한밤 중 월드컵 축구에서 골을 넣었을 때와 비슷한 함성이 동네를 뒤흔들었다. 선잠이 들었다 일어나서 무슨 일이 있나 생각해 봤다. 한 가지 떠오르는 건 평창 올림픽 유치. 아침에 일어나 텔레비전을 틀었더니 온통 동계올림픽 유치 소식에, 사람들이 기뻐하며 눈물 흘리는 광경에, 꼴 보기 싫은 인물들의 등장에 난리법석이다.

그런데 하계 올림픽, 아시안게임, 월드컵, 엑스포 등 수많은 국제행사를 치르는 동안 우리의 살림살이는 얼마나 나아졌나? 복지에 써야 할 엄청난 세금을 쏟아 부었지만 남은 건 빚밖에 없다. 차량을 통제하고 이런저런 행사에 동원되고 전 국민이 영어를 공부해야 할 것 같은 소동을 불평 없이 받아들였건만 돌아오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또 올림픽을 유치했다며 소란을 피우고, 또 사람들은 눈물을 흘린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민주노동당의 입장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게 만든다. 2007년 7월 민주노동당은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러시아의 소치가 선정되었을 때 “언제까지 스포츠 쇼비니즘에 국민을 들러리 세울 건가?”라고 묻는 논평을 발표했다. 이 논평은 국제스포츠경기가 일자리를 만들고 지역을 발전시킨다고 선전하지만 실제로는 빚밖에 남기지 않는다는 점, 동계올림픽이 반(反)생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 개발지의 인구가 오히려 감소한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올림픽 유치 실패가 오히려 주민들의 행복하고 윤택한 삶을 보장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불과 4년이 지난 2011년 7월, 민주노동당의 논평은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강원도 평창이 선정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로 시작한다. 동계올림픽이 ‘평화와 통일의 올림픽’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4년 전의 논평이 지적했던 문제점은 어떻게 할 것인가?

살림살이 면을 보면, 2010년 강원도의 재정자립도는 27.5%로 매우 낮다. 동계올림픽 개최지인 평창군은 재정자립도가 19.9%로 지방세 수입으로는 공무원의 인건비를 근근히 해결하는 실정이다. 강원도는 자생적인 산업기반이 부족한 상황에서 각종 교부세와 보조금으로 근근이 지방정부를 운영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동계올림픽이 평창군과 강원도에 어떤 도움을 줄까? 강원도민의 살림살이에 들어가야 할 예산이 얼마나 건설사와 지역토호들의 손으로 사라질까?

물론 올림픽 유치로 많은 국비 지원을 받겠지만 대규모 경기장과 시설을 짓고 나면 그걸 관리하는 것은 지방자치단체의 몫이다. <정보공개센터>에 따르면 2010년 각 월드컵 경기장의 평균 사용횟수는 30~40회에 그치는데, 관리비는 수십 억원에 달했다. 마찬가지이다. 동계올림픽을 흥청망청 전국 잔치로 치르겠지만, 행사가 끝나면 이런 비용은 고스란히 지방자치단체의 부담으로 변한다.

그리고 6개의 경기장을 더 지을 뿐 아니라 강원도 내에 국제공항이 없어 경기장까지 도로를 닦고 고속철도를 놓는다고 한다. 그런데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으면서 경기장을 짓고 도로와 고속철도를 놓는 신기술이 지난 4년 동안 개발되었다는 얘기를 나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어떻게 ‘생태 친화적인 올림픽’이 가능하단 말인가? 한번 파괴된 생태계를 회복시키기란 거의 불가능한데 강원도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한바탕 벌어지는 소동을 보며 한숨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진보정당이라면 지역 내부의 힘을 끌어내고 모아서 자생적인 지역발전의 비전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비전을 파괴하는 동계올림픽과 같은 대규모 행사를 민주노동당이 ‘진심으로 환영’하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아직도 이런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다.

평창올림픽에 들어갈 7조 이상의 세금으로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진보정당의 새로운 대안을 기대한다.

 

지금 우리는 민주적인 사회에 살고 있나? 사람마다 대답이 다를 수 있지만 상식을 갖춘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정적으로 답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과 달리 민주주의 제도라고 불리는 것들은 대부분 우리 사회에 이미 도입되어 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선거로 뽑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학교’라 불리는 지방자치제도도 실시되고 있고,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주민발의, 주민투표, 주민소환제도들도 지방정부 차원에서는 도입되어 있다. 이렇게 웬만한 민주적인 제도들이 도입되어 있는데도, 왜 우리는 민주주의를 느끼고 경험하지 못할까?


민주주의라는 말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도 이렇게 추상적이었을까? democracy라는 단어가 민주주의(民主主義)라는 ‘주의’로 번역되다보니 민주주의도 어떤 이념인 듯하지만 사실 민주주의는 특정한 이념이 아니다. 어원을 따지면 민주주의는 민중의 지배를 뜻한다. 그게 다이다. 다른 얘기는 없다. 민중이 권력의 주인으로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아주 상식적인 얘기를 적어 놓은 것이 전부이다. 그러니 이런 상식에 따라 누구나 지배할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였다. 지식인들만 아는 특별한 이론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몸으로 실행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삶의 양식이었다.


민본주의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민본주의(民本主義)는 군주나 대신들이 민중을 위하거나 위해야 한다는 ‘주의’가 아니었다. 민본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이 가장 존귀하고 소중한 존재이니 그들의 뜻을 따르고 그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곧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는 마음가짐이자 삶의 태도를 가리켰다.


그런데 우리는 민주주의나 민본주의를 특별하고 복잡한 어떤 이념이라 여긴다. 그래서 평범한 내가 할 수 없는 일이고 관심을 둘 일이 아니라 여긴다. 민주주의는 학력도 높고 돈벌이도 괜찮은 사람들의 일이라 생각한다. 우리도 그런 ‘자격’을 얻을 때까지 민주주의는 미래의 과제로 미뤄진다.


그리고 일상적으로 민주주의라는 말을 많이 쓰긴 하지만, 정작 그것이 내 삶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 서점에 가서 살펴보면 민주주의의 모델이나 원론에 대한 책들은 제법 있지만 정작 내 삶이 민주주의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를 말해주는 책들은 거의 없다. 추상적인 권리목록을 나열하거나 시민권, 민주주의를 설명하는 책들은 있지만 그런 권리를 내 생활에서 써먹을 방법을 알려주는 책들은 거의 없다.


그러다보니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아직도 무거운 단어이다. 민주주의는 골방에 모여 토론하고 집회에 나가 마이크를 잡는 사람들이나 대중의 관심을 받는 정치인들, 어려운 이야기를 늘어놓는 학자들의 것이지 나의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너무 무거워서 내가 자유로이 쓸 수 있는 도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엄마 치맛자락 뒤에 숨어 고개만 내미는 아이처럼 우리는 민주주의를 곁눈질하면서도 직접 앞으로 나서지 못한다.



당신들의 민주주의


이렇게 느껴지는 과정이 자연스러웠던 건 아니다. 우리가 민주주의가 추상적으로 느끼거나 특정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라 여기는 건 역사적인 경험과 의도적인 학습 때문이다. 일제 식민권력과 군인들이 총칼로 나라를 다스리던 시절, 민주주의는 ‘위험한 단어’였다. 한낮 대로변에서 “민주주의, 만세!”라고 외치면 ‘빨갱이’로 몰려 끌려가는 게 우리 현실이었다(지금 우리 현실은 다르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정치인에게 토마토를 던지고 경찰이 시위대를 보호하는 장면은 남의 나라 일이지 무식하고 법을 안 지키는 한국 사람들의 일이 아니다.


한때 ‘제3의 물결’이라 얘기되며 전 세계적인 민주주의의 부흥을 얘기하던 시기도 있었다. 그런데 그 물결은 영미식 민주주의 체제를 제 3세계에 전파하는 과정이었을 뿐 그 사회의 시민들이 권력의 주인으로 등장하도록 돕는 과정이 아니었다(최근 중동과 아프리카의 민주화 운동을 재스민 혁명이라 부르는 목소리에서도 이런 느낌을 받곤 한다). 그 사회의 고유한 가치와 문화를 무시하고 서구식의 경제개발과 시장경제, 정당과 대의민주주의를 일방적으로 보급하는 과정이었다. 제도는 그렇게 도입될 수 있지만 사람들의 삶이 그 제도에 맞춰지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제도가 시민들의 삶에 맞게 조절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삶이 제도에 맞춰야 하니 주인과 손님의 자리가 뒤바뀐 셈이다.


이렇게 지배자들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발전된 것으로 미리 정해놓고서 그것을 따라가는 것만을 민주주의라고 여기게 만들었다. 그와 더불어 우리 삶에 어울리는, 우리의 생활과 맞는 정치제도는 봉건적이고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민주주의가 항상 그랬던 건 아니었다. 역사를 되짚어 보면 시민들의 민주적인 열망과 생각이 ‘스스로’ 터져 나왔던 순간도 있었다. 봉건왕조와 일제 식민지, 미군정, 군사독재로 이어졌던 어둠의 시절에도 시민들은 자신의 힘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고 사건의 시간이 되면 거대한 힘으로 폭발했다. 시민들의 힘이 만든 ‘해방구’는 사람들이 공적인 분노와 공적인 행복을 느끼게 했다. 서로의 손을 잡고 어깨를 걸자 자신만의 삶을 살 때는 느끼지 못했던 분노와 뿌듯함이 가슴 속을 채웠다.


그런 의미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몸을 불살랐던 전태일의 목소리는, “8시간 노동으로 생활임금 쟁취하자”, “노동자 피땀 짜내는 독점 재벌 해체하라”라고 외쳤던 87년 노동자들의 꿈은 살아있는 민주주의였다. “이 나라 민주주의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를 흘리고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라 외쳤던 80년 광주의 목소리, “더 이상 못 속겠다, 거짓 정권 물러가라”는 87년의 외침도 마찬가지였다. 민주주의는 바로 그 곳에 있었다. 2003년과 2008년에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당장 뭔가가 바뀌지는 않지만 우리가 뭔가 대단한 일에 개입하고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민주주의가 살아있던 시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뭔가를 바꾸었다고 느끼는 순간, 거리에서 물러나 집과 공장으로 돌아오는 순간, 민주주의는 쉽게 생명력을 잃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에는 지식인들의 잘못도 크다. 지식인들은 민주주의를 ‘배운 것들’의 전유물로 만들었다. 주인들에게 권력을 돌려줄 생각은 않고 민주주의라는 모델로 가는 특별한 비법이 있는 양, 마치 자신들만이 그 비법을 알고 있는 양 행세하며 사람들의 열정과 행동을 순화시키거나 길들이려 했다.


결국 이런 과정에서 이득을 본 사람들은 영미식 시장과 정치에 익숙한 엘리트들이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이득이 아니라 소외를 경험했다. 적응하지 못함은 시민의식의 뒤떨어짐으로 설명되었고 사람들은 그 적응의 어려움을 온전히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다시 한번 상처를 입었다. 소외당하고 상처를 입으면서도 그 고통을 말하지 못하고 ‘내 탓이요’를 외치거나 그 고통을 비슷한 다른 상대에게 쏟아냈다. 그래, 세상사는 게 다 그렇지. 내가 끼어든다고 될 일이 안 되나? 강한 자에게는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약자들에게 고통을 떠넘기는 방식으로 우리는 ‘약은 삶’을 택해 왔다. 이런 삶에서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뒤틀린 민주주의


‘산업역군’이나 ‘모범시민’은 민주주의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과거의 군사독재는 시민을 경제발전을 위한 군대로 만들고 생활을 길들여왔다. 삶터와 일터를 철저하게 나눈 채 시민을 가정과 공장에 가두고 길들였다. 민간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시민을 ‘~형 인간’에 가두려는 노력은 계속되었고, 작업장 민주주의를 포기한 경제성장은 시민의 가면을 쓴 산업역군을 계속 강요했다. 민주주의가 가능한 사회는 노동사회나 모범적이고 건전한 사회가 아니라 여가사회와 다양하고 생동력있는 사회인데, 우리는 여가를 사치로, 다양성을 불화로 비난하도록 배워왔다.


먹고사는 문제에서 조금 여유가 생기고 다양한 목소리가 터져 나올 수 있었던 시기는 그나마 1987년 민주화 이후였다. 그런데 경제적 평등의 물꼬를 튼 건 정치의 민주화였는데, 이상하게도 그 이후 민주주의를 경제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이론들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마치 민주주의가 완성된 양 거리로 나온 시민들을 직장과 가정으로 돌려보냈고, 민주주의의 기반을 다지려면 경제가 발전해야 한다는 궤변이 판을 치기 시작했다. 진보를 자처하던 지식인들도 이런 궤변에 힘을 실었다.


소득수준이 높아져야만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주장은 정치를 위한 삶의 여유를 지적했다는 점에서 옳지만 삶의 가치를 소득에 맞췄다. 소위 ‘중산층의 신화’는 적절한 주거와 생활수준 이상을 갖춘 중상층의 사람들만 정치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고 믿게끔 만들었다. 그래서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두는 것을 주제넘은 일이라 믿게끔 했다. 즉 정치에 대한 일상적인 무관심과 선거 때의 순간적인 투표를 모범적인 시민의 권리로 만들었다.


이런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공간적인 규모’만이 아니라 ‘삶의 규모’를 정하고 그 규모에 맞지 않은 삶을 후진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도시가 농촌을 지배하고 노동자들이 농민들의 착취를 딛고 사는 것을 정당화시켰다. 중산층이 아닌 사람, 중산층으로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미래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것만 허락되었다. 이들은 지금 자신의 모습을 버려야만 시민으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민주주의에 물음을 던져보자.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고 자본주의가 유지될 수 있을까? 수도권이 비수도권을 착취하지 않고 수도권을 유지할 수 있을까? 제 3세계를 착취하지 않고 제 1세계(소위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의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있을까? 제 3세계의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고서 선진국의 복지시스템이 유지될 수 있을까? 그들이 겪고 있는 복지국가의 위기가 탈식민주의의 흐름과 무관할까? 나오미 클라인의 표현을 빌린다면, 정치와 경제의 경계선을 무너뜨리는 ‘재난 자본주의’는 전 세계의 많은 공유재산을 빼앗아 적은 수의 지배자들에게 몰아주면서도 스스로를 민주주의라 부르고 있다.


엄청난 쇼크와 고통을 겪으며 사람들이 혼란에 빠져있을 때, 민주주의와 크게 상관이 없을 법한 내용들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있다. 선거에 당선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시민들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정책을 추진하는 정치인들은 민주적이고, 명확한 이념도 없이 이해관계에 따라 국민을 팔아대는 정당도 민주적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소비자 민주주의, 관객 민주주의라는 뒤틀린 행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뒤틀린 민주주의에 뒷돈을 두둑하게 대주며 이득을 챙기는 것이 바로 재벌들이다.


2009년의 용산참사는 우리 민주주의의 뒤틀림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국가가 시민을 테러리스트로 몰아붙이고 전쟁을 벌였다. 멀쩡하게 생활하던 사람들이 그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목숨마저 잃었는데 아무도 이 상황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용산구청은 구청에 와서 떼를 쓰면 ‘민주시민’으로 대우받을 수 없다는 플랑카드를 내걸고 주민들을 철저히 대상화시켰다. 4대강 사업은 자연과 생명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고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일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런 사회를 민주적이라 부른다면 대체 어떤 사회가 비민주적일까?


우리 현실은 왜 이 모양일까? 위대한 정치 지도자가 없어서? 시민의 의견을 대변해줄 정당이 없어서? 그럴 수 있다. 우리에겐 믿음직한 지도자가 없다. 민주주의가 어떠한 대표도 용납하지 않는 체제는 아니므로 지도자는 중요하고 리더십도 필요하다.


허나 민주주의에서 정치는 소수의 독점물일 수 없다. 제 아무리 뛰어나고 훌륭한 지도자라 하더라도 그가 더 이상 우리의 말을 똑바로 듣지 않는다면 그는 민주적인 지도자일 수 없다. 아니, 그런 지도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시민의 정신은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민주적인 사회에서 정치는 시민들이 누리는 공적인 행복이기 때문이다. 다른 일로 바쁠 때 내 몫을 누군가가 대신해줄 수 있지만 그렇다고 내 몫이 없어져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최근의 논의들을 보면 뛰어난 리더십에 알아서 맡기라는 식의 얘기가 많다. 이 무슨 해괴한 논리인가?


그리고 ‘정치인’들이 필요하다는 점은 충분히 공감되지만 ‘직업정치인’들이 늘어나야 한다는 점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왜냐하면 ‘직업정치인’의 수가 늘어난다고 정치가 활성화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외려 정치의 장이 좁아지고 직업정치인들이 그 장을 독점하고 조작할 가능성도 커진다. 그래서 다른 건 필요 없고 투표나 열심히 하자는 식의 주장은 매우 위험한데도 매번 선거 때만 되면 이런 주장이 솔솔 새어 나온다.


이런 현실을 고려하면,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것’이거나 ‘이미 망각된 것’이다. 새로운 민주주의는 아직 오지 않았고 과거에 존재했을지 모를 민주주의는 이미 사라졌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가 오게끔 새로운 해답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민주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피동의 정치에서 능동의 정치로


일찍이 “소유란 도둑질”이고 “정치에 몰두하는 건 똥물에 손을 씻는 짓”이라 선언했던 사상가 프루동은 『19세기 혁명의 일반이념』(1849년)이란 책에서 우리의 일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활동할 때마다, 그리고 거래할 때마다 기록되고, 등록되고, 과세되고, 날인되고, 측정되고, 숫자가 매겨지고, 평가되고, 허가되고, 인가되고, 경고를 받고, 금지되고, 선도되고, 교정되고, 처벌받는 것이다. 그것은 공익이라는 구실 아래, 그리고 일반의 이익이라는 이름 아래 기부금 납부를 강요받고, 훈련을 받고, 배상금을 물고, 착취당하고, 독점의 희생자가 되고, 탈취당하고, 쥐어짬을 당하고, 현혹되고, 강탈당하는 것이다. 사소한 저항을 하기만 해도, 불만의 ‘불’자만 꺼내도 억압당하고, 벌금이 부과되고, 멸시당하고, 괴롭힘을 당하고, 추적되고, 학대를 받고, 구타를 당하고, 무장해제되고, 질식당하고, 투옥되고, 재판을 받고,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을 당하고, 추방되고, 희생되고, 팔려가고, 배반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조롱을 당하고, 비웃음을 받고, 모욕을 당하고, 명예를 손상당하게 된다. 이런 것이 정부이고, 정의이며, 도덕이다.”


150년 전의 가혹한 진실을 숀 쉬한은 <우리 시대의 아나키즘>에서 오늘 상황에 맞게 다음과 같이 재구성했다.


“비디오테이프에 기록되고, 캠코더에 녹화되고, 감시당하고, 감독당하고, 문서화되고, 분류되고, 항목별로 나눠지고, 암호가 부여되고, 사진 찍히고, 인가되고, 디지털화되고, 바코드가 찍히고, 범주화되고, 국가 커리큘럼으로 만들어지고, 할인 카드화되고, 사은품을 받는 보너스 카드화되고, 체계화한 시스템의 일부가 되고, 유전자 기록이 보관되고, 폐쇄회로 화면에 잡히고, 접근통제 카드화되고, 신분증명 카드화되고, 데이터 베이스에 저장되고, 인구조사 꼬리표가 붙고, 측정되고, 평가되고, 차례로 나열되고, 스캐닝되고, 돌려지고, 감정되고, 위계를 부여받고, 대상화되고”


지금 우리의 일상은 이와 얼마나 다를까? 우리의 굴욕적인 일상은 얼마 전에 알려진 한 사건에서도 드러난다. 경북 구미의 전자부품업체 KEC는 파업에 맞서 1년이나 직장폐쇄를 한 뒤에, 공장으로 복귀한 노조원들에게 파업가담 정도에 따라 다른 색깔의 티셔츠를 입히고 따로 관리하며 반성문을 쓰게 하고 매일 낭독시켰다. 우리는 이 사건에 얼마나 분노하고 있나? 2003년 한 노동자가 쓸쓸이 죽음을 택했던 부산의 한진중공업 타워크레인에서는 그의 추도식에서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 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라며 탄식했던 또 다른 노동자가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 얘기인가? 이런 사회에서 분노 없이 민주주의가 가능할까?


지배하는 자들이 비상식적이니 우리 역시 상식을 고집할 게 아니라 우리 현실에 맞는 민주주의 이론을 구성해야 한다. 고대 아테네나 근대의 미국, 현대의 유럽을 모델로 삼을 게 아니다. 우리 사회의 고유한 경험과 문화, 열정이 민주주의 이론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사실 우리가 배운 민주주의 이론들은 그 시대의 산물이었다. 토크빌이 본 미국의 민주주의도, 유럽식 계급타협에 기초한 복지국가 모델도 그 시대의 산물일 뿐이다. 시대를 초월한 민주주의 이론이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주체인 민중이 바뀌면 그들의 열정과 사상을 담은 민주주의 이론도 바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가진 모습에서 시작하는 민주주의 이론이 필요하다.


오로지 우리의 현실만 고집하자는 건 아니다. 외국의 경험에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배워야 한다. 가령 스위스의 민회민주주의나 직접민주주의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연방주의라는 시스템 덕에 가능했다. 그리고 남미나 아시아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실험들에도 관심을 둘 만하다. 그 가치를 인정하더라도 그것을 완성된 모델이나 이론으로 배우려 들지 말고 그 사회의 고민과 생활을 배워야 한다.


흔히 이론이라고 하면 지식인들의 과제인 듯 들리지만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 이론을 ‘신봉’하는 한국사회에서 이론을 얘기할 때 매우 조심스럽다. 누가 ‘원전’을 가장 잘 해석하고 지도자의 말을 잘 ‘수용’하는지가 중요한 한국사회에서는 이론이 쉽게 현실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허나 다른 영역의 이론들이 몇몇 지식인들의 손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손 치더라도, 민주주의 이론은 결코 몇몇 사람의 두뇌에서 만들어질 수 없다. 적어도 그것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달고 싶다면 말이다.


사실 대중과의 소통고리를 잃어버리거나 스스로 끊어버리고 대학 속에 몸을 감춘 지식인들은 이미 지식인들이라 부르기 어렵다. 외려 김여진같은 연예인들이 바깥에서 대학을 파고들며 지행의 합일을 보여주고 있고 그야말로 지식인답다. 지금은 지식인들의 ‘항변’이 아니라 자신을 되돌아보는 ‘반성’이 필요한 시기이고, 그들이 제기하는 민주주의 이론 역시 반성의 과정을 거쳐 시민들의 생활과 접목되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프란시스 무어 라페의 얘기는 흥미롭다. 라페는 <살아있는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 모델이 아니라 살아있는 민주주의를 주장하면서 “공정함, 포용, 상호책임성같은 민주적 가치들이 우리 공적 삶의 모든 지평에 스며드는 삶의 방식”이 바로 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그는 전 세계의 다양한 민주주의 사례들을 수집해서 살아있는 민주주의의 특징을 아홉 가지로 정리한다.


1. 시민들은 집중된 부의 손아귀에서 정치권력을 되찾아오고 있다.

2. 시민들은 정부를 시민을 위한 도구로 만들려고 한다.

3. 투자자, 저축가, 소비자는 자신들의 일상적인 경제적 선택에 민주주의적 가치를 불어넣고 있다.

4. 시민들이 자치 테두리를 정하면, 기업은 그 테두리 안에서 자기 기능을 수행한다.

5. 이제는 일부 거대기업들조차 기업이익과 지구의 이익을 일치시킨다는 기업이념을 새로 세우고 있다.

6. ‘지역의 살아있는 경제’는 지역산업이 경제권력을 분산시키고, 에너지 폐기물을 줄이며, 공동체 결속을 진작시키고, 지역시민들이 지역 산업을 지지하는 덕분에 생겨나고 있다.

7. 외부자본 통제 없이도 시장이 훌륭하게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면서 소유주와 노동자간 격차를 줄인 기업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8. 수많은 학교와 대학에서 학생들은 민주주의를 실천함으로써 민주주의를 배우고 있다.

9. 공동체에 기반한 정책을 만들고 ‘회복’을 추구하는 정의를 실현하는 법률을 시행할 때, 범죄율은 낮아지고 공동체는 치료된다.


이 아홉 가지 특징에서 드러나듯 민주주의는 단지 정치나 경제 영역의 변화로 제한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키는 힘이고 우리가 생활을 바꾸려 결심할 때에만 그 힘을 활용할 수 있다.


라페는 “우리 자신의 변화를 경험하지 않고서 어떻게 ‘세계’가 변화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 묻고 “우리가 네트워크의 두터운 그물망 속에 존재한다는 통찰을 받아들인다면,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우리의 모든 선택이 일정한 파문을 일으킨다는 사실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라페의 말처럼 우리의 결심이 이미 변화의 시작을 뜻한다. 길은 멀리 있지 않다. 눈을 돌리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며 더 이상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결심할 때, 이미 민주주의는 생명력을 갖기 시작한다. 그러면 우리 모두의 생활공간에서, 가정과 학교, 직장, 거리, 구청, 시청, 곳곳에서 민주주의가 살아날 수 있다.


민주주의란 쓰면 쓸수록 더욱더 익숙해지고 강해지는 힘이다. 반면에 쓰지 않으면 움츠려들고 약해지는 힘이다. 우리가 지금껏 그 힘을 약화시켰다면 그 힘을 강화시키는 것 역시 우리의 몫이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그 힘을 기르자.


 

지진으로 집이 무너지고 시커먼 해일이 도시를 삼키는 광경을 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지만 그냥 철렁하기만 했다. 허나 그 뒤를 이은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폭발사고는 강 건너 불구경일 수 없었다. 영화에나 나올법한 종말이 다가온 듯했다. 심각한 재난을 보면서 새삼 우리나라에 이미 21개의 핵발전소가 있고 6개를 짓고 있고 2030년까지 핵발전소가 총 41개까지 늘어날 것이라는 끔찍한 사실을 떠올렸다. 우리에게 불구경할 여유가 있을까?


사고소식을 들으며 이제 돌을 맞이하는 아이 얼굴을 바라본다. 어느 순간 핵발전과 관련된 보도들이 조금씩 사라지고 안전한(?) 한국형 원자로가 전략적인 수출품목으로 떠오르는 걸 보며 머릿 속이 핑 돌았다. 이 아이를 영화 <터미네이터>에 나오는 전사로 키워야 하나? 보태줄 건 없더라도 최소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은 남겨줘야 할텐데, 핵은 미래 자체를 파괴한다.



핵발전과 민주주의의 파괴


지금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재앙을 미래세대에게 떠넘기고 있다. 우리가 쓸 에너지를 생산하기 위해 미래를 팔고 있다. 핵발전으로 생기는 핵폐기물은 최소한 2만 5,000년 동안 해결되지 않는 끔찍한 물질이다. 이런 물질을 두고 누가 ‘안전’을 논할 수 있을까?


그리고 자연방사능이나 병원에서 순간적으로 쬐는 방사선과 달리 핵사고로 인한 방사능은 호흡기와 피부, 음식을 통해 체내에 흡수되어 몸 속에 축적된다(오염된 땅과 물은 반드시 인간에게 복수한다). 당장은 우리에게 해가 없다손 치더라도 체내에 축적된 방사능이 미래세대에게 영향을 미치리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 위험하고 끔찍한 물질에 관한 정보를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왜 핵발전소를 더 지어야 하는지, 어디에 지을 것인지, 거기서 나오는 핵폐기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이와 관련된 정보들은 철저히 차단된다. 소수의 핵심관료들과 전문가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건강을 담보로 도박을 벌이고 있다.


사실 핵무기만큼 핵발전은 ‘비밀스럽고 비민주적인’ 기술이자 위험한 기술이다. 핵무기가 현재를 파괴한다면 핵발전은 ‘예고된 파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반전(反戰)과 반핵(反核)은 함께 붙어다닐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예고된 파괴가 중단되지 않는가? 북한의 핵개발을 막고 대량살상무기를 없애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면서도 왜 핵발전에는 이렇게 너그러울까? 원인 없는 결과 없듯이, 이윤 없는 부패는 없다. 원전 1기당 건설비용이 대략 2조원을 넘긴다고 하니 이윤을 노리는 똥파리들이 어찌 꼬이지 않겠는가. 위험하고 끔찍한 핵발전이 중단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이득을 보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여러 신문과 주간지들이 핵발전을 추진하는 한국의 핵마피아를 다뤘다. 대략적인 그림은 교육과학기술부와 지식경제부, 현대건설, 두산중공업, 삼성물산, 대림산업, 대우건설의 5대 재벌기업, 이들과 어울리는 학계와 전문가 집단이 한국의 핵산업을 이끌고 있다. 즉 권력과 자본, 이들에 빌붙은 지식인들이 시민들의 참여를 막고 ‘중립’과 ‘전문성’을 내세우며 핵개발을 주도하고 있고 갖은 이권을 나눠먹고 있다. 외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원전 건설과 관련된 핵마피아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제 3세계를 노리고 있다. 토다 기요시의 말처럼 “원자력개발은 전문가 지배, 관료 지배, 대기업 지배를 강화한다.” 핵발전은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밖에 없다.


핵개발이 비민주적인 이유는 핵마피아가 나눠먹는 이권에만 있지 않다. 한국의 에너지 정책은 중앙정부의 손에서 결정되고 전력소비는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서울의 전력자급율은 1.9%에 불과하다). 핵발전소가 세워지는 지역들을 보라. 대부분 한반도의 외곽지역이고 그 중에서도 가장 못 사는 지역들이다. 핵마피아들은 지역발전을 빌미로 주민들을 유혹하고 그들의 터전을 파괴한다. 그래서 지방은 자신들이 쓰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전력을 생산해서 수도권에 ‘에너지 조공’을 바쳐야 한다(조공을 바쳐야 중앙정부로부터 예산을 얻을 수 있으니). 에너지 조공을 계속 받기 위해 핵마피아들은 지속가능한 발전이나 민주적인 지역발전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고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다. 안전하고 깨끗한 에너지라며 핵을 선전하는 원자력문화재단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직접 핵발전소에서 일할 리 없고, 원자력 르네상스를 꿈꾸는 이명박 대통령이 핵발전소의 연료봉을 갈 리도 없다.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하청 노동자들이고 위험한 곳에서라도 일하며 생계를 꾸려야 하는 사람들이다. 자발적 노동이라고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는 노예노동인 셈이다. 나의 안락함을 위해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도 민주주의를 논할 수 있을까?


핵발전소만이 아니다. 핵발전에 반드시 뒤따르는 핵쓰레기들,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도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1978년에 고리 1호기가 처음 발전을 시작한 이후 계속 쌓여가는 핵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 정부는 비밀리에 핵폐기장 건설을 추진해 왔다. 그동안 핵폐기장을 만들기 위해 정부가 추진한 곳도 역시 지방이다. 경북 영덕군과 영일군, 강원도 울진군, 충남 안면도, 경남 양산, 경기도 굴업도, 전남 영광, 전남 고창, 전북 부안 등이 핵폐기장 후보지로 거론되어 왔다. 처음에는 주민들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핵폐기장을 몰래 지으려다 주민들의 반발로 계속 실패했고, 지금은 한수원이 많은 돈을 풀어 주민들의 여론을 내세워 신청을 하게 만들고 중앙정부가 이를 받아들이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 역시 민주주의의 껍질을 쓰고 있지만 참으로 비민주적인 과정이다.


핵발전소와 마찬가지로 핵폐기장이 들어설 후보지에서 핵의 안전성 여부는 쟁점조차 되지 못한다. 대부분의 후보지들은 ‘지역발전’을 내세워 핵폐기장 유치를 추진하고, 붕괴한 지역경제에 낙담한 주민들이 이에 동조하는 식이다. 허나 누가 핵발전소나 핵폐기장이 있는 곳을 발전된 지역이라 여길까.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으면서 주민들은 떠나고 지역은 더 뒤처지고 생활은 더 어려워진다. 승자는 중앙의 비민주적 권력과 주민의 이름을 팔아먹는 지역의 토호권력 뿐이다.



반핵운동과 주민들의 살아있는 민주주의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은 싹트는데, 핵폐기장이 들어서려는 곳마다 주민들은 상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평범한 주민들이 권력의 부당한 억압에 직접 맞설 수 있을까,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핵운동의 역사를 봐야 한다.


1989년 3월 정부가 경북 영덕군을 핵폐기장 후보지 1순위로 정하자 주민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전 주민의 1/3 가량이 집회에 참여했고 국도를 점거하기도 했다. 주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자 정부는 계획을 포기했고, 이에 힘을 얻은 반핵운동은 4월에 ‘전국핵발전소추방운동본부’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반핵운동을 벌였다.


그 이후에도 정부가 핵폐기장을 지으려는 곳마다 주민들의 저항은 이어졌다. 그 중 광주항쟁 이후 최악의 주민시위로 꼽히는 안면도 투쟁은 눈여겨 볼 만하다. 1990년 11월 과학기술처가 안면도에 원자력 제2연구소라는 이름으로 핵폐기장을 건설하려 한다는 보도가 <한겨레>에 실리자 주민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당시 <공해추방운동연합>의 간사가 안면도에 들어가 주민저항을 조직했고, 보수적인 단체로 분류되는 청년회의소(JC), 로타리클럽, 라이온스클럽, 청년회들, 심지어 지역의 건달들까지 힘을 모아 <안면도핵폐기장반대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약 2만 여명의 주민 중 절반이 집회에 참여했는데, 이 과정에서 지역공동체가 힘을 발휘했다(최대규모의 집회로 불린 11월 8일의 집회에는 약 1만 5천명의 주민이 참여했다). 주민들은 한 가구당 한 명 이상을 반드시 집회에 참석시키고 참여하지 않는 가구에 5만 원씩 벌금을 물린다는 규약을 만들었다. 나아가 핵폐기장 유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장례식이나 결혼식에 참여하지 않고 동네 상여도 빌려주지 않는 징계를 내리기도 했으며 유치 신청자나 그 자식들을 해고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안면도의 주민항쟁은 폭력/비폭력의 경계를 넘어서 진행되었다. 경찰의 폭력진압에 맞서 청년결사대가 조직되고, 안면지서가 불에 타기도 했다. 주민들은 안면읍사무소를 접수하기도 했고 육지와 연결되는 하나뿐인 다리를 폭파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안면공화국 만세’라는 구호가 시위 도중에 등장하기도 했다. 만일 주민들이 저항하지 않았다면, 죽음의 평화가 안면도를 뒤덮었을 것이다. 안면도 투쟁은 주권을 회수한 민중들이 국가의 법치주의나 폭력/비폭력의 경계를 넘어설 수밖에 없다는 점을 증명했다.


이런 저항에 밀려 정부는 안면도 핵폐기장 건설을 포기하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주민들을 돈으로 유혹하며 안면도의 공동체를 분열시키려 들었다. 허나 이마저도 1992년 5월 주민공작을 일삼던 원자력환경관리센터 직원들이 묵던 여관을 마을청년들이 습격해서 서류를 빼앗고, 1993년 1월 유치를 찬성하던 주민의 양심선언이 이어지면서 정부는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핵폐기장을 짓겠다는 계획은 포기될 수 없었다. 핵발전을 이미 시작한 곳에서는 포기가 불가능하다. 핵발전소가 늘어나는 만큼 핵폐기물의 양도 계속 늘어났기 때문이다. 1994년에는 경기도 굴업도에 핵폐기장을 건설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그 옆의 덕적도 주민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주민들은 고립된 섬에서 빠져나와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반대시위를 벌였고 당시 액수로 500억이라는 거금을 투자하겠다는 정부 발표에도 계속 시위를 벌였다. 주민들의 시위가 1년을 끌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던 정부는 지반이 약해서 핵폐기장에 알맞지 않다는 지질조사 결과가 나와 스스로 계획을 접는다(이처럼 핵과 관련된 사업들은 상식을 거부한다).


표류하던 핵폐기장 건설은 2003년 5월 중앙정부와 전북 부안군수가 폐기장 유치를 반대하는 부안군민의 의견을 뒤집고 위도 주민 80%의 서명을 받아 핵폐기장 유치를 신청하자 다시 시작되었다. 이에 부안군민들의 반대집회가 이어졌고 180여 일의 눈물겨운 촛불집회가 시작되었다.


그러자 주민들에게 현금보상을 하겠다는 산자부와 한수원의 거짓말 행진과 주민들을 분열시키려는 공작이 시작되었다. 더구나 정부는 주민들과 대화하면서 합의를 유도하기는커녕 공권력을 투입해 강제로 촛불집회를 막았다(인구 7만이 안되는 부안에 8천여명의 전경이 투입되었으니 정부는 주민들의 입을 공권력으로 꽁꽁 틀어막은 셈이다). 그리고 중앙언론들은 지역이기주의, 폭력사태 등의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뽑으며 부안주민들을 몰아붙였다.


결국 부안에서는 주민투표라는 새로운 대안이 등장했다. 주민투표는 이렇게 돈과 공권력의 힘이 주민들의 입을 완전히 틀어막은 상황에서 주민들의 의견을 밝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정부는 그 주민투표마저 거부하며 주민들의 의견을 무시하려 들었다. 그럼에도 부안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투표를 준비했고, 외부의 시민단체와 자원봉사자, 변호사들이 투표진행을 위해 힘을 모았다. 주민투표 이전에 약 10개월 동안 방폐장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가 지역사회 내에 퍼져서 사람들의 이해를 돕고 토론을 불러일으켰고, 부안주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핵폐기장을 막아냈다.


핵폐기장 건설은 4개 지역 방폐장 동시 주민투표라는 희대의 사기극으로 마무리되는 듯했지만 여전히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다. 경주의 지반이 매우 약해 핵폐기장에 적합하지 않고 공사현장에 수맥이 흘러 방사능이 유출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공사는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민주적인 나라에 살고 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제 우리는 ‘핵폐기장 사고’를 예약한 채 살고 있다. 다만 사고가 언제 터질지 알지 못할 뿐이고 내가 살아있는 동안 끔찍한 사고가 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허나 미래의 누군가는 그 공포를 감당해야 한다.



재난자본주의를 넘어서


왜 끔찍한 재난이 반복되는가? 가장 큰 이유는 누군가의 재난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기회이자 이익이기 때문이다. 재난이 쑥대밭을 만들고 간 자리에서 누군가는 재건축과 재개발의 가능성을 본다. 이를 막을 수 있는 ‘정상적인’ 방법은 없다. 앞서 주민들의 저항이 증명하듯 현 사회를 움직이는 힘은 재난을 당한 사람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오미 클라인은 이를 ‘재난 자본주의(disaster capitalism)’라고 부른다. 전 세계의 재난 현장을 돌아보고 주민들을 인터뷰하면서 나오미 클라인은 위기가 권력의 독점을 정당화시킨다는 결론을 내린다. 가난하고 약한 대다수 사람들이 쓰나미나 지진, 전쟁같은 재난으로 고통을 겪는다면, 소수의 기업과 정치인들은 그런 재난으로 이득을 취하며 더욱더 배를 불린다. 심지어 경제공황이나 전쟁같은 재난을 의도적으로 일으키기도 하고 이를 위해 군대를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수많은 시민들을 고문하며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재난을 통해 정치와 경제, 공과 사의 경계를 뛰어넘어 권력을 독점하는 세력이 바로 재난 자본주의의 지지자들이다.


이들은 주민들의 반대가 거세도 힘으로 누르고 돈으로 유혹하면 일이 성사될 수 있고 그러면 엄청난 돈을 챙길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러니 아무리 설득하고 요구해도 이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수정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겐 국가나 공동체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절망적인 재난을 막을 방법은 그들의 뜻을 대표할 대의제도나 공권력에 있지 않다. 주민들이 직접 나서서야 가까스로 재난을 막을 수 있었다. 안면공화국이 선포되고 부안독립신문이 발간되어야 기득권층은 타협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정치학 교과서에나 나올법한 수준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논하는 얘기들은 사람들의 착각을 부추길 뿐이다. 근본적으로 한 국가 내에 두 개의 나라가 만들어져 있고 민중이 사는 나라의 삶이 불안정하고 위험한데 어떻게 민주주의를 논할 수 있을까? 몇몇 사람이 바뀐다고 재난자본주의가 무너질까? 민중을 대표하기는커녕 내부의 민주적인 의사결정이나 진보적인 정책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진보정당들은 헛된 기대만 부추길 뿐이다.


따라서 민중의 힘을 드러낼 방법은 직접행동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권력이나 자본이 아니라 민중에게 힘을 주기 위한 방법이기에 직접행동은 민주주의의 토대이다. 이 민주주의에서 나라가 생기고 권력이 생긴다. 이 힘을 포기한다면 민중은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 수 없다. 반핵운동은 이 점을 가장 분명하게 증명한다.


그리고 반핵운동은 다른 사회운동과 달리 ‘보편운동으로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반핵운동은 제 1세계와 제3세계의 구분을 뛰어넘어 전 세계의 민중이 보편적으로 공감하며 함께 싸울 수 있는 운동이다. 핵의 개발은 인류에게 공멸(共滅)이라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질문을 던졌고, 핵의 위험은 국경을 넘어 퍼져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핵은 인류를 진정한 운명공동체로 만들었다. 함께 멸망할 것인가, 아니면 함께 생존할 것인가?


또한 반핵운동은 사회운동과 주민운동이 손을 잡을 기회를 마련한다. 과거 반전(反戰)과 반핵, 양키고홈을 함께 외쳤던 ‘반전반핵가’에서 잘 드러나듯이, 핵발전소를 반대하는 운동은 식민지에서 해방되려는 운동,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운동, 억압적인 정권에 저항하는 운동, 개발에 반대하는 운동일 수밖에 없다. 즉 반핵운동은 비민주적인 정부와 독점재벌, 토호세력에 맞서는 운동이다. 반핵운동은 주민운동이 지역을 벗어나 전국적인 이슈에 개입하게 만들고,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를 꿈꾸게 한다.



지옥문 앞에서의 피스몹


30년의 수명을 넘긴 고리 핵발전소 1호기는 지금도 계속 돌아가고 있다. 언제 사고가 터질지 모르는 고장 난 시한폭탄이다. 그 폭탄을 해체할 생각은 않고 미래를 논하는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자동차 사고가 무서워 자동차를 타지 않겠냐며 핵발전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다. 자동차와 원자력이 어찌 같을까? 핵발전소나 핵폐기장에서 사고가 터지는 순간 그 곳은 죽음의 땅으로 변하고 죽음의 재는 멀리 멀리 퍼진다. 미국의 쓰리마일, 소련의 체르노빌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고통을 겪고 있고 아직도 그 고통은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 얼마나 고통이 이어질지 우리의 시야로는 가늠할 수 없다. 이를 자동차와 비교할 수 있을까?


원자력은 ‘근본적인 악’이다. 그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정당화될 수 없는 재앙이다. 저주받은 죽음의 물질을 대대손손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인가? 억압적인 권력보다도 더 무서운 유산이 바로 원자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핵이다.


그러니 우리의 미래를 위해 우리의 현재와 싸워야 한다. 이 길고 긴 싸움은 이기기 위해, 나를 증명하기 위해,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 결코 포기될 수 없는 싸움이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줄 수 없는 싸움이다. 그래서 희망은 나의 삶에 있다. 라페는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 본성에 대한 이러한 움츠러든 관점은 지배적인 정치경제 이론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기업광고에 의해서, 숱한 종교 압력에 의해서도 강화되고 있다. 지배적인 정치경제 이론과 기업광고는 우리를 경쟁적으로 자기 것을 축적하는 존재로 환원시키고 있고, 종교는 우리를 더러운 죄인이라고 강조하면서 더 나쁜 역할을 하고 있다.…지구의 생존은 그러므로 우리가 단절을 이루어 낼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내가 강조했듯이 우리가 인간 본성 그 자체의 선함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풍요로움을 긍정할 수 있을지 없을지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미래의 희망을 꿈꾸며 우리는 지금 현재와 단절해야 한다. 그것도 아주 단호하게.



참고한 책


토다 키요시 지음, 김원식 옮김, 『환경학과 평화학』(녹색평론사, 2003)

녹색평론 좌담회, ‘핵발전, 무엇이 문제인가’, 《녹색평론》 2011년 5~6월호.

신동호, “안면도 반핵항쟁”, 《뉴스메이커》 제 684, 685, 686호.

나오미 클라인 지음, 김소희 옮김, 『쇼크 독트린』(살림Biz, 2008).

프란시스 무어 라페 지음, 우석영 옮김, 『살아 있는 민주주의』(이후, 2008).



1992년, 삐이잉 소리를 내는 모뎀을 통해 나는 ‘천리안’이라는 마법의 세계와 접속했다. 그 첫 경험은 정말 짜릿했다. 지금의 인터넷 문화와 비교하면 원시시대처럼 느껴지겠지만 그 당시로서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지금이라면 몇 분안에 다운받을 영화를 열 몇 시간 동안 통화중 상태를 유지하며 밤을 꼴딱 새서 다운받던 기억, 인터넷 동호회라는 낯선 공간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던 기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때, 내가 가장 열중했던 일은 무림동호회라는 곳에서 무협지를 열심히 다운받아 읽는 것이었다. 몇 달 동안 남들이 아래한글로 쳐서 올리는 무협지를 공짜로 읽으며 그 세계의 매력에 푹 빠졌고, 댓글의 성원에 힘입어 코피를 쏟으며 무협지를 올리는 사람들의 열정에 감탄했다. 저런 열정은 어디서 나왔을까.


한때는 인터넷 상의 토론에 열심히 참여하기도 했다. 누군가의 글이나 이미지에 곧바로 참견해서 답글을 달 수 있다는 게 새로웠다. 그러나 인터넷 논쟁에 끼어들면서 회의적인 생각도 들었다. 벽을 보고 얘기하는 듯한 느낌, 욕하고 까는 건 화끈하게 할 수 있지만 왠지 돌아서면 허전하고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스윽 지나가다 발끈하며 개입하는 건 쉽지만 다른 사람의 속내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운 공간이 인터넷이었다.


그 뒤 인터넷은 내게 ‘할 수 있다’와 ‘할 수 없다’ 사이를 오가는 애매한 공간이 되었다. 인터넷에 이런저런 글을 쓰며 사람들과 소통하지만, 지금도 인터넷은 거북하고 부담스러운 공간이다. 댓글에 때로는 즐거워하고 때론 분노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내가 왜 그랬을까라는 허탈함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축복받은 체력이나 끈기를 지니지 못했기에 키보드워리어의 삶을 살기도 힘들었다.


요즘도 인터넷을 쓰지만 필요할 때만 사용하고 가급적이면 사용시간을 줄이려 노력한다. 인터넷에 쏟을 시간보다 첫 돌이 다가오는 아이에게 쏟을 시간이 더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을 청탁받을 때 좀 망설였다. 내가 잘 모르는 세상의 이야기인데... 그리고 두 사람의 이름을 몇 번 들은바 있는데, 논객은 왠지 두렵다. 청탁을 받고 두 사람의 블로그를 보고 나니 두려움이 더 커졌다. 자신들의 이름이 거론되는 곳이면 거의 대부분 댓글을 달고 트랙백을 거는 사람들인데, 나라고 예외일 수는 없지 않을까? 인터넷 논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두 사람의 논쟁글을 읽어보니 몇 마디 보태고 싶은 생각이 들어 청탁을 받아들였다. 부디 인터넷에서 까이더라도 내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며 떨리는 손가락으로 키보드 앞에 앉는다.



두 논객의 진검승부?


한윤형과 박가분은 언론과 사회의 관심을 받는 ‘이미’ 유명한 20대이다.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의 블로그를 방문하고 있고 두 사람의 이름으로 검색을 해보면 지지자(?)들도 꽤 많다. 이런 두 사람이 논쟁을 벌였으니 인터넷 세상이 들썩거릴 만하다. 실제로 이 논쟁을 품평하는 글들도 제법 있다.


논쟁을 접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두 사람의 논쟁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박가분이 자신의 블로그와 공동생활전선 블로그(공동생활은 참 좋은데, 꼭 전선이라는 말을 붙여야 했을까)에 최장집과 의회민주주의자들을 비판하는 자칭 ‘최장집 3부작’을 올렸고, 한윤형이 이 글을 비판하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박가분이 한윤형의 글을 반박하고, 다시 한윤형이 반박하고, 박가분이 또 반박하고, 한윤형이 또 반박하면서 이 논쟁은 ‘대충’ 마무리되었다. ‘대충’이라고 한 건 서로가 더 이상 이 논쟁에 관해 글을 쓰지 않겠다고 밝히며 다소 어정쩡하게 끝이 났기 때문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박가분은 ‘최장집 3부작’을 통해 부르주아 의회민주주의에 집착하는 최장집주의자들의 논의를 “정당에 대한 이론적 물신주의”라 규정하고 이것이 정치적 냉소주의와 구별되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문제는 부르주아 의회민주주의에 있지 않다며 사회의 주요 모순(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을 구분하고 맑스주의 관점을 회복하자고 주장한다(아마도 이 글은 최장집 교수가 맑스주의를 비현실적이라 비판한 것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박가분은 “대중 자신들이 스스로 억압해 왔던 급진적 요구들을 ‘봉기’의 형태로 표출하는 것을 통해서만 근본적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지지한다. 무기력한 냉소주의, “정책적 대안의 진정성과 호소력이 부족해서 그동안 실패”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진보진영은 ‘적대적인 모순’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어야 한다. 무능력한 좌파라는 딱지를 떼려면 “민주적 절차의 보장에 대한 공허한 약속이 아니라, 사회적 불안에 직면한 민중의 급진적 요구들을 그들 자신들로부터 동원해내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즉각적이고 양보 없는 실현을 ‘약속’하는 것”, “민주적 절차와 제도 전반을 ‘민중의’ 관점에서 ‘재정의’하겠다는 가장 급진적인 제안”을 해야 한다.


한마디로 화끈한 글이다. 사실 박가분의 글을 읽으며 어디서 이런 친구가 등장했을까 궁금했다. 맑스, 레닌의 원전을 아직도 신봉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긴 하지만 20대들 사이에서 그런 얘기가 불쑥 튀어나올지는 몰랐다. 물론 박가분이 그토록 자신있게 맑스와 레닌을 지지할 수 있는 건 가라타니 고진과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어서일 수 있다. 어쨌거나 박가분의 글은 최장집주의를 비판하고 봉기와 비타협적인 투쟁을 지지한다.


한윤형은 이 글에 관해 논평하며 최장집에 대한 평가만이 아니라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이라는 ‘컨텍스트’”에서 평가해 보자며 비판의 문을 연다. 한윤형은 박가분이 최장집의 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고 최장집 논의의 현실적인 가치와 논리적 일관성을 지적한다. 그리고 맑스주의 방법론을 무시하진 않지만 그 현실성을 평가하며 “정당론과 운동론의 무성의한 대립”을 넘어서자고 주장한다. 한윤형은 “진보신당의 가장 큰 문제는 이 정당을 지지해야 할 계층의 사람들을 조직화할 ‘운동’이 부재하다는 것”이라 지적하며 “진보신당의 현실에 개입하는 실천적 모색”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한윤형의 글을 읽으며 참 조리있고 길게 글을 쓴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글에서 빈틈을 찾아내어 적절히 찌르고 들어가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허나 텍스트가 아닌 컨텍스트를 다루거나 자신의 얘기를 담백하게 풀어가는 부분에서는 그 인상적인 날카로움이 좀 떨어지는 듯하다.


아쉬운 점은 이렇게 입장을 드러낸 뒤에 벌어진 논쟁이 논쟁이라고 이름을 붙이기엔 좀 미안한 형태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한윤형의 비판에 박가분은 다분히 감정적인 자세로 대응한다. 비판에 대한 반박이 울컥 할 수 있다는 점은 감안하더라도 그냥 던져지는 문장들이 너무 많다. 두 번의 반론에서 박가분은 “이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저 일군의 우아하고 예의바른 사회학도들에 대해 현장에 있는 저 교양없고(?) 맹목적(?) 좌파들이 터뜨리는 분통”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내가 탓하고 싶은 것은 현장에서 싸우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적으로 유복하고 나은 환경에 있는 중간계급의 ‘교양 있는’ 좌파와 진보주의자들이 그러한 전망에 대해 가져왔던 ‘이론적-지적 태만’”이라고 얘기한다. 그냥 들으면 맞는 얘기이지만 ‘그런데 누구?’라는 의문을 감출 수 없다. 이렇게 날카로운 비판일수록 그 대상이 분명해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 ‘현장’과 ‘이론’의 대립각은 필요하지만 좀 분명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분명하지 않음은 사회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드러난다. “지난 날 공산권 국가들의 파국적인 몰락과, 시민사회의 새로운 계급구성의 출현은, ‘자본’의 존재가 사회적 의제를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가장 중요한 모순이라는 사실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내가 이 글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도 실천 이전에 ‘사태를 밝히는’ 것이었다. 문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의제가 근로대중에 대한 당파성에 기초해 있어야 할 진보(좌파)세력의 의제와 혼동되는 사태에 있었고, 내가 내 글에서 밝히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러한 문제적인 ‘사태’였다.” “PT독재는 결코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적 전망이 아니라, 정확히 의회독재 속에서 불가능한 민주주의를, 새로운 민주적 합의의 틀을 구현하기 위한 대중동원적 실천들을 의미한다.” “한윤형이 간과하는 것은 ‘계급적대’가 시민권이라는 일견 저 중립적인 제도적 틀 역시 가로지른다는 사실이다.” 이 역시 그냥 끄덕끄덕 하며 읽을 수 있는 부분이지만 여전히 분명하지 않다. 앞서 이론과 현장의 대립처럼 이분법적인 대립을 너무나 당연시하며 받아들이기에 더욱더 애매해지는 부분이다(가끔 대가인양 하는 양반들이 맥락없이 큰 얘기로 툭툭 던졌다가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는 부분이기도 하다). 과연 부르주의 민주주의와 진보, 의회독재와 PT독재같은 이분법이 우리 현실에 그대로 대입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근로대중’이라는 표현은 참 오랜 만인데, 어떻게 이런 단어를 쓰게 되었을까?). 이런 부분이 더 분명해져야 자신이 주장하는 ‘현장’에 더 가까운 글쓰기가 되지 않을까?


한윤형의 반박은 이런 틈을 파고든다. “그의 글은 모든 문장이 꼬리를 물고 빙글빙글 돌고 있으며, 핵심과 주변, 주장과 근거를 구분할 수도 없”다고 지적하며 박가분의 문제제기가 잘못된 현실분석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촛불시위나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평가가 다분히 추상적이고 프롤레타리아독재라는 주장 역시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대안이 되지 못한다고 평가한다. “운동권이 정신을 차리지 않아 사태가 이렇게 되었다는 식의 서술은 현실을 호도하는 것”이고 프롤레타리아독재는 “뭐라 말하기 애매한” 관념적인 차원에서 논의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한윤형은 “박가분은 스스로의 글의 정당성을 위해 타인의 내면의 공백을 구성해내는 경향이 강하다”고 꼬집기도 하는데, 사실 이런 점은 두 사람 모두에게서 드러난다. 가령 박가분도 한윤형의 “남의 논지를 꼬는 버릇”을 지적하며 “나는 한윤형에게 저 서툴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안면의 냉소를 거두길 바란다”고 충고하기도 한다. 음, 서로에게 대략 난감한 충고들이다. 정말 마음가짐을 바꾸길 바래서 충고하는 건지, 아니면 확인사살을 하는 건지.


어쨌거나 이 둘의 길고긴 논쟁을 검색해서 읽으며 생각이 복잡해졌다. 이 영민한 두 사람이 왜 이리 소모적으로 논쟁을 할까? 현실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글도 필요하지만 현실에 대해 감정적으로 분노하는 글도 필요할 텐데, 왜 이리 인색하게 상대방의 글을 평가할까?


어떤 점에서 두 사람의 논쟁은 ‘매우 소모적이었던’ 80년대의 사상투쟁(사투)을 닮았다. 그리고 그 시대의 논쟁을 관람했거나 이에 참여했던 이들이 이 두 사람의 논쟁을 흥미롭게 지켜보거나 부추기는 것도 같다(사실 두 사람의 글에서 왜 ‘냉소주의’가 핵심적인 키워드가 되어야 하는지를 나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러다보니 냉소주의라는 쟁점은 한국정치의 ‘컨텍스트’가 아니라 누가 더 지젝을 잘 이해하고 있는가라는 ‘텍스트’의 문제로 돌아가 버린다.


이런 의문을 품고 이런저런 블로그를 돌아다녔다. 박가분, 한윤형 두 사람의 논쟁을 검색해서 읽다가 그 글들에 트랙백을 건 다른 사람들의 블로그를 방문하게 되었고, 그 블로그를 통해 이택광과 김우재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는 점과 그 논쟁이 자연과학과 인문학/사회과학 논쟁으로 비화되었다는 점도, 그리고 노정태와 홍명교, 조영일과 김영하 등 여러 논쟁이 일어났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인터넷 세상과 별로 친하지 않다보니 이렇게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는 사실도 몰랐다. 안타까운 점은 대부분의 논쟁이 상처로 끝나고 그 전투의 기록들이 허무하게 사라졌다는 점이다(어느 한 편의 블로그의 폐쇄나 이전!).


당연히 공론장(公論場)은 중요하다. 특히 한국처럼 자기 얘기를 꺼내기 어려운데 인터넷이 발달한 곳에서는 인터넷이 중요한 공론장이다. 하지만 공론장이 활성화되려면 배경지식이 필요하고 서로간의 이해(理解)도 중요하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보면 이해라는 말이 무색해진다. 바로 앞의 사람에게 무관심한 채 열심히 어느 곳에 있는 누군가와 소통하려 아이폰을 뒤적이는 사람을 바라보며 드는 느낌이랄까. 서로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기는 하는 걸까? 우리는 왜 논쟁하는가?



인문학 키드와 인문학 오타쿠



두 사람의 논쟁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박가분의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인간사랑, 2010)를 읽으니 또 감탄이 터졌다. 이름만 들어도 어려운 칸트, 고진, 지젝, 아렌트, 바디우, 랑시에르, 버틀러, 라클라우, 라캉, 들뢰즈, 벤야민 등이 한칼에 정리된다. 낯설고 어려운 사상가의 이론을 자기만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분석하는 능력이 돋보인다. 그 내용을 자신의 언어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만 빼면 무척 탁월한 능력이다.


그런데 자신의 언어로 해명하지 못하다보니 ‘정리’는 되지만 ‘이해’는 잘 되지 않은 듯하다. 번역책에서 바로 튀어나온 듯한 개념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 뜻을 알기 힘들게 꼬인 문장은 난감하다. 책을 읽고 정리한 인문독서 후기라 하더라도 책으로 나오려면 독자를 고려해 내용을 다듬어야 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회를 분석한 글도 독서후기와 다르지 않은 걸 보면 단지 글의 형식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예를 들자면, 인터넷의 정치적 주체성을 다룬 글에서 박가분은 “인터넷상의 대중 이데올로기 안에서만 머문다면 오늘날 ‘적이 누구인지’ 정세를 결정하는 ‘주요 모순’이 무엇인지에 대한 첨예한 사유의 지평이 닫히고 만다.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다원적인 욕구들이 공존하는 세계와 등치시키는 오늘날 경향은 ‘정치’가 ‘정치적인 것’으로 다변화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는커녕 우리 사회의 주요한 탈정치화의 첩경을 구성한다. 그것은 정치적인 것을 관용․불관용이라는 몰역사적인 풍경으로 환원하는 것의 징후에 불과하다”(435쪽)고 얘기한다. “인터넷 상의 대중 이데올로기”는 무엇이고,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다원적인 욕구들이 공존하는 세계와 등치시키는 오늘날 경향”은, “주요한 탈정치화의 첩경”은, “몰역사적인 풍경”은 무슨 말일까? 책을 읽는 사람들이 이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지 박가분은 설명하지 않는다. 어려운 말을 쓰지 말자는 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줘야 할텐데, 남이 풀다 남겨둔 낱말맞추기를 푸는 느낌이다. 말이 안 들어맞다보니 앞서 맞춰놓은 낱말을 다시 맞춰갈 수밖에 없다.


박가분의 글에서 느낀 또 다른 불편함은 좋아하는 인문학자에 대한 열광과 반대자에 대한 냉소가 너무 분명하다는 점이다. 사랑과 열정을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한쪽으로 치우치다보니 다른 쪽의 무게를 너무 가볍게 여긴다. 가벼이 여길만한 상대라면 가볍게 다뤄야 하겠지만 상대를 잘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상대를 누르려는 경향도 보인다. 다른 사상가들은 어려워서 잘 모르겠고 그나마 알만한 사상가인 아렌트를 가지고 얘기하자면, 사실 박가분의 아렌트 해석은 지젝의 해석을 모방한 것에 가깝다. 지젝의 해석을 모방했다는 점을 숨기지는 않으니 솔직하지만 지젝의 해석이 가진 문제점 또한 그대로 지니고 있다.


박가분은 한나 아렌트의 이론을 신자유주의와 연관짓는 지젝의 분석에 기대어 비판한다. “정치적 판단이란 ‘진리’와 무관하지 않으며, 그것은 취미판단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을 역설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아렌트의 견해는 정확히 쁘띠 부르주아들의 환상을 대변한다”(51쪽)고 주장한다. 아렌트가 쁘띠 부르주아(오랜만에 보는 단어다!)의 환상을 대변한다니 무슨 소리일까? 다음 얘기를 들어보자. “스탈린식 전체주의도 나쁘다. 어쨌든 그것은 말 그대로 전체주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와 같은 자유주의 사상가들과 그녀가 대변하는 참여민주주의적 이상은 ‘더 나쁘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적 조류와 광기어린 전체주의적 폭력에 맞서 공론공간을 방어하겠다는 바로 그 제스처를 통해 그들이야말로 정확히 공론공간 그 자체의 고유한 정치적 성격을 희생시켜 버렸기 때문이다.”(53쪽) 박가분의 비판은 아렌트가 주장한 공론장이 다양성을 빌미로 자신의 정치성을 포기하고 정치행위를 “수동적인 의미체험의 영역으로 격하시키는 효과를 낳는다”(60쪽)고 비판한다. 결국 “이들 참여적 민주주의․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진짜 요망은 공론공간을 순수한 환상으로 유지하는 것에 불과하며, 오히려 이러한 환상을 진짜로 유지시키는 사람은 자신들이 요구하는 특수한 논리, 정체성, 경제적 판단을 곧바로 전 사회적 보편성과 일치시키려는 ‘유토피아적’ 기획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이다(55쪽).


박가분이 비판하는 바는 아렌트가 정치적인 적대의 장을 순수한 의견교환의 장으로 전환시키고 정치와 진리를 분리시켜서 신자유주의 세력이 그 장을 장악하도록 문을 활짝 열어줬다는 혐의이다. 그러나 아렌트는 적대가 없는 정치공간이 가능하다고 보지도 않았고 특정한 세력이 그 공간을 점유하는 것을 걱정했다. 오히려 아렌트는 공감적 참여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시민불복종을 결사의 자유의 권리로 해석했다.


사실 박가분은 아렌트가 정치와 진리를 구별지으려 했던 바로 그 지점에서 아렌트를 비판한다. 아렌트는 순수한 정치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고유함이 보장되는 다원적인 공간을 정치의 장으로 삼으려 했다. 왜냐하면 공적 영역은 특정한 사람들의 독점물이 아니라 타인과 공존해야 하는 인간 공통의 장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프롤레타리아라 하더라도 그 장을 독점할 수는 없다.


사실 현대의 유럽철학자들이 아렌트를 깎아내리려 안간힘을 쓰는 건 그만큼 아렌트의 무게가 무거웠다는 점을 반증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무게를 제대로 재지도 않은 채 내팽개치는 건 올바르지 않다. 박가분은 라캉을 비판하는 버틀러를 비판하면서 “만약 라캉에 대해 알려져야 할 다른 부분이 있다면 어쩔 것인가? 라캉은 자신의 성차 공식을 통해 이미 상징적 금지의 작인 자체가 성별화된 입장으로 분열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104쪽). 이 얘기는 박가분이 비판하는 아렌트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만약 아렌트에 대해 알려져야 할 다른 부분이 있다면 어쩔 것인가? 아렌트는 인류 역사에서 되풀이해서 나타났던 평의회를 새로운 형태의 정부로 환영하면서 노동자평의회만이 아니라 다양한 평의회들이 새로운 주권권력을 구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박가분의 책에서 가장 위험한 부분은 목적과 수단을 분리시키는 사고방식이다. 도구적 합리성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불러왔는지는 이미 인류 역사가 증명했다. 그런데도 박가분은 “물론 전쟁은 전 인류를 수단화하는 반인륜적인 범죄이다. 그러나 그러한 폭력성을 통해서만 바로 그것에 대한 국제적 규제가 가능하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전쟁을 겪어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반복될수록 오히려 우리는 희망에 한걸음씩 다가가게 될 것이다.”(42쪽) 이것이 칸트를 올바로 해석한 것인지는 또 다른 문제이고, 이런 칸트라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리고 싶다. 사실 ‘평화를 위한 전쟁’, ‘정당한 전쟁’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말이 아닌가. 19세기 러시아 혁명가의 사고방식이 21세기 한국의 청년에게서 부활했다.


그 자신이 비판한 인문학 오타쿠가 되지 않으려면 자신의 언어를 가져야 할 것 같다. 그의 급진적 사유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익숙한 언어가 개발되어야 그 말의 힘이 강해질 것 같다. 그리고 외국이론을 한국의 현실에 대입하는 과정은 매우 신중해야 하고, 그런 과정 자체가 이미 오류일 수 있다. 인문학 오타쿠가 아니라 인문학 키드가 되려면 숙성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 같다.



논객의 탄생과 현실주의자


한윤형의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텍스트, 2009)를 읽으며 감탄에 또 감탄을 거듭했다. 인물비평을 매개로 ‘자생적으로’ 대중문화의 세계에서 정치의 세계로 넘어간 고등학생이라, 참으로 놀랍다. 안티조선운동에 공감하긴 했지만 그 논쟁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내게 한윤형의 글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화려한 경력도 그렇지만 하나의 운동에 저토록 헌신적인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은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모습을 이리저리 바꿔내며 인터넷 세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치있게 창조할 줄 아는 사람 역시 보기 드물기 때문이다.


사실 너무도 일찍 ‘결단’의 의미를 깨달은 한윤형의 모습은 좀 비장하기도 했다. 안티조선운동 당시 다른 대학생들에게 “어른들이 일을 더 시키려고 할 테니 절대로 말려들지 말라”고 충고할 정도로 현실을 잘 꿰뚫고 있는 그이기에 자조적인 독백과 열정적인 주장이 책 속에 공존한다. 산전수전을 거치며 너무 일찍 늙어버린 한윤형은 이렇게 얘기한다. “당시의 나는 노빠들을 정말로 싫어할 만큼의 순수함을 지니고 있었다. 세상사의 돌아가는 방식에 적당히 체념하고 그 전에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많은 이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지금의 나로선 돌아갈 수 없는 세계인 것이다.”(90쪽)  회고록에서나 나올법한 얘기가 20대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나는 여기저기서 내가 이미 겪은 것과 같은 문제들이 반복되고 어떤 좋은 흐름들을 좌초시키는 것을 지켜보았다. 세상은 지겨우리만큼 반복적이었고 그 반복을 거부하려는 이들의 몸부림조차도 또한 반복적이었다. 기록에 대한 갈망은 내가 그 ‘사실’을 그저 ‘현실’로 받아들일 만큼 어른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일까? 기억과 자료가 사라지기 전에 기회가 있다면 아직도 그 일을 시도해 보고 싶다. 아직도 종종 그 시절의 꿈을 꾼다.”(50~51쪽).


이미 너무 많은 사건을 겪었고 그 중심에 있었기에 그가 보고 듣고 겪은 바는 압축적이다. 한국의 압축성장이 사회에 미친 영향을 보면, 압축성장의 경험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걱정된다. 그러니 그에게 필요한 건 ‘여유’인 듯하다. 세상을 책임지고 바꾸려는 의지를 잠시 내려놓고 세상의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좋겠다. 짐을 잠시 내려놓아도 세상이 갑자기 망하지는 않을 테니.


허나 열정을 포기하고 차갑게 식은 한윤형의 글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논리’이다. 타고난 논리적 인간일 수 있지만 그는 인터넷 게시판의 논쟁을 통해 논리적으로 ‘단련’된 사람 같다. 인터넷 논쟁의 주요한 무기가 ‘발빠른 대응’이다보니 상대방의 글을 읽고 즉각적으로 논점을 파악하고 그 허점을 짚는 게 논쟁의 정석이다. 때론 상대방이 정말 얘기하고 싶은 바가 글 속에 정확하게 드러나지 못할 수 있는데, 그 점은 이해의 대상이기보다 비판의 대상이다.


그 자신도 이렇게 얘기한다. “게시판 논쟁 시대에 유용한 방식이기도 했지만, 나는 남들의 주장을 종합해서 나 자신의 주장을 만드는 편이었다. 여러 관점을 가진 이들이 있으면 그들의 글을 유심히 보고, 그들 입장의 장점과 난점을 파악하고, 그것들을 새로운 주장 속에서 끼워 맞추는 것이 내가 좋아하는 일이었다. 논쟁의 과정에 내가 몰랐던 사실들을 발견하면 그것들을 수용하는 글을 새로 쓰기도 했다. 그래서 기묘하게도, 나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진중권이 노빠들을 향해 직격탄을 쏘아 논란이 거세지면, 진중권의 진테제와 노빠들의 안티테제를 종합하여 내가 새로운 주장을 만들어내는 일이 잦았다.”(91쪽) 고등학교 때부터 이런 내공을 길러왔으니 그의 공력이 지금은 어느 정도일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런데 논리의 내공이 현실을 바꾸는 동력이 되려면 “인간은 꿈의 세계에서 내려온다”는 체게바라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한윤형은 “지금의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정치적인 대안을 지니고 있지 않고, 사실주의적인 분석은 회의와 냉소의 늪에 빠진다. 하지만 나는 이 늪이 위험하기는 해도 섣부른 희망의 아편만큼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꿈에 취해 살아서는 안 되고, 제정신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직시해야 하는 것”이라 얘기한다(95~96쪽). 하지만 이런 현실주의는 그가 보는 세계를 너무 단편적으로 만든다. 단지 현실의 조건에서 시작하는 것을 현실주의라 부르지 않는다면, 이상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현실주의자이고, 그런 현실주의자들 덕분에 인류 문명은 지금의 현실로 발전해 왔다.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니라 1인칭 시점에서 세상에 말을 걸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민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중‘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허나 안티조선운동의 상처 탓인지, 그가 겪어온 민주노동당 분당, 김선일 사건 등의 영향 때문인지 한윤형은 그런 현실주의를 받아들이진 않는 듯하다. 나는 한윤형이 키보드워리어에서 현실주의자로 변신해서 세상의 열정을 많이 느껴보면 좋겠다.



아름다운 논쟁은 없다!


지금 성공회대에서는 ‘이상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학교 내의 행정직원들이 비정규직법안 때문에 해고되었는데, 밖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사회적 약자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교수나 지식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닫고 있다. 심지어 이 일이 자신과 무관하다고 주장하거나 때로는 학교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들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진보와 보수를 떠나 인간의 기본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남을 가르치려 한다니. 나는 앞길 창창한 두 논객의 삶이 소위 진보적이라 ‘떠드는’ 지식인들과는 다르길 기대한다.


그리고 똑똑한 두 사람이 성장하기에 인터넷이라는 세상은 너무 좁다. 넓은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몇 다리 건너면 하나의 세상이다. 좁은 세상에 똑똑한 사람들이 많으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고 사소한 자극에도 예민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러니 영역을 좀 넓히고 시야도 다양한 방면을 향하면 좋겠다.


80년대 사회과학논쟁, 사회구성체논쟁이 현재로 의미있게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건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원전에 대한 집착’ 탓도 컸다. 치열한 논쟁, 사상투쟁은 많았지만 교조주의나 개량주의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사회변혁을 둘러싼 논쟁마저도 이 땅의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특정한 원전이 논쟁의 승패를 가늠했다. 그러다보니 현실을 바꾸는데 현실이 주가 되지 못하고 현실을 해석할 하나의 방법에 불과할 원전이 주가 된다. 앞뒤가 뒤바뀐 논쟁은 그만둬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논쟁을 벌이다보면 왜 논쟁을 하는가라는 목적이 사라지는 것 같다. 내가 예전에 읽은 동화책엔 남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안경과 자기 마음을 보여주는 단추 얘기가 나온다. 남의 마음을 보는 게 엄청난 권력이지만 그 권력이 삶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나같은 소심쟁이들은 그냥 자신의 소심함을 보여주는 단추를 붙이고 사는 게 행복하다. 이 글을 쓰며 나는 행복했다.


 

I. 들어가며


스콧의 『The Art of Not-being Governed』는 정치에 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흔든다. 그의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국사(國史)를 배운 우리들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고조선-삼국시대-고려-조선의 역사는 허구이다. 그렇게 이어지는 ‘연속된 국사’는 불가능하다. 더불어 국사책의 지도도 허구이다. 단일한 국가공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관점을 정치적으로 해석한다면 이런 판단도 가능하다. 홉스나 로크를 읽을 때 든 의문과 비슷하다. 누가 국가를 만드는데 동의했던가? 암묵적인 동의(tacit consent)가 실제 역사적인 개념이 아닌데도 왜 우리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가? 그리고 단일한 국가주권은 가능한가? 단일민족-단일국가가 근대가 만든 환상이라는 점은 여러 역사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인데도 왜 우리는 그것을 환상이라 인정하지 않는가? 스콧의 관점을 정치적으로 응용한다면, 국가를 구성한다는 영토, 국민, 주권 모두가 근대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통용되지 않는 공간이 국가 내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II. 2장 국가공간: 통치와 징발의 공간


스콧이 보기에 모든 공간이 국가공간일 수는 없다. 국가가 등장하려면 왕가가 주민과 땅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핵심적인 위치로 집중시켜야 한다. 농사를 짓지 않는 엘리트들은 농민들을 통해서만 먹고 살 수 있다. 국가공간의 등장에 단초를 제공한 것이 인도네시아벼(padi)이다. 벼는 적은 인구로 많은 양을 생산할 수 있게 했고, 이로써 국가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거리 내에서 생산될 수 있는 곡식의 양을 최대로 높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벼의 생산주기는 일정해서 국가는 수확량을 예측해서 세금을 걷을 수 있었다. 즉 벼는 국가의 가독성(legibility)을 높이고 징발될 수 있으며 수송하거나 저장하기에도 쉬웠다. 따라서 벼보다 더 이상적인 국가작물(ideal state crop)은 찾아보기 어렵다.


고대사회에서 국가형성을 막은 기본적인 장벽은 바로 거리였다. 식료품을 수송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육지보다는 해상수송이 더 수월했다. 육지의 국가는 보통 120km를 넘지 못했지만 해상수송은 거리의 제한을 거의 받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육지와 해상을 똑같이 1km로 표시한 근대의 표준지도는 매우 잘못되었다. 육지와 해상은 매우 다른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유대관계를 가진다. 육지 내부도 마찬가지이다. 평지와 산, 늪, 습지, 숲은 구분되어야 하고, 국가 통제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지역(state space)과 국가통제에 내심 저항하는 지역(nonstate space)이 구분되어야 한다. 근대의 표준지도는 지방의 관행과 어울리지 않는다.


어쨌거나 내륙국가보다 해상국가가 곡식과 인력에 의존하지 않는 고도의 ‘국가성(stateness)’을 갖춘다. 좁은 해협과 같은 전략적인 위치의 해상국가는 핵심적인 무역상품에 대한 통제, 즉 세금, 통행세, 압수 등을 통해 자원을 확보했다. 허나 이런 이점이 절대적이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해상국가는 기본적으로 육지의 농업국가보다 훨씬 적의 수의 주민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농업국가는 수의 힘으로 해상국가를 제압할 수 있었다(마치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농업국가인 스파르타와 시라쿠사가 해상국가인 아테네를 제압했듯이).


그런 점에서 벼 재배는 국가형성에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동남아시아에서 벼 재배는 주기적으로 홍수가 범람하는 강가에서 잘 되었다. 벼를 재배하는 심장지대가 크고 이어진 곳에서 강대국이 등장했다. 반면 고지대의 농업지대에서는 소국가(statelets)가 등장했고, 이들의 연맹이나 연합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벼를 재배하는 핵심지대가 존재하는 대규모 국가에서도 왕가의 통제권이 전체를 관장하지는 못했다. 습지나, 늪, 고지대는 왕실과 가까워도 정치적인 통제를 거의 받지 않았고 조공을 바쳐도 그건 예속관계가 아니라 정치적인 선택이었다. 이런 공간들은 독자적인 언어와 주거양식, 친족구조, 인종적인 자기동일성, 자급관행, 종교를 가졌다. 즉 이런 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전략적으로 이중 주권의 상황을 만들어냈다. 21세기 국민국가의 표준인 야심 없고 단일한 주권은 소수의 곡창지대의 핵심부 외에 드물었다. Beyond such zones, sovereignty was ambiguous, plural, shifting, and often void altogether. Cultural, linguistic, and ethnic affiliations were, likewise, ambiguous, plural, and shifting(61).



III. 3장 인력과 곡물의 집중: 노예와 물을 대는 논


인적자원을 중앙집중화시키는 것은 근대 이전 동남아시아 정치권력의 핵심요소였다. 이것이 치국(治國)의 첫 번째 원리이고 이 지역에서 식민지 이전 왕국의 모든 역사에서 mantra였다. 그리고 그런 국가공간을 만드는 것은 평평한 땅과 강의 주기적인 범람으로 비옥한 땅, 통행할 수 있는 수로에서 멀지 않은 넓은 공간이 있는 곳에서 가장 쉬웠다.


허나 이런 공간들이 국가형성을 결정하지는 못했다. 물을 대는 논은 주민과 식료품을 중앙으로 집중시키기에 가장 편리하고 대표적인 방식들을 가리키는 정치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사실 쌀을 재배할 핵심지대가 없을 경우, 중앙집중화는 다른 수단들로, 예를 들어 노예화나 무역로에 대한 통행세, 약탈 등으로 이루어졌다.


비교적 땅이 풍부했던 동남아시아의 주민들은 적은 노동력으로 많은 수확을 확보할 수 있고 가족에게 유리한 이동경작을 선호했다. 그래서 인구는 분산되었다. 반면에 물을 대는 논은 인구를 밀집시켰고 상당한 양의 잉여를 보장하는 강력한 심장지대를 만들었다. 그래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논이 있는 땅으로 이주했을 것 같지만 이것은 이론적인 얘기이고 전쟁, 전염병, 수확량의 변동, 기근, 미친 군조, 내전 등은 주민들을 동요시켰다. 국가가 없었던 사람들의 평화롭고 점진적인 군집이라는 왕가의 기록은 허구인 경우가 많다. 특히 이런 주장은 전쟁과 노예제, 억압이 국가를 만들고 유지함에 있어 본질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The accumulation of population by war and slave-raiding is often seen as the origin of the social hierarchy and centralization typical of the earliest states(67). 많은 왕가의 칙령들은 주민들을 강제로 정착시키려는 의도를 가졌다.


그래서 보통 땅보다 인간을 놓고 전쟁을 벌였고, 그래서 전쟁은 피비린내나지 않았다. 이런 논리는 원거리 무역보다 핵심적인 농업생산에 더 많이 의존했던 내륙의 농업국가에서 가장 강력했다. 땅보다 인간이 중요했고, 이는 단지 곡식의 수확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전쟁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전투에서의 승리도 생존한 포로들의 수로 판정되었다(투키디데스의 말처럼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이데올로기나 인종이 아니라 공물을 놓고 싸웠고 에게해의 가장 중요한 무역상품은 노예였다).


근대 이전의 동남아시아 내륙지방의 지배자들은 GDP보다 ‘국가가 접근할 수 있는 생산(state-accessible product, SAP)’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The state-accessible product had to be easy to identify, monitor, and enumerate (in short, assessable), as well as being close enough geographically(73). 경작자에게는 이것이 그다지 좋지 않은 일이지만 국가에는 많은 보상을 주었다. 동남아시아의 국가는 기본적으로 ‘벼-국가(paddy-state)’였다. The superior productivity of wet rice per unit of land permits enormous population densities, and the relative permanence and reliability of padi rice, so long as the irrigation system is functioning well, helps ensure that the population itself will remain in place(74).


주요한 단일작물을 재배하는 것이 가독성과 징발을 위해 필요했다. 단일작물은 동일한 생산리듬을 가지고 토지가치도 하나의 기준에 따라 정해질 수 있으며, 이런 농업환경은 가족구조에도 영향을 미쳐 사회적, 문화적 동질성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국가처럼 보기』에서처럼 스콧은 가독성을 강요하는 정책이 국가형성의 지름길이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인구를 분산시키고 혼합파종을 권하며 새로운 땅을 주기적으로 개간하는 이동농업과 화전농업은 국가형성의 적이었고(스콧은 화전농이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주장도 근대시기에 만들어진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국가는 국가공간 외부에서 사람이 생존할 수 있는 기회를 최소화시키려 노력했다.


허나 이런 국가의 성격이 문화적 동질성을 강요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그것은 크리올 중심(The Creole Center)을 형성했다. 즉 these padi states were ethnically plural, economically open, and culturally assimilationist(82). 특히 다른 지역의 관리와 작가, 왕족을 포로로 잡은 경우 새로운 혼종 왕실 문화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인적 자원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쉬운 동화와 빠른 이동을 선호했고 매우 유동적이고 침투할 수 있는 인종적 경계를 만들었다. 남부 버마의 두 개 언어를 쓰는 지역에서 인종적 정체성은 혈통으로 주어진 것이라기보다 정치적인 선택이었다. 옷이나 머리 스타일, 주거형태, 인종적 정체성도 변화했다. 어느 곳에서나 인적 자원이라는 절대명령은 차별과 배제를 거부했다. 왕국이 잃은 것보다 더 많은 주민들을 끌어들일 때 그 왕국은 부득이하게 점점 더 세계주의적이 되었다. 흡수된 사람들의 다양성이 커질수록 본국의 문화는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였고, 사실상 그런 문화적 혼종성이 성공의 조건이었다.


그래도 국가공간의 주요한 주민들은 노예로 확보되었고, 모든 국가들, 특히 해양 국가는 노예에 기반한 국가이다. 노예는 식민지 이전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환금작물(cash crop)’이었다고 말해도 옳다.


그래서 포로를 노예로 삼는 것 외에 다른 많은 방식들이 정치체제에서 등장했다. 부채노예(debt bondage)가 일반적이었고, 아이들은 팔렸다. 대부분의 노예들은 문화적으로 다른 구릉지대(hill) 주민들이었고 전리품으로 노예사냥이 인정되었다(그래서 구릉지대의 사람들은 유괴에 관한 신화와 전설을 가지고 있다). 이런 노예무역의 규모와 영향은 상상을 초월했다. 분지(valley)의 주민들은 전쟁포로와 범죄자들의 재정착과 더불어 상업적인 노예사냥을 통해 늘어났다. 버마와 타이 모두 ‘노예국가(slaving states)’로 불러도 옳다. 노예사냥은 관리와 군인들의 전략적인 투자, 연합무역사업(joint trading venture)에 가까웠고, 약탈자들은 포로들이 돌아가지 못하도록 곡물과 주거지를 파괴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런 포로들은 대부분 왕가의 재산이 아니라 개인적인 재산이자 신분의 기호로 인정되었다.

허나 사람을 끌어 모으려는 벼-국가의 계획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위험하고 불안정한 기획이었다. 첫째, 재정적 가독성 때문이다. 주민등록과 비옥한 땅의 측량지도가 가독성의 핵심적인 행정도구인데, 이를 측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왕실은 인적 자원과 곡식을 놓고 관리와 귀족, 성직자들과 경쟁해야 했다. 내부와 경쟁하지 않고 외부에서 사냥할 경우 소규모 노예사냥은 위험이 적은 반면 확보할 인력의 비율이 낮았고 대규모 전쟁은 수천명의 포로를 확보할 수 있지만 질 경우 왕가의 파멸을 불러왔다.


둘째, 자멸로서 국가공간(state space as self-liquidating)의 성격이다. 자신의 주변으로 많은 주민들을 포획해서 집중시킬수록, 주민들은 멀리 달아나려 한다. The heartland or core region of the padi state is the most legible and accessible concentration of grain and manpower.…the greater the pressure exerted on it, the more likely it would simply flee out of range or, in some cases, rebel(95).



IV. 나오며


스콧의 설명을 한국역사에 적용하면 몇 가지 흥미로운 설명이 가능하다. 가령, 민심이 곧 천심이다라는 유교적인 명제 역시 인적 자원을 통제하려는 왕가의 노력으로 설명될 수 있다. 민심, 즉 노동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권력은 스스로를 유지할 수 없다. 또한 일제 시대에 조선총독부가 부랑자를 단속하고 강제로 수리조합을 만들어 관개농을 확대시킨 것 역시 한국의 국가형성에 특징적인 지점이 될 수 있다. 농업의 확산과 근대국가의 형성이라는 관점은 뻔한 관점과 결론을 반복하는 한국정치를 흥미롭게 재해석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

내 나이 마흔 하나, 예비군도 끝났고 이제 민방위도 끝날 나이이다. 그러니 군대에 관해 다시 생각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사람 사는 일이 생각대로 되지는 않는다. 어찌하다 보니 군대에 관한 책도 한 권 쓰게 되었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보면 군대문제로 고민하는 학생들을 만나기도 하고, 대학과 거리가 먼 우리 동네 청년들에게도 어김없이 영장은 날아온다.


내게 선배(?)군인으로서 조언을 구할 때마다 고민이 생긴다. 나는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친분 있는 병역거부자들을 예로 들며 군대를 거부하라고 권할까?(나도 못 했으면서!) 아니면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하나마나하고 때로는 폭력적인 얘기를 해줄까?(즐길 게 없다는 걸 알면서!) 군대도 사람 사는 곳이니 너무 걱정 말라며 등을 두들겨줄까?(군대에 다시 가라면 절대로 가지 않을 거면서!) 나도 갔다 왔으니 너도 가서 고생 한번 해보라는 식의 악담을 할까?(본전 생각?)


사실 군대라는 주제는 아직도 내게 무거운 주제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이제 군번을 외우지는 못한다는 점이다(불행하게도 국민교육헌장의 첫 구절은 지금도 불쑥 튀어나오지만). 무거운 얘기들을 글로 꺼내자니 걱정이 앞서고, 마감날이 다가오자 결국 새벽에 잠이 깨어 컴퓨터 앞에 앉았다(아직도 가끔 가위눌린 듯 군대 꿈을 꾼다).



나의 심심한 군대 이야기


나는 대학원 석사학위를 받고 27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입대했다. 의정부의 306보충대를 거쳐 철원의 6사단에 배치를 받았다. 휴가와 각종 부대업무를 담당하는 중대 행정병으로 배치되었다가 시위 전력이 있다는 이유로 쫓겨나 위병소 근무를 서기도 하고 매점(PX)을 관리하다 다시 행정반으로 복귀되는 등 부대 내에서 뺑뺑이를 돌다 큰 사고 없이 제대했다(다행스럽게도 남자들 사이에 흔하다는 수색대나 스나이퍼를 할 기회가 없었다).


에피소드라면, 사단 훈련소에 입소했더니 대학 후배가 소대장을 맡고 있었다.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건만 하필이면 그가 화생방 훈련 교관이었다. 내 얼굴을 유심히 보던 그는 혹시 형이 자기 학교에 다녔냐고 물었고 나는 내가 그 학교를 다녔다고 대답했다. 그 후배의 당혹스러운 눈동자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리고 자대 배치를 받고 대기하던 중, 어느 일병이 고향과 고등학교를 묻기에 대답했더니 자기랑 같은 학교라고 아주 좋아하며 기수를 묻더라. 허나 그는 나의 6년 후배였다(그 때는 나도 동안이었단 말인가?). 짧은 물음과 대답 이후 긴 침묵이 이어지는 곳, 군대는 그런 곳이다.


침묵은 지겨웠지만 군대는 나름 재미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군대에서 배운 가라 영수증 만들기와 숫자 맞추기는 지금도 요긴하게 써먹곤 한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군인들의 생활을 무조건 악의 온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계급이 사회적 격차를 의식하지 않고 그야말로 짬밥 순대로 대할 수 있는 곳은 한국사회에 군대 밖에 없었다(물론 그곳에도 특권층은 있지만). 군대라는 조직은 밉지만 그 속에서의 생활은 우리에게 결핍된 것을 채워주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다른 관계로는 채울 수 없는 ‘군대동기’라는 관계.


막상 갔다 오니 별것 아닌 것도 같은데 나는 왜 27살까지 군대를 미뤘을까? 그 당시에는 총을 든 폭력의 문화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외려 나중을 대비해서 그런 기술을 익혀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폭력이 군대를 미룬 이유는 아니었다. 문제는 군대라는 ‘조직’이었다. 하극상(下剋上)을 친구로 삼아온 내게 일방적인 조직은 독약과 같았다(군대에서 그런 독약이 내 속에도 있다는 점을 확인했지만). 군대가 자유롭고 편안한 곳이라면 누가 입대를 거부할까?


군인들의 삶과 별도로 군대라는 조직은 분명 폭력적인 조직이다. 아무리 좋은 명분을 내세워도 군대는 권력을 가진 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조직이고, 생명을 해치기 위한 조직이다. 그곳에 있다 보면 판단의 기준이 영향을 받고 폭력에 둔해질 수밖에 없다. 내 자신이 아니라 외부의 것이 세상과 인간을 보는 잣대라는 건, 그 잣대가 타인에 대한 폭력을 내포하고 있다는 건 위험하다.


조심을 했음에도 군대에 갔다 온 뒤에 한 가지 변화가 생겼다. 군대를 회피하는 연예인들을 보면 적개심이 샘솟았다. 군대를 면제받았다는 사회 지도층을 볼 때마다 분노가 치솟았다. 그 적개심과 분노가 온전히 불공평과 부조리에 대한 정의로운 분노였을까를 곰곰이 따져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말을 들으며 위안을 삼는다).


이 부조리한 분노가 언젠가 영장을 받을지 모를 우리 아들에게는 전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모든 젊은이를 군대에 보내 사람을 만들려는 세상이 아니라면 말이다.



달라진 군대 이야기


최근에 대학생이나 청년들과 만나며 느끼는 점은 군대에 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군대에 갔다 와서 복학했다는 여학생이 수업에 등장했고, 숙명여대에는 여대생 학생군사교육단(ROTC)이 만들어졌다. 수업시간에 군대나 군가산점에 관한 토론을 붙이면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 나온다. 여자들도 군대에 가야 한다는 남학생들의 얘기에 여학생들이 심심찮게 공감하고 청춘을 바쳤으니 군가산점제를 인정해야 한다고 여학생들이 말하기도 한다. 이제는 군대도 ‘스펙’이고 ‘직장’이다.


전쟁의 위협이 실감나지 않는 곳에서 군대는 위험한 곳이 아니다. 천안함이 침몰하고 연평도가 포격을 당해도 쉽게 전쟁이 벌어지리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러니 영장을 받을 때의 부담감이 줄어든다. 그리고 요즘은 구타도 줄어들고 인터넷도 하며 ‘우리 군대가 달라졌어요’라는 얘기가 솔솔 흘러나오니 거부감도 좀 줄어든다(등록금도 비싼데, 한번 정도 쉬어줘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폭력이 일상화된 곳에서는 폭력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다. 사회의 폭력성이 군대의 폭력성을 열심히 따라가고 있고, 대중매체나 게임, 영화 등에서 느끼는 폭력성이 감수성을 둔하게 만든다. 폭력이 오락으로 변한 세상에서 군대는 ‘우정(?)의 무대’이다.


또한 조금 바꿔 생각하면 한국사회에서는 직장도 군대이다. 비정규직에 적은 월급을 받아도 끽 소리 못하고 상급자의 눈치를 봐야 하는 곳이 직장이다. 사회가 빡세지는 만큼 군대의 빡셈은 거쳐야할 과정일 뿐이다. 어차피 집단적이고 획일적인 한국사회, 군대에 잘 적응하면 직장에도 잘 적응한다니 군대는 나의 사회성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일지 모른다.


물론 여전히 군대는 청춘을 갉아먹는 곳이지만 적절한 타이밍에 시간을 벌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학 등록금도 비싼데, 한번쯤 휴학하고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심지어 군대에서 수업을 들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억압적인 조직문화도 계급‘놀이’로 여기면 느낌이 달라진다. 시간이 흘러 새로운 계급장(아이템)을 먹으면 내 위치도 달라지니 무조건 나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심지어 군가산점제도까지 부활된다니).


그리고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다지만 요즘은 군화를 거꾸로 신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어차피 관계의 지속성이 중요하지 않은 시대이니 쿨하게 만나고 쿨하게 헤어지면 그만이다. 또 모두가 가야 하는 군대에 가지 않는 나쁜 인간들이 있다지만 그건 일종의 능력같기도 하고 그걸 비난하자니 그 모습이 좀 찌질해 보이기도 한다. 무한경쟁의 시대에는 부정(不正)도 능력이 아닌가? 능력껏 빠지는 게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쿨한 시대에는 청년들의 가슴과 머리도 차갑게 식는다.



나는 사람이 되기 싫다!


차갑게 식어버린 한국사회에서는 지금도 초등학생들이 소총을 들고 안보교육을 받곤 한다. 동네에서 서로에게 비비탄을 쏘며 장난감총(정말 장난감일까?)을 들고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철없는 어른들의 작품이다. 국익을 위해 파병을 하는 나라에서 아이들은 미래의 군인으로, 바람직한 인간으로 자란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군대에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신경이 바짝 곤두선다. 도대체 그 말에서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아직도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한국사회이지만 그 기준이 군대라니 우울할 뿐이다.


다행히 우울한 시대에도 희망은 꽃핀다. 얼마 전 병역거부로 수감 중인 친구를 면회했다. 두꺼운 유리벽, 마이크와 스피커로 대화를 나눠야 하는 우울한 상황에서도 그 친구는 유쾌했다. 다행스럽게도 군대든, 감옥이든, 어느 곳에서나 사람은 살 수 있다. 중요한 건 내가 어디에 있는가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고 우리는 아직까지 자신을 확신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 그들이 강요하는 사람의 길을 걷지 않는 것, 그것이 큰 힘이다.


내년이면 감방에서 그 무게를 견디고 있는 그 친구와 술잔을 나눌 수 있을 듯하다. 우정과 사랑이 없다면 힘겨운 세상을 어찌 버틸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군대의 가장 큰 적은 로맨티스트이다. 우정과 사랑을 즐기고 지킬 줄 아는 사람, 복불복의 경쟁 사회를 갉아먹는 암적인 존재이다. 나는 사람이기 싫은 암적인 존재이다.


 

진보정당에게 고민거리를 던지는 사건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진보정당 소속의 시의원이 주민자치센터 직원에게 행패를 부렸던 사건에 뒤이어, 서울시의 한 구의원은 연수를 빙자한 해외관광에 동참해서 물의를 빚고 있다. 그리고 전라남도에서는 도의원이 술을 마시고 차량사고를 낸 뒤에 뺑소니를 쳤다 경찰에 붙잡히는 사고가 터지기도 했다. 일어나지 않아야 할 사건들이 계속 터지면서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의심하거나 되묻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단순히 물의를 빚은 의원을 징계하거나 그 의원을 탈당시켜서 이런 문제를 해결될 수는 없다. 근본적인 원인을 짚지 않으면 이런 일은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고, 진보정당이 제도권으로 더 많이 진입하면 할수록 더욱더 커질 수밖에 없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단지 선거에 나갈 후보자의 자격을 심사하는 것만으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뺑소니를 제외하면 이런 일은 정치‘현실’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지방의원이라는 ‘직책’에서 생겨난 이런 문제들은 후보자 개인의 품성이나 자질만으로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진보정당의 의원이 지방의회에서 경험하는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다. 보수정당의 의원들이 키득거리며 몰려다니고 이해관계에 따른 표결을 할 때, 한 명의 의원이 이에 대처할 방법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더구나 비협조적인 공무원들도 많고 지역토호들이 호시탐탐 허점을 노린다. 그렇다고 중앙당이 적절히 지원을 해주지도 못하는 상황이니 험난한 가시밭길을 홀로 걷는 기분일 게다. 한 치만 삐끗해도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싸움터에서 지방의원은 활동해야 한다.


그래서 왜 유독 진보정당 소속 의원들의 문제만 파헤치고 보수정당 소속 의원들의 수많은 문제점들은 덮어 두냐며 불만을 드러낼 수도 있다. 그리고 왜 정치의 기준이 도덕성이어야 하냐고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허나 의정활동의 어려움들이 앞서의 문제들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진보정당의 의원들은 바로 그런 문제점들을 해결하라는 시민들의 요구를 받으며 지방의회로 진출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보수 정치인들과 똑같이 행동할 거라면 진보정당에 소속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진보적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리고 이것은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사명의 문제이다. 지방의원들은 정치에 대한 인식을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전환시키는 중요한 사명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지방의원은 중요한 사안을 이해하고 판단해야 하지만 개인의 상식과 기준이 아니라 ‘진보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보수언론들이 유독 진보정당의 문제점만 파헤친다는 푸념은 타당한 지적이지만 ‘정치적으로 올바른’ 지적은 아니다.


대중이 정치에 관심을 쏟기 어렵다, 정치인의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권력을 몰아주고 밀어주자는 식의 논의가 있는 것 같은데, 참으로 진보적이지 않고 부끄러운 소리이다. 왜냐하면 그런 주장은 대중의 정치흐름에 관심도 없고 그것을 이해하려 들지도 않으면서 권력에 대한 욕망만 키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방의원의 활동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것인가? 여러 기준들이 있겠지만 진보적인 지방의원은 자신의 경쟁자들을 발굴하고 성장시키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즉 지역사회에서 자신의 역할과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원외 지방의원들’이 등장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진보적인 지방의원은 정보와 권력을 독점하는 역할이 아니라 시민들과 정보와 권력을 공유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래야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역사회가 변할 수 있고 정치의 역할이 바뀔 수 있으며 진보정당의 기반이 넓어질 수 있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리더십에 관한 얘기들은 이미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의 ‘동원욕구’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바로 이 점에 우리 사회의 슬픈 딜레마가 있다. 진보적인 지방의원이라면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헌신해야 한다.

 

회의장에 도착하니 아이들은 이동놀이차에서 장난감을 꺼내어 흥겹게 뛰어놓고 있고, 어른들은 토론장 여기저기에 모여 앉아 구청이 제안한 내년 예산집행계획과 올 해 예산집행과정을 검토하고 있다. 아이들은 갑갑한 집에서 벗어나 친구들과 마음껏 뛰어 놀아서 좋고, 어른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을 자기 뜻대로 만들어갈 수 있어 좋아한다. 그래서 참여예산제 회의가 열리는 날엔 언제나 축제가 열리는 것처럼 마을 전체가 들썩거린다.


회의장은 아이들이 노는 소리와 어른들의 토론하는 소리로 가득 차고, 때로는 서로 대립하는 주민들의 야유나 함성소리가 충돌하기도 한다. 그러나 쉽게 회의장을 떠나는 사람들은 없다. 참여예산제 회의장은 예산에 관한 실질적인 결정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누구도 스스로 판을 뒤엎는 불이익을 감당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마을에 참여예산제가 도입된 지도 4년, 이제는 제도가 제법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더 이상 연말이면 한 해 예산을 소모하기 위해 거리 곳곳의 보도블록을 파헤치는 일이 없어졌다. 무리한 대규모 사업계획을 잡아서 시민들의 세금을 낭비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학교, 도서관, 공원 등을 가꾸기 위한 예산이 훨씬 늘어났고,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곳에 필요한 시설들이 조금씩 들어서고 있다.


취지는 좋지만 예산이 없어서 사업을 할 수 없다며 발뺌하는 공무원들도 줄어들고 있다. 공무원들은 주민들을 ‘지역의 주인’으로 대접하며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주민들 역시 지속적인 학습과정을 밟으며 공무원과 동등한 위치에서 말하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갈등도 많았다. 자기 동네에 필요한 것만을 고집하고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무시하는 일도 잦았다. 하지만 그런 갈등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장하려면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점을, 그리고 때론 자신의 이익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을 자연스레 깨닫게 되었다. 주민들은 ‘나’의 욕구, ‘타자’의 욕구, 나를 타자로 바라보는 ‘우리’의 욕구가 모여 마을의 욕구를 형성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사람들은 ‘말로만 이웃사촌’에서 벗어나 자기 동네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알게 되었으며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말뿐 아니라 각자 서로의 동네를 직접 방문하고 교류하면서 지역 전체에 대한 이해도 또한 높아졌다. 그러다보니 참여예산제가 실시된 이후 자연스레 마을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낯설고 차가운 도시에서 정감 어리고 따뜻한 마을이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를 대신해줄 누군가를 기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면 스스로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함께 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과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방자치의 진정한 의미가 참여예산제를 통해 실현되고 있다.


오늘의 논의안건은 시민노동의 창출과 사회적 기업의 설립에 관한 것이다. 지역 내 청년실업의 해소를 위해 구청이 예산을 지원하고 지역 내 복지서비스를 담당할 기업은 지난 몇 달 동안 마을의 중요한 화두가 되어 왔다. 지역 내 여러 단체와 구청의 사회협약으로 세워질 시민기업은 지역 내 고용수요 창출과 그것을 통해 지역예산을 확충하는 선순환을 가져올 획기적인 방안으로 얘기되고 있다. 오늘 내려질 결정은 우리 구를 발전시킬 새로운 모델이 될 것이다. 그 일에 참여하는 내가 자랑스럽다.


당신이 이 글을 읽는 지금도 리비아에서는 총성이 끊이지 않고 있다. 오랫동안 리비아를 지배해온 카다피 국가원수에 반대하는 저항세력이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총격과 폭격으로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군대와 용병이 위협하고 시민들의 저항은 몇 달 째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가 뭐 길래 이렇게 질기게 싸울까?


그런데 리비아만의 일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시민들의 저항에 불이 붙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재스민 혁명’이라는 말도 2010년 12월 튀니지의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며 대통령을 몰아낸 사건을 가리키는 말이다. 군대가 출동한 상황에서도 튀니지 시민들은 바리케이트를 치며 저항했고 결국 대통령을 몰아냈다. 그 이후 알제리와 이집트 등으로 저항의 불꽃이 계속 번지고 있다. 왜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저항할까?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중동과 아프리카의 시민들을 보며 민주적인 나라의 시민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당장 내 눈앞의 일은 아니니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팔짱 끼고 관망할 수 있다. 그리고 독재국가의 시민들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뒤늦게 깨달은 것이라며 흐뭇하게 바라볼 수도 있다. 조금 더 적극적인 사람이라면 그곳의 사람들을 도울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일까?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떤가? 국민의 절반 이상이 반대해도 4대강사업은 엄청난 예산을 쓰면서 ‘강 살리기’를 내세워 강을 파괴하고 있고, 반면에 시민 대다수가 찬성하는 무상급식사업은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열심히 일해서 재산을 모아야 한다는 게 상식인데도, 열심히 일해도 수도권에 집 한칸 장만하기 어려운 상황인데도, 재벌가의 아이들은 황금수저를 물고 세상에 태어난다(GS그룹 전무의 10살짜리 아들의 보유주식 평가액이 무려 680억원이다). 이만하면 굉장히 억울한 상황인데도 우리는 왜 문제를 제기하거나 저항하지 않는가?


지금은 차갑게 식어버린 듯하지만 한국은 전 세계적으로 ‘뜨거운 나라’였다. 불과 20년 전인 1991년 5월에 한국사회는 ‘분신정국’이라 불렸다. 4월에 명지대 대학생 강경대가 학교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뒤쫓아온 전경의 쇠파이프에 맞아 목숨을 잃으면서 대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었다. 사과나 사죄는커녕 오리발을 내미는 정권의 부조리함과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대학생들은 스스로 자기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수십 만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31년 전인 1980년 5월, 광주는 피로 물들었다. 한 도시가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서 민간인들이 학살되었고 공수부대가 시민들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하지만 총을 들고 싸우는 시민들이 있었기에 권력을 가진 자들은 더 이상 쉽게 군대를 동원할 수 없었고, 87년 6월 민주화 항쟁도 성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민주주의도 재스민 혁명과 다르지 않았다. 튀니지, 알제리, 이집트, 리비아의 시민들은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저항했을까?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듯이 사람들은 먹고 살기 어려울 때 민주주의를 원한다. 고대 아테네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이 등장했을 때도 그건 한가한 사람들의 낭만적인 토론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고 권력을 독점하려 했을 때 그들을 통제하려는 방법으로 민주주의가 등장했고 민주정이 수립된 뒤에는 부를 평등하게 분배하는 경제개혁조치가 뒤따랐다. 민주주의는 추상적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시민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고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한국에서도 민주주의는 배부른 담론이 아니었다. 하루에 15시간을 일하고도 끼니조차 제대로 이을 수 없었던 노동자, 저곡가 정책에 신음하던 농민, 온갖 세금에 시달리던 시민, 비참한 현실을 보고도 말을 꺼내지 못했던 대학생들이 제 몫을 요구한 것이 민주주의의 출발점이었다. 저항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니 재스민 혁명을 보며 우리가 생각할 바는 지금 우리의 삶이다. 튀니지, 알제리, 이집트, 리비아의 시민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 민주주의는 더 이상 강 건너 불구경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도 이제 민주적인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한 시민으로 살기 위해, 정당한 대접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배부르게 먹을 수만 있다’면 누가 권력을 잡든 무슨 상관이랴, 생각할 수도 있다. 허나 권력자들이 우리에게 시혜처럼 베푸는 정책들은 그들이 개인적으로 모은 재산을 나눠주는 과정이 아니다. 우리가 짬짬이 내는 세금들이 그들의 ‘껌값’으로 사용된다.


대학생들도 이미 일상생활 속에서 많은 세금을 내고 있다. 식당이나 커피전문점에서 밥이나 커피를 사먹을 때도, 편의점에서 물건을 살 때도,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도, 담배를 피울 때도, 술을 마실 때도, 생활 속에서 세금을 낸다. 수업시간에 대학생들이 하루에 내는 세금을 계산해보니 만원이 넘을 때도 있었다. 그 돈들이 모여 우리 정부의 예산이 된다. 그러니 정부가 무엇을 해주기만 바라는 건 자기 밥그릇도 제대로 못 찾아먹는 어리석은 짓이다. 청년실업대책, 등록금 인상대책도 애타게 청원할 게 아니라 당당하게 요구할 문제이다. 내가 내는 세금 나를 위해 쓰라고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세계화된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더 이상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먹고 쓰는 것들은 한국에서만 생산되지 않고, 자연히 빈부의 격차나 권력의 독점도 한국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시민이라는 추상적인 얘기를 꺼낼 필요도 없이 우리는 이미 그런 삶을 살고 있다. 내가 먹고 쓰고 이용하는 것들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생산되고 결정되도록 요구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모두의 삶이 행복해질 수 있다.


일본의 방사능 유출, 중국에서 불어오는 중금속 황사만 보더라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려면 우리의 시야가 더 넓어져야 한다. 그들의 삶이 곧 우리의 삶이다.
잘 먹고 잘 사는 법은 치열하는 경쟁하며 혼자 살아남는 일이 아니다.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민주주의에는 원조가 없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디를 보면서 한걸음씩 나가야 할까? 민주주의하면 보통 우리는 세련되고 화려한 서구식 민주주의를 떠올린다. 허나 민주주의에 ‘원조’와 ‘선진국’이 있을까? 미국이 전 세계 민주주의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군대를 파견하고 소란을 떨고 있지만 그 속내는 다르다. 지금 미국 위스콘신주에서는 시위대가 주청사를 점거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노조의 단체협상권을 빼앗으려는 주정부에 맞서 수 천명이 시위를 벌이며 “법안을 죽여라(kill the bill)”고 외치고 있다. 법을 죽여라고 외치다니, 세상에 이렇게 과격한 시민들이 있다니, 이게 미국의 실상이다.


사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잘못 배워왔다. 그동안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책에서나 배우는 것이지 일상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
모범시민이라면 라디오나 텔레비전, 케이블TV로 중개되는 정치를 듣거나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직접 행동하는 건 금지되었다. 누구든 정치인을 비판하고 그 문제를 지적할 수는 있지만 그 장은 반드시 거리가 아니어야 했다. 왜냐하면 거리는 어떤 매개(미디어)를 거치지 않고 시민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흥분하고 연대할 수 있는 ‘위험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거리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배워왔다.


그런 점에서 2008년 종로와 시청 앞 거리를 달궜던 시민들의 외침은 그런 모범시민의 틀이 깨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젊은 것들이 공부는 안 하고”, “니들이 뭘 알어”라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모범시민들은 여전하지만, 가상이 아닌 현실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불붙었다 수그러들고 다시 불붙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지만 그런 꿈틀거림이야말로 우리의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힘이다.


꿈틀거리며 자기 목소리를 내고 주권을 되찾으려는 시민들에게 권력은 대안을 가져오라고 요구한다. 사회적인 대안을 만들라고 위임한 권력인데, 주인이 자기 몫을 찾고 대안을 요구하려는데 머슴이 주인들에게 대든다. 그렇다면 대안을 찾을 때까지, 잘 만들어진 민주주의의 모델이 등장할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할까?


『모비딕』의 작가로 알려진 허만 멜빌은 『필경사 바틀비』라는 요상한 소설을 썼다. 책에서 바틀비의 대사는 주로 “나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이다. 우리 삶의 대안을 마련하라고 권력과 힘, 등록금을 줬는데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얘기하면서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바라고 얘기하는 부조리함에 바틀비는 부조리함으로 맞선다. 바틀비는 ‘나’라는 주어로 시작하는 ‘거부’로 내게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바틀비는 공손하지만 단호하게 ‘절대적 불복종’을 선언한다. 대안을 제시하진 못하더라도 내겐 부당한 삶을 살지 않을 권리가 있다.


실제로 미국의 교육학자 존 테일러 게토는 대학에서 시험을 거부하자는 운동을 조직하고 있다. 대학생은 비싼 등록금을 내고 학교에 들어왔고 그만큼 원하는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러니 시험을 치고 평가를 받을 게 아니라 대학생이 대학교육을 평가해야 한다. 시험답안지에 “나는 이 시험을 보지 않겠습니다”라고 적으며 학생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고 존 테일러 게토는 주장한다. 대학본부는 교육의 특수성과 학문적 권위를 떠들겠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고객이 왕이라는 게 상식이다.


윤리적이고 당위적인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당연한 사실을, 상식을 얘기하는 것이다. 저항을 위한 저항을 벌이자는 얘기가 아니라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당당히 나의 권리를 요구하고 서로 손을 잡아야 한다는 얘기이다.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나의 입장을 당당히 밝히며 버텨라. 버티다 보면 새로운 길이 열리기도 한다. 언제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라는 말이 있듯이, 내가 참여할 수 없다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야권은 단일화를 통해 ‘공동지방정부’라는 최초의 실험을 시작했다. 그 전에도 선거단일화 전략이 활용되곤 했지만 공동의 정책을 마련하고 지방정부의 행정권을 공유하는 실험은 없었다는 점에서 공동지방정부는 최초의 실험이라 평가될 수 있다. 단일후보전략으로 선거에서 승리한 곳은 광역자치단체 3곳(경상남도, 강원도, 인천광역시), 자치시와 자치구를 포함한 기초자치단체 26곳이나 된다. 적지 않은 곳에서 공동지방정부 실험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2010년 11월 17일에 민주노동당 지방자치위원회가 주관한 ‘진보적 지방자치와 공동지방정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정책토론회 자료집을 보면 그 실험이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 틀리다고, 당선된 단체장들은 다른 정당이나 시민사회단체와의 공동정부 구성이나 정책연대에 소극적이었다. 중앙 차원의 합의가 실패하고 지역 차원에서 합의가 이루어지다보니, 당선이 되고 난 뒤에 ‘실질적인’ 공동지방정부를 추진할 내부/외부의 힘이 모아지지 않았고 당의 입장도 분명하지 않았다. 모범적인 사례로 꼽혔던 고양시에서조차 공동지방정부 구성이 처음부터 삐그덕거렸다.


물론 새로운 실험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곳들도 제법 있다. 광역자치단체 차원에서는 경상남도에 민주도정협의회가 2010년 11월에 출범했고, 기초자치단체 차원에서도 공동구정(시정)운영위원회, 정책협의회, 거버넌스위원회, 발전협의회 등이 꾸려졌다. 하지만 이런 협력/거버넌스 기구들의 위상은 대부분 ‘공동결정’이나 ‘심의’가 아니라 ‘자문’에 그치고 법적인 위상도 임의기구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런 문제들 때문에 최초의 실험이 실패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고, 선거 후 고작 1년이 지났을 뿐이라 그 성과를 평가하기도 어렵다. 그렇지만 지난 1년간의 과정을 돌아보며 공동지방정부가 공동정부로서 제 몫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런 문제점들을 바로잡을 대안은 무엇인지를 분석하려는 노력은 필요할 뿐 아니라 매우 중요하다.


공동지방정부가 제대로 추진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그 목적이 ‘선거의 승리만’을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거에서 승리하면 목적이 달성되어 앞으로 협력할 필요성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 물론 선거가 아니라면 여러 정당들이 협력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선거승리까지가 아니라 선거 이후 그 다음 선거 때까지 어떤 정책과 계획에 따라 서로 협력할 것인지를 큰 틀에서 합의해야 한다. 이런 합의를 이루려면 각 정당이 지역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선거 전에 미리 마련하고 서로 협상을 벌여야 한다.


그리고 중앙당이 이런 선거연합에 대해 명확한 원칙을 세워야 한다. 지금은 선거 전에는 얼버무리다 당선되고 나면 당론이나 당의 이해관계를 앞세우지만 실제로는 정당이 단체장이나 지방의회를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판단 하에 각 정당은 공동정부에 관한 합의를 이룰 만큼 능력이 있는지 내부를 먼저 점검해야 한다. 목적과 그 목적을 실현할 과정이 바뀌지 않으면 어떤 명분과 실리를 내세우더라도 공동지방정부는 식물인간이 되기 쉽다.


현재로서는 이런 과정을 지원할 국가 차원의 기구도 없고 정당 내부에서 이런 실험들을 지원할 정책단위도 없다. 몇몇 민간단체들이 싱크탱크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정당 자체가 변해야 한다.


더욱더 중요한 물음은 지난 1년 동안 주민들이 어떤 변화를 ‘체감’했는가이다. 윗선에서 열띤 토론을 벌이며 수많은 새로운 계획들을 제시하더라도 주민들이 그 변화를 느끼며 지역사회의 지배구조를 바꾸려 참여하지 않는 이상 모든 건 모래성일 뿐이다.


2012년 총선과 대통령선거를 앞두곤 여러 가지 논의가 한창이다. 논의가 활발한 것은 좋지만 이런 논의들이 이전의 사례들을 얼마나 분석하고 대안을 마련했는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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