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대학교 교지의 청탁을 받아 쓴 원고이다.
사회 각 영역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정치생활백서들을 계속 만들면 뭐가 좀 나아질래나?ㅎㅎ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는 학교를 빼고 사회를 바꾸겠다고 외치는 점에서 근본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왜 현장활동을 학교에서 하면 안 되나? 학교에 바꿀 게 얼마나 많은데.
자기 일상부터 하나하나 바꿔봐야 바꾸는 재미를 알지...
단체 활동가들은 무슨 생각으로 학교의 구색을 맞춰주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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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정치생활백서


대학생은 시민인가? 참정권을 가진 나이이니 스스로를 시민이라 부를 수 있지만 정말 대학생이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임을 누리고 있나? 시민이라는 존재가 단순히 도시에 사는 사람을 뜻하지 않듯이, 시민권이라는 것도 단지 시민이 누릴 수 있는 권리목록이 아니다. 납세와 국방 등의 의무와 책임이 국민에게 요구된다면, 시민권은 시민으로서 개인이 국가나 기업에 ‘요구할 권리’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권은 소리 높여 당당히 요구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


알아야 요구를 할 텐데, 대학생 중에 자신의 기본권이나 시민권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미 1948년에 세계인권선언은 모든 사람이 “근로의 권리, 자유로운 직업 선택권, 공정하고 유리한 근로조건에 관한 권리 및 실업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근로시간의 합리적 제한과 정기적인 유급휴일을 포함한 휴식과 여가에 관한 권리”, “교육을 받을 권리”, “공동체의 문화생활에 자유롭게 참여하고, 예술을 감상하며, 과학의 진보와 그 혜택을 향유할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헌법도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 “근로의 권리”,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할 권리를 가진다고 말한다.


이처럼 세계와 한국 모두 노동과 교육, 문화에 대한 권리를 보편적으로 인정한다. 이게 뭐가 중요하냐고? 시민에게 노동의 권리가 있다는 건 노동할 수 있는 조건을 정부가 마련해야 하고, 그것도 공정하고 좋은 노동조건을 마련해야 하며, 그도 안 되면 시민이 실업수당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교육의 권리를 가진다는 건 반값등록금이 아니라 돈이 없어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사회가 고민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좋은 환경에서 생활하며 문화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건 돈 있는 사람들만 웰빙의 문화를 즐기는 게 아니라 모두가 똑같이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옳다는 것이다. 이런 좋은 권리들이 있는데도 지금껏 우리는 그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왔다. 왜냐하면 이런 것을 권리로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설령 권리를 안다고 하더라도 투표권 외에는 권리를 행사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 써먹지를 못한다. 학교의 구성원 또는 가족이라 불리는데도 교칙이나 예산을 정하는 과정에는 대학생이 참여하지 못한다. 대학 등록금이 근거 없이 팍팍 올라도, 기숙사 비용과 하숙비가 계속 올라도, 학생식당과 매점의 가격이 올라도, 그건 물가가 올라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설득당해 왔다. 반면에 대학이 등록금을 받아서 건물을 올리고 주식투자로 돈을 날려 먹어도, 건물을 기부받기로 약속받고 기업들에게 기숙사 운영권이나 학내 공간을 팔아도 그건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도록 세뇌당해 왔다.


그래서 생활로 체감되지 않는 정치는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정치행동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정치는 함께 모여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하는 과정이다.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그것을 요구하는 것, 정치는 거기서 시작된다.


그리고 정치는 꾸준한 연습과정이다. 저기 멀리 있는 청와대나 국회를 바라보며 정치를 고민하지 말고 총장실이나 대학본부, 행정실, 교수연구실을 보며 정치를 고민해야 연습을 할 수 있다. 한국의 행정이나 예산체계, 업무처리방식, 교직원들이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는 정부체계나 공무원들의 태도와 거의 비슷하기에, 학교에서 충분히 연습하면 사회에 나가서도 잘 적응할 수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학교에서 쥐 죽은 듯 지내면 사회에 나가도 순응하며 살게 된다.


한 가지 명심할 점은 정치를 연습할 때 너무 정도(正道)를 걸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강자와 싸우는 약자의 무기는 정도가 아니라 변칙이다. 예측하지 못한 수를 둬야 상대방이 당황하며 허점을 보이고, 이 틈을 치고 들어가야 이길 수 있다. 때로는 끈질기게, 때로는 야비하게 상대를 코너로 몰아붙여야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괜히 센 척하면서 정면승부를 시도하다가는 큰 코 다치기 쉽다.



대학에서 정치하기


가장 뜨거운 감자부터 다뤄보자. 반값 등록금이 화두인데, 이번 선거결과가 어떻든 그것이 실현될 조짐은 별로 없다. 어쨌거나 등록금을 조금이라도 낮추려면 대학의 재정이 어렵다는 학교의 징징거림을 한칼에 끊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자료가 필요하다. 정보를 가지면 구체적인 요구를 할 수 있다.


2011년 9월에 개정된 ‘고등교육법’은 학생위원이 등록금심의위원회의 3/10 이상을 차지해야 하고 회의록을 학교 홈페이지에 공개해야 하며 위원회가 학교측에 자료를 요청할 권리가 있다고 규정한다. 즉 대학생위원이 등록금의 산출근거나 대학의 회계운영현황 등을 학교 측에 요구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기본적인 자료나 다른 학교의 자료, 기본적인 통계가 궁금하면 한국대학교육연구소(
http://www.khei.re.kr/)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자료를 모으면 학교의 논리를 구체적으로 반박할 수 있다.


물론 학교 측이 순순히 이런 자료를 주지 않을 수 있고, 그럴 경우에 법적으로 처벌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 그럴 경우 국․공립대학만이 아니라 사립대학도 공공기관이라 정보공개청구의 대상이라는 점을 활용해야 한다. 실제로 2011년 11월 중앙행정심판위원회는 교육과학기술부 산하의 한국사학진흥재단이 보유하고 있는 사학재단의 결산서를 공개하라고 결정했다. 이런 사례가 있으니 학교가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면 직접 청구할 수 있다. 정보공개센터(
http://www.opengirok.or.kr/)를 통하면 정보공개청구에 관한 노하우를 배울 수 있다.


이렇게 해도 대학의 입장이 바뀌지 본격적인 정치가 필요하다. 국민권익위원회가 운영하는 국민신문고(
www.epeople.go.kr)에 가면 민원을 넣을 수 있다. 내용과 상관없이 민원을 넣으면 위원회가 관련부서를 알아서 찾아 통보하고 처리결과를 알려주니 효과적이다. 다만 요구사항을 분명히 해야 구체적인 답변을 들을 수 있다. 아니면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상담포털(http://consult.humanrights.go.kr/)에 진정이나 민원을 접수하면 된다. 1학년 휴학을 교칙으로 금지한다거나 상대평가제도를 강화하고 수강신청을 제한하는 것 등 생각해보면 제기할 내용이 많다.


그래도 안 되면 이번 총선을 통해 국회의원이 된 청년대표들에게 자료를 받아달라고 부탁하면 된다. 국회의원이 교육과학기술부를 통해 자료를 요청하면 대학들은 반드시 관련 자료를 제출해야 한다. 그리고 국회 홈페이지(
http://www.assembly.go.kr/)에 가면 지금 국회가 다루는 법률이나 국회의원들에 대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다. ‘정보광장’코너에서 회의관련정보와 법률관련정보 등을 검색할 수 있고, ‘의원광장’코너에서는 국회의원 현황과 국회의원들을 검색해서 볼 수 있고 그들의 홈페이지에도 찾아갈 수 있다.


이렇게 정보를 모으면 학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알 수 있다. 한국의 사학재단들은 창설자나 그 가족들의 족벌체제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아 민주적인 의사결정이 안 된다. 그리고 총장을 선거로 뽑고 논의기구를 만들어도 형식적인 경우가 많다. 특히 대학특성화나 글로벌화, 전문인력 양성 등을 내세워 대학본부가 기획을 주도하면서 대학 내의 의사결정구조가 더욱더 비민주적으로 변하고 있다. 학생과 교직원의 참여를 배제하고 재단이나 대학본부가 일방적으로 학교비전이나 발전계획을 주도한다. 대학의 비민주적인 운영과 적립금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등록금을 낮추라는 압력이 강해지면 대학들은 발전기금 모금과 재정 확충을 내세워 산학협력 강화, 재정수입의 다양화, 수익사업의 추진 등을 더 강화시킬 것이다. 이런 방향은 대학연구의 사유화와 독점, 시장논리에 맞춰진 교과개편이나 학사운영, 학내노동의 외주화와 캠퍼스의 상업화 등을 불러올 것이다. 따라서 대학이 학문을 연구하는 기능을 상실하고 기업의 연구소로 변하거나 그 자체가 하나의 기업으로 변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이런 사태를 미리미리 대비해야 한다.


물론 열심히 노력해도 자료를 거의 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실망은 하지 말자. 이런 시도를 하는 것만으로도 학교는 긴장한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학교가 꼼수를 부리기 어렵다. 학교가 상대평가방식을 선호하는 것은 그것이 학생을 통제하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대학들은 많은 돈을 홍보비로 쓰고 있기 때문에 언론이나 외부에 학교 일이 퍼지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 그리고 신문이나 TV같은 언론사에 제보하거나 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소셜네트워크를 활용해 압박을 가하면 학교 측의 태도가 달라진다.


왜 귀찮게 이런 일을 해야 할까 생각한다면, 지금 현실을 보자. 2011년을 기준으로 사립대학의 수입에서 등록금이 차지하는 비율은 63.6%인데, 재단이 학교에 전입하는 돈의 비율은 3.3%에 불과하다. 심지어 39개 대학은 한 푼의 전입금도 내지 않았다. 그러면서 2009년 1년 동안 전국 사립대가 땅이나 건물을 사고 공사를 하는 데 쓴 돈이 무려 1조 2,668억 원인데, 사립대 법인이 낸 돈은 1,366억원(10.8%)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땅을 사고 건물을 올렸다는 얘기이다. 2010년에는 30개의 사립대학이 주식과 파생상품에 적립금을 투자했다가 약 150억 원의 손해를 보기도 했다.


그리고 사학재단들의 적립금은 이미 10조원을 넘어 섰는데,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가 원금을 상환하지 못한 학생들의 수는 2010년에는 2만 5천 366명으로, 2006년 670명에 비해 5년 사이에 약 38배나 증가했다. 학부모와 학생들이 비싼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허리가 휘었던 지난 10년 동안 대학적립금은 2배 이상 증가했다.


그리고 등록금을 낮추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내가 낸 등록금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그리고 등록금을 내는 사람으로서 나의 권리를 제대로 누리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학교의 공간을 이용하고 도서관에 책을 신청하고 실험실습비를 쓰는 그 모든 과정에 학생의 권리가 있다. 그리고 빼곡한 강의실에 흥미도 없는 주제의 강의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강의를 개설하도록 요구하는 것도 학생의 권리이다. 교육내용은 교수의 몫이지만 교육과정은 공동의 몫이니까, 그리고 재단이 아니라 우리가 교수들의 월급을 주니까.


그리고 대학 공간이 외부 기업에게 팔리면 팔릴수록 그만큼 생활비가 많이 든다. 반면에 대학생활협동조합이 있으면 낮은 가격에 질 좋은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그러니 대학생협을 만들도록 학교에 요구하거나 대학생들이 직접 만드는 것도 생활비를 줄이는 방법이다.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되어 출자금 규모에 상관없이 5인 이상이 모여 신고하면 협동조합을 만들 수 있고 여러 가지 지원도 받을 수 있다.


혼자서 학교의 문제를 지적하기 어려우면 학내의 비정규직, 일용직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백짓장도 맞들면 났다고 청소노동자나 주차관리원, 시간강사 등과 연대하여 학내를 점거하고 그곳에서 새로운 사건을 만드는 것도 좋다. 실제로 성공회대의 노숙모임인 ‘꿈꾸는 슬리퍼’는 2009년부터 학교 내에 텐트를 치고 살고 있다.


학교에서만 정치가 필요한 건 아니다. 많은 대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자신의 권리를 잘 모른다. 근
로기준법 제 55조에 따르면, 사용자는 1주일 동안 정해진 근로일수를 개근한 노동자에게 1주일에 평균 1회 이상의 유급휴일을 주어야 한다. 이때 사용자는 통상적인 근로일의 하루치 시급을 주급과 별도로 셈해서 노동자에게 지급해야 하는데, 이를 ‘주휴수당’이라 한다. 그리고 제 56조에 따르면, 밤 10시부터 오전 6시 사이의 노동에 대해서는 야간근로수당을 통상임금의 1/2 이상 수준으로 지급해야 한다.


보통 아르바이트를 할 때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기 때문에 대학생들은 이런 사실들을 잘 모른다. 지난 2011년 10월 <청년유니온>이 커피빈코리아를 상대로 주휴수당 지불을 요구해서 약3천 명의 아르바이트생이 5억원 규모의 미지급 수당을 받았다. 이렇게 싸우면 공정한 몫을 챙길 수 있다. 필요하다면 청년유니온(
http://cafe.daum.net/alabor)의 도움을 구하도록. 공정한 대우를 받으며 아르바이트를 해야 나중에 공정한 대우를 받으며 취직할 수 있다.



동네에서 정치하기


대학생들은 동네의 이방인이다. 집에서는 잠만 자고 학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지라 자신이 사는 동네를 잘 모른다. 그런데 동네를 잘 보면 새로운 길이 보인다.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되면서 중앙정부만이 아니라 지방정부도 일상적인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동네 일에 관심을 가지면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다.


지방자치단체, 즉 시청이나 구청 홈페이지에 가면 여러 가지 공지사항이 뜬다. 거기에 보면 지방정부가 형편이 어려운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하고, 지역주민들에게 무료로 공연을 하기도 한다. 제 때에 신청만 잘하면 여러 가지 혜택을 누릴 수도 있다. 그리고 예전에 등록금넷과 민주노동당 등의 단체들이 ‘대학생학자금이자지원조례’를 제정하는 운동을 벌였듯이 대학생을 지원할 조례나 정책을 요구할 수 있다.


그리고 2010년 1월 연세대학교 총학생회는 학생들이 적은 돈으로 좋은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서대문구의 다른 대학들과 연계해 지방자치단체가 신촌에 20대를 위한 임대주택을 짓도록 요구하겠다고 밝혔다. 이 요구가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지방자치단체가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도록 만드는 건 좋은 일이다.


동네에 관심을 가지면 동네의 공공시설, 도서관이나 복지관을 이용할 수도 있고 그곳에서 진행되는 싼 가격의 프로그램들을 이용할 수도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관심을 가져야 공공시설들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 대학생들이 동네 일에 무관심하고 이런 시설들도 잘 모르기 때문에 공무원들은 청년들에게 불친절하다. 만일 공무원들이 딱딱하게 굴면, 구청이나 시청 홈페이지에 가서 구청장이나 시장과의 대화 비슷한 게시판에 글을 남겨라. 장담하건대, 그 게시판에 글을 남기면 공무원들의 태도가 180도 달라진다.


동네를 돌아보면 뉴스에는 나오지 않는 작은 단체들이 제법 많다. 단체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자원활동을 하면 많은 동네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렇게 관계를 맺고 지내다보면 동네에서 떡도 나오고 밥도 나온다.


제대로 동네의 주인이 되려면, 그리고 동네의 이런저런 일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게 적성에 맞으면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고민할 수도 있다. 선거법에 따르면, 만 25세 이상의 시민이면 국회의원선거나 지방선거에 후보로 출마할 수 있다. 공탁금을 내야 하니 국회의원은 좀 부담스럽고 200만원을 내는 기초의원 선거는 해볼 만하다. 기초의원으로 당선되면 4년 동안 해고의 위협 없이 연봉을 받을 수 있고 의회 내에 사무실도 공짜로 사용할 수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운영하는 선거정보센터(
http://elecinfo.nec.go.kr/)에 가면 문헌자료만이 아니라 동영상자료, 사진자료, 선거공약, 홍보인쇄물자료 등을 볼 수 있으니 선거운동에 참고하길. 정치는 소위 정치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리고 정치인이 아니면 지역사회의 기업가가 될 수도 있다. 요즘은 지방자치단체들이 청년일자리나 지역고용창출 등을 정책으로 만들어 청년들을 지원하기도 하니 관심을 가지면 좋다. 버는 돈은 적을 지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일할 수 있으니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 만들기에 도전해 볼만 하다. 희망청(
http://hopenetwork.tistory.com/)이나 한국협동조합연구소(http://www.coops.or.kr/), 사회투자지원재단(http://www.ksif.kr/), 함께 일하는 재단(http://www.hamkke.or.kr/) 등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사회에서 정치하기


시민사회단체나 정당에 가입해 활동하는 것은 사회구조를 바꾸는 좋은 방법이다.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나 정당은 어버이화되어 상상력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에 청년들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20, 30대의 투표율이 높아지니 모든 정당들이 청년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며 난리법석이지만, 결국은 자기 입맛에 맞는 청년을 찾아 기존 구조에 끼워 맞추겠다는 발상이다. 경쟁에 지친 청년들에게 또 다시 오디션 방식을 요구하는 그 발상에 경악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선거 때 반짝하는 이벤트보다 당 내의 의제모임이나 꾸준한 활동을 펼치는 정당을 택하는 게 좋다. 가령, 2012년 3월에 창당된 녹색당은 다양한 의제모임과 청년모임을 꾸리고 있다. 그리고 대학 캠퍼스를 벗어나 농민, 노동자와 연대하며 미래의 자기 삶을 대비하도록 지원하는 정당을 택하는 것이 좋다.


시민사회단체나 정당활동을 권하는 것은 법을 만들 수 있고, 노동법이나 고등교육법의 개정을 제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20인 이상이면 법률안을 발의할 수 있으니 청년비례대표제도를 통해 국회의원이 된 각 당의 청년의원들이 이런 창구 역할을 하도록 요구할 수도 있다.


대학생들도 식당을 이용하고 커피를 마시고 담배와 술을 살 때 이미 많은 세금을 내고 있다. 내가 내는 세금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사용하도록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사회가 바뀔 수 있다.


사실 이제는 개인적인 성공보다 사회로 눈을 좀 돌려야 한다. 정치에 좀 관심을 가져야 미래를 고민할 수 있다. 피크 오일이라 석유저장고가 바닥을 이미 쳤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석유로 돌아가는 한국사회는 이런 위기를 미리 대처하지 않으면 심각한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더구나 2011년 3월 일본의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마지막 경보를 울리고 있다. 한국에 이미 21개의 핵발전소가 있고 6개를 짓고 있고 2030년까지 핵발전소가 총 41개까지 늘어날 것이라는 끔찍한 사실을 대학생들은 알라나 모르겠다. 현 세대가 에너지를 마음껏 쓰기 위해 핵폐기물이라는 저주의 물질을 후손들에게 떠넘기려 한다는 사실을.


어쨌거나 사회를 바꾸려면 우리가 의식화, 조직화되어야 한다. 공적인 참여는 당위가 아니라 나를 변화시켜 세상을 바꾸는 공적인 행복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정치를 즐기자!



참조하면 좋은 책


하승우․유해정, 『도시생활자를 위한 정치백서』(북하우스)

프란시스 무어 라페, 『살아있는 민주주의』(이후)

전진한 외, 『정보사냥』(도요새)


교육공동체 벗이 발간하는 '오늘의 교육'에 쓴 리뷰이다.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좋기도 하지만 걱정되기도 한다.
너무 말랑말랑해져서 무슨 차이가 있지? 이런 생각이 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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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의 부흥기/혼란기?



요즘 들어 협동조합에 관한 얘기를 여기저기서 듣게 된다.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되고 협동조합에 관한 책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으며 언론매체에서도 협동조합에 주목하는 프로그램이나 기사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협동조합의 부흥기라고 얘기하면 지나친 감이 없지 않지만, 그렇게 느낄 만큼 사회적인 관심이 높다. 이런 분위기에서 협동조합이 대안사회의 기반으로 소개되기도 하고, 지방자치단체들이 협동조합을 지역경제 발전모델로 고려하기도 한다.


왜 갑자기(?) 협동조합일까? 기념일 챙기길 좋아하는 한국인지라 유엔이 2012년을 ‘협동조합의 해’로 정했다는 사실이 흥미를 끌었을 것 같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이 현상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은 조금 더 실질적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국가경제는 재벌들의 손아귀에 포획되어 있고 수출 의존도가 높아 외부환경변화에 영향을 많이 받고 성장이 고용으로 이어지지 않으니 그에 대한 대안으로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듯하다.


협동조합의 중요성을 주장해온 사람으로서 이런 분위기가 반갑지 않을 수는 없지만 이런 관심이 협동조합‘운동’의 확대로 이어질지는 의문이다. 분명 경제조직으로서 ‘협동조합’의 존재는 독점재벌이나 일반 기업보다 훨씬 나은 조건을 노동자에게 제공한다. 허나 협동조합이 있다고 해서 그 사회가 좋은 삶을 보장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단순히 협동조합의 수가 늘어나고 그것이 차지하는 몫이 커진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협동의 그물망으로 엮이지는 않을 것 같다. 공산당이나 사회당, 녹색당이 대안정치세력으로 자리를 잡은 나라의 협동조합과 대안정치세력이 거의 없고 생협의 정치참여를 법으로 금지당한 한국의 협동조합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분권화된 국가의 협동조합과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의 협동조합은 매우 다른 경제적, 사회적 조건에서 활동해야 한다. 이런 조건들을 세심하게 검토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외국의 모델을 한국에 이식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협동조합에 대한 오해로 이어질 수도 있고, 최근에 출간된 협동조합 관련 서적에서 그런 징후를 느낄 수 있다.




몬드라곤, 협동조합의 신화일까, 위기일까?


협동조합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한 지역이 스페인의 몬드라곤이다. 1956년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서 시작된 몬드라곤의 생산자협동조합 사례는 협동조합의 ‘성공신화’로 알려져 있다. 최근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으로 『몬드라곤에서 배우자』(역사비평사, 2012년)가 거의 20년 만에 다시 번역되어 출간되었고, 그 책을 번역했던 김성오의 『몬드라곤의 기적』(역사비평사, 2012년)도 함께 출간되었다.


협동조합의 규모가 작을 것이라는 우리의 상식과 달리 몬드라곤 협동조합 복합체(연합조직)의 자산은 약 53조에 달한다. 금융, 제조업, 유통, 지식 등 4개 부문을 포괄하는 몬드라곤의 자산규모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재벌기업인 현대중공업(2011년 기준 약 54조)보다 조금 적은 수준이다. 그리고 몬드라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수도 무려 8만 4천명에 달한다. 고용인원으로만 따지면, 몬드라곤은 SK나 롯데보다도 훨씬 많은 수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회사를 소유하고 경영자를 선임하며 경영 전체를 관리․감독하는 체제”인 협동조합이 이런 규모라니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김성오는 몬드라곤이 현실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온 결과라고 이를 설명한다. 여러 차례의 위기와 유럽통합같은 커다란 조건의 변화를 겪었지만 몬드라곤은 생산자들의 복합체를 만들고 인력과 기술 자원을 전략적으로 배치하며 힘을 키워왔다. 그런 점에서 김성오는 “몬드라곤의 경험을 완성된 본보기나 지고지순의 사례로 받아들여서는 결코 안 된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변화할 수밖에 없는 ‘현재진행형의 사례’로 몬드라곤을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라고 얘기한다.


일단 변화하는 상황에 협동조합이 능동적으로 대처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협동조합은 섬으로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 바스크 지방이라는 특수성이 협동조합의 공동체성을 강화시켰지만 경제위기와 유럽통합이라는 변화된 상황은 협동조합에게도 지역 차원을 넘어선 고민을 요구했다. 김성오는 몬드라곤 복합체를 만든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한국에서는 협동조합간의 연대가 당위적으로 강조되지만 실제로 그런 사례를 찾기 어려운데, 몬드라곤에서는 그런 연대가 강력한 힘을 만들었다.


『몬드라곤에서 배우자』에서 드러나듯 몬드라곤의 성공 뒤에는 그런 연대를 가능케 한 정신적, 지적인 유대감이 존재했다. 몬드라곤의 신화를 만든 호세 마리아 신부가 있었기에 그런 변화도 가능했다. 이런 유대감 없이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협동조합이 하나의 틀로 묶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몬드라곤은 그런 정신적, 지적 유대감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한국의 협동조합에 던진다.


허나 다른 한편으로 몬드라곤의 성공이 몬드라곤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사실 몬드라곤은 더 이상 바스크 지방의 협동조합이 아니다. 몬드라곤에 소속된 노동자 중 러시아와 멕시코, 중국, 브라질, 인도,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고용된 인원이 2010년을 기준으로 볼 때 약 1만 6천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몬드라곤에 협동조합만 속해 있는 것도 아니다. 몬드라곤은 1990년대부터 합작회사를 설립하고, 주식회사 형태의 자회사들을 만들어왔다. “특히 유통 부문의 자회사들은 상당수가 비협동조합 기업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 결과 몬드라곤에 소속된 260여 개 회사 가운데 대략 절반만 협동조합 기업으로 존재하고 있다.”


몬드라곤의 글로벌화와 조직형태의 변화는 협동조합의 정체성에 관한 논란을 피해갈 수 없다. 전체 고용규모는 늘어났지만 “이는 주로 해외 노동자들이 증가한 결과”이고 “국내시장에 더 신경을 써왔던 다른 두 부문은 직원 비용이 감소했다.” 에로스키를 비롯한 유통부문이 인수․합병을 통해 공격적으로 사업체를 늘려서 “몬드라곤에서 최근 10년간 창출된 신규 고용의 70%가 바로 유통부문에서 이루어졌”지만 정작 금융과 유통 부문에서 조합원 노동자 비중은 전체 고용의 약 20%에 지나지 않는다. 즉 규모는 커졌지만 조합원이 아닌 노동자들이 증가한 것은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의심케 한다. 앞으로 주식회사를 협동조합으로 전환하고 노동자 조합원의 비중을 늘려나간다고 하지만, 현재의 경제위기 상황을 고려할 때 제조업 중심의 몬드라곤이 그 구상을 얼마나 실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리고 이런 정체성의 변화는 협동조합의 의사결정구조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규모가 커지는 만큼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상시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총이사회와 상임위원회, 사무국의 권력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김성오도 그 점을 지적한다. “몬드라곤의 경영권력은 총이사회, 중앙사무국, 그리고 각 부문조직에 집중되어 있다. 이에 반비례하여 평조합원들의 직접민주주의적 성격의 참여는 약화되었다. 평조합원들과 경영조직 사이의 간극은 넓어지고 있으며, 몬드라곤의 글로벌화와 외연 확대 과정에서 권력집중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더구나 복합체가 개별 협동조합을 규제하는 방식도 강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단위 협동조합 총회에서 몬드라곤 가입을 결정한 경우에, 그 협동조합은 무조건 몬드라곤의 규칙과 규정을 수용해야 하고 또 부문조직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물론 복합체에 가입된 협동조합에게 탈퇴의 자유가 있다지만 그건 노동자에게 퇴사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협동조합의 7원칙 중에서 민주적 경영의 원칙이 흔들리면 다른 원칙들도 자연히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조합원들의 사유도 영향을 받는다. “노동자 조합원들은 몬드라곤의 소유자이고 또한 그 사실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지만, 직접적인 참여 행위는 수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참여의 수준은, 그들이 회사에 노동력을 공급한 대가로 선급금(월급)과 배당금을 받고(물론 자신의 자본구좌로) 또 회사가 얼마나 잘 운영되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 조합원들은 점점 사업 이익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몬드라곤을 설립한 호세 신부는 연말에 지불할 배당을 미리 매월 지불한다는 선급금 제도를 통해 임금제도를 변화시키려 했는데, 최근 글로벌화와 고용형태의 변화는 역으로 임금제도를 강화시키고 있다. 이런 변화를 협동조합의 관점에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삼성처럼 이건희 개인이 기업의 노동자보다 수천, 수만 배의 돈을 가져가는 경우는 협동조합에서 있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협동조합은 분명 긍정적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협동조합이 좋은 삶을 실현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좋은 삶은 일할 수 있느냐, 얼마나 받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는가?’라는 물음을 통해 실현되기 때문이다.


협동조합이 모든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협동조합이 경제적인 목적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목적을 가진 조직이라면 그 사회성을 실현할 방법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협동조합이 대안적인 사회의 기반이라고 말할 이유는 없다. 사회적인 목적은 협동조합의 부수적인 활동이 아니고, 협동조합의 사업 대상과 과정 자체가 그런 목적을 반영해야 한다.


사실 김성오나 몬드라곤을 소개하는 여러 언론매체들은 고용창출을 강조한다. 한국의 특수성을 고려한 접근처럼 보이는데, 그런 접근이 타당한지는 모르겠다. 단지 고용문제로만 접근한다면, 즉 단순히 일자리 창출로만 접근한다면 그것이 이명박 정부의 구호와 무엇이 다를까? 그리고 성장을 통한 고용창출에 초점을 맞추는 순간 몬드라곤의 글로벌화는 정당화될 수밖에 없다. 책에서도 몬드라곤의 해외 지사의 노동자들이 스페인과 비교할 때 매우 낮은 임금을 받고, 외국의 기업을 인수하면서 노동자들을 구조조정한 사례가 지적되는데, “보통의 다국적기업이 대주주들을 위해 하청 자회사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처럼 몬드라곤 역시 스페인 바스크 지역 노동자 조합원들을 위해 다른 지역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적극적인 글로벌화를 추진하고 있는 몬드라곤이 이러한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기는 힘들 것이다.” 김성오는 이를 어쩔 수 없는 전략적 선택이라고 보는 듯하지만, 이 사실은 협동조합의 사회적 목적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지금 진행되는 경향을 현실로 받아들인다면, 대안사회를 꿈꾸는 건 불가능하다.




협동조합은 시장경제의 당의정(糖衣錠)일까?


사실 이상을 품은 사람이야말로 현실주의자이고, 그런 현실주의자들 덕분에 인류 문명은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협동조합의 역사를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협동조합으로 기업하라』는 협동조합이 급조된 전략이 아니라 역사 속에 깊이 뿌리내린 삶의 형태임을 보여준다. 영국의 소비자협동조합, 프랑스의 노동협동조합, 독일의 신용협동조합, 덴마크의 농민협동조합, 이탈리아의 사회적협동조합의 형성과정과 현황을 설명한다. 그러면서 자본주의경제보다 더 깊은 차원에 “경제와 사회의 격차를 줄여 나가고 개인이나 집단이나 누구나 경제적 게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통합의 메커니즘을 활성화시키는” 시민시장(civil market)이 있음을 지적한다.


자마니 부부는 시종일관 협동조합이 낡은 모델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자본주의 기업보다 더 뛰어나다고 주장한다. “개인 서비스 같은 특정 경제 영역에서는 협동조합이 자본주의 기업보다 효율성에서 더 뛰어”나고 “소득 분배의 불평등을 축소하고 민주주의 공간을 확장하는데 기여하는 한편 사회적 자본, 즉 시민의 신뢰 네트워크를 강력하게 창출하는 역할을” 맡으며 “개발도상국 또는 국제투자가 미치지 못하는 분야나 지역에서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끄는데 적합한 기업형태로 대두됐다”는 것이다. 가히 협동조합에 대한 찬양이라 부를 만하다.


그렇다면 앞서 얘기한 몬드라곤의 현실을 자마니 부부는 어떻게 볼까? 책에서 몬드라곤 사례가 직접 언급하기도 하는데, “몬드라곤의 성공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에로스키 소매 체인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사업체들은 지역적으로 바스크 지방에 머물러 있다. 몬드라곤 그룹은 바스크 지역 생산의 8.3%, 고용의 14%를 차지한다. 관련 사업 다각화를 추진하거나 이웃 지역으로 진출할 만한 역량이 부족하다고 하겠다.” 몬드라곤의 글로벌화를 반영한 평가일까 의문이 들지만, 어쨌거나 자마디 부부도 몬드라곤의 변화를 지지하는 듯하다.


사실 자마니 부부의 관점에서 보면 몬드라곤의 확장과 글로벌화는 주목할 만한 전략이다. 자마니 부부는 “작은 규모라야 협동조합의 정체성이 가장 잘 지켜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큰 나라에서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있을 수 없고 그 이유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방식이 실천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진실은 그 반대이다. 협동조합이 크면 클수록 그 정체성이 강해지고, 다른 시장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사업의 확장이 심각한 협동조합의 정체성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협동조합이 성장하지 않고 그대로 멈춰서 있겠다고 한다면, 필히 현실적인 모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탈리아에서 “협동조합 대기업은 1971년에 전체 대기업의 2.3%에서 2001년 9%로 비중이 커졌다. 고용 인력에서도, 협동조합 대기업 비중은 1.2%에서 8.1%로 높아졌다. 말하자면 협동조합은 이탈리아 경제의 전반적 추세와는 거꾸로 움직였다. 자본주의 기업의 평균 규모가 축소되는데 반해 협동조합 기업들은 규모가 커졌던 것”이라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물론 자마니 부부가 협동조합의 무조건적인 확장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확장을 위해 협동조합은 “협동조합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그리고 협동조합의 특별한 정체성을 해치지 않은 채 어떻게 성장을 위한 자금을 조달할 것인가”라는 두 가지 물음에 답해야 한다.  특히 “경제적으로 취약해서, 스스로 충분한 자본을 조달하는 것 또한 불가능”한 노동자/생산자협동조합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성장을 위해 협동조합에 관한 고정관념에서 풀려나야 하지만 그럼에도 협동조합은 협동조합의 원리에 따라 운영되어야 하고 경영진은 민주적인 이해관계를 실현할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일반 영리기업과 다를 바가 없고 사회적 협동조합이라는 명목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을 근거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협동조합과 시장경제를 화해시키려는 자마니 부부의 노력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노동자가 생산을 통제하면서도 “시장경제를 활성화하는 평등과 자유의 원칙을 기업 자체에 적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마니 부부는 이를 이탈리아의 전통이라 얘기하는데 “정치경제학에 휘둘리지 않고 사회적 시장경제에도 휘둘리지 않은 전형적인 이탈리아학파에서는,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통상적인 시장경제 안에서 인간적인 사회와 우애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인다.


그런데 협동조합을 시장경제와 접목하려는 노력은 높이 사지만 그 방향이 올바른지는 의문이다. 경제는 국가나 사회와 따로 존재할 수 없다. 이 얇은 책의 내용만으로 “시민 인문주의에 뿌리를 둔 시민 경제의 지적 전통”을 이해할 수 없지만 노동분업과 성장을 위한 축적, 기업의 자유를 특징으로 삼는 시장경제가 공화주의나 인문주의 전통과 결합되기는 쉽지 않다. 특히 앞서 몬드라곤에서 봤듯이 대의원총회를 열고 조합원들의 참여를 보장한다 해도 협동조합 대기업의 의사결정구조는 조합원의 역할을 축소시킬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조합원의 경제적인 관심은 높아지는 반면 정치/사회적인 역량은 낮아질 수 있다. 이런 경향이 장기적으로 볼 때 협동조합에게 유리할까?


사실 경제조직으로서 협동조합은 현재의 자본주의 질서를 거스르기 어렵다. 하지만 사회조직으로서 협동조합은 자본주의 질서를 넘어야 한다. 자본주의 속에서 틈을 만들고 그 틈을 넓혀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허황된 꿈처럼 들릴 수도 있는 이 ‘소명’을 협동조합이 버린다면, ‘협동조합’운동은 가능할지라도 협동조합‘운동’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과거 맑스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이 협동조합에 가했던 비판이 옳았다고 손을 들어줘야 한다. 사회주의자들이 가했던 비판은 단순히 노동자들이 협동조합을 경영하며 부르주아로 변신하려 한다는 점이 아니었다. 협동조합의 성장이 협동조합의 경제성을 탈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 계급관계를 은폐시킬 것이라는 점, 그래서 협동조합이 혁명의 기반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자마니 부부의 협동조합 논의가 이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리고 자마니 부부의 주장에서는 이탈리아의 내부 문제, 안토니오 그람시가 지적했던 남부문제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람시는 남부의 농민지대가 북부의 산업지대에 종속되고 노동자가 농민과 분리되어 농민을 열등하게 바라보는 관점을 문제시했다. 그런데 책에 나온 이탈리아 협동조합의 지역별 고용 현황을 봐도, 남부의 협동조합 비율이 북부에 비해 낮고 남부에서는 주로 취약계층을 고용하는 사회적 협동조합이 발달되고 있다. 그동안 볼로냐나 이탈리아 협동조합을 찬양하는 글은 많이 봤지만 남부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를 분석하는 글은 거의 보지 못했다. 만일 남부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다면 이탈리아의 모델은 국가경제모델이지 지역경제모델이 될 수 없다.


협동조합에 관한 내용은 아니지만 이와 비슷한 시각으로 로버트 퍼트남은 『사회적 자본과 민주주의』(박영사, 2000년)를 얘기할 수 있다. 퍼트남은 이탈리아 사회를 분석하며 북부와 남부의 차이를 “상호유대의 결속관계와 종속과 착취의 수직적 결속관계 사이의 구분”이라고 표현했다. 남부의 정치적 후원관계가 그런 경제적 예속상태를 설명해준 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퍼트남은 “경제상태가 시민성을 설명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시민성이 경제 상태를 설명해줄 것”이라며 유명한 사회자본(social capital)이론을 주장했다. 설득력 있는 듯 들리지만 퍼트남의 시각은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진 시민들의 자발적인 결사체라는 특정한 시민사회를 우월하며 보면서 사회운동과 계급갈등의 중요성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자마니 부부의 주장도 비슷한 비판을 받을 수 있는데, 『협동조합으로 기업하라』에서는 1970년대 이후 이탈리아의 노동운동과 자율주의(아우토노미아)운동이 협동조합운동과 주고받은 영향이 드러나지 않는다.


실제로 자마니 부부의 이론도 퍼트남과 비슷한 편견을 재생산하고 있다. 그들은 “협동조합이 생겨나고 잘 뻗어 나가기 위해서는 강력한 연합의 동력과 시장에서 제 구실을 하는 것,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이것이 왜 협동조합 운동의 발상지가 유럽일 수밖에 없었는지를 말해준다. 유럽에서는(프랑스는 스코틀랜드와 이탈리아만큼은 아니지만) 15세기의 시민적 인문주의 이래로 또 계몽주의의 결정적 자극을 받으면서, 이 두 가지 요소가 자라날 비옥한 토양이 마련된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협동조합이라는 형식이 유럽의 것일지는 모르나 협동의 다양한 양식은 전 세계 민중들의 삶에서 공통되게 발견된다. 마리아 미즈와 베로니카 벤홀트-톰젠의 『자급관점(subsistence perspective)』(국내에서 곧 출간될 예정이다)을 보면 다양한 자급경제의 양식들이 발견된다. 그리고 이 자급경제의 다양한 양식들은 시장이 아닌 곳에서, 계몽주의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곳에서, 외려 그것을 거스르면서 뿌리를 내려 왔다.  ‘따라잡기 개발’과 ‘따라잡기 소비주의’가 아닌 자급의 관점을, 노동분업과 임금체계가 아닌 행복한 삶을 위한 문화와 노동의 재결합을 강조하면서 미즈와 톰젠은 비서구 사회, 비근대의 협동양식의 중요성을 드러낸다.


협동조합은 사회적인 조건에 영향을 받고 한국의 정치, 사회구조가 협동조합운동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협동조합을 지지하는 대안적인 정치세력이 없는 한국,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와 재벌 중심, 토건중심의 경제구조를 가진 한국, 무한경쟁구조에 갇힌 한국에서 협동조합은 어떻게 자신의 전략을 만들어야 할까?


협동의 의미를 지키려는 노력이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비현실적이기에 우리에게는 현실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몬드라곤의 기적』과 『협동조합으로 기업하라』는 이런저런 근거들을 제시하곤 있지만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근대적인 경제조직에서 찾고 있고 그런 경제적 관점을 재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왜 다양한 협동행위를 시장경제의 관점에서 판단해야 할까?



협동조합 논의에 대한 유감


『몬드라곤의 기적』을 읽으며 불편했던 점은 저자의 관점에 스며든 편견이다. 몬드라곤이 협동조합 방식을 해외의 기업에 적용하지 않는 이유로 “협동조합 설립에는 협동조합 문화에 익숙한 조합원들의 존재가 필수적인데, 협동조합 문화는 짧은 시간에 형성되지 않는다”는 식의 언급을 여러 번 볼 수 있다. 하지만 『협동조합으로 기업하라』를 보면, 이미 “중국의 1억 8,000만 명과 인도의 2억 1,000만 명”이 협동조합 조합원이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몬드라곤의 협동조합 정체성과 중국이나 인도의 협동조합 정체성이 다르다는 얘기일까? 무리한 해석일 수도 있지만 이런 식의 접근은 오리엔탈리즘, 따라잡기 관점을 반영한다고 본다.


사실 그동안 생협의 활동가나 협동조합 연구자들이 한국의 협동조합 역사를 다루면서 거의 언급하지 않았던 사람이 전진한이다. 일본 유학생으로 <협동조합운동사>를 조직하고 실제로 협동조합운동을 활성화시켰던 전진한은 자전적 기록인 『이렇게 싸웠다』(무역연구원, 1996년)에서 자신의 이념을 ‘자유협동주의’라 명명했다. “개인주의에서 독점성과 배타성이 止 즉 폐기되고 개성자유 즉 개성존엄성, 평등성, 창의성이 揚 즉 보존됨과 동시에 전체주의에서 강권주의와 기계주의가 止 즉 폐기되고 사회협동 즉 사회연대성, 공존성이 揚 즉 보존”되는 이념인 자유협동주의는 농어촌의 협동조합체계와 도시의 소비자/생산자협동조합체계를 결합할 뿐 아니라 임금제도를 철폐하고 이익을 균점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해방 이후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협동조합조성법, 협동조합법의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던 전진한은 국가의 협동조합이 아니라 민중의 자조적인 생활을 통해 협동조합 공화국을 만들려 했다. 그는 “국민경제가 일부 독점재벌이나 간상모리배 심지어는 탐관오리에게 농단됨이 없”도록 협동조합운동을 활성화시키려 했다. 외국의 모델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반면 이런 논의가 진지하게 다뤄진 적은 거의 없다. 왜 그럴까? 협동조합운동도 기존의 사회운동이 가진 편견을 재생산하고 있다고 평가하면 잘못일까?


두 책의 관점에 협동조합의 관점은 있지만 대안이념으로서 녹색의 관점은 없다. 저자들이 수용하는 글로벌화와 성장전략은 녹색이념을 거스를 수밖에 없다. 나는 한국의 협동조합운동이 세계에 뒤쳐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외려 생명사상과 결합된 한국 협동조합운동의 이념은 시대를 앞서간 면이 많다. 지구의 생명을 알리는 시계는 불과 1분을 남겨두고 있는데 우리는 천하태평이다. 협동조합이 이런 시대정신에 민감해야 할 텐데, 외국의 협동조합은 외려 둔감하고 국내의 협동조합이 이런 민감성을 보이고 있다.


다만 그런 면을 살리려는 노력이 사회구조적인 변화에 가로막히면서 지나치게 추상화되어 일상과의 접점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자기 사업의 틀에 갇혀 사회의 전체 그림을 보며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사회의 구조와 시민들의 일상을 더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들여다봐야 그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조금 더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협동조합 논의를 기대한다.

대안지식연구회 이름으로 <인문정치와 주체>라는 책이 지난 주에 나왔다.
거기에 실은 글인데, 3-1운동 기념으로 블로그에 올린다.
운동에 대한 기억과 인식이 우리 자신의 삶과 사회구조를 바라보는데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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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의 사건은 일제 식민지를 살아가던, 그리고 강압적인 권력에 억눌려 신음하던 많은 세계인들에게 충격을 줬다. 당시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 있던 역사학자 박은식(朴殷植)은 3․1운동을 ‘세계 혁명사의 신기원’이라 칭했다. 그리고 사상가 함석헌(咸錫憲)은 3․1운동 이전이 “정치가의 역사, 지배자의 역사, 영웅주의의 역사”였다면, 그 이후는 “씨의 역사다. 자주(自主)하는 민(民)의 역사”라고 말했다.

우리는 3․1운동을 유관순 누나의 태극기 사건, 한국인들이 일제 식민지에 맞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사건, 그러나 성공하지 못한 사회운동 정도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한 해석도 엇갈린다.

역사학자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창으로 찌르고 칼로 쳐서 마치 풀을 베듯 하였으며, 촌락과 교회당을 불태우고 부수었다. 잿더미 위에 해골만이 남아 쌓이고, 즐비했던 집들도 모두 재가 되었다. 전후 사상자가 수만 명이었고, 옥에 갇혀 형벌을 받은 사람이 6만여 명이나 되었다. 하늘의 해도 어두워져 참담하였으며, 초목도 슬피 울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의혈(義血)은 조금도 막히거나 방해되는 바가 없었다”라고 적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이런 비극을 겪었는데도 세계 혁명사의 신기원이자 씨의 역사를 알리는 사건이었을까?

 

 

1. 3․1운동의 배경

 

19세기말부터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치밀한 준비를 했다. 1910년 8월 22일 경술국치(庚戌國恥)라 불리는 한일병합조약 이전에, 이미 일제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체결해 통감부를 설치하고 식민지화 작업에 들어갔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첫번째 통감으로 부임했고, 각 부의 차관을 모두 일본인이 차지했다. 13도의 사무관도 일본인으로 대체되었고 한인 경찰 250명이 해임되고 일본인으로 대체되었다. 통감부가 모든 법관을 임명했고 사법권을 행사했다. 그러니 행정, 입법, 사법의 삼권 모두가 일본의 손으로 넘어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자 일제에 대한 민중의 투쟁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해산된 군대의 군인들과 지방의 유림(儒林)들은 과거 외국군대가 침입하면 등장했던 의병(義兵)의 전통을 따라 무기를 들고 일제에 저항했다. 그러자 일본 통감부는 이런 저항을 철저히 억압했고 1909년 9월, 10월에는 호남지방에 보병 2개 연대를 파병하고 전함까지 동원해 의병들의 근거지를 초토화시켰다. 일본 측의 통계를 따라도,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총 2,852회의 전투가 벌어졌고, 141,185명이 이 전투에 참여했으며, 죽은 사람만 해도 17,697명, 부상자가 3,706명, 체포된 사람이 11,994명에 달했다. 이처럼 1910년의 한일병합조약은 매국노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저항을 총칼로 억누르고 이루어졌다.

완전히 권력을 차지하자 일제는 자신의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한일병합 이후 일제는 경찰과 헌병의 수를 대폭 늘렸고 그들의 권한은 거의 제한을 받지 않았다. 헌병과 경찰의 수는 매년 늘어나 1910년 653개, 2,019명이던 헌병과 481개, 5,881명이던 경찰의 수는 1918년 9월 말이 되면 헌병대 1,048개, 8,054명, 경찰관서 738개, 6,287명으로 대폭 증가했다. 그리고 그 수에서 드러나듯 일제는 경찰이 아니라 헌병의 수를 대폭 늘렸다. 그러니 식민지의 일상은 치안이 아니라 전쟁상태였다. 또한 헌병과 경찰은 범죄를 단속하거나 첩보를 수집할 뿐 아니라 국경세관업무, 산림감시, 민적(民籍)업무, 검역․방역, 묘지단속, 노동자 단속, 일본어 보급, 농사개량, 도박 및 무속, 매음부, 풍속 단속 등의 업무까지 맡았다. 그러니 일본 정부가 심으라는 모종을 심지 않거나 토지측량을 거부하거나 위생검열에 응하지 않으면 헌병들이 바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행정체계도 완전히 바뀌었다. 일제는 동학혁명, 의병봉기 등을 경험하면서 한국의 자치적인 공동체가 식민지 통치를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래서 각 도장관을 친일파로 임명할 뿐 아니라 자치공동체를 파괴하기 위해 지방제도도 바꿨다. 이미 통감부 시절부터 일제는 마을 단위의 향장(鄕長)과 향청(鄕廳)의 역할을 폐지했고, 1914년 ‘도(道)의 치관할구역(置管轄區域) 및 부군(府郡)의 명칭위치관할구역(名稱位置管轄區域)’에 관한 총독부령 제 111호는 12부 317군 가운데 전체의 37%인 1부, 121군을 통폐합하고 새로 1부, 24군을 만들어 12부, 220군으로 조정했다. 그 뒤에도 지방행정통폐합은 계속되어 1910년도에 68,819개였던 동리가 1916년도에는 29,383개, 1918년도에 28,277개 동리로 줄어들었고, 이는 자치적인 동리가 행정적인 면으로 흡수되는 것을 뜻했다. 이와 더불어 각 마을의 고유하고 다양한 문화를 반영하던 마을이름도 ○○동이나 ○○리로 획일화되었다. 또한 총독부는 부군면을 통합할 때 면장의 97%를 교체하고 일제에 협조적인 사람을 면장으로 임명했다. 당시 일제는 지역의 자치공동체를 파괴하고 그것을 중앙집권적인 식민지 통치구조로 흡수하려 했다. 일제가 추진한 행정체계개편은 중앙의 총독부와 지방의 면단위 통치기구가 수직적인 질서를 이루며 작동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행정체계만이 아니라 사법체계도 일제 권력을 위해 재편되었다. 1910년 12월에 제정된 ‘범죄즉결령’은 경찰서장이나 헌병분대장이 구류, 태형 등의 범죄나 3개월 이하의 징역, 100원 이하의 벌금에 해당하는 범죄를 재판없이 즉결처분할 수 있게 했다. 실제로 1911년도에 12,099건이었던 즉결처분은 1918년도에 71,279건으로 약 6배 가까이 증가했고, 처벌인원도 21,288명에서 94,640명으로 증가하여 4.5배 가량 증가했다. 그리고 1912년 3월에 제정된 ‘조선태형령’은 한국인에게만 적용되었는데 징역이나 벌금 대신에 매질을 허용했다. 그러자 태형의 비중은 매년 증가하여 1916년에는 그 비중이 46%에 달했다. 이런 법률들에 따르면 경찰서장이나 헌병대장은 자기 마음에 들지않는 사람이면 아무나 끌고 와서 매질을 할 수 있었다.

공식적인 지배체제 외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본 지배를 거스르는 학교나 언론은 모두 폐교되거나 폐간되었고, 일본을 칭송하는 어용신문인 경성일보 등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1913년의 ‘의생규칙(醫生規則)’은 한의사를 의사가 아니라 의생으로 만들었고 의생면허도 20세 이상으로 2년 이상 의업에 종사한 자만을 대상으로 발급해서 상당수의 한의사들이 의료체계를 떠나게 했다.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삼은 것은 대륙으로 진출할 정치적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만이 아니라 한창 성장하던 일본경제를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한국은 일본에 식량과 원료를 공급하는 곳이자 일제의 상품시장 역할을 해야 했다. 무엇을 심고 기를 것인지도 총독부가 결정했고 한국의 공업은 억제되었다. 일제는 일본의 방직산업을 위해 ‘면화채종포(採種圃)’를 설치해 미국면화를 재배하게 했고 ‘종묘장관제(種苗場官制)’를 공포해 일본 종자를 강제로 배급했다. 모를 심을 종자부터 수확하고 건조하고 탈곡하는 과정 모두에 식민권력이 간섭하며 명령을 내렸고 말을 듣지 않으면 모종을 밟아 뭉개고 벌금까지 매겼다. 뽕나무 재배를 강요하고 지세, 호세, 시장세, 도살세, 연초세, 주세, 학교조합비 등 각종 세금을 거뒀다.

이런 와중에 일제 식민권력은 한국 사회에 배타적 소유권을 확립했고 공유지를 박탈했다. 1919년대에 시행된 토지조사사업은 배타적인 토지소유권을 확립했고, 많은 농민들이 소유권을 잃었다. 자기 땅을 농사짓던 농부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소작농들은 그 소작마저 잃고 일용직 노동자가 되거나 도시로 떠나 빈민이 되었다. 일제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해 땅을 빼앗고 부당하게 국유지로 편입시킨 땅을 1912년 10월 30일 ‘역둔토특별처분령(驛屯土特別處分令)’을 공포하여 동척(東拓)과 일본인에게 팔아 한국농민을 착취했다.

그리고 1910년 12월 ‘회사령’은 한국인이 “법률상·경제상의 지식·경험이 부족하여 복잡한 회사조직의 사업을 경영할 수 없고, 일본자본가 또한 한국 실정을 몰라 예측 못한 손해를 입을 우려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회사를 설립하려면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즉 총독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회사를 만들 수 없었다. 그리고 1912년의 ‘조선관세정률령’에 따라 수입상품에 대한 관세도 매우 낮았다. 1914년 5월에 공포된 ‘신농공은행령’과 ‘지방금융조합령’은 금융자본까지 지배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 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1917년부터 물가가 빠른 속도로 올랐고, 특히 쌀값은 1919년 1월에 거의 두 배로 올랐다. 이렇게 민생이 어려워지자 민중의 불만도 빠르게 늘어났고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했던 민족자결주의는 한민족에게 자결권의 필요성을 고민하게 했다. 그런 상황에서 고종황제가 1월 21일 갑작스레 서거했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일제는 식민지를 수월하게 다스릴 수 있는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의 완성을 목표로 삼았고 사람들의 일상을 철저하게 지배하려 들었다. 따라서 3․1운동은 단순히 일제 식민지로부터 독립해 조선왕조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오히려 민중들은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삶을 꿈꿨다.

 

 

2. 누가 어떻게 운동을 일으켰는가?

 

3․1운동은 일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에 자극을 받은 33인의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의 독립을 선포해서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된다. 민족대표들은 마침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고종의 장례식날인 3월 3일을 봉기일로 정했으나 일제의 눈을 피해 3월 1일로 그 날을 앞당겼다. 일본쪽 자료를 따라도 3월 1일부터 약 두달 동안 1,180회의 시위가 벌어졌고 3월 1일부터 4월 11일까지는 매일 10회 내외의 시위가 벌어졌다. 3·1운동의 정점을 이뤘던 3월 27일부터 4월 3일까지는 하루에만 50~60회의 시위가 일어났다. 참여인원도 많아 서울에서는 수십만 민중이 참여했고, 지방에서도 만명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그 규모만큼 희생도 커서 많은 사람들이 일제 경찰과 헌병의 손에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보통 3·1운동은 민족대표들의 노선에 따라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실제 기록을 보면 아래의 <표1>에서 드러나듯이 폭력적인 충돌도 자주 일어났다.

<표1> 각도별 투쟁양태(폭력․비폭력)(정연태․이지원․이윤상, 1989: 246)

 

3.1~3.10

3.11~3.20

3.21~3.31

4.1~4.10

4.11~4.20

4.21~4.20

 

폭력

비폭력

폭력

비폭력

폭력

비폭력

폭력

비폭력

폭력

비폭력

폭력

비폭력

폭력

비폭력

 

발포

충돌

발포

충돌

발포

충돌

발포

충돌

발포

충돌

발포

충돌

발포

충돌

서울

경기

충북

충남

강원

경북

경남

전북

전남

황해

평남

평북

함남

함북

 

 

 

 

 

 

 

 

 

3

14

2

2

 

 

2

 

 

 

 

 

 

 

2

8

4

3

1

10

6

 

3

1

3

 

3

1

18

48

35

13

1

 

3

 

3

 

2

6

 

1

4

 

2

7

3

1

3

 

 

 

10

2

2

 

 

 

2

1

1

1

6

1

10

3

7

15

7

8

19

2

8

38

15

 

28

3

4

2

6

10

 

 

5

 

9

2

 

13

24

4

2

1

4

2

1

 

6

 

2

1

 

39

90

3

8

5

7

24

11

7

11

5

10

2

8

 

23

10

19

11

1

15

1

1

14

1

13

1

2

 

9

8

9

4

5

3

1

 

12

 

10

 

 

 

23

15

17

34

10

25

4

13

26

5

17

1

9

 

2

1

1

1

 

3

 

1

 

 

 

 

 

 

 

 

 

 

 

1

 

 

1

 

 

 

 

 

2

4

 

7

4

2

2

13

9

1

1

 

4

 

 

 

 

 

 

 

 

1

1

 

 

 

 

 

 

 

 

 

1

 

 

 

 

 

 

 

 

1

 

 

 

 

1

6

 

3

 

 

 

 

7

0

56

14

27

14

9

34

1

4

27

15

26

12

5

14

38

12

11

6

19

8

4

0

21

8

18

5

2

51

127

23

38

50

32

72

27

45

83

61

71

54

44

21

20

142

31

22

 

69

60

230

112

61

199

9

2

 

2

1

18

244

166

778

비율

22.4

77.6

26.7

73.3

35.9

64.1

46.5

53.5

18.3

81.7

21.4

78.6

34.6

65.4

 

<표1>에서 드러나듯 3․1운동은 서울과 북쪽 지방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서울 쪽의 운동은 잦아들고 남쪽 지방의 시위가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그 운동의 형태는 각 지방의 상황에 따라 달랐고 때로는 면사무소와 헌병 주재소를 불태우는 폭력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당시 일제는 황해도 수안의 시위, 경기도 안성군 원곡․양성면의 시위, 평안북도 의주의 시위를 ‘전국 3대 폭동’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 시위에서 민중들은 헌병주재소를 습격하거나 경찰주재소를 방화하고 면사무소를 점거하거나 파괴하고 총을 쏘는 일제 경찰을 때려죽이기도 했다. 경기도에서만 경찰관서 17개소, 주재소 12개소, 군청․면사무소 35개소, 우편소 2개소 등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경기도 외에 시위가 가장 격렬했던 경남지방에서는 경찰관서 15개소, 헌병분견소 7개소, 군청․면사무소 7개소, 우편소 6개소 등이 파괴되었고 그 과정에서 81명이 사망했고 23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754명이 검거되었다. 그러니 ‘폭력/비폭력’의 이분법으로 3․1운동의 진행과정을 분석하기는 어렵다.

3․1운동이 시작된 계기를 제공한 것은 분명 고종의 사망과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서 작성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도화선에 불을 붙인 계기였을 뿐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으면서 민중들의 불만은 누적되어 이미 화약고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일제가 3․1운동 이후 조사한 내용을 보면 그 불만이 자세히 드러나 있다. “①일본인은 리비(理非)의 여하에 불구하고 즉시 구타하는 버릇이 있다. ②양반, 유생에 하등의 특권이 없음을 불쾌하게 생각한다. ③각종의 행정시설이 번잡한 일. ④산업의 장려는 민의(民意)에 반하고 또한 강제적인 점. ⑤제세(諸稅) 징수의 부담이 과중하고, 또 무엇에나 세를 과하는 그 고통은 오히려 한국시대의 폭정보다 못하다. ⑥부역(賦役)이 과중한 것. ⑦인민의 권리를 무시하고 갖가지 공사를 하는 일. 관에서 멋대로 인민의 토지를 도로로 만들고 사후에 강제적으로 기부시키는 따위. ⑧공동묘지는 고래의 관습을 돌보지 않고 규칙을 발표하여 이행하였기 때문에 심적인 불평이 적지 않고 자연히 원망하는 자가 있게 되었다. ⑨행정관리는 조선인을 대하는데 있어 압박으로써 임하고 오만, 불친절하며, 어쩌다 상응되는 사정에 대하여 의견을 말해도 흘려듣고 상관에 전달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정상달(下情上達)이 전혀 불가능하여 민정을 개진(開陣)할 길이 없다. ⑩산업 장려에 대한 불평은 민도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일의 성공을 서두른 결과 일률적으로 명령을 내리기 때문에 인민의 고통이 심하다. 토지 없는 자에 뽕나무 묘목을 강제로 분배하고 대금을 받아내기 때문에 인민은 이것을 땔감으로 하여 대금을 지불하며, 혹은 죽은 묘목을 분배하고 대금을 독촉하거나, 가마니 제조를 강제하여 한 호(戶)당 1개월에 몇 매씩 만들어 내라고 엄명하여 독촉하기 때문에 인민 중 자기가 만들지 못하는 자는 부득이 매월 타인으로부터 구입하여 제납(提納)하고 있다. 이런 일을 호소해도 관리는 조선인의 말을 흘려듣는다. ⑪오늘날의 행정은 모두 규칙 뿐으로, 무슨 일에나 규칙에 위반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어 번루(煩累)를 느끼는 바 크다.”(이정은, 2009: 78). 따라서 3․1운동은 지도자에 이끌린 운동이 아니라 일제의 폭압에 맞선 민중의 자발적인 저항의지가 터져나왔던 운동이라 얘기할 수 있다.

그리고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들도 매우 다양했다. 식민지의 지식인만이 아니라 많은 농민과 노동자, 학생들이 운동에 참여했다. 아래 <표2>를 보면 그 다양함이 잘 드러난다.

<표2> 3․1운동 수감자의 계급․계층별 구성(3.1~5.31)(정연태․이지원․이윤상, 1989: 238)

 

경기(서대문,인천)

강원

(춘천)

충남(공주)

충북(청주)

함남(함흥, 원산)

함북(청진)

평남(평양, 진남포)

평북(신의주)

황해(해주)

경북(대구)

경남(부산, 마산, 전주)

전남(광주, 목포)

전북(전주, 군산)

농민(일부지주포함)

884

(46.3)

81

(77.1)

325

(78.9)

119

(70.0)

502

(65.7)

54

(67.5)

761

(62.7)

289

(52.5)

623

(66.6)

698

(64.9)

408

(54.1)

80

(32.3)

145

(49.7)

4,969

(58.4)

노동자

125

(6.5)

1

(1.0)

3

(0.7)

1

(0.6)

20

(2.6)

2

(2.5)

47

(3.9)

13

(2.4)

12

(1.3)

59

(5.5)

25

(3.3)

12

(4.8)

8

(2.7)

328

(3.9)

지식인․청년학생

교사

학생

416

4

31

24

83

4

134

80

51

149

87

93

70

1,226

(14.4)

종교인

103

1

3

0

11

0

26

24

19

32

43

2

3

267

(3.1)

기타자유업자

57

1

12

8

21

3

30

20

40

23

40

12

16

283

(3.3)

576

(30.1)

6

(5.7)

46

(11.2)

32

(18.8)

115

(15.1)

7

(8.8)

190

(15.9)

124

(22.0)

110

(11.8)

204

(19.0)

170

(22.5)

107

(43.1)

89

(30.5)

1,776

(20.8)

상공업자

상업종사자

136

11

23

10

86

13

110

49

96

53

76

22

33

718

(8.4)

기타자영업종사자

31

2

2

1

9

2

31

27

38

10

8

5

7

173

(2.0)

공업종사자

98

2

9

3

26

2

19

22

29

36

22

7

8

283

(3.3)

265

(13.9)

15

(14.3)

34

(8.3)

14

(8.2)

121

(15.8)

17

(21.3)

160

(7.6)

98

(17.8)

163

(17.4)

99

(9.2)

106

(14.1)

34

(13.7)

48

(16.4)

1,174

(13.8)

무직자

61

(3.2)

2

(1.9)

4

(1.0)

4

(2.4)

6

(0.8)

0

(0.0)

55

(4.5)

27

(4.9)

27

(2.9)

16

(1.5)

45

(6.0)

15

(6.1)

2

(0.7)

264

(3.1)

1,911

(22.5)

105

(1.2)

412

(4.8)

170

(2.0)

764

(9.0)

80

(0.9)

1,213

(14.3)

551

(6.5)

935

(11.0)

1,076

(12.6)

754

(8.9)

248

(2.9)

292

(3.4)

8,511

(100.0)

 

<표2>에서 드러나듯이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은 농민들로 감옥에 갇힌 사람들 중 그 비율이 58.4%나 된다. ‘조선태형령’에 따라 감옥에 갇히지 않고 매를 맞고 풀려난 사람들까지 고려하면 농민들의 참여비중은 더 많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지식인과 학생이 그 다음으로 20.8%를 차지했고, 상공업에 종사하던 사람들도 13.8%나 참여했다. 또한 노동자들의 비중은 3.9%에 불과하지만 당시 공장에서 노동하던 사람들의 수가 많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많은 노동자들이 참여했다고 얘기할 수 있다. 심지어 거지와 기생까지도 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벌였다.

이런 계급·계층적인 참여 외에 종교단체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 동학혁명의 기운을 이어받은 천도교와 기독교, 유림(儒林)도 3·1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그리고 일가가 모여 살던 마을에서는 문중(門中)이 시위를 이끌기도 했다. 따라서 3․1운동은 계급이나 계층, 종교의 구별 없이 전민중적인 저항을 조직했다고 얘기될 수 있다.

참여한 계층이 다양했던 만큼 시위의 방식도 다양했다. 길거리나 장터에서 만세를 외쳤을 뿐 아니라 한밤중에 산봉우리에서 봉화 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산꼭대기에서 만세를 외치는 산호(山呼)시위도 벌어졌다.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만세를 부르거나 인근 지역을 돌며 릴레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만세를 부르다 목숨을 잃은 사람의 시신을 메고 상여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는 철시(撤市)시위를, 학생들은 동맹휴학, 노동자들은 파업시위를 벌였다. 경남 창원의 경우 주도자들이 ‘십인장(十人長)’, ‘이십인장(二十人長)’이라고 쓴 흰 수건을 머리에 감고 시위 군중을 지도하기도 했다. 심지어 ‘만세꾼’이 등장하기도 했다. 만세꾼은 “‘삼베 주머니로 도시락을 만들어 망태에 넣어’ 원거리 시위에 참가하는 의도적인 시위군중인 동시에 수십 명씩 떼를 지어 다니며 봉기를 유도하거나 지역적 연계를 꾀하는 이른바 ‘바람몰이꾼’” 역할을 맡았다(정연태․이지원․이윤상, 1989: 240). 그리고 시위만이 아니라 묘목을 버리거나 부역을 거부하고 납세 고지서를 받지 않고 일본 상품을 배척하고 일본인에게 식량이나 연료 판매를 거부하는 등의 일상적인 투쟁도 함께 벌였다.

시위 때의 구호도 다양했고 ‘대한독립만세’만이 아니라 다양한 요구가 나왔다. 거리 곳곳은 연설장으로 변했고, 사람들은 “지금 우리는 나라를 위하여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면장이든 면서기이든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를 위하여 이렇게 우리들은 진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조금이라도 국가를 위하여 진력하지 않는 자세를 취하는 놈은 때려 죽여라”, “지금부터는 모자리 일을 할 것도 없다. 송충이를 잡을 필요도 없다”, “바닷가의 간척공사도 안 해도 좋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 “조선이 독립하면 부역, 세금이 필요 없게 될 것이며”, “이제부터는 묘포(苗圃)일도 할 것 없고 라고 연설했다(이정은, 2009: 301; 이지원, 1989: 344). 그리고 시위마다 태극기와 각종 선언문, 전단, 경고문, 격문, 포스터 등이 뿌려졌다.

어떤 곳에서는 한 마을 전체가 참여하기도 했다. 경기도 수원 화수리의 항쟁이 대표적이다. 화수리 주민들 중 1집마다 최소한 1명씩이 참여했고 장안면, 우정면의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경찰 주재소에 불을 질렀으며 주민들을 모욕하고 괴롭히던 일본경찰을 때려죽였다. 이에 일본은 화수리의 마을을 비롯해 여러 마을의 집 30채를 불 지르고 주모자인 차희식, 이영쇠에게 징역 15년형을 내렸고 그 외에도 체포된 사람 약 20명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특이한 점은 3․1운동의 시위들이 면사무소나 경찰․헌병주재소같은 공공기관을 공격의 목표로 삼았다는 점이다. 장터나 거리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지고 난 뒤엔 거의 대부분이 공공기관으로 몰려가 그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그곳의 경찰과 헌병들이 총을 쏘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몸을 다쳤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관공서를 목표로 삼은 것은 일제로부터의 독립의지와 더불어 ‘자치(自治)’에의 강한 욕망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향촌공동체가 해온 역할을 대신했던 면사무소가 공격을 받고, 그런 공격을 과거 공동체의 지도자였던 구장(區長, 지금의 이장)들이 주도했다는 점은 그 사실을 증명한다. 심지어 전남 순천군의 주민들은 면사무소를 접수하고 ‘대한독립운동준비사무소’라는 간판을 내걸기도 했고, 평안도 의주에서는 면사무소를 접수하고 자치민단 사무를 집행하기도 했으며, 평안북도 선천군의 신미도 주민들은 헌병주재소를 접수하고 면사무소를 인수해 약 20일동안 행정사무를 봤다.

일제는 이런 자발적인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모든 힘을 동원했다.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고 때리고 마을에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무조건 잡아 가두고서야 민중의 자발적인 의지를 억누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당시 민중들을 탄압한 것은 일제의 경찰이나 헌병만이 아니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일본인 소방대들이 도끼와 경찰용 총을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한국인들을 습격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일제는 모든 힘을 동원하고서야 이런 흐름을 한풀 꺾을 수 있었다. 허나 그렇게 잦아든 듯 보였지만 3․1운동은 또 다른 운동의 흐름을 서서히 형성하고 있었다.

 

 

3. 3·1운동의 발전

 

1890년 동학혁명 때 등장했던 민중(民衆)이란 개념이 자주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라고 한다. 민중이라는 개념이 다수의 피지배층을 가리킬 뿐 아니라 민족독립과 역사발전의 주체를 뜻하기 시작한 것은 3·1운동의 영향이라는 지적도 있다(장상철, 2007: 29).

3·1운동으로 민중의 폭발적인 잠재력을 확인하게 된 지식인들은 이를 조직적인 운동으로 연결시키려 노력했다. 1920년 4월 11일 창립한 <조선노동공제회>는 한국 최초로 노동운동을 전면에 내걸고 조직되었고 이후 전국에 지부가 결성되기도 했다. <조선노동공제회>는 노동문제만이 아니라 농민문제도 중요하게 다루며 소작제도와 일제 수탈을 반대했다. 그리고 1920년대 초반에는 소작농민들이 <소작인조합>운동을 벌였고 이는 1930년대의 <농민조합>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당시까지도 촌계(村契)나 동계(洞契)같은 자치의 전통이 살아있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이런 연대를 기반으로 마을 지주들에게 기금을 걷고 민간의 협동조합을 만들어 농민운동의 뿌리를 강화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민간의 자율적인 결사체인 계가 지역사회의 공식적인 의사결정기구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함석헌의 표현을 빌린다면, “만세가 지나간 후에 일어난 것은 강연회였다. 난물이 한번 휩쓸로 지나간 다음에 시커먼 살진 땅에 무수한 싹이 터 올라오듯 삼천리를 뒤흔드는 격동이 지나간 후 사람들은 차차, “아니다, 배워야 되겠더라!”하게 됐다. 그래 일어난 것이 연달아 밀려오는 물결처럼 골짜기를 찾아 든 강연반이요, 그 뒤를 이어 일어서는 학원이었다.”(함석헌, 2002: 127) 실제로 청년학생들은 민중을 대상으로 야학/여자야학과 강연회, 토론회 등을 열며 지역사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며 지역운동의 구심점을 마련했다. 예를 들어, 1922년 11월말 경남 지방에는 14,115명의 학생이 223개의 야학회와 강습소에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경기도 수원에서는 <혈복단>이라는 비밀결사가 조직되어 <대한독립애국단>과 연계해 활동을 펼쳤다.

농민들도 개별적으로 지나치게 높은 소작료에 반발하며 차츰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1923년 이후부터 농민들은 <소작회>같은 조직을 만들어 ‘유보동맹’, ‘불납동맹’, ‘소작권 상실 걸인단’, ‘아사동맹’ 등을 조직해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부지방에서는 소작권을 박탈당한 소작민들이 공동경작단을 만들어 지주의 의사를 무시하고 논을 갈고 모를 심어 강제로 경작했다. 그중 전남 신안군의 암태도 소작쟁의는 농민들이 소요죄로 구속되고 목포로 원정투쟁을 떠나는 과정을 1년 이상 거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국외에서도 3·1운동의 자극을 받아 다양한 활동이 시작되었다. 만주지역에 이주한 백 수십만 한국인 농민들도 국내의 반일봉기에 호응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1924년 4월에는 이을규, 이회영, 유자명, 백정기, 정현섭 등이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했고, 이후 김좌진 등과 함께 <한족총연합회>를 결성(1929년)하기도 했다.

여러 사회운동단체들이 만들어짐과 더불어 3·1운동은 새로운 사상에 대한 욕구를 자극했다. 과거의 봉건왕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고 그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예를 들어 1916년 한국, 중국, 대만, 일본의 청년들로 구성된 비밀결사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은 3·1운동을 전후로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복벽주의와 공화주의로 갈라졌져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19년 3월말 서울에서 조직된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은 만주, 상해 등지의 민족운동세력과 연계해 임시정부를 수립하려 했다(이현주, 2003).

한편에서는 사회주의 이념을 받아들여 사회주의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과거 민족주의를 따르던 지식인들도 이제는 아나키즘, 사회주의, 맑스-레닌주의 등 다양한 사상에 관심을 가졌다. 예를 들어, 1920년에 만들어진 <사회혁명당>과 1921년 1월에 조직된 <서울청년회>는 한국에서 최초로 대중적 기반을 가지고 사회주의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이런 사회주의 활동 속에는 아나키즘도 함께 수용되고 사회진화론과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주요한 논거로 활용되었다. <서울청년회>의 김사국이나 김명식 등은 글과 연설에서 호상부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21년에는 아나키즘을 널리 선전하고 실천하기 위한 조직인 <흑로회(黑勞會)>와 <흑색청년동맹(黑色靑年同盟)>이 결성되었다. <흑로회>는 일본에서 박열이 잠시 귀국하여 결성되었고, <흑색청년동맹>은 신채호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만들었다. 3․1운동 이후 아나키즘 운동은 전국 각지에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3․1운동이라는 민중의 저항운동은 일제의 탄압을 받으며 수그러들었지만 민중과 사회운동이 손을 잡는 다양한 운동의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사회운동이 민중을 이끌려 하거나 민중이 사회운동을 배제하는 방식의 운동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역할과 가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었다. 그러했기에 1920, 30, 40년대에도 끊임없이 민중들의 저항운동이 조직되었다. 그러니 3․1운동은 비록 일제의 판압을 받으며 수그러들었지만 민중이라는 주체를 드러내고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국사(國史)에는 빠져있지만 사회주의, 아나키즘을 비롯한 다양한 사상들이 뿌리를 내리면서 민중들은 자신의 삶과 사회를 새로이 만들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4. 3․1운동에 대한 해석과 평가

 

그동안 3·1운동에 대한 평가는 민족운동, 사회운동, 자치운동의 순으로 변화해 왔다. 과거 80년대까지는 3·1운동을 민족의 독립운동으로 해석하고 계급적인 의미를 배제시키려 노력했지만, 80년대부터는 사회운동, 즉 사회주의운동의 시초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했다. 비록 일제의 강한 탄압으로 운동이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그 맥은 끊어지지 않고 이후의 운동을 발전되었다.

그런데 기존 역사학계가 3·1운동을 일방적으로 찬양했다면, 80년대 이후의 사회주의 관점을 따르는 평가는 그 의미를 지나치게 축소시키는 태도를 보였다. 예를 들어 <조선공산당>의 관점을 따라 3·1운동이 “①일제의 무력적 탄압, ②소련 등 국제적 지원 역량의 부재, ③노동자계급의 미성숙, ④토착자본가의 중도 반단적․타협적 태도, ⑤민족해방운동을 지도할 당의 부재(목적의식적, 조직적 지도의 부재), ⑥부르조아 민족주의자의 외세의존적 태도, ⑦민족해방투쟁과 토지투쟁의 결합 부재, ⑧무장투쟁 전술의 방기 등”으로 실패했다고 평가하거나 그 운동의 교훈으로 “①민족해방운동의 전투적 참모본부인 ‘혁명적 전위당’이 필요하다는 것, ②민족 부르조아지의 지도는 믿을 수 없으며, 조선의 완전 독립은 전투적인 ‘노동자계급의 영도’를 필요로 한다는 것, ③외세의존의 망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독립은 우리 손으로 달성해야 한다는 것, ④농민의 요구인 토지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하여 줌으로써만 전 농민대중을 민족해방에 동원시킬 수 있다는 것, ⑤민족해방운동은 광범한 인민대중을 동원하는 조직적․계획적․목적의식적인 운동이어야 한다는 것, ⑥단순한 정의의 관점에 의한 무저항주의로는 독립을 달성할 수 없고 희생성을 띤 전투적 지도이론만이 자주독립의 달성을 보장한다는 것, ⑦나라를 가장 사랑하는 애국적인 계급은 노동자, 농민, 학생, 소시민이라는 것 등”을 지적하곤 했다(지수걸, 1989: 21~22). 그리고 맑스-레닌주의의 노선을 따라 농민운동의 보수성을 지적하고 노동자들의 투쟁경험이 지나치게 강조된 감도 없지 않았다.

최근 들어서는 민족주의나 사회주의 관점을 넘어 3·1운동의 자치성을 강조하는 해석이 등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정은은 다음과 같이 3․1운동의 의미를 평가한다. “3․1운동은 지방사회의 공동체적 힘이 중앙의 조선총독부라는 일원적 권력에 대해 마지막 저항의 불꽃을 피워 올린 것이었다. 그 이후 한국의 지방사회는 식민지 권력의 강력한 중앙 집권정책에 의해 해체의 길을 걸었다. 이후 국내의 식민지 해방운동과 해방 이후 민주화운동 등과 같은 변혁운동은 학생층과 같은 조직화된 세력이나 비밀 지하조직 운동으로 전개양상이 전화되었다.”(이정은, 2009: 346) 즉 3․1운동은 지방의 자치적인 힘이 중앙집권적인 권력에 맞서 저항했던 운동이라는 평가이다.

지방사회는 해체되었지만 함석헌이 얘기했듯이 지식인들은 이제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이가 그런 인식을 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기득권층들은 민중을 두려워하며 일제와 결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함석헌은 3․1운동의 기운이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분열되었다고 본다. 1959년 3․1절을 기념하면서 함석헌은 “일본 군인의 총칼도 감옥의 생죽음도 무서워 않던 민중이 풀이 죽기 시작한 것은, 되는 줄 알았던 독립이 아니 돼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뒤 소위 일본 사람의 문화정치 밑에서 사회의 넉넉한 층, 지도층이 민중을 팔아넘기고 일본의 자본가와 타협하여 손잡고 돈을 벌고 출세하기를 도모하게 됨에 따라 민중의 분열이 생기면서부터였다”(함석헌, 2002: 121)고 지적한다.

3․1운동은 국사에 가려져있던 다양한 자치공동체의 역사를 드러냈고 민중의 정치적인 잠재력을 드러낸 중요한 사건이었다. 아래로부터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민중의 의식적인 노력은 이후에도 활발히 이어졌지만 일제만이 아니라 내부의 기득권층과도 싸워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부여받게 되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민중의 정치적인 실천들은 끊임없이 탄압을 받았고 힘으로 억눌렸다. 아직도 대한민국 헌법은 그 운동을 이끌었던 민중들의 저항이나 그 잠재력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으로 축소시키며 민중의 정치를 봉쇄하고 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저항의 잠재력을 완전히 봉쇄하지는 못한다. 언젠가 억압되고 억눌린 자들은 다시 대지에 뿌리내리기 위해 일어설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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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김종철 선생님께 보냈었는데 이번 1~2월호에 덜컥 실린 글.
<지배당하지 않는 기술>을 세미나하며 여러 생각을 했다.
농업에서 벼농사가 핵심일 이유는 없다는 점, 구술문화가 중요하다는 점, 변경의 삶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 등등...
이 고민을 못 담아 아쉽지만 일단 정리의 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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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제임스 스콧(James C. Scott)은 낯선 지식인이다. 유행처럼 수많은 외국 지식인들의 이름이 뜨고 지는 한국의 지식사회나 운동문화에서도 지금껏 스콧의 이름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국내에는 스콧이 1977년에 쓴 《농민의 도덕경제》가 2004년도에 번역되었고, 2010년 연말에 1999년 저작인 《국가처럼 보기》가 번역되었다. 두 책의 제목만 봐서는 스콧의 생각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아직 한글로 번역되지 않은 책들을 보면 제목만 봐도 스콧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약자들의 무기Weapons of the Weak》(1987년작), 《지배와 저항의 기술들Domination and the Arts of Resistance》(1992년작), 《지배당하지 않는 기술The Art of not Being Governed》(2009년작)같은 제목들을 보면 그의 관심이 국가나 지배보다 약자와 저항에 맞춰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배나 저항이 우리 사회에서 인기 없는 주제도 아닌데 왜 스콧의 이름이 낯설게 들릴까? 지배든, 저항이든 모든 논의가 국가에 집중된 우리 사회에서는 스콧이 관심을 두는 지역사회가 흥미를 끌지 못한다. 더구나 스콧은 보수의 텃밭이자 진보의 골칫거리로 ‘오해’를 받는 농민에게 관심을 두니 어찌 보면 낯선 게 당연할 수도 있다.


허나 낯설다고 무시하기엔 스콧의 글은 중요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스콧은 풍부한 역사적인 사실들을 통해 우리의 상식을 뒤엎고 그 상식이 실제로는 길들여진 관점이라는 점을 주장하려 한다. 스콧의 주요 저작들이 아직 번역되지 않았기에 그의 사상을 온전히 논하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호혜성과 생존권, 도덕경제



내가 《농민의 도덕경제》라는 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대학원 석사과정이었다. 수업시간에 동남아시아 농민봉기들을 다루는 와중에 이 책이 언급되었고, 그 때는 농민에서 노동계급으로 넘어가기 바빴을 때라 이 책에 거의 주목하지 못했다. 또 책이 번역되지도 않아 원서를 봐야 했기에 책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보다 영어를 해석하기에 바빴다.


사실 그 때는 스콧보다 폽킨(Popkin)이 수업시간의 주인공이었다. 폽킨은 도덕경제를 내세운 스콧과 달리 농민을 ‘합리적인 농민(rational peasant)’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퐆킨은 농민을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합리적인 행위자로 봐야 농민봉기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당시에는 스콧이 폽킨을 위한 조연배우였기에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그러고 13년이 흐른 뒤에야 《농민의 도덕경제》라는 책을 다시 접했다(안타깝게도 번역이 좋지 않다). 풀뿌리운동과 농민공동체의 관계를 찾아보다 이 책을 우연히 떠올리게 되었고, 책을 다시 읽으면서 농민공동체의 특징과 그것을 움직이는 질서에 관해 많은 점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공장이나 사무실의 구체적인 조건에 의존하는 노동자계급과 달리, 농민이 보편적인 계급으로서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꾸리는 방식에 더 많은 관심을 쏟게 되었다.


《농민의 도덕경제》의 서문에서 스콧은 농민들에게 “착취와 반란의 문제는 칼로리와 수입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정의와 권리, 의무, 호혜성에 관한 농민들의 생각”이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먹고살기 힘들어서 반란과 혁명을 일으킨다고 믿는데, 스콧은 농민에게는 그 문제가 달랐다고 주장한다. 즉 농민들의 반란이 엄청난 착취와 억압에 대한 반발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착취와 억압의 정도는 농민들이 느끼는 생활의 어려움만으로 평가될 수 없었다. 스콧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동남아시아의 농민들은 자신들이 구성한 생존윤리에 따른 도덕경제가 붕괴될 때 정부와 자본에 맞섰다.


농민들은 호혜성과 생존권을 따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호혜성과 강요된 관대함, 공유지, 품앗이 등의 방식들은 다른 경우라면 최저생계수준 아래로 내던져질 수밖에 없는 가족이 부족한 자원을 채우도록 도왔”기 때문이다. 즉 강요되었건 합의되었건 공동체의 도덕은 구성원들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 보장했다. 스콧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기본적인 사회적 권리로 ‘생계에 대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었으며 엘리트들조차도 가난한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활을 위해 남겨둔 것을 빼앗지 못했고 오히려 어려운 시기에는 가난한 이들의 생계에 관한 ‘도덕적인 의무’를 졌다고 지적한다. 경제가 다른 모든 가치를 집어삼킨 지금 우리사회와 달리 당시의 농민공동체에서는 경제가 자신의 고유한 기준을 가지지 않고 일상적인 도덕이나 사회적인 교환의 원리에 따랐다.


이런 농민공동체와 도덕경제는 동남아시아가 서구 유럽의 식민지가 되면서, 즉 식민지 국가체계가 만들어지고 자본주의 시장원리가 도입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식민지 국가와 시장은 농민들의 자급에 가장 중요한 자원인 토지와 노동을 상품으로 만들었다. 특히 “국가 자체가 농민들의 자원을 수탈”했고 국가는 농민들에게 많은 양의 세금을 강제로 걷을 수 있도록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만들었다. 그리고 시장은 사적 소유권을 강화시키고 가격이 도덕을 대체하도록 만들기 위해 경찰과 군대의 힘을 빌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소유권은 “숨 쉬는 공기처럼 항상 자유로웠으며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지역의 산림과 마을 소유의 미개척지”를 없애서 “농민들의 생활에 필수적이던 중요한 부분”을 가로챘다. 그로써 도덕이 경제에 간섭할 수 있는 여지는 점점 사라졌다.


물론 근대적인 식민국가가 등장하기 전에도 세금은 걷혔고 농민의 생산물은 시장에서 거래되었다. 하지만 세금을 정하고 걷는 방식이나 지역의 시장에서 가격을 정하는 방식은 식민지 시기와 달랐다. 자신들의 생활양식과 문화, 도덕이 식민지에서 완전히 힘을 잃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더 이상 미래를 준비할 수 없게 되었다. 남은 방법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도시로 떠나 빈민이 되는 것이었다. 생계와 자급을 누릴 수 있는 여러 사회적인 장치들을 회복하려 했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도 국가의 완전한 전복과 파괴보다 도덕경제를 복원하려는 목표를 가졌다.


식민지 이전의 농민공동체에 주목했다고 해서 스콧이 농민공동체를 이상적인 유토피아로 보는 것은 아니다. 스콧의 말을 빌리면, “대부분의 농촌사회를 특징짓는 이러한 사회적인 장치들을 낭만화시키기 쉬운데 그건 심각한 잘못이다. 그러한 장치들은 근본적으로 평등주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장치들은 모두가 마을 내의 자원으로 생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과 때때로 생존이 신분과 자율성을 포기하는 대가이기도 했다는 점을 암시한다.…그런 장치들이 매번 작동하지도 않았고 작동한 곳에서도 필요에 따른 것이었지 이타주의의 산물은 아니었다. 땅이 풍부하고 노동력이 부족한 곳에서는 생계의 보장이야말로 노동력을 붙들어주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마을이 유지되려면 노동력이 필요하고 다른 마을로 떠나지 않도록 사람들을 붙잡아두려면 도덕경제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타적인 것이 아니니 도덕경제가 나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자기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타성을 가능하게 하고 그래야 서로가 서로에게 부담을 느끼지 않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 “도움을 주고받는 당사자들이 똑같은 지위에 있다면, 그런 교환은 균형을 이루고 안정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소자작농은 자신도 나중에 똑같은 도움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에, 소규모 자작농지를 가진 이웃의 수확을 도울 동기를 가진다. 그 누구도 자기의 의지를 상대방에게 강요할 수는 없지만, 그 자신의 이익에서 볼 때 자신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계속해서 받고 싶다면 기꺼이 그래야만 한다.” 결국 이타적이냐 이기적이냐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보는가이다.


스콧은 농민의 이런 욕구와 이해관계를 분석하려면 ‘방법론적 개인주의’가 아니라 농민이 “도덕적인 가치와 구체적인 사회관계의 체계, 다른 사람의 행동을 기대하는 방식, 자신의 조상들이 옛날에 비슷한 목적을 달성했던 방식을 제공받는, 그가 태어난 사회와 문화 속에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농민들의 삶은 호혜성의 규범과 생계에 대한 권리를 빼고서 이해될 수 없는데, 이런 규범과 권리들은 농사 주기나 의식주기에 잠재되어 있기에 스콧은 “속담, 민요, 구술역사, 전설, 농담, 언어, 의례, 종교”를 분석해야 그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온갖 통계자료를 내세우고 계산기를 두드려서 농민들의 생계를 보장하겠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먼저 그들의 삶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스콧은 식민지 시기의 농민반란이 성공하지 못했지만 완전히 실패했다고 보지도 않는다. 패배한 농민들은 적어도 문화적인 차원에서나마 자신들의 도덕질서(국가와 시장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되지 않는)를 만들고 공동체를 유지해서 시작의 가능성을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농민의 도덕경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 상징적인 피난처는 불안정한 생활을 위로받는 장소가 아니라 외려 하나의 탈출구이다. 이 피난처는 싹을 틔우고 있는 대안적인 도덕세계를, 즉 반체제 하위문화, 구성원들이 인간적인 공동체이자 가치의 공동체로 단결하도록 돕는 실존적으로 참되고 정의로운 하위문화를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이 피난처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한강의 기적’에 현혹되어 자기 생활터전이 공사판으로 변하는 것을 눈감아온 우리에게 스콧의 주장은 공상처럼 들린다. 경쟁력을 내세워 농촌을 버리는 판국에 다시 농민공동체라니. 특히나 우리사회에서는 국가나 자본에게 뭐 하나 받기는커녕 몸과 마음 다 내주기만 한 사람들이 열렬한 애국자요, 재벌들의 옹호자로 나선다. 이런 상황을 예상이나 한듯 스콧은 이런 모습이 왜 나타나는지를 설명한다.



왜 우리는 국가처럼 보나?



《국가처럼 보기》는 세상을 인식하는 우리의 사고방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잘 살 수 있게 해주겠다며 등장한 근대국가는 사회 전체를 자신의 수중에 놓으려 했다. 구석구석 세밀하게 통제하기 위해 국가는 지도를 제작하고 언어와 도량형을 통일하며 소유권을 확립하고 공간을 집중시키고 다양한 세계를 표준화한다.


국가처럼 보는 사람들의 눈에 “가치 있는 식물은 ‘농작물’이 되고, 그 농작물과 경쟁하는 종은 ‘잡초’로 낙인찍힌다. 그리고 농작물에 기생하는 벌레는 ‘해충’으로 낙인찍힌다. 또 가치 있는 나무는 ‘목재’가 되는 반면, 이와 경쟁하는 종은 ‘잡목’이 되거나 ‘덤불’ 쯤으로 여겨진다. 이와 동일한 논리는 동물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높은 가격이 매겨진 동물은 ‘사냥감’이나 ‘가축’이 되지만 그것과 경쟁하는, 혹은 그것들을 먹이로 삼는 동물은 ‘약탈자’나 ‘야생동물’ 쯤으로 간주된다.” 인간사회도 똑같이 나눠진다. 가치있는 인재와 쓸모없는 잉여인간로, 때로는 사회를 좀먹는 암적인 존재로. 왜 그렇게 나눠져야 하는지, 그렇게 나누는 기준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우리는 끊임없이 나눠지고 살아남기 위해 무한경쟁해야 한다.


스콧은 안타깝지만 우리가 진보적이라 믿는 “시민권, 공공 위생 프로그램, 사회 안전, 교통, 커뮤니케이션, 보편적인 공교육 그리고 법 앞의 평등 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모두 국가 중심적, 하이 모더니즘적 단순화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런 시각을 가지게 된 게 아니라 근대국가와 자본주의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단순해진 지도와 세계를 ‘의도적으로 만들었다.’


스콧은 이런 열망과 의식을 ‘하이 모더니즘(High Modernism)’이라 부르는데, 이 “하이 모더니즘은 하나의 신념으로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넓은 스펙트럼을 초월해 많은 사람들에 의해 공유되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하이 모더니즘은 사회 전체를 자신의 구상대로 만들려는 사람들의 공통분모였고, 르 코르뷔지에의 대도시 구상, 레닌의 혁명당, 소련의 집단농장 등으로 구현되었다.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는 재개발과 재정착도 마찬가지이다. 스콧은 사람들을 새로운 공간에 재정착시키는 것이 “경관의 변화라는 차원을 훨씬 능가”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사람들로부터 지금까지 자신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 대부분을 생산해온 기술과 자원은 물론 비교적 자급적으로 살 수 있었던 독립적인 생활수단을 박탈한다. 이러한 기술이 거의 또는 전혀 필요 없는 새로운 환경으로 사람들을 옮기는 것이다.” “농업의 근대화를 꾀하는 대부분의 국가 프로젝트 가운데 미처 잘 알려지지 않은 논리는 중앙정부의 권력을 강화하면서 농민의 자치권 그리고 중앙정부기관에 대한 농민 공동체의 자율성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모든 새로운 물리적 관행은 어떤 방식으로든 권력, 부, 지위에 대한 기존의 분배방식을 변화시켰다.” 이런 계획들이 엘리트들의 하이 모더니즘 미학을 실현할 수는 있겠지만 민중의 삶을 더 행복하게 만들수는 없다. 오히려 이런 계획들은 자치와 자급의 기반을 파괴한다.


《농민의 도덕경제》에서 농민정치가 식민지를 거치며 국가정치로 점점 통합되는 과정을 비판했듯이, 《국가처럼 보기》에서도 스콧은 화전민이나 이동하며 경작하는 농민들이 넓게 퍼져 생활하는 비국가적 공간이 국가적 공간으로 대체되는 과정을 비판한다. 스콧은 농업이 산업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또는 농민이 노동자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발전론을 따르지 않는다. 국가개발이 내세우는 사회복지 담론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콧은 그 과정이 언제나 “비국가적 자원들이던 과거의 공동체를 거의 항상 파괴하거나 분열시켰다”는 점을 지적한다.


근대국가의 확장을 비판하면서 스콧은 농민의 생활과 농업 속에 스며들어 있는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하려 한다. 아무리 좋은 명분을 내세워도 근대국가가 만들려는 유토피아는 다양한 삶을 표준화하고 단순화시키기 때문에, 이런 파괴에 맞서 지역적인 관행이 중요하다. 그러니 국가처럼 보지 말고 우리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고, 우리 눈의 가치를 우리 스스로 인정하도록 노력하자고 스콧은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힘을 가진 자들의 하이 모더니즘을 견제할 민중들의 ‘강력한 시민사회’이다. 민주주의가 필요하고 이 때의 민주주의란 토착적이고 경험적인 지혜를 뜻하는 “시민의 메티스가 조정이라는 방식으로 그 나라의 법과 정책을 끊임없이 수정”하는 것이다.


결국 중앙집중화되고 상품화된 삶에서 벗어나 자치와 자급의 기반을 다져야 하고, 그 과정에서 농민공동체는 사라진 지혜들을 보존해온 보물창고로 등장한다. 하나의 원리가 아니라 다양한 기준들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공존해야 사회가 지속될 수 있다.


스콧의 가장 최근작인 《지배당하지 않는 기술》은 삐에르 클라스트르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를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역사를 가진 사람들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로 불린다. 그만큼 실감나지는 않더라도 역사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역사는 국가에 대항하는 투쟁의 역사로 불릴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의 부제는 ‘동남아시아 고지대의 아나키스트 역사’이다. 스콧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버마, 중국에 걸쳐진 고지대의 주민들이 지난 2천년 동안 어떻게 국민국가의 지배를 피해왔는지를 설명한다. 아직 책을 다 읽진 못했지만 스콧은 그 기술을 산악지대에 흩어져 사는 것과 화전경작, 구전문화의 유지 등에서 찾는 듯하다. 스콧도 자신의 생각을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스콧처럼 보기



내가 스콧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국가‘를 배제한’ 또는 국가‘와 공존하는’ 정치공동체의 모습을 찾을 수 있어서이다. 스콧은 국가가 없는, 또는 국가라는 근대의 상상물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시기에 민중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근대국가의 등장이 그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나에 관해 얘기한다. ‘국사’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생각지 못했던 관점들을 스콧은 잘 지적해 준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근본적인 지적들을 어떻게 소화시킬 것인가이다. 오랫동안 국가처럼 보는데 익숙해진 우리는 근본적으로 생각하고 되짚어보는 방법을 이미 잊어버렸다. 그러니 우리 역시 추상적인 큰 담론으로 시작할 게 아니라 스콧처럼 하나의 구체적인 사례를 발굴하고 그것을 통해 우리의 현재모습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해야 한다. 스콧의 물음들을 가지고 우리 역사를 되짚어본다면 어떤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을까?


요즘 ‘보편적 복지’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나는 그 말에 호감을 느끼거나 신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호혜와 달리 보호나 보장이라는 말은 어떤 주체가 다른 누군가를 대상으로 삼는 말, 특히 국가가 시민들을 대상화시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왜 내가 국가라는 지배질서가 베푸는 시혜(사실은 내가 낸 세금!)에 매달려야 할까? 그 속에서 동등한 관계가 맺어질 수 있을까? 조금 다르게 물으면 국가는 왜 나의 삶을 보호하고 보장하려 들까?


예를 들어, 국가가 도시빈민의 권리를 보호하고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주 매력적으로 들린다. 그런데 그런 보호와 보장을 주장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은 그들이 도시의 빈민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도시빈민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들이 아니라 농촌에서 도시로 ‘밀려난’ 사람들이다. ‘자발적’으로 도시를 선택한 사람들일 수도 있지만 ‘다른 생계수단을 찾을 수 없어’ 도시로 밀려난 사람들이다. 그리고 국가가 그런 밀어내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국가의 보호/보장을 받으며 계속 도시에서 불쌍한 사람들로 살아야 할까? 언제 바뀔지 모르는 ‘국가의 선의’에 의존해서 그들이 계속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도시빈민들이 도시에서 계속 빈민으로 살도록 보장하는 것이 과연 그들의 삶에 이로울까? 이런 근본적인 물음 없이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선량한 오만’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이런 논리는 더럽고 치사하더라도 자기 땅을 빼앗은 강도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야 한다는 논리와 무엇이 다를까? 그래도 사는 게 어디냐라며 합의를 종용하는 야비한 변호사의 논리와 무엇이 다를까?


비슷한 질문을 이주노동자들에게도 던질 수 있다. 왜 이주노동자들은 자기 고향을 등지고 이곳으로 와야 했을까? 그들이 원해서 들어온 것도 있지만 우리가 ‘필요해서’ 그들을 불러들였고 ‘산업연수생제도’라는 야만적인 제도로 그들의 노동을 착취했다. 필요로 불러들인 사람들을 환대하기는커녕 착취하면서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보장하겠다고 한다. 뭔가 앞뒤가 바뀌어 있다. 우리가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권리를 보장한다는 생각 역시 전적으로 ‘우리의 생각’일 뿐 실제로는 이주노동자들이 우리의 생활을 보호하고 보장하고 있다.


요즘 들어 가장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사람이 남을 위해 살겠다는 사람들이다. 엄청난 사명감을 가지고 남을 위해 살지만 정작 그 자신은 자신과 불쌍한 그들을 구분한다. 아무리 좋은 명분을 대더라도 스콧의 표현을 빌면 그는 하이 모더니즘에 빠진 사람일 뿐이다. 그는 세상을 자기 눈에 아름답게 만들고 싶어 하고 다른 이들은 그 세상의 장식품일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들을 보호받아야 하는 나약하고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나와 동일한 존재로 볼 수 있는 관점, 내가 그들과 동일한 존재라고 선언할 수 있는 용기, 그들과 섞여 살아가는 구체적인 일상이다. 스콧은 그런 삶이 가능했고 지금도 가능할 수 있다고 우리를 설득한다. 귀를 기울여볼만한 얘기들이다.


반값 등록금이 화두이다. 그동안 근거 없이 치솟던 대학 등록금이 뭇매를 맞고 있다. 등록금이 제대로 책정되었는가의 여부를 떠나 그동안 사학재단들이 등록금을 어디에 써왔는지를 보자. <한국대학교육연구소>에 따르면, 2009년 1년 동안 전국 사립대가 땅을 사고 건물을 올리느라 쓴 돈이 무려 1조 2,668억 원이다. 그런데 그 중에 사립대 법인이 부담한 돈은 불과 1,366억 원(10.8%)이다. 결국 1조 원 이상의 학생등록금이 이런 일에 들어갔다. 학생들을 위해 그랬다는 건 궁색한 변명이다. 학생은 졸업해도 건물은 남으니까.


그런데 등록금만이 문제는 아니다. 대학을 다니며 생활하는 돈도 만만치 않게 든다. 지방에서 올라와 생활하는 경우 생활비는 몇 배로 뛴다. 예전에는 기숙사에서 생활하면 그나마 돈을 아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안 된다. 왜냐하면 요즘 기숙사는 대부분 민간기업이 관리하기 때문이다.


대학이 교육기관의 정체성을 버리고 사업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2005년 정부가 ‘대학설립운영규정’을 개정해 기업이나 개인이 기숙사나 식당같은 시설을 운영할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 기숙사들이 민간투자(BTL) 방식으로 세워진다. 기업은 일정 기간 동안 기숙사를 운영해 자금을 회수하고 15~20년 뒤에 기숙사를 대학에 기증한다. 대학 입장에서는 공짜로 건물을 받으니 이득이고, 기업은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받을 수 있어 좋다. 피해를 보는 건 일반 기숙사보다 2, 3배 비싼 입주비를 내야 하는 학생들이다.


그리고 2009년에 사립대학들이 기업들에 학내의 공간을 임대해서 얻은 수익이 총 1,225억 원이다. 이렇게 번 돈을 주식에 투자했다 2010년에만 약 150억 원의 손해를 보기도 했지만, 사립대학들은 수익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는다. 한국의 사립대학들은 교육기관이 아니라 영리를 추구하는 학원이니까.


지금 세종대에서는 학교법인 대양학원이 대학생과 교직원이 함께 운영하는 <세종대학교소비자생활협동조합>을 쫓아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세종대는 학내의 모든 매장을 공개입찰하겠다며 2009년부터 생트집을 잡아 왔다. 대학본부는 <대학생협>이 적자운영을 하고 적립된 복지기금을 장학금으로 내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그런데 학생복지위원회에서 시작된 <대학생협>의 목적은 이익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생활을 돕는 것이다. 싼 가격에 질 좋은 제품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실제로 <대학생협>이 운영하는 매점이나 식당은 기업체가 운영하는 곳보다 훨씬 싸다. <대학생협>의 존재와 활동 자체가 학생들의 복지와 연관되니 굳이 따로 학교에 돈을 내야 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민간기업의 운영체계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기업의 특성상 이익을 보려 할 텐데, 그런 기업이 영리를 추구하지 않는 <대학생협>보다 학생들에게 이로울리 없다. 더구나 협동조합은 일반기업과 달리 조합원들의 참여를 보장하는 민주적인 의사결정구조도 갖추고 있다. 물품이나 서비스의 가격부터 품질까지 조합원들이 확인하고 참여할 수 있다. 그러니 업체보다 <대학생협>이 학생들에게 이익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세종대는 막무가내이다.


결국 법정까지 간 세종대와 <대학생협>의 분쟁은 지금 2차 공판을 앞두고 있다. 학교 비리로 쫓겨났던 이사장이 복귀를 시도하는 와중에, 2011년 4월 세종대는 <대학생협>을 상대로 학교식당 및 복지시설의 운영권을 위임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1차 공판은 학교가 갑이니 어쩔 수 없다며 학교 측의 손을 들어 줬다.


법원이 정녕 대학의 공공성을 믿는다면, 대학이 정말 민주적인 공간이길 바란다면, 다른 판결이 나오리라 기대한다.

교육공동체 '벗'의 회지에 쓴 글이다.

총회에 강의를 갔다가 얼떨결에 조합원 가입을 했지만 어쩌면 그 얼떨결이 필연일 수도 있다, 필연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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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원고마감 3일 전에, 그것도 주말을 낀 채, 전화해서 원고를 달라는 불친절한 사무국에 불만이 생깁니다. 하지만 잘 보이면 밥을 얻어먹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아이가 어린이집에 간 금쪽같은 시간을 쪼개어 소식지 글을 씁니다.ㅎㅎ


이런저런 일로 계속 바쁘기는 하지만 대학교를 그만두고 나니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대학을 그만둔 이유는 카페 글을 참조해 주세요.^^). 아이랑 보내는 시간도 많아졌지요. 예전에도 아이를 좋아하긴 했지만 매일 품고 사니 아이의 모습이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자면서 쌔근쌔근 숨을 쉴 때 콩닥거리는 가슴도, 뭔가를 가리키는 작은 손놀림 하나도, 아빠를 쳐다보는 아이의 눈빛 하나도 이제는 하나의 언어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아빠들은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 대해 배울 곳이 없습니다. 마땅한 책도 없구요. 그래서 지난 1․2월호에 실린 박찬희 선생님의 글을 아주 공감하며 읽었어요. 남자들이 겪는 ‘사회적 단절감’이라는 말, 무척 공감합니다. 동네 공원에서 만나는 여성들의 눈에 남자는 무척 낯선 존재입니다.


그나마 저는 동네 도서관에서 주부들과 ‘사회과학강독회’라는 독서모임을 하기에 단절감은 적은 편입니다. 그리고 옷이랑 그림책이랑 필요한 것을 가져다 주시고 걷어 입히고 읽히니 돈도 거의 안 들고 참 좋습니다.^^ 단점(?)은 수다와 오지랖이 많이 늘어났다는 점?


동네에서 주부들이랑 얘기를 나누다보면 역시 최고의 화두는 교육입니다. 경제나 정치 쪽 책을 읽을 때는 보통 2시간이면 모임이 정리됐는데, 교육 관련 책을 읽으니 2시간을 넘기가 다반사입니다. 이제서야 고교평준화가 되는 야만적인 동네라 그렇기도 하고, 학원가가 밀집된 동네라 그렇기도 합니다. 학원을 보내는 엄마들은 보내서 걱정, 안 보내는 엄마들은 안 보내서 걱정입니다.


제가 대학을 그만뒀다는 소식, 앞으로 새로운 대학을 만들겠다는 다짐에 주부들은 많이 공감합니다(물론 공감만!^^). 뭔가 다른 대안을 찾으면 좋겠다는 욕구가 많습니다. 그러다 급기야 『영혼없는 사회의 교육』을 쓰신 이계삼 선생님을 직접 모시고 얘기를 들어보자는 사고를 쳤습니다. 아마 도서관이 아니라 독서회가 직접 저자를 모시고 강연회를 갖는 건 처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처음이라 불안불안 하지만 그래도 뭔가 재미있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도 큽니다.


저는 배움이라는 것이 꼭 학교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을 곳곳이, 수많은 사건들이 벌어지는 현장들이 배움의 터전이라고 믿습니다. 지금은 그런 공간들이 서로 엮이지 않고 모이지 않은 채 따로따로 존재하니 힘이 생기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 힘들을 그냥 엮어주기만 해도 새로운 배움이 시작될 거라 믿습니다. 제가 앞으로 하고픈 일은 그런 일들입니다(벗 조합원들의 많은 격려와 지지를!^^).


예전에는 그냥 머리로만 생각했는데 아이가 어린이집을 들어가면서 생활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저희 아이는 자존감이 강한 듯합니다(아이의 사주를 봐준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엄마, 아빠의 도움을 원할 때는 분명히 얘기하고 웬만하면 자기 손으로 뭔가를 하고 싶어 합니다. 20개월 된 놈이 밥도 혼자 먹고 옷도 혼자 입겠다며 나서는 걸 보면 대견한데요(물론 귀찮기도 하죠.ㅎㅎ).


문제는 어린이집에 보내니 그 체계가 걸립니다. 어린이집에 보낸 지 2주 정도 됐는데 아이의 눈빛이 쾡합니다. 혼자 밥 먹는 아이에게 밥을 먹여 주고, 혼자 물 마시는 아이에게 물을 먹여주고, 혼자 입으려는 아이에게 입혀주고.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나오면 한 10분 동안 아이는 아빠 품에 안겨서 멍하게 있습니다. 그 어린이집이 나쁘지 않은 곳인데, 여러 아이들을 적은 수의 선생님들이 ‘관리’하다 보니 아무래도 통제할 수밖에 없습니다(그런데도 왜 어린이집에 맡기냐구요? 엄마, 아빠도 살아야 하니까요...^^;;)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한정된 공간에 아이들을 두고 기르는 건 통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발상을 뒤집으면 어떨까? 닫힌 공간이 아니라 열린 공간을 성장의 장으로 만들면 어떨까?, 지금 제 고민은 그것입니다. 공동육아협동조합이나 대안학교이 동네에 있지만 그다지 땡기지 않는 건 그곳 역시 닫힌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지역사회와 소통하지 않고 땅과 소통하지 않는(개인적으로 농사를 짓지 않는 공동육아나 대안학교는 대안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닫힌 체계에서는 대안이 나올 수 없다고 믿습니다. 동네의 도서관, 복지관을 비롯한 공공시설, 동네 곳곳의 거리, 시민사회단체, 협동조합, 기타 등등의 공간들이 서로 엮여 아이들이 성장할 기반을 만들면 어떨까. 그러면 굳이 대학을 가지 않아도 생활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통제하지 않아도 스스로 규율을 만들고, 굳이 가르치려 들지 않아도 배움을 찾는. ‘아이 한 명이 자라려면 한 마을이 필요합니다’라는 말의 의미도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아빠는 이런저런 고민하며 그럭저럭 잘 살고 있는데,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면 참 걱정입니다.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를 보며, 한국에 있는 핵발전소들의 수많은 사건사고들이 소리소문 없이 감춰지는 것을 보며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러니 벗의 조합원들에게도 정당이 필요하다면 지금 녹색당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전에 <세계일보>에 썼던 글을 파일 정리하다 우연히 찾았다.
2003년에 쓴 글인데 별로 바뀐 게 없다.
참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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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대학에 관해 좋은 얘기를 듣기 어렵다. 학문의 전당이라 불렸던 대학은 입시부정, 임용비리, 회계비리 같은 부정을 키우는 곳이자 이공계 위기, 인문학 위기 등 위기를 낳는 모태로 변했다. 게다가 성폭력, 엄격한 도제관계, 시간강사에 대한 부당한 대우와 착취 등 폭력과 억압을 조장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왜 학문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걸까? 그 답은 이미 전 국민이 알고 있다. 바로 시선과 관심을 막으며 대학을 빙 둘러싸고 있는 ‘권위라 불리는 벽’들이다. 손오공의 여의봉처럼 자유자재로 늘어났다 줄어드는 이 벽은 밖으로 ‘대학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내걸어 개입을 막고 안으로 ‘대학 경영의 원칙과 효율성’을 외치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대학은 사학재단이라는 영주의 성채로 변했다. 교육부라는 군주의 대신과 계약을 맺은 영주는 성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 대해 결정권과 심의권을 가지며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한다. 성 내의 법률인 학칙도 영주의 마음대로 정해진다. 연초에 한번 세금을 바치는 학생들이 벌이는 등록금 투쟁을 제외하면 앞을 가로막을 장애물은 없다. 어떻게든 학생 수를 늘려 세금을 많이 걷는 게 중요하다보니 대학교의 교원 일인당 학생수는 1965년 23.2명에서 2002년 40.1명으로 늘어났다. 고등학교와 비슷한, 때론 훨씬 더 많은 학생들이 조그만 강의실에 갇혀 있다. 영주는 백성들의 말을 듣는 게 귀찮을 뿐 아니라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연히 교수충원이나 교과과정 개편도 학생들의 욕구가 아니라 영주에게 이윤을 가져다 주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영주와 계약을 맺고 학생들을 지배할 권위를 부여받은 기사들이 대학교수다. 그리고 이 기사들은 대학원생과 시간강사라는 부하들로 자기들만의 부대를 꾸리고 그 속에서 영주와 같은 권력을 행사한다. 똑똑한 부하들이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수도 있기에 기사들은 이 부대에게 더욱더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한다. 얼마 전 한 대학교수가 “내가 너를 여인으로 만들어주겠다”며 제자를 성추행했듯이 자신이 중세 시대 초야권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기사도 있다. 이 기사들은 학생들의 절대적인 복종과 함께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라는 부분에서도 학생들의 의견을 철저히 무시한다. 학위라는 갑옷과 학점이라는 창으로 무장한 이 기사들은 전문가주의의 쇠퇴라는 사회의 흐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정말 두려운 것은 이런 봉건질서의 완고함만이 아니라 학생들이 이런 권위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학생들은 대학의 봉건질서를 무너뜨리려 하지 않고 그 질서에 복종하며 착실히 계단을 밟고 올라가 기사나 영주가 되려 한다. 또는 만사를 귀찮아하며 스스로 농노, 노예가 되려 한다. 한국의 대학은 중세의 봉건제를 능가할 만큼 단단한 주종의 계약관계 혹은 먹이사슬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대학이 중세시대 등장한 공동체이기는 하다. 독일의 역사가 자입트(F. Seibt)는 대학이 신학공동체(universitas)에서 출현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암흑의 시대라 불리는 중세에도 대학은 가르치고 배우는 방식이 아니라 교수와 학생이 서로 질문을 던지는 토론공동체였고 권위로 인정되어 온 원전에 의문을 품었다. 토론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대학의 학풍은 그것이 자리잡은 지역사회까지 변화시켜내며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하지만 한국의 대학은 어떤가? 토론은 없고 권위만 있다. 그 권위의 합리적이고 정서적인 바탕은 일방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토론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 일반인들도 다 아는 상식을 왜 지성인들이 모를까?

시사인에 쓴 칼럼이다.
몇 줄이 짤렸고 분량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하긴 했지만(여차하면 다음 기회에 교수직의 실상을 폭로?ㅎㅎ) 대충 할 말은 했다.
2012년, 이제 비고용노동자로서의 삶을 새로이 시작한다.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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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부터 대학에서 강의를 했으니 햇수로 10년이다. 그동안 직함도 시간강사, 겸임교수, 연구교수, 객원교수로 바뀌었다. 직함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아직까지 정식으로 계약을 해본 적이 없다. ‘이상한 공장’ 대학에는 기본적인 규칙이 없다. 핸드폰으로 해고문자를 보내는 야만적인 규칙조차 대학에는 없다. 다음 학기에도 강의를 맡는다는 연락이 없으면 그걸로 끝이다.


이번에 통과된 고등교육법 개정안은 학기마다 맺던 고용계약을 최소 1년으로 연장시킨다고 한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이다. 계약을 해본 적이 없는데, 어떤 조건으로 강의를 맡는지 확인한 바 없는데, 기한만 연장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 결국에는 강의를 주겠다며 전화를 하는 교수들에게, 대학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다.


지난 해 시민교육이라는 과목을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어떤 알바를 하든 반드시 고용계약서를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연한 상식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청년유니온을 인터뷰하고 알바 실태를 조사해서 수업시간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나는 한 번도 고용계약서를 써본 적이 없다. 여기서 어떤 교육이 가능한가? 누가 누구에게 시민됨을 가르칠 수 있는가?


몇몇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권을 내세운 대학에서도 비정규직은 해고되고 어떤 강사들은 외부 프로젝트를 한다는 이유로 강사료를 받지 못한다. 학교 밖에서는 진보를 자처하는 교수들도 학내에서는 놀라우리만치 보수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이득을 보는 건 사학재단이고, 교수들은 이런 야만을 승인하고 때로는 결탁하며 자리를 보존한다.


강의를 하는 사람들만 야만의 상태에 놓인 건 아니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이다. 휴학하고 다른 학교 시험준비를 하는 ‘반수’를 막는다며 1학년생들의 휴학을 금지하는 대학들이 많다. 학생증이 은행의 체크카드로 변한 지 오래되었고, 학교 공간 곳곳에 기업들이, 상품의 논리가 침투했다. 이 모든 게 학교 발전을 위해서란다. 한국의 대학들이 제아무리 인문정신을 떠들어도 그곳은 이미 인간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상품의 공간이다.


그래도 대학에서 필요한 전공과 교양을 배우지 않느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학기 초마다 학생들은 듣고 싶은 과목을 수강하기는커녕 들을 수 있는 과목을 찾아 수강신청하느라 바쁘다. 그렇게 수강하니 당연히 수업분위기는 좋지 않다. 그리고 졸업반 학생들이 조별로 활동하는 수업, 토론하는 수업을 처음 했다고 할 정도로, 대학의 분위기는 갈수록 중고등학교를 닮아간다. 좀 쉬었다 하자고 하면 다들 책상에 얼굴을 묻는다. 뭐가 그리 피곤하냐고 물으면 쪽지시험에, 과제에 너무 힘들단다. 상대평가방식이 점점 더 세분화되니, 교수들이 가장 쉽게 성적을 매길 방법은 과제와 시험이다. 교육 원칙이나 소신 따윈 필요 없다. 한국의 대학은 학생이 아니라 학교를 위해 존재하니까.


이런 일이 가능한 건 한국 교육의 정점이 대학이고 교육의 목표가 학벌을 높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엄청난 적립금이 문제되어도 사학재단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대안학교가 발버둥을 쳐도 학벌의 그물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듯, 학생들이 계속 대학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조용한 노동자, 무기력한 학생, 영악한 교수, 오만한 사학재단, 부모들의 욕망이 교육을 빙자한 야만의 대학을 유지시킨다.


그래서 대학을 관두기로 했다.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 내 품위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교수라는 직함보다 새로운 교육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힘을 쏟으려 한다. 현장과 이론을 잘 아는 연구자, 그들과 학생을 이어줄 시스템, 시민사회의 다양한 공간을 활용한다면 야만의 대학을 무너뜨릴 새로운 대학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지 않다. 누군가는 이 공모관계에서 벗어나야 교육이 바뀔 수 있다. 나부터 시작이다.

 소위 ‘안철수 바람’이 잦아들지 않고 있다. 설마가 현실이 되니 온갖 예측이 난무하고, 박원순 변호사의 서울시장 당선은 기성 정치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정말 정치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걸까? 허나 몇몇 새로운 인물의 등장을 제외하면 지금의 정치구도는 새로움을 논하기엔 여전히 낡고 칙칙하게 느껴진다. ‘나는 꼼수다’의 성공이 화려한 조명을 받지만 듣고 즐기는 것 이상의 정치참여가 활성화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 색깔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사회에서는 ‘소속 없음’도 하나의 소속이다. 왜냐하면 소속되지 않겠다는 것도 소속된 자들의 신념만큼 강한 하나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무소속은 소속될 수 없는 사람을, 소속되기 싫은 사람을 뜻하기도 하니까. 정당정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소속 없음을 ‘냉소’나 ‘무능력’의 상징으로 보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한국의 정당법은 5개 광역시도 이상에서 1,000명 이상의 당원을 거느린 전국정당만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선거법은 정당에 소속된 후보자들에게 선거기호나 운동기간 등의 면에서 지나치게 많은 이득을 준다. 한국의 정치구조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진입을 가로막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정치규칙이 소속 없는 사람들의 ‘능력’을 능력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배제한다고 봐야 한다. 가령 2006년 지방선거 때 만들어진 <풀뿌리 옥천당>은 지역정당의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정당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강제로 해산되었고 법적인 처벌까지 받았다. 자신이 속할 곳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소속을 갖지 않는 건 당연한데도 정당정치를 외치는 사람들은 이를 문제삼지 않는다.


그리고 정부선거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중앙/지방선관위는 어떠한가? 이 불필요한 조직이 온갖 유권해석을 독점하며 선거기간의 정치활동을 막는데도 이 기관을 문제 삼는 정당정치주의자들은 많지 않다. 그냥 닥치고 선거나 하란다. 이런 상황에서 소속 없음은 냉소나 무능력이 아니라 치열한 고민의 산물이다. ‘닥치고 정치’가 ‘닥치고 투표’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기권의 정치’도 필요하다.


사회를 지배하는 규칙이 기득권층을 위해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나는 안철수의 등장이 흥미롭다. 준비 안 된 정치인이면 어떻고, 착한 자본가면 어떤가. 이 재미없고 갑갑한 한국 정치판을 뒤흔들 흥미로운 요소를 보탰다는 이유만으로도, 그가 손쉬운 방식으로 명망가 정당을 창당하지 않으며 버티는 것만으로도, 기성 정당에 쓱 들어가며 권력을 움켜쥐지 않는 것으로도 나는 안철수가 반갑다.


물론 마냥 반갑지는 않다. 왜 우리는 정치를 ‘사건’이 아니라 인물로만 사유하는가? 박원순 변호사의 서울 시장 당선도 마찬가지이다. 박원순이나 안철수라는 인물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다거나 없다는 것보다 나는 그들의 등장이 일으킨 파장에 관심을 둔다. 그 사건이 한국사회의 정치구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까?


그런 흐름을 보려면 우리의 잘못된 고정관념들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정치현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기본적인 관점 말이다. 정치와 이념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관점,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권력의 장(長)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정당이 아니면 선거가 의미없다는 생각도 바뀌어야 한다.


이 글은 우리 사회의 변화를 풀뿌리운동의 관점에서 해석하려 한다. 국회의원 총선과 대통령선거라는 큰 선거가 모든 정치 쟁점들을 삼켜버릴 2012년에 풀뿌리운동이 어떻게 다른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을지를 살펴보려 한다. 기존의 풀뿌리운동이 선거에 수동적으로 대응했다면, 최근 녹색당의 출현은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녹색당이 풀뿌리운동과 맞물릴 수 있는 접점을 찾아보려 한다. 서구에서 68혁명이 녹색정치의 문을 열었다면, 한국에서는 지역의 다양한 풀뿌리운동의 힘이 녹색정치의 기반을 다지고 있다. 이것은 한국정치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1. 정치를 오해하게 만드는 잘못된 프레임들


학자들이 쉽게 쏟아내는 추상개념들이 지금 이곳의 정치를 설명하는데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까? ‘탈(脫)’이라는 접두어를 단 여러 개념들, 예를 들어 탈이념, 탈물질, 탈정치, 탈정당이라는 개념이 현실을 얼마나 설명할 수 있을까? 철저히 기득권화되고 사유화된 정치에 대한 시민의 허탈함과 냉소를 어찌 탈이념, 탈정치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엄기호가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푸른숲, 2010년)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 각자의 삶에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은 채 그 답만을 가지고 도덕적으로 판단한다.” 탈정치는 타인에 대한 낙인이지 이해하려는 언어가 아니다. 즉 “‘탈정치화’라든가 ‘소비주의적’이라든가 ‘개인주의적’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도덕적 판단의 언어이다.” 이런 낙인이 자주 찍히는 청년들을 엄기호는 이렇게 옹호한다. “이들의 이야기에서 만난 것은 탈정치화가 아니라 정치에 대한 지나친 계몽이다. 이 세대는 정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너무 많이 안다. 너무 잘 안다. 너무 많이 알고 너무 잘 알아서 정치에 냉소한다. 이들은 정치에 대해 아무런 환상이 없다.” 계몽의 깊이가 이해나 공감의 깊이와 다르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계몽되어 냉소하는 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옳을까? 어찌 부르건 그것을 단순히 탈정치라 정의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청년만이 아니라 지역의 풀뿌리운동에 대해서도 기존의 정치해석은 탈이념, 탈정치라는 낙인을 자주 찍는다. 풀뿌리운동이 좌우의 이념 스펙트럼에서 어느 편도 아니고 선거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정치 풀뿌리운동’이라는 말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풀뿌리운동이라는 말 자체가 강한 정치성을 띠기 때문이다. 정치라는 말은 선거나 정당같은 제도화된 정치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장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와 의견을 나누고 조절하고 합의하는 과정을 뜻한다. 풀뿌리운동은 일상을 바꾸는 정치운동이다.


과거 식민지와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시민들이 정치라는 말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보인다면, 운동세력은 정치라는 말을 지나치게 순수하게 보려는 경향이 있다. 마치 정치가 높은 선을 구현하고 악을 몰아내는 방법인양 사고되는데, 사실 정치는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거치며 한 단계씩 발전하는 불순한 개념이다. 그래서 정치에 문제가 있을수록 더욱더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해야 변화가 가능하다. 풀뿌리운동은 기성의 정치와 다른 정치를 추구한다.


그동안 풀뿌리운동은 생활로부터 벗어난 변화가 아니라 생활과 연계된 변화를 꿈꿔왔다. 1960년대 이후의 주민운동, 빈민운동 등이 풀뿌리운동의 뿌리가 되었고, 1991년 지방자치제도의 부활 이후에는 제도정치와의 접목을 모색하는 시도들이 늘어나고 있다. 풀뿌리운동은 주민자치운동, 도서관운동, 보육운동, 학교급식운동, 참여예산운동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활동을 넓히고 있다. 풀뿌리운동은 당면한 쟁점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 시민을 참여시키고 그것을 통해 의식을 바꾸고 확장시키는 주체형성의 정치를 실천해 왔다. 이것은 왜 정치가 아니란 말인가?


탈정치라는 말이 낙인으로 찍히거나 남용되는 것은 현재의 정치현실이 과거의 언어로 해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울리히 벡(U. Beck)이 『정치의 재발견』(거름, 1998년)에서 얘기하듯이 “정치적인 갈등과 이해관계의 개성화는 또한 더 이상 탈참여도, ‘분위기 민주주의’도, ‘정치에 대한 염증’도 의미하지 않는다. 대신 모순적일 정도로 다양한 참여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들이 정치 스펙트럼의 고전적인 양극을 혼합∙조합하고 있다. 이로써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좌이면서 우로, 급진적이면서 보수적으로, 민주적이면서 비민주적으로, 생태적이면서 반생태적으로, 정치적이면서 무정치적으로 사고하며 그리고 행동한다.” 기성정치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인정하기 싫은 다양하고 혼합된 참여형태들을 탈정치나 몰정치, 반(反)정치라 규정한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탈이념 정치가 어떻게 가능한가? 이념을 벗어난다는 것은 이념이 없는 진공상태로 들어간다는 것이 아니다. 백지상태(tabula rasa)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겠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는 이미 이념이 존재하고 어떤 이념에 서지 않는 것 자체가 이미 어떤 입장을 뜻한다. 이념을 벗어난다는 것은 지금 현실을 지배하는 이념에 투항하겠다는 것인데, 그 역시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다. 지금의 현실을 유지시키려 노력하든 현실을 배반하든 그 역시 하나의 선택이고 아무 것도 없는 진공상태는 불가능하다. 하워드 진(H. Zinn)이 얘기했듯이 달리는 기차에는 중립이 없다. 중립은 환상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적 중립’이라는 신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정치적 중립이 불가능하다. 좌파의 이념이 온전히 자기 색깔을 드러내지 못했고 우파가 기득권으로 변질된 우리 사회에서 중립은 무기력이나 냉소와 동의어이다(‘닥치고 정치’가 가진 장점은 바로 그런 환상을 한칼에 베어버렸다는 점이다. 다만 ‘닥치고 정치’는 기차가 가야할 방향에 대해 아무런 의견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지금까지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는 개인과 시민사회단체들은 자신의 입장을 다시 고민해야 한다. 정치를 부정적으로 이해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지금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기득권들이다. 토미 더글러스(Tommy Douglas)가 ‘마우스랜드’라는 비유로 적절히 설명했듯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검은 고양이에서 흰 고양이, 얼룩고양이로의 교체가 아니라 생쥐들이 권력을 잡는 것이다.


정치의 의미가 혼란스럽게 사용되고 제대로 해석되지 않는 상황을 무조건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한길사, 2006년)에서 유럽의 전체주의운동이 성장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계급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정당들은 선전에서 더욱더 심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으로 되었고, 정치적 접근방식에서 더욱더 옹호적이고 과거지향적으로 되었다. 게다가 정당들은 어느새 중립적 지지자들을 잃어버렸다. 이들은 어떤 정당도 자신들의 이익을 돌보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에 정치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유럽정당체제 붕괴의 첫 신호는 옛 당원들의 탈당이 아니라, 젊은 세대로부터 당원을 모집하는 데 실패한 것과, 조직되지 않는 대중의 무언의 동의와 지지를 상실한 것이었다. 이 대중은 갑자기 냉담해졌고, 격렬한 적대감을 표명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갔다.”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은 이와 얼마나 다를까?


지금 한국의 정치를 정의하려면 탈정치나 탈이념이 아니라 정치가 벌어지는 ‘세계’의 파괴에 간해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이 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시민이 아니라 기득권층의 사유물인 정부이다. 한국에서는 정당만이 아니라 정부기구에 대한 신뢰가 낮은데, 이는 정부가 정치에서 벗어난 탓이 크다. 제주도 해군기지나 4대강 사업, 한미FTA처럼 정부가 정치의 틀을 벗어나 움직이고, 시민의 통제를 벗어나며 정치를 배반하고 있다. 정부가 앞장서서 정치의 세계를 파괴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하고 비판해야 할 지점은 바로 이 점이다. 비판을 받지 않고 당연히 인정되어온 상식에 대한 부정, 정부를 중심에 놓고 정치를 사유하지 말고 정치를 중심에 놓고 사유해야 한다.


이제 정치를 사유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의 화두가 핵발전과 탈핵(脫核)이기 때문이다. 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우리는 세계의 근본적인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핵이 폭발한 곳에 어떤 생명, 어떤 인간이 살 수 있단 말인가? 핵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정치의 미래는 없다. 이것은 이전의 인간들이 한 번도 부딪힌 바 없는 위기상황이고, 핵은 정치의 다양성을 가로막는 절대악이다. 핵은 정치를 절대폭력의 장으로 몰아간다.


더구나 한국사회에서 탈핵은 단순히 에너지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에너지정의와 환경정의, 사회정의의 문제이다. 탈핵은 수도권으로의 초집중화와 불균등발전, 중앙집권형 국가에 대한 비판이자 그들과 결탁한 독점재벌과 언론, 지식인들에 대한 비판이고 기술과 정보를 독점하고 공개하지 않는 비민주적인 권력에 대한 비판이다. 그런 점에서 탈핵은 반(反)자본주의, 반(反)국가를 선언하는 가장 정치적인 구호이고, 자치와 자급의 삶을 전제하는 근본적인 정치운동이다. 이것은 또 왜 정치나 이념이 아니란 말인가?


이런 흐름을 탈이념, 탈정치라 부른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위아래가 뒤바뀐 사고방식이고, 그런 삶이 우리의 미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전국의 다양한 풀뿌리운동들이 탈핵이라는 구호를 중심으로 모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지금 당장 그것이 하나의 이념으로 꼴을 갖추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새로운 이념이 탄생할 조건을 마련하고 있다. 이념의 의미를 너무 완고하게 파악하지 않는다면 이념은 좌표나 지표의 역할을 한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 총체적이고 전일적인 삶의 방식은 무엇인지,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이 조금씩 구체화되고 있다. 과제는 우리가 이런 고민을 현실로 소환하는 방법이다.



2. 세계의 위기: 정치의 어버이화와 청소년의 배제


아렌트는 『과거와 미래사이』(푸른숲, 2005년)에서 현재란 단순히 과거의 연장이나 미래의 전단계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지속적 투쟁, 즉 그가 과거와 미래에 대적하여 ‘그의’ 자리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시간 속의 틈새”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시간의 틈새로 스며들어 자신의 토대를 세우는 만큼 과거와 미래가 나눠질 수 있다. 시간이라는 연속의 흐름을 분열시키는 이 힘이 어떤 사건의 시작이자 우리의 현재이다. 우리의 현재는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오랜 세월 동안 자기 목소리를 내거나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민들이 곧바로 능동적인 정치주체로 나서서 정치활동을 펼치기는 어렵다. 그동안 풀뿌리운동은 이런 주체들이 성장할 수 있는 과정을 마련해 왔다. 풀뿌리운동은 소외되어온 시민이 직접 참여하며 몸과 마음으로 자신의 ‘시민됨’을 자각하고 능동적인 정치적 의지를 회복하는 과정을 마련해 왔다. 단순히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을 몰아내자는 주장으로 그치지 않고 시민을 정치의 주인공으로 세우려 한다는 점에서, 추상적인 이념이나 구호보다 실질적인 생활의 변화, 삶의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풀뿌리운동은 정치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꿔왔다.


그리고 풀뿌리운동은 목적으로 치우친 정치행위를 정치과정으로, 권위적이고 중앙집중화된 권력에서 자율적이고 분화된 권력으로, 효율성에서 공감으로,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에서 ‘지역적으로 생각하고 지구적으로 행동하라’로 정치의 무게중심을 옮겨 왔다. 그동안의 모든 새로운 움직임을 풀뿌리운동의 힘으로 소급할 수는 없지만 그 역동성이 한국의 시민사회에 영향을 미쳐왔음을 분명하다.


보통 풀뿌리운동의 의미를 지역공동체운동 정도로 제한하려 하지만 그것 역시 닫힌 프레임이다. 풀뿌리운동은 기득권층의 분할통치전략에 맞서 협동의 전략으로, 즉 “나도 그들이다.” “우리도 그들이다”이라는 자각을 일깨워왔다. 자기들끼리 잘 사는 공동체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마을을 만드는 것이 풀뿌리정치의 목표였고, 더불어 사는 관계망의 범위를 확장시켜 왔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집회에서 청소년과 여성들이 운동의 새로운 주체로 등장했다고 하지만, 사실 청소년과 여성들은 그 이전부터 정치의 주체가 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기존의 성인 남성 중심의 정치제도가 이들을 정치주체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안철수 현상의 긍정성은 우리의 정치세계를 꿀렁거리게 만들어 시민들도 함께 들썩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자 시민들을 쳐다보지도 않던 기성정당들이 시민들에 주목하고 있다. 물론 선거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다시 안색을 바꾸겠지만 시민들도 매번 당해온 배신을 똑같이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관건은 이 답답한 정치의 시간에 틈새를 만들어 현재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 틈새를 만들지 못하면 현재의 사건도 의미를 잃을 수밖에 없다.


이런 틈새를 만들려면 새로운 정치에너지가 필요하다. 단순히 정치신인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정치라는 현상에 활력을 줄 수 있는 정치주체, 세계에 새로이 출현한 존재가 정치세계로 충원되어야 한다는 얘기이다. 이런 존재가 없다면, 세계는 다양한 독특성을 흡수할 수 없어 파멸하게 된다(핵은 이 가능성을 근원적으로 차단한다).


그런데도 한국사회는 청소년과 청년의 정치참여를 금지하거나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다. 정당정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지적하지 않는 또 다른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기성정당의 청년위원회를 살펴보면, 청년위원회는 대부분 유명무실한 조직이다. 청년위원회는 청년답지 않은 45세 까지의 연령대를 포괄하고, 실제 청년들은 그 과정에서 거의 역할을 맡지 못한다. 조직만 있을 뿐 기능이 없다.


국회의원 연령대를 보면 그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비례대표를 포함한 제 18대 국회의원의 평균연령은 53.5세이다. 50대가 가장 많고, 40대, 60대가 그 뒤를 잇고 30대 당선자는 불과 7명이다(이런 현실을 감추기 위해 국회 홈페이지는 위원회나 소속정당, 당선회수, 당선지역별 현황을 두지만 연령별 현황을 두지 않고 있다). 적어도 국회 내의 정치는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정당만이 아니라 시민사회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시민사회단체에 소속된 활동가들의 평균 연령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 90년대 후반에만 해도 시민사회단체의 핵심은 20, 30대 활동가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분포가 점점 변하고 있다.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려는 청년들의 수는 줄고 있고, 시민사회단체 활동의 허리 역할을 맡을 활동가의 수도 줄어들고 있다.


<대한민국 어버이연합>보다 더 무서운 건 정당과 시민사회단체의 ‘어버이화’이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틈새를 만들 청년들이 정치세계에서 사라지고 있다.


청년에서 청소년으로 내려가면 더 끔찍한 현실이 기다린다. 한국의 교육은 정치를 금기어로 만들었다. 인터넷의 시대에 청소년들이 정보를 구하지 못할 리 없는데, 학교나 정부는 청소년들이 정보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못하게 한다. 2003년과 2008년의 촛불집회 때 좌우를 막론하고 반복되었던 폭력은 청소년들에게 입 닥치고 공부나 하라, 이제 알았으니 너희는 들어가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한국의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정치적인 입장을 가지는 걸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을 것이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의 가부장적인 부모들은 자식이 자신과 다른 입장을 가지는 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식들이 자신이 살아갈 세계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니 학교가 정치의 장으로 바뀌는 것도, 교사가 정당활동을 하는 것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이런 교육환경에서는 사회현상에 관한 정보가 아니라 ‘입장’을 가진 청소년들이 등장하기 어렵다. 입장이란 건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겪으며 생기는 체험을 바탕으로 삼는데, 학교와 학원, 집을 오가는 청소년들이 입장을 가지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똑똑하게 말하는 아이들은 많지만 그 똑똑함을 삶으로 드러내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갖가지 논리로 무장한 똑똑한 아이들이 정치에 냉소한다는 건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점이다. 알면서도 그리 되지 않을 거라 미리 냉소하는 마음은 세계를 파멸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것도 좋지만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연령을 낮춰야 한다. 이것은 한국의 정치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시도들 중 하나이다. 이를 통해 새로운 정치주체들이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등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2006년 9월에 설립된 독일 해적당(Piratenpartei Deutschland)은 2011년 베를린 시의원 선거에서 8.9%의 득표율로 15석의 의석을 차지하며 제 5당이 되었다. 소통과 공유를 중요한 기치로 내세우는 해적당의 평균연령은 30.2세로 녹색당의 평균연령 46.8세보다도 낮다. 더 놀라운 점은 16세 이상이면 당원이 될 수 있고 종교와 국적도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독일 해적당만이 아니다. 한국에도 도입된 주민참여예산제도를 처음 실시한 브라질에서도 16세 이상의 청년들이 투표권을 가진다.


이것은 특정 이념이나 정파를 위한 정치적인 고려가 아니라 어릴 적부터 정치적인 판단력을 기르고 연습해야 좋은 정치주체가 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의미한다. 19세 이상의 정당가입과 만 20세 이상의 참정권만을 인정하는 한국의 법률은 과거의 정치세계를 그대로 지속시키겠다는 의도일 뿐이다. 이런 세계에서는 과거와 다른 정치가 불가능하다.


다른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정당정치가 구태의연한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에도, 풀뿌리정치는 대안적인 정치참여의 틀을 실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11년 경기도 수원시에서는 청소년참여예산제가 진행되었다. 홈스쿨링을 포함한 15개 학교 만16세~18세까지의 학생 23명이 공개모집되어 방학 때 예산학교에 참여했다. 고등학생들이 모여 교육과 관련한 예산을 결정한다고 하니 그 수준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논의된 결과를 보면 그렇지 않다(아주 독특한 제안들이 나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른들이 모여서 논의한들 크게 달라질 것 없는 제안들이다).[각주:1]

순위

주  제

내   용

1

진로상담도우미(MY WAY HELPER)

학교상담가배치, 진로체험

1

학습공간 확충(우리들의 공부하는 행복한시간)

도서관열람실, 독서실 조성

3

청소년 동아리 지원(날개달기 프로잭트)

학교동아리공간, 동아리지원금

4

학교셔틀버스(학교가기가 제일 쉬웠어요)

학교 셔틀버스 운영

5

청소년 프로그램 홍보(니가 나를 알아?)

청소년 시설 및 활동홍보

6

청소년 놀이문화공간(노릿길)

청소년을위한거리, 문화공간

7

학교급식개선(잘 먹고 잘 삽시다)

위생과 질개선

8

봉사센터 네트워크

자원봉사연계시스템

9

길거리 동물구조대(청소년 119)

동물구조 청소년 활동지원

10

학교내 모의법정(청소년 배심원제)

학생자치권보장

순위외

무상교육실시

중,고등학교 의무교육실시



그리고 서울시에 주민발의로 제출된 학생인권조례가 “학생은 학교 안팎에서 모임이나 단체활동 및 정치활동에 자유롭게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는 점 역시 기대할 만한 일이다. 또한 다양한 지역의 풀뿌리운동이 진행하는 청소년의회나 청소년활동도 이런 정치성을 강화시키고 있다.



3. 풀뿌리정치와 징검다리 정당


그렇지만 이런 시도들만으로는 세계가 근본적으로 바뀌길 기대하기 어렵다. 일본의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다양한 생활운동들이 활성화되어도 보수적인 정치기득권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정치흐름이 형성되는 건 긍정적이나 그 흐름이 이미 존재하는 현실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현재를 만들어갈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기존 질서를 부정할 수는 있지만 더불어 살아야 할 사람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스스로 만드는 질서가 중요하지만 이미 있는 질서에 포획된 사람들을 탈출시키고 그들과 더불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풀뿌리정치가 자율적인 지역공동체를 꿈꾸지만 그들만의 리그로 끝난다면 그것은 사회를 바꿀 수 없다.


지금 한국의 풀뿌리정치가 새로운 정당을 고민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다양한 정치주체를 성장시킬 뿐 아니라 이들간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협동의 힘을 강화시키고 부당한 정치․사회질서를 재편해야 자치하고 자급하는 공동체, 공동체들의 공동체가 가능하다. 그런데 현실의 정치구조를 볼 때 정당을 완전히 배제하고 순수한(?) 시민정치의 힘만으로 정치세계를 바꾼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국가 내에서 국가를 배제하고 시장 내에서 자본의 논리를 배격하자는 전략도 있지만 이것은 특정한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한국처럼 권력보다 폭력의 논리가 앞서고 기득권이 거의 모든 사회자원을 독점한 사회에서는 소수의 엄청난 헌신과 순교에도 성공가능성을 장담하기 어렵다. 그리고 지나치게 많이 일하고 자기 목소리를 스스로 검열하는 한국사회에서 그 정도의 능동적인 에너지를 많은 시민들이 지금 당장 드러내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독일 녹색당의 탈정당정치 전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독일 녹색당은 ‘장기적인 안목의 생태주의’, ‘사회적 관심’, ‘풀뿌리민주주의’, ‘비폭력’이라는 네 가지 기본원칙을 부각시키며 독일의 정치세계에 자리를 잡았다. 그동안의 독일 녹색당 활동에 대해 여러 가지 평가가 가능하지만, 녹색당이 독일 정치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었고 녹색당의 기본원칙들이 독일과 유럽의 정치세계에서 차츰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정치구조의 면에서 녹색당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장했다.


• 경제의 독점과 중앙집권적 기구의 지속적인 성장 대신에 시민과 친숙하고 민주적으로 통제가능한 자기조정형태의 개발

• 행정업무의 단순화와 완전한 분권화

• 행정적 권한, 자치권, 그리고 주, 지역, 군, 자치단체, 이웃에 대한 재정세입 할당액의 증액

• 행정과 관련된 모든 정보의 검열 없고 신속한 공개

• 행정기관과 국회의 청문회에 참관하고 각 부문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을 시민단체와 결사체의 권리

• 시민으로부터 유리되고 직무가 명백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은 많은 자문 상담실을 일반적인 자문과 의사결정위원회로 대체. 자치단체, 군, 지역, 주, 연방의 차원에서 중요한 경제계획과 결정에 대한 이런 위원회들의 발언권 보장

• 직접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국민투표와 일반투표.[각주:2]


이런 내용들은 기성정당의 ‘집권전략’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대표를 자처하며 자신이 모든 권력을 가지려 하지 않고 시민들에게 권력을 돌려주겠다는 발상이, 자율적이고 자치적인 시민이 정치세계를 활성화시킨다는 믿음이 여기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런 녹색당 덕분에 독일에서는 다양한 시민사회운동들이 활성화될 수 있었다.


지금 한국의 풀뿌리운동이 녹색당을 고민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녹색당 홈페이지(http://kgreens.org)에 따르면, 녹색당은 “환경뿐 아니라 농업 살리기, 비정규직 문제, 소수자 인권, 방사능 먹거리 문제와 원전 폐기, 재생가능에너지, 동물권, 청소년 인권과 참여, 노동시간 단축과 생활임금 보장, 지속가능한 지역계획,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과 마을 만들기, 반전평화, 풀뿌리민주주의 등”의 다양한 의제들을 제기하고 이런 의제들을 “생태적 지혜와 사회적 정의라는 관점에서 들여다보고 풀어가고자” 한다고 밝힌다. 그 전에 없었던 새로운 제안을 하는 게 아니라 그동안 무시되어온 제안들을 녹색당이라는 틀을 통해 실현하겠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녹색당의 사무책임을 맡고 있는 하승수에 따르면, 녹색당은 반정당의 정당(anti-party party)을 지향한다고 한다.[각주:3]
기존의 정당정치를 반대하는 정당이라니 묘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정당정치가 가져온 폐해를 다시 정당정치로 돌아가서 해결하겠다는 것은 분명 ‘모순’이다. 그렇지만 사유화되고 독점된 정치구조를 외면한 채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꾸기도 어렵다. 그래서 시민들이 부조리한 세상에 좌절하지 않고 정치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줄 ‘징검다리 정당’이 필요하다. 누가 징검다리를 건너는가에 따라 구호와 성격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징검다리 정당의 정체성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다만 독일 녹색당의 경험에서 드러났듯이 권력을 집중시키는 정당의 속성과 권력을 해체하는 반정당의 속성을 하나의 조직 속에 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허나 괜스레 기존의 정당조직을 모방해서 조직을 형식화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자연계에 변이하지 않는 생명체는 없고, 환경의 변화에 맞춰 자신을 바꾸고 그럼으로써 환경을 바꾸는 생명체만이 오랜 생명력을 가진다. 정당을 인공적인 조직체가 아니라 하나의 살아있는 생물로 본다면, 정당도 그런 적응력과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려면 당원 한 명, 한 명의 의미와 실천이 정당의 조직과 연결되어야 하고, 그들이 자신의 정치언어를 가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당원들이 직접 만드는 당헌, 강령이 중요하다. 그리고 당헌과 강령이 당원들에게, 그리고 시민들에게 쓸모와 의미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당헌과 강령이 일상적인 언어로 술술 풀려야 하고, 당원들의 일상생활 속에 실현되어야 한다. 권력이나 집권이 아니라 당원의 욕구와 삶을 지지하는 정당은 생명력을 가지고 다양한 풀뿌리운동과 접속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의 정당들은 시민의 징검다리가 아니었다. 정치세계를 보존하고 활성화시킬 새로운 정당은 탈정당정치가 아니라 ‘비(非)정당정치’를 추구해야 한다. 모든 정치과정을 제도정치 속으로 제한하는 게 아니라 정치의 과정 자체를 넓혀 제도와 일상 속에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새로운 사건들은 이런 정치가 실현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4. 인공의 정치에서 번식하는 정치로


새로운 정치의 방식으로 많이 얘기되는 것이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팟캐스트이다. 실제로 서울시장 재보궐선거나 여러 정치적인 사건에서 이런 매체들이 TV나 신문같은 언론매체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고, 심지어 ‘나는 꼼수다’를 본딴 MBC의 ‘나는 하수다’처럼 공중파 방송이 이를 모방하는 특이한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정보를 주고받으며 소통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 봐야 할까? 그리고 정치도 이런 변화에 발맞춰 변화해야 할까?


사람들이 만나고 관계를 맺는 방법이 달라지면 그에 맞춰 정치의 방식도 당연히 변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변화를 기술의 변화에 따른 정치변화로 해석해야 할지는 의문이다. 한국사회에서 인터넷을 비롯한 소통기술의 발달은 현실의 닫힌 소통구조를 넘어서려는 욕망/열망과 맞닿아 있다. 현실세계에서 소외되고 배제당한 사람들이 사이버세계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강화시켜왔고, 현실세계에서 바이러스로 규정되고 금지된 담론들이 사이버세계에서 확산되어왔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지금처럼 많은 에너지를 인터넷에 쏟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새로운 경향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흔히 인터넷의 구조가 고구마나 감자가 수평으로 넓게 퍼지는 구조인 리좀(rhizome)을 닮았다고 얘기한다.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아니라 수평적인 연계망을 통해 비조직적으로 확산된다는 점에서 인터넷의 구조는 풀뿌리운동의 방식과 닮았다. 조양호는 『모이고 떠들고 꿈꾸다』(이매진, 2010년)에서 인터넷정치의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인터넷은 조직이 없이도 조직을 만들 수 있게 했다. 세상의 변화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일어나고 있는 지금, 고정된 조직이 아니라 유연하고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조직 아닌 조직이 필요하다. 조직의 규모를 키워서 영향력을 발휘하기보다는 조직과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 사람들의 영향력이 확대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이런 조직관은 다양한 접속을 가능케 한다.


사실 이런 조직관은 이미 풀뿌리운동에서 논의되던 바이다. 같은 책에서 이호는 풀뿌리운동이란 “‘권력에서 소외된 다수 대중’이 주체가 돼서 우리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는 사회운동”이라 정의하면서 풀뿌리운동의 활동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민들과 일상의 공감대를 좀 더 많이 형성하는 과정”이라 지적한다. 인터넷정치처럼 풀뿌리운동은 유연하고 개방적인 조직구조를 통해 다양한 주민/시민들이 서로의 삶을 지지하고 호혜의 관계망을 맺으면서 세계를 변화시키도록 지원해 왔다. 풀뿌리운동은 개인이 사회라는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성장하는 존재이고, 그래서 서로 돕고 보살피는 호혜의 관계가 사회를 발전시키는 힘이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풀뿌리운동은 경쟁과 생존투쟁을 극복하고 공생과 자율의 삶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이자 내 삶의 경험이나 의식과 분리되지 않은 정치구조를 만드는 방법, 나와 우리의 삶을 정치적으로 재구성하는 방법이다.


그렇지만 그동안 한국의 풀뿌리운동은 지역사회라는 경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세계로의 확장요구 앞에서 머뭇거려왔다. 이제 풀뿌리운동은 ‘번식하는 정치’를 요구받고 있다. 자신을 복제하는 정치 말고 외부로 활발하게 접속하며 자신을 변형시키는 정치 말이다. 인터넷이 고구마나 감자 같은 식물의 구조를 닮았듯이, 정치세계도 자연세계를 반영할 수 있다. 스테판 하딩(Stephan Harding)은 『지구의 노래』(현암사, 2011년)에서 세균들의 증식구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균류는 놀라운 지능을 가졌을 뿐 아니라 특이한 자의식도 있다. 이것은 균사체 속에서 균사들이 꼭지에서 꼭지 또는 꼭지에서 측면으로 서로 연결하면서 경이적인 의사소통 능력이 있는 네트워크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 네트워크는 우리 혈액 체계나 뇌 속의 신경회로와 매우 유사하다.…생물을 포함하는 모든 복잡한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균사체는 지적이지만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존재다. 인간의 파이프라인과 달리 균사체는 주위 환경을 파악하고 나면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법을 배운다. 균사체는 시간과 공간 모두에서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세균 종들 간에도 의사소통을 하며 그 결과로 여러 종이 혼합된 군집이 나타날 수 있다. 이 혼합된 군집은 단일 종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한다.…세균의 화학적인 의사소통 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이 의사소통은 인간언어의 기본적인 문법구조와 유사한데, 그래서 과학자들은 이제 세균의 통사론(統辭論)과 사회적 지성에 대해서까지 말하고 있다. 이 정교한 세균의 언어는 미생물 군집 내에서 다른 종들 간의 긴밀한 조정까지 가능하게 할 정도다.”


우리는 정치가 인위(人爲)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동물이나 신이 아닌 인간이기에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설명은 타당하지만 인위적인 정치의 논리가 반드시 인공(人工)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인공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욕망이 핵발전과 같은 파괴의 정치를 불러왔다. 그동안의 인공적인 정치는 사람의 관계와 정치적인 힘을 만들려(工)했고 그래서 더욱더 강한 힘을 욕망했다. 그래서 정파와 조직이 중요했고 규율과 규범이 강조되었다.


이제는 인공적인 정치에서 자연의 정치로의 인위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사람과 자원을 쓰고 버리는 근대적인 ‘소비의 정치’가 아니라 순환시키고 재활용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보잘 것 없는 균류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생명이란 근본적으로 불확실하다는 것,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네트워크를 맺으며 번식해야 한다는 것, 경험에서 배우며 향상시키는 지성을 가져야 한다는 그 지혜 말이다.


세계의 근본적인 위기에 맞서 풀뿌리운동은 공통의 과제를 찾고 공동으로 노력해야 한다. 각자가 추구해온 정체성을 버리고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연결할 수 있는 문법을 개발하고 이질적인 요소를 서로 소통하며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의제와 정책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우선순위를 정하고 관료제도와 자본의 저항에 맞설 수 있는 강한 정치력도 형성해야 한다. 가령 핵발전을 추진하는 원자력마피아를 해체하려면, 부패한 학자와 관료, 독점재벌, 언론들의 강력한 동맹을 해체시켜야 한다. 엄청나게 강한 정치적인 힘이 없다면 이런 카르텔을 깨기 어렵다. 단순한 구호만으로는 이런 힘을 만들 수 없다. 이미 기득권화된 정치구조에서 하나의 정당이 독자적으로 이런 힘을 만들 수도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풀뿌리운동이 구성할 새로운 정당은 다양한 정치적 힘이 접속해서 활용할 수 있는 허브여야 한다. 그러려면 시민사회운동이나 풀뿌리운동이 만든 의제와 정책을 정당이 받아들이는 과거의 방식을 넘어서야 한다. 이것은 기존의 독일 녹색당도 고민했던 바이다. 독일 녹색당은 지방의회와 연방의회에서 여러 시민사회운동단체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그곳에서 얻은 정보를 단체들에게 제공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독일 녹색당도 정당구조 자체를 바꾸지는 못하고 현실정치의 논리를 따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이런 구조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정당이 풀뿌리정치의 허브 역할을 맡을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새로운 정당은 앞서 얘기한 균류의 생명력을 배워야 한다. 여러 종의 세균이 뒤섞여 군집해서 의사소통하고 네트워크를 형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떨어지며 한 종이 해낼 수 없는 일을 하듯이, 정당도 그런 성격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강한 정치적인 힘을 만들며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뒤섞임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방식이 바로 ‘추첨제’이다. 추첨제가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라는 점은 이미 『일본 정신의 기원』(이매진, 2003년), 『선거는 민주적인가』(후마니타스, 2004년), 『추첨 민주주의』(이매진, 2011년)와 같은 책들에서 진지하게 논의된 바 있다. 민주적인 원리라는 점 외에도 추첨제는 권력을 순환시켜 전문가나 정파의 출현을 막는다. 그리고 추첨제는 정치를 근본적으로 불확실한 것으로 만들고 서로가 서로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연합하게 만들며 아마추어가 가진 경험을 중요한 지식으로 만든다. 마치 균류의 체계처럼.


그렇지만 추첨제만으로는 부족하다. 능동적인 참여의지를 가진 시민 없이 추첨제가 저절로 자리를 잡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풀뿌리정치의 역할이 중요하고, 정당 안팎에서 풀뿌리운동은 다양한 사건들을 계속 일으켜야 한다. 새로운 정당은 기득권화된 정치구조를 해체시키며 풀뿌리운동을 지원하고, 풀뿌리운동은 새로운 정당의 정치주체들을 발굴하고 성장시켜야 한다. 때로는 왁자지껄한 소란과 이질적인 대립이, 때로는 끈끈함 공감과 울림이, 때로는 화끈한 합의와 긴밀한 소통이 다양한 정치 에너지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정당은 ‘공유지로서의 정당’이어야 하고 그것을 통해 ‘번식하는 정당’이어야 한다. 누군가의 정당이 아니라 우리의 정당이 되어야 하고, 실제로 당원들이 당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자원과 기술, 사람이 접속하고 분화되는 플랫폼이어야 한다. 공유지로서의 정당을 만드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각자가 가진 것을 서로 나누는 것에서 공유는 시작된다. 나누는 것은 단지 물질만이 아니다. 내가 가진 지식, 물건, 공간 등 다양한 것을 나누면서 우리의 삶은 조금 더 끈끈해지고 조금 더 안전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끈끈한 공유지가 정치의 힘을 발휘할 때 주권에 포획되지 않는 다양한 정치력이 발휘될 수 있다.



5. 풀뿌리정치의 꿈틀거림


그동안 질기게 이어진 풀뿌리운동은 선거라는 제도정치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제는 탈정치나 탈이념이라고 매도당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가 마련되었고, 풀뿌리정치는 기성의 권력정치(power politics)나 정당정치를 변화시키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것은 한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고, 사건이기에 미래는 기대할 만한 것이 되었다.


그렇지만 모든 사건이 특정한 방향의 지향을 가지는 것은 아니고 사건이 특정한 성공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사건은 사건이기 때문에 터져 나오고 예측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니엘 벤사이드(Daniel Bensaïd)가 『저항』(이후, 2003년)에서 말하듯 “사건은 늘 너무 조숙하게, 때맞지 않게 시간을 거슬러서 출현한다. 사건의 힘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사건은 ‘자신의 미래에서,’ 자신이 창시하는 새로운 가능성에서 의미 있게 된다. 사건은 ‘자신에 대한 이해의 조건’을 자신 안으로 운반해 온다. 사건의 후예만이 이런 새로움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건은 가능한 것들의 뿌리에서 올라오기 때문이다. 사건은 가능한 것들이 놓인 지평을 바꾸고 ‘시간의 혁명’을 선언한다.” 지금 우리가 지켜보며 준비하는 것도 하나의 사건이다.


풀뿌리정치가 믿고 따라갈 모범이나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열심히 꿈틀댈 뿐이다. 겨우내 움츠려 있으면서 꿈을 길러서 봄이 오면 꿈을 튼다는 것이 바로 꿈틀거림이라고 함석헌 선생은 강조했다. 이 꿈틀거림이 정말 “무서운 꿈틀”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사나운 겨울바다, 같은 권세 밑에 갇히는 민중의 꿈”이고, “그 꿈이 터지고야 마는 봄”이 오기 때문이다. “삶은 절대이기 때문에 터지고야 만다. 말도 못하고 죽는 민중의 꿈틀거림은 생(生)의 항의(抗議)다. 삶의 외침이다. 삶의 음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이다. 말씀이다. 역사의 길이다. 내가 이름 없는 민중이라도 민중이기 때문에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각주:4]


그런 경계를 넘나드는 풀뿌리정치의 꿈틀거림이 2012년에 만들어낼 사건을 기대한다.

  1. 김광원, “참여예산, 제도보다 중요한건 주민참여!”, 2011년 11월 22일 ‘좌충우돌 참여예산, 우리 동네를 발견해줘’ 발표문. [본문으로]
  2. 스프레트낙․후리조프 카프라 지음, 강석찬 옮김, 『녹색정치: 전지구적 위기에 도전하는 녹색당의 이념과 활동』(정신세계사, 1990년) [본문으로]
  3. 하승수, “지금 왜 녹색당인가”, 《녹색평론》 2012년 1~2월호. [본문으로]
  4. 함석헌 지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생각사, 1979년) [본문으로]
학교에 강의하러 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한 남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내게 청량리로 가는 열차냐고 묻던 남루한 차림의 그 남자는 말이 고팠던지 계속 말을 걸었다. 이어폰을 빼고 눈을 맞추자 그 남자는 내게 스포츠토토 복권을 하냐고 물었다. 로또도 해본 적 없는 내가 당황하자 그는 자신의 복권을 꺼내어 설명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잘 써야 한다고, 자기 아는 형님은 2만원 넣어서 100만원을 탔다고 얘기하다 그는 갑자기 지갑을 꺼냈다. 낡은 파란색 지갑에는 복권 용지로 보이는 하얀 종이가 가득했고 다행히 천원 지폐 몇 장 외에 만 원권도 보였다. 실패한 희망이 가득한 지갑을 접으며 그는 이번에는 꼭 성공하리라 다짐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가카와 박원순 시장 얘기를 꺼냈다. 가카가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에 일감이 줄었다고, 박원순 시장이 바로 서울을 바꾸기는 어려우니 2년 정도는 기다려야 할 거라며, 나이든 사람들은 보수적인데 자신은 박원순을 찍었노라며 열변을 토할 때쯤 지하철은 청량리에 도착했다. 클라이맥스라 아쉬웠지만 지갑 안의 만 원권이 복권용지로 변하지 않길 바라며 그 남자를 보내야 했다.


남자가 내린 뒤 복권과 박원순의 관계를 찾으려 애를 썼지만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평소에 스포츠토토 복권을 하며 머리를 단련시키지 않아서일까? 내게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가 왜 그에겐 당연한 일상일까?


실마리는 다른 곳에 있다고 했던가. 내가 사는 용인시 수지구의 한 아파트를 지나며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작년, 그 아파트 단지의 벽에는 시민들의 쉼터인 토월약수터를 파괴하는 노인복지시설 건립을 반대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수지구에 몇 남지 않은 녹지를 보존하려는 좋은 마음이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아파트 벽 같은 자리에 이런 플래카드가 걸렸다. “신분당선 연장선 착공 경축! KTX-GTX 동천역에 환승역 추진하라!” 약수터를 지키자와 마을을 파헤치자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이걸 보며 나는 실마리를 찾았다. 가난한 사람들이 박원순을 지지하는 진보이고, 수지구에 사는, 분당을 꿈꾸는 중산층이 김문수와 가카를 지지하는 보수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건 인간의 마음을 단순하게 설명하고 자기 식으로 재단하려는 몹쓸 사람들이나 할 얘기이다.


내가 찾은 실마리는 우리 시대가 직면한 위기의 심각성이다. 도저히 함께 품을 수 없는 욕망들을 모두 움켜쥐고 살아야 할 만큼, 아니 그렇게 살 수밖에 없을 만큼 우리의 삶은 근본적인 위기에 처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으려 하고 가능한 많은 걸 더 빨리 손에 쥐고 싶어 한다. 그것이 결국에는 자기 삶을 파괴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는 꼼수다’를 즐겨 들어도 2012년에 세상이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정권은 바뀔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우리 삶의 위기를 해결하거나 욕망을 풀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두 손에 움켜쥔 욕망을 내려놓고 위기에서 벗어나려 적극적으로 몸부림을 쳐야 우리는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 내가 투자한 회사의 주가를 노동조합이 떨어뜨린다고 투덜거리지 않고, 집값을 높인다며 마을을 공사판으로 만들지 않고, 전력수요를 대비한다며 핵발전소를 짓지 않아야 우리는 가카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다.


1988년 귓 속에 도청장치가 있다며 뉴스 방송에 뛰어든 남자는 우리가 그런 세계에 살고 있을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폭로했다. 구속된 송경동 시인의 산문집도 그런 진실을 폭로한다. 제목부터 숨이 막힌다. 『꿈꾸는 자 잡혀간다』라니. 하지만 그는 감옥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나비처럼 훨훨 날아 나오는 꿈을 꾼다고 한다. 그 누구도 꿈을 가둘 수는 없다. 우리도 꿈을 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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