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 전, 전국언론노동조합 그린비출판사분회 성명서(http://www.twitlonger.com/show/llvqjd)와 그린비출판사의 호소문(http://greenbee.co.kr/blog/1798)을 읽었습니다. 노조는 "회사의 권한 남용과 억압적 태도에 우려를 표하며 시정을 요구"했고, 이에 출판사는 " 노동조합의 비상식적이고 억압적인 태도에 회사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 아니기에 누구의, 어떤 태도가 비상식적이고 억압적인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성명서와 호소문에서 몇 가지 쟁점이 드러났고, 이에 대한 회사 측의 충분한 설명이나 태도변화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1. 노조의 성명서는 "전체 회의가 사라졌고, 인트라넷에 자유로운 댓글 및 게시글을 쓰는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출퇴근 기록기가 설치되었고, 분 단위 임금 삭감 통보에 이어 징계가 논의되었습니다. 사전 설명 없는 갑작스러운 인사 발령이 이어지는가 하면, 노동통제가 강화되고 이전에 비해 급격하게 달라진 새로운 편집프로세스도 직원들의 충분한 동의를 얻지 못한 채 도입되었습니다. 사무실 이전에 따른 환경 변화, 명절 선물 폐지, 생일 선물 폐지 등 지면상 다 나열하지 못한 무수한 근무 조건이 한꺼번에 후퇴했습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출판사의 호소문에는 이런 지적에 대한 설명이 없고 대신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노동자가 "그린비가 독자와 필자들과 함께 모여 소통하고, 인문학을 함께 공부하는 커뮤니티로 만들고자 했던 웹사이트에서" " 그린비의 주요 필자를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그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대표이사에게 '표현의 자유'와 '노동자의 관점'을 운운하며 공격한 사태가 있었"다고 얘기합니다. 이 둘을 연결시키면 이 문제가 불거지고 난 뒤에 노조가 발표한 노동조건의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아요. 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2. 출판사는 "9시 출근, 6시 칼퇴근. 주5일 근무에 야근이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라고 밝히지만 노조의 문제제기는 출판사의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문화에 관한 것입니다. 설령 업무량이 적다손 치더라도 일을 진행하는 방식이 일방적이라면 그 부분에 대한 문제제기는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미 많은 걸 가지고 있는데 노동조합이 더 많은 걸 가지기 위해 회사를 '협박'한다고 보기에는 정황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노동자가 업무상 과실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고 해당 업무에 대해서는 징계위원회에 출석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해당 노동자가 받아들일 수 없는 건 '상습적인 근무태도 불량'이라고 합니다. 그린비출판사는 타임체크기를 설치하고 5분 이상 지각할 경우 징계를 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문화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노동자를 칼출근, 칼퇴근 시키기 위해 타임체크기를 설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기계를 설치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봅니다. 우리도 자본주의 기업이니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 딱히 더 할 말이 없긴 하지만 안 그러는 게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칼출근, 칼퇴근이 좋기야 하지만 출판업의 특성상 편집자가 회사를 나서는 순간 업무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고 볼 수 있을까요?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그것이 당사자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3. 업무에 관한 부분에서도 출판사의 징계사유서는 문제가 있습니다. 업무 과실로 인한 금전적 손실은 분명한 사실인데 "고성 및 불손한 태도", "직장질서 문란 행위"라는 사유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일반 노동자가 직장 상사(호소문에 나온 대로 편집장과 디자인팀장)에게 고성을 지른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직원이 관리자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소리를 지를 까요? 그리고 어떤 이유가 있어서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면, 일단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새로 도입된 프로세스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에 문제가 있어 지적을 한 거라면, 그런 문제제기는 정당하다고 여겨집니다. 문제제기를 태도의 문제로 전환시키는 건 올바른 논쟁방식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노동자는 회사에서 소리 지르면 안 되나요? 부당한 일이 있어도 그냥 참고 조용히만 말해야 하나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입니다. 더구나 '불손한 태도'나 '직장질서 문란'이 징계 사유로 올라온 건 참으로 유감입니다. 불손함과 문란은 상하질서를 전제한 말입니, 노동조합의 주장을 증명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우리 좀 불손해지면 안 되나요? 문란해지면 문제일까요?^^ 

 

4. 회사측이 노동조합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출판사는 호소문에서 "누구보다 단체협약의 원만한 타결을 위해 노력해야 할 노동조합이, 노동조합 활동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업무상 부주의와 직장질서 문란에 대한 징계과정을 빌미로 회사측을 비난하는 성명서까지 발표한 상황"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회사가 지탱하기 위한 최소한의 징계마저도 악의적인 선전으로 물타기하려는 그런 행태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그린비가 출간하는 책들의 성격을 볼모로 마치 '노조'를 탄압하는 회사로 몰아가는 노조가 진정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의심스럽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노동조합은 조합원인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아울러 노동조합이 기업 운영과 관련된 권한을 공유해야 그 기업을 민주적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다른 출판사에서 나왔지만 김상봉 교수님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책을 권합니다). 왜 노동조합이 그런 부분에 목소리를 내면 안 되는 걸까요? 그리고 왜 노동조합이 단체협약의 '원만한 타결'을 위해 노력해야 할까요? 노동조합이 팽팽한 대결을 지향할 수도 있지요. 그린비가 출간하는 책들이 진보적이라면, 출판사가 내부에서 자신의 관점을 실현하는 게 옳다고 여겨집니다.

 

5.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필자와 편집자는 동반자라고 봅니다. 도판이 빠진 책임은 일차적으로 편집자에게 있겠지만, 필자 역시 이차적인 책임을 집니다. 그렇지 않다면 함께 교정지를 검토할 이유가 없겠지요. 그리고 편집자는 필자가 넘긴 원고에서 오탈자만 찾는 기계적인 역할만 해야 하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책이 출판되는 건 보지 못했습니다. 편집자가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그 책임이 온전히 편집자의 몫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궁금증이 있기에 출판사의 호소문 만으로는 "밝은 눈으로 그린비를 지켜"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린비출판사에서 책을 낸 필자로서 출판사와 노동조합이 현명하게 이 문제를 풀어가면 좋겠습니다. 좋은 인문사회과학서적을 많이 출판하는 그린비출판사가 책 만이 아니라 기업 내부에서도 그런 관점을 실현하길 기대합니다. 그리고 노동조합이 거의 결성되지 않은 출판계에서, 노동조합이 있더라도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출판계에서 그린비출판사가 좋은 모범을  보여주길 기대합니다. 

 

이런 기대가 충족되려면 많은 관심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일단, 그린비출판사에서 책을 낸 필자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주시하면 좋겠습니다.

이 글에 댓글을 남겨주시면 입장을 같이하고 함께 지켜보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2013. 4. 30.

                                                                                                         하승우 제안드림...

하승우(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지역사회에서는 시민들의 다양한 공적인 활동들이 벌어진다. 지역정치는 주민 스스로 지역사회의 중요한 사안들을 의제로 만들고 이를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말이지만, 한국에서 지역정치가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주체화’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지역정치, 시민정치를 강조해도 그것을 실현할 주민, 시민이 없다면 그것은 민주주의나 정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주체 없는 정치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봉건왕조와 식민지, 군사독재로 이어진 질곡의 한국 역사는 자기 뜻과 의견을 펼치려는 주체를 탄압해왔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주체화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라 할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가 계속 제한되었고, 대안적인 정치나 경제에 대한 담론은 억제된 형태로 내면화되어왔다(특히 교육은 그런 억압을 내면화하는 중요한 장치였다).

그리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는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중요한 지역 의제도 언제나 중앙 정치인을 통해 드러나야 했고, 실제로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 권한은 중앙정부에게 있다. 1991년에 지방의회가 부활되고 1995년부터 지방자치단체장을 선거로 뽑았지만 정치무대에 올라설 수 있는 주체는 제한되었다. 그리고 중앙권력만이 아니라 지역 내에 형성된 각종 이권구조는 지방자치제를 딛고 자신의 권력을 공식화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지방자치제 부활 10년이 되어도 여전히 지역정치의 무대는 “기성정당의 원심력과 이권 브로커들, 지역 토호들이 판을 치는 아수라장”[각주:1]으로 묘사되기도 했는데, 10년이 더 지난 지금의 상황도 크게 달라진 바 없다.

런 구조에서 지역주민들의 목소리는 드러나기 어려웠고, 지방민의 목소리는 더더욱 반영되기 어려웠다. 지역정치 활성화의 전제조건이라 할 정치주체의 자존감이나 존엄함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구조였기에 정치는 언제나 정치인들의 전유물이었다.

이런 조건에서도 서로의 삶을 지지하고 북돋우는 공동체를 만듦으로써 지역정치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들은 계속되었다.[각주:2] 마을축제를 열고 협동조합을 만들고 공부방이나 대안학교, 도서관을 세우려는 시도들이 있었고, 시민들이 서로를 마주보고 지역의 주체임을 자각하며 공동의 힘을 강화시키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지역정치는 조금씩 부활했고, 그 토대가 되었던 공동체들은 규모만이 아니라 내부의 밀도에서도 그 힘을 쌓아왔다.

그럼에도 지역정치가 그동안 시민의 정치주체화를 가로막아온 정치구조나 사회구조를 변화시켰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지역공동체의 대표적인 사례라 평가받는 곳에서도 지역정치는 구조적인 변화를 꾀하지 않고 자기만족적으로 진행되곤 했다. 그동안의 시도들은 높은 평가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그렇다고 현재의 흐름을 무조건 긍정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이 글은 ‘연대’의 관점에서 한국 지역정치의 현재와 미래를 살펴보려 한다. 연대라는 말이 너무 자주 사용되고 그냥 시민단체의 명칭으로도 사용되는 한국인지라 때로는 연대의 의미가 퇴색되기도 한다. 그런데 인권활동가 류은숙의 말을 빌면 연대는 호혜적일 뿐 아니라 기꺼이 나서려는 자세이다. 연대는 “‘내가 노동자요’ ‘내가 빈민이요’ ‘내가 채무자요’ ‘내가 바로 박해 받는 소수자요’라는 인식과 선언”이고 “‘나는 그런 처지가 아니지만’ ‘나는 다행히 빠져나가고 성공할 수 있지만’이라는 가정법을 버리고 모두가 걸려들어 숨막혀하는 그물망을 찢어보자고 달려드는 자세”를 뜻한다.[각주:3] 이 정의에 따르면, 연대란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라 비대칭적인 관계를 대칭적인 관계, 우정의 관계로 만들려는 입장과 실천이다. 이 말에 지역정치의 미래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호혜의 관계가 연대로 발전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만남과 우정의 관계를 만들지 못한다면, 지역정치가 개별 공동체 내의 상호부조를 넘어 한국사회를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1. 왜 지역정치가 등장했는가?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지역정치라는 개념을 조금 더 분명히 정의해야 할 것 같다. 지역정치는 제도정치로 구조화된 영역을 넘어 “경제, 문화 등 총체적인 지역의 ‘구조화’과정에서 발생”하고 “지역의 산업구조나 인구 및 계급구성, 그리고 역사문화적으로 형성된 총체적인 지역의 ‘맥락’에 있으며 그 맥락을 낳게 하는 메커니즘 속에” 있다.[각주:4] 지역정치를 이해하려면 국가정치의 눈[각주:5]에 잡히지 않는 지역의 맥락, 즉 지역성(locality)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크리스텐슨(T. Christensen)은 지역성을 구성하는 요소를 크게 다섯 가지, 즉 크기, 인구밀도, 주민구성의 다양성, 지역경제구조, 사회심리(social psychology)로 정리한다.[각주:6]

먼저 크기란 주민 수를 뜻하는데, 그것이 지역정치에 중요한 이유는 크기가 조직(organization)의 필요성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소수의 사람들이 모였다면 구성원들끼리 서로 아는 사이라 공동체를 스스로 운영할 수 있지만, 크기가 커져서 사람들이 서로 알아볼 수 없으면 서로의 관계나 이해관계의 충돌을 조절할 조직이 필요하다. 따라서 크기가 커질수록 더욱더 많은 조직이, 그리고 더욱더 많은 정치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크기는 지역정치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둘째, 지역사회의 면적과 인구밀도도 지역정치에 영향을 미친다. 농촌은 인구밀도가 낮고 비교적 자급하며 서로 떨어져서 사는 반면, 도시는 인구밀도가 높기 때문에 여러 가지 시설(시장, 하수처리장, 공원, 경찰서 등)이 필요하고, 교통난과 같은 사회문제나 이해관계의 충돌가능성(주차나 소음, 쓰레기처리, 사생활 침해 등)도 높아져서 그런 갈등을 중재하고 해결할 기구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인구밀도를 어느 정도로 유지하고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해진다.

셋째, 주민구성의 다양성이란 인종, 계급, 문화, 직업, 나이, 성적 취향, 생활양식 등의 차이를 가리킨다. 크기가 같고 인구밀도가 동일해도 구성원의 성향이 다를 수 있다. 비슷한 직업과 재산, 나이와 비슷한 생활양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갈등이 비교적 적어서 지역정치의 역할이 줄어들 수 있다. 그러나 외국인과 함께 살고 빈부격차가 아주 심하며 가치관과 연령대가 천차만별인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산다면 갈등의 빈도도 높고 갈등이 폭력으로 치달을 수 있다. 그래서 크기와 인구밀도가 같다 해도 내부가 다양하고 복잡할수록 정치의 역할이 더 많이 요구된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사회가 이런 다양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처럼 주거를 격리하는 것이다. 이런 격리는 농촌보다 도시에서 더 많이 발생하고, 이런 문제를 다루기 위해 정치가 필요하다. 그리고 만일 다양성을 거부하는 정치인이 지방정부를 장악하면 공동체의 단일성과 동질성을 유지하려 할 테고, 그러면 공동체 자체가 격리주거지로 변해서 지역정치의 폭이 줄어든다. 반대로 다양성을 수용하는 정치인이 나서면 지역정치의 폭이 넓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성도 지역정치의 중요한 변수이다.

넷째, 앞서 다룬 크기와 인구밀도, 다양성이 ‘주민’이라는 개념으로 다뤄진다면, 경제구조는 ‘계급’을 반영한다. 농촌의 경제활동은 계급구조가 비교적 단순하고, 그래서 계급정치가 지역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런데 도시는 농촌과 달리 자급자족이 불가능하고 경제활동이 전문화되어 서로 다양한 재화와 서비스를 교환해야만 한다. 농민이나 노동자만이 아니라 공무원, 자영업자, 도시빈민 등 다양한 계급들이 서로 의존하며 이해관계를 조절해야 하기에, 도시에서는 지역정치가 농촌보다 활성화된다. 특히 부의 축적과 집중이 아주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에 계급에 따라 주거와 생활공간의 격리가 이루어진다. 또한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놓고 지역 내외부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기 때문에, 경제구조가 지역정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기업을 유치하거나 지역 내에 묶어두기 위해 지역주민들이 단합하기도 하고 그런 기업을 위해 생태계나 다른 공동체를 희생시키기도 한다). 도시경제의 전문화 정도와 상호의존도, 계급구조, 지자체의 경제상황과 목표 등이 지역정치에 영향을 미친다.

다섯째, 사회심리는 주민이 지역사회에서 느끼는 감정을 가리키는데, ‘지역정체성’으로 표현될 수 있다. 보통 이 사회심리는 가족과 친지 같은 1차 집단과 학교·직장·소모임 같은 2차 집단에 대한 소속감으로 드러난다. 1차 집단에의 소속감은 농촌과 소도시에서 우세하고, 2차 집단에의 소속감은 대도시에서 더 우세하다. 1차 집단이 발달된 곳에는 공동체의식과 일체감, 온정과 친밀감이 존재하는데, 이런 감정은 긍정적이지만 때때로 이런 장점이 비공식적으로 억압하고 순응을 강요하는 단점으로 변할 수 있다. 이런 비공식적인 영향력이 강해지면 1차 집단에의 소속감이 강한 곳에서는 지역정치가 활성화되지 못한다. 그러나 1차 집단에의 소속감이 높다고 해서 무조건 지역정치가 위축되는 것은 아니다. 때론 핵발전소나 핵폐기장, 송전탑과 같은 외부의 사안이 공동체를 자극할 경우 그런 소속감은 지역정치의 강력한 힘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그리고 지역사회가 도시화될수록 이런 1차 집단은 해체되고,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주민들은 2차 집단에 소속감을 느낀다. 도시민들의 2차 집단은 1차 집단만큼 강한 소속감을 주지 못하기에 사람들은 공동체를 추구하게 된다. 도시민들은 비공식적인 억압에서 비교적 자유롭지만 반대로 그것이 주는 보호나 소속감을 받지 못하고, 그래서 공동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지역정치가 활성화될 수 있다. 하지만 앞에서 봤듯이 공동체를 만들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주민들 간의 다양성을 배제하면 사회적인 격리로 이어져 정치가 활성화되기 어렵다.

이렇게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하고 그 복잡성을 이해해야 지역정치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 단지 몇몇 개인들이 느끼는 감정이나 의식만으로 지역정치의 가능성을 점칠 수는 없다.

이와 더불어 한국의 지역정치가 온전히 설명되려면 여기에 중앙집권제와 서울/지역의 모호함에 관한 분석이 더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지방자치제도 실시 이후에도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들은 청와대와 중앙정부에 의해 내려지기 때문이다. 지방정부의 권한이 커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결정적인 권한인 예산의 면을 보면 국세와 지방세의 비중은 여전히 8:2이다. 그리고 지방정부의 평균 재정자립도는 1995년 62.5%에서 2012년 52.3%로 계속 떨어지고 있다. 예산을 중앙정부에서 받아야 하기 때문에 지방정부의 자치는 허울에 그친다. 이것은 지역사회의 정치를 근원적으로 가로막는다.

그리고 수도권의 지역사회가 지방의 지역사회가 동일한 조건에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핵발전소를 비롯해 불편한 것들은 모두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이전시켰다. 수도권 주민들의 필요를 위해 지방민들의 욕구를 희생시키고, 이것을 무마하기 위해 예산을 놓고 복마전을 편다. 그래서 지역정치는 중앙정치, 지방정치라는 말과 더불어 사유되어야 하는데, 중앙정치/지역정치가 대비되는 키워드로 사용되는 반면, 지역정치와 지방정치의 연관성은 잘 논의되지 않는다. 좀 격하게 말하자면 한국사회에서 지방의 지역정치는 내부식민지에서 전개되는 일종의 해방운동이다.

또한 중앙으로의 집중은 지역성을 망각시킨다. 즉 수도권으로의 초집중구조는 지역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제임스 스콧(James Scott) 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이미 ‘국가처럼’ 보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지역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미 자신의 언어를 상실한 지역정치는 자신을 해명하거나 스스로 드러낼 수 없고 자신의 잠재력을 파악할 수도 없다. 예를 들어, 문학평론가 염무웅에 따르면 1960년만 해도 서울의 느낌은 지금과 달랐다. “1960년 초봄 필자가 대학 입학을 위해 상경하여 처음 목격한 서울은 21세기인의 눈으로 본다면 여전히 농경시대적 풍경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어서, 도심에도 나비와 잠자리가 날아다녔고 번화가 뒷골목을 조금만 들어가면 텃밭에서 자라는 고추와 상추를 쉽게 볼 수 있었다.”[각주:7] 그때는 서울특별시에도 농촌의 특성이 살아 있었고, 그것이 시민의 심성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지역성을 상실하면서 서울은 모든 면에서 외부에 의존해야 하는 도시, 자급능력을 잃어버린 도시가 되었다. 반면에 서울과 수도권의 풍요와 그곳의 문화코드는 지방의 거주민에게 심한 상대적 박탈감을 심어줬고 지방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결국 수도권과 비수도권 모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대면하지 못한다. 타자의 상실이 자아의 상실로 이어지듯이 수도권과 비수도권 모두 지역 고유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2. 한국 지역정치운동의 현재

한국의 급속한 도시화(통계청에 따르면 2010년 기준 82%, 국토해양부 기준에 따르면 2011년 기준 91.1%), 수도권의 높은 인구밀도(2011년 기준으로 서울시는 16,567명/㎢이고, 인구밀도 최저인 강원도는 89명/㎢으로 무려 186배의 차이를 보인다), 주민구성에서의 다양성 증가(대표적으로 국내 거주 외국인 주민이 2011년 전체 인구의 2.5%로 2010년보다 11% 증가했고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지역정치를 활성화시키는 요소이지만, 국가/도시정치체제의 비민주성과 억압성, 계급정치의 배제, 연고정치의 활성화는 지역정치의 활성화를 가로막았다. 여러 구조적인 한계들을 안고 있지만 시민들의 노력을 통해 한국의 지역정치는 조금씩 활성화되어왔다.

어떻게 보면 여러 제한요인들에도 한국의 급속한 도시화는 지역정치의 활성화를 자극할 수밖에 없었다. 정규호는 그동안의 도시공동체운동을 “근대적 도시화과정이 만들어낸 부작용들을 치유하고 극복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도시화가 만들어낸 조건과 바탕 위에서 공동체적 삶의 원리를 새롭게 재구성하기 위한 의도적 노력”이라 정의한다. 한국의 도시공동체는 단순히 전통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사회의 시대적 맥락과 조건에 맞는 공동체 모델을 만들어왔다는 것이다.[각주:8] 그러면서 정규호는 한국 도시공동체운동의 흐름과 특성을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도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한 ‘적응형’ 도시공동체운동(1960~1970년대), 거주공간의 강제해체과정에 반발한 ‘저항형’ 도시공동체운동(1980년대), 도시민들이 스스로 생활세계를 지키고 가꾸려는 ‘방어형’ 도시공동체운동(1990년대), 국가나 시장과 다른 대안적인 모델을 만들려는 ‘창조형’ 도시공동체운동(1990년대 후반)으로 보고, 최근에 등장한 도시공동체운동의 성격을 ‘협력형’이라 정의한다. 이런 공동체운동에서 지역정치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이런 흐름이 기계적으로 구분되기는 어렵고, 하나의 공동체 역사에도 다양한 기운이 섞여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앞서 지역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인 빠른 속도의 대도시 형성과 급속한 인구증가, 대단위 아파트 단지의 높은 인구밀도, 그에 따른 주민구성의 다양성의 증가, 농촌의 몰락, 1차 집단의 빠른 해체와 소속감의 상실, 수도권으로의 집중 등이 도시공동체의 형성과 지역정치 활성화를 자극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잘 알려진 성미산마을을 비롯한 수도권의 도시공동체들이 지역정치에 개입해왔다.

반면에 농촌의 지역정치는 도시공동체운동의 그늘이라 얘기될 수 있다.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인구와 농업의 쇠락, 정체성의 상실, 농협이나 관변단체들의 지역사회 장악력 등은 지역정치의 활력을 빠른 속도로 감소시켰다. 반면에 이주민의 증가에 따른 다양성과 공동체의 쇠락이 지역정치를 활성화시키기도 하고 지방정부가 지역정치를 자극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전라북도 진안군에서처럼 마을만들기운동이 활성화되기도 하고, 충청북도 옥천군처럼 주민들 스스로 지역언론을 만들고 지역비전을 세우며 삶을 기획하는 곳도 등장했다.

아울러 도시와 농촌을,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잇는 소비자생활협동조합운동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소비자생협연합회로 ‘한살림’, ‘아이쿱생협연합회’, ‘여성민우회생협연합회’, ‘두레생협연합회’ 등이 활동하고 있고, 안성·원주·인천·대전 등지의 의료생활협동조합, 원주의 ‘밝음신협’이나 성남의 ‘주민신협’, 서울의 ‘논골신협’과 같은 신용협동조합 등 다양한 협동조합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런 협동조합들은 지역사회를 근거로 활동을 펼치고 있기 때문에 지역정치의 주요한 주체이다.

이런 활동들에서 여러 가지 희망을 찾을 수 있지만 크게 세 가지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지역정치는 전문가와 아마추어의 구분, 엘리트와 대중의 구분을 극복하고 있다. 정치는 더 이상 정치인들의 독점물일 수 없고, 주민들은 지역의 전문가이자 지역을 변화시키는 주체로 성장하며 지역정치를 활성화시키고 있다. 주민/시민단체나 주민자치센터, 생협 등에서 활동하며 시민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있고 정치의 주체로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기존의 대의기구마저도 주민의 ‘대표자’가 아닌 ‘대리인’ 개념으로 변형되고 있다.

둘째, 지역정치는 추상적인 명분이나 이데올로기보다 구체적인 생활의 욕구를 반영하면서 참여를 활성화시키고 있다. 기존의 국가정치가 대의(大義)를 빌미로 국민을 동원하려 했다면, 지역정치는 보육이나 청소년교육, 보행로, 미세먼지 등 주민들이 생활하면서 느끼는 문제를 주민들이 직접 해결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피부에 와 닿는 문제이고 참여의 결과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에 주민들은 참여의 비용이나 불편을 감수하면서 지역정치에 개입하고 있다. 한국의 몇몇 지역에서 활성화되고 있는 주민참여예산제의 경우, 합리적인 예산편성만이 아니라 주민참여를 자극하는 매개로도 활용되고 있다.

셋째, 지역정치가 국가정치의 변화를 이끄는 ‘정치의 역전현상’이 서서히 등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1998년에 시행된 정보공개법은 1991년에 제정된 청주시의 행정정보공개조례를 받아들인 것이다. 국가의 법률이 지역을 이끄는 방식이 아니라 지역의 조례가 법률의 변화를 이끌고 있는 셈이다. 단지 정보공개만이 아니라 학교급식조례나 주민소환조례, 보육조례, 청소년인권조례, 여성발전기본조례 등 국가차원에서 시행되지 않았던 혁신적인 조례들이 법률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

이런 지역정치가 지향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단순히 제도를 바꾸거나 대표를 선거에서 당선시키는 것에만 목적을 두지 않는다. 래빈(D. Levine)의 말처럼 지역정치의 “진정한 도전은 빈민을 위한 선택이나 목소리 없는 사람들을 위한 목소리가 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진정한 도전은 민중의 목소리에 힘을 싣고 그들을 신뢰하며 그들이 일을 시작하게 하는 것”이다.[각주:9] 주민은 의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의견을 표현하는 법을 모르거나 서툴 뿐이었고, 기성체제에서 배제되어온 주체들(subaltern)이 지역정치를 통해 자기 목소리를 내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교육이나 소득수준이 낮은 빈민계층이나 가정에 얽매여온 주부들은 경험적 지식을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런 변화가 있었기에 여러 구조적인 조건들이 지역정치의 가능성을 차단해왔음에도 그 가능성을 부정적으로만 평가하기는 어렵다. 다만 한국사회의 변화가 지역정치에 또 다른 과제를 던지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3. 지역정치의 과제는?

사회학자 바우만(Z. Bauman)은 공동체주의를 이렇게 비판한다. “공동체주의 복음이 말하는 공동체는 큰 글씨로 쓴 집 (…)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개인적 경험의 문제가 아닌 아름다운 동화에 더 가까운 그런 종류의 집이다. (…) 한마디로, 집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의 화폭에는 대체로 어두운 색깔이 없어야 한다.”[각주:10] 바우만은 공동체 자체를 비판하기보다 공동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과 섞일 수 없는 것을 배제하고 적대를 제거하려 든다고 비판한다. 아울러 바우만은 지역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생활정치가 사유화되고 있는 공적인 영역을 재점유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바우만의 비판을 한국에 무조건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의 지역공동체가 이질적인 것이나 적대를 배제하거나 제거하려 든다는 점, 제도정치와 공적 정치영역을 장악하지 못하고 지역정치를 방해하는 정치․사회구조를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점(또는 아직 그만 한 힘을 모으지 못했다는 점)은 고민할 만한 내용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이런 내용을 살펴보자.

서울특별시 마포구의 성미산마을은 서울시 마을공동체사업의 모델이 되기 전부터 유명세를 탔다. 성미산마을의 주민이자 주요한 화자(speaker)인 유창복은 공동육아어린이집이 성미산을 지키는 주민운동으로, 마포두레생협, 성미산학교, 동네부엌 등의 마을로 발전했다고 설명한다.[각주:11] 유창복의 설명에 따르면 성미산마을이라 불릴 수 있는 기관은 자체기관 2곳, 교육 9곳, 경제 12곳, 문화․동아리 11곳, 환경 3곳, 복지 1곳, 미디어 1곳, 기타 2곳, 그리고 함께하는 단체 18곳이다. 그러니 총 60곳의 기관들이 성미산마을이라 불리는 곳을 구성하고, 이 마을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으로 집약되지 않고 촘촘한 관계망으로 구성된다.

주민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욕구를 실현할 다양한 기관들을 만들어온 점은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특히 2007년 국토해양부의 시범마을사업으로 선정되고 ‘(사)사람과 마을’이 만들어진 뒤 성미산마을은 다양한 사업을 펼쳐왔다. 이런 활동과 사업들을 기반으로 지역주민들의 결속력이 강해졌고 그만큼 지역정치도 활성화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성미산마을이 유명해지면서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이 그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1세대에서 3세대까지 세대가 구분될 만큼 다양성이 증가되었다. 그렇게 마을의 크기가 커지고 주민구성의 다양성이 증가하면 내부정치가 활성화되어야 하는데, 세대가 구분되며 1세대가 지역사회의 주요한 결정을 이끄는 상황을 보면 그렇게 판단하기 어렵다. 외려 2차 집단의 정체성이 1차 집단의 정체성처럼 굳어지는 현상, 즉 비공식적인 의사결정절차가 활성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특히 마을이 외부자원의 의존하는 비중이 커질수록 그런 1세대의 주도력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지금은 성미산마을의 주요 자원이 정부나 공기업, 민간공익재단, 시민단체들의 프로젝트에서 들어오고 있다. 예를 들어, 성미산마을을 대표하던 공동체라디오 마포FM, 사람과 마을, 성미산마을배움터, 성미산마을극장 일자리, 성미산학교사회적일자리사업부 등은 외부자원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각주:12] 그럴 경우 마을의 역사와 상황을 잘 아는 1세대의 발언력이 강해지고 화자의 역할도 1세대가 맡게 된다. 1세대가 이런 경향을 주도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외부 자원을 지원받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그런 가능성을 더 높일 수 있는 능력들이 축적되면서 마을을 대변하는 주요한 화자들이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성미산 마을의 외형이 커졌지만 그만큼 내부의 결속력이 커졌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성미산마을의 주요한 기관 중 하나인 마포두레생협이 확장되면서 내부의 관계망보다 확장에 치중했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도 그런 의문을 반영한다(대표적으로 두레생협서울이사회 구성과 관련된 논란).[각주:13] 그리고 세대 간의 차이가 불거지고 갈등하는 현상도 그런 결속력에 의문을 던지게 만든다.

지역정치의 원래 목적에 따르면 이런 경향이 바로잡혀야 하지만, 대표에 집중되는 한국사회의 특성 때문에 이 경향은 수정되기 어렵다. 그리고 도시에서 마을과 공동체라는 것이 빠르게 소비되고 상품화되는 현상도 피하기 어려워졌다. 예를 들어, 공동체로 소문이 나면서 주거비용이 높아지는 현상도 피하기 어렵다. 서울시 마을공동체 사업의 또 다른 모범으로 소개되는 장수마을에서도 마을공동체로 소문이 나면서 집주인들이 세를 올려 세입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각주:14] 이런 현상은 마을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과도 거리를 만들 수밖에 없다. 주거불평등이 심각한 한국사회, 특히 수도권에서 공동체를 소비하는 현상은 공동체가 격리방식을 택하며 지역정치를 회피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성미산마을이 자랑으로 내세우는 ‘하고 싶은 사람이 한다’는 말은 연대의 관점으로 보면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성미산마을이 이성애 가족 중심으로 관계망을 형성하여 마을사람이라는 느낌을 못 받는다는 지적에, 스스로 커뮤니티를 만들어야 한다[각주:15]고 답하는 것은 연대의 취약성을 드러낸다. 다가오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스스로 다가서는 것이, 그리고 우리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 연대라면, 하고 싶은 사람이 해야 한다는 관점은 연대의 올바른 관점이 아니다. ‘스스로의 변화’만 강조하는 것은 소수자들이 겪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구조를 ‘그들의 문제’로 만들거나 ‘공동체’로 ‘배타성’을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다양성의 증가가 새로운 형태의 격리를 낳는다면 그것은 지역정치를 활성화시키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역정치가 활성화될 수 있는 조건이어도 그 역량이 고루 분배되고 새로운 정치주체가 지속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면 정치의 힘은 축소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은 지역정치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제도정치에의 관여나 공적 공간의 확보라는 측면에서도 성미산마을이 미래를 장담하기는 어렵다. 2012년에 홍익대 재단이 성미산마을의 형성 계기인 성미산을 개발해서 학원을 이전한 것도 일종의 징후이고, 성미산마을이 관계망으로 이어진 것은 물리적인 공간을 장악할 능력이 떨어진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리고 2010년 지방선거 당시 마포 아 선거구에서 진보신당 의원이 당선되기는 했지만 성미산마을이 내세운 후보는 마포 사 선거구에서 떨어진 점도 그런 점을 반영한다.

이런 문제가 도시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충청남도 홍성군 홍동면은 ‘위대한 평민’, ‘더불어 사는 평민’을 양성하는 풀무학교로 유명한 곳이다. 풀무학교는 소규모로 게토화된 대안학교와 달리 지역과 학교의 연계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학교는 지역과 유기적 생활권을 이루는 곳입니다. 지역은 열려진 학교이고 또 학교는 지역의 일부라는 것은 우리나라 교육계에서도 자주 했던 말 같습니다. 학교 안에 작은 사회를 만들자, 교육사를 보면 그런 주장을 한 이도 있었지만 제대로 실현하기도 어렵고 오히려 실제 사회에서 더 생생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지역과 유리되면 학교는 산 지식의 생동감을 잃고 스스로 갇히게 됩니다. 지역의 교육력을 활용하고, 또한 학교를 움직이는 원리가 지역사회를 움직일 때, 지역과 학교는 서로 힘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에서 그 의지를 느낄 수 있다.[각주:16]

그래서 풀무학교는 단순히 학교를 운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풀무신용협동조합’과 ‘풀무생협’을 만들어 지역경제를 뒷받침했으며, <홍성신문>이라는 지역언론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전국 정농회 홍성지부’, ‘지역사회연구회’, ‘갓골어린이집’, ‘풀무학교생협’, ‘밝맑도서관’, ‘지역센터 마을활력소’ 등을 만들어 마을거점들을 활성화시키고 있다. 또한 풀무학교 출신들이 홍동면에 정착해 다양한 지역 활성화 실험들을 펼치고 있다. 새로운 문명을 주도할 ‘새로운 농촌’을 만들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품은 풀무학교의 실험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각주:17]

그런데 이런 작은 실험들을 구조적인 변화로 이어갈 방법은 50년을 넘긴 풀무학교 역사에서도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유기농산물을 재배하고 이를 가공하여 생협을 통해 유통하는 체계가 마련되고 있지만,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물류체계가 농업을 살릴 방법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예를 들어, 현행 식품위생법과 보건복지부령에 따라 유통되는 식품들은 법이 허가한 기준들을 충족시키는 시설에서 생산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기준들은 대부분 공장 중심의 기준들이다. 이웃집 할머니의 손맛이나 장맛도 공간과 시설이 받쳐주지 못하면 ‘공식적으로’ 유통되지 못한다. 농업이 아닌 농사의 관점에서 보면 농촌의 힘이 진정 강해지고 있는지, 풀무학교의 이상이 얼마나 실현될 수 있을지 물음표를 던지게 된다.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자결한 이경해 농민은 WTO 사무총장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는 곧 아무리 노력해도 턱없이 값싼 수입농산물 가격을 따라잡을 수 없음을 알았고, 더욱이 우리의 작은 농토는 대수출국의 1/100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수입농산물은 여기저기 범람하였고 나와 우리 친구들은 이를 피해 이 작목 저 작목으로 틈새를 찾아다녔지만, 그러나 항상 그 틈새에서 도망나온 다른 동료들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라며 좌절감을 토로했다. 이것은 특정한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한국 농촌의 보편적인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풀무학교의 힘이 강하지만 한국에서 섬으로 살아남기는 어렵다는 점을 생각하면, 외부와 어떻게 소통하고 연대할 것인가는 중요한 과제이다. 홍동면의 경우 외부에서 풀무학교로 사람들이 들어오고 주민구성의 다양성이 증가하면서 지역정치가 활성화될 가능성은 높아졌다. 그리고 농민이라는 계급이 붕괴되고 있기에 농촌은 지역정치의 새로운 거점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다양성 증가가 실제로 지역정치를 활성화시키고 있는지, 풀무학교의 이상이 지역사회로 스며들고 있는지 아니면 고립되고 있는지는 여전히 점검을 필요로 한다. 더구나 인구밀도가 낮고 1차 집단의 영향력이 강한 농촌사회는 지역정치가 활성화되기 어려운 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점검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점검이 진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그 내부의 상황을 역대 선거에서의 지지율로 가늠할 수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역대선거통계를 통해 홍성군의 선거결과를 살펴보면, 새누리당(舊 한나라당), 자유선진당(또는 국민중심당) 등 보수정당에 대한 지지도가 지난 10년 이상 꾸준히 70, 80%를 유지했다. 그래서 다른 정당들은 후보를 잘 내지 않는 곳이다. 비례대표 지지도를 봐도 보수정당에 대한 지지도가 2006년 지방선거 기초 80.84%, 광역 76.97%, 2008년 총선 73.84%, 2010년 지방선거 기초 76.77%, 광역 72.29%, 2012년 총선 64.75%이다. 보수정당 지지율은 계속 떨어지고 있지만, 지방선거의 경우 홍동면의 지지율이고 총선이 홍성군 전체의 지지율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홍동면의 지지율 변화가 홍성군의 변화를 앞지른다고 보기 어렵다.

대안적인 정치세력의 필요성 때문인지 2012년 ‘녹색당’이 창당할 당시 홍동면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당원들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불렸다. 농민들이 자신의 정치색을 드러내고 정당의 당원으로 가입한다는 것은, 특히 혈연·지연의 연고가 강한 농촌의 특성을 감안하면 ‘정치적인 커밍아웃’이라 불릴 만하다. 그런데 총선 당시 녹색당의 득표율은 홍동면의 당원 숫자만큼도 나오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홍동면에서는 매달 정기적으로 당원모임이 열리고 일상정치활동을 위한 아이디어가 쏟아지고 있다지만,[각주:18] 좋은 담론이 적대적인 정치현실과 어떻게 충돌하고 어떤 사건들을 만들어내는가라는 관점에서 보면, 풀무학교의 역사는 아직도 이 질문에 답을 하는 과정이다. 적대가 사라진 정치는 적당한 정치적 배분을 낳을 뿐이라는 점에서 보면 더더욱 그렇다.

지역정치의 한계가 단지 도시와 농촌이라는 공간의 문제는 아니고 협동조합운동 내부에서도 드러난다. 일본의 생활협동조합과 달리 한국의 생협들은 정치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지 않는다. 일본 ‘가나가와 네토’의 경우 “의회에 보낸 사람을 의회 바깥에서 지원을 해주는 ‘공육共育(상호교육을 통한 상호성장) 시스템’”[각주:19]을 강조한다. 반면 한국에서는 간혹 생협의 이사나 이사장이 지방선거에 출마하거나 당선되는 경우는 있지만 제도정치 참여가 생협의 주요한 활동으로 논의되지는 않고 있다. “특정 정당을 지지·반대하거나 특정인을 당선되게 하거나 당선되지 못하게 하는 일체의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 제4조는 폐지되지 않았고, 2012년에 제정된 협동조합기본법에서도 공직선거 참여가 금지되었다. 생협의 주요무대가 지역사회이고 지방정부가 그 지역의 질서를 짜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를 바꾸려 하지 않는 건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조합원의 수가 이미 60만 명을 훌쩍 넘겼더라도 그 힘이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면 생협의 활동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외부 권력의 결정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

초기에 생협운동을 이끌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에 몸담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각주:20] 생협의 비정치성은 정상적이지 않은 예외적인 것이라 얘기할 수 있다. 사실 이는 생협의 대중적인 확산을 모색하는 생협의 입장과 무관하지 않다. 먹거리에 대한 관심만으로 가입하는 조합원의 수가 늘어나다 보니, 생협 실무자들은 정치적인 개입을 할 경우 외부의 탄압을 받거나 내부적인 갈등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근본적으로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고, 우리가 현재 사는 세계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세계화시대의 흐름은 점점 협동보다 경쟁과 독점을 향하고 있고, 나오미 클라인(N. Klein)은 정치와 경제, 공과 사의 경계를 뛰어넘어 권력을 독점하는 세력을 ‘재난 자본주의 복합체’라고 부르며 이 세력을 제어하는 것을 향후 정치의 주요한 과제로 지목한 바 있다.[각주:21] 이런 구조적인 변화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생협운동의 정치적 성공을 장담하기 어렵다.

그리고 현재 소비자생협운동의 현실을 보면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의 협동조합 7원칙 중 여섯 번째 원칙인 ‘협동조합 간의 연대’를 지키고 있는지조차도 의문이다. 대부분의 소비자생협들이 물류 중심의 경쟁구조를 갖춤으로써 매장의 입지를 두고 서로 경쟁한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온 일이고, 기존의 협동조합이 새로운 협동조합의 구성을 돕고 지원하는 사례도 몇몇 지역을 제외하면 찾아보기 어렵다.

 

4. 연대는 불가능한가?

다양한 지역운동 사례들에서 드러나는 이런 경향들은 향후 정치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자 독점하는 세력에게 맞설 힘을 결집할 연대를 가로막는다. 수많은 사건을 겪었음에도 한국에서 연대가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학자 라이너 촐(Rainer Zoll)은 한국사회의 위기를 이렇게 진단한다. “생활세계를 통해 바라본 한국인의 상호관계에 대한 인상은 매우 긍정적”이나 “특정한 사회적 집단이 다른 집단을 적대적으로 대한다는 사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자동차 공장에서 여성 노동자의 투쟁은 잘 조직화된 남성 노동자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이 두 집단이 급진적 노동조합에 함께 속해 있으면서도 말이다. 한국에는 열심히 투쟁하는 두 개의 노동조합 연맹이 있고, 이 둘을 합쳐 정확히 노동자의 12%가 조직되어 있다. 그 외의 사례로는 사기업 노동자와 공무원이 조직한 노동조합이 있다. 사회에 관심 있는 한국인이라면 이러한 사례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연대가 대부분 ‘집단연대’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 즉 사회집단이 서로 결속하지만 그 자체로는 닫혀 있으며 다른 집단과 날카로운 경쟁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각주:22] 지역정치 역시 이런 지적에서 자유롭지 않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지역과 마을을 만든다 해도, 어느 누구도 이런 구조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리고 연대는 바로 이런 구조를 변화시키려는 절망적인 노력이다. 그런 노력 없이 지역정치의 활성화나 대안을 논하는 것은 섣부르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진보신당의 이재영은 2008년 5월, <시민사회신문>에 「‘풀뿌리’는 기만이다」라는 칼럼을 기고했다. 이 칼럼에서 이재영은 “한국에 소개돼 있는 ‘풀뿌리’란 주로 미국과 일본의 탈사회주의적 비정치 사회운동에 다름 아니”므로 “풀뿌리라는 것이 이미 인민의 파괴적 도전을 완충시키는 ‘체제의 풀뿌리’로 기능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당시 필자는 이 칼럼을 비판하는 「‘풀뿌리 없는 진보’야말로 기만이다」라는 반박기사를 <시민사회신문>에 실었다. 그 글에서 “권력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고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풀뿌리의 정치전략이 탈사회주의, 비정치라는 해석은 어떻게 가능”한지, “오히려 그런 운동이야말로 정치적인 게 아닌가?”라고 물었다.

그런데 최근 이런 생각은 조금씩 바뀌고 있다. 많은 지역단체 활동들이 중앙/지방정부의 프로젝트나 민간재단의 프로젝트에 의존하면서 그런 활동들은 ‘파괴적 도전을 완충’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풀뿌리 활동이든 사회적 기업이든 협동조합이든, 자신이 가진 급진적 전망을 포기하고 다가올 파국을 막는 완충작용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다.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말했듯이 다가오는 파국이 사회성 형성의 계기가 되기도 하는데,[각주:23] 한국의 지역정치는 파국을 피하는 데 많은 힘을 쏟고 있는 듯하다.

상호부조와 연대는 정치적인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패한 국가 내에 건강한 지역사회가 활성화될 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마을과 공동체도 그곳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라는 장소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시대에도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소성이 중요하고, 이를 변화시키려면 지역 내외부의 다양한 정치활동과 연대가 필요하다.

그리고 연대는, 타자가 나의 삶을 지탱해주고 내가 타자의 삶을 지탱하는 좋은 관계는, 단순한 이해관계나 계산능력만으로 맺어질 수 없다. 그것은 공통성을, 그것을 가능케 하는 공통감각(common sense)을 필요로 한다. 성장만을 강요하는 시대에 그런 감각을 회복하려면 건강한 자기성찰이 필요하고, 건강한 자기성찰 없이 지역정치는 활성화되기 어렵다. 감각을 열어놓고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과정이 여전히 중요하다.

하승우

현재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에서 운영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정치학을 전공했고 풀뿌리민주주의, 아나키즘, 지역정치에 관심을 두고 있다. 쓴 책으로 <민주주의에 反하다>, <도시생활자의 정치백서>,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 등이 있다.

  1. 최경송, 「대안정치의 씨앗 뿌리기」, 시민자치정책센터 지음, <풀뿌리는 느리게 질주한다>, 갈무리, 2002, 199쪽. [본문으로]
  2. 한국청년연합회(KYC)가 발행한 <도시 속 희망공동체 11곳>(시금치, 2005)은 서울시 도봉구의 ‘느티나무방과후’, 경기도 일산시의 ‘야호 어린이집’, 서울시 도봉구의 주부학습동아리 ‘즐멤’, 경기도 광명시 광명YMCA의 ‘등대생협’, 서울시 강북구의 녹색가게 ‘풀빛살림터’, 경기도 광명시의 ‘광명평생학습원’, 대전시 ‘민들레의료생활협동조합’, 서울시 마포구 성미산 마을공동체, 경기도 의정부시의 ‘꿈틀자유학교’, 인천시 연수2동의 주민자치센터, 서울시 금천구의 ‘은행나무어린이도서관’ 등 11곳에서 희망을 찾았다. 그리고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이 발행한 <달팽이가 달리기를 시작한 까닭은?>(2008)은 한국 주민자치운동의 모범지역을 경기도 광명YMCA의 ‘등대생협’, 서울 수유리의 ‘녹색삶을 위한 여성들의 모임’(지금은 ‘녹색마을사람들’로 명칭 바꿈), ‘대전여민회’와 중촌마을어린이도서관 ‘짜장’, 충청남도 천안시의 ‘복지세상을 열어가는 시민모임’, 충청남도 옥천군의 ‘안남 어머니 학교’, ‘안성의료생활협동조합’, 원주시의 ‘협동조합운동협의회’(지금은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 강원도 사북의 ‘철암어린이도서관’, 부산시 반송의 ‘희망세상’ 등 8곳으로 정리했다. [본문으로]
  3. 류은숙, <사람인 까닭에>, 낮은산, 2012, 177쪽. [본문으로]
  4. 김왕배, <도시, 공간, 생활세계>, 한울, 2000, 271~272쪽. [본문으로]
  5. 제임스 스콧, 전상인 옮김, <국가처럼 보기>, 에코리브르, 2010 참조. [본문으로]
  6. Terry Christensen, Local Politics: governing at the grassroots, Wadsworth Publishing Company, 1995. [본문으로]
  7. 염무웅, <자유의 역설>, 삶창, 2012, 173쪽. [본문으로]
  8. 정규호, 「한국 도시공동체운동의 전개과정과 협력형 모델의 의미」, <정신문화연구> 제35권 제2호, 2012. 6. [본문으로]
  9. Daniel H. Levine, Popular Voices in Latin American Catholicism,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2, p. 370. [본문으로]
  10.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일수 옮김, <액체근대>, 도서출판 강, 2009, 274쪽. [본문으로]
  11. 유창복, <우린 마을에서 논다>, 또하나의문화, 2010 참조. [본문으로]
  12. 조정래, 「서울 마을공동체 만들기 사업 추진방향 연구」, 입법담당관 정책보고서 제3호(2012. 4. 18). [본문으로]
  13. 마포두레생협 홈페이지(http://www.mapocoop.org/) 조합원 의견나눔 게시판 2010년 3월 부분 참조. [본문으로]
  14. 박학룡, 「위태로운 세입자」, <시사인> 2012년 12월 29일자(제276호). [본문으로]
  15. 기획대담 「횡단대화: 마포에서 듣는 새로운 실험」,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2009년 11․12월호(제41호). [본문으로]
  16. 홍순명, <더불어 사는 평민을 기르는 풀무학교 이야기>, 내일을여는책, 1998, 55쪽. [본문으로]
  17. 백승종, <그 나라의 역사와 말: 일제시기 한 평민 지식인의 세계관>, 궁리, 2002, 332쪽. [본문으로]
  18. 강국주, 「‘착헌 정치’란 가능할까?」, <지역과 학교> 통권 26호, 2012년 겨울호. [본문으로]
  19. 요코다 카쓰미, 나일경 옮김, <어리석은 나라의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시민: 생활클럽 운동그룹과 풀뿌리 민주주의운동의 모델 만들기>, 논형, 2004, 200쪽. [본문으로]
  20. 염찬희, 「iCOOP생협 10년의 역사와 활동」, iCOOP생협연대 지음, <협동, 생활의 윤리: iCOOP생협 10년사>, 도서출판 푸른나무, 2008, 17~18쪽. [본문으로]
  21. 나오미 클라인 지음, 김소희 옮김, <쇼크 독트린>, 살림Biz, 2008 참조. [본문으로]
  22. 라이너 촐 지음, 최성환 옮김, <오늘날 연대란 무엇인가>, 한울 아카데미, 2008, 14~15쪽. [본문으로]
  23. 레베카 솔닛 지음, 정해영 옮김, <이 폐허를 응시하라>, 도서출판 펜타그램, 2012 참조. [본문으로]

1. 못 살겠다 갈아보자?

 

간디의 나라로 익숙한 인도에서 총파업이 벌어졌다. 지난 2013년 2월 20, 21일, 약 1억 명의 인도노동자들이 정부의 신자유주의 조치에 대항해서 48시간 동안 총파업을 벌였다. 인도 전체 인구가 약 11억 명이니 그중 1/10이 파업에 참여한 셈이고, 이는 세계 역사상 가장 큰 파업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대체 누가 이런 거대한 파업을 이끌었을까? 인도에도 여러 노조연합체들이 있는데, 이번 파업에는 노동조합의 규모와 상관없이 석유, 은행, 보험, 통신, 광산, 운송, 보건, 농업 등의 대다수 노동조합들이 힘을 합쳐 총파업에 나섰다. 그리고 노동조합과 함께 많은 지역의 시장, 상점, 관공서, 학교, 은행, 보험사들이 문을 닫고 파업에 동참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고 차량이 불에 타거나 공장에 불이 나기도 했다.

 

성자같은 이미지의 나라 인도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시간은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 인도는 사회주의를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주요한 산업을 국유화했고 협동조합이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높았다. 1904년 협동조합 신용회사법이 제정되고, 국가의 주요한 경제계획에도 협동조합과 관련된 내용이 반드시 포함될 정도였다. 그런데 1991년 심각한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인도는 국제통화기금(IMF)에게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강요당했다. 인도정부는 기존의 정책을 바꿔 각종 규제를 철폐하고 국영기업을 매각했다. 협동조합에게 저리의 자금을 제공했던 정책도 폐지되고 협동조합은 취약계층의 고용을 창출하는 보조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런 신자유주의 정책을 입안했던 사람이 지금의 만모한 싱 총리이다. 싱 총리의 구조조정으로 경제는 회생되는 듯 보였지만 사회양극화는 매우 심각해졌고, 인도 농가는 몰락하고 있으며, 심각한 인플레이션으로 실질소득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번 총파업 전인 2012년에도 총파업이 있었다. 외국유통자본이 51%까지 지분을 가질 수 있는 대형유통점의 설립 허가와 유류 가격 인상을 반대하는 5천 만 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였다. 

 

2. 총파업은 성공했을까?

 

이번 총파업은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화폐(루피)가치가 폭락하는 반면 기름/가스값이나 곡물/채소값이 엄청나게 뛰는 생활고를 문제삼았다. 그리고 우량한 공기업을 민간기업에 매각하려는 시도에도 반대했다. 파업에 참여한 노동조합들은 물가인상에 대한 통제, 일자리 창출, 최저임금 인상, 사회안전조치 강화, 모든 노동자에 대한 연금과 물가수당 지금 등 10가지 개혁조치를 정부에 제안했다.

 

하지만 인도정부가 이 총파업의 요구를 받아들일지는 의문이다. 인도정부는 이 총파업이 국가경제를 악화시키고 국민을 분열시킨다며 비난했고, 이 파업에 국가보안법 적용을 검토한다는 소문도 들린다. 이곳이나 저곳이나 정부는 불통(不通)이다.

 

그래도 2014년에는 인도의 총선이 있다. 싱 총리는 이미 2012년 말에 총선에 대비해 젊은 층을 대폭 임용하는 대대적인 개각을 단행했고, 2013년 1월부터 주(州)정부나 군청 등 중간단계를 거치지 않고 빈민층 은행계좌에 직접 정부보조금을 입금해주는 정책을 실시했다. 이미 선거준비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2012년 말, 인도 5대 공업지역 중 하나로 평가받는 구자라트 주의 총선에서 극우 성향인 제 1야당 인도국민당(BJP)의 모디가 3선 연임에 성공하며 2014년 선거를 노리고 있다. 구자라트 주의 선거에서 인도국민당은 전체 182석 중 115석을 차지해 여당인 국민회의당을 2배 이상 앞섰다. 2014년 총선에서 BJP가 승리하면 구자라트가 총리를 맡을 가능성이 커진다. 그리고 인도의 정치 1번지라 불리는 우타르프라데시 주의회 선거(연방하원 545석 중 가장 많은 80석 차지)서는 사회주의 정당인 사마지와디당이 과반 이상을 차지했고, 불가촌 천민을 대변하는 국민사회당이 2위, 여당인 국민회의당은 4위를 차지했다.

 

심각한 경제위기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입안했던 정권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 그렇지만 그 대안이 극우성향의 정당으로 몰리는 건 인도의 미래를 낙관하기 어렵게 한다. 그리고 공산당을 비롯한 인도의 기존 좌파들은 현정부와 비슷한 성장주도의 전략을 계획함으로써 차별화에 실패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3. 인도는 한국의 미래일까?

 

어쨌거나 인도의 노동자들은 대규모 총파업을 벌이며 정부의 일방적인 결정에 맞서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자들은 어떤 상황일까? 전국의 장기파업 사업장을 살펴보면, 흥국생명과 코오롱 노조의 파업일은 이제 3,000일에 다가서고 있다. 영남대의료원과 콜트콜텍의 파업은 2,000일을 넘어섰고, 재능교육 파업은 곧 2,000일을 넘긴다. 쌍용자동차, 쓰리엠, 유성기업 등 장기파업장들이 줄을 잇는다. 해결방안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철탑에 올라간 최병승, 천의봉씨의 철탑투쟁은 160일을 넘어섰다. 160일이면 5달을 넘는다. 철탑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한다. 봄이 오면 철탑에서 내려올 수 있으려나...

 

인도의 사례에서 보이듯 전체적인 경제흐름과 협동조합의 현실은 무관하지 않다. 한국도 외환위기를 겪으며 구조조정을 받아들였고, 경제는 성장하지만 사회양극화는 더욱더 심각해지는 모순이 불거지고 있다. 실질임금은 떨어지고 물가는 오르고... 하지만 총파업은커녕 이런 흐름에 맞서는 시도들도 조금씩 어려워지고 있다.

 

인도의 총파업에서 우리의 어떤 미래를 엿볼 수 있을까?


- 한반도 전쟁위기는 거품인가?

 

올해로 60주년을 맞은 정전협정은 “한 개의 군사분계선을 확정하고 쌍방이 이 線으로부터 각기 2km씩 후퇴함으로써 適對 군대간에 한 개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한다. 한 개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하여 이를 완충지대로 함으로써 적대행위의 재발을 초래할 수 있는 사건의 발생을 방지한다.”며 비무장지대를 설정하는 협정이다. 이 협정에 따라 남북은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전쟁행위를 중단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정전협정문에는 중국, 북한, 미국이 서명했고, 한국은 서명하지 못했다. 즉 한국은 정전협정의 당사국이 아니다. 그리고 아직도 한반도 내의 전시작전권은 한국정부에게 있지 않다. 노무현 정부 때 협상을 거쳐 2015년 전시작전권을 미국으로부터 넘겨받을 예정이지만, 미국정부는 한국정부의 준비가 없으면 이양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이 와중에 지난 3월 14일 북한은 정전협정을 백지화하겠다고 밝혔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다른 협정들과 달리 정전협정은 특성상 쌍방이 합의하여 파기할 성격의 협정이 아니며 어느 일방이 협정을 준수하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백지화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한미 양국은 “상호 합의한 정전협정에 대해 특정 일방이 상대방의 동의 없이 철회할 수 없다”며 반대의견을 밝힌 상태이다.

 

북한의 핵실험 이후 계속되어온 한반도의 긴장이 깊어지는 상황이다. 북한 핵실험 이후 유엔 차원에서 대북결의안이 채택되자,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사실상 조선정전협정은 지난 60년 동안 지속해온 미국의 체계적인 파괴행위와 그를 비호·두둔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부당한 처사로 이미 백지화되고도 남은 상태였다”고 비난했다. 이어 한국과 미국이 키리졸브 훈련과 독수리 한미합동군사연습을 진행하자 군사도발행위로 규정하며 전쟁불사를 주장하고 있다. 북한 최고사령부 대변인은 "우리도 정전협정의 구속을 받음이 없이 임의의 시기, 임의의 대상에 대하여 제한없이 마음대로 정의의 타격을 가하고 민족의 숙원인 조국통일 대업을 이룩하자는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에 미국 하원은 정전협정 무효화를 선언한 북한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도 시민들은 일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 북한이 3차 핵실험을 강행한 날 포털 업체의 검색어 1위는 화장품 업체의 50% 할인 소식이었다. 아산정책연구원이 3차 핵실험 이후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불안하지 않다’고 대답한 사람이 35.7%였다. 그러면서 ‘안보불감증’이 확산되고 있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 안보불감증에서 평화감수성으로

 

그런데 ‘안보불감증’이라는 말은 정권이 자신의 생명 연장이나 여론 전환을 위해 사용했던 말이다. 국방이나 안보라는 영역을 정부의 고유영역으로 묶어 놓고, 정부가 제기하는 사안들에 시민들의 무조건적인, 어느 면에서는 조건반사적인 반응을 요구하는 말이 안보불감증이었다. 따라서 그런 틀로 지금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는 것은 이미 어떤 편견을 전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레베카 솔닛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9․11 테러 당시 미국정부가 그런 문제에 얼마나 무능했는가를 지적한다. “부시 행정부가 정신을 수습하자마자 선택한 가장 긴급한 작전은, 미국을 테러리스트의 손에서 되찾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손에서 되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작전은 대체로 성공했다.” 그리고  사실상 부시정부의 애국법은 외부만이 아니라 내부를 통제하기 위한 법률이었다.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안보불감증이 아니라 평화감수성이 필요하다.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은 평화 역시 타인과의 적대나 대결이 아니라 연대와 공감을 통해 실현할 것을 요구한다. 국가의 경계로 갇히지 않는 감수성을 일깨우고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적대나 전쟁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자각하는 과정에서 평화감수성은 길러질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남북한의 문제 역시 적대나 전쟁이 아니라 평화로 해결하려면 서로에 대한 공감과 연대가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모심과 살림연구소>가 발간하는 정세와 동향 7호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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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협동조합연대는 누구인가?

2013년 1월 2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한국협동조합연대’ 창립총회가 열렸다. 대표 발기인으로는 한국협동조합연구소를 만든 황민영 씨를 비롯해, 팔만대장경연구소장 종림 스님, 홍성덕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조정현 신부, 이길재 전 농수산TV 회장, 오영숙 전 세종대 총장, 박계동 전 국회 사무총장, 배일도 서울지하철노조 초대 위원장, 김애실 마중물연대 공동대표, 조윤명 전 특임장관실차관, 이갑산 범시민사회단체연합 공동대표 등이 참여했다. 한국협동조합연대는 앞으로 협동조합 운동의 육성과 발전을 위한 협동조합 아이템 개발, 창립지원 컨설팅, 교육 및 운영 지원 등 협동조합을 위한 민간지원사업을 펼칠 예정임. 특히 사회적 소외계층과 공적 부문에 협동조합을 건설해 시장경제와 조응하는 사회적 안전망을 강화하는데 역점을 둘 계획이라 한다.

이날 행사에서 박계동 사무총장(前 국회 사무총장)은 “우리 민족의 피에는 협동조합의 정신이 살아있다. 혹자는 협동조합이 서구에서 기원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호혜적 이타주의에 입각하여 공동체 정신을 키워왔던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보면 협동조합은 우리에게 맞춤운동 이라고 할 수 있으며 대표적인 것이 ‘두레’로 두레운동은 보릿고개를 넘고 새마을운동으로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대한민국의 에너지 원천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날 행사에는 축사자로 고흥길 특임장관과 박인주 청와대 사회통합수석 등이 참석했다.


- 한국협동조합연대와 제 2의 새마을 운동

3013년 3월 9일, 임헌조 한국협동조합연대 이사와 <데일리안>의 인터뷰(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328222)를 보면, 기사 제목은 “박원순의 협동조합, 관주도하며 볼로냐 꿈?”이고 “좌파들의 독무대 폐단”, “선거에 이용할 생각이라면 수천개가 생겨나도 제역할 못한다”는 자극적인(?) 부제가 붙었다. 인터뷰 내용에서는 국민이 잘 모르는 상황에서 “관이 나서 주도한다면 지금의 서울시처럼 좌파 조직에만 협동조합을 몰아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서울시가 인가한 협동조합들을 대다수 좌파 세력이 장악하고 있고 마을기업이나 협동조합 실무팀에 희망제작소나 아름다운 가게 출신 인사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한다. 아울러 반값식당을 반시장주의라고 보는데, “더 큰 문제는 좌파 내부에서 협동조합을 선거조직으로 이용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한 점”이라고 함. 임헌조 이사는 “협동조합을 좌파가 장악하면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협동조합에 대해 올바른 의미를 규정하고 발전시키기보다 조직화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데 있다”며 “민주당 원외 지구당 협의회장이 당원에게 협동조합을 홍보하고 있고, 민주노총 등에서 제안서 형태로 발표돼 통용된 일이 있다”고 지적했다. 결론적으로 임헌조 이사는 “국민 다수는 모르는 채 일부 좌파 활동가만 알고 있는 협동조합이 자라나고, 수혜를 받은 활동가들이 국민 속에서 협동조합이 아닌 사상을 이식시키는 폐단으로 이어진다면 앞으로 수년 내 우리 사회에 협동조합이 수천개가 생겨나도 결코 우리 사회의 허리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임헌조 이사는 뉴라이트 전국연합의 사무처장을 맡았던 사람으로 2013년 설 특사 55명에 포함되어 특별복권되었다. 2008년 대통령선거 때 뉴라이트전국연합 홈페이지와 신문광고로 이회창 씨를 비난하고 이명박 씨를 지지하는 글을 올려 선거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람이 한국협동조합연대의 이사를 맡은 것으로 그 단체의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인터뷰가 한국협동조합연대 전체의견을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의중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협동조합연대는 <한국협동조합기업연대>에서 명칭을 바꿨고, 제 1차 협동조합 전문가 초청 간담회 후원을 300여개 보수 성향 시민단체로 구성된 <범시민사회단체연합>이 맡았다.

이런 배경에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 이후의 ‘창조 경제’와 ‘제2의 새마을운동’ 논의가 있다. 2013년 2월 14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제 18차 간사단 회의에서 안상훈 고용복지분과위원은 실업 해결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창조경제를 시장경제에서만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적 경제까지 개념을 확장시”키자고 제안하며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자활기업, 마을기업 등 공동체적인 경제주체들을 활성화시키는 ‘두 번째 새마을운동’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이는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경제공동체를 지원하겠다는 취지이고,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 인사에서 두레와 같은 상부상조의 미덕이 나라를 지키는 원동력이라고 말한 점과 일치한다. 그리고 이 운동의 확대를 읍면동 조직을 갖춘 새마을운동중앙회가 맡고, 이를 위해 새마을운동중앙회의 위상과 조직을 정비하겠다고 인수위 관계자가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농림수산부도 2월 16일 인수위 업무보고 때 “제 2의 새마을운동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고 한다. “지난 2011년부터 추진 중인 `함께 하는 우리 농어촌 운동'을 '제2의 새마을 운동'으로 확대 개편”해서 “농어촌의 침체된 분위기를 일신하고, 주민들 스스로 역량을 결집해 마을의 발전을 선도해 나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인수위는 복지 분야, 예를 들어 노인과 장애인시설 등을 지방자치단체가 직접 운영하도록 하는 규정을 완화해 민간이 운영할 수 있는 방안도 검토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두 흐름에서 공통된 지점, 즉 ‘두레’에 대한 강조를 찾을 수 있다. 인수위와 한국협동조합연대 모두 두레를 정신으로 지목했고, 박계총 사무총장은 “두레운동은 보릿고개를 넘고 새마을운동으로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대한민국의 에너지 원천”이라고 말했고, 박근혜 대통령도 두레를 언급했다. 이는 창조경제의 방향에 의문을 던지게 한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의 협동조합정책이 어떤 방향으로 갈지를 예측할 수 있다. 정부가 보장하지 못하는 일자리나 복지, 안전 등을 협동조합을 통해 해결하도록 하고 정부는 자원을 지원하되, 새마을운동중앙회나 한국협동조합연대가 이런 지원을 받을 주요한 창구가 될지 모른다. 반면에 협동조합운동의 역사를 일궈온 단체들이 2012년 12월 6일 만든 ‘한국협동사회경제연대회의’는 들러리로 전락할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행보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듯 싶다.

 <모심과살림연구소>가 발간하는 '정세와 동향' 7호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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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겉으로는 행정구역개편, 실제로는 지방자치의 퇴보

이명박 정부가 행정구역 개편을 공식 의제로 만든 시기는 2009년 8월이지만 그와 관련된 논의는 노무현 정부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현재의 ‘중앙정부-광역자치단체-기초자치단체-읍면동’으로 이어지는 지방자치구조를 실제 인구 규모와 생활권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이전부터 있었다. 이명박 정부는 이런 논의를 받아들여 2009년 국회 특위를 만들고, 2010년 10월, ‘지방행정체제 개편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다. 이 법에 따라 지방행정체제개편위원회가 신설되어 2012년 6월 30일까지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제출하기로 했지만 시기가 늦춰져 2013년 5월까지 ‘도의 지위 및 기능 재정립’, ‘읍면동 주민자치 강화’, ‘지방분권 강화’에 관한 개편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중앙정부의 적극적인 움직임과 달리 지방자치단체들은 이런 흐름에 냉소적이다. 현실적으로 단체장들은 행정구역이 조정될 경우 자기 지역이 사라지고 선거구가 변할 거라 우려한다. 그래서 1994년에도 시․군 경계를 조정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일례로 생활권이 괴산군 청천면에 속한 경북 상주시 화북면 일부 마을을 괴산군에 편입하려하자 경상북도가 반발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박근혜 정부도 행정구역 개편 문제를 추진중이다. 유정복 행정안전부(안전행정부로 이름을 바꿀 예정임) 장관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주민들의 편의, 국가 경쟁력, 지역의 정서, 그리고 무엇보다 지역 주민들의 동의를 종합적으로 감안해 합리적 개편 방안을 마련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이명박 정부에서 자치구 의회 폐지론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지방행정체제 개편추진위원회( http://www.clar.go.kr/ )가 2013년 2월에 발표한 자료집을 보면, ‘도의 지위 및 기능 재정립’, ‘읍면동 주민자치 강화’, ‘지방분권 강화’라는 그럴싸한 명목을 내세웠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단체장과 지방의회 둘 중 하나를 임명제로 바꾸거나 폐지하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 [참고자료] 2012년 4~5월, 지방행정체제 개편위원회가 실시한 38개 시군 통합에 관한 여론조사결과

구분

통합안

자치단체

응답(%)

1

수원-화성-오산

수원

61.7

38.3

오산

67.4

32.6

화성

42.4

57.6

2

안양-군포-의왕

안양

79.9

20.1

군포

59.7

40.3

의왕

40.3

31.5

3

의정부-양주-동두천

의정부

63.1

36.9

양주

51.8

48.2

동두천

71.7

28.3

4

동해-삼척-태백

동해

60.4

39.6

삼척

58.3

41.7

태백

49.5

50.5

5

속초-고성-양양

속초

85.8

14.2

고성

24.2

75.8

양양

34.6

65.4

6

음성-진천

음성

71.5

28.5

진천

36.2

63.8

7

괴산-증평

괴산

88.4

11.6

증평

12.9

87.1

8

논산-계룡

논산

79.5

20.5

계룡

22.3

77.7

9

전주-완주

전주

89.4

10.6

완주

52.2

47.8

10

군산-김제-부안

군산

61.1

38.9

김제

48.7

51.3

부안

51.8

48.2

11

목포-무안-신안

목포

85.7

14.3

무안

47.6

52.4

신안

47.1

52.9

12

구미-칠곡

구미

68.3

31.7

칠곡

63.8

36.2

13

창원-함안

창원

42.6

57.4

함안

75.7

24.3

14

진주-사천

진주

71.1

28.9

사천

35.7

64.3

15

통영-거제-고성

통영

63.3

36.7

거제

24.4

75.6

고성

52.9

47.1


- 당신들의 지방자치..

앞서의 자료집을 세세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도의 지위 및 기능 재정립’: 도를 광역자치단체로 계속 두되, ‘광역행정의 중심기관으로의 기능 재정립’, ‘국가기능의 도 이양 확대’, ‘도 기능의 시․군 이양으로 행정계층간 기능의 적정 분배’, ‘사무 중복 해소’ 등에 중점을 둔다.

2) ‘읍면동 주민자치 강화’: 풀뿌리 지방자치 강화, 주민의 민주적 참여의식 고취, 지역공동체 활성화를 위해, ‘주민자치회에 실질적 권한 부여’, ‘인구 등 지역 여건을 고려한 주민자치회 운영의 자율성 보장’, ‘시범실시 및 단계별 추진’에 중점을 둔다.

3) ‘지방분권 강화’: 21개 부처, 5,145개 기관의 ‘특별지방행정기관 사무의 지방 이양’, ‘교육자치와 지방자치의 연계․통합’, ‘자치경찰제 실시’에 중점을 둔다.

그런데 추진위의 안은 ‘특별시 자치구’의 경우 ‘구청장 직선, 의회 미구성’에 방점을 두고 ‘의회 구성, 구청장 임명’, 현행 유지의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즉 구청장 직선제나 지방의회 구성 중 어느 하나를 없애겠다는 것이다. 이 안에 따르면 서울시의 구청장 직선제나 구의회 구성 둘 중 하나가 폐지된다.

그리고 광역시 자치구․군 개편안의 경우 시장이 구청장․군수를 임명하고 의회를 구성하지 않는 방안이 1순위이고, 2순위가 특별시처럼 구청장․군수 직선, 의회를 구성하지 않는 방안이다. 이건 지방자치제도 부활 이전으로 돌아가겠다는 발상이다.

그리고 주민자치회 모델은 읍․면․동에 주민대표들의 의결기구와 공무원으로 구성된 기존의 동사무소를 통합한다는 방안일 뿐이다. 그리고 자치경찰제도도 예산의 이관과 권한 부여 정도이지 주민들이 경찰의 장을 선출하는 방안이 아니다.

겉으로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실제 내용은 1991년 지방의회 부활 이전으로 시대를 되돌리겠다는 발상이다. 마치 박정희가 쿠데타 이후 지방자치제도를 유보시킬 때로 되돌아가는 발상이다. 이를 지방자치제도라 불러야 할 이유가 있을까?


-지방자치에서 지방주권으로

2012년 11월 강원발전연구원의 김승희, 김진기, 김주원 연구원은 “지방자치에서 지역주권으로”라는 정책메모를 발표했다. 이들 연구진은 ‘지방’에서 ‘지역’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중앙에 종속된 지방이 아니라 지역중심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고, 지방자치에서 지역주권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역주민의 주권의식 회복을 위한 캠페인, 오․남용되고 있는 용어 바꾸기(예를 들어, 경기도지방공무원을 경기도 공무원으로), ‘지역화’와 ‘지역주권’에 대한 철학 공유, 지역교육을 통한 지역리더 양성과 지역공동체 복원, 법률과 제도의 정비, 강원평화특별자치도 설치 등을 제안했다. 그리고 강원도는 2013년 1월 28일 자치실현과 지역주권 회복을 위해 ‘지방’이라는 명칭 대신 ‘지역’이라는 명칭을 쓰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2012년 11월 17일, 제 7회 지리산문화제 때 열린 지리산포럼에서는 지리산 자락 5개 시 군(구례, 남원, 하동, 함양, 산청)을 묶어 지리산특별자치도를 만들자는 제안이 나왔다. 지리산과 관련된 각종 개발공약들을 각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막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특별자치도를 만들어 그와 관련된 권한과 책임을 공유하자는 주장이다.

지방자치제도의 취지를 살린다면, 중앙정부가 지방행정체계를 일방적으로 개편하는 것이 아니라 각 자치체의 특성이 반영되도록 구성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의 진행방향은 ‘개편’을 표방하지만 ‘개악’이 될 가능성이 높아, 주의를 요한다.

용인시 수지구의 느티나무도서관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으며 간단한 소감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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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명회를 다녀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을 했더군요.
그만큼 많이 궁금하고 할 말도 많으셨으리라 짐작합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건 내용보다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멋지고 찬란한 비전보다는 어떤 내용이 어떤 과정을 거쳐 결정되었는지, 그 과정에 함께 논의하고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던 건지, 변화가 필요하다는 '판단'과 그 '시점'을 왜 함께 고민할 수 없었던건지...
예정시간을 훌쩍 넘긴 긴 시간이었지만 참여했던 분들의 궁금증이 풀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늘 설명회 때 읽으셨던 그 문서도 결국 공개하지 않는 거군요. 지금까지도 올라오지 않은 걸 보면요.

절차적인 문제는 없다고 하셨지만 정말 그런지는 잘 따져봐야 하겠지요.
재단이고 공공도서관이니 지켜야 할 절차가 아마 있을 겁니다.
저는 절차에 밝은 사람이라 차차 그 문제를 잘 고민하고 따져보겠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들...
세상 사는 데 그런 게 없을 수 없겠지요.
허나 어디까지만 말할 수 있다고, 우리가 왜 이 자리에서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하느냐고 선을 긋는 순간, 대화는 무의미해집니다.
마치는 순간에도 변하는 건 없을 거라고 못을 박으시더군요.

느티나무의 역사는 자료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관계로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록들을 검토해서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결론을 내리는 과정에 왜 사람들은 참여할 수 없었는지, 저는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그 강한 '확신'은 어떻게 만들어 진걸까...

어쨌거나 설명회는 끝났고, 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일상은 다시 잠잠해 지겠지요.
하지만 어제와 오늘은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단 저부터 많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느티나무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하게 되겠지요.
예전에는 느티나무가 있어 참 행복하다는 얘기를 했지만 이제는 느티나무에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의 얘기를 하겠지요.
얘기를 하면서 계속 어떤 상황을 떠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누구도 행복하지 못할 이 상황을요...

사회과학강독회는 다음 주에 회원들의 의견을 물어볼 생각입니다.
독서회는 계속하겠지만 어떤 정체성을 가질지는 회원들의 판단에 맡길 생각입니다.
느티나무도서관의 독서회로 남을지, 아니면 다른 정체성을 가질지...
아마도 느티나무도서관 북카페에서 했던 제 개인적인 모임들도 장소를 바꾸게 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앞으로 외부의 다른 자리에서 느티나무도서관재단이나 도서관 분들을 만날 수도 있겠지요.
반갑게 인사하지 않더라도 너무 서운해 하지는 마시구요.^^;;

느티나무와는 2008년 9월의 장서개발강좌로 처음 인연을 맺었습니다.
수지로 이사를 결심하게 된 것에도 느티나무와의 인연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2011년 느티나무도서관재단에서 일을 하기도 했고, 사회과학강독회를 만들어 좋은 분들과 즐거운 만남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 소중한 기억들은 계속 마음에 남겠지요.

안타까운 작별인사를 전합니다.

 <문화과학>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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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승우(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한국에서 협동조합에 대한 인식은 매우 낮다.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의 조합원 수가 이미 60만을 넘어섰지만 협동조합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고, 아는 사람들의 인식도 농업협동조합이나 생협 매장 정도이다. 하지만 농협이나 수협이 협동조합의 정체성과 무관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소비자생협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협동조합에 대한 인식은 유기농이나 친환경 먹거리를 구입하는 매장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협동조합에 대한 사회 전체의 인식도는 매우 낮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유엔이 2012년을 ‘협동조합의 해’로 정하고 전세계적인 경제위기 이후 협동조합이 일자리 창출과 지속가능한 성장의 대안으로 떠오르자 한국에서도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되고 서울시가 협동조합도시를 선언하는 등 사회적인 관심은 높아지고 있다. 그런 관심 이면에는 한국의 경제가 재벌들의 손아귀에 포획되어 있고 수출 의존도가 높아 외부환경변화에 영향을 많이 받으며 성장이 고용으로 이어지지 않는 상황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말이다.

 

협동조합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사람으로서 사회적인 관심이 반갑지 않을 수 없지만 이런 관심이 협동조합‘운동’의 확대로 이어질지는 의문이다. 분명 경제조직으로서 ‘협동조합’의 존재는 독점재벌이나 일반 기업보다 노동자에게 훨씬 나은 노동조건을 제공한다. 허나 협동조합이 있다고 해서 그 사회가 시민의 좋은 삶을 보장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농협이 있다고 해서 농민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단순히 협동조합의 수가 늘어나고 매출규모가 증가한다고 해서 승자독식의 자본주의와 정치와 경제가 유착되고 중앙집권화된 국가구조가 자동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협동조합‘운동’이 필요한 건 그 때문이다.

 

이 글은 협동조합운동의 관점에서 협동조합들의 상황을 점검하고 협동조합기본법 이후 협동조합운동의 과제를 찾아보려 한다.



1. 한국 협동조합운동, 어디까지 왔나


협동조합에 대한 낮은 사회적 인식과 달리 협동조합에 소속된 조합원의 수는 결코 적지 않다. 농협의 조합원수가 2백 만명을 훌쩍 넘어섰고, 수협도 16만 명, 신용협동조합도 5백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이런 수를 바탕으로 국제협동조합연맹(ICA)에 농협, 산림조합, 새마을금고, 수협, 신협, 아이쿱생협 등이 가입되어 있다). 현재 연합회가 구성된 국내 소비자생협의 조합원 수와 공급액은 아래 표와 같이 추정된다.[각주:1]

구분

지역조합수

조합원수

공급액

2010

2011

증가율

2010

2011

증가율

한살림

30

247,072

293,442

18.8

186,686

222,581

19.2

아이쿱생협

75

118,824

155,705

31.0

219,647

290,132

32.1

두레생협

23

85,022

103,874

22.2

66,674

75,072

12.6

민우회생협

5

22,792

26,763

16.4

16,962

17,015

0.3

합계

123

473,890

579,757

22.3

489,996

604,800

23.4


이 자료를 보면 소비자생협연합회에 소속된 조합원 수는 2011년을 기준으로 약 58만명이고, 조합원이 이용하는 물품거래비용도 6,000억원을 넘는다. 더 놀라운 건 불황과 경기침체 속에서도 조합원 수의 평균증가율이 22.3%이고, 공급액 증가율도 23.4%에 달한다는 점이다. 증가율을 고려하면 이 수는 훨씬 더 늘어난다.

 

그리고 소비자생협 외에 2009년을 기준으로 한국의료생협연대에 소속된 의료생협의 조합원 세대 수를 합치면 15,280세대나 된다.[각주:2]

비교기준

안성의료생협

인천평화의료생협

안산의료생협

원주의료생협

주요 설립 동기

농촌지역 의료봉사

산재 및 직업병 해결

지역환경보호운동

생협간의 협동

설립 년도

1994년 4월

1996년 11월

2000년 4월

2002년 5월

조합원수

3426세대

1749세대

2414세대

1570세대

비교기준

대전의료생협

서울의료생협

전주의료생협 

함께걸음 의료생협

주요 설립 동기

지역화폐운동

신협운동의 확장

 보건의료운동과 공동체운동

장애우 평등세상

설립 년도

2002년 8월

2002년 6월

 2004년 4월

2005년 6월

조합원수

1361세대

1650세대

408세대

526세대

비교기준

청주 의료생협

용인해바라기 

성남의료생협

수원

설립 동기

복지네트워크

장애아동부모모임 

장애인무료치과 진료

복지네트워크

설립 년도

2007년 5월

2007년 3월

2008년 2월

2009 3월

조합원수

365세대

480세대

671세대

340세대

비교기준

시흥 의료생협

마포(준) 

살림의료생협

설립 동기

복지네트워크

지역사회 돌봄

여성주의 돌봄공동체

설립 년도

2009년 9월

2010년 5월 발기인대회

2012년 2월 창립총회

조합원수

500 세대

 

1,000세대(2013년 1월)


둘을 합하면 조합원 세대가 약 73만 세대나 되고, 소비자생협과 의료생협 모두 조합원의 구성이 세대를 기본으로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수는 훨씬 더 늘어난다. 숫자로 그 가능성을 점칠 수는 없지만 조합원의 수로 판단한다면, 한국사회에서 협동조합은 낡은 브랜드가 아니라 외려 뜨는 브랜드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소비자생협의 조합원수와 공급액 증가속도는 다른 산업보다 월등하게 빠르고, 먹거리와 건강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생협의 성장가능성은 무시될 수 없다(그래서인지 ‘유사소비자생협’과 ‘유사의료생협’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소비자생협의 활동은 단순히 농산물의 직거래와 안전한 먹거리로 그치지 않는다. 소비자생협은 조합원과 조합원 가족, 지역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활성화시키는 다양한 활동들, 먹거리 교육이나 학교급식조례운동, 농업살림운동, 협동하는 생활문화정착, 지역살림운동, 지역사회 식품안전생활시스템 구축 등의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의료생협 또한 질병의 치료보다 건강한 삶을, 그리고 주민참여와 협동으로 건강한 지역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따라서 협동조합운동은 지역운동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조합원들이 사회적 주체로 등장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지원한다. 협동조합은 사업체이자 결사체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협동조합의 수는 2012년 12월에 발효된 협동조합기본법에 따라 계속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법이 발효된 지 불과 한 달 만에 전국에서 일반협동조합이 119건, 사회적협동조합이 17건 신청되었다.[각주:3] 과거 소비자생협의 설립기준이 조합원 300명 이상, 출자금 3,000만원 이상이었다면, 협동조합기본법은 출자금 규모에 상관없이 5인 이상이면 협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췄다. 그런 점에서 협동조합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은 늘어날 것으로 보이고, 사업 대상도 먹거리나 의료에서 대리운전, 도시농업, 재생에너지사업 등으로 늘어날 것이다. 심지어 주식회사 <해피브릿지>는 2012년 연말에 주식회사 해산총회를 열고 노동자협동조합으로 전환을 결의하기도 했다. 이런 추세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협동조합 설립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만 따지면 한국사회에서 협동조합은 분명히 좋은 기회를 맞고 있다.



2. 한국의 협동조합운동, 어디로 갈까?


어떤 제도가 사회적인 조건과 상관없이 똑같은 효과를 내는 경우는 드물다. 귤이 황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사회조건은 제도에 영향을 미치고 어떤 경향이 한번 만들어지면 그것이 잘못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그것을 제도의 ‘경로의존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협동조합기본법에 앞서 2007년 1월 사회적기업육성법이 제정되었다. 당시 노동부는 사회적 취약계층에게 일자리나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등의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고 재화․서비스의 생산․판매 등 영업활동을 수행하면서 그 수익을 사회적 목적을 위해 재투자하고 민주적인 의사결정구조를 갖춘 기업을 사회적 기업이라 정의했다.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도 ‘사회적 경제’라는 말이 유행하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어쨌거나 이런 지원정책에 따라 사회적 기업의 수는 2007년 446개에서 2012년 2,221개로 5년간 498% 증가했고, 2012년 9월 기준 사회적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 수도 17,410명이고 이 중 취약계층이 10,640명이다. 그리고 노동자의 평균 급여는 월 107.6만원이고, 비정규직 비율이 52.7%이다.[각주:4]

 

풍요 속의 빈곤이라고, 이런 수치로만 보면 사회적 기업의 특징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냥 저임금 일자리가 늘어난 것으로 보일 뿐이다. 사회적 기업보다 사회적 일자리가 부각된다. 그리고 한국정부는 제도를 시작할 당시부터 사회적기업 인증제도라는 것을 도입했다. ‘사회적 기업’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려면 반드시 노동부 장관의 인증을 받아야 하고, 인증을 받지 않으면 과태료를 내도록 했다. 그럼에도 정부의 인증기준이 명확하지 않고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이 계속 제기되었다. 그리고 정부의 인증이 신규사업보다 기존에 이미 진행되어오던 사업들, 즉 이미 인력과 자원을 가진 곳으로 집중되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또한 사회적 기업이 사회성보다 일자리를 만드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비판, 정부가 최저임금만을 보조하고 나머지 부족분을 사업을 통해 보충하도록 해서 저임금 일자리가 확산된다는 비판, 정부가 노동복지(workfare)를 강조하면서 기본적인 복지를 축소시키고 있다는 비판 등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협동조합기본법도 이런 경로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협동조합기본법에서 협동조합은 (일반)협동조합과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구분된다. (일반)협동조합은 5인 이상의 결의로 설립되고 신고만 하면 등록절차를 거쳐 활동할 수 있다. 반면에 지역사회에 공헌하거나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월평균 소득의 60% 이하, 고령자, 장애인, 결혼이민자, 경력단절여성, 갱생보호 대상자 등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이들을 고용하는 비중이 전체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사회적 협동조합은 5인 이상의 결의로 가능한데, 기획재정부 장관의 인가를 받아야 설립될 수 있다. 사회적 협동조합은 (일반)협동조합과 달리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기업과 비슷하게 ‘인가’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협동조합

사회적 협동조합

법인격

(영리)법인

비영리법인

설립

시도지사 신고

기획재정부 장관 인가

사업

업종․분야 제한 없음(금융․공제 제외)

업종․분야 제한 없으나 주사업 규정

적립

잉여금의 10/100

잉여금의 30/100


협동조합의 국제연대기구인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은 협동조합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사업체를 통하여 공통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자율적인 조직”이라 정의한다. 그런데 협동조합기본법은 협동조합을 “재화 또는 용역의 구매/생산/판매/제공 등을 협동으로 영위함으로써 조합원의 권익을 향상하고 지역사회에 공헌하고자 하는 사업조직”이라 정의한다. 두 정의에서 어떤 차이점이 느껴지나? 한국의 협동조합기본법은 협동조합을 공동구매/생산/판매/제공을 하는 ‘사업조직’으로 제한하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사회적 협동조합을 인가하는 기획재정부도 협동조합을 “함께 규칙을 만들고 착실하게 이용하는 정의로운 사업체”로 정의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규칙과 정의는 케이크를 나누는 방식에 관한 것이지 어떤 케이크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다루지 않는다.[각주:5]

 

협동조합을 바라보는 정부의 시선은 협동조합기본법 시행령이 전 세계적으로 합의된 노동자협동조합(workers cooperative)이라는 개념을 직원협동조합이라는 애매한 개념으로 바꿔버린 점에서도 드러난다. 법률상의 통일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적기업육성법의 경험을 통해 협동조합기본법을 해석한다면 그 결과는 사회적 기업과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단기간의 지원을 통해 협동조합의 수가 늘어날 수 있지만 사회성이나 협동의 강화보다 고용 창출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고, 시장경쟁에 내몰린 협동조합들이 실패를 경험할 것이고, 협동조합이 공공서비스 민영화의 명분(사회적 협동조합은 국가와 지자체의 사무 중 일부를 위탁받을 수 있다)으로 악용될 수 있다. 이런 흐름은 협동조합운동의 강화가 아니라 왜곡이나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사회적 경제는 연대의 경제, 즉 “경제를 다른 방식으로 구축하는 것”이자 “새로운 시장조절양식을 개발하는 것이야말로 더없이 바람직할 뿐 아니라 시장과의 관계를 새로이 정립하고, 시장활동의 우선적 수혜자의 영역에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시장을 사회적으로 재구축하는 방안을 고안하고자 하는 것”인데,[각주:6] 한국사회에서 이런 의미는 드러나지 않는다. 협동조합은 기존의 시장질서를 보완하지 관계를 재정립할 힘을 가지지 못한다.

 

협동조합기본법 제정과정에서 드러난 특이한 점은 소비자생협을 비롯한 기존의 협동조합운동진영이 기존 법률에 있던 정치참여 금지 조항을 수용했다는 점이다. 1999년 2월에 공포된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 제4조는 “①조합은 공직선거에 있어서 특정 정당을 지지ㆍ반대하거나 특정인을 당선되게 하거나 당선되지 못하게 하는 일체의 행위를 할 수 없다. ②누구든지 조합을 이용하여 제1항의 규정에 의한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고 생협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모든 생협들은 단체의 정관에 ‘정치관여 금지’를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협동조합운동이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자본주의 질서와 다른 살림살이 질서를 짜려면 이는 정치적인 결정과정을 거쳐야 한다. 협동조합들이 조합원의 사회참여와 지역적인 살림살이 회복을 추구한다면 지역정치에의 개입은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협동조합운동이 기본법 제정과정에서 이런 조항을 수용했다는 점은 협동조합운동의 방향이 결사체를 배제한 사업체에 향하고 있음을, 즉 정부가 추진하는 방향과 협동조합의 방향이 수렴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협동조합이 탈정치를 지향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것이 정부의 방향과 수렴된다는 점은 더 큰 문제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협동조합운동이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없다.



3. 세계적인 흐름은 어디로 가고 있나?[각주:7]


협동조합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한 지역이 스페인의 몬드라곤이다. 협동조합의 규모가 작을 것이라는 우리의 상식과 달리 몬드라곤 협동조합 복합체(연합조직)의 자산은 약 53조에 달한다. 금융, 제조업, 유통, 지식 등 4개 부문을 포괄하는 몬드라곤의 자산규모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재벌인 현대중공업(2011년 기준 약 54조)보다 조금 적은 수준이다. 그리고 몬드라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수도 무려 8만 4천명에 달한다. 고용인원으로만 따지면, 몬드라곤은 SK나 롯데보다도 훨씬 많은 수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다.

 

이처럼 유럽의 협동조합들은 생산과 소비, 신용, 문화 등의 영역에 폭넓게 퍼져 있다. 유럽의 조합원 수나 매출고는 한국과 비교가 안 될 수준이다. 전 국민의 60%가 조합원인 스위스에서는 협동조합이 카르푸의 매장을 인수했고, 이탈리아의 볼로냐시는 한국 협동조합 관계자들의 순례코스가 되었다. 유럽만이 아니다. 캐나다의 협동조합은행 데자르댕(Desjardins)은 조합원이 580만명으로 자산이 216조, 노동자가 4만 7천명에 이른다.

 

이런 규모를 보면 협동조합은 결코 미미한 흐름이 아니며, 전 세계 경제규모에서 적지 않은 부문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년과 올해 계속 소개되는 해외의 협동조합 사례들은 이런 성공사례들이고, 실제로 한국의 많은 소비자생협들이 스위스의 미그로(Migros)와 같은 유럽생협의 대형매장을 부러워하니 한국의 협동조합운동도 이런 해외사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외국의 협동조합들이 아무런 위기를 경험하지 않으며 성장만 해온 것은 아니다. 유럽의 협동조합들은 세계대전과 파시즘, 경제위기, 유럽통합이라는 실험을 통과해야 했고, 자본주의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외국의 협동조합들이 큰 몸집을 가지게 된 것은 이런 위기와 무관하지 않고, 그런 과정에서

협동조합의 그늘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스페인의 몬드라곤은 더 이상 바스크 지방의 협동조합이 아니다. 몬드라곤 협동조합 복합체에 소속된 노동자 중에서 러시아와 멕시코, 중국, 브라질, 인도,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고용된 인원은 2010년을 기준으로 볼 때 약 1만 6천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몬드라곤 협동조합 복합체에 협동조합만 속해 있는 것도 아니다. 몬드라곤은 1990년대부터 합작회사를 설립하고, 주식회사 형태의 자회사들을 만들었다. “특히 유통 부문의 자회사들은 상당수가 비협동조합 기업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 결과 몬드라곤에 소속된 260여 개 회사 가운데 대략 절반만 협동조합 기업으로 존재하고 있다.”[각주:8]

 

몬드라곤의 글로벌화와 조직형태의 변화는 협동조합의 정체성에 관한 논란을 피해갈 수 없다. 전체 고용규모는 늘어났지만 이것은 해외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늘어났기 때문이고, 에로스키를 비롯한 유통부문이 인수․합병을 통해 공격적으로 사업체를 늘려온 분야에서는 조합원 노동자의 비중이 급격히 떨어졌다. 즉 규모는 커졌지만 조합원이 아닌 노동자들이 증가한 것은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의심케 하고, 협동조합의 자회사들이 협동조합이 아닌 주식회사로 세워지는 모순이 만들어졌다. 이런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앞으로 주식회사를 협동조합으로 전환하고 노동자 조합원의 비중을 늘려나간다고 하지만, 현재의 경제위기를 고려할 때 제조업 조합원 중심의 몬드라곤이 그 구상을 얼마나 실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런 정체성 변화는 협동조합의 의사결정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 규모가 커지는 만큼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상시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총이사회와 상임위원회, 사무국의 권력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상위기구인 몬드라곤 협동조합 복합체가 자신의 규정으로 개별 협동조합을 규제하려 들기도 한다. 또한 노동자 조합원들은 사업과 배당에 관심을 갖지 조합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 이렇게 바뀐다면 이 조직을 협동조합이라 부를 이유가 없다.

 

갈러(Z. Galor)는 이런 경향을 탈협동화(demutualization)라 부른다.[각주:9] 갈러는 전 세계 다양한 협동조합들에서 탈협동화 경향이 나타나고 있고 그런 경향이 소비자협동조합과 에너지협동조합에서 두드러직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 탈협동화 경향이 나타나는 주된 원인은 조합원의 관심과 참여 부족이다. 즉 협동조합이 탈협동화되어도 조합원들은 관심이 없거나 외려 주식회사로의 전환을 지지하는 사례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문제가 조합원들 탓은 아니다. 조합원의 삶을 지지하거나 조합원과 함께 성장하지 않는 협동조합의 구조도 문제이고, 세계화에 따른 경제구조 변화나 초국적기업들과의 경쟁, 협동조합이 낡은 것이라는 편견같은 외부요인들도 탈협동화를 부추긴다.

 

한 사례를 구체적으로 따져 보자. 이스라엘의 트누바(Tnuva)는 연계형 협동조합(secondary cooperative)으로 농업공동체인 모샤브(Moshavim)와 키부츠(Kibbutzim)가 생산한 농산물을 가공해서 판매하는 곳이다. 지난 몇 십년 동안 트누바는 빠르게 성장했고, 그와 더불어 조합의 지분과 가치도 높아졌다. 그런데 조합원들이 아니라 두 조합의 위원회가 트누바를 운영했고, 조합원들은 트누바의 성장에서 자기 몫을 공유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이스라엘의 대기업이 트누바를 인수하려는 움직임도 있었고, 에이팩스(APAX)사가 10억 달러(트누바의 실제 자산가치는 8억 달러 정도)를 제안하자 총회는 압도적인 비율로 지분의 매각을 결정했다(에이팩스사가 51%의 지분을 차지!).

 

갈러는 조합에 관심을 가진 조합원 그룹이 존재했다면 그들이 탈협동화에 맞섰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한다. 어쨌거나 이런 전환의 결과 2011년 7월에는 트누바의 비싼 치즈가격 때문에 이스라엘 시민들이 불매운동을 조직하는 일까지 생겼다. 시민들의 조직이어야 할 협동조합을 시민들이 불매운동하는 비극이 나타난 것이다. 이 일이 이스라엘의 협동조합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협동조합간의 연대도 좋지만 연계형 협동조합이 조합원들의 관심과 참여구조를 마련하지 못할 경우 언제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이다.

 

이런 변화가 온전히 협동조합만의 문제는 아니다. 앞서 갈러가 탈협동화의 외부요인이라 얘기한 것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결정권의 집중’이다. 전 세계적으로 국가와 시장의 경계가 점점 사라지면서 엄청난 힘을 가진 괴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정치, 경제의 영역을 넘나든다는 점에서 단순히 초국적 자본이라고만 부를 수 없는 괴물들이다. 심지어 국가의 고유한 영역이라 불렸던 치안과 군대 영역도 점점 민간기업의 영역으로 전환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협동조합의 성공을 점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싸워야 할 상대의 힘이 집중된다고 해서 협동조합운동도 힘을 집중시켜야 한다는 논리 역시 괴물을 만드는 과정일 뿐이다. 세계가 ‘1 대 99의 사회’로 전락한 것은 99%의 사람들에게 결정권이 없기 때문이다. 협동조합은 99%의 사람들이 다시 결정권을 회복하기 위한 방편이지 1%를 위한 벤처사업이 아니어야 한다.

 

그런데 해외의 이런 탈협동화 경향을 무시하고 한국의 협동조합들은 양적인 성장에 올인하고 있다. 최근 박승옥이 “성장은 결사체로서의 성장과 사업체로서의 성장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지, 자본주의 성장신화에 갇힌 성장지상주의와는 차원이 다르다. 때로 협동조합은 지나친 성장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지역사회를 뛰어넘는 사업의 성장은 그 자체로 결사체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한 것은 이런 성장에의 열광을 비판한 것이다.[각주:10] 협동조합이 자본주의 사회의 작은 섬에 불과하다며 부정적이었던 레닌(V. Lenin)조차 “협동조합을 신경제정책에 적응시킬 것이 아니라 신경제정책을 협동조합에 적응시켜야 한다”고 말할 만큼 다른 세상을 꿈꿨던 협동조합운동의 힘은 어디로 갔을까?



3. 사회변혁 전략으로서의 협동조합운동은 불가능한가?


지금 한국의 협동조합에게는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 전 세계가 경제위기로 허덕이고 피크오일이 코앞에 다가온 상황에서 협동조합운동은 어떤 전략을 고민해야 할까?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구조가 협동조합운동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데, 협동조합을 지지하는 대안적인 정치세력이 없는 한국,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와 재벌 중심, 토건중심의 경제구조를 가진 한국, 무한경쟁구조에 갇힌 한국에서 협동조합은 어떻게 자신의 전략을 만들어야 할까?

 

데이비드 맥낼리(D. McNally)는 세계경제 전체를 보면서 새로운 형태로 변이되는 경제위기의 속성을 파악하지 않으면 현재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각주:11] 자본주의의 위기는 일시적이지 않고 산업자본에서 금융자본으로의 변화는 위기의 힘과 규모를 넓히고 있다. 맥낼리는 그런 경향에 맞서 정치를 되살리고 희망의 기운을 만들 다양한 고리들을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월 스트리트를 비롯해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항들은 그런 고리를 구성하려는 노력이다. 그러니 협동조합도 지역의 관점에서 세계경제의 변화를 읽고 지역적인 행동으로 변화에 개입하고 그 사건들을 조직해야 한다.

 

협동조합운동이 그런 개입과 조직의 전략을 고민할 때 기본으로 삼아야 할 것은 자본주의 마케팅이나 다른 사회운동의 전략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원칙이다. 협동조합운동은 이미 협동조합 7원칙을 가지고 있는데, 이 원칙에 대한 소극적인 해석이 아니라 적극적인 해석,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교훈이 지금이야말로 필요하다. 하나씩 살펴보자.

 

첫 번째 원칙 ‘자발적이고 개방적인 조합원 제도’는 가족과 사회집단에의 참여가 강제성을 띠고 성과 재산, 인종, 사회적 지위에 따른 차별이 심한 한국사회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이다. 이를 위해 협동조합은 아무나 오세요가 아니라 오는 사람을 환대해야 하고, 조합에 문턱이 없는지 잘 살펴야 한다. 중산층이나 이성애 가족의 전유물처럼 인식된 협동조합은 사회적 양극화나 가족구성의 변화라는 시대변화에 맞게 자신의 정체성을 바꿔야 한다. 단지 물건을 거래하는 매장이 아니라 새로운 만남을 가지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장이 되어야 첫 번째 원칙이 힘을 가질 수 있다.

 

두 번째 원칙 ‘민주적 관리’는 1원 1표를 따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1인 1표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출자금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똑같은 결정권을 행사한다는 건 조합원들의 자존감을 강화시킨다. 이 원칙은 나와 다른 사람이 동등한 사람이라는 평등의 원칙이자 내가 원하는 바를 드러내고 주장하고 결정할 수 있다는 자유의 원칙이다. 이 원칙을 통해 조합원들은 나와 가족의 경계를 넘어 지역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다. 그리고 노동자의 경영참여가 배제되고 조직구성과 일상활동, 주요한 의사결정과정이 민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이 원칙은 일터의 민주주의를 실현한다. 나와 조합이 분리되지 않고 한 몸임을 깨닫고 나와 조합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과정은 오로지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협동조합은 그런 성장과 역량강화를 위한 틀이다.

 

세 번째 원칙 ‘조합원의 경제적 참여’는 협동조합을 움직이는 자원이 조합원의 것임을 강조한다. 협동조합이 조합원에게 출자금을 받는 것은 필요한 자원을 공정하게 조성하고 그것을 민주적으로 관리하기 위함이다. 아울러 그 과정은 내 몫이 커지려면 우리의 몫이 커져야 한다는 점을 깨닫는 과정이기도 하다. 내 몫을 내놓음으로써 우리의 관계를 더욱더 단단하게 다질 수 있고, 그렇게 몫을 내놓아야 서로 만나야 할 이유가 생긴다. 이런 공유를 위해 협동조합은 조합원들이 은행이나 보험회사, 주식에 매달리지 않고 조합을 통해 살림살이를 실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협동조합은 조합원들의 욕구와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조합원의 욕구와 필요를 파악하는 것이 곧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임을 깨달아야 한다.

 

네 번째 원칙 ‘자율과 독립’은 국가나 자본과 거리를 둬야 협동조합의 자율성이 유지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대형마트, 기업형 슈퍼마켓, 빵집, 사진관 등 문어발식 확장이 기본인 재벌경제에서, 그리고 정부가 민간단체를 길들이고 통제하려 드는 한국에서 이 원칙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민주주의가 통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협동조합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조직이다. 협동조합이 이런 정체성을 강화시킬수록 국가는 협동조합에 개입하려 들 것이고, 친환경 유기농 시장이 커질수록 자본은 협동조합을 집어삼키려 들 것이다. 이에 맞서 협동조합의 자율성을 지키는 것은 국가나 자본이 통제할 수 없는 공공성의 영역을 유지하고 확장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조합원이 늘어날수록 그런 영역의 힘이 강화되는 셈이니.

 

다섯 번째 원칙 ‘교육, 훈련 및 정보의 제공’은 조합의 성공이 조합원들에게 있음을 알리는 원칙이다. 서로를 성장시키는 과정이 아무런 매개 없이 가능할 수 없다. 우리 세계가 어떤 지경으로 몰락하고 있는지, 조합이 어떤 꿈을 꾸고 있고 그런 꿈을 실현하려면 조합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조합원들이 스스로 꿈을 꾸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서로가 서로를 마주보기 위해 어떤 장이 필요한지, 협동조합은 끊임없이 이런 과정을 준비해야 한다. 하나의 모습으로만 살아온 사람이 조합을 통해 다양한 자기 얼굴을 확인하고 그 꿈을 조합에서 실현할 수 있을 때 협동조합은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여섯 번째 원칙 ‘협동조합 간의 협동’은 일종의 연방제 원리라고 얘기할 수 있다. 한 조합의 힘이 충분히 강하지 않더라도 그런 조합들이 여럿 뭉치면, 즉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의 어소시에이션이 되면 그 힘을 키울 수 있다. 협동의 힘이란 애초에 그런 것이고 공생(共生)을 지향한다. 자본주의가 적대적인 경쟁과 인수합병(M&A), 승자독식을 권장한다면, 협동조합들이 힘을 모아 서로간의 경쟁을 누그러뜨리고 새로운 장을 만들고 사회적 시장을 형성하고 살림살이를 바로잡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 협동조합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삶의 질서이고, 자치와 자급이 조합을 통해 실현된다.

 

일곱 번째 원칙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는 중앙집권화된 근대국가에서 지역의 힘을 강화시키려는 시도이다. 협동조합과 지역사회의 관계는 선택적인 것이 아니고, 지역사회가 붕괴되어가는 한국사회에서 협동조합의 역할은 지역공동체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초국적 자본과 중앙권력이 지역을 수탈하는 한국에서 협동조합은 지역을 강화시키려 노력한다. 협동조합과 지역사회를 나누는 경계가 사라질수록 그 힘은 커지고, 그것이 곧 협동조합을 강화시키는 방법이다. 기여한다는 것은 단순히 자원을 기부하거나 자원활동을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지역성(locality)을 부활시키려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일곱 가지 원칙이 제대로 실현되려면 협동조합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미 국가의 사회보장체계와 자본의 소비체계가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협동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협동조합이 섬으로만 존재해서는 힘을 발휘할 수 없고, 설령 섬으로 존재하더라도 그 섬들이 서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러려면 사회변화를 바라는 다양한 세력과 연대해야 한다. 그리고 이 연대는 타자가 내 쪽으로 오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타자의 편에 서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 단순히 이타적인 운동을 지향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삶에 관심을 쏟다보면 그 시야가 넓어질 수 있다. 조합원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소들, 지역사회의 변화, 조합원 가계의 노동조건, 생활상의 어려움 등에 관심을 가지고 개입하다보면 새로운 상대를 만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협동조합운동에게만 요구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회운동들이 협동조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도 중요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협동조합에 관한 후보들의 입장을 살펴보자. 박근혜 후보는 ‘소상공인의 사업인프라 구축 지원’을 위해 “자영업자·소상공인의 자율조직화 유도를 위하여 협동조합 활성화 전폭 지원”하고 “소상공인 협동조합 활성화를 기반으로 공동브랜드, 공동판매 등 공동사업 활동 활성화”를 지원하며, ‘지속가능한 축산업 육성’을 위해 “생산에서 도축·가공·유통·판매까지 협동조합 중심의 축산계열화체계 구축”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문재인 후보는 ‘사람중심 협동경제, 사회적 경제’라는 구호 아래 “사회적 경제를 통해 지역중심 순환경제가 활성화되고 품위 있는 일자리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나라가 진정한 선진국가의 대열에 설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사회적 금융을 조성하고 사회투자기금 2조원을 조성하며 사회적 경제에 관한 공감대를 강화시키고 사회적 경제를 통한 공공서비스(돌봄서비스나 보육 등) 공급을 30%까지 확대하며 사회적 경제 모델을 적극 활용하는 기초자치단체를 집중 지원하며 대통령 직속의 사회적경제위원회를 신설한다는 등의 공약을 발표했다.

 

반면에 통합진보당의 이정희 후보나 노동자대통령을 표방했던 김소연 후보의 대선투쟁공약집에서는 협동조합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김순자 후보의 정책에서는 경제분야가 아니라 ‘에너지 혁명과 생태적 전환’ 정책에서 협동적 소농체제를 중심으로 농촌을 재생하기 위해 협동생산판매체제를 국가 차원에서 구성하고 농협중앙회 등을 협동조합 섹터의 중심체로 전환한다는 정도의 내용이 확인된다. 보수정당의 고민이 외려 구체적이고, 진보적인 정당운동이나 사회운동이 협동조합을 전혀 고민하지 않고 있다. 과거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다양한 교육기관들은 협동조합을 세우는 것을 당연한 과정으로 여긴 반면, 참교육을 지향하는 교육운동이나 대안학교들은 협동조합을 자신의 기관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런 상태에서는 서로 연대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연대에 관한 구체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설령 진보정당이 협동조합과 관련된 정책을 내놓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할지 깊은 고민은 없는 상태이다. 협동조합은 국가의 하부조직이 아니라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자율과 독립을 지켜야 하는 조직이다(과거 러시아의 경험은 협동조합이 국가의 하부기관이 되면서 자기 정체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잘 보여줬다). 그렇다면 진보적인 정치운동은 협동조합과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협동조합운동도 자신이 누구와 함께 지역사회를 재구성할 것인지를, 그리고 단순히 후보 캠프에 필요한 정책을 제안하는 수준을 넘어서 자신의 정치를 어떻게 재발견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협동조합운동은 지역사회의 다양한 소상공인, 노동자, 청년들이 협동조합을 통해 자신들의 삶을 재조직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지역사회가 자신의 힘과 지혜, 권리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



4. 나가며


단순히 협동조합의 수가 늘어나고 그것이 차지하는 몫이 커진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협동의 그물망으로 엮이지는 않을 것 같다. 공산당이나 사회당, 녹색당이 대안정치세력으로 자리를 잡은 나라의 협동조합과 대안정치세력이 거의 없고 생협의 정치참여를 법으로 금지당한 한국의 협동조합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분권화된 국가의 협동조합과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의 협동조합은 매우 다른 경제적, 사회적 조건에서 활동해야 한다. 이런 조건을 넘어서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 그대로 ‘함께 살자’이다.

 

함께 살려면 일단 먼저 서로를 마주봐야 한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어떤 의미이고 우리가 어떤 삶을 지금 살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하고 상상해야 한다. 그렇게 마주보고 상상하다보면 먼 미래의 좋은 삶을 기다리지 말고 지금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협동조합운동은 그런 삶을 위한 틀이 될 때 온전히 제 몫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1. 신중일, “생협 필요성 커지는데 불교계는 제자리”, 《현대불교》2012년 9월 15일자. [본문으로]
  2. 박봉희. 2010. “한국의료생협의 사회적 가치와 역할”, 광주지역사회 협동조합학교 [본문으로]
  3. 최영진, “협동조합 설립 붐, 자본주의 대안으로 뜬다”, 《주간경향》2013년 1월 15일자(제 1009호) [본문으로]
  4. 국회예산정책처, 『사회적기업 육성사업 평가』, 2012년 10월(통권 262호) [본문으로]
  5. 기획재정부, 『협동조합 설립운영 안내서: 아름다운 협동조합 만들기』2013년 1월 24일 발행. [본문으로]
  6. 알랭 까이에 외, 김신양 편역, 『다른 경제』, (재)실업극복국민재단, 2005), 24~30쪽. [본문으로]
  7. 이 부분은 하승우, “협동조합의 부흥기/혼란기?”, 《오늘의 교육》2012년 3․4월호; 하승우, “살리지 못하면 죽는다: 유럽 탈협동화 경향이 주는 교훈”, 《살림이야기》2012년 여름호를 재구성했다. [본문으로]
  8. 김성오, 『몬드라곤의 기적: 행복한 고용을 위한 성장』(역사비평사, 2012년), 30쪽. [본문으로]
  9. http://www.coopgalor,.com 참조. [본문으로]
  10. 박승옥, “한국 생협, 성장신화 버려라”, 《녹색평론》 2013년 1․2월호, 53쪽. [본문으로]
  11. 데이비드 맥낼리 지음, 강수돌․김낙중 옮김, 『글로벌 슬럼프』(그린비, 2011년) 참조. [본문으로]

한나 아렌트 강좌


● 강좌 소개
... ... ...
이 강좌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를 읽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각자 스스로 깨닫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지금도 아렌트는 많은 점에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학자이다. 아렌트를 읽고 소비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아렌트의 보수적이며 복고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에서 아렌트의 거의 모든 저작이 번역되어 있고 여전히 번역 작업 중이라는 사실은 아렌트의 이론이 우리 사회를 크게 불편하지 않게 만드는 온건한 측면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렌트의 저작은 불온하다. 그녀는 근대사회에 대한 전위적인 비판가인 동시에 우리의 정치적 무력함을 불편하게 드러내 주는 저술가이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가스실로 줄지어 걸어 들어가는 의지 없는 나약한 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강좌는 아렌트 이론을 통해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지적해보고 아렌트적인 해결책, 혹은 아렌트의 지향점들을 급진적인 이론으로 구성하려 한다.
늦은 밤 예쁜 카페에서 나즈막히 아렌트 구절을 읽으며 불온한 생각을 속닥거리는 강좌이니, 너무 부담스러워 하지도 너무 맘 편히 오지도 마시길...


● 소개
- 권정우: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정치사상을 전공했으며, 한나 아렌트의 인간론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아렌트로 인해 불온한 동시에 불안한 삶을 즐기다 못해 사랑하게 되었다. 박사 논문을 준비중에 있으며, 정치적 공론장, 도시, 생활정치, 민주주의의 직접행동과 관련한 문제에 관심이 있다
- 하승우: 학교를 관두고 여러 공부모임을 꾸리고 강연을 다니며 생활한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삐딱한 시선의 소유자이다. 한때 ‘도끼’라는 섬뜩한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직접 만나보면 참 선한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다. 아나키즘, 풀뿌리민주주의, 직접행동 등에 관심이 있다.


● 공부모임 일정: 4월 8일부터 매주 월요일

1강 왜 지금 아렌트인가?(4/8): 하승우, 권정우
: 지금 우리 시대에 아렌트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렌트가 기존의 정치이론에 던지는 문제의식은 무엇이고, 아렌트가 구사하는 정치개념의 특별함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시간!
keyword: 독특성, 탄생성, 활동적 삶, 판단, 공론장
하승우, 『민주주의에 反하다』(낮은산, 2012)
고병권, 『점거, 새로운 거버먼트』(그린비, 2012)
존 홀러웨이, 『크랙 캐피탈리즘』(갈무리, 2013)

2강 아렌트의 삶과 사람(4/15): 권정우
: 아렌트의 이론을 형성하고 있는 맥락(context)을 우선적으로 짚어보고자 한다. 독일계 유대인, 하이데거, 나치, 전체주의, 강제수용소, 미국, 망명, 이스라엘, 아이히만. 아렌트와 관련되어 있는 20세기의 사건들과 인물들을 통해 아렌트의 이론 형성의 영향을 살펴보겠다.
keyword: 나치, 히틀러, 하이데거, 이스라엘, 아이히만, 벤야민, 야스퍼스, 브레히트
한나 아렌트, 홍원표 역,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2010, 인간사랑).
사이먼 스위프트, 이부순 역, 『스토리텔링 한나 아렌트』 (2011, 앨피).
엘리자베스 영-브륄, 홍원표 역, 『한나 아렌트 전기: 세계 사랑을 위하여』 (2007, 인간사랑).

3강 아렌트와 전체주의의 이해(4/22): 권정우
: 전체주의의 문제는 아렌트에게 학문적 대상이 아니라 그녀가 떠안은 짐이었다. 또한 나치즘이라는 하나의 사례로서의 전체주의가 아니라 경향으로서의 전체주의를 아렌트는 언급하고 있다. 즉 특수하고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 현실 정치와 인간들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전체주의의 경향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keyword: 전체주의, 총체적 지배, 강제수용소, 군중(mob), 대중(mass)
한나 아렌트, 이진우 역, 『전체주의의 기원』 (2006, 한길사)

4강 노동하는 동물(animal laborans)의 대중사회(4/29): 권정우, 하승우
: 대중(mass)의 등장은 근대사회를 규정짓는 중요한 사건이다. 대중사회는 자본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전체주의의 기원과 상통한다. 대중의 문제는 곧 현대 사회의 문제인 것이다. 아렌트는 대중을, 무세계적(worldless)이며, 고립되어 있고, 자발성을 박탈당한 채 정치로부터 도피한 자들이라고 보고 있다. 아렌트가 보고 있는 대중과 사회에 대한 분석은 현재 우리에게 무엇이 상실되어 있고 결여되어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틀이 될 것이다.
keyword: 대중, 사회, 가계(hosehold), 사적 소유, 무세계성, 고립, 외로움, 자발성, 공통감각
한나 아렌트, 이진우·박미애 역, 『전체주의의 기원』 (2006, 한길사)
한나 아렌트, 이진우 역, 『인간의 조건』 (2002, 한길사)

5강 노동의 정치, 제작의 정치, 행위의 정치(5/6): 권정우
: 아렌트는 노동, 제작, 행위로 이뤄지는 활동적 삶(vita activa)의 위계가 전도되어 있다고 본다. 전도되어 있는 활동의 위계를 다시 제자리로 돌리는 것은 아렌트 이론의 주요한 문제제기이다. 아렌트는 정치를 정의할 때, 무언가를 만드는 작업이나 먹고 사는 필요의 영역을 채우는 노동이 아니라 복수로 존재하는 타인을 전제한 행위의 영역이라고 보았다. 4강에서는 행위로서의 정치란 무엇인지를 아렌트의 논의를 통해 살펴보고,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개념과 개념이 갖고 있는 현실적 함의를 지적하게 될 것이다.
keyword: 노동, 작업, 행위, 정치적인 것, 필요의 영역, 복수성, 자유
한나 아렌트, 이진우 역, 『인간의 조건』 (2002, 한길사)

6강 대중에서 정치적 인간으로(5/13): 권정우
: 그렇다면 무세계적이며 박탈된 존재인 대중이 어떻게 정치적 행위가 선사하는 자유를 쟁취할 수 있을까? 공적 영역은 어떻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인가. ‘용기’, ‘용서,’ ‘약속’, ‘새로운 시작’이라는 아렌트적 개념을 통해 정치의 새로운 미래를 조망해 본다.
keyword: 용기, 용서, 약속, 시작, 판단, 자유
한나 아렌트, 이진우 역, 『인간의 조건』 (2002, 한길사).
한나 아렌트, 김선욱 역, 『정치의 약속』 (2007, 푸른숲).
한나 아렌트, 서유경 역, 『과거와 미래 사이』 (2005, 푸른숲).

7강 공적 행복의 추구: 혁명과 평의회의 경험(5/20): 권정우
: 6강에서는 미국 독립혁명 당시의 타운 미팅과 같이 혁명 과정 안에 우발적으로 등장했고 철저히 파괴되어 버린 자발적 공동체의 역사적 경험을 살펴 볼 것이다. 그 경험들은 1871년 프랑스의 코뮌, 1905년 러시아의 소비에트, 1954년 헝가리의 레떼, 1980년 5월의 광주로 이어지며 정치적 행위의 장을 활짝 열었다. 아렌트는 인간들의 개별적인 덕(virtue) 자발성을 공적인 영역에서 꽃피우게 한 평의회의 경험을 연방 원리, 공동세계의 구성권력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keyword: 혁명, 자발성, 평의회, 소비에트, 레떼, 연방 원리, 공동세계
한나 아렌트, 홍원표 역, 『혁명론』 (2004, 한길사).
한나 아렌트, 이진우 역, 『인간의 조건』 (2002, 한길사).

8강 아렌트로 본 한국정치(5/27): 권정우, 하승우
: 아렌트의 이론으로 현재의 한국정치를 진단하며 강의를 마간하는 시간! 각자가 한 편의 정치 에세이를 쓰고 이를 서로 공유하며 한국의 정치현실에 관한 공론장을 구성한다.


● 장소: 어쩌면사무소(약수동 4번 출구. http://probable.kr/contact)


● 시간: 오후 7시 30분~ 9시 30분.
- 뒷풀이는 알아서들 하시오!!


● 참가비: 정규직 노동자(스스로를 그렇게 여기는 노동자) 10만원(더 내도 상관없음), 비정규직 노동자(한 달 살기에도 삶이 팍팍하다) 6만원(강좌 날에만 담배 한 갑, 맥주 한잔 아끼고 공부합시다), 활동가/청년백수/전업주부/대학생/기타 하루 살기도 삶이 팍팍하다 4만원(정 힘들면 가능한 만큼만 내시길).
- 어쩌면사무소의 음료는 직접 구입해 드세요. 참가비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 참가인원: 어쩌면사무소의 규모상 15명
- 입금한 순서대로 접수함


● 입금계좌: 우리은행 146-503204-02-001 (예금주: 권정우)

하승우(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사회적기업지원법, 협동조합기본법과 더불어 한국에서도 사회적 경제의 제도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국제협동조합의 해를 맞이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들이 앞을 다투어 협동조합과 관련된 법령이나 조례를 제정하고 있고, 금융위기와 실업이라는 심각한 경제위기를 극복할 해법으로 사회적 경제를 주목하고 있다. 제도화의 속도가 빠르면 더 빨라졌지 늦춰질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언제나 제도화는 양날의 검이다. 제도는 운동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고 사회적 조건을 만드는 기반이지만 반대로 운동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제한하는 틀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제도는 끊임없는 혁신을 요구받는다. 제도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더 현실적이고 좋은 방향으로 수정될 때에만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부가 아니라 사회적 경제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제도를 수정할 권한을 가져야 한다. 지금 처한 문제의 어려움과 심각성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불거진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위기가 반드시 사회적 경제에 유리한 조건을 만드는 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인류역사를 살펴보면 대공황과 경제위기에 등장했던 체제는 사회적 경제가 아니라 파시즘과 군사정부였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협동조합운동이 성장했음에도 파시즘을 막을 수 없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시민사회의 자율성과 시민사회를 강화시킬 방법은 제도화만큼, 또는 제도화보다 더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자율성과 힘을 강화시키는 실천적인 활동에 관한 부분은 여전히 형식적으로만 얘기되는 듯하다. 사회적 경제 규모의 성장이 먼저이고 그 내실을 다져줄 조직화와 관련된 사업은 뒷순위로 밀린다. 수단과 목적이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실제 행동에서는 그 둘이 분리되고 수단이 목적을 압도한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멀지 않아 다양한 활동들이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 글은 한국사회에서 왜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강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하고 중요한지를, 거버넌스라는 이름으로 민과 관이 진정 동등한 파트너가 될 수 있을지를, 시민사회운동은 자신의 역량과 한계를 인식하고 성찰하고 있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앞서 말했듯이 제도화는 양날의 검이다.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함께 존재한다. 이 글은 성찰을 유도하기 위해 부정적인 면을 주로 드러낼 것이다.



1. 국가와 자본에 억눌린 시민사회


일제 식민지가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다. 일제 식민지는 한국에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체제를 확립했다. 식민지 통치의 효율성을 위해 수직적인 권력구조가 만들어졌고, 중앙정부가 정책의 기획과 평가 역할을, 지방정부는 단순집행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수직적인 권력구조의 정착과 강화를 위해 강력한 경찰국가체계가 만들어졌고 공권력의 이름을 빈 국가폭력이 시민의 일상에 깊숙이 개입했다. 정치와 노동영역만이 아니라 교육과 위생, 보건영역에도 깊숙이 개입했던 국가폭력은 시민들의 존엄을 짓밟고 수동성을 내면화시켰다. 식민지를 경험한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나타나는 시민사회의 수동성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강요된 것이다. 중앙정부가 일상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각종 제도들과 폭력적인 개입이 지금도 제주도 강정마을이나 밀양, 삼척 등지에서 재현되고 있다.

 

그리고 식민지 이후 미군정과 한국전쟁, 분단의 고착으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현대사는 반공이데올로기가 시민의 일상사를 지배하게 했다. 영화 <풍산개>에 나오듯 반공이데올로기는 단순히 ‘빨갱이’를 만들고 그들을 색출해야 한다는 배제의 논리로만 작동하지 않았다. 빨갱이로 분류되지 않은 사람들도 남이냐, 북이냐라는 양자택일의 논리에 갇히게 되었고 어느 계파에 서지 않으면 자신을 드러낼 수 없게 되었다. 끊임없는 자기검열과 진영논리에 시달리면서 시민사회의 외부적인 자율성만이 아니라 내부적인 자율성도 점점 사라졌다.

 

중앙집권형 국가가 가져온 또 다른 문제는 대부분의 지방을 ‘내부식민지’ 상태에 빠뜨렸다는 점이다. 수도권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방은 자치와 자급능력을 상실한 상태이다. 재정자립도, 지역내 총생산, 지역문화/교육 등 대부분의 지표에서 지방의 능력치는 매우 낮다. 지금 당장의 역량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앎과 삶이 연결되는 과정이 살아있다면 그 역량을 서서히 회복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지역적인 앎과 지식이 평가절하될 뿐 아니라 거의 사라진 상태이다.

 

정리하자면 중앙집권형 국가와 반공․규율사회를 거치면서 ‘시민사회의 자율성’은 언급하기 어려울 만큼 약화되었다. 현실적으로 농협을 비롯한 관제 협동조합이 가장 큰 규모의 협동조합이듯, 사회적 경제 또한 체제 내화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이런 허약한 기반 위에 좋은 건물을 세우겠다는 건 허황된 생각이다.

 

국가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한국의 경제를 고려하면 시민사회의 자율성은 더욱더 허약해진다. 식민지와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한국경제는 재벌 중심의 발전전략을 강화시켜 왔다. 제 아무리 시장질서를 내세워도 관치경제가 실제 모습이고, 정부가 벌이는 대규모 토건사업에서 재벌들이 이득을 취해왔다. 한국 재벌의 성장기반은 관료와의 결탁과 부패였고, 브루스 커밍스의 말처럼 “한국의 재벌들은 남한에 거대한 가족경영의 세습 기업영지를 세우고 그것을 자본주의라고 불렀다. 따라서 한국의 개혁가들에게는 이 재벌체제 내에서 개혁을 추진하는 것 외에, 즉 이런 기업들과 국가, 그리고 거대 은행들 사이의 연계를 끊는 데 집중하는 것 외에 달리 대안이 없었다.”

 

그리고 재벌들은 독자적으로 기술을 개발하지 않고 중소기업이 개발한 기술을 ‘제휴’나 ‘협력’의 명목으로 가로채 왔다. 비도덕적인 행위는 재벌들의 기술 가로채기에서만 드러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중소기업들을 후려치는 납품단가 인하이다(재벌들은 매년 최소 20%이상의 단가 인하를 목표로 삼는다고 한다). 곽정수에 따르면, “회사의 연간 이익 목표가 정해지면 그것에 맞춰 원가절감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단가 인하 목표가 설정된다. 단가 인하는 분기별로 나눠서 시행하는데, 회사의 경영상황에 따라 연간 목표와 별도로 추가적으로 단가 인하를 할 때도 있다.” 이런 상황이니 2011년 10대 재벌의 매출액이 무려 국내총생산의 76.5%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이런 독점을 고려하면 ‘기업사회’라는 말이 무색하고 ‘재벌사회’라 불러야 한다. 그리고 재벌들의 문어발식 확장은 SSM만이 아니라 골목상권으로도 이미 침투하고 있다. 곽정수에 따르면, “CJ, 롯데, GS, 두산, 삼양사, 오리온, 매일유업, 농심, 남양유업, 빙그레, LG패션 등이 참여한 외식업은 일부 재벌이 먼저 진출한 분야에 다른 재벌들이 추가로 뛰어든 경우다. 여기다 와인 판매(LG, SK, 롯데, 신세계, 보광, 두산, 동원), 온라인 교육(SK, 삼성, KT, 이랜드), 차량 정비(SK), 사진관(SK), 소금 생산(CJ), 농산물 생산유통가공(현대차), 막걸리(CJ, 롯데, 진로, 오리온), 골판지(롯데, 농심, 한화, 삼양식품, 오리온, 애경), 웨딩사업(SK), 먹는 샘물(LG, 하이트), 장례업(삼성), 콜택시 사업(동부), 학원 사업(대상) 등 전혀 새로운 영역으로 진출한 사례도 일일이 헤아리기 어렵다. 대형할인점, 기업형 슈퍼마켓(SSM)으로 불거진 골목 상권 침해논란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사회적 경제의 영역과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 영역이 현실적으로 겹친다.

 

국가와 자본, 시민사회라는 세 축을 고려할 때, 한국 시민사회의 역량은 국가와 자본에 압도당해 왔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체적인 힘이 약하다보니 그동안의 시민사회운동은 주로 법과 제도를 변화시키는데 활동의 초점을 맞춰왔다. 자연히 전문가 중심, 사무국 중심의 활동이 강화되었고, 엘리트 중심의 운동문화가 형성되었다. 중앙집권형 국가 속에서 운동하니 운동조직들도 피라미드형의 위계구조를 갖추게 되었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였다. ‘시민없는 시민운동’이라는 호명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식민지와 군사독재, 재벌에 억눌려온 시민문화가 시민사회운동을 통해 부활하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국가와 자본의 힘이 강하다보니 노동과 농업의 의제들은 그동안 정치의 주요한 의제가 되지 못했다.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이 법적으로 자유로워진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지금도 실제로는 그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다. 농민운동 역시 농촌의 파괴, 농민수의 감소, 농업의 쇠락과 더불어 주도권을 잃어가고 있다. 사회적 경제를 활성화시키려는 노력이 기존의 노동․농민운동과 분리된 채 진행될 수는 없는 노릇인데, 이를 연계한 조직적인 역량은 마련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운동사회 내에 깊이 뿌리내린 정파간 갈등구조(거의 선악의 구조와 가까운)는 연대를 명목적인 연대로 만들어왔다. 통합진보당 사태만이 아니라 시민사회운동 곳곳에 그와 유사한 갈등들이 존재하고, 가부장적인 운동문화 또한 갈등의 씨앗이 되고 있다. 즉 시민사회운동의 자체적인 역량이나 의지도 매우 취약한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자율성을 논할 수 있을까?



2. 정책의 공동생산 또는 거버넌스 구조는 존재하는가?


이런 상황에서 제도화의 방식으로 거버넌스가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거버넌스는 논의 이상의 실천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고, 관이 주도하고 민간이 이를 보완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말로 왜곡되고 있다. 사실상 한국사회에서 거버넌스가 자리잡기 어려운 몇 가지 원인이 존재한다.

 

첫째로, 관료주의의 문제이다. 중앙집권형 국가의 관료들은 지나치게 많은 정보와 권한을 누린다. 그리고 선발되는 관료들은 선거 등을 통해 선출되는 관료들과 때론 협력관계를 때론 긴장, 갈등관계를 맺으며 독자적인 이해관계를 추구하기도 한다. 관료들의 능력은 민주화의 효과에 영향을 받지 않고 사업의 기획과 집행, 평가 모든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더구나 196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대규모 공공수요가 발생하자 관료들은 예산, 인력, 지침들을 일방적으로 확정하는 것을 관행으로 만들었다. 중앙의 부처들이 일방적으로 계획을 입안하고 비밀리에 사업을 추진하거나 반대측의 논리를 일방적으로 몰아세우거나 이념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일까지 생겼다.

 

그리고 중앙정부가 직접 사업대상을 선정하다보니 지방자치단체의 사업기획은 중앙정부의 기획을 따를 수밖에 없고 공모로 사업을 진행하다보니 지방자치단체들의 경쟁이 치열해진다. 1991년 지방의회의 부활을 시작으로 지방자치제도가 부활된 지 20년이 넘었건만 중앙이 계획, 평가하고 지방이 집행하는 구조는 여전하다.

 

민주화 이후에는 관료들이 ‘공공성’을 내세워 사적인 이해관계를 추구할 뿐 아니라 ‘조직의 이해관계’를 놓고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보통 정책집행단계보다 정책입안단계에서 이런 경쟁이 치열한데, 갈등은 권력을 더 많이 가진 부처에 유리한 쪽으로, 즉 예산이나 인력규모, 기관의 법적․공식적 권한, 대통령의 관심과 지지를 더 많이 받는 부처(재정경제부, 기획예산처, 검찰청, 중앙인사위원회, 행정자치부, 외교통상부, 교육인적자원부, 법무부 등)에게 더 유리하다. 조직의 이해관계가 강조되다보니 공공성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거버넌스도 부처간의 이해관계에 무력해지기 쉽다.

 

물론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에 이런 관료제도를 개혁하려는 시도(개방형 공무원제도 등)가 있었지만 내부의 저항으로 실패를 거듭했다. 그리고 관료들의 저항만이 아니라 개혁의 방향이 힘의 불균형이나 실제 조건을 무시하고 원론을 내세우는 경향도 있었다. 또한 한국의 관료조직은 지연과 학벌을 통해 단단한 연고를 다지고, 이런 연고들은 주무장관이나 단체장과 같은 임명되거나 선출된 관료들의 통제를 약화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 이런 관료주의 구조에서는 거버넌스가 이루어지기 어렵고 제도화의 과정은 정부의 의지만을 반영하기 쉽다.

 

둘째는 지금도 깊이 뿌리내려 있는 관존민비(官尊民卑)의 문화이다. 시민은 정치의 ‘대상’이었지 정치의 ‘주체’로 여겨지지 않았다. 관은 계획을 구상하고 민은 그것을 따르는 철저한 역할분담만이 이루어졌다. 한국처럼 관존민비 문화가 오랫동안 자리잡아온 곳에서는 정부가 주민이나 시민의 능력을 불신하고, 그러다보니 주민이나 시민은 정부의 의도를 믿지 않고 적극적으로 결정과정에 참여하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정부는 당위적으로 참여를 강조할 게 아니라 실제로 참여할 수 있는 조건들(예를 들어 정책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자료집을 나눠주거나 자주 찾아가서 만나고 얘기할 기회를 가지는 등)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런 노력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문화의 물질성은 공유자산에 대한 관의 ‘독점권’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동사무소가 주민자치센터로 이름을 바꾼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주민들이 그 공간을 쓰려면 공무원들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지방정부나 중앙정부가 점유하고 있는 공유자산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적 경제의 실현에 필요한 다양한 자원들이 사회의 몫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정부의 손에 묶여 있거나 남용되고 있다.

 

셋째, 거버넌스에 필요한 정보와 자원의 불균형이다. 정부와 민간이 협력해서 결정을 내리려면 그 사안과 관련된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협력하려면 신뢰가 필요하고 신뢰하려면 서로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히 토론해야 하고, 그리고 충분한 토론이 가능하려면 토론할 수 있는 이야기꺼리가 많아야 한다.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은 채, 혹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보만 제공한 채 같이 논의해서 결정하자는 건 거버넌스를 형식적인 틀로 만드는 원인이다.

 

아울러 그런 정보를 검토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공간도 마련되어야 한다. 민주적인 과정의 의미는 정보를 꼼꼼히 검토하고 충분히 토론할 시간과 공간이 보장될 때에만 거버넌스가 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실질적인 부분을 꼼꼼히 챙기는 사례는 한국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은 행정이 편한 시간과 장소에서 제한된 정보와 짧은 시간 내에 아무런 권한도 없이 거버넌스를 내세운 협력이 이루어진다. 사회적 경제와 관련된 사업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시간동안 업체수만 늘리려는 방식은 사회적 경제의 뿌리내리기에 독이 될 수밖에 없다.

 

넷째, 거버넌스의 실현방식이다. 사실상 지금까지 한국 정부는 특정 주민들만을, 소위 ‘지역토호’라 불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아 왔다. 뉴라이트의 권력기반이 강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제는 이런 세력들이 시민사회, 제3섹터라는 영역 속에 자연스럽게 포함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거버넌스는 이해당사자와 더불어 전문가들의 참여를 당연시하고 이들의 의견에 지나치게 의존하곤 한다. 이명박 정부 이전의 정부들에서도 거버넌스는 주로 시민단체나 지식인들만을 파트너로 삼았다. 정부는 자기 세력을 중심으로 개혁을 수행하기 위해 여러 가지 위원회를 만들었고 이런 위원회에는 시민들보다 단체나 지식인들이 주로 참여했다. 더구나 이런 위원회들이 시민과 정부 사이를 매개했다기보다는 단체나 지식인들이 구상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현실화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는 시민단체나 지식인들이 민주화 과정에서 여전히 자신들의 역할을 잡지 못했음을 뜻한다. 운동이 변화된 사회적 조건에 발맞춰 성격을 바꾸는 노력은 필요하지만 ‘거버넌스의 덫’에 걸려들어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은 일정한 타당성을 가진다.

 

그러나 지역의 필요와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적 경제를 실현함에 있어 전문가는 누구인가? 주민들은 지역에 관해 추상적이고 보편적 지식보다 구체적이고 경험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지식은 적어도 지역의 문제를 풀어가는데 있어 전문가의 전문적인 지식만큼, 또는 그보다 더 소중하다. 더구나 현재 그 지역에서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갈 사람들은 전문가가 아니라 주민이기 때문에, 주민들의 참여는 매우 중요하다. 아무리 뛰어난 건축가나 요리사라 하더라도 좋은 집이나 음식을 만들려면 그 집에 살거나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욕구를 들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다섯째, 거버넌스 이면에 깔린 민영화나 시장논리의 문제점이다. 설령 국가가 권한을 나눈다 하더라도 그것이 시민사회의 참여와 협력의 강화로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는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이중 구조가 아니라 국가, 시장, 시민사회라는 삼각 구조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의 분권이나 역할변화는 시민사회의 강화가 아니라 시장의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 국가의 ‘탈규제’와 ‘민영화’, ‘위탁관리’만이 국가의 문제점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주장은 그런 시각을 잘 보여준다.

 

여섯째, 거버넌스가 논의되는 시점이다. 보통 거버넌스는 사안을 계획하는 단계에서가 아니라 그 사안을 진행하는 단계에서 갈등해결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제안되었고, 그렇기에 갈등의 씨앗은 여전히 남아 있다. 정부는 거버넌스를 주장하면서도 일반 주민이나 평범한 시민들을 중요한 논의대상이나 파트너로 여기지 않고 일방적으로 정책을 계획하고 집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가 바뀌지 않고 거버넌스를 논하기는 어렵다.

 

사회적 경제의 제도화라는 정책과제가 민주적이고 효과적으로 실현되려면 관과 민의 공동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의 구조에서는 그런 협력이 거의 불가능하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책과 제도를 만든다. 이런 초기의 제도화가 사회적 경제의 앞날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논리이다.

 

지금 당장 제도화의 방향에 개입하지 못하더라도 내적인 힘을 기르고 있다면 이후에라도 시민사회운동이 제도의 틀을 바꾸는데 참여할 수 있다. 지금의 상황은 어떨까?



3. 운동과 사업이라는 두 마리 토끼


자활,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나눔장터 등 사회적 경제의 영역은 계속 넓어지고 있고 관련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지만 규모와 활동가의 수가 운동의 목적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외려 규모와 수가 늘어날수록 단체 내부에서조차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자기 담당사업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자기반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외부로 알려진 만큼 내실이 없다는 비판, 사업담당자만 있지 활동가는 없다는 성찰도 있다. 눈에 띄는 사업에 단체들이 몰리고 때로는 단체들이 서로 경쟁하며 기본적인 정보조차 공유하지 않는다는 볼멘소리도 들린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걸까?

 

첫째, 정부의 사업관행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은 없고, 이런 식이라면 당장 사업을 관두고 싶지만 우리가 아니면 안 될 사업이라 울며 겨자먹기로 한다는 식의 얘기가 많다. 이 시점에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져봄 직하다. 정부의 일을 대행하는 것이 사회적 경제 진영의 역할일까? 물론 주민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사업들을 제대로 실행하는 건 중요한 일이지만 그런 사업들에 모두 ‘사회적 경제’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다. 특히 사업에 대한 ‘평가의 권한’을 사회적 경제 진영이 가지고 있지 않고, 외려 관이 그런 평가의 권한을 가지고 사업에 개입한다. 따라서 사업을 제대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이 사업을 하는 것인가’, ‘사업이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다양한 사회적 관계망을 맺고 확장하며 사업에 개입하고 있나’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면, 많은 사업들은 사회적 경제의 기반을 다지는 운동을 하지 않는 상황에 대한 핑계일 뿐이다.

 

그리고 정부의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사회적 경제의 제도화와 사회적 경제의 공고화나 확산에 도움이 될 것인가? 단체들의 고유활동을 지원사업으로 기획하거나 그 단체의 설립목적과 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업을, 소위 ‘뜨는 사업’을 추진하는 것도 문제이다. 우리가 사업만을 위한다면 자본주의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고, 보조금만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관료주의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필요한 인적, 재정적 자원을 마련하는 과정이야말로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사회적 경제를 실행한다는 단체들도 쉬운 길만을 선택하고 있는 것 같다. 갈수록 단체들의 사업이 비슷해지고 있고, 지역특성을 반영한 활동들, 아니 유기체처럼 변화하는 지역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반영하는 활동들은 사라지고 있다. 자원을 마련하는 과정이 곧 지역사회를 조직하는 과정인데, 외부자원을 동원하려 애쓰다보니 불편하고 어려운 과정을 밟더라도 지속성이 담보되는 내부의 자원을 모으려 하지 않는다.

 

더구나 공무원들은 바보가 아니고 자원이 제한되고 부족한 시민사회의 상황을 알고 있기에 더욱더 거만하게 나온다. 때로는 일부러 단체들끼리 경쟁을 붙이고 자기 말을 잘 듣는 단체들을 밀어주기도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운동의 목적은 자꾸 사라지고 사업만 남게 된다. 더구나 행정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사회의 밑바닥을 다지고 관계를 확장시키는 사회적 목적보다 앞서 나가게 된다. ‘왜 우리가 운동을 시작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면, 지금의 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다.

 

둘째, 사회적 경제의 지속가능성이라는 면에서 생기는 고민인데, 요즘은 어딜 가나 사람이 부족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왜 그럴까? 앞으로 박원순 시장과 같은 사람이 더 나올 수 있을까? 운동이 사람을 성장시키지 못한다면 좋은 활동가, 뛰어난 활동가도 더 이상 나오지 못할 것이다. 과거에는 학생운동 출신들이 이런저런 시민사회운동의 활동가로 충원되었지만 경쟁적인 교육체계, 대학 중심, 학벌 중심의 교육체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이제 그런 충원구조는 사라졌다. 10년 뒤, 20년 뒤에는 누가 어떤 과정을 밟아 운동에 참여할까? 아이디어나 기획력이 뛰어나고 그나마 사회정의감을 가진 대학생들도 아마 단체가 아니라 행정조직을 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이 실행력과 자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활동의 문화도 많이 바뀌었다. 목적을 공유하더라도 문화를 공유하지 못하는 ‘세대단절’의 문제가 풀뿌리운동 내에서도 드러난다. 이런 단절을 이어가려는 노력을 풀뿌리운동이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 고민을 했다손 치더라도 그 고민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을 거의 못 봤다. 10년 정도 더 지나면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생활리듬과 가치관을 가진 이질적인 존재가 한 단체 안에서 (그것도 운이 좋아야) 불편한 동거를 하게 될 것이다.

 

사람을 기르지 않으면서 어떤 지속가능성을 논할 수 있을까? 사람 없이는 제도가 지속될 수 없다.



4. 결론


이상의 비관적인 전망을 마치고 제도화 과정에서 몇 가지 제언을 하고 싶다.

 

일단 무조건 안 된다고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역량에 대한 정확한 평가와 어느 부분의 힘을 더 강화시킬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다. 특히 앞서 말한 여러 문제점들에 대처할 방법을 깊이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사회구조와 제도를 변화시킬 힘은 시민들이 자신의 권한을 되찾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이를 위해 사회적 경제운동은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분권국가, 연방국가로 해체할 방법을 여타의 시민사회운동, 정치운동과 함께 고민해야 한다. 재벌과 국가, 수도권으로 집중된 권력구조를 해체시키지 않고 사회적 경제의 전망을 논하는 건 무의미하다.

 

그리고 협동의 문화를 구성해야 한다. 거버넌스를 제도적인 협약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 계약의 실행을 요구하고 강요할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다양한 단체, 운동들이 함께 도모하는 일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접촉도 잦아져야 한다. 관료주의를 넘어설 방법은 똑같은 관료조직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시도들이다. 그리고 관료주의의 특성상 일단 정책이 입안되고 집행되기 시작하면 그것을 막을 방법을 찾기 어렵다. 따라서 용역보고서로 시작되는 정책의 입안과정에 관심을 두며 참여해야 하고 겉으로 드러난 단기적인 사업만이 아니라 중․장기적인 사업에도 관심을 가지며 개입해야 한다.

 

또한 시민사회의 자율성이 강화될 수 있도록 지식인들의 다양한 활동이 필요하다. 현재로서는 지식인의 자율성 자체가 정부나 자본의 영향을 받으며 흔들리고 있다. 한국연구재단을 비롯한 연구지원에 따라 연구방향이 주로 제도로만 맞춰지고 실질적인 삶이나 방향성과 관련된 부분들은 약화되고 있다. 지방으로 내려가면 이런 문제점은 더욱더 심각해진다. 즉 지식인 사회가 사회에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는커녕 제도권력과 결탁하며 이익을 추구하기도 한다(각종 연구용역들이 그런 거래의 매개가 된다). 이런 폐해에서 벗어나 자율성이 강화되고 다양한 지적 활동이 시민사회의 생활을 매개로 벌어질 수 있도록 사회적 경제운동의 다양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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