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말로 ‘돌직구’라고 그러죠. 그냥 크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지려 합니다.

 

1.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 왔나?

 

풀뿌리라는 말이, 마을과 공동체, 협동조합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좋은 일이지요. 그동안 노력해온 성과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론 팽팽하게 긴장해야 할 일입니다. 이 말이 우리의 입과 우리의 힘을 통해서가 아니라 국가와 기업의 입과 힘을 통해 퍼지고 있다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꿈과 의지를 담은 말이 그저 그런 사업처럼 논의되고 있다는 현실을 눈감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풀뿌리운동에서도 ‘사업’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습니다. 사업을 하니 실무자가 필요하고, 어느덧 활동과 활동가는 거북한 말이 되고 있습니다. 내가 정신 바짝 차리고 있으면 되지 어떻게 불리든 무슨 상관일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렇지요. 하지만 운동은 나의 의지로만 되는 게 아니고, 나를 바라보는 여러 사람들의 뜻이 모일 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풀뿌리운동을 지켜보는 여러 사람들이 이 운동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고 있는지 그 목소리를 들어볼 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동안 우리가 걸어온 길이 잘못 되었다는 게 아니라 이제 우리가 이 길을 어떻게 걷고자 하는지 서로 확인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2. 우리는 어떤 미래를 살고 있나?

 

요즘 ‘prefigurative’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저는 이 말을 좀 좋아합니다. 이 말을 ‘예시적’, ‘전(前)형성적’, 이렇게 해석하기도 하지만 저는 ‘미래를 살아가는’이라고 씁니다. 미래의 유토피아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지금 유토피아가 온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그 사회가 지금 실천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풀뿌리운동도 어떤 미래를 살고 있는지 한번 고민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미래를 살고 있을까요?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마음에 품고 그 사회를 하나씩 실현하며 살고 있을까요? 어느 순간 우리는 그 사회에 관해서는 얘기하거나 살지 않고 그냥 그것이 있다고 믿기를 강요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진행되는 사업을 얘기하며 달을 보라는데 손가락만 본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종종 보이는데, 사실 저는 그 사람들이 무슨 달을 가리키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삶으로 드러나지 않으니 알 수 없고, 달을 보여주지 않으니 모르겠습니다. 예언자는 무책임한 말을 내뱉는 사람이 아니라 그 예언이 실제임을 증명하는 사람인데, 우리는 증명하지 않는 예언자들의 시대를 살고 있는 듯합니다.

 

사람에 관한 문제가 사회에 관한 문제와 분리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각자의 삶을 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3. 어떤 경계를 넘어야 할까?

 

풀뿌리운동에 정말 힘이 있을까요? 단지 박근혜 정부가 등장했기 때문에 던지는 질문은 아닙니다. 법률 하나 제 마음대로 만들지 못하고 사람 하나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운동이 어떤 변화를 장담할 수 있을까요? 시간이 흐를수록 동의하고 동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하는데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만 얘기를 나누고 있는 상황이니 답답합니다.

 

더구나 앞으로 맞닥뜨려야 할 현실은 더 어려워질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파국’이라는 상황을 앞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이 체제가 비틀거리면서도 걸어왔는데 앞으로도 과연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금융위기, 경제위기가 이미 몇 년 전에 선포되었고, 핵발전소와 먹거리 등 일상이 위기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한국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하지만 전 세계는 조금씩 들끓고 있습니다.

 

풀뿌리운동은 이런 현실과 무관할까요? 현실은 개판인데 우리는 여전히 힐링의 방식을 택하려는 건 아닌지, 저는 좀 우려가 됩니다. 이제 풀뿌리운동도 본격적으로 자기 경계를 확장시켜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주민운동의 틀에서 벗어나 다양한 영역의 운동들과 서로 엮이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좀 힘이 나지 않을까요? 우리 일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인데 어떻게 다른 쪽에 관심을 가지냐? 과연 그 우리 일이 과연 다른 일과 무관할까요?

 

곳곳의 공장과 일터에 위험물질이 쌓여 있는 상황에서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는 착각 아닐까요? 우리 지역에 무엇이 있고 어떤 사람들이 어떤 조건에서 일하고 있는가, 이것은 더 이상 남의 문제일 수 없습니다. 전국 곳곳의 노동현장에서 장기파업과 철탑농성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지역사회가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상황이 벌어지면 일시적으로 연대기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장기적으로 지역사회 변화전략을 짜야 하지 않을까요?

 

자치와 자급은 무관할 수 없고 자급의 기반인 농촌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팔자 좋게 공동체를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농업이 사업과 산업으로 변한 사회에서 자치가 실현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생활정치가 중요하지만 그것이 제도정치와 어떤 영향을 주고받고 사회의 공공성을 확장시킬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냥 우리끼리만 잘 사는 공동체는 재벌가의 아름다운 브랜드아파트 CF에도 등장할 수 있습니다.

 

마을만들기로 성공한 지역의 집값이 뛰거나 재개발되면서 마을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야 하는 서글픈 상황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회권은 복지국가 유럽시민들만 누리는 특권일까요?

 

제가 운영위원장이라는 큰 권력을 낼름 사다리타기로 얻었습니다. 사다리타기로 얻은 권력, 양껏 써보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작년부터 시작된 사례연구팀에서 어느 정도 담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질문은 비정규직 노동운동, 농민운동, 문화운동, 인권운동 등 이미 진행 중인 다양한 운동들, 지역사회를 중심에 놓고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운동들과 공통의 질문을 놓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작년에 진행된 “인권운동가 + 풀뿌리운동가 우리 한번 만나” 자리가 시작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어떤 단위를 만들지 않더라도 같이 고민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고민이 잘 나눠지지 않으면 운동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상, 준비된 운영위원장 하승우였습니다.^^

요즘 들어 협동조합에 관한 얘기를 여기저기서 듣게 된다.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되고 협동조합에 관한 책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으며 언론매체에서도 협동조합에 주목하는 프로그램이나 기사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협동조합이 대안사회의 기반으로 소개되기도 하고, 지방자치단체들이 협동조합을 지역경제 발전모델로 고려하기도 한다.

 

왜 갑자기(?) 협동조합일까? 기념일 챙기길 좋아하는 한국인지라 유엔이 2012년을 ‘협동조합의 해’로 정했다는 사실이 흥미를 끌었을 것 같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이 현상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은 조금 더 실질적인 것으로 보인다. 언론에 소개되는 경향을 보면 일자리 창출이라는 면에 많이 집중된 듯하다. 그런 면도 분명 긍정성을 갖지만 그것만으로 협동조합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을까?

 

이 강좌의 주제는 협동조합과 지역운동이다. 그런데 한국 협동조합운동의 시초를 보면, 협동조합과 지역운동이 아니라 협동조합이 곧 지역운동이었다.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협동조합이 고민되었다. 물론 협동조합은 경제활동을 하는 법인이자 조직활동을 하는 결사체이다. 이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경제활동을 하고 힘을 축적할까?? 일반 기업처럼 경제활동을 하지만 경제활동의 목적이 달랐다. 자본주의 기업은 이윤의 축적, 자본형성이 목적이지만 협동조합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 힘을 어디에 쓰려고 하는 걸까? 그런 점에서 한국 협동조합운동의 기원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1. 지역운동이자 협동운동

 

일제 식민지 시기 여러 개혁가들이 전국 곳곳에 학교를 세웠다. 도산 안창호 선생과 남강 이승훈 선생도 그런 개혁가였다. 흥미로운 건 이들이 학교만 세운 게 아니라 협동조합을 근거로 한 이상촌을 만들려 했다는 점이다. 이들에게 학교와 협동조합은 이상촌의 기둥이었다. 지역을 공부하고 일하고 생활하는 장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안병욱 등이 쓴 『안창호 평전』(청포도, 2007년)을 보자. 도산 안창호 선생은 “산과 강이 있고 지미가 비옥한 지점을 택하여서 200호 정도의 집단 부락”을 세우려 했다. 이 이상촌에는 “공회당(公會堂), 여관, 학교, 욕장, 운동장, 우편국, 금융과 협동조합의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이 설치될 것”으로 “집단적인 회식과 오락”을 안창호 선생은 강조했다. 이 부락에는 금융기관과 협동조합이 있는데, “금융기관에서는 저금과 융자의 일을”, 협동조합은 “생산품의 공동판매와 일상생활 용품의 공동구매 배급기관”을 담당한다. 안창호 선생은 이 부락에 “일반교육의 학교 이외에 직업학교를 세우”려 했고 “직업학교는 농(農)․잠(蠶)․임(林)․원예․목축(牧畜)․공(工) 등의 여러 과목을 두되, 공에는 농가 건축, 농촌 토목, 요업, 식료품 가공, 농구제조의 목․철공, 농촌 상업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학교를 졸업하면 소자본과 약간의 연장으로 직업을 갖고 이상촌의 한 몫을 담당하도록 하는 것이 학교교육의 목표였다. 안창호 선생은 이러한 모범촌과 직업학교를 각 도에 하나씩 설립해서 적어도 전국 각 면에 한사람씩을 선발하여 교육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 모범촌은 “첫째, 각 사람이 교육받고 훈련받은 직업 기능을 가질 것, 둘째, 그리하여서 농․어․임․공 기타 모든 생산방법을 과학화하고 합리화할 것, 셋째, 부락사업의 계획과 경영과 노력을 집단화할 것. 이것을 도산은 분공합작(分工合作)이라 하였다. 넷째, 부락의 금융과 공공 매매의 협동기관을 세울 것. 다섯째, 각 사람의 덕, 즉 신용을 향상하고 부락의 일상생활을 도덕적․위생적․심미적으로 개선하여서 생활이 안전하고 유쾌하게 할 것”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안창호 선생에게 협동조합은 어떤 의미였을까? 안창호 선생은 이를 무실역행(務實力行)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아무리 옳은 것을 알더라도 행함이 없으면 아니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봤고 무실역행하는 중요한 기관이 학교와 협동조합이었다. 이 둘은 분리된 기관이 아니었다. 안창호 선생이 평양에 세운 대성학원의 뜻을 이어받은 것이 1954년 원주에 세워진 장일순 선생의 대성학원이라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안창호 선생의 이상촌을 실제 계획에 옮겼던 건 이승훈 선생이다. 이승훈 선생은 충남 홍성군에 풀무학교를 세운 이찬갑 선생의 종증조부이다. 이찬갑 선생에 관한 백승종의 『그 나라의 역사와 말: 일제 시기 한 평민 지식인의 세계관』(궁리출판, 2002년)에서 이승훈 선생이 세운 오산학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오산학교는 용동 마을에서 북쪽으로 일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전국 각지에서 온 학생들이 학교 주변에 하숙집을 정해두고 있었다. 이찬갑의 집에서도 대문의 서편에 있는 사랑방 두 개를 학생들의 숙소로 제공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숙비를 지불함으로써, 이 집의 살림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1940년경까지는 그러했다.” 이승훈 선생은 용동 마을에 교회를 세우고 자신의 사유지 일부를 마을 전체의 공유 농지로 기증하는 한편 마을조직인 용동회를 조직했다. 용동회는 “자치적으로 마을의 위생, 교양, 풍기는 물론이고 마을의 모든 일을 처리”했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 가운데서도 한 명씩 간사를 선출하여 마을일을 함께 의논”했다. 용동회와 별도로 이승훈 선생의 측근과 친척들이 자면회를 조직해서 근면, 청결, 책임을 주장하며 “농지 개량, 연료 개량, 협동생산, 협동노동 및 소득증대”를 추구했다.

 

이렇게 “오산학교를 발전시키는 한편, 이승훈은 지역 공동체를 굳건한 기반 위에 세우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용동을 비롯한 오산의 일곱 마을에 저마다 동회를 조직하게 하고, 그 전체를 하나로 묶어서 소비조합을 설치했다. 조합은 일곱 마을의 연합체이기도 한 동시에 동회의 상위 조직이기도 했던 셈이다. 소비조합은 본래 학생과 주민들에게 생필품과 학용품을 값싸게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찬갑은 소비조합 일에 특히 열심이었다. 1933년 3월부터 1935년 3월까지 그는 오산소비조합의 전무이사를 지냈을 정도이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이찬갑은 조합운동의 필요성을 잊지 않았다. 1958년 4월, 그는 주옥로와 함께 충남 홍성에 풀무학교를 창설했는데, 개교 직후 학교 내에 소비조합을 설치했던 것이다. 오산의 경우에도 소비조합의 사무실은 오산학교 구내에 있었다. 이 점만 보더라도 학교와 조합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 설명을 들어보자. “오산의 조합은 일종의 은행이었다. 오산학교 학생들의 학비는 부형이 학교로 송금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 돈을 조합이 보관했다. 학생들은 담임 선생님의 허가를 얻은 다음, 금전 출납부에 돈을 사용할 용도를 기입했다. 그런 뒤에야 지출이 가능했다. 용돈 지출의 경우, 학생들은 소비조합에 가서 물품을 구입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물품 구입에 사용한 금액은 매월 말 학교와 조합 및 조합원인 학생들 사이에서 정확하게 계산되었다. 조합의 회원은 오산의 주민, 교사 및 학생들이었다. 그들의 대표가 상임위원으로서 조합회의에 참여했다. 오산 일곱 마을의 동회는 각 마을의 이익을 조합에 파견된 대표를 통하여 조합 회의에서 대변할 수 있었다. 회의에서는 주민들의 생활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적 문제와 사회적인 지위에 관한 문제까지 논의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관한 연구에서 서굉일은 주장하기를, 오산학교와 일곱 마을의 공동체 활동은 “학교와 교회, 농촌으로 나누어진 현장을 교육과 산업으로 구조화시키고 정신과 물질이라는 양면으로 구체화하는 작업”이었다고 했다(서굉일 1988, 275). 서굉일의 그러한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사실, 오산학교의 시설물 가운데서도 주민들의 복지에 특히 기여하는 바가 많을 것으로 생각되던 학교 병원과 목욕탕은 그 이용이 전면 개방되었다. 학교에서 개최되는 각종 강연회와 음악회에도 주민들이 초대되었다. 그 밖에도 교회, 동회 및 야학을 통하여 오산의 뜻있는 인사들은 주민들의 정신생활을 지도했다. 그러한 결과,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을 휩쓸던 사회주의의 격랑 속에서도 오산 일대는 계층적 갈등이 노골화되지 않았다고 한다.” 오산학교의 교사였던 함석헌 선생이 1968년에 부산에서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세우고 조합원 1호로 가입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독립운동가로만 알려진 윤봉길 선생도 사실은 지역을 바꾸는 혁명가였다.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http://www.yunbonggil.or.kr/)에 가면 그 자료들을 찾을 수 있다. 불과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윤봉길 의사는 농업에 바탕을 둔 사회변화를 추구했다. “우리 조선은 농민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조선에서 주인공인 농민은 이 때까지 주인 대접을 못 받고 살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농사는 천하(天下)의 대본(大本)이라는 말은 결단코 묵은 문자가 아닙니다. 이것은 억만년을 가고 또 가도 변할 수 없는 대진리입니다.”라고 강조하는 <농민독본>을 직접 써서 야학에서 교재로 사용했다. “지식이란 혼자 힘으로 터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있는 사실도 발표하여 남에게 가르쳐 보기도 하고, 실제로 적용해 보아야 비로소 산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월례 강연회 때에는 열심히 연사의 말을 듣기도 하고, 토론회 때에는 여러분도 한번씩 연단에 올라가서 아는 바를 발표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라고 하며 독서회를 조직했다. 이 독서회는 “1. 낮에 일하다가 쉬는 사이, 밤에 야학이 파한 뒤에도 시간을 내어 독서한다. 2. 누구나 독서한 뒤 그 소감을 적어 두었다가 토론회때 의견을 발표한다. 3. 제한된 책을 여러 사람이 읽어야 하는 관계로 가급적이면 빨리 읽고 다음 사람에게 넘긴다.”라는 규정을 두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윤봉길 선생이 힘쓴 것은 협동정신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매달, 매철마다 돈과 곡식을 모아 상을 당하거나 경사가 생겼을 때 서로 도우며 친목을 도모하는 위친(爲親契), 달마다 자신이 직접 번 돈 10전 씩을 모아 돼지와 닭을 기르고 유실수를 재배하는 월진회(月進會),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며 만든 수암체육회, “뭉처야 한다. 그리고 혁신해야한다. 살길은 단결과 혁신 뿐이다”라며 마을회관인 부흥원(復興院)을 세우고 이 건물에 야학당과 구매조합, 각종 회의공간을 만들었다. 부흥원은 “첫째. 증산운동(增産運動을 펴야한다. 둘째. 마을 공동의 구매조합을 만든다. 셋째. 일본 물건을 배척하고 우리 손으로 만든 토산품(土産品)을 애용한다. 넷째. 부업(副業)을 장려해야 한다. 다섯째. 생활개선이다.”라는 실천목표를 제시했다.

 

그리고 두레와 품앗이를 권장했고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협동조합은 조합원들의 출자금으로 농산품을 매매하고 그 이윤을 부원에게 배당했다. 농민공생조합을 만들어 공동구입 배급 및 판매를 담당하는 소비부, 창고 및 공장 경영, 위탁판매를 담당하는 생산부, 농자금을 융통하고 예금활동을 하는 신용부, 주요 농기구들을 관리하는 이용부, 병원과 이발소, 목욕탕을 운영하는 위생부를 뒀다. 만주로 떠나기 전에 4년 동안 충남 예산군에서 지역운동을 펼쳤다.

 

앞선 선배들의 사상과 삶에서 지역과 협동조합, 학교는 분리된 기관이 아니었다. 이런 기관들이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지역사회를 변화시켰다. 그리고 그 변화는 자치와 자급을 지향했다. 풀무학교가 내건 ‘위대한 평민’은 헛된 구호가 아니고, 다만 그런 위대함은 구호가 아니라 생활로 증명되어야 했다. 협동조합은 위대한 평민들이 자신의 삶을 살고 협동하는 방편이었다.

 

이상촌은 한반도 내에서만 생기지 않았다. 무장항일조직인 <신민부(新民府)>를 이끌던 김좌진 선생이 김종진, 유자명, 이을규 선생 등의 도움을 받아 1929년에 만든 <재만한족총연합회(在滿韓族總聯合會)>도 이상촌을 추구했다. 유자명, 이을규 선생 등은 북만주에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크로포트킨의 농업론을 바탕으로 이상적인 농촌을 건설하려 했다.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우리는 한 개의 농민으로서 농민대중과 같이 공동노작(共同勞作)하여 자력으로 자기 생활을 영위하는 동시에 농민들의 생활개선과 영농방법의 개선 및 사상의 계몽에 주력한다”는 당면강령을 세우고 자신의 뜻을 실현할 공동체를 찾았다.

 

<한족총연합회>는 자신이 만주에 사는 한국 교민의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향상발전을 도모하며 동시에 항일구국의 완수를 위하여 재만동포의 총력을 집결한 교포들의 자주자치적 협동조직체”라고 밝혔다. 그리고 <한족총연합회>는 다음과 같은 사업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①교포들의 집단정착사업, 교포의 유랑 방지 및 집단부락 촉성, ②영농지도와 개량․공동판매․공동구입․경제적 상호금고 설치 등을 목적하는 협동조합사업, ③교육․문화사업, 즉 소학․중학의 설립운영, 각지조직의 연락 및 교포들의 소식․교포들의 생활개선․농업기술지도 등을 위한 정기간행물발행, 순회강좌․순회문고설치, 성인교육과 장학제도,  ④청장년에 대한 농한기의 단기군사훈련, ⑤중학출신자로써 군사간부양성을 위한 군사교육기관의 설립운영, ⑥항일게릴라부대의 교육 훈련․계획지도를 맡으며, 지방치안을 위한 지방조직체의 치안대의 편성지도 등을 위한 통솔부 설치.” 실제로 <한족총연합회>는 농민들이 생산한 쌀을 도정하기 위해 직접 정미소를 차리고 위탁판매까지 담당했다.

 

이런 운동들에서 주목할 점은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이상촌이라는 구상 속에 각각의 기능이 배치되었다는 점이다. 사람을 기르는 일과 지역사회를 성장시키는 일이 분리되지 않았고, 학교와 협동조합이 분리되지 않았고 필요를 성찰하는 일과 필요를 조직하는 일이 분리되지 않았다. 안창호 선생의 이상촌은 같이 일하고 생활하며 공생공락하는 자치와 자급 공동체였다.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필영이를 제한 외에 네 아이는 무엇을 하던지 거리에 나가 신문지를 팔더라도 죄다 일전씩의 벌이라도 버는 일을 실행케 하고 이 불경기 시기를 이용하여 절용을 공부하게 하소서”라고 말하는 안창호 선생의 협동조합은 정의돈수(情誼敦修), 서로의 사랑을 도탑게 닦는 것, 사랑하기를 날마다 힘써 그것이 되도록 하는 과정이었다. 오산학교의 경우, 조합 사무실이 학교 안에 있었다. 이런 학교가 협동조합을 교육내용에 반영하지 않았을까? 윤봉길 선생은 마을회관 부흥원을 세우고 그곳에 야학당과 구매조합, 회의공간을 만들었다. <한족총연합회>는 농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정미소를 세우고 협동의 그물망을 짬으로써 미래의 공산주의 사회를 지금 현실에서 살아가려 했다. 협동조합은 그렇게 축적한 힘으로 서로의 삶을 변화시키고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발판이었다.

 

 

2. 협동조합은 어려운 것인가?

 

물론 사회상황은 바뀌었다. 한국은 더 이상 농사가 기본이지도 않고 지역 내의 관계망도 거의 파괴되었다. 마을은 의식적으로 관계 맺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것이 되었고, 이미 자본주의 소비주의가 일상 속으로 깊이 침투했다. 국가의 일방적인 정책결정과 강력한 중앙집중화는 대부분의 지방민을 소외시키고 있다. 농민과 노동자가 자신의 자식을 농민이나 노동자로 기르지 않으려 하는 상황은, 윤봉길 선생이 비판했던 그 상황을 지속시키고 있고 교육은 이른 경향을 강화시키고 있다. 사회 어디에서도 협동을 경험할 곳이 없고, 우리의 마음과 습관은 무한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상촌을 만들 수 있는 토대가 거의 사라졌다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국가 차원의 독점을 상쇄시켰던 마을 내의 재분배, 이를 가능케했던 공유지들이 거의 사라졌고, 최소한의 생계기준도 바뀌었다. 제임스 스콧의 『농민의 도덕경제』(아카넷, 2004년)를 보면, “농민에게 있어서의 기준은 ‘얼마나 가져가는가’보다 ‘얼마가 남는가’일 가능성이 더 크다. 생존기준은 착취당한 잉여가치라는 기준에 의존하는 이론과는 상당히 다른 착취에 대한 관점을 제공한다.” 그런데 이런 기준들은 자본주의적인 착취와 무한경쟁, 승자독식의 논리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전 세계 어느 곳의 협동조합운동을 봐도 우호적인 사회 환경에서 성장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초기에는 모두 어려운 시기를 겪었고, 그 시련이 협동조합을 강화시키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협동의 근본은 동일하다고 본다. 내 것을 우리 것으로 전환시키고 서로의 얼굴을 대면하려는 노력, 서로를 우리 삶의 주체로 만드는 과정, 서로의 필요를 공동의 필요로 만들어 우리의 몫을 키우는 과정이 협동조합과 지역사회를 살리는 지름길이다.

 

일본 유학생으로 <협동조합운동사>를 조직하고 활성화시켰던 전진한은 자전적 기록인 『이렇게 싸웠다』(무역연구원, 1996년)에서 자신의 이념을 ‘자유협동주의’라 명명했다. “개인주의에서 독점성과 배타성이 止 즉 폐기되고 개성자유 즉 개성존엄성, 평등성, 창의성이 揚 즉 보존됨과 동시에 전체주의에서 강권주의와 기계주의가 止 즉 폐기되고 사회협동 즉 사회연대성, 공존성이 揚 즉 보존”되는 이념인 자유협동주의는 농어촌의 협동조합체계와 도시의 소비자/생산자협동조합체계를 결합할 뿐 아니라 임금제도를 철폐하고 이익을 균점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해방 이후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협동조합조성법, 협동조합법의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던 전진한은 국가의 협동조합이 아니라 민중의 자조적인 생활을 통해 협동조합 공화국을 만들려 했다. 그는 “국민경제가 일부 독점재벌이나 간상모리배 심지어는 탐관오리에게 농단됨이 없”도록 협동조합운동을 활성화시키려 했다.

 

전진한이 협동조합을 만들고자 한 방식은 간단했다. 매일 한 사람이 한 숟가락의 쌀을 저축(자조미自助米)하고 매월 5, 10, 15, 20, 25, 30일 저녁식사를 죽으로 대체하고(애향미愛鄕米), 매월 7, 14, 21, 28일에 점심식사를 하지 않고 그 쌀을 모은다(구국미救國米). 농가나 공장도 수확을 할 때나 상품을 팔 때 조금씩 판매량을 저축한다. 이것이 모이면 협동조합을 만들고 운영하는데 필요한 기본자산이 된다. 그 결과 불과 2년 만에 협동조합의 수가 22개, 조합원수 약 5천명에 이르렀고 자본금도 4만 5천여원에 달했다.

 

협동조합의 틀이 정형화될 필요도 없다. 차성환의 글 “양서협동조합운동의 재조명”(2009년)에는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까지 부산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활동했던 양서협동조합운동이 설명된다. 부산의 청년활동가들이 공개적이고 합법적이며 도덕적인 개혁운동으로 구상한 양서협동조합운동은 말 그대로 좋은 책을 널리 권하고 함께 읽으며 민주주의를 확산시키려는 운동이었다.

 

1978년 4월에 창립총회를 가진 <부산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은 107명의 조합원으로 시작되었고 “본 조합은 양서를 적정한 가격으로 구입․보급하고 지역사회 개발사업을 통해 부산지방의 문화 향상을 도모하며, 조합원 상호간의 협동과 신뢰에 기초한 민주적 경영방식을 익히고 나아가 경제적 민주주의와 협동주의에 입각한 참다운 자주, 자립적 경제질서의 전 사회적 확산을 그 목적으로 한다”고 밝혔다. 이 목적을 위해 양서를 구입하고 판매하는 시설을 설치, 운영했고, 조합원은 의무적으로 매월 1천원 이상 출자하고 매월 책 2권 이상을 구입하게 했다. 세미나와 강연회, 학습모임 등 다양한 활동을 조직했고, 도시문제 연구모임, 농촌문제 연구모임 등 사회문제 학습모임과 사진반, 연극반, 꽃꽂이반 등의 취미모임도 만들었다. 이런 활동으로 부산의 양서협동조합은 불과 1년 만에 조합원 수가 3배로 늘었고 흑자로 운영되었다. 이 글에 따르면 양서협동조합의 빠른 성장은 기독교 교회의 전도방식과 비슷했다고 즉 “조합원이 조합원 신입교육을 받고 취지에 흔쾌히 찬동하고 자기가 제일 친한 친구들을 데려와 소개해 주고, 순수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과 사귈 수 있다는 매력”을 줬다고 한다.

 

양서협동조합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정부의 감시와 압력을 받게 되었고 1979년 10월 부마항쟁의 불씨를 일구기도 했는데, 결국 정부가 양서협동조합을 부마항쟁의 배후조직으로 지목하면서 강제로 폐쇄되었다. 1년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에 마산, 대구, 울산, 서울, 수원, 광주로 퍼져나간 양서협동조합운동은 협동조합이 민주주의를 불태우는 횃불임을 증명했다.

 

어두운 시대에 협동조합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틀이었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사람들은 따스한 온기를 갈망하기 마련이다. 소비자가 생산자를, 생산자가 소비자를 만나고, 노동자가 농민을, 농민이 노동자를 만나고, 학생이 선생을, 선생이 학생을 만나고, 그렇게 서로를 동등한 시각에서 만나다보면 자연스레 협동의 힘이 생긴다.

 

협동조합운동을 어렵게 만드는 건 부족한 자원이 아니다. 협동조합에 출자하기 위해 한 사람이 담배 한 갑, 소주 한 병, 쌀 한 숟갈 모으면, 협동이기에 순식간에 큰 자원이 된다. 협동의 힘은 내 자원을 기꺼이 내놓으려는 마음이다. 나중에 돌려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지금 좋은 삶을 살기 위해 가진 것을 공유하려는 마음, 그리고 그런 마음들의 의미를 밝혀주고 더욱더 단단하게 다져주는 사상, 사상을 실현시키는 다양한 조직들이 협동운동을 가능케 한다.

 

반면에 서로가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도 여기는 순간 협동의 힘은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조그만 지원금이나 매장을 놓고 지역에 있는 작은 단체, 협동조합들이 서로 경쟁하는 상황, 사람의 성장을 기다리고 지원하지 않는 조직, 스스로 직접 나서지 않고 뒤를 봐주길 기대하는 문화는 협동운동의 힘을 위축시킨다.

 

3. 위태롭고 불안정한 삶에서 벗어나는 법

 

운동은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거기서 시작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운동의 목표는 현실을 빌미로 삼아선 안 된다고 믿는다. 한 사람이 현실을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건 불가능하다. 자기 눈에 보이는 사실만을 현실로 받아들일 경우, 우리 속에 학습된 기성사회의 논리로만 바라볼 경우, 우리는 주어진 사실을 넘어설 수 없다. 제임스 스콧은 『국가처럼 보기』(에코리브르, 2010년)에서 체계화되고 표준화된 가독성의 시각에서 벗어나 지역적인 경험과 체험으로 구성된 경험지의 시각을 가져야 그동안 보이지 않던 현실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에게도 그런 시각이 필요하다. 분명 경제조직으로서 ‘협동조합’의 존재는 독점재벌이나 일반 기업보다 훨씬 나은 조건을 노동자에게 제공한다. 허나 협동조합이 있다고 해서 그 사회가 좋은 삶을 보장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단순히 협동조합의 수가 늘어나고 그것이 차지하는 몫이 커진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협동의 그물망으로 엮이지는 않을 것 같다. 공산당이나 사회당, 녹색당이 대안정치세력으로 자리를 잡은 나라의 협동조합과 대안정치세력이 거의 없고 생협의 정치참여를 법으로 금지당한 한국의 협동조합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분권화된 국가의 협동조합과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의 협동조합은 매우 다른 경제적, 사회적 조건에서 활동해야 한다. 이런 조건들을 세심하게 검토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외국의 모델을 한국에 이식할 수는 없다.

 

아울러 단순히 사회적 일자리를 창출하거나 사회서비스를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평민의 삶을 근본적으로 향상시킬 수 없다. 사회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이 소외를 극복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때에만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하다. 경제학자 아마티아 센은 『자유로서의 발전』(세종연구원, 2001년)에서 경제적 필요가 정치적인 자유의 절박성을 증가시킨다고 주장하면서 세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①정치적․사회적 참여를 포함하는 기본적인 능력과 관련된 인간의 삶에서 그것들의 직접적 중요성, ②경제적 필요의 주장을 포함하여 사람들이 정치적 관심사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표출하고 지지하는 발언의 기회를 강화시키는 그것들의 도구적 역할, ③사회적 맥락에서 ‘경제적 필요’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여 ‘필요’의 개념화에 있어서 그것들이 지니는 구성적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센은 경제적인 발전이 개인을 능동적인 행위주체로 변화시키는 전략과 연계되어야만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요한 자원들을 중앙정부와 재벌이 독점하고 있는 상황을 변화시켜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 지역의 다양한 주체들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하고, 그런 지역들이 촘촘히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나는 이를 지역들의 연합, 연방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처럼 중앙정부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곳에서는 지역이 홀로 고립되어서는 결코 생존할 수 없다. 정치를 변화시키고 분권을 이루려는 노력이 결합되어야만 한다. <YMCA>운동을 이끌었던 황주석 선생은 『마을이 보인다, 사람이 보인다』(그물코, 2007년)에서 이미 ‘시민생활나라’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시민생활나라는 참여와 자치, 자결과 협동을 중히 여기고 이로써 운영됩니다. 또한 시민생활나라는 연대를 중히 여깁니다. 나라 안의 연대, 나라 간의 연방을 형성하며 나라가 뻗어갑니다.” 중요한 과제들이 이 속에 모두 담겨 있다.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정치학자 데이비드 맥낼리는 『글로벌 슬럼프』(그린비, 2011년)에서 세계경제 전체를 보면서 새로운 형태로 변이되는 경제위기의 속성을 파악하지 않으면 현재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위기를 주도하는 탈정치화의 경향에 맞서 정치를 되살리고 희망의 기운을 만들 다양한 고리들을 조직하는 것, 그것이 대안이라고 맥낼리는 얘기한다. 그러니 협동조합은 지역의 관점에서 세계경제의 변화를 읽고 지역적인 행동으로 변화에 개입하고 그 사건들을 조직해야 한다.

 

유럽 협동조합의 기본은 농민과 소상공인, 도시노동자들을 지원하는 구조였다. 그리고 그런 역할을 위해 협동조합은 분권화를 추구했고 지역과 지방은행을 강화시켰다. 중앙에서 조직되어 지방으로 퍼지는 방식이 아니었다. 자급이 기본이고, 불가피할 경우에만 중앙이 개입했다. 중앙이 가서 판 깔아주고 컨설팅해주고 하는 구조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유럽연합(EU)으로 통합된 이후에도 협동조합들은 자급의 원칙을 지키고 있고, 분권화되어 있어 유연하고 조합원이나 외부의 변화에 민감하다. 그리고 중소기업들이 협동조합과 긴밀한 연계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나 협동조합이 조직되는 방식은 어떤가? 수도권과 중앙 중심이고 그 구조가 집중화되어 있다. 이런 구조를 비판하고 바로잡지 않고서는 협동운동의 성공을 점칠 수 없다.

 

아울러 협동조합은 공론장(公論場)이어야 한다. 다양한 의견과 행동들이 이 장에서 갈등하고 충돌하고 조절되고 합의되어야 한다. 수많은 얘기와 활동들이 협동조합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분리된 삶터와 일터의 얘기들이 협동조합을 통해 순환되어야 한다. 공장과 사무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삶터에서 얘기되고, 반대로 삶터의 일들이 공장과 사무실에서 얘기되어야 한다. 아울러 지역사회에서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 청소노동자, 식당노동자, 배달노동자 등 다양한 직종의 비정규직/일용직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들이 그들이 생산한 제품과 서비스를 이용하는 소비자들 사이에서 얘기되어야 한다. 또 재벌들이 만드는 열악한 노동시장의 조건에 소비자들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삼성그룹의 제품을 쓰고 보험을 들고 주식투자를 하는 게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조합원들이 고민해야 하고 그 대안을 구체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지금 벗어나면, 지금 저항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 그 행복을 만지고 느낄 수 있게 하는 틀, 그 행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게 하는 틀, 중앙이 아니라 변방을 강화시키는 틀, 협동조합은 그런 틀이다.

 맨 날 똑같다. 한참을 욕하다가 선거 당일이 되면 울며 겨자먹기로 투표한다. 최악이 안 되면 다행이고, 최악이면 술을 들이킨다. 정치하는 인간들도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시민의 가슴이 뛰길 원치 않는다. 그냥 표만 찍어주길 원한다. 니들이 찍지 별 수 있겠냐, 그런 똥배짱이다. 이런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

 

몇일 전, 동네에 걸려있던 선거벽보를 누가 찢었다. 딴 일엔 굼뜬 경찰이 재빨리 출동했고, CCTV에 잡힌 용의자를 체포했다. 기초생활수급자가 지원금 부족에 불만을 품고 찢었다고 한다. 그런데 수급자가 아닌 나도 선거벽보를 보면 가끔 찢고 싶을 때가 있다. 꼬라지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가슴이 뛰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선거에는 ‘소위’ 진보후보가 세 명이나 되는데, 가슴이 전혀 안 뛴다. 한 명일 때도 가끔 벌렁거렸던 가슴이 세 명인데도 죽은 듯 잠잠하다. 그냥 선거 공탁금만 떠오른다. 세 명 합치면 11억인데, 아깝다, 돈을 쓸 때는 팍팍 써야 하겠지만 이런 판에 왜 팍팍 써야 할까, 뭐 이런 생각.

 

그런데 이 판이 이렇게 된 것에는 우리만의 ‘이율배반’도 한 몫을 차지한다. 우리는 대통령 후보들이 현장을 방문하고 우리를 지지하기를 ‘내심’ 기대한다. 표가 보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자들이 사람들이 모이면 올 만도 한데, 그들은 오지 않는다. 사실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은 우리가 자신들을 찍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이곳에 표가 보이지 않기에 그들은 오지 않는다. 까놓고 말하면, 사실 아닌가. 우리는 ‘소위’ 진보후보를 찍을 사람들이 아닌가. 오지 않을 거라, 우리를 대변하지 않을 거라 믿으면서 우리는 그들이 오지 않는다고 욕한다. 왜?

 

우리 편이 당선될 가능성이 낮다면, 선거에서는 편을 바꾸거나 같은 편을 먹는 것이 상식인데, 또 우리는 그러지도 못한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가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자세이다. 분명한 입장을 요구하니 맨 날 만나는 사람들 말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지도 못한다. 그러면서 우리 편이 늘 부족하다고 한탄한다. 이런 이율배반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선거는 맨 날 똑같을 수밖에 없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바로 우리 때문에.

 

 

사실 선거도 중요하지만 더욱더 중요한 건 선거 이후이다. 정책이 중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정책을 보자는 것은 그 사람이나 캠프가 얼마나 똑똑한지를 확인하려는 게 아니라 선거 이후에 뭘 하려 하는지를 보는 것이다. 이 편, 저 편 논의에서 사라지는 건 정책이고 선거 이후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말들의 잔치이고 이후를 얘기하지 않는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지 않으려면 그 공약을 뜻으로 밀고 나가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사람만 한 명 달랑 들어가면 되는 게 아니라 정책결정이 내려지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 그러니 통 크게 우리가 몰표를 줄 테니 노동부나 복지부 전체를 우리한테 넘겨라, 뭐 이런 수를 쓸 수는 없을까? 국회의원도 아니고 대통령이니 그 정도 약속을 받으면 우리 몫을 걸어볼 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선거‘까지’만 얘기하고 그 때 웃고 울기에 이후를 보지 않는다. 누가 당선되면 그걸로 끝이다. 그리고 선거를 통해 아무런 새로운 관계를 만들지 않기에 선거가 끝나는 순간 선거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기성 정치인들이 선거를 통해 진심이든 뻥이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면, 우리는 늘 익숙한 공간을 헤맨다. 그러니 선거 이후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 맨 날 그 편이 그 편이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고 까면서도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우리의 처지를 알기에 기득권층은 선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들은 마음대로 국경을 넘나들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안다. 심지어 별 수 없이 자신들을 지지할 거라는 사실도.

 

그것은 한진중공업이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복직을 하더라도 기업의 주인으로 복귀하지 않는 이상 비극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점과 마찬가지이다. 제 손으로는 아무 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자들이 노동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들이 주인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일을 할 것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국외로 튈 수도 있지만 외국이 자신들의 천국일 수 없다는 점을 그들은 잘 안다.

 

그러니 당신들의 대한민국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들의 대한민국을 살겠다고 결의할 수는 없을까? 노동자가 기업의 주인일 수는 없을까? 다른 나라, 다른 기업을 만들어 우리끼리 재밌게 살면, 그들도 좀 머리를 숙이지 않을까? 맨 날 제왕적 대통령제라 욕하면서 대통령 제도를 한 치도 바꿀 생각을 못 하는 그런 냉소주의를 버리고 헌법을 바꿀 수는 없을까? 검사나 판사가 또라이라고 욕하지 말고 그들이 준거로 삼을 헌법을 우리 뜻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경찰이 깡패라고 욕하지 말고 경찰서장을 우리 손으로 뽑을 생각을 할 수는 없을까? 어차피 열심히 세금 내봐야 4대강 사업이나 토건사업에 쓸 텐데, 그런 몫을 주지 않고 우리가 나눠서 잘 쓰겠다고 선언할 수는 없을까? 선거 이후를 보며 칼을 벼리는 정치는 불가능할까?

선거판을 보며 던지는 질문이 바뀌지 않는 이상 우리의 삶도 바뀌지 않을 것 같다.

대통령선거일은 다가오는데 시민들의 관심도는 그리 높지 않다. 왠지 다들 시큰둥하다. 어찌되었건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이들 중에서 앞으로 5년 동안 중요한 정책들을 결정할 대통령이 탄생할 것이다. ‘제왕적 대통령제’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을 뽑는 선거이니 관심이 집중될 만하고 당선가능한 사람의 윤곽도 드러났으니 분위기가 달아오를 만도 한데 그렇지 않다. 왜 그럴까?

 

물론 당선가능한 후보자들이 하나같이 뭔가 부족한 면을 가져서일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의 선거는 그렇지 않았던가? 그동안의 선거도 언제나 최선은 고사하고 차선조차 아닌 차악을 지지하는 수준이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최악을 가려내고 차악을 차선으로 포장하려는 관심은 어느 정도 있었는데 이번 선거에는 그런 관심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지지하는 후보가 없을 때는(사실 대통령 선거에 당선가능한 후보를 낼만한 조직은 한국에 몇 되지 않으니), 선거연합이나 대안정책을 제안하거나 선거캠프에 들어가는 등 다른 전략들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이조차도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이런 전략들이 대부분 실패했기에 그럴 수도 있지만 실현해야 할 중요한 사회의제들이 여전히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금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것은 냉소라고 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 냉소가 상황을 바꾸기는커녕 더 강화시킨다는 점이다.

 

사실 그동안의 선거전략들이 성공하지 못한 건 진보정치의 부족한 실력 탓도 크지만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 없도록 만든 구조의 문제이기도 했다. 일제 식민지 이후 한국은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체제를 고수해 왔다. 정치를 하든 경제를 하든 문화예술을 하든 심지어 조직폭력배를 해도 ‘전국구’가 되어야 성공하는 사회이다. 전국구가 되어야 내 이해관계나 사상을 실현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는 타협이나 변질을 피할 수 없기에 전국구가 된다는 건 기존의 구조를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했다.

 

실 전국구의 중앙집권형 국가체제가 계속 유지되는 건 기득권층의 이해관계 때문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고책임자만 되면 마음껏 나라를 유린할 수 있고, 직접 나서지 않아도 최고책임자만 꼬시면 되니 이권을 나눠먹기에 가장 좋은 체제가 중앙집권형 국가이다. 1987년 이후 여러 체제 논의가 있었지만 중앙집권형 국가 문제를 제대로 건드리는 논의는 거의 없었다.

 

지금의 체제로는 누가 대통령이 되던 변화의 물꼬를 트는 것이 어렵다. 왜냐하면 반(反)민주적인 중앙권력에 의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대통령 후보들이 하나같이 시민의 주인됨과 민주주의를 떠들지만 실제로 그게 가능하려면 사회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연방주의를 고민해 봄직하다.

 

혁명을 지속시키는 방법

우리 역사에는 혁명에 견줄만한 사건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 사건들이 실제로 사회를 크게 바꾸지는 못했다. 주체들의 역량이 부족했던 탓도 있겠지만 혁명을 준비하는 방법이나 그 이후에 대한 사유가 우리 사회의 근본 구조를 건드리지 못한 탓도 크다. 주로 자신들의 ‘집권’만 생각하고 국가의 성격 자체를 바꿀 방법을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 아무리 차이와 다양성, 민주주의를 주장해도 중앙집권형 국가에서는 그것이 자리잡을 여백이 없다. 제임스 스콧이 《국가처럼 보기》1)에서 지적했듯이 국가는 그 모든 언어와 문화, 삶의 다양한 결들을 통일시키고 표준화시킬 때에만 자신의 힘을 강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지역의 관행과 문화, 민주주의의 회복은 중앙집권화된 힘을 해체하고 지역 자체의 힘을 강화시킬 때에만 가능하다. 이 회복은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와 질적으로 다르다. 연방주의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연방주의가 제대로 논의되지 못한 것은 분단이라는 조건 탓이 크다. 1960년 8월에 북한이 ‘고려연방제’를 제안한 이후, 한국사회에서 연방은 금기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방의 의미를 제대로 사유하는 정치사회운동도 없었다. 2007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코리아연방제를 주장했지만 ‘1민족-1국가-2체제-2정부’라는 기존의 식상한 논의들을 벗어나지 못했고 연방제도를 체제로 사유할 뿐 그 의미와 정신을 살리지 못했다.

 

새로운 정치인이나 정당의 등장을 지지하는 것을 넘어서 시민의 정치열정을 계속 불태울 방법은 없을까? 그런 의미에서 사상가 한나 아렌트의 논의를 참조할 만하다. 우리는 미국의 독립전쟁이나 건국보다 프랑스 혁명을 더 높이 평가하지만 아렌트는 《혁명론》2)에서 미국 건국의 가치를 더 높이 산다. 두 나라 모두 혁명이라는 새로운 시작과정에서 폭력과 파괴를 경험했지만 미국은 연방이라는 자유를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프랑스 혁명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혁명이 자유의 공간을 만들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렌트는 그 이유를 프랑스 혁명이 빵을 달라고 외치며 빈곤에서 벗어나는 것을, 동료의 자유가 아니라 결핍의 충족을, 자유가 아니라 풍요를 목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찾는다. 혁명가들도 ‘동정’과 ‘연민’이라는 정념에 휩싸여 혁명을 지속시킬 제도를 만드는데 관심을 쏟지 않았다.

 

이와 달리 미국은 독립으로 자유를 맛본 시민들이 공적 행복을 느끼며 일상적으로 통치에 참여하고 공권력에 대항해 자신의 세계를 지킬 수 있는 제도를 만들려 했다. 미국헌법은 “새로운 정치 영역의 경계를 설정하고 내부의 규칙을 규정”하며 “혁명이 실질적으로 종말을 맞은 후에도 생존할 수 있도록, ‘공적 자유에 대한 정념’이나 ‘공적 행복의 추구’가 미래 세대를 위한 자유로운 유희를 수용할 새로운 정치 공간”을 보장했다. 즉 미국헌법은 혁명의 목적인 자유가 혁명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도록,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제이자 실생활에서 쓰고 활용할 수 있는 무기가 되도록 했다. 미국 헌법의 수정조항들은 건국의 의미를 되살렸고 아렌트는 “미국 헌법의 진정한 권위는 수정되고 확장되는 그 내재적 능력에 있다”고 말했다. 즉 권위는 시민들 속에 있게 되었다.

 

너나 할 것 없이 풍요와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지금 이곳 한국의 선거판은 혁명이 무엇을 고민하고 준비해야 하는가라는 아렌트의 물음을 떠올리게 한다. 시민이 권력의 주체로서 자유를 누리려면 개혁이든 혁명이든 그 자유를 지속시킬 수 있는 제도를 구상해야 한다. 혁명이 열어놓은 자유의 공간을 지속시킬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혁명은 지속될 수 없다. 혁명의 구체적인 내용을 채워가는 건 자유로운 시민의 몫이고, 이를 가능케 하는 정치무대가 바로 연방국가이다.

 

그동안의 사건은 자유를 지속시키는 방법으로서의 정치를 사유하지 못했다. 1987년 6월 항쟁이 헌법을 개정시켰지만 개헌은 정치인들의 타협으로 이루어졌고, 국민투표라는 과정을 거쳤지만 3개월 동안의 논의는 시민들의 말과 행위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의 헌법은 정치를 자유의 실현으로 사유한 결과물도 아니었고 시민에게 자유의 공간을 제공하지도 않았다. 대통령 직선제와 헌법재판소 설치 정도가 논의되었을 뿐 혁명을 지속시킬 제도에 관한 고민은 없었다. 내가 살고 싶은 나라에 살 수 있는 권리, 그렇게 살아갈 권리는 지금 우리에게 건국에 버금가는 행위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고, 그렇기에 연방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아렌트가 연방국가의 장점에 주목했던 최초의 사상가는 아니었다. 아렌트에 앞서 연방에 주목했던 여러 사상가들이 있었고, 초기에 연방주의를 고민했던 인물들은 연방주의를 단순히 국가체계로 생각하지 않았다. 민족주의 열풍이 한창이던 유럽에서 연방주의를 주장했던 사상가 프루동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프루동은 《연방의 원리(Du Principe federatif)》라는 책에서 모든 정치질서가 기본적으로 권위(authority)와 자유(liberty)라는 두 가지 원리를 품고 있다고 말한다. 고분고분하게 따르는 신앙과 자유로운 이성을 따르는 이 두 원리는 서로 대립하지만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완전히 압도하지는 못한다. 때로는 자유의 질서 자체가 자유를 가로막기도 하고, 때로는 권위가 자유의 가면을 쓰고 등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프루동은 어떤 순수한 원리를 표방하는 것보다 두 원리를 조절해야 한다고 믿었고 이를 가능케 하는 체제가 연방주의라고 봤다. 불가능한 순수성을 탐하지 않고 현실적인 해결책을 추구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상호계약으로 연방국가를 세운 시민은 자신이 국가를 위해 희생한 만큼을 국가에서 얻어야 하고, 계약의 구체적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경우를 제외하면 국가가 시민의 자유와 주권, 주도권을 보장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서건 시민의 자유와 주권, 주도권은 양도될 수 없고, 시민이 자신의 자유와 주권을 보류하는 건 더 많은 자유와 권위를 누리기 위해서이다. 즉 연방국가는 지배나 통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시민들이 더 많은 자유를 누리기 위해 서로에게 지운 의무이다. 뒤집어 말하면 그런 자유를 보장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연방정부가 아니다.

 

프루동이 살았던 시대를 고려한다면 이는 매우 혁명적인 주장이다. 왜냐하면 그 시대는 민족주의가 한창 번성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프루동의 연방주의는 시민의 자유를 고려하지 않고 확장을 추구하던 민족국가의 행보에 제동을 걸었다. 연방권력은 지방정부의 수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지방정부는 시민의 권리와 특권을 결코 억누를 수 없다. 연방국가는 국가보다 시민에게, 중앙권력보다 지방정부에게 더 많은 권력을 준다. 이를 위해 연방국가는 유기적인 분리(organic separation)의 원칙을 따라서 모든 권력을 분리시킬 수 있는 만큼 분리시키고 공공행정은 전적으로 공개되고 통제되어야 한다.

 

프루동 사상의 특징은 경제적인 권리가 정치적인 권리를 뒷받침해야만 그 질서가 지속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점이다. “만일 연방질서가 단지 자본과 상업의 무질서를 보존하는 것이라면, 이 잘못된 아나키의 결과로 사회가 두 개의 계급으로 나눠진다면, 정치질서는 안정되지 못할 것이다”(아나키즘을 단순히 무정부주의로 해석하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치질서를 개혁한 뒤에 연방정부는 경제를 개혁해야만 하고, 내부와 외부의 자본주의 착취와 금융착취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해야 한다. 그래서 공공서비스의 독점과 교육특권, 노동분업, 자본의 이해관계, 불공정한 과세 등을 없애고 평등하고 호혜적인 노동질서를, 농업과 산업의 연방질서를 확립해야 한다.

 

이런 프루동의 관점을 따른다면 미국 연방이 실패한 이유는 그런 부분에서 주의 권한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미국 연방헌법은 각 주가 화폐를 주조하거나 신용증권을 발행하는 등의 근본적인 경제활동을 주도할 수 없도록 금지했다(미국에서 프루동의 사상을 이어받았던 벤자민 터커는 ‘자유화폐free money와 경제적 자유를 주장했다). 경제영역에서 연방원리가 실현되지 않는 것은 정치적인 연방의 원리를 후퇴시킬 수밖에 없다.

 

물론 연방주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연방주의로 개헌을 한다고 모든 문제가 저절로 없어지지는 않는다. 권력을 쪼갠다고 그 권력의 속성이 자연스레 변하는 것도 아니다. 마이클 테일러가 우려하듯이, 공동체들의 연방이 언제나 다정하고 큰 문제없이 진행되는 건 아니다. 작은 공동체들로 이루어진 연방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내적인 갈등과 주변 국가의 공격 또는 대응이라는 공동체 내외부의 조건들을 고려할 때 무조건 낙관할 수는 없다.3)

 

허나 연방주의의 과제는 단순히 국가기구를 해체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분권을 통해 지역의 자율성을 확보하고 그런 지역들간의 네트워크를 구성하며 궁극적으로 국제적인 규모의 네트워크를 건설하는 것이다.

 

 


삶의 방식으로서의 연방주의


연방주의는 단순히 중앙집권화된 국가의 해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연방주의는 다양한 풀뿌리운동들이 자기결정권을 실현하고 자신의 자유를 확보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홀로 고립된 풀뿌리운동은 연방주의를 통해 더 많은 자유를 확보하고 다른 풀뿌리운동들과 교류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연방주의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적인 필요이자 요구이기도 하다.

 

연방주의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인물들 중에는 아나키스트들이 많은데, 이들은 연방을 통해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꼼뮨들의 꼼뮨을,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을 꿈꿨다. 이들이 꿈꾼 건 착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자유로운 사람들의 꼼뮨이었다. 꼼뮨에서 한 개인의 자아와 자유는 제한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자아와 자유와 연결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이들은 연방을 통해 ‘국가 안의 국가’를 만들고, 억압적이지 않고 존엄한 노동질서를 만들며, 더불어 살고 함께 누리는 관습과 문화를 지킬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대표적으로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4)에서 왜 작은 공동체들이 지속되지 못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라고 묻는다. 크로포트킨에 따르면, 종교적인 규율을 따르거나 소수의 지도자들이 이끄는 공동체들은 내부의 필요를 충족시키거나 자율적인 삶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꼼뮨은 적절한 규모를 유지해야 하지만 그것이 꼭 폐쇄적이거나 작은 규모를 지켜야 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폐쇄되고 격리된 공동체들은 자급능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구성원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기도 어렵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노동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다보면 자유의 이념은 실제 생활에서 점점 멀어진다. 그렇지만 만일 다양한 공동체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면 부족한 부분들을 서로 보완할 수 있다. 그러니 연방이 하나의 대안인 셈이다.

 

그리고 사람은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 개성이 기존의 공동체와 어울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크로포트킨은 “젊은이들은 18세가 되면 공동체를 떠나야만 한다. 다른 세계에 섞이지 않고, 그 세계의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젊은이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공동체를 떠나야 할 것이다.” 이 떠남이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로 떠남을 의미하는 건 아니기에 다양한 공동체들이 존재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공동체에 속할 수 없는 이들이 자유로이 떠나 다른 공동체에서 자신의 삶을 이어갈 수 있다. 이 역시 연방이 가진 장점이다. 크로포트킨이 연방주의를 궁극적인 대안이라 봤던 건 개별적인 공동체의 한계를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연방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구상이다. 그리고 크로포트킨은 이런 연방이 이미 역사적으로 존재했다고 본다. 12세기에 유럽 전역에서 도시 공동체들이 일제히 왕정에 맞서 봉기를 했는데, 이 봉기는 수공업 길드와 농촌공동체의 연합이라는 오랜 정신으로 준비되었다. 그래서 크로포트킨은 “12세기의 유럽인은 본질상 연방주의자였다”고 과감하게 선언한다.

 

크로포트킨은 이런 12세기의 현상을 어떤 탁월한 개인이나, 어떤 중앙집권적 제도의 공으로 돌리지 말고 친족관계와 농촌공동체와 같이 인류의 성장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시기는 근대국가가 등장하기 이전에 농촌의 촌락공동체가 힘을 가졌던 시기이자 자유도시들이 연합을 형성하며 힘을 키웠던 시기였다. 한편으로는 자족적인 농촌공동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의 경계를 초월했던 많은 조합과 길드들이 만든 연합은 연방국가라는 이름을 내걸지는 않았지만 하나의 연방이었다. 이들은 무력이나 법이 아니라 서로간의 협약과 공동서약, 우정(amilas)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고 확산시켰다.

 

예를 들어, 100여 개 이상의 도시가 속했던 독일의 한자동맹을 보면 그 힘이 개별 국가를 넘어설 정도로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서로가 각자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면 연방의 힘은 결코 약하지 않고 따로따로 모은 힘보다 더 큰 연합의 힘을 만들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품었기에 크로포트킨은 미국과 캐나다의 연방주의 체계를 찬양했다. 그리고 1917년 러시아혁명이 성공한 이후에도 소비에트의 중앙집권화를 반대하며 ‘非국가적 성격의 연방’을 주장했고 연방주의와 지역자치를 요구했다.5)

 

연방주의는 풀뿌리의 힘을 강화시키는 방법이다. 1991년에 지방의회가 부활한 이후 한국에서도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되고 있지만 이를 통해 풀뿌리운동의 성장했다는 얘기를 듣기 어렵다.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되어도 여전히 중앙집권형 국가의 힘이 강하고 지방정부는 자치와 자급과는 거리가 먼 단순집행기능만을 담당하고 있다.

 

이런 제도의 문제도 있지만 풀뿌리운동이 자기 지역에 고립된 탓도 크다. 연방주의는 그런 고립을 깨고 서로 연대해야 사회를 실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지적한다. 자기결정권의 강화는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고 지지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연방주의를 또 다른 방식으로 설명한 사상가는 구스타프 란다우어이다. 란다우어는 연방주의를 사회혁명이라고 봤다. 생활정치가 이루어지는 공동체들의 연방을 뜻하는 연방주의는 “인간의 사회적 삶에 대한 끊임없는, 그리고 반복적인 문제의 제기와 이에 대한 개선을 포괄하는 인간의 삶 전체에 대한 재생 혹은 회복, 즉 생활 속에서의 끊임없는 의식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6) 연방주의는 인간이 자기책임성의 원리를 견지하도록 하고 인간본질을 회복하도록 한다. 왜냐하면 연방주의는 인간의 상호의존성을 인식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란다우어는 아나키즘의 본질을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정치제도가 연방주의라고 봤다. 그는 맑스주의에 맞서면서 분권적이고 반(反)권위주의적인 사상을 발전시켰고 아래로부터 조직된 자율적인 꼬뮨들의 연방으로 국가를 대체하려 했다. 란다우어는 자발적인 협동과 상호부조에 기초를 둔 사회, 농업과 산업을 결합한 농촌 공동체이자 지역공동체에 기초를 둔 평등하게 교환하는 사회를 주장했다. 연방주의는 스스로 결정하면서도 타자를 배제하지 않고 호혜성을 유지하는 삶을 살자는 호소였다.

 

이것은 사회주의에 관한 란다우어의 설명에서도 드러난다. 란다우어에게 사회주의는 갑자기 한꺼번에 새로운 어떤 것을 시작하는 것이나 갑작스런 종말론적 활동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자라고 있는 무엇, “항상 막 시작하고 항상 움직이는” 무엇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사회주의란 어떤 이상을 가슴에 품고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려는 분투이다. 인간의 아름다움, 고귀함, 풍요로움을 위한 분투인 사회주의는 중앙집권화된 국가의 정신이 아니라 영성을 가지고 자신을 불태우는 자각된 민중의 의지이다. 란다우어는 민중에게 “자본주의 밖으로 나가자”고, “인간이 되기 시작하자”고, 다른 사람들이 따라오도록 하나의 영감이자 모델로 기여하는, 현존 질서 내부의 리버테리안 요새 형태로 지금 우리가 대안사회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란다우어는 국가 속에서 국가를 변화시킬 방법으로 연방주의를 생각했다.7)

 

연방주의는 단순히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다른 혼과 몸으로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 결의가 뭉치고 하나의 운동이 될 때 연방주의는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유를 실현하는 틀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연방주의 개헌을 하는 건 지금 우리가 연방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강정, 평택, 용산, 밀양, 삼척 등 수많은 지역들이 고립된 지방이 아니라 하나의 정신으로, 서로의 삶을 지지하는 연합을 구성한다면 연방주의는 이미 정신으로 실현되는 셈이다. 개헌은 그 정신을 지속시키는 틀이지 연방주의의 본질이 아니다.

 

 


연방주의에서 가능한 실험


연방주의를 얘기하면 이런 반대들이 제기될 수 있다. 연방주의는 영토가 넓은 국가에서 실시되는 것이지 한국처럼 작은 나라에는 맞지 않다는 반대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큰 국가들만 연방주의를 한다는 것은 실제 현실과는 다른 착각이다. 한국보다 큰 나라들도 있지만 작은 나라들도 있다. 예를 들어, 오랜 연방주의 경험을 가진 스위스의 면적은 남한의 절반도 안 되고, 벨기에의 면적은 1/3 정도이다. 면적과 연방주의는 연관성을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지방정부의 부패를 고려할 때 연방주의가 더 심각한 문제를 낳을 것이라는 반대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4대강 사업에만 들어간 돈이 24조원이고 그와 관련된 부패만 모아도 그동안 지방정부들이 쳐온 사고를 상쇄하고도 남는다. 하물며 연방주의 하에서는 주민들이 능히 지방정부를 소환해서 심판할 수 있고, 굳이 명박산성을 넘지 않아도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바로잡을 수 있다. 지방정부의 문제가 더 늘어날 수도 있지만 그 문제를 바로잡을 시민의 권한도 강화되기 때문에, 그리고 부패를 부채질하는 중앙정부이나 재벌의 입김도 약해지기 때문에 외려 지방정부의 부패가 줄어들 수도 있다.

 

또한 한국처럼 수도권으로의 집중도가 높은 곳에서 연방이 실현되면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 지방이 몰락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연방국가에서 재정은 풍족한 곳에서 부족한 곳으로 흐른다. 오스트리아와 말레이시아의 지방정부는 연방정부에서 27~30% 정도의 재정을, 미국은 26% 정도를, 오스트리아와 인도는 46% 정도를, 스페인은 73% 정도의 재정을 지원받는다. 즉 연방국가가 된다고 해서 각 지방정부가 자체재정만으로 운영되어야 하는 건 아니고, 그건 더 큰 자유를 보장하는 연방주의 정신에도 어긋난다. 그리고 지역발전이 단지 투자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결정권의 문제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재정의 불균형이 연방주의의 장애물일 수는 없다.

 

이기우는 우리 상식과 달리 이미 연방주의가 많은 나라들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 브라질, 인도, 독일, 스위스, 오스트레일리아, 멕시코, 나이지리아, 베네수엘라, 벨기에, 이란 등 세계적으로 28개의 연방국가가 있고 세계인구의 약 40%가 연방국가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연방국가라는 이름을 직접 쓰지는 않아도 스페인이나 스코틀랜드, 이탈리아, 인도처럼 지방정부가 독자적으로 입법권을 행사하는 사례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8)

 

연방국가가 되면 당장 생길 이득도 많다. 일단 연방국가가 되면 지금처럼 중앙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려 지방에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 줄어들거나 사라질 것이다. 수도권의 전력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지방에 핵발전소를 짓는 일도 어려워질 것이고, 안보를 위해서라며 제주도 강정마을 주민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해군기지공사를 강행할 수도 없을 것이다. 더 이상 같이 살지도 않는 결정권자가 존재할 수 없다.

 

아울러 연방국가가 되면 경찰이나 사법부도 변할 수밖에 없다. 연방국가 하의 자치경찰제도는 경찰청장이나 서장을 선거로 뽑으니 지역주민들의 의견이나 반대를 무시하고 공권력을 투입하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아울러 중앙경찰청이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일도 사라질 것이다. 사법부도 마찬가지이다. 지방자치단체가 독자적인 입법권을 갖게 되면 사법부도 그것을 반영해서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다. 연방국가가 되면 그 지역의 정서와 상식을 반영하는 판결의 비중이 늘어날 것이다.

 

물론 토호들이 지배하고 이미 자급과 자치능력을 상실해버린 지방의 상황을 고려할 때 무조건 성공을 낙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연방주의 하에서는 당연히 자치와 자급에서 시민들의 주도권이 강화된다. 노동자와 시민들의 행정을 다시 전유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중앙이 계획하고 지방이 실행하는 형태의 역할분담은 근본적으로 폐지될 것이기에 토호들의 힘도 약화될 것이다. 그리고 시민들간의 자발성은 조례나 법률을 통하지 않고 자발적인 사회협약들을 통해 실현될 수도 있다. 이런 사회협약들은 법률에 준하는 기능을 맡음으로써 시민들이 자신의 주권을 실제로 행사할 수 있도록 해준다.

 

연방국가에서는 다양한 실험들이 가능하다. 당장 지역이 독자적인 화폐를 발행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중앙통화를 보완할 수 있는 지역통화를 발행할 수 있다. 지역통화는 지역 바깥에서는 쓸모없거나 그 가치가 감소하기 때문에 지역경제를 살찌우는 근본적인 처방이 될 수 있다. 통화라고 해서 꼭 새로운 형태를 취할 필요도 없고 상품권과 같은 형태를 유통시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독일의 프린 암 킴제(Prien am Chiemsee) 지방에서 유통되는 킴가우어(Chiemgauer)라는 지역통화는 시민단체와 일반 시민, 지역기업 모두에게 이득을 준다. 사무국이 100 킴가우어를 97유로에 시민단체에게 판매하고 단체는 이를 시민에게 100유로에 판매하고 3유로를 단체활동비로 충당한다. 시민은 100킴가우어를 액면 가격대로 쓰고, 지역기업은 100킴가우어를 다른 지역기업에 지불하든지 아니면 5%의 수수료를 내고 95유로로 환전할 수 있다. 킴가우어 사무국은 이 환전에서 2유로를 남겨 사무국 운영비로 쓴다. 3개월마다 화폐가치가 2%씩 떨어지기 때문에 지역 내에서 제때 사용해야만 한다. 그리고 생태도시로 유명한 브라질 꾸리찌바에서는 폐기물을 분리수거하는 대가로 버스표를 지급하는데 그것이 일종의 지역통화 역할을 한다. 스위스에도 오랜 역사를 가진 비르(WIR)라는 대안화폐가 있고 스위스 전체 중소기업의 약 20%가 이를 사용한다. 중소기업들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지역 내의 중소기업들을 활성화시키고 서로를 연계시킨다. 이런 실험들이 진행되는 곳은 대부분 연방국가이고, 시민들의 상상력에 따라 다양한 실험들이 가능하다.

 

이와 더불어 기본소득과 관련된 새로운 상상들도 가능하다. 기본소득의 취지는 얼마의 돈을 줄 것이냐가 아니라 개개인이 원하는 바를 찾고 실행할 수 있을 만큼의 자유를 줄 것인가이다. 중앙은행의 통화만이 아니라 지역통화가 보완화폐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기본소득의 자원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 아울러 농촌의 회복이나 로컬푸드의 활성화도 연방체제 하에서 더욱더 다양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다.

 

그리고 자원과 자발성의 자연스런 결합이 가능하고 새로운 형태의 사회복지도 가능하다. 일본에서 얘기되는 커뮤니티 옵티멈(community optimum), 즉 상부상조에 의해서 지역사회 복지를 최적 수준으로 만드는 운영시스템도 가능하다. 이것은 중앙정부가 일방적으로 지침과 재원을 내리는 중앙집권형 국가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계획이다. 당연히 교육도 지역에 기반을 둔 교육체계를 만들 수 있고, 전국이 동일한 지침에 따라 교육을 진행할 필요도 없다. 그러면 학벌체제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궁극적으로 연방주의는 통일에 대비하는 실험이기도 하다. 남북한의 통일을 준비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자 이상적인 방법이 연방주의이다.

 

지난 10월 19일 문재인 후보는 연방제 수준의 분권국가를 만들겠다는 발언을 했다. 그 발언의 진의를 무조건 의심할 수도 지지할 수도 없다. 노무현 정부가 균형발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전 국토를 공사판으로 만들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똑같은 연방이라도 그 의미가 아주 다를 수 있다.

 

연방주의로의 개헌은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리고 연방주의는 단순한 제도가 아니라 어떤 사회를 살겠다는 의지와 결의이다.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하고 지역의 다양한 목소리들이 그 속에 반영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더 이상 억압적이지 않은 권력 또는 자유로운 권력을 새로이 고안할 수도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착한 정치인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를 대비할 자유로운 정치활동과 자유로운 연대, 그것을 반영하는 헌법이다.

 글을 쓰다 결론을 못 냈다.

지금은 내라면 낼 수는 있는데...ㅎㅎ

-------------------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활동가들은 대부분 여성이다. 왜 여성이 많을까? 내가 생물학적 남성이라서? 여자만큼 남자를 좋아하는 걸 보면 단지 그 때문은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여성활동가들의 활동방식에서 어떤 끌림을 느껴서? 솔직히 그런 끌림을 느낀다. 남성활동가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매력이 분명 있다. 그런데 그 매력이 단지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생기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물론 타고난 무엇은 있는 듯하다. 학교를 관두고 아이를 돌보면서, 그리고 동네에서 주부들과 독서회나 공부모임을 꾸려오면서 든 생각은 생물학적으로 타고나는 면도 있고 사회적으로 강화되는 면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를 보면 타고난 자질이 있는 것 같고, 내가 변하는 것을 보면 사회적으로 강화되는 면을 느낄 수 있다.

 

인간 모두가 고유하고 독특한 존재라는 건 인정해도 사람이 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다. 분명한 건 나의 선호와 환경 때문에 나의 사유와 표현방식도 바뀌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런 가정이 가능하다. 내가 여성활동가들에게서 느끼는 끌림은 개인이 타고난 것일 수도 있고 사회 속에서 강화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여성이라는 존재가 어떤 자질을 타고났다면, 어떤 공간이나 조직이 그 자질을 강화시킬 수도 약화시킬 수도 있다.

 

이 글의 가정은 여성적인 자질을 강화시킬 수 있는 조직이 협동조합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협동조합에는 여성활동가들이 많다. 협동조합운동의 기원을 보면 남성들이 대다수인데 어떤 점에서 협동조합이 여성에게 중요한 장이 될 수 있었을까? 협동조합운동이 중산층 여성들의 운동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일까? 알려진 만큼 실제로 여성들이 협동조합운동을 이끌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이런 물음을 던지고자 한다.



1. 협동조합은 중산층 여성들의 운동인가?


우리는 많은 편견 속에 살고, 공간과 시간, 관계망이 그런 편견을 없애기도 하고 강화시키기도 한다. 한국사회에는 힘을 가진 자들이 무수히 많은 편견들을 만들었지만 그 중 가장 심한 편견을 꼽으라면 남녀에 관한 편견이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편견이 만들어지거나 작동하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 여성은 여전히 어떤 ‘규정’ 속에 갇혀 있다. 그 규정을 넘어서려고 하면 여전히 ‘쌈마이’나 ‘무서운 페미 언니’로 받아들여진다. ‘나는 내 생각의 주인인가?’라는 단순한(?) 물음을 던져보면 이런 규정이 타자를 배제할 뿐 아니라 결국 나 자신도 배제해서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감명을 받은 책들 중에 벨 훅스(bell hooks)의 『행복한 페미니즘』(백년글사랑, 2002년)이라는 책이 있다. 원제는 ‘페미니즘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Feminism is for everybody)’인데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페미니즘을 설명하는 책이다. 이 책을 쓴 훅스는 『나는 여자도 아닌가요: 흑인 여성과 페미니즘(Ain't I a Woman : Black Women and Feminism)』라는 책을 쓰기도 했는데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겹치는 제목이 참 시사적이다.

 

그래서인지 훅스는 『행복한 페미니즘』에서 “억압자와 피억압자라는 간명한 범주에 집어넣음으로써 남성과 여성을 양극화하는 것은, 계급상승과 가부장제 권력의 공유를 추구하는 페미니스트 여성”이라고 규정한다. 여성의 불행한 가족사로 대통령 스토리를 만드는 한국이니만큼 말만 듣지 말고 누가 그 말을 하는지를 살펴야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사실 ‘모든 여성은 진보적’이라는 말은 ‘모든 노동계급은 혁명적’이라는 말처럼 공허하다. 진보와 혁명성은 타고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벨 훅스의 예리함은 성차별을 계급이나 인종에 대한 차별과 연계시킨다는 점이다. 같은 남성, 여성 내에도 차별선은 그어지고 그런 다양한 차원의 차별들이 삶을 위협한다. 그리고 그 차별선들은 같은 당사자들이 서로를 마주볼 수 없도록 만든다. 차별이 없음을 부정할 게 아니라 가부장제도는 모두에게 나쁜 것이기 때문에 남녀가 함께 물리쳐야 할 텐데 서로 마주보지 못하게 만든다. 왜? 남녀 중에도 힘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그런 차별선을 교묘히 이용하기 때문이다. 여성성의 힘은 그런 분할과 차별, 폭력을 없애고 상호성과 사랑, 상호자유를 강화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페미니스트 정치학을 선택하는 것은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일”이라고 훅스는 강조한다.

 

협동조합 얘기를 시작하면서 벨 훅스의 얘기를 꺼낸 이유는 편견이 우리 속에도 자리를 잡고 있는 건 아닌지 묻기 위해서이다. 흔히 협동조합운동은 중산층 여성들의 활동무대라고 불린다. 한편으로 남성 중심의 시민사회운동이 그렇게 불렀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한 남성과 여성들을 조직하는 시민사회운동이 그렇게 불렀다. 이 호칭에는 단순히 운동주체를 지칭하는 의미보다 ‘여유를 가진’ 주부들의 운동이라는 냉소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심지어 협동조합운동 내에서조차도 조합원을 중산층 여성이라는 범주에 집어넣음으로써 조합원들의 다양한 삶과 욕구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서로 다른 운동들의 갈등이나 대립을 나쁘다고 피하거나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그 대립이나 갈등의 지점이 제대로 잘 그려졌는지를 묻고 싶다.

 

일단 중산층이라는 개념 자체가 워낙 유동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이기도 하거니와 엄밀하게 따져보면 중산층 여성이란 누구인가? 자신이 중산층의 임금을 버는 여성, 아니면 중산층의 임금을 버는 남편을 둔 여성? 아마도 후자의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을 독립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시각이 그 속에 깔려 있으니 호명 자체가 매우 차별적이다. 만일 그런게 아니라면 설령 남편이 중산층이라 해서 그 여성이 중산층 여성이라 낙인찍힐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낙인이 가능하려면 가계의 자산을 남녀가 공유하고 여성이 자신의 삶을 선택할 권한을 가져야 할 텐데, 실제로 그럴 가능성은 낮다.

 

더 근본적으로 보면 이런 정의는 ‘가족임금’이라는 가부장주의와 자본주의의 전제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가족임금제도가 여성들을 가사노동의 틀에 가두고 남성노동자들의 가부장성을 강화시키는 제도라는 점은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과거와 달리 내가 밖에서 돈을 버니 집안의 모든 일을 다하라는 가부장의 논리는 집안에서만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 사실상 가족임금은 노동시장에서 여성노동력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시키거나 여성노동을 남성노동을 보완하는 예비노동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여성노동자들은 남성노동자들의 결정에 따라 쉽게 해고될 수밖에 없는 불안한 노동자가 되었다. 노동하는 여성들만이 아니라 가정주부도 외부의 힘에 깃댄 불안정한 삶을 살 수밖에 없고 남성의 경제력에 종속되어 자립하지 못한다.

 

반대로 가족임금은 가부장성을 유지하려면 기업의 가혹한 착취를 버텨고 생계부양자라는 짐을 혼자 져야 한다고  남성노동자를 세뇌시킨다. 그래서 남성들은 주말엔 할 일 없이 텔레비전과 휴식을 즐기고 주중에는 ‘노동기계’가 되는 삶을, 요즘에는 자기관리까지 강요당하는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한편으로 강요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즐기는 가부장성은 남성의 내면을 왜곡하고 획일화시키고, 생활능력을 감퇴시키고 감수성을 떨어뜨리며 점점 더 남성을 고립시킨다. 중산층이라고해서 남성이나 여성의 삶이 여유롭거나 대안사회에 열려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겉으로 우아하게 보이려 애쓰지만 속으로는 밑으로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가장 여유 없는 계층이 중산층이다. 그러니 냉소할 이유가 없다.

 

주체의 면만이 아니라 조직의 면에서도 오해가 있다. 협동조합은 중산층의 결사체가 아니라 약자의 결사체이다. 협동조합의 기원 자체가 그러하다. 로버트 오웬(R. Owen)이 협동조합을 구상했던 이유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최초의 협동조합이라 불리는 로치데일 협동조합도 가난한 노동자들의 조직이었다. 한국에서도 협동조합운동은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들의 삶을 뒷받침하는 디딤돌로 시작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씩 따로 떨어져서 국가나 자본의 관리를 받지 않고 스스로 의식화되고 조직화되어 단결할 때 다른 가능성들이 하나씩 생겨난다. 다양한 협동조합들을 만들다보면 공동체가 강해지고 또 다른 협동의 가능성이 생길 수 있다.

 

협동조합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홀로 살아갈 필요가 없는 사람들의 조직이고 힘이었다. 어떤 의미에서건 조직이란 건 개인이 홀로 하지 못하는 힘을 발산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기득권층은 사람들이 모이는 걸 두려워하고 조직을 싫어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독점하고 관리해온 공조직 외에 또 다른 조직이 힘을 얻고 사람들의 신뢰를 받는 걸 두려워하기에 사람들의 인식에 개입한다(한때 NGO라는 말이 폭발적인 호응을 얻다 어느 순간 도덕성에 타격을 입고 사라지게 된 것이 대표적이고, 최근에는 협동조합의 해라며 흥분하는 모습에서도 그런 징후를 느끼게 된다). 그런 논리가 가부장적인 편견을 재생산하고 현실에서 자기 목소리를 온전히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마주보며 손을 내밀 수 없게 만든다. 박노해의 ‘이불을 꿰매면서’라는 시에 나오듯 “거만하고 전제주의적인 기업주의 짓거리”를 비판하는 노동조합 활동가이지만 “아내를 착취하고 가정의 독재자”가 되는 모순이 생겼다. 비슷한 맥락에서 약자의 무기인 협동조합을 한가한 사람들이나 주부들의 계모임, 자원봉사활동, 때로는 일반기업 정도로 여기는 잘못된 인식이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인식의 원인을 기득권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떤 면에서 협동조합운동 스스로가 재생산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협동조합운동은, 특히 소비자생활협동조합운동은 생활의 주체인 여성들을 중요한 주체로 삼았지만 가부장주의에서 해방시키려 하지 않았다. ‘밥상공동체’가 한 가정부터 우주를 포괄하는 이념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 이념은 ‘누가 그 밥상을 차릴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함께 먹고 함께 즐기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한국의 생협운동은 함께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의 인식과 지식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키지도 않았다(예를 들어, 일본 <가나가와 네토>처럼 여성을 ‘전일시민’, 남성을 ‘반일시민’이라 규정하려는 노력도 없었다).

 

2005년에 나온 『한살림운동과 조합원노동의 이해』라는 보고서를 보면, 생활협동조합운동이 주부를 주체로 삼은 이유는 “생명을 낳고 기르고 가르치고 보살피고 치유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생활을 화폐로 평가하는 시장시스템, 평균화시키는 행정시스템에 위탁하는 것의 위험을 자각한 주부들이 먹을거리를 매개로 생활을 자치해 나간다는 운동전략”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고립된 소비를 “사회적 힘으로 조직하는 ‘공동구입’”이 필요했고, 이런 과정에서 주부들이 “사적영역을 공공화시키는 사회적 의사소통 능력을 키우고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훈련”받기를 기대했다. 비슷하게 1989년 <함께가는 생활소비자협동조합>에서 시작된 <여성민우회 생협>은 ‘사회주부’, 즉 “바람직한 사회상의 실현을 추구하며 가정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 이바지하는 기혼여성”을 운동의 주체로 삼았다. 사회주부는 “자신들의 가족 내 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문제를 인식함으로써 사적인 돌봄을 공적인 돌봄으로 확장시켜나가는 생활정치를 전개하는 과정을 통해 사회의 치유자로서의 어머니의 역할”을 자처했다. 문제는 그런 주체의 성장에 공동구입이라는 시스템이 매우 중요한데, 그런 시스템이 이미 무너졌다는 점이다. 반공급을 유지하는 몇몇 지역생협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소비자생협이 개인공급방식을 받아들였고 그러다보니 사회적인 힘을 조직하는 과정은 별도의 교육과정으로 대체되어야 했다. 교육은 생활 속에서 구체화되는데, 그 생활에 사회적 관계가 없다보니 교육은 형식화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앞의 한살림 보고서가 지적하듯 공급활동 외에 조합원활동이나 조합원노동을 통해 “한살림의 활동을 매개로 지역사회에서 자기실현의 관계망을 형성하는 과정”이 존재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협동조합운동은 가족임금제도를 비롯한 노동현장의 문제점을 자신과 연결된 문제로 인식하지 않았다. 삶터만이 아니라 일터도 바꿔야 삶터가 바뀌고 그 변화가 지속될 수 있을 텐데, 전체를 보는 시야는 부족했다. 소비자생협운동이 농민과 농업을 살리려는 노력에 힘을 쏟아온 점은 인정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국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하기 어렵다. 급속한 도시화와 산업화는 한국사회의 풍경을 이미 바꿔놓았다. 더글러스 러미스가 『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녹색평론사, 2010년)에서 말하듯, 근대사회에 대한 비판은 중요하지만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노고와 노력을 이해하고, 그 위엄을 인정하면서 논의할 수 있는 형태로 어떻게 비판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인식하고 “그 사람들의 생활과 노력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어떤 면에서는 우리에게 그렇지 못한 면이 많았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생산과 소비를 순환의 관계로 파악하는 인식은 자본주의의 기둥을 무너뜨리는 인식인데, 그 혁명성은 어느 순간 사라졌고 그냥 직거래만 남았다. 그러면서 자본주의도 서서히 협동조합의 특성에 눈을 뜨고 그것을 길들이거나 활용하려는 전략을 펼쳐 왔다.

 

협동조합운동은 이에 일공동체나 워커즈 콜렉티브라는 대안을 내놓고 있지만 이것은 가족임금체계를 뛰어넘지 못했다(비슷하게 사회적기업의 여성고용 비중이 높지만 이 역시 임금이 낮고 불안정한 일자리들이고 가족임금을 해체하는 장치가 아니라 가족임금을 보완하는 장치이다). 이런 대안들은 원래 목표한 대로 자본주의 화폐경제를 대체하지 못하고 이를 보완하는 형태로 운영되었고, 조합원의 자발성이 강조되지만 조합원이 협동조합 내에서만 생활하는 게 아닌 이상 사회의 강요나 억압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진정 자율적인 선택이려면 그것을 가능케 할 조직적인 방법을 찾았어야 했는데, 그런 부분은 개인의 몫으로 남겨졌다. 따라서 가정을 넘어 사회로라는 구호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가정과 사회를 분리시키는 벽은 더 높아졌고, 가족임금제도와 여성의 가정주부화라는 도식이 깨어지지 않는 이상 이 벽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소비자생협운동은 지금도 ‘우리 아이, 우리 가족의 먹을거리’라는 틀을 여성들, 더 정확히는 주부들에게 선전하고 있다. 밥상에 담긴 그 많은 의미를 부정하고픈 생각은 없다. 다만 이 틀은 ‘우리 아이, 우리 가족’이 가진 문제점을, 가부장주의를 해체시키지 않고 강화시킨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자녀교육의 책임자가 되고 이로 인해 자식의 교육과 삶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문제를 낳는다.

 

그런 점에서 가부장주의를 남녀만이 아니라 어른과 아이 사이에서도 찾는 벨 훅스의 말에 귀를 기울여봄직 하다. “백인 우월주의적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지배 문화 속에서 어린이들은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페미니즘 운동은 우리의 문화가 어린이를 사랑하지 않고 어린이를 어른이 자기 마음대로 취급할 수 있는 소유물로 여기는 문화라는 사실에 주목하도록 만든 이 나라 최초의 사회 정의 운동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주의는 “남녀를 막론하고 자기 아이에 대하여 가부장적으로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가정을 어린이들이 안전하게 자랄 수 있고 자유롭게 자랄 수 있고 사랑을 배울 수 있는 장소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임을 인식한 운동이다.

 

협동조합이 누구의 운동인가라는 물음은 사실 중요한 질문이 아니다. 누구라도 협동조합을 통해 다른 삶을 꿈꿀 수 있다. 협동조합운동은 약자나 소수자들이 사회적 주체로 성장하고 자립할 수 있는 배경인데, 이런 역할은 아직 과제이다.



2. 협동조합 7원칙을 다시 생각한다


일본의 <그린코프연합>이 발족하며 선언한 내용은 약간 충격이었다. <모심과살림연구소>가 펴낸 『모심 侍』(2002년)에 실린 다케다 케지로의 「그린코프선언 외」에는 “①생협은 어머니들의 연합체이다, ②생협운동은 어머니 연합이 담당하는 여성 자립운동이다, ③그린코프는 자립한 어머니연합과 여성운동 간의 공통의 본질을 모색한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한다는 선언이 담겨 있다. <그린코프생협>은 ‘사업 근대화’를 내세우고 반 중심의 공동활동을 해체하며 생협노동을 임노동으로 규정했던 생협인데, 이 선언은 어머니와 여성자립을 강조하지 않는가. 더구나 이 선언은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는 모든 사람, 어머니에 관한 생각에 찬성하는 남성까지 포함하는 “가능성으로서의 어머니”를 조합원으로 받아들이고 “존재로서의 어머니로부터, 의식하는 어머니로, 더 나아가 연대하는 어머니로 진화해 나간다는 생각”을 밝혔다. 경제가 생활을, 직장이 지역을 지배하는 시대에 맞서 인간의 자립, 어머니의 자립, 아이의 자립을 추구하고 “어디까지나 연대와 협동에 의한 자주적인 지역주민의 활동에 기초”한 지역활동을 하겠다는 구상은 나름 감동적이다. 하지만 이 선언과 협동조합의 구체적인 활동을 조화시킬 방법에 관한 의문은 계속 남는다.

 

이런 관심은 우리 사회에도 이미 존재했다. 2000년 7월 4일 민우회생협 조합원선언은 조화․협동․평등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환경, 여성, 지역사회 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여성적 관점에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선언했다. 이 조합원선언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남성과 여성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대안적 생활양식을 개발하고 실천”하며 “더불어 사는 삶의 방식을 지향하는 공동체 문화를 형성”하고 “지역사회가 조화롭고 정의롭고 평등한 생활의 장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조합원선언은 여성들이 이끄는 ‘여성생협’을 목표로, 남녀를 비롯한 조합원들이 ‘여성적 관점’으로 대안적인 생활양식과 공동체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을 지향했다.

 

그리고 2012년 6월 20일 <살림의료생협>의 어라 사무국장은 「여성주의자가 만난 사회운동방법으로서의 ‘협동조합’」이라는 주제발표에서 협동조합만큼 여성주의와 잘 어울리는 조직이 없다고 말했다. 협동조합 7원칙이 여성주의와 얼마나 가까운지를, 왜 협동조합을 이해하는 과정이 여성주의를 이해하는 과정인지를 설명하는 발표를 들으며 협동조합원칙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협동조합에서 여성이 다수임에도 여성주의와 협동조합의 원칙을 같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살림의료생협>의 공간에 오면 자신의 정체성을 솔직히 드러낼 수 있어 지역의 숨겨진 여성주의자들이 드러나고 다른 정체성을 추구할 수 있다는 발표자의 말은 협동조합운동의 핵심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성별만이 아니라 계급, 인종, 이성애 중심의 차별에 저항하는 의료, 탈의료화를 추구한다는 목표가 궁극적으로 여성운동이라는 말도 가슴에 와 닿았다. 많은 조합원들이 모여서 같이 병원을 보러 다니고 병원에 들어올 기계를 선택한다는 말에서도 협동조합운동의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여성의 역량을, 생명의 살림살이를 강화시키는 조직으로서 협동조합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면 좋을까? 그리고 협동조합을 하기에 그리 좋지 않은 환경인 한국에서 협동조합 7원칙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앞에서 지적했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틀로서 협동조합 7원칙을 성찰해 보자.

 

협동조합 7원칙 중에서 제 1원칙이 ‘자발적이고 개방적인 조합원 제도’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얘기이다. 그 가장 중요한 원칙이 ‘누구나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소극적인 의미로만 해석될 수는 없다. 이미 사회적인 차별이 폭넓게 존재하고 있기에 문턱이 있을 수밖에 없는 한국사회에서 ‘누구나’는 참으로 무력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조합원을 어떻게 ‘환대’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현재의 사회구조를 고려할 때 기혼자나 전통가족만을 중심에 둘 수도 없다. 비혼자나 아이 없는 가족, 성소수자 가족도 협동조합에 다가설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고, 약자들이 일하는 자활공동체나 사회적 기업들에도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단순히 약자를 보호하고 지원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 원칙이 실현될 수 있는 사회 환경을 만든다는 차원에서 이미 만들어진 협동조합이 적극성을 가져야 한다.

 

제 2원칙 ‘민주적 관리’나 제 3원칙 ‘조합원의 경제적 참여’도 기계적으로 해석되면 안 된다. 민주란 말 그대로 주인이라는 얘기이고 참여란 단지 통로를 열어주는 게 아니라 다양성이 드러나도록 판을 깔아주는 것이다. 협동조합은 사회적인 차별을 내부에서 바로잡고 그 정의를 사회화하는 결사체이다. 그러하기에 각 조합원들의 의견과 의지, 다양한 색깔이 드러날 수 있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관계망을 확대시켜야 한다. 이 과정을 조합이 아니라 조합원이 이끌어야 하기에 내부민주주의야말로 외부로의 확장을 위한 전제이다. 조합이 조합원 개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아니라 조합원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잠재적인 조합원들을 조합으로 끌어들이려면 민주주의와 참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는 민주와 참여가 너무 정형화되어 있다. 협동조합에서도 민주보다 관리에 방점이 찍히고 참여보다 경제에 강조점이 찍힌다. 단지 조합원의 수가 많다고 해서 조합의 민주적인 운영구조가 무력해지는 건 아니다. 그리고 사람의 수가 적다고해서 반드시 민주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고 보기도 어렵다. 외려 ‘자신의 것’, ‘우리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겠다고 여기는 조합원들이 많다면 지금 당장 참여하는 사람의 수가 적어도 민주주의는 실현되고 있다. 그리고 억압된 주체일수록 민주주의를 회피하거나 타인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그래서 나의 억압된 주체가 타자와 무관하지 않고 같은 지반위에 서 있음을 깨닫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이해는 남성적인 결정의 화법보다 상황을 충분히 알아듣게 설명하는 ‘수다’로 더 잘 이루어질 수 있다. 공식적인 대화보다 비공식 대화가 중요하다는 게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어야, 서로간의 공감이 생겨야 이해가 가능하다. 이해(理解)는 단순히 듣는 게 아니라 내용을 따지는 과정이고 입장(standing)이 아니라 그 밑(under-standing)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가부장주의와 자본주의는 권력을 집중시키고 다양성을 배제하며 소통을 차단하려 든다. 가부장주의와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우리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서만 그 틀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제 4원칙 ‘자율과 독립의 원칙’과 제 5원칙 ‘교육, 훈련, 정보제공의 원칙’이 중요하다. 농협이나 신협의 사례에서 보이듯 국가가 협동조합을 관리하려 드는 사회, 재벌들이 공장과 사무실을 군대로 만들고 골목상권을 위협하는 사회에서 협동조합은 자신의 생존과 조합원들의 변화를 도모하기 힘들다.

 

아울러 자발성, 평등, 참여와 같은 협동조합의 가치들도 계속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국가나 시장과 관계를 끊을 수는 없다. 자율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국가나 시장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점을 뜻하지 않는다. 현실과 분리된 공동체를 꾸리고 자기들끼리만 잘 살려는 게 아니라면 외부와의 접촉은 필수적이다. 그런 점에서 자율성은 나를 지킬 힘이, 국가나 시장과 약속을 맺을 힘이 내게 있음을 뜻한다. 이 힘을 찾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주체적인 시민으로 성장하고 임금노동이나 화폐경제에 종속된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디딤돌로 협동조합이 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리고 조합원들의 생활이나 노동을 대체할 수 있는 다양한 협동조합들이 새로이 만들어지도록 지원해야 한다.

 

그런 힘을 기르기 위해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협동조합의 사업을 확장시킬 수 있는 힘은 조합의 물류나 시스템이 아니라 조합원들이다(자본주의 사회에서 협동조합의 물류나 시스템이 이익을 좇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따라잡기는 어렵다). 생산과 소비를 하나의 순환체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조합원이 늘어날수록 협동조합운동의 힘도 강해질 수 있다. 따라서 즐기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어야 하고, 조합원이 뭔가를 새로 시작하고자 할 때 조합이 든든한 뒷심이 되어야 한다.

 

조합원들에게 필요한 교육은 단지 식생활교육이나 교양교육만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고 해석할 수 있는 눈이다. 앞서 말했듯이 일터와 삶터의 변화를 스스로 해석하고 이를 통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조합원, 그들이 협동조합운동의 희망이다. 그런 조합원을 많이 기르고 그들이 서로 협동하고 연대할 틀을 제공하는 것이 협동조합의 과제이다.

 

마지막으로 6원칙 ‘협동조합간의 연대’나 7원칙 ‘지역사회에의 기여’는 협동조합의 그런 시야를 뜻한다. 적대적인 경쟁, 인수합병(M&A)이 원칙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한경쟁과 복불복을 강요하는 한국사회에서 협동의 원칙은 다른 세상을 뜻한다. 그리고 그런 세상을 실제로 만들어가려면 몇몇 조합이 아니라 전체의 힘이 모여야 하고 ‘공생(共生)’과 ‘공생(公生)’이 필요하다. 협동조합간의 공생(共生)은 서로간의 경쟁을 막거나 최소한 적대적인 경쟁을 최소화시키는 창구이고 사회적 시장을 만들 가능성을 뜻한다. 이런 시장이 형성되면 협동조합은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의 가치를 실험할 수 있다.

 

그리고 협동조합과 지역사회의 공생(公生)은 협동과 지역사회가 분리될 수 없다는 인식을 뜻한다.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가 만들어진 한국사회에서 지역사회의 의미는 단순히 작은 규모의 공동체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역 자체가 가진 동력에 주목한다는 의미이며, 그 힘과 기술, 전통에 기반해서 사업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강화시키지 않고서 세계화의 시대에 협동조합이 생존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런데 이런 공생의 관계를 인식하려면 전일(全一)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나와 타자의 관계, 나와 세상의 관계를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없이 공생과 공생이 강화되지는 못한다. 내 살을 베어 타인을 먹이려는 자세가 있어야 이런 공생이 강화될 수 있다. 이런 관점은 기존의 강화된 남성성으로는 길러질 수 없고 여성적인 자급 관점이 필요하다.

 

마리아 미즈(M. Mies)와 베로니카 벤홀트 톰젠이 쓴 『자급관점(Subsistence Perspective)』(곧 한글번역판이 출판될 예정이다)의 서문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지금 미국의 국무장관인 힐러리 클린턴(당시에는 대통령의 부인)이 방글라데시의 작은 마을을 방문했던 이야기이다. 힐러리는 그라민 은행의 소액대출을 받아 자립을 시작한 마을 여성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마을 여성들이 이렇게 묻는다.

 

“아파(자매님), 당신은 암소가 있나요?”

“아뇨, 나는 암소가 없어요.”

“아파, 당신은 소득이 있나요?”

“네, 전에는 내 소득이 있었지요. 하지만 남편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백악관으로 온 뒤에는 일을 관뒀어요.”

“아이는 몇인가요?”

“딸 한 명요.”

“아이를 더 갖고 싶은가요?”

“네, 한두 명 정도 더 갖고 싶지만, 지금의 딸 첼시와도 충분히 행복하답니다.”

이 짧은 대화를 나눈 뒤 방글라데시의 여성들은 이렇게 입을 모았다고 한다. “불쌍한 힐러리! 그녀는 소도 없고 소득도 없고 딸도 하나밖에 없다네.”

 

미즈와 톰젠은 이 이야기에서 다섯 가지의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첫째는 우리가 현실을 보는 관점에 대한 반성이다. 보통 우리는 서유럽이나 미대륙을 보며 삶을 생각하지만 이 이야기는 남반구의 찢어지게 가난한 여성농민과 도시여성의 일상생활에서 삶을 구상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허나 좋은 삶이 자연과 타자, 여성, 아이들을 희생시키고서야 가능하다면 그것이 어찌 좋은 삶일 수 있겠는가? 우리의 삶이 전쟁 속에 사는 타자들의 삶을 딛고 평화를 누린다면 그것이 어찌 평화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미즈와 톰젠은 가장 낮은 곳, 밑바닥의 관점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외부의 힘이나 지원이 아니라 스스로 자급해서 살아가는 공동체의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이다. 엄청난 자원이 아니라 암소 한 마리와 닭 몇 마리, 아이들, 약간의 땅 만으로도 자립은 가능하고 그것이야말로 좋은 삶을 지탱하는 힘이다.

 

셋째, 가난한 여성이 미국의 영부인을 대하는 그 자세이다. 권력자를 ‘자매’라고 부를 수 있는 자신감과 위엄, 존엄함, 이들은 더 이상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설 수 있는 사람들이다.

 

넷째, 마을 여성에게 좋은 것이 전체 사회에도 좋은 것이고, 유토피아는 모든 사람이 자립적인 삶을 누리고 유지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미즈와 톰젠은 이를 “사회주의적이고 성차별적이지 않고 비식민주의적이고 생태적인 유토피아”라고 부른다.

 

다섯째, 세계를 ‘제1세계’와 ‘제3세계’로 나누는 정신분열증을 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방글라데시 여성들은 힐러리를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그런 차별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과 같은 여성으로 위치짓고 있다. 자신들의 삶의 지향이 힐러리에게도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의 물음은 근본적으로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미즈와 톰젠의 논의는 가사노동과 비정규직노동이 같은 지반 위에 서 있음을 드러낸다. 비정규직 노동을 없애고 변화를 꾀하는 건 여성의 가정주부화를 빼놓고 진행될 수 없고, 노동의 성격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설 수 없다. 따라서 명목적인 7원칙이 아니라 현실의 변화를 이끌 수 있는 7원칙으로 원칙을 재해석해야 한다.



3. 여성이 협동조합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나?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A. Gramsci)는 헤게모니(hegemony)라는 개념으로 사회를 설명했다. 지적, 도덕적, 정치적 동의를 뜻하는 헤게모니는 지배계급의 지배가 억압이라는 수단만이 아니라 동의라는 기제를 통해서도 행사된다는 점을 설명했다. 가부장제 역시 헤게모니를 통해 작동한다. 그것이 일정한 동의체계를 갖추고 있고 때로는 헤게모니의 유지를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킬 줄도 안다는 얘기이다. 이를 적용하면 여성들이 많이 일하는 것만으로는 협동조합의 헤게모니를 설명할 수 없다.

 

협동조합운동의 실제 현실은 어떨까? 2004년 이화여대 여성학과에서 나온 「여성주의 정치학으로서 생협운동의 가능성에 관한 연구: 한살림과 민우회 생협의 활동여성들을 중심으로」는 그런 가능성을 타진한다. 이 논문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한편에서는 생협운동의 의미에 치중해 여성들의 활동상의 어려움 및 갈등부분에 대해 민감하지 못한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여성의 생협활동을 성역할 강화라고만 간주하여, 제대로 평가하지 않거나 아예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하려는 경향”을 모두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한살림과 민우회생협 활동가와 실무자 등을 인터뷰해서 작성된 이 논문에 따르면, 협동조합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일상은 부주일(집안일)의 연장선상에 있다. “남편은 생계책임자이고 여성은 집안살림을 맡는 성별 구도 하에서 남편의 눈에 아내의 생협활동은 주부가 여가활동으로 선택한 하나의 자원활동 쯤으로 비춰지고, 결국 남편과의 가사분담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제가 좋아서 하는 일’로 치부된다.” 그리고 조직 내에서도 여성의 활동이 본부와 지부, 사업과 운동의 관계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맡거나 의사결정이나 의견수렴과정에서 드러나는 위계성 등도 지적한다. 그리고 민우회생협의 활동은 여성운동과 생협운동을 조화시키지 못함으로써 생협운동이 여성들의 대중적인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도구로 머무르는 한계를 보였다.

 

실제로 지금 현재를 봐도 단위생협의 이사장과 이사들이 대부분 여성이지만 생협운동을 대표하거나 정책이나 비전을 짜거나 생협운동에 관해 얘기하는 사람들 중에는 남성들이 많다. 협동조합과 그것의 지향을 논의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남성이다. 생산자나 공급업체로 가도 비슷한 상황이다. 가장 잘 알고 오래된 사람들이 맡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그걸 인정하면 그 구조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직위가 남성들 중심으로 대물림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이 논문은 어떤 가능성에 주목할까? “생협운동이 단지 가사량을 늘리고 참여 여성들이 가사활동에 충실하려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생협운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다시 인식하고 대안사회를 구상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또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는 과정을 통해 여성의 임파워먼트를 얻게 되는 등 여성과 생협운동 간의 다양한 측면들을 주시함으로써 여성운동으로서 커나갈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한다. 그리고 생협활동이 “가정 내 성별분업을 해체시키고 대안적 지역문화를 생성할 뿐 아니라, 소비와 파괴의 악순환을 매개하는 생산영역에도 변화”를 준다면 살림의 가치를 중심으로 한 대안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다. 그리고 생협활동을 통해 주부들이 자아를 발견하고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며 역량을 강화시키는 과정도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한다.

 

여성들이 협동조합운동의 헤게모니를 쥔다는 것은 운동의 정체성과 방향이 여성성에 뿌리를 내린다 의미이다. 훅스의 입을 빌려 얘기하자면 운동이 상호성과 사랑, 상호자유를 지향한다는 것이고, 여성이 협동조합을 통해 자립하고 생산과 재생산 영역 모두를 바꾸는 것이다. 협동조합이 여성활동가의 삶을 바꿨지만 여성활동가가 협동조합을 바꾸지 못했다는 건 현재까지의 모습이고, 앞으로의 변화는 과제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 과제를 풀어가는 과정에는 여성과 남성의 공동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니까.

나는 20대까지 공부를 하리라 마음을 먹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릴 적에는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과학자라고 답을 했고, 커서도 누가 소원을 물으면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라 답했다. 책읽는 것보다 손으로 조립하고 만드는 걸 좋아했고 수줍게 앉아 남의 얘기를 듣길 좋아하던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건 상상하지 않던 일이었다. 소심하고 낯을 가리던 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하고 꿈꾸는 세상에 관해 얘기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으니 세상일은 참으로 알 수 없다.

 

그래서 나의 10대, 20대를 함께 했던 사람들은 지금 내 모습에 적잖이 놀라곤 한다. 예를 들자면, 책값이라도 벌어보려고 여기저기 글을 쓰던 2002년, 대학원 석사시절 때 알던 선배가 ‘하니리포터’라는 인터넷신문에서 내 글을 읽고 미국에서 이런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네 석사 때 모습이 생각난다. ‘형, 나는 머리 쓰는 일보다 몸으로 때우는 게 적성에 맞아요’라고 사무실에서 나에게 이야기 했던 너인데 어떻게 머리 고생시키는 일을 하고 있구나.^^” 내 모습이 실제로 그랬으니 이 선배만 유독 생뚱맞은 반응을 보인 건 아니다.

 

그렇다면 왜 나는 팔자에도 없고 꿈도 꾸지 않던 공부라는 길을 택했을까?

 

1. 억압된 자아와 갇힌 학문의 유사성

나는 부산에서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형들은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좋아하는 엄친아들이었고, 나는 공부나 운동 모두 고만고만한 평범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까지 반에서 20등 정도가 내 성적이었고 공부 잘 한다는 말보다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책을 진득하게 오래 보지도 못했고 그 당시 유행하던 얄개 시리즈나 괴도 루팡 시리즈 정도만 내 관심을 사로잡았다.

 

그러니 시험 때마다 마음을 졸이기 일쑤였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성적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형들이 공부를 잘하니 쟤 머리도 좋지 않겠냐는 주변 사람들의 근거 없는 낙관이 삶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했다(명절은 지옥에 가까웠다!). 오히려 성적을 올려야 한다는 압박감이 나를 계속 쫓아다녔고, 고등학교 생활은 압박감에 시달리는 암기나 공포를 잊어보려는 일탈로 채워졌다. 함께 놀던 친구들이 없었다면 그 시기를 버틸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운 좋게 2지망으로 대학에 들어간 뒤에도 공부는 내 관심 밖이었다. 학생운동을 하던 형을 보면서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들과 시위현장에 가보고 운동권 가요를 배우기도 했지만 그 당시 유행하던 ‘사회과학세미나’도 내 관심 밖이었다. 책이라면 전공책과 사회과학서적 어느 것에도 끌리지 않았고 나는 술 마시고 노는데 더 관심이 많았다. 군인이 정치를 하던 심각한 시대였던지라 겉치레를 하기 위해 딴에는 심각한 척을 하기도 했지만 실제 관심은 연애나 길거리의 사람들 삶에 있었다. 학교 가다 버스에서 내려 길거리 노점을 구경하고 집에 오다 시장 봐서 술 마시는 삶이 가장 행복했다.

 

어떤 일에서건 배우고 남길 점이 있듯이 그 시기에도 성과는 있었다. 잠깐 학생운동을 경험하면서 조직이 인간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고, 91년 5월의 경험은 역시나 나의 ‘그릇’이 아주 작다는 점을 확신시켰다. 이렇게 재미없는 성장기 얘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그런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내 자신을 아주 ‘작은 인간’으로 여겼고 주변의 환경도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즉 내게는 나라는 ‘자아’가 없었다. 껍데기만 있지 영혼이 없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당시의 학문이라는 것도 비슷했다. 학교에서건 세미나에서건 외국의 낯선 개념과 어려운 이론을 다루었다. 대학교의 정치학 수업은 서구의 민주주의 이론과 서양철학, 정당론을 가르쳤고, 사회과학 세미나 역시 맑스-레닌주의와 러시아 혁명사, 사회구성체론 등을 다뤘다. 당시의 지식인 사회는 이 땅의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것을 지나간 시대의 낡은 유물로만 봤다. 우리 사회는 너무나 작고 약해서 외부의 강한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라잡아야 했다. 그러니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학문의 내용은 낯선 언어로 채워졌고, 그런 어려운 언어는 언제나 나를 주눅들게 했다.

 

그렇게 보면 나와 한국의 학문 모두가 외부의 것에 갇힌 존재였다. 나는 자아를 찾지 못하고 헤매었고 한국의 학문도 자기 기준을 잃고 갈팡질팡했다. 자신 안에서 성장의 기운을 찾지 못하고 외부의 것을 따라잡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살만 찌우는 식용가축처럼, 나는 길들여졌고 한국도 그렇게 성장했다. 그 사육의 속도는 너무 빨라 갈매기 조나단처럼 다른 삶을 꿈꾸기 힘들었다.

 

그러다 우연히 나는 또 다른 외부를 접하게 되었다. 그것은 대학교 앞의 사회과학서점에서 우연히 집어든 아나키즘에 관한 책이었다. 폴 애브리치(Paul Avrich)라는 역사가가 쓴 『러시아 아나키스트 1905』와 『러시아 아나키스트 1917』이라는 두 권의 책은 검은 표지에 권위와 자본주의를 갈아엎는 농부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그 투박함과 생동감에 나는 매력을 느꼈다. 그때는 아나키즘을 이념이라기보다 ‘부정의 철학’으로 받아들였다. 한편에서는 새롭고 낯선 것에 대한 관심 때문에, 다른 한편에서는 기존의 것들을 부정하기 위한 철학으로 그때부터 아나키즘에 관심을 뒀다.

 

그 즈음인 1991년 3월, 낙동강에 페놀이라는 오염물질이 유출된 사건이 있었다. 그런 생태위기를 목격하고 ‘한살림선언’을 접하면서 ‘녹색사상’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그것은 우리 현실 속에서 고민의 출발점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낯선 언어가 주는 구토감에 우리 언어를 찾고 싶었다. 그러면서 동학이라는 걸 처음 접했고 그 때는 사상보다 종교적인 관심이 약간 앞섰다. 내 속에 억압된 감정이 가끔은 민족적인 감정이나 일본에 대한 적개심으로 터지곤 했는데, 동학은 그런 것들을 담을 수 있는 그릇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공부를 하겠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갑자기 정치학에 대한 관심이 생겨 대학원을 가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평생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 선택은 한편으로 군대를 연기하기 위한 방편이었고 다른 한편으론 지금껏 하지 않았던 공부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아나키즘과 녹색사상에서 잠깐 내 모습을 비춰볼 수 있었지만, 또다시 세상의 속도에 맞춰 끊임없이 선택과 선택을 거듭해야 했던 나는 왠지 모를 미련을 느꼈다.

 

하지만 대학원에서 접한 공부는 힘들었을 뿐 성취감을 느낄 수 없었다. 수업시간에 읽어야 할 글들 대부분이 영어였고,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번역을 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책을 읽으면서 내 머리에 떠오르는 구상보다 어떻게 하면 저자의 생각을 잘 쫓아갈 것인가가 공부의 목적이었다. 영어책을 읽는 능력이 생긴 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 때 읽었던 책들은 지금 머리 속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대학원 시절의 갑갑함을 덜어준 것은 학교밖 ‘한국정치연구회’라는 연구단체였다. 당시에는 이 단체가 진보적 학술운동을 추구했고 다양한 주제의 세미나팀에 대학원생들이 모여 함께 글을 읽고 토론을 벌였다. 공부도 공부지만 공부를 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고민이 뒤섞였고 세미나 시간보다 훨씬 더 긴 뒷풀이 시간이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이 이 사회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지식인은 어떤 존재인지, 술잔을 타고 흐르는 이야기들이 새벽하늘을 밝히기 일쑤였다.

 

내가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칭찬과 격려를 받았던 곳도 그곳이었다. 내가 실제로 공부를 잘 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내 속의 많은 고민들을 쏟아내면서 선배들에게 조금씩 인정을 받았던 것 같다(어쩌면 뒷풀이 장소를 떠나지 않는 체력이 인정의 이유였는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그 곳은 생애 최초로 ‘사회적 인정’을 받았던 공간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자아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무조건 외부의 조건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내 자신을 받아들이면서 어렴풋했던 내 자아가 조금씩 뿌연 안개를 걷고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국정치연구회에서 많은 책들을 읽었지만 석사학위 논문을 써야할 즈음부터 하버마스(J. Habermas)라는 독일 사상가의 여러 책들을 한 권씩 읽었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읽으려 노력했다. 외부의 것이라는 근본적인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곳에서는 공부를 하면서 ‘비판적 읽기’와 ‘거리두기’를 익힐 수 있었다.

 

그런 만남과 도움이 있었기에 나는 ‘허버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의 모더니티(modernity) 비판’이라는 석사논문을 쓸 수 있었다. 나는 모두가 쥐 죽은 듯 숨죽이고 사는 세상에서도 사회가 바뀔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 가능성을 추적하다 찾아간 시기가 서구의 68혁명이었고, 희망의 씨앗을 본 사람이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the Frankfurt School)의 1세대라 불리던 마르쿠제였다. 마르쿠제를 연구하는 것은 맑스주의를 껄끄러워했고 특정한 계급이 사회변화를 주도해야 한다는 논리를 거부하던 내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다.

 

마르쿠제에 관한 기존의 시각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고 나와 외부 사이에 놓인 깊은 골을 좁히고 싶었기에, 나는 ‘모더니티의 이중화’라는 나름의 방법을 개발했다. 서로 대립한다고 여겨지던 사회경제적 모더니티와 미적 모더니티의 긴장과 대립을 마르쿠제가 해소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 긴장을 ‘의도적으로’ 유지한다고 나는 봤다. 현실과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미적 모더니티가 유토피아적 지향으로 존재하면서 현실을 이끌고, 사회경제적 모더니티의 지향은 현재의 잠재력에 기초해 갈등을 평화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과정, 그것을 나는 모더니티의 이중화 전략이라 정의했다.

 

기존에 없던 마르쿠제 해석이었기에 나는 마르쿠제의 글들을 꼼꼼하게 읽고 내 구상대로 해체해서 사회경제적 모더니티와 미적 모더니티에 관한 두 가지 내용들로 재구성했다(나는 마르쿠제의 ‘입을 빌어’ 내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전략은 나름대로 성공을 거뒀고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내 나름의 방법을 개발했다는 자신감을 가졌고, 그래서인지 논문 곳곳에 자리잡은 오타(제본한 뒤에 논문을 읽으면 그 전엔 절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던 한 무더기의 오타를 발견하게 된다)에도 나는 아직까지 석사논문에 대한 불만이 그다지 없다.

 

그때 나는 최초로 ‘공부가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고, 책을 통해 저자와 만나는 즐거움을 누렸다. 모더니티가 사회를 완전히 삼켜버리지 않은 제 3세계의 잠재력을 인정하고 존중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68혁명은 서구와 비서구를 가르는 문명이라는 위선을 깨려는 서구 사회 내부의 시도였던 것 같다.

 

머리 속을 떠다니던 고민을 활자로 새기면서 나는 최초로 자아와 대면했고 그와 대화하는 즐거운 경험을 했다(가끔은 거울을 보며 대화를 나눌 정도로). 나는 내 속의 억압성이나 상처와 대화하면서 조금씩 그것을 깨달음으로 바꿀 수 있었다. 그리고 논문을 쓰면서 다른 사상가의 고민을 통해 나와 외부의 경계를 넘나드는 재미를 조금씩 느꼈다 더구나 기존 연구를 따르지 않고 내 식대로 하나의 사상을 재구성하는 것, 남이 가지 않았던 길을 가며 현재를 조망할 수 있는 관점을 드러내는 것, 그것을 다른 사람과 토론하고 인정을 받는 것, 이런 경험들은 내가 공부를 그만둘 수 없는 이유들을 하나씩 만들었다.

 

2. 풀뿌리운동과의 만남과 성장하는 삶

석사학위를 받고 군대를 다녀온 뒤에는 집안 형편상 마음 편히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취직을 할까 고민도 했지만 왠지 석사논문을 썼을 때의 성취감과 자신감이 자꾸 떠올랐다. 내가 그런 인정을 다른 곳에서도 받을 수 있을까? 그래서 다시 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짜여진 학문의 틀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게 망설여졌지만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사는 직장생활보다 궁핍하고 힘들어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처음에는 제도화된 학문 속에서도 변화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거라 믿음을 가졌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에 대한 믿음과 학문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언제나처럼 그 원인을 나 밖의 것에서만 찾았던 것 같다. 희망은 내 머리 속 이론으로만 존재했고, 가슴은 사람들과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미련과 약간의 호기심으로 무리하게 시작했던 박사과정 생활은 냉소와 무관심으로 채워졌다. 아나키즘과 비판이론가들의 사상은 그런 냉소를 정당화하는 무기력한 이념으로 변해갔다.

 

그래서 그 때는 학과공부보다 그냥 도서관에서 아무 책이나 빌려서 읽는 게 즐거웠다. 쇼핑하듯이 서가를 빙빙 돌며 책을 구경하다가 눈에 띄는 제목의 책을 빌려서 읽었다. 공부하는 사람들의 욕심 중 제일 큰 것이 책 욕심이지만 여건상 책을 살 여유가 없었기에 나는 매번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어야 했다. 대학원 등록금도 비싼데 책이라도 왕창 신청해서 읽어야지 생각했고, 책을 가지지 못하는 욕심은 책을 정리해서 기록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예전에는 책을 사서 읽고 독서카드를 만들었지만 그때는 보고난 책을 도서관에 반납해야하니 컴퓨터에 책의 주요 내용과 그것에 대한 내 생각을 일일이 타이핑했다. 필요한 책을 그때마다 볼 수 없어 불편했고 읽은 내용을 일일이 컴퓨터에 치는 게 참으로 고생스러웠다. 하지만 그렇게 정리된 책이 열 권, 백 권, 이백 권을 넘으면서 그 정리들은 내게 큰 재산이 되었다. 불편함은 어느덧 공부하는 ‘습관’이 되었고 ‘공부하는 사람은 어떠어떠해야 한다’라는 고정관념에서도 벗어나게 되었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으며 정신은 자유로워졌지만 내 몸은 여전히 무거웠다. 한국사회를 예리하게 분석한 책들이 거의 없다보니 사유의 힘은 지금 이곳보다 저기 먼 곳이나 이전 시대를 헤맸다. 그러다 2001년도 여름, 우연히 찾아간 풀뿌리주민활동가 워크샵은 내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다소 투박하지만 체험으로 다져진 활동가들의 단단한 이야기가 내 머릿속 고대 아테네 광장을 밀어내고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책에서 읽던 내용들을 운동과정에서 이미 몸으로 익혀 온 활동가들의 모습을 보며 책만이 아니라 현실 속에도 길이 존재하고 있다는 지극히 단순한 진리를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 때부터 소심함과 낯가림을 무릅쓰고 지역의 풀뿌리 단체들을 돌아다니며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러면서 나는 희망의 구체적인 상을 그릴 수 있었다. 만일 한국의 중앙정치와 권력, 그것이 왜곡해 온 민주주의에 조그만 기대라도 품고 있었다면, 나는 그런 희망을 그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희망을 포기한 상태였기에 새로운 희망의 가능성을 덥석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니 삶은 참으로 묘하다.

 

구나 지역을 돌며 보고 들었던 활동가들의 모습은 내가 고민 없이 습관적으로 읽어 온 책의 내용과 무관하지 않았다. 현실에 없는 것이라 여겼던 판타지가 현실 속에서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미국의 사상가 아이리스 영(Irish Young)이 얘기했던 소통민주주의(communicative democracy)는 생활협동조합 활동가의 삶으로 구현되었고, 하버마스(J. Habermas)의 공론장은 평범한 사람들이 사랑방과 거리에서 나누는 수다와 생활로 드러났다.

 

지금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동네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세운 철암과 부산 반송, 대전의 도서관은 책을 보는 공간을 넘어 지역공동체의 소통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광주, 울산, 대전의 참여예산제는 시민들이 예산이라는 전문적인 영역에서도 자기 몫을 다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부안에서는 유채꽃으로 바이오디젤을 만들고 햇빛발전소로 전력을 생산하는 에너지농업이 활성화되고 있다. 전북 진안은 귀농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한 보금자리가 되고 있고, 소비자생활협동조합과 여러 사회적 기업들은 도시와 농촌을 잇는 대안적인 유통망을 만들어가고 있다. 안성과 원주의 의료생활협동조합들은 지역공동체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고, 대전한밭레츠는 지역화폐를 활성화시키며 관계의 그물망을 이어가고 있다. 나조차도 불가능한 꿈이라 여겼던 아나키즘의 공동체가 이미 우리 현실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 희망은 이론이 아니라 현실 속에 있었다. 다만 그것의 의미를 몰랐기에 내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활동가들과 시민들의 말과 행위를 볼 때마다 내 머리 속에는 여러 사상가들과 그들의 핵심 개념들이 떠올랐다. 그런 희망의 힘과 직업병 덕택에 나는 손을 놓고 있던, 내게 의미없다 여기며 차일피일 미루던 박사논문을 쓰리라 마음을 먹었다. ‘풀뿌리 공론장에 대한 이론적 고찰’이라는 박사학위논문은 왜 풀뿌리가 희망인지를 설득하기 위해 태어났다. 여러 활동가들이 몸소 보여준 그 희망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나는 희망의 근거를 만들 뿐 아니라 그 희망을 더 부풀리기 위한 내 나름의 방법을 찾고 싶었다. 풀뿌리운동을 사회운동의 한 흐름이 아니라 조금 더 근본적인 사상으로 발전시키고 싶었고, 그것이 연구자로서의 내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과정이 마냥 즐거웠던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운동을 펼치는 사람들 앞에서 학문이라는 건 공허하고 얄팍할 뿐 아니라 때때로 경험지(經驗知)를 무시하는 오만한 것이었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이 왜 현장에 오냐는 질문을 계속 들어야 했고 낯선 시선을 견뎌야 했다. 무정부주의라는 과격한 말로 번역되는 아나키즘을 입에 담기조차 어려웠다(지금은 조금 달라졌지만). 더구나 풀뿌리운동은 아이와 가족, 일상생활을 중심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그런 일상을 갖추지 못한 비혼(非婚), 스스로 생산하지 못하는 존재인 지식인은 현장에 다가서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었다. 머리로는 이해를 해도 마음을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나는 풀뿌리 현장을 떠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본 희망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그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계속 고민했다. 처음에는 풀뿌리운동의 활동을 기록하는 사람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참여예산제도처럼 풀뿌리운동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제공하고 지원하는 연구자로 역할을 확대시켜 갔다.

 

그 과정에서 부딪친 또 다른 어려움은 현장에서 느낀 고민을 논문이라는 틀로 정리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풀뿌리민주주의나 풀뿌리운동에 주목하거나 그 의미를 밝히려는 연구는 거의 없고, 이는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기존의 사회운동이나 시민운동, 사회주의운동, 민족주의운동을 논문의 틀에 담은 연구들은 있었지만 풀뿌리운동은 그렇지 않았다. 더구나 내가 배운 학문이란 유명한 인물이나 영웅, 사상가를 따라잡는 것이지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위대함을 깨닫고 공적인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선거 때 표를 던지는 유권자로서나 가치를 인정받을 뿐 그 자신의 고유성을 드러내지 못했고, 연구자들도 그 사람들에게 주목하지 않았다. 간혹 한나 아렌트(H. Arendt)나 니체(F. Nietzsche)를 만나고 나중에는 함석헌, 장일순같은 뛰어난 사상가를 만나기도 했지만 각기 다른 삶의 궤적을 그린 사람들을 하나의 논문에 담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쓴 방식은 풀뿌리운동의 고민을 정리한 뒤에 그런 고민과 연관되거나 고민의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상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박사(博士)란 것이 넓은 시야보다 좁은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의견을 요구받고 풀뿌리운동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운동의 의미와 사상을 밝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작업은 쉽지 않았다. 결국 아렌트와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 ‘풀뿌리공론장’이라는 개념을 재구성하는 것으로 박사논문의 목표를 수정했다. 서양철학을 기본논리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 난처했지만 현장의 고민을 중심으로 그것을 재배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 목표를 제대로 충족시켰는지는 의문이지만 논문의 마지막 장에는 경기도 과천시의 풀뿌리운동 사례를 대입해서 현실과의 접점을 최대한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렇지만 박사논문은 아직도 치수가 어긋난 옷을 입은 사람처럼 자연스럽지 않은 느낌을 준다. 풀뿌리활동가들에게 바치는 논문이었음에도 정작 활동가들은 서양사상의 개념들로 구성된 내용을 어려워했다. 여러 사상가들의 생각을 충분히 녹여내지 못한 나의 부족한 내공의 탓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한계를 느꼈다. 내 목소리로 얘기하려면 논문이라는 낡은 틀에서 벗어나야 했다.

 

사실 애시당초 학문이 현실에 대한 관심과 고민에서 시작했음에도 지금 우리는 책을 책으로만 대한다. 과거의 사상가들이 미래의 우리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책을 기록한 것은 아닐 터이니 우리는 과거의 지혜를 현재에 유추할 뿐이다. 그러니 과거의 것에서 정답을 찾을 수는 없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정답이란 원래 불가능한 것이다. 결국 현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연구는 이미 지나간 과거를 낭만적으로 회상하거나 허황된 미래를 예측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논문을 쓴다는 핑계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있는 동안에도 현실은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꾸준히 관심을 기울이며 소통하지 않으면 내가 의지해야 할 현실의 근거들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연구자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고 먼 길을 가야 한다. 왜냐하면 활동과 연구를 병행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활동가는 자신이 맡은 과제를 성공시키는 과정과 그 결과로 평가를 받지만 연구자는 활동만이 아니라 그 활동을 기록하고 보편적인 언어로 해석하는 과제를 맡는다. 보편적인 언어로 해석하려면 그와 관련된 다른 연구나 책을 공부해야 하고 그에 맞게 활동을 다시 정리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그 둘을 모두 잘 하면 좋겠지만 하다 보면 어느 한 곳에 구멍이 생기기 마련이다.

 

한 때는 그 짐이 버거워 추상의 세계로 도피하기도 했지만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독일의 작가 미카엘 엔데(M. Ende)의 소설 『모모』를 떠올렸다. 모모의 가장 뛰어난 능력은 사람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서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시간도둑들은 그 지극히 평범한 능력을 가장 경계했고 결국 모모에게 지고 만다. 그런 모모를 생각하며 내 마음도 조금 편해졌다. 그래, 내가 얘기를 하고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냥 듣고 얘기를 나누는 것으로 만족하자. 굳이 내가 답을 내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스스로 답을 찾아갈 수 있다고 믿자. 그러자 그토록 부족했던 시간이 아주 넉넉하게 채워졌고 내 삶을 돌아볼 여유도 생겼다.

 

이런 믿음을 얻기까지 4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허나 늦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금이라도 내 삶을 성장시키며 살게 되었으니 기쁠 뿐이다. 다만 과제는 남은 시간 동안 이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밀고 나가는 일이고 더욱더 기름지게 거름을 뿌리는 일이다. 믿고 바라는 것만큼 내 삶이 그렇게 움직이고, 그런 실천이 더 나은 공부로 이어지길 바랄 뿐이다.

 

 

3. 서로 보살피는 삶과 지식인으로서 뿌리내리기

나와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려 하는 것은 외부의 사상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외부의 것들은 우리 내부의 차이이기도 하고 우리 모습을 드러내는 거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외부는 중요하다.

 

다만 지금 우리는 거울의 매혹과 아름다움에 빠져 자기 모습을 잊고 싶어 하기 때문에 문제이다. 『백설공주』의 왕비처럼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는 거울의 인정을 받으려고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버리고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어떤 특별한 모습으로만 드러나길 원한다. 우리는 자신을 버리고 ‘아침형 인간’, ‘몸짱’, ‘짐승남’같은 틀로 자신을 보이고 싶어한다. 하지만 삶이란 어떤가?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하고, 선하고 악한 것이 뒤엉켜 있다. 피카소의 그림이 보여주듯이 그 모습이란 여러 단면들이 만들어낸 기이한 형태이고 남들이 보면 괴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런 조작된 정체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모습을 대면하지 못한다면 내 삶을 살기가 어렵다. 시간도둑들에게 빼앗긴 시간을 되찾고 우리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좋은 삶은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특히 전통적인 생활방식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일하는 것과 즐기는 것이 분리되지 않던 시절, 공동체는 좋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었다. 국가의 복지가 아니라 공동체의 생활이 서로 보살피는 삶을 가능하게 했다. 일터와 삶터가 분리되지 않고 안과 밖이 경계를 이루면서도 다양한 삶들이 자연스레 뒤섞였다. 가령 옛날 집집마다 있던 마당은 개인적인 공간이면서 동시에 집 안과 집 밖을 연결하는 공간, 가정과 일터를 연결하는 공간, 가족과 마을을 연결하는 공간이었다. 그런 다양한 공간들을 통해 사람들의 삶은 자연스럽게 뒤섞일 수 있었다.

 

물론 과거의 공동체를 무조건 이상적으로 그리고 싶지는 않다. 나는 자연의 생명이 순환하듯이, 인간사회도 그렇게 순환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조금 더 자유롭고 싶은 것은 도시로, 조금 더 뿌리를 내리고 싶은 것은 농촌으로 가야 옳다. 다만 그 둘의 균형이 맞아야 순환이 계속될 수 있는데 지금 우리 사회는 균형이 무너져 있다. 무조건 도시가 좋고 편한 게 옳고 돈의 가치로 환산되는 것만이 인정을 받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연스런 순환의 고리가 끊어져서 삶이 외부의 조건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불안하니까 우리는 자꾸 국가나 시장에 매달린다. 정부가 나서서 무언가를 해주길 바라고 기업이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길 원한다. 시장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필요하고, 국가가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시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허나 그런 주장은 공허한 바람이고, 우리 현실에서 뼈저리게 느낄 수 있듯이 국가와 시장은 한통속이다. 그들은 풀뿌리들의 삶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국가에 집착할까? 좋은 정치인, 좋은 정당이 우리의 삶을 지켜줄 수 있다고 진짜로 믿는 것일까? 진보적인 사회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은 유럽의 복지국가를 많이 얘기하지만 나는 복지국가가 진보적이라고 믿지 않는다. 식민지를 가혹하게 착취했던 제국주의 없이 유럽의 복지국가가 가능하기나 했을까?

 

역사가 하워드 진(Howard Zinn)이나 조셉 폰타나(Josep Fontana)의 책을 조금이라도 읽어보면, 서구문명이란 착취의 흔적일 뿐임을 알 수 있다. 소위 선진국들은 식민지의 민중들을 미개인이나 야만인으로 몰아서 그들의 영혼을 빼앗고 하얀 가면을 씌웠다. 그들은 땅과 자원을 빼앗을 뿐 아니라 생활의 기반 자체를 파괴했다. 우리가 먹는 커피, 초콜릿, 설탕 등 일상 곳곳에 제국주의 지배의 역사가 숨어 있다. 여름철 폭우와 겨울철 폭설, 황사와 사막화 등 기후변화에도 그 지배의 흔적이 숨어 있다. 그리고 지금도 선진국들은 전 세계의 가난한 아이들과 여성들에게서 많은 자원과 생명을 빼앗고 있다. 그런 역사와 현실을 무시하고 우리가 그들의 길을 따라야 할까? 설령 우리가 그 길에 오를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러기 위해 또 다른 타자를 희생양으로 삼고 그들의 풀뿌리 공동체를 짓밟아야 할텐데 우리의 삶이 행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식민지는 우리에게 지나간 과거가 아니다. 과거에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사람들의 가슴에는 남모를 상처가 새겨져 있다. 흔히 이를 정신적 상처인 트라우마라 표현하지만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식민지의 상처는 심리적인 것일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심리학자 파농(F. Fanon)이 말했듯이, 식민지 사람들은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 저항하면 어떤 일을 당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고만고만한 주변의 사람들을 괴롭히며 대리만족을 얻고 지배질서를 대물림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국가를 버리라는 건 자신을 버리라는 것과 똑같다.

 

더구나 식민지의 경험은 우리에게 민족과 국가의 일치를 가져왔다. 공동체의 경계가 민족, 국가와 겹쳐지면서 사람들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동일시했다. ‘민족=국가’라는 공식이 자연스레 자리를 잡았다. 국사를 배우고 군대를 다녀오고 스포츠경기에 열광하고 국민가수, 국민드라마를 보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국민임을 깨닫는다. 이런 경험의 공식을 깨지 못한다면 우리는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내게 아나키즘은 이런 지배의 역사를 깨고 풀뿌리들의 목소리를 드러내며 식민지를 벗어날 중요한 방편이다. 오쿠다 히데오가 『남쪽으로 튀어』에서 말했듯이, 아나키즘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이념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도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념은 과거가 누적되어 현재로 흘러나온 흔적이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과 1945년 해방까지 일본과 한반도, 중국대륙을 넘나들던 사상을 아나키즘만으로 정리하고 싶지는 않고 다만 그 실타래를 풀기 위해 아나키즘이라는 하나의 실을 계속 따라가고 있다. 아나키즘이라는 이념은 아나키스트들이 추구했던 그 다양한 삶의 단면들일 뿐이고, 내게 그것의 이름은 대동사상이기도 하고 풀뿌리이기도 하다. 도를 도라고 부르면 도가 아니듯, 아나키즘도 하나로 굳어지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꽃을 피웠으리라 믿는다.

 

설령 그 과정에서 이념의 흔적을 찾더라도 그것이 자동적으로 세상을 바꾸리라 믿지 않는다. 삶으로 녹아들지 못한 이념은 꽃을 피울 수 없기 때문이다. 가정과 학교, 마을, 공장, 구청, 시청, 국회, 청와대에서 구체적인 삶으로 자기를 드러내지 못하는 이념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무한경쟁의 규칙에 쫓겨 우정도, 사랑도 모두 뒤로 미루는 사회에서 이념은 힘을 가질 수 없다. 이념이 꽃을 피우려면 국가나 자본이 시키는 일을 거부하면서도 우리가 생활하고 삶을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옛날 마을 공동체에서는 과부나 고아, 장애인도 굶어죽지 않았다. 간혹 그렇게 죽는 사람이 있으면 그 마을 전체가 비난을 받았다. 지금은 옆집에서 사람이 죽어 썩어가도 아무런 비난을 받지 않지만 그 때는 그렇지 않았다. 왜일까? 지금 우리는 서로 아무 것도 나누지 않고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아 윤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환대의 사상가 피터 모린(P. Maurin)의 “아무도 부유해지려고 하지 않으면 모두가 부유해질 것”이고 “모두가 가난해지려고 하면 아무도 가난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간단한 윤리조차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앞으로 하고 싶은 공부는 이념을 윤리로 다듬고 내 자신도 그렇게 사는 것이다.

 

평생 공부를 계속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받는다면 그러리라고 대답할 듯하다. 어차피 공부란 것이 책만 읽는 게 아니라 일상을 사는 것이라 생각하면 평범한 일상에도 가르침과 깨달음은 숨어 있다. 숨은 진리를 찾는 건 퍼즐을 맞추는 것만큼 흥미로운 일이다. 그리고 내가 얻은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과정도 아주 즐겁다. 그동안 떠도는 지식인으로 살았다면 이제는 모모처럼 마을에서 살고 싶다.

 

그리고 나이를 먹으면 수도권을 벗어나 지방에 내려가 지역의 고유한 지식을 몸에 익히고 싶다. 지금 한국의 지식사회는 서구중심일 뿐 아니라 서울 중심이다. 서울로 수입된 학문이 지방으로 확산된다. 서울에서 인정을 받아야 소위 ‘전국구’로 이름을 내걸 수 있으니 지식인들도 서울로 입성하려 발버둥친다. 그래서 나는 수도권을 떠나고 싶다. 서울을 떠나야 내 속의 생각과 감정의 힘이 더 강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 내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경험시켜주는 우리 각시와 아이도 조금은 나은 환경에서 성장하리라 믿는다. 우리 가족이 도시의 무미건조하고 단절된 환경 속에서 성장하며 그런 감성과 생각을 익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쥔 것을 놓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쥘 수 없다는 점을 가족과 함께 깨닫고 나누며 살고 싶다. 내가 평생 해온 공부는 그렇게 나를 비추며 나를 이끌어 줄 것이라 생각한다. 작고 사소하지만 깊게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인격을 뜻하는 영어 person의 어원은 persona이다. 페르소나는 무대에서 배우가 쓰는 가면을 뜻했다. 가면을 씀으로써 배우는 다른 인격을 가질 수 있고, 관객은 배우가 아니라 배역에 집중할 수 있었다. 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이 점에 착안해 시민이 공개된 정치무대에서 차별을 받지 않으며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가면을 중요한 권리로 인정했다. 여기서 가면은 자신을 은폐하는 도구가 아니라 차별을 받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인 셈이다. 현실세계의 약자들에게는 강자와 동등해지기 위해 때때로 이런 가면이 필요하다.

 

한국의 트위터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열악하기로 소문난 출판업계에서 일하는 편집자가 트위터에 ‘출판사 옆 대나무숲’이라는 계정을 만들고 비밀번호를 공개했다. 그래서 누구라도 이 비밀번호로 로그인을 해서 계정에 글을 남길 수 있다. 대나무숲이라는 명칭은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이야기에서 착안한 듯하다. 그 이야기처럼 권력이 무서워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들을 대나무숲은 들려준다.

 

베스트셀러를 만들기 위한 출판사의 사재기 관행과 출판사의 비민주적인 운영, 기자와 저자에 대한 편집자들의 불만 등이 날 것의 목소리로 터져 나왔다. 고상한 척 행세하는 출판사 사장들에 대한 촌철살인(“북한도 삼성도 출판계도 가계 세습을 한다. 난 이 출판사가 좋았던 게 사모는 다른 일 하느라 출근을 안 하고 사장 자녀들이 어려서였다.”), 행사에 대한 불만(“곧 북페스티벌의 계절이 다가온다. 올해도 역시 주말수당 따위 꿈이겠지. 작년엔 밥값도 아까운지, 마감은 자기들이 하겠다고 생색을 내며 (배고파 죽겠는데) 8시 즈음 퇴근시켜 줬었지. 집에 가서 밥 먹으라며.ㅋㅋ”)도 이어졌다. 출판계는 아니지만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리트윗이 폭발했다.

 

‘출판사 옆 대나무숲’의 성공에 힘입어 ‘촬영장 옆 대나무숲’, ‘연구소 대나무숲’, ‘병원 옆 대나무숲’, ‘공연장 옆 대나무숲’, ‘방송국 옆 대나무숲’, ‘IT회사 옆 대나무숲’ 등의 계정이 연이어 만들어졌다. 급기야 ‘성형녀 대나무숲’, ‘시댁 옆 대나무숲’도 만들어졌다. 대나무숲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들을 몇 개만 소개하자면, “수술대에 오를 때마다 세상이 열배씩 친절해진다” “시댁가서 첫 제사지낸다고 전 부치고 나물 삶는데 옆에서 눈치없는 시동생이 시엄마에게 한마디 ‘엄마, 원래 다 사서 했는데 왜 갑자기 집에서 해?’”, “니들끼리 연예정보 프로에서 웃으며 얘기하는 에피소드 ㅋ 우린 니들이 지랄 떤 게 에피소드다” 상대가 눈앞에 있다면, 가면이 없다면 쉽게 꺼낼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대나무숲이 인기를 누리자 알 수 없는 사건도 이어졌다. 올라온 트윗이 갑자기 삭제되거나 계정 자체가 사라지는 일(소위 계정폭파)이 생겼다. 비밀번호가 공개된지라 사장님이나 관련자들이 지웠다는 등의 괴담들도 떠돌았다. 하지만 인터넷의 특성상 지우고 폭파당해도 금방 복구될 수 있기 때문에 대나무숲의 폭로는 당분간 계속될 듯하다.

 

그런데 어떤 회사의 누가 올렸나에 대한 추적이 시작되자 스스로 트윗을 삭제하는 일도 생겼다. 사실 완벽하게 안전한 공간은 없고, 가면을 써도 흔적은 남는다. 가면이 보장하는 조건은 말할 수 있는 것이지 어떤 배역을 맡을 것인가는 배우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대나무숲은 어느 곳에서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면 피해를 볼 게 뻔한 사람들의 공간이다. 그러니 대나무숲에서 어느 정도의 잡음은 피할 수 없고 원래 민주주의는 그렇게 시끄러운 것이다.

 

명절날 스마트폰을 들고 트위터에 접속하는 사람들을 경계할 지어다. 어떤 얘기가 올라갈지 모르니. 그리고 ‘청와대 옆 대나무숲’이나 ‘법원 옆 대나무숲’이 등장할 날을 나는 기다린다.

지난 18대 국회는 경범죄처벌법을 개정해 ‘공공장소에서 구걸을 하여 다른 사람의 통행을 방해하거나 귀찮게 한’ 행위를 처벌하도록 했다. 2013년 3월부터는 타인의 통행을 방해하거나 귀찮게 한다는 모호한 이유로도 10만원 이하의 벌금 또는 구류형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한적한 곳에서 구걸을 하란 말인가?

지난 5월 서울지방경찰청은 ‘주폭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처음에는 폭주족을 잘못 쓴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술의 힘을 빌려 상습적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라 한다.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서울에서 주폭 1000명만 잡으면 세상이 확 달라질 거라 말했고, 31개 전담팀을 구성해서 이미 100여 명을 구속했다고 한다. 술 마시다 보면 큰소리도 나오고 타인과 충돌할 때도 있는데, 이제 그 치기는 범죄로 규정된다. 이제는 해수욕장이나 공원으로 놀러 가서도 술을 마시려면 경찰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지난 6월 경기경찰청은 골목 조폭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집중 단속해 지금까지 1637명을 검거했다고 한다. 시장이나 광장에서 주변 사람에게 욕설을 하거나 행패를 부린 사람도 체포되었다고 한다. 물론 공공장소에서 타인을 괴롭히는 건 잘못된 일이지만 그 사람을 조폭이라 부르며 처벌하는 게 맞는지, 경찰이 그런 해석 권한을 가지는 게 맞는지, 아무런 합의가 없었다. 이제 공공장소에서는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만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경찰이 자신을 ‘짭새’라 부른 시민들을 모욕죄로 고발하는 일도 늘었다. 법원도 이를 받아들여 연이어 벌금형을 선고하고 있다. 뭔가 부당하다고 느낄 때에도 경찰에게 반드시 예의를 갖춰야 한단 말인가?


   
ⓒ난나 http://www.nannarart.com/sisain.html
( '까칠거칠 삽화를 구매하고 싶으면 클릭하세요')
이런 현상에서 공통되게 드러나는 건 ‘공권력의 과잉’이다. 경찰이 시민의 일상에 개입해 그 행위를 판단하고 처벌하려 든다. 합의로 해결될 일이 처벌 대상으로 변한다. 특히 구걸하고 술 마시고 소리 지르며 살아온 사람들, 사회에서 배제되어온 사람들은 언제든 처벌받을 수 있다. 곧 배제될 사람들은 처벌되는 공포를 느끼며 알아서 기어야 한다.

문제는 이런 과잉이 언제나 결핍을 동반한다는 점이다. 컨택터스로 대표되는 용역회사들의 폭력은 이미 공권력의 통제를 벗어났고, 경찰은 이 폭력을 묵인해왔다. 사실 공권력이 사적 폭력을 묵인하거나 그와 결탁해온 역사는 독도 문제만큼이나 뿌리가 깊다. 그리고 1990년 노태우 정권의 ‘범죄와의 전쟁’이 민생 치안과 조직폭력 소탕을 내세웠지만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잡아들이고 경찰의 총기 사용을 장려하는 논리로 활용되었듯이 과잉과 결핍은 동전의 양면이다.


안전을 빌미로 공포 조장

도대체 경찰은 뭐하는 거냐며 비판하는 것이 그들의 과잉을 정당화시키고, 안전을 빌미로 공포가 조장된다. 생활공간을 분할하여 ‘깨끗한 지배’를 실현하려는 전략이 폭력으로 뒷받침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서는 결핍으로, 노동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권리에 대해서는 과잉으로 대하는 경찰이 공(公)권력을 자처한다.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를 결정할 권한이 시민의 손에서 벗어나고 있다. 공권력의 정당성은 그 힘을 사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힘이 구성되는 방식에서 나오는데, 지금의 상황은 우리가 공권력의 행사에만 관심을 쏟도록 만든다.

만일 권력이, 그 정당성을 시민들의 동의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서 끌어내려 한다면 시민들은 그 권력을 버리고 새로운 권력을 구성해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건 좋은 경찰의 ‘우연한 출현’이 아니다. 우리는 시민의 통제를 받는 공권력을 원한다. 경찰이 시민을 관리하려 드는 게 아니라 시민이 경찰을 관리하기를 원한다. 이번 대선에서 우리가 고민할 바도 이것이 아닐까?


 

 

 요즘 뜨는 키워드는 마을이다. 여러 지방자치단체들이 마을과 관련된 사업들을 진행하고 기업들도 마을과 관련된 이미지를 심심찮게 광고에 활용한다. 서점에 가도 마을과 관련된 책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애타게 마을에 매달리는 건 공동체라 상상해왔던사회관계의 허약함을 잘 드러낸다. 경쟁에 치여 쓰러져도 손 잡아줄 이 없고 집 앞 엘리베이터만 타도 불안하고, 아이들을 혼자 내보낼 수 없는 시대가 아닌가.

 

 불안의 시대이니 그 절박한 마음은 이해되지만 마을의 관계와 마을에서 가능한 삶을 손쉽게 구성할 방법은 없다. 그러다보니 억지가 생긴다. 예를 들어, ‘마을 만들라는 말이 지금도 유행하고 있는데, 과연 누가 마을을 만들 수 있을까? 마을을 만들겠다는 사람들은 대체 누구일까? 하루 종일 밖에 나가 일하고 밤늦게 들어와 잠만 자는 수도권 베드타운의 주민들이 어떻게 마을을 이룰 수 있을까? 구도심과 신도심이 거의 분리된 경기도 신도시들에서 마을은 어떻게 가능할까? 마을을 만들겠다는 욕심에 앞서 이런 물음들에 먼저 답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작은 공동체를 외치며 마을을 쪼개고 쪼개어 실제로는 있던 관계마저 깨놓고선 마을을 만들었다고 우기는 건 억지이다. 건축도면처럼 마을을 물리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풍부한 관계와 밀도, 공생과 환대의 가치를 가진 마을을 뚝딱 만들어낼 방법은 없다.

 

 온갖 자원을 쏟아 부어 그럴싸한 모양을 만들어낼 수는 있겠지만 몇몇 사람들의 눈에 아름다운 마을을 만드는 건 더욱더 위험한 일이다. 그런 마을은 생활의 근거지가 아니라 욕망의 실현지라서 요건에 맞지 않는 사람을 몰아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더불어 살기 위한 관계보다 혼자 더 잘 살기 위한 방편으로 마을이 얘기된다. 내가 사는 공간에 무엇무엇이 더 있어야 한다는 논리, 더 편리하고 효율적인 삶을 위해 마을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마을 담론에 똬리를 틀고 있다. 그런데 나만 안전하면 그곳이 마을일까? 그렇다면 CCTV와 민간방법회사의 장비로 둘러싸인 곳에도 마을이 있을까? 온갖 잡무를 대신해주는 용역노동자들 없이 며칠도 버티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그들을 투명인간으로 만드는 아파트도 마을일까? 이방인을 환대하지 않는 공동체가 마을이라 불리는 게 옳을까? 이런 물음에 답하지 않고 마을을 만들었다 자신하는 건 자신들만의 안전한 공간을 만들려는 폭력과 다를바 없다.

 

 우리 시대 마을이 가진 모순은 지방으로 눈을 돌리면 더 분명히 드러난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한창 마을 만들기에 관한 논의가 한창이라면, 경남 밀양과 제주 강정에서는 마을이 몰락하고 있다. “요대로 살다가 죽도록 해 달라는 절규가 마을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마을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제목을 권정생과 소박한 마을이라 짓고 서는 언제 선생의 얘기를 꺼낼까 궁금하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한 얘기들은 권정생 선생이 살아계셨다면 응당 하셨을 불편한 이야기이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권정생 선생만큼 관계와 마을을 많이 이야기한 사람은 없다. 권정생 선생의 이야기 어느 것에나 관계와 마을이 등장하고 선생만큼 마을과 공동체의 의미를 강조한 사람은 없다.

 

 그런데 권정생의 마을은 성공한 사람들이 으스대는 마을이 아니라 홀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부서져 내려앉으면서도 모여 살아가는 마을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기에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때로는 자기 것이 부족하다고 아웅 대면서도 같이 살아간다.

 

 마을에 모여 사는 사람들이 항상 행복한 것도 아니다. <몽실 언><한티재 하늘>에서 묘사되는 마을은 갈등과 폭력이 사라진 유토피아가 아니다. 현실의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사는 마을이다. 다만 그 공동체는 각자의 과잉된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삶을 지탱하고 생명을 지키는 공동체, 지금 이대로 살도록 내버려두라고 얘기하는 공동체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먹는 것 입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잘못된 향락은 더 큰 고통이 따른다는 것,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것은 푸른 하늘 밑에서 여덟 시간 일하고 이웃과 더불어 가난하게 사는 것이라는 믿음, “이미 주신 것을 가지고 함께 나눠먹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라는 믿음을 따르는 마을이다. “가난한 자에게 필요한 것은 그 가난한 자 곁에서 함께 가난해지는 것 뿐이고 마을에 필요한 것은 부족한 것은 부족한 대로 받아들이며 함께 살려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노동과 생활이 바뀌지 않는 이상, 그에 기반을 둔 우리의 가치가 소박해지지 않는 이상 마을은 이루어질 수 없다. 마을과 함께 키워드가 되고 있는 귀농이나 귀촌도 마찬가지이다. 선생의 말처럼 MBC드라마 <전원일기>에 나오던 농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농촌은 30년 전까지는 가능했지만 지금은 절대 아니다. 고샅길에 거위가 꽥꽥거리며 다니지도 않고 아이를 핥아주는 삽사리(토종개)도 없다. 개는 모두 외국종 송아지만한 도사견 같은 큰 것이 아니면 발바리라고 부르는 작고 앙칼진 개뿐이다. 그것도 모두 목을 매달아놓고 키운다. 고샅길엔 경운기가 다니고 승용차와 트럭도 다닌다.” 살기 좋다고 알려진 농촌 마을의 상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웃과의 관계를 불편해하고 자동차를 포기하지 않는 곳에 마을이 자리 잡기는 어렵다.

 

 

 

 

 하물며 농촌의 상황이 이럴진대 도시의 상황은 어떨까? 선생은 농촌 없이 도시가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제 한미FTA가 본격화되면 농촌의 상황은 더 어려워지고 선생이 우리 인간들의 삶의 근본이며 전부라고 믿었던 농업은 더 어려운 환경에 놓일 것이다. 길 떠난 사람을 위해 밥 한 그릇을 남기고 자연의 생명을 위해 고수레와 까치밥을 남기던 전통 역시 그와 더불어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엇을 믿고 마을을 얘기하는 걸까?

 

 그런 점에서 지금 떠도는 마을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만들어진 환상에 가깝다. 여전히 우리는 농촌이 사라져도 도시에서 마을이 가능하리라 믿고 많은 프로그램과 돈, 사람만 있으면 마을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이런 환상이 마을의 사라짐에 따른 우리의 결핍감을 거짓되게 채워주고 우리의 감각을 둔하게 만들며 지금의 팍팍한 현실을 지속시킨다는 점이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사는 요지경 세상을 떠받칠 뿐이다.

 

 권정생 선생은 마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에 대한 자각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더불어 지금 우리가 마을을 노래하는 이유에 관한 지속적인 성찰을 요구했다. 이런 자각과 성찰 없이 마을의 이미지만 강요하거나 그 이미지만 팔아먹는 건 공동체의 파괴를 더욱더 가속화시키고 소수의 문화정치만을 부추길 가능성이 높다. 그곳에서는 관계로 풀리지 않는 문제를 돈과 힘으로 밀어붙이는 어리석음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곳은 결코 마을일 수 없다.

권정생의 글을 일부러 찾아서 읽지는 않는다. 원고지에 꾹꾹 눌러쓴 언어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끔씩은 만수산 드렁칡처럼 좀 얽혀 살아도 될 터인데 그는 죽는 순간에도 자기 원칙을 지키며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사람은 못 되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고 다짐하는 우리에게 사람의 삶만을 말하기에 권정생의 글은 불편하다.

그래서 권정생의 사상을 평가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도 몇 번이나 책을 펼쳤다 덮었다 했다. 몇 페이지 읽고 마음이 무거워져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권정생을 자꾸 성인(聖人)으로 만드는 것은 그가 원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의 앎을 다루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권정생에 관한 이런저런 해석에 하나의 해석을 더 보태려 한다.

이 글은 권정생의 사상을 되짚어보려 한다. 「몽실언니」나 「강아지똥」의 작가 권정생보다 「팥죽 할머니」의 작가 권정생에 주목하려 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따뜻한 인간애나 자기희생보다 모순을 드러내고 바로잡으려는 반역자로서의 모습에, 애국과 국가를 반대한 반역자로서의 모습에 주목하려 한다. 그가 생전에 무엇을 불편해 했고 어떻게 반역하려 했는지를 말해야 권정생의 사상이 좀 더 온전해질 것 같다.

 

1. 사람의 사상

건강한 것이 어떤 건지 잊어버렸다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권정생의 몸은 평생 고통을 겪었고, 가족과 친구, 이웃들의 잇따른 죽음도 그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의 글 어디서나 고통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고통을 겪는 사람은 고통에서 무조건 벗어나려 하기 마련인데, 권정생이 택한 방법은 그 고통과 함께 사는 것이었다. 고통을 짊어진 채 산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 고통을 같이 짊어질 사람을 찾아 나서는 것, 그것이 그의 과제였다. 누구라도 피하고 싶을 그 고통을 대면하고 살았기에 그를 보는 이의 마음은 한편으론 감동을, 다른 한편으론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런데 이런 고통이 권정생 개인의 고통은 아니었다. 이 고통은 지금도 무수한 죽음과 고통을 대면해야 하는 한국사회의 고통이기도 했다. 권정생 스스로도 이 고통을 개인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고통은 벗어나면 안 되는 것이기도 했다.

함석헌의 글 중에 「하나님 발길에 채어서」라는 글이 있다. 그 글에서 함석헌은 자신이 퀘이커를 선택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묘사한다. “어떤 때는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스스로 나는 이상주의다 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을 실지로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기보다 어느 의미로는 도리어 너무 알아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안과 밖에 어떻게 먼 것, 나와 남 사이가 어떻게 떨어진 것, 앞이 어떻게 될 것이 너무도 빤히 되어 주저주저 하게 됩니다. 그러노라면 주위의 사정이 나를 몰아쳐서 가야 할 데로 가고야 말게 합니다. 가놓고 보면 역시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하게 되지만, 그것은 결코 내가 한 것 아닙니다. 생각했던 것은 하나도 실현해 본 것 없고 나간 것은 한 발걸음도 내가 내켜 디디었다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를 “이날껏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오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퀘이커가 된 것도 아마 잘돼서 됐다기보다는 잘못돼서 된 것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피할 수 없는 발길에 채인 느낌이 거기 있습니다. 두려움과 화평, 슬픔과 감사, 부끄러움과 자랑의 뒤섞인 것이”

권정생의 절판된 책 중에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종로서적, 1986년)가 있다. 그 책에 실린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라는 글에서 권정생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나사로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한다. “개들에게 헌데를 핥이면서 부자가 먹던 찌꺼기를 얻어먹던 나사로였지만, 그는 하늘나라를 볼 줄 알았다. 그래, 그것이면 족한 것이다. 나는 거지 나사로를 알고부터 세상을 보는 눈을 달리했다. 천국이라는 것, 행복이라는 것,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여태까지와는 거꾸로 보게 된 것이다.” 권정생은 이 글에서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에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 사람을 찾아다니는 사람으로 자신의 변화를 설명하고, 루쉰을 인용해 “아직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어린이가 있을지 모른다. 아이들을 구하라”라고 말한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면서도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처지, 그것이 권정생의 삶이었다.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 굴러가는 삶과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 하늘나라를 보게 된 삶에서 느껴지는 공통점은 숙명이다. 사실 분단과 내전을 경험한 나라에서 평화를 열망하는 퀘이커가 된다는 건 정치적인 자살에 가깝다. 그리고 폭력과 풍요로 “착하게 살 수 있는 곳이 없어진” 걸 알면서도 사람을 찾아 나서겠다는 건 종교적인 순교에 가깝다. 그런데도 두 사람이 그런 선택을 내린 것은 바로 우리의 역사 때문이다. “갈릴리 들판에서 그가 자기 민족의 수난사를 공부했듯이, 우리도 하느님과 함께한 우리의 민족사를 아이들에게 가르칩시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혼자서가 아니라 우리 인간들과의 공동작업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함석헌이 수난사를 공부하며 씨알을 찾았다면 권정생은 그 수난사에서 사람을 발견했다.

공동작업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하느님 나라에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함께할 씨알과 사람이지 제도나 기구 또는 제도나 기구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가 아니다. 수난을 겪어온 사람들에게 또 다른 복종과 굴욕을 강요하는 제도는 반역의 대상일 뿐이다. “나는 지금 20여년 전에 내가 구상하고 꿈꿨던 교회는 벌써 전에 잊었다. 교회는 새삼스레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와 온 우주가 바로 하느님의 교회”라는 권정생의 말은 그가 함석헌과 같은 꿈을 꿨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앞서 인용한 말에서는 당위를 넘어서는 어떤 절박성과 확신이 드러난다. 특히 권정생의 이야기가 ‘사람을 사랑하라’라는 당위를 넘어서는 것은 사랑할 사람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는 절박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절박성과 확신이 맞닿아 있는 이유는 “인간의 눈으로만 보지 말고 하늘의 뜻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존재함을 믿어야 “나의 동화는 슬프다. 그러나 절대 절망적인 것은 없다.”는 그의 말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권정생은 이 절박성과 확신을 품고 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권정생은 하느님과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었을까? 하늘나라를 볼 수 있는 나사로 권정생은 그 나라를 몸으로 살아가는 나라로 묘사한다. “입으로 설교하는 목회가 아니라 몸으로 살아가는 목회자가 있어야 한다. 밭을 갈고 씨뿌리고 김매고 똥짐을 지는 농군이 바로 이 땅의 목회자다. 창세기의 하느님나라는 말씀으로 되었지만 지금은 몸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하느님나라가 다시 창조되고 천국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 몸으로 살지 않고 수천 만번 주기도문만 외운다고 하느님나라가 이루어지는 건 절대 아니지 않는가.” 똥짐을 지는 목회자가 있는 세상, 부정을 규탄하는 용감한 시민이 있는 세상, 좀 더 춥게 좀 더 불편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 세상, 그곳이 바로 하늘나라이다.

그래서 하늘나라로 다가서는 방법은 가난이다. 가난은 몸을 쓰게 하고 불편하게 만들고 때로는 고통을 주지만 그걸 받아들일 때 행복도 찾아온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노동에 있”고 “노동은 가난이 무엇이고 고통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한다. 가난하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고 인간은 행복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가난은 행복의 필수조건이다. 권정생에게 가난은 결핍이 아니었고, 가난은 떳떳한 삶이자 평화와 행복의 기약이자 “함께 사는 하늘의 뜻”이었다. 마냥 행복한 건 아니지만 그 소박한 삶 속에 사람이 존재한다.

그런데 가난하지 않은 우리가, 곳곳에 풍요의 성전을 세우는 우리가 가난한 그의 글을 읽으며 불편하지 않다면 그건 좀 이상한 일이다. 권정생의 글들이 지금껏 그림책이나 동화로 널리 읽히는 걸 보면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을 고를 아이들의 권리를 빼앗고 싶지 않다며 책 소개 티브이 프로그램인 <느낌표>까지 거부했던 권정생인데 우리는 그 권리를 빼앗으며 권정생의 글을 아이들에게 읽히고 있다. 권정생이 강조한 건 몸으로 행복을 느끼는 건데 그걸 머리로만 느끼도록 만드니 모순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성장과 풍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회는 가난조차도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서 진정 가난한 삶을 조롱하는 게 아닐까. 그러면서 권정생의 불편한 이야기는 누구나 받아들이며 감동을 느낄 만한 말랑말랑한 이야기로 해석되고, 권정생이 고통을 견디며 찾아 나섰던 사람은 점점 줄어든다.



2. 애국자 없는 세상


권정생의 사상을 줄여 말하라면 주저 없이 ‘애국자가 없는 세상’이라는 시를 예로 들겠다. 이 세상 어디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평화로울 것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시는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라며 끝을 맺는다.이념은 버릴지언정 애국은 버리지 못하는 우리에게 권정생은 애국자가 될 시간에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라고 권한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사람들, 국사와 국익의 관점에서 세상사를 해석하려는 사람들에게 권정생은 자신이 겪었던 1944년 말의 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의 끔찍한 현실을 들려준다. 그 전쟁의 포화 속에 누가 있었는지, 왜 그들이 죽어야 했는지를. 전쟁의 비극을 몸소 체험한 그였기에 국가에 대한 반대는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생각이 다르고 이름이 다르다고 한핏줄끼리 원수가 되라고 강요”하는 분단상황이야말로 모든 문제의 원천인데, 권정생은 이를 힘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전쟁이란 “더러는 영웅도 되고 뜻밖의 횡재를 얻는 이도 있지만 대부분이 씻지 못할 상처를 안고 비극의 인생을 살다가 끝마”치는 비극일 뿐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전쟁은 단순히 “남침도 북침도 아닌 원격조정에 의한 약소국의 비극”이 아니다. 이것은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지식인의 해석일 뿐이다. 그 사건을 몸으로 살아야 했던 사람은 “아비와 자식이 서로 총구멍을 맞대고 싸우는 전쟁도 전쟁일까? 공비가 되어 숨어 다니는 아비가 있고 그 자식은 멋도 모르고 공비토벌가를 목청껏 불러대는, 그런 잔인한 비극이 또 어디 있을까?”라고 묻는다. 그리고 그 모순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어느 편에도 서지 말라고 권한다. 애국은 전쟁의 다른 얼굴이고, 마크 트웨인이 ‘전쟁을 위한 기도’에서 들려주었듯 전쟁의 깃발은 애국의 열광 속에 휘날리니까.

 

우리의 애국 깃발은 남과 북에서만 휘날리지 않는다. 우리 몸속에 DNA처럼 새겨진 반일감정에 대해서도 권정생은 “벚꽃이 일본의 국화라고 해서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여느 꽃나무처럼 벚꽃도 이 땅에 자라고 꽃피고 시들어 죽어가는 목숨일 뿐”인데 그것을 베어내는 건 또 다른 폭력이 아니냐고 묻는다. 국가주의에 물든 우리의 시선에는 잡히지 않는 생명들이 그의 시선에 모습을 드러낸다.

 

권정생의 글 곳곳에서 생명을 파괴하는 국가를 거부하고 그에 맞서려는 반역의 의지가 드러난다. 예수의 입을 빌어 권정생은 자신의 사상이 “무소유, 무계급, 무정부의 세 가지가 갖춰진 나라”, “국경도 인종차별도 없는 나라”, “모두가 한 형제이며 평등하”고 “아무도 다스리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법칙대로 사는 나라”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마치 꿈에서 덜 깬 듯한 소리같지만 법정스님의 『무소유』가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새누리당이 비정규직 차별금지를 외치는 세상이니 무정부만 실현되면 하늘나라는 멀지 않았다. 보수와 진보를 불문하고 국가의 눈으로, 마치 국가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은 한국 사회에서 권정생만큼 급진적인 사상가는 드물다. 권정생의 문학과 사상이 우리 사회에 절실한 이유는 국가로부터 벗어나 세상을 바라보고 사유를 확장시킬 수 있어서이다.

 

국가에서 벗어난 권정생의 소망은 이웃과 더불어 가난하게 사는 것이었다. “이미 주신 것을 가지고 함께 나눠먹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다. 그것이 인간이 만들어낸 경제정의나 사회주의라는 말로 표현되었을 뿐”이라는 명쾌한 논리는 교회를 세워도 뾰족탑이나 십자가, 간판을 없애고 오두막을 지어 맨마루 바닥에서 세상살이 얘기를 나누고 부처님 말씀, 점쟁이 할머니 말씀, 마을서당 훈장님 말씀도 듣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소망으로 드러난다. 교회가 사람을 찾고 사람에게서 배우는 공간으로 바뀌는 걸 그는 꿈꿨다.

그런데 권정생이 거부한 국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와 달랐다. 권정생에게 국가는 정부체계나 제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국가는 우리의 생활공간 곳곳에 존재한다. 권정생에게는 교회도 국가이고 학교도 국가이고 농촌도 점점 국가로 변해갔다. “이젠 농촌은, 삶의 터전으로서 농촌은 없다. 그냥 먹을 것을 생산해내는 식품생산단지로 변한 것”이라는 말처럼, 먹고 교육을 받고 생활하는 공간이 국가로 변할수록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권정생의 몸부림도 더 강해졌다. 그가 점점 더 완고한 근본주의자로 변신했던 건 그의 탓이 아니라 그걸 강요하는 세상의 탓이었다.

 

그럼에도 권정생을 바라보고 얘기하는 우리들은 그 꿈을 ‘은둔자’로 가둬 놓고 그 삶을 소비한다. 가둔다는 표현이 거북할 수 있지만 우리가 기꺼이 권정생의 편에 서고자 했다면 그가 세상을 계속 불편해 했을까? 평생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 했던 사람이 왜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까? “왜 이다지도 내 곁엔 사람이 없을까? 모두 기계이고, 로봇트야. 가슴도 없는, 돌뭉치거나, 솜뭉치, 아니면 고무풍선들 뿐이야.”라고 한숨을 쉬었을까?

 

“이 세상의 모든 교육은 선하고 아름답게 살기 위한 교육이 아니라, 좀 더 편리하고 풍요하게 살기 위한 교육”이고, “일등을 해야만 돈과 권력을 잡고 행복해진다는 논리”가 판치는 세상에는 그가 숨을 쉴 곳이 없었다. 권정생이 보기 싫어할 만한 끔찍한 세상을 자신이 떠받들고 있으면서도 자기 아이들에게는 강아지똥과 몽실언니의 아름다움을, 권정생의 삶을 얘기하는 건 ‘위선’이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우리가 그를 가둬놓고 그가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세상을 만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건 불편함을 제거한 착한 사람 권정생이 아니라 반역자 권정생이다. 국가에 반역하고 교회에 반역하고 풍요를 강요하는 경제에 반역했던 권정생이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이다.



3. 반역의 언어, 지방의 언어


권정생이 살아있었다면 지금도 많은 눈물을 흘릴 것이다. 약하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강정마을, 두물머리, 밀양, 청도, 삼척, 영덕, 곳곳에서 싸우고 있으니까. 그들이 곧 권정생이고, 농민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사람들이 그의 동지이니까. 언제쯤이면 그들의 눈물이 웃음으로 바뀔 수 있을까?

 

권정생은 전통 이야기를 아이들의 동극으로 각색한 「팥죽 할머니」에 자신의 혁명론을 담았다. 남편과 아들의 원수를 갚아야지, 갚아야지 하면서도 호랑이 앞에서 “힘이 없구나, 차라리 잡아 먹어라. 날 잡아 먹어라”고 외치는 건 이 땅의 농민들이다. “농사꾼을 통째 잡아먹으면 너도 죽는다”는 말에 “난 안 죽는다”고 호언장담하는 것은 바로 힘을 가진 기득권층이다. “힘이 인간을 지배하고 자연을 파괴하며 목숨을 짓밟아 버리는 것이라면 그건 힘이 아니라 바로 악마”라는 권정생의 절규는 그들을 향한다.

 

할머니가 쒀준 팥죽을 먹고 호랑이에 맞서는 것들은 알밤을 제외하면 송곳, 홍두깨, 멍석, 지게이다. 이 모든 것이 일하는 사람들의 도구이다. 팥죽을 먹고 힘을 낸 물건들이 함께 호랑이를 잡는다. 이제는 마음 놓고 농사짓고 무엇도 빼앗기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건 사냥꾼이 아니라 “하늘님은 언제나 농사꾼 편이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연대’이다. 강정마을의 주민들이 쌍용자동차 문제해결을 요구하고 용산참사를 경험한 주민들이 강정평화대행진에 참여하고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이 용산참사의 진실을 밝힐 것을 요구하는 것이 연대이듯, 이 강력한 연대는 무서운 호랑이를 실컷 두드려 패고 강물에 빠뜨려 죽인다. 이것을 보면 권정생은 자신을 희생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독재자와 억압자에게 반역하고 그를 제거하고 해방의 농악, 해방춤을 추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권정생은 억압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도 외부의 힘에 호소하지도 않았다. 「처음으로 하느님께 올리는 편지」에서 도리어 권정생은 “하느님 아버지, 제발 정신 좀 차려 주십시오. 지금은 깨어날 때인데, 하느님께서 도리어 정신없이 나쁜 곳에 이용만 당하고 계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나쁜 사람들의 힘을 거둬 가 주십시오. 진짜 하느님이라고 분명히 보여 주십시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힘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서러운 사람들의 아버지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 주십시오.”라고 요구한다.

 

「김목사님께」라는 글에서도 권정생은 마냥 겸손하고 복종하는 인간이 최고의 가치일 수 없고 겸손과 복종의 교리가 지배의 교리로 바뀌었음을 성찰한다. “사랑 사랑 하다 보니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될 사실까지 덮어 버리고 양가죽을 뒤집어쓴 이리 같은 사기꾼이 되어 버렸습니다. 겸손은 무조건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알량하고 비굴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복종만이 신앙의 도리로 알고 맹종하다 보니, 이젠 마귀의 명령에도 굽신대는 절대적인 착한 인간이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이현주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성서라는 책을 맹신하지 말자. 아닌 것은 아니고, 부당한 것은 부당하다고 분명히 말하자꾸나. 우리는 그래서 비굴하지 말자. 하느님이란 권력 앞에 아첨하는 못난 인간이 되지 말자. 우리는 천국엔 못 가도 영혼을 죽일 수는 없다. 불의가 가득 찬 천국에 가느니보다 깨끗한 지옥에서 살자.”라고 다짐한다. 권정생은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하느님께 제대로 일을 하라고 요구하는 반역자였다.

 

그는 폭력을 바로잡고 농민 편을 대놓고 드는 알밤이 되기를, 송곳, 홍두깨, 멍석, 지게가 되기를 원했다. 다만 “압제자를 향해 피를 흘리는 저항과 투쟁도 해야 하지만, 진정한 혁명은 자신의 삶이 바로서야 한다”며 권정생은 “무력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아닌, 밑바닥에서의 진정한 혁명”을 꿈꿨다.

 

권정생은 평화를 추구했지만 억압을 묵묵히 받아들이지 않았고 마냥 겸손하게 복종하지도 않았다. 권정생은 비슷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권정생은 시내의 한살림 식품가게에서 무공해식품을 산 뒤에 동네에서 자살한 농부를 떠올리며 “진짜 한살림은 이웃끼리 마을사람끼리 서로 사고팔고 주고받으며 살아야 되는데 가까운 이웃은 다 버리고 먼 데서 깨끗한 음식만 먹겠다고 한 것이 정말 잘한 것일까? 먹는 것만 깨끗하게 먹는다고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것일까? 정말 건강을 지킬 수 있는 것일까?”라고 물었다. 실컷 쓰고 편하게 살자는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런 삶을 바꾸지 않는다면 유기농이 무슨 의미일까? 제 아무리 좋은 뜻이라도 기본적인 원칙을 되짚는 권정생의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런 반역의 기반은 점점 사라졌다. “농촌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생명의 원천이며 정신적 고향”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미 농촌은 그런 고향이 아니다. 농촌의 언어였던 사투리는 사라졌고 “옛날 일본 식민지였을 때 우리는 말과 글과 쌀을 함께 빼앗겼듯이 이제 농촌의 말과 식량을 도시에 빼앗기고 있다.”

 

그런 세계에서 권정생이 주목했던 또 다른 반역의 방식은 언어, 즉 시의 언어를 살리는 것이었고, 중심의 언어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의 언어, 토착의 언어로 얘기하는 것이었다. 구비문학이 ‘창작문학의 어머니’일 뿐 아니라 “문화라는 이물질이 전혀 없는 순수한 농민들의 감정과 생각과 삶의 모습”을 반영한다고 생각했기에, 권정생의 작품은 풍부한 사투리를 그대로 옮겼다. 권정생은 매끄럽게 다듬어지기는 했지만 어딘가 거짓되어 보이는 표준어보다 아름다운 사투리를 좋아했다. 표준어는 지역의 자연에 맞춰진 삶을 부끄러워하게 만들고 표준화된 풍요를 강요했기에, 권정생에게 사투리는 의식적인 반역의 도구였다.

 

표준화된 언어로 정리되지 않은 삶 또는 정리될 수 없는 무수한 삶들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토착의 언어였고,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사투리는 반란과 저항의 언어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권정생은 시의 언어를 시들게 하는 자연적인 삶에 대한 이런 부끄러움을 거부했다. 아이들을 시인으로 만드는 건 교육이 아니라 바로 자연이다. “봄날의 비릿한 풋내와 작은 꽃들”, “여름날의 소낙비와 무지개와 지루한 장맛비”, “비지땀을 흘리며 들판에서 일하는 삶의 현장”, “고통의 대가로 얻어지는 가을의 풍성함, 겨울의 추위와 그 추위를 이겨 내는 생명들의 힘찬 인내”, “씨 한 톨 심어 놓고 싹이 트기를 기다리는 마음, 어미 닭이 품은 알에서 병아리가 깨기를 기다리는 마음, 보리 이삭이 패고 씨알이 누렇게 익어 가는 것을 지켜보는 마음”을 느껴야 비로소 시인이 될 수 있다. 시는 단지 몇 줄의 노래를 읊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의 언어라는 권정생의 말은 지금 시대에 반역할 무기가 무엇인지를 또 알려준다.

 

전쟁같은 경쟁과 획일화된 언어를 받아들이면서 힘 없는 사람들의 세상, 가난한 사람들의 세상이 만들어지길 기대하는 것은 헛되다. 지금 반역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런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런 세상은 오지 않는다. 우리는 이 반역의 언어를 살리고 반역자를 살리고 있는가?



4. 나오며


깔끔하고 예쁘게 만들어진 권정생의 책은 왠지 불편하다. 그런 점에서 새로 나온 『빌뱅이 언덕』보다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가 훨씬 더 권정생답다(절판된 책이 다시 부활한 건 반가운 일이지만). 그리고 새 책에서 예전 책에 실렸던 편지글이 사라진 건 참 안타깝다. 권정생의 삶과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였는데 말이다.

 

예를 들어, 이현주 목사에게 쓴 편지에서 권정생은 하나됨에 관해 되묻는다. “교인들과 ‘하나’가 되지 못해 괴롭다니, 현주는 욕심꾸러기구나. 대체로 지도자란 분들은 하나 되기를 원하고 있지, 오해하지 말고 생각해 보자. 우리가 지금 총화란 말도 곧 지도자인 그 분의 뜻대로 하나 되어 달라는 뜻일거야. 백 미터를 뛰는데도 똑같이 출발해서 똑같이 꼴인하라는 지도자의 기대는 억지가 되지 않을까? 사람은 다 다르다. 달라야 된다. 다르기 때문에 하나가 될 수 없는 거지 다른 이유는 없다. 하나 못 되는 것이 정상이고, 그것이 올바른 교육이고 착한 지도법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 왔고 주장해 왔다. 똑같은 것을 싫어하는 내 성미 때문인지 모르지만 하나되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을 게다. 물론 똑같은 것과 하나 되는 것은 다르겠지만 대체로 현주가 말하는 ‘하나’는 ‘나와 꼭 같기’를 원하는 것일 게다. 냉정히 생각해 보기 바란다.” 권정생은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해주길 원하지 않았을까.

 

권정생에게 문학은 삶의 문제를 드러내고 이를 대면하는 방식이었다. 삶을 드러내기 위해 많은 양의 책을 읽고 세상의 소식을 접하며 그는 고민했다. 그리고 이를 대면하기 위해 여러 작품을 쓰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성찰했다. 문학이란 “어느 시대나 착하면 잘 살 수 없”다는 점을 밝혀야 하고, “아동문학도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모두가 착하고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쓰고 읽는 것으로 되”도록 하는 게 권정생의 생각이었다.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애국과 풍요를 버리고 자연과 더불어 시를 노래하는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권정생과 그의 문학을 단순히 ‘착한 사람’, ‘착한 문학’으로 규정하는 게 불편하다. 외려 그의 삶과 문학은 편안하고 복종하는 삶과 문학을 뒤엎으려 했다. 권정생은 반역자였고 반역의 기운을 불사르다 숨을 거뒀다.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도 그는 시대에 반역했다. 사건이 의례화되면 그 정신은 사라지고 불편한 진실은 적당히 버무려진 의례가 된다. 권정생은 자신을 그렇게 기억하길 원할까? 추모 5주년에 그 삶을 다시 생각하며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그 세상에서는 평안하시길, 아니 그 세상에서도 반역하시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