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 사랑방의 래군이형이 인권재단 사람 소속으로 메일을 보냈다.
'가을의 신부, 길 위의 신부' 문정현 신부님 콘서트를 홍보하는 메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콘서트에 들리면 좋겠다.
솔랑이를 잠깐 맡기고 콘서트에 가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지금 감기에 걸리셔서(요즘 우리집의 웃어른이다.헐) 좀 봐야 하겠지만...
집에 갇힌 우리 각시 콧구멍에 서울바람도 한번 넣어줘야 할 것 같고...
안 되면 내가 집에서 애를 봐야지 뭐...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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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인권재단 사람의 박래군입니다. 물론 저는 인권운동사랑방의 활동가이기도 합니다.
올해는 연말까지 사랑방을 쉬고 재단 일에 집중하고 있지요.
참으로 오랜만에 이렇게 메일을 씁니다. 예전에는 종종 스팸메일을 보내곤 했는데 말이지요. 이렇게 오랜만에 편지를 쓰는 일은, 다들 알고는 있겠지만 문정현 신부님 헌정 공연이 다음 주로 다가와서 입니다.

 

‘가을의 신부, 길 위의 신부’

인권재단 사람에서 이번 공연을 준비한 이유는 인권센터를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재단 사업에 관심을 기울여주셨던 신부님의 동의를 받아서 이번 공연을 준비하게 되었는데요, 인권센터를 추진하는 배경은 보도자료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인권단체들이 쓸 수 있는 공간이 너무 없다보니까 어떻게든 이번 기회에 그런 공간을 만들어보자는 뜻입니다.

활동가들이 쉽게 모여서 소통하고, 일을 도모하는 자리, 시민들이 찾아와서 인권상담도 하고 인권교육도 받고, 자신들의 모임도 꾸리고 할 수 있는 자리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서 일을 저질렀습니다.

한국에서 인권운동 40년이 넘었음에도 이런 공간 하나 없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이겠지요.

서울에서부터 만들고, 지역마다 만들어서 세상을 바꾸는 중심이 되는 그런 공간을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 인권운동에 절대 필요하지 않을까요?

 

인권센터를 시민의 힘으로!

그래서 우리 재단의 사무실 하나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인권단체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그런 센터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누구 유명한 사람들이 제안하고, 발기하고, 참여해서가 아니라 이름 없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만들어가는 그런 인권센터 운동이기를 바랍니다.

구체적으로 제안하겠지만, 인권활동가들부터, 지역의 이런저런 모임들로부터, 인권세상을 염원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이런 인권센터의 주춧돌을 놓겠다는 결의를 밝히고 십시일반으로 참여해서 만들어가는 그런 인권센터였으면 좋겠습니다.

 

공연에 많이 와 주시길…

이런 인권센터를 만드는 첫 작업을 알리는 일이 이번 공연입니다.

그런데 공연 날이 가까워지니 걱정이 앞섭니다.

사람들은 많이 올까, 후불제의 취지를 사람들이 잘 이해할까(돈 걱정)도 걱정이지만

우리의 공연이 신부님께 도리어 누가 되지는 않을지가 가장 큰 걱정입니다.

그래서 부탁드립니다. 주위에 이 공연에 참여하자고 많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각 단체들에서는 홈페이지에 배너부터 달아주고, 사무실에 포스터도 달고, 회원들에게 웹자보로 홍보도 하고 해서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인권단체의 활동가와 회원들이 북적되는

그런 공연이기를 바랍니다.

저희 공연 관련 카페(http://cafe.daum.net/hrfund)가 있으니 거기서 배너도 퍼 나르고, 관련한 기사도 퍼 날라 주시기 바랍니다.

부탁드립니다.

공연이 성사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주시기 바랍니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공연장에서 만나겠습니다.

 

- 2010. 10. 26.(안중근의사가 이토오 히로부미,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했던 날)

박래군 드림

인류 역사에서 권력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공평하게 분배된 사회를 찾기란 매우 어렵다. 간혹 불평등한 사회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등장했지만 그런 시도들은 찰나의 아름다운 순간을 제외하면 언제나 비극으로 끝을 맺었다.


지금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기득권층은 덩굴처럼 얽혀 서로의 뒤를 봐주면서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나 상식조차 무시하고 있다. 절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만큼 기득권층은 거의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고 기득권을 독점하고 강화해 왔다. 간혹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벌거벗음을 폭로하거나 당나귀 귀라는 소문을 퍼뜨려도 기득권층은 압도적인 힘으로 그 사실을 은폐해 왔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보니 사실을 접한 시민들의 반응은 이중적이다. 이럴 수 있냐는 분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냉소와 뒤섞인다. 그리고 한 명에 대한 분노는 곧 또 다른 이에 대한 분노에 밀려나고, 해결 없는 분노가 길어지면서 분노는 어쩔 수 없다는 냉소로 변질된다.



깃털과 몸통



우리 사회에서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몸통 찾기에 바쁘다. 기득권층을 위해 기꺼이 총대를 메려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뒤를 봐주는 세력들도 있기 때문이다. 허나 사건이란 게 뭔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사건은 그런 관계가 폭로된 상황을 뜻한다. 사건이 터졌으니 부패의 고리가 끊어져야 할 텐데, 우리사회에서는 사건이 터지면 진실이 더욱더 은폐된다. 깃털이 몸통을 흔들고 거짓이 진실을 감춘다.


사실 깃털과 몸통을 나누는 생각 자체가 우리의 병든 현실을 반영한다. 한 사회에 살지만 그들과 우리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영화 <공공의 적2>에서 검사 강철중(설경구 役)이 상대하는 한상우(정준호 役)는 대표적인 기득권층이다. 어릴 적부터 든든한 집안을 배경 삼아 승승장구해온 상우는 돈세탁, 협박, 뇌물, 살인을 일삼으며 5천억 원이나 되는 재산을 미국으로 빼돌리려 한다. 자신을 잡으려는 철중에게 상우는 이렇게 얘기한다. “태생이 천한 것들이 좀 괜찮은 자리에 오르면 착각을 해. 자기들이 뭔가 대단한 걸 이룬 것처럼. 그래서 뭐든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자기들 머리 위에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걸 잊어버리지. 니들은 니들끼리 살란 말이야. 버러지같은 인생들끼리.”


영화는 강철중이 한상우를 구속시키면서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강철중처럼 “법이 뭔데요? 법, 그거 최소한입니다. 사람들끼리 살면서 정말 지켜야할 최소한인데, 그것도 안 지키는 진짜 나쁜 놈을 나쁜 놈이라고 못하면서 법같은 거 없이도 착하게 사는 사람들 억울하게 만들면요. 다시 못 돌아와도 좋습니다”라고 말할 검사는 없다. 외려 삼성그룹을 비롯한 재벌가의 비리는 번번이 무죄판결을 받고 설령 유죄판결을 받더라도 금방 집행유예나 특별사면을 받는다.



근대의 법․제도와 기득권



21세기를 맞이해 독특한 영화 한 편이 등장했다.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영화 <세기말>은 20세기말 한국사회의 풍경을 노골적으로 묘사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악덕 고리대금업자 천(이호재 役)은 이렇게 말한다. “돈 있는 이들이, 이대로, 왜 제발 이대로 하면서 건배하는 줄 아나. 참말로 이대로가 좋은 기라. 대한민국, 망해도 안 되고 더 잘 되도 안 되는 기라. 선진국, 그거 절대 사절이야. 선진국하고 후진국 결정적인 차이가 뭔 줄 아나. 투명과세라. 많이 번 놈 많이 내고 쪼매 번 놈 쪼매 내고. 가진 아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그거 아이가. 내 돈 넘 주는 거. 내하고 룸살롱 같이 하다가 미국으로 이민 간 아가 있는데, 마, 학을 떼는 기라. 얼매나 세금을 때려 맞는지, 빨갱이 나라가 따로 없다 캐. 여서 얼매 안 냈거든. 그라이 여가 천국이제.”


모두가 약간의 불안감과 흥분을 느끼며 맞이했던 21세기에도 한국의 기득권층은 철저한 현상유지를 바랬다. 일제 식민지 시기와 군사독재를 거쳐 완성된 우리의 근대적인 법․제도는 기득권층을 처벌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입법, 행정, 사법 거의 모든 제도가 철저히 기득권층을 보호해 왔다. 아직까지도 친일파의 재산을 환수하는 문제가 뉴스거리가 될 만큼 우리의 근대법과 제도는 기득권에 대한 도전을 가로막아 왔다. 어떤 과정을 거쳤든 일단 한번 만들어진 권력이나 재산에 대해서는, 기득권 자체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문제를 제기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니 법과 제도의 잘못된 적용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규칙 자체가 문제이다.


옛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부패한 수령을 쫓아내거나 필요하다면 부잣집 곳간을 열기도 했는데, 근대의 법과 제도는 이런 해결책을 금지했다. 사유화된 공권력이 힘을 독점했고, 자력구제는 범죄가 되었다. 우리는 옛날보다 더 합리적인 사회에 살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더 야만적인 사회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합리의 가면을 쓴 야만적인 사회에서 기득권층을 무너뜨리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야만적인 억압의 형식은 조금씩 세련되게 변해 왔다. 과거에는 국가의 폭력이 기득권층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짓밟았다면, 지금은 돈의 폭력이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차라리 노역을 살고 나오겠다는 말이 나올 만큼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가들에게 갖가지 벌금형이 내려지고 있다. 파업을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엄청난 손해배상압력이 노동조합을 짓누르고 있다.


그러니 기득권층에게 ‘법대로 하자’는 말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법치주의를 내세우기도 한다.



하나의 공동체와 두 개의 세계



더구나 기득권층은 자기 입맛대로 법과 제도를 바꾸며 비밀리에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어 왔다. 얼마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딸이 부정한 방법으로 특채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현대판 음서제도 논란이 벌어졌다. 한 사람의 문제인 줄 알았더니 제도 자체의 문제이다. 힘없는 이들이 신분상승을 꿈꾸는 3대 고시(행정고시, 사법고시, 외무고시) 모두가 기득권층을 특별대우하거나 그들에게 유리하다. 지난 10년간 신규채용 공무원 중 약 23%가 특채로 선발되었고, 로스쿨의 한 해 등록금은 1천만 원에서 3천만 원에 이르며, 외교관이나 고위 공무원의 자식들은 대학입학부터 인턴, 취직까지 온갖 특혜를 누려 왔다. 정부에서만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기업에 취직할 때도 임원이나 사장단의 아이들, 고위 공무원의 아이들은 따로 관리된다. 제도의 허점을 파고드는 게 아니라 기득권층을 위한 제도가 따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두 개의 분리된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런데 기득권층의 세계는 우리 세계를 착취하고 약탈해서 유지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하나의 공동체를 유지해야만 한다. 그러다보니 그 세계의 비밀이 간혹 공개되기도 한다. 이번에 외교통상부 특채과정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지적한 사람은 홍정욱 국회의원이다. 한때 『7막 7장』이라는 성공담을 팔아 유명해지고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그가, 지금의 조건만 보면 너끈히 상류층에 속할 그가 왜 다른 세계의 비밀을 폭로했을까? 어찌 보면 그의 ‘태생’ 탓일지도 모른다. 그는 성공한 인물이지만 이쪽 세계에 속한 인물이기에.


하지만 이런 폭로로 그들의 세계가 쉽게 무너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공동체의 규칙을 정하는 건 여전히 기득권층이고 그들은 자신들의 ‘상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황새와 여우



물론 그동안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은 건 아니다. 고인 물이 썩듯이 기득권층의 헛발질이 줄을 잇고 문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우리 세계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세계도 영향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잃어버린 10년’이라 우기는 시기에 이뤄놓은 상식적인 업적들이, 글로벌 스탠다드와 선진화를 내세우기 위해 받아들이는 최소한의 기준들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그들의 발등을 찍고 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황새와 여우처럼 기득권층은 자기 꾀에 스스로 걸려들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인사청문회이다. 다른 사람의 글을 표절하거나 부동산 투기, 병역기피를 하면 안 된다는 ‘우리 세계’의 상식이 다른 세계에 사는 기득권층에게는 불공정한 억지논리이다. 땅을 사랑해서 많이 사놓는 것은, 학계의 관행을 따라 표절하는 것은, 능력껏 군대를 면제받고 이중국적을 가지는 것은 그들의 세계에서 지위를 증명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을 그들은 이해할 수 없고 억울하다. 지금처럼 따로 살면 될 텐데, 하나의 세계로 통합하자니 미칠 노릇이다.


이처럼 선진국, 선진화가 때로는 족쇄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기득권층은 ‘한국형’을 그토록 강조한다. 그들 세계의 상식을 한국이라는 상황으로 포장해서 유지하려 든다. 그리고 우리 세계의 간섭을 귀찮아 할 뿐 잘못을 인정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여차하면 이 공동체를 떠나겠다며 우리를 협박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부와 힘이 우리 세계의 피와 땀임을 잘 알고 있다. 실제로 이런 천국을 버리고 빨갱이 나라인 미국이나 유럽으로 떠날 수는 없기에 그들의 속내는 불안하다. 우리 세계로부터 그들의 세계를 보호해온 법과 제도가 무너질까봐 그들은 두렵다.



괴물의 등장과 기득권층의 불안



특히 기득권층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합리적인 제도나 폭력적인 저항이 아니라 괴물이다. 아직까지도 기득권층이 가진 힘은 폭력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고 때로는 용산참사에서 드러났듯이 반(反)테러라는 극단적인 논리를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런데 괴물은 기득권층의 힘으로도 막기 어렵다. 영화 <괴물>에서 드러났듯이, 그리고 미네르바 사건과 촛불집회에서 드러났듯이, 기존의 권력은 다른 차원의 존재에게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근대적인 시야로는 보이지 않는, 어떻게 나타났다 사라지는지 그 원인이나 과정을 알 수 없는 괴물을 처벌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들은 괴물이 등장할 때마다 그런 괴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인한다. 그것은 괴물이 아니라 사회질서에서 벗어난 일탈자나 사이코, 쓰레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괴물의 출현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는 점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불안하다. 그들 세계만의 상식과 힘이 괴물의 탄생을 자극한다는 점을 알지만 분리된 세계를 통합하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근본적인 딜레마에 빠져 있다.


뒤집어 생각하면 우리는 기득권층에 도전하기 위해 괴물이 되어야 한다. 각시탈을 쓴 이강토가 되든, 미래소년 코난이 되든,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브이가 되든. 그들의 불안이 우리에게는 기회이다.

문정현 신부님, 문규현 신부님, 두 분을 뵈면 정말 신부님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부복보다 평상복 차림일 때가 훨씬 더 많은 신부님이고 성당보다 거리나 집회에서 더 자주 뵐 수 있는 신부님이지만 그 어느 종교인들보다 더 많은 감동을 받게 됩니다.
생명, 평화라는 말은 두 분의 모습에서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라 생생한 활동으로 꽃을 피우지요.
그런 두 분이 형제라는 사실이 한편으로 놀랍고 다른 한편으론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번에 문정현 신부님이 콘서트를 여십니다.
용산참사 현장을 지키러 용산에서 생활하실 때 잠깐 짬을 내서 뵌 적이 있었는데(저랑 같이 사는 사람의 덕입니다),
그때 잠깐 지나가는 말처럼 얘기되던 콘서트가 11월달의 공연으로 잡혔습니다.
문정현 신부님의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정말 아름다운 사진이죠).

11월 4일부터 6일까지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화암홀에서 열립니다.
매일 다른 테마로 진행되고, 입장료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감동을 받은 만큼 성금으로 내라니 이 역시 신부님의 콘서트다운 생각입니다.
기회가 되면 콘서트에 들려 신부님의 얘기도 듣고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돌아갈 성금도 팍팍 내시길...
 

추석 전날 무섭게 내린 폭우는 우리 사회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철도와 지하철의 운행이 중단되고 다리의 통행이 중단될 만큼 폭우의 힘은 강했다. 공공시설의 피해 외에도 반지하나 지하에서 생활하거나 일하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삶터와 일터를 잃어버렸다. 추석대목을 바라던 장터의 상인들도 하늘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특이하게도 한반도 전역에서 이런 일이 똑같이 벌이지지 않았다. 서울과 수도권에 폭우가 내리는 동안 남부지방엔 햇빛이 쨍쨍했다. 그리고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서도 강우량이 큰 차이를 보였다. 그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앞을 떠나지 못했다.


아마도 앞으로는 이런 자연재해가 더욱더 잦아질 것이고 그 피해도 커질 것이다. 한국의 기후가 아열대로 바뀌면서 장마가 없어지고 열대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생태계 파괴가 불러올 재난은 예측하거나 막는 게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큰 공포와 불안을 심어준다.


하지만 폭우가 내리는 동안에도 4대강에서는 포크레인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재난을 겪으면서도 그 원인을 제거하기는커녕 왜 재난을 부채질할까? 생태계 파괴의 심각성과 위험을 사람들이 몰라서일까? 그렇지는 않다.


힘없는 사람들에겐 그런 사업을 결정할 권한이 없다는 점도 한 이유이지만 재난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이다. 힘있는 자들이 사는 곳은 물에 잠기지도 않을 것이고 설령 피해를 보더라도 즉각 조치나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힘없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는 재난이 힘 있는 사람들에겐 한순간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냉장고와 밥상이 떠다니는 지하 전세방에서 물난리를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알려지지 않지만 영화배우 정우성의 2억짜리 자동차가 물에 잠길 뻔한 일은 트위터를 타고 알려지듯이.


어느 아파트에 사는지가 그 사람을 증명하는 사회에서 재난은 계급을 가린다. 새로 세워지는 고급아파트에는 입주자들을 위한 사우나 시설과 휴양림이 마련되어 있고 도로에는 폭설에 대비한 열선까지 깔려 있다고 한다. 아마도 자연재해가 계속되면 고급 아파트는 재난에 대처할 다양한 시설과 장비를 갖출 것이다. 그리고 보안회사와 감시카메라가 경찰의 몫을 대체하듯이, 그런 아파트가 늘어날수록 공공성의 영역은 줄어들고 재난은 각자가 알아서 대비해야 할 일이 된다. 시간이 지나면 미국처럼 지방정부가 사설기업으로 대체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의 자연재난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의 재난으로 변한다.


더구나 힘있는 자들에게는 재난이 새로운 기회이기도 하다. 태풍 카트리나가 미국 뉴올리언즈시를 물바다로 만들었을 때 정치인들과 개발업자들은 축배를 들었다고 한다. 골치 아픈 빈민가를 보상 한 푼 없이 싹 밀어버렸으니 그들에게는 대홍수가 엄청나게 좋은 기회였다. 쓰나미가 마을을 집어삼켰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한국의 상황은 다를까? 한국에서도 재난이 힘있는 자들에게는 구호금을 떼어먹을 기회, 댐을 만들고 둑을 쌓는 개발사업을 진행할 기회이다. 피해는커녕 더 많은 기회를 누릴 수 있으니 그들이 재난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4대강사업 때문에 보금자리를 잃어버린 농민들이 겪는 고통은 도시에서 반지하와 다세대주택의 주민들이 겪는 고통과 맞닿아 있다. 재난은 사회적 고통을 대물림한다. 이 연관고리를 깨닫지 못하면 힘없는 사람들만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러니 이제 우리도 반격을 준비해야 한다. 마이클 무어의 영화 <자본주의>를 보면, 사유화된 영역을 다시 공공영역으로 전환시키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보인다(주택을 점거하라고 연설하는 하원의원도 보인다). 우리도 재난을 새로운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재난을 피하기 위한 긴급구제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이다. 흉년이 들면 만석꾼의 곳간을 열게 했듯이, 인간이 만든 재난을 바라보며 진보정당이 요구해야 하는 것은 땜질식 대책이 아니라 근본적인 처방이다.

학벌없는 사회가 엮은 [학교를 버리고 시장을 떠나라]에 실은 글입니다.



“어떤 행복을 꿈꾸어 나는 경쟁하고 경쟁했는데

우리가 그린 미래는 드라마에 불과한 공상입니다

…일상의 무게로 비굴해진 나의 자존심도 용기도 버린 내일

우리의 꿈은 서로 다르지 않은데 꿈을 위해 꿈을 버리고

어머니 당신은 알고 계시나요 나는 이름도 없는 나사”

―자우림의 노래 ‘나사(螺絲)’ 중에서



지금 당신은 왜 행복하지 못한가?



행복을 꿈꾸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행복이란 무엇일까? 사람은 무엇으로 행복해질까? 알렉산더 대왕이 전 세계를 정복하며 행복을 느끼고 있을 때,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가 원한 건 단지 알렉산더가 가렸던 햇빛이었다. 디오게네스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지만 자신의 삶에서 행복을 느꼈다. 아니, 디오게네스는 권력이나 부유함, 명예에서 행복을 구하던 다른 사람들을 하찮게 여겼다. 디오게네스는 자신이 원할 때 먹고 원할 때 잠을 청할 수 있는 자유인이었기에 행복했다. 어느 누가 그에게 불행한 사람이라 설득할 수 있을까?


낚시질 하는 어부에게 지나가는 사람이 말을 건다. 낚시 대신 그물을 쓰면 한꺼번에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그러자 어부가 묻는다. 많은 고기를 잡아서 무엇하냐고? 그러자 행인은 물고기를 팔아 돈을 모으고 배도 살 수 있다고 답한다. 어부는 다시 묻는다. 그렇게 하면 무엇이 좋냐고? 행인은 배도 사고 돈도 많이 모으면 노후에 편히 살 수 있다고 답한다. 그러자 어부는 답한다. 나는 지금 편하게 낚시질을 하며 살고 있다고. 이와 비슷한 얘기들은 아주 많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삶을 포기하라는 얘기들에 현명한 사람들은 이렇게 답했다. 지금 나는 이미 행복하다고. 권력도 없고 돈도 넉넉지 않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미국의 사상가 소로우(H. D. Thoreau)는 이렇게 얘기했다.



“왜 우리들은 이렇게 쫓기듯이 인생을 낭비해 가면서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배가 고프기도 전에 굶어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 사람들은 제때의 한 바늘이 나중에 아홉 바늘의 수고를 막아준다고 하면서 오늘 천 바늘을 꿰매고 있다. 일, 일 하지만 우리는 이렇다 할 중요한 일 하나 하고 있지 않다. 단지 무도병舞蹈病에 걸려 머리를 가만히 놔둘 수가 없을 뿐이다.”[각주:1]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명한 사람들은 저 먼 곳의 행복이 아니라 지금 이곳의 행복을 즐기고 누리라고 가르친다. 행복은 먼 곳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사회에서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현재를 포기하고 있다. 권력을 잡아야, 돈을 많이 모아야 우리는 자신과 가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정말 그럴까? OECD국가들 중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길지만 가장 불안하고 위험해서 교통사고율이나 암발생율이 높고 자살율도 높은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어느 날 갑자기 문자로 해직통보를 받거나 병원에서 암진단 선고를 받고, 자동차 사고나 갑작스런 사고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두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 산다. 허나 불행한 현재를 사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행복한 미래가 찾아올 수 있을까?


비단 한국 사람들만 그런 건 아닐 터이지만 유독 이곳의 사람들은 현재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왜 그럴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우리의 교육에 있다. 우리 사회의 교육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해야 한다고 세뇌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육은 안정되고 좋은 직장을 잡으면, 그러기 위해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그러기 위해 외국어고나 특목고에 들어가면, 그러기 위해 국제중에 들어가면, 그러기 위해 좋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그러기 위해 미리 영어유치원을 다니면, 미래의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달리는 말에도 더 채찍을 가해야 옳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누가 누구의 어떤 행복을 보장한단 말인가? 아이들을 좋은 학원에 보내기 위해 야근을 하고 알바를 뛰며 밤 늦게 집에 들어오는 부모들이 아이들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을까? 학교와 학원의 경쟁에 시달리고 짓눌려 어깨가 축 처진 아이들이 부모들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을까? 서로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까? 부모는 아이들의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 속이 타들어가고, 아이들은 따뜻한 대화없이 온기를 잃어버린 가정에 숨이 턱턱 막힌다. 모두가 불행한데 어디서 갑자기 행복한 미래가 불쑥 튀어나올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니 우리의 교육은 폭력을 사용한다. 자신이 바라는 바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타자에게 강요한다. 사랑하면 모든 것이 다 용서되는 줄 안다. 사랑하니까 때리고 사랑하니까 잔소리하고 사랑하니까 강하게 키우기 위해 험한 곳으로 내몬다. 자신의 꿈을 보상받으려는 사랑 때문에 부모들은 아침에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아이들을 억지로 깨워 학교로 보낸다. 이게 정녕 사랑일까?


그러니 우리의 교육은 배우고 스스로 깨닫는 가르침이 아니라 폭력이고 매트릭스이다. 실제로는 에너지를 뽑히는 갇힌 몸이면서도 자신이 자유롭다고, 행복하다고 착각하도록 만든다. 누가 나서서 이제는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외쳐도, 같이 짜기라도 한 듯이 모두가 등을 돌린다. 반대하는 사람은 왕따를 시키며 특별한 것들은 지들끼리 모여 살라면서 우리 눈을 감고 귀를 닫는다. 서로가 서로의 폭력을 묵인하고 자신의 알리바이로 삼으며 공모한다.


제 아무리 휘황찬란한 여러 가지 지표로 자신을 정당화시켜도 지금 우리 사회는 매우 불행하다. 교육은 똑같은 행복을 내세운 경쟁으로 아이들을 내몰아 그 영혼을 메마르게 하고, 우리 사회는 아이들의 에너지를 아귀처럼 빨아먹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나나 우리 가족이 정녕 행복해질 수 있을까? 행복은 고사하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경쟁에서 이기면 행복해질까?



우리나라는 지금 서느냐 무너지느냐하는 갈래길에 섰다. 그 기본조건은 민생(民生)이다. 민중이 우선 먹어야 한다. 건전한 사회가 되려면 되도록 노동하는 자가 많고 놀고 먹는 자가 적어야 할 일이다. 대학이 늘수록 놀고 먹는 자가 늘어갈 뿐이니 많을수록 국민적으로는 손해다. 그러나 대학 수는 훨씬 줄여 학문에 소질이 있는 자로 필요한 수에만 한하게 하고 그 경비를 초등교육에 돌려야 할 것이다.…대학을 자꾸 지원하는 것은 정부가 인물 등용에 반드시 실력으로써 하지 않고 소위 간판으로 하기 때문인데 정부가 그 방침을 쓰는 것은 표면은 그럴듯한 구실을 내 걸고 사실은 특권계급이 자기네 이익, 지위를 옹호하는 제도를 지켜가는 방법으로 하는 것이다. 학교를 졸업해야 우대한다 해서 실지로 필요하지도 않는, 하고 나오면 실업자가 되는 교육을 강요함으로써 농민을 착취하고 있다. ―함석헌 선생의 글에서[각주:2]



잘못된 논리를 가르치는 것은 학교만이 아니다. TV드라마나 영화, 대중문화들도, 우리 정부도 무한경쟁의 전도사이다. 남이 괴롭고 힘들어도 나만 아니면 된다는 ‘복불복의 논리’, 어떤 수단을 쓰던 성공만 하면 된다는 ‘왜곡된 합리성의 논리’, 전 세계의 사람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세계화의 논리’가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런 다양한 논리들이 서로 맞물리며 경쟁의 피라미드를 구성한다. 어떤 능력, 어떤 성품을 가진 사람이든 그 사다리에서 한 단계 올라서면 존경받고, 한 단계 떨어지면 가차없이 내쳐진다. 이긴 자에게 모든 몫이 돌아가고 패배한 자는 모든 걸 잃는다. 피라미드의 끝이 아주 뾰족하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니 피라미드에서 밀려 떨어지지 않기 위해 모두가 발버둥을 쳐야 한다.


그렇다, 우리 사회는 냉정하고 치열한 경쟁에 지배당하고 있다. ‘공부의 신’이 아니라 ‘경쟁의 신’이 우리 사회를 지배한다. 우리는 경쟁을 거쳐야 능력이 생기고 경쟁을 통해서만 강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그런 믿음을 강하게 가지게 된 건 불행한 역사 때문일지도 모른다. 강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을만큼 넉넉한 사회였다면 우리가 굳이 경쟁을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허나 강자만이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기에 우리는 싫건 좋건 경쟁을 받아들여야 한다. 적어도 내 아이는 한 단계 높은 자리에 보내려 한다.


그러니 아이들을 좋은 유치원에 보내기 위해 부모들이 밤새 줄을 서야 하고 걸음마를 갓 뗀 아이들이 영어를 따라 말하고 초등학교 아이들이 무거운 가방을 질질 끌며 학교로 향해야 한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나도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날고 싶다”는 유서를 쓰고 아이들이 자살해도 우리 사회는 쉬쉬한다. 자살이 청소년의 주된 사망원인이고, 15세에서 19세의 청소년들이 자살충동을 느끼는 원인의 51%가 성적과 진학문제인데도, 우리 사회는 이를 해결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못나고 약한 아이들이나 그렇지 내 아이는 그렇지 않다고 자위하며 부모들은 아이들을 위해 고된 하루를 보낸다. 아이나 부모나 극단적인 경쟁에 시달리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회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생각하며 살까? 한 교사는 자신의 끔찍한 체험을 이렇게 말했다.



“얼마 전 10일짜리 자원봉사 활동을 다녀왔다. 학생들의 농촌 체험 활동인데 교사로서 자연봉사를 했다. 그런데 자원봉사를 하는 동안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한 학생이 개미들을 밟아죽이고 있는 것이었다. 다가가서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왜 약한 개미들을 죽이냐고 물었다. 죽여도 된다고 대답했다. 너는 너보다 힘센 사람이 너를 괴롭혀도 좋으냐라고 물었다. 그래도 좋단다. 여기까지도 많이 놀랐는데 더 놀라운 대답이 이어졌다. 힘센 니가 개미를 죽이듯이 너보다 힘센 사람이 너를 괴롭히면 너는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으냐라고 물으니 아이는 대답했다. “나는 죽어도 좋아요”라고. 왜 그러냐고 물으니 그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학원을 안 가도 되잖아요.” 나는 너무 놀랐다. 그 아이는 8살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학원을 다섯 개를 다닌다고 한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이렇다.”[각주:3]



학원을 가지 않으니 죽어도 좋다는 아이들을 둔 우리 사회가 지속가능할까? 설령 이 아이들이 운 좋게 어른으로 성장한다 해도 우리 현실이 나아질 수 있을까?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아이들을 안아주기는커녕 힘겹게 경주하는 아이들에게 채찍질을 가한다. 요즘 아이들이나 청년들은 배가 불렀다거나 고생을 안 해봐서 그렇다라는 어른들의 막말이 아이와 청년의 영혼을 질식시킨다. 영혼이 죽은 시체같은 타자들을 보며 우리 사회는 군기가 바짝 들었다며 만족스러워 한다. 간간히 들리는 안타까운 소식은 그 사람의 나태함과 게으름 탓이지 경쟁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제는 그런 힘겨운 노력조차 사회에서 통하기가 어렵다. 영어사전을 씹어 먹으며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출세했다는 이야기는 이제 드라마에서조차 다루지 않는다. 승용차로 등교하고 학원버스로 하교하는 아이들, 특목고를 다니고 좋은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이 경쟁의 피라미드의 윗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박이 터져라 싸우는 아이들은 그 경쟁의 사다리 중간이나 그 밑을 차지하는 아이들이다. 교육만이 아니다. 대기업들이 중소기업들을 착취하며 대부분의 이윤을 독점하고, 대형마트나 기업형 슈퍼마켓이 재래시장이나 구멍가게들을 잡아먹고 있다. 그러니 제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경쟁의 결과는 우리 사회에서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공정한 경쟁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IMF를 거치면서 피라미드의 규칙이 바뀌었다. 즉 운 좋게 경쟁에서 승리해도 그 승리가 평생 이어지지는 않는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도 언제 비정규직으로 떨어질지, 명예퇴직을 당할지 모르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도 청년실업을 면하기 어렵다. 중소기업으로 성공해도,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도 언제 재벌들에게 잡아먹힐지 모른다. 더구나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나타내듯이, ‘용산참사’에서 증명되었듯이 우리 사회는 경쟁을 할 때 이미 강한 자들에게 유리한 규칙을 일방적으로 적용한다.


웬만한 사람들은 이 잔인한 현실을 알기 때문에 조금 남은 중간 자리를 두고 다툰다. 앞서 가는 사람들을 따라잡기란 불가능하고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들을 보면 불안하니까 사람들이 모질어진다. 지금 내가 지키는 자리, 작은 여유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가차없이 밀어내고 짓밟는다. 강자에게는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고 약자에게는 무수한 폭력을 가한다. 경쟁할수록 풍족해지고 풍요로운 게 아니라 더 불안하고 빈곤해지는데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나만이라도, 우리 가족이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수동적인 무모함이 경쟁의 피라미드를 보호하는 든든한 장치이다.


그러니 기득권자들이 지배하는 사회는 우리들을 극단적인 경쟁으로 빈곤하게 만든 뒤에 마음껏 조롱하고 모욕한다. 나이를 먹고 성장하며 자신의 자아를 찾고 큰 인간으로 자라기는커녕 더욱더 비굴해지고 작은 인간으로 길들여진다.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웬만한 수모는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생존의 달인이 된다. 허나 노예의 배가 부를 수는 있으나 행복할 수는 없듯이, 이런 사회에서 행복은 불가능하다.


이미 50년 전에 함석헌 선생은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교육자의 혼이 ‘어버이’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버이를 대신한 존재이기에 교육자는 우등생, 열등생을 구별하지 않아야 하고 각각의 아이들에게 맞는 나름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남보다 뒤떨어진다고 해서 그 아이를 추려내고 벌준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교육이 아니요, 어버이의 마음도 아니다. 만일 그런 교육자가 있다면 그는 자신의 무성의와 무능함을 숨기기 위한 협잡꾼이라고 함석헌 선생은 지적했다.


더구나 그런 교육은 아이들도 교활하게 만든다. 교사는 지식을 파는 사람이고 학생은 그 지식을 사는 소비자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는 인격적이거나 윤리적인 관계를 맺을 여지가 없다. 이런 세계에서 교육은 출세를 위해 학벌을 따는 과정이지 존경과 신뢰를 배우고 배움에 감사하는 과정이 아니다. 선생이 학생을 때리고 학생이 선생을 때리는 것은 교육이 출세의 수단으로 변질된 현실을 반영할 뿐이다. 그리고 이런 현실은 강자와 이긴 자가 약자와 패한 자를 짓밟고 욕보이는 교육을, 경쟁과 이익이 지배하는 교육을 정당화하고 있다. 왜곡된 교육과 비정한 현실이 강력한 동맹관계를 맺고 인간성을 짓밟고 시민의 출현을 가로막는다.


이런 사회를 바로잡고 다시 행복해질 방법이 있을까? 교육의 위기와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이제 저 바닥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단순히 제도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교육의 근본정신을 회복하지 못하고 교육개혁을 얘기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런 혼이 회복될 사회적인 조건을 마련하지 않고 교육혼의 회복을 애기하는 건 모래로 탑을 쌓는 것과 같다.


아이 한 명이 바르게 자라려면 한 마을이 필요하다고 한다. 교육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은 정권이나 몇몇 교육단체의 몫일 수 없다. 이제 마을의 지혜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떤 지혜가 필요할까? 어렵고 복잡한 정책이나 혁명적인 조치가 필요할까? 돌아가신 이오덕 선생은 그 지혜를 단순명료하게 밝히셨다.



“청소를 싫어하고, 청소를 하지 않으려고 그 시간에 도망가고 하는 것은 그 학급의 교육이 사람답지 못한 점수 따기 경쟁 교육으로, 반인간, 반민주 교육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주 힘드는 높은 단계의 무슨 훌륭한 교육을 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런 교육을 하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다. 생각만 있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사실 아이들은 책만 읽고 쓰고 외우고 하는 그런 공부를 아주 싫어한다. 그 증거로 아이들은 체육 시간이 되면 몸이 아픈 아이가 아니고는 모두 좋아한다. 책에서 해방이 되어 운동장에서 뛰어놀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 시간이나 과학 시간에 산이나 들에 나간다고 해 보라. 기뻐서 소리칠 것이다. 교실 청소를 할 때 보면 책걸상을 옮기거나 걸레로 마루를 닦는 것을 장난처럼 하면서 즐긴다. 일이 놀이가 되고, 그것이 또 운동도 되고 학습도 되는 것인데, 이런 아이들의 삶에서 교사는 배워야 한다. 모든 교육을 이렇게 해야 가장 좋은 교육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의 한평생도 이와 같이 어떤 일을 즐겁게 열심히 하면서(일과 놀이와 공부가 하나로 되는 삶을 즐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사람의 길이다. 정치도 모든 국민이 이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온갖 사회 문제가 풀린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에서부터 아이들이 이렇게 일과 놀이와 공부가 하나로 되는 삶을 나날이 즐기도록 하는 교육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교실에서 청소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거나 장난을 치면 “입 다물어!” “장난치지 마!”하고 선생이 야단을 치니까 그만 그 청소는 재미가 없게 되고 하기 싫어진다.”[각주:4]


 

이렇게 간단한 해답을 두고서 우리는 계속 엉뚱한 답을 찾고 있다. 일과 놀이, 공부가 하나로 되는 삶, 경쟁하지 않고 서로 돌보고 보살피는 삶, 그런 삶을 이야기하면 모두들 달나라 얘기를 하냐는 듯 쳐다본다. 정말 불가능한 꿈일까?




공생은 헛된 공상인가?



우리는 자연계의 법칙을 적자생존, 생존경쟁이라 믿지만 그건 잘못된 믿음이다. 러시아의 사상가 크로포트킨(P. Kropotkin)은 서로 보살핌(mutual aid)이야말로 자연계 진화의 비밀이라고 주장한다. “동물들 사이에서 경쟁은 예외적인 시기로 제한되고, 자연선택은 그 원리가 발현되기에 더 좋은 분야를 찾게 된다. 상호부조와 상호지지를 통해서 경쟁이 제거되면 더 좋은 조건들이 창출된다. 엄청난 생존경쟁 속에서―최소한의 에너지를 소비해서 가능한 최대한도로 생의 충만함과 강렬함을 추구하기 위해서― 자연선택은 지속적으로 가능한 한 경쟁을 피하는 방법을 추구한다.”[각주:5]
더구나 인간의 지식과 지능은 그런 경쟁을 제한하며 공생을 더욱 활성화시킬 수도 있는데, 그 방법이 바로 교육이다.


사실 서로 보살피고 공생해야 한다는 건 엄명한 자연계의 질서이기도 하다. 미국의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와 그녀의 아들 도리언 세이건(Dorion Sagan)의 『생명이란 무엇인가?(What is Life?)』(1995)는 크로포트킨의 논의를 이어받는다. 마굴리스와 세이건에 따르면 생물은 자기 완결적이고 자율적인 개체가 아니라 다른 생물과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정보를 상호교환하는 공동체이다. 숨을 쉴 때마다 우리는, 비록 느리기는 하지만 역시 호흡하는 생물권의 나머지 생물들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즉 생명체는 물과 공기를 통해 복잡하게 서로 얽혀 있고, 지구상의 생물들은 수십 억 년 전부터 상호작용을 하며 지구의 생존조건을 유지해 오고 있다.


마굴리스와 세이건은 지구가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제임스 러브록(James E. Lovelock)의 가이아(Gaia) 가설을 지지하면서 생물이 지구의 표면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생물이 곧 지구의 표면이라는 획기적인 이론을 주장한다. 생명은 고립된 개체로서가 아니라 서로 공생하는 하나의 체계로서, 즉 지구로서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진화의 요인은 경쟁이 아니라 공생이다.


그러니 생물의 진화과정에서 그 자체로 구분가능한 개체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인간 역시 단독자가 아니라 공생의 복합체이고 우리 몸 속과 몸 밖에서 살고 있는 생물에게 훌륭한 환경을 제공하고 그들의 도움을 얻는다. 인간은 수 억개의 박테리아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각주:6]

 

인간과 박테리아를 비교하는 것이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박테리아는 작고 불완전한 생명체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완전한 생물이며, 35억 년 이상 계속 번성해 오고 있는 진화된 존재이다. 사실상 “모든 생물은 한 박테리아의 후손이거나 아니면 여러 박테리아가 합병된 것이다.” 그리고 이 박테리아는 유전자를 거래하며 환경에 적응하며 공생 연합, 말하자면 공생에 의한 동맹을 꾀한다. 진화는 바로 박테리아들이 서로 공생을 하면서 이루어졌다.


그런 점에서 공생은 “결혼처럼 좋건 궂건 함께 살아나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결혼이 서로 다른 두 사람의 결합인 반면, 공생은 둘 혹은 그 이상의 서로 다른 생물들 사이에서도 이루어진다.” 때로는 박테리아가 다른 생물의 속에서 살아가는 ‘내부 공생’도 이루어진다. 이런 공생을 통해 새로운 개체가 만들어지고 생물은 진화한다. 마굴리스와 세이건의 주장은 생물학적인 면에서도 상호부조의 원리가 경쟁의 원리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유전자도 이타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증명한다.


이런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공생은 공상이 아니라 자연적이고 자발적인 질서이다. 다만 우리 사회의 잘못된 구조가, 그리고 그런 구조를 강요하는 국가가 그런 질서를 파괴해 왔을 뿐이다. 이제 그런 구조와 국가에서 벗어나 공생의 삶을 모색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에게 진정 미래가 보장될 수 있다.


이 역시 어렵고 복잡한 대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장 단순한 방법은 저 멀리 있는 행복을 위해석 아니라 지금 내 자신을 위한 삶을 성실하게 사는 것이다. 돌아가신 권정생 선생은 참다운 삶이 멀리 있지 않다고 봤다.



“이 세상에서 진정 공생의 길을 찾고 평화적 삶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모두가 참된 하느님을 찾은 사람들이다. 그것은 그 누구나 그 무엇을 위함이 아니라 바로 자기자신을 위한 삶이다. 우리의 모습이 본래부터 하느님이었는데 새삼스레 하느님이 되려고 하는 노력은 가장 우둔한 짓이다. 가장 사람다운 삶과 모습이 바로 하느님의 모습이다. 인간을 사랑함이 곧 하느님을 사랑함이며 인간을 사랑하는 길은 이웃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길이다.”[각주:7]


그리고 생태계 파괴와 전쟁, 착취를 반대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이미 걷고 있다. 미국의 사상가 리 호이나키는 이 시대를 살아있게 하는 사람들을 ‘거룩한 바보’라고 부르며 “‘거룩한 바보’들이 아직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고, 그들의 연기 때문에 우리가 세계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 모두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고 얘기했다.[각주:8]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바보 이반의 소박한 진리를 따를 때 우리는 전쟁과 물신의 시대를 넘어 공생공락(共生共樂)의 시대를 누릴 것이다.




헝그리사회에서 벗어나기


악바리 근성을 지켜

깡다구 하나로 덤벼

사나이 칼을 뽑았어

벌써 잊었니? 헝그리 정신

…허리띠를 꽉 졸라매고

머리통을 빡빡 3미리로

밀었어 크나큰 거울 앞에 서서

매일 매일 나와 싸웠던 땔 잊은 채

먹고 살만하니 살만 쪄

현실과 타협? 웃겨 변명 때려 쳐

Yo Amateur 만족하지 말고 어서 일어서

성공보단 목표를 향해 전속력을

-바비킴의 노래 ‘헝그리정신’ 중에서



흔히들 교육을 백년지대계라고 얘기한다. 이 말은 제자백가서 중 하나인 『관자(管子)』의 “일년 계획은 곡식을 심는 것만한 것이 없고, 십년 계획은 나무를 심는 것만한 것이 없고, 평생 계획은 사람을 키우는 것만한 것이 없다(一年之計, 莫如樹穀; 十年之計, 莫如樹木; 終身之計, 莫如樹人)”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사람을 기르는 것만큼 크고 중요한 계획이 없다.


그런데 크고 중요하다는 것이 어렵고 특별한 일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동안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는 교육개혁을 전문가들의 몫으로 미뤄왔다. 교육부나 교육학자들만 교육을 논할 수 있는 듯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현재의 심각한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은 몇몇 사람들의 지혜로 구해질 수 없다.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의 지혜를 모으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서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먼저 바로잡고 헝그리 정신에서 벗어나야 한다. 영화 <넘버3>에서 조필(송강호 役)은 홍수환과 임춘애를 헝그리 정신의 대표로 얘기한다. 가난하지만 성공이라는 목표 하나만을 보고 달리는 사람들의 헝그리 정신은 좋은 삶의 자세로 얘기된다.


물론 이런 자세가 무조건 나쁘다 얘기할 순 없다. 하지만 경쟁의 사다리가 세워진 사회에서 이런 자세는 나쁜 알리바이로 악용될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정녕 무조건 열심히 한다고 우리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뒷배경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사람이 ‘운좋게’ 노력만으로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옆 나라 일본에서는 사회의 구조적인 빈곤에 맞서는 운동이 한창이다. 그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유아사 마코토(湯浅誠)는 과거에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다메’[각주:9]
가 있었지만 지금 사회에는 그런 다메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빈곤하다는 것은 단순히 물질적으로 여유가 없다는 점을 뜻하지 않고 다메가 사라졌음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부모, 친구, 연인들이 점점 사라졌음을, 그래서 자신과 자존심이 사라지고 있음을 뜻한다. 유아사 마코토는 의미있는 얘기를 건낸다.


 

“인정상 어쩔 수 없는 면도 있다. 대학 입시에 합격한 사람이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비싼 교육비를 내주신 부모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쉽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가 노력해서 수험공부를 참아 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예전에는 가난했지만 현재는 성공한 사람들도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가족과 지역, 친구의 유형무형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가난해도 꾸준히 노력하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다”고 생각하려 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곤란한 것은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칼이 될 때, 즉 자신과는 조건이 다른 사람에게 무리하게 적용할 때이다. “나도 열심히 살았어. 너도 분발해!”라는 말에는 많은 경우 자신이 상정하는 범위에서의 ‘객관적 상황의 큰일’이나 ‘분발’에 한정되어 있다. 그때 자칫하면 자신과 타인의 ‘다메’ 크기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 간과된다. 그것은 때로 억압과 폭력으로 나타난다.”[각주:10]



차이가 무시되면 폭력이 되기 쉽고, 이런 폭력을 이용해 자기 뱃속을 채우는 것은 다름아닌 정부와 기업이다. 그들은 강하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을 지속시키고 싶어 한다. 한국의 상황은 과연 다를까?


경쟁은 우리 사회를 행복과 풍요로움보다 절망과 빈곤으로 내몰고 있다. 이제는 그런 경쟁의 논리에서 벗어나 공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 경쟁에서의 패배를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몰고 가는 헝그리 사회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홀로 런닝머신을 뛰는 것이 아니다. 거리로 나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과 손을 맞잡고 자기 목소리를 외칠 때 공생은 가능하다.


그리고 공생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내가 당했던 경쟁의 규칙을 다른 사람에게 똑같이 강요하지 않고 그런 규칙에 걸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관심을 두는 것이다. 내 삶과 타자의 삶이 서로 얽혀들 수 있도록 여지를 만들고 공유의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지금 당장 내가 도움을 줄 수 없더라도 자신의 일에 관심을 두고 함께 하려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불안과 공포를 덜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관계 속에서만 진정한 헝그리 정신이 가능할지 모른다. 남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 때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


행복하게 살자.


  1.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월든』(이레, 2001), 134쪽 [본문으로]
  2. 함석헌 지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생각사, 1979), 235쪽 [본문으로]
  3. 김종철 지음, “민주주의를 위하여(2)”, 《녹색평론》 제 108호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4. 이오덕 지음, 『문학의 길 교육의 길』(소년한길, 2002), 129~130쪽 [본문으로]
  5. P. A. 크로포트킨 지음, 김영범 옮김,『만물은 서로 돕는다』(르네상스, 2005), 105쪽. [본문으로]
  6. 린 마굴리스․도리언 세이건 지음, 황현숙 옮김, 『생명이란 무엇인가?』(지호, 1999), 343쪽. [본문으로]
  7. 권정생 지음,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사, 1997), 51쪽. [본문으로]
  8. 리 호이나키 지음, 김종철 옮김,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녹색평론사, 2007), 336쪽. [본문으로]
  9. “‘다메’라는 것은 저수지를 가리키는 ‘다메이케 溜(ぬ)池’의 ‘다메’이다. 큰 저수지를 가지고 있는 지역은 비가 적게 와도 당황하지 않는다. 저수지 물이 전답을 적셔 주어 작물을 기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저수지가 작으면 가뭄이 지속되기만 해도 전답이 바싹 말라 심각한 손실을 입는다. 이처럼 ‘다메’는 밖으로부터의 충격을 흡수해 주는 쿠션(완충제) 역할을 하는 동시에, 에너지를 끌어들이는 모든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다메’의 기능은 다양한 형태로 갖춰져 있다.…일부러 추상적인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금전으로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유형, 무형의 다양한 것이 ‘다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의지할 수 있는 가족, 친족, 친구가 있다는 것은 인간관계의 ‘다메’이다. 자신감이 있고,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는 것 역시 정신적인 ‘다메’이다.”(유아사 마코토 지음, 이성재 옮김, 『빈곤에 맞서다』(검둥소, 2009), 94쪽) [본문으로]
  10. 앞의 책, 103쪽. [본문으로]
한국의 논객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칼날을 겨루고 있다.
논객들이 서로에게 칼날을 겨루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왠지 그 싸움의 끝이 생산적이거나 중요한 의미를 남기지 못할 듯하다(물론 논쟁이 꼭 생산적으로 끝나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진중권씨야 좌충우돌하며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온 사람이니 앞으로도 슬기롭게 자기 길을 잘 헤쳐가리라 믿는다.
허낙 김규항씨에 대해서는 생각이 좀 다르다.
소위 'B급좌파'라는 이미지로, 역설적이지만, 자신의 이미지를 '순수하게' 만들어온 그이니, 이번 논쟁이 어떤 면에서는 그의 순수하지 않은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번의 사태는 예전에 김규항씨가 '그 페미니즘'이라는 글을 썼을 때와 느낌이 좀 비슷하다(지나친 생각일까?)
다시 한번 이미지 마케팅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특히 진중권씨의 얘기가 아니라 얘기하는 방식을 물고 늘어지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김규항 씨가 자신에게 날아온 비판을 대한 방식은 어땠을까?
워낙에 자기관리(?)를 잘 하시는 분이라 흠을 잡기가 쉽지 않지만 출판계에서 몇번 악명(?)을 들은 바 있고, 내가 아는 활동가들이 직접 곤경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 흔적이 아직 남아있는데, http://blog.jinbo.net/mete0r?pid=322 나 http://blog.jinbo.net/aumilieu/?pid=602 를 보면 대강의 정황을 알 수 있다.

사회가 어떻게 바뀌더라도 자신이 하고픈 말을 누구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그 말이 힘을 가지려면, 어렵지만, 앎과 삶이 조금씩 다가서야 한다.
김규항씨가 그렇게 존경한다는 권정생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말을 건냈을까?
아니면 그가 책을 쓴 예수라는 분은 어떻게 얘기를 건냈을까?

진보신당의 미래도 암담하지만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삶도 그리 희망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 점이 우리를 더욱 힘빠지게 하는지 모른다.

자유주의의 역사를 정리한 알랭 로랑은 자유주의의 개인이 “분리할 수 없고 서로 환원되지 않으며 실제로 홀로 느끼고 행동하며 생각하는 인간”, “독립을 추구하는 자율적 존재로 만드는 내면적 특성”을 가진 인간이라고 얘기한다. 이런 고유한 존재이기에 개인은 “외부의 강제 없이 자신의 고유한 삶의 주체가 되고, 선택하지 않은 집단의 강요 없이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창조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각주:1]


외부의 힘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고유함을 실현하는 존재라니 개인은 참으로 중요한 존재이다. 허나 한국사회에서 이런 개인/주체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국가나 자본의 힘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내면성을 사회에 실현할 수 있는 존재, 얼마 전에 그런 사람을 책에서 보기는 했다.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비평, 2010)를 읽으니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그런 개인에 가까운 듯하다.[각주:2]
이처럼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제외하고 한국사회에서 근대적 주체를 자처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물론 근대적 개인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이런 엄격한 조건(?)을 부각시키려고 등장한 것은 아닐 것이다. 강력한 집단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자율적인 개인의 중요성을 부정할 사람은 드물다. 개인적인 삶을 가능케 하는 사회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박노자의 얘기가 우리 사회에서 각광을 받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박노자는 민주적이며 개인 중심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여러 계급과 계층들의 이해관계가 자유롭게 표현되며 자율적으로 조절될 수 있는 시민사회”를 구성해야 하고 이를 위해 국경을 초월해 연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각주:3]
그러면서 박노자는 그동안 한국사회의 지식인이나 운동이 개인주의에 “애매하고 불철저한 관심과 두려움”을 가졌다고 비판한다.[각주:4]


자율적인 개인과 그들의 연대에 관한 얘기가 한편으로 희망을 심어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감을 늘리기도 한다. 세계화된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논리는 홀로 떨어지거나 남겨지는 것을 두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의 고유함과 차이를 실현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고립되는 것도 두렵기 때문에 우리는 애매하고 철저하지 못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각 개인의 경험과 우리의 근대사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그 삶과 역사에 대한 분석 없이 개인에 대한 환상과 신화만을 강조하는 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 상태에서 개인에 대한 기대치는 계속 높아지고 있다. 성찰적 근대(reflexive modernity)를 주장하면서 울리히 벡은 개인화가 전통적인 의무를 피하거나 극복하고 새로운 형태의 행동과 공존형식, 자유를 추구할 기회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이 개인화는 “에로틱하며 성적인 욕구를 그대로 즐길 뿐만 아니라 삶을 먼 미래뿐만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서 즐길 것을, 또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로부터 시작해 ‘즐김의 문화’를 개발하고 세련화시킬 수 있는 자유를 지향”하고 “자기 자신의 욕구를 권리로 변형시켜 제도적 규범과 의무에 저항할 수 있는 자유, ‘외부’의 간섭에 맞서 자기 자신의 삶을 방어하고 보호하며, (말 그대로 또 비유적 의미에서) 삶에 ‘삶 나름의 공간’을 제공하고 이러한 사적 공간이 위협받을 경우에는 언제든지 사회적․정치적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자유를 겨냥”한다.[각주:5]


하지만 이런 희망적인 전망도 우리사회에서는 뭔가 어정쩡한 상태로 드러나고 있다. “부모에게 상처 주는 일을 차마 못하는 ‘착한 심성’을 가졌다는 것, 그렇게 용기있게 사고를 쳐 본 경험이 없다는 것, 여전히 여자들에게 약간의 정절 이데올로기 같은 것이 요구되는 봉건 사회라는 것, 여기에 미래가 너무 불투명하고 불안한 것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부모의 도움 없이는 집 마련이 힘들고, 특히 그간 유지해온 생활수준을 대폭 낮추어야 하는데 그것도 행동을 결정하는데 암암리에 크게 작용한다.…분명한 것은 근대화/개인주의화/합리화가 진행되던 한국사회가 21세기에 들어서서 개인주의도 집단주의도 아닌 아주 이상한 어떤 곳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각주:6]
이것이 우리사회의 보편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한 단면을 보여주는 건 사실이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 그리고 그들간의 촘촘한 네트워크가 만들어내는 사회변화는 분명 희망적이다. 다만 우리는 이런 개인이 식민지와 군사독재를 경험한 사회에서, 아직도 그 잔재를 털어버리지 못한 사회에서 어떻게 출현할 수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우리는 외부의 강제 없이도 ‘자기 삶’의 주체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까?

 


식민성과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은 의도적으로 식민성을 다루지 않는다. 개화기의 지식인들이 보여줬듯이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유를 부르짖지만 그 자유의 속내는 문명사회에 대한 동경과 사회진화론, 제국주의 미화, 민중에 대한 불신이다.[각주:7] 그들에게 개인은 ‘강한 타자’이기에, 그런 타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은 ‘태생적으로’ 개인이 될 수 없다. 그래서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은 “불황의 문제도, 도산하거나 실업하는 것은 각 개인의 책임이니까 사회적인 대처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고 자유주의를 “결코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존하려는 인간의 치열한 철학이나 세계관”으로 생각한다.[각주:8] 이러니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에게 식민성은 부차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 억울하면 너도 강해져라, 강하면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이것이 그들의 개인주의이다.


이제 세계화의 물결은 더 이상 타자를 동경할 필요가 없는 시대, 힘과 돈으로 치장하면 타자로 살 수 있는 시대를 불러왔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건 강한 타자가 아니라 ‘자신들의 공동체’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기꺼이 희생할 약한 내부인들이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도 공동체를 얘기하고 ‘공동체 자유주의’라는 거짓 개념을 만들기도 한다. 이 거짓 개념은 “자유주의를 통한 개인의 자아실현과 공동체주의를 통한 공동체의 재창조와 발전”이라는 탈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사회공동체만이 아니라 “자연공동체와 역사공동체”로 확장되려 하고 심지어 식민주의의 주인공이 되려 한다.[각주:9]
이 괴물에게 식민성은 빨리 버려야 할 부끄러운 약자의 과거이다.


이렇게 생각하기에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은 기득권층에 속하고 역사를 자기 식대로 해석하려 든다. 억압적인 권력과 결탁해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 왔기에 그들은 식민성을 인정하는 순간 본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에게 식민성은 반드시 숨겨야 하는 기록이다.


식민성을 은폐하지는 않더라도 그 의미를 낮게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가령 최장집은 한국의 시민사회가 공익을 위해 참여하는 ‘적극적 시민’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그 “내면적 자아의 공허함, 내면적 정신세계의 황폐화”를 문제삼는다. 한국의 시민들은 “스스로의 가치와 내면의 정신세계를 갖지 못하고, 바깥에 존재하는 가치와 기준에 의해 그리고 여론의 헤게모니적인 힘에 의해 휩쓸리고 동원”되기 쉽다.[각주:10]
내면적 자아가 없어 외부의 환경에 휘둘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연히 그에게는 개인보다 제도와 대의기구를 통한 사회변화가 중요하다.


그런데 왜 내면적 자아가 공허하고 황폐해졌을까? 그의 분석처럼 반공이데올로기와 협소한 이념적 대표체계 탓일까? 하지만 원인은 조금 더 멀리 있다. 일제 식민권력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구분하지 않고 억압했다. 식민권력은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소화되지 못한 외래사상으로 배격하려 했고 이를 위해 공동체주의를 지속적으로 강조했다.[각주:11]
식민권력은 “식민지의 주민들을 통치대상으로 전락시키면서, 동시에 식민지적 질서 속에서 각 개인들을 스스로 그것을 유지, 재생산할 수 있는 주체로 만들려고 시도하였다.”[각주:12]


한국사회의 식민성은 단지 의식적인 차원에서 강요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식민성은 일본의 이에를 본 딴 가부장제도, 병영같은 학교와 기업만이 아니라 군대와 경찰이라는 폭력기구를 통해 실현되었다. 이런 가공할 폭력은 강자에 대한 자발적인 복종을 내면화하고 그 굴욕감을 약자간의 폭력으로 해소시켰다. 이런 사회에서 살아남았기에 내면은 황폐해지고 개인은 외부의 가치와 기준에 휩쓸리기 쉽다. 그리고 아직도 그런 식민성이 유지되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것이 한국만의 특징은 아니다. 프란츠 파농은 알제리를 분석하면서 식민권력의 폭력으로 인한 수치심과 공포이 원주민들의 자아를 붕괴시켰다고 얘기한다. “흑인은 ‘행동하는’ 인간이 아니다. 그 흑인의 목적은 (백인으로 가장한) ‘타자’가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타자만이 그에게 가치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각주:13]
이렇게 보면 식민지를 경험한 사회에서 근대적 개인의 출현은 불가능하다. 식민권력과 결탁해 승승장구해온 기득권층, 타자를 닮으려 애쓰는 지식인들 제외하면 말이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자유주의자들이 개인의 이름으로 한국사회에서 개인의 출현을 가로막아 왔다면, 최근에는 자율적인 개인의 출현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각자의 고유함과 독특성을 공통성 또는 코뮨으로 녹여내려는 흐름이, 자율주의나 코뮨주의를 실천하는 흐름이 한국에서도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제국에 맞서는 다중에 관한 논의들은 “개인성이 단순히 집단적인 것에 대립되는 것으로 되지 않으면서 그 자체로 인정되고 진실로 해방되는 커뮤널한 생활양식”을 추구한다.[각주:14]
자율주의는 개인과 집단성을 결합한 독특한 양식의 출현에, 내부의 차이를 서로 소통하고 함께 행동하면서 공통된 것(the common)을 ‘생산’하는 다중의 출현에 기대를 건다. 그리고 그런 다중의 저항이 제국의 주권까지 뛰어넘어 새로운 사회를 구성할 것이라 예상한다.


허나 그런 고유함을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파괴당해온 사람들은 그 고유함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학교를 그만두고 주유소나 편의점에서 알바를 뛰며 생활의 달인이 되어가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자율성은 긍정의 힘으로만 작용할까? 생필품을 구할 수 없어 가게나 공공시설을 터는 사람들에게, 4대강 살리기 때문에 농지를 잃게 된 농민들에게 노동거부는 어떤 의미일까? “‘~이(가) 없는’ 사람들―고용이 없고, 주소지가 없고, 주택이 없는 사람들― 모두는 실제로 부분적으로만 배제되어 있”고 “실제로 그들이 사회적․삶정치적 생산의 회로들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지를 더 많이 알 수 있다”는 네그리와 하트의 얘기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만큼의 설득력을 가질까?[각주:15]
사회적 안전망 없이 노골적인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도 차이를 서로 소통하고 함께 행동하면서 공통된 것(the common)을 ‘생산’할 수 있을까?


물론 가능성은 불현듯 찾아온다. 허나 그 가능성의 싹이 자라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땅에 씨앗을 심고 똑같은 조건을 마련해도 빨리 싹을 틔우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햇빛이 비치는 각도와 양, 땅의 질과 수분처럼 아주 미세한 차이들이 큰 차이를 만든다. 씨앗의 고유함도 있지만 이런 환경도 그 고유함에 영향을 미친다. 마찬가지로 개개인이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해서 그 가능성이 자동적으로 실현되지는 않는다. 식민지를 경험한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네그리와 하트가 구상하는 권력의 양면성과 다중의 네트워크는 다분히 당위적이다. 물론 ‘~되기’라는 능동성은 당위를 현실로 바꿀 잠재성의 실현을 전제한다. 하지만 저항할 수 있다고 해서, 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저항하거나 네트워크가 구성되지는 않는다. 저항이 어떻게 시작되는가라는 물음은 현실에서 조금 더 깊은 차원의 분석을 요구한다. 우리사회에서도 소수자운동의 가능성이 얘기되고 있지만 흑인여성도 여성인가라는 물음처럼 모든 소수자가 똑같은 소수자는 아니다. 예를 들어, 똑같이 학교를 떠났지만 대안학교를 다니는 청소년과 거리에서 생활하는 청소년의 처지가 같을 수는 없다. 이들이 서로의 삶을 낯설지 않게 보지 않는 공통의 장은 만들어질 수 있을까? 현재 한국사회의 상황을 보면 그런 장이 만들어지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코뮨주의에 대해서도 비슷한 의문이 든다. 코뮨주의 선언은 “가장 고독한 순간에도 우리는 고독한 채로 무리를 이룬다. 우리에게는 ‘고독’조차 ‘고독들’이다. 모든 것들이 더불어 있다는 것, 더 나아가 더불어 있는 것만이 실존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출발점”이라 선언한다. 타자들을 억압하는 공동체로 변질되었던 과거의 코뮨을 반성하면서 이 선언문은 코뮨주의를 “언젠가는 도달해야 할 세상의 이름이 아니라, 언제든 도달할 수 있고 언제든 실현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라 주장한다.[각주:16]


그런데 대안학교의 학생은 “대안학교의 가장 큰 장점이자 약점”으로 자율성을 꼽는다. 학생들은 “자율성은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성실하고 진지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약이 될 수 있다”며 자신의 성숙과 성장을 위해 “아이들이 알아듣고, 느낄 수 있는 언어”로 조금 더 사랑해줄 것을 요구한다. 또 “대안학교에서는 너무 ‘좋은 것, 건전한 것’만 가르치고 경험시킨다”고 딴지를 걸면서 그 역시 일종의 세뇌가 아닌지를 묻는다.[각주:17]
 놀기도 잘 하고 공부도 잘 하고 성품도 좋은 아이로 키우고 싶어하는 ‘부모들의 귀족학교’로 변질되어버린 대안학교는 더 이상 기성학교에 대한 대안이 아니다. 대안공동체의 상황은 이와 다를까?


매우 거칠지만 북친의 지적 역시 귀담아 들을 만하다. “아무런 분류도 등급도 조정도 시도하지 않는 접근법은 우리의 역사관을 통찰력있는 논리성보다는 조야한 절충주의로 축소시키거나, 의미와 보편성보다는 차이와 독특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상식적인 개개인이 자유 극대화를 지향하는 사회 운동을 재구성하도록 도와주기보다는 심리적인 안락의자로 숨어들도록 한다.”[각주:18]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건 차이나 고독보다 약자들의 삶이 자연스레 서로 엮일 수 있는 생활의 망일지 모른다. 일본에서 ‘아마추어의 반란’이라는 대안공간을 운영하는 마쓰모토 하지메는 그 점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개인 차원에서 아이디어를 내서 생활하는 것에 비해 가게를 통해 마을에서 공동체를 조직하면 훨씬 다양하고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대로 된 세상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우선 어중이떠중이가 모이면 공공의 재산을 많이 확보할 수 있다는 점, 신명이라도 나면 공공시설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 두자. 우리 가난뱅이, 얼간이, 오합지졸은 이제까지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결탁해서 무언가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동네를 둘러보면 여기저기 가난뱅이 천지인데도 왠지 한 사람 한 사람 고독하게 살아간다. 그래서 시시껄렁하게 뼛골 빼먹는 직장에서 일만 죽도록 하거나 중류 계급인 척하면서 번화한 중심가로 놀러 가기도 한다. 하지만 가난뱅이 제군! 이제 그런 바보 같은 짓은 그만두자.”[각주:19]


다행히도 우리 사회에서도 바보짓을 그만두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터지고 있다. 고병권은 2008년의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한국사회에서도 “하나의 정체성으로 환원되지 않으면서도 절묘하게 서로 융합한 일종의 ‘질적 다양체’”가 등장했다고 평가한다. “아주 다른 커뮤니티들이 자신들의 색깔을 살린 채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국가와 개인의 이분법이 아니라, 비국가적이지만 공통적인 ‘공공성’을 형성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앞으로 수십 년간 한국 사회의 방향을 크게 좌우할 성취”
라는 지적[각주:20]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허나 그 성취는 여전히 가능성일 뿐이고 그 공공성의 실현은 여전히 어려운 과제이다. 조지 오웰은 너무나 냉정한 언어로 그 사실을 지적한다. “여기 중산층의 전형적인 일원인 내가 있다. 내가 계급차별을 없애기 바란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거의 모든 것은 계급차별의 산물이다. 나의 모든 관념은 (선악에 대한, 유쾌와 불쾌에 대한, 경박과 경건에 대한, 미추에 대한) 어쩔 수 없이 ‘중산층’의 관념이다. 책과 옷과 음식에 대한 나의 취향, 명예에 대한 나의 감각, 나의 염치, 나의 식사예절, 나의 어투, 나의 억양, 심지어 나의 독특한 몸동작도 전부 특정한 훈육의 산물이며, 사회 위계의 윗부분에 있는 특정한 지위의 산물이다. 그런 사실을 이해할 때, 나는 프롤레타리아의 등을 두드려주며 그가 나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고 말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이해하게 된다.…나를 철저히 변화시켜야 하며, 결국엔 같은 사람인 줄 모를 정도로 달라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노동계급의 현실을 개선하는 것으로도, 더 어리석은 형태의 속물근성을 억제하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삶에 대한 상류층적, 중산층적 태도를 완전히 버리기까지 해야 한다.…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번거롭게 자신의 습성과 ‘이데올로기’를 바꾸지 않고도 계급차별을 철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각주:21]


덧붙여 말하자면 대안을 추구하는 여러 운동들은 한국의 사회운동에 내재된 문제점들, 예를 들면 학벌이나 가부장성, 엘리트주의를 극복했을까? 즉 80년대 운동권 문화라 불리는 “위계질서나 보이지 않는 권위에 대한 순응성, 조직에 대한 충성도, 조직에 가족주의적인 가치관의 적용”은 이런 운동들 속에서 사라졌을까?[각주:22]
쉽게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렵다.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사실 자유주의, 자율주의, 코뮨주의를 막론하고 그 모두가 주목하지 않는 건 생태주의이다.[각주:23] 그들의 공통성은 인간들의 공통성으로 제한되고, 세계체제라는 개념 역시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개념이다. 세계체제가 생태계의 위기를 다루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 위기의 해법은 다분히 인간중심적이다. 생태주의에 대한 이런 무관심은 “합성 물질이든, 단순한 것이든 아니면 기계적이든 간에 이것들이 현존하는 생명체와 생태적인 관계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연 세계의 파괴는 정당화될 수 있다”는 위험한 사고방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각주:24]


허나 생태주의가 정녕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이성과 감성 모두에서 전일성(全一性)을 회복하도록 돕기 때문이다.[각주:25]
전일성을 회복하지 못한 차이는 서로를 보살피는 것이 남을 위한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차이와 독특성을 유지하는, 심지어 차이들의 어떠한 종속도 가져오지 않는 네트워크가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단절된 섬이라면 어떤 중요성을 가질 수 있을까?


함석헌은 고립된 개인이란 거짓말이고 인간의 사회조직은 “하나 하나의 개체들이 보다 높은 하나를 드러내는 방법”이라 주장한다.[각주:26]
그러므로 “각 개체가 다 전체를 가능성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전체의 발전은 개체의 발전을 통해서만 되게 되어 있다. 민족적인 본성은 개인의 자아 속에서만 볼 수 있고 발전시킬 수 있다.”[각주:27] 개인의 타락이나 제도의 불완전함이 아니라 전체의 통일이 깨어질 때 불안과 공포가 우리의 삶을 덮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 전체의 통일과 균형을 회복하는 일다. 그러려면 각자가 서로의 삶에 의존해 살고 있음을 인정하고 자기 품을 내어주는 게 필요하다. 차이와 긍정이 중요하지만 때로는 베풀고 내어주고 자기를 버려야 비로소 전체의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각주:28]


이것은 관념적인 얘기가 아니다. 마굴리스와 세이건은 이를 생물학적으로 증명한다. “진화의 원동력으로서 공생이 지니는 힘은 개체성을 확고하고 안정된 신성한 그 무엇으로 생각하는 현재의 통념을 가차없이 깨부순다. 특히 인간은 단독자가 아니라 복합체이다. 우리들 개개인은 여러 박테리아와 균류, 회충, 진드기 등 우리 피부와 몸속에서 살고 있는 생물에게 훌륭한 환경을 제공해 준다.”[각주:29]
보이지 않고 인정하지 않지만 이미 우리는 그런 복합체 속에서 생활하고 있고, 우리 스스로가 그 복합체를 파괴하고 있다.


영화 <아바타>의 주인공들은 서로에게 “네가 보여(I see you)”라고 말한다. 우리는 서로를 보고 있을까?


  1. 알랭 로랑 지음, 김용민 옮김, 『개인주의의 역사』, 한길사, 2001, 10~12쪽. [본문으로]
  2. “언제나 그렇듯, 어떤 유형의 사회에서든, 개인성이란 많은 이의 부러움을 사며, 엄중한 보호와 경호를 받는 소수만의 특권이다. 개인이 된다는 것은 대중에서 벗어나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얼굴이 널리 알려지고, 유명해진다는 뜻이다.”(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함규진 옮김, 『유동하는 공포』, 산책자, 2009, 64쪽) [본문으로]
  3. 박노자, 『나를 배반한 역사』, 인물과 사상사, 2003, 55쪽. [본문으로]
  4. 같은 책, 82쪽. [본문으로]
  5. 울리히 벡 지음, 정일준 옮김,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 새물결, 2000, 110쪽. [본문으로]
  6. 조한혜정, 『다시, 마을이다: 위험사회에서 살아남기』, 또하나의문화, 2007, 44쪽. [본문으로]
  7. 이나미,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 책세상, 2001. [본문으로]
  8. 장상환, “공병호: 신자유주의보다 더한 보수주의 찬미론자”, 최종욱 외, 『보수주의자들』, 삼인, 1997, 216쪽. [본문으로]
  9. 박세일, 『대한민국 선진화전략』, 21세기북스, 2006, 159~160쪽. [본문으로]
  10.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한국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후마니타스, 2002, 226쪽. [본문으로]
  11. 박세훈, 『식민국가와 지역공동체: 1930년대 경성부의 도시사회정책 연구』, 한국학술정보(주), 2006, 99~105쪽. [본문으로]
  12. 김진균․정근식, “서장: 식민지체제와 근대적 규율”, 김진균․정근식 편저, 『근대주체와 식민지 규율권력』, 문화과학사, 1997, 24쪽. [본문으로]
  13. 프란츠 파농 지음, 이석호 옮김, 『검은 피부, 하얀 가면』, 인간사랑, 1998, 191쪽. 그렇다고 파농이 자아를 찾으려는 시도를 포기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아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자아를 재포착하려는 시도를 통해서만, 그리고 그 자아를 음미하려는 시도를 통해서만 또한 자유의 지속적인 긴장을 통해서만 인간은 인간 세계를 위한 이상적인 존재 조건을 창출해낼 수가 있다. 우월감? 열등감? 타자를 만지고 타자를 느끼며 동시에 그 타자를 내 자신에게 설명하려는 그런 단순한 노력을 왜 그대는 하지 않는가?”(같은 책, 291쪽) [본문으로]
  14. 안또니오 네그리․펠릭스 가따리 지음, 조정환 편역, 『미래로 돌아가다』, 갈무리, 2000, 103쪽. [본문으로]
  15.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지음, 조정환·정남영·서창현 옮김, 『다중』, 세종서적, 2008, 168쪽. [본문으로]
  16. 고병권․이진경 외 지음, 『코뮨주의 선언: 우정과 기쁨의 정치학』, 교양인, 2007, 5~29쪽. [본문으로]
  17. “기획: 아이들, 대안교육을 까다”, 《민들레》67권, 2010, 6~45쪽. [본문으로]
  18. 머레이 북친, 문순홍 옮김, 『사회생태론의 철학』, 솔, 1997, 211~212쪽. [본문으로]
  19. 마쓰모토 하지메 지음, 김경원 옮김, 『가난뱅이의 역습』, 이루, 2009, 102쪽. [본문으로]
  20. 고병권, 『추방과 탈주』, 그린비, 2009, 107쪽. [본문으로]
  21.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위건부두로 가는 길』, 한겨레출판, 2010, 217~218쪽. [본문으로]
  22. 권인숙, 『대한민국은 군대다』, 청년사, 2005, 205쪽. [본문으로]
  23. 변화의 실마리는 보인다. 이진경은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그 경계를 근본에서부터 변환”하고 “인간을 착취하고 인간을 억압하는 권력에 분노하면서도 인간 아닌 것들에 대해서는 착취하고 쉽사리 버리거나 파괴하는데 아무런 불편함도, 부당함도 느끼지 않는 우리의 감각을 변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연이나 사물에 대한 관계의 변화 없이 코뮨주의를 적절하게 구성했다고 말해선 안 된다.”(이진경, “코뮨주의와 휴머니즘: 휴머니즘 이후의 코뮨주의”, 『코뮨주의 선언』, 226쪽) [본문으로]
  24. 머레이 북친, 『사회생태론의 철학』, 110쪽. [본문으로]
  25. “개인이 하루에 할 수 있는 많은 일의 하나로(푸리에의 조건을 따른다면) 유기 농업은 우리의 일상 생활이 갖는 다양성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고, 성장과 분해에 대한 자연적인 감성을 더욱 예리하게 만들며, 우리를 자연의 리듬에 순응시킨다. 따라서 오직 하나의 보기일 뿐이나, 유기 농업은 생태적인 사회에서는 단순한 영양 문제의 해결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사회적, 문화적, 생물학적인 자각이 있는 존재로서 우리의 일부가 될 수 있다.”(머레이 북친 지음, 박홍규 옮김, 『사회생태주의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8, 214쪽). [본문으로]
  26. 함석헌, 『들사람 얼』, 한길사, 2001, 34쪽. [본문으로]
  27. 같은 책, 42쪽. [본문으로]
  28. “밖에서 사람을 만나 술도 마시고 이야기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는 꼭 강가로 난 방축 길을 걸어서 돌아옵니다. 혼자 걸어오면서 '이 못난 나를 사람들이 많이 사랑해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감사하는 마음이 듭니다. 또 '오늘 내가 허튼소리를 많이 했구나. 오만도 아니고 이건 뭐 망언에 지나지 않는 얘기를 했구나.'하고 반성도 합니다. 문득 발 밑의 풀들을 보게 되지요. 사람들에게 밝혀서 구멍이 나고 흙이 묻어 있건만 그 풀들은 대지에 뿌리내리고 밤낮으로 의연한 모습으로 해와 달을 맞이한단 말이에요. 그 길가의 모든 잡초들이내 스승이요 벗이 되는 순간이죠. 나 자신은 건전하게 대지 위에 뿌리박고 있지 못하면서 그런 얘기들을 했다는 생각에 참으로 부끄러워집니다.”(장일순,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시골생활, 2010) [본문으로]
  29. 린 마굴리스․도리언 세이건 지음, 황현숙 옮김, 『생명이란 무엇인가?』, 지호, 1999, 343쪽. [본문으로]

 

지난 5월의 지방선거로 새로이 구성된 지방정부가 인수위 활동을 끝내고 첫 단추를 꿰기 시작했다. 선거결과로 드러났듯이 이번 지방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가 매우 높은 만큼, 그 첫 단추가 중요하다는 점은 상식이다. 그렇다면 진보적 지방자치를 위한 첫 단추를 어떻게 꿰어야 할까? 나는 공무원 사회의 인식과 행정체계를 진보적으로 바로잡는 것이 그 첫 단추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어느 자리에서 공무원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새로 당선된 시장을 ‘오너’라고 불렀다. 그 공무원은 새로운 오너가 왔으니 그의 생각에 맞게 업무계획을 새로 짜고 있다고 말했다. 인수위 활동이 끝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는 벌써 새로운 계획을 짜서 보고할 예정이라 했다. 기존의 계획을 근본적으로 검토할 시간이 부족하다보니 참여, 소통, 혁신같은 그럴싸한 단어들을 짜깁기한 계획이 마련되고 있었다. 이렇게 가시적이고 단기적인 성과를 강조하는 행정체계에서는 진보적 지방자치의 열매가 영글기 어렵다.


그리고 그 공무원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오너라는 말을 들으며 공무원 사회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담당 공무원은 선거결과와 관련 없이 계속 자리를 지키지만 단체장은 4년마다 바뀔 수 있다. 그래서 공무원들은 자치단체장의 성향이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그에 맞춰서 계획을 짜는데 익숙하다. 그러다보니 사업에 진심(眞心)이 없다.


더구나 진보적 지방자치의 주인공에는 단체장만이 아니라 지역주민도 포함되는데, 공무원들은 그 단체장을 선출한 지역주민들의 생각에는 그다지 관심을 쏟지 않는다. 공무원노조도 이런 부분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공무원들은 주민들과 함께 얘기를 나누며 사업을 계획하고 집행하고 평가하는 걸 꺼린다. 자신들의 생각과 판단은 공적이고 주민들은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얽매여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행정체계와 공무원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진보적 지방자치가 실현되기 어렵다. 그럴싸한 계획을 급히 마련해서 새로움을 강조하는 것보다 느리더라도 주민들과 함께 진지하게 새로운 계획을 마련하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새로이 당선된 자치단체장의 첫 단추는 이런 과정을 만드는 것이다. 아쉽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그런 노력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예를 들자면, 참여예산제도가 아무리 혁신적인 제도라 할지라도 주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없다면 그것은 결실을 거두기 어렵다. 그리고 주민들이 관심을 보이더라도 공무원들이 적극적으로 이 제도를 성공시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그 구상은 실패하기 쉽다. 사실 참여예산제도가 처음 실시되었던 브라질의 뽀르뚜알레그리시에서도 공무원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복잡하고 어려운 예산체계를 친절히 설명하고 인내력을 가지며 주민을 만나고 자신의 권한을 주민과 공유하는 공무원이 있어야만 참여예산제도는 성공할 수 있다. 그러니 주민들만이 아니라 공무원들도 다양한 교육을 받으며 자신의 인식을 바꿔야 한다.


물론 이런 과정은 결코 짧은 시간 내에 마련되지 않는다. 1년 안에 새로운 성과를 보여주려 하지 말고 4년이라는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며 조금씩 단계를 밟아가야 한다. 시민과 공무원이 함께 어울려 밥 먹고 놀며 즐기는 다양한 장들을 마련해야 한다. 사업 이전에 신뢰와 관계가 필요한데, 지방정부는 그런 것을 마련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단순히 생각을 바꾸라고 요구할 게 아니라 공무원들의 인식이 바뀌도록 사업의 계획, 집행, 평가에 관한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논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한다.


시장은 사장이 아니다. 사장은 자신의 판단과 능력에 의존하지만 시장은 끊임없이 시민들과 소통하며 판단을 내리고 시민의 능동적인 참여를 통해 능력을 펼쳐야 한다. 향후 1년 동안 단체장은 그런 장을 마련하기 위한 밑그림을 그려야 한다. 지금 당장 성과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 첫 단추를 잘 꿰야 진보적 지방자치가 성공할 수 있다.

영화 [아바타]에서 나비족은 인간과의 싸움에서 승리한다.
그들의 힘만으로는 결코 승리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들 없이 판도라 행성이 지켜질 수도 없었다.
자연을 지키려하는, 더 정확히 말하면 서로 공생하는 삶을 지키려는 그들의 강한 의지와, 그 의지에 울림을 받은 자연이 함께 판도라 행성을 지킨다.

신성한 나무의 신 에이와는 어느 한 편에 서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지만 제이크의 간절한 부탁에 귀를 기울인다. “우리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지구에는 더 이상 푸른 숲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파괴한 것입니다. 그들은 여기도 그렇게 파괴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도와주세요.”
결국 이런 마음의 공명(共鳴)이 권력의 힘에 맞서 승리를 거둔다.

청와대가 무식하게 밀어붙이는 4대강 사업도 이런 공명이 있다면 막을 수 있다.
지키려는 강한 의지만 있다면 자연이 우리와 공명할 것이다.

박래군이라는 이름은 예전부터 들어왔지만 본격적으로 알게 된 건 우리 각시를 만나면서부터이다. 각시의 인연으로 글로만 접했던 인권운동 사랑방의 박래군, 류은숙같은 사람들과 만나 얘기도 나누고 술도 한잔씩 나누게 되었다. 마침 인권운동이 지역의 풀뿌리운동에 관심을 두고 있기에 서로 얘기를 섞을 기회도 잦아졌다. 더구나 우리 각시는 박사모(박래군을 사랑하는 모임)의 주요회원이기도 해서 래군이형이 수배를 받던 중에 순천향대병원이나 명동성당을 찾아가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래군이형이 출소해서 그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얘기를 나누는 자리를 만들었다. '420일간의 불복종과 세상살이'라는 제목의 토크쇼(?)이다. 제 2의 용산이라 얘기되는 신촌의 두리반에서 진행된다. 간간이 만나 얘기를 들어왔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떤 얘기를 나눌지 기대된다. 막걸리 한잔 하면서 얘기를 나누는 자리이고 수익금은 전액 두리반에 기부된다니 한번씩 찾아서 얘기도 듣고 막걸리 한잔 나누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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