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몽똘 2014.06.13 10:07

 


하승우(땡땡책협동조합 땡초)


“그게 정말 대안이야?”, “본질적인 해결책이 맞아?”, 어떤 문제에 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흔히 받게 되는 질문이다. 그런데 이 질문이 나오는 순간부터는 토론이 어렵다. 합리성이 아니라 근본적인 믿음의 문제로 토론이 전환되기 때문이다. 근본과 본질이 중요하다는 점은 알지만 무엇이 근본이고 본질인가에 관한 생각은 모호해서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질문은 답을 찾기 위한 것인데, 보통 이런 질문들은 말문을 막는다. 말을 할 수 없으니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행동은 늦춰지고 대안은 아닐지라도 디딤돌이 될 수 있는 방법들은 바다에 떠보지도 못한 채 좌초한다. 그러면서 “야, 그거 예전에 해봤는데 안 돼!”라는, 선배라 불리고 싶은 사람들의 흐릿한 기억들이 후배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새로운 시도조차 가로막는다. 대안을 찾으려는 시도는 어느새 진부한 논리싸움으로 전락한다.

 

물론 이런 전락이 그런 물음을 던지는 개인들의 탓만은 아니다. 권력이 일상을 억압하고 자본이 노골적으로 착취하는 한국사회는 자꾸 이런 본질적인 질문들을 던지게 만든다. 제정신이라면 단 하루도 분노하지 않고선 살기 어렵게 만드는 현실은 다양한 혁명들이 있음에도 ‘단 하나의 혁명’, 모든 것을 한순간에 뒤바꿀 수 있는 혁명만을 상상할 것을, 아니면 그냥 냉소할 것을 강요한다. 단단하게 가로막고 선 현실의 벽은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어쩌면 호연지기일 수도 있는 자세를 가학적인 희망고문으로 만들기도 한다. 벽을 피해 우회하다 보면 맞닥뜨리는 건 변화보다 우리가 이 일을 왜 시작하게 되었을까라는 ‘초심’이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정말 열심히 하는’데, 기우뚱한 현실에서는 한순간 삐끗하면 동지(同志)들의 반대편에 서게 된다.

 

 

이러니 사는 게 어렵고 피곤하다. 피로도를 따지면 한국이 세계 최강 아닐까. 그리고 대안을 찾는 사람들일수록 더 피곤하다. 피곤해도 언젠가 낙이 온다고 믿을 만하면 기다리기라도 할 텐데, 그런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본질적인 질문과 피로에 지친 사람들의 갈증을 풀어줄 시원한 책 한권이 나왔으니, JK깁슨-그레엄의 『그따위 자본주의는 벌써 끝났다』(알트, 2013년)가 그것이다.

 

먼저 고백하자면 나는 그동안 여성주의를 추상적으로 인식했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용적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여성주의가 다른 학문체계를 자극하고 무너뜨릴 주요한 방법일 거라 생각만 했지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가능할지를 구체적으로 고민한 적이 없다. 민주주의 이론을 뒤흔들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양한 민주주의들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걸 구체적인 일상에 적용하지 못했다. 그런 무능함은 나 역시 기존의 관행에 길들여져 있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여러 ‘중심주의’에 대한 깁슨-그레엄의 비판은 내 정신을 번쩍 들게 해줬다(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함께 읽고 토론하며 공동의 이름으로 책을 쓰는 작업을 남성들이 과연 할 수 있을까, 이런 상념에 빠지기도 했다).

 

솔직히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많은 민주주의‘들’이 있음은 생각했지만 자본주의‘들’이 있다는 생각에는 미치지 못했다. 풀뿌리운동이나 협동조합운동이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대안이라고 믿지만, 중앙집권형 국가와 재벌 중심 경제의 결탁이라는 강력한 장벽을 넘어서려면 일단은 힘을 더 길러야 한다고 믿어왔다. 단단한 벽이니 우리도 더 단단해질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쯤이면 우리의 단단함이 저 벽을 뚫을 수 있을까? 매일 들리는 소식은 나조차도 가능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1. 자본주의 앞에서 쫄지마!


깁슨-그레엄도 아마 나와 비슷한 경험, 비슷한 고민을 많이 했고 어떤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다양한 경제diverse economy’라는 이름으로 깁슨-그레엄은 “자본주의 경제의 자연화된 지배를 무장해제하고 탈구시키며, 새로운 경제적 생성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내”자고 제안한다(15쪽).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에 그것이 가능하겠냐고? 깁슨-그레엄은 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유기체적 사회 개념, 영웅적인 역사의 서사, 진화론적 사회발전의 시나리오, 본질주의적 남근중심적 이원적 사고 패턴의 복합적 산물”(74쪽)이라고 비판한다.

 

시장과 비시장,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라는 이분법을 피해 그 내부의 다양한 균열들을 접하고 보고 관계를 맺어 가면 대안은 도래할 미래의 것이 아니라 이미 실현되는 중인 가능성이다.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의 관계를 위계적으로 설정하는 방식은 경제적 차이를 이론화하고, 자본주의 헤게모니 담론을 경제적 복수성과 이질성으로 보완할 가능성에 덫을 놓는다. 이 가능성을 해방시키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중요한 목표인 반본질주의 기획”이다(82쪽). 이 책은 본질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보다 이런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이 좌파의 전략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주장이 깁슨-그레엄만의 생각은 아니다. 그동안 균열을 찾아내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어왔다. 그 중에서 깁슨-그레엄은 중층결정에 바탕을 둔 포스트모던 맑스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적 여성주의 전략을 강조한다. 이 전략은 기존의 이론구조에 강한 충격을 준다. 여성주의자들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젠더관계를 재구성하려는 것은 개념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위계질서를 깨기 위해서이다. 남성과 대비되는 여성은 이미 그 자체가 어떤 틀에 갇혀 있다. 마찬가지로 깁슨-그레엄은 자본주의와 대비되는 비자본주의라는 구도를 거부한다. 말로는 쉬운데, 참 쉽지 않은 주장이다(이 주장의 오류가 아니라 곤혹스러움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룬다). 깁슨-그레엄은 이런 위계 때문에 “비자본주의는 이질성과 차이의 다양한 영역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헤게모니 담론에 포섭되는 것으로 재현”되고 자본주의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고 본다. 마치 “여성이 남성의 대립물이나 보완물이 아니라 특수성의 집합으로 인식되려면 남성 또한 특수성의 집합이 되어야” 하듯이, 자본주의도 그 자체로 통일되거나 완결된 틀이 아니라 특수한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렇게 자본주의를 특수한 것들의 공존으로 이해하는 순간, 비자본주의도 “긍정적이고 특수한 존재로 이해할 조건”이 마련된다(85쪽). 특히 깁슨-그레엄은 자본주의 경제가 없는 것처럼 말했던 가정경제를 끌어들임으로써 경제를 재구성한다. 즉 “가정경제의 다양성과 착취에 대한 강조는 가정 이외의 분야에서의 계급다양성을 이론화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준다.”(212쪽) 또한 깁슨-그레엄은 알튀세르에게 영향을 받은 중층결정이라는 렌즈로 보면 자본주의 각각이 환원불가능한 특수성을 드러낸다고 본다. 이렇게 “대문자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적 차이들에게 길을 양보할 때, 비자본주의적 타자는 단수성과 종속에서 해방되어 차별화된 다중성으로 드러날 잠재력을 지닌다.”(88쪽)

 

요즘 내 고민 중 하나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체념이 이 빌어먹을 사회를 지속시킨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자본주의의 착취와 영향력이지 대안이 아니다. 자본주의로부터의 탈출불가능을 얘기하는 순간, 자본주의는 자가발전하는 시스템이 되고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것으로 변한다. 그러면서 “지배하는 쪽은 독립적인 것”이 되고, “자신의 존재를 위해 자신의 타자에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이 망각”된다. “반면 종속되는 쪽은 상대방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지배하는 쪽과 달리 지배당하는 쪽은 항상 부정적으로 규정된다”(193쪽) 이런 인식틀을 깨지 않으면 현실에 순응하거나 체념하게 된다. 그래서인이 깁슨-그레엄은 파격적으로 마커스의 강간 스크립트 분석을 자본주의에 적용한다.

슬럿워크가 성폭력에 관한 고정관념에 도전하듯이, 마커스는 여성이 강간의 희생자라는 인식에 도전한다. “지배적인 강간 스크립트에 도전하기 위해 마커스는 상당히 다른 두 개의 행동 경로를 제시한다. 하나는 스크립트 자체를 내부로부터 변화시키는 것, 즉 희생자 역할을 거부함으로써 스크립트의 전형성에 도전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강간 스크립트에 각인된 섹슈얼리티 담론과 거기에서 도출되는 합법성과 자연스러움에 도전하는 것이다. 두 방법 모두 지구화에 대한 대안적 대응을 고려할 때도 도움이 된다.”(222쪽) 초국적 자본에 짓밟히는 불쌍한 노동자라는 서술에서,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노동은 자본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성이 남근을 비틀고 고환을 걷어찰 수 있듯이, 노동자도 자본가에 맞설 수 있고 때로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관계, 비자본주의 기업을 만들 수도 있다. 이렇게 마음을 먹어야 ‘삼성이 한국을 떠나면 어떡할까’라는 걱정보다 ‘어차피 삼성은 한국을 떠나지 못하니 그들을 제대로 바꾸자’라는 투지가 생긴다. 모든 악의 근원인 ‘신자유주의’는 우리가 만든 환상이다. ‘지구화의 희생양’이라는 도식을 버려야 비자본주의의 투기가 살아날 수 있다. 깁슨-그레엄은 “지구화의 각인들 중에서 다양한 과잉의 지점들을―즉 그러한 각인이 통제불가능한 것 혹은 확정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곳들, 혹은 비자본주의적 정체성이 새겨질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곳들을― 부각시킴으로써, 우리는 지구화에서 남성의 생식기나 남근의 속성을 약화시키고자 시도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247쪽).

 

이렇듯 파격적인 주장을 일삼지만 이 책은 어떤 분명한 답도 제시하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제시하지 못한다. 무엇을 규정하고 경계 지움으로써 그 속에 포함되지 않는 다양한 시도들을 말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깁슨-그레엄의 공동체 경제를 어떤 특정한 것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 속에 포함되지 못하는 시도들은 다른 시도를 가로막는 장벽으로 변할 수 있다. “사회와 경제의 재현들 그 자체가 하나의 탈중심적이고 무정형인 실재에 중심을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탈 중심의 실재 그 자체가 항상 서로 상이하니까, 또 항상 변화하는 외부가 이들에게 변화무쌍하고 모순적인 정체성을 부여하고 이들을 중층결정하니까 말이다.”(121쪽) 그러니 대안을 논하는 것이 다른 중심을 만들 필요는 없다.

 

이 책은 어떤 해답을 제공하는 것보다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 경제 현존 양측 모두에서 나타나는 이질공간heterospace을 해방시키려는 시도”(75쪽)이다. 이런 시도는 모든 형태의 착취를 한번에 없애겠다고 주장하지 않고 착취를 낳는 상황을 분석하고 그런 착취를 변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나 조건을, 다양한 주체들이 접합될 수 있는 과정을 찾으려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가령 이런 질문들이다. “으레 좌절된 자의 처지라고 여겨지곤 하는 반자본주의 주체의 부정적 이미지를 털어내기 위해 우리는 어떤 생각과 정서를, 어떤 기질과 태도를 지녀야 하며, 어떤 힘들을 길러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우리는 단순한 자본주의의 적대자를 넘어 ‘비자본주의’를 욕망하고 빚어낼 주체로 우뚝 설 수 있을까?”(22쪽)

 

깁슨-그레엄은 자본주의 헤게모니, 자본중심주의, 본질, 대문자 자본주의, 남근성을 전복시키려면 세 가지의 정치가 필요하다고 본다. “언어의 정치: 경제와 경제적 가능성에 대해 참신하고 풍부한 그 지방만의 언어들을 만들어 내기”, “주체의 정치: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주체로 육성하기”, “집단행동의 정치: 대안적인 경제조직과 공간들이 특정 장소에 싹틀 수 있도록 공동 협력하기”(12쪽). 이런 정치를 통해 이미 그 끝을 드러내고 있는 자본주의의 민낯이 드러난다.


2. 한국 사회의 특이성은?


사실 한국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비자본주의적 경제실천들이 있었으나, 한국 자본주의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거나 그 영향이 미미하다는 이유로 무시되어 왔다. 그렇게 평가할 수는 있지만 이미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을 경제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점에서 깁슨-그래함의 관점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편견을 부수는데 효과적이다. 아니, 강력하다.

 

다만 그 관점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는 여러 가지 경험들이 더 첨부되어야 할 것 같다. 이 책에서 깁슨-그레엄이 많이 거론하지 않는 건 국가이다. 한국의 역사를 반영하면 ‘그냥’ 국가나 근대국가가 아니라 식민지국가, 반공국가, 개발독재국가이다. 한국 자본주의‘들’의 발전을 가로막은 것은 바로 재벌을 뒷받침한 국가, 재벌과 결탁한 국가이기도 하다. 물론 깁슨-그레엄의 관점에 따른다면, 국가도 다양한 통치형태‘들’로 분해될 수 있다. 하지만 주체들이 어떻게든 시작할 수 있는 자본주의와 달리, 한국의 국가영역은 의지하는 주체가 진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국가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어렵고 국가에 진입할 수 있는 주체는 제한된다. 이는 다양성을 억압하고 중심성을 강요한다. 그리고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2010년)에 나오듯, 정부와 재벌은 ‘유착’이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는 단계를 이미 넘어서 ‘합병’의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이명박과 정몽준이 그 단계를 현실화시켰고 나오미 클라인은 이를 ‘재난 자본주의’라 부르기도 했다. 이런 국가를 고려하지 않으면 깁슨-그레엄이 말하는 정치의 가능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은 주체적인 역량이나 전략의 부재보다 주체의 등장 가능성 자체를 철저히 말살하는 구조적인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현실은 녹녹치가 않다.

 

이런 현실적인 어려움은 비자본주의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논하는 곳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금융회사를 논하는 부분에서 깁슨-그레엄은 “어떤 회사는 독립적 상품생산의 현장으로서 비자본주의적 성격”을 가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원주의 ‘밝음신협’같은 곳을 생각하면 그렇기도 하다. 따라서 모든 금융회사를 자본주의적이라고 부를 수 없기는 하다. 그렇지만 역으로 농협이나 수협, 축협같은 관제 협동조합이 존재하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특히나 이런 협동조합들이 “잉여노동을 집단적으로 생산하고 전유”하며 “생산관계에서의 이러한 차이들”을 낳지 않는다(90쪽)는 점을 고려한다면, 깁슨-그레엄의 관점이 조금 더 복잡해진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현실은 더욱더 복잡해진다.

 

이런 복잡함은 자영업에 대한 관점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깁슨-그레엄은 “라우즈는 미국 내 도시의 서비스산업에 종사하는 멕시코계 이주노동자들이 어떻게 임금노동자로서의 삶을 살아내면서 동시에 멕시코에서 소규모 가족농장이나 상점 운영과 같은 구분되는 삶의 형태를 유지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미국에서 임금으로 벌어들인 돈이 생산 투자금으로 흡수되어 멕시코 경제 안의 비자본주의적 활동에 투자되는 것이다.…이 경우는 감염의 메타포를 통해 만들어지는 생산적 불일치의 놀라운 사례이다”(242쪽)라고 주장한다. 알다시피 한국은 자영업의 비중이 매우 높은 나라이다. 그렇다면 이런 자영업의 활성화가 한국 자본주의 내에 다양한 틈을 만들어왔는가, 라고 질문하면 그렇지 않다는 답을 얻을 수 있다.

 

그건 우리 삶의 거대한 힘들이 재벌들로 흡수되고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정녕 한국의 자영업들이 비자본주의적인 경로를 만들고 있나? <알바연대>가 조사해서 발표하는 사례들을 보면, 많은 자영업자들이 ‘노동력의 판매’와 ‘인격의 판매’를 혼동하며 자본주의를 넘어선 착취논리에 젖어 있다. 이는 자본주의 고용과 착취에 대한 긍정적인 대안을 한국의 자영업이 자임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자영업자들이 영세 자영업자에 머물고 있고, 프랜차이즈에 종속된 자영업 노동자로 변하고 있다는 점은 그 가능성을 자신할 수 없게 한다.

 

또한 공정무역은 ‘원조가 아니라 무역’을 주장했지만 사실상 원조의 색깔을 벗어나지 못했고, 우리사주조합이 노동자의 개별화를 부추기며, 소액주주운동이 주주자본주의를 강화시키며,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이 비자본주의를 확장시키기는커녕 정부에 포획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작년 11월 깁슨의 한국 방문에서도 이 의문은 속 시원하게 풀리지 않았다.

 

아울러 깁슨-그레엄의 관점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은 농사이다. 굉장히 많은 경제들이 있을 수 있지만 살림살이의 기본은 먹는 것이다. 농업은 단지 산업의 문제로, 특히 1차 산업의 문제로 생각할 수 없고 그것이 대안경제의 핵심이라 얘기할 수 있다. 그래서 미즈와 벤홀트-톰젠은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도서출판 동연, 2013년)에서 명확하게 소농경제가 자급경제의 기초라고 주장하면서 “자급을 위한 생산수단인 땅에 대한 접근을 기초로 하는, 상향식의 상호관계를 통해 조직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연히 이런 어려움들이 깁슨-그레엄의 관점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건 아니다. 이 관점은 본질과 중심의 논리에 빠져 사람과 삶을 보지 못하는 이론, 도플갱어식 논리에 빠져 있는 이론을 극복하게 한다. 다만 이 관점을 한국 현실에 뿌리내리게 하려면 현장 활동가들과 이론가들이 마주 앉아 차분히 방법을 찾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다. 한국의 특이성을 찾고 다시 이론을 가공하는 그런 과정에서 어쩌면 우리는 정말 그 끝을 드러내고 있는 자본주의를 맞닥뜨릴 수 있을 것 같다.

신고
posted by 몽똘 2013.11.07 08:10

 

 

후카사쿠 긴지 감독의 영화 <배틀로얄 1, 2>은 실업자 1천만 명, 등교거부학생 80만 명이라는 일본의 가까운 미래를 다룬다. 일본정부는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학교의 한 반의 학생들을 무작위로 뽑아서 무인도에 가두고 3일 동안 한 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 죽이게 하는 ‘배틀로얄법’을 선포한다. 이 법의 목적은 한 가지!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경쟁’에 복종하도록 청소년들을 가르쳐서 ‘가치 있는 어른’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무인도에서 탈출한 청소년들은 <와일드 세븐>이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쌍둥이 빌딩을 폭파하며 모든 ‘어른’들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 《희망의 나라로 엑소더스》는 총이 아니라 미디어와 화폐를 들고 저항하는 일본의 청소년들을 다룬다. 더 이상 어른들에게 미래를 맡기길 거부하는 중학생들이 자신들에게 익숙한 인터넷과 미디어를 기반으로 기업을 만들고 호텔을 인수해 자신들의 직업훈련소를 만들고 어른들을 고용한다. 어른들의 세상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청소년들이 스스로 세계를 만들어간다.

 

이 두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바는 미래란 근본적으로 불확실하다는 점과 기성세대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기 어렵고, 과거의 지식이 쓸모없어지는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에 의지해 살아가야 할까? 분명한 건 혼자 살아남는다는 게 이미 불가능해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같이 살아남을 기반으로 공동체를 꿈꾼다. 영화와 소설에서도 삶을 살아가려는 이들이 선택한 방법은 조직화와 공동체이다.

 

그런데 이 공동체는 뭔가 과거의 공동체와 다른 느낌을 준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이들에게 공동체는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이 공동체는 과거의 공동체와 무엇이 다를까?


공동체는 비슷한 사람들의 모임일까?

 

 

프랑스의 사상가 장 뤽 낭시는 《무위의 공동체》에서 “공동체에 대한 사유나 욕망은 근대적 경험에 나타난 가혹한 현실에 응답하기 위해 뒤늦게 창조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근대로 접어들며 공동체가 사라졌다는 기독교나 휴머니즘의 안타까움은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던 공동체에 대한 환상일 뿐, 우리가 공동체라고 믿는 것은 부족이나 제국의 다른 형태였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낭시에 따르면, 공동체의 이상이라 불리는 ‘하나는 전체를 위해, 전체는 하나를 위해(one for all, all for one)’는 불가능한 이상이다.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타인들의 공동체”이고, 일시적으로 서로 일체감을 느끼는 상태를 만들 수는 있지만 그런 상태를 영원히 지속시킬 수 있는 사회는 없다.

 

공동체는 이미 규정된 것을 실현하는 관계가 아니라 구성원들이 만들어가는 관계이고, 사회 바깥에서 일방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무위(無爲)의 장소이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공동체라 불리지 않아도 사랑하고 우정을 맺으며 그런 공동의 관계를 사는 삶이 훨씬 더 중요한 장이다. 낭시의 논리를 따르면, 무엇을 공동체라 부를 것인가라는 물음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때로는 위험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무엇을 위한 공동체,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공동체라 말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공동체가 아닐 뿐 아니라 공동체에 포함되지 않는 타자들을 위협하거나 지배하려는 위험한 도구로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철학자 알폰소 링기스는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에서 “흔히 공통언어나 공통개념형식 같은 공통적인 것을 공유하고 국가나 도시나 제도같은 공통적인 것을 공립하는 다수의 개인들로 구성되는 것”이라 여겨지는 ‘합리적 공동체’가 타자를 배격한다고 비판한다. 타자의 얼굴을 마주보길 거부하며 “세계의 잡음을 제거하는 과정은 합리주의자가 되는 과정”이다. 주변의 무수한 웅성거림이야말로 우리에게 소통이 필요한 이유이고, 우리와 다르다며 배척한 사람들이야말로 공동체가 필요한 이유인데, 우리는 그 무거운 이유를 대면하지 않고 피하려 한다.

 

우리 삶에 필요한 다양한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들,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방인들, 그들과 우리가 마주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만 공동체가 출현할 수 있다. 타자를 마주할 때에만 우리는 공동체를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링기스는 우리에게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하며 그들과 동반해야 하는 근본적인 의무”가 있다고 얘기한다. “병원들에서든 빈민촌들에서든 외롭게 홀로 죽어가는 사람을 방치하는 사회는 급속히 자멸하는 사회이다. ‘죽어가는 사람과 우리가 함께 하는 공동체’는 ‘공통적인 것을 공유하고 공립하는 사람들과 우리가 함께 하는 공동체’와 어떤 관계를 맺을까?”라고 링기스는 묻는다. 직장에서 쫓겨난 노동자, 고향에서 내쫓긴 농민, 경쟁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이 죽어가는 한국사회에서 공동체를 꿈꾸는 이들은 무엇을 고민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이 두 서양 사상가의 철학은 우리에게 아주 낯설다. 우리에게는 공동체가 집단적이고 비슷한 느낌을 주는 집단인데, 이들은 그것을 단호하게 부정한다. 그건 공동체의 가면을 쓴 다른 무엇이라는 거다. 이런 해석을 동양과 서양의 차이라고 봐야 할까? 농업사회와 산업사회의 차이라고 볼 수는 있으나 동서양의 차이로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나와 우주의 전일성(全一性)은 이런 사상과 연결되기도 한다.

 

문제는 공동체에 대한 생각과 우리의 실제 삶이 매우 이질적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TV드라마 <전원일기>나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를 그리워 할 때도 있지만 실제 삶은 CCTV와 출입증으로 도배된 아파트촌에서 이루어진다. 마을공동체, 마을기업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사업으로 홍보되는 세상이지만, 바로 그 점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공동체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는 점을 반증한다.

 

자연스러운 공동체가 불가능해진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공동체를 상상하고 있다. 공동체의 진위(眞僞) 여부보다는 ‘우리가 원하는 공동체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우리는 정말 함께 살려는 준비를, 타자들을 환대할 준비를 하고 있나?

 

 


문턱있는 공동체의 번성, 환대하는 공동체의 소멸

 

 

안락하고 비슷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는 주로 그 공동체에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유지된다는 역설! 공동체에 사는 사람과 공동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철저히 구분된다.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근대》에서 현대의 공동체란 “그 내부의 모습보다는 울타리가 빈틈없이 경계된다는 사실로 특징지어진다”고 주장한다. 문턱이 만들어지고 울타리가 세워진 곳에서 공동체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 공동체들은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높은 울타리를 세우고 경비원들을 고용한다.

 

“끊임없이 예측을 불허하며 혼란을 가중시키는 사나운 바다에서 길을 잃은 선원들에게 안전한 항구, 꿈의 종착지를 약속”하는 공동체는 분명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림을 아름답게 그릴수록 그 상상은 공동체를 이상적인 것으로, 어떠한 잡음이나 혼란도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위험에 처한 몸 주변에 있는 분명한 위험들을 거부하고 밀쳐내고 싶은 욕구는 ‘외부’가 비슷한 것이 되도록, 외부를 거의 ‘비슷’하거나 일치하는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구, ‘저 바깥’을 ‘이 안’과 비슷한 형태로 다시 만들고 싶은 욕구로” 번진다. 이 욕구가 강렬해질수록 공동체의 문턱은 높아진다.

 

그리고 바우만이 지적하는 또 하나의 문제! 매일매일 즐거운 축제가 열리는 공동체는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공적인 공간으로서의 성격을 잃고 살만하지 않은 세상을 살만한 것으로 위안하는, 그래서 실제로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는 수동적인 삶을 정당화시킨다. 외부에 관심을 두지 않고 내부의 즐거움만 추구하는 공동체는 세계의 고통을 덜어주기는커녕 외려 그것을 심화시킨다.

 

 

이렇게 외부와 담을 쌓고 지내려는 공동체들이 있는 반면, 외부인들을 적극적으로 환대하는 공동체도 있었다. 도로시 데이는 노숙자들이 맘 편히 먹고 쉴 수 있는 ‘환대의 집’을 미국 곳곳에 세웠다. 도로시 데이에 관한 평전 《환대하는 삶》을 쓴 로버트 콜스는 환대의 집을 “복지국가라는 익명의 관료적 체계와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즉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방식으로 자선행위가 이루어지고 인정되는 곳”이라 설명한다. 환대의 집은 “창고 하나와 아파트 하나를 빌리고, 빵과 버터를 사고 커피를 만들고 수프를 준비하고 노숙자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옷가지를 구해 주고, 가능하다면 잠잘 곳을 마련해 주고, 가장 중요하게는 어떻게든 그들에게 우정과 애정을 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들과 함께 앉아 대화를 나눔으로써 그 비전을 현실화시키는 일을 함께 시작했다.” 이런 환대의 집이야말로 낭시나 링기스가 말하는 공동체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그곳에는 같이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는 동등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로시 데이가 환대의 집에만 관심을 쏟은 것은 아니었다. 가톨릭노동자신문을 만들었고 전쟁을 반대하는 일에도 앞장을 섰다. 도로시 데이는 “누군가는 거대 기업과 싸우러 나서야 하고, 누군가는 정부를 압박해 가난한 사람들을 돕도록 만들어야 하고, 또 누군가는 일하는 사람을 옹호해 주장을 펼쳐야 합니다. 워싱턴에는, 미국의 경제적 정치적 권력에는 등 돌린 채 공동체주의에 대해서만 끊임없이 이야기한다는 건 바보같은 일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서로 동등하게 마주보려면 우리는 그런 마주침을 방해하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눈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마주보며 함께 살려고 결심할 때 우리는 공동체를 ‘경험’한다.

 

문제는 폐쇄적인 공동체가 늘어나는 반면 환대하는 공동체는 계속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홀로 고립되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없듯이 고립된 공동체는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공동체가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이 아니라면, 안에만 신경을 쏟지 말고 밖을 주시해야 한다. 그렇게 낯설고 이질적인 것과 섞이면서 공동체는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위축되기도 하고 확장되기도 하며 존재를 이어간다.

 

 


공동체는 가족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바는 공동체를 가족과 일치시키는 것이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처럼 국가와 학교, 가정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는 건 속성이 다른 모임을 하나의 질서 속에 통합하려는 시도이고, 우리가 지향할 공동체의 모습은 아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에서 공동체를 표방하는 곳들은 지나칠 정도로 가족 중심이다. 공동체를 만들 필요가 주로 보육이나 교육에서 생긴다는 점이 그런 특성을 만들었다. 그러나 가족 중심의 공동체가 한국의 전통 공동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권정생의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묘사되듯이 공동체는 세상 만물을 품는 장소였다. 그리고 권정생의 작품에서 묘사되는 공동체는 가족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가족이 해체된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가족을 그리워하긴 하지만 그 가족들로만 공동체를 구성하자는 얘기는 어디에도 없고, 낯설고 찢어진 관계의 사람들이 서로 기대어 생활하는 곳이 바로 공동체이다. 가족의 사랑을 강요할 수도, 친구와의 우정을 조작할 수도 없는 곳이 공동체이다.

 

물론 가족이라 불리지 않던 사람들을 관계망 속으로 끌어들이고 더불어 산다면, 송해성 감독의 영화 <고령화 가족>처럼 ‘새로운 가족’이 구성되고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곳은 공동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가족처럼 얽혀 살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공동체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없애줄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 자체가 대안이라기보다는 공동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하려 하는가, 어떤 삶을 꿈꾸는가, 어떻게 세상을 바꾸려 하는가, 이런 질문들이 훨씬 더 중요하다.

신고
posted by 몽똘 2013.10.14 14:16

야간자율학습을 받는 우리에게 자원봉사는 그다지 매력적인 말이 아니다. 자율이나 자원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강요나 강제에 의한 것이 얼마나 많은가. “누구 자원할 사람?”이라며 돌아보는 가족, 교사의 눈과 마주칠 때마다 얼마나 불편한가. 이럴 거면 그냥 시키지 왜 자원하라고 하는 거야?

 

지금도 공공장소에서 중고등학생들이 자원봉사 띠를 두르고 어색한 표정과 자세로 돌아다니는 모습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교육이 목적이라고는 하지만 자원봉사시간을 인증하면서 관리하는 건 매우 어색하다. 어느 누가 다른 이의 자발성을 평가할 수 있을까?

 

이런 한국 현실에 대해 이 책은 자발성 없이 쓰레기를 줍는 자원봉사란 강제노동과 다를 바가 없다며 돌직구를 날린다. 이 책은 자원봉사의 의미를 설명하고 활동을 권하는 책이지만 자원봉사에 관한 환상을 심어주지 않고 우리의 고정관념들을 바로잡는다.


자원봉사는 착한 사람들의 몫인가?

자원봉사는 단순히 착한 일을 많이 하자는 활동이 아니다. 저자는 어려움을 겪는 사람의 편에 서는 것이 자원봉사라고 얘기한다. 상대방의 ‘편에 서는’ 활동이기에 자원봉사자는 싸움에 끼어들 수도 있다. 착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 무조건 갈등을 피하기만 한다면 자원봉사는 어려운 일을 의식적으로 피하는 활동, 자신의 개인적인 경력을 쌓으려는 활동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편에 선다고 해서 자원봉사가 마냥 이타적인 활동은 아니다. 자원봉사활동을 통해, 그리고 새로운 만남을 통해 우리는 자기 속에 갇힌 자신을 대면하고 만날 수 있다. 자신의 이익이나 가치만을 위해 살 때와는 다른 자아, 본디 자신이 되고 싶었던 자아를 만나는 과정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자원봉사란 “자기 자신을 닦아 나가는 과정”이고 “‘착한 사람’이라는 자기 평가를 중요시할 것인가, ‘착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버리고라도 상대방의 입장에 설 것인가”라는 물음의 과정이다. 자원봉사는 일종의 연대이다. 상대방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체험하며 나의 의미를 되새기는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경력을 쌓기 위해 국제기구에 지원하는 자원봉사활동을 비판한다. “그 사람에게 가난한 이들이란 자신의 ‘경력’을 높이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현장에 가서 변하는 사람도 많지만, 변화를 가져오는 만남이 없다면 여전히 자기 사정으로밖에 상대방을 보지 못한다. 오직 자기 사정뿐이고 자원봉사를 하는 ‘체’ 하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과 불행을 과장하고 광고하는 활동은 자원봉사가 아니다.


자원봉사는 힘 있고 한가한 사람들의 몫인가?

자원봉사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활동이다. 그래서 경제적인 여유가 있고 시간도 많은 사람들이나 자원봉사를 한다는 편견이 있다. 하지만 한국의 자원봉사 현황을 보면, 중상위층보다 중하위층이 더 많이 참여한다. 자원봉사를 하려면 서로의 삶에 관심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힘을 가진 계층일수록 타인의 삶에 관심이 없다. 과부사정은 홀아비가 안다는 말이 있듯이,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자원봉사를 많이 한다.

 

그리고 성인만이 아니라 청소년이 할 수 있는 일도 많다. 저자는 ‘아이라서’ 할 수 있는 일도 많다고 강조한다. 똑같은 주장이라도 청소년들이 하면 사회적인 관심을 모으기 쉽다는 거다. 그리고 그런 효과성을 넘어 저자는 “학교를 벗어나면 모두 한 명의 인격체”라고 강조한다. 자원봉사는 자신의 인격을 만들어가는 활동이니 자격요건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자원봉사가 힘 있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 건 막아야 한다. 최근 한국에도 주민자치형 도서관을 내세우며 사서를 두지 않고 자원봉사를 강조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저자는 자원봉사자가 사서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고 “인건비를 싸게 하려고 자원봉사 활동이 이용되면 모두의 생활이 불행해진다. 내가 자원봉사를 해서 불행한 사람이 늘어나게 된다면,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비판한다. 타인에게 불행과 고통을 줄 수 있는 자원봉사는 하지 말라는 지당하신 말씀이다. 자원봉사라는 가면을 쓴 무보수노동을 경계해야 한다.


자원봉사는 정말 자발적인가?

자원봉사는 자발적인 활동이니 남의 강요에 의한 봉사는 자원봉사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억지로 시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하도록 만드는 강요가 있었다면? 가령 봉사시간이나 학점 때문에 봉사를 한다면 그것도 자원봉사일까?

 

저자의 관점에 따르면 그것은 자원봉사가 아니다. 자원봉사는 내가 즐거우니까 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자신에게 맞지 않으면 그 일을 선택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봉사할 자유도 있지만 봉사를 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자원봉사를 할 이유도 없다.

 

자발성은 자기 의지를 펼치는 과정이다. 그래야 자발적이라 말할 수 있다. 저자는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한다. “자원봉사라는 것은 자기를 다시 돌아보고 자기를 닦아 가는 것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자기 모습은 거울에 비춰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 너무 깊이 생각지 말고 해 보자. 자기 나름의 자원봉사를!”


자원봉사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자원봉사자들의 수가 늘어나면 세상이 바뀔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자원봉사자가 적을 때보다는 조금 더 나은 세상이겠지만 그렇다고 그 세상이 무조건 좋은 세상은 아니다. 쓰레기 문제가 심각하니 분리수거를 해야 하고 그와 관련된 일손도 많이 필요하다. 그런데 가장 좋은 방법은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것이고 쓰레기를 생산하는 기업이 책임지고 이를 회수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노력도 필요하지만 사회구조를 바로잡아야 세상이 바뀐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우선 문제의 원인을 조사해야 한다. 그 다음에 가장 큰 원인에서 순서대로 문제를 삼아 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자원봉사자는 자기 눈에 들어오는 세상만 보려 하지 말고 사회의 구조적인 부분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예를 들어, 생태계의 파괴가 경제발전과 무관하지 않고 빈곤이 전쟁과 무관할 수도 없다. 자연을 보호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자는 자원봉사가 파괴적인 발전과 엄청난 돈을 쏟아 붇는 전쟁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면 그건 ‘위선’이다.

 

그래서 자원봉사를 다루는 책이 글로벌 텍스(국제연대세), 다국적기업과세, 지구탄소세, 천연자원세, 무기거래세처럼 사회구조를 바꾸는 전략을 고민한다. 이렇게 구조를 바꾸려면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자원봉사와 관련된 다른 책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얘기이다.


자신의 삶과 세상을 뜨겁게 달구자!

자원봉사처럼 미지근한 방법으로 정말 세상이 바뀔까? 뜨거운 혁명이 필요한 게 아닐까? 저자는 “일시적으로 뜨거워지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생 동안 줄곧 계속해 나갈 수 있는 의지를 지니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 했다. 어리석게 보이는 사람이 진정 큰 역사를 일군다. 우리에게 힘이 없는 게 아니라 그 힘이 약한 것일 뿐이니 뭉치면 큰 힘을 만들 수 있다. 다만 묵묵히 역사를 밀고 갈 지속적인 의지가 중요하다.

 

스스로 선택한 일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큰 에너지를 품고 있다. 그리고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니 즐거움을 나누며 많은 사람들을 모을 수도 있다. 누군가의 명령에 따르는 자원봉사가 아니라 나와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자원봉사, 그 속에 세상을 바꿀 힘이 들어 있다.

 

“가장 나쁜 것은 포기해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망해 버리면 그 다음에 할 수 있는 일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절망한 사람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불평밖에 안 될 이야기 따위는 들어도 의미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포기하지 않고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 그것 자체가 ‘자원봉사’다.”

신고
posted by 몽똘 2012.09.07 10:50

권정생의 글을 일부러 찾아서 읽지는 않는다. 원고지에 꾹꾹 눌러쓴 언어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끔씩은 만수산 드렁칡처럼 좀 얽혀 살아도 될 터인데 그는 죽는 순간에도 자기 원칙을 지키며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사람은 못 되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고 다짐하는 우리에게 사람의 삶만을 말하기에 권정생의 글은 불편하다.

그래서 권정생의 사상을 평가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도 몇 번이나 책을 펼쳤다 덮었다 했다. 몇 페이지 읽고 마음이 무거워져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권정생을 자꾸 성인(聖人)으로 만드는 것은 그가 원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의 앎을 다루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권정생에 관한 이런저런 해석에 하나의 해석을 더 보태려 한다.

이 글은 권정생의 사상을 되짚어보려 한다. 「몽실언니」나 「강아지똥」의 작가 권정생보다 「팥죽 할머니」의 작가 권정생에 주목하려 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따뜻한 인간애나 자기희생보다 모순을 드러내고 바로잡으려는 반역자로서의 모습에, 애국과 국가를 반대한 반역자로서의 모습에 주목하려 한다. 그가 생전에 무엇을 불편해 했고 어떻게 반역하려 했는지를 말해야 권정생의 사상이 좀 더 온전해질 것 같다.

 

1. 사람의 사상

건강한 것이 어떤 건지 잊어버렸다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권정생의 몸은 평생 고통을 겪었고, 가족과 친구, 이웃들의 잇따른 죽음도 그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의 글 어디서나 고통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고통을 겪는 사람은 고통에서 무조건 벗어나려 하기 마련인데, 권정생이 택한 방법은 그 고통과 함께 사는 것이었다. 고통을 짊어진 채 산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 고통을 같이 짊어질 사람을 찾아 나서는 것, 그것이 그의 과제였다. 누구라도 피하고 싶을 그 고통을 대면하고 살았기에 그를 보는 이의 마음은 한편으론 감동을, 다른 한편으론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런데 이런 고통이 권정생 개인의 고통은 아니었다. 이 고통은 지금도 무수한 죽음과 고통을 대면해야 하는 한국사회의 고통이기도 했다. 권정생 스스로도 이 고통을 개인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고통은 벗어나면 안 되는 것이기도 했다.

함석헌의 글 중에 「하나님 발길에 채어서」라는 글이 있다. 그 글에서 함석헌은 자신이 퀘이커를 선택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묘사한다. “어떤 때는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스스로 나는 이상주의다 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을 실지로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기보다 어느 의미로는 도리어 너무 알아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안과 밖에 어떻게 먼 것, 나와 남 사이가 어떻게 떨어진 것, 앞이 어떻게 될 것이 너무도 빤히 되어 주저주저 하게 됩니다. 그러노라면 주위의 사정이 나를 몰아쳐서 가야 할 데로 가고야 말게 합니다. 가놓고 보면 역시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하게 되지만, 그것은 결코 내가 한 것 아닙니다. 생각했던 것은 하나도 실현해 본 것 없고 나간 것은 한 발걸음도 내가 내켜 디디었다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를 “이날껏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오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퀘이커가 된 것도 아마 잘돼서 됐다기보다는 잘못돼서 된 것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피할 수 없는 발길에 채인 느낌이 거기 있습니다. 두려움과 화평, 슬픔과 감사, 부끄러움과 자랑의 뒤섞인 것이”

권정생의 절판된 책 중에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종로서적, 1986년)가 있다. 그 책에 실린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라는 글에서 권정생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나사로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한다. “개들에게 헌데를 핥이면서 부자가 먹던 찌꺼기를 얻어먹던 나사로였지만, 그는 하늘나라를 볼 줄 알았다. 그래, 그것이면 족한 것이다. 나는 거지 나사로를 알고부터 세상을 보는 눈을 달리했다. 천국이라는 것, 행복이라는 것,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여태까지와는 거꾸로 보게 된 것이다.” 권정생은 이 글에서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에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 사람을 찾아다니는 사람으로 자신의 변화를 설명하고, 루쉰을 인용해 “아직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어린이가 있을지 모른다. 아이들을 구하라”라고 말한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면서도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처지, 그것이 권정생의 삶이었다.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 굴러가는 삶과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 하늘나라를 보게 된 삶에서 느껴지는 공통점은 숙명이다. 사실 분단과 내전을 경험한 나라에서 평화를 열망하는 퀘이커가 된다는 건 정치적인 자살에 가깝다. 그리고 폭력과 풍요로 “착하게 살 수 있는 곳이 없어진” 걸 알면서도 사람을 찾아 나서겠다는 건 종교적인 순교에 가깝다. 그런데도 두 사람이 그런 선택을 내린 것은 바로 우리의 역사 때문이다. “갈릴리 들판에서 그가 자기 민족의 수난사를 공부했듯이, 우리도 하느님과 함께한 우리의 민족사를 아이들에게 가르칩시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혼자서가 아니라 우리 인간들과의 공동작업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함석헌이 수난사를 공부하며 씨알을 찾았다면 권정생은 그 수난사에서 사람을 발견했다.

공동작업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하느님 나라에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함께할 씨알과 사람이지 제도나 기구 또는 제도나 기구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가 아니다. 수난을 겪어온 사람들에게 또 다른 복종과 굴욕을 강요하는 제도는 반역의 대상일 뿐이다. “나는 지금 20여년 전에 내가 구상하고 꿈꿨던 교회는 벌써 전에 잊었다. 교회는 새삼스레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와 온 우주가 바로 하느님의 교회”라는 권정생의 말은 그가 함석헌과 같은 꿈을 꿨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앞서 인용한 말에서는 당위를 넘어서는 어떤 절박성과 확신이 드러난다. 특히 권정생의 이야기가 ‘사람을 사랑하라’라는 당위를 넘어서는 것은 사랑할 사람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는 절박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절박성과 확신이 맞닿아 있는 이유는 “인간의 눈으로만 보지 말고 하늘의 뜻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존재함을 믿어야 “나의 동화는 슬프다. 그러나 절대 절망적인 것은 없다.”는 그의 말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권정생은 이 절박성과 확신을 품고 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권정생은 하느님과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었을까? 하늘나라를 볼 수 있는 나사로 권정생은 그 나라를 몸으로 살아가는 나라로 묘사한다. “입으로 설교하는 목회가 아니라 몸으로 살아가는 목회자가 있어야 한다. 밭을 갈고 씨뿌리고 김매고 똥짐을 지는 농군이 바로 이 땅의 목회자다. 창세기의 하느님나라는 말씀으로 되었지만 지금은 몸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하느님나라가 다시 창조되고 천국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 몸으로 살지 않고 수천 만번 주기도문만 외운다고 하느님나라가 이루어지는 건 절대 아니지 않는가.” 똥짐을 지는 목회자가 있는 세상, 부정을 규탄하는 용감한 시민이 있는 세상, 좀 더 춥게 좀 더 불편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 세상, 그곳이 바로 하늘나라이다.

그래서 하늘나라로 다가서는 방법은 가난이다. 가난은 몸을 쓰게 하고 불편하게 만들고 때로는 고통을 주지만 그걸 받아들일 때 행복도 찾아온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노동에 있”고 “노동은 가난이 무엇이고 고통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한다. 가난하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고 인간은 행복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가난은 행복의 필수조건이다. 권정생에게 가난은 결핍이 아니었고, 가난은 떳떳한 삶이자 평화와 행복의 기약이자 “함께 사는 하늘의 뜻”이었다. 마냥 행복한 건 아니지만 그 소박한 삶 속에 사람이 존재한다.

그런데 가난하지 않은 우리가, 곳곳에 풍요의 성전을 세우는 우리가 가난한 그의 글을 읽으며 불편하지 않다면 그건 좀 이상한 일이다. 권정생의 글들이 지금껏 그림책이나 동화로 널리 읽히는 걸 보면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을 고를 아이들의 권리를 빼앗고 싶지 않다며 책 소개 티브이 프로그램인 <느낌표>까지 거부했던 권정생인데 우리는 그 권리를 빼앗으며 권정생의 글을 아이들에게 읽히고 있다. 권정생이 강조한 건 몸으로 행복을 느끼는 건데 그걸 머리로만 느끼도록 만드니 모순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성장과 풍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회는 가난조차도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서 진정 가난한 삶을 조롱하는 게 아닐까. 그러면서 권정생의 불편한 이야기는 누구나 받아들이며 감동을 느낄 만한 말랑말랑한 이야기로 해석되고, 권정생이 고통을 견디며 찾아 나섰던 사람은 점점 줄어든다.



2. 애국자 없는 세상


권정생의 사상을 줄여 말하라면 주저 없이 ‘애국자가 없는 세상’이라는 시를 예로 들겠다. 이 세상 어디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평화로울 것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시는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라며 끝을 맺는다.이념은 버릴지언정 애국은 버리지 못하는 우리에게 권정생은 애국자가 될 시간에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라고 권한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사람들, 국사와 국익의 관점에서 세상사를 해석하려는 사람들에게 권정생은 자신이 겪었던 1944년 말의 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의 끔찍한 현실을 들려준다. 그 전쟁의 포화 속에 누가 있었는지, 왜 그들이 죽어야 했는지를. 전쟁의 비극을 몸소 체험한 그였기에 국가에 대한 반대는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생각이 다르고 이름이 다르다고 한핏줄끼리 원수가 되라고 강요”하는 분단상황이야말로 모든 문제의 원천인데, 권정생은 이를 힘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전쟁이란 “더러는 영웅도 되고 뜻밖의 횡재를 얻는 이도 있지만 대부분이 씻지 못할 상처를 안고 비극의 인생을 살다가 끝마”치는 비극일 뿐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전쟁은 단순히 “남침도 북침도 아닌 원격조정에 의한 약소국의 비극”이 아니다. 이것은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지식인의 해석일 뿐이다. 그 사건을 몸으로 살아야 했던 사람은 “아비와 자식이 서로 총구멍을 맞대고 싸우는 전쟁도 전쟁일까? 공비가 되어 숨어 다니는 아비가 있고 그 자식은 멋도 모르고 공비토벌가를 목청껏 불러대는, 그런 잔인한 비극이 또 어디 있을까?”라고 묻는다. 그리고 그 모순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어느 편에도 서지 말라고 권한다. 애국은 전쟁의 다른 얼굴이고, 마크 트웨인이 ‘전쟁을 위한 기도’에서 들려주었듯 전쟁의 깃발은 애국의 열광 속에 휘날리니까.

 

우리의 애국 깃발은 남과 북에서만 휘날리지 않는다. 우리 몸속에 DNA처럼 새겨진 반일감정에 대해서도 권정생은 “벚꽃이 일본의 국화라고 해서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여느 꽃나무처럼 벚꽃도 이 땅에 자라고 꽃피고 시들어 죽어가는 목숨일 뿐”인데 그것을 베어내는 건 또 다른 폭력이 아니냐고 묻는다. 국가주의에 물든 우리의 시선에는 잡히지 않는 생명들이 그의 시선에 모습을 드러낸다.

 

권정생의 글 곳곳에서 생명을 파괴하는 국가를 거부하고 그에 맞서려는 반역의 의지가 드러난다. 예수의 입을 빌어 권정생은 자신의 사상이 “무소유, 무계급, 무정부의 세 가지가 갖춰진 나라”, “국경도 인종차별도 없는 나라”, “모두가 한 형제이며 평등하”고 “아무도 다스리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법칙대로 사는 나라”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마치 꿈에서 덜 깬 듯한 소리같지만 법정스님의 『무소유』가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새누리당이 비정규직 차별금지를 외치는 세상이니 무정부만 실현되면 하늘나라는 멀지 않았다. 보수와 진보를 불문하고 국가의 눈으로, 마치 국가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은 한국 사회에서 권정생만큼 급진적인 사상가는 드물다. 권정생의 문학과 사상이 우리 사회에 절실한 이유는 국가로부터 벗어나 세상을 바라보고 사유를 확장시킬 수 있어서이다.

 

국가에서 벗어난 권정생의 소망은 이웃과 더불어 가난하게 사는 것이었다. “이미 주신 것을 가지고 함께 나눠먹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다. 그것이 인간이 만들어낸 경제정의나 사회주의라는 말로 표현되었을 뿐”이라는 명쾌한 논리는 교회를 세워도 뾰족탑이나 십자가, 간판을 없애고 오두막을 지어 맨마루 바닥에서 세상살이 얘기를 나누고 부처님 말씀, 점쟁이 할머니 말씀, 마을서당 훈장님 말씀도 듣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소망으로 드러난다. 교회가 사람을 찾고 사람에게서 배우는 공간으로 바뀌는 걸 그는 꿈꿨다.

그런데 권정생이 거부한 국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와 달랐다. 권정생에게 국가는 정부체계나 제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국가는 우리의 생활공간 곳곳에 존재한다. 권정생에게는 교회도 국가이고 학교도 국가이고 농촌도 점점 국가로 변해갔다. “이젠 농촌은, 삶의 터전으로서 농촌은 없다. 그냥 먹을 것을 생산해내는 식품생산단지로 변한 것”이라는 말처럼, 먹고 교육을 받고 생활하는 공간이 국가로 변할수록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권정생의 몸부림도 더 강해졌다. 그가 점점 더 완고한 근본주의자로 변신했던 건 그의 탓이 아니라 그걸 강요하는 세상의 탓이었다.

 

그럼에도 권정생을 바라보고 얘기하는 우리들은 그 꿈을 ‘은둔자’로 가둬 놓고 그 삶을 소비한다. 가둔다는 표현이 거북할 수 있지만 우리가 기꺼이 권정생의 편에 서고자 했다면 그가 세상을 계속 불편해 했을까? 평생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 했던 사람이 왜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까? “왜 이다지도 내 곁엔 사람이 없을까? 모두 기계이고, 로봇트야. 가슴도 없는, 돌뭉치거나, 솜뭉치, 아니면 고무풍선들 뿐이야.”라고 한숨을 쉬었을까?

 

“이 세상의 모든 교육은 선하고 아름답게 살기 위한 교육이 아니라, 좀 더 편리하고 풍요하게 살기 위한 교육”이고, “일등을 해야만 돈과 권력을 잡고 행복해진다는 논리”가 판치는 세상에는 그가 숨을 쉴 곳이 없었다. 권정생이 보기 싫어할 만한 끔찍한 세상을 자신이 떠받들고 있으면서도 자기 아이들에게는 강아지똥과 몽실언니의 아름다움을, 권정생의 삶을 얘기하는 건 ‘위선’이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우리가 그를 가둬놓고 그가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세상을 만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건 불편함을 제거한 착한 사람 권정생이 아니라 반역자 권정생이다. 국가에 반역하고 교회에 반역하고 풍요를 강요하는 경제에 반역했던 권정생이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이다.



3. 반역의 언어, 지방의 언어


권정생이 살아있었다면 지금도 많은 눈물을 흘릴 것이다. 약하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강정마을, 두물머리, 밀양, 청도, 삼척, 영덕, 곳곳에서 싸우고 있으니까. 그들이 곧 권정생이고, 농민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사람들이 그의 동지이니까. 언제쯤이면 그들의 눈물이 웃음으로 바뀔 수 있을까?

 

권정생은 전통 이야기를 아이들의 동극으로 각색한 「팥죽 할머니」에 자신의 혁명론을 담았다. 남편과 아들의 원수를 갚아야지, 갚아야지 하면서도 호랑이 앞에서 “힘이 없구나, 차라리 잡아 먹어라. 날 잡아 먹어라”고 외치는 건 이 땅의 농민들이다. “농사꾼을 통째 잡아먹으면 너도 죽는다”는 말에 “난 안 죽는다”고 호언장담하는 것은 바로 힘을 가진 기득권층이다. “힘이 인간을 지배하고 자연을 파괴하며 목숨을 짓밟아 버리는 것이라면 그건 힘이 아니라 바로 악마”라는 권정생의 절규는 그들을 향한다.

 

할머니가 쒀준 팥죽을 먹고 호랑이에 맞서는 것들은 알밤을 제외하면 송곳, 홍두깨, 멍석, 지게이다. 이 모든 것이 일하는 사람들의 도구이다. 팥죽을 먹고 힘을 낸 물건들이 함께 호랑이를 잡는다. 이제는 마음 놓고 농사짓고 무엇도 빼앗기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건 사냥꾼이 아니라 “하늘님은 언제나 농사꾼 편이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연대’이다. 강정마을의 주민들이 쌍용자동차 문제해결을 요구하고 용산참사를 경험한 주민들이 강정평화대행진에 참여하고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이 용산참사의 진실을 밝힐 것을 요구하는 것이 연대이듯, 이 강력한 연대는 무서운 호랑이를 실컷 두드려 패고 강물에 빠뜨려 죽인다. 이것을 보면 권정생은 자신을 희생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독재자와 억압자에게 반역하고 그를 제거하고 해방의 농악, 해방춤을 추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권정생은 억압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도 외부의 힘에 호소하지도 않았다. 「처음으로 하느님께 올리는 편지」에서 도리어 권정생은 “하느님 아버지, 제발 정신 좀 차려 주십시오. 지금은 깨어날 때인데, 하느님께서 도리어 정신없이 나쁜 곳에 이용만 당하고 계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나쁜 사람들의 힘을 거둬 가 주십시오. 진짜 하느님이라고 분명히 보여 주십시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힘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서러운 사람들의 아버지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 주십시오.”라고 요구한다.

 

「김목사님께」라는 글에서도 권정생은 마냥 겸손하고 복종하는 인간이 최고의 가치일 수 없고 겸손과 복종의 교리가 지배의 교리로 바뀌었음을 성찰한다. “사랑 사랑 하다 보니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될 사실까지 덮어 버리고 양가죽을 뒤집어쓴 이리 같은 사기꾼이 되어 버렸습니다. 겸손은 무조건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알량하고 비굴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복종만이 신앙의 도리로 알고 맹종하다 보니, 이젠 마귀의 명령에도 굽신대는 절대적인 착한 인간이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이현주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성서라는 책을 맹신하지 말자. 아닌 것은 아니고, 부당한 것은 부당하다고 분명히 말하자꾸나. 우리는 그래서 비굴하지 말자. 하느님이란 권력 앞에 아첨하는 못난 인간이 되지 말자. 우리는 천국엔 못 가도 영혼을 죽일 수는 없다. 불의가 가득 찬 천국에 가느니보다 깨끗한 지옥에서 살자.”라고 다짐한다. 권정생은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하느님께 제대로 일을 하라고 요구하는 반역자였다.

 

그는 폭력을 바로잡고 농민 편을 대놓고 드는 알밤이 되기를, 송곳, 홍두깨, 멍석, 지게가 되기를 원했다. 다만 “압제자를 향해 피를 흘리는 저항과 투쟁도 해야 하지만, 진정한 혁명은 자신의 삶이 바로서야 한다”며 권정생은 “무력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아닌, 밑바닥에서의 진정한 혁명”을 꿈꿨다.

 

권정생은 평화를 추구했지만 억압을 묵묵히 받아들이지 않았고 마냥 겸손하게 복종하지도 않았다. 권정생은 비슷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권정생은 시내의 한살림 식품가게에서 무공해식품을 산 뒤에 동네에서 자살한 농부를 떠올리며 “진짜 한살림은 이웃끼리 마을사람끼리 서로 사고팔고 주고받으며 살아야 되는데 가까운 이웃은 다 버리고 먼 데서 깨끗한 음식만 먹겠다고 한 것이 정말 잘한 것일까? 먹는 것만 깨끗하게 먹는다고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것일까? 정말 건강을 지킬 수 있는 것일까?”라고 물었다. 실컷 쓰고 편하게 살자는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런 삶을 바꾸지 않는다면 유기농이 무슨 의미일까? 제 아무리 좋은 뜻이라도 기본적인 원칙을 되짚는 권정생의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런 반역의 기반은 점점 사라졌다. “농촌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생명의 원천이며 정신적 고향”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미 농촌은 그런 고향이 아니다. 농촌의 언어였던 사투리는 사라졌고 “옛날 일본 식민지였을 때 우리는 말과 글과 쌀을 함께 빼앗겼듯이 이제 농촌의 말과 식량을 도시에 빼앗기고 있다.”

 

그런 세계에서 권정생이 주목했던 또 다른 반역의 방식은 언어, 즉 시의 언어를 살리는 것이었고, 중심의 언어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의 언어, 토착의 언어로 얘기하는 것이었다. 구비문학이 ‘창작문학의 어머니’일 뿐 아니라 “문화라는 이물질이 전혀 없는 순수한 농민들의 감정과 생각과 삶의 모습”을 반영한다고 생각했기에, 권정생의 작품은 풍부한 사투리를 그대로 옮겼다. 권정생은 매끄럽게 다듬어지기는 했지만 어딘가 거짓되어 보이는 표준어보다 아름다운 사투리를 좋아했다. 표준어는 지역의 자연에 맞춰진 삶을 부끄러워하게 만들고 표준화된 풍요를 강요했기에, 권정생에게 사투리는 의식적인 반역의 도구였다.

 

표준화된 언어로 정리되지 않은 삶 또는 정리될 수 없는 무수한 삶들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토착의 언어였고,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사투리는 반란과 저항의 언어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권정생은 시의 언어를 시들게 하는 자연적인 삶에 대한 이런 부끄러움을 거부했다. 아이들을 시인으로 만드는 건 교육이 아니라 바로 자연이다. “봄날의 비릿한 풋내와 작은 꽃들”, “여름날의 소낙비와 무지개와 지루한 장맛비”, “비지땀을 흘리며 들판에서 일하는 삶의 현장”, “고통의 대가로 얻어지는 가을의 풍성함, 겨울의 추위와 그 추위를 이겨 내는 생명들의 힘찬 인내”, “씨 한 톨 심어 놓고 싹이 트기를 기다리는 마음, 어미 닭이 품은 알에서 병아리가 깨기를 기다리는 마음, 보리 이삭이 패고 씨알이 누렇게 익어 가는 것을 지켜보는 마음”을 느껴야 비로소 시인이 될 수 있다. 시는 단지 몇 줄의 노래를 읊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의 언어라는 권정생의 말은 지금 시대에 반역할 무기가 무엇인지를 또 알려준다.

 

전쟁같은 경쟁과 획일화된 언어를 받아들이면서 힘 없는 사람들의 세상, 가난한 사람들의 세상이 만들어지길 기대하는 것은 헛되다. 지금 반역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런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런 세상은 오지 않는다. 우리는 이 반역의 언어를 살리고 반역자를 살리고 있는가?



4. 나오며


깔끔하고 예쁘게 만들어진 권정생의 책은 왠지 불편하다. 그런 점에서 새로 나온 『빌뱅이 언덕』보다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가 훨씬 더 권정생답다(절판된 책이 다시 부활한 건 반가운 일이지만). 그리고 새 책에서 예전 책에 실렸던 편지글이 사라진 건 참 안타깝다. 권정생의 삶과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였는데 말이다.

 

예를 들어, 이현주 목사에게 쓴 편지에서 권정생은 하나됨에 관해 되묻는다. “교인들과 ‘하나’가 되지 못해 괴롭다니, 현주는 욕심꾸러기구나. 대체로 지도자란 분들은 하나 되기를 원하고 있지, 오해하지 말고 생각해 보자. 우리가 지금 총화란 말도 곧 지도자인 그 분의 뜻대로 하나 되어 달라는 뜻일거야. 백 미터를 뛰는데도 똑같이 출발해서 똑같이 꼴인하라는 지도자의 기대는 억지가 되지 않을까? 사람은 다 다르다. 달라야 된다. 다르기 때문에 하나가 될 수 없는 거지 다른 이유는 없다. 하나 못 되는 것이 정상이고, 그것이 올바른 교육이고 착한 지도법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 왔고 주장해 왔다. 똑같은 것을 싫어하는 내 성미 때문인지 모르지만 하나되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을 게다. 물론 똑같은 것과 하나 되는 것은 다르겠지만 대체로 현주가 말하는 ‘하나’는 ‘나와 꼭 같기’를 원하는 것일 게다. 냉정히 생각해 보기 바란다.” 권정생은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해주길 원하지 않았을까.

 

권정생에게 문학은 삶의 문제를 드러내고 이를 대면하는 방식이었다. 삶을 드러내기 위해 많은 양의 책을 읽고 세상의 소식을 접하며 그는 고민했다. 그리고 이를 대면하기 위해 여러 작품을 쓰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성찰했다. 문학이란 “어느 시대나 착하면 잘 살 수 없”다는 점을 밝혀야 하고, “아동문학도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모두가 착하고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쓰고 읽는 것으로 되”도록 하는 게 권정생의 생각이었다.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애국과 풍요를 버리고 자연과 더불어 시를 노래하는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권정생과 그의 문학을 단순히 ‘착한 사람’, ‘착한 문학’으로 규정하는 게 불편하다. 외려 그의 삶과 문학은 편안하고 복종하는 삶과 문학을 뒤엎으려 했다. 권정생은 반역자였고 반역의 기운을 불사르다 숨을 거뒀다.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도 그는 시대에 반역했다. 사건이 의례화되면 그 정신은 사라지고 불편한 진실은 적당히 버무려진 의례가 된다. 권정생은 자신을 그렇게 기억하길 원할까? 추모 5주년에 그 삶을 다시 생각하며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그 세상에서는 평안하시길, 아니 그 세상에서도 반역하시길...

신고
posted by 몽똘 2012.05.18 11:01

"왜 잘사는 집 아이들이 공부를 더 잘하나?"(신명호 지음, 한울 아카데미), 이 책의 주요한 상대는 두 가지 논리이다. 한 가지는 아이들의 개인적인 자질이 학력을 결정한다는 논리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학력격차는 개인의 타고난 자질이니 사회적인 문제일 수 없고 사회적인 대안도 필요하지 않다. 허나 계급차이가 학력의 차이로 드러나는 학벌사회 한국에서는 이미 설득력을 잃어가는 논리이다.

 

다른 하나는 부모의 사교육비 지출이 아이들의 학력을 결정한다는 논리이다. 언론에 간간히 등장하는 이 논리는 소득수준 상위 10%와 하위 10%의 사교육비 지출을 비교하며 교육불평등의 문제를 지적한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소득층도 활용할 수 있는 EBS나 인터넷 강의의 비중을 늘리자고 주장한다.

 

이 책은 이 두 논리 모두를 비판하면서 ‘사회계층간 학력자본의 격차와 양육관행’에 주목한다. 학력자본과 양육관행이라는 두 가지 변수는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을 자녀 교육에 투여하는가?’가 아니라, ‘자녀교육에 왜 그리고 어떻게 돈과 시간을 투여하는가(또는 왜 투여하지 않는가)?’”라며 물음을 바꾼다.

 

왜 고학력 중산층의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하는가?

 

고학력 중산층 부모들은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아이에게 물려주려 하고 그런 지위의 상속에서 교육(학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저자는 이들에게서 교육열망이 일상화되고 자녀들에게 의식화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아이들 스스로 학습열의를 가져야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점을 알기에, 부모는 다양한 방법으로 아이들을 옥죈다. 공부 열심히 하라고 잔소리를 할 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며 자존심을 건드려야 한다. 소위 ‘엄친아’가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중산층의 아이들에게 공부의 목적은 부모의 지위라는 확고한 상징으로 드러나고 이를 일상적으로 되새기게 된다. 그런데 아이들만 노력해서는 이 세습과정이 완성되지 못한다. 한국의 입시교육은 전략과 전술을 요구하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녀로 하여금 공부에 몰입하도록 자녀 자신의 생각과 태도를 주조하는 행위”가 필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모가 전략과 전술을 세워 “자녀의 나아갈 방향을 부모가 대신 판단하고 결정해주는 개입”도 필요하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통해야 신분세습이 이루어질 수 있다.

 

여기서 저자는 매우 중요한 지적을 한다. 분명 개인적인 특성이 학업성취욕을 자극할 수 있지만 “저학력 저소득층 가정에서 명문대를 진학한 자녀들은 이러한 성향이 가정환경, 즉 부모에 의해서 형성되기보다는 타고난 성격으로 주어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면 “고학력 중산층 가정에서는 일찍부터 공부가 성인으로서의 성공에 가장 확실한 열쇠라는 믿음을 끊임없이 주입하고, 교육제도에 순응하도록 습관을 들여놓았기 때문에 자녀의 학업열의가 높아”졌다. 아무리 좋은 자질을 타고나더라도 그것을 발전시킬 조건에 있지 않으면 자질은 사라진다. 이것이 정녕 공정한 조건인가?

 

왜 개천에서 용 나는 비율이 떨어지는가?

 

그래서 저학력 저소득층의 아이들의 열의는 계속 떨어진다. 용의 비율이 떨어지는 것은 아이들의 탓이 아니라 교육열망이 없는 부모들의 탓이다. 중산층들의 강력한 세습욕망이 저학년 저소득층에겐 없다.

 

이건 우리의 상식과 어긋난다. TV드라마와 영화에서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술 취한 아버지들의 공부하라는 ‘꼬장’아닌가? 저자는 외려 그런 꼬장이 아이들의 학업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부모의 사회적 지위의 격차는 자녀의 학업열의와 교육열망에 영향을 주어 학업성적의 격차를 벌려놓는다”고 지적한다. 즉 저학력 저소득층이 공부를 강요할 수는 있지만 그들에게는 자녀들의 몸과 마음 깊이 교육열을 심어 줄 수 있는 과정, 가령 “정신과 마음을 길들이는 것뿐 아니라 몸도 길들여서 어릴 때부터 공부 습관이 배도록…규칙적으로 책상에 앉아 공부하도록 통제를 하고, 주의를 산만하게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요소, 즉 컴퓨터, 텔레비전, 운동, 친구 등에 대한 접근을 선별적으로 제어하며 가능한 한 학습활동에 도움이 되는 것 이외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도록 유도”하는 과정이 없다. 중산층의 전략과 전술이 없다.

 

저소득층이 그런 전략을 고민하지 않는 실질적인 이유도 있다. 왜냐하면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현실이고, 그 계층의 노동시장에서는 학벌보다 실적과 근무태도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저학력 노동자층은 설사 높은 학력자본의 가치를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이동해야 할 ‘사회적 거리’”가 너무 길다는 점을 알고 있다.

 

격차를 해소할 방법은 있는가?

 

저자의 결론에 따르면 학력격차를 낳는 건 “굳이 부모가 자녀에게 직접 말로 표현하고 행동으로 압박하지 않더라도 은연중에 자녀의 학업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양육과정이다. 그래서 저자는 비관적이다. “애석하게도 부모의 학력과 직업이라는 조건은 정책적 개입을 통해서 변화시키기 어려운 요소”이기 때문이다. 결국 저자는 학력격차를 낳는 사회적 격차를 해소하고 사회적 안전망을 확대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제안을 한다.

 

결론도 좀 심심하지만 그보다 더 심심한 건 글의 형식이다. 박사논문을 크게 손보지 않고 책으로 만들었기에 논문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책을 읽는 건 쉽지 않다. 사회적으로 더 깊이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면 좀 다른 글쓰기가 필요할 듯 싶다.

 

그리고 한나 아렌트는 『공화국의 위기』에서 가난한 아이들의 성적이 부진하다는 잘 알려진 연구결과가 있고 그 부진에 어려 가지 ‘깊은’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어떤 천재라도 배고픈 상태에서 공부하기 어렵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라고 얘기했다. 깊이 연구하지 않아도 그것은 사실이고, 외려 그것에 관한 깊은 연구들이 이 명백한 사실을 다양한 ‘깊은’ 원인들로 감춘다는 것이다.

 

나는 교육과 관련된 한국의 연구들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학력격차가 신분을 세습한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교육의 관점으로 보면 세습한 이나 배제된 이나, 고학력자나 저학력자나 온전한 주체적 인간으로 살아가기 어렵다. 그래서 현재의 경쟁에서는 절대적인 승자가 존재할 수 없다. 승자는 시스템을 짜고 자들뿐이다. 그것이 우리 교육의 명백한 문제점이다.

신고
posted by 몽똘 2012.05.01 22:57

총선이 끝나고 ‘멘붕’ 상태에 빠졌다는 사람들이 많다. 헛된 기대를 품게 했던 SNS 세계를 잠시 떠났다가 복귀하는 사람들도 있고, 자신이 보고 싶은 현실만 봤다는 뒤늦은 후회(?)가 나오기도 한다. 예전에는 정보가 부족해서 판단이 어려웠다면 이제는 정보가 너무 많아 판단하기 어렵다고도 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가 세상을 해석하고 소통하는 방식에서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그래서 때로는 세상에 널린 텍스트들의 의미를 파헤치고 숨은 뜻을 드러내 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문화평론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내가 문강형준이라는 문화평론가에 주목하는 이유는 세 가지이다.

 

하나는 엄청난 성실성이다. 한때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한 달 동안 읽고 듣고 본 텍스트들을 정리해서 올리곤 했다. 그 리스트만을 보고 자괴감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그는 많은 책과 드라마, 영화, 다큐멘터리, 쇼 프로그램 등을 보고 음악을 들으며 문화의 사정을 읽는다. 그 리스트만 보고 있어도 일정한 흐름을 느낄 정도였다.

 

그리고 그가 주목하고 있는 키워드이다. 이념이 사라졌다며 방황하고 울부짖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 토대를 다시 다지려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냥 ‘말빨’만 난무하거나 너무 무겁고 진지하다는 푸념만 있다. 그 속에서 문강형준은 그 이념을 세우기 위해 현재의 무덤을 파는 사건인 ‘파국’에 주목하고 이 흥미로운 키워드로 세상을 해부한다.

 

더구나 문강형준은 외국에서 학위를 받고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꾸준히 인터넷 카페와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사람들과 소통해 왔다. 차근차근 기본적인 초식부터 깊은 내공까지 다져 온 지식인이라 더 반갑다. ‘내가 진실을 알려 주마’, ‘내가 제일 잘났어’ 식의 수사는 이제 너무 지겨우니까.

 

 

 

 


파국은 TV에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문강형준의 책이 마냥 쉽지는 않다. 우리에게 낯선 개념이나 이론가들의 이름이 수시로 튀어나온다. 호흡도 좀 빠르고 여러 가지 텍스트들이 엉키기도 한다. 하지만 여유를 가지고 속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그림이 보인다. “기대하고 있던 서사가 갑자기 뒤집히는 순간”을 뜻하는 파국이라는 그림이다.

 

우리는 세상이 바뀌길 바란다. 진보든 보수든 지금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 바뀐 세상이 자신에게 조금 더 나은 것이길 바라며, 서로 다른 꿈을 꾸며 우리는 변화를 요구한다. 문제는 그런 변화를 강요할 힘이다. 우리에겐 그런 변화를 강요할 힘이 없기에 변화는 언제나 우리를 배신하고, 변화의 빠른 속도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고 좌절시킨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심한 우울과 좌절은 변화를 바라지만 정작 어떤 변화를 바라는지 모른다는 사실에서 온다. 내가 바라는 세상을 그리려면 나 자신이 드러나야 할 텐데, 나는 누구인가? 가장 기본에서부터 막히니,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은 사람들에게는 대세를 따르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삶이 생존이 되어 버린 사회에서는 귀차니즘이 대세이다.

 

문강형준은 이 무기력한 주체를 ‘좀비’라 부른다. 오, 좀비라니. 서늘함이 가슴을 슥 가른다. 설명은 더 서늘하다. “파국 상황에서도 ‘묵묵히’ 걸어 다니며 자신의 식욕을 채우는 ‘일차원적’ 존재”이자 “완벽하게 자유롭지만 완벽하게 속박된, 인간의 형상을 했지만 인간이 아닌, 포식하면서 소진하는, 살아 있으면서 죽어 있는, 존재이면서 비존재인, 주체이면서 반주체인, 노예이면서 소비자인, 결핍이면서 과잉”인, “바로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의 온갖 모순을 체화”한 존재, 그가 바로 좀비이다.

 

우리는 아직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은가? 모순을 체화한 존재이기에 우리는 핵발전소가 터지는 광경을 두려워하면서도 원자력 르네상스를 꿈꾸고, 착한 초콜릿과 착한 커피를 먹고 마시며 제3세계의 기아가 사라지길 기대한다. 모든 게 다 신자유주의 때문이라 욕하면서도 TV에 나오는 각종 오디션‘쇼’를 즐긴다. 그래도 아직은 인간이라고? 좀비 영화들에 항상 나오는 장면. 좀비에 물린 사람들은 꼭 그 사실을 감추고 나중에 좀비로 변해 사람들을 공격한다. 좀비로 변하는 건 시간 문제이다.

 

물론 TV만 보고 있으면 아직도 여유는 있는 듯하다. 뭐든 한 가지만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들이 사라지지 않고 그런 신화를 부추기는 멘토들이 등장하니 말이다. 내게는 아직 기회가 오지 않았을 뿐이라며, 내 자신에게 얼마나 충분한 기회를 줘 봤냐며, 언젠가는 치료제를 찾을 수 있을 거라며 기대를 갖지만 모든 기대는 헛되다. ‘아직 인간’은 곧 좀비로 변신해 동료들을 공격할 예정이다.

 

문강형준은 〈나는 가수다〉(이하 나가수)와 포르노그래피에서도 같은 그림을 본다. “‘야동 폐인’과 ‘나가수 폐인’은 공히 중독자”로서 “포르노그래피와 엔터테인먼트는 창조 대신 중독을 통해 관람객을 확보하”고 “탈락자의 자리를 새로운 가수로 보충”하지만 결코 새로운 창조는 없다. 온가족이 모여 앉아 〈나가수〉를 보며 나누는 품평회는 화목함이 아니라 파국의 전주곡이다. 서로에게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는 장은 사라지고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생존을 놓고 경쟁적으로 점수를 매기며 만족하는 장만 남았다. 그것은 치료제가 아니라 좀비에게 물린 상처를 감추는 위장막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무한도전〉에 대한 문강형준의 비평을 가장 거북해할 것 같다. 나랑 같이 사는 사람이나 내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무한도전〉을 좋아하고 MBC 파업의 가장 큰 아쉬움으로 〈무한도전〉의 결방을 꼽는다. 하지만 문강형준은 이 프로그램에도 칼날을 들이댄다. “연예인들의 몸과 일상을 쥐락펴락하며 ‘판을 깔아 준’ PD들은 방송 자막을 통해 이들을 진정한 ‘평균 이하’로 묘사하”고 “죽도록 일하라고 해서 죽도록 했더니 죽도록 했다고 비아냥”댄다. “열심히 뛰어다니는 〈무한도전〉 멤버들에게 점심을 주지 않아 바나나 하나 가지고 서로 싸우게 만들고 이런 모습을 한 발짝 물러서서 조롱하는 제작진의 태도”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무책임함이다.

 

소위 ‘개념 프로그램’으로 꼽히는 〈무한도전〉에 이런 혹평을 하다니.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있다. 〈무한도전〉이 아무리 사회의식을 담아도, 다양한 삶의 단편들을 담아도, 그것이 계속 TV에 방송될 수 있는 건 말랑말랑한 감동 때문이라는 점이다. 스쳐 지나가는 에피소드 이상으로 사회의식 같은 것을 전면에 내세우면 〈무한도전〉은 더 이상 TV에 방송될 수 없다. 혁명은 TV에 나올 수 없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김진숙과 쌍차, 문정현 신부님을 찾아 SNS를 헤매는 건 TV에는 ‘인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희극적이고 말랑말랑한 즐거움만이 파국을 감추는 건 아니다. 때로는 강력 사건도 그것을 은폐한다. 문강형준의 ‘강단剛斷’이 가장 드러나는 비평은 우리 사회가 한 명의 ‘악인’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 대한 비판이다. 좀 길지만 곱씹을 만한 내용이다. “‘나영이 사건’에 관해 들끓는 분노의 여론과 그것을 받아서 증폭시키는 언론들, 그리고 ‘이때다’ 하면서 범죄자의 엄정 처벌을 주장하는 대통령의 모습에서 참으로 구역질 나는 냄새가 진동한다. 소녀들을 성적 대상으로 만들면서 즐기는 대중과 그 소녀들을 데리고 돈을 버는 연예 기획사들, 구조적인 모순보다 사건의 선정성을 부각시켜 여론화하는 언론들, 사회를 생존 경쟁의 전쟁터로 만들고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죽음들을 빚어내면서도 성폭력이나 연쇄살인만을 ‘강력 범죄’라고 부르며 사뭇 비장한 척하는 정치인들. 이들이 ‘공모’해 ‘술 취해 여자아이를 성폭행한 50대 남자’ 한 명을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면서 돌팔매질을 해 댄다. 가장 취약한 사람을 성폭행한 가장 취약한 남자. 이 둘이 가해자와 피해자 고리 속에 들어가 논쟁의 중심이 되어 있는 사이에, 우리는 모두 자신이 가진 알량한 편안함을 ‘축복’으로 알면서 또다시 더 큰 폭력의 질서 속에서 남을 짓밟고 이용하고 합법적으로 희롱하면서 ‘밥 먹고’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진짜 심각한 ‘사건’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일상의 악은 악인 뒤에 숨고, 우리는 악인에게만 돌팔매질을 해 댄다. 좀비가 등장한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무조건 좀비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 이 자에게 돌을 던지라는 예수님 말씀은 일단 저놈부터 조져 놓고 보자는, 나부터 살고 보자는 우선순위 뒤로 사라진다.

 

이렇게 세상이 끝으로 치달아도 파국은 TV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래도 우리는 멀쩡할 거라는 환상이, 우리는 안전할 거라는 근거 없는 기대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세상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많지만 그 불만이 파국으로 터져 나오길 바라는 사람은 없다. 좌우를 막론하고 파국의 원인인 자들이 어떻게든 파국을 피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들은 파국을 준비하지 않는다.

 

이번 총선 때 소위 김용민 파동을 보며 문강형준이 트위터에 남긴 말이다. “김용민을 공천할 때부터 이런 사단이 날 줄 알았다. 한국에서 정치가 ‘인기투표’가 되고, 이명박 개인에 대한 복수의 엔터테인먼트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후보를 감싸는 세력이 ‘진보’라는 말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김용민 막말보다 더 추악하다.” 이래서 나는 그를 사랑한다.

 

 


시대는 개판인데 멘토들은 다 착하다!

 

그렇다면 어떤 출구가 있는가? 좀비를 인간으로 바꿀 치료제는 어디에 있는가? 많은 좀비 영화들에서 이미 확인되었듯이 출구나 치료제는 없다. 우리는 그런 것이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조금 맘을 편히 먹는다면 좀비에게 물린다고 죽지는 않는다. 그냥 좀비가 될 뿐이다. 대다수가 좀비인 세상에서는 인간들이 사냥을 당하니 좀비가 되는 것도 하나의 생존(?) 전략이다.

 

한때 팟캐스트 1위를 차지했던 〈나는 꼼수다〉도 그런 전략이다. 열광적으로 치료제를 찾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누군가가 나를 구원해 주길, 내 목을 물어 주길 기다리는 전략이다. 닥치고 투표하고 닥치고 기다리라! “언뜻 신선해 보이는 〈나는 꼼수다〉의 새로운 미디어 실험과 직설적 언사들이 도달하는 ‘정치’적 비전의 장소란 결국 다시 ‘국회’이고, ‘시청’이고, ‘청와대’다. 바뀌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인물이다.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 아니면, 오세훈이나 나경원이 아니라 박원순이면, 이명박이 아니라 문재인이나 안철수면 ‘희망’이 있다는 식의 생각이 이 프로그램 전반에 흐르고 있다. (……) 언제나 우리를 들뜨게 하는 이 즐거움의 정언명령은 더욱 가혹해져 가는 자본주의와 더욱 공고해져 가는 대의제 정치라는 이 시대의 진짜 핵심을 세련되게 감춘다. ‘즐겨라’라는 명령이 잦아질수록 삶은 더욱 공허해지며, 그 공허에서 벗어나려고 우리는 다시 즐거움을 찾는다.” 모순은 결코 해결되지 않고 그냥 미뤄질 뿐이다.

 

문강형준은 소위 ‘안철수 현상’에서도 비슷한 모순을 본다. “이명박에게 ‘당한’ 대중은 이제 안철수에게 이명박이 가지지 못한 정직, 신뢰, 부드러움, 소통 등의 이미지를 갈구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명박과 안철수가 동시에 구현하는 ‘행정, 관리, 성공, 경제’의 이미지 역시 함께 안고 가는 것이다. 대중은 여전히 ‘생존’의 법칙이 거의 유일한 삶의 법칙이 된 사회에 살고 있고, 그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투쟁하고 싸우는 정치인’보다는 ‘스스로 계발하고, 자기 관리를 하고, 즐거움을 좇으면서도, 동시에 기업을 성공시킨, 그러나 정직하고 인간적이며 부드러운 사업가’를 대표로 삼고 싶은 것이다.” 살아남고자 하는 대중의 욕구 외에 안철수는 어떤 욕구를 대변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이 착한 멘토들은 사실 ‘개판’이 되어 버린 시대와 정면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처럼 부드럽고 조용하게, 착실하고 성실하게, 쉽게 말하면 ‘착하게’ 이 고통을 견뎌 내고 승리하라고 조언”한다. 참고 견뎌서 세상이 바뀔 거면 이미 세상은 바뀌었어야 옳다. 그러나 아직도 이 모양인데 언제까지 착하게 살아야 할까?

 

이런 깨달음이 생겨도 파국을 준비하기는 쉽지 않다. 혼자 인간으로 살며 공포에 떠느니 좀비가 되는 게 안전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착한 멘토들은 그냥 좀비가 아니라 ‘착한 좀비’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멘토들은 좀비가 되지 않으려는 처절한 싸움만 그만두면, 다시 인간이 되려는 욕망만 내려놓으면 계속 인간을 쫓는 자로 살 수 있다며 안심시킨다. 좀비가 되면 마음껏 인간을 사냥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쾌락이 아닌가. 좀비들의 세상에서 인간은 동경의 대상이 아니고 사냥감일 뿐이다. 그런데도 왜 인간이 되려 하는가?

 

그리고 착하건 안 착하건 좀비의 가장 강한 본능은 생존 본능이다. 배가 고파지면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건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좀비에겐 공통된 현상이다. 그리고 때로는 적절한 먹잇감이 없으면 좀비들끼리도 서로 뜯어먹는다. 이 세상에는 도덕이나 윤리가 필요 없다. 먼저 공격해서 살아남는 자가 왕이고,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오래 살아남는 자가 강자이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자가 있기에, 비틀거리며 돌아다니는 좀비도 생명체이기에, 개판이 되어도 세상은 지속된다.

 

 


혁명의 지형학

 

우리가 단지 생존만을 바라지 않는다면 다른 돌파구가 필요하다. 문강형준이 얘기하는 파국은 현실을 조롱하거나 절망하기 위한 키워드가 아니다. 외려 파국은 “위기와 절멸을 상상함으로써 현재의 질서를 역전시키고 절멸시키려는 근본적인 접근”이고 지금 우리가 빠져들고 있는 푹신한 안락의 의자에서 일어나 “모순적인 현재에 개입하는 입구”이다.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희소성과 폭력, 쾌락에 맞서 저자는 유토피아라는 카드를 꺼낸다.

 

허나 신자유주의는 유토피아마저도 가만두지 않는다. 끊임없이 개입하고 현실을 강요한다. 그래서 문강형준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무게를 딛고 꾸역꾸역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고 미친놈과 또라이에게 박수를 보낸다. 앞뒤 재지 않고 무대포로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좀비이길 거부하는 인간다움의 상징이다. 그런 미친 열광 속에서 우리는 형제자매가 되고 “사랑도 쿨하게, 정치도 ‘간지’나게. ‘핫’한 것은 오직 섹스에서나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시대를 벗어날 수 있다.

 

사실 미치지 않고서 어떻게 신자유주의에 맞설 수 있을까? 체제를 지탱하는 사람이나 체제를 반대하는 사람이나 모두가 체제에 ‘갇혀 있는’ 사회에 사는 우리는 미쳐야만 한다. “‘자기 신분도 모르고’ 반란에 나선 농노의 장인들을 가리켰던 또 하나의 말”이 “광신자”였듯이, 어느 시대에나 주류에 도전하며 파국을 불러오는 자들은 또라이일 수밖에 없다. 거리로 나서는 청소년들을 보며, 사랑을 나누는 성소수자들을 보며, 행진하는 슬럿 워크를 보며 민주주의나 사랑, 해방보다 ‘말세’를 외치는 사람들이 많듯이, 이런 광적인 반란이야말로 파국과 맞닿아 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세상을 불태울 수 있을까.

 

‘21세기에 어떻게 이런 짓을’이라며 욕을 먹는 비동시성, ‘굳이 저렇게까지’라며 욕먹는 과잉된 행동이야말로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모습을 상상하고 실천해 내는, 그럼으로써 가장 현재적이고 동시적인 사건을 만들어 내는 토양”이다. 그래서 미치도록 사랑하고 가슴속 분노를 토해 내는 또라이들은 파국을 피하지 않고 파국을 준비한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또라이는 누구인가? 문강형준은 그 모습을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에서 찾는다. 자신의 가족도 아닌 이를 품어 줄 수 있는 이들, “이 서글픈 한국의 현실에서도, 오직 이 하층 계급의 가족만이 유일하게 피가 섞이지 않은 이들, 그러니까 또 하나의 ‘모자란 아들’을 자신의 품으로 받아들일” 이들인 ‘아직 인간’이다. 언제 변해서 주변 사람들을 뜯어먹을지 모르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가진 게 없기에 파국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니 이 체제의 붕괴에서 잃어버릴 게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파국을 준비하는 혁명가이다. 그러니 임금 노예의 사슬에조차 묶이지 못했던 인류의 가장 희망 없는 쓰레기들에서 혁명의 기운을 엿본 바쿠닌이, 토착적인 진보를 위해 산업 문명을 재구성할 것을 요구했던 일리치나 마르쿠제가 다시 부활한다. 문강형준이 외치는 최신 이론에서 나는 잊혀진 이론의 흔적들을 보기도 한다.

 

사실 나는 문강형준의 글보다 문강형준이라는 사람을 훨씬 더 좋아한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가 더 그리워지는 건 글을 읽다 보면 밖에서 들여다보고 있다는 느낌, 단지 그가 외국에 있어서가 아니라 현실을 관객으로서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계속 받기 때문이다. 매체 비평은 매체로 드러나지 않는 현실에 둔감해서 글은 날카롭지만 깊이 감춰진 현실을 길어 올리지는 못한다. 자고로 문화란 게 같이 모여 앉아 쑥덕거리는 것이라면 그 해석 또한 쑥덕거리면서 더 깊어질 것이다. 그런 자리를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나는 그가 한국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린다.

 

그래서 나는 그의 다음 책보다 그의 귀국을 기다린다. 같이 먹고 마시고 여러 현장을 돌아다니며 부대끼고 싶다.

신고
posted by 몽똘 2012.03.31 12:58

요즘 삼성불매운동이 한창이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는 삼성카드를 폐기하거나 삼성가맹점을 탈퇴하였음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삼성물산이 제주도 해군기지사업에 참여해 구럼비를 폭파하자 이에 대한 분노가 불매운동으로 시민들을 이끌고 있다.

 

허나 삼성물산이 폭파를 중단하면 불매운동이 중단되어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토건국가’라는 말처럼, 이미 전국 곳곳이 제주도 강정마을과 비슷한 처지이고, 공사현장에는 어김없이 재벌들의 로고가 박혀 있다. 재벌들의 문제는 한 가지 사업이 아니라 사업을 하는 방식 자체가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재벌들의 밥그릇》(홍익출판사, 2012년)은 우리의 인식을 넓혀주는 좋은 책이다. 그동안 재벌들의 문제점을 다루거나 폭로한 책들은 간혹 있었지만 그것을 중소기업과의 관계에서 다룬 책은 없었다. 더구나 이 책은 일선현장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자의 시각이라 구체적인 관계를 엿보게 한다. 수치와 논리를 강조하는 시대이니만큼 이 책에는 재벌비판의 필요성을 증명하는 수치가 가득하다.

 

 

중소기업을 위한 한국은 없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고 난 후 여기저기 ‘기업하기 좋은’ 나라, 지방을 떠든다. 하지만 과연 중소기업에게도 한국이 기업하기 좋은 나라일까? 《재벌들의 밥그릇》에서 가장 먼저 지적되는 문제는 재벌들이 중소기업의 기술을 가로채는 문제이다. 한국의 재벌들은 독자적으로 기술을 개발하지 않고 중소기업이 개발한 기술을 ‘제휴’나 ‘협력’의 명목으로 가로채고 있다.

 

중소기업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재벌들이 그만한 기술투자를 하지 않을까 의심할 수 있다. 하지만 책에 따르면, 한국의 10대 재벌이 시설 투자와 연구개발 투자에 쓴 돈을 합쳐도 이 돈이 매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7년의 7.57%에서 2010년에는 6.57%로 하락했다.”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3년 동안 지속적으로 투자비중이 떨어졌다.

 

정말 재벌들이 기술을 가로챈다면 왜 중소기업이 법에 호소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한 현실적인 설명도 책에 담겨 있다. 중소기업이 부품을 생산해서 재벌에 납품하는 하도급 구조 때문에 납품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법적인 문제제기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법에 호소해도 사실관계를 증명하기가 어렵고 재판 비용도 많이 들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그리고 설령 이긴다 해도 현행법에 따르면 보상을 제대로 받기 어렵다. 그러니 기업활동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중소기업이 재벌들에게 책임을 묻기 어렵다.

 

비단 기술 가로채기만이 아니다. 이 책이 지적하는 중요한 문제는 중소기업들을 후려치는 납품단가 인하이다. 책에 따르면, 재벌들은 매년 최소 20%이상의 단가 인하를 목표로 삼는다. 원자재 시장의 가격변동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회사의 연간 이익 목표가 정해지면 그것에 맞춰 원가절감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단가 인하 목표가 설정된다.” 그리고 납품 중소기업이 이익을 보면 무조건 단가를 깎는다. 구체적으로 보면 “납품 중소기업의 이익률이 10% 이상이면 인하율은 5%, 이익률이 5%면 인하율은 2%, 이익률이 3%면 인하율은 1%로 정하는 식이다. 그러니 대기업의 사냥감이 안 되려면 이익률이 1% 이하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대기업들은 더 이상 납품단가 인하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은 거래대상에서 쫓아낸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중소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리고 가장 심하게 협력업체들을 쪼는 곳이 재벌 서열 1, 2위인 삼성과 현대차이다. 특히 “삼성전자 무선사업부가 이런 방법으로 2002년에서 2005년까지 4년간 국내 부품업체들을 상대로 단가 인하를 한 규모는 모두 3조 28억 원에 달하는데, 이는 같은 기간 중 영업이익 10조 7,925억 원의 28%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중소기업이 울며 겨자먹기로 재벌들에게 납품하는 이유는 그렇게 부품을 공급하다보면 일본이나 유럽의 회사들도 거래를 하자고 요청하고 납품규모가 커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 글로벌 경영의 선두주자는 재벌이 아니라 중소기업인 셈이다. 이들이야말로 온갖 어려움과 희생을 감수하고 세계경영에 나서고 있으니.

 

재벌들이 좋은 일자리를 빼앗는다!

뒤처지는 중소기업 대신 잘 나가는 재벌들 중심으로 경제구조를 다시 짜자고 얘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우리 삶을 포기하자는 얘기와 다를 바 없다. 왜냐하면 재벌들이 아니라 중소기업이 한국의 노동시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중소기업 종사자 수는 1,114만 9,134명으로, 전체 종사자 1,261만 2,692명의 88.4%를 차지한다.” 그리고 1997년부터 2007년 10년 동안 중소기업 종사자 수는 287만 6,846명이 늘어났지만, “같은 기간 동안 대기업의 종사자 수는 오히려 10만 6,598명이 감소했다.”

 

IMF외환위기 이후 엄청난 공적자금을 받았던 재벌들은 정작 그 세금을 내온 노동자들을 해고해 왔다. 그러니 ‘고용없는 성장’이라는 비난이 정부나 새누리당에서조차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선진국의 상황은 반대이다. “선진국의 경우 중소기업이 전체 고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7.8~50.2%로, 우리나라에 비해 10~40%나 낮다.” 재벌들이 가장 많은 이익을 독점하면서 노동시장에는 해를 입히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리고 이런 구조는 중소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상황도 열악하게 만든다. “종업원 300명 이상 대기업 노동자의 평균임금을 100으로 볼 때, 종업원 5~9명 규모의 중소기업 노동자 임금은 2010년 1~3분기에 60.2로 2008년 62.3, 2009년 63.4에 비해 더 낮아졌다.”

 

이처럼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노동빈곤’의 원인은 재벌중심의 경제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재벌들이 경제규모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계속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이다. 삼성과 현대차 두 재벌의 “매출 합계액 121조 7,000억 원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11.45%에 달”하는 현상은 매우 위험하다.

 

한국사회에서 회사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많이 택하는 생계가 각종 ‘자영업’이다. 그런데 재벌들은 이조차 내버려두지 않는다. 기업형 슈퍼마켓(SSM)만이 문제는 아니다. 책에 나온 것만 정리해도, 재벌들이 운영하는 카페 브랜드가 8개, 외식업이 11개, 와인판매 7개, 골판지 6개, 온라인 교육 4개, 막걸리 4개 등이고 차량정비와 사진관, 소금 생산, 농산물 생산유통가공, 웨딩사업, 장례업, 콜택시 사업, 학원사업 등 그 영역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러니 계열사 수도 계속 늘어난다. 상위 20대 재벌의 계열사 수는 2002년 말 514개였는데, 2010년 말 859개로 무려 67%나 늘어났다. 얼마 전 재벌들의 문어발식 확장이 비판을 받자 잠시 주춤하는 듯 했지만 금방 입장을 바꿔 최근 신세계그룹은 베이커리 사업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정부가 방울을 달 수 있을까?

이런 ‘불공정한 하도급거래’의 고리를 끊고 문어발식 확장을 막지 않는 이상 정상경제는 불가능하다. 재벌총수들은 말끝마다 자본주의를 내세우고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외치는데, 그들이 기본적인 규칙을 파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대책을 내놓겠다며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재벌과 중소기업의 하도급 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어렵다. 저자는 “납품단가 연동제(원자재 가격이 오르면 납품단가에 반영하는 제도)를 도입하거나 최소한 업종별 협동조합에 조정신청권이 아니라 협의권을 부여해서 집단 교섭을 보장”하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중소기업과 재벌이 함께 살 수 있는 방안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동반성장과 같은 개념들을 제시한다.

 

 

하지만 저자 스스로 8장에서 ‘피죤’의 막장경영을 다루며 법과 원칙이 통하지 않는 세상을 얘기하듯이, 그런 일은 현재의 정치상황에서 일어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런 막장이 피죤만의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보면, 삼성그룹 또한 막장이다. 그리고 재벌회장들이 구속되었다 보석으로 풀려나는 걸 보면 한국사회 또한 이미 막장이다.

 

아마도 각종 경제 수치를 찾아 인터넷을 뒤져본 경험을 가진 사람은 이 책의 가치를 인정할 것이다. 재벌개혁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필요한 많은 수치들이 이 책에 담겨 있다. 반면 비슷한 논의가 반복되는 점은 이 책의 단점이다.

신고
posted by 몽똘 2012.03.12 10:29
교육공동체 벗이 발간하는 '오늘의 교육'에 쓴 리뷰이다.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좋기도 하지만 걱정되기도 한다.
너무 말랑말랑해져서 무슨 차이가 있지? 이런 생각이 든다는...
 
--------------------

협동조합의 부흥기/혼란기?



요즘 들어 협동조합에 관한 얘기를 여기저기서 듣게 된다.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되고 협동조합에 관한 책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으며 언론매체에서도 협동조합에 주목하는 프로그램이나 기사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협동조합의 부흥기라고 얘기하면 지나친 감이 없지 않지만, 그렇게 느낄 만큼 사회적인 관심이 높다. 이런 분위기에서 협동조합이 대안사회의 기반으로 소개되기도 하고, 지방자치단체들이 협동조합을 지역경제 발전모델로 고려하기도 한다.


왜 갑자기(?) 협동조합일까? 기념일 챙기길 좋아하는 한국인지라 유엔이 2012년을 ‘협동조합의 해’로 정했다는 사실이 흥미를 끌었을 것 같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이 현상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은 조금 더 실질적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국가경제는 재벌들의 손아귀에 포획되어 있고 수출 의존도가 높아 외부환경변화에 영향을 많이 받고 성장이 고용으로 이어지지 않으니 그에 대한 대안으로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듯하다.


협동조합의 중요성을 주장해온 사람으로서 이런 분위기가 반갑지 않을 수는 없지만 이런 관심이 협동조합‘운동’의 확대로 이어질지는 의문이다. 분명 경제조직으로서 ‘협동조합’의 존재는 독점재벌이나 일반 기업보다 훨씬 나은 조건을 노동자에게 제공한다. 허나 협동조합이 있다고 해서 그 사회가 좋은 삶을 보장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단순히 협동조합의 수가 늘어나고 그것이 차지하는 몫이 커진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협동의 그물망으로 엮이지는 않을 것 같다. 공산당이나 사회당, 녹색당이 대안정치세력으로 자리를 잡은 나라의 협동조합과 대안정치세력이 거의 없고 생협의 정치참여를 법으로 금지당한 한국의 협동조합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분권화된 국가의 협동조합과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의 협동조합은 매우 다른 경제적, 사회적 조건에서 활동해야 한다. 이런 조건들을 세심하게 검토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외국의 모델을 한국에 이식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협동조합에 대한 오해로 이어질 수도 있고, 최근에 출간된 협동조합 관련 서적에서 그런 징후를 느낄 수 있다.




몬드라곤, 협동조합의 신화일까, 위기일까?


협동조합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한 지역이 스페인의 몬드라곤이다. 1956년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서 시작된 몬드라곤의 생산자협동조합 사례는 협동조합의 ‘성공신화’로 알려져 있다. 최근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으로 『몬드라곤에서 배우자』(역사비평사, 2012년)가 거의 20년 만에 다시 번역되어 출간되었고, 그 책을 번역했던 김성오의 『몬드라곤의 기적』(역사비평사, 2012년)도 함께 출간되었다.


협동조합의 규모가 작을 것이라는 우리의 상식과 달리 몬드라곤 협동조합 복합체(연합조직)의 자산은 약 53조에 달한다. 금융, 제조업, 유통, 지식 등 4개 부문을 포괄하는 몬드라곤의 자산규모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재벌기업인 현대중공업(2011년 기준 약 54조)보다 조금 적은 수준이다. 그리고 몬드라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수도 무려 8만 4천명에 달한다. 고용인원으로만 따지면, 몬드라곤은 SK나 롯데보다도 훨씬 많은 수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회사를 소유하고 경영자를 선임하며 경영 전체를 관리․감독하는 체제”인 협동조합이 이런 규모라니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김성오는 몬드라곤이 현실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온 결과라고 이를 설명한다. 여러 차례의 위기와 유럽통합같은 커다란 조건의 변화를 겪었지만 몬드라곤은 생산자들의 복합체를 만들고 인력과 기술 자원을 전략적으로 배치하며 힘을 키워왔다. 그런 점에서 김성오는 “몬드라곤의 경험을 완성된 본보기나 지고지순의 사례로 받아들여서는 결코 안 된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변화할 수밖에 없는 ‘현재진행형의 사례’로 몬드라곤을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라고 얘기한다.


일단 변화하는 상황에 협동조합이 능동적으로 대처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협동조합은 섬으로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 바스크 지방이라는 특수성이 협동조합의 공동체성을 강화시켰지만 경제위기와 유럽통합이라는 변화된 상황은 협동조합에게도 지역 차원을 넘어선 고민을 요구했다. 김성오는 몬드라곤 복합체를 만든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한국에서는 협동조합간의 연대가 당위적으로 강조되지만 실제로 그런 사례를 찾기 어려운데, 몬드라곤에서는 그런 연대가 강력한 힘을 만들었다.


『몬드라곤에서 배우자』에서 드러나듯 몬드라곤의 성공 뒤에는 그런 연대를 가능케 한 정신적, 지적인 유대감이 존재했다. 몬드라곤의 신화를 만든 호세 마리아 신부가 있었기에 그런 변화도 가능했다. 이런 유대감 없이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협동조합이 하나의 틀로 묶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몬드라곤은 그런 정신적, 지적 유대감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한국의 협동조합에 던진다.


허나 다른 한편으로 몬드라곤의 성공이 몬드라곤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사실 몬드라곤은 더 이상 바스크 지방의 협동조합이 아니다. 몬드라곤에 소속된 노동자 중 러시아와 멕시코, 중국, 브라질, 인도,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고용된 인원이 2010년을 기준으로 볼 때 약 1만 6천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몬드라곤에 협동조합만 속해 있는 것도 아니다. 몬드라곤은 1990년대부터 합작회사를 설립하고, 주식회사 형태의 자회사들을 만들어왔다. “특히 유통 부문의 자회사들은 상당수가 비협동조합 기업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 결과 몬드라곤에 소속된 260여 개 회사 가운데 대략 절반만 협동조합 기업으로 존재하고 있다.”


몬드라곤의 글로벌화와 조직형태의 변화는 협동조합의 정체성에 관한 논란을 피해갈 수 없다. 전체 고용규모는 늘어났지만 “이는 주로 해외 노동자들이 증가한 결과”이고 “국내시장에 더 신경을 써왔던 다른 두 부문은 직원 비용이 감소했다.” 에로스키를 비롯한 유통부문이 인수․합병을 통해 공격적으로 사업체를 늘려서 “몬드라곤에서 최근 10년간 창출된 신규 고용의 70%가 바로 유통부문에서 이루어졌”지만 정작 금융과 유통 부문에서 조합원 노동자 비중은 전체 고용의 약 20%에 지나지 않는다. 즉 규모는 커졌지만 조합원이 아닌 노동자들이 증가한 것은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의심케 한다. 앞으로 주식회사를 협동조합으로 전환하고 노동자 조합원의 비중을 늘려나간다고 하지만, 현재의 경제위기 상황을 고려할 때 제조업 중심의 몬드라곤이 그 구상을 얼마나 실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리고 이런 정체성의 변화는 협동조합의 의사결정구조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규모가 커지는 만큼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상시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총이사회와 상임위원회, 사무국의 권력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김성오도 그 점을 지적한다. “몬드라곤의 경영권력은 총이사회, 중앙사무국, 그리고 각 부문조직에 집중되어 있다. 이에 반비례하여 평조합원들의 직접민주주의적 성격의 참여는 약화되었다. 평조합원들과 경영조직 사이의 간극은 넓어지고 있으며, 몬드라곤의 글로벌화와 외연 확대 과정에서 권력집중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더구나 복합체가 개별 협동조합을 규제하는 방식도 강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단위 협동조합 총회에서 몬드라곤 가입을 결정한 경우에, 그 협동조합은 무조건 몬드라곤의 규칙과 규정을 수용해야 하고 또 부문조직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물론 복합체에 가입된 협동조합에게 탈퇴의 자유가 있다지만 그건 노동자에게 퇴사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협동조합의 7원칙 중에서 민주적 경영의 원칙이 흔들리면 다른 원칙들도 자연히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조합원들의 사유도 영향을 받는다. “노동자 조합원들은 몬드라곤의 소유자이고 또한 그 사실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지만, 직접적인 참여 행위는 수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참여의 수준은, 그들이 회사에 노동력을 공급한 대가로 선급금(월급)과 배당금을 받고(물론 자신의 자본구좌로) 또 회사가 얼마나 잘 운영되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 조합원들은 점점 사업 이익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몬드라곤을 설립한 호세 신부는 연말에 지불할 배당을 미리 매월 지불한다는 선급금 제도를 통해 임금제도를 변화시키려 했는데, 최근 글로벌화와 고용형태의 변화는 역으로 임금제도를 강화시키고 있다. 이런 변화를 협동조합의 관점에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삼성처럼 이건희 개인이 기업의 노동자보다 수천, 수만 배의 돈을 가져가는 경우는 협동조합에서 있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협동조합은 분명 긍정적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협동조합이 좋은 삶을 실현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좋은 삶은 일할 수 있느냐, 얼마나 받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는가?’라는 물음을 통해 실현되기 때문이다.


협동조합이 모든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협동조합이 경제적인 목적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목적을 가진 조직이라면 그 사회성을 실현할 방법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협동조합이 대안적인 사회의 기반이라고 말할 이유는 없다. 사회적인 목적은 협동조합의 부수적인 활동이 아니고, 협동조합의 사업 대상과 과정 자체가 그런 목적을 반영해야 한다.


사실 김성오나 몬드라곤을 소개하는 여러 언론매체들은 고용창출을 강조한다. 한국의 특수성을 고려한 접근처럼 보이는데, 그런 접근이 타당한지는 모르겠다. 단지 고용문제로만 접근한다면, 즉 단순히 일자리 창출로만 접근한다면 그것이 이명박 정부의 구호와 무엇이 다를까? 그리고 성장을 통한 고용창출에 초점을 맞추는 순간 몬드라곤의 글로벌화는 정당화될 수밖에 없다. 책에서도 몬드라곤의 해외 지사의 노동자들이 스페인과 비교할 때 매우 낮은 임금을 받고, 외국의 기업을 인수하면서 노동자들을 구조조정한 사례가 지적되는데, “보통의 다국적기업이 대주주들을 위해 하청 자회사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처럼 몬드라곤 역시 스페인 바스크 지역 노동자 조합원들을 위해 다른 지역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적극적인 글로벌화를 추진하고 있는 몬드라곤이 이러한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기는 힘들 것이다.” 김성오는 이를 어쩔 수 없는 전략적 선택이라고 보는 듯하지만, 이 사실은 협동조합의 사회적 목적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지금 진행되는 경향을 현실로 받아들인다면, 대안사회를 꿈꾸는 건 불가능하다.




협동조합은 시장경제의 당의정(糖衣錠)일까?


사실 이상을 품은 사람이야말로 현실주의자이고, 그런 현실주의자들 덕분에 인류 문명은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협동조합의 역사를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협동조합으로 기업하라』는 협동조합이 급조된 전략이 아니라 역사 속에 깊이 뿌리내린 삶의 형태임을 보여준다. 영국의 소비자협동조합, 프랑스의 노동협동조합, 독일의 신용협동조합, 덴마크의 농민협동조합, 이탈리아의 사회적협동조합의 형성과정과 현황을 설명한다. 그러면서 자본주의경제보다 더 깊은 차원에 “경제와 사회의 격차를 줄여 나가고 개인이나 집단이나 누구나 경제적 게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통합의 메커니즘을 활성화시키는” 시민시장(civil market)이 있음을 지적한다.


자마니 부부는 시종일관 협동조합이 낡은 모델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자본주의 기업보다 더 뛰어나다고 주장한다. “개인 서비스 같은 특정 경제 영역에서는 협동조합이 자본주의 기업보다 효율성에서 더 뛰어”나고 “소득 분배의 불평등을 축소하고 민주주의 공간을 확장하는데 기여하는 한편 사회적 자본, 즉 시민의 신뢰 네트워크를 강력하게 창출하는 역할을” 맡으며 “개발도상국 또는 국제투자가 미치지 못하는 분야나 지역에서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끄는데 적합한 기업형태로 대두됐다”는 것이다. 가히 협동조합에 대한 찬양이라 부를 만하다.


그렇다면 앞서 얘기한 몬드라곤의 현실을 자마니 부부는 어떻게 볼까? 책에서 몬드라곤 사례가 직접 언급하기도 하는데, “몬드라곤의 성공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에로스키 소매 체인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사업체들은 지역적으로 바스크 지방에 머물러 있다. 몬드라곤 그룹은 바스크 지역 생산의 8.3%, 고용의 14%를 차지한다. 관련 사업 다각화를 추진하거나 이웃 지역으로 진출할 만한 역량이 부족하다고 하겠다.” 몬드라곤의 글로벌화를 반영한 평가일까 의문이 들지만, 어쨌거나 자마디 부부도 몬드라곤의 변화를 지지하는 듯하다.


사실 자마니 부부의 관점에서 보면 몬드라곤의 확장과 글로벌화는 주목할 만한 전략이다. 자마니 부부는 “작은 규모라야 협동조합의 정체성이 가장 잘 지켜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큰 나라에서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있을 수 없고 그 이유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방식이 실천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진실은 그 반대이다. 협동조합이 크면 클수록 그 정체성이 강해지고, 다른 시장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사업의 확장이 심각한 협동조합의 정체성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협동조합이 성장하지 않고 그대로 멈춰서 있겠다고 한다면, 필히 현실적인 모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탈리아에서 “협동조합 대기업은 1971년에 전체 대기업의 2.3%에서 2001년 9%로 비중이 커졌다. 고용 인력에서도, 협동조합 대기업 비중은 1.2%에서 8.1%로 높아졌다. 말하자면 협동조합은 이탈리아 경제의 전반적 추세와는 거꾸로 움직였다. 자본주의 기업의 평균 규모가 축소되는데 반해 협동조합 기업들은 규모가 커졌던 것”이라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물론 자마니 부부가 협동조합의 무조건적인 확장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확장을 위해 협동조합은 “협동조합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그리고 협동조합의 특별한 정체성을 해치지 않은 채 어떻게 성장을 위한 자금을 조달할 것인가”라는 두 가지 물음에 답해야 한다.  특히 “경제적으로 취약해서, 스스로 충분한 자본을 조달하는 것 또한 불가능”한 노동자/생산자협동조합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성장을 위해 협동조합에 관한 고정관념에서 풀려나야 하지만 그럼에도 협동조합은 협동조합의 원리에 따라 운영되어야 하고 경영진은 민주적인 이해관계를 실현할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일반 영리기업과 다를 바가 없고 사회적 협동조합이라는 명목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을 근거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협동조합과 시장경제를 화해시키려는 자마니 부부의 노력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노동자가 생산을 통제하면서도 “시장경제를 활성화하는 평등과 자유의 원칙을 기업 자체에 적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마니 부부는 이를 이탈리아의 전통이라 얘기하는데 “정치경제학에 휘둘리지 않고 사회적 시장경제에도 휘둘리지 않은 전형적인 이탈리아학파에서는,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통상적인 시장경제 안에서 인간적인 사회와 우애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인다.


그런데 협동조합을 시장경제와 접목하려는 노력은 높이 사지만 그 방향이 올바른지는 의문이다. 경제는 국가나 사회와 따로 존재할 수 없다. 이 얇은 책의 내용만으로 “시민 인문주의에 뿌리를 둔 시민 경제의 지적 전통”을 이해할 수 없지만 노동분업과 성장을 위한 축적, 기업의 자유를 특징으로 삼는 시장경제가 공화주의나 인문주의 전통과 결합되기는 쉽지 않다. 특히 앞서 몬드라곤에서 봤듯이 대의원총회를 열고 조합원들의 참여를 보장한다 해도 협동조합 대기업의 의사결정구조는 조합원의 역할을 축소시킬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조합원의 경제적인 관심은 높아지는 반면 정치/사회적인 역량은 낮아질 수 있다. 이런 경향이 장기적으로 볼 때 협동조합에게 유리할까?


사실 경제조직으로서 협동조합은 현재의 자본주의 질서를 거스르기 어렵다. 하지만 사회조직으로서 협동조합은 자본주의 질서를 넘어야 한다. 자본주의 속에서 틈을 만들고 그 틈을 넓혀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허황된 꿈처럼 들릴 수도 있는 이 ‘소명’을 협동조합이 버린다면, ‘협동조합’운동은 가능할지라도 협동조합‘운동’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과거 맑스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이 협동조합에 가했던 비판이 옳았다고 손을 들어줘야 한다. 사회주의자들이 가했던 비판은 단순히 노동자들이 협동조합을 경영하며 부르주아로 변신하려 한다는 점이 아니었다. 협동조합의 성장이 협동조합의 경제성을 탈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 계급관계를 은폐시킬 것이라는 점, 그래서 협동조합이 혁명의 기반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자마니 부부의 협동조합 논의가 이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리고 자마니 부부의 주장에서는 이탈리아의 내부 문제, 안토니오 그람시가 지적했던 남부문제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람시는 남부의 농민지대가 북부의 산업지대에 종속되고 노동자가 농민과 분리되어 농민을 열등하게 바라보는 관점을 문제시했다. 그런데 책에 나온 이탈리아 협동조합의 지역별 고용 현황을 봐도, 남부의 협동조합 비율이 북부에 비해 낮고 남부에서는 주로 취약계층을 고용하는 사회적 협동조합이 발달되고 있다. 그동안 볼로냐나 이탈리아 협동조합을 찬양하는 글은 많이 봤지만 남부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를 분석하는 글은 거의 보지 못했다. 만일 남부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다면 이탈리아의 모델은 국가경제모델이지 지역경제모델이 될 수 없다.


협동조합에 관한 내용은 아니지만 이와 비슷한 시각으로 로버트 퍼트남은 『사회적 자본과 민주주의』(박영사, 2000년)를 얘기할 수 있다. 퍼트남은 이탈리아 사회를 분석하며 북부와 남부의 차이를 “상호유대의 결속관계와 종속과 착취의 수직적 결속관계 사이의 구분”이라고 표현했다. 남부의 정치적 후원관계가 그런 경제적 예속상태를 설명해준 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퍼트남은 “경제상태가 시민성을 설명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시민성이 경제 상태를 설명해줄 것”이라며 유명한 사회자본(social capital)이론을 주장했다. 설득력 있는 듯 들리지만 퍼트남의 시각은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진 시민들의 자발적인 결사체라는 특정한 시민사회를 우월하며 보면서 사회운동과 계급갈등의 중요성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자마니 부부의 주장도 비슷한 비판을 받을 수 있는데, 『협동조합으로 기업하라』에서는 1970년대 이후 이탈리아의 노동운동과 자율주의(아우토노미아)운동이 협동조합운동과 주고받은 영향이 드러나지 않는다.


실제로 자마니 부부의 이론도 퍼트남과 비슷한 편견을 재생산하고 있다. 그들은 “협동조합이 생겨나고 잘 뻗어 나가기 위해서는 강력한 연합의 동력과 시장에서 제 구실을 하는 것,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이것이 왜 협동조합 운동의 발상지가 유럽일 수밖에 없었는지를 말해준다. 유럽에서는(프랑스는 스코틀랜드와 이탈리아만큼은 아니지만) 15세기의 시민적 인문주의 이래로 또 계몽주의의 결정적 자극을 받으면서, 이 두 가지 요소가 자라날 비옥한 토양이 마련된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협동조합이라는 형식이 유럽의 것일지는 모르나 협동의 다양한 양식은 전 세계 민중들의 삶에서 공통되게 발견된다. 마리아 미즈와 베로니카 벤홀트-톰젠의 『자급관점(subsistence perspective)』(국내에서 곧 출간될 예정이다)을 보면 다양한 자급경제의 양식들이 발견된다. 그리고 이 자급경제의 다양한 양식들은 시장이 아닌 곳에서, 계몽주의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곳에서, 외려 그것을 거스르면서 뿌리를 내려 왔다.  ‘따라잡기 개발’과 ‘따라잡기 소비주의’가 아닌 자급의 관점을, 노동분업과 임금체계가 아닌 행복한 삶을 위한 문화와 노동의 재결합을 강조하면서 미즈와 톰젠은 비서구 사회, 비근대의 협동양식의 중요성을 드러낸다.


협동조합은 사회적인 조건에 영향을 받고 한국의 정치, 사회구조가 협동조합운동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협동조합을 지지하는 대안적인 정치세력이 없는 한국,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와 재벌 중심, 토건중심의 경제구조를 가진 한국, 무한경쟁구조에 갇힌 한국에서 협동조합은 어떻게 자신의 전략을 만들어야 할까?


협동의 의미를 지키려는 노력이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비현실적이기에 우리에게는 현실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몬드라곤의 기적』과 『협동조합으로 기업하라』는 이런저런 근거들을 제시하곤 있지만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근대적인 경제조직에서 찾고 있고 그런 경제적 관점을 재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왜 다양한 협동행위를 시장경제의 관점에서 판단해야 할까?



협동조합 논의에 대한 유감


『몬드라곤의 기적』을 읽으며 불편했던 점은 저자의 관점에 스며든 편견이다. 몬드라곤이 협동조합 방식을 해외의 기업에 적용하지 않는 이유로 “협동조합 설립에는 협동조합 문화에 익숙한 조합원들의 존재가 필수적인데, 협동조합 문화는 짧은 시간에 형성되지 않는다”는 식의 언급을 여러 번 볼 수 있다. 하지만 『협동조합으로 기업하라』를 보면, 이미 “중국의 1억 8,000만 명과 인도의 2억 1,000만 명”이 협동조합 조합원이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몬드라곤의 협동조합 정체성과 중국이나 인도의 협동조합 정체성이 다르다는 얘기일까? 무리한 해석일 수도 있지만 이런 식의 접근은 오리엔탈리즘, 따라잡기 관점을 반영한다고 본다.


사실 그동안 생협의 활동가나 협동조합 연구자들이 한국의 협동조합 역사를 다루면서 거의 언급하지 않았던 사람이 전진한이다. 일본 유학생으로 <협동조합운동사>를 조직하고 실제로 협동조합운동을 활성화시켰던 전진한은 자전적 기록인 『이렇게 싸웠다』(무역연구원, 1996년)에서 자신의 이념을 ‘자유협동주의’라 명명했다. “개인주의에서 독점성과 배타성이 止 즉 폐기되고 개성자유 즉 개성존엄성, 평등성, 창의성이 揚 즉 보존됨과 동시에 전체주의에서 강권주의와 기계주의가 止 즉 폐기되고 사회협동 즉 사회연대성, 공존성이 揚 즉 보존”되는 이념인 자유협동주의는 농어촌의 협동조합체계와 도시의 소비자/생산자협동조합체계를 결합할 뿐 아니라 임금제도를 철폐하고 이익을 균점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해방 이후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협동조합조성법, 협동조합법의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던 전진한은 국가의 협동조합이 아니라 민중의 자조적인 생활을 통해 협동조합 공화국을 만들려 했다. 그는 “국민경제가 일부 독점재벌이나 간상모리배 심지어는 탐관오리에게 농단됨이 없”도록 협동조합운동을 활성화시키려 했다. 외국의 모델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반면 이런 논의가 진지하게 다뤄진 적은 거의 없다. 왜 그럴까? 협동조합운동도 기존의 사회운동이 가진 편견을 재생산하고 있다고 평가하면 잘못일까?


두 책의 관점에 협동조합의 관점은 있지만 대안이념으로서 녹색의 관점은 없다. 저자들이 수용하는 글로벌화와 성장전략은 녹색이념을 거스를 수밖에 없다. 나는 한국의 협동조합운동이 세계에 뒤쳐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외려 생명사상과 결합된 한국 협동조합운동의 이념은 시대를 앞서간 면이 많다. 지구의 생명을 알리는 시계는 불과 1분을 남겨두고 있는데 우리는 천하태평이다. 협동조합이 이런 시대정신에 민감해야 할 텐데, 외국의 협동조합은 외려 둔감하고 국내의 협동조합이 이런 민감성을 보이고 있다.


다만 그런 면을 살리려는 노력이 사회구조적인 변화에 가로막히면서 지나치게 추상화되어 일상과의 접점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자기 사업의 틀에 갇혀 사회의 전체 그림을 보며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사회의 구조와 시민들의 일상을 더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들여다봐야 그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조금 더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협동조합 논의를 기대한다.

신고
posted by 몽똘 2012.02.22 21:06

예전에 김종철 선생님께 보냈었는데 이번 1~2월호에 덜컥 실린 글.
<지배당하지 않는 기술>을 세미나하며 여러 생각을 했다.
농업에서 벼농사가 핵심일 이유는 없다는 점, 구술문화가 중요하다는 점, 변경의 삶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 등등...
이 고민을 못 담아 아쉽지만 일단 정리의 의미로...

-----------------------------------
우리에게 제임스 스콧(James C. Scott)은 낯선 지식인이다. 유행처럼 수많은 외국 지식인들의 이름이 뜨고 지는 한국의 지식사회나 운동문화에서도 지금껏 스콧의 이름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국내에는 스콧이 1977년에 쓴 《농민의 도덕경제》가 2004년도에 번역되었고, 2010년 연말에 1999년 저작인 《국가처럼 보기》가 번역되었다. 두 책의 제목만 봐서는 스콧의 생각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아직 한글로 번역되지 않은 책들을 보면 제목만 봐도 스콧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약자들의 무기Weapons of the Weak》(1987년작), 《지배와 저항의 기술들Domination and the Arts of Resistance》(1992년작), 《지배당하지 않는 기술The Art of not Being Governed》(2009년작)같은 제목들을 보면 그의 관심이 국가나 지배보다 약자와 저항에 맞춰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배나 저항이 우리 사회에서 인기 없는 주제도 아닌데 왜 스콧의 이름이 낯설게 들릴까? 지배든, 저항이든 모든 논의가 국가에 집중된 우리 사회에서는 스콧이 관심을 두는 지역사회가 흥미를 끌지 못한다. 더구나 스콧은 보수의 텃밭이자 진보의 골칫거리로 ‘오해’를 받는 농민에게 관심을 두니 어찌 보면 낯선 게 당연할 수도 있다.


허나 낯설다고 무시하기엔 스콧의 글은 중요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스콧은 풍부한 역사적인 사실들을 통해 우리의 상식을 뒤엎고 그 상식이 실제로는 길들여진 관점이라는 점을 주장하려 한다. 스콧의 주요 저작들이 아직 번역되지 않았기에 그의 사상을 온전히 논하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호혜성과 생존권, 도덕경제



내가 《농민의 도덕경제》라는 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대학원 석사과정이었다. 수업시간에 동남아시아 농민봉기들을 다루는 와중에 이 책이 언급되었고, 그 때는 농민에서 노동계급으로 넘어가기 바빴을 때라 이 책에 거의 주목하지 못했다. 또 책이 번역되지도 않아 원서를 봐야 했기에 책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보다 영어를 해석하기에 바빴다.


사실 그 때는 스콧보다 폽킨(Popkin)이 수업시간의 주인공이었다. 폽킨은 도덕경제를 내세운 스콧과 달리 농민을 ‘합리적인 농민(rational peasant)’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퐆킨은 농민을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합리적인 행위자로 봐야 농민봉기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당시에는 스콧이 폽킨을 위한 조연배우였기에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그러고 13년이 흐른 뒤에야 《농민의 도덕경제》라는 책을 다시 접했다(안타깝게도 번역이 좋지 않다). 풀뿌리운동과 농민공동체의 관계를 찾아보다 이 책을 우연히 떠올리게 되었고, 책을 다시 읽으면서 농민공동체의 특징과 그것을 움직이는 질서에 관해 많은 점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공장이나 사무실의 구체적인 조건에 의존하는 노동자계급과 달리, 농민이 보편적인 계급으로서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꾸리는 방식에 더 많은 관심을 쏟게 되었다.


《농민의 도덕경제》의 서문에서 스콧은 농민들에게 “착취와 반란의 문제는 칼로리와 수입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정의와 권리, 의무, 호혜성에 관한 농민들의 생각”이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먹고살기 힘들어서 반란과 혁명을 일으킨다고 믿는데, 스콧은 농민에게는 그 문제가 달랐다고 주장한다. 즉 농민들의 반란이 엄청난 착취와 억압에 대한 반발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착취와 억압의 정도는 농민들이 느끼는 생활의 어려움만으로 평가될 수 없었다. 스콧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동남아시아의 농민들은 자신들이 구성한 생존윤리에 따른 도덕경제가 붕괴될 때 정부와 자본에 맞섰다.


농민들은 호혜성과 생존권을 따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호혜성과 강요된 관대함, 공유지, 품앗이 등의 방식들은 다른 경우라면 최저생계수준 아래로 내던져질 수밖에 없는 가족이 부족한 자원을 채우도록 도왔”기 때문이다. 즉 강요되었건 합의되었건 공동체의 도덕은 구성원들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 보장했다. 스콧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기본적인 사회적 권리로 ‘생계에 대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었으며 엘리트들조차도 가난한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활을 위해 남겨둔 것을 빼앗지 못했고 오히려 어려운 시기에는 가난한 이들의 생계에 관한 ‘도덕적인 의무’를 졌다고 지적한다. 경제가 다른 모든 가치를 집어삼킨 지금 우리사회와 달리 당시의 농민공동체에서는 경제가 자신의 고유한 기준을 가지지 않고 일상적인 도덕이나 사회적인 교환의 원리에 따랐다.


이런 농민공동체와 도덕경제는 동남아시아가 서구 유럽의 식민지가 되면서, 즉 식민지 국가체계가 만들어지고 자본주의 시장원리가 도입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식민지 국가와 시장은 농민들의 자급에 가장 중요한 자원인 토지와 노동을 상품으로 만들었다. 특히 “국가 자체가 농민들의 자원을 수탈”했고 국가는 농민들에게 많은 양의 세금을 강제로 걷을 수 있도록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만들었다. 그리고 시장은 사적 소유권을 강화시키고 가격이 도덕을 대체하도록 만들기 위해 경찰과 군대의 힘을 빌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소유권은 “숨 쉬는 공기처럼 항상 자유로웠으며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지역의 산림과 마을 소유의 미개척지”를 없애서 “농민들의 생활에 필수적이던 중요한 부분”을 가로챘다. 그로써 도덕이 경제에 간섭할 수 있는 여지는 점점 사라졌다.


물론 근대적인 식민국가가 등장하기 전에도 세금은 걷혔고 농민의 생산물은 시장에서 거래되었다. 하지만 세금을 정하고 걷는 방식이나 지역의 시장에서 가격을 정하는 방식은 식민지 시기와 달랐다. 자신들의 생활양식과 문화, 도덕이 식민지에서 완전히 힘을 잃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더 이상 미래를 준비할 수 없게 되었다. 남은 방법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도시로 떠나 빈민이 되는 것이었다. 생계와 자급을 누릴 수 있는 여러 사회적인 장치들을 회복하려 했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도 국가의 완전한 전복과 파괴보다 도덕경제를 복원하려는 목표를 가졌다.


식민지 이전의 농민공동체에 주목했다고 해서 스콧이 농민공동체를 이상적인 유토피아로 보는 것은 아니다. 스콧의 말을 빌리면, “대부분의 농촌사회를 특징짓는 이러한 사회적인 장치들을 낭만화시키기 쉬운데 그건 심각한 잘못이다. 그러한 장치들은 근본적으로 평등주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장치들은 모두가 마을 내의 자원으로 생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과 때때로 생존이 신분과 자율성을 포기하는 대가이기도 했다는 점을 암시한다.…그런 장치들이 매번 작동하지도 않았고 작동한 곳에서도 필요에 따른 것이었지 이타주의의 산물은 아니었다. 땅이 풍부하고 노동력이 부족한 곳에서는 생계의 보장이야말로 노동력을 붙들어주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마을이 유지되려면 노동력이 필요하고 다른 마을로 떠나지 않도록 사람들을 붙잡아두려면 도덕경제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타적인 것이 아니니 도덕경제가 나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자기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타성을 가능하게 하고 그래야 서로가 서로에게 부담을 느끼지 않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 “도움을 주고받는 당사자들이 똑같은 지위에 있다면, 그런 교환은 균형을 이루고 안정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소자작농은 자신도 나중에 똑같은 도움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에, 소규모 자작농지를 가진 이웃의 수확을 도울 동기를 가진다. 그 누구도 자기의 의지를 상대방에게 강요할 수는 없지만, 그 자신의 이익에서 볼 때 자신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계속해서 받고 싶다면 기꺼이 그래야만 한다.” 결국 이타적이냐 이기적이냐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보는가이다.


스콧은 농민의 이런 욕구와 이해관계를 분석하려면 ‘방법론적 개인주의’가 아니라 농민이 “도덕적인 가치와 구체적인 사회관계의 체계, 다른 사람의 행동을 기대하는 방식, 자신의 조상들이 옛날에 비슷한 목적을 달성했던 방식을 제공받는, 그가 태어난 사회와 문화 속에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농민들의 삶은 호혜성의 규범과 생계에 대한 권리를 빼고서 이해될 수 없는데, 이런 규범과 권리들은 농사 주기나 의식주기에 잠재되어 있기에 스콧은 “속담, 민요, 구술역사, 전설, 농담, 언어, 의례, 종교”를 분석해야 그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온갖 통계자료를 내세우고 계산기를 두드려서 농민들의 생계를 보장하겠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먼저 그들의 삶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스콧은 식민지 시기의 농민반란이 성공하지 못했지만 완전히 실패했다고 보지도 않는다. 패배한 농민들은 적어도 문화적인 차원에서나마 자신들의 도덕질서(국가와 시장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되지 않는)를 만들고 공동체를 유지해서 시작의 가능성을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농민의 도덕경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 상징적인 피난처는 불안정한 생활을 위로받는 장소가 아니라 외려 하나의 탈출구이다. 이 피난처는 싹을 틔우고 있는 대안적인 도덕세계를, 즉 반체제 하위문화, 구성원들이 인간적인 공동체이자 가치의 공동체로 단결하도록 돕는 실존적으로 참되고 정의로운 하위문화를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이 피난처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한강의 기적’에 현혹되어 자기 생활터전이 공사판으로 변하는 것을 눈감아온 우리에게 스콧의 주장은 공상처럼 들린다. 경쟁력을 내세워 농촌을 버리는 판국에 다시 농민공동체라니. 특히나 우리사회에서는 국가나 자본에게 뭐 하나 받기는커녕 몸과 마음 다 내주기만 한 사람들이 열렬한 애국자요, 재벌들의 옹호자로 나선다. 이런 상황을 예상이나 한듯 스콧은 이런 모습이 왜 나타나는지를 설명한다.



왜 우리는 국가처럼 보나?



《국가처럼 보기》는 세상을 인식하는 우리의 사고방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잘 살 수 있게 해주겠다며 등장한 근대국가는 사회 전체를 자신의 수중에 놓으려 했다. 구석구석 세밀하게 통제하기 위해 국가는 지도를 제작하고 언어와 도량형을 통일하며 소유권을 확립하고 공간을 집중시키고 다양한 세계를 표준화한다.


국가처럼 보는 사람들의 눈에 “가치 있는 식물은 ‘농작물’이 되고, 그 농작물과 경쟁하는 종은 ‘잡초’로 낙인찍힌다. 그리고 농작물에 기생하는 벌레는 ‘해충’으로 낙인찍힌다. 또 가치 있는 나무는 ‘목재’가 되는 반면, 이와 경쟁하는 종은 ‘잡목’이 되거나 ‘덤불’ 쯤으로 여겨진다. 이와 동일한 논리는 동물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높은 가격이 매겨진 동물은 ‘사냥감’이나 ‘가축’이 되지만 그것과 경쟁하는, 혹은 그것들을 먹이로 삼는 동물은 ‘약탈자’나 ‘야생동물’ 쯤으로 간주된다.” 인간사회도 똑같이 나눠진다. 가치있는 인재와 쓸모없는 잉여인간로, 때로는 사회를 좀먹는 암적인 존재로. 왜 그렇게 나눠져야 하는지, 그렇게 나누는 기준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우리는 끊임없이 나눠지고 살아남기 위해 무한경쟁해야 한다.


스콧은 안타깝지만 우리가 진보적이라 믿는 “시민권, 공공 위생 프로그램, 사회 안전, 교통, 커뮤니케이션, 보편적인 공교육 그리고 법 앞의 평등 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모두 국가 중심적, 하이 모더니즘적 단순화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런 시각을 가지게 된 게 아니라 근대국가와 자본주의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단순해진 지도와 세계를 ‘의도적으로 만들었다.’


스콧은 이런 열망과 의식을 ‘하이 모더니즘(High Modernism)’이라 부르는데, 이 “하이 모더니즘은 하나의 신념으로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넓은 스펙트럼을 초월해 많은 사람들에 의해 공유되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하이 모더니즘은 사회 전체를 자신의 구상대로 만들려는 사람들의 공통분모였고, 르 코르뷔지에의 대도시 구상, 레닌의 혁명당, 소련의 집단농장 등으로 구현되었다.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는 재개발과 재정착도 마찬가지이다. 스콧은 사람들을 새로운 공간에 재정착시키는 것이 “경관의 변화라는 차원을 훨씬 능가”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사람들로부터 지금까지 자신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 대부분을 생산해온 기술과 자원은 물론 비교적 자급적으로 살 수 있었던 독립적인 생활수단을 박탈한다. 이러한 기술이 거의 또는 전혀 필요 없는 새로운 환경으로 사람들을 옮기는 것이다.” “농업의 근대화를 꾀하는 대부분의 국가 프로젝트 가운데 미처 잘 알려지지 않은 논리는 중앙정부의 권력을 강화하면서 농민의 자치권 그리고 중앙정부기관에 대한 농민 공동체의 자율성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모든 새로운 물리적 관행은 어떤 방식으로든 권력, 부, 지위에 대한 기존의 분배방식을 변화시켰다.” 이런 계획들이 엘리트들의 하이 모더니즘 미학을 실현할 수는 있겠지만 민중의 삶을 더 행복하게 만들수는 없다. 오히려 이런 계획들은 자치와 자급의 기반을 파괴한다.


《농민의 도덕경제》에서 농민정치가 식민지를 거치며 국가정치로 점점 통합되는 과정을 비판했듯이, 《국가처럼 보기》에서도 스콧은 화전민이나 이동하며 경작하는 농민들이 넓게 퍼져 생활하는 비국가적 공간이 국가적 공간으로 대체되는 과정을 비판한다. 스콧은 농업이 산업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또는 농민이 노동자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발전론을 따르지 않는다. 국가개발이 내세우는 사회복지 담론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콧은 그 과정이 언제나 “비국가적 자원들이던 과거의 공동체를 거의 항상 파괴하거나 분열시켰다”는 점을 지적한다.


근대국가의 확장을 비판하면서 스콧은 농민의 생활과 농업 속에 스며들어 있는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하려 한다. 아무리 좋은 명분을 내세워도 근대국가가 만들려는 유토피아는 다양한 삶을 표준화하고 단순화시키기 때문에, 이런 파괴에 맞서 지역적인 관행이 중요하다. 그러니 국가처럼 보지 말고 우리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고, 우리 눈의 가치를 우리 스스로 인정하도록 노력하자고 스콧은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힘을 가진 자들의 하이 모더니즘을 견제할 민중들의 ‘강력한 시민사회’이다. 민주주의가 필요하고 이 때의 민주주의란 토착적이고 경험적인 지혜를 뜻하는 “시민의 메티스가 조정이라는 방식으로 그 나라의 법과 정책을 끊임없이 수정”하는 것이다.


결국 중앙집중화되고 상품화된 삶에서 벗어나 자치와 자급의 기반을 다져야 하고, 그 과정에서 농민공동체는 사라진 지혜들을 보존해온 보물창고로 등장한다. 하나의 원리가 아니라 다양한 기준들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공존해야 사회가 지속될 수 있다.


스콧의 가장 최근작인 《지배당하지 않는 기술》은 삐에르 클라스트르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를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역사를 가진 사람들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로 불린다. 그만큼 실감나지는 않더라도 역사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역사는 국가에 대항하는 투쟁의 역사로 불릴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의 부제는 ‘동남아시아 고지대의 아나키스트 역사’이다. 스콧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버마, 중국에 걸쳐진 고지대의 주민들이 지난 2천년 동안 어떻게 국민국가의 지배를 피해왔는지를 설명한다. 아직 책을 다 읽진 못했지만 스콧은 그 기술을 산악지대에 흩어져 사는 것과 화전경작, 구전문화의 유지 등에서 찾는 듯하다. 스콧도 자신의 생각을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스콧처럼 보기



내가 스콧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국가‘를 배제한’ 또는 국가‘와 공존하는’ 정치공동체의 모습을 찾을 수 있어서이다. 스콧은 국가가 없는, 또는 국가라는 근대의 상상물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시기에 민중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근대국가의 등장이 그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나에 관해 얘기한다. ‘국사’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생각지 못했던 관점들을 스콧은 잘 지적해 준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근본적인 지적들을 어떻게 소화시킬 것인가이다. 오랫동안 국가처럼 보는데 익숙해진 우리는 근본적으로 생각하고 되짚어보는 방법을 이미 잊어버렸다. 그러니 우리 역시 추상적인 큰 담론으로 시작할 게 아니라 스콧처럼 하나의 구체적인 사례를 발굴하고 그것을 통해 우리의 현재모습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해야 한다. 스콧의 물음들을 가지고 우리 역사를 되짚어본다면 어떤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을까?


요즘 ‘보편적 복지’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나는 그 말에 호감을 느끼거나 신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호혜와 달리 보호나 보장이라는 말은 어떤 주체가 다른 누군가를 대상으로 삼는 말, 특히 국가가 시민들을 대상화시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왜 내가 국가라는 지배질서가 베푸는 시혜(사실은 내가 낸 세금!)에 매달려야 할까? 그 속에서 동등한 관계가 맺어질 수 있을까? 조금 다르게 물으면 국가는 왜 나의 삶을 보호하고 보장하려 들까?


예를 들어, 국가가 도시빈민의 권리를 보호하고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주 매력적으로 들린다. 그런데 그런 보호와 보장을 주장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은 그들이 도시의 빈민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도시빈민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들이 아니라 농촌에서 도시로 ‘밀려난’ 사람들이다. ‘자발적’으로 도시를 선택한 사람들일 수도 있지만 ‘다른 생계수단을 찾을 수 없어’ 도시로 밀려난 사람들이다. 그리고 국가가 그런 밀어내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국가의 보호/보장을 받으며 계속 도시에서 불쌍한 사람들로 살아야 할까? 언제 바뀔지 모르는 ‘국가의 선의’에 의존해서 그들이 계속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도시빈민들이 도시에서 계속 빈민으로 살도록 보장하는 것이 과연 그들의 삶에 이로울까? 이런 근본적인 물음 없이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선량한 오만’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이런 논리는 더럽고 치사하더라도 자기 땅을 빼앗은 강도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야 한다는 논리와 무엇이 다를까? 그래도 사는 게 어디냐라며 합의를 종용하는 야비한 변호사의 논리와 무엇이 다를까?


비슷한 질문을 이주노동자들에게도 던질 수 있다. 왜 이주노동자들은 자기 고향을 등지고 이곳으로 와야 했을까? 그들이 원해서 들어온 것도 있지만 우리가 ‘필요해서’ 그들을 불러들였고 ‘산업연수생제도’라는 야만적인 제도로 그들의 노동을 착취했다. 필요로 불러들인 사람들을 환대하기는커녕 착취하면서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보장하겠다고 한다. 뭔가 앞뒤가 바뀌어 있다. 우리가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권리를 보장한다는 생각 역시 전적으로 ‘우리의 생각’일 뿐 실제로는 이주노동자들이 우리의 생활을 보호하고 보장하고 있다.


요즘 들어 가장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사람이 남을 위해 살겠다는 사람들이다. 엄청난 사명감을 가지고 남을 위해 살지만 정작 그 자신은 자신과 불쌍한 그들을 구분한다. 아무리 좋은 명분을 대더라도 스콧의 표현을 빌면 그는 하이 모더니즘에 빠진 사람일 뿐이다. 그는 세상을 자기 눈에 아름답게 만들고 싶어 하고 다른 이들은 그 세상의 장식품일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들을 보호받아야 하는 나약하고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나와 동일한 존재로 볼 수 있는 관점, 내가 그들과 동일한 존재라고 선언할 수 있는 용기, 그들과 섞여 살아가는 구체적인 일상이다. 스콧은 그런 삶이 가능했고 지금도 가능할 수 있다고 우리를 설득한다. 귀를 기울여볼만한 얘기들이다.


신고
posted by 몽똘 2011.12.09 23:17
<프레시안>에는 '원순씨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은 현 정부를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 불렀다. 그동안 녹색, 공정, 공생처럼 좋은 말들의 의미를 줄줄이 왜곡해온 사람이라지만 이건 너무하다. 측근들의 비리가 줄줄이 터져 나오고 '위키리크스'를 통해 부정한 외교가 들통 난 상황에서 현 정부가 도덕적으로 완벽하다니. 개그라면 웃겠지만 진심이라니 기가 막힌다.

아직은 자신이 힘을 가지고 있으니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명박산성이 영원할 수는 없다. 비록 2008년 촛불의 행진은 명박산성에 막혔지만 이제 시민들은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용산 레아, 홍대 두리반, 4대강 공사 현장,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강정 마을 해군 기지 등을 찾는 시민들의 발길은 현실을 스스로 판단하려는 움직임이다.

물론 짜잘하게 부딪쳐봤자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며 냉소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다. 통계 수치나 이론, 정책을 들먹거리며 자신을 믿고 '큰 거 한방'에 기대를 걸라고 설득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성공한 사건(?)만을 기억하는 한국 사회에서 정치는 MB, JP, DJ같은 약자로 얘기되는 정치인과 사조직처럼 움직이는 정당들의 전유물로 얘기된다.

갑작스런 사건이 우리를 흥분시키는 것은 분명하지만 군불이 없다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제프리 골드파브의 <작은 것들의 정치>(이충훈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는 정치의 군불을 때는 방법을 다룬다. 한나 아렌트와 어빙 고프먼의 이론을 받아들여 골드파브는 "사람들이 역사적 상황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상호 작용 속에서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세계에 가져올 수 있는 역량이 있다"고 주장한다.

▲ <작은 것들의 정치>(제프리 골드파브 지음, 이충훈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btn
1960년대 말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벌어졌던 사건들, 1989년의 루마니아 혁명, 2001년 9·11 테러, 2004년 미국 내의 반전 운동과 대통령 선거 운동 같은 굵직한 사건들에서 일상의 정치는 변화의 물꼬를 텄다. 골드파브는 "구조적 조건들이 변화를 이끌기 위해서는, 상황을 정의하는데 있어서 나타난 변화가 공유되고 공개되며, 그런 공유된 변화에 입각해 행위가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큰 거 한 방도 세상을 달리 보려는 자잘한 시도들이 쌓여야 가능하다는 얘기이다.

골드파브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광범위한 상호 작용에 내재한 자유로운 공적 공간의 중요성"을 간파하면 식탁, 책방, 살롱, 공장, 학교 같은 일상 공간이 정치의 장으로 변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공간에서 상황을 스스로 새로이 규정하며 시민들은 대안적인 정치의 싹을 키운다. 마치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는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시민들은 "사회적 상호 작용의 일상적인 유형, 즉 자유로운 시민사회의 구성요소를 사실상 만들어" 낸다.

물론 우리의 '가카'처럼 부조리한 권력자들은 공권력을 동원하고 미디어의 입을 막으며 공식 이데올로기를 시민들에게 강요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공식적인 공간에서는 공식적인 이데올로기를 믿는 척했지만, 식탁의 주위에서, 독립적인 책방에서, 살롱에서, 그런 강요된 관계는 의문시되었다." 의심받기 시작한 권력은 그렇게 서서히 무너지고, 시민들은 일상적인 관계 속에서 새로이 권력을 정의하며 대항 지식, 대항 권력을 형성한다.

특히 골드파브는 인터넷이 좌파 운동의 중요한 수단이라고 얘기한다. 미국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던 민주당의 하워드 딘과 <무브온>, 미국의 반전 운동을 예로 들며 골드파브는 인터넷이야말로 작은 것들의 정치를 펼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서로 만났다. 그들은 자신의 글을 올렸고, 서로에게 반응했으며, 서로를 알게 되었고, 그들의 행위를 조율했다. 그들은 상황을 재정의했다. 상황은 그들의 정의에 따라 변화했다." 이야기와 관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인터넷이야말로 작은 정치를 큰 정치로 전환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매개물이다.

그렇다고 작은 것들의 정치가 곧 권력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골드파브는 "작은 것들의 정치(흔히 시민사회의 중요성이라는 통념으로 요약되는)가 권력의 중요한 기반을 제공한다는 것이지 권력의 궁극적인 원천은 아니라"고 인정한다. 그런 점에서 골드파브는 작은 것들의 정치가 '제도화'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유동적인 운동들은 중요한 정치적·문화적 변화를 산출하지만, 그것들은 또한 출현하자마자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상황을 정의하는 힘은 제도화되지 않으면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 그렇지만 대안들이, 기존의 두 지배 정당 가운데 한 정당(예컨대, 민주당―옮긴이)에서 제도화된다면, 그와 같은 대안들은 미국인들에게 꾸준히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제도화는 작은 것들의 정치가 장기적으로 생존하는데 핵심적인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제도화는 정당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매우 다양한 사회 제도들 속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가 살펴보게 될 것처럼 교육과 미디어 제도들은 특히 중요하다."

더불어 이런 생각을 말로만 떠들지 않고 골드파브는 'deliberately considered'라는 사이트를 운영하며 다양한 시민들과 소통하고 일상의 정치를 활성화시키고 있다. 골드파브의 이론을 통해 우리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나는 꼼수다>의 유행과 '닥치고 정치'라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바로 작은 것들의 정치이다.

포스트 후쿠시마 시대의 정치

이런 골드파브의 주장이 완전히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정규군이 큰 것 같지만 어떤 때 가면 정규군을 다 동원할 수도 없어요. 쥐는 고양이가 잡게 생겼지 황소가 못 잡는단 말이야. 그런 모양으로 신문에서라든지 잡지에서 못하게 되면 차 마시러 들어가서 다방에서도 얘기하고, 친구 만나 음식점에 가서 얘기하고, 기차 타러 가서 그 안에서 얘기하고, 그게 게릴라전 아니냐. 정규의 언론 기관은 아니지만, 정규의 언론 기관이 다 맥이 빠져서, 권력에 팔려서, 종이 돼서 할 말을 못하고 있다 그런다면 우리끼리 어디서든 만나는 대로 해야 돼."

함석헌의 이런 얘기는 이미 핵심을 짚었다. 그리고 골드파브보다 훨씬 더 강한 열정과 활동으로 함석헌은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려 했다. 많은 시민들이 그의 글과 강연에 매료되었다.

그런데도 왜 우리 사회에서 작은 것들의 정치는 활성화되지 못했을까? 한국의 시민들이 능동적이지 못해서? 한국 사회 시민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렇게 판단하기 어렵다. 문제는 작은 것들의 정치가 몇몇 스타를 낳을 뿐 긍정적으로 제도화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서민의 꿈과 희망을 대변하겠다는 인물들만 있었지 시민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정치제도는 만들어지지 못했다. 아니 만들어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대다수 정치인과 정당들, 시민 운동 활동가들조차도 작은 것들의 정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시민들의 꿈을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시민들이 직접 꿈을 꾸는 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08년 9월 촛불 집회의 끝물에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하는 <인권오름>에 '편견과 망각의 정치'라는 글을 실었다. (☞관련 기사 : 편견과 망각의 정치) 3년이 지났지만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원순닷컴이 한나라쩜 오알쩜 케이알을 '한 방에' 날려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능력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외려 그의 능력을 알기에 그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걱정스럽다. '반드시 나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가 없어도 시민들이 소통할 수 있는' 구조를 짜는 게 서울 시장 당락과 무관한 박원순의 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역사의 반복과 더불어 냉소주의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거리로 나선 시민들이 열정을 경험한 뒤에 돌아가는 곳은 억압적인 학교와 공장, 가정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를 정치의 장에 가두는 사고야말로 정치의 발전을 가로막는 방해물이다. 학교와 공장, 가정의 민주화 없이는 정치의 민주화가 이루어질 수 없고, 우리의 정치는 삶터의 장을 넘어 일터로 진입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일상은 작은 정치의 희망을 꽃피우는 장소가 아니라 정치의 무덤으로 변한다.

그런 점에서 골드파브가 던지지 않은 질문을 던져 보자. 골드파브가 극찬하는 폴란드는 왜 민주 혁명 이후 신자유주의의 덫에 걸렸을까? 우리 식으로 말하면, 시민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던 노무현 정부가 왜 시민들의 생활 기반을 파괴하는 한미 FTA나 제주 해군 기지, 핵폐기물 처리장 정책을 추진했을까?

이는 정치 논리로만 풀 수 없는 어려운 수수께끼이다. 이 수수께끼를 풀려면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골드파브의 글에서 그런 통찰력을 찾아보긴 어렵다. 정치는 내용이 아니라 틀만 짜야 하기에,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경제의 영역으로 진입하지 못한다. 이제 정치는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구호에, '삼성공화국을 해체하라'는 요구에 답을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골드파브는 아렌트의 이론에 많은 점을 기대고 있지만 그녀가 현대 정치에서 감지한 위기감을 제대로 인식하지는 못한 듯하다. 아렌트는 근대와 현대의 차이를 핵의 발명에서 찾는다. 왜냐하면 핵무기를 다루는 정치는 전쟁이 민간인을 대량 학살할 뿐 아니라 자연 자체를 새로이 만드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정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치의 약속>에서 아렌트는 핵무기의 등장이 "정치를 궁극적으로 정당화하는 바로 그것, 즉 모든 인류가 살아가기 위한 기초적인 가능성을 위협"하는 모순을 만들었다고 얘기한다. 아렌트는 정치와 진리를 연관 짓는 걸 거부하지만 정치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모순을 핵의 발명에서 찾았다. 이것은 아렌트의 정치 이론을 재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즉, 정치의 기반인 세계의 파멸을 막기 위해 우리는 일정한 진리 앞에 서야 한다.

허나 골드파브는 이를 거부하는 듯하다. 골드파브는 책 제목을 따온 아룬다티 로이를 거론하며 "테러주의와 반테러주의에 대한 대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활동가로서의 로이보다는 소설가로서의 로이를 참조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허나 나는 소설가로서의 로이만큼 반세계화 활동가로서의 로이(로이는 활동가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지만!)도 좋아한다.

"만약 후세인 정권이 쓰러진다면 바스라 거리에 사람들이 뛰어나와 춤을 출지 모른다. 그렇다면 만약 부시 정권이 무너진다면 세계 전역에서 거리마다 사람들이 뛰어나와 춤을 출 것이다."

이 얼마나 명쾌한 정의인가?

핵 발전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한국의 정치는 근본적인 물음 앞에 서 있다. '원자력 르네상스'를 꿈꾸고 아직도 원자력의 신화를 믿는 우리 사회에서 작은 것들의 정치는 반핵(反核)을 지지해야 한다. 작은 것들의 정치, 제도 정치 모두를 위해서.
신고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