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렌트, 수용소와 전체주의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다

 

아렌트라면 어땠을까? 아렌트가 지금 한국에 산다면 정치를 어떻게 볼까?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독재나 전체주의라는 단어가 다시 공론장에 등장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어떤 작가는 이를 나치의 등장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 비유가 적절한가 아닌가의 여부는 선거를 통해 집권했고 51%의 국민이 박근혜씨를 지지했다는 사실로만 판단될 수 없다. 왜냐하면 히틀러가 권력을 잡았던 독일 총선에서도 나치의 지지율은 44%였기 때문이다. 이 지지율을 등에 업고 합법적으로권력을 잡은 히틀러는 나치를 제외한 다른 정당들을 해산시키고 여론의 입을 틀어막으며 전체주의를 실현했다.

그리고 아렌트는 선거를 무시하지 않았지만 선거가 곧 정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외려 근대 정당과 선거가 정치의 가능성을 차단할 것이라 우려했다. 아렌트에게 정치란 시민들이 공개된 장소에서 공적인 의견을 서로 나누며 자신의 독특함을 드러내는 것이고, 정치는 진리의 영역이 아니기에 옳고 그름에 대한 정답을 쫓지 않는다. 선거에서의 지지율보다는 공론장을 파괴하는 정치’, ‘말과 행동을 부정하는 정치’, ‘사유하지 않고 정답만을 강요하는 정치’, ‘차이를 부정하고 효율성만을 강요하는 정치의 등장이 정치를 가늠하는 잣대이다.

이 책에서 우리가 아렌트를 읽고자 하는 이유도 단순한 지적 호기심보다 우리가 사는 시대와 사회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논의하려는 바람일 것이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그 체제 너머의 정치를 보려는 사람에게, 정치와 민주주의가 어떻게 실현되는지 궁금한 사람에게, 개인주의의 냉소나 전체주의의 열광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아렌트는 좋은 길잡이이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국내외의 이런저런 자리에서 많이 인용되는 사상가이다. 하지만 그 사상을 직접 접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아렌트의 언어와 사상이 낯설기도 하거니와 국내에 소개된 번역서들이 낯설음과 어려움을 더한다. 그리고 사상이란 현실과의 치열한 대면에서 나오는 것인데, 아렌트의 사상이 나오게 된 맥락은 책으로 이해하기 어려다. 마찬가지로 아렌트의 개념들을 한국 현실과 어떻게 맞닥뜨리게 해야 할지 막막한 면도 있다. 어려운 책을 읽다보면 아렌트를 공부하는 게 지금 우리 현실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이런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런 관심과 의문에 답하려는 시도이다. 아렌트가 궁금한 사람과 아렌트를 활용하고픈 사람 모두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었고 아렌트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제 I부와 제 II부로 나눴고 관심에 따라 제 I부와 제 II부를 읽는 순서를 바꿔도 좋다. 아렌트의 사상을 조곤조곤 보고 싶은 사람은 제 I부부터, 아렌트의 관점으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궁금한 사람은 제 II부부터 읽어도 된다. 따로 읽어도 될 만큼 아렌트에 관한 기본적인 내용들을 설명하면서 글을 쓰려 노력했으니 두 가지 맛 파스타 또는 짬짜면 정도로 생각하시면 되겠다. 한 쪽의 깊은 맛을 느끼려고 하는 사람에겐 미흡할지 모르겠으나 어느 걸 선택할지 망설이는 사람에겐 여러 고민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I부는 수용소와 공론장이라는 아렌트 사상의 고갱이를 다루고, II부는 아렌트가 평생을 걸고 맞섰던 전체주의라는 화두에 주목하고 그 문제의식을 한국사회에 투영시켜 본다. 아렌트에게 수용소와 전체주의는 평생을 따라다닌 악몽이었다. 그 악몽을 끄집어내는 것은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의 악몽이 이와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무슬림이라 불렸다. 아랍 사람이나 이슬람 교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고 엎드려 기도하는 듯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던 수용소의 은어였다. 수치심마저 잃어버린 채 마치 물건처럼 취급되는 사람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측은함과 동정을 느끼겠지만 우리는 그런 삶과 정말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 정치로부터 도피해서 개인적인 생활에만 관심을 가지고, 바로 그 때문에 주어진 질서에 수동적으로 복종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권력을 구성할 용기나 의견이 없으면서도 내가 주권자라며 공허한 호기만 부리는 건 아닐까? 사람들도 자주 만나고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같은 편끼리 똘똘 뭉쳐서 비슷한 각도로 세상을 재단하고 어긋난 부분에 대한 불만만 쏟아내는 건 아닐까? 나도 당당한 주체라며 자신을 내세우지만 우리가 공통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서로 공유하는 감각을 잃어버린 채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건 아닐까? 고립되어 있으면서 고독한 척 위선을 부리는 건 아닐까? 수용소는 물리적인 공간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타자와 만나고 헤어지는 방식을 규정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I부는 이런 물음들에 대한 답을 고민할 수 있도록 아렌트의 사상을 재구성했다.

그리고 전체주의는 단순히 독재자가 지배하는 상황을 뜻하지 않는다. 전체주의는 비공식 조직이 공식기관의 힘을 대체하고 누가 권력을 행사하는지, 어떤 일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도통 알 수 없게 만드는 지배구조이다.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감시하면서 내부의 적을 만들어내고 불안을 자극하며 결국에는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도록 만드는 비밀경찰이 암약하는 체제이다. 실제 현실이 아니라 조작된 이데올로기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만들고 우리 자신도 이미 규정된 지위로만 이해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바로 전체주의이다.

이 책을 쓰는 동안 한국사회에서 큰 비극이 발생했다. 바로 세월호 참사이다. 295명의 승객이 사망했고 9명이 아직도 바다 속에 잠겨 있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안산시 단원고의 학생들과 먹고살기 위해 배에 올랐던 사람들이 이 참사로 떼죽음을 당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참사에 책임을 진 정치인이 아무도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엇이 원인인지, 왜 사고가 참사로 이어졌는지, 진상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자신을 믿고 맡겨달라고 하지만 사실을 은폐하고 유가족들의 요구를 무시할 뿐 공정하고 투명한 절차를 마련하고 있지 않다. 이런 정부 앞에서 유가족과 시민들은 다시 한번 극심한 무기력을 경험하고 있다. 이런저런 소문만 무성할 뿐 정확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시민들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자식과 가족, 이웃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절규와 몸부림에 가만히 있으라고, 교통사고일 뿐이라고, 정치적인 선전이라고 비난하는 이들과 우리는 정말 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걸까? 시민들이 선출한 정부가 시민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시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 시민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끔찍한 세계전쟁과 정부의 거짓말, 폭력이 난무했던 20세기를 겪었던 아렌트는 이런 경우에 어떤 이야기를 할까? II부는 이런 물음들에 대한 답을 고민할 수 있도록 한국의 현대사를 되짚어본다.

아렌트를 읽으며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1987년 민주화나 1993년 문민정부의 수립, 1997년 국민의 정부, 2003년 참여정부의 수립은 시민이 새로이 정치를 시작할 수 있는 세계를 부활시켰을까? 만일 그러하다면 왜 아직도 우리에게 정치는 부정하고 타락한 것이거나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어떤 무기력한 것으로만 느껴질까? 어디서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한국의 정치는 이렇게 지지부진할까?

글쓴이들은 이런 물음들에 조금이라도 실마리를 주고자 노력했다. 글쓴이들은 길잡이로서 정치의 부활을 모색하는 이 흥미로운 여행에 앞장선다. 혹시 몰라 두 명이 지도를 함께 그렸고, 그래도 글쓴이들의 지도가 완벽한 것이라 장담할 수는 없기에 최대한 돌다리를 두들겨보며 가려 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아렌트의 원문에 바탕을 두고 논의를 이끌어가려 했다. 가능하면 위태롭고 험난한 길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 길을 지나지 않으면 다음 길로 이어지지 않는 곳도 있으니 힘들어도 같이 손을 잡고 지나갈 수밖에 없다. 각 장의 마지막에 함께 읽기와 해설을 둔 것은 우리와 손을 잡고 함께 가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이 확인하기 위한 장치이다. 물론 때로는 길잡이를 따르지 않고 내키는대로 무작정 걸어보는 것도 여행을 즐기는 묘미일 수 있다. 그러니 길잡이에게서 여행의 모든 재미를 찾으려고 하지는 말기를... 다만 글쓴이들이 길잡이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는지를 헤아리는 일은 독자들의 몫이다.

이 책은 아렌트에 관한 하나의 해석이고, 아렌트가 강조했듯이 다양한 소리들이 모여 하나의 화음을 이뤄가는 합주(action-in-concert)’, 두 사람의 합주이다. 이 합주가 얼마나 성공적일지는 합주를 듣는 독자들의 몫이다. 그리고 합주를 들으며 또 다른 합주를 만들어가는 것 역시 독자들의 몫이다. 깊은 바다에 홀로 들어가는 건 두려운 일이기에 이 책은 작은 불빛만 밝혀 놓았고 직접 들어가 텍스트를 건지는 작업은 독자들의 몫이다. 이렇게 독자들에게 많은 몫을 밀어놓는 무책임한 저자들이 있을까 싶겠지만 그렇게 아렌트를 접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모쪼록 즐거운 여행이 되길 빈다.

글을 쓰는 두 사람은 학교에서 같이 아렌트 세미나를 했던 사람이기도 하고 땡땡책협동조합에서 아렌트에 관한 독서회를 함께 진행하기도 했다. 이 책은 두 사람이 처음 호흡을 맞춰본 결과물이자 충청북도 옥천군으로 함께 이사와 간간이 고민도 나누고 밥도 나누며 만든 성과이다. 지역출판의 불씨를 지피고 있는 한티재에서 이 책을 내게 되어 또 기쁘다. 모두 고마운 일이다.

 

지금 근원적으로 되풀이되는 물음, 국가란 무엇인가
한 세기 전의 한 아나키스트가 일깨우는 통렬한 비전

아나키즘 정치 이론에 중대한 공헌을 한 역사적 문헌
격동의 시대를 관통하며 23년에 걸쳐 씌어진 대화

아나키스트 조르조가 어느 모퉁이 카페에서
열일곱 밤에 걸쳐 다양한 인물들과 어울려 나누는
국가와 사회에 관한 거침없는 논쟁

“자본주의와 중앙집권화된 국가가 미치는 폭력의 정점에 사는 우리에게
이 책은 무엇이 사회의 근본인지를 잘 보여준다”


【 2014년 4월, 세월호 사건 이후 많은 사람들이 정부와 국가의 역할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시민들의 촛불집회 현장에서 “국가가 책임져라”, “누구의 정부인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글귀를 종종 접한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이 질문을 먼저 풀어야 했던 과거 한 아나키스트 선배의 이야기이다. 외국의 이야기로만 들을 수 없다. 봉건제도와 외세에 맞서 농민들이 무기를 들었던 갑오년이 120년을 돌아 지금 우리의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당시 무장봉기했던 동학 농민군의 고민을 어떻게 이어가고 있을까? 우리는 당시의 농민들보다 더 나은 삶, 더 좋은 삶을 살고 있을까?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은 여기서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만을 헛되이 되풀이하지 않는다. 인민의 삶을, 우리가 원하는 사회의 모습을, 그것을 구성하고 운영할 방법을 근원적으로 고민하게 한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자신이 좋아하는 삶을 만들 수단을 가진 사회’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비전이라고 할 수 있다. 】

『국가 없는 사회』(영어판 『At the Cafe: Conversation on Anarchism』, 2005)는 지금처럼 국가 혹은 정부 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가 가득한 때에, 우리가 바라고 만들어나갈 수 있는 새로운 사회 시스템에 대한 실천적인 비전을 담고 있다. 이 책은 1897년부터 1920년까지, 23년에 걸쳐 이탈리아 아나키스트인 에리코 말라테스타가 수배와 구속을 거듭 겪으며 집필한 원고들로,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씌어졌으며, 국가폭력의 본질을 고발하며 국가 없는 사회 구상의 비전을 그려낸다.
이 책의 집필 목적은 분명하다. 인민이 스스로 힘을 기르고, 생활의 수단을 가지고, 사회를 구성하자는 점을 설득하고 그러한 운동을 선전하기 위해서다. 이 목적을 위해 읽기 쉬운 대화 형식으로 글을 썼고, 다양한 입장을 대변하면서 아나키스트의 입장을 명확히 밝히고자 치안판사, 부르주아지, 노동자, 자영업자, 공화주의자, 대학생, 군인 등을 대화 상대로 등장시켜 말을 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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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코 말라테스타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생소하다. 그는 일찍이 학교를 떠나 혁명가의 길을 걸었고 여러 차례 감옥살이를 했으며, 무장봉기를 이끈 지도자, 총파업을 꿈꾸며 인민을 조직한 활동가이면서 평생 일을 멈추지 않은 노동자였다. 바쿠닌, 크로포트킨, 엠마 골드만과 함께 아나키즘 운동을 이끌었고, 사상과 행동, 설교와 실천이 일치하는 혁명가이자 상냥하고 따뜻한 심성의 인간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창 아나키즘 선전과 조직화가 왕성할 당시에는 ‘이탈리아의 레닌’(말라테스타는 자신은 결코 지배자, 폭군이 아니라며 그러한 표현을 거부했다)으로 추앙받기도 했다.
이 짧은 책에는 그의 뜨겁고 치열하던 생애가 잘 녹아들어 있다. 말라테스타는 숱한 구속과 수배 생활에도 불구하고 삶의 노선이 굳건했다. 다름 아니라 국가 혹은 정부 권력을 바꾸는 혁명이 아니라 아래에서부터 치받는 욕구들이 자기 힘으로 사회를 구성하고 운영해야 한다는 원리가 그의 노선이었다. 그리고 그 노선을 평생 일관된 목소리로 선전하고 조직 활동에서 실천했다. 그러한 하나의 사례가 바로 이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1897년에 쓰기 시작해, 구속과 수배 및 역사적인 사건들 때문에 중간중간 단절을 겪으며 1920년에야 현재의 구성으로 마무리되었으니 무려 23년 간 집필된 셈이다(그러던 사이 틈틈히 토막 원고들을 자신이 편집하는 잡지나 신문에 싣곤 했다). 앞서 적었듯, 말라테스타는 일생을 쉬지 않는 노동자로 일하면서 동시에 혁명가로 살았다. 크로포트킨과 만났을 때도 말라테스타는 어느 가게 벽에 구멍을 뚫는 작업을 하러 망치를 들고 사다리 위에 올라가 있었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생애는 그의 글과 활동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이 분명하다. 말라테스타는 공허하고 추상적인 단어, 배운 척하는 어려운 단어나 인용구는 피하고 언제나 명확한 표현만을 사용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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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없는 사회’라는 비전을 두고 우리가 논쟁을 시작한다면 어떤 대화들이 가능할까. 말라테스타는 이 책에서 우리를 그러한 논쟁으로 한껏 끌어당긴다. 이 책 속에서는 치안판사, 부르주아지, 노동자, 자영업자, 공화주의자, 대학생, 군인 등이 등장해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웅변하고 서로 논쟁한다. 여기서 치고받는 ‘질문’들이 지금의 우리에게 새로운 상상과 행동을 기획할 지점들을 비춰준다. 최근 경찰과 국가에 대한 비판이 많지만, 이 문제가 어디서 비롯되는가에 대한 설명은 부족한 데 오히려 한 세기 전의 인물들이 나눈 대화와 통찰들에서 우리는 지금의 문제의 핵심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원고는 ‘가상 대담’ 형식으로 씌어졌는데, 사실 당시 카페 등에서 실제 벌인 토론의 기록이리라 짐작할 수 있다. 말라테스타는 원고를 집필하던 시기에 사람들과 격렬한 토론을 벌이다 다리에 총상을 입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 대화로 짐작하는 또다른 이유는, 말라테스타가 언제나 감시를 받던 신분임에도 자주 카페에 나와 토론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그는 바라는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방법은 끊임없이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어 그들과 대화하고 설득하여 뜻을 모으는 방법뿐이라고 굳게 믿은 혁명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옮긴이의 표현대로 말라테스타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인민 속으로 파고든 선동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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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아나키즘 사회, 그리고 ‘자유로운 공산주의’라고도 표현하는 사회 구상을 목표로 삼는다. 책에서도 등장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대한 가장 일차적인 반발은 무정부 사회의 무질서 상태를 어떻게 통제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말라테스타가 말하는 비전은 ‘자유로부터 질서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중앙집권화된 국가로 인한 사회 폭력의 정점에 사는 우리에게 이 책은 무엇이 사회의 근본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렇기에 근본적인 전환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에게 좋은 참고점들을 제시하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로 이 책은 새롭게 시작하는 사회 구상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도록, 그것이 옳고도 가능하다는 점을 믿을 수 있게 해준다. 아나키즘에 궁금증을 가지거나 아나키즘에 회의를 품은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는 문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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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未知)의 만남은 흥미롭다

 

항상 그런 마음이 있었다. 익숙한 것을 지지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점검하면 좋겠다는. 내가 믿고 지지하는 것이 몇몇 사람들의 대안이 아니라 정말 사회의 대안을 만들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마을모임을 기획한 것도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마을이라는 말이 여기저기 등장하는 것을 볼 때마다 반갑기도 했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전국이 마을로 힐링을 하려는 건가. 마을로 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을 텐데, 왜 마을만 얘기할까. 어느 순간 마을은 정부의 정책에도 등장하고 기업의 광고에도 등장하는 무채색의 개념이 되어 버렸다.

물론 마을은 자치와 자급을 가능케 하는 삶의 중요한 기반이다. 하지만 한국처럼 기본적인 인권이 존중받지 못하고 노동자와 농민의 권리가 짓밟히며 성소수자와 청소년의 정체성이 부정당하는 사회에서 마을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정도의 능력을 마을이 정말 가지고 있나? 그리고 마을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다양한 활동들이 그 마을에 걸맞게 주민들과 함께 진행되며 한국사회를 바꾸고 있나? 마을만들기, 마을공동체라는 말이 사업으로 변해 얘기되는 것을 볼 때마다 이런 물음이 생겼다.

그리고 마을의 활동이 더 작고 구체화되는 건 좋지만 그 자체로 자족적인 모임이 되어버리면 내부의 관계는 돈독해지나 점점 외부로부터 고립된다. 사실 마을이라는 말이 이런 고립감을 상쇄시켜주기 때문에 마을에만 있으면 사회에 대한 감각이 점점 둔해진다. 완전히 마비되지 않으면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내 주변엔 온통 착한 사람 뿐인데, 왜 세상은 개판인가? 내 직장은 개판인데, 마을은 왜 이리 아름답나? 이러면 사람이 정신분열증에 걸리는 거다. 세상의 모든 일이 일관될 필요는 없지만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뉘면 삶이 온전해지기 어렵다.

또한 마을의 자급능력은 점점 줄어들고 필요한 기능을 외부에서 끌어다 쓴다. 예를 들어 아파트 단지를 유지하려면 다양한 노동이 필요하다. 경비를 서고 계단을 청소하고 쓰레기를 수거하고 택배로 물건을 나르고, 주민들에게 필요한 많은 일들을 대신해주는 분들이 계시다. 그런데 이 분들은 마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나? 대부분이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하는 약자들이다. 아름다운 마을에서 이 분들의 자리는 어디일까?

이 모임을 기획한 건 이런 고민을 함께 풀면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어서였다. 매번 만나는 익숙한 사람들이 아니라 좀 낯선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면 딱히 답은 안 나와도 여러 가지 질문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도 마을운동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갑작스런 연락에 모두들 순순히(?) 응해주셨다.

이 분들을 모신 이유를 설명하다보면 이 책을 기획한 이유가 좀 드러날 것 같다. 대담에 참여하신 분들을 하파타 순으로(가나다 순의 반대로) 한분씩 소개하자면, 한채윤씨는 인권운동을 하는 우리 각시 덕분에 알게 된 분이다. 한국 최초의 동성애전문지 <버디>의 편집장을 오랫동안 맡았고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퀴어문화축제, 마포민중의 집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채윤씨는 이성애 중산층 가족 중심으로 흘러가는 마을운동에 관해 날카로운 지적을 해주실 것 같았다. 마을주민이라는 무채색의 개념은 보고 싶지 않은 사람, 보이지 않길 바라는 사람을 지워버리는 말이기도 하다. 특히 2013년에는 마포구가 “LGBT(성소수자), 우리가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라는 현수막의 게시를 허가하지 않은 사건이 있었다. 알다시피 마포구는 성미산 마을이 있는 유명한 곳이다. 그곳에서 벌어졌던 사건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박영길씨는 청주에서 오랫동안 지역사회운동에 몸을 담았다. 지역사회운동이 그러하듯 안 해본 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여러 일을 했고(운동 외의 일도) 마을만들기 운동에도 관여했다. 공부방 운동을 하던 중 생활교육공동체의 필요성을 느꼈고, 공부해서 용되자는 공룡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공룡의 활동가들은 농사짓고 카페와 도서관을 운영하고 영상기록물을 만들고 지역노동운동에 개입하며 활기찬 삶을 살고 있다. 공룡의 활동은 정형화되지 않는다. 어느 때는 농사를 지어 옥수수와 고구마를 팔더니, 어느 순간에는 밀양송전탑 싸움현장이나 유성노조 농성장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201312월에는 지역코뮌학교 동동(動同)을 세우고 노동과 인권, 경제와 노동, 글쓰기, 대안금융운동, 도시 연구 등 하나같이 쉽지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정형화된 틀에 갇히지 않는 공룡의 활동은 마찬가지로 정형화될 수 없는 지역사회의 다양한 고민들을 담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김정찬씨는 종로를 중심으로 모인 여러 단체들의 네트워크인 품애라는 단체에서 활동한다. 이번에 모인 사람들 중 나와 가장 짧은 인연을 가진 분이다. 내가 품애를 처음 접한 건 카페 토크콘서트 마빠기(마을에서 빠진 이야기)’라는 곳에 이야기손님으로 초대되면서였다. 인터넷으로 품애를 검색해서 카페를 찾아갔지만 정체(?)를 분명히 알 수 없었다. 품애는 결혼식이나 돌잔치같은 마을잔치를 착하게 준비하고 장애인과 함께 걷기도 하고 사진도 찍고 음악회도 연다. 운동처럼 보이지 않지만 마을에 필요한 일이고 그 속에 운동의 의미가 스며드는 활동들이었다. 이런저런 사업들을 많이 하는데, 새로운 사람들을 계속 만나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익숙하지 않은 영역이기에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신범씨는 죽음을 부르는 직업병으로 유명했던 원진레이온 사건으로 만들어진 원진재단이 세운 녹색병원의 노동환경건강연구소에서 일한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노동자의 건강권 확보와 작업환경 개선, 직업병 문제 해결, 환경문제 조사 등을 하는 곳이다. 경북 구미시에서 불산이 유출되었을 때도 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현장을 측정해 안전하다는 정부발표를 뒤집었다. 김신범씨가 2010년 제주인권회의에서 청소노동자들의 건강권을 발표하실 때 그를 처음 만났다. 부끄럽지만 그때서야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했고 마을 내 노동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김신범 씨는 공장 노동자들이 유해물질을 다룰 때 소비자의 건강도 안전할 수 없다며 공장 안과 밖을 연결하는데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런 관심이 마을운동과 노동운동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상철씨는 오랫동안 진보정당운동에 몸을 담아왔다. 처음 만났을 때는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처지였는데 그 뒤에 정당인으로 만났다.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서울시당에서 활동했고, 지금은 노동당 서울시당의 사무처장으로 일하고 있다. 도시계획이나 주택정책, 문화예술정책에 관심이 많고, 자료를 꾸준히 검토하고 공부하는 성실한(?) 정치가로 불린다. 그가 속한 노동당 서울시당의 논평은 날카로운 논리와 깔끔한 글솜씨로 꽤 명성을 날리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마을운동이 탈정치화되었거나 되고있다는 비판이 심심찮게 들리는데, 이 부분을 속 시원하게 짚어줄 것이라 기대했다. 그리고 지역사회운동이 정당정치와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듣고 싶었다.

권단씨는 2002년에 옥천신문 기자로 입사한 뒤 옥천에 살며 옥천농민회, 옥천살림, 옥천순환경제공동체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자치와 자급이고, 이를 가능케 할 방법으로 주민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섞이는 공론장을 꼽는다. 충청북도 옥천군은 안티조선운동으로 유명했던 곳인데, 1989년에 주민들이 직접 옥천신문사라는 지역언론사를 만들었다. <옥천신문>을 통해 지방정부 감시부터 사회적 경제 함께 만들기까지 다양한 활동들이 엮인다. 농민과 지역의 먹을거리, 주민자치에 관심이 많은 권단씨가 아침마다 페이스북에 올리는 글은 많은 사람들의 좋아요를 받으며 공감대를 확산시키고 있다. 권단씨를 통해 비수도권 농촌에서 마을을 바라보는 이야기를 좀 듣고 싶었다.

좋은 분들을 모셨지만 이 논의에 여성활동가가 함께 하지 못했음은 참 아쉬운 일이었다. 주변에 여러 여성활동가들이 있음에도 같이 얘기를 나누자고 제안하지 못했다. 한 차례 사루비아 다방의 김인민씨가 참여했지만 그 뒤 일정이 맞지 않아 참여하지 못했다. 이 부분은 계속 아쉬움으로 남는다.

엄청나게 바쁜 사람들이 달마다 한번 토요일에 모여 이야기 한마당을 펼쳤다. 사실 이 원고에는 그 뜨겁고 즐거운 열기를 모두 담지 못했다. 그리고 가끔 “(웃음)”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만 분위기를 전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4시간씩 웃고 떠들며 수다를 떨었던 몇 차례의 모임은 끝났지만 단지 얘기만이 아니라 함께 할 실천들을 찾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조금씩 실현되고 있다.

이 책은 많은 고민을 나눴던 모임의 결과물이다. 독자들도 이 책에서 어떤 해답보다 새로이 고민해야 할 질문들을 많이 찾으면 좋겠다.

 

한국 사회에서 풀뿌리민주주의grassroots democracy에 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풀뿌리 보수주의라는 말이 나오고 있지만, 실감없이 겉도는 민주주의를 내실 있게 만들려면 삶의 현장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상식적으로 말하면 민주주의의 원리는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정치’다. 그런데 현대의 대의 민주주의는 민중이 권력의 주체임을 자각하고 자처하는 ‘민중의 정치’라는 의미를 제거하고, ‘민중에 의한 정치’를 선거로 제한했으며, ‘민중을 위한 정치’를 민중을 대상화하는 정치적 수사로 만들었다. 특히 한국처럼 매우 중앙 집중화된 대의 민주주의에서 정치는 권력과 화폐, 언론을 소유한 기득권층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정당화하고 민중의 이름을 팔아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으로 변질됐다. 기득권층에 맞서 민주 정부를 수립하려는 열망은 있었지만, 그 열정이 정작 자신이 일하고 생활하는 지역사회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아 민주주의는 겉도는 말이 돼버렸다. 풀뿌리민주주의에 관한 관심의 증대는 이른바 민주주의의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이제 민주주의는 다시금 자신의 본래 의미인 ‘민중성’을 확보하고 실현할 것을 요구받고 있고, 풀뿌리민주주의는 이런 요구에 보내는 시대적인 응답이라 얘기할 수 있다. 풀뿌리민주주의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요구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주체에 관련해서 보면 풀뿌리민주주의는 ‘시민없는 시민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며 시민들을 삶의 주체로 세우려는 이론이다. 과거의 사회운동이 ‘민주 대 반민주’나 ‘국가 대 시민사회’, ‘합리성 대 비합리성’이라는 대립 축을 중심으로 전개됐다면, 이제는 사회의 변화에 발맞춰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갖춰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시민운동 단체들이 양적인 면에서 성장을 거듭하지만, 여기에 발맞춰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증가하거나 시민사회의 구조가 내부적으로 탄탄해지는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한국의 시민사회가 내부 구조 면에서 아주 취약하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고, 시민운동 단체들의 내부 의사 결정 과정이나 의사소통 구조가 비민주적이라는 지적도 계속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사회가 성장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그리고 단순히 제도나 정책을 바꾸는 게 아니라 시민 주체를 부각하고 성장하게 하는 ‘과정’으로 풀뿌리민주주의는 주목받고 있다.


또한 수도권 집중도가 매우 심각한 한국의 현실을 고려할 때, 풀뿌리민주주의에 관한 관심은 지역과 지방을 향한 관심이기도 하다. 수도권 문제는 단지 인구 집중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 간 불균등 발전과 지역 격차를 가져온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부 식민지’라는 개념이 주장될 정도로 한국의 상황은 심각하다.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 체계는 거의 변화 없이 지금까지 유지돼왔다. 해방 이후 실시된 지방자치 제도가 박정희 정부 때 중단된 뒤 1991년에 부활하기는 했지만 중앙이 기획하고 지방/지역이 실행하는 구조는 지금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풀뿌리민주주의에 관한 관심은 지방자치와 주민자치, 자치와 자급을 향한 관심에도 맞닿아 있다. 지역사회의 역량을 강화하고 대안적인 지역사회 비전을 만드는 중요한 방법으로서 풀뿌리민주주의가 강조된다.


그런데 이렇게 높아지는 관심에 견줘 풀뿌리민주주의에 관한 논의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그동안 한국에서 진행된 연구들을 살펴보면, 풀뿌리민주주의라는 말은 주로 진행 중인 지방자치 운동이나 지방정부의 성과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을 뿐 독자적인 이론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진지한 이론적 고찰보다는 지역운동 사례를 다루기 위한 방법으로 풀뿌리민주주의가 거론되는 정도였다. 상향식 민주주의라는 관점이나 시민사회 이론으로 풀뿌리민주주의를 설명하려 했지만, 개별 사례를 부각시키거나 부분적인 설명을 시도할 뿐 풀뿌리민주주의의 이론적인 지향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또한 시기 측면에서도 기존 연구들은 한국 사회의 풀뿌리민주주의의 역사를 주로 1987년 민주화 이후 시기에서만 찾고 한국 현대사와 풀뿌리민주주의의 관계를 설명하지는 못했다.


풀뿌리민주주의에 관한 논의가 부족하고 논의 방식이 협소한 현실은 한국뿐 아니라 해외 연구에서도 드러난다. 영미권에서 진행된 논의들도 주로 지역 거버넌스local governance나 지역 정치local politics, 공동체 권력community power 차원에서 풀뿌리민주주의를 다룬다. 풀뿌리민주주의가 작은 지역사회나 소규모 지역 공동체에만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은 이 개념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이론가들 사이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다 보니 개념의 타당성을 주로 공동체운동 같은 실증적인 사례 연구를 통해서만 증명하려 하고, 하나의 이념과 지향으로서 풀뿌리민주주의의 의미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이렇게 이론적인 기반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풀뿌리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운동은 1968년 이후 전세계에서, 그리고 한국의 경우 1970년대 이후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삼은 풀뿌리 주민운동 단체나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경험을 축적하고 역사를 만들어왔다. 국가권력과 재벌의 억압과 간섭을 받으면서도 풀뿌리운동은 지역사회에 서서히 뿌리를 내려왔고, 1991년에 지방자치제가 부활된 뒤에는 다양한 영역으로 활동을 넓히고 있다. 참여예산운동, 학교급식이나 보육, 주민 참여에 관련된 조례제정 또는 개정 운동, 마을 만들기, 협동조합운동, 정보 공개와 주민참여운동 등 한국 사회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풀뿌리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이렇게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운동의 경험을 비교하고 분석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이 필요해졌지만 관련된 연구는 매우 부족하다. 풀뿌리민주주의에서 이론과 경험의 불균형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이 책은 이런 불균형을 바로잡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이 책은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풀뿌리민주주의의 이론적 기반을 다지려 한다.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풀뿌리민주주의를 접근하는 것은 크게 네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이 책은 아나키즘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풀뿌리민주주의의 전통을 복원하려 한다. 보통 풀뿌리민주주의에 관련된 연구들은 1987년 이후 시기만 다루거나 1991년 지방자치 제도가 부활된 이후의 시기만을 다룬다. 그 전까지는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에 군사독재가 지배하던 시기라 사실 민주주의를 얘기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어떤 제도가 뿌리를 내리려면 오랜 세월 동안 누적된 전통이 필요하다. 특히 시민 참여의 경우에는 그런 전통이 더더욱 절실하고 또 필요하다. 그런데 풀뿌리민주주의에 관련된 논의들은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그런 전통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 책은 한국 사회가 풀뿌리민주주의의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조선 후기에 생겨난 두레 같은 공동 노동 조직이나 계 같은 자조 모임들은 내부에 민주주의의 맹아를 품고 있었다. 민주주의의 기본이라 할 ‘회의하는 전통’이 두레나 동계, 촌회 같은 마을 단위 모임에 전해지고 있었고, 일터와 삶터에서 모두 협동이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그런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에 수용된 아나키즘은 대종교 계통의 민족주의자들이 주장하던 대동사상이나 공자나 맹자의 원시 유교나 노자의 무치주의無治主義 등 한국의 전통사상하고 어울리면서 발전할 수 있었다. 1930년대까지 주요한 사회사상으로 자리 잡은 아나키즘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졌으며, 이런 흐름은 직간접으로 풀뿌리민주주의에 연관된다. 예를 들어 1945년 9월 해방 직후 만들어진 아나키스트 단체인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은 “우리는 독재정치를 배격하고 완전한 자유의 조선건설을 기한다. 우리는 집산주의 경제제도를 거부하고 지방 분산주의의 실현을 기한다. 우리는 상호부조에 의한 인류일가이상人類一家理想의 구현을 기한다”는 강령을 선포했는데, 이런 주장은 풀뿌리민주주의하고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아나키즘의 전통과 그 맥을 살리는 일은 풀뿌리민주주의를 우리 전통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한편 이론 연구하고 다르게 현실의 실천 운동은 풀뿌리민주주의에 관련된 논의들을 민초민주주의民草民主主義라는 형태로 발전시키기도 했다(민초라는 표현은 동학의 뜻을 이어받아 근대 문명의 한계를 극복하려한 생명운동에서 주로 사용됐다). 1970년대 이후 원주에서 무위당 장일순 등이 시작한 생명운동은 그 뒤 한살림모임이나 생명민회운동으로 발전했는데, 이런 시도들은 “낭비와 파괴를 구조적으로 강요하는 자본주의적 시장기구로부터 가능한 한의 독립성을 유지하여, 자치적 ‘해방구’를 만들어보려는 노력”(장일순 2005)인 동시에 “민초들은 스스로 그 무의의 탁월한 자연 생명의 질서를 깨달아 스스로 변화하고, 스스로 다스리고,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여 나아간다”(김지하 2003)는 점을 강조했다. 아나키즘이 내포한 사회혁명의 문제의식 역시 이런 지향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아나키즘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 사회 풀뿌리민주주의의 전통은 훨씬 넓게 파악될 수 있다. 그리고 아나키즘의 전통과 그 맥을 살리는 것은 풀뿌리민주주의를 우리 전통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이런 내용을 2부에서 다루려 한다.


둘째, 아나키즘의 이론적 특징, 특히 분권과 연방주의는 풀뿌리민주주의에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보통 아나키즘은 모든 형태의 권력을 거부한다는 오해에 시달리고 무정부주의라는 비판을 받아왔지만 프루동P. Proudhon이나 크로폿킨P. Kropotkin 같은 아나키스트들은 자유로운 코뮌에서 권력의 존재를 인정했다. 프루동은 자치라는 민주주의의 가장 위대한 원리가 연방주의에서 자연스레 구현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각 지방의 자치를 보장하고 권력이 상향식으로 구성되는 연방주의만이 시민의 참된 주권을 보장하고 시민이 대표/대리인들을 해임하거나 소환하면서 자신들의 일반의지를 실행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크로폿킨 역시 캐나다와 미국의 연방주의에 관심을 가졌고 러시아로 돌아간 뒤에는 소비에트의 연방화를 주장했다. 크로폿킨의 아나키즘은 권력 자체를 전면 거부하는 방식을 뜻하는 게 아니라, 하향식으로 강요당하는 국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민중의 의지를 거부하는 국가를 반대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크로폿킨은 국가를 부정했지만 권력이 분산된 연방 공화국을 지지했고 실제로 자치가 보장되는 연방 정부를 구상했다.


아나키즘의 이런 권력관과 정치 이론은 시민 참여의 활성화와 자치를 주장하는 풀뿌리민주주의하고 잘 어울린다. 그리고 풀뿌리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한 지류가 아니라 ‘민주주의 이론’으로 다루려면 작은 지역 공동체뿐 아니라 국가 단위에도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에서는 개별 정치 공동체의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국가 안의 국가’를 지향하는 연방주의야말로 풀뿌리민주주의가 지향할 사회 모델로 이야기될 수 있다. 그렇지만 현재까지 풀뿌리민주주의와 연방주의를 함께 다루는 논의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따라서 3부에서는 아나키즘의 권력관과 연방주의의 관점에서 풀뿌리민주주의의 이론적 기반을 다지려 한다.


셋째, 아나키즘의 원리를 따르는 협동조합운동이나 대안 공동체, 대안 학교 등은 한국 사회에서 풀뿌리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중요한 흐름이다. 아나키즘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사회적 실천을 장려해왔다. 예를 들어 공동육아나 대안 학교를 만드는 실천, 생산협동조합이나 소비협동조합을 만들어 농촌과 도시의 ‘서로 살림相生’을 앞당기려는 실천, 농촌과 도시에 대안적인 마을 공동체를 세우려는 실천, 대안적인 의료 체계를 만들려는 실천 등 다양한 실천이 있었고, 아나키즘은 이런 삶의 변화를 통해서만 국가를 대신할 힘이, 국가 없이 살 수 있는 힘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크로폿킨은 협동조합의 ‘보편적인 복지와 생산자들의 복지’라는 특성이 사회적이고 건전한 정신을 기르는 중요한 기구라고 봤다. 이런 협동조합들이 사회의 계급 구조를 직접 해체하지는 못하지만, 작은 마을에서는 사회적인 차별을 실질적으로 완화하며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돕고 향상시킬 뿐 아니라 공통의 필요를 구성함으로써 생활을 조직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이런 활동이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어 국제적인 활동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활동으로 다져진 경험은 시민의 자존감을 높인다.


또한 아나키즘이 주장하는 임금 제도의 폐지 또는 개인이나 코뮌 간의 자유로운 협약을 통한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은 경제를 이해관계나 수익이나 화폐가치의 관점이 아니라 필요와 호혜와 상생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자본주의는 위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마땅한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등이 대안으로 얘기되지만 전체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관한 고민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자치가 자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살림살이는 풀뿌리민주주의의 중요한 과제다. 아나키즘은 이런 과제를 푸는 데 여러 시사점을 준다. 이런 내용을 4부에서 다루려 한다.


넷째, 풀뿌리민주주의는 단순히 아래에서 시작해 변화의 씨앗을 만들자는 ‘운동의 전략’이 아니다. 오히려 풀뿌리민주주의는 우리의 삶이 단단하게 이 땅에 뿌리를 내려서 권력이 우리를 밀어내고 갈아엎으려 해도 잡초처럼 끈질기게 버텨보자는, 그리고 서로 뿌리를 단단히 얽어서 함께 살아보자는 ‘생활의 전략’이다. 운동의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하지만, 그 가치가 생활로 단단히 묶이지 않으면, 따라서 운동의 가치와 삶이 단단히 서로 부둥켜안고 받쳐주지 않으면 변화는 지속되기 어렵다. 풀뿌리민주주의는 변화의 과정이면서 그것 자체가 변화의 목표다.


마찬가지로 아나키즘은 특정한 역사 법칙을 따르거나 특정한 세력이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보지 않았다. 아나키스트들은 역사가 역사적 유물론이나 과학적 사회주의 같은 특정한 발전 법칙에 따라 실현된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이론을 거부했다. 새로운 사회의 구체적인 청사진이 미리 그려질 수 없다고 본 아나키스트들은 새로운 사회란 그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운동에 참여하는 대중의 집단적 활력을 통해 구성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이 정치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 중심의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풀뿌리민주주의의 특징도 이런 특성에 무관하지 않다. 최근 ‘오큐파이occupy 운동’을 비롯해 새롭게 등장하는 아나키즘 운동도 이런 점을 강조한다.


풀뿌리민주주의가 지향하는 가치 또한 자기의식을 되찾은 시민이 스스로 세상을 바꾸는 데 있다. 정치적으로 소외된 시민이 정치의 주체로 성장해 공동체를 이끈다는 생각은 각각의 시민이 정치적 가능성과 잠재성을 품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시민운동이 일방적인 선동보다 지속적인 대화와 상호 이해를 지향할 때만 가능하다. 풀뿌리민주주의에 관련된 여러 논의들이 이 점을 늘 강조했지만, 당위적인 수준이었을 뿐 이론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지는 못했다. 아나키즘은 이런 점을 보완할 수 있다. 5부에서 이런 내용을 다루려 한다.


마지막 6부에서는 아나키즘의 이념을 통해 한국 풀뿌리민주주의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려 한다. 아나키즘의 연방주의는 한국의 풀뿌리운동이 지방자치라는 다분히 형식화된 틀을 넘어 새로운 국가 구조를 고민하게 한다. 국가 안의 국가를 만들고 연합의 논리를 실현하는 연방주의는 다양한 풀뿌리들이 상생의 길을 모색할 수 있는 틀을 제시할 것이다. 그리고 아나키즘의 호혜와 자급의 경제는 풀뿌리운동이 협동조합과 다양한 형태의 공동 노동 형식을 통해 살림살이의 사회성을 다시 실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윤을 넘어서는 관계의 형성과 확장을 목적으로 하고, 상품이 아니라 생활재를 생산하면서 살림살이를 지키는 실천과 자급의 운동이 풀뿌리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바탕이다. 또한 아나키즘이 제기하는 사회적 개인과 주체성은 풀뿌리민주주의를 실현할 다양한 주체들을 구성할 것이다. 이런 주체의 활성화에 도움을 주는 기본소득과 지역화폐의 활성화는 다른 경제를 구현할 힘을 마련할 밑바

탕이 된다.


사실 모순되지만 이 책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았다. 이 책을 쓰는 동안 나는 대학을 떠날 준비를 했고, 이를 위한 대비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대비 덕분인지 2012년부터는 대학 강의도 관둘 수 있었다(그 시점부터 지원이 끝났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누군가의 표현을 빌면 ‘상근저자’를 모색할 정도로 글을 파는 처지라 이 책에 담긴 고민들은 내가 써온 여러 글들에서 조금씩 드러난 바 있다. 그리고 긴 호흡으로 썼지만 지금 시점으로 끊어보면 내가 봐도 여전히 부족한 부분들이 보인다. 그 부분은 더 치열한 고민과 삶으로 채워야 할 것 같다. 부족한 면이 많지만 하고 싶은 일을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지금껏 살고 있다. 아나키즘은 그런 마음을 지켜주고 삶을 살아가게 한다.


또 모순되지만 이 책을 쓰는 동안에 아이도 한 명 태어났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고 아나키즘을 얘기하는 사람으로선 분명하지 않은 삶이다. 어느 순간부터 흐릿한 경계인으로 사는 게 약간 몸에 익었다. 경계에 있기에 만날 수 있는 여러 사람들이 내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계속 흐릿하게 살 것 같다. 그 삶의 과정에서 만난 각시, 솔랑군,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사람들, 땡땡책협동조합 사람들, 협동조합을 비롯한 많은 곳에서 대안을 일구는 사람들, 독서회를 통해 만난 사람들, 함께 하지 못함에 가슴 졸이게 만드는 사람들, 여전히 지키며 싸우고 있는 사람들과 계속 만남을 이어가고 싶다.

 

그제는 출판사와, 어제는 각시랑 조촐한 출판기념회를 했다.

몇 부가 나갈 것 같냐는 물음에 그냥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많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살이 붙어 다양하고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사건들, 잊혀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건들을 다시 호명할 수 있어 좋았다. 이 책은 내가 드러나는 책이 아니라 바로 그런 사건들이 드러나는 책이다.

"멀리 외국의 혁명을 동경하지 않아도 될 만큼 엄청난 저항과 투쟁의 역사가 바로 우리의 것이"라는 점, 안성과 수원의 3-1운동과 소안도, 안면도 핵폐기장 반대투쟁, 부안 핵폐기장 반대투쟁, 백석동 주민투표, 매향리 국적포기 선언, 수원촛불, 장애인이동권 투쟁, 이라크전 인간방패, 지율스님 천성산 반대 농성, 남원주민 도로건설 반대, 대추리 주민 국적 포기선언, 세종대 생협, 달구벌 버스, 병역거부선언, 녹색당 창당 등 우리 역사의 사건들로 시민불복종과 직접행동, 정치를 설명할 수 있어 좋았다. 책 표지에 깨알같이 적힌 사건들은 이 책이 단지 '내 책'이 아님을 말해준다.

그리고 “우리가 이겼다!”라고 외치면 좋겠지만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결코 너희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외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내 나름의 근거로 설명했다.

이제 책은 손을 떠났고, 총선 직접과 직후라는 상황이 선거를 중심에 두지 않는 정치를, 직접행동하는 정치를 얼마나 주목할지 걱정되긴 한다. 그래도 나는 마음이 편하다. 내 할 몫은 했으니까...ㅎㅎ 이제 남은 건 친구들의 몫?ㅋㅋ

제 책을 증정받으신 분들은 '행복의 책'이라 생각하시면 되겠다. '행운의 편지' 아시죠? 책을 받고 난 뒤 10명의 사람들에게 책을 사서 나눠주고 리뷰를 써서 올리지 않으면 평생 저주가 따라다닌다는...ㅎㅎ 제게서 이미 책을 받으신 녹색당 관계자분들, 세종대 생협 분들, 앞으로 제 책을 받으실 분들 긴장하시길...^^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9646766

어제 편집자분이 집으로 찾아와 최종교정을 봤다. 솔랑군 덕분에 이래저래 호사를 누리며 산다. 어쨌거나 긴 시간의 작업이 끝났다.
편집자 분이 물었다. "얼마나 만족스러우세요?"
"글쎄요, 교정지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또 새로이 들어오는 부분도 있고, 이걸 이렇게밖에 못 다뤘나 싶은 부분도 있고. 하지만 만족스럽다는...ㅎㅎ"
그동안 쓴 책들은 일종의 개념에 관한 책이라 내가 생각하는 세상을 내 방식대로 보여주진 못했다. 이번

민주주의표지최종.pdf

책은 온전히 나의 생각과 시선으로 밀고 나갔으니 만족스럽다. 내게 본인의 책을 쓰라고 강요(?)했던 이들 보고있나?ㅎㅎ
이제 남은 건 판매전략입니다.ㅎㅎ 아시죠? 이 책이 저의 상반기 수입원일지 모릅니다. 많이 팔아주셔야 제가 앵벌이 하지 않고 맘 편히 이런저런 활동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전략을 짜실 때 도움되라고 아주 따끈따끈한 책의 표지도 올립니다.^^
다음주면 책이 나옵니다. 페이지수는 대략 350페이지, 가격은 14,000원.
저도 이제 본격적인 판촉모드로 들어가겠습니다.
아, 녹색당 깔때기는 어떻게 되냐구요? 이 책의 한 장이 녹색당입니다. 책 표지를 잘 보시면 이 책에서 다뤄지는 사건들이 쭉 나열됩니다. 사건들을 찾아보는 깨알같은 재미도?^^


 


도시에서 살다보면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에 부딪치게 된다. 치솟는 전세값이 마음을 꺼멓게 태우고, 정리해고와 실업이 남의 회사 얘기로 느껴지지 않는다. 야근과 잔업을 마다하지 않으며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데도 구멍 뚫린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돈은 술술 어딘가로 샌다. 쓰린 속을 달래며 일을 하려니 이제는 몸도 슬슬 이상을 보이는 듯하다. 좀 쉬고 싶어도 직장에서 짤리지 않으려면 외국어나 최신 프로그램을 익히며 자기관리를 해야 한다. 심지어 몸매나 유머감각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열심히 사는 데도 왜 이렇게 날이 갈수록 생활이 힘들어질까?

나만 힘든 거라면 그럭저럭 참겠는데 우리 아이들의 삶도 행복하지 않다. 갓난쟁이들에게는 아토피가 끊이지 않고,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는 안전사고가 심심찮게 터진다. 학원을 보내고 싶지 않아도 학교가 파하면 아이들 갈 곳이 마땅치 않고, 사실 집 밖만 나가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 맘 같아선 쉬엄쉬엄 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경쟁이 갈수록 심해지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석유가 고갈되고 있다느니, 지구온난화가 심각하다느니, 불길한 말만 들리고, 왕따에, 사이코 패스에, 세상은 미처 돌아가는 것 같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지금까지 한국의 도시생활자들은 이런 많은 고민들을 온전히 ‘혼자 힘으로’ 감당해 왔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 많은 돈과 노력을 혼자 힘으로 감당하며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한국 사람들의 생활능력은 세계 최강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TV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을 보면, 손가락 마디마다 굳은 살이 훈장처럼 박히도록 일하며 역경을 기회로 만들어온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런데 그 기적의 성과는 모두 어디로 갔나? 그동안 간, 쓸개 다 빼주며 뼈빠지게 일한 결과는 무엇인가? 또 하나의 가족, 무슨 가족을 떠들던 기업들은 조금만 적자가 나면 가족들을 쳐내기에 바쁘고, 머슴을 자처하는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제 밥그릇 챙기기에 바쁘다. 정작 그 기적을 일궈온 시민들은 죽 쒀서 개주는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다. 원래 다 그런 거다, 내가 뭘 어쩌겠냐며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한다.


생활에는 달인의 경지에 이른 시민들의 근성이 이상하게 정치로 가면 슬그머니 사라진다. 헝그리정신, 악바리근성이 정치 쪽으로만 가면 냉소와 허무주의로 바뀐다. 술자리에서는 정치인, 전문가 못지않게 열변을 토해내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착한 양이 되어 위에서 시키는 대로 산다.


물론 도시생활자들이 몰라서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건 아니다. 오히려 도시에서는 정보가 넘쳐 난다. 많은 정치인들은 진보/보수나 좌/우, 자신의 신념과 이해관계에 따라 수많은 정보들을 쏟아낸다. 그런 정보들에 익숙하기에 자신을 세련되고 똑똑한 시민이라 여기지만 각종 정보에만 밝을 뿐 자기 자신의 정치관을 고민해본 적이 없다. 매일마다 스캔들과 부패사건이 터지니 마치 쇼핑을 즐기듯 품평회를 하지만 내가 원하는 세상에 관해 고민해본 적은 별로 없다. 그러니 “못살겠다 바꿔보자”라는 외침에 바로 따라붙는 건 “갈아봤자,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냉소이다.


루쒼(魯迅)의 『아Q정전』을 보면 아Q의 정신승리법이 나온다. 건달들에게 시달림을 당할 때마다 아Q는 잠시 서 있다 이렇게 얘기한다. “아이들에게 맞은 거라구. 요즘은 정말 말세라니까.” “아Q는 자신이 마음속에서 생각했던 것을 늘 뒤에 가서 떠들어대곤 했다. 그래서 아Q를 놀렸던 사람들은 누구나 그의 이 같은 정신적인 승리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자기 비하의 제1인자라고 여겼다. ‘자기 비하’란 말만 빼면 어쨌든 ‘제1인자’가 된다.”


지금 우리의 삶이 아Q를 닮은 건 아닐까? 정치인들에게 시달림을 당할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얘기한다. “인간같지도 않은 놈들에게 당한 거라구. 요즘은 정말 말세라니까.” 우리는 생각했던 것을 늘 정치인들 뒤에서 떠들고 앞에 가면 제대로 입을 열지 못한다. 법 앞에 누구나 평등하다는 얘기를 학교에서 배우고 그렇게 생각하지만 실제로 법 앞에만 서면 움츠려든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순종적인 민주시민이라고 여긴다. ‘순종적인’이란 말만 빼면 어쨌든 민주시민이니까.


다른 정치는 불가능할까?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를 보면 아주 훌륭한 도시생활자가 나온다. 우에하라는 남의 얘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전개(展開)해봐”라며 상대방에게 물음을 던진다. 자신이 납득할 수 없다면 우에하라는 국가에게 어떤 도움도 받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사람을 저희들 맘대로 국민으로 만들어놓고 이래저래 세금을 뜯어 간다니까. 그러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피지배층이라는 얘기야? 정말 웃기고 있어.” 지금 우리에겐 우에하라와 같은 배짱이 있을까?


지나친 얘기일 수 있지만 이렇게 살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더 많이 일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하다. 행복하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민의식이나 준법정신, 근면함과 성실함이 아니라 바로 정치이다. 왜냐하면 정치는 개인이 혼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해결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나와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행복의 조건을 실현해가는 과정이 바로 정치이기 때문이다.


집값이나 전세값만 좀 내려가도 살기가 훨씬 편할 텐데 지금까지 우리는 널뛰기하는 그 값을 치르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그 값이 정확한가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셈만 정확하게 해도 삶이 한층 행복해질 텐데 그런 행복을 뒤로 미룬 채 “내 탓이오”만 외쳐 왔다.


전세값만이 아니다. 건강을 챙기는 건 개인의 책임이라고 알고 있지만 건강 역시 사회의 책임이다. ‘건강불평등’이라는 말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이 아프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건강이 정규직 노동자보다 좋지 않다. 아무리 건강해지고 싶어도 먹는 게 부실하고 일이 지나치게 많으면, 그리고 사는 곳이 쾌적하지 않으면 건강할 수 없다. 이렇게 아픈 사람들이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돈이 없으면 치료를 받지 못하니 애써 고통을 참으며 살아야 한다. 이래도 건강이 개인의 책임인가?


사회적인 문제이니 건강 문제도 정치적으로 풀어야 한다. 최저임금이나 노동조건, 노동환경을 정하는 것은 정치의 몫이고, 건강보험이나 의료시스템을 정하는 의료보건정책을 만드는 것도 정치에 속한다. 마을에 복지관, 도서관 등의 휴식공간을 마련하는 일도 정치에 속한다. 아이들의 아토피도 따지고 보면 도시의 생활환경과 연관되어 있으니 정치가 잘 이뤄진다면 아이가 몸을 박박 긁으며 힘들어하는 것을 가슴 아프게 지켜볼 필요가 없다. 지금 우리가 고통스럽고 아픈 건 정치가 제 길을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거나 정치의 역할을 무시해왔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보육이나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아이가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가서 무엇을 먹고 어떤 교육을 받는지는 모든 부모의 관심사이다. 이런 관심사를 개인적으로 풀려고 하니 우리 아이 잘 봐달라며 계속 고개를 숙이고 촌지를 쥐어주며 부탁할 수밖에 없다. 만일 이런 관심을 학부모들이 모여 함께 푼다면 어떻게 될까? 보육위원회나 학교운영위원회에 참여해 어린이집이나 학교가 돌아가는 실상을 파악하고 아이들이나 내가 원하는 바를 요구하면 어떨까? 모두가 똑같이 느끼는 문제인데도 나 혼자서 풀려고 하니 돈도 많이 들고 결과도 좋지 않다.

 

세상사는 게 원래 다 그렇지라며 담배를 꺼내 물거나 내 탓이라 자책하지 말고 정치에 관심을 좀 쏟자. 교육정책이 바뀌면 아이들의 삶도 달라질 수 있고 나도 더 이상 아이들에 얽매여 살지 않아도 된다. 노동관계법이나 보건의료관계법이 바뀌면 건강하게 삶의 여유를 누리며 살 수 있다. 주택법과 도시개발관련 법률을 바꾸면 2년마다 이사 걱정에 마음 졸이며 살지 않아도 된다.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두고 혼자서 먼 길을 돌아가니 지치고 힘이 든다.


귀찮게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면 당신은 선택받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 복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내 아이들, 아이의 아이들, 대대손손 그렇게 선택받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생태계 위기, 에너지 위기, 사회안전망의 위기 등 크고 심각한 위기들을 혼자 힘으로 쉽사리 헤쳐갈 수 있을까? 그럴 자신이 없다면 이제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는 그런 요구들이 하나의 권리로 인정되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2008년부터 여러 엔지오들의 노력으로 성별이나 장애, 연령 등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 시행되고 있다. 그러니 부당한 차별을 받았다면 내게는 그것을 바로 잡을 것을 당당하게 요구할 권리가 있다.


허나 제 아무리 좋은 법이 있어도 그걸 실제로 써먹는 사람이 없으면 법은 도루묵이 된다. 계속 요구하고 일을 바로잡아야 법이 제 역할을 한다. 나와 우리 가족의 삶이 조금 더 행복해지기 위해, 그리고 이 나라가 조금 더 정의롭기 위해 나는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내 자신을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하지 말고 한걸음씩 나아가자.


베란다에 플라스틱 화분을 놓고 흙을 깔고 씨앗을 심었다. 바짝 말라버린 씨앗이지만 바람을 쐬이고 물을 줬더니 몇일 만에 푸른 싹을 틔웠다. 삭막한 아파트 베란다 플라스틱에서 생명이 자라난다. 생명의 힘은 이리도 질기고 강하다. 미리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내 속에 잠재된 정치의 싹을 틔워보자.


이 책은 우리 부부가 함께 한 첫 작품이다. 우리 각시는 내가 부러워하는 글솜씨를 가지고 있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좋은 글을 쓸 수 있는데, 내 글에 맞추느라 그 솜씨를 살리지 못했다. 다음번엔 내가 우리 각시의 솜씨를 따라가면 좋겠다.


그리고 7월이면 우리의 첫 아이가 태어난다. 솔랑이가 태어날 세상은 지금보다 조금 더 살만한 세상이었으면 한다. 그런 점에서 정치는 우리 부부에게도 중요한 과정이다. 함께 하면 좋겠다.


2010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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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각시와 함께 쓴 '도시생활자의 정치백서'가 드디어 나왔다.
냉소하지 않고 희망을 품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제도와 기술들을 한 권에 담았다.
소위 무림의 고수들만 아는 비법들을 평범한 시민들도 활용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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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들어가는 글


I. 정치란 무엇일까?

1. 짜증나는 정치, 바꿀 수 없을까?

        정치가 사라지면 살기가 편할까?

        기업이 정치를 대신할 수 있을까?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2. 민주주의가 밥을 먹여준다

        정치 참여가 양극화를 막는다

        정치 참여가 우리의 자존심을 회복시킨다


II. 선거와 참여제도 활용하기

1. 선거를 제대로 치러볼까?

        선거 때 누구를 찍어야 할까?

        투표할 때 잊지 말아야 할 몇 가지들

        직업으로서의 정치?


2. 선거 외에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내가 뽑은 사람들을 감시하기

        잘 못하는 정치인과 공무원 들을 괴롭히기

        정신 못 차리는 정치인들 쫓아내기

        내가 직접 조례를 만들기

        우리 동네일은 우리가 결정한다

        마을예산, 이렇게 쓸 수 없나?


III. 정당 활용하기

1. 당원이 되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잠깐, 당신들 당비는 내고 당원 하나?

        당원이 되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정당은 어떻게 당론을 결정할까?

        지구당은 왜 폐지되었을까?

        재미있는 정치는 불가능할까?

2. 정당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공천과정을 바꿔보자

        정당의 돈줄을 잡아라

        선거제도부터 바꿔라


IV. 엔지오 활동하기

1. 엔지오란 무엇인가?

        엔지오, 넌 누구냐?

        엔지오와 시민단체는 뭐가 다를까?

2. 엔지오 고르기

        환상의 짝꿍 엔지오 찾기

        엔지오를 고르는 기준은?

3. 엔지오 활동하기

        후원하기

        자원활동하기

        단체 만들기와 지원받기

4. 엔지오 활동, 세상을 바꿀 수 있나?

5. 생활 속의 엔지오, 생활하면서 대안을 만든다

        먹으면서 바꾼다, 소비자생활협동조합

        건강하게 바꾼다, 의료생활협동조합

        불안을 넘어 협동한다, 다양한 협동조합들


V. 여론 만들기

1. 웹2.0과 현명한 군중

        블로그는 소통이다

        우리가 바로 미디어다

2. 허튼짓은 이제 그만, 정보공개제도가 있다

        정보공개청구, 속살 파헤치기

        도전! 정보공개청구

        정보공개청구가 바꾼 제도 그리고 삶


VI. 직접 맞서기

1. 시민불복종하기

        복종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까?

        복종하지 않는다고 권력이 무서워할까?

2. 마을에서 동지를 모아볼까?

        우리 동네 예산은 어떻게 쓰일까?

        주민자치센터는 누가 운영할까?

        도서관이나 복지관에서 생긴 일

        학교운영위원회 참여하기

        아마추어의 반란: ‘가난뱅이’들의 생존전략


부록: 권리 찾기 매뉴얼

1. 찾아보자, 내 권리

        세계인권선언의 권리목록

        경제·사회·문화적 권리 살피기 -노동권, 건강권, 주거권


2. 내 힘으로 바꾸는 세상

        첫번째 고개-정보 얻기

        두번째 고개-공공기관이나 정치인에게 요구하기

        세번째 고개-정당과 엔지오를 활용하기

        네번째 고개-공무원과 정치인에게 압력 가하기

        다섯번째 고개-직접 나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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