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렌트, 수용소와 전체주의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다
아렌트라면 어땠을까? 아렌트가 지금 한국에 산다면 정치를 어떻게 볼까?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독재나 전체주의라는 단어가 다시 공론장에 등장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어떤 작가는 이를 나치의 등장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 비유가 적절한가 아닌가의 여부는 선거를 통해 집권했고 51%의 국민이 박근혜씨를 지지했다는 사실로만 판단될 수 없다. 왜냐하면 히틀러가 권력을 잡았던 독일 총선에서도 나치의 지지율은 44%였기 때문이다. 이 지지율을 등에 업고 ‘합법적으로’ 권력을 잡은 히틀러는 나치를 제외한 다른 정당들을 해산시키고 여론의 입을 틀어막으며 전체주의를 실현했다.
그리고 아렌트는 선거를 무시하지 않았지만 선거가 곧 정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외려 근대 정당과 선거가 정치의 가능성을 차단할 것이라 우려했다. 아렌트에게 정치란 시민들이 공개된 장소에서 공적인 의견을 서로 나누며 자신의 독특함을 드러내는 것이고, 정치는 진리의 영역이 아니기에 옳고 그름에 대한 정답을 쫓지 않는다. 선거에서의 지지율보다는 ‘공론장을 파괴하는 정치’, ‘말과 행동을 부정하는 정치’, ‘사유하지 않고 정답만을 강요하는 정치’, ‘차이를 부정하고 효율성만을 강요하는 정치’의 등장이 정치를 가늠하는 잣대이다.
이 책에서 우리가 아렌트를 읽고자 하는 이유도 단순한 지적 호기심보다 우리가 사는 시대와 사회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논의하려는 바람일 것이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그 체제 너머의 정치를 보려는 사람에게, 정치와 민주주의가 어떻게 실현되는지 궁금한 사람에게, 개인주의의 냉소나 전체주의의 열광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아렌트는 좋은 길잡이이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국내외의 이런저런 자리에서 많이 인용되는 사상가이다. 하지만 그 사상을 직접 접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아렌트의 언어와 사상이 낯설기도 하거니와 국내에 소개된 번역서들이 낯설음과 어려움을 더한다. 그리고 사상이란 현실과의 치열한 대면에서 나오는 것인데, 아렌트의 사상이 나오게 된 맥락은 책으로 이해하기 어려다. 마찬가지로 아렌트의 개념들을 한국 현실과 어떻게 맞닥뜨리게 해야 할지 막막한 면도 있다. 어려운 책을 읽다보면 아렌트를 공부하는 게 지금 우리 현실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이런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런 관심과 의문에 답하려는 시도이다. 아렌트가 궁금한 사람과 아렌트를 활용하고픈 사람 모두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었고 아렌트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제 I부와 제 II부로 나눴고 관심에 따라 제 I부와 제 II부를 읽는 순서를 바꿔도 좋다. 아렌트의 사상을 조곤조곤 보고 싶은 사람은 제 I부부터, 아렌트의 관점으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궁금한 사람은 제 II부부터 읽어도 된다. 따로 읽어도 될 만큼 아렌트에 관한 기본적인 내용들을 설명하면서 글을 쓰려 노력했으니 두 가지 맛 파스타 또는 짬짜면 정도로 생각하시면 되겠다. 한 쪽의 깊은 맛을 느끼려고 하는 사람에겐 미흡할지 모르겠으나 어느 걸 선택할지 망설이는 사람에겐 여러 고민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I부는 수용소와 공론장이라는 아렌트 사상의 고갱이를 다루고, II부는 아렌트가 평생을 걸고 맞섰던 전체주의라는 화두에 주목하고 그 문제의식을 한국사회에 투영시켜 본다. 아렌트에게 수용소와 전체주의는 평생을 따라다닌 악몽이었다. 그 악몽을 끄집어내는 것은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의 악몽이 이와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무슬림이라 불렸다. 아랍 사람이나 이슬람 교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고 엎드려 기도하는 듯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던 수용소의 은어였다. 수치심마저 잃어버린 채 마치 물건처럼 취급되는 사람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측은함과 동정을 느끼겠지만 우리는 그런 삶과 정말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 정치로부터 도피해서 개인적인 생활에만 관심을 가지고, 바로 그 때문에 주어진 질서에 수동적으로 복종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권력을 구성할 용기나 의견이 없으면서도 내가 주권자라며 공허한 호기만 부리는 건 아닐까? 사람들도 자주 만나고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같은 편끼리 똘똘 뭉쳐서 비슷한 각도로 세상을 재단하고 어긋난 부분에 대한 불만만 쏟아내는 건 아닐까? 나도 당당한 주체라며 자신을 내세우지만 우리가 공통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서로 공유하는 감각을 잃어버린 채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건 아닐까? 고립되어 있으면서 고독한 척 위선을 부리는 건 아닐까? 수용소는 물리적인 공간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타자와 만나고 헤어지는 방식을 규정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제 I부는 이런 물음들에 대한 답을 고민할 수 있도록 아렌트의 사상을 재구성했다.
그리고 전체주의는 단순히 독재자가 지배하는 상황을 뜻하지 않는다. 전체주의는 비공식 조직이 공식기관의 힘을 대체하고 누가 권력을 행사하는지, 어떤 일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도통 알 수 없게 만드는 지배구조이다.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감시하면서 내부의 적을 만들어내고 불안을 자극하며 결국에는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도록 만드는 비밀경찰이 암약하는 체제이다. 실제 현실이 아니라 조작된 이데올로기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만들고 우리 자신도 이미 규정된 지위로만 이해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바로 전체주의이다.
이 책을 쓰는 동안 한국사회에서 큰 비극이 발생했다. 바로 세월호 참사이다. 295명의 승객이 사망했고 9명이 아직도 바다 속에 잠겨 있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안산시 단원고의 학생들과 먹고살기 위해 배에 올랐던 사람들이 이 참사로 떼죽음을 당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참사에 책임을 진 정치인이 아무도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엇이 원인인지, 왜 사고가 참사로 이어졌는지, 진상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자신을 믿고 맡겨달라고 하지만 사실을 은폐하고 유가족들의 요구를 무시할 뿐 공정하고 투명한 절차를 마련하고 있지 않다. 이런 정부 앞에서 유가족과 시민들은 다시 한번 극심한 무기력을 경험하고 있다. 이런저런 소문만 무성할 뿐 정확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시민들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자식과 가족, 이웃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절규와 몸부림에 가만히 있으라고, 교통사고일 뿐이라고, 정치적인 선전이라고 비난하는 이들과 우리는 정말 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걸까? 시민들이 선출한 정부가 시민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시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 시민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끔찍한 세계전쟁과 정부의 거짓말, 폭력이 난무했던 20세기를 겪었던 아렌트는 이런 경우에 어떤 이야기를 할까? 제 II부는 이런 물음들에 대한 답을 고민할 수 있도록 한국의 현대사를 되짚어본다.
아렌트를 읽으며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1987년 민주화나 1993년 문민정부의 수립, 1997년 국민의 정부, 2003년 참여정부의 수립은 시민이 새로이 정치를 시작할 수 있는 세계를 부활시켰을까? 만일 그러하다면 왜 아직도 우리에게 정치는 부정하고 타락한 것이거나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어떤 무기력한 것으로만 느껴질까? 어디서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한국의 정치는 이렇게 지지부진할까?
글쓴이들은 이런 물음들에 조금이라도 실마리를 주고자 노력했다. 글쓴이들은 길잡이로서 정치의 부활을 모색하는 이 흥미로운 여행에 앞장선다. 혹시 몰라 두 명이 지도를 함께 그렸고, 그래도 글쓴이들의 지도가 완벽한 것이라 장담할 수는 없기에 최대한 돌다리를 두들겨보며 가려 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아렌트의 원문에 바탕을 두고 논의를 이끌어가려 했다. 가능하면 위태롭고 험난한 길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 길을 지나지 않으면 다음 길로 이어지지 않는 곳도 있으니 힘들어도 같이 손을 잡고 지나갈 수밖에 없다. 각 장의 마지막에 함께 읽기와 해설을 둔 것은 우리와 손을 잡고 함께 가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이 확인하기 위한 장치이다. 물론 때로는 길잡이를 따르지 않고 내키는대로 무작정 걸어보는 것도 여행을 즐기는 묘미일 수 있다. 그러니 길잡이에게서 여행의 모든 재미를 찾으려고 하지는 말기를... 다만 글쓴이들이 길잡이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는지를 헤아리는 일은 독자들의 몫이다.
이 책은 아렌트에 관한 하나의 해석이고, 아렌트가 강조했듯이 다양한 소리들이 모여 하나의 화음을 이뤄가는 ‘합주(action-in-concert)’, 두 사람의 합주이다. 이 합주가 얼마나 성공적일지는 합주를 듣는 독자들의 몫이다. 그리고 합주를 들으며 또 다른 합주를 만들어가는 것 역시 독자들의 몫이다. 깊은 바다에 홀로 들어가는 건 두려운 일이기에 이 책은 작은 불빛만 밝혀 놓았고 직접 들어가 텍스트를 건지는 작업은 독자들의 몫이다. 이렇게 독자들에게 많은 몫을 밀어놓는 무책임한 저자들이 있을까 싶겠지만 그렇게 아렌트를 접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모쪼록 즐거운 여행이 되길 빈다.
글을 쓰는 두 사람은 학교에서 같이 아렌트 세미나를 했던 사람이기도 하고 땡땡책협동조합에서 아렌트에 관한 독서회를 함께 진행하기도 했다. 이 책은 두 사람이 처음 호흡을 맞춰본 결과물이자 충청북도 옥천군으로 함께 이사와 간간이 고민도 나누고 밥도 나누며 만든 성과이다. 지역출판의 불씨를 지피고 있는 한티재에서 이 책을 내게 되어 또 기쁘다. 모두 고마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