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몽똘 2016.11.01 02:05


1. 어떠한 폭력에도 맞서고 갈등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해 사회, 정치, 제도의 면에서 세계인권선언을 지킨다.


2. 정책결정과정과 정책집행에 모든 시민이 직접, 그리고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다.


3. 민중의 민주적인 주권을 회복시키기 위해 일한다.


4. 모든 종류의 인종주의, 외국인혐오, 남성 우월주의나 성별이나 성적 지향에 따른 배제와 싸우고 사회와 <포데모스> 내부의 평등을 강화시킨다. 그리고 <포데모스> 내부의 여성 정치참여를 활성화시키고 당의 모든 행사에서 보육서비스를 제공한다.


5. <포데모스>에의 가입은 자유롭고 자발적이며 사회적인 지위와 상관없이 모든 이에게 항상 열려 있다. 이는 세계인권선언과 민주적인 시민참여방법을 옹호하는 것이다.


6. 관점이 다르더라도 대화하고 합의를 추구하면서 모든 의견에 관해 정직하게 논쟁하고 서로를 존중한다.


7. 대의정치(자치구, , , 국가, 유럽의회 기타)로 나설 후보선출은 양성평등[원칙]에 따른 변경을 제외하면 명부를 공개하고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공개예비선거(primary elections open)를 통해 결정되어야 하고 그 결과는 존중되어야 한다. 중간에 탈당하는 것을 금지하고,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과정을 통해 정치인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선출된 정치인이 아니라면 <포데모스>의 당원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


8. 선거 이전과 선거 이후의 정치연합은 어떠한 형태이든 대의제도 각각의 모든 단계에서 모든 시민과의 공개 토론을 통해 민주적으로 승인되어야 하고 그것을 존중한다.


9. 모든 선출직 공무원은 오로지 대리인(representatives)으로 간주되고, 공개적이고 민주적인 참여방법에 따라 자신을 뽑아준 사람들의 요구를 받아 모든 결정들을 내리라는 요구를 받고 그것을 존중한다.


10. <포데모스>는 재정을 관리할 때 이윤을 추구하는 기관(institutions based on profit)의 금융상품에 참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은행을 통한 자금조달은 당연히 금지된다.


11. 정치가 사적인 이해관계를 돕지 못하도록 보장하는 플랫폼으로서 포데모스를 만들기 위해 모든 선출직 공무원과 포데모스의 당직자들은 다음의 조항들을 받아들인다.


a) 보통 모든 정치인의 월급에 상한선을 두고, 정치인은 수입의 성격을 완전히 투명하게, 공개적으로 설명하고 재산을 투명하게 관리할 의무를 진다.


b) 보통 각 개인이 맡을 수 있는 공적인 역할은 제한되고, 이런 일에 대한 보상으로 개인이 받는 월급은 그 총액이 최저임금의 3배 이하여야 한다.


c) 대표나 공직으로 맡음으로서 얻게 되는 법적인 또는 물질적인 특권은 포기되고 어떠한 종류의 특별한 법적인 보호도 받지 않는다.


d) 임기 동안 투명성과 책임성을 위해 일한다.


e) 개인적인 경제적, 정치적 이해관계를 위해 결정을 내리거나 선출직 공직을 맡지 않겠다는 서약은 해당 공직에 뒤따르는 이해관계를 부정한다. 시민총회(Citizen's Council)가 마련할 청렴의 규칙(incompatibility rules)은 윤리적인 관점만이 아니라 보편적인 기준으로서 약속될 것이다. 어떤 경우에 이 규칙은 전국 규모의 정치조직의 회원이나 지부들이 당내의 주요선거에 출마할 권리를 제한하는 것도 포함한다.


f) [정치]대리인으로서의 기능과 관련해 대리인의 활동이 특정한 이권과 연계될 수 있기에 공직을 맡은 뒤에 자신의 책임 하에 있던 사기업에 들어가는 것은 10년 동안 금지되고, 전략적인 부문이나 국가경제에서 중요한 기업의 이사가 될 수도 없다. 그리고 공직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는 세금혜택도 받지 못한다.


g) 폭행이나 범죄 때문에 고발, 소환, 기소당할 경우 공직이나 당내 지위, 공직후보직을 포기하겠다는 약속은 권리보장위원회가 규정한 규칙에 따라 지켜질 것이고, 어떤 경우든 노동자의 권리나 생명권, 도시권에 반하는 부패나 금융범죄, 성희롱, 성폭력, 이상성욕, 아동학대 등의 범죄들도 항상 이런 경우에 속한다.


h) 포데모스의 당원이나 그 가족이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회사와 공적인 협약을 맺는 것은 금지된다.


i) 공직이나 당직 모두 8년으로 제한되고 예외적인 경우에만 12년으로 연장될 수 있다.


j) 세속주의를 증진시키기 위해 특정 신앙이나 종교를 지지하지 않고 양심의 자유에 기반한 민주적인 체제를 위해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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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6.01.18 13:17
 

이 보고서는 우고 차베스가 협동조합에 주목하며 사회적경제를 활성화시키려고 하는 배경과 그런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공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우고 차베스에게 협동조합은 베네수엘라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전략의 중요한 한 기둥이었고, 협동조합정책은 특정 부문을 키우는 분리된 정책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기반을 강화시키려는 미션이나 코헤스티옹(cogestión, 노동자통제기업), 풀뿌리의 힘을 강화시키려는 주민평의회(Consejos Comunales, popular council) 등 아래로부터의 힘을 강화시키고 시민의 주권을 회복하려는 시도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런 베네수엘라의 경험이 한국사회에 던지는 시사점이 어떤 것인지도 살펴보려 한다.

 

베네수엘라협동조합운동연구(하승우,2015모심과살림생명협동연구지원공모사업결과보고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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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5.12.10 22:45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단지 아래로부터의 힘을 모으자는 전략이 아니다.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단순히 지역사회를 변화의 거점으로 내세우는 전략도 아니다.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단순히 민중에 대한 무한한 신뢰만을 강조하는 전략도 아니다.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기성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이상만을 좇고자 하는 전략도 아니다.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이 어려운 것은 풀뿌리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기도 하다. 아래, 지역, 민중, 이상과 같은 단어들은 풀뿌리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지만 그것만으로 풀뿌리를 충분히 설명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위와 연결되지 않은 아래는 없고 국가와 무관한 지역사회도 없으며 완전무결한 주체도 없고 이상이 무조건적인 진리나 선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전형(典型)에 대한 부정, 국가주의 또는 중앙집권형 국가체제와의 결별, 삶의 재구성이자 현실적인 이상주의이다. 이 발제문은 근본적이면서 급진적이고자 하는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이 한국사회에서 갖는 의미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 발제문의 내용은 풀뿌리운동 내에서 합의된 의견이 아니라 필자의 주관적인 의견임을 미리 밝힌다.



1. 전형에 대한 부정, 공론장


한국사회에서 공론장(public sphere)이라는 단어가 많이 회자되지만 맥락이 뒤틀린 채 논의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나 아렌트(H. Arendt)에 따르면 공론장은 정치가 이루어지는 장이기에 진리와 선이 아니라 판단에 따르는 곳이고 의견(doxa)이 소통되는 장이다. 그러니 공론장을 통해서는 어떤 진리와 선에 이를 수 없고 그런 논의가 이데아(idea)를 자처할 수도 없다.


그런데 한국에서 공론장은 그런 장을 구성하기 위한 노력보다 공론을 표방하는 여론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이미 어떤 입장을 가지고 찬반을 나눈 뒤 의견을 제시하기보다는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한다. 설득하지 못하는 의견은 의견이 아닌 듯이. 이미 답을 정해놓은 상태에서, 아니 답은 분명히 있다는 전제 하에서 논의가 진행된다. 어떤 기준을 세우는지 논하는 작업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기준에 따라가는 작업이 주를 이룬다. 시민사회운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답은 분명히 있고 우리가 그 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공론장은 전략적인 활용의 장이지 그 장 자체가 근본적인 목적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전형의 부재는 한국인을 불안하게 만든다. 어떤 기준이 존재해야만 사물이나 사건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으니 전형의 부재는 변화는 불가능하다며 냉소한다. 그렇게 보면 전형과 냉소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기보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어떤 상황에 대한 거부가 냉소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형 없음이 냉소로 이어진다. 1980년대 말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가 새로운 논의의 시작이 아니라 변화의 불가능과 변절, 냉소로 이어진 건 이 때문이 아닐까?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그런 전형에 대한 부정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위로부터의 주도, 아래로부터의 힘, 이렇게 명명되는 것도 일종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혁명이 실제로는 복구를 뜻했다는 아이러니한 사실1)은 우리가 대립한다고 생각하는 개념들이 서로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위가 아래를 규정하고 아래에 의미를 부여한다. 아래라고 불리지만 실은 그곳이 바로 중심이나 위일 수 있다. 시민이 무참하게 권리를 짓밟히지만 그들이 바로 주권자이듯이 어떤 위치에서 보는가에 따라 위, 아래는 뒤바뀔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계속 위의 필요성 때문에 아래를 호명하는 것은 아래를 또 다른 전형으로 만들 수 있다. 아래는 이래야 한다, 주민/시민을 조직하는 방식과 목적은 이래야 한다는 전형은 풀뿌리의 역동성을 갉아먹는다.


그렇다면 풀뿌리는 무엇을 의미할까? 풀뿌리의 전일(全一)적인 인식틀은 위와 아래가 분리될 수 없음을, 위와 아래가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아래를 강조하더라도 위의 변화가 동반되지 않으면 변화를 지속시킬 수 없다. 위를 아무리 뒤흔들더라도 토대의 성격이 바뀌지 않으면 변화가 지속되지 않는다. 결국 풀뿌리는 위와 아래가 분리되지 않고 순환하는 사회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고 그런 변화를 위한 준비한다고 봐야 한다. 순환의 역동성, 그것이야말로 풀뿌리의 힘 아닐까? 성장하고 결실을 맺고 다시 밑으로 내려가고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우고 다시 성장하고,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복합적으로 얽히고설키어 진행되는 과정 말이다.


그렇다면 정치공동체에서 그렇게 아래 위를 연결시키고 순환시키는 작업은 어떤 것일까? 나는 헌법이라고 생각한다. 아렌트는 “반란과 해방 운동이 새롭게 획득한 정치적 자유를 헌법에 담지 못한다면, 반란과 해방보다 더 무익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즉 자유의 공간을 틀 지우는 가장 기본적인 작업을 헌법이라고 봤다. 그동안 시민사회운동 내에서 법과 제도에 대한 논의들은 많지만 그 모든 걸 틀 지우는 헌법에 대한 논의는 드물었다. 2008년 촛불집회 이후 대한민국헌법 제 1조가 시민들 입에서 되뇌이긴 했지만 중요한 건 명목상의 제 1조가 아니다. 우리는 어떤 자유를 구성하고 누리기 위해 이 공동체에서 생활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유로운 시민으로 성장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들과 정치공동체에서의 생활을 얼마나 연계시키고 있을까? 헌법은 이런 질문들을 담는 그릇이다.


물론 헌법조차도 이런 전형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위르겐 하버마스(J. Harbermas)가 말했던 헌법의 지속적인 변화가 중요하다. 하버마스는 『사실성과 타당성』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헌법의 고정된 문장은 변화하는 해석의 흐름 속에서만 생동하는 것으로 남는다. 헌법은 시민권을 실현하기 위한 완수되지 않은, 앞으로도 결코 완수될 수 없는 프로젝트이다. 시민권은 매 세대마다 변화된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새롭게 비판적으로 해석되고 소화되어야 하며, 그 실체도 지금까지보다 더 포괄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 풀뿌리 공론장은 이런 완수될 수 없는 프로젝트를 실현하는 장이다.


그리고 더글러스 러미스(D. Lummis)는 『Radical Democracy』에서 민주주의를 일종의 상태로 정의한다. “민주주의는 특정한 정치제도나 경제제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정치제도나 경제제도가 가져오거나 가져오지 못할 어떠한 상태를 가리킨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이상이지, 그것을 달성하는 방법을 설명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통치형태들 중 하나가 아니라 통치의 목적이며, 인류 역사에서 계속 유지되어온 제도가 아니라 역사적인 과제이다.” 물이 액체, 기체, 고체로 변할 수 있듯이 상태로서의 민주주의는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고정되지 않는다. 내부의 구성요소들이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민주주의의 상태는 달라진다. 근본적이자 급진적인 풀뿌리의 민주주의 역시 이런 상태를 지향하고 이를 가능케하는 정치구조를 만들고자 한다.



2. 국가주의 또는 중앙집권형 국가체제와의 결별, 연방주의


국가를 가장 근본적인 정치공동체로 보고 다양성을 억압하는 국가주의(statism)는 식민지 시기부터, 아니 그 이전 시대부터 한국인에게 의식/무의식적으로 강요되어온 이데올로기이다. 그리고 식민지 시기에 만들어진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체제는 해방 이후에도 거의 아무런 변화 없이 1990년대 초반까지 유지되었다.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체제에서는 입법/행정/사법의 삼권분립도 무력화되고 대통령이라는 정점에 연결된 강력한 관료집단들이 생활세계를 식민화시키고 지배한다.2)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국가주의를 극복하고 이런 국가체제를 근본적이고 급진적으로 변화시킬 때에만 가능하다. 아니, 이런 체제전환을 통해서만 사회전환이 가능하다. 전환이 특정 영역에서의 부분적인 변화나 정신승리법이 아니라면 국가구조의 변화는 필수적이다. 그런 점에서 연방주의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연방주의는 연방국가를 포괄하는 더 넓은 개념이다. 연방주의는 지역이 더 많은 결정권한을 가지도록 한다.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권한은 외교와 국방을 제외하면 거의 동등하다. 우리의 생각보다 이런 체제를 갖춘 곳이 꽤 많은데, 연방주의를 공식적으로 채택하지 않더라도 스페인이나 스코틀랜드, 이탈리아, 인도처럼 지역정부가 독자적으로 입법권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스위스나 벨기에처럼 작은 국가들에서도 연방주의가 실시되고 있으니 땅덩어리가 큰 나라에서만 실시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연방정부가 수립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자연스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연방정부가 만들어지면 정치는 더욱더 필요해지고 그만큼 더 활성화된다. 시민들이 어떤 뜻을 품는가에 따라 국가체제는 그에 맞게 계속 바뀔 수 있다. 국가가 정치공동체라면 구성원의 뜻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특히 ‘내부식민지’라는 말이 있듯이, 한국처럼 수도권이 비수도권의 사람과 자원을 계속 빨아들이고 착취하는 체제에서는 정치가 복원될 수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결정권이 모두 서울에 있으니, 생산하지 않는 곳이 생산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모순 아닌가. 추상적인 주장보다는 재정과 정책을 운영할 권한이 어디에 있는가를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2014년 기준으로 한국의 국세와 지방세 비중은 79.9%와 20.1%로 지방자치제도 실시 이후에도 국세 비중은 계속 증가해 왔다. 

결국 지방자치제도 실시 이후에도 중앙정부가 계획하고 지방정부가 그 예산에 기반해 사업을 집행하고 중앙정부가 이를 평가하는 체제가 변하지 않았다. 기득권층이나 재벌들이 쌈짓돈처럼 쓰는 세금을 우리가 원하고 필요한 곳에 쓸 수 있고, 중앙정부나 지역정부가 가진 건 궁극적으로 시민들의 자산이다. 연방주의는 이런 근본적인 부조리를 급진적으로 바로잡으려는 시도이다.


한국은 사실상 두 개의 국가로 나뉘어 있다. 언제나 지배자의 위치에 서는 기득권층의 국가지방자치제 실시 이후에도 행정와 언제나 지배를 받는 시민들의 국가. 그리고 기득권층 대다수는 서울에 살고 있고 지역에중앙부처들은 각종 시행령과 지침으로 지방정부들을 통제하고, 지방정부들은 그런 통제를 는 이들과 연결된 토호들이 기득권 행세를 한다. 시민과 지역의 협조 없이는 기득권층의 국알리바이삼아 자신들이 대변해야 할 지역주민들을 속인다.가가 유지될 수 없을 텐데, 지금은 대안을 찾지 못한 시민과 지역사회들이 무기력하게 기득권층의 국가를 유지시키고 있다. 연방주의는 이 상태를 변화시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또한 북한과의 통일을 고려한다면 연방주의로의 전환은 필수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통합/통일이라는 추상적인 환상은 갈등과 대립이라는 구체적인 현실과 조건을 은폐하고 억압하기 쉽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모순된 국가체제를 지양할 수 있는 연방주의를 확립하는 것이다. 연방주의는 국가주권의 강화보다 주권을 지속적으로 폐기하는 역할을 맡고 풀뿌리의 정치역량을 활성화시킨다.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이런 연방주의 국가형태를 지속적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3. 삶의 재구성, 경제의 정치화


아이러니하지만 민주화 이후 정치의 경제화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민주화가 되었으니 먹고사는 문제에 집중한다고 볼 수 있지만 기본적인 경제조건을 결정하는 정치과정의 중요성이 중산층 신화 속에 망각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의제가 핵심적인 사안으로 부각되지 못했다는 점으로 이를 증명할 수 있다(국가는 노동운동을 억압하고 쟁의에 개입하며 자본의 양적 성장을 지속시켰다). 그리고 민주화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경제적인 자산은 재벌에게 집중되었고, 그만큼 시민들의 삶을 결정하고 그걸 뒤흔드는 재벌들의 힘도 커졌다. 그리고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 역시 커졌고 비수도권에서 생산된 부가가치는 수도권으로 흡수된다.


민주정부라고 불렸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도 이런 경향을 근본적으로 바로잡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 삶의 재구성은 이렇게 식민지로 전락한 삶을 자립의 삶으로 되돌리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연방주의 역시 이런 자립 속에서만 지속될 수 있다. 그런 자립경제에 관한 단초를 박현채의 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박현채는 『한국경제구조론』에서 “경제발전의 과정은 단순한 경제적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전체적인 사회적 변혁의 과정이어야” 하고, “경제발전의 추구는 민족주체적으로 한 민족의 민족주의적 요구, 민족의 자립과 민족주의적인 통일된 민족국가의 수립을 경제적으로 밑받침하는 것이어야” 하며, “경제발전에 있어서 토착적인 것의 최대한의 활용이 있어야” 하고, “새로운 발전론의 모색에서는 경제이론에서의 인간 복권(復權)이 이루어져야” 하며, “경제발전은 경제발전의 중요한 동인인 인간의 창의․창발성에 서는 것이어야” 하고, “시장결락(market failure)에 의한 공해는 물론 경제제량만을 위한 무원칙한 경제성장의 추구가 가져오는 생활환경 및 생태계의 파괴는 최소한으로 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 경제나 미국에 의한 원조경제, 재벌과 결탁한 관료자본주의,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 벗어나 국민경제, 자립경제를 이뤄야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박현채는 강조했다. 그렇지만 세계자본주의와 한국경제의 조건 속에 농업을 놓고 농업과 중소기업으로 자립경제의 기반을 만들려고 했던 박현채의 시도는 김대중 정부와의 결별로 실패하게 된다.


세계화의 현실에서 자립경제의 가능성과 범위를 어느 정도로 인정할 것인가는 논의가 필요하지만 경제를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삶 속으로 가져오는 작업은 필요하다. 앞서 논의한 연방주의도 경제를 우리 삶 속으로 가져오기 위한 디딤돌이다. 경제 면에서 연방주의는 협동과 우애의 원리에 바탕을 둔 경제질서, 생산과 소비, 농업과 산업을 분리시키지 않고 지역과 지역이 동등하게 자원을 나누고 협력하고자 하는 전략이었다. 없는 걸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연방주의 정신에 따라 강화시킨다면 자립경제라는 목표는 헛된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런 전환의 과정은 구체적인 정책으로 뒷받침되어야 하고 그런 정책을 구성하는 과정에는 시민의 개입과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하다. ‘중앙정부의 와해=지역자치의 활성화’가 아니듯 ‘독점의 해체=자립의 활성화’는 아니다. 각자의 삶의 규모를 해석하고 판단하는 과정도 필요하고 지역사회의 필요와 가능성을 해석하고 결정하며 그런 것을 공통의 과제로 구성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서로 다른 처지에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공통의 불안과 위험 속에 있다는 자각이 있어야 공통된 삶의 재구성이 가능하다.


그리고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구호와, 이미 고용 자체가 한계에 달했다는 앙드레 고르(A. Gorz)의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이라는 선언을 함께 고려한다면, 임금노동제도라 불리는 임금노예제도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자본주의 임금제도는 노동력을 빌미로 인격을 구매하는데, 구매당한 인격은 스스로 삶의 규모를 조절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제는 세계화, 자동화와 더불어 기업의 구매력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 실업과 노동빈곤(working poor)이 정치를 경제화시켜서 인간을 생존욕구에 불타는 좀비로 만든다면, 기본소득(basic income)은 경제를 정치화시켜서 죽어버린 좀비의 심장을 다시 뛰도록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본소득에 관해 이런저런 우려들이 있지만 아렌트 식으로 말한다면 자유로운 정치공간이 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다. 사실 엄청나게 새로운 이야기 같지만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져간다는 코뮨주의 원리의 현대판이라고 볼 수 있다. 일종의 공유지를 만드는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고립된 생활을 강화시키는 방법이 아니라 공동체를 구성하며 공유지를 만들고 확장시키는 방법이라 본다면, 기본소득은 삶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경제를 근본적/급진적으로 정치화시키는 과정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1) “‘혁명’이라는 용어는 원래 천체 궤도의 운행(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이라는 코페르니쿠스의 표현을 통해 자연과학에서 점차 중요해진 천문학 용어였다. 이 과학 용어에서 혁명이라는 용어는 라틴어의 의미를 그대로 유지했다. 별들의 회전 운동은 인간의 영향력을 벗어난 거역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새로움이나 격렬함이라는 특징과는 분명히 거리가 먼, 규칙적이고 합법칙적인 것을 의미했다.”(한나 아렌트, 『혁명론』)


2) 그 과정에 대한 분석은 하승우․권정우의 『아렌트의 정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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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5.06.12 16:20

1. 나른한 봄날의 꿈


박영순 시장실의 회의 열기가 뜨겁다. 다가올 여름에 사상 최대의 전력난이 우려되자 서울시의 전기공급을 조절할 수밖에 없는데, 불편을 호소하는 민원인들의 전화가 폭주할 거라고 담당자들이 걱정한다. 전력을 거의 생산하지 않는 서울시가 전력을 확보할 방법은 전력을 생산하는 다른 지역들의 도움을 받는 것인데, 요즘 수도권 밖 지역정부들의 태도가 예전같지 않다. 경기도와 협의해서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산업이나 자원을 조정하지 않으면 수도권으로 보내는 전력을 줄이거나 단가를 높이겠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하고 있다. 과거 중앙정부 시절에 발전소들을 전부 지방에 크게 짓다보니 서울시로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박영순 시장이 나서서 박본혜 대통령과 통화를 했지만 연방정부 역시 비리나 특별한 문제가 아니면 지역정부가 운영하는 공기업인 전력회사에 개입할 수 없다며 난색을 표한다. 전력난 걱정에 마음이 심란한데, 박본혜 대통령은 제주도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만드는 걸 서울광역시정부(연방국가로 전환된 뒤 서울특별시는 서울광역시가 되었다)가 공개지지하고 서울시민의 찬성여론을 유도해 달라고 요청한다. 아버지가 대통령일 때가 좋았는데, 라는 이상한 말을 하면서 박본혜 대통령은 전화를 끊었다.


과거 중앙정부 시절에 온갖 지원을 약속받았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이득이 없다보니 지역정부들은 연방정부의 약속을 잘 믿지 않는다. 확실한 지원책을 미리 제공받고 난 뒤에야 해당 사업을 진지하게 고민하겠다는 식이다. 국방은 연방정부의 소관이라 밀어붙일 만한 일이지만 제주도의 역사를 고려할 때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식이라면 육지와 분리․독립하겠다는 제주도지사의 당선은 연방정부를 더욱더 곤란하게 만들었다. 제주도지사는 연방정부의 분명한 지원이 없다면 과거 중앙정부에게 피해를 입었던 지역들과 손을 잡고 따로 협조체계를 꾸리겠다며 압박을 가하기도 한다. 그리고 제주도지사는 앞으로 제주도내 공문서에서 표준어와 제주어를 똑같이 공식언어로 채택하고 학교에서는 제주어를 먼저 가르치겠다고 밝혔다. 차차 표준어 사용을 줄이겠다고 하니 제주도에 가는 연방공무원은 제주어 과외를 받아야 한다. 연방정부가 해군기지 공사를 밀어붙이다간 제주공화국이 수립될 것 같다.


제주도만이 아니다. 충청남도는 한국은행과 별도로 화폐를 만들겠다며 충남은행을 설립했다. 지역 밖으로 빠져나가는 돈을 묶어서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고 한다. 충남은행의 설립은 중앙정부의 경제정책이나 중앙정부가 내려주는 지원금에 목을 매는 시대가 지나갔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앞으로 충남은행은 중앙통화와 지역화폐를 환전하며 지역경제를 순환시키는 심장 역할을 맡을 예정이다. 그리고 충청남도는 도시와 농촌, 어촌이 공존하는 지역특색을 살리는 발전정책을 수립하겠다며 관련 법령들을 전면 재검토하고 있다.


중앙정부가 연방정부로 전환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지역정부들은 ‘지역주권’을 강화시킬 수 있는 연방주의를 지지하고 있다. 그리고 연방정부는 과거 수도권으로의 초집중을 보상하는 차원에서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정부에게 연방기금을 지급하고 있다. 지역정부들이 수도권을 포위하는 전략을 공동으로 세우고 압력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지역주의는 영호남이 아니라 수도권과 비수도권에서 간혹 드러났다). 연방주의는 각 지방들이 알아서 살아남는 구조가 아니라 각각의 필요들에 따라 서로 연합하는 것이기에, 지역간의 연대는 더 강화되었다. 또 지역정부의 법률(연방국가가 되면서 조례라는 말이 사라졌다)이 연방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발휘하다보니 지방의회의 권한이 강해지고 법원도 따로 구성되었다.


시민들이 자기와 맞는 지역을 선택하며 여차하면 다른 지역으로 떠나겠다고 하니, 지역권력도 주민들의 요구에 더 민감해졌다. 그리고 중요한 결정들이 서울보다 지역에서 내려지자 주민들도 자기 지역의 미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정부와 기업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한다. 연방국가로 전환되면서 주민소환권이 강화되고 한 단계 더 가까워진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며 더 작은 규모의 대안을 모색하는 주민자치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연방국가는 공공정보를 공개해서 이런 움직임을 뒷받침한다. 이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2. 왜 연방주의인가?


위의 이야기는 허구이지만 근거 있는 이야기이다. 미국의 경우 각 주마다 발전소와 전력공급회사가 있는데, 2000년 캘리포니아주의 전력난 사태는 공기업인 발전소가 민간회사에 매각되면서 전력가격이 폭등하면서 시작되었다. 엔론이라는 회사가 그 주역인데 가격을 장난쳐서 두 군데의 전력공급회사를 파산하게 만들었다. 문제가 터지자 나중에 미연방정부도 개입했는데, 한국이라면 중앙정부와 한수원이 좌지우지했을 일이다. 한국처럼 의사결정이 집중되면 그만큼 부패가 발생하기 쉽고, 힘이 약한 지방이 중앙에 종속된다.


캘리포니아주 사태처럼 시민의 통제가 없으면 문제가 생기기도 하지만 연방주의는 지역이 더 많은 결정권한을 가지도록 한다.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권한은 외교와 국방을 제외하면 거의 동등하다. 우리의 생각보다 이런 체제를 갖춘 곳이 꽤 많은데, 연방주의를 공식적으로 채택하지 않더라도 스페인이나 스코틀랜드, 이탈리아, 인도처럼 지역정부가 독자적으로 입법권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스위스나 벨기에처럼 작은 국가들에서도 연방주의가 실시되고 있으니 땅덩어리가 큰 나라에서만 실시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연방정부가 수립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자연스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연방정부가 만들어지면 정치는 더욱더 필요해지고 그만큼 더 활성화된다. 캐나다의 경우 퀘벡주는 두 차례나 연방정부와 떨어져 독립하기 위한 주민투표를 진행했다. 영어와 프랑스어를 모두 공용어로 쓰는 캐나다이지만 퀘벡주는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쓴다. 캐나다에서 가장 크고 인구가 두 번째로 많은데도 퀘벡주의 뜻이 연방헌법이나 정치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퀘벡주는 1980년과 1995년 두 번 분리독립을 위한 투표를 실시했다. 1980년에는 분리독립 찬성비율이 40.44%, 1995년에는 찬성비율이 49.42%에 달했다. 그 뒤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퀘벡당과 독립을 반대하는 자유당의 업치락뒤치락 선거경쟁이 계속되고 있다. 연방정부가 되면 국가로부터의 분리도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된다.


그리고 2014년 9월 18일에는 영연방에서 스코틀랜드가 분리․독립하는 것에 관한 주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찬성율 44%로 독립은 무산되었지만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윌리엄 월레스가 외쳤던 ‘프리덤’은 여전히 스코틀랜드인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대표 없이 세금만 부과하는 현재의 체제를 고분고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자세이다. 투표는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분리․독립 시도가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자유의 열망은 계속될 예정이다.


이렇게 보면 시민들이 어떤 뜻을 품는가에 따라 국가의 형태는 그에 맞게 계속 바뀔 수 있다. 국가가 정치공동체라면 구성원의 뜻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 우리도 퀘벡주나 스코틀랜드처럼 분리․독립을 하지 말란 법도 없다.


특히 ‘내부식민지’라는 말이 있듯이, 한국처럼 수도권이 비수도권의 사람과 자원을 계속 빨아들이고 착취하는 체제에서는 정치가 복원될 수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결정권이 모두 서울에 있으니, 생산하지 않는 곳이 생산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모순 아닌가. 연방주의는 이런 기본적인 부조리를 바로잡으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한국은 사실상 두 개의 국가로 나뉘어 있다. 언제나 지배자의 위치에 서는 기득권층의 국가와 언제나 지배를 받는 시민들의 국가. 그리고 기득권층 대다수는 서울에 살고 있고 지역에는 이들과 연결된 토호들이 기득권 행세를 한다. 시민과 지역의 협조 없이는 기득권층의 국가가 유지될 수 없을 텐데, 지금은 대안을 찾지 못한 시민과 지역사회들이 무기력하게 기득권층의 국가를 유지시키고 있다. 연방주의는 이 상태를 변화시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연방주의 논의는 단순히 중앙정부의 권력을 분산시키자는 주장이 아니다. 권력을 근본적으로 재편하자는 것이고 청와대와 국회만 바라보는 우리들의 무기력한 시선을 이제 구체적인 지역으로 돌릴 기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3. 어떻게 하면 연방주의를 실현할까?


지난 2015년 3월 5일 ‘시민이 만드는 헌법 국민운동본부’라는 단체가 발족했는데, 이 단체는 선언문에서 한국의 낡은 헌법이 사회 현안을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민이 나서서 직접 헌법을 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발족 당일 대토론회를 열고 지방분권과 국민주권, 사법정의, 권력구조개혁 등을 요구했다. 참석하지 못해 토론에서 논의된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다른 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개헌이나 분권형 국가에 관한 논의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실제로 연방주의로 가려면 개헌이 필수적이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연방주의가 아예 배제되어 있고, 자치단체에 관한 규정만 있을 뿐 주민자치에 관한 규정은 법률로 위임되어 있기 때문이다(제 118조 2항 ‘지방의회의 조직․권한․의원선거와 지방자치단체의 장의 선임방법 기타 지방자치단체의 조직과 운영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지방자치제도의 지위가 법률에 위임되어 있기 때문에 과거 박정희 정권은 지방자치제도를 유보시킬 수 있었다. 연방주의 개헌이 되면 국회나 청와대가 지방자치제도를 마음대로 좌우할 수 없다.


사실 그래서 개헌은 쉽지 않을 것이고, 기득권층은 이에 적극적으로 저항할 것이다. 실제로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그동안 진행된 지방자치 논의를 거꾸로 되돌리려 하고 있다. 2014년 12월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는 ‘지방자치발전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지방의회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지방행정에 주민참여를 확대시키며 기초자치단체에 자치경찰단을 설치하는 등 그동안 시민사회가 요구해온 방안들도 포함되었지만 특별시와 광역시의 기초의회를 폐지하고 단체장과 교육감 직선제를 변형하는 등 지방자치의 흐름에 역행하는 내용들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주민자치를 외치면서 행정단위를 광역화시키겠다는 이상한 발상도 항상 따라다니고 있다. 이런 구상은 박근혜 정부의 독자적인 판단이 아니고 이명박 정부의 지방행정체제개편추진위원회도 비슷한 방안을 제안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분권은 일종의 ‘착시현상’을 낳을 수 있다. 권력을 나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지역의 기득권을 더 강화시킬 수 있고 분권이 수사에 그칠 수도 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 때처럼 분권과 균형발전을 중요한 의제로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공사판의 규모를 키울 수도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이제는 분권보다 더 분명한 연방주의를 내세워야 한다. 그래야 기득권층의 술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연방국가가 수립되면 문제가 끝나는 것도 아니다. 머레이 북친은 『다음 세대의 혁명(The Next Revolution)』(2015년 번역 출간예정)에서 미국이나 유럽공동체(EU) 등에서 드러나는 연방국가의 문제를 지적한다. 연방국가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중앙집권화가 진행되고 시민이 국가를 통제할 방법은 제한되어 있다는 비판이다. 그래서 북친은 지역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인민의회들(popular assemblies)이 소환할 수 있는 대리인들을 지역과 지방의 연맹의회로 보내는 네트워크”를 구성해야 하고 연방은 지역간의 차이를 조절하는 역할만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친은 국가주의를 강화시키는 국가선거보다 지역정부의 선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지역정부가 국가와 의회에 맞서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분권이나 연방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흔한 실수는 국가통치를 구성하는 주와 국가 차원의 선거활동과 지역차원의 선거활동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북친은 우려한다.


북친의 주장을 한국에서 무조건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연방주의를 실현할 전략과 관련해 여러 시사점을 준다. 일단 청와대나 국회는 연방으로의 전환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거스를 것이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체제에서는 국민투표를 통한 헌법 개정 외에는 연방으로의 전환을 강요할 방법이 없는데 국민투표를 부여할 권리도 대통령에게 있다.


그렇다면 방법은 없을까? 그렇지는 않다. 연방주의는 새롭고 자유로운 사회구조를 만들려는 이들이 합심해서 만들어낸 이념이자 전략이다.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려면 우리 스스로가 지금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정치 면에서 연방주의란 정부 안에 정부를 만들어 일종의 이중권력을 만들고 주권이 작동되는 방식을 바꿀 뿐 아니라 주권 자체를 시민들이 직접 정의하게끔 하는 이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지금 이중권력을 구성해서 그림자 정부를 활성화시키면 어떨까? 우리 스스로의 공식화되지 않은 자치질서를 짜는 것은 지금도 가능하다.


그리고 경제 면에서 연방주의는 협동과 우애의 원리에 바탕을 둔 경제질서, 생산과 소비, 농업과 산업을 분리시키지 않고 지역과 지역이 동등하게 자원을 나누고자 하는 전략이었다. 그렇다면 이미 연결되어 있는 생산/소비의 망을 강화시켜서 농부가 도시인의 밥상과 공장/사무실의 급식을 책임지고, 도시인이 농촌으로 내려올 수 있는 바탕을 만든다면? 도시인이 농촌의 삶을 지지하고 산업이 농촌의 기술을 지원하면 어떨까? 없는 걸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연방주의 정신에 따라 강화시켜가야 실제로 연방으로의 전환이 된 후에 지역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


또한 문화 면에서 연방주의는 표준어와 표준지식, 통일된 기준을 거부하고 지역적인 지식과 문화를 강화시키려는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중앙언론을 끊고 지역언론을 살리고, 외부의 시선이나 수도권 중심의 담론을 차단하면 어떨까? 지식과 문화의 획일성을 깨고 차이와 다양성을 활성화시키려면 다양한 공동체 공간이 필요한데, 도서관이나 다양한 시민공간 등이 그런 역할을 맡으면 어떨까? 시민의 정체성이 지역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면 자급과 자치의 중요한 기둥이 될 수 있다.


연방주의는 연방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살려는 시민들이 등장하고 서로 손을 맞잡을 때에 실현될 수 있다. 국가의 민주화와 시장의 사회화, 주권의 분권화, 자치와 자급의 삶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지역이 자립의 기반이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자급이 가능하려면 안팎의 다양한 연계가 필요하다. 필요한 인력과 자원, 더 중요하게는 경험과 지혜를 공유할 관계망이 필요하다. 내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타자의 자유를 희생시키지 않고 기득권에 맞서 서로가 서로의 자유를 지지할 때에만 자유가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은 무시되지 말아야 한다. 사실 진정 자율적인 존재라면 스스로의 선택으로 타자의 뒤에 서서 그 뒤를 받쳐줄 수 있다. 이런 자율적인 존재들이 만나야 연방의 원리가 실현될 수 있다. 우리는 자유롭기 위해 서로 연대한다, 는 마음가짐이 만남에서 가장 중요하다.



4. 연방주의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지금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갈등들은 대부분 중앙정부의 정책 때문이다. 지역의 구체적인 사정과 필요, 관행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집행되는 정책, 그것도 수도권의 필요에 따라 진행되는 정책들이 많다(에너지정책이 대표적이다). 이런 문제를 개혁하려면 지역사회가 ‘지역주권’을 가지고, 그런 지역들이 서로 연계되어 ‘연대의 정치’를 펼칠 수 있는 연방정부가 필요하다. 이런 전환은 시민들에게 자율성만이 아니라 결정에 대한 책임성도 준다. 스스로 결정하며 시행착오를 경험하다보면 그 지역에 맞는 삶의 형식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연방주의로 전환하기 위한 논의를 모으고 합의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의 몫을 되찾는 일도 가능하다. 기득권층이나 재벌들이 쌈짓돈처럼 쓰는 세금을 우리가 원하고 필요한 곳에 쓸 수 있고, 중앙정부나 지역정부가 가진 건 궁극적으로 시민들의 자산이다. 자치가 활성화되면 헛되이 사용되는 자원이 줄어들어 삶의 질이 높아질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중앙정부에만 맞춰져 있는 우리의 시선을 지방정부로 돌려야 한다. 중앙정부의 일에 관심을 끊으라는 게 아니라 지방정부의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이다. 적어도 중앙정부의 권력보다 지방정부의 권력이 접촉하기 쉽고 통제할 수 있는 방법도 더 많다. 세금을 더 내서 복지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지방세의 비중을 늘려 국세와 지방세의 균형을 잡고 지역의 힘을 늘리는 방향으로 나아야 실질적인 변화를 체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역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정치적인 힘이 생길 수 있다.


지역사회는 자연과 사람이 상호의존하며 자치와 자급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공간이자 그런 관계를 통해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세상으로 도약할 수 있는 장소이다. 서로의 삶을 섞고(共有) 공적인 장을 확장하는(公有) 공공성(公共性)은 지역에서부터 실현될 수 있다. 그러니 지역사회를 무대로 삼는 운동주체의 등장과 그 주체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행동, 그것을 지속시킬 수 있는 살림살이가 필요하다. 신문을 만들거나 인터넷 카페를 만들거나 방송국을 만들거나 민중의 집과 비슷한 공유공간을 만들거나, 그 방식은 여러 가지이다. 연방주의는 그런 다양한 실험들을 담기에 좋은 그릇이고, 그런 우리를 위한 체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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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5.01.20 08:23

2009년 2월에 금속노조에서 나온 정책연구보고서 「산별노조시대: 금속노조의 지역사회 개입전략」이 만들어질 때, 연구진과 2008년도에 지역운동을 설명하러 공식적으로 한번 만났고, 보고서가 나온 뒤 금속노조 간부들이 모인 발표회를 할 때 비공식적으로 한번 참여했다. 그날 발표회 자리는 내게 오랜 시간 동안 당혹스러운 자리로 기억되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간부들 대부분이 보고서 내용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개입할 현장, 현안이 많은데 생뚱맞게 웬 지역사회? 지금 한가해요?, 이런 분위기였다. 2015년이면 7년째인데, 이 보고서가 나온 뒤 금속노조는 어떤 구체적인 개입전략을 만들었을까? 그리고 그때보다 더 발전된 전략을 고민하고 있을까? 실사구시(實事求是)라고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야 그 다음 과정이 보일 거라고 생각한다.



1. 풀뿌리운동이란?


보통 풀뿌리운동은 특정 지역을 근거로 삼는 운동으로 이해되지만 그건 절반의 진실이다. 풀뿌리운동은 수동적인 주민을 능동적인 주체로 성장시키려는 목적을 가진다. 그래서 특정 지역을 근거지로 삼더라도 주민이 직접 의제를 만들고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을 주도하지 못한다면 풀뿌리운동이라 보기 어렵다. 풀뿌리운동은 운동과정에서 발전된 주민들의 리더십이 지역을 재구성하는 정치적인 힘이 되고, 주민들의 민중권력이 지방권력과 대등해지는 삶을 지향한다. 군사독재 시기와 비교하면 운동의 뿌리가 제법 넓어졌고 언론의 주목을 받는 지역들도 생겼지만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렸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왜냐하면 지역도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변하고 풀뿌리운동의 주체들도 인간이기에 다양한 경로를 걷기 때문이다. 뉴타운, 산업단지와 같은 개발사업들이 지역에 큰 영향을 미치고, 각종 사건이나 죽음이 주체들의 힘을 뺐다 늘렸다 한다. 그래서 풀뿌리운동은 어떤 하나의 모델을 따라가기 어렵다. 사람이 중심인 운동인지라 사람들의 다양한 관점과 삶이 반영되어야 하고, 지역이 중심인 운동이라 중앙집중성보다 다양성을 반영해야 한다.

그렇기에 풀뿌리운동은 주체의 성장과 다양성이라는 강점을 제대로 살리고 있는지를 계속 점검하고 있다. 주민구성이 특정 아파트나 마을을 넘어 다양해지고 넓어지고 있다면, 생활과 노동의 장이 조금씩 통합되고 있다면, 그러면서 지역과 사람의 독특성을 드러내며 단단한 관계망을 만들고 있다면 그 힘은 강하다. 사실 풀뿌리운동의 정치적인 힘은 관계망을 통해 구성된 신뢰이고 생활로 단련된 지혜이다. 신뢰는 일방적인 믿음보다 자신의 힘에 대한 자각과 서로에 대한 약속을 뜻하고, 지혜는 표준화된 지식보다 가슴과 몸으로 느끼는 경험과 함께 나누는 삶을 뜻한다.

서로를 믿고 돌보고 물건을 나누고 같이 밥 먹고 수다를 떨며 공부하는 과정은 생활정치의 동력이고 자치(自治)를 가능케 하는 토대이다. 주민 스스로가 이 과정을 기획할 수 있기에 운동은 즐겁기도 하다. 함께 즐겁게 할 수 있다는 점이 풀뿌리운동의 강점이다. 이런 삶이 단단해지면 기성 권력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삶이, 그리고 지역이 지속될 수 있다.

그렇지만 풀뿌리운동이 현실의 역동성을 반영하려면 지속적인 ‘공부’와 ‘수련’이 필요하다. 공부를 해야 그동안 보이지 않던 사람과 공간이 눈에 들어오고 수련을 해야 사람과 지역에 대한 감각과 의식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더구나 한국처럼 제왕의 권력을 가진 대통령과 단체장이 있는 중앙집권형 사회에서 풀뿌리의 힘이 강해지려면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더구나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갈수록 다양해지는데, 기득권은 개발, 발전이라는 말 하나로 자기 전략을 설득할 수 있지만, 풀뿌리운동은 통일되지 않은, 통일될 수 없는 언어로 주민들을 만나야 한다. 운동에서는 그나마 만남이 가능할 수 있지만 선거에서는 그것이 어렵다(선거과정조차 불리하다). 따라서 개발에 대한 비판도 중요하지만 지역의 언어로 만들어진 비전이 사회 전체의 변화와 연계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해관계와 변화의 비전을 연계시켜야 한다. 정치에 관한 정보를 나누는 통로도 다양해져야 한다. 생활정치의 힘이 강해져도 그 힘이 체제를 압박하지 못한다면, 두 사회가 분리된다면 삶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특히 행정 주도의 마을만들기나 사회적 경제가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자원배분에 더 많은 이해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누가 자원을 더 많이 끌어올 수 있는가를 따지는 이해관계와 영악해진 주민은 풀뿌리를 쉽게 흔들 수 있다. 그리고 정부와 연관된 일자리들이 늘어날수록 그것은 주변의 질시를 받고 주민을 분열시킨다. 풀뿌리가 지역을 강화시켜야 하는데 외려 체제를 강화시킨다. 내적인 힘을 다지면서 외부와 적극적으로 연계될 때에 풀뿌리민주주의는 더 넓게, 더 깊이 뿌리를 내릴 것 같다.



2. 풀뿌리운동의 현재


우리의 민주화운동 역사에서도 풀뿌리민주주의의 싹을 찾을 수 있다. 1960년대 이후의 주민운동, 빈민운동 등이 지역운동의 뿌리가 되었고, 1995년도에 지방자치제도가 전면적으로 실시된 후에는 풀뿌리민주주의가 제도정치와도 접목되고 있다.

물론 풀뿌리민주주의가 자연스럽게 실현되지는 않는다.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다양한 단체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한국에서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는 단체들이 있다. <시민의신문>과 <한국청년연합회(KYC)>가 엮은 『도시 속 희망공동체 11곳 - 풀뿌리가 희망이다』(시금치, 2005년)는 <광명YMCA>를 비롯한 11곳을 대표적인 풀뿌리운동의 사례로 소개한다. 그리고 김기현의 『우리 시대의 커뮤빌더』(이매진, 2007)는 <부천YMCA>의 녹색가게, <광명YMCA>의 등대생협, 부산의 <희망세상>, 안성의 <안성의료생협>, 네 곳을 풀뿌리운동의 사례로 소개한다. 그리고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의 『달팽이가 달리기를 시작한 까닭은?』(이음, 2008년)은 <광명YMCA>의 등대생협, 서울 강북구의 <녹색삶을 위한 여성들의 모임>, <대전여민회>의 중촌마을어린이도서관 짜장, 천안의 <복지세상을 열어가는 시민모임>, 충청북도 옥천군의 <안남 어머니학교>, <안성의료생활협동조합>, 강원의 원주의 <협동조합운동협의회>, 강원도 철암의 <철암어린이도서관>, 부산의 <희망세상> 등 9곳을 풀뿌리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한다.

운동의제의 측면에서 보면, 도서관운동, 보육운동, 학교급식운동 등 다양한 생활상의 이슈들이 풀뿌리민주주의의 의제로 등장하고 있다. 도서관이나 보육, 학교급식과 관련된 운동은 그 사안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안을 해결하는 과정에 주민/시민이 참여하며 의식을 확장하고 정치주체로 성장하도록 디딤돌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풀뿌리민주주의와 맞닿아 있다. 도서관이나 놀이터, 공부방, 방과후학교 등이 일정한 물리적인 공간을 중심으로 민주주의의 관계망을 구성한다면, 보육이나 학교급식 등은 지역사회 내의 다양한 사람들을 조직화하면서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장이 되고 있다.

그리고 행정이 주도하는 주민자치센터나 주민자치위원회를 민주적인 공간으로 바꾸려는 노력들도 점점 많이 등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도시계획이나 재개발, 주거권에 개입하려는 운동도 조금씩 활성화되고 ‘미래의 시민’인 청소년들을 지역사회의 주체로 구성하는 운동도 활발해지고 있다. 또한 천안의 <풀뿌리희망재단>처럼 지역재단을 설립하는 운동도 추진되고 있다.

이런 다양한 흐름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이런 운동이 주민들의 성장에 필요한 여유를 마련하고 과정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주민들이 곧바로 능동적인 정치주체로 변신하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운동은 주체들이 성장할 ‘과정’과 ‘여유’를 마련한다. 이런 과정과 여유는 소외된 주민이 자신의 ‘시민됨’을 자각하고 능동적인 정치적 의지를 회복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직접 참여하고 실천하며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배우게 한다. 성공적인 사례로 거론되는 지역들은 바로 이런 과정을 만드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삶의 터전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것은 활동가가 아니라 주민이고 활동가는 주민이 세계를 이해하고 변화시킬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맡을 뿐이다.

허나 아직은 그 뿌리가 튼튼하지 않기에 한국의 풀뿌리민주주의를 낙관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 중앙정부로 집중된 권력, 중앙에서 지역으로 끈끈하게 연결된 부패의 고리, 학연/지연/혈연으로 대변되는 연고주의, 심각한 사회적 양극화와 청년실업 등은 민주주의의 기반을 갉아먹고 있다. 비민주적인 학교와 공장, 사무실, 군대 등이 민주주의를 가로막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풀뿌리민주주의가 지역을 넘어 한국사회로 확장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가정과 공장의 벽을 넘어, 정치와 경제의 벽을 넘어 우리 삶을 총체적으로 바꿔야 민주적으로 살 수 있다.

그리고 재활용가게, 나눔장터, 동네카페, 도서관,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등 풀뿌리운동의 영역은 계속 넓어지고 있고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지만, 규모와 활동가의 수가 운동의 목적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외려 규모와 수가 늘어날수록 단체 내부에서조차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자기 담당사업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자기반성의 목소리가 솔솔 흘러나온다. 외부로 알려진 만큼 내실이 없다는 비판, 사업담당자만 있지 활동가는 없다는 성찰도 있다. 지역/시민단체 내부의 열악한 노동 문제도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소위 사회적 경제라 불리는 영역은 노동의 영역이기도 하기 때문에 풀뿌리운동은 노동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3. 지역과 노동운동의 만남은 가능한가?


노동환경건강연구소 김신범 실장은 “노동권을 지키는 마을 어때요?”라는 발제문(<인천 제 2기 주민자치인문대학 2014년 10월 17일)에서 청소노동자의 씻을 권리운동을 평가하며 “우리는 이번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대다수의 시민들이 가진 허위의식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언론에 있었다. TV에서는 환경미화원 채용시험에 수백대 일의 경쟁률을 보였으며, 대학졸업자도 다수 지원했다고 떠들면서 환경미화원의 일자리가 고임금에 좋은 것으로 보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로 인해 대다수의 시민들은 청소업무의 민간위탁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던 수준이 아니라, 오히려 환경미화원은 고임금에 좋은 대우를 받는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환경미화원의 해고저지투쟁이나 민간위탁 반대투쟁의 절박함과 정당성이 얼마나 지역주민들에게 전달되었을지는 너무도 명백한 것이었다.…아직, 시민과 노동자들이 만나서 청소업무 민간위탁으로 인한 예산절감효과를 분석하는 수준까지는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공부문 사유화의 폐해가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조건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지역사회와 호흡하면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질문을 지역사회 시민들과 함께 던져보고 싶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케이블방송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운동 C&M투쟁을 평가하며 “희망연대노동조합은 단체교섭을 통해 사회공헌기금을 확보하였고 지역의 시민사회단체가 하는 사업의 지원비로 내놓는다. 시민사회단체에서는 기획안을 마련하여 노동조합에 제출하고 심의를 통해 사업지원을 받게 된다. 송파시민연대는 희망연대노동조합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PVC 플라스틱으로부터 어린이를 지키는 캠페인을 지역에서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러던 이들이 노동조합 존폐위기에 놓이자 시민사회는 적극 이들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송파 강동 지역에서는 석촌호수에서 이들을 위한 문화제를 시민단체들이 주도하여 개최하였다. 지역사회에서 이들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캠페인이 전개되고 있다. C&M 노동조합은 적어도 외롭지는 않다. 지역에서 이러한 연대가 이루어지자 인터넷 기사들의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면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하여 회사에게 압박을 하는 등 최근에는 관계가 더 돈독해지고 더 구체적인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런 흐름을 보며 김신범 실장은 “정리해고, 명예퇴직, 간접고용의 문제를 마을이 파괴되는 문제로 인식하는 태도가 자리하기 시작했다. 정리해고나 명예퇴직을 당하는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자영업으로 뛰어들지만, 이 들 중 대다수는 망하고 만다. 망하는 과정에서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에 대해 제대로 된 처우를 해 줄 리 만무하다. 고용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사회의 최종 피해자는 나의 이웃이며 나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청주 생활교육공동체 공룡의 박영길 사무국장은 “마을과 노동, 마을에서 노동이 분리될 수 없는 이유”(2014년 11월)라는 팜플릿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 노동조합활동을 하는 이웃 사람이 있다고 해도, 결국 마을에서 보면 그냥 똑같은 마을주민이다. 이는 노동조합이라는 것이 결국 그 사람의 직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보니 직접적으로 마을과 관계되지 않기 때문이며, 그래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단순하게 직업적 차원에서의 노동자로 받아들여질 뿐인 것이다. 그래서 마을이 하나의 공장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맺어지지 않는 한은 노동자체가 이슈화되기 힘든 구조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과연 마을에서 노동조합 간부들을 만나는 게 진정 마을에서 노동을 만나는 것일까? 지역의 어느 사업장에서 파업이 있을 때 지지방문 가고 연대하는 것만이 내가 사는 마을에서 노동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일까?”라고 묻는다. 우리 사회가 마을공동체나 지역의 의미를 강조하는 듯 하지만 지역 내의 필요노동이나 노동의 가치를 여전히 낮게 평가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박영길 사무국장은 “경비아저씨라는 노동자를 아파트 마을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경비아저씨에게 친철하게 말 한마디 건네라는 게 아니라 직접 면접보고 직접 고용하라는 것이다. 관리사무소라는 일부 관리업체에게 맡겨놓고 방관할 것이 아니라 적어도 우리 아파트에서 필요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직접 주민대표자들이 고용하고 그들의 삶과 업무들을 살펴보라는 것이다. 마을에 필요한 공적 서비스를 진행하는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고 직접 고용하는 방식, 학교에서 급식조리종사자들을 학교 행정실에 맡기는 게 아니라 면접보고 그들의 하는 일들을 자세히 살피는 것들을 학부모의 의무이자 권리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벽에 동네 쓰레기를 치우는 공공근로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직접 제공하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적어도 필요 노동자들에 한해서라도 아파트 관리업체에게 맡기지 말고, 급식업체나 학교 행정실에 맡기지 말고, 주민자치센터에 맡기지 말고, 수많은 필요노동을 대행업체에 맡기지 말고 직접 대면하라는 이야길 하고 싶은 거다. 이게 우리가 이야기하는 자립과 자치의 첫 출발점이 아닐까.”라고 주장한다.

공공부문의 사유화가 노동운동과 지역운동 모두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두 운동의 주체가 지역사회에 기반을 두고 운동을 펼치는 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운동 이전에 필요한 건 지역을 파악하는 것이다. 투명인간처럼 존재하는 노동자, 주민들이 지역사회에 존재한다. 특히 청소노동자나 학교급식조리노동자, 경비노동자, 택배노동자, 사회복지사,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 청(소)년들의 알바노동은 잘 드러나지 않거나 노동자와 주민간의 이해관계가 상충하기도 한다. 가격이나 비용이 아닌 다른 언어로 지역사회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만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 그 장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박영길 사무국장이 지적하듯이, 지역의 필요노동이라면 그 노동을 지역주민들이 직접 고용하도록 강요하거나 최소한 그 노동을 직접 대면해야 한다. 우리가 공통의 세계 위에 서 있다는 자각이 매우 중요한데, 그런 자각은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는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보더라도 그 존재를 인지하지 않으면 자각되지 않는다. 노동운동은 주민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또한 한국사회의 특성상 자영업의 비중이 높고, 자영업 내에서 고용되는 일용직 노동이 아주 열악하다. 이것은 개별 업주의 문제도 있지만 자영업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다. 2012년 12월에 발간된 고용노동부의 「생계형 자영업 실태 및 사회안전망 강화방안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도소매업과 숙박 및 음식점업 전체 151만 1,154개 사업체 중 무려 139만 6,743개 사업체가 자영업자이고, 이중 5인 미만의 노동자를 고용하거나 연간 매출액이 4,800만원 이하인 영세 자영업자가 전체 자영업자의 44.6%이다. 2014년 5월을 기준으로 자영업자는 569만8천명이고, 그중 415만2천명이 '고용원이 없는 자영업자'로 추산된다. 그리고 자영업이라 불리지만 사실상 프랜차이즈화되어 ‘갑질’에 시달리는 이들 업자들에게 노동운동은 어떤 의미일까? 자영업자들이 알바노동을 무시하고 착취하는 것은 인간성이 나빠서일까?

더불어 소위 사회적 경제라 불리는 영역이 점점 커지고 있다. 정부의 지원을 받는 이 영역이 기존의 시장을 변형시킬 때 노동운동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가령 직영되던 노동이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으로 바뀔 경우 노동운동은 반대 이외의 어떤 입장을 택할 것인가? 기업이 폐업할 경우 노동자들이 인수하는 자주관리기업에 대해 노동운동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노동운동은 어느 정도의 기업운영능력을 기르고 있을까?



4. 같이 고민하고픈 내용들


- 공장과 사무실을 나오면 대부분이 비정규직 노동이다. 노동운동에서 지역의 지역화는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이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의 조직화이다. 공장과 사무실을 벗어난 노동운동이자 공장과 사무실을 포위하는 노동운동이다. 성공한 지역노조의 싸움은 지역단체들을 조직화한 싸움, 생산과 소비를 연계시키고 조직화하는 싸움이었다. 이런 싸움의 경험들은 어떻게 정리되고 어떻게 공유되고 있나? 사업의 공유말고 경험의 공유와 그 경험을 실제로 적용하는 실험은 이루어지고 있나?

그런데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연대는 강력한 연대보다 느슨한 연대이다. 조직화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노동운동의 지역사회전략은 대부분 산별을 강화시키는 방편으로 신속하고 강한 연대를 전제하고 있다. 서로 만나는 방식과 목적이 다른데, 어떤 연대가 가능할까?

그리고 각 지역에 따라 현안과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노동조합이 어떤 의제를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달성해야 한다고 ‘미리’ 정하기는 어렵다. 어떤 의제를 얘기하기 전에 그 지역에 관한 구체적인 욕구조사가 실시되어야 하고, 지역사회 내의 다양한 주체들(조직화되지 않은 주민/노동자 포함)을 파악해야 한다. 이렇게 욕구조사를 하고 주민지도력을 파악하는 과정 자체가 지역과 연계를 맺고 지역운동을 시작하는 과정이다. 이런 부분에 공무원 노조나 전교조가 적극적으로 결합하면 좋은데, 그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시도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관청과 학교 내로 숨어버린 느낌이다. 주민들을 만나고 함께 하지 않으면서 연대전략을 모색한다는 건 사업 중심으로 활동가를 배치하겠다는 발상인데, 주민들이 사업을 원할까? 그리고 주민들에게 금속노조의 사업을 주민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활동가는 얼마나 있을까?

또한 지역의 의제를 선정하고 논의하는 과정에 지역주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야 하고, 그 주민들을 볼 때 기존의 진보/보수틀로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지역사회는 권력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진공의 장이 아니라 아주 촘촘한 권력관계의 영향을 받고 있다. 지역적인 의제를 달성하려면 기존에 보수적이라 평가되는 사람들과도 연계를 맺어야 하고 그들의 공감을 이끌어내야 한다. 이념적인 잣대로 접근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이념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그런 자연스러운 과정을 노동운동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 앞서 말했듯이 풀뿌리운동은 단순히 지역에 기반한 운동이 아니라 주체와 더불어  성장하는 운동이다. 이것은 운동의 방법론으로서 노동운동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성장한다는 건 노동운동의 기본입장이기도 하지만 방법론의 면에서 공장/사무실/일터에서만이 아니라 지역/삶터에서도 그런 성장의 방법이 필요하다. 지역주민들을 대상화시켜서 주민들을 위해 펼치는 사업이 아니라 노동자와 주민이 뒤섞여서 서로의 삶을 고민하는 장이 필요하다. 이미 어떤 사건이 터진 후 만나는 게 아니라 어떤 사건을 함께 일으키는 공동의 주체가 되기 위해 서로의 일상적인 관계를 강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건 서로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고, 그런 깨달음이 가능하려면 서로에 대한 편견을 깨고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솔직하게 만나고 있나?

그리고 연대전략이 지역적인 의제를 해결했을 때 그 성과를 반드시 그 지역사회에 남겨야 한다. 보통 어떤 성과가 있으면 주요한 단체가 그것을 독점해 버리는데, 그러면 그 다음에 더 큰 연대의 틀이 보통 만들어지지 않는다. 성과를 남기고 지역사회를 성장시키는 만큼 같은 편이 늘어나기 때문에 성과를 지역에 남기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면 노조에게도 유리하다. ‘거점’이라 부르려면 정말 중요한 지점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럴 준비는 되어 있나?

- 민중의 집이 주요한 지역화 전략으로 이야기되는데, 한국사회에서 정말 효과적일지 따져봐야 한다. 거점을 공간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고, 이것은 지역사회를 장악의 대상으로 보는 편견과 무관하지 않다. 민중의 집을 만들면 정말 그 일대가 해방구가 될까? 차라리 괜찮은 자영업 가게들의 단골이 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민중의 집은 노동자들이 식사하고 토론하고 오락을 즐기며 사회적인 연대를 형성하는 공간, 노동자들의 고립감을 극복시켰던 공간인데, 한국의 민중의 집이 그런 공간이 되고 있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아울러 유럽의 민중의 집은 노동자들이 협동조합을 경험하는 공간이기도 했는데,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실패했다는 게 아니라 민중의 집에 들어가는 에너지만큼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냉정하게 따져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공간을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공간을 다양한 관계들로 채워야 하는데, 그런 관계망을 만들고 확장시키는 활동에는 많은 사람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새로운 교육과 활동보다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에서 할 수 있는 부분들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예를 들어, 금속노조가 알바청(소)년들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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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5.01.16 10:24

이제 좀 진진하게 마인드프리즘 이야기를 해야겠다.

왜냐하면 오늘 2명 중 계약직 노동자  중 1명이 해고, 사측은 계약 종료, 되기 때문이다.

이 한 명은 와락에서 정혜신씨와 함께 치유활동가로 일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오늘부터 마인드프리즘 노동조합은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인다.


마인드프리즘의 상황을 보면, 그동안 내세웠던 해고노동자의 치유나 사회적인 가치와 무관한 민낯이 드러난다.


몇 가지 궁금증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혜신 전 대표는 이번 일에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회사의 부채가 30억원 정도인데, 이 부채는 정혜신 전 대표가 사임의사를 밝힌 올해 5월부터 누적된 게 아니라 회사 설립 이후부터 누적된 부채이다.

정혜신 전 대표는 얼마 전(2014년 12월 26일), 타이밍이 참 공교로운데, 한겨레신문 인터뷰에서 마인드프리즘과 관계를 끊었다고 이야기했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기사를 인터뷰한 기자가 서두를 이렇게 시작한다. “정혜신 이명수 부부는 심리치유 전문기업 ‘마인드프리즘’으로 유명합니다. 당연히 아직도 겸직하는 줄 알았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세월호 사건 이후 완전히 접었다고 합니다. 이제 안산에서의 치유활동에 모든 것을 걸었다고 합니다.”

세월호 가족의 치유에 모든 걸 거는 건 좋다. 하지만 자신과 함께 몇 년 동안 마인드프리즘을 이끌어온 노동자들은? 왜 노동자들이 그 부채를 짊어지며 해고되어야 하나?

정혜신 전 대표가 사임한 뒤, 노조의 성명서에 따르면, “지난 해 7월에는 직원의 1/3을 권고사직으로 감원하겠다는 통보가 있기도 했으며, 결국은  희망퇴직 형식으로 직원 28명 중 8명이 마인드프리즘을 떠나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희망퇴직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경영진들은 그동안 마인드프리즘이 지켜왔던 ‘사람에겐 마음이 있다’는 가치를 훼손하며 일방적인 부서개편을 단행하고 소통을 거부했습니다. 급기야는 성과가 증명되어 계약갱신이 예상되던 심리치유 활동가에 대해서 계약종료 통보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한다. 6월 사임 이후 이렇게 일이 진행된 것을 정혜신 전대표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을까? 보통 이렇게 일이 진행되려면 이미 안이 나와 있는 것 아닌가?

와락으로 사회적인 명사가 된 정혜신 전 대표는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TV찬조연설을 했다. 그 연설에서 정혜신 전대표는 “해고를 당했다고 다 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많이 죽어가는 거냐, 사람들이 많이 묻더라구요. 사람의 고통이 여러가지가 있지만요. 사람이 진짜 억울하면요. 정말로 살아남기가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또 그 억울함과 함께 세상 누구도 우리 고통에, 내 고통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런 극도의 절망감이 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삶의 끈을 놓게 만드는 거죠.” 마인드프리즘 노동자들의 억울함은 어떻게 할 건가?

지금도 마인드프리즘 홈페이지에는 마인드프리즘 설립자인 정혜신 씨의 이야기가 걸려있다.

만일 이 문제를 피한다면 정혜신 전 대표도 억울함을 치유받아야 하는 노동자를 만든 당사자가 될 것이다.


둘째, 마인드프리즘에 투자를 했던 김범수씨와 그 투자를 통해 공동대표가 되었던 김화영 전대표는 이 문제에 왜 침묵하나?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보통 투자라고 하면 투자에 따른 손실도 함께 부담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오마이뉴스> 기사에 따르면, 카카오톡의 김범수 씨는 회사 지분 70.5%를 인수하며 친동생을 공동대표 자리에 앉히며 투자를 했다. 카카오톡의 투자를 받으며 마인드프리즘은 적자에도 사업을 계속 넓혔으니 이 적자분은 카카오톡에도 책임이 있다. 그래서인지 동생인 김화영 전대표는 사임을 하면서 카카오톡 부채인 26억 5천만원을 책임지기로 하고 현 공동대표에게 지분을 양도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면 회사 부채는 4억 정도인데, 그 정도 규모의 회사에서 이 부채가 직원들을 대거 해고해야 할 만큼 심각한 것일까? 김범수 씨와 김화영 전대표가 우리는 손을 뗐으니 상관없다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새로운 공동대표는 김화영 전대표와 무관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지분을 넘겨준 사람들이 지분을 넘겨받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력이 없을까? 더구나 현 공동대표인 김창성 씨는 김화영 전대표가 대표를 맡을 때 함께 들어온 사람인데?

심지어 김범수 씨는 2013년 정혜신 전대표와 ‘1000만 힐링 프로젝트’에 나선다며 기자회견을 열고 “돈이 아닌 사회공헌을 위해 시작한 일이다. 국민에게 자기 자신을 만나게 해주고 싶어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 발언에 대한 책임은 없나? 결국 자기 기업 이미지만 좋게 만들었다는 것인데....


셋째, 현 공동대표는 사안을 해결할 의지가 있나?

<오마이뉴스> 기사에 따르면, 현 공동대표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회사 경영상 적자가 계속되던 중 사업 규모 대비 높은 인력 숫자 등 구조적 문제를 해소하려고 지난해 희망퇴직을 실시한 건 사실’이라면서도 ‘그 과정에서 팀장이나 직원 대표단과 협의했지 일방적으로 진행한 건 아니다’라고 밝혔다.” 따져보면, 희망퇴직은 현 공동대표가 취임하기 전에 벌어진 일이기에, 본인들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말할 사안은 아니다. 그리고 ‘협의’하며 진행한 일이었다고 하면서 지난 1월 6일 “ '계약직 고용 지속' 등을 요구한 직원들에게 서면 경고장을 발부하며 맞대응했다.”(<라포르시안> 기사) “마인드프리즘 사측은 지난 6일 직원들에게 "회사 직원들 간의 불신을 선동하고, 회사의 신인도를 훼손하는 등 복무규율을 위반했다"는 내용의 서면 경고장을 발부했다.”(<프레시안> 기사) 이건 사측이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의사가 없음을 뜻한다.

현 공동대표는 마인드프리즘 창립 멤버인 박인정 씨와 김화영 전 대표와 함께 입사한 김창성 전 마케팅팀장이다. 언론과 인터뷰를 한 것은 김화영 전대표와 함께 입사한 김창성 대표이니,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경영마인드만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혜신 전대표와 함께 마인드프리즘을 만든 박인정 대표는 어떤 입장일까? 기본적인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면, 정말 공동대표라면 이 문제에 관해 박인정 대표가 입장을 밝혀야 한다.

그리고 “김 대표는 ‘이제 김범수 의장, 정혜신 박사, 김화영 전 대표 세 사람 모두 마인드프리즘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고 하는데, 그게 더 의심스럽다. 왜 이렇게 꼬리 자르기를 시도할까?


노동자들이 억울하게 희망퇴직을 선택하고 일방적인 구조개편을 받아들이면서도 회사를 지키려 하는데, 사측은 경영적자이니 어쩔 수 없다며 해고를 밀어붙인다. 노동조합에게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하는데, 누가 정말 마인드프리즘이라는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킨 걸까? 현 공동대표야말로 마인드프리즘의 명예를 실추시킨 사람들이고, 정혜신, 김범수, 김화영 씨는 이런 사태에 책임을 통감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사안이 어떻게 되는지 끝까지 지켜 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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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4.12.23 08:33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에 정당해산결정을 내렸다. 4월 16일, 바다 속으로 침몰한 세월호 사건의 진실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제 18대 대통령선거에 개입했던 국가정보원과 군사이버사령부의 선거개입과 관련된 진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고 책임자들도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12월 9일 대통령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는 ‘지방자치발전 종합계획’을 발표하고 특별시와 광역시의 자치구 기초의회폐지, 단체장과 교육감의 선거방식 개악을 발표했다.

 

2014년 12월 5일, 대한항공 부사장은 항공기를 회항시켰고, 2013년은 남양유업, 서울우유 등의 ‘갑질’로 장식된 한해였다. 12월 12일 서울고등법원은 이마트가 대형마트가 아니기에 의무휴업일 지정 및 영업시간 제한이 위법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4년 11월 10일 대학생협의 모범이던 세종대학교생협은 비리재단에 밀려 사업종료를 공지했다. 지난 5년간 국내 10대 재벌가문 자산이 430조원이나 늘어나 1,240조원에 달한다. 지금 국회는 사회적경제기본법을 심의중이고, 12월 2일 박근혜 정부는 2018년까지 165조원을 투자하는 지역발전 5개년계획, 소위 제2의 새마을운동을 국무회의에서 확정했다.

 

사회운동, 풀뿌리운동이 여러 성과를 거뒀다고 얘기되는 한국사회의 거시적인 모습은 이렇다. 사회가 변했다고 자평하는 동안 고공농성, 철탑농성, 수십 일의 단식농성, 엄청난 손해배상은 일상의 풍경이 되었다. 우리가 원한 세상은 이런 것이었나?



1. 현실을 보며 드는 물음들


- 생활정치는 정말 생활 속의 다양한 문제들을 정치적인 의제로 만들었나?

- 거버넌스는 정말 대등한 관계에서의 협력인가?

- 마을운동은 취향의 공동체를 넘어서 공존하는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나?

- 사회적 경제는 진정 경제활동에서 이윤보다 사회적인 가치를 우선시하고 있나? 경쟁보다 협력을 앞세우고 있나?

- 협동조합은 협동하는 문화를 확산시키며 생산과 소비의 연계를 강화시키고 있나?

- 시민사회운동은 수도권 중심을 벗어나고 있나?

- 시민사회단체는 몇몇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시민들의 도구가 되고 있나?

- 시민사회단체의 활동은 노동이 아니라 활동인가?

- 시민사회단체는 관료주의에서 자유로운가?

- 시민사회운동은 자기 진영의 논리에서 벗어나 소통하고 있는가?

-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그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얼마나 이야기하고 있나?



2. 다른 세상으로 가기 위한 열쇳말


- 자본주의, 사회주의, 이분법을 극복해야 한다는 건 두말 할 나위 없다. 그런데 극복한다는 것의 의미가 뭘까? 원론이 아니라 한국 현실에서 두 이념이 어떤 문제와 한계를 가지는지를 파악하고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을 찾는다는 의미일 텐데, 지금까지 우리는 그런 과정을 밟아왔을까?

 

- 그동안 풀뿌리운동은 대중이 스스로 조직되며 삶과 공간을 변화시키는 과정이라는 점을 강조했는데, 이 역시 한국사회라는 특수한 현실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만 한다. 기존의 사회운동이 한국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려고 노력해온 만큼 풀뿌리운동도 나름의 사회를 분석하는 틀을 가졌던가를 반성해볼 필요해볼 필요가 있다.

 

- 4주제 연구모임이 그동안 아나키즘, 생명운동, 에코 페미니즘, 사회운동의 영성이라는 관점을 검토한 것도 이런 필요성 때문이다. 각 관점이 같고 다른 면을 가지지만 공통적이라고 여겨지는 열쇳말을 배치하자면 다음과 같다.

 

- 관계성: 전일성, 상호성, 부분과 전체의 연계성, 연방, 연대, 생산과 소비의 연계, 교감, 깨달음, 집단적 영성

- 다양성: 탈중심, 상호적 권리, 평등, 성찰, 중립성과 객관성 비판, 국가주의 비판

- 자율성: 자치, 자급, 자결권, 삶에 대한 책임의식, 자기 목소리, 임금제도 비판, 너를 위한 운동이 아닌 나를 위한 운동, 가부장제 비판

- 순환성: 성장 포기, 사용가치의 우선성, 공유, 사적 소유권 부정, 소농, 소비주의 비판

 

- 이런 것이 가능한 장으로서 마을, 공동체 등이 대안으로 얘기된다. 근대국가와 자본주의 시장은 이런 열쇳말과 대립되는 구조이기에, 풀뿌리운동은 이를 넘어설 방법과 과정을 지속적으로 논의해야 옳다. 특히 한국사회의 국가와 자본은 훨씬 더 기득권화되어 있고 억압적이며 중앙화되어 있어서 풀뿌리운동과 양립하기 어렵다. 강력한 국가와 자본에 맞서려면 다양한 실천과 연대가 필요할 텐데, 풀뿌리운동은 그동안 어떤 고민과 실천을 보여줬나? 주민조직화, 생활정치는 마치 주민운동의 몫인 양, 생산과 소비의 조직, 협동운동은 마치 사회적경제 조직의 몫인 양, 서로 몰라라 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이런 흐름을 자기 조직의 규모를 확대시키는 쪽으로 활용했을 뿐 그 몫 자체를 늘리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 운동의 가짓수는 늘어나지만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아 지속가능하지 않은 데도 마치 지속가능한 것처럼 운동이 마취제를 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부나 재벌을 감시하고 비판하며 잡은 손 놓고 후려쳐야 할 때에도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대충 뭉뚱그리는 것은 아닌가. 단순히 정부나 재벌이 정서적으로 싫어서가 아니라 자기 운동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데도 이를 방치한다면 운동의 기반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운동은 단순한 방법론이 아니라 자기 가치를 가진 운동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는 방법만 이야기하고 사례만 강조하지 가치와 그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다. 운동과 사회의 위기는 여기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 풀뿌리운동은 스스로 대안적인 생활양식을 실천하고 이를 심화시키는 과정으로서의 운동을 지향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에 대한 분석도 필요하고 사회운동가 개인의 영성을 형성하고 심화시키는 과정도 필요하다. 목적과 수단을 일치시키는 조직운영과 내용 방식에 대한 자각도.

 

- 한국사회에서 이런 키워드들은 현재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풀뿌리운동은 이런 키워드들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활동을 펼치고 있을까? 그 활동 속에 이런 관점들은 얼마나 투영되고 있을까?

 

- 이런 관점들은 성장주의, 국가주의, 자본주의, 가부장제, 식민주의, 환원주의, 교조주의를 비판하는데, 우리 운동 속에는 이런 문제들이 없을까? 시민사회운동은 이를 점검할 수 있는 내부장치를 가지고 있을까?



3. 다른 세상을 고민하기 위한 질문


- 제도정치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제도정치를 회피하는 것은 아닐 텐데, 우리도 어느 순간 정치적 중립성의 신화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의 경계를 너무 분명하게 정해버린 건 아닐까? 최근 박원순 시정에서 시민단체가 이중대 역할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는데, 풀뿌리운동의 거버넌스는 어떻게 실현되어야 할까? 협력과 파트너십을 당위적으로 강조하면서 제도정치를 압박할 수 있었던 감시와 비판기능이 어느 순간 퇴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생활정치의 동력이 빠른 속도로 제도화되고 있다면, 그 가치의 올바른 실현을 위해 제도정치에 개입하는 것이 응당 필요하지 않을까? 제도정치에 개입할 경우 풀뿌리운동은 자기만의 실력과 전술을 가지고 있을까? 제도정치에 개입하려면 그것을 위한 제도 자체를 바꾸는, 경기규칙을 바꾸는 노력이 필요할 텐데, 이 부분은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 자본주의와 성장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이 말로만 그치지 않으려면 그만한 실력을 갖춰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실력을 쌓고 있나? 소비자들은 생산자들의 삶에, 생산자들은 소비자들의 생활에 서로 관심을 가지고 있나? 풀뿌리운동은 노동운동에, 노동운동은 풀뿌리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나?

 

- 우리는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의 상을 구체적으로 만들고 있나? 주민/시민들이 피부로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삶의 틀로 만들고 있나? 운동이 추구하는 대안과 가치를 개인의 삶과 조직의 운영으로 구현하지 못한다면 공동체의 관계망이 확대되고 심화될 수 있을까? 활동가들은 자기 삶을 가치대로 변화시키고 있나? 위계적이고 관료화된 조직운영이 줄어들고 운영주체가 개방되어 늘어나고 세대나 직책에 구애받지 않는 평등한 운영방식이 확산되고 있나?

 

- 우리는 공유의 기반을 만들고 있는가? 많이 얘기하는 네트워크도 일종의 공유물일 텐데, 적절히 공유되고 있을까? 관계성과 상호성을 실현하는 네트워크는 기성사회로 흡수되지 않는 관계망을 만드는 것인데, 우리는 그런 관계를 만들고 있나?

 

- 집단화된 다수가 실질적인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끼리끼리의 정치, 끼리끼리의 문화를 극복할 수 있는 실천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사회운동의 역사가 길어질수록 구세대와 신세대의 소통가능성이 낮아지는데, 이런 틈을 좁힐 방법을 개발하고 있을까? 민주적이고 평등한 의사소통이라는 가치를 실질적으로 구현할 방법을 만들고 있을까? 활동가 개인과 조직에는 어떤 영성이 필요할까?

 

- 서울 중심의 운동에서 벗어나려면 주요 운동조직이 서울을 떠나는 것도 방법 아닐까? 공공기관도 이전하는데 시민사회조직이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그 내부에 어떤 다른 욕망들이 자리 잡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이렇듯 분열된 존재인데, 대중의 분열을 비판할 수 있을까?



4. 개인적인 고민들


- 제도가 문제라면 그 제도를 바꿀 수 있는 정치력을 만들어야 한다. 홀로 그 몫을 담당할 수 없다면 당연히 그 목적에 동의하는 주체들이 손을 잡아야 한다. 활동가들조차도 정치를 갈등요인으로만 보고 회피하려하는데 갈등은 인간사의 당연한 요소이고 이를 해결하면서 공동의 목적과 생활이 강화된다. 갈등의 제거가 아니라 갈등의 조절이 중요한데, 정치가 이 과정을 맡는다. 제도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만큼 정치적인 힘을 구성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과정을 제도화로 넘기면서 그 제도가 알아서 좋은 방향으로 가길 기대하는 것은 운동이 무모함을 넘어 무책임함을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 진보정당을 드러내놓고 지지하거나 스스로 정치적인 역할을 맡아야 하지 않을까. 미흡한 점은 고쳐갈 과제이지 배제할 이유가 아니다. 우리 내부에서 관계성이 살아나야 한다.

- 살림살이가 무너지면 여유도 없어지고 참여도 어려워진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럴수록 공동의 대책을 마련하고 정치와 경제의 연관성을 드러내야 하는데 그런 역할이 없다. 지금의 시민사회운동은 각자의 부문운동으로 후퇴해서 딱 고만고만한 이야기만 나누고 있다. 그리고 말만 무성하지 그 말에 힘을 실어줄 움직임은 별로 없다. 주민/시민들에게 자기 것을 내놓으라고 얘기하면서 정작 자기 것은 내놓지 않으니 곳간이 찰 수 있을까? ‘능력에 따라서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져가고’, 우리 자신도 믿지 못하는 것을 누가 믿어줄까? 당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우리 자신을 위해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하면 꼭 우리 일을 팽개치고 다른 일에 헌신해야 하는가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 일과 다른 일이 분리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생각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은 우리 내부에도 있다. 돌아보고 성찰하고 생각해야 운동의 미래가 있다. 다양성은 그런 과정에서만 싹틀 수 있다고 생각한다.

- 거시적인 것을 본다고 주장하는 운동은 미시적인 운동을 무시하고, 미시적인 것을 강조하는 운동은 거시적인 운동을 배제하고 있다. 이런 무시와 배제가 사라지려면 일단은 서로 자주 만나야 한다. 그리고 서로의 접점을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만들어야 한다. 멋지고 폼나는 일, 외부의 사례보다는 자그마한 실천들이 중요할 텐데, 이런 일들이 각 조직은 어느 정도의 역량을 쏟고 있나? 이런 일들이 여러 사업과 활동에서 어느 정도의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나. 자기 사업이나 사업장 외에 관심이 없는 조직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네가 살아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자세를 가지지 않으면 미래를 장담하기 어렵다. 자율성은 나 혼자 살아남겠다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자세이다.

- 어느 순간부터 운동에서 가치의 지속보다 사업의 지속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그러니 서로 가치를 실현하지 못함을 알리바이로 덮어둔다. 평화박물관, 함께일하는재단에서 벌어지는 비상식적인 일들도 그냥 그렇게 무시된다. 강력한 도덕성이 아니라 최소한의 민주적인 절차마저 무시된다면 우리 내부는 너무 허약한 것이고 기득권층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내부의 문제를 감출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떠들고 그 문제가 충분히 논의되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마을 곳곳에서 들리는 문제들에 관해서도 이제는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눠야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아직 다들 쉬쉬 하고만 있다. 우리 내부에 있는 문제들을 도려내고 새 살을 돋게 만들어야, 저들이 우리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고정된 위계, 고정된 가치는 내부를 부패하게 만들고, 시민사회단체는 특정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 내부가 골고루 순환되어야 그 순환의 힘이 사회도 순환시킬 수 있다.

- 살림살이는 개인의 문제로 얘기되고 이는 운동단체 내부에서도 비슷하게 어렵다. 생활고로 어려움을 겪는 활동가들이 있다면 공동의 대책이 필요한데, 그냥 개인의 몫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과 활동을 분리시키는 것이 가능할까? 서울에서 개인의 생활을 꾸리고 가족을 건사하는 것이 불가능한 데도, 개인의 헌신만을 강요할 수 있을까? 실무자의 저임금이 활동가의 헌신으로 포장되고 활동가의 답답함이 실무자의 업무능력으로 평가되는 시점에서, 노동과 활동은 서로에 대한 알리바이로 활용될 수밖에 없다. 그 경계를 넘어설 힘은 그것이 노동이냐 활동이냐를 따지고 규정하는 것보다 활용할 수 있는 공유물을 늘리고 그것의 민주적인 운영을 보장하는 것일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그런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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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4.10.22 08:53

1. 들어가며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던 5월 19일, 그 날로 예정된 토론회가 취소되었다. 사실 그 토론회는 우리 권력의 속살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토론회였다. “수상재난 상황에서의 안전확보를 위한 수영교육 활성화 방안 토론회”, 이 얼마나 솔직한 주제인가. 배가 침몰하면 각자 갈고 닦은 수영실력으로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 이게 우리 현실 아닌가.

 

흥미로운 점은 이 토론회를 주최한 국회의원들이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같은 배를 탄 사람들인데도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비치는 것은 아마도 실제 차이보다 우리의 바람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바람으로 한국사회가 바뀐 적이 있었나?

 

통치성에 관한 사토 요시유키의 분석에 공감하지만 노골적인 한국현실을 분석하는 이론틀이 되려면 보완되어야 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 고민들을 함께 나누려 한다.



2. 공고해지는 기득권과 사업으로 변한 안전


(1) 유체이탈화법과 좀비정치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부의 공식발표라고 할 박근혜 대통령의 5.19 대국민담화는 참사의 원인은 없고 대책만 나열되는 이상한 담화였다.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 이상 지났건만 참사의 원인은 “선박 심사와 안전운항 지침 등 안전관련 규정들이 원칙대로 지켜지고 감독이 이루어졌다면 이번 참사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는 원론에 머물렀다. 반면에 대책은 아주 구체적인데 박근혜 정부는 해경을 해체하고 국가안전처를 신설하고, “우리 사회의 비정상적인 관행과 제도를 바꿔서 정상화하기 위한 개혁작업”을 진행하며,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끼리끼리 문화와 민관유착이라는 비정상의 관행”을 없애고,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끼리끼리 서로 봐주고, 눈감아주는 민간유착의 고리”를 끊고,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관피아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이 대책은 규제를 쳐부술 암이자 원수라고 밝혔던 기존 입장과 큰 차이가 없다.

 

아울러 대국민담화는 “폐쇄적인 조직문화와 무사안일이라는 문제”를 바꾸기 위해 민간전문가들을 대거 발탁하겠다고 밝혔다. 짧은 담화 중에 전문성, 전문가라는 말이 15회 반복된다. 그런데 안전을 점점 더 전문화시켜서 특정한 민간전문가를 참여시키고 대다수 민간의 참여를 배제하는 것은, ‘민간 전문가’를 과장급 이상의 직위에 배치하겠다는 것은 과거 김영삼 정부 때부터 반복되어온 관료제도의 경쟁 논리를 강화시킨다. 더구나 이는 나오미 클라인(N. Klein)이 정의했던 ‘재난 자본주의(disaster capitalism)’, 즉 “비정상적 상황에서 급박하게 추진되는 영리 추구 정부 모델을 국가의 일상적 기능에도 도입하는 것”, “한마디로 정부를 민영화하겠다”는 생각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각주:1]

 

이 대국민담화는 안전을 더욱더 전문화시키고 제도화시켜 정부가 참사를 빌미로 시민의 삶을 더욱더 관리하겠다는 발상이고 국가안전처라는 신설부서 역시 그런 의심을 받고 있다(지금 선임된 처장 역시 군 출신이다). 사고를 참사로 만든 주범이면서도 책임의 인정 없이 관리대책만 나열한 이 담화는 ‘유체이탈화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문재인 국회의원도 그 다음날 이를 비판하는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특별성명은 한국사회가 박정희 시대로 회귀한 것 같다고 질타한 뒤 “돈이 먼저인 나라에서 사람이 먼저인 나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별성명은 규제완화를 비롯한 경제민주화의 후퇴에서 참사의 원인을 찾으며 “가장 안전한 사회는 ‘민주주의’입니다”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대책도 부처의 신설이나 전문가 활용보다 “여야는 물론 시민사회까지 함께 참여”해야 하고, 수명이 다한 노후 원전의 가동을 중단시키는 등 가시적인 노력을 먼저 보이라고 주장했다.

 

이 특별성명은 정당해 보인다. 그렇지만 이 특별성명 역시 묘한 유체이탈화법의 경향을 띤다. 왜냐하면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에서 민주당은 다수당이 아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군소정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창 신자유주의와 규제완화가 시행될 때 민주당은 무엇을 했었나?[각주:2] 그리고 문재인 국회의원은 노무현 정부 시절의 제주해군기지나 부안/경주방폐장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니 민주주의를 문제삼을 자격은 문재인 의원에게도 부족하다.

 

박근혜 대통령과 문재인 국회의원의 연설은 다른 듯 보이지만 묘한 공생관계를 감추고 있다. 문민정부라 불렸던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노선, IMF사태를 빌미삼아 금융/공공부분을 민영화시켰던 김대중 정부, 자유무역지대(FTA) 전략을 세웠던 노무현 정부, 그런 기반을 딛고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등장하고 강화되고 있다는 공생관계 말이다. 그러니 누구도 이 정부 이후를 자신할 수 없다.


(2) 안전과 건설의 지방선거


세월호 참사 이후 6.4 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지방선거임에도 초미의 관심사는 서울시장 선거였는데, 이명박 이후 한국 자본가를 대표하는 정몽준 국회의원이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기 때문이다. 정몽준 후보는 세월호 참사를 거론하는 것보다 “현재의 생활이 힘들고 장래가 불안한 시민에게 일자리는 최고의 복지”라고 주장하며 “서울로부터 3시간 비행거리에는 15억 명이 살고 있습니다. 15억 명이 찾아오고 싶은 서울, 장사가 잘 되는 서울, 청년들의 일자리가 늘어나는 서울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안전을 경제로 전환시키는 프레임, 한국 선거에서 잘 먹히는 프레임을 만들고서도 정몽준 후보는 선거운동과정에서 박원순 시장의 문제점을 드러낸다며 ‘불안한 서울’을 주로 언급했다. 농약급식, 지하철 공기질 등을 문제삼고 협동조합/마을공동체사업 폐지 등을 얘기하다 정몽준 후보는 네가티브 선거라는 역풍을 맞았다.

 

반면에 박원순 후보는 서울시정의 기조를 ‘안전·복지·창조경제’라고 정의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사고가 일어난 이후 피해를 최소화하는 ‘재난 골든타임 목표제’”라며 세월호 참사를 활용했다. 12대 핵심공약에서는 ‘1. 안전특별시 서울, 2. 어린이 안전도시 서울, 3. 주택안심 서울’처럼 안전과 안심이 전면에 등장했고, 60대 정책공약에서도 “사람중심의 안전패러다임 전환”, “시민의 안전이 보장되는 안전마을 50곳 만들기” 등 안전이 강조되었다. 박원순 후보는 안전을 중요한 화두로 내세우고 활용하며 선거를 이끌었는데, 이 때의 안전은 정부가 시민의 삶을 안전하게 ‘관리해주겠다’는 언술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특정한 가치나 삶을 좋은 삶으로 전제하고 그 삶을 확산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특히 이 안전담론은 여전히 노동을 배제한다. 예를 들자면, “시민을 위한 안전지하철! 노후차량‘노후시설 전면 교체”는 있어도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시키겠다는 내용은 없다. “차량 노후화-인력감축-비용절감 위주 경영”이 전형적인 사영화의 과정인데, 박원순 후보의 공약에서는 시설 문제만 부각된다. 그리고 박 후보는 향후 가장 불안요인이 될 핵발전소정책에 대한 반대의지도 밝히지 않았고, 적자와 사고를 부르는 경전철 사업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외려 “창조 전문인력 10만명 양성, 공공형 사회․복지서비스 좋은 일자리 5만개 창출, 맞춤형 여성일자리 10만개 창출”같은 모호한 노동정책이 함께 등장한다. 창조 전문인력, 좋은 일자리, 맞춤형 여성일자리가 어떤 것인지를 지난 서울시정을 통해 유추한다면, 이 일자리들은 최저임금에 가까운 시급과 단기고용(11개월 이내) 일자리인데, 정말 건강하고 안전한 노동이 가능할까?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와 박원순 시정의 창조경제는 얼마나 다를까?

 

또한 선거를 통해 드러난 안전담론은 안전을 내세워 시민의 삶을 관리할 뿐 아니라 이를 자본축적의 기회로 삼으려 한다. 그런 점에서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은 서로 공생관계에 있다. 예를 들어, 세월호 참사를 당한 안산시와 경기도가 총 900억원의 국비지원사업 추진을 밝히면서 안전체험테마파크 조성, 글로벌 안전시범도시 구축, 수도권 규제완화특별지구 지정 등을 내세운 것은 안전이 건설자본에겐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을 뜻한다.

 

안전을 내세운 여러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지만, 기득권들은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결탁되고 있다. 한국사회의 안전담론은 경쟁과 배제라는 신자유주의 권력 또는 환경개입권력, 즉 “개개인에게 직접 개입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환경에 개입해 그 게임의 규칙을 설계함으로써 환경의 최적화를 꾀하고자 하는 권력”[각주:3]의 성격과 무관하진 않지만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물론 현실에서는 규율권력과 환경개입권력이 복합적으로 작동하지만 한국의 통치는 노골적인 이해관계를 감추지 않고 그것을 정책으로 관철시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특히 한국에서 여당/야당은 서로를 뜯어먹으려고만 하지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 생존에의 욕망만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좀비정치’이다.



3. 한국사회의 특수성은 무엇인가?


(1) 보이지 않는 강한 국가와 고착권력


국가가 자본과 결탁해 노골적으로 이해관계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은 어렵게 증명하지 않아도 신문기사만 몇 개만 검색해도 나온다. 핵발전소 납품과 관련된 비리, 4대강 사업과 관련된 비리 등 많은 사건들이 이미 드러났다. 그리고 철도나 의료 등 한창 논쟁이 되고 있는 민영화 문제는 중요한 공기업이나 비영리법인들이 민간자본에게 매각되고 흡수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을 ‘국가나 공공성의 민영화’로 볼 것인가? 물론 민영화가 맞다. 그런데 민영화가 되었다고 해서 국가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병참이나 전쟁까지 민간기업이 담당하는 시대이지만,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알리바이이기도 하다. 민간이 철도나 의료, 병참을 관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운용하는 법적, 제도적 장치는 여전히 국가의 권한이다. 나오미 클라인의 '재난자본주의'도 국가와 자본의 혼성, 뒤섞임을 뜻하지 한 방향으로의 이전을 뜻하지 않는다. 사실 재난자본주의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자유주의나 신자유주의가 ‘작은 정부’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강한 정부’를 요구하는 것도 바로 그런 현실적인 필요 때문이다.

 

2014년 5월 29일 발표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법률지원 특별위원회’의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17대 과제 중간검토 보고서」는 진상규명과 관련된 많은 질문들을 담고 있다. 이 「보고서」를 보면 참사 이전과 사고 당시, 사고 이후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이 잘 드러난다. 여객선 안전검사기준이나 차량적재기준, 선박연령기준, 안전점검기준, 선박운행기준 등은 정부의 소관이고, 부실한 관리감독의 원인인 해피아(해양수산부+마피아)나 해양경찰의 안전관리, 해양사고에 대한 정부의 대응능력, 재난관리시스템 역시 정부의 소관이다. 더구나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의 언론통제 및 사건은폐, 유가족에 대한 감시와 시위를 벌인 시민들에 대한 과도한 탄압, 전문가들의 개입 차단, 수사과정에서의 의혹 등은 정부가 생각보다 훨씬 넓은 영역에 개입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즉 민간영역이지만 여전히 그 운영과 관련된 규칙은 정부의 권한에 속한다. 따라서 국가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7개국의 민영화 과정을 추적한 다큐멘터리 <블랙딜>을 보면, 민영화 과정 뒤에는 언제나 정부와 기업의 검은 뒷거래가 있었다. 자연스러운 민영화란 환상이고, 민영화의 다른 이름은 부패이다. 한국이 식민지,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과대성장국가’(overdeveloped state, 함자 알라비H. Alavi의 개념)가 되었다는 점을 무시하면 안 된다. 복지국가와 국가의 강화를 외치는 목소리들이 있지만 자본과 결탁한 부패한 관료제도가 그런 역할을 맡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국가나 통치에 관한 분석이 간과하는 것은 그 시스템을 작동하는 관료제도이다.

 

또한 한국사회에서는 안전성의 기준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사실상 안전성을 논할 수 있는 기본정보와 기회 자체를 얻기 어렵다. 예를 들어, 핵발전소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민간의 접근이 차단되고 진상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아직도 전혀 밝혀지지 않는 의혹과 진상규명 요구는 세월호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다. 사건/사고가 터질 때마다 정부는 은폐와 여론통제, 폭력대응이라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이 면담을 청했을 때 드러났듯이, 정부는 ‘순수한 시민’이라는 자의적인 잣대를 활용해 시민/비시민으로 구분하고 비시민들을 고착시키고 있다. 가만히 있으라는데 가만히 있지 않으면 과거처럼 빨갱이로 몰려 잡혀가진 않지만 종북(從北)으로 몰려서 고립된다.

 

정보를 공개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정부사업은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폭력과 다를 바 없다. 밀양송전탑이 그 전형이다. 정부는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4개 면의 농성장을 감시하고 철거하기 위해 투입된 경찰은 총 38만1000여명, 숙식비는 99억600만원에 달했다. 경찰이 직접 폭력을 행사해 농성장을 철거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강제로 끌어냈다. 2011년 1월의 용산참사에서 그러했듯이, 경찰과 용역의 경계가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국가와 경찰이 일체가 된 근대의 경찰제도에서 경찰이란 단순히 법[법률]을 적용하는 법 보존적 폭력일 뿐만 아니라, 정부에 의한 행정명령의 공포와 일체를 이루는 방식으로 ‘법을 발명하며’ 그것에 의해서 안전을 확보하고자 하는 기관”[각주:4]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여전히 강력한 국가가 민영화라는 가면 뒤에 숨어 자본과 거래하며 이익을 취하고 이에 관한 정보와 개입을 통제하며 노골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한국사회의 특징을 뭐라 부를 수 있을까? 최근 집회/시위현장에 자주 등장하는 “고착시켜”라는 경찰의 용어를 본 따 ‘고착권력(固着勸力)’라 부를 수 있다. 정부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 감금당하고 고립된다. 집회는 금지되지 않지만 집회장 주변은 경찰버스로 꼼꼼히 차단되어 선전과 항의라는 집회의 목적은 금지된다. 감금이지만 감금이 아니기에 불법이 아니라고 주장되는 고착, 폭력으로 고립시킴으로써 의지를 꺾고 능동성을 가로막는 고착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어떤 참사에도 가만히 있으라는 정부의 지시 역시 고착 아닌가.


(2) 노동을 배제하는 자본의 노골적인 폭력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날이자 원자력안전위원회가 고리원전 1호기의 재가동을 승인한 날이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이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노후한 선박, 인건비 절감을 위한 비정규직 고용, 감시감독의 부재 등이 기본적인 원인이고[각주:5], 핵발전소들은 이런 문제를 똑같이 안고 있다. 핵발전소의 수명을 넘긴 노후시설, 납품비리와 수많은 사고, 감독기관의 이해관계집단화(핵마피아), 원전노동의 하청구조 등은 임박한 참사를, 엄청난 파국을 예고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은 여러 곳에서 반복적으로 지적되었고, 그와 비슷한 원인들이 철도, 지하철, 병원, 에너지, 공항, 건설 등 곳곳에 존재하고 있음도 지적되었다.[각주:6] 그리고 실제로 서울시장 후보였던 정몽준이 최대주주인 현대중공업에서는 지난 3월부터 한달 반 남짓 동안 7명의 사내하청노동자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적절한 안전장치가 없고 현장에 관한 정보를 제대로 알지 못한 탓이었다. 하청노동자는 현장의 안전성에 관해 묻거나 안전장비를 요구할 권리를 전혀 누리지 못한다. 사회에서 수많은 안전대책이 논의되고 있지만 위험한 공장과 사무실에서 노동자의 안전은 논의테이블에도 오르지 못하고 있다. 위험에 가장 노출된 노동자들은 정작 안전에 대한 권리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있다.

 

노동자 개개인이 요구를 하지 못하면 조직된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노동조건과 관련된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외려 현실에서는 노동조합이 체계적으로 파괴되고 있다.[각주:7] 대표적인 회사가 돈을 받고 노조를 파괴하는 전략을 짜는 노무법인 <창조컨설팅>이다. 이들이 노조를 파괴하는 전략은 다음 순서를 따랐다. ‘회사의 갑작스런 교섭거부와 단협해지 ― 파업유도 ― 사측의 직장폐쇄 ― 용역깡패 투입 ― 노조에 대한 대량해고와 대량징계, 막대한 손해배상 요구 ― 조합원탈퇴 종용 ― 탈퇴 조합원 중심으로 기업노조 창립, 배타적 교섭권 부여’. 이런 전략은 효과적이었고, 많은 노동조합들이 이런 전략에 무너졌다. 그 성과를 인정받아 <창조컨설팅>은 2011년 1월부터 2012년 8월까지 총 23개 기업에게 무려 82억 4,500만원을 받았다.

 

이처럼 한국의 통치에서는 규칙을 설계하는 것보다 여전히 개개인과 개별 사안에 직접 개입해서 폭력을 행사하고 배제하는 방식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 이 통치를 뭐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법으로는 분명히 불법이지만 검찰, 노동위, 기업주가 힘을 합쳐 규칙을 무력화시키는 사회에서 통치는 폭력과 얼마나 다를까(만도노조와 SJM노조를 습격했던 <컨택터스>의 유니폼과 장비는 공권력과 다를 바 없다).

 

직접적인 폭력을 경험하지 않더라도 노동조합의 노동자들은 끊임없는 손해배상과 민사소송에 시달린다. 2003년 타워크레인 위에서 쓸쓸히 죽음을 택했던 김주익위원장은 유서에 “그래 당신들이 나의 목숨을 원한다면 기꺼이 제물로 바치겠다. 하지만 이 투쟁은 반드시 승리해야만 한다. 잘못은 자신들이 저질러놓고 적반하장으로 우리들에게 손해배상 가압류에 고소고발에 구속에 해고까지 노동조합을 식물노조로 노동자를 식물인간으로 만들려는 노무정책을 이 투쟁을 통해서 바꿔내지 못하면 우리 모두는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승리할 때까지 이번 투쟁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같은 해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씨도 “두산이 해도 너무한다. 해고자 18명, 징계자 90명 정도. 재산가압류, 급여가압류, 노동조합 말살 악랄한 정책에 우리가 여기서 밀려난다면 전사원의 고용은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두산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랄한 인간들”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손해배상과 가압류는 계속 이어져 2014년 2월까지 각 노조가 청구받은 금액을 합하면 1,600억원이 넘는다. 물리적인 폭력과 돈의 폭력이 뒤섞여 노동자들의 삶을 고공농성과 죽음으로 몰아간다.

 

노동자가 돈과 고립에 눌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핵사고의 전례없는 죽음이 두렵긴 하지만 일상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도 두렵다. ‘배제’라는 단어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못하는 이 죽음은 우리 삶의 뿌리로 파고든다. 안전을 비용으로만 계산하는 기업이[각주:8], 노동자의 발언 자체를 금지하고 농민의 삶을 고착시키는 권력이 안전을 내세우는 상황이다. 깔끔한 안전권력을 논하기엔 우리 사회에는 피비린내가 짙게 배어 있다.

 

노동자나 주민의 활동은 불법이 아니건만 막대한 손해배상과 용역깡패의 폭력은 노동자와 주민을 꼼짝 못하게 고착시킨다. 노동자와 주민의 관계마저 단절시키고 단속한다.[각주:9] 기업이나 송전탑, 핵발전소에 관한 정보는 접근 자체가 어렵고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그 진상에 접근하기 어렵다. 여전히 권력은 은폐하고 규율하며 폭력을 행사한다.

 

이런 상황이니 민중의 권력이 다시 그 힘을 제자리로 찾아와야 하고, 그럴려면 국가와 자본의 연합전선에 맞설 힘이 필요하고, 그런 점에서 국가를 활용하지만 국가권력을 강화시키지 않는, 제도정치를 활용하지만 그것에만 의존하지 않는, 집권의지를 갖지만 분권을 실현하려는 비(非)국가 전략이 중요하다고 본다.


(3) 안전담론과 안보담론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안전과 치안이 안보(安保)담론과 결합된다.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냉전상황은 위기의 내용이나 과정과 상관없이 정치, 경제,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는 수단이 된다. 실제로 국정원의 선거개입이나 간첩조작과 같은 치명적인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박근혜 정부는 안보담론을 활용했고 세월호 참사도 그런 사건을 은폐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안전이 화두로 떠오른 6.4 지방선거에서도 안전과 함께 활용된 말이 안보였다.

 

종북이라는 낙인은 한국사회에서 안보담론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뜻한다. 이 종북담론은 기존의 빨갱이담론과는 다르다. 빨갱이가 불온한 주체를 호명하는 단어라면, 종북은 그 주체만이 아니라 북을 추종하는 세력(從北)을 뜻한다. 종북은 빨갱이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서 사용된다. 말 많으면 빨갱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정부를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종북이라는 딱지가 붙을 뿐 아니라 비판하지 않더라도 다른 삶의 태도를 보이면 바로 꼬리표가 붙는다. 심지어 밀양송전탑이나 지리산댐, 핵발전소를 반대해도, 세월호 참사를 문제 삼아도 종북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보수파들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개새끼”라고 말하면 종북이 아니라는데, 바로 면전에서 그렇게 얘기하더라도 ‘진심(眞心)’을 문제삼을 수 있는 낙인이 바로 종북이다.

 

안보와 결합된 안전담론은 어떤 주장을 가로막는 게 아니라 현실에 대한 느낌의 발산 자체를 막는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침묵시위에서 드러났듯이 주장 이전에 흐느낌이나 침묵조차도, 노란 리본이라는 소품조차도 이미 불손하고 불온한 것으로 규정되어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된다. 열심히 일하지만 가난하고 열심히 참여하면 고착되는데도, 이 답답함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안보와 결합된 안전담론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의 통치이다. 내부의 적만이 아니라 외부의 적으로 몰아 그 존재 자체를 고착시키려는 이 흐름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고민이다.

 

물론 이런 고착을 뛰어넘으려는 운동도 존재한다. 존재 자체를 고립시키는 고착사회에 맞서 희망버스를 타고 직접 현장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국가와 자본의 폭력은 희망버스를 타고 먼저 손을 잡으려는 사람들조차 고립시키고 경계를 지운다. 나서는 것 자체가 금지되지는 않지만 어느 선을 넘는 순간 고착된다. 누구의 명령에서 비롯되는지도 파악되기 어려운 고착명령은 예외상태의 규칙화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지만 뭔가 고민의 꼬리는 계속 남는다.

 

또한 이런 고착의 흐름에 맞서기 위해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국민대책회의가 구성되고 “존엄으로부터 안전을 세우기 위하여”라고 외치는 존엄과안전위원회가 출범했다. 존엄과안전위원회는 안전한 사회를 위해 당장 실천해야 할 일로 일곱 가지 과제를 요구했다.

 

1. 기업살인법을 제정해야 합니다.

2. 원전사고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 수명이 끝난 노후원전을 폐쇄해야 합니다.

3. 위험작업 중지권을 보장해야 합니다.

4. 생명과 안전에 관한 업무는 외주화를 금지하고 즉각 정규직화해야 합니다.

5. 기업활동규제완화에 대한 특별조치법을 폐기하고 규제완화를 중단해야 합니다.

6. 화학물질로부터 안전하기 위해 주민 알권리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7. 지역안전관리 시스템과 공공다중이용시설 안전에 시민 참여를 보장해야 합니다.

 

과제는 다 나온 듯하다. 문제는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이다. 지금 정부가 이 일곱가제 과제를 순순히 받아들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일곱 과제의 ‘합니다’가 안보담론과 안전담론을 분열시키고 누구를 어떻게 설득하며 조직할 것인가에 관한 방법을 찾아야 현재의 안전담론에 균열을 만들 수 있다. 누구에게 말을 거는가에 따라 호명의 방식이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4. 기민(棄民)과 자립인


사토 요시유키는 발제문에서 히로시마 자유농장의 발언을 인용하며 기민을 얘기한다. 사이토 준이치도 『민주적 공공성』에서 “약자의 기민화”를 우려한다.[각주:10] 그런데 버려진 민중이란 표현은 공공성 강화를 위한 국가의 책임을 자극하긴 하지만 민중의 가진 힘을 제한하는 것이기도 하다. 2014년 1월, 일본 후쿠시마현 이와키시의 활동가들을 초청했을 때[각주:11], 그들은 핵발전소에서 30km 떨어진 곳에 다시 마을을 세우고 있었다. 모든 문제를 후쿠시마로 몰아붙여 배제하려는 정부에 맞서 자립(自立)의 기반을 다지고자 했다. 그러면서 일본 활동가들은 한국의 상황에 굉장히 놀라워했다. 방사능에 그토록 민감한 사람들이 어떻게 저런 핵발전소를 그대로 둘 수 있냐고. 어떻게 시민들이 사는 도심에 핵연료 공장을 세우냐고. 어떻게 마을 한 가운데에 송전탑을 세우냐고.

 

물론 이런 물음이 안전에 대한 갈망을 더욱더 증폭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 갈망은 누군가가 채워줄 수 있는 욕망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준비해야 할 생활이자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토론회에서 현재의 상황에 대한 이런저런 진단이 나오지만 정부에 대한 무기력한 요구나 의지만 드러나는 결의 이상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 생각한다.

 

두려움만으로는 현실의 벽을 뛰어넘을 수 없다. 연대는 가장 절실한 사람들과 손을 잡는 것이라 배웠고 그렇게 생각한다. 앞서 가는 사람들과 손을 잡는 것은 연대가 아니다. 넘어지는 사람을 받치는 것(人)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의식적인 연대이다. 그렇게 의식적으로 손을 잡고 또 잡아야 국가와 자본에 맞서, 외려 그들을 버리면서 우리의 삶을 재구성할 수 있다.

  1. 나오미 클라인, 김소희 옮김, 『쇼크 독트린』, 살림Biz, 2008, 23쪽. [본문으로]
  2. 이병천 등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1997년 위기와 구조개편을 통해 만들어진 신자유주의 수동혁명”이라 평가한다. 이들 정부는 영미식 스탠더드를 추종하는 시장개혁론을 내세우며 개방=선(善)의 등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투기자본인지 생산적 투자자본인지를 묻지 않고 무분별하게 외국자본을 유입시켰다(이병천 등 『세계화 시대 한국 자본주의: 진단과 대안』, 한울, 2007, 23~25쪽) [본문으로]
  3. 사토 요시유키, 김상운 옮김. 『신자유주의와 권력』, 후마니타스, 2014, 71쪽. [본문으로]
  4. 사토 요시유키, 앞의 책, 98쪽. [본문으로]
  5. 김성희, “세월호 대참사와 한국사회, 그리고 노동”, 김철, “박근혜정부의 안전규제완화 및 민영화 정책, 그 쟁점과 대안”, ‘민영화와 위험사회: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말한다.’ 자료집(2014.05.22) [본문으로]
  6. 민주노총 주최 ‘현장에서 바라본 세월호: 진단과 대안’ 토론회(2014.05.29) [본문으로]
  7. 땡땡책협동조합, 『우리, 노동자로 살아가다』, 땡땡책협동조합, 2014 참조. [본문으로]
  8. 김혜진, “사고는 어떻게 참사로 이어지는가?”, 세월호참사국민대책회의 존엄안전위원회 ‘참사를 막기 위한 출발선에 서다’ 토론회 토론문(2014.06.11) [본문으로]
  9. “손해배상에 따라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자신이 가족과 친구에게서 존재감을 상실한 채 ‘쓸모없는 존재’로, 나아가 ‘민폐를 끼치는 존재’로 되어감을 실감하게 된다.”(엄기호, 『단속사회』(창비, 2014), 216쪽) [본문으로]
  10. 사이토 준이치, 윤대석 외 옮김, 『민주적 공공성』, 이음, 2009, 101쪽. [본문으로]
  11. 땡땡책협동조합, 『후쿠시마에서 살아간다』, 땡땡책협동조합, 2014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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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4.09.05 09:30

몇 년 전부터 사회의 공공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여러 단체들에서 갈등이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지향하는 가치가 아름답고 올바르다고 해도 가치를 실현하는 방법이 올바르지 않거나 가치를 사업으로 만드는 의사결정과정이 민주적이지 않다면, 그 단체의 활동이 시민사회를 성장시키기 어렵습니다.

 

갈등한다는 사실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비온뒤에 땅이 굳듯이, 갈등이 잘 조절되고 해결방향을 잡으면 발전에 필요한 거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갈등이 생기고 난 뒤의 과정이 중요할 텐데요, 안타깝게도 지금까지는 그런 과정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로 문제를 제기한 활동가 개인이 단체를 나오거나 문제를 참으며 단체를 다니다보니 정작 문제를 낳은 단체들은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함께일하는재단>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시민의 성금으로 세워진 공익재단인데도 활동가들이 주요한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없고 비정규직으로 채용되고 있으며 재단의 공금이나 자원이 분명한 증빙자료도 없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문제를 바로잡기는커녕 내부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활동가들을 대량 징계하거나 계약만료를 이유로 해고하는 등 노조에 대한 사측의 탄압으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재단을 떠났습니다. 소위 시민사회계의 원로나 명망가로 불리는 사람들이 재단의 이사장과 상임이사 등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데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이런 재단이 10월에 사회적기업월드포럼(SEWF)이라는 행사를 개최한다니 국제적인 망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할 상임이사는 재단 내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민사회운동에 바친 공로를 인정받아 만해실천대상을 받았습니다. 이제 박근혜정부의 불통만을 답답해할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의 불통을 생각해야 합니다. 취약한 모래탑을 쌓으면서 시민사회의 미래를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다행히 <함께일하는재단>의 노동조합이 근 30개월 동안 힘겹게 싸우고 있고,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에서도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그 기세를 이어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홀로 내버려두지 말고 따뜻한 연대의 손길을 보내면 좋겠습니다.


9월 12일(금요일) 저녁 7시 그동안 공익단체들에서 어떤 문제들이 제기되었는지를 함께 알아보고 대책을 세우는 공익단체를 바로 세우기 위한 대책위원회를 제안합니다. 개인도 좋고 단체도 좋습니다.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얘기를 나누고 사이를 돈독히 한다면 뾰족한 해답은 나오지 않더라고 공감을 확산시킬 수 있습니다. 명망가가 아니라 평범한 시민의 힘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을 시민사회 내부에서부터 증명하면 좋겠습니다.


한국의 공익단체는 건강한가? & '바로' 출범식
일시 2014년 9월 12일(금) 저녁 7시
장소 인권중심 사람


19:00 개회 함께일하는재단 노동조합 김창주 위원장
19:15~20:00 사례소개 -함께일하는재단 사례 및 노조투쟁 경과보고
-평화박물관 등 사례 3개
20:00~21:00 토론 고질적인 병폐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토론 진행: 하승우(땡땡책협동조합)
21:00~21:30 바로선언 '바로'의 문제의식과 활동방향에 관한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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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4.08.12 09:51

영화 <블랙딜>을 봤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간단했다. 민영화(民營化)는 시민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고, 기업과 그 시설과 서비스를 기업에 넘기는 권력층에게만 유리하다. 공중의 이익을 해치는 민영화는 사실상 사영화(私營化), 기득권을 가진 몇몇 개인들에게만 이득이 되는 검은 거래이다. <블랙딜>을 보면 그 점이 분명해진다.

 

영화에 공감하든 아니든 많은 사람들은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가’라는 물음 앞에 무기력함을 느낀다. 뭔가 세상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우리가 뭘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하물며 공공성(公共性)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앞에 두니 지금 당장은 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 같고 이 일이 내 일처럼 여겨지지 않으니 관심이 잘 가지도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신경을 쓰든 안 쓰든, 참여를 하든 하지 않든 어떤 결정은 내려지고 그 결정은 우리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민영화를 코앞에 둔 의료만 봐도 그렇다. 복지부가 입법예고한 의료법 시행규칙 개정안은 의료법인이 자회사를 만들어 영리사업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 개정안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의료민영화, 불편한 진실’이라는 동영상을 보면 잘 드러난다(http://www.youtube.com/watch?v=yTs5An6iUas). 그런데 이 결과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일이기 때문에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설마 정부가 그런 일을 하겠어, 그래도 사람이 하는 일인데 그리 할까, 이런 생각은 두려움을 감소시키려는 우리의 바람이다. 하지만 세월호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정부는 그런 일을 하고 기업에게는 사람보다 이윤이 우선이다.

 

이런 파국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정부에 호소한들 지금의 정부는 시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병원에 호소한들 그들은 돈을 버는 사업에 열중할 것이다. 국가-시장-시민사회라는 구도로 현실을 이해한다면, 국가와 시장은 이미 한편이 되어 공공성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결국 시민사회가 함께 힘을 모아 국가와 시장을 압박해야 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정부와 기업의 검은 거래를 막으려면, 일단 정부를 제대로 감시하지 않을까? 민영화가 검은 거래라면 돈을 주는 자와 돈을 받는 자가 분명히 있다. 법안을 추진하는 공무원이 누구인지, 뒤를 봐주는 정치인이 누구인지, 개정안을 근거로 사업을 준비하는 기업이 어디인지, 그 당사자들을 끈질기게 추적하고 이들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일어날 민영화를 막을 수 있다. 이런 역할을 언론사가 마땅히 맡아야 하는데, 한국의 언론은 정부와 기업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으니 그 역할을 가만히 앉아서 기대할 순 없다. 그러니 시민이나 시민사회단체가 자기 분야에서 진행되는 정책결정과정에 관심을 가지는 수밖에 없다. 공공성이라는 추상적인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구체적인 인물이니 그 인물들을 드러내어 검은 거래를 막아야 한다.

 

그리고 중앙정부만이 아니라 지방정부의 담당자들도 추적해서 책임을 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정책실명제를 확대하고 잘못된 정책의 효과에 대해서는 담당자들이 반드시 책임을 지도록 만들어야 하고, 공무원들이 퇴직 후 업무와 관련된 기업에 취직하는 ‘회전문 인사’를 막는 제도를 입법화시켜야 한다. 제도가 중요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니 관료들의 부패를 막는 장치를 강화시켜야 검은 거래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또한 공공서비스라면 그 결정권한이 응당 주민과 시민에게 있어야 하는데, 이들이 부당하게 권한을 남용하는 것이니 관련된 정보를 공개하고 주민과 시민의 의견을 반드시 묻도록 제도화시켜야 한다. 진주의료원 폐원처럼 주민들이 반대하는데 도지사가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못하도록 공공성과 관련된 주요사안은 반드시 ‘주민투표’를 거치도록 제도화시켜야 한다. 주민들에게 정보를 알리지 않고 밀실에서 결정된 정책들은 효력을 발휘할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해야 하지 않을까? 민주적인 공공성이란 함께 논의하고 결정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는 가치이기 때문에 그런 가치를 실현하도록 제도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아울러 민간기업의 부조리를 내부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장치는 노동조합이다. 정부기관에는 정보공개를 청구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있지만 민간기업의 내부정보에는 접근하기가 어렵다. 그런 내부정보를 다루고 공론화시킬 수 있는 기구는 현실적으로 노동조합이다. 그러니 노동조합이 기업 내에서 힘을 갖고 경영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화를 시키고 노동조합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시민사회의 힘을 모아야 하지 않을까? 독일의 노사 공동결정제도(Mitbestimmung)는 직장평의회(Betriebsrat)와 감독이사회(Aufsichtsrat)를 통해 노동자가 기업의 주요한 정책결정에 참여하도록 보장하고 있다. 한국에도 이런 제도가 실현되어야 경제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

 

그리고 민간기업이라 하더라도 시민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업을 하고 있다면 관련 정보를 공개하도록 해야 한다. 내년부터 시행되는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에 대한 법률이나 유해화학물질 관리법은 기업이 지역주민에게 관련된 정보를 고지할 의무를 지우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런 정보들을 시민이 확인하고 감시할 수 있도록 법적인 장치를 마련하도록 시민사회가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가 이런 법과 제도들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설령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단서 조항을 만들어 시민들의 활용을 막을 것이므로 정부나 기업에 맞서 싸우고 공통의 합의를 만들어가려는 시민들의 연대와 노력이 중요하다. 전국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싸우고 있다. 청도와 밀양의 송전탑, 제주도 강정마을의 주민들, 세월호 유가족, 쌍용자동차, 유성기업, 스타케미칼, 함께일하는재단의 노동자들, 식량주권을 지키려는 농민들, 손을 잡아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일단은 이들과 적극적으로 손을 잡으려는 노력 속에서 공공성이 조금씩 실현되리라 믿는다.

 

이 사회의 기득권층이 아니라면 누구도 민영화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니 우리 자신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과 손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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