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몽똘 2016.01.18 13:17
 

이 보고서는 우고 차베스가 협동조합에 주목하며 사회적경제를 활성화시키려고 하는 배경과 그런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공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우고 차베스에게 협동조합은 베네수엘라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전략의 중요한 한 기둥이었고, 협동조합정책은 특정 부문을 키우는 분리된 정책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기반을 강화시키려는 미션이나 코헤스티옹(cogestión, 노동자통제기업), 풀뿌리의 힘을 강화시키려는 주민평의회(Consejos Comunales, popular council) 등 아래로부터의 힘을 강화시키고 시민의 주권을 회복하려는 시도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런 베네수엘라의 경험이 한국사회에 던지는 시사점이 어떤 것인지도 살펴보려 한다.

 

베네수엘라협동조합운동연구(하승우,2015모심과살림생명협동연구지원공모사업결과보고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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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5.12.10 22:45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단지 아래로부터의 힘을 모으자는 전략이 아니다.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단순히 지역사회를 변화의 거점으로 내세우는 전략도 아니다.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단순히 민중에 대한 무한한 신뢰만을 강조하는 전략도 아니다.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기성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이상만을 좇고자 하는 전략도 아니다.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이 어려운 것은 풀뿌리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기도 하다. 아래, 지역, 민중, 이상과 같은 단어들은 풀뿌리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지만 그것만으로 풀뿌리를 충분히 설명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위와 연결되지 않은 아래는 없고 국가와 무관한 지역사회도 없으며 완전무결한 주체도 없고 이상이 무조건적인 진리나 선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전형(典型)에 대한 부정, 국가주의 또는 중앙집권형 국가체제와의 결별, 삶의 재구성이자 현실적인 이상주의이다. 이 발제문은 근본적이면서 급진적이고자 하는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이 한국사회에서 갖는 의미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 발제문의 내용은 풀뿌리운동 내에서 합의된 의견이 아니라 필자의 주관적인 의견임을 미리 밝힌다.



1. 전형에 대한 부정, 공론장


한국사회에서 공론장(public sphere)이라는 단어가 많이 회자되지만 맥락이 뒤틀린 채 논의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나 아렌트(H. Arendt)에 따르면 공론장은 정치가 이루어지는 장이기에 진리와 선이 아니라 판단에 따르는 곳이고 의견(doxa)이 소통되는 장이다. 그러니 공론장을 통해서는 어떤 진리와 선에 이를 수 없고 그런 논의가 이데아(idea)를 자처할 수도 없다.


그런데 한국에서 공론장은 그런 장을 구성하기 위한 노력보다 공론을 표방하는 여론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이미 어떤 입장을 가지고 찬반을 나눈 뒤 의견을 제시하기보다는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한다. 설득하지 못하는 의견은 의견이 아닌 듯이. 이미 답을 정해놓은 상태에서, 아니 답은 분명히 있다는 전제 하에서 논의가 진행된다. 어떤 기준을 세우는지 논하는 작업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기준에 따라가는 작업이 주를 이룬다. 시민사회운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답은 분명히 있고 우리가 그 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공론장은 전략적인 활용의 장이지 그 장 자체가 근본적인 목적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전형의 부재는 한국인을 불안하게 만든다. 어떤 기준이 존재해야만 사물이나 사건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으니 전형의 부재는 변화는 불가능하다며 냉소한다. 그렇게 보면 전형과 냉소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기보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어떤 상황에 대한 거부가 냉소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형 없음이 냉소로 이어진다. 1980년대 말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가 새로운 논의의 시작이 아니라 변화의 불가능과 변절, 냉소로 이어진 건 이 때문이 아닐까?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그런 전형에 대한 부정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위로부터의 주도, 아래로부터의 힘, 이렇게 명명되는 것도 일종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혁명이 실제로는 복구를 뜻했다는 아이러니한 사실1)은 우리가 대립한다고 생각하는 개념들이 서로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위가 아래를 규정하고 아래에 의미를 부여한다. 아래라고 불리지만 실은 그곳이 바로 중심이나 위일 수 있다. 시민이 무참하게 권리를 짓밟히지만 그들이 바로 주권자이듯이 어떤 위치에서 보는가에 따라 위, 아래는 뒤바뀔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계속 위의 필요성 때문에 아래를 호명하는 것은 아래를 또 다른 전형으로 만들 수 있다. 아래는 이래야 한다, 주민/시민을 조직하는 방식과 목적은 이래야 한다는 전형은 풀뿌리의 역동성을 갉아먹는다.


그렇다면 풀뿌리는 무엇을 의미할까? 풀뿌리의 전일(全一)적인 인식틀은 위와 아래가 분리될 수 없음을, 위와 아래가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아래를 강조하더라도 위의 변화가 동반되지 않으면 변화를 지속시킬 수 없다. 위를 아무리 뒤흔들더라도 토대의 성격이 바뀌지 않으면 변화가 지속되지 않는다. 결국 풀뿌리는 위와 아래가 분리되지 않고 순환하는 사회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고 그런 변화를 위한 준비한다고 봐야 한다. 순환의 역동성, 그것이야말로 풀뿌리의 힘 아닐까? 성장하고 결실을 맺고 다시 밑으로 내려가고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우고 다시 성장하고,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복합적으로 얽히고설키어 진행되는 과정 말이다.


그렇다면 정치공동체에서 그렇게 아래 위를 연결시키고 순환시키는 작업은 어떤 것일까? 나는 헌법이라고 생각한다. 아렌트는 “반란과 해방 운동이 새롭게 획득한 정치적 자유를 헌법에 담지 못한다면, 반란과 해방보다 더 무익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즉 자유의 공간을 틀 지우는 가장 기본적인 작업을 헌법이라고 봤다. 그동안 시민사회운동 내에서 법과 제도에 대한 논의들은 많지만 그 모든 걸 틀 지우는 헌법에 대한 논의는 드물었다. 2008년 촛불집회 이후 대한민국헌법 제 1조가 시민들 입에서 되뇌이긴 했지만 중요한 건 명목상의 제 1조가 아니다. 우리는 어떤 자유를 구성하고 누리기 위해 이 공동체에서 생활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유로운 시민으로 성장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들과 정치공동체에서의 생활을 얼마나 연계시키고 있을까? 헌법은 이런 질문들을 담는 그릇이다.


물론 헌법조차도 이런 전형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위르겐 하버마스(J. Harbermas)가 말했던 헌법의 지속적인 변화가 중요하다. 하버마스는 『사실성과 타당성』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헌법의 고정된 문장은 변화하는 해석의 흐름 속에서만 생동하는 것으로 남는다. 헌법은 시민권을 실현하기 위한 완수되지 않은, 앞으로도 결코 완수될 수 없는 프로젝트이다. 시민권은 매 세대마다 변화된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새롭게 비판적으로 해석되고 소화되어야 하며, 그 실체도 지금까지보다 더 포괄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 풀뿌리 공론장은 이런 완수될 수 없는 프로젝트를 실현하는 장이다.


그리고 더글러스 러미스(D. Lummis)는 『Radical Democracy』에서 민주주의를 일종의 상태로 정의한다. “민주주의는 특정한 정치제도나 경제제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정치제도나 경제제도가 가져오거나 가져오지 못할 어떠한 상태를 가리킨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이상이지, 그것을 달성하는 방법을 설명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통치형태들 중 하나가 아니라 통치의 목적이며, 인류 역사에서 계속 유지되어온 제도가 아니라 역사적인 과제이다.” 물이 액체, 기체, 고체로 변할 수 있듯이 상태로서의 민주주의는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고정되지 않는다. 내부의 구성요소들이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민주주의의 상태는 달라진다. 근본적이자 급진적인 풀뿌리의 민주주의 역시 이런 상태를 지향하고 이를 가능케하는 정치구조를 만들고자 한다.



2. 국가주의 또는 중앙집권형 국가체제와의 결별, 연방주의


국가를 가장 근본적인 정치공동체로 보고 다양성을 억압하는 국가주의(statism)는 식민지 시기부터, 아니 그 이전 시대부터 한국인에게 의식/무의식적으로 강요되어온 이데올로기이다. 그리고 식민지 시기에 만들어진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체제는 해방 이후에도 거의 아무런 변화 없이 1990년대 초반까지 유지되었다.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체제에서는 입법/행정/사법의 삼권분립도 무력화되고 대통령이라는 정점에 연결된 강력한 관료집단들이 생활세계를 식민화시키고 지배한다.2)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국가주의를 극복하고 이런 국가체제를 근본적이고 급진적으로 변화시킬 때에만 가능하다. 아니, 이런 체제전환을 통해서만 사회전환이 가능하다. 전환이 특정 영역에서의 부분적인 변화나 정신승리법이 아니라면 국가구조의 변화는 필수적이다. 그런 점에서 연방주의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연방주의는 연방국가를 포괄하는 더 넓은 개념이다. 연방주의는 지역이 더 많은 결정권한을 가지도록 한다.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권한은 외교와 국방을 제외하면 거의 동등하다. 우리의 생각보다 이런 체제를 갖춘 곳이 꽤 많은데, 연방주의를 공식적으로 채택하지 않더라도 스페인이나 스코틀랜드, 이탈리아, 인도처럼 지역정부가 독자적으로 입법권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스위스나 벨기에처럼 작은 국가들에서도 연방주의가 실시되고 있으니 땅덩어리가 큰 나라에서만 실시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연방정부가 수립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자연스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연방정부가 만들어지면 정치는 더욱더 필요해지고 그만큼 더 활성화된다. 시민들이 어떤 뜻을 품는가에 따라 국가체제는 그에 맞게 계속 바뀔 수 있다. 국가가 정치공동체라면 구성원의 뜻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특히 ‘내부식민지’라는 말이 있듯이, 한국처럼 수도권이 비수도권의 사람과 자원을 계속 빨아들이고 착취하는 체제에서는 정치가 복원될 수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결정권이 모두 서울에 있으니, 생산하지 않는 곳이 생산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모순 아닌가. 추상적인 주장보다는 재정과 정책을 운영할 권한이 어디에 있는가를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2014년 기준으로 한국의 국세와 지방세 비중은 79.9%와 20.1%로 지방자치제도 실시 이후에도 국세 비중은 계속 증가해 왔다. 

결국 지방자치제도 실시 이후에도 중앙정부가 계획하고 지방정부가 그 예산에 기반해 사업을 집행하고 중앙정부가 이를 평가하는 체제가 변하지 않았다. 기득권층이나 재벌들이 쌈짓돈처럼 쓰는 세금을 우리가 원하고 필요한 곳에 쓸 수 있고, 중앙정부나 지역정부가 가진 건 궁극적으로 시민들의 자산이다. 연방주의는 이런 근본적인 부조리를 급진적으로 바로잡으려는 시도이다.


한국은 사실상 두 개의 국가로 나뉘어 있다. 언제나 지배자의 위치에 서는 기득권층의 국가지방자치제 실시 이후에도 행정와 언제나 지배를 받는 시민들의 국가. 그리고 기득권층 대다수는 서울에 살고 있고 지역에중앙부처들은 각종 시행령과 지침으로 지방정부들을 통제하고, 지방정부들은 그런 통제를 는 이들과 연결된 토호들이 기득권 행세를 한다. 시민과 지역의 협조 없이는 기득권층의 국알리바이삼아 자신들이 대변해야 할 지역주민들을 속인다.가가 유지될 수 없을 텐데, 지금은 대안을 찾지 못한 시민과 지역사회들이 무기력하게 기득권층의 국가를 유지시키고 있다. 연방주의는 이 상태를 변화시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또한 북한과의 통일을 고려한다면 연방주의로의 전환은 필수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통합/통일이라는 추상적인 환상은 갈등과 대립이라는 구체적인 현실과 조건을 은폐하고 억압하기 쉽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모순된 국가체제를 지양할 수 있는 연방주의를 확립하는 것이다. 연방주의는 국가주권의 강화보다 주권을 지속적으로 폐기하는 역할을 맡고 풀뿌리의 정치역량을 활성화시킨다.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이런 연방주의 국가형태를 지속적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3. 삶의 재구성, 경제의 정치화


아이러니하지만 민주화 이후 정치의 경제화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민주화가 되었으니 먹고사는 문제에 집중한다고 볼 수 있지만 기본적인 경제조건을 결정하는 정치과정의 중요성이 중산층 신화 속에 망각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의제가 핵심적인 사안으로 부각되지 못했다는 점으로 이를 증명할 수 있다(국가는 노동운동을 억압하고 쟁의에 개입하며 자본의 양적 성장을 지속시켰다). 그리고 민주화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경제적인 자산은 재벌에게 집중되었고, 그만큼 시민들의 삶을 결정하고 그걸 뒤흔드는 재벌들의 힘도 커졌다. 그리고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 역시 커졌고 비수도권에서 생산된 부가가치는 수도권으로 흡수된다.


민주정부라고 불렸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도 이런 경향을 근본적으로 바로잡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 삶의 재구성은 이렇게 식민지로 전락한 삶을 자립의 삶으로 되돌리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연방주의 역시 이런 자립 속에서만 지속될 수 있다. 그런 자립경제에 관한 단초를 박현채의 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박현채는 『한국경제구조론』에서 “경제발전의 과정은 단순한 경제적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전체적인 사회적 변혁의 과정이어야” 하고, “경제발전의 추구는 민족주체적으로 한 민족의 민족주의적 요구, 민족의 자립과 민족주의적인 통일된 민족국가의 수립을 경제적으로 밑받침하는 것이어야” 하며, “경제발전에 있어서 토착적인 것의 최대한의 활용이 있어야” 하고, “새로운 발전론의 모색에서는 경제이론에서의 인간 복권(復權)이 이루어져야” 하며, “경제발전은 경제발전의 중요한 동인인 인간의 창의․창발성에 서는 것이어야” 하고, “시장결락(market failure)에 의한 공해는 물론 경제제량만을 위한 무원칙한 경제성장의 추구가 가져오는 생활환경 및 생태계의 파괴는 최소한으로 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 경제나 미국에 의한 원조경제, 재벌과 결탁한 관료자본주의,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 벗어나 국민경제, 자립경제를 이뤄야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박현채는 강조했다. 그렇지만 세계자본주의와 한국경제의 조건 속에 농업을 놓고 농업과 중소기업으로 자립경제의 기반을 만들려고 했던 박현채의 시도는 김대중 정부와의 결별로 실패하게 된다.


세계화의 현실에서 자립경제의 가능성과 범위를 어느 정도로 인정할 것인가는 논의가 필요하지만 경제를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삶 속으로 가져오는 작업은 필요하다. 앞서 논의한 연방주의도 경제를 우리 삶 속으로 가져오기 위한 디딤돌이다. 경제 면에서 연방주의는 협동과 우애의 원리에 바탕을 둔 경제질서, 생산과 소비, 농업과 산업을 분리시키지 않고 지역과 지역이 동등하게 자원을 나누고 협력하고자 하는 전략이었다. 없는 걸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연방주의 정신에 따라 강화시킨다면 자립경제라는 목표는 헛된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런 전환의 과정은 구체적인 정책으로 뒷받침되어야 하고 그런 정책을 구성하는 과정에는 시민의 개입과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하다. ‘중앙정부의 와해=지역자치의 활성화’가 아니듯 ‘독점의 해체=자립의 활성화’는 아니다. 각자의 삶의 규모를 해석하고 판단하는 과정도 필요하고 지역사회의 필요와 가능성을 해석하고 결정하며 그런 것을 공통의 과제로 구성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서로 다른 처지에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공통의 불안과 위험 속에 있다는 자각이 있어야 공통된 삶의 재구성이 가능하다.


그리고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구호와, 이미 고용 자체가 한계에 달했다는 앙드레 고르(A. Gorz)의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이라는 선언을 함께 고려한다면, 임금노동제도라 불리는 임금노예제도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자본주의 임금제도는 노동력을 빌미로 인격을 구매하는데, 구매당한 인격은 스스로 삶의 규모를 조절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제는 세계화, 자동화와 더불어 기업의 구매력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 실업과 노동빈곤(working poor)이 정치를 경제화시켜서 인간을 생존욕구에 불타는 좀비로 만든다면, 기본소득(basic income)은 경제를 정치화시켜서 죽어버린 좀비의 심장을 다시 뛰도록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본소득에 관해 이런저런 우려들이 있지만 아렌트 식으로 말한다면 자유로운 정치공간이 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다. 사실 엄청나게 새로운 이야기 같지만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져간다는 코뮨주의 원리의 현대판이라고 볼 수 있다. 일종의 공유지를 만드는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고립된 생활을 강화시키는 방법이 아니라 공동체를 구성하며 공유지를 만들고 확장시키는 방법이라 본다면, 기본소득은 삶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경제를 근본적/급진적으로 정치화시키는 과정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1) “‘혁명’이라는 용어는 원래 천체 궤도의 운행(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이라는 코페르니쿠스의 표현을 통해 자연과학에서 점차 중요해진 천문학 용어였다. 이 과학 용어에서 혁명이라는 용어는 라틴어의 의미를 그대로 유지했다. 별들의 회전 운동은 인간의 영향력을 벗어난 거역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새로움이나 격렬함이라는 특징과는 분명히 거리가 먼, 규칙적이고 합법칙적인 것을 의미했다.”(한나 아렌트, 『혁명론』)


2) 그 과정에 대한 분석은 하승우․권정우의 『아렌트의 정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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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5.06.12 16:20

1. 나른한 봄날의 꿈


박영순 시장실의 회의 열기가 뜨겁다. 다가올 여름에 사상 최대의 전력난이 우려되자 서울시의 전기공급을 조절할 수밖에 없는데, 불편을 호소하는 민원인들의 전화가 폭주할 거라고 담당자들이 걱정한다. 전력을 거의 생산하지 않는 서울시가 전력을 확보할 방법은 전력을 생산하는 다른 지역들의 도움을 받는 것인데, 요즘 수도권 밖 지역정부들의 태도가 예전같지 않다. 경기도와 협의해서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산업이나 자원을 조정하지 않으면 수도권으로 보내는 전력을 줄이거나 단가를 높이겠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하고 있다. 과거 중앙정부 시절에 발전소들을 전부 지방에 크게 짓다보니 서울시로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박영순 시장이 나서서 박본혜 대통령과 통화를 했지만 연방정부 역시 비리나 특별한 문제가 아니면 지역정부가 운영하는 공기업인 전력회사에 개입할 수 없다며 난색을 표한다. 전력난 걱정에 마음이 심란한데, 박본혜 대통령은 제주도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만드는 걸 서울광역시정부(연방국가로 전환된 뒤 서울특별시는 서울광역시가 되었다)가 공개지지하고 서울시민의 찬성여론을 유도해 달라고 요청한다. 아버지가 대통령일 때가 좋았는데, 라는 이상한 말을 하면서 박본혜 대통령은 전화를 끊었다.


과거 중앙정부 시절에 온갖 지원을 약속받았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이득이 없다보니 지역정부들은 연방정부의 약속을 잘 믿지 않는다. 확실한 지원책을 미리 제공받고 난 뒤에야 해당 사업을 진지하게 고민하겠다는 식이다. 국방은 연방정부의 소관이라 밀어붙일 만한 일이지만 제주도의 역사를 고려할 때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식이라면 육지와 분리․독립하겠다는 제주도지사의 당선은 연방정부를 더욱더 곤란하게 만들었다. 제주도지사는 연방정부의 분명한 지원이 없다면 과거 중앙정부에게 피해를 입었던 지역들과 손을 잡고 따로 협조체계를 꾸리겠다며 압박을 가하기도 한다. 그리고 제주도지사는 앞으로 제주도내 공문서에서 표준어와 제주어를 똑같이 공식언어로 채택하고 학교에서는 제주어를 먼저 가르치겠다고 밝혔다. 차차 표준어 사용을 줄이겠다고 하니 제주도에 가는 연방공무원은 제주어 과외를 받아야 한다. 연방정부가 해군기지 공사를 밀어붙이다간 제주공화국이 수립될 것 같다.


제주도만이 아니다. 충청남도는 한국은행과 별도로 화폐를 만들겠다며 충남은행을 설립했다. 지역 밖으로 빠져나가는 돈을 묶어서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고 한다. 충남은행의 설립은 중앙정부의 경제정책이나 중앙정부가 내려주는 지원금에 목을 매는 시대가 지나갔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앞으로 충남은행은 중앙통화와 지역화폐를 환전하며 지역경제를 순환시키는 심장 역할을 맡을 예정이다. 그리고 충청남도는 도시와 농촌, 어촌이 공존하는 지역특색을 살리는 발전정책을 수립하겠다며 관련 법령들을 전면 재검토하고 있다.


중앙정부가 연방정부로 전환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지역정부들은 ‘지역주권’을 강화시킬 수 있는 연방주의를 지지하고 있다. 그리고 연방정부는 과거 수도권으로의 초집중을 보상하는 차원에서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정부에게 연방기금을 지급하고 있다. 지역정부들이 수도권을 포위하는 전략을 공동으로 세우고 압력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지역주의는 영호남이 아니라 수도권과 비수도권에서 간혹 드러났다). 연방주의는 각 지방들이 알아서 살아남는 구조가 아니라 각각의 필요들에 따라 서로 연합하는 것이기에, 지역간의 연대는 더 강화되었다. 또 지역정부의 법률(연방국가가 되면서 조례라는 말이 사라졌다)이 연방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발휘하다보니 지방의회의 권한이 강해지고 법원도 따로 구성되었다.


시민들이 자기와 맞는 지역을 선택하며 여차하면 다른 지역으로 떠나겠다고 하니, 지역권력도 주민들의 요구에 더 민감해졌다. 그리고 중요한 결정들이 서울보다 지역에서 내려지자 주민들도 자기 지역의 미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정부와 기업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한다. 연방국가로 전환되면서 주민소환권이 강화되고 한 단계 더 가까워진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며 더 작은 규모의 대안을 모색하는 주민자치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연방국가는 공공정보를 공개해서 이런 움직임을 뒷받침한다. 이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2. 왜 연방주의인가?


위의 이야기는 허구이지만 근거 있는 이야기이다. 미국의 경우 각 주마다 발전소와 전력공급회사가 있는데, 2000년 캘리포니아주의 전력난 사태는 공기업인 발전소가 민간회사에 매각되면서 전력가격이 폭등하면서 시작되었다. 엔론이라는 회사가 그 주역인데 가격을 장난쳐서 두 군데의 전력공급회사를 파산하게 만들었다. 문제가 터지자 나중에 미연방정부도 개입했는데, 한국이라면 중앙정부와 한수원이 좌지우지했을 일이다. 한국처럼 의사결정이 집중되면 그만큼 부패가 발생하기 쉽고, 힘이 약한 지방이 중앙에 종속된다.


캘리포니아주 사태처럼 시민의 통제가 없으면 문제가 생기기도 하지만 연방주의는 지역이 더 많은 결정권한을 가지도록 한다.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권한은 외교와 국방을 제외하면 거의 동등하다. 우리의 생각보다 이런 체제를 갖춘 곳이 꽤 많은데, 연방주의를 공식적으로 채택하지 않더라도 스페인이나 스코틀랜드, 이탈리아, 인도처럼 지역정부가 독자적으로 입법권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스위스나 벨기에처럼 작은 국가들에서도 연방주의가 실시되고 있으니 땅덩어리가 큰 나라에서만 실시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연방정부가 수립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자연스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연방정부가 만들어지면 정치는 더욱더 필요해지고 그만큼 더 활성화된다. 캐나다의 경우 퀘벡주는 두 차례나 연방정부와 떨어져 독립하기 위한 주민투표를 진행했다. 영어와 프랑스어를 모두 공용어로 쓰는 캐나다이지만 퀘벡주는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쓴다. 캐나다에서 가장 크고 인구가 두 번째로 많은데도 퀘벡주의 뜻이 연방헌법이나 정치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퀘벡주는 1980년과 1995년 두 번 분리독립을 위한 투표를 실시했다. 1980년에는 분리독립 찬성비율이 40.44%, 1995년에는 찬성비율이 49.42%에 달했다. 그 뒤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퀘벡당과 독립을 반대하는 자유당의 업치락뒤치락 선거경쟁이 계속되고 있다. 연방정부가 되면 국가로부터의 분리도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된다.


그리고 2014년 9월 18일에는 영연방에서 스코틀랜드가 분리․독립하는 것에 관한 주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찬성율 44%로 독립은 무산되었지만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윌리엄 월레스가 외쳤던 ‘프리덤’은 여전히 스코틀랜드인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대표 없이 세금만 부과하는 현재의 체제를 고분고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자세이다. 투표는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분리․독립 시도가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자유의 열망은 계속될 예정이다.


이렇게 보면 시민들이 어떤 뜻을 품는가에 따라 국가의 형태는 그에 맞게 계속 바뀔 수 있다. 국가가 정치공동체라면 구성원의 뜻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 우리도 퀘벡주나 스코틀랜드처럼 분리․독립을 하지 말란 법도 없다.


특히 ‘내부식민지’라는 말이 있듯이, 한국처럼 수도권이 비수도권의 사람과 자원을 계속 빨아들이고 착취하는 체제에서는 정치가 복원될 수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결정권이 모두 서울에 있으니, 생산하지 않는 곳이 생산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모순 아닌가. 연방주의는 이런 기본적인 부조리를 바로잡으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한국은 사실상 두 개의 국가로 나뉘어 있다. 언제나 지배자의 위치에 서는 기득권층의 국가와 언제나 지배를 받는 시민들의 국가. 그리고 기득권층 대다수는 서울에 살고 있고 지역에는 이들과 연결된 토호들이 기득권 행세를 한다. 시민과 지역의 협조 없이는 기득권층의 국가가 유지될 수 없을 텐데, 지금은 대안을 찾지 못한 시민과 지역사회들이 무기력하게 기득권층의 국가를 유지시키고 있다. 연방주의는 이 상태를 변화시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연방주의 논의는 단순히 중앙정부의 권력을 분산시키자는 주장이 아니다. 권력을 근본적으로 재편하자는 것이고 청와대와 국회만 바라보는 우리들의 무기력한 시선을 이제 구체적인 지역으로 돌릴 기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3. 어떻게 하면 연방주의를 실현할까?


지난 2015년 3월 5일 ‘시민이 만드는 헌법 국민운동본부’라는 단체가 발족했는데, 이 단체는 선언문에서 한국의 낡은 헌법이 사회 현안을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민이 나서서 직접 헌법을 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발족 당일 대토론회를 열고 지방분권과 국민주권, 사법정의, 권력구조개혁 등을 요구했다. 참석하지 못해 토론에서 논의된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다른 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개헌이나 분권형 국가에 관한 논의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실제로 연방주의로 가려면 개헌이 필수적이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연방주의가 아예 배제되어 있고, 자치단체에 관한 규정만 있을 뿐 주민자치에 관한 규정은 법률로 위임되어 있기 때문이다(제 118조 2항 ‘지방의회의 조직․권한․의원선거와 지방자치단체의 장의 선임방법 기타 지방자치단체의 조직과 운영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지방자치제도의 지위가 법률에 위임되어 있기 때문에 과거 박정희 정권은 지방자치제도를 유보시킬 수 있었다. 연방주의 개헌이 되면 국회나 청와대가 지방자치제도를 마음대로 좌우할 수 없다.


사실 그래서 개헌은 쉽지 않을 것이고, 기득권층은 이에 적극적으로 저항할 것이다. 실제로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그동안 진행된 지방자치 논의를 거꾸로 되돌리려 하고 있다. 2014년 12월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는 ‘지방자치발전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지방의회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지방행정에 주민참여를 확대시키며 기초자치단체에 자치경찰단을 설치하는 등 그동안 시민사회가 요구해온 방안들도 포함되었지만 특별시와 광역시의 기초의회를 폐지하고 단체장과 교육감 직선제를 변형하는 등 지방자치의 흐름에 역행하는 내용들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주민자치를 외치면서 행정단위를 광역화시키겠다는 이상한 발상도 항상 따라다니고 있다. 이런 구상은 박근혜 정부의 독자적인 판단이 아니고 이명박 정부의 지방행정체제개편추진위원회도 비슷한 방안을 제안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분권은 일종의 ‘착시현상’을 낳을 수 있다. 권력을 나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지역의 기득권을 더 강화시킬 수 있고 분권이 수사에 그칠 수도 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 때처럼 분권과 균형발전을 중요한 의제로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공사판의 규모를 키울 수도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이제는 분권보다 더 분명한 연방주의를 내세워야 한다. 그래야 기득권층의 술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연방국가가 수립되면 문제가 끝나는 것도 아니다. 머레이 북친은 『다음 세대의 혁명(The Next Revolution)』(2015년 번역 출간예정)에서 미국이나 유럽공동체(EU) 등에서 드러나는 연방국가의 문제를 지적한다. 연방국가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중앙집권화가 진행되고 시민이 국가를 통제할 방법은 제한되어 있다는 비판이다. 그래서 북친은 지역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인민의회들(popular assemblies)이 소환할 수 있는 대리인들을 지역과 지방의 연맹의회로 보내는 네트워크”를 구성해야 하고 연방은 지역간의 차이를 조절하는 역할만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친은 국가주의를 강화시키는 국가선거보다 지역정부의 선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지역정부가 국가와 의회에 맞서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분권이나 연방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흔한 실수는 국가통치를 구성하는 주와 국가 차원의 선거활동과 지역차원의 선거활동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북친은 우려한다.


북친의 주장을 한국에서 무조건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연방주의를 실현할 전략과 관련해 여러 시사점을 준다. 일단 청와대나 국회는 연방으로의 전환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거스를 것이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체제에서는 국민투표를 통한 헌법 개정 외에는 연방으로의 전환을 강요할 방법이 없는데 국민투표를 부여할 권리도 대통령에게 있다.


그렇다면 방법은 없을까? 그렇지는 않다. 연방주의는 새롭고 자유로운 사회구조를 만들려는 이들이 합심해서 만들어낸 이념이자 전략이다.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려면 우리 스스로가 지금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정치 면에서 연방주의란 정부 안에 정부를 만들어 일종의 이중권력을 만들고 주권이 작동되는 방식을 바꿀 뿐 아니라 주권 자체를 시민들이 직접 정의하게끔 하는 이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지금 이중권력을 구성해서 그림자 정부를 활성화시키면 어떨까? 우리 스스로의 공식화되지 않은 자치질서를 짜는 것은 지금도 가능하다.


그리고 경제 면에서 연방주의는 협동과 우애의 원리에 바탕을 둔 경제질서, 생산과 소비, 농업과 산업을 분리시키지 않고 지역과 지역이 동등하게 자원을 나누고자 하는 전략이었다. 그렇다면 이미 연결되어 있는 생산/소비의 망을 강화시켜서 농부가 도시인의 밥상과 공장/사무실의 급식을 책임지고, 도시인이 농촌으로 내려올 수 있는 바탕을 만든다면? 도시인이 농촌의 삶을 지지하고 산업이 농촌의 기술을 지원하면 어떨까? 없는 걸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연방주의 정신에 따라 강화시켜가야 실제로 연방으로의 전환이 된 후에 지역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


또한 문화 면에서 연방주의는 표준어와 표준지식, 통일된 기준을 거부하고 지역적인 지식과 문화를 강화시키려는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중앙언론을 끊고 지역언론을 살리고, 외부의 시선이나 수도권 중심의 담론을 차단하면 어떨까? 지식과 문화의 획일성을 깨고 차이와 다양성을 활성화시키려면 다양한 공동체 공간이 필요한데, 도서관이나 다양한 시민공간 등이 그런 역할을 맡으면 어떨까? 시민의 정체성이 지역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면 자급과 자치의 중요한 기둥이 될 수 있다.


연방주의는 연방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살려는 시민들이 등장하고 서로 손을 맞잡을 때에 실현될 수 있다. 국가의 민주화와 시장의 사회화, 주권의 분권화, 자치와 자급의 삶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지역이 자립의 기반이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자급이 가능하려면 안팎의 다양한 연계가 필요하다. 필요한 인력과 자원, 더 중요하게는 경험과 지혜를 공유할 관계망이 필요하다. 내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타자의 자유를 희생시키지 않고 기득권에 맞서 서로가 서로의 자유를 지지할 때에만 자유가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은 무시되지 말아야 한다. 사실 진정 자율적인 존재라면 스스로의 선택으로 타자의 뒤에 서서 그 뒤를 받쳐줄 수 있다. 이런 자율적인 존재들이 만나야 연방의 원리가 실현될 수 있다. 우리는 자유롭기 위해 서로 연대한다, 는 마음가짐이 만남에서 가장 중요하다.



4. 연방주의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지금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갈등들은 대부분 중앙정부의 정책 때문이다. 지역의 구체적인 사정과 필요, 관행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집행되는 정책, 그것도 수도권의 필요에 따라 진행되는 정책들이 많다(에너지정책이 대표적이다). 이런 문제를 개혁하려면 지역사회가 ‘지역주권’을 가지고, 그런 지역들이 서로 연계되어 ‘연대의 정치’를 펼칠 수 있는 연방정부가 필요하다. 이런 전환은 시민들에게 자율성만이 아니라 결정에 대한 책임성도 준다. 스스로 결정하며 시행착오를 경험하다보면 그 지역에 맞는 삶의 형식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연방주의로 전환하기 위한 논의를 모으고 합의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의 몫을 되찾는 일도 가능하다. 기득권층이나 재벌들이 쌈짓돈처럼 쓰는 세금을 우리가 원하고 필요한 곳에 쓸 수 있고, 중앙정부나 지역정부가 가진 건 궁극적으로 시민들의 자산이다. 자치가 활성화되면 헛되이 사용되는 자원이 줄어들어 삶의 질이 높아질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중앙정부에만 맞춰져 있는 우리의 시선을 지방정부로 돌려야 한다. 중앙정부의 일에 관심을 끊으라는 게 아니라 지방정부의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이다. 적어도 중앙정부의 권력보다 지방정부의 권력이 접촉하기 쉽고 통제할 수 있는 방법도 더 많다. 세금을 더 내서 복지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지방세의 비중을 늘려 국세와 지방세의 균형을 잡고 지역의 힘을 늘리는 방향으로 나아야 실질적인 변화를 체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역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정치적인 힘이 생길 수 있다.


지역사회는 자연과 사람이 상호의존하며 자치와 자급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공간이자 그런 관계를 통해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세상으로 도약할 수 있는 장소이다. 서로의 삶을 섞고(共有) 공적인 장을 확장하는(公有) 공공성(公共性)은 지역에서부터 실현될 수 있다. 그러니 지역사회를 무대로 삼는 운동주체의 등장과 그 주체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행동, 그것을 지속시킬 수 있는 살림살이가 필요하다. 신문을 만들거나 인터넷 카페를 만들거나 방송국을 만들거나 민중의 집과 비슷한 공유공간을 만들거나, 그 방식은 여러 가지이다. 연방주의는 그런 다양한 실험들을 담기에 좋은 그릇이고, 그런 우리를 위한 체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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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4.12.23 08:33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에 정당해산결정을 내렸다. 4월 16일, 바다 속으로 침몰한 세월호 사건의 진실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제 18대 대통령선거에 개입했던 국가정보원과 군사이버사령부의 선거개입과 관련된 진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고 책임자들도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12월 9일 대통령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는 ‘지방자치발전 종합계획’을 발표하고 특별시와 광역시의 자치구 기초의회폐지, 단체장과 교육감의 선거방식 개악을 발표했다.

 

2014년 12월 5일, 대한항공 부사장은 항공기를 회항시켰고, 2013년은 남양유업, 서울우유 등의 ‘갑질’로 장식된 한해였다. 12월 12일 서울고등법원은 이마트가 대형마트가 아니기에 의무휴업일 지정 및 영업시간 제한이 위법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4년 11월 10일 대학생협의 모범이던 세종대학교생협은 비리재단에 밀려 사업종료를 공지했다. 지난 5년간 국내 10대 재벌가문 자산이 430조원이나 늘어나 1,240조원에 달한다. 지금 국회는 사회적경제기본법을 심의중이고, 12월 2일 박근혜 정부는 2018년까지 165조원을 투자하는 지역발전 5개년계획, 소위 제2의 새마을운동을 국무회의에서 확정했다.

 

사회운동, 풀뿌리운동이 여러 성과를 거뒀다고 얘기되는 한국사회의 거시적인 모습은 이렇다. 사회가 변했다고 자평하는 동안 고공농성, 철탑농성, 수십 일의 단식농성, 엄청난 손해배상은 일상의 풍경이 되었다. 우리가 원한 세상은 이런 것이었나?



1. 현실을 보며 드는 물음들


- 생활정치는 정말 생활 속의 다양한 문제들을 정치적인 의제로 만들었나?

- 거버넌스는 정말 대등한 관계에서의 협력인가?

- 마을운동은 취향의 공동체를 넘어서 공존하는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나?

- 사회적 경제는 진정 경제활동에서 이윤보다 사회적인 가치를 우선시하고 있나? 경쟁보다 협력을 앞세우고 있나?

- 협동조합은 협동하는 문화를 확산시키며 생산과 소비의 연계를 강화시키고 있나?

- 시민사회운동은 수도권 중심을 벗어나고 있나?

- 시민사회단체는 몇몇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시민들의 도구가 되고 있나?

- 시민사회단체의 활동은 노동이 아니라 활동인가?

- 시민사회단체는 관료주의에서 자유로운가?

- 시민사회운동은 자기 진영의 논리에서 벗어나 소통하고 있는가?

-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그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얼마나 이야기하고 있나?



2. 다른 세상으로 가기 위한 열쇳말


- 자본주의, 사회주의, 이분법을 극복해야 한다는 건 두말 할 나위 없다. 그런데 극복한다는 것의 의미가 뭘까? 원론이 아니라 한국 현실에서 두 이념이 어떤 문제와 한계를 가지는지를 파악하고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을 찾는다는 의미일 텐데, 지금까지 우리는 그런 과정을 밟아왔을까?

 

- 그동안 풀뿌리운동은 대중이 스스로 조직되며 삶과 공간을 변화시키는 과정이라는 점을 강조했는데, 이 역시 한국사회라는 특수한 현실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만 한다. 기존의 사회운동이 한국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려고 노력해온 만큼 풀뿌리운동도 나름의 사회를 분석하는 틀을 가졌던가를 반성해볼 필요해볼 필요가 있다.

 

- 4주제 연구모임이 그동안 아나키즘, 생명운동, 에코 페미니즘, 사회운동의 영성이라는 관점을 검토한 것도 이런 필요성 때문이다. 각 관점이 같고 다른 면을 가지지만 공통적이라고 여겨지는 열쇳말을 배치하자면 다음과 같다.

 

- 관계성: 전일성, 상호성, 부분과 전체의 연계성, 연방, 연대, 생산과 소비의 연계, 교감, 깨달음, 집단적 영성

- 다양성: 탈중심, 상호적 권리, 평등, 성찰, 중립성과 객관성 비판, 국가주의 비판

- 자율성: 자치, 자급, 자결권, 삶에 대한 책임의식, 자기 목소리, 임금제도 비판, 너를 위한 운동이 아닌 나를 위한 운동, 가부장제 비판

- 순환성: 성장 포기, 사용가치의 우선성, 공유, 사적 소유권 부정, 소농, 소비주의 비판

 

- 이런 것이 가능한 장으로서 마을, 공동체 등이 대안으로 얘기된다. 근대국가와 자본주의 시장은 이런 열쇳말과 대립되는 구조이기에, 풀뿌리운동은 이를 넘어설 방법과 과정을 지속적으로 논의해야 옳다. 특히 한국사회의 국가와 자본은 훨씬 더 기득권화되어 있고 억압적이며 중앙화되어 있어서 풀뿌리운동과 양립하기 어렵다. 강력한 국가와 자본에 맞서려면 다양한 실천과 연대가 필요할 텐데, 풀뿌리운동은 그동안 어떤 고민과 실천을 보여줬나? 주민조직화, 생활정치는 마치 주민운동의 몫인 양, 생산과 소비의 조직, 협동운동은 마치 사회적경제 조직의 몫인 양, 서로 몰라라 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이런 흐름을 자기 조직의 규모를 확대시키는 쪽으로 활용했을 뿐 그 몫 자체를 늘리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 운동의 가짓수는 늘어나지만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아 지속가능하지 않은 데도 마치 지속가능한 것처럼 운동이 마취제를 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부나 재벌을 감시하고 비판하며 잡은 손 놓고 후려쳐야 할 때에도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대충 뭉뚱그리는 것은 아닌가. 단순히 정부나 재벌이 정서적으로 싫어서가 아니라 자기 운동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데도 이를 방치한다면 운동의 기반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운동은 단순한 방법론이 아니라 자기 가치를 가진 운동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는 방법만 이야기하고 사례만 강조하지 가치와 그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다. 운동과 사회의 위기는 여기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 풀뿌리운동은 스스로 대안적인 생활양식을 실천하고 이를 심화시키는 과정으로서의 운동을 지향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에 대한 분석도 필요하고 사회운동가 개인의 영성을 형성하고 심화시키는 과정도 필요하다. 목적과 수단을 일치시키는 조직운영과 내용 방식에 대한 자각도.

 

- 한국사회에서 이런 키워드들은 현재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풀뿌리운동은 이런 키워드들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활동을 펼치고 있을까? 그 활동 속에 이런 관점들은 얼마나 투영되고 있을까?

 

- 이런 관점들은 성장주의, 국가주의, 자본주의, 가부장제, 식민주의, 환원주의, 교조주의를 비판하는데, 우리 운동 속에는 이런 문제들이 없을까? 시민사회운동은 이를 점검할 수 있는 내부장치를 가지고 있을까?



3. 다른 세상을 고민하기 위한 질문


- 제도정치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제도정치를 회피하는 것은 아닐 텐데, 우리도 어느 순간 정치적 중립성의 신화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의 경계를 너무 분명하게 정해버린 건 아닐까? 최근 박원순 시정에서 시민단체가 이중대 역할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는데, 풀뿌리운동의 거버넌스는 어떻게 실현되어야 할까? 협력과 파트너십을 당위적으로 강조하면서 제도정치를 압박할 수 있었던 감시와 비판기능이 어느 순간 퇴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생활정치의 동력이 빠른 속도로 제도화되고 있다면, 그 가치의 올바른 실현을 위해 제도정치에 개입하는 것이 응당 필요하지 않을까? 제도정치에 개입할 경우 풀뿌리운동은 자기만의 실력과 전술을 가지고 있을까? 제도정치에 개입하려면 그것을 위한 제도 자체를 바꾸는, 경기규칙을 바꾸는 노력이 필요할 텐데, 이 부분은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 자본주의와 성장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이 말로만 그치지 않으려면 그만한 실력을 갖춰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실력을 쌓고 있나? 소비자들은 생산자들의 삶에, 생산자들은 소비자들의 생활에 서로 관심을 가지고 있나? 풀뿌리운동은 노동운동에, 노동운동은 풀뿌리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나?

 

- 우리는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의 상을 구체적으로 만들고 있나? 주민/시민들이 피부로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삶의 틀로 만들고 있나? 운동이 추구하는 대안과 가치를 개인의 삶과 조직의 운영으로 구현하지 못한다면 공동체의 관계망이 확대되고 심화될 수 있을까? 활동가들은 자기 삶을 가치대로 변화시키고 있나? 위계적이고 관료화된 조직운영이 줄어들고 운영주체가 개방되어 늘어나고 세대나 직책에 구애받지 않는 평등한 운영방식이 확산되고 있나?

 

- 우리는 공유의 기반을 만들고 있는가? 많이 얘기하는 네트워크도 일종의 공유물일 텐데, 적절히 공유되고 있을까? 관계성과 상호성을 실현하는 네트워크는 기성사회로 흡수되지 않는 관계망을 만드는 것인데, 우리는 그런 관계를 만들고 있나?

 

- 집단화된 다수가 실질적인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끼리끼리의 정치, 끼리끼리의 문화를 극복할 수 있는 실천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사회운동의 역사가 길어질수록 구세대와 신세대의 소통가능성이 낮아지는데, 이런 틈을 좁힐 방법을 개발하고 있을까? 민주적이고 평등한 의사소통이라는 가치를 실질적으로 구현할 방법을 만들고 있을까? 활동가 개인과 조직에는 어떤 영성이 필요할까?

 

- 서울 중심의 운동에서 벗어나려면 주요 운동조직이 서울을 떠나는 것도 방법 아닐까? 공공기관도 이전하는데 시민사회조직이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그 내부에 어떤 다른 욕망들이 자리 잡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이렇듯 분열된 존재인데, 대중의 분열을 비판할 수 있을까?



4. 개인적인 고민들


- 제도가 문제라면 그 제도를 바꿀 수 있는 정치력을 만들어야 한다. 홀로 그 몫을 담당할 수 없다면 당연히 그 목적에 동의하는 주체들이 손을 잡아야 한다. 활동가들조차도 정치를 갈등요인으로만 보고 회피하려하는데 갈등은 인간사의 당연한 요소이고 이를 해결하면서 공동의 목적과 생활이 강화된다. 갈등의 제거가 아니라 갈등의 조절이 중요한데, 정치가 이 과정을 맡는다. 제도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만큼 정치적인 힘을 구성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과정을 제도화로 넘기면서 그 제도가 알아서 좋은 방향으로 가길 기대하는 것은 운동이 무모함을 넘어 무책임함을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 진보정당을 드러내놓고 지지하거나 스스로 정치적인 역할을 맡아야 하지 않을까. 미흡한 점은 고쳐갈 과제이지 배제할 이유가 아니다. 우리 내부에서 관계성이 살아나야 한다.

- 살림살이가 무너지면 여유도 없어지고 참여도 어려워진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럴수록 공동의 대책을 마련하고 정치와 경제의 연관성을 드러내야 하는데 그런 역할이 없다. 지금의 시민사회운동은 각자의 부문운동으로 후퇴해서 딱 고만고만한 이야기만 나누고 있다. 그리고 말만 무성하지 그 말에 힘을 실어줄 움직임은 별로 없다. 주민/시민들에게 자기 것을 내놓으라고 얘기하면서 정작 자기 것은 내놓지 않으니 곳간이 찰 수 있을까? ‘능력에 따라서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져가고’, 우리 자신도 믿지 못하는 것을 누가 믿어줄까? 당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우리 자신을 위해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하면 꼭 우리 일을 팽개치고 다른 일에 헌신해야 하는가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 일과 다른 일이 분리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생각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은 우리 내부에도 있다. 돌아보고 성찰하고 생각해야 운동의 미래가 있다. 다양성은 그런 과정에서만 싹틀 수 있다고 생각한다.

- 거시적인 것을 본다고 주장하는 운동은 미시적인 운동을 무시하고, 미시적인 것을 강조하는 운동은 거시적인 운동을 배제하고 있다. 이런 무시와 배제가 사라지려면 일단은 서로 자주 만나야 한다. 그리고 서로의 접점을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만들어야 한다. 멋지고 폼나는 일, 외부의 사례보다는 자그마한 실천들이 중요할 텐데, 이런 일들이 각 조직은 어느 정도의 역량을 쏟고 있나? 이런 일들이 여러 사업과 활동에서 어느 정도의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나. 자기 사업이나 사업장 외에 관심이 없는 조직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네가 살아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자세를 가지지 않으면 미래를 장담하기 어렵다. 자율성은 나 혼자 살아남겠다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자세이다.

- 어느 순간부터 운동에서 가치의 지속보다 사업의 지속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그러니 서로 가치를 실현하지 못함을 알리바이로 덮어둔다. 평화박물관, 함께일하는재단에서 벌어지는 비상식적인 일들도 그냥 그렇게 무시된다. 강력한 도덕성이 아니라 최소한의 민주적인 절차마저 무시된다면 우리 내부는 너무 허약한 것이고 기득권층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내부의 문제를 감출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떠들고 그 문제가 충분히 논의되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마을 곳곳에서 들리는 문제들에 관해서도 이제는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눠야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아직 다들 쉬쉬 하고만 있다. 우리 내부에 있는 문제들을 도려내고 새 살을 돋게 만들어야, 저들이 우리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고정된 위계, 고정된 가치는 내부를 부패하게 만들고, 시민사회단체는 특정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 내부가 골고루 순환되어야 그 순환의 힘이 사회도 순환시킬 수 있다.

- 살림살이는 개인의 문제로 얘기되고 이는 운동단체 내부에서도 비슷하게 어렵다. 생활고로 어려움을 겪는 활동가들이 있다면 공동의 대책이 필요한데, 그냥 개인의 몫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과 활동을 분리시키는 것이 가능할까? 서울에서 개인의 생활을 꾸리고 가족을 건사하는 것이 불가능한 데도, 개인의 헌신만을 강요할 수 있을까? 실무자의 저임금이 활동가의 헌신으로 포장되고 활동가의 답답함이 실무자의 업무능력으로 평가되는 시점에서, 노동과 활동은 서로에 대한 알리바이로 활용될 수밖에 없다. 그 경계를 넘어설 힘은 그것이 노동이냐 활동이냐를 따지고 규정하는 것보다 활용할 수 있는 공유물을 늘리고 그것의 민주적인 운영을 보장하는 것일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그런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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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4.07.09 09:26

I. 아나키즘의 정치관


□ 인민의 자유와 자율성에 대한 믿음. 스스로 삶을 결정할 조건이 갖춰진다면, 아직은 억압을 경험하며 노예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적절한 상황이 마련되면 인민은 올바른 사회구조를 만들어갈 것이다. 인민의 자치역량에 대한 믿음. 어떤 완성된 개념이나 이론을 습득하는 것보다 스스로 만들어가는 ‘수련(修鍊)’의 의미가 강조된다.

□ 자율적인 개인과 연합하는 공동체. 각 개인의 자율적인 힘과 그렇게 드러나는 힘이 서로를 돕고, 이런 상호부조의 관계망이 개인과 공동체의 힘 모두를 강화시킬 것이라고 바라본다. 고립된 개인은 존재할 수 없고, 스스로 선택하고 약속할 수 있는 개인은 공동체 속에서도 자아를 잃지 않는다. 위계질서의 구성보다는 자유로운 협약, 관습의 힘을 믿는다. 자유로운 개인이 자유로운 공동체를 만든다.

□ 직접민주주의와 대리인 정치. 아나키즘은 정치를 특정한 사람이나 세력이 전담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사실 마을마다 전통적인 의사결정기구나 관습들이 있다. 없던 조직을 새로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일상적인 조직들을 활성화시키는 것, 그것이 아나키즘의 정치이다. 아나키즘의 반(反)정치노선은 근대국가의 등장이라는 상황에서만 이해될 수 있고, 그 대안으로 대리인 정치, 즉 권한이 제한되고 소환되는 대리인의 정치가 등장하기도 했다.

□ 국가와 정부의 구분. 국가는 중앙집권화된 체제이고, 정부는 일종의 통치형태이다. 아나키스트들은 국가에 절대적으로 저항하고 정부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태도를 보였다. 하나의 공동체가 아나키즘을 완성할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공동체들이 필요하고 이런 공동체들은 또 자기 나름의 협약을 맺을 수 있다. 아나키즘에서 연방주의가 가능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II. 아나키즘의 경제관


□ 아나키즘의 경제관은 기본적으로 자급(自給)이다. 작은 공동체를 지향한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생산과 소비가 연계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아울러 도시와 농촌이 연계되고 다양한 농촌들, 다양한 도시들이 등장해야 한다. 전원도시, 소공업도시 등은 이런 이상을 반영한다.

□ 아나키즘이 제기하는 가장 근본적인 비판은 사적 소유권의 부정이다. 점유는 가능하지만 소유는 불가능하고, 설령 한 세대의 소유가 필요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상속될 수는 없다고 봤다. 사유(私有)는 홀로 가지기 때문에 나쁜 것만이 아니라 공통의 기반을 파괴하기 때문에 나쁘다. 사실 사회의 약자들에게 공유지는 살아가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채울 수 있는 발판이었다. 사회주의는 이를 국유화로 대체하려 했지만, 국유화는 민중을 시혜의 대상으로 여기며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지만 민중이 스스로 그 권리를 지키고 권리를 확장시킬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고 국유화가 되면 사람들이 모여 회의하며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기회나 그럴 이유도 줄어든다. 따라서 배타적인 사적 소유권에 대한 저항은 국유보다 공동의 소유(共有)와 공적인 소유(公有)를 지향해야 한다. 이미 기본적인 연대감과 자유가 인간 속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그 연대감과 자유를 끌어내는 다양한 실천들이 중요하다. 이런 형태의 협동운동들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일방적인 시혜가 아니라 자존감을 가지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힘을 준다.

□ 아나키즘의 또 다른 본질적인 비판은 임금제도이다. 임금제도는 노동을 유일한 생존방식으로 만들었다. 자본가들이 만든 무노동 무임금의 원칙은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는 논리를 노동자들이 스스로 각인하게 만들었다. 허나 일하지 않는 자는 정녕 먹지도 말아야 하나? 그렇다면 일하지 않는 아이, 노인, 전업주부는 먹지 말아야 하나? 이런 물음을 피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가족임금제도를 마련했다. 남성이 생계임금을 버는 동안 여성은 가족과 가계를 부양한다. 그러면서 국가와 자본은 생계를 지탱해왔던 다른 사회적 관계들을, 자립경제의 기반들을 하나씩 파괴했다. 그런 면에서 임금제도는 정치적인 것이기도 하다. 정치적인 시민권을 보장받은 사람이라도 공장에서 굴욕적인 노예노동을 한다면 자신의 주체성을 온전히 실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주체적인 시민이 일터의 굴욕을 감당해야 한다면 그의 주체성도 수그러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대안은 뭔가? 크로포트킨은 『빵의 쟁취(The Conquest of Bread)』에서 이 유쾌하고 자유로운 노동에 한 가지 중요성을 더하는데, 그것은 이런 노동들이 서로 자유로이 협약을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공동으로 일하고 공동으로 즐기는 관계 속에서 노동은 자유로이 서로 협동하고 그것에 관한 협약을 맺는다. 최근의 기본소득 논의도 이와 결합될 수 있다.

□ 아나키즘은 농민의 사상이다. 이런 생각을 모아 크로포트킨은 『전원, 공장, 작업장』(형설출판사, 1983년)에서 경제학이 어떻게 이윤을 늘릴 것인가보다 무엇을,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로포트킨은 그 물음에 “농업이 공업을 성립시키고, 공업이 농업을 지지”하는 통합된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관점에 따르면, 땅과 인간의 다양성에 발맞춰 공업은 분산되어야 하고 “재배하고, 생산하는 사람들 자신이 사용하기 위하여 곡식이 재배되고 공업제품이 만들어지는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 크로포트킨은 인류의 진보가 자급(producing for home use)을 전제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III. 아나키즘의 문화관


□ 자치조직을 통한 다양한 의식. 크로포트킨은 촌락공동체가 “공유지에서 공정한 배당을 각인에게 보증하기 위한 동맹”이었고 “공통의 문화, 가능한 한에서의 상호지지, 폭력으로부터의 방위, 보다 일층의 지적 발달, 민족적 결속, 도덕관념을 위한 동맹”이었다고 지적한다. 바로 이런 것에서 민회가 필요했고 자치조직이 활성화되었다. 시민들은 공유지를 통해 민주주의를 몸에 익히고 공동의 정체성을 만들었다.

□ 대안문화 형성을 통한 지금 현실을 살기. 미국으로 이주한 이탈리아인과 유대인들은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을 만들어 자본주의 속에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사회를, 국가 속에 또 다른 공동체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들은 빵집과 버스회사, 채석장, 공장 등에서 노동자협동조합을 만들었고 공동주택을 세우려는 주택협동조합도 만들었다. 그리고 실업여성들은 일공동체를 만들고 석공들은 공동보험을 만들었다. 이렇게 같은 작업장과 마을에서 일하고 사는 주민들이 함께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을 교육시켰다. 이런 활동을 통해 아나키스트들은 대항문화를 만들어 전통적인 대중활동에 새로운 혁명적인 내용을 덧붙이며 다른 삶을 꿈꿨다. 이들의 직접행동은 폭력이나 파괴보다 자치공동체, 대안경제, 대안교육, 대안문화를 만들며 다른 사회를 구성하는 걸 의미했다.

□ 자유학교(free school)와 도서관운동. 스페인의 아나키스트 프란시스코 페레(F. Ferrer)의 ‘모던스쿨(modern school)’은 그런 생각을 잘 보여준다. 페레는 학교의 설립선언문에서 학교의 목표가 “학교에 다니는 소년소녀들이 진실하며, 정의롭고, 그리고 편견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아동들의 자연적 능력을 자극하고, 발달시키고, 지도하여, 충분한 개인적 가치를 지닌 쓸모 있는 사회 구성원이 되게 함으로써 전체 공동체의 발전에 헌신하게 할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아이들만이 아니라 학부모들도 일요일 아침마다 함께 출석해서 수업을 받도록 했다. 그리고 학교 수업 때는 상벌이나 시험을 폐지하고 아이들의 자율성을 키우려 노력했다. 학교만이 아니라 도서관도 교육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인류의 지혜를 저장하고 있는 도서관이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에게 개방되고 이들이 실제로 그 지혜를 활용한다면 민중의 성장은 불가능한 얘기일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유대인 아나키스트들은 도서관과 독서실을 세우고 문학모임을 조직해서 사람들이 다른 사회를 꿈꿀 수 있게 했다. 이런 도서관에서는 다양한 강좌들이 개최되어 시사적인 이슈와 인문학적인 관점을 갖게 했다. 그리고 호주의 아나키스트 플레밍(J. W. Fleming)은 협동조합의 설립을 도왔을 뿐 아니라 멜버른 공공도서관의 일요일 개관을 위해 싸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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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4.06.09 10:44

1. 들어가는 말


협동조합‘과’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건 어떤 효과를 가진다. 구분되어야 하지만 분리될 수 없는 두 개념이 그냥 병렬적으로 나열된 느낌이다. 구분이 분리는 아니어야 하는데, 한국사회에서는 분리의 느낌이 강하다. 여유가 있으면 필요할 때 한번 접목해 봐야지, 이런 느낌을 준다.

 

이렇게 바꿔서 물어보자. 흔히 협동조합을 사업체이자 결사체라고 한다. 흔히 사업체의 운영방식을 경영으로 표현하고, 결사체의 운영원리를 민주주의라 표현한다. 그런데 이게 맞을까? 그렇다면 협동조합 활동가, 실무자, 조합원들은 경제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협동조합은 민주적인 통제를 원칙으로 삼고 있으니 자연스레 경제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구체적으로 ‘민주적인 통제’는 뭘 말하는 걸까? 조합원이 통제하는 민주적인 조직이고 1인 1표를 가지고 있다는 2원칙에 대한 설명은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어떤 민주성을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협동조합 7원칙 중 두 번째 원칙은 다른 여섯 가지 원칙과 어떤 연관성을 가질까?

 

또 협동조합운동의 오랜 역사를 말한다. 그런데 역사는 끊임없이 현실과 맞닥뜨리며 전진하고 후퇴한다. 협동조합운동의 역사가 만들어온 구조가 있다면 현실의 변화에 맞춰 바뀌어야 할 구조도 있다. 그렇다면 협동조합은 현실의 변화에 발맞춰 어떻게 자신의 구조를 변화시켜 왔을까? 협동조합기본법에 따라 대다수 협동조합들의 정관이 똑같이 만들어지고 있고 그건 내부구조나 활동양식도 동일화되고 있음을 뜻한다. 똑같은 구조를 가진 협동조합이 조합원들의 다양한 욕구와 열망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을까?



2. 서기 2020년의 협동조합운동은?


더글러스 러미스(D. Lummis)는 『래디컬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에서 민주주의에 관한 여러 가지 오해들을 지적한다. 지금 현실과 관련된 오해들을 추려서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 민주주의는 민중의 복지를 돌보는 것이다.

- 민주주의는 민중이 지지하는 지도자를 가지는 것이다.

- 민주주의는 경제발전이다.

- 민주주의는 자유선거이다.

- 민주주의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함께 잘 살아가는 방법이다.

- 민주주의는 민중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한다.

 

러미스는 이런 오해들을 반박하면서 민주주의는 민중을 위하고 민중의 지지를 받는 지도자를 가지는 게 아니라 민중이 중요한 결정을 직접 내리는 것이고, 발전이 아니라 스스로 삶의 규모를 결정하는 것이며, 정치가 선거라는 형식적인 장으로 제한될 수 없으며,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되고 있다면 부자와 가난한 사람으로 갈라질 수 없고, 민주주의는 민중이 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결정을 내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민주주의는 특정한 제도나 원리를 일방적으로 따르는 게 아니라 민중이 힘을 가지고 있는 상태, 출렁출렁 유동적인 상태라는 게 러미스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협동조합은 어떠한가? 협동조합은 조합원들이 출렁거리며 대안적인 삶을 살아가는 장인가? 1980년에 레이들로 박사는 그 유명한 『레이들로 보고서』에서 협동조합의 민주적 특성이 협동조합의 모든 측면에서 확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특히 다음과 같은 과제를 제안했다.


- 조합원간에 어느 정도의 균질성과 연대의 기초가 되는 조직적 결속이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각각 2ha의 농지를 가진 빈농 500명과 2000ha씩 소유한 부농 5명으로 조합원이 구성될 경우, 대농의 큰 사업량이 협동조합의 생존능력에 기여할지 몰라도 민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농업협동조합의 기반은 되지 못할 것이다.

- 민주주의는 투표율만이 아니라 조합원이 얼마나 참여하느냐에 의하여 측정된다. 

- 완전히 민주적인 협동조합에서는 서비스의 실제 이용자인 조합원만이 임원과 이사를 임명하고 선출할 권리를 가진다.

- 민주적인 협동조합은 효과적인 교육프로그램과 모든 단계의 지도자 훈련의 기회를 제공한다.

- 민주적인 협동조합에서 여성은 여성으로서의 상징적 지위가 아니라 완전한 의미에서 조합원자격을 가져야 한다. 별도의 “남성의 역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차별적인 “여성의 역할”도 존재하지 않는다.

- 사업장에서 종업원 사이의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협동조합은 민주주의를 완전히 실현한다고 할 수 없다.

- 조직의 민주적인 성격은 조합원에게 자유롭게 정보를 제공하고, 정책결정 과정에서 조합원이 의견을 제출하고 피드백(feed-back)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있느냐에 의하여 판별할 수 있다.

- 민주주의에 관심이 있는 협동조합에서는 모든 보고나 정보는 알기 쉬운 형태로 제공되어야 하며, 소수민족을 위해서도 그들의 언어로 작성되어야 한다.

- 중요한 결정은 위계질서에 따른 명령보다도 전체의 합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민주주의의 깊이는 관리구조의 최하위 단위에서 제출된 제안에 따라 얼마나 결정되느냐에 의하여 측정될 수 있다.

- 민주주의에서는 전문가나 전문기술관료가 조합원에게 상담과 조언, 그리고 권고를 듣고, 최종적으로는 평조합원이 결정한다.


레이들로 박사는 서기 2000년의 협동조합을 내다보며 이를 과제로 제시했는데, 이 과제들 중 지금 해결되고 있는 건 얼마나 될까? 조합원들 사이에는 빈부를 넘어선 조직적인 결속이 이루어지고 있나? 조합원의 참여율은 어떻게 측정되고 있나? 임원과 이사는 어떻게 선임되고 있나? 조합은 어느 정도의 교육과 지도자 훈련 기회를 제공하고 있나? 조합 내에서 여성과 남성의 역할은 구분되지 않고 다양한 남성들/여성들의 정체성이 인정되고 있나? 실무자나 활동가들의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나? 조합의 정책결정과정에 조합원들은 어느 정도로 개입할 수 있나? 조합은 다양한 언어, 쉬운 언어로 정보를 제공하고 있나? 가장 아래에서 제출된 제안이 어떻게 전체의 합의로 모아지고 있나? 평조합원이 조합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있나?

 

현재 한국의 협동조합운동이 이런 물음에 어느 정도로 답할 수 있을까? 그런데, 아뿔싸, 이미 시간은 2000년을 훌쩍 넘어 2014년이 되었다. 과거의 협동조합운동은 시대를 앞선 과감한 결정들을 내렸다. 그런데 지금의 협동조합운동은 어떠한가?

 

2013년 1월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은 2020년을 내다보면서 『협동조합 10년을 위한 청사진』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런 저런 얘기들이 있지만 눈에 띄는 내용은 조합원제도와 지배구조에 있어 참여를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 올린다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현실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골자를 살펴보면,

 

- 구체적으로 청소년과 젊은이에 초점에 맞춰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구조를 탐색하여 참여와 관계에 대한 기존의 전통적 구조가 조정될 수 있고 그럴 필요가 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 민주적 참여와 관계, 관여에 혁신을 유도하고 모범사례를 찾아내서 전파하고 유지시킨다

- 모든 협동조합이 조합원 전략을 채택하고 매년 전략을 보고하도록 지원한다.

- 소셜미디어를 통한 논평, 대화, 논쟁, 관계와 같은 여타의 혁신적이면서 전통적인 참여의 형태가 조합원제도와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지 그리고 조합원, 후원자, 추종세력과 같은 서로 다른 참여의 형태가 이러한 상황에서 적절한지 여부를 고려해서 전통적 조합원제도의 요소들을 검토한다.

- 공동생산과 인적자원관리를 포함하여 기업조직의 맥락에서 혁신분야의 리더십을 확보한다.

- 개별적인 추진과제로서 자본이라는 주제와 연결되어, 협동조합 특성을 저해하거나 손상시지 않으면서 자본 제공자를 위한 조합원과는 다른 제한적인 형태의 참여를 검토한다.


아이쿱생협연구소가 번역한 이 보고서를 여기저기서 읽은 것으로 아는데, 협동조합운동의 전략으로 어느 정도로 고민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청소년과 청년의 특성을 반영하는 참여구조가 고민되고 있는지, 협동조합 내의 혁신적인 참여 사례가 전파/공유되고 있는 건지, 조합원의 참여를 끌어낼 전략이 매년 수립되고 있는 건지, 단순 홍보용 수단을 넘어 소셜 미디어가 쌍방향 소통의 수단이 되고 전통적인 참여형태와 접목되며 새로운 의사소통/의사결정구조를 만들고 있는 건지, 새로운 형태의 민주적인 리더십이 확보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맨 마지막의 자본확보와 관련해 조합원의 참여형태를 다각화하는 문제 정도만 사업의 필요성 때문에 논의되고 있다.

 

『레이들로 보고서』나  『협동조합 10년을 위한 청사진』과 더불어 우리는 한국의 협동조합운동 현실을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그런 노력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나? 협동조합기본법, 사회적경제기본법 등의 제도화와 관련된 논의들은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지만 협동조합의 내실을 다지려는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는지 의문이다. 우리는 정말 서기 2020년의 협동조합운동을 고민하고 있는 것일까? 매번 땜질하듯 단기적인 방법을 얘기하는 것 말고 어떤 장기적인 전망을 세우고 있나? 20세기 협동조합은 21세기 협동조합으로 전환될 수 있을까? 새로운 세대구성과 사회조건의 변화를 반영할 수 있을까?



3. 한국사회와 협동조합, 민주주의


협동조합이 ‘섬’이 아니라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협동조합의 민주주의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떤 수준인가?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경험할 수 있는 장은 어디인가? 마을, 학교, 공장, 사무실, 노동조합, 시민사회단체, 미디어, SNS, 어디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느끼고 경험하며 그 감각과 방법을 키우고 있을까?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조직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조직은 어떤 조직일까? 우리는 어디서 고정되고 획일화된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양한 민주주의‘들’을 활성화시키고 있을까? 무기력한 대의민주주의와 당위적인 직접민주주의의 대립을 넘어설 방법들을 어떻게 마련하고 있을까?

 

최근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무슨 민주주의가 더 필요하냐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지금으로도 민주주의는 충분하고 민주주의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지나쳐서 문제이고, 외국에서 얘기되듯이 현재의 문제는 과잉된 민주주의(demorecracy)라는 거다. 지금껏 자기 몫을 주장하지 못했거나 자기 삶과 연관된 결정들에 참여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공론장에 모습을 드러내면 기득권층은 기함하며 이들을 막아선다. 마치 당장 무슨 변고가 일어날 것처럼, 사회가 하루 아침에 무너질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한 때 몫 없는 자들의 민주주의라는 말이 유행했다. 몫 없는 자들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주체이니 치안의 질서에서 벗어나 강하게 ‘아니오’라고 외치며 정치를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건데,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치안의 힘이 너무 강하다. 제주도 강정마을, 밀양, 청도, 여러 지역에서 마을이 위협받고 있고, 쌍용자동차, 유성기업, 콜트콜텍, 여러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내몰리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권리의 목록을 제 아무리 길게 만들고 읽어줘도 그것을 실제로 쓸 사람이 적을 수밖에 없다. 몰라서 못 쓰는 게 아니라 알아도 못 쓰고 쓸 수 없는 게 약자의 권리 아니던가. 몫을 논하는 순간 돌아오는 이 폭력 앞에서 민주주의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한때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는 말도 유행했다. 개념에 앞서 한국에서 노동자와 청소년, 소수자들은 이미 헐벗은 삶을 살고 있다. 내가 그 현장과 자리에 서지 않기를 원할 뿐 우리는 ‘죽음의 뺑뺑이’를 돌고 있다. 언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는 존재들이다. 무기력한 민주주의가 이 뺑뺑이를 멈출 수 있을까?

 

사실 어떤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좀 과잉될 때에만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자신을 동등하게 대해달라는 목소리와 개입이 있어야 기득권이 해체되고 새로운 정치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잉이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은 기득권이 위협받고 있음을 뜻하기에, 어쩌면 우리가 조금 더 본질에 다가서는 것일 수 있다. 그러니 누가 과잉을 주장하는지 잘 살펴야 한다. 누가 민주주의의 과잉을 이야기하는가?

 

그리고 단순히 자기 몫을 못 챙기는 사람들을 탓할 문제는 아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몫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판단할 수 있는 장 자체가 없다. 중요한 정치의제는 언제나 중앙이나 외부에서 논의되다 삶으로 툭 떨어진다. ‘자아성찰’과 ‘자기판단’은 교과서에나 나오는 얘기이고 실제 삶에는 그런 과정이 없다. 수많은 착시현상들이 판단을 방해하니 판단력은 더욱 떨어지고, 똑똑한 사람들이 반드시 좋은 시민이라는 보장도 없으니 대략난감이다.

 

이런 한국사회에서 스스로 주체로 서지 못하는 민주주의, 서로를 알아보고 동등하게 인정할 수 없는 민주주의, 새로운 관계와 만남으로 이어지지 않는 민주주의는 가식이다. 내가 저들을 위해 권리목록을 만들고 보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물음이 필요하다. 우리가 어떤 세계에 같이 살고 있는가? 함께 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서로를 그렇게 마주보고 있는가?

 

우리 시대의 어려움은 정치와 민주주의를 경험할 수 있는 공공영역이나 공론장은 계속 줄어드는데, 권리를 교육받은 시민들은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서도 생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건 공리이지만,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공리는 분노보다 냉소를 낳기 쉽다. 이 냉소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또 다른 권리목록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의식화와 교육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을까?

 

역설적이지만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 시대에 공공성은 더욱더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그것은 국가와 시장, 시민 사회의 생각이나 이해관계가 엉키거나 충돌하는 지점이 늘어나고, 기후 변화나 먹을거리, 에너지 문제 등 국경을 넘나드는 사안들이 많아지는 우리 삶을 반영한다. 더 이상 혼자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고, 다가올 파국을 함께 대비해야 하기에 공공성은 점점 더 중요해진다.

 

물론 공공성 자체가 그런 다양한 사안에 관한 모범 답안은 아니다. 공공성은 우리가 같은 세계에 살고 있음을 자각하고 같은 세계 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안을 함께 논의하며 민주적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민주주의 없이도 공공사업의 진행은 가능하지만 공공의 이익은 민주주의 없이 확보될 수 없다. 우리가 서로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사고해야 하는 건 우리의 자유를 위해, 더 솔직하게는 우리의 삶을 위해서다. 협동조합운동은 조합원의 자유와 공공성 확보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

 

협동조합운동이 힘을 가지려면 이런 많은 질문들에 하나씩 답을 찾으며 사회의 변화에 동참해야 한다. 협동조합이 모든 역할을 다 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사회의 변화가 조합의 변화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에 끌려가지 말고 이끌어야 한다는 얘기이다. 리차드 세넷(R. Sennett)은 『투게더』(현암사, 2013년)에서 협동과 관련해 중요한 화두를 던졌다. 협력에도 기술이 필요하고, 세넷은 실험과 소통이라는 기술에 주목한다. 이 둘은 서로 연관되는데, “실험은 새로운 일을 하는 것, 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어나는 변화를 구축하는 것을 뜻한다. 젋은이들은 반복적으로, 점점 더 큰 규모로 연습을 해나가면서 소통하는 법을 배운다. 초기의 소통은 모호하다. 아기들이 보내는 신호가 애매모호한 것처럼 말이다. 놀이 규칙을 협상할 수 있을 만큼 자라면 아이들은 그 애매모호성을 협상하고 해소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상대방이 대답하기 전에 무엇을 말하는지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해석하는 기술, 발언만이 아니라 동작과 침묵까지 파악하는 기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잘 관찰하기 위해 스스로는 말을 자제해야 할지는 몰라도, 그 결과 나누게 되는 대화는 더 풍부한 보상을 가져다줄 것이다. 더 협동적이며 더 대화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테니까.” 우리는 이런 기술들을 연마해야 한다.

 

엄기호 역시 소통을 얘기하지만 우리 현실에서 듣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1) “우리에겐 소리로만 전달되는 고통을 들을 수 있는 감수성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하고요. 그런데 누구나 자신의 고통에 대해 토로하기 시작하면서, 말 아닌 방식으로 고통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설 자리는 점점 사라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불길한 생각이 듭니다. 고통의 목소리마저 독점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지금 누가 고통의 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당했는가를 먼저 관찰하고 찾아내서 그 소리와 말을 공적인 무대에 세우는 것이 민주주의라 생각하고, 이런 점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먼저 민주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사회적 경제, 협동조합운동을 외치면서 우리 사회가 단속사회, “자기를 ‘단속(團束)’하며 타자와의 관계는 차단하며 동일성에만 머무르며 자기 삶의 연속성조차 끊어져버린 상태”를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사회를 탓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더딘 민주주의이지만 한국사회에서도 이미 다양한 실험들이 진행되고 있다. 참여예산제도, 타운홀미팅, 어큐파이(occupy), 공유공간, 희망버스, SNS를 통한 이슈화 등. 이변 변화와 협동조합이 무관할까? 사회는 변하고 있는데 협동조합은 사회가 바뀌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섬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4. 조합원주권과 민주주의


한살림운동은 생산자/소비자협동조합을 뛰어넘는 ‘생산과 소비는 하나다’라는 중요한 화두를 제시했다. 그렇다면 이 화두는 어떻게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조합원주권은 이 하나됨 속에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조합원이라는 부름은 생산자와 소비자라는 규정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세계 협동조합운동의 역사를 보면 생산자/노동자협동조합과 소비자협동조합은 갈등을 거듭해 왔다. 소비자협동조합은 소비하는 조합원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하지만 사실 소비자협동조합이라 하더라도 조합원 주권은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조합원으로서의 정체성을 요구한다. 협동조합은 소비자에서 조합원으로 건너갈 징검다리를 놓아야 하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연계되는 협동조합이라면 같은 조합원으로 묶이는 이 양자에게 어떤 역할과 권한을 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안 맥퍼슨 교수가 지적했듯이 협동조합은 주권을 조합의 여러 의사결정기구가 아니라 조합원에게 줘야 한다. 조합원에게 주권이 있다 함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무기력한 반복이 아니라 조합 내의 주요한 의사결정과정이 민주적이어야 하고 조합원들이 그 과정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뜻한다. 그리고 협동조합이 그런 과정을 조직의 목적 중에서 최우선 순위에 놓아야 한다는 점을 뜻한다. 개별 소비자로서가 아니라 공통의 필요와 열망을 가진 협동조합의 조합원으로서 시민들이 자기 삶을 재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초기 한살림운동에서도 이런 주장이 등장한다. <한살림공동체소비자협동조합>의 초대 이사장이었던 이순로는 “죽어가는 밥상, 생명을 살리고 갈라진 삶을 더불어 사는 삶으로 만들 수 있는 길, 그것은 미리 깨달은 사람, 올바른 삶을 원하는 사람들이 서로 힘을 합해 작은 일에서부터 하나씩하나씩 실천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같은 뜻으로 그동안 한살림을 많은 가족들이 이용해 왔지만 이용만 해왔지 스스로 주인이 되고자 하는 노력은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한 발짝 더 나아가 손님의 자리에서 적극적인 살림꾼으로 탈바꿈한 것이 한살림공동체소비자협동조합이라 하겠습니다. 협동조합에 참여하게 되면 계획소비와 책임생산이 가능해져서 개별단위로 남아 있을 때 이용할 수 없었던 물품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되고, 공동구입, 공동나눔 속에 개인발전과 참삶의 맛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한살림운동은 무농약 농산물을 어떤 특정한 계층에 공급하는 이기주의적인 활동을 하자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협동적으로 만나 인간과 대지의 거룩한 생명을 살려내며 불합리한 삶의 모습을 걷어치우는 ‘함께 살림’ 운동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며 작은 힘을 모아서 꼭 해야 할, 또 누구나 할 수 있는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함께 합시다.”라고 강조했다.2) 이순로는 물품을 이용하는 손님이 아니라 삶의 주인이 되려는 노력을, 공동체 속에서 참삶을 찾는 협동운동을 강조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그래서 소비에는 ‘공부’가 중요하다. 소비영역의 활동에서 한살림의 특징을 찾는다면 공부모임에서 찾을 수 있다. “초창기 한살림을 더욱 한살림답게 한 것은 회원들과 진행한 공부였다. 1990년 4~5월에 걸쳐 열린 과천지역 한살림 공개강좌는 ‘공부하는 어머니는 생명을 키우고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주제를 내걸었다. 매월 정기강좌가 진행되고, 화곡이나 관악, 과천 등 활동 주체가 꾸려지고, 모임이 튼튼하게 꾸려진 곳에서는 지역강좌도 마련되었다. 공동체에서 스스로 교육 자료를 발행하기도 했다.”3) 외부의 전문가나 지식인을 불러오는 강좌나 스스로 만든 교육과정, 이런 다양한 공부들이 소비자의 의식을 조합원으로 변화시켰다. 이는 개별화된 소비자를 함께 소비하는 공동체로 조직했다. 지금도 이런 활동들이 ‘교육’과 ‘자주공부모임’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역한살림이 다양한 주제로 교육을 진행하고 지역의 식생활교육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전체 조합원 중 기초조직에 참여하는 비율이 1% 대라는 점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상황이다. 마을모임, 소모임, 매장모임 등이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그 모임들이 조합원의 ‘필요’와 ‘열망’을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장이 되고 있는지는 점검을 필요로 한다.

 

그런 점에서 ‘한살림 회원 생활 수칙’4)은 지금도 되새길 만한 수칙이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이웃과 더불어 깨끗한 환경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바람입니다. 하지만 물질문명의 사회 속에서 이 세상은 온갖 오염으로 정작 모든 생명체는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눈앞의 이익과 남보다 우위에 서고자 하는 욕심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실천하여 한살림을 이루고자 합니다.

- 언제나 나의 존엄함을 생각합니다.

- 나를 솔직하게 느낄 수 있는 기도와 수행을 생활화합니다.

- 힘닿는 대로 봉사하고 그것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 우리말 우리 글을 바로 씁니다.

- 음식은 먹을 만큼만 간단하게 조리합니다.

- 합성세재 대신 비누를 씁니다.

- 천기저귀와 면생리대를 씁니다.

- 쓰레기 양을 최소로 줄입니다.

- 유행을 따르지 않습니다.

- 땅을 투기의 대상으로 보지 말고 무분별한 토지개발을 반대합니다.

- 좋은 점을 찾아 칭찬합니다.

- 내가 먼저 인사합니다.

- 아이들에게 공동생활에 필요한 예의를 가르칩니다.

- 시간을 잘 지킵니다.

- 적은 액수라도 매달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위해 후원금을 내고, 사회운동단체에 가입해서 후원합니다.

- 지역문제에 관심을 갖고 적극 참여합니다.

- 생산자에게 편지를 하거나, 생산지를 방문하여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 육류의 소비를 줄이고, 자급 가능한 곡식과 채소 중심의 식생활로 바꿔나갑니다.

- 에너지를 절약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합니다.

- 작은 생명체라도 함부로 다루지 않습니다.

- 서로를 존중하는 말을 씁니다.

- 길에서 마주하는 아이도 우리 아이로 보살핍니다.

- 시설을 이용하는 놀이보다 자연 안에서 놉니다.

- 한살림 물건을 집을 때 ‘내가 작은 것 고르면 누가 큰 것 먹겠지’ 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 혼자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한살림운동을 이웃에 권하여 함께 펼쳐갑니다.

- 환경보전형 농업(유기농업) 육성에 힘씁니다.


수칙은 존재하는데 이 수칙에 따라 지금 이곳의 삶을 바꾸려는 노력은 존재하는가? 수칙을 수련하는 조합원은 얼마나 존재할까?

 

그리고 조합원 주권이 실현되는 장은 어디인가? 총회인가, 이사회인가? 매장인가? 인터넷 장보기인가? 조합원의 주권이 실현되는 구체적인 장이 있고, 조합원이 그 장의 영향을 받으며 조합원 의식을 강화시켜야 협동조합이 정체성이 강화되고 협동운동이 확장될 수 있다. 마거릿 콘(M. Kohn)은 이런 협동조합운동의 확장을 ‘감염’으로 본다. “물리적 접촉으로 새롭고 위험한 이념의 확산이 촉진된다”는 것이다. “협동조합은 출신이 다양한 회원과 연대 구조, 영토적 기반을 확보하며 정치 동원의 토대로 구실하기에 아주 적합한 조직”이었고, “생계를 위해 충분한 수입을 얻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기부금에 기댄 것이 아니라 상인이나 중개인에게로 돌아갈 잉여가치의 일부를 자원으로 나누어” 줬다. 그러면서 협동조합은 “다양한 농민과 노동자가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정치적․경제적 투쟁을 위한 자원을 획득하는 방식이 되었”고, “그러한 자원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연대감, 즉 생산과 소비 과정에서 발생한 구조적 변화의 결과로 비슷한 지위 하락을 경험하던 다른 개인들과의 수평적인 유대감이었다.”5) 주권은 수평적인 유대감 속에서만 제 몫을 할 수 있다. 이런 변화를 이룰 방법을 찾는 건 여전히 과제이다.



5. 나가며


이 많은 과제들을 한꺼번에 모두 해결하자는 것은 아니다. 사회현실의 변화에 맞추어, 때로는 그 변화를 거스르며 자기 정체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협동조합이 무엇을 할 것인지, 그 속에서 새로운 민주주의는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 그와 관련해 조직구조를 어떻게 바꾸고 내부의 역량을 강화시킬지, 조합원들과의 접점을 어떻게 만들고 주권을 강화시킬지, 이런 부분들에 대한 고민이 하나씩 진행되며 협동조합운동의 중장기적인 발전계획을 구상해야지만 2020년의 협동조합운동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하나하나의 협동조합들이 자본주의 속에 틈을 만들고 조금씩 역량을 강화시켜도 그것이 하나의 섬이 되어버린다면 그건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

 

요즘 한국의 협동조합운동이 이념에 치우쳐 있다는 평가를 간혹 듣는데, 대체 그 이념의 실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형태도 없이 공허하고 흐릿하게 나열된 것은 이념이 아니다. 이념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좌표이다. 사기업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만 협동조합이 존재한다면 그건 사회현실을 바꿀 수 없을뿐더러 대안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망감을 안겨준다. 우리 시대의 냉소주의와 맞서려면 운동이 자기 원칙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이념을 바로 세워야 한다. 녹색이 ‘녹색성장’으로 왜곡된 시대, 협동조합이 ‘창조경제’로 둔갑되는 시대일수록 이념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아직도 한국의 협동조합운동에 이념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이념과 그 이념을 실현할 구체적인 사업들이 드러나지 않는 한, 우리는 매우 공허한 이야기들만 서로 주고받을 것이라 믿는다. 반면에 이념적이라 말하는 사람들의 방법은 생존전략이기에 구체적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마취제 놓듯이 몽롱하게 현실을 바라보게 한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진짜 실용은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현실을 제대로 분석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생존을 이야기할까? 세월호 사건을 통해 드러난 것은 몇몇 정치인의 무능이 아니라 정부시스템의 무능이고, 삼성그룹을 통해 증명된 것은 시장의 부패이다. 이 무능과 부패 속에서 침몰하는, 어쩌면 이미 침몰해버린 것은 사회이다. 이 침몰을 이야기하지 않고 대안을 얘기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 모두 현실주의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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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4.04.13 22:46

곧 '도서출판 삶창'에서 나올 <모두를 위한 마을은 없다>(가제)에 실린 모임 후기이다.

대화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이 각자 후기를 쓰기로 했는데, 이건 내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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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을 마치고 난 뒤 가장 큰 변화는 가족과 함께 옥천으로 이주를 했다는 점이다. 꼭 이 모임 때문에 이사를 한 것은 아니다. 2006년부터 수도권을 떠나야 제대로 지역을 고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수도권을 제외하면 곳곳에서 마을이 무너지고 있는데, 살만한 곳을 끼고 마을 운운하긴 싫었기 때문이다. 삶이 앎을 받쳐주지 못하면 언젠가는 폭삭 내려앉을 것 같았다.

 

이 모임을 진행하는 중에도 어디로 내려갈까 계속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그러다 애초에 계획에 없던 옥천으로 이사를 한 건 우연한 선택이었다. 옥천이 가장 이상적이어서 옥천을 택한 건 아니었다. <옥천신문>이 있다는 점, 주민들의 다양한 시도가 있다는 점, 농촌과 소도시라는 점이 옥천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연고도 없고 일을 찾기도 어려운 옥천을 선택한 건 역설적이지만 당장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옥천으로 내려오기까지 몸도 힘들었고 맘고생도 심했지만 오고난 뒤엔 마음이 좀 차분해졌다. 짐정리가 대충 끝나고 난 뒤에는 옥천 시내를 천천히 걸어다닌다. 주로 아이의 손을 잡고, 때로는 혼자서. ‘거리가 왜 이리 한산하지’라고 생각했다가 ‘내가 참 붐비는 곳에 살았구나’로 생각을 고쳐먹고, 지방에 강연을 가기 위해 여러 번 차를 바꿔 타며 ‘왜 이리 불편하지’라고 생각했다가 ‘그동안 참 편리한 곳에 살았구나’라고 생각을 고쳐먹는다. 아파트에서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오니 직접 손을 대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거참, 번거롭네’라고 생각했다가 ‘그동안 참 많은 사람들의 손을 빌리며 살았구나’라며 반성한다.

 

옥천에 와서도 계속 느끼는 건 안전한(?) 지역이 없다는 거다. 한국 어디건 지역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개발사업이 들어온다. 열심히 마을을 만들어도 이런 노력을 한 번에 밀어버리는 것이 바로 개발사업이다. 이 사업은 우리가 발전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이미 발전의 극단을 달리는 수도권에 살고 있지 않는 이상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지방에 내려가면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건 외지인의 땅이다. 농사를 짓지도, 살지도 않는 사람들이 땅을 소유하고 있다. 살지 않으니 이런저런 계획만 잡히면 냅다 땅을 판다. 토지문서만 있고 주인이 없는 땅은 지역을 힘들게 만든다.

 

그리고 마을에 아무리 좋은 말을 갖다 붙여도 지금의 마을은 불안하다. 이웃끼리 얼굴 알고 수다떨며 잔치도 열고, 참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건 서로의 관계가 좋을 때이다. 서로 생각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충돌한다고 느끼는 순간 그 얼굴과 수다와 잔치는 고통으로 변한다. 나는 천국이 지옥으로 변하는 걸 경험했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편이다. 비단 마을만 그럴까? 시민사회단체나 마을과 공동체를 얘기하는 기업, 협동조합에서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환상은 자꾸 깨진다. 다행이다.

 

또한 마을에서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 행복하다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대체 누구를 만나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왜냐하면 자급하는 삶이 아니라면 아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마다 마음도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아파트 경비 아저씨를 알면 눈이 올 때마다 마음이 무겁고, 계단을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를 알면 왠지 조심스러워진다. 그리고 같은 마을에 살지 않아도 박영길 샘을 알고 난 뒤 청소노동자가 보이기 시작하고, 김신범 샘을 알고 난 뒤 마을에 있는 기업들이 보이기 시작해 고민이 많아진다. 모든 관계는 친밀하고 가깝다고 하나 모든 관계를 그렇게 만들어야 할까, 그리고 그걸 내가 다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이 든다.

 

사실 나는 마을과 관계를 강조하지만 그것을 통해 모든 걸 해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름답고 친밀한 관계 속엔 나름의 독도 있다. 그 아름다움과 친밀함을 유지하기 위해 불편한 것들은 모두 감춰진다. 서로 합의할 수 있는 것들만 이야기하고, 나눌 수 있는 것들만 나눈다. 누군가가 불편함을 드러내는 순간 그 사람은 왕따가 되고 마을에서 밀려난다. 왕따를 만들어 단합되는 마을은 마을운동이 아니다. 불편한 타자와도 공존할 수 있을 때에만 마을은 마을운동이 될 수 있다. 사실 그 불편함이란 것의 속내는 결국 이기적인 것이 아니던가. 더 이상 불편해지기 싫다는, 때때로 고통을 통해 맞보는 기쁨이 싫어지고 그냥 편해지고 싶다는. 이기적인 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아니지만 그것을 이기적이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여러 문제들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이기적인 불편함을 보편타당함으로 포장하려 할 때 무리한 논리가 만들어지고 편견과 강압이 생긴다.

 

이 모든 문제가 개인의 탓은 아니다.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장벽들이 개인의 편견을 재생산하고 확대시킨다. 마을이 이런 편견과 구조적인 문제 밖에 존재한다고 믿는 건 큰 잘못이다. 이 모임에서 확인한 건 개인의 잘못이나 실수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들이 그렇게 마을을 몰아가기도 한다는 점이다. 개인과 구조, 이렇게 이분법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지금의 사회분위기는 개인을 지나치게 몰아세운다. 개인의 가능성이 구조를 뛰어넘을 수도 있지만 그건 가능성일 뿐이다. 마치 그 가능성이 보편적인 것처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처럼 만드는 것은 다양성을 파괴한다. 마을이 만능의 법칙처럼 논의되면서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

 

이 모임에서 많이 논의된 바는 바로 이 다양성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함께 사는데, 우리는 그 속에서 자신에게 익숙한 색깔만을 골라낸다. 아이 하나가 자라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듯이, 마을이 제대로 서려면 다양한 운동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역 내에선 복지 따로, 노동 따로, 교육 따로, 모두가 따로따로이다. 이러니 체계를 갖추고 밀어붙이는 정부와 기업의 힘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뭉쳐도 시원찮을 판에 쪼개지고, 마을만들기사업은 이해관계까지 만들어 단체들이 비슷한 사업을, 선정될 만한 사업을 경쟁적으로 벌이기도 한다. 서로가 서로의 성장을 지원해줘야 정부와 기업에 맞설 힘을 만들 텐데,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 말로만 떠드는 연대로는 지역의 작은 개발사업조차 감당하기 어렵다. 이렇게 힘이 약해진 상태에서 무슨 마을의 힘을 논하나.

 

그리고 우리는 아직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다. 강정마을이나 밀양, 청도의 마을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 참여한 적은 있으나 그 싸움이 우리의 싸움은 아니다. 뭔가를 지키기 위한 방어적인 싸움이지 우리의 뜻과 의견을 실현할 공격적인 싸움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을은 이런 싸움을 벌일 수 있는 좋은 진지여야 하는데,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종합하면 마을은 마치 행정이 지역 속에 투입한 ‘트로이의 목마’같다. 행정의 언어가 마을의 언어를 대체하고 행정의 관점이 마을의 경계를 정한다. 행정과 기업의 자원이 마을을 움직일 동력을 만들고, 행정의 지표로 마을의 활동이 평가를 받는다. 놀라운 건 마을이 스스로 이런 순응을 내면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니 이제 마을 쪽에선 비판이나 감시, 투쟁이라는 말을 듣기가 어렵다. 현실은 개판인데 주옥같은 말만 들린다.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는데 벌써 무기를 내려놓았다.

 

나는 이 모임 때문에 마을에 대한 생각과 걱정이 더욱더 많아졌다. 그러니 마을운동과 공동체운동을 지지하는 내게 이 모임은 별로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 셈이다. 그럴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떠들어보니 생각보다 더 심각한 단면이 드러났다. 내가 앞으로 마을운동과 공동체운동을 등진다면 그건 이 모임의 탓이다.

 

그래도 나는 마을을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들을 연계하고 공유지를 늘려가는 일에 계속 관심을 두며 활동할 것이다. 비어 있는 곳이기에 누군가는 채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옥천으로의 이주는 그런 활동을 더 정색하며 하겠다는 결의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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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4.03.08 22:26

안녕들 하세요? 저는 얼마 전 충청북도 옥천군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부산에서 태어나 20년을 보냈고, 수도권에서 그 이상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곳 옥천은 태어난 곳도, 지금까지 살아온 곳과도 다른 전혀 새로운 곳입니다. 어떤 이는 귀촌, 귀농한 것이냐 묻지만 옥천에서 구한 집은 읍내에 있고 농촌보다는 작은 도시 풍경에 가깝습니다. 농사를 못 짓는 백수이구요. 그러니 귀촌도 귀농도 아닌 거지요.

그러면 왜 옥천으로 갔느냐? 수도권에 사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 힘들어졌어요. 대부분의 자원을 외부에서 지원받으면서도 고마움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곳, 그러면서도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자원을 독식하고 있는 곳이 부담스러웠죠. 풀뿌리운동과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수도권에 사는 것이 왠지 모순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가족과 수도권을 떠나자는 이야기를 나눴고 일단 가보자는 합의가 되어 옥천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우리 귀엔 낯설지만 옥천군은 1989년 주민들이 직접 만든 옥천신문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옥천신문은 25년 동안 지역의 중요한 공론장이 되어 왔습니다. 2008년에는 친환경농업인들을 중심으로 옥천살림 영농조합법인이 만들어져 어린이집과 학교에 지역의 먹거리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2013년에는 지역 내의 자활센터,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등이 힘을 모아 옥천순환경제공동체를 만들고 지역대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남면은 주민들이 운영하는 지역발전위원회와 어머니학교, 배바우도서관, 배바우장터, 작은음악회로 유명한 곳입니다. 인구 5만 3천명의 작은 군에서 이런 다양한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희망만 있는 건 아닙니다. 옥천에는 5일장이 섭니다. 외지 사람들에게는 낭만적으로 들리겠지만 현지 주민들의 느낌은 다릅니다. 북적이는 5일장에 물건을 팔러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외지인이고, 그에 비하면 옥천주민들이 주로 있는 상설시장은 썰렁합니다. 선거가 다가오니 군수는 이당 저당을 떠돌고, 학생 수가 줄어 폐교되는 학교도 계속 나옵니다. 산업단지, 농공단지, 이런 사업들도 지역경제를 내세워 계속 시도됩니다. 한국 어느 곳에나 불안은 존재합니다.

그래도 30분이면 걸어서 돌 수 있는 읍내라 길에서 사람들도 자주 만나고 이야기도 자주 나눕니다. 시민에서 군민이 되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함께 사는 거겠죠. 다른 지역에서도 꼬물꼬물 희망이 싹트고 있다는 소식 전합니다. 따뜻한 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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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4.02.28 09:25

공동체(共同體)는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다. 영어 community는 라틴어 communis에서 유래되었는데, 『옥스퍼드영어사전』에 따르면 이는 ‘함께’를 뜻하는 com과 ‘의무나 책임, 선물을 준다’는 뜻의 munis의 조합어이다. 즉 공동체는 함께 어떤 책임을 지거나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사람들이다. 공동체는 그 나름의 관습에 따라 같이 일하고 가진 것을 나누며 공동의 목적을 추구한다. 따라서 그런 관계가 맺어진 곳은 어디나 공동체가 될 수 있다.

 

공동체는 서로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가난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혼자서도 잘 살아갈 사람들에게는 공동체가 그리 절실하지 않고, 반면에 같이 아파하고 기뻐하며 힘을 모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공동체는 참으로 절실하고 소중한 것이다. 어느 한 편이 다른 편을 일방적으로 도와주는 관계를 뜻하지 않기에 공동체의 힘은 관계를 통해 서로의 힘을 북돋운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이런 점을 자각할수록 그 힘은 강해진다.

 

구성원들이 서로 책임을 지거나 살림살이를 나누는 곳이기에 공동체는 어느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규정한 목적을 실현하거나 이미 규정된 목적만을 실현하지 않는다. 그곳은 구성원들이 관계를 만들어가는 장이고, 그래서 공동체의 경계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문턱은 아니어야 한다. 타자를 배제하는 유명한 공동체보다 공동체라 불리지 않아도 우정을 맺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이 훨씬 더 공동체적인 이유는 그 때문이다. 동서양 어디서나 인류 역사에서 이런 공동체들을 수없이 많이 찾아볼 수 있고,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기에 예전에는 공동체가 절실히 요구되지 않았다.

 

공동체가 사회의 중요한 대안으로 불리기 시작한 시기는 자본주의의 등장 이후이다. 칼 폴라니(K. Polanyi)가 블레이크(W. Blake)의 싯구를 인용해 표현했듯이 자본주의는 ‘악마의 맷돌’이었다. 자본주의는 이전의 관계를 완전히 해체시키고 인간과 자연을 화폐로 측정되고 거래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생산과 소비의 관계를 끊고, 우리 삶에 필요한 다양한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들,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방인들을 계속 만들었다. 이렇게 맷돌에 갈려나간 사람들은 서로의 삶을 지지해줄 관계를 다시 찾게 되었다. 지금도 신자유주의라 통칭해서 불리는 여러 사회변화들은 공동체의 필요성을 도드라지게 만들고 있다.

 

협동조합은 이렇게 가난해진 사람들이 다시 서로를 마주보고 서로에 의지하며 사회의 주체로 서려는 곳이다. 그래서 협동조합은 타자를 만나는 공간이자 자신을 만나는 공간이다. 자신을 인정하거나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이 타자를 인정하거나 존중할 수 없듯이, 나와 약속할 수 없는 사람은 타자와 약속할 수 없다. 내가 남에게 기댈 수 있어야 남도 나에게 기댈 수 있고, 내가 스스로 일어서야 타자도 일어설 수 있다. 협동조합은 타자와 더불어 좋은 삶을 누리기 위한 나의 조건을 만드는 곳이고, 협동조합은 그 목적을 공통의 것으로 조직하고 실천하는 곳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 마주 보고 투명인간과 이방인들이 그 재화와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과 마주볼 방법을 찾을 때 다시 공동체의 관계가 시작된다. 그런 점에서 협동조합은 이미 존재하는 공동체를 활용하려는 곳이 아니다. 협동조합은 관계망을 찢는 자본주의에 맞서 싸워야 하고, 때로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것을 내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협동조합은 공통의 필요를 조직하고 공통의 열망을 실현하려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협동조합과 공동체는 매우 비슷한 관계를 형성하려는 곳이다.

 

그렇지만 생활수준이 비슷한 사람들만의 공동체, 폐쇄적인 공동체가 공동체란 말의 의미를 왜곡하듯이, 자본주의 영리기업과 비슷해지는 협동조합이 협동조합의 공동체성을 파괴할 수도 있다. 협동조합도 협동보다 경쟁을, 관계보다 소유를, 연대보다 시기를, 사랑보다 무관심을 퍼뜨리는 곳이 될 수 있다. 그 옛날 예수의 공동체가 기독교로 제도화되었듯이 협동조합도 공동체성을 포기할 경우 비슷한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래서 공동체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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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똘 2013.11.10 22:06

협동조합 강의를 나갈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질문은 정부에게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냐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속이 좀 쓰리다. 오죽 했으면 저런 기대를 할까 안타깝기도 하지만, 지원을 못 받으면 협동조합을 하지 않을 것 같아 힘이 빠진다. 허공에 헛된 단어들을 뱉으려고 나는 이 자리에 섰던가, 뭐 이런 우울한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답은 해야 하니 협동조합은 정부에게 직접 지원을 받지 못한다고, 협동조합의 정체성은 정부로부터 독립되고 자율적이어야 한다고 답한다. 너무 실망하는 듯 하면 직접지원은 어려우나 공공기관에 납품할 때 우선순위를 얻거나 공간을 지원받을 수는 있다고 답한다. 그럴 거면 왜 협동조합을 하라고 이런 강좌를 여느냐 묻는 경우도 있다. 나 역시 그렇게 묻고 싶다. 대체 왜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경제와 관련된 강의들이 지역에 넘쳐 날까? 여기에 뭔가 해답이 있다고 믿는 걸까?

협동조합기본법이 만들어져 협동조합을 만드는 건 쉬워졌다고 한다. 하지만 직접 설립준비를 해본 사람은 안다. 하나도 안 쉽다. 정관 하나 마음대로 못 하고 표준정관에 맞추라는 잔소리를 들어야 하고, 사업 시작도 안 했는데 사업계획서에, 예산서에, 임원 명부, 설립동의자 명부, 창립총회 공고문, 창립총회 의사록 등 귀찮은 일이 한 가득이다. 이런 과정을 지원한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행정 입장에서 잔소리를 하지 자기 마음으로 일을 돕는 경우는 흔치 않다.

지원도 없고 설립할 때도 품이 많이 들고, 그렇게 만들고 나면 협동조합이 알아서 잘 굴러가나? 그렇지도 않다. 우리가 5명 이상 모여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 본 게 언제였던가? 심지어 사업과 관련된 결정을, 이해관계가 얽힌 결정을 내려야 하니 쉽지 않을 수밖에 없다. 삶터에서나 일터에서나 그런 현장경험을 쌓을 기회가 거의 없지 않은가. 그리고 사업을 하려면 자본금이 필요한데, 조합원의 출자금만으로 자본금을 충당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딜레마이다. 사업을 본격적인 궤도 위에 올려놓아야 돈이 생길 텐데, 거기까지 가기가 쉽지 않다. 경험도 부족, 자본금도 부족, 지원도 부족, 3부족인 협동조합이 어떤 대안이라는 건가?

그런데도 올 9월까지 설립신고가 된 협동조합이 2,600여개를 넘는다. 10개월 동안 이 숫자가 만들어졌으니 하루 평균 9개 정도의 협동조합이 만들어진 셈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협동조합들은 우리 사회에서 어떤 공통의 필요와 열망을 조직하려는 걸까? 당장 눈에 보이는 건 익숙한 공동구매나 공동판매, 일자리이다(서울시를 기준으로 보면 문구나 식료품을 공동구매하거나 판매하겠다는 협동조합이 가장 많고, 강사 양성이나 창업교육 등 교육 및 서비스업, 출판․영상․통신 등 정보서비스업이 많다고 한다).

그런데 공동구매나 공동판매가 협동조합의 전유물도 아니고 이미 온/오프라인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곳이 많다. 그리고 다른 전문기관들이 협동조합의 교육이나 서비스보다 질이 떨어진다고 얘기할 수도 없다. 없는 시장을 새로이 개척하는 경우라면 모르겠으나 이미 있는 시장에서 영리기업들과 경쟁해서 살아남는 건 지금의 경제상황에서 매우 어려운 일이다.

어렵게 만들어도 성공을 자신할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도 협동조합의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어려우니 협동조합을 만들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협동조합의 힘을 깨달으며 활동을 시작하면 좋겠다. 혼자서는 하지 못할 일을 하기 위해 협동조합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나와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그런 필요와 열망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만나야 협동조합의 힘이 생길 수 있다. 강좌를 듣는 게 아니라 강좌를 듣는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몇몇이 모여 뚝딱 설립신고를 하는 게 아니라 비슷한 필요와 열망을 가진 사람들을 찾고 만나야 한다. 함께 공부하고 밥을 먹으며 관계를 다져야 협동의 힘이 살아날 수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어려운데 새로운 일을 더 할 수 있을까 주저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왜 잘 안 풀리고 어려울까 생각해보면 그 일로는 풀리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내 일이 어려운 건 내가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서일지도 모른다. 옆의 사람을 믿고 자리를 내어주는 것도 협동이다.

피에르 신부와 함께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엠마우스 운동을 시작한 사람은 감옥에서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던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를 찾아온 피에르 신부는 그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말하지 않고 어차피 죽을 것 죽기 전에 집 한 채만 짓자고 말했다. 피에르 신부의 손을 잡고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신부님께서 제게 돈이든 집이든 일이든 그저 베푸셨더라면 아마도 저는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겁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살아갈 방편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협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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