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뒤로 넘어지는 경험'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2.11.29 혁명의 기도가 현장을 휩쓸 때(오늘의 교육)
posted by 몽똘 2012.11.29 09:45

2주에 한번 월요일마다 동네 주부들과 사회과학강독회라는 모임을 가진다. 혼자서는 안 읽을 두꺼운 책 또는 어려운 책을 정해 같이 읽고 얘기를 나누는 모임이다. 다들 아이를 둔 부모인지라 어떤 책을 읽던 부메랑처럼 교육 이야기로 돌아가고, 모임 마치고 밥을 먹는 시간에도 주된 주제는 교육이다. 주로 학생이나 교사의 입장에서만 얘기를 듣고 생각했는데 이 모임에서는 ‘부모’의 입장, 특히 ‘엄마’의 입장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밖에서는 엄친아다, 헬리콥터맘이다, 엄마들의 교육열을 비꼬지만, 정작 엄마들은 ‘우친엄(우리 친구 엄마)’에 대한 부담을 얘기한다. 우리 친구 엄마들은 이런 거 저런 거 해준다는데 엄마는 왜 그래?, 엄만 나한테 관심이 없어?, 이런 얘기를 아이에게 듣는다고 한다. 물론 부모 귀에 다른 얘기가 그렇게 들렸을 수도 있고, 비평준화 지역이고 이우학교가 있으며 조기교육, 입시교육 열기가 뜨거운 동네의 영향도 클 것이다. 그래도 이 얘기에서 느껴지는 결은 엄친아, 우친엄이 같은 현상의 다른 이름이고 서로가 서로를 옥죄고 자신을 갉아먹는 ‘절망의 알리바이’라는 거다.

강독회에서 이계삼 선생님의 《영혼없는 사회의 교육》도 읽고(선생님을 동네로 한번 모시기도 했고), 기타하라 마사키가 쓰고 우토 오사무가 그린 《현미선생의 도시락》을 읽으며 땅을 만지는 교육에 관해 얘기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넘기 어려운 벽은 자기 변화에 대한 공포이다. 우리만 변해서 뭐가 달라지냐, 대안이 있어야 마음을 고쳐먹을 것 아니냐는 알리바이의 그늘이 여전히 삶을 뒤덮고 있다.

 

누구나 가야 하는 대학에서 누구나 갈 수 있는 대학으로

 

얼마 전 이 모임에서 <어셉티드(accepted)>라는 영화를 봤다. 국내에 개봉되지 않은 영화이고 DVD로는 출시됐는데, 번역된 영화제목은 <짝퉁 대학생>이다. 영화의 의미를 뒤집는 참 기묘한 제목인데, 어쩌면 우리 사회의 상식을 드러내는 제목이기도 하다. 《의자놀이》를 둘러싼 논쟁으로 증명되었듯, 발언의 의미에 주목하지 않고 진짜/짝퉁이라는 틀로 논의를 몰아가는 경우가 많으니.

<어셉티드>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미국 내 어느 대학에도 합격하지 못한 바틀비는 친구들과 정신병원을 접수해 SHIT이라는 가짜 대학을 만든다. 그런데 부모를 속이기 위해 만든 대학 웹사이트(클릭하면 입학되었다accepted고 뜨는 대박 사이트!)를 통해 대학에 가지 못한 청년들이 몰려들고 바틀비는 이들‘과 함께’ 대학을 운영한다. SHIT이 잘 운영되자 옆의 대학에서 ‘진짜 대학생’들이 몰려들고, 결국 그 대학의 총장이 SHIT을 불법교육기관으로 교육청에 고발한다. 그러나 교육청은 SHIT의 교육성을 인정하고 다시 문을 열게 한다. 좀 뻔한 줄거리이지만 영화 곳곳에서 드러나는 교육과 사회에 대한 풍자가 깨알같은 재미를 준다.

그 재미를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SHIT(South Harmon Institute of Technology라는 그럴싸한 이름이지만 약자로 만들면 ‘제기랄’이라는 욕이다)은 하먼 대학이라는 유명사립대 옆에 있는데, 재미있게도 그곳은 원래 정신병원이었다. 정신병원에 대학을 세운다니 끔찍한 발상 같지만, 생각해보면 대학, 학교라는 공간이 사실상 정신병원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 자유를 억압하고 감금하고 멍 때리게 만들고 때로는 약물까지 복용하게 만드는 곳이 학교 아닌가. 그러니 이건 풍자가 아니라 고발이다.

그리고 정신병원을 대학으로 만드는 역사를 일으킨 이는 달랑 4명이고, 이들은 특별한 능력자도 아니다. 이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준 건 이들의 능력이 아니라 대학에서 공부하려고 온 사람들과 그들의 등록금이다. 사실 한국의 비싼 등록금이면 어떤 학교든 못 만들까. 그리고 한국의 사립대처럼 따로 적립금을 모아둘 필요가 없으니 시설투자도 과감하다. 한때 유행어처럼 대학 만들기 참 쉽죠, 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대학에서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이 역시 지극히 단순하다.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배우고 싶은 일을 서로 나누면 된다. 모두가 학생이자 교수이다. 내가 남들보다 잘 하는 일, 내가 남에게 배우고 싶은 일을 칠판에 적어서 나누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교육과정이 만들어진다. 너와 나의 능력을 나누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면 도움을 줄 사람을 찾아 길을 떠나거나 그 사람을 데리고 오면 된다. ‘새로움’에 현혹되어 내가 가진 능력을 버리지 않고 지금 내가 가진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것이 진짜 공부이고 교육 아닌가.

 

물론 새로운 실험이 시련을 겪지 않을 수는 없다. 영화에서 SHIT이 진짜 대학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학생들은 대학을 떠난다. 하지만 곧 그들은 자신이 경험했던 교육이 진짜 공부라는 점을 깨닫고 SHIT를 지지한다. 경험의 힘은 편견의 힘을 넘어설 수 있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건 따분한 충고나 꿈나라 상상력이 아니라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진행될 조그만 시도들이다. 인생은 새로운 가능성들로 가득 찼다는 점을 증명할.

 

또 하나 재미있는 건 주인공의 이름이다. 일부러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지만, 바틀비는 《모비딕》의 작가로 알려진 허만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이다. 책에서 바틀비는 상대방의 물음에 늘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고 답한다. 좋다/싫다, 긍정/부정도 아니고 질문한 사람을 난감하게 만드는 이 대답! 우리는 언제나 대안을 찾고 대안이 있어야 뭔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당장 스스로 대안을 제시할 수 없는 이들에게 그런 요구는 뭔가 부조리하다. 바틀비는 그런 부조리함에 부조리함으로 맞선다. 바틀비는 일방적으로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고 공손하지만 단호하게 절대적 불복종을 선언한다.

 

흥미롭게도 국내에도 몇 권의 책이 번역된 바 있는 존 테일러 개토는 ‘바틀비 프로젝트’를 주장한 바 있다.1) 시험이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조용히 시험을 거부하자는 것이다. 전혀 어렵지 않다. 시험지에 ‘나는 이 시험을 보고 싶지 않다’라고 쓰면 된다. 조직이나 위계질서를 만들지 말고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도록 시험지에 불복종을 선언하는 문구만 남기면 된다. 개토는 이 시도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얘기한다. 왜냐하면 이미 “대학은 다른 무엇이기 이전에 하나의 사업”이기에 고객을 필요로 하고, 기업체는 고객의 요구에 부응할 수밖에 없다고.

 

허나 한국에서 바틀비 프로젝트가 성공할지는 모르겠다. 한국의 대학은 단지 기업이 아니라 학벌을 재생산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대학에 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좋은 대학’에 가야만 대접받는 우리 현실에서는 아무리 대안이 출현해도 그 대안이 또 다른 형태의 기준을 만들지 못하면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그리고 대안을 표방한 것들이 또 다른 형태의 기준들을 실제로 만들어 왔다). 학벌을 위해 교육이 존재하고, 사회적 지위의 대물림이나 미래의 생존도 학벌에 달려 있는 한국에서는 절대적 불복종도 알리바이를 깨기 어렵다.

 

그리고 바틀비에게는 그 스스로 풀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문강형준은 바틀비에 내재된 모순을 지적한다. 바틀비의 절대적 부정이 힘을 얻으려면 자신을 지킬 장소가 필요한데, 어떤 면에서 바틀비는 “행동할 수 없는 무기력증과 기약 없는 기다림이라는 태도”를 내면화하기 때문이다. 《필경사 바틀비》가 극단의 불복종인 자결로 삶을 마감했듯이, 그 불복종은 우리 안의 회의와 냉소를 강화시킬 수도 있다.2) 뿌리내릴 땅이 없다면, 손잡아줄 동지가 없다면, 강인한 바틀비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모임에서 함께 영화를 봤을 때도 분위기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모인 사람들의 반응은 공감도, 냉담함도 아닌 답답함이었다. 누군들 자식이 좋은 교육을 받길 원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그런 대학이 없다는 것이다. 대학을 직접 만드는 영화를 보면서도 그런 대학이 없음을 한탄할 수밖에 없는 이 답답함을 어떻게 해야 하나.

 

진짜/가짜, 진품/짝퉁, 성공/실패라는 식의 이분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한 이 답답함은 풀릴 수 없다. 새로 대학을 만들어도 그 대학이 ‘좋은’ 대학이어야 한다면 그건 알리바이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 새로운 대학을 기대해도 그 대학이 다른 이의 손으로 세워져야 한다면 그 역시 마찬가지이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성공이 아니라 뿌리내림이다. 불안하고 공포에 떨지 않아도 삶을 살 수 있다는 자신감, 그건 내 속에 있고 우리 속에 있다. 그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를 그 주체에게 맡겨준다면 답답함은 사라질 수 있다. 나만이 할 수 있다는 개인적인 경쟁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보편적인 능력을 믿는다면 알리바이의 힘은 약해진다.

 


혁명에는 육법전서가 없다.


개인적으로 한승훈의 《혁명을 기도하라》(문주, 2012)를 올해의 책으로 꼽는다. 최근 레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펜타그램, 2012)가 순위다툼을 하고 있지만 그 책의 감동에서 쉬이 벗어나기 어렵다. 책표지엔 검은 예수와 체게바라의 사진이 겹쳐져 있다. 아나키스트 예수의 탄생, 혁명의 예언자 불온한 예수의 탄생이라니, 이보다 더 후끈할 순 없다.

 

서론만 읽어도 후끈 달아오른다. “이 책이 포착한 성서 속 예수는 오늘날 한국의 주류 개신교가 그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독생자’, ‘우리 죄를 대속하신 구세주’와는 전혀 다른 존재다. 차라리 그는 반란과 전복의 붉은 예언자였으며, 평화 대신 소란을 일으키기 위해 온 자, 버려진 자들과 거친 황야를 주유하며 체제와 세상 모든 권력을 조롱하고 비웃는 자였다. 따라서 예수는 질서와 안녕을 위해 무릎 꿇고 기도하는(Pray) 그리스도가 아니라 맨발로 대지를 딛고 모든 체제와 권위를 뒤엎는 혁명을 기도(Attempt)하는 불온한 예언자였으며, 오늘날로 치면 아나키즘을 상징하는 검은색이 어울리는 검은 메시아였던 것이다.” 할렐루야, 내가 기다렸던 holy anarchist의 출현이다.

 

예수가 태어났을 당시는 종말을 앞둔 혼란기였다. 로마제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무장투쟁세력인 젤롯이나 시카리, 유대 율법을 철저히 따르며 제국에 대항하는 지식인 그룹인 바리사이, 그 세상의 종말을 선포하며 집단이주운동을 이끄는 예언자 그룹인 카라이도 있었다. 예수는 예언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좀 달랐다. 예수는 지식을 내세워 교계를 비판하지도 않았고 무장투쟁을 벌이지도 않았다. 예수는 로마제국의 법률도, 유대교의 율법도 지키지 않았다. 다만 예수는 “마음과 삶, 관습, 삶의 방식에 대한 전면적인 전복”을 선포했다. 새로운 세상은 세계를 보는 눈을 뜯어고칠 때, 사는 방식을 바꿀 때 모습을 드러낸다. 회개는 그런 전복을 뜻했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특정한 몸짓을 했다고 한다. “그것은 자신의 생업수단을 버리고 기존의 사회적 위치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물을 버리거나, 세관에서 일어서거나, 가진 재산을 모두 남에게 나눠주거나, 아버지를 내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간다” 등의. 그리고 예수와 그 무리들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들리는 곳마다 음식과 술을 요구했다. 엄숙한 탁발승들이 아니라 품바떼였고, 예수는 먹보에 술꾼이었다.

 

이런 무리들이 어떻게 세상을 바꿨을까? 예수의 곁엔 언제나 사람들이 모였다. 특히 예수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 불렸다. 당시에 세금을 걷던 세리는 가장 천대받는 사람들이었는데, 예수는 예언자 요한을 따라서 “체제에 부역하며 이득을 챙겨 먹는 이들은 그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진짜 지배자들보다는 욕을 덜 먹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체제에 부역했던 자라도 체제를 버리고 함께 길을 떠날 몸짓을 하는 순간 그는 예수의 친구가 된다. 그것이 예수가 신의 왕국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세상을 사는 방법이었다.

 

예수는 사람들이 꺼리는 자들과 같은 밥상에서 식사를 했고 함께 술을 마셨다. 그래서 그의 옆에는 거지, 여성, 죄인들이 모였고, 한승훈은 오늘날의 언어로 말하면 노숙자, 장애인, 동성애자들이 예수 옆에 있었다고 말한다. “모든 이들에게 비난을 받거나, 공동체에서 유리된 사람들”과 함께 예수는 기꺼이 술꾼이 되었다. 예수는 그들과 함께 다른 세상을 꿈꾸지 않고 그렇게 살았다.

 

한승훈은 그 혁명을 이렇게 설명한다. 예수는 “메시아를 자칭했던 동시대의 다른 혁명운동가들과는 달리 민중봉기를 선동하거나 게릴라 조직을 구성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현재의 억압적인 권력자를 다른 권력자로 교체할 뿐이었다. 대신 그는 하늘나라가 이 땅에 실제로 와 있는 것처럼 행동하였다. 거기에서는 기존의 가족이나 사회적 구별들이 소멸된다.…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예수가 의도한 것은 ‘정치혁명’이라기보다는 ‘사회혁명’이거나 ‘문화혁명’이었다.”

 

저자의 설명은 기독교라는 종교에 초점을 맞추지만 이 책에서 묘사되는 예수의 모습과 그 활동은 다른 영역에도 얼마든지 투영될 수 있다. 이제 한국사회에는 무장투쟁을 외치는 젤롯들은 없고 권력 앞에서 목숨 걸고 권력을 조롱하는 카라이들도 없으니 우리가 비교할 대상은 바리사이이다. 당시 바리사이들은 “유대 율법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율법의 철저한 준수를 통해 제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문화운동을 주도”했다.

 

그런데 로마제국의 지배를 비판했지만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위계질서를 만들었고 수많은 금기와 의무를 강요했다. 이들의 사상은 거룩했으나 이들은 그것을 실천하는데 소극적이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위상을 포기하면서 급진적 행동에 나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쉽게 변하지 않는 건 새로운 율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바리사이들이 너무 많아서가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그리고 바리사이들이 예수를 제국에 팔아먹었듯이 우리 역시 바리사이와 각을 세우며 다른 세상을 살려는 예수의 출현과 그의 활동을 믿지 않고 바리사이에게 공물을 바쳐온 건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예수를 따르는 몸짓이 아닐까.

 

이 책을 읽고 나니 예수가 좀 궁금해졌다. 성경도 읽어보고 싶고. 혁명의 경전인 성경을 지금 가진 것을 더 공고히 누리려는 자들의 위안으로 만든 교회라는 조직이나 체제를 벗어난 삶이 체제 속에 안착되고 내면화 된 이유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생겼다. 그러면서도 우리 시대의 예수가 분명 어딘가에 이미 살다는 예감도 들었다. 지금 가장 낮은 곳에서 함께 삶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일 것이라는.

 

물론 예수의 시대는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와 다르다. 더 간악한 지배, 더 폭력적인 내몰림, 깨지고 부서진 관계들이 우리 시대를 장식한다. 사적인 공포가 공적인 장을 압도한다. 체제의 강력한 알리바이는 일상으로 스며들어 개인을 지배한다.

 

그래서 회개가, 앞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뒤로 넘어지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뒤로 넘어져 본 사람들은 그 고통에 공포를 느낀다. 홀로 넘어졌을 때는 크게 다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둘이 있다면? 두 사람이 넘어질 때 꼭 잡아주겠다며 서로 약속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손을 잡고 같이 길을 간다면, 공포는 남아도 불안은 사라질 수 있다. 그리고 뒤로 넘어지는 경험이 쌓일수록 사람들은 서로를 믿게 되고 결국에는 뒤로 넘어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넘어져보지 않은 사람들은 느끼지 못할 연대의 삶이 그렇게 실현된다. ‘함께 살자’라는 외침을 공허하게 만들지 않을 그 실천은 앞으로 가자는 구호가 아니라 그렇게 뒤로 넘어지는 경험을 통해 다져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뒤로 넘어져본 사람들의 밥상공동체, 공부공동체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삶을 그저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우리가 알리바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삶을 사는 것이다. 혼자 사는 게 아니라 같이 사는 것, 그러고 싶지 않다고 선언함과 동시에 그런 선언을 함께 할 사람들과 손을 잡고 같이 밥 먹고 술을 마시는 것. 재앙의 순간에도 서로를 믿는 것. 이것이 너무 어려운 일일까.

신고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