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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5.24 인권도시와 시민참여, 그 기대와 어려움(인권도시칼럼)
posted by 몽똘 2013.05.24 07:08

한편으로는 인권을 강화시킨다는 조례들이 하나둘씩 제정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본권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학생인권조례는 제정되고 있지만 학생들의 인권이 향상된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고 외려 청소년들의 자살 소식만 전해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곳은 강제로 철거되고 있고, 어느 작업장에선 노동자들이 착취당하거나 밀려나고 있다. 인권도시가 논의되고 있지만 도시의 중요한 공적 공간들은 하나둘씩 사유화되고 있다.

 

지금껏 인권도시나 인권조례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사람이 아니기에 조심스럽지만, 인권기본조례나 인권 관련 조례들이 기존의 다른 조례들의 어려움들을 극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몇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한다.

 

 


조례와 자기입법


작년에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 제정된 인권 관련 조례들을 아는 시민들이 얼마나 될까? 일단 그런 조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제도를 사용할 마음을 먹을 텐데, 주민의 몇 % 정도가 조례를 알까? 그리고 인권기본조례의 대상은 이미 권리를 누리는 사람보다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일 텐데, 그 사람들을 위한 배려는 있는가? 또한 인권을 침해하고 있거나 침해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 조례를 알고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고 있을까?

 

이런 과정이 마련되려면 적극적인 ‘공지(公知)’가 필요하다. 시민들은 인권기본조례가 제정되었다는 사실을 어디서, 어떻게 인지할 수 있을까? 버스나 지하철 광고판에 실리나? 시민들이 자주 오가는 시장이나 마트에 공지되나? 차별받는 대상자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에 조례가 제정되었음을 공표하나? 홈페이지에 공지를 띄우거나 플랑카드 몇 장 걸어놓는 것으로는 시민들이 제도를 인지할 수 없다.

 

그리고 제도를 안다 할지라도 대부분의 조례들이 규정하는 인권의 내용은 헌법이나 국제인권조약, 국제관습법 등을 근거로 삼는다. 그런데 헌법이나 국제인권조약, 국제관습법을 들춰본 시민들이 얼마나 될까? 권리보다 의무를 먼저 배우는 한국사회에서, 보장보다는 박탈을 먼저 경험하는(대부분의 학교가 그렇지 않은가!) 한국사회에서 인권은 참으로 먼 얘기이다. 그리하여 누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으면 잘 모를 수밖에 없는 얘기이고, 실감을 느끼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자기 것이 아닌 양 몸에 잘 맞지 않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조례안의 공개가 아니라 조례를 친절하게(!) 설명하는 팜플릿이나 동영상 등이 필요할 텐데, 그런 과정이 제대로 준비되고 있나? 주민참여에 관한 여러 조례들이 시민들의 언어로 구성되지 않는 한국사회에서는 인권기본조례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특히 인권조례라면 더욱더 시민들의 문화와 가치를 고려해야 할 텐데, 표준안이나 잘 알려진 사례를 기계적으로 복제하는 듯하다. 그러면서 조례가 자치법규로서의 가치를 이미 상실하고 있다.

 

인권의 주체는 정부가 아니라 시민이다. 정부는 보호와 증진의 의무를 가지고 있을 뿐 실질적인 변화는 시민의 몫이다.

 

 


인권위원회와 주민참여


지금까지 대부분의 조례안들은 인권위원회를 전문가와 활동가들로 구성하도록 규정한다. 그런데 외부의 전문가와 활동가들이 해당 지역사회를 정말 전문적으로 알고 있을까? 어떤 공간, 어떤 사건이 주민의 인권을 침해하거나 강화시킨다는 점을 외부인이 어느 정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을까? 인권감수성이나 인권의 가치는 보편적인 것이라 지역주민들이 계몽되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인권이 좀 특수한 분야일 수도 있다. 대중의 상식이 편견과 선입견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인권을 강요할 힘이 제도에서 나오길 기대하기는 어렵다. 제도가 시민의 편견이나 선입견을 억누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없앨 수 있는 건 아니다. 설령 억누른다 하더라도 제도는 ‘분리’나 ‘격리’의 방법을 쓸 수 있을 뿐 ‘통합’을 강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에서 시민들이 함께 어울려 살려면 서로간의 소통이 전제되어야 한다(최후의 방법으로 분리를 선택할 수 있지만 그 역시 당사자들의 선택이어야 한다).

 

주민참여예산제도에서도 예산처럼 전문분야에 어떻게 일반 주민들을 참여시키는가라는 물음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어찌 보면 바로 그런 물음 때문에 주민참여예산제도는 평범한 시민들을 지역회의나 예산위원회에 더욱더 적극적으로 참여시킨다. 공공예산의 활용을 ‘시혜’가 아니라 ‘권리’로 여기려면 나와 우리가 결정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권기본조례에서도 이 부분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리고 서울시학생인권조례가 표류하는 상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제도는 권한을 가진 사람(한국의 경우 대부분은 장長)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다. 조례가 법률의 하위개념인 상황에서 조례의 힘은 법률을 거스를 수 없다. 그렇게 제한된 것이니 쓰지 말자는 게 아니라 그런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조례는 원래 취지대로 조금 더 자기입법의 과정으로 가는 게 바람직하다. 그럴 경우 조례는 사문화되어 없어질 수 있지만 자기입법의 문화는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아직 인권에 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고, 그 사람들이 참여과정을 통해 인권에 관해 ‘공적으로 사유하기’를 기대한다면, 교육 이후에 역할을 주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사안을 놓고 토론을 벌이며 자신의 편견을 깨우치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우리 지역사회에 누가 사는지, 뭘 하며 먹고 사는지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고민은 주민참여예산제나 사회적 경제, 마을만들기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인권기본조례는 이런 다른 조례들과 어떤 연관성을 만들어가고 있나? 그런 사례는 거의 없는 듯하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그런 부분을 통합적으로 다룰 기관이 없고 행정체계가 이런 복합성을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마을만들기와 참여예산제가 따로 또 같이 가야 하는데 대부분 분리되어서 진행되고 있다. 허나 일은 사안별로 따로따로 진행되더라도, 인간의 삶은 통합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권도시와 관련된 정책이나 제도들은 민(民)의 활동을 흉내 내지 않으면 좋겠다. 거의 대부분의 인권조례안이 그렇지만 민간이 이미 하고 있는 영역을 관이 복제할 필요가 있을까? 지방정부가 인권과 관련된 정책과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면 민간이 할 수 없는 영역, 예를 들어 청소년 노동기본권을 강화시키려면 청소년들을 교육시킬 게 아니라 행정구역 내에 있는 사업장의 책임자들을 소집해서 교육시켜야 한다. 그래야 실질적으로 인권이 향상될 수 있다. 이렇게 편의점이나 작업장 등의 공간을 관리하는 사람들(소위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인권감수성이 바뀌어야 실질적으로 지역 내의 인권이 향상될 수 있는데, 이는 지방정부의 몫이 크다. 진정 인권의 가치를 실현하려고 한다면 지방정부가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참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근대』(강, 2005년)에서 공적 영역의 몰락과 정치의 사유화를 비판한다. 모든 것이 개인화되고 공적 공간이 분리되어 게토화될 때 시민의 삶 역시 몰락한다. 과거에는 공적인 이데올로기가 사적인 것들을 식민화시켰다면 지금은 “사적인 것들이야말로, 사적인 관심과 걱정, 추구의 언어로 온전히 표현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내몰아버리면서 공적 공간을 식민화하고 있다.”는 게 바우만의 생각이다. 이런 공적인 것의 사유화는 참여 역시 매우 사적인 활동으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참여는 매력적이지 않다. 공적인 삶이 사라진 세계, 공공영역이 몰락한 세계에서 참여는 점점 부담스럽고 불편한 것으로 변한다. 더구나 무한경쟁, 승자독식을 강요하는 한국사회는 참여를 낭비로 만든다. 사생활이 아니라 공적 삶이 기본이고 사적(private)이란 타자의 부재, 타자에게 드러나고 들려지는 경험을 박탈당한 상태를 가리키는데, 우리는 사생활을 먼저 챙기도록 교육받고 훈육되어져 왔다. 먹고 입고 생활하는 과정이 철저히 개인화되고 한정된 자원을 놓고 무한경쟁하는 사회에서 참여는 거부된다.

 

이런 구조를 바꾸지 않은 채 참여를 논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사람들이 참여를 꺼린다는 지적은 이런 구조를 문제 삼지 않기 때문에 공허하다. 구조를 바꾼다는 것이 어떤 혁명을 뜻하는 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공통성(the common)을 확보하는 것일 수 있다. 서로를 대면하고 타자와 더불어 존재할 세계가 사라진다면, 공통성은 사라지고 참여는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참여는 일방적으로 규정되어온 공공성(公共性)의 재구성과 무관하지 않다. 즉 인권기본조례는 공적인 삶의 재구성, 공공성의 재구성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공공성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시민에게 강요하거나 보장할 수 없는 부분이다. 외려 사람들의 관계가 관행과 규범, 도덕으로 묶일 때, 서로가 서로의 관계를 의식할 인권은 확립될 수 있고, 정부의 제도는 때때로 그런 관계성을 침해하고 파괴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관이 일방적으로 규정해온 공공성에서 민의 주도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이런 물음이 지금 중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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