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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2.22 제임스 스콧, 약자의 무기를 벼리다(녹색평론)
posted by 몽똘 2012.02.22 21:06

예전에 김종철 선생님께 보냈었는데 이번 1~2월호에 덜컥 실린 글.
<지배당하지 않는 기술>을 세미나하며 여러 생각을 했다.
농업에서 벼농사가 핵심일 이유는 없다는 점, 구술문화가 중요하다는 점, 변경의 삶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 등등...
이 고민을 못 담아 아쉽지만 일단 정리의 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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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제임스 스콧(James C. Scott)은 낯선 지식인이다. 유행처럼 수많은 외국 지식인들의 이름이 뜨고 지는 한국의 지식사회나 운동문화에서도 지금껏 스콧의 이름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국내에는 스콧이 1977년에 쓴 《농민의 도덕경제》가 2004년도에 번역되었고, 2010년 연말에 1999년 저작인 《국가처럼 보기》가 번역되었다. 두 책의 제목만 봐서는 스콧의 생각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아직 한글로 번역되지 않은 책들을 보면 제목만 봐도 스콧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약자들의 무기Weapons of the Weak》(1987년작), 《지배와 저항의 기술들Domination and the Arts of Resistance》(1992년작), 《지배당하지 않는 기술The Art of not Being Governed》(2009년작)같은 제목들을 보면 그의 관심이 국가나 지배보다 약자와 저항에 맞춰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배나 저항이 우리 사회에서 인기 없는 주제도 아닌데 왜 스콧의 이름이 낯설게 들릴까? 지배든, 저항이든 모든 논의가 국가에 집중된 우리 사회에서는 스콧이 관심을 두는 지역사회가 흥미를 끌지 못한다. 더구나 스콧은 보수의 텃밭이자 진보의 골칫거리로 ‘오해’를 받는 농민에게 관심을 두니 어찌 보면 낯선 게 당연할 수도 있다.


허나 낯설다고 무시하기엔 스콧의 글은 중요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스콧은 풍부한 역사적인 사실들을 통해 우리의 상식을 뒤엎고 그 상식이 실제로는 길들여진 관점이라는 점을 주장하려 한다. 스콧의 주요 저작들이 아직 번역되지 않았기에 그의 사상을 온전히 논하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호혜성과 생존권, 도덕경제



내가 《농민의 도덕경제》라는 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대학원 석사과정이었다. 수업시간에 동남아시아 농민봉기들을 다루는 와중에 이 책이 언급되었고, 그 때는 농민에서 노동계급으로 넘어가기 바빴을 때라 이 책에 거의 주목하지 못했다. 또 책이 번역되지도 않아 원서를 봐야 했기에 책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보다 영어를 해석하기에 바빴다.


사실 그 때는 스콧보다 폽킨(Popkin)이 수업시간의 주인공이었다. 폽킨은 도덕경제를 내세운 스콧과 달리 농민을 ‘합리적인 농민(rational peasant)’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퐆킨은 농민을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합리적인 행위자로 봐야 농민봉기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당시에는 스콧이 폽킨을 위한 조연배우였기에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그러고 13년이 흐른 뒤에야 《농민의 도덕경제》라는 책을 다시 접했다(안타깝게도 번역이 좋지 않다). 풀뿌리운동과 농민공동체의 관계를 찾아보다 이 책을 우연히 떠올리게 되었고, 책을 다시 읽으면서 농민공동체의 특징과 그것을 움직이는 질서에 관해 많은 점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공장이나 사무실의 구체적인 조건에 의존하는 노동자계급과 달리, 농민이 보편적인 계급으로서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꾸리는 방식에 더 많은 관심을 쏟게 되었다.


《농민의 도덕경제》의 서문에서 스콧은 농민들에게 “착취와 반란의 문제는 칼로리와 수입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정의와 권리, 의무, 호혜성에 관한 농민들의 생각”이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먹고살기 힘들어서 반란과 혁명을 일으킨다고 믿는데, 스콧은 농민에게는 그 문제가 달랐다고 주장한다. 즉 농민들의 반란이 엄청난 착취와 억압에 대한 반발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착취와 억압의 정도는 농민들이 느끼는 생활의 어려움만으로 평가될 수 없었다. 스콧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동남아시아의 농민들은 자신들이 구성한 생존윤리에 따른 도덕경제가 붕괴될 때 정부와 자본에 맞섰다.


농민들은 호혜성과 생존권을 따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호혜성과 강요된 관대함, 공유지, 품앗이 등의 방식들은 다른 경우라면 최저생계수준 아래로 내던져질 수밖에 없는 가족이 부족한 자원을 채우도록 도왔”기 때문이다. 즉 강요되었건 합의되었건 공동체의 도덕은 구성원들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 보장했다. 스콧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기본적인 사회적 권리로 ‘생계에 대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었으며 엘리트들조차도 가난한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활을 위해 남겨둔 것을 빼앗지 못했고 오히려 어려운 시기에는 가난한 이들의 생계에 관한 ‘도덕적인 의무’를 졌다고 지적한다. 경제가 다른 모든 가치를 집어삼킨 지금 우리사회와 달리 당시의 농민공동체에서는 경제가 자신의 고유한 기준을 가지지 않고 일상적인 도덕이나 사회적인 교환의 원리에 따랐다.


이런 농민공동체와 도덕경제는 동남아시아가 서구 유럽의 식민지가 되면서, 즉 식민지 국가체계가 만들어지고 자본주의 시장원리가 도입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식민지 국가와 시장은 농민들의 자급에 가장 중요한 자원인 토지와 노동을 상품으로 만들었다. 특히 “국가 자체가 농민들의 자원을 수탈”했고 국가는 농민들에게 많은 양의 세금을 강제로 걷을 수 있도록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만들었다. 그리고 시장은 사적 소유권을 강화시키고 가격이 도덕을 대체하도록 만들기 위해 경찰과 군대의 힘을 빌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소유권은 “숨 쉬는 공기처럼 항상 자유로웠으며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지역의 산림과 마을 소유의 미개척지”를 없애서 “농민들의 생활에 필수적이던 중요한 부분”을 가로챘다. 그로써 도덕이 경제에 간섭할 수 있는 여지는 점점 사라졌다.


물론 근대적인 식민국가가 등장하기 전에도 세금은 걷혔고 농민의 생산물은 시장에서 거래되었다. 하지만 세금을 정하고 걷는 방식이나 지역의 시장에서 가격을 정하는 방식은 식민지 시기와 달랐다. 자신들의 생활양식과 문화, 도덕이 식민지에서 완전히 힘을 잃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더 이상 미래를 준비할 수 없게 되었다. 남은 방법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도시로 떠나 빈민이 되는 것이었다. 생계와 자급을 누릴 수 있는 여러 사회적인 장치들을 회복하려 했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도 국가의 완전한 전복과 파괴보다 도덕경제를 복원하려는 목표를 가졌다.


식민지 이전의 농민공동체에 주목했다고 해서 스콧이 농민공동체를 이상적인 유토피아로 보는 것은 아니다. 스콧의 말을 빌리면, “대부분의 농촌사회를 특징짓는 이러한 사회적인 장치들을 낭만화시키기 쉬운데 그건 심각한 잘못이다. 그러한 장치들은 근본적으로 평등주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장치들은 모두가 마을 내의 자원으로 생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과 때때로 생존이 신분과 자율성을 포기하는 대가이기도 했다는 점을 암시한다.…그런 장치들이 매번 작동하지도 않았고 작동한 곳에서도 필요에 따른 것이었지 이타주의의 산물은 아니었다. 땅이 풍부하고 노동력이 부족한 곳에서는 생계의 보장이야말로 노동력을 붙들어주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마을이 유지되려면 노동력이 필요하고 다른 마을로 떠나지 않도록 사람들을 붙잡아두려면 도덕경제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타적인 것이 아니니 도덕경제가 나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자기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타성을 가능하게 하고 그래야 서로가 서로에게 부담을 느끼지 않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 “도움을 주고받는 당사자들이 똑같은 지위에 있다면, 그런 교환은 균형을 이루고 안정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소자작농은 자신도 나중에 똑같은 도움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에, 소규모 자작농지를 가진 이웃의 수확을 도울 동기를 가진다. 그 누구도 자기의 의지를 상대방에게 강요할 수는 없지만, 그 자신의 이익에서 볼 때 자신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계속해서 받고 싶다면 기꺼이 그래야만 한다.” 결국 이타적이냐 이기적이냐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보는가이다.


스콧은 농민의 이런 욕구와 이해관계를 분석하려면 ‘방법론적 개인주의’가 아니라 농민이 “도덕적인 가치와 구체적인 사회관계의 체계, 다른 사람의 행동을 기대하는 방식, 자신의 조상들이 옛날에 비슷한 목적을 달성했던 방식을 제공받는, 그가 태어난 사회와 문화 속에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농민들의 삶은 호혜성의 규범과 생계에 대한 권리를 빼고서 이해될 수 없는데, 이런 규범과 권리들은 농사 주기나 의식주기에 잠재되어 있기에 스콧은 “속담, 민요, 구술역사, 전설, 농담, 언어, 의례, 종교”를 분석해야 그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온갖 통계자료를 내세우고 계산기를 두드려서 농민들의 생계를 보장하겠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먼저 그들의 삶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스콧은 식민지 시기의 농민반란이 성공하지 못했지만 완전히 실패했다고 보지도 않는다. 패배한 농민들은 적어도 문화적인 차원에서나마 자신들의 도덕질서(국가와 시장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되지 않는)를 만들고 공동체를 유지해서 시작의 가능성을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농민의 도덕경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 상징적인 피난처는 불안정한 생활을 위로받는 장소가 아니라 외려 하나의 탈출구이다. 이 피난처는 싹을 틔우고 있는 대안적인 도덕세계를, 즉 반체제 하위문화, 구성원들이 인간적인 공동체이자 가치의 공동체로 단결하도록 돕는 실존적으로 참되고 정의로운 하위문화를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이 피난처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한강의 기적’에 현혹되어 자기 생활터전이 공사판으로 변하는 것을 눈감아온 우리에게 스콧의 주장은 공상처럼 들린다. 경쟁력을 내세워 농촌을 버리는 판국에 다시 농민공동체라니. 특히나 우리사회에서는 국가나 자본에게 뭐 하나 받기는커녕 몸과 마음 다 내주기만 한 사람들이 열렬한 애국자요, 재벌들의 옹호자로 나선다. 이런 상황을 예상이나 한듯 스콧은 이런 모습이 왜 나타나는지를 설명한다.



왜 우리는 국가처럼 보나?



《국가처럼 보기》는 세상을 인식하는 우리의 사고방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잘 살 수 있게 해주겠다며 등장한 근대국가는 사회 전체를 자신의 수중에 놓으려 했다. 구석구석 세밀하게 통제하기 위해 국가는 지도를 제작하고 언어와 도량형을 통일하며 소유권을 확립하고 공간을 집중시키고 다양한 세계를 표준화한다.


국가처럼 보는 사람들의 눈에 “가치 있는 식물은 ‘농작물’이 되고, 그 농작물과 경쟁하는 종은 ‘잡초’로 낙인찍힌다. 그리고 농작물에 기생하는 벌레는 ‘해충’으로 낙인찍힌다. 또 가치 있는 나무는 ‘목재’가 되는 반면, 이와 경쟁하는 종은 ‘잡목’이 되거나 ‘덤불’ 쯤으로 여겨진다. 이와 동일한 논리는 동물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높은 가격이 매겨진 동물은 ‘사냥감’이나 ‘가축’이 되지만 그것과 경쟁하는, 혹은 그것들을 먹이로 삼는 동물은 ‘약탈자’나 ‘야생동물’ 쯤으로 간주된다.” 인간사회도 똑같이 나눠진다. 가치있는 인재와 쓸모없는 잉여인간로, 때로는 사회를 좀먹는 암적인 존재로. 왜 그렇게 나눠져야 하는지, 그렇게 나누는 기준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우리는 끊임없이 나눠지고 살아남기 위해 무한경쟁해야 한다.


스콧은 안타깝지만 우리가 진보적이라 믿는 “시민권, 공공 위생 프로그램, 사회 안전, 교통, 커뮤니케이션, 보편적인 공교육 그리고 법 앞의 평등 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모두 국가 중심적, 하이 모더니즘적 단순화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런 시각을 가지게 된 게 아니라 근대국가와 자본주의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단순해진 지도와 세계를 ‘의도적으로 만들었다.’


스콧은 이런 열망과 의식을 ‘하이 모더니즘(High Modernism)’이라 부르는데, 이 “하이 모더니즘은 하나의 신념으로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넓은 스펙트럼을 초월해 많은 사람들에 의해 공유되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하이 모더니즘은 사회 전체를 자신의 구상대로 만들려는 사람들의 공통분모였고, 르 코르뷔지에의 대도시 구상, 레닌의 혁명당, 소련의 집단농장 등으로 구현되었다.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는 재개발과 재정착도 마찬가지이다. 스콧은 사람들을 새로운 공간에 재정착시키는 것이 “경관의 변화라는 차원을 훨씬 능가”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사람들로부터 지금까지 자신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 대부분을 생산해온 기술과 자원은 물론 비교적 자급적으로 살 수 있었던 독립적인 생활수단을 박탈한다. 이러한 기술이 거의 또는 전혀 필요 없는 새로운 환경으로 사람들을 옮기는 것이다.” “농업의 근대화를 꾀하는 대부분의 국가 프로젝트 가운데 미처 잘 알려지지 않은 논리는 중앙정부의 권력을 강화하면서 농민의 자치권 그리고 중앙정부기관에 대한 농민 공동체의 자율성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모든 새로운 물리적 관행은 어떤 방식으로든 권력, 부, 지위에 대한 기존의 분배방식을 변화시켰다.” 이런 계획들이 엘리트들의 하이 모더니즘 미학을 실현할 수는 있겠지만 민중의 삶을 더 행복하게 만들수는 없다. 오히려 이런 계획들은 자치와 자급의 기반을 파괴한다.


《농민의 도덕경제》에서 농민정치가 식민지를 거치며 국가정치로 점점 통합되는 과정을 비판했듯이, 《국가처럼 보기》에서도 스콧은 화전민이나 이동하며 경작하는 농민들이 넓게 퍼져 생활하는 비국가적 공간이 국가적 공간으로 대체되는 과정을 비판한다. 스콧은 농업이 산업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또는 농민이 노동자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발전론을 따르지 않는다. 국가개발이 내세우는 사회복지 담론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콧은 그 과정이 언제나 “비국가적 자원들이던 과거의 공동체를 거의 항상 파괴하거나 분열시켰다”는 점을 지적한다.


근대국가의 확장을 비판하면서 스콧은 농민의 생활과 농업 속에 스며들어 있는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하려 한다. 아무리 좋은 명분을 내세워도 근대국가가 만들려는 유토피아는 다양한 삶을 표준화하고 단순화시키기 때문에, 이런 파괴에 맞서 지역적인 관행이 중요하다. 그러니 국가처럼 보지 말고 우리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고, 우리 눈의 가치를 우리 스스로 인정하도록 노력하자고 스콧은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힘을 가진 자들의 하이 모더니즘을 견제할 민중들의 ‘강력한 시민사회’이다. 민주주의가 필요하고 이 때의 민주주의란 토착적이고 경험적인 지혜를 뜻하는 “시민의 메티스가 조정이라는 방식으로 그 나라의 법과 정책을 끊임없이 수정”하는 것이다.


결국 중앙집중화되고 상품화된 삶에서 벗어나 자치와 자급의 기반을 다져야 하고, 그 과정에서 농민공동체는 사라진 지혜들을 보존해온 보물창고로 등장한다. 하나의 원리가 아니라 다양한 기준들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공존해야 사회가 지속될 수 있다.


스콧의 가장 최근작인 《지배당하지 않는 기술》은 삐에르 클라스트르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를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역사를 가진 사람들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로 불린다. 그만큼 실감나지는 않더라도 역사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역사는 국가에 대항하는 투쟁의 역사로 불릴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의 부제는 ‘동남아시아 고지대의 아나키스트 역사’이다. 스콧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버마, 중국에 걸쳐진 고지대의 주민들이 지난 2천년 동안 어떻게 국민국가의 지배를 피해왔는지를 설명한다. 아직 책을 다 읽진 못했지만 스콧은 그 기술을 산악지대에 흩어져 사는 것과 화전경작, 구전문화의 유지 등에서 찾는 듯하다. 스콧도 자신의 생각을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스콧처럼 보기



내가 스콧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국가‘를 배제한’ 또는 국가‘와 공존하는’ 정치공동체의 모습을 찾을 수 있어서이다. 스콧은 국가가 없는, 또는 국가라는 근대의 상상물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시기에 민중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근대국가의 등장이 그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나에 관해 얘기한다. ‘국사’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생각지 못했던 관점들을 스콧은 잘 지적해 준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근본적인 지적들을 어떻게 소화시킬 것인가이다. 오랫동안 국가처럼 보는데 익숙해진 우리는 근본적으로 생각하고 되짚어보는 방법을 이미 잊어버렸다. 그러니 우리 역시 추상적인 큰 담론으로 시작할 게 아니라 스콧처럼 하나의 구체적인 사례를 발굴하고 그것을 통해 우리의 현재모습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해야 한다. 스콧의 물음들을 가지고 우리 역사를 되짚어본다면 어떤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을까?


요즘 ‘보편적 복지’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나는 그 말에 호감을 느끼거나 신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호혜와 달리 보호나 보장이라는 말은 어떤 주체가 다른 누군가를 대상으로 삼는 말, 특히 국가가 시민들을 대상화시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왜 내가 국가라는 지배질서가 베푸는 시혜(사실은 내가 낸 세금!)에 매달려야 할까? 그 속에서 동등한 관계가 맺어질 수 있을까? 조금 다르게 물으면 국가는 왜 나의 삶을 보호하고 보장하려 들까?


예를 들어, 국가가 도시빈민의 권리를 보호하고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주 매력적으로 들린다. 그런데 그런 보호와 보장을 주장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은 그들이 도시의 빈민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도시빈민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들이 아니라 농촌에서 도시로 ‘밀려난’ 사람들이다. ‘자발적’으로 도시를 선택한 사람들일 수도 있지만 ‘다른 생계수단을 찾을 수 없어’ 도시로 밀려난 사람들이다. 그리고 국가가 그런 밀어내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국가의 보호/보장을 받으며 계속 도시에서 불쌍한 사람들로 살아야 할까? 언제 바뀔지 모르는 ‘국가의 선의’에 의존해서 그들이 계속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도시빈민들이 도시에서 계속 빈민으로 살도록 보장하는 것이 과연 그들의 삶에 이로울까? 이런 근본적인 물음 없이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선량한 오만’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이런 논리는 더럽고 치사하더라도 자기 땅을 빼앗은 강도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야 한다는 논리와 무엇이 다를까? 그래도 사는 게 어디냐라며 합의를 종용하는 야비한 변호사의 논리와 무엇이 다를까?


비슷한 질문을 이주노동자들에게도 던질 수 있다. 왜 이주노동자들은 자기 고향을 등지고 이곳으로 와야 했을까? 그들이 원해서 들어온 것도 있지만 우리가 ‘필요해서’ 그들을 불러들였고 ‘산업연수생제도’라는 야만적인 제도로 그들의 노동을 착취했다. 필요로 불러들인 사람들을 환대하기는커녕 착취하면서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보장하겠다고 한다. 뭔가 앞뒤가 바뀌어 있다. 우리가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권리를 보장한다는 생각 역시 전적으로 ‘우리의 생각’일 뿐 실제로는 이주노동자들이 우리의 생활을 보호하고 보장하고 있다.


요즘 들어 가장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사람이 남을 위해 살겠다는 사람들이다. 엄청난 사명감을 가지고 남을 위해 살지만 정작 그 자신은 자신과 불쌍한 그들을 구분한다. 아무리 좋은 명분을 대더라도 스콧의 표현을 빌면 그는 하이 모더니즘에 빠진 사람일 뿐이다. 그는 세상을 자기 눈에 아름답게 만들고 싶어 하고 다른 이들은 그 세상의 장식품일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들을 보호받아야 하는 나약하고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나와 동일한 존재로 볼 수 있는 관점, 내가 그들과 동일한 존재라고 선언할 수 있는 용기, 그들과 섞여 살아가는 구체적인 일상이다. 스콧은 그런 삶이 가능했고 지금도 가능할 수 있다고 우리를 설득한다. 귀를 기울여볼만한 얘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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