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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30 불량정신, 미래를 향해 뛰어라!
posted by 몽똘 2009.01.30 14:35

후카사쿠 긴지 감독, <배틀로얄 1> 2000년도 작품.

후카사쿠 긴지, 후카사쿠 켄타 감독, <배틀로얄 2: 레퀴엠>, 2003년도 작품.

후지따 쇼오조오 지음, 이순애 엮음, 이홍락 옮김, <전체주의의 시대경험>, 창작과 비평사, 1998.

 


영화는 시종일관 끔찍하고 피비린내 풍기는 장면을 보여준다. 인간의 생명은 잔혹한 생존의 룰 앞에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영화를 보며 잔인하다 고개를 돌리는 당신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 영화가 아닌 현실을?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그런 생존의 룰이 지배하지 않는 천국일까? 영화에서처럼 무기가 주어지지 않을 뿐, 우리의 학교, 우리의 사회는 이미 폭력이 난무하는 전쟁터가 아닐까?


실업자 1천만 명, 등교거부 학생 80만 명, <배틀로얄 1>의 배경은 일본의 가까운 미래이다(우리에게는 얼마나 먼 미래일까?). 국가는 이런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배틀로얄’이라는 법을 선포한다. 배틀로얄은 일종의 서바이벌게임으로 무작위로 한 반을 선택해 무인도에 집어넣고 3일 내에 한 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 죽이게 한다. 이 게임은 목적은 단 한가지이다.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경쟁’이라는 규율에 복종하는 법을 가르쳐서 ‘가치 있는 어른’을 만드는 것.


<배틀로얄 1>의 이야기를 이렇게 바꿔 보자. “각자 성적이나 학점, 인사고과라는 무기를 가지고 최고가 될 때까지 싸워라. 만약 이 길을 벗어나 다른 길을 꿈꾼다면, 너는 배제될 것이다. 살아남고 싶다면 네 친구나 동료를 꺾어라.” 폭력적인 얘기인가? 이미 우리 학교와 사회는 폭력적인 공간이다.


<배틀로얄 1>이 친구끼리 서로 죽이는 치열한 생존경쟁을 드러낸다면, <배틀로얄 2>는 그런 체제에 도전하는 ‘테러의 시대’를 그린다. 1편에서 섬에서 탈출해 새로운 세상으로 뛰어나간 나나하라 슈야(후지와라 다쓰야 役)는 <와일드 세븐>이라는 조직을 결성해서 쌍둥이 빌딩을 폭파하고 모든 ‘어른’들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소수의 어른들과 소수의 국가들이 전 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마음대로 결정짓고 있다는 걸.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결코 하나가 아냐. 63억이란 인간들이 살아가고 63억 가지의 삶이 존재하고 63억의 평화, 63억의 정의, 63억의 전쟁과 악이 있다. 싸움 없이 얻어진 평화는 어디에도 없다! 평화의 뒤엔 수많은 피, 땀, 눈물이 스며 있지. 만약에 인간이 그 역사를 경시하고 잊게 된다면, 그런 평화는 개똥만도 못해. 일본, 중국, 북한, 과테말라, 인도네시아, 쿠바, 콩고, 페루, 라오스, 베트남, 캄보디아, 그라나다, 리비아,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파나마, 이라크, 소말리아, 보스니아, 수단, 유고슬라비아, 아프가니스탄, 고독하게 싸우는 전 세계의 아이들, 너흰 혼자일지 몰라. 하지만 이젠 혼자인 것을 두려워하지 마. 버려진 전 세계의 아이들, 함께 일어서서 함께 싸우자. 우리 지금 낡은 구두를 벗어 던지고 이곳이 아닌 더욱 먼 곳으로 달려나갈 것이다. 우리의 자유를 뺏고 억압해 온 모든 어른들을 향해.”


이에 어른들은 ‘정의’란 이름으로 새로운 게임을 시작한다. 정부는 전국에서 문제아들을 모아 슈야를 죽일 때까지 진행되는 게임에 투입한다.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 끝에 아이들은 ‘모두 돌아갈 곳이 없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함께 총구를 어른들에게로 돌린다. 멀고 험하며 어두울지 알면서도,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모두들 앞으로 뛰어나간다.


긴지 감독은 억지스러울지라도 아이들을 모두 죽이지 않는다. 그 아이들은 냉혹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승자가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할 미래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아직 쌀쌀하지만 곧 봄이 오리라는 바램을 우리가 버리지 않듯이, 아이들은 새로운 미래를 향해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 길에는 길동무가 있다. 2편의 부제인 레퀴엠은 망자를 위한 미사곡이다. 슈야는 얘기한다. “살아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죽어간 친구들을 잊지 않는 것 뿐, 어른이 되어서도 잊지않는 것 뿐이야.” 망자를 잊지 않고 기억할 때 산자는 살아갈 힘을 얻는다. 때론 그 망자의 무게에 어깨가 짓눌릴지라도 이젠 혼자가 아닌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함께 할 친구가 생긴 것이다.



<배틀로얄 1>에서 한 마디 반항없이 규칙을 열심히 적는 아이는 소위 ‘범생’이다. 그 모범생의 모습을 보며 나는 후지따 쇼오조오의 <전체주의의 시대경험>을 떠올렸다. 책에서 쇼오조오는 일본이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외치며 제국주의 전쟁을 정당화하던 시절을 떠올린다. 평화를 가르쳐야 할 학교가 어느덧 전쟁의 정당성을 설교하고 있을 때, 모범생들은 그 논리를 열심히 받아들인다. 하지만 소위 ‘비행청소년’들은 사고를 치며 자기들 방식으로 선생과 학교에, 체제에 저항하기 시작한다. 쇼오조오는 바로 그 비행청소년들에게서 일본의 희망을 본다. “회의장이 아니면 회의를 할 수 없다는 식으로 규격화된 우등생들과는 달리 불량소년들은 필요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지 미친 소리든 진지한 회의든 할 수 있었”고 “그와같은 규격으로부터의 자유야말로 참신한 발상을 낳는 그들의 지혜의 원천”(194쪽)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쇼오조오는 불량정신이 가져야 할 ‘불량의 윤리학’을 설파한다. “권력 및 그 밖의 것에 대한 비판과, 비판의 자유를 어느 때에나 허용하는 자유로운 관용과, 타인에 대한 공감”(202쪽)을 가질 때 불량은 하나의 윤리로까지 자리를 잡는다.


쇼오조오가 불량을 설파하는 이유는 일본 사회가 너무나 ‘정상적’이고 ‘안락’하기 때문이다. 쇼오조오는 일본사회를 보육기가 계단처럼 쌓아올려진 사회로 파악한다. “하나의 보육기로부터 다른 보육기로 옮겨질 때에는 지나치게 격렬한 경쟁시험이 부여”(18쪽)되고, “경험이 없는 ‘우등생’ 출신이 ‘우등생’이었던 시절의 자기도취만을 여전히 가진 채­아무런 자기비판도 거치지 않은 채­ 지배신분이 되어서 인간을 규격제품으로서 대량생산하는 데 필요한 세칙 작성에 광분하고 있는 것”(186쪽)이 바로 일본사회이다.


사실 쇼오조오가 비판하는 일본 사회는 지금 우리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 어느덧 체제의 규율에 길들여져 스스로 복종하는 상태, 쇼오조오의 말을 빌면 ‘자발적 예속’의 상태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얄팍한 중산층이라는 가면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는, 때론 친구나 동료를 희생시켜서 자신의 안락함을 지키겠다는 자발적인 예속상태가.


쇼오조오는 그런 자발적 예속의 사회야말로 전체주의 사회가 아닌가, 라고 묻는다. “격렬하고 끊임없는 유통․유동이 모든 형태, 대상, 사물을 삼켜버리는 세계이며 그와 같은 특질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한 그 사회는, 외견적인 깃발이 무엇이든지 간에 파국의 30년대를 ‘창립기’로 하는, ‘창조적’인 고전적 전체주의와는 차원과 형식을 달리하는 새로운 전체주의가 아닐까?”(74~75쪽) 이런 사회에서는 개인의 “헌신의 대상이 국가일 때 국가주의가 생겨나고 회사일 때는 회사인간이 태어나며 그것이 엄청난 에너지를 발휘한다.”(82쪽)


전체주의의 작동방식과 특징을 분석하면서, 쇼오조오는 전체주의와 맞서는 수단으로 틀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경험(비행)과 그 속에서 활기를 띠는 이성을, 궁극적으로는 자기비판, 즉 “제도나 조직에 의해 강제되면 되는 대로 꾸역꾸역 허위의 ‘자기 죄’를 ‘고백’하는 비참한 ‘자기비판’과는 정반대의, 사회의 정신을 자신과 더불어 재생시키고 부활시키는 본래적인 자기비판­역사에 의해 관철되면서 또 그것을 통해서 오히려 역사 그 자체를 바꿔나가는 상호주체적인 자기비판­”(207쪽)을 강조한다.


전체주의, 그것은 우리와 멀리 떨어진 이념이 아니다. 이미 우리는 교육을 통해 끊임없이 전체주의의 정당성을 학습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형 인간’이, ‘성공신화’가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고 있다. 이렇게 모범을 강요하는 사회의 틀을 깨는 방법은 불량해지는 것이다. 삐딱한 시선을 보내고 짝다리를 짚으며 ‘불량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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