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만을 넘긴 잔치라고 해야 할까?

쓸데없는 생각 말고 자료나 꾸준히 업데이트 해야지.ㅎ

 


하승우(땡땡책협동조합 땡초)


“그게 정말 대안이야?”, “본질적인 해결책이 맞아?”, 어떤 문제에 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흔히 받게 되는 질문이다. 그런데 이 질문이 나오는 순간부터는 토론이 어렵다. 합리성이 아니라 근본적인 믿음의 문제로 토론이 전환되기 때문이다. 근본과 본질이 중요하다는 점은 알지만 무엇이 근본이고 본질인가에 관한 생각은 모호해서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질문은 답을 찾기 위한 것인데, 보통 이런 질문들은 말문을 막는다. 말을 할 수 없으니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행동은 늦춰지고 대안은 아닐지라도 디딤돌이 될 수 있는 방법들은 바다에 떠보지도 못한 채 좌초한다. 그러면서 “야, 그거 예전에 해봤는데 안 돼!”라는, 선배라 불리고 싶은 사람들의 흐릿한 기억들이 후배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새로운 시도조차 가로막는다. 대안을 찾으려는 시도는 어느새 진부한 논리싸움으로 전락한다.

 

물론 이런 전락이 그런 물음을 던지는 개인들의 탓만은 아니다. 권력이 일상을 억압하고 자본이 노골적으로 착취하는 한국사회는 자꾸 이런 본질적인 질문들을 던지게 만든다. 제정신이라면 단 하루도 분노하지 않고선 살기 어렵게 만드는 현실은 다양한 혁명들이 있음에도 ‘단 하나의 혁명’, 모든 것을 한순간에 뒤바꿀 수 있는 혁명만을 상상할 것을, 아니면 그냥 냉소할 것을 강요한다. 단단하게 가로막고 선 현실의 벽은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어쩌면 호연지기일 수도 있는 자세를 가학적인 희망고문으로 만들기도 한다. 벽을 피해 우회하다 보면 맞닥뜨리는 건 변화보다 우리가 이 일을 왜 시작하게 되었을까라는 ‘초심’이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정말 열심히 하는’데, 기우뚱한 현실에서는 한순간 삐끗하면 동지(同志)들의 반대편에 서게 된다.

 

 

이러니 사는 게 어렵고 피곤하다. 피로도를 따지면 한국이 세계 최강 아닐까. 그리고 대안을 찾는 사람들일수록 더 피곤하다. 피곤해도 언젠가 낙이 온다고 믿을 만하면 기다리기라도 할 텐데, 그런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본질적인 질문과 피로에 지친 사람들의 갈증을 풀어줄 시원한 책 한권이 나왔으니, JK깁슨-그레엄의 『그따위 자본주의는 벌써 끝났다』(알트, 2013년)가 그것이다.

 

먼저 고백하자면 나는 그동안 여성주의를 추상적으로 인식했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용적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여성주의가 다른 학문체계를 자극하고 무너뜨릴 주요한 방법일 거라 생각만 했지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가능할지를 구체적으로 고민한 적이 없다. 민주주의 이론을 뒤흔들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양한 민주주의들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걸 구체적인 일상에 적용하지 못했다. 그런 무능함은 나 역시 기존의 관행에 길들여져 있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여러 ‘중심주의’에 대한 깁슨-그레엄의 비판은 내 정신을 번쩍 들게 해줬다(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함께 읽고 토론하며 공동의 이름으로 책을 쓰는 작업을 남성들이 과연 할 수 있을까, 이런 상념에 빠지기도 했다).

 

솔직히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많은 민주주의‘들’이 있음은 생각했지만 자본주의‘들’이 있다는 생각에는 미치지 못했다. 풀뿌리운동이나 협동조합운동이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대안이라고 믿지만, 중앙집권형 국가와 재벌 중심 경제의 결탁이라는 강력한 장벽을 넘어서려면 일단은 힘을 더 길러야 한다고 믿어왔다. 단단한 벽이니 우리도 더 단단해질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쯤이면 우리의 단단함이 저 벽을 뚫을 수 있을까? 매일 들리는 소식은 나조차도 가능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1. 자본주의 앞에서 쫄지마!


깁슨-그레엄도 아마 나와 비슷한 경험, 비슷한 고민을 많이 했고 어떤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다양한 경제diverse economy’라는 이름으로 깁슨-그레엄은 “자본주의 경제의 자연화된 지배를 무장해제하고 탈구시키며, 새로운 경제적 생성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내”자고 제안한다(15쪽).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에 그것이 가능하겠냐고? 깁슨-그레엄은 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유기체적 사회 개념, 영웅적인 역사의 서사, 진화론적 사회발전의 시나리오, 본질주의적 남근중심적 이원적 사고 패턴의 복합적 산물”(74쪽)이라고 비판한다.

 

시장과 비시장,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라는 이분법을 피해 그 내부의 다양한 균열들을 접하고 보고 관계를 맺어 가면 대안은 도래할 미래의 것이 아니라 이미 실현되는 중인 가능성이다.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의 관계를 위계적으로 설정하는 방식은 경제적 차이를 이론화하고, 자본주의 헤게모니 담론을 경제적 복수성과 이질성으로 보완할 가능성에 덫을 놓는다. 이 가능성을 해방시키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중요한 목표인 반본질주의 기획”이다(82쪽). 이 책은 본질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보다 이런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이 좌파의 전략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주장이 깁슨-그레엄만의 생각은 아니다. 그동안 균열을 찾아내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어왔다. 그 중에서 깁슨-그레엄은 중층결정에 바탕을 둔 포스트모던 맑스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적 여성주의 전략을 강조한다. 이 전략은 기존의 이론구조에 강한 충격을 준다. 여성주의자들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젠더관계를 재구성하려는 것은 개념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위계질서를 깨기 위해서이다. 남성과 대비되는 여성은 이미 그 자체가 어떤 틀에 갇혀 있다. 마찬가지로 깁슨-그레엄은 자본주의와 대비되는 비자본주의라는 구도를 거부한다. 말로는 쉬운데, 참 쉽지 않은 주장이다(이 주장의 오류가 아니라 곤혹스러움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룬다). 깁슨-그레엄은 이런 위계 때문에 “비자본주의는 이질성과 차이의 다양한 영역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헤게모니 담론에 포섭되는 것으로 재현”되고 자본주의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고 본다. 마치 “여성이 남성의 대립물이나 보완물이 아니라 특수성의 집합으로 인식되려면 남성 또한 특수성의 집합이 되어야” 하듯이, 자본주의도 그 자체로 통일되거나 완결된 틀이 아니라 특수한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렇게 자본주의를 특수한 것들의 공존으로 이해하는 순간, 비자본주의도 “긍정적이고 특수한 존재로 이해할 조건”이 마련된다(85쪽). 특히 깁슨-그레엄은 자본주의 경제가 없는 것처럼 말했던 가정경제를 끌어들임으로써 경제를 재구성한다. 즉 “가정경제의 다양성과 착취에 대한 강조는 가정 이외의 분야에서의 계급다양성을 이론화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준다.”(212쪽) 또한 깁슨-그레엄은 알튀세르에게 영향을 받은 중층결정이라는 렌즈로 보면 자본주의 각각이 환원불가능한 특수성을 드러낸다고 본다. 이렇게 “대문자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적 차이들에게 길을 양보할 때, 비자본주의적 타자는 단수성과 종속에서 해방되어 차별화된 다중성으로 드러날 잠재력을 지닌다.”(88쪽)

 

요즘 내 고민 중 하나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체념이 이 빌어먹을 사회를 지속시킨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자본주의의 착취와 영향력이지 대안이 아니다. 자본주의로부터의 탈출불가능을 얘기하는 순간, 자본주의는 자가발전하는 시스템이 되고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것으로 변한다. 그러면서 “지배하는 쪽은 독립적인 것”이 되고, “자신의 존재를 위해 자신의 타자에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이 망각”된다. “반면 종속되는 쪽은 상대방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지배하는 쪽과 달리 지배당하는 쪽은 항상 부정적으로 규정된다”(193쪽) 이런 인식틀을 깨지 않으면 현실에 순응하거나 체념하게 된다. 그래서인이 깁슨-그레엄은 파격적으로 마커스의 강간 스크립트 분석을 자본주의에 적용한다.

슬럿워크가 성폭력에 관한 고정관념에 도전하듯이, 마커스는 여성이 강간의 희생자라는 인식에 도전한다. “지배적인 강간 스크립트에 도전하기 위해 마커스는 상당히 다른 두 개의 행동 경로를 제시한다. 하나는 스크립트 자체를 내부로부터 변화시키는 것, 즉 희생자 역할을 거부함으로써 스크립트의 전형성에 도전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강간 스크립트에 각인된 섹슈얼리티 담론과 거기에서 도출되는 합법성과 자연스러움에 도전하는 것이다. 두 방법 모두 지구화에 대한 대안적 대응을 고려할 때도 도움이 된다.”(222쪽) 초국적 자본에 짓밟히는 불쌍한 노동자라는 서술에서,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노동은 자본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성이 남근을 비틀고 고환을 걷어찰 수 있듯이, 노동자도 자본가에 맞설 수 있고 때로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관계, 비자본주의 기업을 만들 수도 있다. 이렇게 마음을 먹어야 ‘삼성이 한국을 떠나면 어떡할까’라는 걱정보다 ‘어차피 삼성은 한국을 떠나지 못하니 그들을 제대로 바꾸자’라는 투지가 생긴다. 모든 악의 근원인 ‘신자유주의’는 우리가 만든 환상이다. ‘지구화의 희생양’이라는 도식을 버려야 비자본주의의 투기가 살아날 수 있다. 깁슨-그레엄은 “지구화의 각인들 중에서 다양한 과잉의 지점들을―즉 그러한 각인이 통제불가능한 것 혹은 확정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곳들, 혹은 비자본주의적 정체성이 새겨질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곳들을― 부각시킴으로써, 우리는 지구화에서 남성의 생식기나 남근의 속성을 약화시키고자 시도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247쪽).

 

이렇듯 파격적인 주장을 일삼지만 이 책은 어떤 분명한 답도 제시하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제시하지 못한다. 무엇을 규정하고 경계 지움으로써 그 속에 포함되지 않는 다양한 시도들을 말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깁슨-그레엄의 공동체 경제를 어떤 특정한 것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 속에 포함되지 못하는 시도들은 다른 시도를 가로막는 장벽으로 변할 수 있다. “사회와 경제의 재현들 그 자체가 하나의 탈중심적이고 무정형인 실재에 중심을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탈 중심의 실재 그 자체가 항상 서로 상이하니까, 또 항상 변화하는 외부가 이들에게 변화무쌍하고 모순적인 정체성을 부여하고 이들을 중층결정하니까 말이다.”(121쪽) 그러니 대안을 논하는 것이 다른 중심을 만들 필요는 없다.

 

이 책은 어떤 해답을 제공하는 것보다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 경제 현존 양측 모두에서 나타나는 이질공간heterospace을 해방시키려는 시도”(75쪽)이다. 이런 시도는 모든 형태의 착취를 한번에 없애겠다고 주장하지 않고 착취를 낳는 상황을 분석하고 그런 착취를 변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나 조건을, 다양한 주체들이 접합될 수 있는 과정을 찾으려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가령 이런 질문들이다. “으레 좌절된 자의 처지라고 여겨지곤 하는 반자본주의 주체의 부정적 이미지를 털어내기 위해 우리는 어떤 생각과 정서를, 어떤 기질과 태도를 지녀야 하며, 어떤 힘들을 길러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우리는 단순한 자본주의의 적대자를 넘어 ‘비자본주의’를 욕망하고 빚어낼 주체로 우뚝 설 수 있을까?”(22쪽)

 

깁슨-그레엄은 자본주의 헤게모니, 자본중심주의, 본질, 대문자 자본주의, 남근성을 전복시키려면 세 가지의 정치가 필요하다고 본다. “언어의 정치: 경제와 경제적 가능성에 대해 참신하고 풍부한 그 지방만의 언어들을 만들어 내기”, “주체의 정치: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주체로 육성하기”, “집단행동의 정치: 대안적인 경제조직과 공간들이 특정 장소에 싹틀 수 있도록 공동 협력하기”(12쪽). 이런 정치를 통해 이미 그 끝을 드러내고 있는 자본주의의 민낯이 드러난다.


2. 한국 사회의 특이성은?


사실 한국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비자본주의적 경제실천들이 있었으나, 한국 자본주의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거나 그 영향이 미미하다는 이유로 무시되어 왔다. 그렇게 평가할 수는 있지만 이미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을 경제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점에서 깁슨-그래함의 관점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편견을 부수는데 효과적이다. 아니, 강력하다.

 

다만 그 관점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는 여러 가지 경험들이 더 첨부되어야 할 것 같다. 이 책에서 깁슨-그레엄이 많이 거론하지 않는 건 국가이다. 한국의 역사를 반영하면 ‘그냥’ 국가나 근대국가가 아니라 식민지국가, 반공국가, 개발독재국가이다. 한국 자본주의‘들’의 발전을 가로막은 것은 바로 재벌을 뒷받침한 국가, 재벌과 결탁한 국가이기도 하다. 물론 깁슨-그레엄의 관점에 따른다면, 국가도 다양한 통치형태‘들’로 분해될 수 있다. 하지만 주체들이 어떻게든 시작할 수 있는 자본주의와 달리, 한국의 국가영역은 의지하는 주체가 진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국가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어렵고 국가에 진입할 수 있는 주체는 제한된다. 이는 다양성을 억압하고 중심성을 강요한다. 그리고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2010년)에 나오듯, 정부와 재벌은 ‘유착’이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는 단계를 이미 넘어서 ‘합병’의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이명박과 정몽준이 그 단계를 현실화시켰고 나오미 클라인은 이를 ‘재난 자본주의’라 부르기도 했다. 이런 국가를 고려하지 않으면 깁슨-그레엄이 말하는 정치의 가능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은 주체적인 역량이나 전략의 부재보다 주체의 등장 가능성 자체를 철저히 말살하는 구조적인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현실은 녹녹치가 않다.

 

이런 현실적인 어려움은 비자본주의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논하는 곳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금융회사를 논하는 부분에서 깁슨-그레엄은 “어떤 회사는 독립적 상품생산의 현장으로서 비자본주의적 성격”을 가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원주의 ‘밝음신협’같은 곳을 생각하면 그렇기도 하다. 따라서 모든 금융회사를 자본주의적이라고 부를 수 없기는 하다. 그렇지만 역으로 농협이나 수협, 축협같은 관제 협동조합이 존재하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특히나 이런 협동조합들이 “잉여노동을 집단적으로 생산하고 전유”하며 “생산관계에서의 이러한 차이들”을 낳지 않는다(90쪽)는 점을 고려한다면, 깁슨-그레엄의 관점이 조금 더 복잡해진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현실은 더욱더 복잡해진다.

 

이런 복잡함은 자영업에 대한 관점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깁슨-그레엄은 “라우즈는 미국 내 도시의 서비스산업에 종사하는 멕시코계 이주노동자들이 어떻게 임금노동자로서의 삶을 살아내면서 동시에 멕시코에서 소규모 가족농장이나 상점 운영과 같은 구분되는 삶의 형태를 유지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미국에서 임금으로 벌어들인 돈이 생산 투자금으로 흡수되어 멕시코 경제 안의 비자본주의적 활동에 투자되는 것이다.…이 경우는 감염의 메타포를 통해 만들어지는 생산적 불일치의 놀라운 사례이다”(242쪽)라고 주장한다. 알다시피 한국은 자영업의 비중이 매우 높은 나라이다. 그렇다면 이런 자영업의 활성화가 한국 자본주의 내에 다양한 틈을 만들어왔는가, 라고 질문하면 그렇지 않다는 답을 얻을 수 있다.

 

그건 우리 삶의 거대한 힘들이 재벌들로 흡수되고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정녕 한국의 자영업들이 비자본주의적인 경로를 만들고 있나? <알바연대>가 조사해서 발표하는 사례들을 보면, 많은 자영업자들이 ‘노동력의 판매’와 ‘인격의 판매’를 혼동하며 자본주의를 넘어선 착취논리에 젖어 있다. 이는 자본주의 고용과 착취에 대한 긍정적인 대안을 한국의 자영업이 자임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자영업자들이 영세 자영업자에 머물고 있고, 프랜차이즈에 종속된 자영업 노동자로 변하고 있다는 점은 그 가능성을 자신할 수 없게 한다.

 

또한 공정무역은 ‘원조가 아니라 무역’을 주장했지만 사실상 원조의 색깔을 벗어나지 못했고, 우리사주조합이 노동자의 개별화를 부추기며, 소액주주운동이 주주자본주의를 강화시키며,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이 비자본주의를 확장시키기는커녕 정부에 포획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작년 11월 깁슨의 한국 방문에서도 이 의문은 속 시원하게 풀리지 않았다.

 

아울러 깁슨-그레엄의 관점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은 농사이다. 굉장히 많은 경제들이 있을 수 있지만 살림살이의 기본은 먹는 것이다. 농업은 단지 산업의 문제로, 특히 1차 산업의 문제로 생각할 수 없고 그것이 대안경제의 핵심이라 얘기할 수 있다. 그래서 미즈와 벤홀트-톰젠은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도서출판 동연, 2013년)에서 명확하게 소농경제가 자급경제의 기초라고 주장하면서 “자급을 위한 생산수단인 땅에 대한 접근을 기초로 하는, 상향식의 상호관계를 통해 조직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연히 이런 어려움들이 깁슨-그레엄의 관점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건 아니다. 이 관점은 본질과 중심의 논리에 빠져 사람과 삶을 보지 못하는 이론, 도플갱어식 논리에 빠져 있는 이론을 극복하게 한다. 다만 이 관점을 한국 현실에 뿌리내리게 하려면 현장 활동가들과 이론가들이 마주 앉아 차분히 방법을 찾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다. 한국의 특이성을 찾고 다시 이론을 가공하는 그런 과정에서 어쩌면 우리는 정말 그 끝을 드러내고 있는 자본주의를 맞닥뜨릴 수 있을 것 같다.

1. 들어가는 말


협동조합‘과’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건 어떤 효과를 가진다. 구분되어야 하지만 분리될 수 없는 두 개념이 그냥 병렬적으로 나열된 느낌이다. 구분이 분리는 아니어야 하는데, 한국사회에서는 분리의 느낌이 강하다. 여유가 있으면 필요할 때 한번 접목해 봐야지, 이런 느낌을 준다.

 

이렇게 바꿔서 물어보자. 흔히 협동조합을 사업체이자 결사체라고 한다. 흔히 사업체의 운영방식을 경영으로 표현하고, 결사체의 운영원리를 민주주의라 표현한다. 그런데 이게 맞을까? 그렇다면 협동조합 활동가, 실무자, 조합원들은 경제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협동조합은 민주적인 통제를 원칙으로 삼고 있으니 자연스레 경제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구체적으로 ‘민주적인 통제’는 뭘 말하는 걸까? 조합원이 통제하는 민주적인 조직이고 1인 1표를 가지고 있다는 2원칙에 대한 설명은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어떤 민주성을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협동조합 7원칙 중 두 번째 원칙은 다른 여섯 가지 원칙과 어떤 연관성을 가질까?

 

또 협동조합운동의 오랜 역사를 말한다. 그런데 역사는 끊임없이 현실과 맞닥뜨리며 전진하고 후퇴한다. 협동조합운동의 역사가 만들어온 구조가 있다면 현실의 변화에 맞춰 바뀌어야 할 구조도 있다. 그렇다면 협동조합은 현실의 변화에 발맞춰 어떻게 자신의 구조를 변화시켜 왔을까? 협동조합기본법에 따라 대다수 협동조합들의 정관이 똑같이 만들어지고 있고 그건 내부구조나 활동양식도 동일화되고 있음을 뜻한다. 똑같은 구조를 가진 협동조합이 조합원들의 다양한 욕구와 열망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을까?



2. 서기 2020년의 협동조합운동은?


더글러스 러미스(D. Lummis)는 『래디컬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에서 민주주의에 관한 여러 가지 오해들을 지적한다. 지금 현실과 관련된 오해들을 추려서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 민주주의는 민중의 복지를 돌보는 것이다.

- 민주주의는 민중이 지지하는 지도자를 가지는 것이다.

- 민주주의는 경제발전이다.

- 민주주의는 자유선거이다.

- 민주주의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함께 잘 살아가는 방법이다.

- 민주주의는 민중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한다.

 

러미스는 이런 오해들을 반박하면서 민주주의는 민중을 위하고 민중의 지지를 받는 지도자를 가지는 게 아니라 민중이 중요한 결정을 직접 내리는 것이고, 발전이 아니라 스스로 삶의 규모를 결정하는 것이며, 정치가 선거라는 형식적인 장으로 제한될 수 없으며,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되고 있다면 부자와 가난한 사람으로 갈라질 수 없고, 민주주의는 민중이 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결정을 내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민주주의는 특정한 제도나 원리를 일방적으로 따르는 게 아니라 민중이 힘을 가지고 있는 상태, 출렁출렁 유동적인 상태라는 게 러미스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협동조합은 어떠한가? 협동조합은 조합원들이 출렁거리며 대안적인 삶을 살아가는 장인가? 1980년에 레이들로 박사는 그 유명한 『레이들로 보고서』에서 협동조합의 민주적 특성이 협동조합의 모든 측면에서 확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특히 다음과 같은 과제를 제안했다.


- 조합원간에 어느 정도의 균질성과 연대의 기초가 되는 조직적 결속이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각각 2ha의 농지를 가진 빈농 500명과 2000ha씩 소유한 부농 5명으로 조합원이 구성될 경우, 대농의 큰 사업량이 협동조합의 생존능력에 기여할지 몰라도 민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농업협동조합의 기반은 되지 못할 것이다.

- 민주주의는 투표율만이 아니라 조합원이 얼마나 참여하느냐에 의하여 측정된다. 

- 완전히 민주적인 협동조합에서는 서비스의 실제 이용자인 조합원만이 임원과 이사를 임명하고 선출할 권리를 가진다.

- 민주적인 협동조합은 효과적인 교육프로그램과 모든 단계의 지도자 훈련의 기회를 제공한다.

- 민주적인 협동조합에서 여성은 여성으로서의 상징적 지위가 아니라 완전한 의미에서 조합원자격을 가져야 한다. 별도의 “남성의 역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차별적인 “여성의 역할”도 존재하지 않는다.

- 사업장에서 종업원 사이의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협동조합은 민주주의를 완전히 실현한다고 할 수 없다.

- 조직의 민주적인 성격은 조합원에게 자유롭게 정보를 제공하고, 정책결정 과정에서 조합원이 의견을 제출하고 피드백(feed-back)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있느냐에 의하여 판별할 수 있다.

- 민주주의에 관심이 있는 협동조합에서는 모든 보고나 정보는 알기 쉬운 형태로 제공되어야 하며, 소수민족을 위해서도 그들의 언어로 작성되어야 한다.

- 중요한 결정은 위계질서에 따른 명령보다도 전체의 합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민주주의의 깊이는 관리구조의 최하위 단위에서 제출된 제안에 따라 얼마나 결정되느냐에 의하여 측정될 수 있다.

- 민주주의에서는 전문가나 전문기술관료가 조합원에게 상담과 조언, 그리고 권고를 듣고, 최종적으로는 평조합원이 결정한다.


레이들로 박사는 서기 2000년의 협동조합을 내다보며 이를 과제로 제시했는데, 이 과제들 중 지금 해결되고 있는 건 얼마나 될까? 조합원들 사이에는 빈부를 넘어선 조직적인 결속이 이루어지고 있나? 조합원의 참여율은 어떻게 측정되고 있나? 임원과 이사는 어떻게 선임되고 있나? 조합은 어느 정도의 교육과 지도자 훈련 기회를 제공하고 있나? 조합 내에서 여성과 남성의 역할은 구분되지 않고 다양한 남성들/여성들의 정체성이 인정되고 있나? 실무자나 활동가들의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나? 조합의 정책결정과정에 조합원들은 어느 정도로 개입할 수 있나? 조합은 다양한 언어, 쉬운 언어로 정보를 제공하고 있나? 가장 아래에서 제출된 제안이 어떻게 전체의 합의로 모아지고 있나? 평조합원이 조합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있나?

 

현재 한국의 협동조합운동이 이런 물음에 어느 정도로 답할 수 있을까? 그런데, 아뿔싸, 이미 시간은 2000년을 훌쩍 넘어 2014년이 되었다. 과거의 협동조합운동은 시대를 앞선 과감한 결정들을 내렸다. 그런데 지금의 협동조합운동은 어떠한가?

 

2013년 1월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은 2020년을 내다보면서 『협동조합 10년을 위한 청사진』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런 저런 얘기들이 있지만 눈에 띄는 내용은 조합원제도와 지배구조에 있어 참여를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 올린다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현실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골자를 살펴보면,

 

- 구체적으로 청소년과 젊은이에 초점에 맞춰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구조를 탐색하여 참여와 관계에 대한 기존의 전통적 구조가 조정될 수 있고 그럴 필요가 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 민주적 참여와 관계, 관여에 혁신을 유도하고 모범사례를 찾아내서 전파하고 유지시킨다

- 모든 협동조합이 조합원 전략을 채택하고 매년 전략을 보고하도록 지원한다.

- 소셜미디어를 통한 논평, 대화, 논쟁, 관계와 같은 여타의 혁신적이면서 전통적인 참여의 형태가 조합원제도와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지 그리고 조합원, 후원자, 추종세력과 같은 서로 다른 참여의 형태가 이러한 상황에서 적절한지 여부를 고려해서 전통적 조합원제도의 요소들을 검토한다.

- 공동생산과 인적자원관리를 포함하여 기업조직의 맥락에서 혁신분야의 리더십을 확보한다.

- 개별적인 추진과제로서 자본이라는 주제와 연결되어, 협동조합 특성을 저해하거나 손상시지 않으면서 자본 제공자를 위한 조합원과는 다른 제한적인 형태의 참여를 검토한다.


아이쿱생협연구소가 번역한 이 보고서를 여기저기서 읽은 것으로 아는데, 협동조합운동의 전략으로 어느 정도로 고민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청소년과 청년의 특성을 반영하는 참여구조가 고민되고 있는지, 협동조합 내의 혁신적인 참여 사례가 전파/공유되고 있는 건지, 조합원의 참여를 끌어낼 전략이 매년 수립되고 있는 건지, 단순 홍보용 수단을 넘어 소셜 미디어가 쌍방향 소통의 수단이 되고 전통적인 참여형태와 접목되며 새로운 의사소통/의사결정구조를 만들고 있는 건지, 새로운 형태의 민주적인 리더십이 확보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맨 마지막의 자본확보와 관련해 조합원의 참여형태를 다각화하는 문제 정도만 사업의 필요성 때문에 논의되고 있다.

 

『레이들로 보고서』나  『협동조합 10년을 위한 청사진』과 더불어 우리는 한국의 협동조합운동 현실을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그런 노력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나? 협동조합기본법, 사회적경제기본법 등의 제도화와 관련된 논의들은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지만 협동조합의 내실을 다지려는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는지 의문이다. 우리는 정말 서기 2020년의 협동조합운동을 고민하고 있는 것일까? 매번 땜질하듯 단기적인 방법을 얘기하는 것 말고 어떤 장기적인 전망을 세우고 있나? 20세기 협동조합은 21세기 협동조합으로 전환될 수 있을까? 새로운 세대구성과 사회조건의 변화를 반영할 수 있을까?



3. 한국사회와 협동조합, 민주주의


협동조합이 ‘섬’이 아니라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협동조합의 민주주의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떤 수준인가?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경험할 수 있는 장은 어디인가? 마을, 학교, 공장, 사무실, 노동조합, 시민사회단체, 미디어, SNS, 어디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느끼고 경험하며 그 감각과 방법을 키우고 있을까?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조직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조직은 어떤 조직일까? 우리는 어디서 고정되고 획일화된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양한 민주주의‘들’을 활성화시키고 있을까? 무기력한 대의민주주의와 당위적인 직접민주주의의 대립을 넘어설 방법들을 어떻게 마련하고 있을까?

 

최근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무슨 민주주의가 더 필요하냐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지금으로도 민주주의는 충분하고 민주주의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지나쳐서 문제이고, 외국에서 얘기되듯이 현재의 문제는 과잉된 민주주의(demorecracy)라는 거다. 지금껏 자기 몫을 주장하지 못했거나 자기 삶과 연관된 결정들에 참여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공론장에 모습을 드러내면 기득권층은 기함하며 이들을 막아선다. 마치 당장 무슨 변고가 일어날 것처럼, 사회가 하루 아침에 무너질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한 때 몫 없는 자들의 민주주의라는 말이 유행했다. 몫 없는 자들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주체이니 치안의 질서에서 벗어나 강하게 ‘아니오’라고 외치며 정치를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건데,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치안의 힘이 너무 강하다. 제주도 강정마을, 밀양, 청도, 여러 지역에서 마을이 위협받고 있고, 쌍용자동차, 유성기업, 콜트콜텍, 여러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내몰리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권리의 목록을 제 아무리 길게 만들고 읽어줘도 그것을 실제로 쓸 사람이 적을 수밖에 없다. 몰라서 못 쓰는 게 아니라 알아도 못 쓰고 쓸 수 없는 게 약자의 권리 아니던가. 몫을 논하는 순간 돌아오는 이 폭력 앞에서 민주주의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한때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는 말도 유행했다. 개념에 앞서 한국에서 노동자와 청소년, 소수자들은 이미 헐벗은 삶을 살고 있다. 내가 그 현장과 자리에 서지 않기를 원할 뿐 우리는 ‘죽음의 뺑뺑이’를 돌고 있다. 언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는 존재들이다. 무기력한 민주주의가 이 뺑뺑이를 멈출 수 있을까?

 

사실 어떤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좀 과잉될 때에만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자신을 동등하게 대해달라는 목소리와 개입이 있어야 기득권이 해체되고 새로운 정치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잉이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은 기득권이 위협받고 있음을 뜻하기에, 어쩌면 우리가 조금 더 본질에 다가서는 것일 수 있다. 그러니 누가 과잉을 주장하는지 잘 살펴야 한다. 누가 민주주의의 과잉을 이야기하는가?

 

그리고 단순히 자기 몫을 못 챙기는 사람들을 탓할 문제는 아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몫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판단할 수 있는 장 자체가 없다. 중요한 정치의제는 언제나 중앙이나 외부에서 논의되다 삶으로 툭 떨어진다. ‘자아성찰’과 ‘자기판단’은 교과서에나 나오는 얘기이고 실제 삶에는 그런 과정이 없다. 수많은 착시현상들이 판단을 방해하니 판단력은 더욱 떨어지고, 똑똑한 사람들이 반드시 좋은 시민이라는 보장도 없으니 대략난감이다.

 

이런 한국사회에서 스스로 주체로 서지 못하는 민주주의, 서로를 알아보고 동등하게 인정할 수 없는 민주주의, 새로운 관계와 만남으로 이어지지 않는 민주주의는 가식이다. 내가 저들을 위해 권리목록을 만들고 보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물음이 필요하다. 우리가 어떤 세계에 같이 살고 있는가? 함께 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서로를 그렇게 마주보고 있는가?

 

우리 시대의 어려움은 정치와 민주주의를 경험할 수 있는 공공영역이나 공론장은 계속 줄어드는데, 권리를 교육받은 시민들은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서도 생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건 공리이지만,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공리는 분노보다 냉소를 낳기 쉽다. 이 냉소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또 다른 권리목록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의식화와 교육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을까?

 

역설적이지만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 시대에 공공성은 더욱더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그것은 국가와 시장, 시민 사회의 생각이나 이해관계가 엉키거나 충돌하는 지점이 늘어나고, 기후 변화나 먹을거리, 에너지 문제 등 국경을 넘나드는 사안들이 많아지는 우리 삶을 반영한다. 더 이상 혼자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고, 다가올 파국을 함께 대비해야 하기에 공공성은 점점 더 중요해진다.

 

물론 공공성 자체가 그런 다양한 사안에 관한 모범 답안은 아니다. 공공성은 우리가 같은 세계에 살고 있음을 자각하고 같은 세계 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안을 함께 논의하며 민주적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민주주의 없이도 공공사업의 진행은 가능하지만 공공의 이익은 민주주의 없이 확보될 수 없다. 우리가 서로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사고해야 하는 건 우리의 자유를 위해, 더 솔직하게는 우리의 삶을 위해서다. 협동조합운동은 조합원의 자유와 공공성 확보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

 

협동조합운동이 힘을 가지려면 이런 많은 질문들에 하나씩 답을 찾으며 사회의 변화에 동참해야 한다. 협동조합이 모든 역할을 다 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사회의 변화가 조합의 변화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에 끌려가지 말고 이끌어야 한다는 얘기이다. 리차드 세넷(R. Sennett)은 『투게더』(현암사, 2013년)에서 협동과 관련해 중요한 화두를 던졌다. 협력에도 기술이 필요하고, 세넷은 실험과 소통이라는 기술에 주목한다. 이 둘은 서로 연관되는데, “실험은 새로운 일을 하는 것, 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어나는 변화를 구축하는 것을 뜻한다. 젋은이들은 반복적으로, 점점 더 큰 규모로 연습을 해나가면서 소통하는 법을 배운다. 초기의 소통은 모호하다. 아기들이 보내는 신호가 애매모호한 것처럼 말이다. 놀이 규칙을 협상할 수 있을 만큼 자라면 아이들은 그 애매모호성을 협상하고 해소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상대방이 대답하기 전에 무엇을 말하는지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해석하는 기술, 발언만이 아니라 동작과 침묵까지 파악하는 기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잘 관찰하기 위해 스스로는 말을 자제해야 할지는 몰라도, 그 결과 나누게 되는 대화는 더 풍부한 보상을 가져다줄 것이다. 더 협동적이며 더 대화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테니까.” 우리는 이런 기술들을 연마해야 한다.

 

엄기호 역시 소통을 얘기하지만 우리 현실에서 듣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1) “우리에겐 소리로만 전달되는 고통을 들을 수 있는 감수성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하고요. 그런데 누구나 자신의 고통에 대해 토로하기 시작하면서, 말 아닌 방식으로 고통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설 자리는 점점 사라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불길한 생각이 듭니다. 고통의 목소리마저 독점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지금 누가 고통의 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당했는가를 먼저 관찰하고 찾아내서 그 소리와 말을 공적인 무대에 세우는 것이 민주주의라 생각하고, 이런 점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먼저 민주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사회적 경제, 협동조합운동을 외치면서 우리 사회가 단속사회, “자기를 ‘단속(團束)’하며 타자와의 관계는 차단하며 동일성에만 머무르며 자기 삶의 연속성조차 끊어져버린 상태”를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사회를 탓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더딘 민주주의이지만 한국사회에서도 이미 다양한 실험들이 진행되고 있다. 참여예산제도, 타운홀미팅, 어큐파이(occupy), 공유공간, 희망버스, SNS를 통한 이슈화 등. 이변 변화와 협동조합이 무관할까? 사회는 변하고 있는데 협동조합은 사회가 바뀌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섬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4. 조합원주권과 민주주의


한살림운동은 생산자/소비자협동조합을 뛰어넘는 ‘생산과 소비는 하나다’라는 중요한 화두를 제시했다. 그렇다면 이 화두는 어떻게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조합원주권은 이 하나됨 속에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조합원이라는 부름은 생산자와 소비자라는 규정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세계 협동조합운동의 역사를 보면 생산자/노동자협동조합과 소비자협동조합은 갈등을 거듭해 왔다. 소비자협동조합은 소비하는 조합원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하지만 사실 소비자협동조합이라 하더라도 조합원 주권은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조합원으로서의 정체성을 요구한다. 협동조합은 소비자에서 조합원으로 건너갈 징검다리를 놓아야 하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연계되는 협동조합이라면 같은 조합원으로 묶이는 이 양자에게 어떤 역할과 권한을 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안 맥퍼슨 교수가 지적했듯이 협동조합은 주권을 조합의 여러 의사결정기구가 아니라 조합원에게 줘야 한다. 조합원에게 주권이 있다 함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무기력한 반복이 아니라 조합 내의 주요한 의사결정과정이 민주적이어야 하고 조합원들이 그 과정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뜻한다. 그리고 협동조합이 그런 과정을 조직의 목적 중에서 최우선 순위에 놓아야 한다는 점을 뜻한다. 개별 소비자로서가 아니라 공통의 필요와 열망을 가진 협동조합의 조합원으로서 시민들이 자기 삶을 재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초기 한살림운동에서도 이런 주장이 등장한다. <한살림공동체소비자협동조합>의 초대 이사장이었던 이순로는 “죽어가는 밥상, 생명을 살리고 갈라진 삶을 더불어 사는 삶으로 만들 수 있는 길, 그것은 미리 깨달은 사람, 올바른 삶을 원하는 사람들이 서로 힘을 합해 작은 일에서부터 하나씩하나씩 실천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같은 뜻으로 그동안 한살림을 많은 가족들이 이용해 왔지만 이용만 해왔지 스스로 주인이 되고자 하는 노력은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한 발짝 더 나아가 손님의 자리에서 적극적인 살림꾼으로 탈바꿈한 것이 한살림공동체소비자협동조합이라 하겠습니다. 협동조합에 참여하게 되면 계획소비와 책임생산이 가능해져서 개별단위로 남아 있을 때 이용할 수 없었던 물품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되고, 공동구입, 공동나눔 속에 개인발전과 참삶의 맛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한살림운동은 무농약 농산물을 어떤 특정한 계층에 공급하는 이기주의적인 활동을 하자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협동적으로 만나 인간과 대지의 거룩한 생명을 살려내며 불합리한 삶의 모습을 걷어치우는 ‘함께 살림’ 운동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며 작은 힘을 모아서 꼭 해야 할, 또 누구나 할 수 있는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함께 합시다.”라고 강조했다.2) 이순로는 물품을 이용하는 손님이 아니라 삶의 주인이 되려는 노력을, 공동체 속에서 참삶을 찾는 협동운동을 강조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그래서 소비에는 ‘공부’가 중요하다. 소비영역의 활동에서 한살림의 특징을 찾는다면 공부모임에서 찾을 수 있다. “초창기 한살림을 더욱 한살림답게 한 것은 회원들과 진행한 공부였다. 1990년 4~5월에 걸쳐 열린 과천지역 한살림 공개강좌는 ‘공부하는 어머니는 생명을 키우고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주제를 내걸었다. 매월 정기강좌가 진행되고, 화곡이나 관악, 과천 등 활동 주체가 꾸려지고, 모임이 튼튼하게 꾸려진 곳에서는 지역강좌도 마련되었다. 공동체에서 스스로 교육 자료를 발행하기도 했다.”3) 외부의 전문가나 지식인을 불러오는 강좌나 스스로 만든 교육과정, 이런 다양한 공부들이 소비자의 의식을 조합원으로 변화시켰다. 이는 개별화된 소비자를 함께 소비하는 공동체로 조직했다. 지금도 이런 활동들이 ‘교육’과 ‘자주공부모임’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역한살림이 다양한 주제로 교육을 진행하고 지역의 식생활교육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전체 조합원 중 기초조직에 참여하는 비율이 1% 대라는 점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상황이다. 마을모임, 소모임, 매장모임 등이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그 모임들이 조합원의 ‘필요’와 ‘열망’을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장이 되고 있는지는 점검을 필요로 한다.

 

그런 점에서 ‘한살림 회원 생활 수칙’4)은 지금도 되새길 만한 수칙이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이웃과 더불어 깨끗한 환경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바람입니다. 하지만 물질문명의 사회 속에서 이 세상은 온갖 오염으로 정작 모든 생명체는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눈앞의 이익과 남보다 우위에 서고자 하는 욕심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실천하여 한살림을 이루고자 합니다.

- 언제나 나의 존엄함을 생각합니다.

- 나를 솔직하게 느낄 수 있는 기도와 수행을 생활화합니다.

- 힘닿는 대로 봉사하고 그것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 우리말 우리 글을 바로 씁니다.

- 음식은 먹을 만큼만 간단하게 조리합니다.

- 합성세재 대신 비누를 씁니다.

- 천기저귀와 면생리대를 씁니다.

- 쓰레기 양을 최소로 줄입니다.

- 유행을 따르지 않습니다.

- 땅을 투기의 대상으로 보지 말고 무분별한 토지개발을 반대합니다.

- 좋은 점을 찾아 칭찬합니다.

- 내가 먼저 인사합니다.

- 아이들에게 공동생활에 필요한 예의를 가르칩니다.

- 시간을 잘 지킵니다.

- 적은 액수라도 매달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위해 후원금을 내고, 사회운동단체에 가입해서 후원합니다.

- 지역문제에 관심을 갖고 적극 참여합니다.

- 생산자에게 편지를 하거나, 생산지를 방문하여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 육류의 소비를 줄이고, 자급 가능한 곡식과 채소 중심의 식생활로 바꿔나갑니다.

- 에너지를 절약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합니다.

- 작은 생명체라도 함부로 다루지 않습니다.

- 서로를 존중하는 말을 씁니다.

- 길에서 마주하는 아이도 우리 아이로 보살핍니다.

- 시설을 이용하는 놀이보다 자연 안에서 놉니다.

- 한살림 물건을 집을 때 ‘내가 작은 것 고르면 누가 큰 것 먹겠지’ 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 혼자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한살림운동을 이웃에 권하여 함께 펼쳐갑니다.

- 환경보전형 농업(유기농업) 육성에 힘씁니다.


수칙은 존재하는데 이 수칙에 따라 지금 이곳의 삶을 바꾸려는 노력은 존재하는가? 수칙을 수련하는 조합원은 얼마나 존재할까?

 

그리고 조합원 주권이 실현되는 장은 어디인가? 총회인가, 이사회인가? 매장인가? 인터넷 장보기인가? 조합원의 주권이 실현되는 구체적인 장이 있고, 조합원이 그 장의 영향을 받으며 조합원 의식을 강화시켜야 협동조합이 정체성이 강화되고 협동운동이 확장될 수 있다. 마거릿 콘(M. Kohn)은 이런 협동조합운동의 확장을 ‘감염’으로 본다. “물리적 접촉으로 새롭고 위험한 이념의 확산이 촉진된다”는 것이다. “협동조합은 출신이 다양한 회원과 연대 구조, 영토적 기반을 확보하며 정치 동원의 토대로 구실하기에 아주 적합한 조직”이었고, “생계를 위해 충분한 수입을 얻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기부금에 기댄 것이 아니라 상인이나 중개인에게로 돌아갈 잉여가치의 일부를 자원으로 나누어” 줬다. 그러면서 협동조합은 “다양한 농민과 노동자가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정치적․경제적 투쟁을 위한 자원을 획득하는 방식이 되었”고, “그러한 자원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연대감, 즉 생산과 소비 과정에서 발생한 구조적 변화의 결과로 비슷한 지위 하락을 경험하던 다른 개인들과의 수평적인 유대감이었다.”5) 주권은 수평적인 유대감 속에서만 제 몫을 할 수 있다. 이런 변화를 이룰 방법을 찾는 건 여전히 과제이다.



5. 나가며


이 많은 과제들을 한꺼번에 모두 해결하자는 것은 아니다. 사회현실의 변화에 맞추어, 때로는 그 변화를 거스르며 자기 정체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협동조합이 무엇을 할 것인지, 그 속에서 새로운 민주주의는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 그와 관련해 조직구조를 어떻게 바꾸고 내부의 역량을 강화시킬지, 조합원들과의 접점을 어떻게 만들고 주권을 강화시킬지, 이런 부분들에 대한 고민이 하나씩 진행되며 협동조합운동의 중장기적인 발전계획을 구상해야지만 2020년의 협동조합운동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하나하나의 협동조합들이 자본주의 속에 틈을 만들고 조금씩 역량을 강화시켜도 그것이 하나의 섬이 되어버린다면 그건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

 

요즘 한국의 협동조합운동이 이념에 치우쳐 있다는 평가를 간혹 듣는데, 대체 그 이념의 실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형태도 없이 공허하고 흐릿하게 나열된 것은 이념이 아니다. 이념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좌표이다. 사기업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만 협동조합이 존재한다면 그건 사회현실을 바꿀 수 없을뿐더러 대안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망감을 안겨준다. 우리 시대의 냉소주의와 맞서려면 운동이 자기 원칙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이념을 바로 세워야 한다. 녹색이 ‘녹색성장’으로 왜곡된 시대, 협동조합이 ‘창조경제’로 둔갑되는 시대일수록 이념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아직도 한국의 협동조합운동에 이념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이념과 그 이념을 실현할 구체적인 사업들이 드러나지 않는 한, 우리는 매우 공허한 이야기들만 서로 주고받을 것이라 믿는다. 반면에 이념적이라 말하는 사람들의 방법은 생존전략이기에 구체적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마취제 놓듯이 몽롱하게 현실을 바라보게 한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진짜 실용은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현실을 제대로 분석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생존을 이야기할까? 세월호 사건을 통해 드러난 것은 몇몇 정치인의 무능이 아니라 정부시스템의 무능이고, 삼성그룹을 통해 증명된 것은 시장의 부패이다. 이 무능과 부패 속에서 침몰하는, 어쩌면 이미 침몰해버린 것은 사회이다. 이 침몰을 이야기하지 않고 대안을 얘기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 모두 현실주의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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