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단지 아래로부터의 힘을 모으자는 전략이 아니다.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단순히 지역사회를 변화의 거점으로 내세우는 전략도 아니다.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단순히 민중에 대한 무한한 신뢰만을 강조하는 전략도 아니다.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기성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이상만을 좇고자 하는 전략도 아니다.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이 어려운 것은 풀뿌리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기도 하다. 아래, 지역, 민중, 이상과 같은 단어들은 풀뿌리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지만 그것만으로 풀뿌리를 충분히 설명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위와 연결되지 않은 아래는 없고 국가와 무관한 지역사회도 없으며 완전무결한 주체도 없고 이상이 무조건적인 진리나 선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전형(典型)에 대한 부정, 국가주의 또는 중앙집권형 국가체제와의 결별, 삶의 재구성이자 현실적인 이상주의이다. 이 발제문은 근본적이면서 급진적이고자 하는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이 한국사회에서 갖는 의미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 발제문의 내용은 풀뿌리운동 내에서 합의된 의견이 아니라 필자의 주관적인 의견임을 미리 밝힌다.



1. 전형에 대한 부정, 공론장


한국사회에서 공론장(public sphere)이라는 단어가 많이 회자되지만 맥락이 뒤틀린 채 논의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나 아렌트(H. Arendt)에 따르면 공론장은 정치가 이루어지는 장이기에 진리와 선이 아니라 판단에 따르는 곳이고 의견(doxa)이 소통되는 장이다. 그러니 공론장을 통해서는 어떤 진리와 선에 이를 수 없고 그런 논의가 이데아(idea)를 자처할 수도 없다.


그런데 한국에서 공론장은 그런 장을 구성하기 위한 노력보다 공론을 표방하는 여론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이미 어떤 입장을 가지고 찬반을 나눈 뒤 의견을 제시하기보다는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한다. 설득하지 못하는 의견은 의견이 아닌 듯이. 이미 답을 정해놓은 상태에서, 아니 답은 분명히 있다는 전제 하에서 논의가 진행된다. 어떤 기준을 세우는지 논하는 작업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기준에 따라가는 작업이 주를 이룬다. 시민사회운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답은 분명히 있고 우리가 그 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공론장은 전략적인 활용의 장이지 그 장 자체가 근본적인 목적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전형의 부재는 한국인을 불안하게 만든다. 어떤 기준이 존재해야만 사물이나 사건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으니 전형의 부재는 변화는 불가능하다며 냉소한다. 그렇게 보면 전형과 냉소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기보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어떤 상황에 대한 거부가 냉소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형 없음이 냉소로 이어진다. 1980년대 말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가 새로운 논의의 시작이 아니라 변화의 불가능과 변절, 냉소로 이어진 건 이 때문이 아닐까?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그런 전형에 대한 부정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위로부터의 주도, 아래로부터의 힘, 이렇게 명명되는 것도 일종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혁명이 실제로는 복구를 뜻했다는 아이러니한 사실1)은 우리가 대립한다고 생각하는 개념들이 서로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위가 아래를 규정하고 아래에 의미를 부여한다. 아래라고 불리지만 실은 그곳이 바로 중심이나 위일 수 있다. 시민이 무참하게 권리를 짓밟히지만 그들이 바로 주권자이듯이 어떤 위치에서 보는가에 따라 위, 아래는 뒤바뀔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계속 위의 필요성 때문에 아래를 호명하는 것은 아래를 또 다른 전형으로 만들 수 있다. 아래는 이래야 한다, 주민/시민을 조직하는 방식과 목적은 이래야 한다는 전형은 풀뿌리의 역동성을 갉아먹는다.


그렇다면 풀뿌리는 무엇을 의미할까? 풀뿌리의 전일(全一)적인 인식틀은 위와 아래가 분리될 수 없음을, 위와 아래가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아래를 강조하더라도 위의 변화가 동반되지 않으면 변화를 지속시킬 수 없다. 위를 아무리 뒤흔들더라도 토대의 성격이 바뀌지 않으면 변화가 지속되지 않는다. 결국 풀뿌리는 위와 아래가 분리되지 않고 순환하는 사회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고 그런 변화를 위한 준비한다고 봐야 한다. 순환의 역동성, 그것이야말로 풀뿌리의 힘 아닐까? 성장하고 결실을 맺고 다시 밑으로 내려가고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우고 다시 성장하고,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복합적으로 얽히고설키어 진행되는 과정 말이다.


그렇다면 정치공동체에서 그렇게 아래 위를 연결시키고 순환시키는 작업은 어떤 것일까? 나는 헌법이라고 생각한다. 아렌트는 “반란과 해방 운동이 새롭게 획득한 정치적 자유를 헌법에 담지 못한다면, 반란과 해방보다 더 무익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즉 자유의 공간을 틀 지우는 가장 기본적인 작업을 헌법이라고 봤다. 그동안 시민사회운동 내에서 법과 제도에 대한 논의들은 많지만 그 모든 걸 틀 지우는 헌법에 대한 논의는 드물었다. 2008년 촛불집회 이후 대한민국헌법 제 1조가 시민들 입에서 되뇌이긴 했지만 중요한 건 명목상의 제 1조가 아니다. 우리는 어떤 자유를 구성하고 누리기 위해 이 공동체에서 생활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유로운 시민으로 성장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들과 정치공동체에서의 생활을 얼마나 연계시키고 있을까? 헌법은 이런 질문들을 담는 그릇이다.


물론 헌법조차도 이런 전형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위르겐 하버마스(J. Harbermas)가 말했던 헌법의 지속적인 변화가 중요하다. 하버마스는 『사실성과 타당성』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헌법의 고정된 문장은 변화하는 해석의 흐름 속에서만 생동하는 것으로 남는다. 헌법은 시민권을 실현하기 위한 완수되지 않은, 앞으로도 결코 완수될 수 없는 프로젝트이다. 시민권은 매 세대마다 변화된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새롭게 비판적으로 해석되고 소화되어야 하며, 그 실체도 지금까지보다 더 포괄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 풀뿌리 공론장은 이런 완수될 수 없는 프로젝트를 실현하는 장이다.


그리고 더글러스 러미스(D. Lummis)는 『Radical Democracy』에서 민주주의를 일종의 상태로 정의한다. “민주주의는 특정한 정치제도나 경제제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정치제도나 경제제도가 가져오거나 가져오지 못할 어떠한 상태를 가리킨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이상이지, 그것을 달성하는 방법을 설명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통치형태들 중 하나가 아니라 통치의 목적이며, 인류 역사에서 계속 유지되어온 제도가 아니라 역사적인 과제이다.” 물이 액체, 기체, 고체로 변할 수 있듯이 상태로서의 민주주의는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고정되지 않는다. 내부의 구성요소들이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민주주의의 상태는 달라진다. 근본적이자 급진적인 풀뿌리의 민주주의 역시 이런 상태를 지향하고 이를 가능케하는 정치구조를 만들고자 한다.



2. 국가주의 또는 중앙집권형 국가체제와의 결별, 연방주의


국가를 가장 근본적인 정치공동체로 보고 다양성을 억압하는 국가주의(statism)는 식민지 시기부터, 아니 그 이전 시대부터 한국인에게 의식/무의식적으로 강요되어온 이데올로기이다. 그리고 식민지 시기에 만들어진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체제는 해방 이후에도 거의 아무런 변화 없이 1990년대 초반까지 유지되었다.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체제에서는 입법/행정/사법의 삼권분립도 무력화되고 대통령이라는 정점에 연결된 강력한 관료집단들이 생활세계를 식민화시키고 지배한다.2)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국가주의를 극복하고 이런 국가체제를 근본적이고 급진적으로 변화시킬 때에만 가능하다. 아니, 이런 체제전환을 통해서만 사회전환이 가능하다. 전환이 특정 영역에서의 부분적인 변화나 정신승리법이 아니라면 국가구조의 변화는 필수적이다. 그런 점에서 연방주의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연방주의는 연방국가를 포괄하는 더 넓은 개념이다. 연방주의는 지역이 더 많은 결정권한을 가지도록 한다.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권한은 외교와 국방을 제외하면 거의 동등하다. 우리의 생각보다 이런 체제를 갖춘 곳이 꽤 많은데, 연방주의를 공식적으로 채택하지 않더라도 스페인이나 스코틀랜드, 이탈리아, 인도처럼 지역정부가 독자적으로 입법권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스위스나 벨기에처럼 작은 국가들에서도 연방주의가 실시되고 있으니 땅덩어리가 큰 나라에서만 실시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연방정부가 수립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자연스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연방정부가 만들어지면 정치는 더욱더 필요해지고 그만큼 더 활성화된다. 시민들이 어떤 뜻을 품는가에 따라 국가체제는 그에 맞게 계속 바뀔 수 있다. 국가가 정치공동체라면 구성원의 뜻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특히 ‘내부식민지’라는 말이 있듯이, 한국처럼 수도권이 비수도권의 사람과 자원을 계속 빨아들이고 착취하는 체제에서는 정치가 복원될 수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결정권이 모두 서울에 있으니, 생산하지 않는 곳이 생산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모순 아닌가. 추상적인 주장보다는 재정과 정책을 운영할 권한이 어디에 있는가를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2014년 기준으로 한국의 국세와 지방세 비중은 79.9%와 20.1%로 지방자치제도 실시 이후에도 국세 비중은 계속 증가해 왔다. 

결국 지방자치제도 실시 이후에도 중앙정부가 계획하고 지방정부가 그 예산에 기반해 사업을 집행하고 중앙정부가 이를 평가하는 체제가 변하지 않았다. 기득권층이나 재벌들이 쌈짓돈처럼 쓰는 세금을 우리가 원하고 필요한 곳에 쓸 수 있고, 중앙정부나 지역정부가 가진 건 궁극적으로 시민들의 자산이다. 연방주의는 이런 근본적인 부조리를 급진적으로 바로잡으려는 시도이다.


한국은 사실상 두 개의 국가로 나뉘어 있다. 언제나 지배자의 위치에 서는 기득권층의 국가지방자치제 실시 이후에도 행정와 언제나 지배를 받는 시민들의 국가. 그리고 기득권층 대다수는 서울에 살고 있고 지역에중앙부처들은 각종 시행령과 지침으로 지방정부들을 통제하고, 지방정부들은 그런 통제를 는 이들과 연결된 토호들이 기득권 행세를 한다. 시민과 지역의 협조 없이는 기득권층의 국알리바이삼아 자신들이 대변해야 할 지역주민들을 속인다.가가 유지될 수 없을 텐데, 지금은 대안을 찾지 못한 시민과 지역사회들이 무기력하게 기득권층의 국가를 유지시키고 있다. 연방주의는 이 상태를 변화시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또한 북한과의 통일을 고려한다면 연방주의로의 전환은 필수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통합/통일이라는 추상적인 환상은 갈등과 대립이라는 구체적인 현실과 조건을 은폐하고 억압하기 쉽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모순된 국가체제를 지양할 수 있는 연방주의를 확립하는 것이다. 연방주의는 국가주권의 강화보다 주권을 지속적으로 폐기하는 역할을 맡고 풀뿌리의 정치역량을 활성화시킨다.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이런 연방주의 국가형태를 지속적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3. 삶의 재구성, 경제의 정치화


아이러니하지만 민주화 이후 정치의 경제화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민주화가 되었으니 먹고사는 문제에 집중한다고 볼 수 있지만 기본적인 경제조건을 결정하는 정치과정의 중요성이 중산층 신화 속에 망각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의제가 핵심적인 사안으로 부각되지 못했다는 점으로 이를 증명할 수 있다(국가는 노동운동을 억압하고 쟁의에 개입하며 자본의 양적 성장을 지속시켰다). 그리고 민주화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경제적인 자산은 재벌에게 집중되었고, 그만큼 시민들의 삶을 결정하고 그걸 뒤흔드는 재벌들의 힘도 커졌다. 그리고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 역시 커졌고 비수도권에서 생산된 부가가치는 수도권으로 흡수된다.


민주정부라고 불렸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도 이런 경향을 근본적으로 바로잡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 삶의 재구성은 이렇게 식민지로 전락한 삶을 자립의 삶으로 되돌리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연방주의 역시 이런 자립 속에서만 지속될 수 있다. 그런 자립경제에 관한 단초를 박현채의 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박현채는 『한국경제구조론』에서 “경제발전의 과정은 단순한 경제적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전체적인 사회적 변혁의 과정이어야” 하고, “경제발전의 추구는 민족주체적으로 한 민족의 민족주의적 요구, 민족의 자립과 민족주의적인 통일된 민족국가의 수립을 경제적으로 밑받침하는 것이어야” 하며, “경제발전에 있어서 토착적인 것의 최대한의 활용이 있어야” 하고, “새로운 발전론의 모색에서는 경제이론에서의 인간 복권(復權)이 이루어져야” 하며, “경제발전은 경제발전의 중요한 동인인 인간의 창의․창발성에 서는 것이어야” 하고, “시장결락(market failure)에 의한 공해는 물론 경제제량만을 위한 무원칙한 경제성장의 추구가 가져오는 생활환경 및 생태계의 파괴는 최소한으로 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 경제나 미국에 의한 원조경제, 재벌과 결탁한 관료자본주의,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 벗어나 국민경제, 자립경제를 이뤄야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박현채는 강조했다. 그렇지만 세계자본주의와 한국경제의 조건 속에 농업을 놓고 농업과 중소기업으로 자립경제의 기반을 만들려고 했던 박현채의 시도는 김대중 정부와의 결별로 실패하게 된다.


세계화의 현실에서 자립경제의 가능성과 범위를 어느 정도로 인정할 것인가는 논의가 필요하지만 경제를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삶 속으로 가져오는 작업은 필요하다. 앞서 논의한 연방주의도 경제를 우리 삶 속으로 가져오기 위한 디딤돌이다. 경제 면에서 연방주의는 협동과 우애의 원리에 바탕을 둔 경제질서, 생산과 소비, 농업과 산업을 분리시키지 않고 지역과 지역이 동등하게 자원을 나누고 협력하고자 하는 전략이었다. 없는 걸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연방주의 정신에 따라 강화시킨다면 자립경제라는 목표는 헛된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런 전환의 과정은 구체적인 정책으로 뒷받침되어야 하고 그런 정책을 구성하는 과정에는 시민의 개입과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하다. ‘중앙정부의 와해=지역자치의 활성화’가 아니듯 ‘독점의 해체=자립의 활성화’는 아니다. 각자의 삶의 규모를 해석하고 판단하는 과정도 필요하고 지역사회의 필요와 가능성을 해석하고 결정하며 그런 것을 공통의 과제로 구성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서로 다른 처지에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공통의 불안과 위험 속에 있다는 자각이 있어야 공통된 삶의 재구성이 가능하다.


그리고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구호와, 이미 고용 자체가 한계에 달했다는 앙드레 고르(A. Gorz)의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이라는 선언을 함께 고려한다면, 임금노동제도라 불리는 임금노예제도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자본주의 임금제도는 노동력을 빌미로 인격을 구매하는데, 구매당한 인격은 스스로 삶의 규모를 조절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제는 세계화, 자동화와 더불어 기업의 구매력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 실업과 노동빈곤(working poor)이 정치를 경제화시켜서 인간을 생존욕구에 불타는 좀비로 만든다면, 기본소득(basic income)은 경제를 정치화시켜서 죽어버린 좀비의 심장을 다시 뛰도록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본소득에 관해 이런저런 우려들이 있지만 아렌트 식으로 말한다면 자유로운 정치공간이 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다. 사실 엄청나게 새로운 이야기 같지만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져간다는 코뮨주의 원리의 현대판이라고 볼 수 있다. 일종의 공유지를 만드는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고립된 생활을 강화시키는 방법이 아니라 공동체를 구성하며 공유지를 만들고 확장시키는 방법이라 본다면, 기본소득은 삶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경제를 근본적/급진적으로 정치화시키는 과정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1) “‘혁명’이라는 용어는 원래 천체 궤도의 운행(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이라는 코페르니쿠스의 표현을 통해 자연과학에서 점차 중요해진 천문학 용어였다. 이 과학 용어에서 혁명이라는 용어는 라틴어의 의미를 그대로 유지했다. 별들의 회전 운동은 인간의 영향력을 벗어난 거역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새로움이나 격렬함이라는 특징과는 분명히 거리가 먼, 규칙적이고 합법칙적인 것을 의미했다.”(한나 아렌트, 『혁명론』)


2) 그 과정에 대한 분석은 하승우․권정우의 『아렌트의 정치』 참조.


1. 나른한 봄날의 꿈


박영순 시장실의 회의 열기가 뜨겁다. 다가올 여름에 사상 최대의 전력난이 우려되자 서울시의 전기공급을 조절할 수밖에 없는데, 불편을 호소하는 민원인들의 전화가 폭주할 거라고 담당자들이 걱정한다. 전력을 거의 생산하지 않는 서울시가 전력을 확보할 방법은 전력을 생산하는 다른 지역들의 도움을 받는 것인데, 요즘 수도권 밖 지역정부들의 태도가 예전같지 않다. 경기도와 협의해서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산업이나 자원을 조정하지 않으면 수도권으로 보내는 전력을 줄이거나 단가를 높이겠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하고 있다. 과거 중앙정부 시절에 발전소들을 전부 지방에 크게 짓다보니 서울시로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박영순 시장이 나서서 박본혜 대통령과 통화를 했지만 연방정부 역시 비리나 특별한 문제가 아니면 지역정부가 운영하는 공기업인 전력회사에 개입할 수 없다며 난색을 표한다. 전력난 걱정에 마음이 심란한데, 박본혜 대통령은 제주도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만드는 걸 서울광역시정부(연방국가로 전환된 뒤 서울특별시는 서울광역시가 되었다)가 공개지지하고 서울시민의 찬성여론을 유도해 달라고 요청한다. 아버지가 대통령일 때가 좋았는데, 라는 이상한 말을 하면서 박본혜 대통령은 전화를 끊었다.


과거 중앙정부 시절에 온갖 지원을 약속받았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이득이 없다보니 지역정부들은 연방정부의 약속을 잘 믿지 않는다. 확실한 지원책을 미리 제공받고 난 뒤에야 해당 사업을 진지하게 고민하겠다는 식이다. 국방은 연방정부의 소관이라 밀어붙일 만한 일이지만 제주도의 역사를 고려할 때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식이라면 육지와 분리․독립하겠다는 제주도지사의 당선은 연방정부를 더욱더 곤란하게 만들었다. 제주도지사는 연방정부의 분명한 지원이 없다면 과거 중앙정부에게 피해를 입었던 지역들과 손을 잡고 따로 협조체계를 꾸리겠다며 압박을 가하기도 한다. 그리고 제주도지사는 앞으로 제주도내 공문서에서 표준어와 제주어를 똑같이 공식언어로 채택하고 학교에서는 제주어를 먼저 가르치겠다고 밝혔다. 차차 표준어 사용을 줄이겠다고 하니 제주도에 가는 연방공무원은 제주어 과외를 받아야 한다. 연방정부가 해군기지 공사를 밀어붙이다간 제주공화국이 수립될 것 같다.


제주도만이 아니다. 충청남도는 한국은행과 별도로 화폐를 만들겠다며 충남은행을 설립했다. 지역 밖으로 빠져나가는 돈을 묶어서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고 한다. 충남은행의 설립은 중앙정부의 경제정책이나 중앙정부가 내려주는 지원금에 목을 매는 시대가 지나갔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앞으로 충남은행은 중앙통화와 지역화폐를 환전하며 지역경제를 순환시키는 심장 역할을 맡을 예정이다. 그리고 충청남도는 도시와 농촌, 어촌이 공존하는 지역특색을 살리는 발전정책을 수립하겠다며 관련 법령들을 전면 재검토하고 있다.


중앙정부가 연방정부로 전환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지역정부들은 ‘지역주권’을 강화시킬 수 있는 연방주의를 지지하고 있다. 그리고 연방정부는 과거 수도권으로의 초집중을 보상하는 차원에서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정부에게 연방기금을 지급하고 있다. 지역정부들이 수도권을 포위하는 전략을 공동으로 세우고 압력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지역주의는 영호남이 아니라 수도권과 비수도권에서 간혹 드러났다). 연방주의는 각 지방들이 알아서 살아남는 구조가 아니라 각각의 필요들에 따라 서로 연합하는 것이기에, 지역간의 연대는 더 강화되었다. 또 지역정부의 법률(연방국가가 되면서 조례라는 말이 사라졌다)이 연방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발휘하다보니 지방의회의 권한이 강해지고 법원도 따로 구성되었다.


시민들이 자기와 맞는 지역을 선택하며 여차하면 다른 지역으로 떠나겠다고 하니, 지역권력도 주민들의 요구에 더 민감해졌다. 그리고 중요한 결정들이 서울보다 지역에서 내려지자 주민들도 자기 지역의 미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정부와 기업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한다. 연방국가로 전환되면서 주민소환권이 강화되고 한 단계 더 가까워진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며 더 작은 규모의 대안을 모색하는 주민자치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연방국가는 공공정보를 공개해서 이런 움직임을 뒷받침한다. 이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2. 왜 연방주의인가?


위의 이야기는 허구이지만 근거 있는 이야기이다. 미국의 경우 각 주마다 발전소와 전력공급회사가 있는데, 2000년 캘리포니아주의 전력난 사태는 공기업인 발전소가 민간회사에 매각되면서 전력가격이 폭등하면서 시작되었다. 엔론이라는 회사가 그 주역인데 가격을 장난쳐서 두 군데의 전력공급회사를 파산하게 만들었다. 문제가 터지자 나중에 미연방정부도 개입했는데, 한국이라면 중앙정부와 한수원이 좌지우지했을 일이다. 한국처럼 의사결정이 집중되면 그만큼 부패가 발생하기 쉽고, 힘이 약한 지방이 중앙에 종속된다.


캘리포니아주 사태처럼 시민의 통제가 없으면 문제가 생기기도 하지만 연방주의는 지역이 더 많은 결정권한을 가지도록 한다.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권한은 외교와 국방을 제외하면 거의 동등하다. 우리의 생각보다 이런 체제를 갖춘 곳이 꽤 많은데, 연방주의를 공식적으로 채택하지 않더라도 스페인이나 스코틀랜드, 이탈리아, 인도처럼 지역정부가 독자적으로 입법권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스위스나 벨기에처럼 작은 국가들에서도 연방주의가 실시되고 있으니 땅덩어리가 큰 나라에서만 실시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연방정부가 수립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자연스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연방정부가 만들어지면 정치는 더욱더 필요해지고 그만큼 더 활성화된다. 캐나다의 경우 퀘벡주는 두 차례나 연방정부와 떨어져 독립하기 위한 주민투표를 진행했다. 영어와 프랑스어를 모두 공용어로 쓰는 캐나다이지만 퀘벡주는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쓴다. 캐나다에서 가장 크고 인구가 두 번째로 많은데도 퀘벡주의 뜻이 연방헌법이나 정치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퀘벡주는 1980년과 1995년 두 번 분리독립을 위한 투표를 실시했다. 1980년에는 분리독립 찬성비율이 40.44%, 1995년에는 찬성비율이 49.42%에 달했다. 그 뒤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퀘벡당과 독립을 반대하는 자유당의 업치락뒤치락 선거경쟁이 계속되고 있다. 연방정부가 되면 국가로부터의 분리도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된다.


그리고 2014년 9월 18일에는 영연방에서 스코틀랜드가 분리․독립하는 것에 관한 주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찬성율 44%로 독립은 무산되었지만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윌리엄 월레스가 외쳤던 ‘프리덤’은 여전히 스코틀랜드인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대표 없이 세금만 부과하는 현재의 체제를 고분고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자세이다. 투표는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분리․독립 시도가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자유의 열망은 계속될 예정이다.


이렇게 보면 시민들이 어떤 뜻을 품는가에 따라 국가의 형태는 그에 맞게 계속 바뀔 수 있다. 국가가 정치공동체라면 구성원의 뜻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 우리도 퀘벡주나 스코틀랜드처럼 분리․독립을 하지 말란 법도 없다.


특히 ‘내부식민지’라는 말이 있듯이, 한국처럼 수도권이 비수도권의 사람과 자원을 계속 빨아들이고 착취하는 체제에서는 정치가 복원될 수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결정권이 모두 서울에 있으니, 생산하지 않는 곳이 생산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모순 아닌가. 연방주의는 이런 기본적인 부조리를 바로잡으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한국은 사실상 두 개의 국가로 나뉘어 있다. 언제나 지배자의 위치에 서는 기득권층의 국가와 언제나 지배를 받는 시민들의 국가. 그리고 기득권층 대다수는 서울에 살고 있고 지역에는 이들과 연결된 토호들이 기득권 행세를 한다. 시민과 지역의 협조 없이는 기득권층의 국가가 유지될 수 없을 텐데, 지금은 대안을 찾지 못한 시민과 지역사회들이 무기력하게 기득권층의 국가를 유지시키고 있다. 연방주의는 이 상태를 변화시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연방주의 논의는 단순히 중앙정부의 권력을 분산시키자는 주장이 아니다. 권력을 근본적으로 재편하자는 것이고 청와대와 국회만 바라보는 우리들의 무기력한 시선을 이제 구체적인 지역으로 돌릴 기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3. 어떻게 하면 연방주의를 실현할까?


지난 2015년 3월 5일 ‘시민이 만드는 헌법 국민운동본부’라는 단체가 발족했는데, 이 단체는 선언문에서 한국의 낡은 헌법이 사회 현안을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민이 나서서 직접 헌법을 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는 발족 당일 대토론회를 열고 지방분권과 국민주권, 사법정의, 권력구조개혁 등을 요구했다. 참석하지 못해 토론에서 논의된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다른 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개헌이나 분권형 국가에 관한 논의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실제로 연방주의로 가려면 개헌이 필수적이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연방주의가 아예 배제되어 있고, 자치단체에 관한 규정만 있을 뿐 주민자치에 관한 규정은 법률로 위임되어 있기 때문이다(제 118조 2항 ‘지방의회의 조직․권한․의원선거와 지방자치단체의 장의 선임방법 기타 지방자치단체의 조직과 운영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지방자치제도의 지위가 법률에 위임되어 있기 때문에 과거 박정희 정권은 지방자치제도를 유보시킬 수 있었다. 연방주의 개헌이 되면 국회나 청와대가 지방자치제도를 마음대로 좌우할 수 없다.


사실 그래서 개헌은 쉽지 않을 것이고, 기득권층은 이에 적극적으로 저항할 것이다. 실제로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그동안 진행된 지방자치 논의를 거꾸로 되돌리려 하고 있다. 2014년 12월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는 ‘지방자치발전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지방의회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지방행정에 주민참여를 확대시키며 기초자치단체에 자치경찰단을 설치하는 등 그동안 시민사회가 요구해온 방안들도 포함되었지만 특별시와 광역시의 기초의회를 폐지하고 단체장과 교육감 직선제를 변형하는 등 지방자치의 흐름에 역행하는 내용들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주민자치를 외치면서 행정단위를 광역화시키겠다는 이상한 발상도 항상 따라다니고 있다. 이런 구상은 박근혜 정부의 독자적인 판단이 아니고 이명박 정부의 지방행정체제개편추진위원회도 비슷한 방안을 제안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분권은 일종의 ‘착시현상’을 낳을 수 있다. 권력을 나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지역의 기득권을 더 강화시킬 수 있고 분권이 수사에 그칠 수도 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 때처럼 분권과 균형발전을 중요한 의제로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공사판의 규모를 키울 수도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이제는 분권보다 더 분명한 연방주의를 내세워야 한다. 그래야 기득권층의 술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연방국가가 수립되면 문제가 끝나는 것도 아니다. 머레이 북친은 『다음 세대의 혁명(The Next Revolution)』(2015년 번역 출간예정)에서 미국이나 유럽공동체(EU) 등에서 드러나는 연방국가의 문제를 지적한다. 연방국가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중앙집권화가 진행되고 시민이 국가를 통제할 방법은 제한되어 있다는 비판이다. 그래서 북친은 지역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인민의회들(popular assemblies)이 소환할 수 있는 대리인들을 지역과 지방의 연맹의회로 보내는 네트워크”를 구성해야 하고 연방은 지역간의 차이를 조절하는 역할만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친은 국가주의를 강화시키는 국가선거보다 지역정부의 선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지역정부가 국가와 의회에 맞서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분권이나 연방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흔한 실수는 국가통치를 구성하는 주와 국가 차원의 선거활동과 지역차원의 선거활동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북친은 우려한다.


북친의 주장을 한국에서 무조건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연방주의를 실현할 전략과 관련해 여러 시사점을 준다. 일단 청와대나 국회는 연방으로의 전환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거스를 것이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체제에서는 국민투표를 통한 헌법 개정 외에는 연방으로의 전환을 강요할 방법이 없는데 국민투표를 부여할 권리도 대통령에게 있다.


그렇다면 방법은 없을까? 그렇지는 않다. 연방주의는 새롭고 자유로운 사회구조를 만들려는 이들이 합심해서 만들어낸 이념이자 전략이다.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려면 우리 스스로가 지금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정치 면에서 연방주의란 정부 안에 정부를 만들어 일종의 이중권력을 만들고 주권이 작동되는 방식을 바꿀 뿐 아니라 주권 자체를 시민들이 직접 정의하게끔 하는 이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지금 이중권력을 구성해서 그림자 정부를 활성화시키면 어떨까? 우리 스스로의 공식화되지 않은 자치질서를 짜는 것은 지금도 가능하다.


그리고 경제 면에서 연방주의는 협동과 우애의 원리에 바탕을 둔 경제질서, 생산과 소비, 농업과 산업을 분리시키지 않고 지역과 지역이 동등하게 자원을 나누고자 하는 전략이었다. 그렇다면 이미 연결되어 있는 생산/소비의 망을 강화시켜서 농부가 도시인의 밥상과 공장/사무실의 급식을 책임지고, 도시인이 농촌으로 내려올 수 있는 바탕을 만든다면? 도시인이 농촌의 삶을 지지하고 산업이 농촌의 기술을 지원하면 어떨까? 없는 걸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연방주의 정신에 따라 강화시켜가야 실제로 연방으로의 전환이 된 후에 지역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


또한 문화 면에서 연방주의는 표준어와 표준지식, 통일된 기준을 거부하고 지역적인 지식과 문화를 강화시키려는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중앙언론을 끊고 지역언론을 살리고, 외부의 시선이나 수도권 중심의 담론을 차단하면 어떨까? 지식과 문화의 획일성을 깨고 차이와 다양성을 활성화시키려면 다양한 공동체 공간이 필요한데, 도서관이나 다양한 시민공간 등이 그런 역할을 맡으면 어떨까? 시민의 정체성이 지역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면 자급과 자치의 중요한 기둥이 될 수 있다.


연방주의는 연방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살려는 시민들이 등장하고 서로 손을 맞잡을 때에 실현될 수 있다. 국가의 민주화와 시장의 사회화, 주권의 분권화, 자치와 자급의 삶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지역이 자립의 기반이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자급이 가능하려면 안팎의 다양한 연계가 필요하다. 필요한 인력과 자원, 더 중요하게는 경험과 지혜를 공유할 관계망이 필요하다. 내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타자의 자유를 희생시키지 않고 기득권에 맞서 서로가 서로의 자유를 지지할 때에만 자유가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은 무시되지 말아야 한다. 사실 진정 자율적인 존재라면 스스로의 선택으로 타자의 뒤에 서서 그 뒤를 받쳐줄 수 있다. 이런 자율적인 존재들이 만나야 연방의 원리가 실현될 수 있다. 우리는 자유롭기 위해 서로 연대한다, 는 마음가짐이 만남에서 가장 중요하다.



4. 연방주의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지금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갈등들은 대부분 중앙정부의 정책 때문이다. 지역의 구체적인 사정과 필요, 관행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집행되는 정책, 그것도 수도권의 필요에 따라 진행되는 정책들이 많다(에너지정책이 대표적이다). 이런 문제를 개혁하려면 지역사회가 ‘지역주권’을 가지고, 그런 지역들이 서로 연계되어 ‘연대의 정치’를 펼칠 수 있는 연방정부가 필요하다. 이런 전환은 시민들에게 자율성만이 아니라 결정에 대한 책임성도 준다. 스스로 결정하며 시행착오를 경험하다보면 그 지역에 맞는 삶의 형식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연방주의로 전환하기 위한 논의를 모으고 합의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의 몫을 되찾는 일도 가능하다. 기득권층이나 재벌들이 쌈짓돈처럼 쓰는 세금을 우리가 원하고 필요한 곳에 쓸 수 있고, 중앙정부나 지역정부가 가진 건 궁극적으로 시민들의 자산이다. 자치가 활성화되면 헛되이 사용되는 자원이 줄어들어 삶의 질이 높아질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중앙정부에만 맞춰져 있는 우리의 시선을 지방정부로 돌려야 한다. 중앙정부의 일에 관심을 끊으라는 게 아니라 지방정부의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이다. 적어도 중앙정부의 권력보다 지방정부의 권력이 접촉하기 쉽고 통제할 수 있는 방법도 더 많다. 세금을 더 내서 복지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지방세의 비중을 늘려 국세와 지방세의 균형을 잡고 지역의 힘을 늘리는 방향으로 나아야 실질적인 변화를 체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역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정치적인 힘이 생길 수 있다.


지역사회는 자연과 사람이 상호의존하며 자치와 자급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공간이자 그런 관계를 통해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세상으로 도약할 수 있는 장소이다. 서로의 삶을 섞고(共有) 공적인 장을 확장하는(公有) 공공성(公共性)은 지역에서부터 실현될 수 있다. 그러니 지역사회를 무대로 삼는 운동주체의 등장과 그 주체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행동, 그것을 지속시킬 수 있는 살림살이가 필요하다. 신문을 만들거나 인터넷 카페를 만들거나 방송국을 만들거나 민중의 집과 비슷한 공유공간을 만들거나, 그 방식은 여러 가지이다. 연방주의는 그런 다양한 실험들을 담기에 좋은 그릇이고, 그런 우리를 위한 체제이다.




2009년 2월에 금속노조에서 나온 정책연구보고서 「산별노조시대: 금속노조의 지역사회 개입전략」이 만들어질 때, 연구진과 2008년도에 지역운동을 설명하러 공식적으로 한번 만났고, 보고서가 나온 뒤 금속노조 간부들이 모인 발표회를 할 때 비공식적으로 한번 참여했다. 그날 발표회 자리는 내게 오랜 시간 동안 당혹스러운 자리로 기억되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간부들 대부분이 보고서 내용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개입할 현장, 현안이 많은데 생뚱맞게 웬 지역사회? 지금 한가해요?, 이런 분위기였다. 2015년이면 7년째인데, 이 보고서가 나온 뒤 금속노조는 어떤 구체적인 개입전략을 만들었을까? 그리고 그때보다 더 발전된 전략을 고민하고 있을까? 실사구시(實事求是)라고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야 그 다음 과정이 보일 거라고 생각한다.



1. 풀뿌리운동이란?


보통 풀뿌리운동은 특정 지역을 근거로 삼는 운동으로 이해되지만 그건 절반의 진실이다. 풀뿌리운동은 수동적인 주민을 능동적인 주체로 성장시키려는 목적을 가진다. 그래서 특정 지역을 근거지로 삼더라도 주민이 직접 의제를 만들고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을 주도하지 못한다면 풀뿌리운동이라 보기 어렵다. 풀뿌리운동은 운동과정에서 발전된 주민들의 리더십이 지역을 재구성하는 정치적인 힘이 되고, 주민들의 민중권력이 지방권력과 대등해지는 삶을 지향한다. 군사독재 시기와 비교하면 운동의 뿌리가 제법 넓어졌고 언론의 주목을 받는 지역들도 생겼지만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렸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왜냐하면 지역도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변하고 풀뿌리운동의 주체들도 인간이기에 다양한 경로를 걷기 때문이다. 뉴타운, 산업단지와 같은 개발사업들이 지역에 큰 영향을 미치고, 각종 사건이나 죽음이 주체들의 힘을 뺐다 늘렸다 한다. 그래서 풀뿌리운동은 어떤 하나의 모델을 따라가기 어렵다. 사람이 중심인 운동인지라 사람들의 다양한 관점과 삶이 반영되어야 하고, 지역이 중심인 운동이라 중앙집중성보다 다양성을 반영해야 한다.

그렇기에 풀뿌리운동은 주체의 성장과 다양성이라는 강점을 제대로 살리고 있는지를 계속 점검하고 있다. 주민구성이 특정 아파트나 마을을 넘어 다양해지고 넓어지고 있다면, 생활과 노동의 장이 조금씩 통합되고 있다면, 그러면서 지역과 사람의 독특성을 드러내며 단단한 관계망을 만들고 있다면 그 힘은 강하다. 사실 풀뿌리운동의 정치적인 힘은 관계망을 통해 구성된 신뢰이고 생활로 단련된 지혜이다. 신뢰는 일방적인 믿음보다 자신의 힘에 대한 자각과 서로에 대한 약속을 뜻하고, 지혜는 표준화된 지식보다 가슴과 몸으로 느끼는 경험과 함께 나누는 삶을 뜻한다.

서로를 믿고 돌보고 물건을 나누고 같이 밥 먹고 수다를 떨며 공부하는 과정은 생활정치의 동력이고 자치(自治)를 가능케 하는 토대이다. 주민 스스로가 이 과정을 기획할 수 있기에 운동은 즐겁기도 하다. 함께 즐겁게 할 수 있다는 점이 풀뿌리운동의 강점이다. 이런 삶이 단단해지면 기성 권력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삶이, 그리고 지역이 지속될 수 있다.

그렇지만 풀뿌리운동이 현실의 역동성을 반영하려면 지속적인 ‘공부’와 ‘수련’이 필요하다. 공부를 해야 그동안 보이지 않던 사람과 공간이 눈에 들어오고 수련을 해야 사람과 지역에 대한 감각과 의식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더구나 한국처럼 제왕의 권력을 가진 대통령과 단체장이 있는 중앙집권형 사회에서 풀뿌리의 힘이 강해지려면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더구나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갈수록 다양해지는데, 기득권은 개발, 발전이라는 말 하나로 자기 전략을 설득할 수 있지만, 풀뿌리운동은 통일되지 않은, 통일될 수 없는 언어로 주민들을 만나야 한다. 운동에서는 그나마 만남이 가능할 수 있지만 선거에서는 그것이 어렵다(선거과정조차 불리하다). 따라서 개발에 대한 비판도 중요하지만 지역의 언어로 만들어진 비전이 사회 전체의 변화와 연계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해관계와 변화의 비전을 연계시켜야 한다. 정치에 관한 정보를 나누는 통로도 다양해져야 한다. 생활정치의 힘이 강해져도 그 힘이 체제를 압박하지 못한다면, 두 사회가 분리된다면 삶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특히 행정 주도의 마을만들기나 사회적 경제가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자원배분에 더 많은 이해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누가 자원을 더 많이 끌어올 수 있는가를 따지는 이해관계와 영악해진 주민은 풀뿌리를 쉽게 흔들 수 있다. 그리고 정부와 연관된 일자리들이 늘어날수록 그것은 주변의 질시를 받고 주민을 분열시킨다. 풀뿌리가 지역을 강화시켜야 하는데 외려 체제를 강화시킨다. 내적인 힘을 다지면서 외부와 적극적으로 연계될 때에 풀뿌리민주주의는 더 넓게, 더 깊이 뿌리를 내릴 것 같다.



2. 풀뿌리운동의 현재


우리의 민주화운동 역사에서도 풀뿌리민주주의의 싹을 찾을 수 있다. 1960년대 이후의 주민운동, 빈민운동 등이 지역운동의 뿌리가 되었고, 1995년도에 지방자치제도가 전면적으로 실시된 후에는 풀뿌리민주주의가 제도정치와도 접목되고 있다.

물론 풀뿌리민주주의가 자연스럽게 실현되지는 않는다.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다양한 단체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한국에서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는 단체들이 있다. <시민의신문>과 <한국청년연합회(KYC)>가 엮은 『도시 속 희망공동체 11곳 - 풀뿌리가 희망이다』(시금치, 2005년)는 <광명YMCA>를 비롯한 11곳을 대표적인 풀뿌리운동의 사례로 소개한다. 그리고 김기현의 『우리 시대의 커뮤빌더』(이매진, 2007)는 <부천YMCA>의 녹색가게, <광명YMCA>의 등대생협, 부산의 <희망세상>, 안성의 <안성의료생협>, 네 곳을 풀뿌리운동의 사례로 소개한다. 그리고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의 『달팽이가 달리기를 시작한 까닭은?』(이음, 2008년)은 <광명YMCA>의 등대생협, 서울 강북구의 <녹색삶을 위한 여성들의 모임>, <대전여민회>의 중촌마을어린이도서관 짜장, 천안의 <복지세상을 열어가는 시민모임>, 충청북도 옥천군의 <안남 어머니학교>, <안성의료생활협동조합>, 강원의 원주의 <협동조합운동협의회>, 강원도 철암의 <철암어린이도서관>, 부산의 <희망세상> 등 9곳을 풀뿌리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한다.

운동의제의 측면에서 보면, 도서관운동, 보육운동, 학교급식운동 등 다양한 생활상의 이슈들이 풀뿌리민주주의의 의제로 등장하고 있다. 도서관이나 보육, 학교급식과 관련된 운동은 그 사안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안을 해결하는 과정에 주민/시민이 참여하며 의식을 확장하고 정치주체로 성장하도록 디딤돌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풀뿌리민주주의와 맞닿아 있다. 도서관이나 놀이터, 공부방, 방과후학교 등이 일정한 물리적인 공간을 중심으로 민주주의의 관계망을 구성한다면, 보육이나 학교급식 등은 지역사회 내의 다양한 사람들을 조직화하면서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장이 되고 있다.

그리고 행정이 주도하는 주민자치센터나 주민자치위원회를 민주적인 공간으로 바꾸려는 노력들도 점점 많이 등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도시계획이나 재개발, 주거권에 개입하려는 운동도 조금씩 활성화되고 ‘미래의 시민’인 청소년들을 지역사회의 주체로 구성하는 운동도 활발해지고 있다. 또한 천안의 <풀뿌리희망재단>처럼 지역재단을 설립하는 운동도 추진되고 있다.

이런 다양한 흐름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이런 운동이 주민들의 성장에 필요한 여유를 마련하고 과정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주민들이 곧바로 능동적인 정치주체로 변신하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운동은 주체들이 성장할 ‘과정’과 ‘여유’를 마련한다. 이런 과정과 여유는 소외된 주민이 자신의 ‘시민됨’을 자각하고 능동적인 정치적 의지를 회복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직접 참여하고 실천하며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배우게 한다. 성공적인 사례로 거론되는 지역들은 바로 이런 과정을 만드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삶의 터전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것은 활동가가 아니라 주민이고 활동가는 주민이 세계를 이해하고 변화시킬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맡을 뿐이다.

허나 아직은 그 뿌리가 튼튼하지 않기에 한국의 풀뿌리민주주의를 낙관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 중앙정부로 집중된 권력, 중앙에서 지역으로 끈끈하게 연결된 부패의 고리, 학연/지연/혈연으로 대변되는 연고주의, 심각한 사회적 양극화와 청년실업 등은 민주주의의 기반을 갉아먹고 있다. 비민주적인 학교와 공장, 사무실, 군대 등이 민주주의를 가로막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풀뿌리민주주의가 지역을 넘어 한국사회로 확장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가정과 공장의 벽을 넘어, 정치와 경제의 벽을 넘어 우리 삶을 총체적으로 바꿔야 민주적으로 살 수 있다.

그리고 재활용가게, 나눔장터, 동네카페, 도서관,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등 풀뿌리운동의 영역은 계속 넓어지고 있고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지만, 규모와 활동가의 수가 운동의 목적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외려 규모와 수가 늘어날수록 단체 내부에서조차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자기 담당사업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자기반성의 목소리가 솔솔 흘러나온다. 외부로 알려진 만큼 내실이 없다는 비판, 사업담당자만 있지 활동가는 없다는 성찰도 있다. 지역/시민단체 내부의 열악한 노동 문제도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소위 사회적 경제라 불리는 영역은 노동의 영역이기도 하기 때문에 풀뿌리운동은 노동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3. 지역과 노동운동의 만남은 가능한가?


노동환경건강연구소 김신범 실장은 “노동권을 지키는 마을 어때요?”라는 발제문(<인천 제 2기 주민자치인문대학 2014년 10월 17일)에서 청소노동자의 씻을 권리운동을 평가하며 “우리는 이번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대다수의 시민들이 가진 허위의식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언론에 있었다. TV에서는 환경미화원 채용시험에 수백대 일의 경쟁률을 보였으며, 대학졸업자도 다수 지원했다고 떠들면서 환경미화원의 일자리가 고임금에 좋은 것으로 보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로 인해 대다수의 시민들은 청소업무의 민간위탁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던 수준이 아니라, 오히려 환경미화원은 고임금에 좋은 대우를 받는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환경미화원의 해고저지투쟁이나 민간위탁 반대투쟁의 절박함과 정당성이 얼마나 지역주민들에게 전달되었을지는 너무도 명백한 것이었다.…아직, 시민과 노동자들이 만나서 청소업무 민간위탁으로 인한 예산절감효과를 분석하는 수준까지는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공부문 사유화의 폐해가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조건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지역사회와 호흡하면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질문을 지역사회 시민들과 함께 던져보고 싶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케이블방송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운동 C&M투쟁을 평가하며 “희망연대노동조합은 단체교섭을 통해 사회공헌기금을 확보하였고 지역의 시민사회단체가 하는 사업의 지원비로 내놓는다. 시민사회단체에서는 기획안을 마련하여 노동조합에 제출하고 심의를 통해 사업지원을 받게 된다. 송파시민연대는 희망연대노동조합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PVC 플라스틱으로부터 어린이를 지키는 캠페인을 지역에서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러던 이들이 노동조합 존폐위기에 놓이자 시민사회는 적극 이들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송파 강동 지역에서는 석촌호수에서 이들을 위한 문화제를 시민단체들이 주도하여 개최하였다. 지역사회에서 이들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캠페인이 전개되고 있다. C&M 노동조합은 적어도 외롭지는 않다. 지역에서 이러한 연대가 이루어지자 인터넷 기사들의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면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하여 회사에게 압박을 하는 등 최근에는 관계가 더 돈독해지고 더 구체적인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런 흐름을 보며 김신범 실장은 “정리해고, 명예퇴직, 간접고용의 문제를 마을이 파괴되는 문제로 인식하는 태도가 자리하기 시작했다. 정리해고나 명예퇴직을 당하는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자영업으로 뛰어들지만, 이 들 중 대다수는 망하고 만다. 망하는 과정에서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에 대해 제대로 된 처우를 해 줄 리 만무하다. 고용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사회의 최종 피해자는 나의 이웃이며 나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청주 생활교육공동체 공룡의 박영길 사무국장은 “마을과 노동, 마을에서 노동이 분리될 수 없는 이유”(2014년 11월)라는 팜플릿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 노동조합활동을 하는 이웃 사람이 있다고 해도, 결국 마을에서 보면 그냥 똑같은 마을주민이다. 이는 노동조합이라는 것이 결국 그 사람의 직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보니 직접적으로 마을과 관계되지 않기 때문이며, 그래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단순하게 직업적 차원에서의 노동자로 받아들여질 뿐인 것이다. 그래서 마을이 하나의 공장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맺어지지 않는 한은 노동자체가 이슈화되기 힘든 구조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과연 마을에서 노동조합 간부들을 만나는 게 진정 마을에서 노동을 만나는 것일까? 지역의 어느 사업장에서 파업이 있을 때 지지방문 가고 연대하는 것만이 내가 사는 마을에서 노동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일까?”라고 묻는다. 우리 사회가 마을공동체나 지역의 의미를 강조하는 듯 하지만 지역 내의 필요노동이나 노동의 가치를 여전히 낮게 평가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박영길 사무국장은 “경비아저씨라는 노동자를 아파트 마을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경비아저씨에게 친철하게 말 한마디 건네라는 게 아니라 직접 면접보고 직접 고용하라는 것이다. 관리사무소라는 일부 관리업체에게 맡겨놓고 방관할 것이 아니라 적어도 우리 아파트에서 필요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직접 주민대표자들이 고용하고 그들의 삶과 업무들을 살펴보라는 것이다. 마을에 필요한 공적 서비스를 진행하는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고 직접 고용하는 방식, 학교에서 급식조리종사자들을 학교 행정실에 맡기는 게 아니라 면접보고 그들의 하는 일들을 자세히 살피는 것들을 학부모의 의무이자 권리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벽에 동네 쓰레기를 치우는 공공근로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직접 제공하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적어도 필요 노동자들에 한해서라도 아파트 관리업체에게 맡기지 말고, 급식업체나 학교 행정실에 맡기지 말고, 주민자치센터에 맡기지 말고, 수많은 필요노동을 대행업체에 맡기지 말고 직접 대면하라는 이야길 하고 싶은 거다. 이게 우리가 이야기하는 자립과 자치의 첫 출발점이 아닐까.”라고 주장한다.

공공부문의 사유화가 노동운동과 지역운동 모두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두 운동의 주체가 지역사회에 기반을 두고 운동을 펼치는 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운동 이전에 필요한 건 지역을 파악하는 것이다. 투명인간처럼 존재하는 노동자, 주민들이 지역사회에 존재한다. 특히 청소노동자나 학교급식조리노동자, 경비노동자, 택배노동자, 사회복지사,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 청(소)년들의 알바노동은 잘 드러나지 않거나 노동자와 주민간의 이해관계가 상충하기도 한다. 가격이나 비용이 아닌 다른 언어로 지역사회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만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 그 장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박영길 사무국장이 지적하듯이, 지역의 필요노동이라면 그 노동을 지역주민들이 직접 고용하도록 강요하거나 최소한 그 노동을 직접 대면해야 한다. 우리가 공통의 세계 위에 서 있다는 자각이 매우 중요한데, 그런 자각은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는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보더라도 그 존재를 인지하지 않으면 자각되지 않는다. 노동운동은 주민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또한 한국사회의 특성상 자영업의 비중이 높고, 자영업 내에서 고용되는 일용직 노동이 아주 열악하다. 이것은 개별 업주의 문제도 있지만 자영업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다. 2012년 12월에 발간된 고용노동부의 「생계형 자영업 실태 및 사회안전망 강화방안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도소매업과 숙박 및 음식점업 전체 151만 1,154개 사업체 중 무려 139만 6,743개 사업체가 자영업자이고, 이중 5인 미만의 노동자를 고용하거나 연간 매출액이 4,800만원 이하인 영세 자영업자가 전체 자영업자의 44.6%이다. 2014년 5월을 기준으로 자영업자는 569만8천명이고, 그중 415만2천명이 '고용원이 없는 자영업자'로 추산된다. 그리고 자영업이라 불리지만 사실상 프랜차이즈화되어 ‘갑질’에 시달리는 이들 업자들에게 노동운동은 어떤 의미일까? 자영업자들이 알바노동을 무시하고 착취하는 것은 인간성이 나빠서일까?

더불어 소위 사회적 경제라 불리는 영역이 점점 커지고 있다. 정부의 지원을 받는 이 영역이 기존의 시장을 변형시킬 때 노동운동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가령 직영되던 노동이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으로 바뀔 경우 노동운동은 반대 이외의 어떤 입장을 택할 것인가? 기업이 폐업할 경우 노동자들이 인수하는 자주관리기업에 대해 노동운동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노동운동은 어느 정도의 기업운영능력을 기르고 있을까?



4. 같이 고민하고픈 내용들


- 공장과 사무실을 나오면 대부분이 비정규직 노동이다. 노동운동에서 지역의 지역화는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이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의 조직화이다. 공장과 사무실을 벗어난 노동운동이자 공장과 사무실을 포위하는 노동운동이다. 성공한 지역노조의 싸움은 지역단체들을 조직화한 싸움, 생산과 소비를 연계시키고 조직화하는 싸움이었다. 이런 싸움의 경험들은 어떻게 정리되고 어떻게 공유되고 있나? 사업의 공유말고 경험의 공유와 그 경험을 실제로 적용하는 실험은 이루어지고 있나?

그런데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연대는 강력한 연대보다 느슨한 연대이다. 조직화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노동운동의 지역사회전략은 대부분 산별을 강화시키는 방편으로 신속하고 강한 연대를 전제하고 있다. 서로 만나는 방식과 목적이 다른데, 어떤 연대가 가능할까?

그리고 각 지역에 따라 현안과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노동조합이 어떤 의제를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달성해야 한다고 ‘미리’ 정하기는 어렵다. 어떤 의제를 얘기하기 전에 그 지역에 관한 구체적인 욕구조사가 실시되어야 하고, 지역사회 내의 다양한 주체들(조직화되지 않은 주민/노동자 포함)을 파악해야 한다. 이렇게 욕구조사를 하고 주민지도력을 파악하는 과정 자체가 지역과 연계를 맺고 지역운동을 시작하는 과정이다. 이런 부분에 공무원 노조나 전교조가 적극적으로 결합하면 좋은데, 그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시도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관청과 학교 내로 숨어버린 느낌이다. 주민들을 만나고 함께 하지 않으면서 연대전략을 모색한다는 건 사업 중심으로 활동가를 배치하겠다는 발상인데, 주민들이 사업을 원할까? 그리고 주민들에게 금속노조의 사업을 주민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활동가는 얼마나 있을까?

또한 지역의 의제를 선정하고 논의하는 과정에 지역주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야 하고, 그 주민들을 볼 때 기존의 진보/보수틀로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지역사회는 권력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진공의 장이 아니라 아주 촘촘한 권력관계의 영향을 받고 있다. 지역적인 의제를 달성하려면 기존에 보수적이라 평가되는 사람들과도 연계를 맺어야 하고 그들의 공감을 이끌어내야 한다. 이념적인 잣대로 접근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이념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그런 자연스러운 과정을 노동운동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 앞서 말했듯이 풀뿌리운동은 단순히 지역에 기반한 운동이 아니라 주체와 더불어  성장하는 운동이다. 이것은 운동의 방법론으로서 노동운동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성장한다는 건 노동운동의 기본입장이기도 하지만 방법론의 면에서 공장/사무실/일터에서만이 아니라 지역/삶터에서도 그런 성장의 방법이 필요하다. 지역주민들을 대상화시켜서 주민들을 위해 펼치는 사업이 아니라 노동자와 주민이 뒤섞여서 서로의 삶을 고민하는 장이 필요하다. 이미 어떤 사건이 터진 후 만나는 게 아니라 어떤 사건을 함께 일으키는 공동의 주체가 되기 위해 서로의 일상적인 관계를 강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건 서로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고, 그런 깨달음이 가능하려면 서로에 대한 편견을 깨고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솔직하게 만나고 있나?

그리고 연대전략이 지역적인 의제를 해결했을 때 그 성과를 반드시 그 지역사회에 남겨야 한다. 보통 어떤 성과가 있으면 주요한 단체가 그것을 독점해 버리는데, 그러면 그 다음에 더 큰 연대의 틀이 보통 만들어지지 않는다. 성과를 남기고 지역사회를 성장시키는 만큼 같은 편이 늘어나기 때문에 성과를 지역에 남기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면 노조에게도 유리하다. ‘거점’이라 부르려면 정말 중요한 지점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럴 준비는 되어 있나?

- 민중의 집이 주요한 지역화 전략으로 이야기되는데, 한국사회에서 정말 효과적일지 따져봐야 한다. 거점을 공간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고, 이것은 지역사회를 장악의 대상으로 보는 편견과 무관하지 않다. 민중의 집을 만들면 정말 그 일대가 해방구가 될까? 차라리 괜찮은 자영업 가게들의 단골이 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민중의 집은 노동자들이 식사하고 토론하고 오락을 즐기며 사회적인 연대를 형성하는 공간, 노동자들의 고립감을 극복시켰던 공간인데, 한국의 민중의 집이 그런 공간이 되고 있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아울러 유럽의 민중의 집은 노동자들이 협동조합을 경험하는 공간이기도 했는데,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실패했다는 게 아니라 민중의 집에 들어가는 에너지만큼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냉정하게 따져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공간을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공간을 다양한 관계들로 채워야 하는데, 그런 관계망을 만들고 확장시키는 활동에는 많은 사람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새로운 교육과 활동보다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에서 할 수 있는 부분들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예를 들어, 금속노조가 알바청(소)년들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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