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좀 진진하게 마인드프리즘 이야기를 해야겠다.

왜냐하면 오늘 2명 중 계약직 노동자  중 1명이 해고, 사측은 계약 종료, 되기 때문이다.

이 한 명은 와락에서 정혜신씨와 함께 치유활동가로 일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오늘부터 마인드프리즘 노동조합은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인다.


마인드프리즘의 상황을 보면, 그동안 내세웠던 해고노동자의 치유나 사회적인 가치와 무관한 민낯이 드러난다.


몇 가지 궁금증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혜신 전 대표는 이번 일에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회사의 부채가 30억원 정도인데, 이 부채는 정혜신 전 대표가 사임의사를 밝힌 올해 5월부터 누적된 게 아니라 회사 설립 이후부터 누적된 부채이다.

정혜신 전 대표는 얼마 전(2014년 12월 26일), 타이밍이 참 공교로운데, 한겨레신문 인터뷰에서 마인드프리즘과 관계를 끊었다고 이야기했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기사를 인터뷰한 기자가 서두를 이렇게 시작한다. “정혜신 이명수 부부는 심리치유 전문기업 ‘마인드프리즘’으로 유명합니다. 당연히 아직도 겸직하는 줄 알았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세월호 사건 이후 완전히 접었다고 합니다. 이제 안산에서의 치유활동에 모든 것을 걸었다고 합니다.”

세월호 가족의 치유에 모든 걸 거는 건 좋다. 하지만 자신과 함께 몇 년 동안 마인드프리즘을 이끌어온 노동자들은? 왜 노동자들이 그 부채를 짊어지며 해고되어야 하나?

정혜신 전 대표가 사임한 뒤, 노조의 성명서에 따르면, “지난 해 7월에는 직원의 1/3을 권고사직으로 감원하겠다는 통보가 있기도 했으며, 결국은  희망퇴직 형식으로 직원 28명 중 8명이 마인드프리즘을 떠나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희망퇴직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경영진들은 그동안 마인드프리즘이 지켜왔던 ‘사람에겐 마음이 있다’는 가치를 훼손하며 일방적인 부서개편을 단행하고 소통을 거부했습니다. 급기야는 성과가 증명되어 계약갱신이 예상되던 심리치유 활동가에 대해서 계약종료 통보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한다. 6월 사임 이후 이렇게 일이 진행된 것을 정혜신 전대표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을까? 보통 이렇게 일이 진행되려면 이미 안이 나와 있는 것 아닌가?

와락으로 사회적인 명사가 된 정혜신 전 대표는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TV찬조연설을 했다. 그 연설에서 정혜신 전대표는 “해고를 당했다고 다 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많이 죽어가는 거냐, 사람들이 많이 묻더라구요. 사람의 고통이 여러가지가 있지만요. 사람이 진짜 억울하면요. 정말로 살아남기가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또 그 억울함과 함께 세상 누구도 우리 고통에, 내 고통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런 극도의 절망감이 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삶의 끈을 놓게 만드는 거죠.” 마인드프리즘 노동자들의 억울함은 어떻게 할 건가?

지금도 마인드프리즘 홈페이지에는 마인드프리즘 설립자인 정혜신 씨의 이야기가 걸려있다.

만일 이 문제를 피한다면 정혜신 전 대표도 억울함을 치유받아야 하는 노동자를 만든 당사자가 될 것이다.


둘째, 마인드프리즘에 투자를 했던 김범수씨와 그 투자를 통해 공동대표가 되었던 김화영 전대표는 이 문제에 왜 침묵하나?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보통 투자라고 하면 투자에 따른 손실도 함께 부담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오마이뉴스> 기사에 따르면, 카카오톡의 김범수 씨는 회사 지분 70.5%를 인수하며 친동생을 공동대표 자리에 앉히며 투자를 했다. 카카오톡의 투자를 받으며 마인드프리즘은 적자에도 사업을 계속 넓혔으니 이 적자분은 카카오톡에도 책임이 있다. 그래서인지 동생인 김화영 전대표는 사임을 하면서 카카오톡 부채인 26억 5천만원을 책임지기로 하고 현 공동대표에게 지분을 양도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면 회사 부채는 4억 정도인데, 그 정도 규모의 회사에서 이 부채가 직원들을 대거 해고해야 할 만큼 심각한 것일까? 김범수 씨와 김화영 전대표가 우리는 손을 뗐으니 상관없다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새로운 공동대표는 김화영 전대표와 무관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지분을 넘겨준 사람들이 지분을 넘겨받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력이 없을까? 더구나 현 공동대표인 김창성 씨는 김화영 전대표가 대표를 맡을 때 함께 들어온 사람인데?

심지어 김범수 씨는 2013년 정혜신 전대표와 ‘1000만 힐링 프로젝트’에 나선다며 기자회견을 열고 “돈이 아닌 사회공헌을 위해 시작한 일이다. 국민에게 자기 자신을 만나게 해주고 싶어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 발언에 대한 책임은 없나? 결국 자기 기업 이미지만 좋게 만들었다는 것인데....


셋째, 현 공동대표는 사안을 해결할 의지가 있나?

<오마이뉴스> 기사에 따르면, 현 공동대표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회사 경영상 적자가 계속되던 중 사업 규모 대비 높은 인력 숫자 등 구조적 문제를 해소하려고 지난해 희망퇴직을 실시한 건 사실’이라면서도 ‘그 과정에서 팀장이나 직원 대표단과 협의했지 일방적으로 진행한 건 아니다’라고 밝혔다.” 따져보면, 희망퇴직은 현 공동대표가 취임하기 전에 벌어진 일이기에, 본인들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말할 사안은 아니다. 그리고 ‘협의’하며 진행한 일이었다고 하면서 지난 1월 6일 “ '계약직 고용 지속' 등을 요구한 직원들에게 서면 경고장을 발부하며 맞대응했다.”(<라포르시안> 기사) “마인드프리즘 사측은 지난 6일 직원들에게 "회사 직원들 간의 불신을 선동하고, 회사의 신인도를 훼손하는 등 복무규율을 위반했다"는 내용의 서면 경고장을 발부했다.”(<프레시안> 기사) 이건 사측이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의사가 없음을 뜻한다.

현 공동대표는 마인드프리즘 창립 멤버인 박인정 씨와 김화영 전 대표와 함께 입사한 김창성 전 마케팅팀장이다. 언론과 인터뷰를 한 것은 김화영 전대표와 함께 입사한 김창성 대표이니,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경영마인드만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혜신 전대표와 함께 마인드프리즘을 만든 박인정 대표는 어떤 입장일까? 기본적인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면, 정말 공동대표라면 이 문제에 관해 박인정 대표가 입장을 밝혀야 한다.

그리고 “김 대표는 ‘이제 김범수 의장, 정혜신 박사, 김화영 전 대표 세 사람 모두 마인드프리즘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고 하는데, 그게 더 의심스럽다. 왜 이렇게 꼬리 자르기를 시도할까?


노동자들이 억울하게 희망퇴직을 선택하고 일방적인 구조개편을 받아들이면서도 회사를 지키려 하는데, 사측은 경영적자이니 어쩔 수 없다며 해고를 밀어붙인다. 노동조합에게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하는데, 누가 정말 마인드프리즘이라는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킨 걸까? 현 공동대표야말로 마인드프리즘의 명예를 실추시킨 사람들이고, 정혜신, 김범수, 김화영 씨는 이런 사태에 책임을 통감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사안이 어떻게 되는지 끝까지 지켜 볼테다.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에 정당해산결정을 내렸다. 4월 16일, 바다 속으로 침몰한 세월호 사건의 진실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제 18대 대통령선거에 개입했던 국가정보원과 군사이버사령부의 선거개입과 관련된 진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고 책임자들도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12월 9일 대통령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는 ‘지방자치발전 종합계획’을 발표하고 특별시와 광역시의 자치구 기초의회폐지, 단체장과 교육감의 선거방식 개악을 발표했다.

 

2014년 12월 5일, 대한항공 부사장은 항공기를 회항시켰고, 2013년은 남양유업, 서울우유 등의 ‘갑질’로 장식된 한해였다. 12월 12일 서울고등법원은 이마트가 대형마트가 아니기에 의무휴업일 지정 및 영업시간 제한이 위법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4년 11월 10일 대학생협의 모범이던 세종대학교생협은 비리재단에 밀려 사업종료를 공지했다. 지난 5년간 국내 10대 재벌가문 자산이 430조원이나 늘어나 1,240조원에 달한다. 지금 국회는 사회적경제기본법을 심의중이고, 12월 2일 박근혜 정부는 2018년까지 165조원을 투자하는 지역발전 5개년계획, 소위 제2의 새마을운동을 국무회의에서 확정했다.

 

사회운동, 풀뿌리운동이 여러 성과를 거뒀다고 얘기되는 한국사회의 거시적인 모습은 이렇다. 사회가 변했다고 자평하는 동안 고공농성, 철탑농성, 수십 일의 단식농성, 엄청난 손해배상은 일상의 풍경이 되었다. 우리가 원한 세상은 이런 것이었나?



1. 현실을 보며 드는 물음들


- 생활정치는 정말 생활 속의 다양한 문제들을 정치적인 의제로 만들었나?

- 거버넌스는 정말 대등한 관계에서의 협력인가?

- 마을운동은 취향의 공동체를 넘어서 공존하는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나?

- 사회적 경제는 진정 경제활동에서 이윤보다 사회적인 가치를 우선시하고 있나? 경쟁보다 협력을 앞세우고 있나?

- 협동조합은 협동하는 문화를 확산시키며 생산과 소비의 연계를 강화시키고 있나?

- 시민사회운동은 수도권 중심을 벗어나고 있나?

- 시민사회단체는 몇몇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시민들의 도구가 되고 있나?

- 시민사회단체의 활동은 노동이 아니라 활동인가?

- 시민사회단체는 관료주의에서 자유로운가?

- 시민사회운동은 자기 진영의 논리에서 벗어나 소통하고 있는가?

-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그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얼마나 이야기하고 있나?



2. 다른 세상으로 가기 위한 열쇳말


- 자본주의, 사회주의, 이분법을 극복해야 한다는 건 두말 할 나위 없다. 그런데 극복한다는 것의 의미가 뭘까? 원론이 아니라 한국 현실에서 두 이념이 어떤 문제와 한계를 가지는지를 파악하고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을 찾는다는 의미일 텐데, 지금까지 우리는 그런 과정을 밟아왔을까?

 

- 그동안 풀뿌리운동은 대중이 스스로 조직되며 삶과 공간을 변화시키는 과정이라는 점을 강조했는데, 이 역시 한국사회라는 특수한 현실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만 한다. 기존의 사회운동이 한국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려고 노력해온 만큼 풀뿌리운동도 나름의 사회를 분석하는 틀을 가졌던가를 반성해볼 필요해볼 필요가 있다.

 

- 4주제 연구모임이 그동안 아나키즘, 생명운동, 에코 페미니즘, 사회운동의 영성이라는 관점을 검토한 것도 이런 필요성 때문이다. 각 관점이 같고 다른 면을 가지지만 공통적이라고 여겨지는 열쇳말을 배치하자면 다음과 같다.

 

- 관계성: 전일성, 상호성, 부분과 전체의 연계성, 연방, 연대, 생산과 소비의 연계, 교감, 깨달음, 집단적 영성

- 다양성: 탈중심, 상호적 권리, 평등, 성찰, 중립성과 객관성 비판, 국가주의 비판

- 자율성: 자치, 자급, 자결권, 삶에 대한 책임의식, 자기 목소리, 임금제도 비판, 너를 위한 운동이 아닌 나를 위한 운동, 가부장제 비판

- 순환성: 성장 포기, 사용가치의 우선성, 공유, 사적 소유권 부정, 소농, 소비주의 비판

 

- 이런 것이 가능한 장으로서 마을, 공동체 등이 대안으로 얘기된다. 근대국가와 자본주의 시장은 이런 열쇳말과 대립되는 구조이기에, 풀뿌리운동은 이를 넘어설 방법과 과정을 지속적으로 논의해야 옳다. 특히 한국사회의 국가와 자본은 훨씬 더 기득권화되어 있고 억압적이며 중앙화되어 있어서 풀뿌리운동과 양립하기 어렵다. 강력한 국가와 자본에 맞서려면 다양한 실천과 연대가 필요할 텐데, 풀뿌리운동은 그동안 어떤 고민과 실천을 보여줬나? 주민조직화, 생활정치는 마치 주민운동의 몫인 양, 생산과 소비의 조직, 협동운동은 마치 사회적경제 조직의 몫인 양, 서로 몰라라 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이런 흐름을 자기 조직의 규모를 확대시키는 쪽으로 활용했을 뿐 그 몫 자체를 늘리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 운동의 가짓수는 늘어나지만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아 지속가능하지 않은 데도 마치 지속가능한 것처럼 운동이 마취제를 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부나 재벌을 감시하고 비판하며 잡은 손 놓고 후려쳐야 할 때에도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대충 뭉뚱그리는 것은 아닌가. 단순히 정부나 재벌이 정서적으로 싫어서가 아니라 자기 운동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데도 이를 방치한다면 운동의 기반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운동은 단순한 방법론이 아니라 자기 가치를 가진 운동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는 방법만 이야기하고 사례만 강조하지 가치와 그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다. 운동과 사회의 위기는 여기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 풀뿌리운동은 스스로 대안적인 생활양식을 실천하고 이를 심화시키는 과정으로서의 운동을 지향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에 대한 분석도 필요하고 사회운동가 개인의 영성을 형성하고 심화시키는 과정도 필요하다. 목적과 수단을 일치시키는 조직운영과 내용 방식에 대한 자각도.

 

- 한국사회에서 이런 키워드들은 현재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풀뿌리운동은 이런 키워드들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활동을 펼치고 있을까? 그 활동 속에 이런 관점들은 얼마나 투영되고 있을까?

 

- 이런 관점들은 성장주의, 국가주의, 자본주의, 가부장제, 식민주의, 환원주의, 교조주의를 비판하는데, 우리 운동 속에는 이런 문제들이 없을까? 시민사회운동은 이를 점검할 수 있는 내부장치를 가지고 있을까?



3. 다른 세상을 고민하기 위한 질문


- 제도정치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제도정치를 회피하는 것은 아닐 텐데, 우리도 어느 순간 정치적 중립성의 신화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의 경계를 너무 분명하게 정해버린 건 아닐까? 최근 박원순 시정에서 시민단체가 이중대 역할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는데, 풀뿌리운동의 거버넌스는 어떻게 실현되어야 할까? 협력과 파트너십을 당위적으로 강조하면서 제도정치를 압박할 수 있었던 감시와 비판기능이 어느 순간 퇴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생활정치의 동력이 빠른 속도로 제도화되고 있다면, 그 가치의 올바른 실현을 위해 제도정치에 개입하는 것이 응당 필요하지 않을까? 제도정치에 개입할 경우 풀뿌리운동은 자기만의 실력과 전술을 가지고 있을까? 제도정치에 개입하려면 그것을 위한 제도 자체를 바꾸는, 경기규칙을 바꾸는 노력이 필요할 텐데, 이 부분은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 자본주의와 성장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이 말로만 그치지 않으려면 그만한 실력을 갖춰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실력을 쌓고 있나? 소비자들은 생산자들의 삶에, 생산자들은 소비자들의 생활에 서로 관심을 가지고 있나? 풀뿌리운동은 노동운동에, 노동운동은 풀뿌리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나?

 

- 우리는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의 상을 구체적으로 만들고 있나? 주민/시민들이 피부로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삶의 틀로 만들고 있나? 운동이 추구하는 대안과 가치를 개인의 삶과 조직의 운영으로 구현하지 못한다면 공동체의 관계망이 확대되고 심화될 수 있을까? 활동가들은 자기 삶을 가치대로 변화시키고 있나? 위계적이고 관료화된 조직운영이 줄어들고 운영주체가 개방되어 늘어나고 세대나 직책에 구애받지 않는 평등한 운영방식이 확산되고 있나?

 

- 우리는 공유의 기반을 만들고 있는가? 많이 얘기하는 네트워크도 일종의 공유물일 텐데, 적절히 공유되고 있을까? 관계성과 상호성을 실현하는 네트워크는 기성사회로 흡수되지 않는 관계망을 만드는 것인데, 우리는 그런 관계를 만들고 있나?

 

- 집단화된 다수가 실질적인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끼리끼리의 정치, 끼리끼리의 문화를 극복할 수 있는 실천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사회운동의 역사가 길어질수록 구세대와 신세대의 소통가능성이 낮아지는데, 이런 틈을 좁힐 방법을 개발하고 있을까? 민주적이고 평등한 의사소통이라는 가치를 실질적으로 구현할 방법을 만들고 있을까? 활동가 개인과 조직에는 어떤 영성이 필요할까?

 

- 서울 중심의 운동에서 벗어나려면 주요 운동조직이 서울을 떠나는 것도 방법 아닐까? 공공기관도 이전하는데 시민사회조직이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그 내부에 어떤 다른 욕망들이 자리 잡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이렇듯 분열된 존재인데, 대중의 분열을 비판할 수 있을까?



4. 개인적인 고민들


- 제도가 문제라면 그 제도를 바꿀 수 있는 정치력을 만들어야 한다. 홀로 그 몫을 담당할 수 없다면 당연히 그 목적에 동의하는 주체들이 손을 잡아야 한다. 활동가들조차도 정치를 갈등요인으로만 보고 회피하려하는데 갈등은 인간사의 당연한 요소이고 이를 해결하면서 공동의 목적과 생활이 강화된다. 갈등의 제거가 아니라 갈등의 조절이 중요한데, 정치가 이 과정을 맡는다. 제도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만큼 정치적인 힘을 구성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과정을 제도화로 넘기면서 그 제도가 알아서 좋은 방향으로 가길 기대하는 것은 운동이 무모함을 넘어 무책임함을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 진보정당을 드러내놓고 지지하거나 스스로 정치적인 역할을 맡아야 하지 않을까. 미흡한 점은 고쳐갈 과제이지 배제할 이유가 아니다. 우리 내부에서 관계성이 살아나야 한다.

- 살림살이가 무너지면 여유도 없어지고 참여도 어려워진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럴수록 공동의 대책을 마련하고 정치와 경제의 연관성을 드러내야 하는데 그런 역할이 없다. 지금의 시민사회운동은 각자의 부문운동으로 후퇴해서 딱 고만고만한 이야기만 나누고 있다. 그리고 말만 무성하지 그 말에 힘을 실어줄 움직임은 별로 없다. 주민/시민들에게 자기 것을 내놓으라고 얘기하면서 정작 자기 것은 내놓지 않으니 곳간이 찰 수 있을까? ‘능력에 따라서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져가고’, 우리 자신도 믿지 못하는 것을 누가 믿어줄까? 당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우리 자신을 위해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하면 꼭 우리 일을 팽개치고 다른 일에 헌신해야 하는가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 일과 다른 일이 분리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생각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은 우리 내부에도 있다. 돌아보고 성찰하고 생각해야 운동의 미래가 있다. 다양성은 그런 과정에서만 싹틀 수 있다고 생각한다.

- 거시적인 것을 본다고 주장하는 운동은 미시적인 운동을 무시하고, 미시적인 것을 강조하는 운동은 거시적인 운동을 배제하고 있다. 이런 무시와 배제가 사라지려면 일단은 서로 자주 만나야 한다. 그리고 서로의 접점을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만들어야 한다. 멋지고 폼나는 일, 외부의 사례보다는 자그마한 실천들이 중요할 텐데, 이런 일들이 각 조직은 어느 정도의 역량을 쏟고 있나? 이런 일들이 여러 사업과 활동에서 어느 정도의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나. 자기 사업이나 사업장 외에 관심이 없는 조직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네가 살아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자세를 가지지 않으면 미래를 장담하기 어렵다. 자율성은 나 혼자 살아남겠다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자세이다.

- 어느 순간부터 운동에서 가치의 지속보다 사업의 지속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그러니 서로 가치를 실현하지 못함을 알리바이로 덮어둔다. 평화박물관, 함께일하는재단에서 벌어지는 비상식적인 일들도 그냥 그렇게 무시된다. 강력한 도덕성이 아니라 최소한의 민주적인 절차마저 무시된다면 우리 내부는 너무 허약한 것이고 기득권층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내부의 문제를 감출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떠들고 그 문제가 충분히 논의되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마을 곳곳에서 들리는 문제들에 관해서도 이제는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눠야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아직 다들 쉬쉬 하고만 있다. 우리 내부에 있는 문제들을 도려내고 새 살을 돋게 만들어야, 저들이 우리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고정된 위계, 고정된 가치는 내부를 부패하게 만들고, 시민사회단체는 특정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 내부가 골고루 순환되어야 그 순환의 힘이 사회도 순환시킬 수 있다.

- 살림살이는 개인의 문제로 얘기되고 이는 운동단체 내부에서도 비슷하게 어렵다. 생활고로 어려움을 겪는 활동가들이 있다면 공동의 대책이 필요한데, 그냥 개인의 몫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과 활동을 분리시키는 것이 가능할까? 서울에서 개인의 생활을 꾸리고 가족을 건사하는 것이 불가능한 데도, 개인의 헌신만을 강요할 수 있을까? 실무자의 저임금이 활동가의 헌신으로 포장되고 활동가의 답답함이 실무자의 업무능력으로 평가되는 시점에서, 노동과 활동은 서로에 대한 알리바이로 활용될 수밖에 없다. 그 경계를 넘어설 힘은 그것이 노동이냐 활동이냐를 따지고 규정하는 것보다 활용할 수 있는 공유물을 늘리고 그것의 민주적인 운영을 보장하는 것일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그런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1. 들어가며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던 5월 19일, 그 날로 예정된 토론회가 취소되었다. 사실 그 토론회는 우리 권력의 속살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토론회였다. “수상재난 상황에서의 안전확보를 위한 수영교육 활성화 방안 토론회”, 이 얼마나 솔직한 주제인가. 배가 침몰하면 각자 갈고 닦은 수영실력으로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 이게 우리 현실 아닌가.

 

흥미로운 점은 이 토론회를 주최한 국회의원들이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같은 배를 탄 사람들인데도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비치는 것은 아마도 실제 차이보다 우리의 바람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바람으로 한국사회가 바뀐 적이 있었나?

 

통치성에 관한 사토 요시유키의 분석에 공감하지만 노골적인 한국현실을 분석하는 이론틀이 되려면 보완되어야 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 고민들을 함께 나누려 한다.



2. 공고해지는 기득권과 사업으로 변한 안전


(1) 유체이탈화법과 좀비정치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부의 공식발표라고 할 박근혜 대통령의 5.19 대국민담화는 참사의 원인은 없고 대책만 나열되는 이상한 담화였다.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 이상 지났건만 참사의 원인은 “선박 심사와 안전운항 지침 등 안전관련 규정들이 원칙대로 지켜지고 감독이 이루어졌다면 이번 참사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는 원론에 머물렀다. 반면에 대책은 아주 구체적인데 박근혜 정부는 해경을 해체하고 국가안전처를 신설하고, “우리 사회의 비정상적인 관행과 제도를 바꿔서 정상화하기 위한 개혁작업”을 진행하며,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끼리끼리 문화와 민관유착이라는 비정상의 관행”을 없애고,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끼리끼리 서로 봐주고, 눈감아주는 민간유착의 고리”를 끊고,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관피아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이 대책은 규제를 쳐부술 암이자 원수라고 밝혔던 기존 입장과 큰 차이가 없다.

 

아울러 대국민담화는 “폐쇄적인 조직문화와 무사안일이라는 문제”를 바꾸기 위해 민간전문가들을 대거 발탁하겠다고 밝혔다. 짧은 담화 중에 전문성, 전문가라는 말이 15회 반복된다. 그런데 안전을 점점 더 전문화시켜서 특정한 민간전문가를 참여시키고 대다수 민간의 참여를 배제하는 것은, ‘민간 전문가’를 과장급 이상의 직위에 배치하겠다는 것은 과거 김영삼 정부 때부터 반복되어온 관료제도의 경쟁 논리를 강화시킨다. 더구나 이는 나오미 클라인(N. Klein)이 정의했던 ‘재난 자본주의(disaster capitalism)’, 즉 “비정상적 상황에서 급박하게 추진되는 영리 추구 정부 모델을 국가의 일상적 기능에도 도입하는 것”, “한마디로 정부를 민영화하겠다”는 생각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각주:1]

 

이 대국민담화는 안전을 더욱더 전문화시키고 제도화시켜 정부가 참사를 빌미로 시민의 삶을 더욱더 관리하겠다는 발상이고 국가안전처라는 신설부서 역시 그런 의심을 받고 있다(지금 선임된 처장 역시 군 출신이다). 사고를 참사로 만든 주범이면서도 책임의 인정 없이 관리대책만 나열한 이 담화는 ‘유체이탈화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문재인 국회의원도 그 다음날 이를 비판하는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특별성명은 한국사회가 박정희 시대로 회귀한 것 같다고 질타한 뒤 “돈이 먼저인 나라에서 사람이 먼저인 나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별성명은 규제완화를 비롯한 경제민주화의 후퇴에서 참사의 원인을 찾으며 “가장 안전한 사회는 ‘민주주의’입니다”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대책도 부처의 신설이나 전문가 활용보다 “여야는 물론 시민사회까지 함께 참여”해야 하고, 수명이 다한 노후 원전의 가동을 중단시키는 등 가시적인 노력을 먼저 보이라고 주장했다.

 

이 특별성명은 정당해 보인다. 그렇지만 이 특별성명 역시 묘한 유체이탈화법의 경향을 띤다. 왜냐하면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정부에서 민주당은 다수당이 아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군소정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창 신자유주의와 규제완화가 시행될 때 민주당은 무엇을 했었나?[각주:2] 그리고 문재인 국회의원은 노무현 정부 시절의 제주해군기지나 부안/경주방폐장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니 민주주의를 문제삼을 자격은 문재인 의원에게도 부족하다.

 

박근혜 대통령과 문재인 국회의원의 연설은 다른 듯 보이지만 묘한 공생관계를 감추고 있다. 문민정부라 불렸던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노선, IMF사태를 빌미삼아 금융/공공부분을 민영화시켰던 김대중 정부, 자유무역지대(FTA) 전략을 세웠던 노무현 정부, 그런 기반을 딛고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등장하고 강화되고 있다는 공생관계 말이다. 그러니 누구도 이 정부 이후를 자신할 수 없다.


(2) 안전과 건설의 지방선거


세월호 참사 이후 6.4 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지방선거임에도 초미의 관심사는 서울시장 선거였는데, 이명박 이후 한국 자본가를 대표하는 정몽준 국회의원이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기 때문이다. 정몽준 후보는 세월호 참사를 거론하는 것보다 “현재의 생활이 힘들고 장래가 불안한 시민에게 일자리는 최고의 복지”라고 주장하며 “서울로부터 3시간 비행거리에는 15억 명이 살고 있습니다. 15억 명이 찾아오고 싶은 서울, 장사가 잘 되는 서울, 청년들의 일자리가 늘어나는 서울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안전을 경제로 전환시키는 프레임, 한국 선거에서 잘 먹히는 프레임을 만들고서도 정몽준 후보는 선거운동과정에서 박원순 시장의 문제점을 드러낸다며 ‘불안한 서울’을 주로 언급했다. 농약급식, 지하철 공기질 등을 문제삼고 협동조합/마을공동체사업 폐지 등을 얘기하다 정몽준 후보는 네가티브 선거라는 역풍을 맞았다.

 

반면에 박원순 후보는 서울시정의 기조를 ‘안전·복지·창조경제’라고 정의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사고가 일어난 이후 피해를 최소화하는 ‘재난 골든타임 목표제’”라며 세월호 참사를 활용했다. 12대 핵심공약에서는 ‘1. 안전특별시 서울, 2. 어린이 안전도시 서울, 3. 주택안심 서울’처럼 안전과 안심이 전면에 등장했고, 60대 정책공약에서도 “사람중심의 안전패러다임 전환”, “시민의 안전이 보장되는 안전마을 50곳 만들기” 등 안전이 강조되었다. 박원순 후보는 안전을 중요한 화두로 내세우고 활용하며 선거를 이끌었는데, 이 때의 안전은 정부가 시민의 삶을 안전하게 ‘관리해주겠다’는 언술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특정한 가치나 삶을 좋은 삶으로 전제하고 그 삶을 확산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특히 이 안전담론은 여전히 노동을 배제한다. 예를 들자면, “시민을 위한 안전지하철! 노후차량‘노후시설 전면 교체”는 있어도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시키겠다는 내용은 없다. “차량 노후화-인력감축-비용절감 위주 경영”이 전형적인 사영화의 과정인데, 박원순 후보의 공약에서는 시설 문제만 부각된다. 그리고 박 후보는 향후 가장 불안요인이 될 핵발전소정책에 대한 반대의지도 밝히지 않았고, 적자와 사고를 부르는 경전철 사업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외려 “창조 전문인력 10만명 양성, 공공형 사회․복지서비스 좋은 일자리 5만개 창출, 맞춤형 여성일자리 10만개 창출”같은 모호한 노동정책이 함께 등장한다. 창조 전문인력, 좋은 일자리, 맞춤형 여성일자리가 어떤 것인지를 지난 서울시정을 통해 유추한다면, 이 일자리들은 최저임금에 가까운 시급과 단기고용(11개월 이내) 일자리인데, 정말 건강하고 안전한 노동이 가능할까?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와 박원순 시정의 창조경제는 얼마나 다를까?

 

또한 선거를 통해 드러난 안전담론은 안전을 내세워 시민의 삶을 관리할 뿐 아니라 이를 자본축적의 기회로 삼으려 한다. 그런 점에서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은 서로 공생관계에 있다. 예를 들어, 세월호 참사를 당한 안산시와 경기도가 총 900억원의 국비지원사업 추진을 밝히면서 안전체험테마파크 조성, 글로벌 안전시범도시 구축, 수도권 규제완화특별지구 지정 등을 내세운 것은 안전이 건설자본에겐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을 뜻한다.

 

안전을 내세운 여러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지만, 기득권들은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결탁되고 있다. 한국사회의 안전담론은 경쟁과 배제라는 신자유주의 권력 또는 환경개입권력, 즉 “개개인에게 직접 개입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환경에 개입해 그 게임의 규칙을 설계함으로써 환경의 최적화를 꾀하고자 하는 권력”[각주:3]의 성격과 무관하진 않지만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물론 현실에서는 규율권력과 환경개입권력이 복합적으로 작동하지만 한국의 통치는 노골적인 이해관계를 감추지 않고 그것을 정책으로 관철시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특히 한국에서 여당/야당은 서로를 뜯어먹으려고만 하지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 생존에의 욕망만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좀비정치’이다.



3. 한국사회의 특수성은 무엇인가?


(1) 보이지 않는 강한 국가와 고착권력


국가가 자본과 결탁해 노골적으로 이해관계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은 어렵게 증명하지 않아도 신문기사만 몇 개만 검색해도 나온다. 핵발전소 납품과 관련된 비리, 4대강 사업과 관련된 비리 등 많은 사건들이 이미 드러났다. 그리고 철도나 의료 등 한창 논쟁이 되고 있는 민영화 문제는 중요한 공기업이나 비영리법인들이 민간자본에게 매각되고 흡수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을 ‘국가나 공공성의 민영화’로 볼 것인가? 물론 민영화가 맞다. 그런데 민영화가 되었다고 해서 국가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병참이나 전쟁까지 민간기업이 담당하는 시대이지만,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알리바이이기도 하다. 민간이 철도나 의료, 병참을 관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운용하는 법적, 제도적 장치는 여전히 국가의 권한이다. 나오미 클라인의 '재난자본주의'도 국가와 자본의 혼성, 뒤섞임을 뜻하지 한 방향으로의 이전을 뜻하지 않는다. 사실 재난자본주의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자유주의나 신자유주의가 ‘작은 정부’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강한 정부’를 요구하는 것도 바로 그런 현실적인 필요 때문이다.

 

2014년 5월 29일 발표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법률지원 특별위원회’의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17대 과제 중간검토 보고서」는 진상규명과 관련된 많은 질문들을 담고 있다. 이 「보고서」를 보면 참사 이전과 사고 당시, 사고 이후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이 잘 드러난다. 여객선 안전검사기준이나 차량적재기준, 선박연령기준, 안전점검기준, 선박운행기준 등은 정부의 소관이고, 부실한 관리감독의 원인인 해피아(해양수산부+마피아)나 해양경찰의 안전관리, 해양사고에 대한 정부의 대응능력, 재난관리시스템 역시 정부의 소관이다. 더구나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의 언론통제 및 사건은폐, 유가족에 대한 감시와 시위를 벌인 시민들에 대한 과도한 탄압, 전문가들의 개입 차단, 수사과정에서의 의혹 등은 정부가 생각보다 훨씬 넓은 영역에 개입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즉 민간영역이지만 여전히 그 운영과 관련된 규칙은 정부의 권한에 속한다. 따라서 국가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7개국의 민영화 과정을 추적한 다큐멘터리 <블랙딜>을 보면, 민영화 과정 뒤에는 언제나 정부와 기업의 검은 뒷거래가 있었다. 자연스러운 민영화란 환상이고, 민영화의 다른 이름은 부패이다. 한국이 식민지,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과대성장국가’(overdeveloped state, 함자 알라비H. Alavi의 개념)가 되었다는 점을 무시하면 안 된다. 복지국가와 국가의 강화를 외치는 목소리들이 있지만 자본과 결탁한 부패한 관료제도가 그런 역할을 맡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국가나 통치에 관한 분석이 간과하는 것은 그 시스템을 작동하는 관료제도이다.

 

또한 한국사회에서는 안전성의 기준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사실상 안전성을 논할 수 있는 기본정보와 기회 자체를 얻기 어렵다. 예를 들어, 핵발전소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민간의 접근이 차단되고 진상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아직도 전혀 밝혀지지 않는 의혹과 진상규명 요구는 세월호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다. 사건/사고가 터질 때마다 정부는 은폐와 여론통제, 폭력대응이라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이 면담을 청했을 때 드러났듯이, 정부는 ‘순수한 시민’이라는 자의적인 잣대를 활용해 시민/비시민으로 구분하고 비시민들을 고착시키고 있다. 가만히 있으라는데 가만히 있지 않으면 과거처럼 빨갱이로 몰려 잡혀가진 않지만 종북(從北)으로 몰려서 고립된다.

 

정보를 공개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정부사업은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폭력과 다를 바 없다. 밀양송전탑이 그 전형이다. 정부는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4개 면의 농성장을 감시하고 철거하기 위해 투입된 경찰은 총 38만1000여명, 숙식비는 99억600만원에 달했다. 경찰이 직접 폭력을 행사해 농성장을 철거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강제로 끌어냈다. 2011년 1월의 용산참사에서 그러했듯이, 경찰과 용역의 경계가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국가와 경찰이 일체가 된 근대의 경찰제도에서 경찰이란 단순히 법[법률]을 적용하는 법 보존적 폭력일 뿐만 아니라, 정부에 의한 행정명령의 공포와 일체를 이루는 방식으로 ‘법을 발명하며’ 그것에 의해서 안전을 확보하고자 하는 기관”[각주:4]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여전히 강력한 국가가 민영화라는 가면 뒤에 숨어 자본과 거래하며 이익을 취하고 이에 관한 정보와 개입을 통제하며 노골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한국사회의 특징을 뭐라 부를 수 있을까? 최근 집회/시위현장에 자주 등장하는 “고착시켜”라는 경찰의 용어를 본 따 ‘고착권력(固着勸力)’라 부를 수 있다. 정부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 감금당하고 고립된다. 집회는 금지되지 않지만 집회장 주변은 경찰버스로 꼼꼼히 차단되어 선전과 항의라는 집회의 목적은 금지된다. 감금이지만 감금이 아니기에 불법이 아니라고 주장되는 고착, 폭력으로 고립시킴으로써 의지를 꺾고 능동성을 가로막는 고착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어떤 참사에도 가만히 있으라는 정부의 지시 역시 고착 아닌가.


(2) 노동을 배제하는 자본의 노골적인 폭력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날이자 원자력안전위원회가 고리원전 1호기의 재가동을 승인한 날이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이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노후한 선박, 인건비 절감을 위한 비정규직 고용, 감시감독의 부재 등이 기본적인 원인이고[각주:5], 핵발전소들은 이런 문제를 똑같이 안고 있다. 핵발전소의 수명을 넘긴 노후시설, 납품비리와 수많은 사고, 감독기관의 이해관계집단화(핵마피아), 원전노동의 하청구조 등은 임박한 참사를, 엄청난 파국을 예고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은 여러 곳에서 반복적으로 지적되었고, 그와 비슷한 원인들이 철도, 지하철, 병원, 에너지, 공항, 건설 등 곳곳에 존재하고 있음도 지적되었다.[각주:6] 그리고 실제로 서울시장 후보였던 정몽준이 최대주주인 현대중공업에서는 지난 3월부터 한달 반 남짓 동안 7명의 사내하청노동자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적절한 안전장치가 없고 현장에 관한 정보를 제대로 알지 못한 탓이었다. 하청노동자는 현장의 안전성에 관해 묻거나 안전장비를 요구할 권리를 전혀 누리지 못한다. 사회에서 수많은 안전대책이 논의되고 있지만 위험한 공장과 사무실에서 노동자의 안전은 논의테이블에도 오르지 못하고 있다. 위험에 가장 노출된 노동자들은 정작 안전에 대한 권리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있다.

 

노동자 개개인이 요구를 하지 못하면 조직된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노동조건과 관련된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외려 현실에서는 노동조합이 체계적으로 파괴되고 있다.[각주:7] 대표적인 회사가 돈을 받고 노조를 파괴하는 전략을 짜는 노무법인 <창조컨설팅>이다. 이들이 노조를 파괴하는 전략은 다음 순서를 따랐다. ‘회사의 갑작스런 교섭거부와 단협해지 ― 파업유도 ― 사측의 직장폐쇄 ― 용역깡패 투입 ― 노조에 대한 대량해고와 대량징계, 막대한 손해배상 요구 ― 조합원탈퇴 종용 ― 탈퇴 조합원 중심으로 기업노조 창립, 배타적 교섭권 부여’. 이런 전략은 효과적이었고, 많은 노동조합들이 이런 전략에 무너졌다. 그 성과를 인정받아 <창조컨설팅>은 2011년 1월부터 2012년 8월까지 총 23개 기업에게 무려 82억 4,500만원을 받았다.

 

이처럼 한국의 통치에서는 규칙을 설계하는 것보다 여전히 개개인과 개별 사안에 직접 개입해서 폭력을 행사하고 배제하는 방식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 이 통치를 뭐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법으로는 분명히 불법이지만 검찰, 노동위, 기업주가 힘을 합쳐 규칙을 무력화시키는 사회에서 통치는 폭력과 얼마나 다를까(만도노조와 SJM노조를 습격했던 <컨택터스>의 유니폼과 장비는 공권력과 다를 바 없다).

 

직접적인 폭력을 경험하지 않더라도 노동조합의 노동자들은 끊임없는 손해배상과 민사소송에 시달린다. 2003년 타워크레인 위에서 쓸쓸히 죽음을 택했던 김주익위원장은 유서에 “그래 당신들이 나의 목숨을 원한다면 기꺼이 제물로 바치겠다. 하지만 이 투쟁은 반드시 승리해야만 한다. 잘못은 자신들이 저질러놓고 적반하장으로 우리들에게 손해배상 가압류에 고소고발에 구속에 해고까지 노동조합을 식물노조로 노동자를 식물인간으로 만들려는 노무정책을 이 투쟁을 통해서 바꿔내지 못하면 우리 모두는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승리할 때까지 이번 투쟁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같은 해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씨도 “두산이 해도 너무한다. 해고자 18명, 징계자 90명 정도. 재산가압류, 급여가압류, 노동조합 말살 악랄한 정책에 우리가 여기서 밀려난다면 전사원의 고용은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두산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랄한 인간들”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손해배상과 가압류는 계속 이어져 2014년 2월까지 각 노조가 청구받은 금액을 합하면 1,600억원이 넘는다. 물리적인 폭력과 돈의 폭력이 뒤섞여 노동자들의 삶을 고공농성과 죽음으로 몰아간다.

 

노동자가 돈과 고립에 눌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핵사고의 전례없는 죽음이 두렵긴 하지만 일상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도 두렵다. ‘배제’라는 단어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못하는 이 죽음은 우리 삶의 뿌리로 파고든다. 안전을 비용으로만 계산하는 기업이[각주:8], 노동자의 발언 자체를 금지하고 농민의 삶을 고착시키는 권력이 안전을 내세우는 상황이다. 깔끔한 안전권력을 논하기엔 우리 사회에는 피비린내가 짙게 배어 있다.

 

노동자나 주민의 활동은 불법이 아니건만 막대한 손해배상과 용역깡패의 폭력은 노동자와 주민을 꼼짝 못하게 고착시킨다. 노동자와 주민의 관계마저 단절시키고 단속한다.[각주:9] 기업이나 송전탑, 핵발전소에 관한 정보는 접근 자체가 어렵고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그 진상에 접근하기 어렵다. 여전히 권력은 은폐하고 규율하며 폭력을 행사한다.

 

이런 상황이니 민중의 권력이 다시 그 힘을 제자리로 찾아와야 하고, 그럴려면 국가와 자본의 연합전선에 맞설 힘이 필요하고, 그런 점에서 국가를 활용하지만 국가권력을 강화시키지 않는, 제도정치를 활용하지만 그것에만 의존하지 않는, 집권의지를 갖지만 분권을 실현하려는 비(非)국가 전략이 중요하다고 본다.


(3) 안전담론과 안보담론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안전과 치안이 안보(安保)담론과 결합된다.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냉전상황은 위기의 내용이나 과정과 상관없이 정치, 경제,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는 수단이 된다. 실제로 국정원의 선거개입이나 간첩조작과 같은 치명적인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박근혜 정부는 안보담론을 활용했고 세월호 참사도 그런 사건을 은폐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안전이 화두로 떠오른 6.4 지방선거에서도 안전과 함께 활용된 말이 안보였다.

 

종북이라는 낙인은 한국사회에서 안보담론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뜻한다. 이 종북담론은 기존의 빨갱이담론과는 다르다. 빨갱이가 불온한 주체를 호명하는 단어라면, 종북은 그 주체만이 아니라 북을 추종하는 세력(從北)을 뜻한다. 종북은 빨갱이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서 사용된다. 말 많으면 빨갱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정부를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종북이라는 딱지가 붙을 뿐 아니라 비판하지 않더라도 다른 삶의 태도를 보이면 바로 꼬리표가 붙는다. 심지어 밀양송전탑이나 지리산댐, 핵발전소를 반대해도, 세월호 참사를 문제 삼아도 종북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보수파들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개새끼”라고 말하면 종북이 아니라는데, 바로 면전에서 그렇게 얘기하더라도 ‘진심(眞心)’을 문제삼을 수 있는 낙인이 바로 종북이다.

 

안보와 결합된 안전담론은 어떤 주장을 가로막는 게 아니라 현실에 대한 느낌의 발산 자체를 막는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침묵시위에서 드러났듯이 주장 이전에 흐느낌이나 침묵조차도, 노란 리본이라는 소품조차도 이미 불손하고 불온한 것으로 규정되어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된다. 열심히 일하지만 가난하고 열심히 참여하면 고착되는데도, 이 답답함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안보와 결합된 안전담론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의 통치이다. 내부의 적만이 아니라 외부의 적으로 몰아 그 존재 자체를 고착시키려는 이 흐름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고민이다.

 

물론 이런 고착을 뛰어넘으려는 운동도 존재한다. 존재 자체를 고립시키는 고착사회에 맞서 희망버스를 타고 직접 현장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국가와 자본의 폭력은 희망버스를 타고 먼저 손을 잡으려는 사람들조차 고립시키고 경계를 지운다. 나서는 것 자체가 금지되지는 않지만 어느 선을 넘는 순간 고착된다. 누구의 명령에서 비롯되는지도 파악되기 어려운 고착명령은 예외상태의 규칙화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지만 뭔가 고민의 꼬리는 계속 남는다.

 

또한 이런 고착의 흐름에 맞서기 위해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국민대책회의가 구성되고 “존엄으로부터 안전을 세우기 위하여”라고 외치는 존엄과안전위원회가 출범했다. 존엄과안전위원회는 안전한 사회를 위해 당장 실천해야 할 일로 일곱 가지 과제를 요구했다.

 

1. 기업살인법을 제정해야 합니다.

2. 원전사고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 수명이 끝난 노후원전을 폐쇄해야 합니다.

3. 위험작업 중지권을 보장해야 합니다.

4. 생명과 안전에 관한 업무는 외주화를 금지하고 즉각 정규직화해야 합니다.

5. 기업활동규제완화에 대한 특별조치법을 폐기하고 규제완화를 중단해야 합니다.

6. 화학물질로부터 안전하기 위해 주민 알권리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7. 지역안전관리 시스템과 공공다중이용시설 안전에 시민 참여를 보장해야 합니다.

 

과제는 다 나온 듯하다. 문제는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이다. 지금 정부가 이 일곱가제 과제를 순순히 받아들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일곱 과제의 ‘합니다’가 안보담론과 안전담론을 분열시키고 누구를 어떻게 설득하며 조직할 것인가에 관한 방법을 찾아야 현재의 안전담론에 균열을 만들 수 있다. 누구에게 말을 거는가에 따라 호명의 방식이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4. 기민(棄民)과 자립인


사토 요시유키는 발제문에서 히로시마 자유농장의 발언을 인용하며 기민을 얘기한다. 사이토 준이치도 『민주적 공공성』에서 “약자의 기민화”를 우려한다.[각주:10] 그런데 버려진 민중이란 표현은 공공성 강화를 위한 국가의 책임을 자극하긴 하지만 민중의 가진 힘을 제한하는 것이기도 하다. 2014년 1월, 일본 후쿠시마현 이와키시의 활동가들을 초청했을 때[각주:11], 그들은 핵발전소에서 30km 떨어진 곳에 다시 마을을 세우고 있었다. 모든 문제를 후쿠시마로 몰아붙여 배제하려는 정부에 맞서 자립(自立)의 기반을 다지고자 했다. 그러면서 일본 활동가들은 한국의 상황에 굉장히 놀라워했다. 방사능에 그토록 민감한 사람들이 어떻게 저런 핵발전소를 그대로 둘 수 있냐고. 어떻게 시민들이 사는 도심에 핵연료 공장을 세우냐고. 어떻게 마을 한 가운데에 송전탑을 세우냐고.

 

물론 이런 물음이 안전에 대한 갈망을 더욱더 증폭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 갈망은 누군가가 채워줄 수 있는 욕망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준비해야 할 생활이자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토론회에서 현재의 상황에 대한 이런저런 진단이 나오지만 정부에 대한 무기력한 요구나 의지만 드러나는 결의 이상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 생각한다.

 

두려움만으로는 현실의 벽을 뛰어넘을 수 없다. 연대는 가장 절실한 사람들과 손을 잡는 것이라 배웠고 그렇게 생각한다. 앞서 가는 사람들과 손을 잡는 것은 연대가 아니다. 넘어지는 사람을 받치는 것(人)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의식적인 연대이다. 그렇게 의식적으로 손을 잡고 또 잡아야 국가와 자본에 맞서, 외려 그들을 버리면서 우리의 삶을 재구성할 수 있다.

  1. 나오미 클라인, 김소희 옮김, 『쇼크 독트린』, 살림Biz, 2008, 23쪽. [본문으로]
  2. 이병천 등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1997년 위기와 구조개편을 통해 만들어진 신자유주의 수동혁명”이라 평가한다. 이들 정부는 영미식 스탠더드를 추종하는 시장개혁론을 내세우며 개방=선(善)의 등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투기자본인지 생산적 투자자본인지를 묻지 않고 무분별하게 외국자본을 유입시켰다(이병천 등 『세계화 시대 한국 자본주의: 진단과 대안』, 한울, 2007, 23~25쪽) [본문으로]
  3. 사토 요시유키, 김상운 옮김. 『신자유주의와 권력』, 후마니타스, 2014, 71쪽. [본문으로]
  4. 사토 요시유키, 앞의 책, 98쪽. [본문으로]
  5. 김성희, “세월호 대참사와 한국사회, 그리고 노동”, 김철, “박근혜정부의 안전규제완화 및 민영화 정책, 그 쟁점과 대안”, ‘민영화와 위험사회: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말한다.’ 자료집(2014.05.22) [본문으로]
  6. 민주노총 주최 ‘현장에서 바라본 세월호: 진단과 대안’ 토론회(2014.05.29) [본문으로]
  7. 땡땡책협동조합, 『우리, 노동자로 살아가다』, 땡땡책협동조합, 2014 참조. [본문으로]
  8. 김혜진, “사고는 어떻게 참사로 이어지는가?”, 세월호참사국민대책회의 존엄안전위원회 ‘참사를 막기 위한 출발선에 서다’ 토론회 토론문(2014.06.11) [본문으로]
  9. “손해배상에 따라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자신이 가족과 친구에게서 존재감을 상실한 채 ‘쓸모없는 존재’로, 나아가 ‘민폐를 끼치는 존재’로 되어감을 실감하게 된다.”(엄기호, 『단속사회』(창비, 2014), 216쪽) [본문으로]
  10. 사이토 준이치, 윤대석 외 옮김, 『민주적 공공성』, 이음, 2009, 101쪽. [본문으로]
  11. 땡땡책협동조합, 『후쿠시마에서 살아간다』, 땡땡책협동조합, 2014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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