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의 효과는 짧은 시간에 드러날 수 없다. 불과 2년밖에 안된 정책을 가지고 그 실제 효과를 따지는 건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효과가 분명하게 드러날 수 없는 상황에서 효과를 예측해서 비판하는 것만큼 잘못된 비판은 없다. 기존의 정책이 보완되고 수정된 것이라면 그 방향이라도 예측할 수 있겠지만 새로 시작된 정책이 어디로 어떻게 갈지를 미리 예측하는 건 예언의 영역이지 분석의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약간이나마 의지할 수 있는 틀은 ‘경로의존성’이다. 과거에 어떤 정책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를 보면 비슷한 정책이 어디로 갈지를 알 수 있다. 행정조직의 경우, 특히 그 관행이 잘 바뀌지 않는 한국의 행정조직 경우에는 그 방향이 잘 보인다. 민관협력, 거버넌스를 아무리 얘기해도 잘 바뀌지 않는 것은 행정구조와 관행, 문화이다.
그런 점에서 혁신정책의 방향은 민이 아니라 관이어야 한다. 그런데 서울시의 혁신정책은 대부분 관이 아니라 민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솔직히 혁신정책이라 부르기 어렵고 시민운동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관의 영역으로 흡수하려는 정책이라 평가할 수 있다. 시민사회와 행정이 함께 변해야 하겠지만 ‘취약한 시민사회와 과도한 행정’이라는 현실을 고려하면 행정의 혁신이 두드러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발제문은 크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지려 한다. 첫째, 혁신이 어느 한 편의 과제인가? 함께 변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변해야 한다는 걸까? 둘째, 변화의 구체적인 힘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져야 할까? 개인의 자율성과 함께 사회의 공공성(公共性)을 강화시킬 전략은 어떻게 마련될 수 있을까?
1. 서울시 마을공동체 정책: 의도는 좋다고 하나 방법이...
<서울특별시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의 유창복 씨는 《마을공동체 1년 시민토론회 자료집》에 실은 “서울시 마을만들기 사업과 거버넌스의 과제”라는 글에서 이런 입장을 밝혔다. 서울시 사업을 하며 가장 염두에 둔 문제가 “칸막이행정, 형식적 거버넌스, 조급한 성과주의”라고 지적했다. 타당한 지적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업은 실국이 담당하며, 마을공동체 담당관실과 마을지원센터가 정책조율 기능을 담당한다. 공동체위원회가 실질적인 심의기구로서 실국에 대한 지배력을 가진다”는 거버넌스 원칙을 세웠고 ‘맞춤형 지원’과 ‘당사자주의와 보충성 원리’를 사업의 원칙으로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민과 관의 소통이 어렵다”는 것을 전제로 “상호협업의 경험과 소통의 경험”을 쌓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아울러 “마을 차원의 사회적 자본을 강화”시킬 수 있도록 “마을 공공성, 주민들의 관계망, 사업의 주민주도성과 자립성, 장소성 등 다양한 요소들에 대한 합리적인 측정과 평가기준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런 노력이 실제로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발제문에 따르면 그럼에도 서울시의 칸막이 행정을 넘어서기에는 “구조적인 한계”가 있었다고 평가한다. 마을사업이나 주민이 시의 재정지원을 받는 “보조사업”이나 “보조사업자”가 아니라 “시의 주인으로서 시정에 참여하는 주체”임을 인정하라는 주장은 증명의 주장보다 그렇지 못한 현실을 반영하는 주장처럼 들린다. 민관협력을 담당하는 기관으로서 지난 1년 동안 쌓은 경험을 논하는데 사업에 관한 부분이 매우 구체적이나 ‘구조’를 논하는 부분은 매우 추상적이다. 사업의 기획과 평가 과정에서 민간의 주도성이 살아나고 행정의 권력이 이양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구체적인 근거는 제시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발제문은 서울시 마을공동체 사업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좋은 물음을 만들고 그 질문을 공유하는 과정에서만 좋은 고민과 해답들이 나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질문은 아니고 앞서 《마을공동체 1년 시민토론회 자료집》에 실린 구자인 연구소장의 “마을현장 거버넌스와 중간지원체계”, 최순옥 위원의 “마을공동체 사업 1년 성과와 발전방향”, 박현찬 연구원의 “마을공동체 사업, 성과와 비판, 그리고 발전과제”, 신원철 의원의 “마을사업 예산지원과 주민 자생력 제고”를 참고했고, 조정래 입법담당관의 “서울 마을공동체 만들기 사업 추진방향 연구”(《입법담당관 정책보고서 제 3호》), 김은희 <도시연대> 사무처장의 “서울특별시의 마을공동체 사업에 대한 질문들”(2012년 4월 6일 간담회 발제문), 양재섭, 김인희 연구원의 “서울의 마을단위계획 운영실태와 자치구 역할 개선방향연구”(《서울연구원 보고서》)를 참고했다. 서울시의 마을공동체 정책과 관련해 이런 질문들을 던지고 싶다.
첫째, 서울시의 행정은 마을공동체 정책을 통해 어떤 변화를 경험했나? 이 부분은 측정할 구체적인 자료가 없다. 다만 구조적인 면을 한번 점검할 수 있다. 서울시의 조직도를 보자. 혁신을 담당하기 위해 서울시장 밑에 서울혁신기획관이 만들어졌다.
구조적으로 서울혁신기획관이 시장 직속으로 서울시의 행정을 관장하는 지위에 있다. 이런 구조가 혁신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직속의 행정조직이 신설된 것일 뿐 이 자체가 조직의 혁신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구조가 시민사회로 행정의 권한이 이전되었음을 증명하지도 못하고, 이렇게 별도의 조직을 만드는 것이 칸막이행정을 무너뜨릴 계기가 되지도 못한다. 다른 나라의 행정혁신모델은 대부분 시민사회로 상당한 권한과 예산을 넘겨주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행정구조의 개편만으로는 그 혁신성을 증명하기 어렵다.
둘째, 광역자치단체와 기초자치단체의 역할분담은 잘 되고 있나? 여러 자료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바는 광역자치단체가 실제 사업을 하지 말고 기초자치단체의 시스템 개선을 정책적으로 유도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광역자치단체가 신규사업을 만드는 걸 자제하고 기존 사업의 연계를 중시하며 업무의 질을 높여야 한다. 예를 들어 양재섭, 김인희 연구원은 서울시 추진과 자치구 추진의 장단점을 다음과 같은 표로 정리한다.
구분 |
서울시 주도형 |
자치구 주도형 |
장단점 |
▶충분한 계획 수립 역량으로 안정화된 사업추진 가능
▶충분한 예산의 운용 가능
▶객관적인 기준으로 공정한 평가와 모니터링 가능
▷기본계획과 실시설계의 주체 변경으로 인한 단절 발생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여러 사업을 실질적으로 관리하기에는 한계 |
▶지역 이해를 통한 장소중심의 통합적 정책시행 가능
▶창구의 단일화를 통해 주민과 밀착되고 피드백이 가능한 소통 가능
▶지역과 밀착하여 주민과 지속적 소통으로 사후관리 용이
▷전문부서 마련의 어려움과 절대적인 담당 인력의 부족
▷자치구 자체적 예산 마련에 한계 |
그런데 현재의 서울시 정책에서 이런 역할분담을 확인하기 어렵다. 역할분담이 없지는 않지만 광역자치단체가 기획하고 자치구가 실행하는 식의 역할분담이 사라지지 않았다.
셋째, 행정의 조급성은 정말 사라졌나? 사업의 수를 늘리는 것보다 질을 강화시키려는 노력이 있었나? 유창복 센터장은 마을공동체사업이 ‘마을지향행정’을 만들려 했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처럼 분명 일정한 변화는 있었다. 마을거버넌스를 만들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거버넌스의 마지막 단계는 평가가 아니다. 평가가 다시 기획으로 환류(feedback)되어야 거버넌스이고, 그 환류과정에서 민간의 주도성이 살아나야 거버넌스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런 거버넌스가 구현되고 있을까? 예를 들어, “마을의 역사와 경험을 공유하는 마을, 마음껏 상상하고 함께 꿈꾸는 마을, 서로가 서로에게 들려주고 듣는” 자리라는 00마을이야기의 2012년 지원사업 보고서 양식을 보자. 참여회원수, 축제참여자수가 전체적인 사업개요이다. 양식이 간소화된 건 분명 긍정적인 면이지만 양적 평가가 아닌 질적 평가가 어떻게 반영되는지 알 수 없다. 민간의 주도성이 살아나고 있는 걸까?
진정 주민주도성이 살아나고 있을까? 신원철 의원의 지적처럼, 일방적인 지침과 선정, 평가 등은 시민사회를 규율하는 장치가 되고 있는 것 아닌가? ‘기획→계획→예산편성→제안접수→심의․선정→지원→평가’라는 집행과정은 철저한 관주도 방식이라는 문제제기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넷째, 서울에 마을이 만들어지지 않는 건 사람들이 친하지 않아서일까? 통계청에 따르면, 2012년 기준 서울시의 인구밀도는 16,483명으로 전국 평균 499명보다 약 33배 높고, 전국 최저인 강원도의 90명보다 약 183배 높다. 인구밀도만으로 서울시민보다 강원도민의 삶이 더 행복할 것이라 예상할 방법은 없지만 생명체가 좁은 공간에 몰려 살 때 불행해지고 밀집하면 도시문제가 반드시 생긴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마을공동체가 형성되려면 사실 서울시는 인구를 분산시킬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통계청에 따르면, 2010년 기준 서울시 전체 가구 약 350만 가구 중 집을 소유한 가구는 약 143만 가구이다. 전월세 가구가 약 199만 가구이다. 결국 약 57%의 가구는 정주하지 못하고 전월세 시세에 따라 이동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마을공동체는 어떤 의미일까? 아파트소유자 중심으로 움직이는 아파트입주자대표회의가 주도하는 아파트공동체는 세입자들에게 어떤 느낌일까?
<도시연대> 김은희 사무처장의 지적처럼, 우수사례지역이 보편적인 삶의 질 향상의 계기가 되기보다는 고립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리고 성공사례보다는 마을이 무너지는 이유를 먼저 파악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구자인 연구소장의 말처럼 “서울시는 지나친 과밀에서 나타나는 폐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전국적 동향을 보면서 ‘지역이 살아야 서울이 산다’는 관점에서 국토 균형발전에도 기여해야” 하는 것 아닐까?
다섯째, 이미 모임들이 많이 만들어진 지역이나 단체활동이 활발한 곳으로 자원이 집중되는 것은 아닌가? 일반 시민들의 인식이나 정보부족으로 혜택이 편중된다는 우려가 실제로 제기되고 있다. 새누리당 남재경 서울시의원이 제기한 사업편중에 대한 지적이 정말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인지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사)마을이 제작한 《마을공동체기업 육성프로세스》(2012. 08)의 평가지표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마을의 필요를 파악할 정도의 안목과 조합원을 모을 자립도, 마을 내 취약계층을 파악하고 조직의 이익을 마을의 이익으로 연결지을 능력은 이미 드러난 조직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특히 서류를 준비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이나 주민들과 사업을 진행했던 경험은 기성단체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익숙하지 않은 주민들을 위해 멘토단이나 인큐베이터, 컨설턴트가 지원을 한다고 하지만 정작 이 과정에서는 이들의 통일되지 않은 관점이 주민들의 혼란을 늘리기도 하고, 불필요한 사업을 만들기도 한다.
사실 마을의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공적인 지원을 받아야 할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시민참여의 효율성이 시민참여의 민주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스카치폴(T. Skocpol)과 피오리나(M. P. Fiorina)가 지적하듯이 시민참여는 ‘대표되지 않은 참여자’(unrepresentative participators)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업이 다른 사업보다 더 절실하다는 기준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고 그것의 민주성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나? 특히 마을공동체사업을 위탁받은 조직의 민주성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나?
여섯째, 모든 마을활동이 마을공동체사업이어야 하나? 마을공동체사업들이 진행되면서 정말 마을이 만들어지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이런저런 사업들은 많지만 그 사업들을 통해 주민들은 어떤 경험을 하고 있나? 외려 지원사업 때문에, 지원을 받은 쪽과 지원을 받지 못한 쪽으로 나눠지고, 되는 사업일수록 그와 관련된 기획이 공유되지 않는 것을 보면 마을이 더 분열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을공동체사업을 통해 통반장, 지역단위 직능 사회단체, 자원봉사센터, 주민자치위원회가 민주화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야 사업의 의미가 살아날 것인데, 그런 소식을 듣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마을활동이라는 것이 매우 정형화되고 그것에 대한 다른 목소리를 배제하는 것은 아닌가? 갈등이 없는 아름다운 마을을 지향하는 게 정치없는 마을을 지향하는 건 아닌가? 스카치폴과 피오리나는 질서와 안정이 아니라 갈등이 시민의 민주적인 능력을 강화시킨다고 주장한다. 즉 갈등하는 이해관계에 바탕을 둔 시민들의 적극적인 행동과 시민단체들의 확산이 민주주의를 강화시킨다. 갈등을 회피하는 마을공동체, 정치를 배제하는 마을공동체는 어떤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확산시키고 강화시키려는 것일까?
이 와중에 서울시는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종교를 전파하려는 목적을 가진 마을공동체에는 행정, 재정적 지원을 하지 않겠다며 조례를 개정했다.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미 마을의 관변단체들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정치성을 배제하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우리는 어느 정당을 지지하겠다며 마을사업을 하는 곳이 어디 있겠나? 이런 판단은 특정 정당의 당원들이 마을에서 배제되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고 이 효과는 소수당에게 집중될 것이다. 이것이 마을의 민주주의를 살리는 결과를 가져올까?
일곱째, 마을공동체 사업과 무관하게 한 가지를 더 지적한다면, 박원순 시장은 SNS행정을 자신의 치적으로 평가했다. “지난 6개월간 1만 4,000여건의 의견을 받아 98%의 민원을 해결했다”며 “SNS 행정이 세계 최초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자평했다. 민원을 해결했다니 좋은 듯하지만 시장을 통한 민원해결은 새로운 형태의 후견주의(clientalism), 주민들의 뒤를 봐주고 지지를 확보하는 방식이지 혁신정책이나 민주주의는 아니다. 사안을 공식적인 과정을 통해 해결하고 개인이 아니라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이 한국의 지방자치제도에서 절실히 필요한데, SNS 행정은 이런 노력을 뒷받침하지 못한다.
2. 서울시 사회적경제 사업: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구별이...
<서울사회적기업개발센터>가 2013년 2월에 발표한 “2013년 서울특별시 사회적 경제 현황과 정책흐름”이라는 PPT자료를 보면, 서울시의 사회적 경제 정책은 다음과 같은 전략을 세우고 있다.
개발 중심의 하드웨어 전략을 추진했던 기존 서울시정에 비하면 긍정적인 전략이라 얘기할 수 있다. 제시하는 목적처럼 시민의 관점에서 생활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을 통해 지역경제를 강화시키며 경제민주주의를 확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다만 관건은 지방정부가 경제 영역에 어느 정도로, 어떤 방식으로 개입해야 하는가이다.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는 것이나 일치되는 것 모두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서울특별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의 이은애 센터장은 센터장이 되기 전인 2012년 1월에 발표한 “서울시 사회적 기업 육성정책의 평가 및 개선과제”(《서울경제》)에서 서울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여섯 가지를 제안했다.
①서울형 사회적 기업의 개념 및 정책목표 재설정. 한시적 재정지원에 의존한 ‘일자리 창출’을 너머, 지역사회 특유의 인적․물적 자원을 활용함으로써 내발적 발전을 이끄는 사회적 기업의 지역화와 이를 가능케할 생태계 조성이 핵심과정으로 제기되게 된다. ‘서울시민의 주도적이고 민주적인 참여와 사회․경제․문화적 수요에 기반하여 지역 활성화를 위한 혁신적 해법을 제시하는 가운데 다양한 지역자원을 연계하므로써 사회적 목적 수행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해 나가는 예비 및 인증 사회적 기업’으로 재정의. 마을기업이나 자활공동체, 협동조합을 포괄하는 접근.
②창업단계 인건비 지원 중심에서 기업의 생애주기별 맞춤지원 전략으로 이행. 창업, 인증, 성장, 폐업이라는 주기. 인건비, 시설설비비, 무료 사회서비스 파일럿 사업비 등을 지원기관이 선택하도록. 우호적 시장 확보(공공기관 및 대기업 연계를 통한 조달시장 확대, 사회적 기업간의 내부시장 구축을 활성화, 서울 특유의 공공의 적극성과 정책역량을 활용하고 시민의 지지기반 형성. 칸막이 행정 제거하고 연계.
③서울시의 수요 및 자원조사를 통한 전략분야 및 전략지역 시범사업 필요. 서울시의 우선사업분야로 대학생 및 청년 주거문제 해결, 낙후지역 대안개발형 쇼셜 하우징, 도시농업, 로컬푸드 연계형 친환경 공공급식시스템 구축, 전통시장 및 소상인 지원, 지역공동체형 보육시설 확충, 자치구 특화산업 연계형 사회적 기업 창업.
④시민사회 역량 제고 및 네트워크 강화. 인력양성 지원사업.
⑤민관 거버넌스에 기반한 시너지 확보. (가칭)서울 사회적경제위원회 구성.
⑥사회적 기업의 개별 생존을 너머 생태계 조성을 돕는 풀뿌리 중간지원조직 확충.
이런 제안이 거의 반영되어 <서울특별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는 2013년 9월 12일 미래복지포럼에서 발표한 “서울시 사회적 경제 현황 및 활성화 전략”이라는 PPT 자료에서 아래와 같은 지원계획을 밝혔다.
좋은 내용이고 동의할 만한 내용인데, 여러 가지 다양한 사업들을 다루는 것 말고 이런 사업들을 어떤 관점에서 진행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이렇게 만들어진 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 마을기업이 서울시민의 살림살이를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서울시의 사회적 경제는 기존의 경제를 보완하려는 것인가? 하지만 그 목적을 보면 보완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해석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서울시의 사회적 경제정책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런 물음에서 시작해 다른 물음으로 넘어가려 한다.
첫째, 한국사회의 경제 집중도는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1997년 IMF 이후에는 국제금융자본과 재벌, 자유주의 정부의 삼각동맹체제(이병천)가 한국사회를 지배하며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모토로 삼는 ‘기업사회’를 만들고 있다. 이 와중에 고용없는 성장과 비정규직 양상은 바꿀 수 없는 흐름이 되고 있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하도급거래’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재벌의 사회적인 지배력은 더욱더 강해지고 있다.
자, 이런 현실을 두고 판단할 때 서울시의 사회적 경제정책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나? 기존의 영리경제와 사회적 경제를 ‘공존’하게 만들겠다는 서울시의 구상은 정말 실현가능한 것인가? 예를 들어, 서울시가 선포한 ‘협동조합도시 서울’은 ▲공공서비스 영역에 시민 주도의 협동조합 참여 보장과 서비스 질 개선,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이 참여하는 협동조합 설립 촉진과 경쟁력 강화, ▲근로자 협동조합의 원활한 설립을 위한 지원, ▲다양한 생활협동조합 설립으로 지역 공동체성 회복, ▲시민 교육 체계 마련과 지도자·전문가 육성, ▲협동조합 활성화 조례 제정과 기금 조성을 통한 자립·성장지원 등을 내세웠다. 만일 이런 협동조합정책이 기존의 경제정책을 보완하는 수준이 아니라 대체하려 한다면 재벌과의 대결이 필수적인데, 그런 전략이 있는가? 특히 한국사회의 모순이 집약된 서울시가 그런 대결을 주도할 수 있을까?
서울시가 보완전략을 대체전략인 것처럼 홍보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물음을 떨칠 수가 없다. 더구나 민주화 이후 독자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시장에 개입하는 신자유주의 관료집단을 견제할 힘이 구성되고 있는가? 민주화 이후 더욱더 적극적으로 국가를 포섭하는 재벌들의 지배전략에 대항할 힘이 마련되고 있는가? 사회경제적 시민권과 정치적 시민권이 상호 연관을 맺으며 향상될 수 있는 전략이 세워지고 있는가? 사회적 경제는 노동자이자 동시에 투자자인 노동자들을 조직할 전략을 가지고 있나? 자본파업에 대항할 힘이 형성되고 있나? 재벌의 지배구조를 변화시킬 전략이 마련되고 있나? 사회적 경제는 한국 자본주의의 특징인 하도급거래구조를 변화시킬 힘이 있나? 재벌들의 골목 상권 침해를 막을 힘을 가지고 있나? 이런 물음들이 뒤따라 나온다.
둘째,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계급불평등의 심화라는 상황에서 사회적 경제는 노동과 복지를 연계시키는 전략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사회적 경제가 교육, 주거, 고용에서 격화되는 경쟁과 불평등을 바로잡을 힘을 기르고 있나? IMF 이후 등장한 노동복지(workfare)라는 개념이 실제로는 복지의 축소를 동반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사회적 경제의 의미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해석할 이유는 없다. 다만 제도가 사회에 실제로 미쳤던 영향을 잘 따져봐야 한다. 사회적 경제의 경로는 사회적 기업의 경로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정부는 2007년 사회적기업육성법을 만들면서 사회적기업 인증제도라는 것을 도입했다. ‘사회적 기업’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려면 반드시 노동부 장관의 인증을 받아야 하고, 인증을 받지 않으면 과태료를 내도록 했다.
이렇게 인증을 내세웠지만 정부의 인증기준이 명확하지 않고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이 계속 제기되었다. 그리고 정부의 인증이 신규사업보다 기존에 이미 진행되어오던 사업들, 즉 이미 인력과 자원을 가진 곳으로 집중되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또한 사회적 기업이 사회성보다 일자리를 만드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비판, 정부가 최저임금만을 보조하고 나머지 부족분을 사업을 통해 보충하도록 해서 저임금 일자리가 확산된다는 비판, 정부가 노동복지(workfare)를 강조하면서 기본적인 복지를 축소시키고 있다는 비판 등이 계속 제기되었다.
협동조합은 사회적 기업의 경로와 다를 것이라 자신할 수 있을까? 사실 협동조합기본법도 이런 경로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협동조합기본법에서 협동조합은 (일반)협동조합과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구분된다. (일반)협동조합은 5인 이상의 결의로 설립되고 신고만 하면 등록절차를 거쳐 활동할 수 있다. 반면에 지역사회에 공헌하거나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월평균 소득의 60% 이하, 고령자, 장애인, 결혼이민자, 경력단절여성, 갱생보호 대상자 등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이들을 고용하는 비중이 전체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사회적 협동조합은 5인 이상의 결의로 가능한데, 기획재정부 장관의 인가를 받아야 설립될 수 있다. 사회적 협동조합은 (일반)협동조합과 달리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기업과 비슷하게 ‘인가’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사회적기업육성법의 경험을 통해 협동조합기본법을 해석한다면 그 결과는 사회적 기업과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단기간의 지원을 통해 협동조합의 수가 늘어날 수 있지만 사회성이나 협동의 강화보다 고용 창출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고, 시장경쟁에 내몰린 협동조합들이 실패를 경험할 것이고, 협동조합이 공공서비스 민영화의 명분(사회적 협동조합은 국가와 지자체의 사무 중 일부를 위탁받을 수 있다)으로 악용될 수 있다. 이런 흐름은 협동조합운동의 강화가 아니라 왜곡이나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사실 사회적 경제라는 것은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뿐만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생산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도 관심을 가진다. 현재의 사회적 경제 정책은 이런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셋째, 사회적 경제가 확장되고 비가시적인 경제 영역을 가시적인 경제활동으로 만드는 것은 반드시 좋은 일일까? 즉 화폐경제에 포함되지 않았던 살림살이의 영역을 임금노동의 영역으로 만드는 것이 반드시 올바른 일일까? 서울시의 사회적 경제 정책이 주력하는 7대 분야는 공동육아, 돌봄, 보건의료, 임대주택, 전통상인 및 소상공인, 베이비 부머,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그중 공동육아, 돌봄, 보건의료는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볼 수도 있는데, 그것이 영리영역으로 가시화되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일까?
청년이나 경력단절여성, 이주민들이 직업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노동을 경험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가부장적이고 비민주적인 기업문화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한국사회에서 노동은 어떤 의미이고 노동을 통해 자존감을 얻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이런 부분을 고민하지 않으면서 정책을 구상하는 것이 과연 사회성이나 호혜성을 강화시킬 수 있을까?
그리고 사회적 경제가 지속되려면 다른 경제활동이 지속될 수 있는 다른 시장이 필요할 텐데 그것이 공공조달과 내부거래의 확대, 기업의 협조로 가능할까? 신경희 연구원의 “서울형 마을기업을 통한 지역공동체 활성화”(서울시정개발연구원 보고서, 2012년)에 따르면, 2010~2012년 65개 마을기업의 담당자들은 마을기업의 가장 큰 애로사항으로 “마을기업 유지를 위한 수익창출”(26.2%)과 “마을기업 운영자금 부족”(13.8%)을 들었다. 사실 수익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순간 다른 가치는 쉽게 무기력해진다. 사회적 기업에 민주주의가 부족한 이유는 그것이 협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바꾸더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박원순 시장은 이를 ‘유통’이라는 말로 정리하려는 듯하다.
그리고 경제나 빈곤에 관한 새로운 고민이 필요하다. 현대의 빈곤은 단순히 실업이나 저소득으로만 발생하지 않는다.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배제의 차원은 매우 다양하고 우리의 상식과 달리 배제의 중요한 원인이 경제적인 변수보다 사회적 관계망과 교육에서 비롯된다. 물론 경제적인 빈곤이나 실업이 중요한 변수이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사회적 배제의 현상을 모두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소외는 경제적인 상황만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실존적인 상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사회적 경제정책은 이런 소외에 대해 어떤 해법을 가지고 있을까?
더글러스 러미스는 쓰지 신이치와의 대담(『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에서 가난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가난이 왜 고통스러운가 하면, 가난하기 때문에 싫은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고, 가난하기 때문에 관리나 억압에 저항하지 못하고 착취당하기 때문입니다. 상사가 아무리 보기 싫어도 이를 악물고 일해야 하고, 경멸당하고 무시당해야 하니까 그것이 고통스러운 거죠. 물질이 풍요롭지 않다는 것, 즉 가난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관계의 문젭니다. 관리되는 인간관계에서 자신의 위험이 상처받는 것이 고통스러운 게 아닐까요?” 우리는 가난을 빈곤의 문제로 생각하는데 러미스는 관계의 문제로 본다. 가난이 가졌던 관계는 현대 사회에서는 계속 파괴되고 있다. 특히 세계화의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이제는 가난이 아니라 ‘잉여’가 되는 사회이니까. 잉여사회에서는 가난한 사회가 가졌던 관계망이 유지될 수 없다.
넷째, 서울시의 사회적 경제정책은 경제의 사회성을 확장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나? 과거와 달리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 아니다. 도시농업이 의도치 않게 농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듯이, 사회적 경제의 활성화가 도시의 소상공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2년 기준 서울시 전체 취업자 약 503만명 중에서 자영업주가 97만명, 무급 가족종사자가 약 16만명에 달한다. 합하면 약 113만명으로 22.4%이다. 그리고 임금근로자 중에서 임시직이 113만 6천명, 일용직이 39만 6천명이다. 사회적 경제는 이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들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들을 지원해야 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앞선 신경희의 연구를 보면, 마을기업의 설립목적 중 가장 높은 비율이 “지역기반 주민 일자리 창출”(81.5%)이고 두 번째가 “주민교류와 지역공동체 활성화”(64.6%), “취약계층 주민 일자리 창출”((60.0%) 등이고 “전통상가, 지역경제 활성화”는 (18.5%)이다. 새로이 만들어지는 사회적 경제 영역들이 기존의 지역경제 영역과 잘 접목되지 않는 징조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아름다운재단>의 월간지 《콩반쪽》2005년 5월호에 따르면, 1970년부터 2005년 4월까지 언론에 보도된 김밥할머니의 기부금을 모으면 95건, 약 1,149억원이라고 한다. 사회적 경제가 없었을 때에도 그런 경제를 실현한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그럴 것이다. 사회적 경제는 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려 하는가?
3. 서울시 정책에 대한 총평
중간지원조직을 위한 중간지원조직이라는 탄성이 여기저기서 들을 수 있다. 컨설턴트나 상담원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지역의 입장을 대변하기는커녕 행정의 방침을 강요한다는 항의도 여기저기서 들을 수 있다. 내 귀에만 들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는 사람들이 더 무섭다는 얘기도 들린다.
사회적 경제라는 것이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의 수를 늘리는 것은 아니다. 살림살이의 사회성이 실현되는 것이 사회적 경제이다. 그렇다면 살림살이를 바라보는 관점이 근본적으로 전환되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벗어나 때로는 대결을 통해 새로운 건설을 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착한 경제’를 외칠 뿐 현실의 악과 싸우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혁신은 자기성찰을 동반할 때에만 지속가능하다. 서울시의 자기성찰이 무엇보다 요구되는 시기이다. 원전 1기 줄이기 캠페인으로 밀양 송전탑에 맞서 싸우는 할머니들의 고통과 신음을 감출 수는 없다. 한편에서는 마을공동체사업이 다른 한편에서는 이미 있던 마을이 처절하게 짓밟히는 이 모순을 둔 채 아름다움을 논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