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대까지 공부를 하리라 마음을 먹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릴 적에는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과학자라고 답을 했고, 커서도 누가 소원을 물으면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라 답했다. 책읽는 것보다 손으로 조립하고 만드는 걸 좋아했고 수줍게 앉아 남의 얘기를 듣길 좋아하던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건 상상하지 않던 일이었다. 소심하고 낯을 가리던 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하고 꿈꾸는 세상에 관해 얘기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으니 세상일은 참으로 알 수 없다.
그래서 나의 10대, 20대를 함께 했던 사람들은 지금 내 모습에 적잖이 놀라곤 한다. 예를 들자면, 책값이라도 벌어보려고 여기저기 글을 쓰던 2002년, 대학원 석사시절 때 알던 선배가 ‘하니리포터’라는 인터넷신문에서 내 글을 읽고 미국에서 이런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네 석사 때 모습이 생각난다. ‘형, 나는 머리 쓰는 일보다 몸으로 때우는 게 적성에 맞아요’라고 사무실에서 나에게 이야기 했던 너인데 어떻게 머리 고생시키는 일을 하고 있구나.^^” 내 모습이 실제로 그랬으니 이 선배만 유독 생뚱맞은 반응을 보인 건 아니다.
그렇다면 왜 나는 팔자에도 없고 꿈도 꾸지 않던 공부라는 길을 택했을까?
1. 억압된 자아와 갇힌 학문의 유사성
나는 부산에서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형들은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좋아하는 엄친아들이었고, 나는 공부나 운동 모두 고만고만한 평범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까지 반에서 20등 정도가 내 성적이었고 공부 잘 한다는 말보다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책을 진득하게 오래 보지도 못했고 그 당시 유행하던 얄개 시리즈나 괴도 루팡 시리즈 정도만 내 관심을 사로잡았다.
그러니 시험 때마다 마음을 졸이기 일쑤였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성적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형들이 공부를 잘하니 쟤 머리도 좋지 않겠냐는 주변 사람들의 근거 없는 낙관이 삶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했다(명절은 지옥에 가까웠다!). 오히려 성적을 올려야 한다는 압박감이 나를 계속 쫓아다녔고, 고등학교 생활은 압박감에 시달리는 암기나 공포를 잊어보려는 일탈로 채워졌다. 함께 놀던 친구들이 없었다면 그 시기를 버틸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운 좋게 2지망으로 대학에 들어간 뒤에도 공부는 내 관심 밖이었다. 학생운동을 하던 형을 보면서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들과 시위현장에 가보고 운동권 가요를 배우기도 했지만 그 당시 유행하던 ‘사회과학세미나’도 내 관심 밖이었다. 책이라면 전공책과 사회과학서적 어느 것에도 끌리지 않았고 나는 술 마시고 노는데 더 관심이 많았다. 군인이 정치를 하던 심각한 시대였던지라 겉치레를 하기 위해 딴에는 심각한 척을 하기도 했지만 실제 관심은 연애나 길거리의 사람들 삶에 있었다. 학교 가다 버스에서 내려 길거리 노점을 구경하고 집에 오다 시장 봐서 술 마시는 삶이 가장 행복했다.
어떤 일에서건 배우고 남길 점이 있듯이 그 시기에도 성과는 있었다. 잠깐 학생운동을 경험하면서 조직이 인간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고, 91년 5월의 경험은 역시나 나의 ‘그릇’이 아주 작다는 점을 확신시켰다. 이렇게 재미없는 성장기 얘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그런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내 자신을 아주 ‘작은 인간’으로 여겼고 주변의 환경도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즉 내게는 나라는 ‘자아’가 없었다. 껍데기만 있지 영혼이 없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당시의 학문이라는 것도 비슷했다. 학교에서건 세미나에서건 외국의 낯선 개념과 어려운 이론을 다루었다. 대학교의 정치학 수업은 서구의 민주주의 이론과 서양철학, 정당론을 가르쳤고, 사회과학 세미나 역시 맑스-레닌주의와 러시아 혁명사, 사회구성체론 등을 다뤘다. 당시의 지식인 사회는 이 땅의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것을 지나간 시대의 낡은 유물로만 봤다. 우리 사회는 너무나 작고 약해서 외부의 강한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라잡아야 했다. 그러니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학문의 내용은 낯선 언어로 채워졌고, 그런 어려운 언어는 언제나 나를 주눅들게 했다.
그렇게 보면 나와 한국의 학문 모두가 외부의 것에 갇힌 존재였다. 나는 자아를 찾지 못하고 헤매었고 한국의 학문도 자기 기준을 잃고 갈팡질팡했다. 자신 안에서 성장의 기운을 찾지 못하고 외부의 것을 따라잡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살만 찌우는 식용가축처럼, 나는 길들여졌고 한국도 그렇게 성장했다. 그 사육의 속도는 너무 빨라 갈매기 조나단처럼 다른 삶을 꿈꾸기 힘들었다.
그러다 우연히 나는 또 다른 외부를 접하게 되었다. 그것은 대학교 앞의 사회과학서점에서 우연히 집어든 아나키즘에 관한 책이었다. 폴 애브리치(Paul Avrich)라는 역사가가 쓴 『러시아 아나키스트 1905』와 『러시아 아나키스트 1917』이라는 두 권의 책은 검은 표지에 권위와 자본주의를 갈아엎는 농부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그 투박함과 생동감에 나는 매력을 느꼈다. 그때는 아나키즘을 이념이라기보다 ‘부정의 철학’으로 받아들였다. 한편에서는 새롭고 낯선 것에 대한 관심 때문에, 다른 한편에서는 기존의 것들을 부정하기 위한 철학으로 그때부터 아나키즘에 관심을 뒀다.
그 즈음인 1991년 3월, 낙동강에 페놀이라는 오염물질이 유출된 사건이 있었다. 그런 생태위기를 목격하고 ‘한살림선언’을 접하면서 ‘녹색사상’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그것은 우리 현실 속에서 고민의 출발점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낯선 언어가 주는 구토감에 우리 언어를 찾고 싶었다. 그러면서 동학이라는 걸 처음 접했고 그 때는 사상보다 종교적인 관심이 약간 앞섰다. 내 속에 억압된 감정이 가끔은 민족적인 감정이나 일본에 대한 적개심으로 터지곤 했는데, 동학은 그런 것들을 담을 수 있는 그릇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공부를 하겠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갑자기 정치학에 대한 관심이 생겨 대학원을 가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평생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 선택은 한편으로 군대를 연기하기 위한 방편이었고 다른 한편으론 지금껏 하지 않았던 공부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아나키즘과 녹색사상에서 잠깐 내 모습을 비춰볼 수 있었지만, 또다시 세상의 속도에 맞춰 끊임없이 선택과 선택을 거듭해야 했던 나는 왠지 모를 미련을 느꼈다.
하지만 대학원에서 접한 공부는 힘들었을 뿐 성취감을 느낄 수 없었다. 수업시간에 읽어야 할 글들 대부분이 영어였고,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번역을 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책을 읽으면서 내 머리에 떠오르는 구상보다 어떻게 하면 저자의 생각을 잘 쫓아갈 것인가가 공부의 목적이었다. 영어책을 읽는 능력이 생긴 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 때 읽었던 책들은 지금 머리 속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대학원 시절의 갑갑함을 덜어준 것은 학교밖 ‘한국정치연구회’라는 연구단체였다. 당시에는 이 단체가 진보적 학술운동을 추구했고 다양한 주제의 세미나팀에 대학원생들이 모여 함께 글을 읽고 토론을 벌였다. 공부도 공부지만 공부를 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고민이 뒤섞였고 세미나 시간보다 훨씬 더 긴 뒷풀이 시간이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이 이 사회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지식인은 어떤 존재인지, 술잔을 타고 흐르는 이야기들이 새벽하늘을 밝히기 일쑤였다.
내가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칭찬과 격려를 받았던 곳도 그곳이었다. 내가 실제로 공부를 잘 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내 속의 많은 고민들을 쏟아내면서 선배들에게 조금씩 인정을 받았던 것 같다(어쩌면 뒷풀이 장소를 떠나지 않는 체력이 인정의 이유였는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그 곳은 생애 최초로 ‘사회적 인정’을 받았던 공간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자아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무조건 외부의 조건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내 자신을 받아들이면서 어렴풋했던 내 자아가 조금씩 뿌연 안개를 걷고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국정치연구회에서 많은 책들을 읽었지만 석사학위 논문을 써야할 즈음부터 하버마스(J. Habermas)라는 독일 사상가의 여러 책들을 한 권씩 읽었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읽으려 노력했다. 외부의 것이라는 근본적인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곳에서는 공부를 하면서 ‘비판적 읽기’와 ‘거리두기’를 익힐 수 있었다.
그런 만남과 도움이 있었기에 나는 ‘허버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의 모더니티(modernity) 비판’이라는 석사논문을 쓸 수 있었다. 나는 모두가 쥐 죽은 듯 숨죽이고 사는 세상에서도 사회가 바뀔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 가능성을 추적하다 찾아간 시기가 서구의 68혁명이었고, 희망의 씨앗을 본 사람이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the Frankfurt School)의 1세대라 불리던 마르쿠제였다. 마르쿠제를 연구하는 것은 맑스주의를 껄끄러워했고 특정한 계급이 사회변화를 주도해야 한다는 논리를 거부하던 내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다.
마르쿠제에 관한 기존의 시각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고 나와 외부 사이에 놓인 깊은 골을 좁히고 싶었기에, 나는 ‘모더니티의 이중화’라는 나름의 방법을 개발했다. 서로 대립한다고 여겨지던 사회경제적 모더니티와 미적 모더니티의 긴장과 대립을 마르쿠제가 해소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 긴장을 ‘의도적으로’ 유지한다고 나는 봤다. 현실과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미적 모더니티가 유토피아적 지향으로 존재하면서 현실을 이끌고, 사회경제적 모더니티의 지향은 현재의 잠재력에 기초해 갈등을 평화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과정, 그것을 나는 모더니티의 이중화 전략이라 정의했다.
기존에 없던 마르쿠제 해석이었기에 나는 마르쿠제의 글들을 꼼꼼하게 읽고 내 구상대로 해체해서 사회경제적 모더니티와 미적 모더니티에 관한 두 가지 내용들로 재구성했다(나는 마르쿠제의 ‘입을 빌어’ 내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전략은 나름대로 성공을 거뒀고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내 나름의 방법을 개발했다는 자신감을 가졌고, 그래서인지 논문 곳곳에 자리잡은 오타(제본한 뒤에 논문을 읽으면 그 전엔 절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던 한 무더기의 오타를 발견하게 된다)에도 나는 아직까지 석사논문에 대한 불만이 그다지 없다.
그때 나는 최초로 ‘공부가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고, 책을 통해 저자와 만나는 즐거움을 누렸다. 모더니티가 사회를 완전히 삼켜버리지 않은 제 3세계의 잠재력을 인정하고 존중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68혁명은 서구와 비서구를 가르는 문명이라는 위선을 깨려는 서구 사회 내부의 시도였던 것 같다.
머리 속을 떠다니던 고민을 활자로 새기면서 나는 최초로 자아와 대면했고 그와 대화하는 즐거운 경험을 했다(가끔은 거울을 보며 대화를 나눌 정도로). 나는 내 속의 억압성이나 상처와 대화하면서 조금씩 그것을 깨달음으로 바꿀 수 있었다. 그리고 논문을 쓰면서 다른 사상가의 고민을 통해 나와 외부의 경계를 넘나드는 재미를 조금씩 느꼈다 더구나 기존 연구를 따르지 않고 내 식대로 하나의 사상을 재구성하는 것, 남이 가지 않았던 길을 가며 현재를 조망할 수 있는 관점을 드러내는 것, 그것을 다른 사람과 토론하고 인정을 받는 것, 이런 경험들은 내가 공부를 그만둘 수 없는 이유들을 하나씩 만들었다.
2. 풀뿌리운동과의 만남과 성장하는 삶
석사학위를 받고 군대를 다녀온 뒤에는 집안 형편상 마음 편히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취직을 할까 고민도 했지만 왠지 석사논문을 썼을 때의 성취감과 자신감이 자꾸 떠올랐다. 내가 그런 인정을 다른 곳에서도 받을 수 있을까? 그래서 다시 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짜여진 학문의 틀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게 망설여졌지만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사는 직장생활보다 궁핍하고 힘들어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처음에는 제도화된 학문 속에서도 변화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거라 믿음을 가졌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에 대한 믿음과 학문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언제나처럼 그 원인을 나 밖의 것에서만 찾았던 것 같다. 희망은 내 머리 속 이론으로만 존재했고, 가슴은 사람들과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미련과 약간의 호기심으로 무리하게 시작했던 박사과정 생활은 냉소와 무관심으로 채워졌다. 아나키즘과 비판이론가들의 사상은 그런 냉소를 정당화하는 무기력한 이념으로 변해갔다.
그래서 그 때는 학과공부보다 그냥 도서관에서 아무 책이나 빌려서 읽는 게 즐거웠다. 쇼핑하듯이 서가를 빙빙 돌며 책을 구경하다가 눈에 띄는 제목의 책을 빌려서 읽었다. 공부하는 사람들의 욕심 중 제일 큰 것이 책 욕심이지만 여건상 책을 살 여유가 없었기에 나는 매번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어야 했다. 대학원 등록금도 비싼데 책이라도 왕창 신청해서 읽어야지 생각했고, 책을 가지지 못하는 욕심은 책을 정리해서 기록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예전에는 책을 사서 읽고 독서카드를 만들었지만 그때는 보고난 책을 도서관에 반납해야하니 컴퓨터에 책의 주요 내용과 그것에 대한 내 생각을 일일이 타이핑했다. 필요한 책을 그때마다 볼 수 없어 불편했고 읽은 내용을 일일이 컴퓨터에 치는 게 참으로 고생스러웠다. 하지만 그렇게 정리된 책이 열 권, 백 권, 이백 권을 넘으면서 그 정리들은 내게 큰 재산이 되었다. 불편함은 어느덧 공부하는 ‘습관’이 되었고 ‘공부하는 사람은 어떠어떠해야 한다’라는 고정관념에서도 벗어나게 되었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으며 정신은 자유로워졌지만 내 몸은 여전히 무거웠다. 한국사회를 예리하게 분석한 책들이 거의 없다보니 사유의 힘은 지금 이곳보다 저기 먼 곳이나 이전 시대를 헤맸다. 그러다 2001년도 여름, 우연히 찾아간 풀뿌리주민활동가 워크샵은 내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다소 투박하지만 체험으로 다져진 활동가들의 단단한 이야기가 내 머릿속 고대 아테네 광장을 밀어내고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책에서 읽던 내용들을 운동과정에서 이미 몸으로 익혀 온 활동가들의 모습을 보며 책만이 아니라 현실 속에도 길이 존재하고 있다는 지극히 단순한 진리를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 때부터 소심함과 낯가림을 무릅쓰고 지역의 풀뿌리 단체들을 돌아다니며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러면서 나는 희망의 구체적인 상을 그릴 수 있었다. 만일 한국의 중앙정치와 권력, 그것이 왜곡해 온 민주주의에 조그만 기대라도 품고 있었다면, 나는 그런 희망을 그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희망을 포기한 상태였기에 새로운 희망의 가능성을 덥석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니 삶은 참으로 묘하다.
더구나 지역을 돌며 보고 들었던 활동가들의 모습은 내가 고민 없이 습관적으로 읽어 온 책의 내용과 무관하지 않았다. 현실에 없는 것이라 여겼던 판타지가 현실 속에서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미국의 사상가 아이리스 영(Irish Young)이 얘기했던 소통민주주의(communicative democracy)는 생활협동조합 활동가의 삶으로 구현되었고, 하버마스(J. Habermas)의 공론장은 평범한 사람들이 사랑방과 거리에서 나누는 수다와 생활로 드러났다.
지금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동네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세운 철암과 부산 반송, 대전의 도서관은 책을 보는 공간을 넘어 지역공동체의 소통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광주, 울산, 대전의 참여예산제는 시민들이 예산이라는 전문적인 영역에서도 자기 몫을 다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부안에서는 유채꽃으로 바이오디젤을 만들고 햇빛발전소로 전력을 생산하는 에너지농업이 활성화되고 있다. 전북 진안은 귀농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한 보금자리가 되고 있고, 소비자생활협동조합과 여러 사회적 기업들은 도시와 농촌을 잇는 대안적인 유통망을 만들어가고 있다. 안성과 원주의 의료생활협동조합들은 지역공동체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고, 대전한밭레츠는 지역화폐를 활성화시키며 관계의 그물망을 이어가고 있다. 나조차도 불가능한 꿈이라 여겼던 아나키즘의 공동체가 이미 우리 현실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 희망은 이론이 아니라 현실 속에 있었다. 다만 그것의 의미를 몰랐기에 내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활동가들과 시민들의 말과 행위를 볼 때마다 내 머리 속에는 여러 사상가들과 그들의 핵심 개념들이 떠올랐다. 그런 희망의 힘과 직업병 덕택에 나는 손을 놓고 있던, 내게 의미없다 여기며 차일피일 미루던 박사논문을 쓰리라 마음을 먹었다. ‘풀뿌리 공론장에 대한 이론적 고찰’이라는 박사학위논문은 왜 풀뿌리가 희망인지를 설득하기 위해 태어났다. 여러 활동가들이 몸소 보여준 그 희망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나는 희망의 근거를 만들 뿐 아니라 그 희망을 더 부풀리기 위한 내 나름의 방법을 찾고 싶었다. 풀뿌리운동을 사회운동의 한 흐름이 아니라 조금 더 근본적인 사상으로 발전시키고 싶었고, 그것이 연구자로서의 내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과정이 마냥 즐거웠던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운동을 펼치는 사람들 앞에서 학문이라는 건 공허하고 얄팍할 뿐 아니라 때때로 경험지(經驗知)를 무시하는 오만한 것이었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이 왜 현장에 오냐는 질문을 계속 들어야 했고 낯선 시선을 견뎌야 했다. 무정부주의라는 과격한 말로 번역되는 아나키즘을 입에 담기조차 어려웠다(지금은 조금 달라졌지만). 더구나 풀뿌리운동은 아이와 가족, 일상생활을 중심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그런 일상을 갖추지 못한 비혼(非婚), 스스로 생산하지 못하는 존재인 지식인은 현장에 다가서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었다. 머리로는 이해를 해도 마음을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나는 풀뿌리 현장을 떠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본 희망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그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계속 고민했다. 처음에는 풀뿌리운동의 활동을 기록하는 사람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참여예산제도처럼 풀뿌리운동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제공하고 지원하는 연구자로 역할을 확대시켜 갔다.
그 과정에서 부딪친 또 다른 어려움은 현장에서 느낀 고민을 논문이라는 틀로 정리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풀뿌리민주주의나 풀뿌리운동에 주목하거나 그 의미를 밝히려는 연구는 거의 없고, 이는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기존의 사회운동이나 시민운동, 사회주의운동, 민족주의운동을 논문의 틀에 담은 연구들은 있었지만 풀뿌리운동은 그렇지 않았다. 더구나 내가 배운 학문이란 유명한 인물이나 영웅, 사상가를 따라잡는 것이지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위대함을 깨닫고 공적인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선거 때 표를 던지는 유권자로서나 가치를 인정받을 뿐 그 자신의 고유성을 드러내지 못했고, 연구자들도 그 사람들에게 주목하지 않았다. 간혹 한나 아렌트(H. Arendt)나 니체(F. Nietzsche)를 만나고 나중에는 함석헌, 장일순같은 뛰어난 사상가를 만나기도 했지만 각기 다른 삶의 궤적을 그린 사람들을 하나의 논문에 담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쓴 방식은 풀뿌리운동의 고민을 정리한 뒤에 그런 고민과 연관되거나 고민의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상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박사(博士)란 것이 넓은 시야보다 좁은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의견을 요구받고 풀뿌리운동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운동의 의미와 사상을 밝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작업은 쉽지 않았다. 결국 아렌트와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 ‘풀뿌리공론장’이라는 개념을 재구성하는 것으로 박사논문의 목표를 수정했다. 서양철학을 기본논리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 난처했지만 현장의 고민을 중심으로 그것을 재배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 목표를 제대로 충족시켰는지는 의문이지만 논문의 마지막 장에는 경기도 과천시의 풀뿌리운동 사례를 대입해서 현실과의 접점을 최대한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렇지만 박사논문은 아직도 치수가 어긋난 옷을 입은 사람처럼 자연스럽지 않은 느낌을 준다. 풀뿌리활동가들에게 바치는 논문이었음에도 정작 활동가들은 서양사상의 개념들로 구성된 내용을 어려워했다. 여러 사상가들의 생각을 충분히 녹여내지 못한 나의 부족한 내공의 탓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한계를 느꼈다. 내 목소리로 얘기하려면 논문이라는 낡은 틀에서 벗어나야 했다.
사실 애시당초 학문이 현실에 대한 관심과 고민에서 시작했음에도 지금 우리는 책을 책으로만 대한다. 과거의 사상가들이 미래의 우리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책을 기록한 것은 아닐 터이니 우리는 과거의 지혜를 현재에 유추할 뿐이다. 그러니 과거의 것에서 정답을 찾을 수는 없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정답이란 원래 불가능한 것이다. 결국 현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연구는 이미 지나간 과거를 낭만적으로 회상하거나 허황된 미래를 예측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논문을 쓴다는 핑계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있는 동안에도 현실은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꾸준히 관심을 기울이며 소통하지 않으면 내가 의지해야 할 현실의 근거들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연구자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고 먼 길을 가야 한다. 왜냐하면 활동과 연구를 병행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활동가는 자신이 맡은 과제를 성공시키는 과정과 그 결과로 평가를 받지만 연구자는 활동만이 아니라 그 활동을 기록하고 보편적인 언어로 해석하는 과제를 맡는다. 보편적인 언어로 해석하려면 그와 관련된 다른 연구나 책을 공부해야 하고 그에 맞게 활동을 다시 정리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그 둘을 모두 잘 하면 좋겠지만 하다 보면 어느 한 곳에 구멍이 생기기 마련이다.
한 때는 그 짐이 버거워 추상의 세계로 도피하기도 했지만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독일의 작가 미카엘 엔데(M. Ende)의 소설 『모모』를 떠올렸다. 모모의 가장 뛰어난 능력은 사람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서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시간도둑들은 그 지극히 평범한 능력을 가장 경계했고 결국 모모에게 지고 만다. 그런 모모를 생각하며 내 마음도 조금 편해졌다. 그래, 내가 얘기를 하고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냥 듣고 얘기를 나누는 것으로 만족하자. 굳이 내가 답을 내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스스로 답을 찾아갈 수 있다고 믿자. 그러자 그토록 부족했던 시간이 아주 넉넉하게 채워졌고 내 삶을 돌아볼 여유도 생겼다.
이런 믿음을 얻기까지 4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허나 늦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금이라도 내 삶을 성장시키며 살게 되었으니 기쁠 뿐이다. 다만 과제는 남은 시간 동안 이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밀고 나가는 일이고 더욱더 기름지게 거름을 뿌리는 일이다. 믿고 바라는 것만큼 내 삶이 그렇게 움직이고, 그런 실천이 더 나은 공부로 이어지길 바랄 뿐이다.
3. 서로 보살피는 삶과 지식인으로서 뿌리내리기
나와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려 하는 것은 외부의 사상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외부의 것들은 우리 내부의 차이이기도 하고 우리 모습을 드러내는 거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외부는 중요하다.
다만 지금 우리는 거울의 매혹과 아름다움에 빠져 자기 모습을 잊고 싶어 하기 때문에 문제이다. 『백설공주』의 왕비처럼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는 거울의 인정을 받으려고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버리고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어떤 특별한 모습으로만 드러나길 원한다. 우리는 자신을 버리고 ‘아침형 인간’, ‘몸짱’, ‘짐승남’같은 틀로 자신을 보이고 싶어한다. 하지만 삶이란 어떤가?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하고, 선하고 악한 것이 뒤엉켜 있다. 피카소의 그림이 보여주듯이 그 모습이란 여러 단면들이 만들어낸 기이한 형태이고 남들이 보면 괴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런 조작된 정체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모습을 대면하지 못한다면 내 삶을 살기가 어렵다. 시간도둑들에게 빼앗긴 시간을 되찾고 우리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좋은 삶은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특히 전통적인 생활방식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일하는 것과 즐기는 것이 분리되지 않던 시절, 공동체는 좋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었다. 국가의 복지가 아니라 공동체의 생활이 서로 보살피는 삶을 가능하게 했다. 일터와 삶터가 분리되지 않고 안과 밖이 경계를 이루면서도 다양한 삶들이 자연스레 뒤섞였다. 가령 옛날 집집마다 있던 마당은 개인적인 공간이면서 동시에 집 안과 집 밖을 연결하는 공간, 가정과 일터를 연결하는 공간, 가족과 마을을 연결하는 공간이었다. 그런 다양한 공간들을 통해 사람들의 삶은 자연스럽게 뒤섞일 수 있었다.
물론 과거의 공동체를 무조건 이상적으로 그리고 싶지는 않다. 나는 자연의 생명이 순환하듯이, 인간사회도 그렇게 순환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조금 더 자유롭고 싶은 것은 도시로, 조금 더 뿌리를 내리고 싶은 것은 농촌으로 가야 옳다. 다만 그 둘의 균형이 맞아야 순환이 계속될 수 있는데 지금 우리 사회는 균형이 무너져 있다. 무조건 도시가 좋고 편한 게 옳고 돈의 가치로 환산되는 것만이 인정을 받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연스런 순환의 고리가 끊어져서 삶이 외부의 조건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불안하니까 우리는 자꾸 국가나 시장에 매달린다. 정부가 나서서 무언가를 해주길 바라고 기업이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길 원한다. 시장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필요하고, 국가가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시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허나 그런 주장은 공허한 바람이고, 우리 현실에서 뼈저리게 느낄 수 있듯이 국가와 시장은 한통속이다. 그들은 풀뿌리들의 삶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국가에 집착할까? 좋은 정치인, 좋은 정당이 우리의 삶을 지켜줄 수 있다고 진짜로 믿는 것일까? 진보적인 사회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은 유럽의 복지국가를 많이 얘기하지만 나는 복지국가가 진보적이라고 믿지 않는다. 식민지를 가혹하게 착취했던 제국주의 없이 유럽의 복지국가가 가능하기나 했을까?
역사가 하워드 진(Howard Zinn)이나 조셉 폰타나(Josep Fontana)의 책을 조금이라도 읽어보면, 서구문명이란 착취의 흔적일 뿐임을 알 수 있다. 소위 선진국들은 식민지의 민중들을 미개인이나 야만인으로 몰아서 그들의 영혼을 빼앗고 하얀 가면을 씌웠다. 그들은 땅과 자원을 빼앗을 뿐 아니라 생활의 기반 자체를 파괴했다. 우리가 먹는 커피, 초콜릿, 설탕 등 일상 곳곳에 제국주의 지배의 역사가 숨어 있다. 여름철 폭우와 겨울철 폭설, 황사와 사막화 등 기후변화에도 그 지배의 흔적이 숨어 있다. 그리고 지금도 선진국들은 전 세계의 가난한 아이들과 여성들에게서 많은 자원과 생명을 빼앗고 있다. 그런 역사와 현실을 무시하고 우리가 그들의 길을 따라야 할까? 설령 우리가 그 길에 오를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러기 위해 또 다른 타자를 희생양으로 삼고 그들의 풀뿌리 공동체를 짓밟아야 할텐데 우리의 삶이 행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식민지는 우리에게 지나간 과거가 아니다. 과거에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사람들의 가슴에는 남모를 상처가 새겨져 있다. 흔히 이를 정신적 상처인 트라우마라 표현하지만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식민지의 상처는 심리적인 것일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심리학자 파농(F. Fanon)이 말했듯이, 식민지 사람들은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 저항하면 어떤 일을 당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고만고만한 주변의 사람들을 괴롭히며 대리만족을 얻고 지배질서를 대물림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국가를 버리라는 건 자신을 버리라는 것과 똑같다.
더구나 식민지의 경험은 우리에게 민족과 국가의 일치를 가져왔다. 공동체의 경계가 민족, 국가와 겹쳐지면서 사람들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동일시했다. ‘민족=국가’라는 공식이 자연스레 자리를 잡았다. 국사를 배우고 군대를 다녀오고 스포츠경기에 열광하고 국민가수, 국민드라마를 보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국민임을 깨닫는다. 이런 경험의 공식을 깨지 못한다면 우리는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내게 아나키즘은 이런 지배의 역사를 깨고 풀뿌리들의 목소리를 드러내며 식민지를 벗어날 중요한 방편이다. 오쿠다 히데오가 『남쪽으로 튀어』에서 말했듯이, 아나키즘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이념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도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념은 과거가 누적되어 현재로 흘러나온 흔적이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과 1945년 해방까지 일본과 한반도, 중국대륙을 넘나들던 사상을 아나키즘만으로 정리하고 싶지는 않고 다만 그 실타래를 풀기 위해 아나키즘이라는 하나의 실을 계속 따라가고 있다. 아나키즘이라는 이념은 아나키스트들이 추구했던 그 다양한 삶의 단면들일 뿐이고, 내게 그것의 이름은 대동사상이기도 하고 풀뿌리이기도 하다. 도를 도라고 부르면 도가 아니듯, 아나키즘도 하나로 굳어지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꽃을 피웠으리라 믿는다.
설령 그 과정에서 이념의 흔적을 찾더라도 그것이 자동적으로 세상을 바꾸리라 믿지 않는다. 삶으로 녹아들지 못한 이념은 꽃을 피울 수 없기 때문이다. 가정과 학교, 마을, 공장, 구청, 시청, 국회, 청와대에서 구체적인 삶으로 자기를 드러내지 못하는 이념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무한경쟁의 규칙에 쫓겨 우정도, 사랑도 모두 뒤로 미루는 사회에서 이념은 힘을 가질 수 없다. 이념이 꽃을 피우려면 국가나 자본이 시키는 일을 거부하면서도 우리가 생활하고 삶을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옛날 마을 공동체에서는 과부나 고아, 장애인도 굶어죽지 않았다. 간혹 그렇게 죽는 사람이 있으면 그 마을 전체가 비난을 받았다. 지금은 옆집에서 사람이 죽어 썩어가도 아무런 비난을 받지 않지만 그 때는 그렇지 않았다. 왜일까? 지금 우리는 서로 아무 것도 나누지 않고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아 윤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환대의 사상가 피터 모린(P. Maurin)의 “아무도 부유해지려고 하지 않으면 모두가 부유해질 것”이고 “모두가 가난해지려고 하면 아무도 가난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간단한 윤리조차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앞으로 하고 싶은 공부는 이념을 윤리로 다듬고 내 자신도 그렇게 사는 것이다.
평생 공부를 계속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받는다면 그러리라고 대답할 듯하다. 어차피 공부란 것이 책만 읽는 게 아니라 일상을 사는 것이라 생각하면 평범한 일상에도 가르침과 깨달음은 숨어 있다. 숨은 진리를 찾는 건 퍼즐을 맞추는 것만큼 흥미로운 일이다. 그리고 내가 얻은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과정도 아주 즐겁다. 그동안 떠도는 지식인으로 살았다면 이제는 모모처럼 마을에서 살고 싶다.
그리고 나이를 먹으면 수도권을 벗어나 지방에 내려가 지역의 고유한 지식을 몸에 익히고 싶다. 지금 한국의 지식사회는 서구중심일 뿐 아니라 서울 중심이다. 서울로 수입된 학문이 지방으로 확산된다. 서울에서 인정을 받아야 소위 ‘전국구’로 이름을 내걸 수 있으니 지식인들도 서울로 입성하려 발버둥친다. 그래서 나는 수도권을 떠나고 싶다. 서울을 떠나야 내 속의 생각과 감정의 힘이 더 강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 내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경험시켜주는 우리 각시와 아이도 조금은 나은 환경에서 성장하리라 믿는다. 우리 가족이 도시의 무미건조하고 단절된 환경 속에서 성장하며 그런 감성과 생각을 익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쥔 것을 놓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쥘 수 없다는 점을 가족과 함께 깨닫고 나누며 살고 싶다. 내가 평생 해온 공부는 그렇게 나를 비추며 나를 이끌어 줄 것이라 생각한다. 작고 사소하지만 깊게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