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시대에도 여행은 가고 싶은데 탄소배출량은 걱정되고. 그럼 탄소배출량이 낮은 기차로 떠나는 여행은 어떨까. 캐리어를 가득 채운 짐과 자동차는 놓아두고 배낭 하나 가볍게 메고 떠나는 여행. 빠른 고속열차보다는 느린 무궁화호를 타고, 고속철은 서지 않는 작은 역에 내려 두 발로 걸어 다니며 자연과 지역을 경험하는 저탄소 여행. 내 건강에도, 지역에도, 지구에도 나쁘지 않은 여행. 지역을 소비하지 않고 알아가는 공감여행.
2028년이면 무궁화호가 사라질 예정이고, 그러면 작은 역의 운명도, 무궁화호가 서던 지역의 운명도 어찌될지 모른다. 사라지는 것들을 당장 지켜낼 방법은 없지만 지금보다 조금 더 애틋하게 사랑하면 뭔가 방법도 생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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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텀블러에 물만 챙겨 집을 나섰다. 오늘의 목적지인 용궁역의 위치는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용궁면의 한자어는 실제로도 용궁(龍宮)인데, 왜 바다없는 육지에 용궁이란 이름이 붙었을까? 
이곳의 지형과 관련된 설화가 있다. 용궁면 남쪽에 낙동강이 합류하는 연못인 용담소(龍潭沼)가 있는데, 그 깊이가 깊고 바닥이 동굴로 이어져 용이 산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용담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비슷한 지형의 용두소(龍頭沼)가 있어 두 마리 용이 부부가 되어 이 지역의 수호신이 되었다고 한다. 용궁면이라는 지명은 바다 용왕과는 연관이 없지만 그런 낙원을 만들자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용이 지키는 지역은 어떤 기운과 풍경을 품고 있을까?
용궁역은 경부선으로 바로 갈 수 없고 경부선 김천역에서 경북선 기차로 갈아타야 한다. 김천역에서 용궁역을 오가는 기차는 하루에 다섯 번(상하행 합치면 열 번), 그러니 환승시간을 잘 맞춰야 한다. 기차 시간을 놓쳐 김천역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면 역에서 5분 거리인 ‘시인의 거리’를 돌아봐도 좋다. 시인의 거리는 조금 오르막이지만 조용한 동네 사이로 지역 시인들의 작품이 낮은 담벼락에 그려져 있어 천천히 둘러보기에 좋다.

아침에 조금 서둘러 9시 14분에 김천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면 용궁역에서 오후 3시 4분이나 5시 39분에 김천역으로 돌아오는 열차를 탈 수 있어 여유있게 용궁면을 둘러볼 수 있다.
                    김천역 경북선 시간표
 
이렇게 기다리면서까지 꼭 기차를 타야 할까? 기차의 탄소배출량이 자동차나 비행기보다 훨씬 적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더구나 기차는 공공교통수단으로 아동이나 노인, 장애인 등 교통약자의 이동권을 보장하고(약자의 기본권 보장은 기후위기 대응에 매우 중요하다), 지역을 연결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조금 기다리더라도 기차가 활성화되어야 우리는 자동차 중심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기다리는 시간이 꼭 낭비하는 시간일까? 연인을 기다리는 시간처럼 기차를 기다리는 시간은 설렌다. 찾아갈 곳에 관해 생각하고 그곳의 정보를 찾으며 아직 만나지 못한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다. 운전에 집중해야 하는 자동차와 달리 우리는 기차에서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풍경을 즐길 수 있다. 그조차 싫으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멍때릴 수도 있고.

김천역에서 두 량으로 구성된 작은 무궁화 기차를 타고 한 시간 십이분 정도 가면 용궁역에 도착한다. 용궁역은 예천군에 속하지만 문경시와 바짝 붙어 있고 점촌역에서 기차로 6분밖에 안 걸린다(그래서 점촌을 오가는 버스도 다닌다). 고속철도에선 볼 수 없는,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풍경들을 보며 이동하다보면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현재 용궁역은 무인역으로 역무원이 없고, 역 내부는 별주부전을 묘사한 인형들이 자동으로 움직이는 작은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다. 익숙한 별주부전도 좋지만 용궁면의 특징을 살렸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은 있지만 잠깐 둘러볼만은 하다.
              용궁역 별주부전 전시관 
용궁역 전경 
 
역을 나서면 왼편에 귀상어, 물메기 등을 묘사한 12해신의 동상이 있고 작은 카페용궁역이 있다. 걸어서 여행하는 사람 입장에서 크게 매력적인 시설은 아니지만 다 걷고 난 뒤에 차 한잔 하며 열차를 기다리기엔 나쁘지 않다.
역을 등 뒤로 하고 나서면 용궁척화비와 만파루로 가는 표지판이 보인다. 용궁척화비는 대원군이 전국 곳곳에 세웠던 척화비이고, 만파루는 1988년에 복원된 누각인데 독립운동의 기운을 담은 곳이라고 한다. 만파루 옆엔 예천독립운동기념비도 있어 3.1운동이 얼마나 전국적으로 벌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저항이 넓어질수록 탄압은 어렵고 민심은 깊어진다.
만파루 전경
 
만파루 누각에 오르면 용궁면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데, 면중심지를 낮은 산들이 쭉 둘러싸고 있어 눈이 시원해진다. 하나둘 높은 건물이 채워가는 대도시와 달리 조금씩 쇠락해가는 지역의 풍경에 안타까움을 느낄 수도 있고, 그럼에도 여전히 무너지지 않고 있고 지키고 있는 기운을 느낄 수도 있다. 낡은 것이 버릴 것은 아니듯이 쓰임새는 가치를 반영하고, 기후위기 시대는 그 가치의 전환을 요구한다.
만파루를 내려오면 뚜벅이에겐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 첫째는 면중심지를 꼼꼼히 돌아보는 것. 면에서는 2017년에 복원된, 용궁면의 유래를 설명해주는 용궁현청, 벽화가 그려진 용궁시장 등을 둘러볼 수 있다. 둘째는 사진찍는 장소로 알려진 부부송을 돌아보는 것, 셋째는 열찻길을 가로질러 황색 꽃을 피운다는 오백년된 팽나무 황목근을 둘러보는 것이다. 체력이 있고 이동이 편하고 시간이 넉넉하다면 세 곳을 다 돌아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부부송보다는 황목근을 추천한다. 왜냐하면 부부송 주위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듯하고 용궁교까지 가는 길이 찻길이라 걷기에 편하지 않다. 그래도 출사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 가보고 싶다면 용궁교를 지나 가볍게 산책할 수 있는 강변길을 따라 걸어들어가면 된다. 주의할 점으로 면 내에는 공용화장실에 여럿 있는데 외곽으로 나가면 화장실이 없으니 용무는 미리 해결하고 이동하면 좋다.
용궁현청 2층에서 내려다본 전경 
부부송 전경 
황목근으로 건너가는 철길
황목근과 용궁향교 가는 길 
황목근 전경 
 
면 내를 찬찬히 돌아볼 때는 그냥 둘러봐도 되지만 나중에 밥 먹을 식당을 잘 물색하면 좋다. 부지런히 눈품을 팔면 취향에 맞는 식당을 찾을 수 있다. 용궁면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음식은 순대국과 오징어불고기이다. 대를 이어 운영하는 순대국집들이 여럿 있고, 내륙이니만큼 배에서 잡자 마자 급냉한 오징어를 가져와 연탄불에 구운 오징어도 판다.  그 외에도 곳곳에 오래된 식당들이 있으니 천천히 둘러보며 밥 먹을 곳을 정하는 것도 즐거움이다.
천연기념물 제 400호로 지정된 팽나무 황목근(黃木根)으로 가는 길은 만파루에서 내려와 왼쪽으로 조금 가면 철길을 지나는 길이 오른편에 보인다. <백종원의 3대천왕>에 출연해서 유명해진 단골식당 별관 바로 옆인데, 철길을 건너면 걷는 길이 조성되어 있다. 겹겹이 겹쳐진 산세가 시야에 확 들어오고 눈을 가리는 곳이 없어 시원한 바람을 맞을 수 있다. 길을 따라 나무가 늘어서 있지만 땡볕이라면 양산을 챙길 것을 권한다. 
나무데크로 조성된 길에서 황목근이라는 표지판을 따라 오른쪽으로 빠지면 작은 동네가 나오고 동네를 통과해서 들판 사이로 조금 더 걸어가면 황목근이 나온다. 황목근은 500년 이상 된 팽나무로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라 당산제를 지내는 비석이 앞에 있다. 마을 재산이던 토지가 황목근으로 등기이전되어 세금을 납부하는 나무라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사람을 압도하는 풍광이나 사람이 몰리는 관광상품은 아니지만 한가로이 바람을 맞으며 생각에 잠기기 좋은 곳이다. 차를 타고 이동하면 더 많은 곳을 돌아볼 수 있겠지만 뚜벅이의 반경은 이정도가 딱 적당하다.
면도 둘러보고 황목근도 다녀오면 식사에 막걸리 곁들여 한잔 하기 좋은 시간이다. 아니면 미리 막걸리 한잔 하고 살짝 들뜬 기분에 걸어도 좋다. 지역음식에 곁들여 가볍게 한잔 하며 즐기는 게 기차여행의 즐가움 아닐까. 그러다보면 어느덧 돌아갈 시간이다. 우리 삶처럼 올 때의 방향과 갈 때의 방향에서 본 풍경이 다르니 돌아가는 길도 심심하지 않다. 
걷는 거리와 시간으로 따지면 용궁면은 순한 맛 정도. 가파른 오르막이 없고 걷는 거리도 그리 길지 않다. 좀 더 많이 걷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다음 여행지는 매운 맛 코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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