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未知)의 만남은 흥미롭다

 

항상 그런 마음이 있었다. 익숙한 것을 지지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점검하면 좋겠다는. 내가 믿고 지지하는 것이 몇몇 사람들의 대안이 아니라 정말 사회의 대안을 만들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마을모임을 기획한 것도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마을이라는 말이 여기저기 등장하는 것을 볼 때마다 반갑기도 했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전국이 마을로 힐링을 하려는 건가. 마을로 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을 텐데, 왜 마을만 얘기할까. 어느 순간 마을은 정부의 정책에도 등장하고 기업의 광고에도 등장하는 무채색의 개념이 되어 버렸다.

물론 마을은 자치와 자급을 가능케 하는 삶의 중요한 기반이다. 하지만 한국처럼 기본적인 인권이 존중받지 못하고 노동자와 농민의 권리가 짓밟히며 성소수자와 청소년의 정체성이 부정당하는 사회에서 마을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정도의 능력을 마을이 정말 가지고 있나? 그리고 마을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다양한 활동들이 그 마을에 걸맞게 주민들과 함께 진행되며 한국사회를 바꾸고 있나? 마을만들기, 마을공동체라는 말이 사업으로 변해 얘기되는 것을 볼 때마다 이런 물음이 생겼다.

그리고 마을의 활동이 더 작고 구체화되는 건 좋지만 그 자체로 자족적인 모임이 되어버리면 내부의 관계는 돈독해지나 점점 외부로부터 고립된다. 사실 마을이라는 말이 이런 고립감을 상쇄시켜주기 때문에 마을에만 있으면 사회에 대한 감각이 점점 둔해진다. 완전히 마비되지 않으면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내 주변엔 온통 착한 사람 뿐인데, 왜 세상은 개판인가? 내 직장은 개판인데, 마을은 왜 이리 아름답나? 이러면 사람이 정신분열증에 걸리는 거다. 세상의 모든 일이 일관될 필요는 없지만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뉘면 삶이 온전해지기 어렵다.

또한 마을의 자급능력은 점점 줄어들고 필요한 기능을 외부에서 끌어다 쓴다. 예를 들어 아파트 단지를 유지하려면 다양한 노동이 필요하다. 경비를 서고 계단을 청소하고 쓰레기를 수거하고 택배로 물건을 나르고, 주민들에게 필요한 많은 일들을 대신해주는 분들이 계시다. 그런데 이 분들은 마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나? 대부분이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하는 약자들이다. 아름다운 마을에서 이 분들의 자리는 어디일까?

이 모임을 기획한 건 이런 고민을 함께 풀면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어서였다. 매번 만나는 익숙한 사람들이 아니라 좀 낯선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면 딱히 답은 안 나와도 여러 가지 질문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도 마을운동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갑작스런 연락에 모두들 순순히(?) 응해주셨다.

이 분들을 모신 이유를 설명하다보면 이 책을 기획한 이유가 좀 드러날 것 같다. 대담에 참여하신 분들을 하파타 순으로(가나다 순의 반대로) 한분씩 소개하자면, 한채윤씨는 인권운동을 하는 우리 각시 덕분에 알게 된 분이다. 한국 최초의 동성애전문지 <버디>의 편집장을 오랫동안 맡았고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퀴어문화축제, 마포민중의 집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채윤씨는 이성애 중산층 가족 중심으로 흘러가는 마을운동에 관해 날카로운 지적을 해주실 것 같았다. 마을주민이라는 무채색의 개념은 보고 싶지 않은 사람, 보이지 않길 바라는 사람을 지워버리는 말이기도 하다. 특히 2013년에는 마포구가 “LGBT(성소수자), 우리가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라는 현수막의 게시를 허가하지 않은 사건이 있었다. 알다시피 마포구는 성미산 마을이 있는 유명한 곳이다. 그곳에서 벌어졌던 사건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박영길씨는 청주에서 오랫동안 지역사회운동에 몸을 담았다. 지역사회운동이 그러하듯 안 해본 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여러 일을 했고(운동 외의 일도) 마을만들기 운동에도 관여했다. 공부방 운동을 하던 중 생활교육공동체의 필요성을 느꼈고, 공부해서 용되자는 공룡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공룡의 활동가들은 농사짓고 카페와 도서관을 운영하고 영상기록물을 만들고 지역노동운동에 개입하며 활기찬 삶을 살고 있다. 공룡의 활동은 정형화되지 않는다. 어느 때는 농사를 지어 옥수수와 고구마를 팔더니, 어느 순간에는 밀양송전탑 싸움현장이나 유성노조 농성장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201312월에는 지역코뮌학교 동동(動同)을 세우고 노동과 인권, 경제와 노동, 글쓰기, 대안금융운동, 도시 연구 등 하나같이 쉽지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정형화된 틀에 갇히지 않는 공룡의 활동은 마찬가지로 정형화될 수 없는 지역사회의 다양한 고민들을 담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김정찬씨는 종로를 중심으로 모인 여러 단체들의 네트워크인 품애라는 단체에서 활동한다. 이번에 모인 사람들 중 나와 가장 짧은 인연을 가진 분이다. 내가 품애를 처음 접한 건 카페 토크콘서트 마빠기(마을에서 빠진 이야기)’라는 곳에 이야기손님으로 초대되면서였다. 인터넷으로 품애를 검색해서 카페를 찾아갔지만 정체(?)를 분명히 알 수 없었다. 품애는 결혼식이나 돌잔치같은 마을잔치를 착하게 준비하고 장애인과 함께 걷기도 하고 사진도 찍고 음악회도 연다. 운동처럼 보이지 않지만 마을에 필요한 일이고 그 속에 운동의 의미가 스며드는 활동들이었다. 이런저런 사업들을 많이 하는데, 새로운 사람들을 계속 만나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익숙하지 않은 영역이기에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신범씨는 죽음을 부르는 직업병으로 유명했던 원진레이온 사건으로 만들어진 원진재단이 세운 녹색병원의 노동환경건강연구소에서 일한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노동자의 건강권 확보와 작업환경 개선, 직업병 문제 해결, 환경문제 조사 등을 하는 곳이다. 경북 구미시에서 불산이 유출되었을 때도 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현장을 측정해 안전하다는 정부발표를 뒤집었다. 김신범씨가 2010년 제주인권회의에서 청소노동자들의 건강권을 발표하실 때 그를 처음 만났다. 부끄럽지만 그때서야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했고 마을 내 노동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김신범 씨는 공장 노동자들이 유해물질을 다룰 때 소비자의 건강도 안전할 수 없다며 공장 안과 밖을 연결하는데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런 관심이 마을운동과 노동운동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상철씨는 오랫동안 진보정당운동에 몸을 담아왔다. 처음 만났을 때는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처지였는데 그 뒤에 정당인으로 만났다.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서울시당에서 활동했고, 지금은 노동당 서울시당의 사무처장으로 일하고 있다. 도시계획이나 주택정책, 문화예술정책에 관심이 많고, 자료를 꾸준히 검토하고 공부하는 성실한(?) 정치가로 불린다. 그가 속한 노동당 서울시당의 논평은 날카로운 논리와 깔끔한 글솜씨로 꽤 명성을 날리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마을운동이 탈정치화되었거나 되고있다는 비판이 심심찮게 들리는데, 이 부분을 속 시원하게 짚어줄 것이라 기대했다. 그리고 지역사회운동이 정당정치와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듣고 싶었다.

권단씨는 2002년에 옥천신문 기자로 입사한 뒤 옥천에 살며 옥천농민회, 옥천살림, 옥천순환경제공동체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자치와 자급이고, 이를 가능케 할 방법으로 주민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섞이는 공론장을 꼽는다. 충청북도 옥천군은 안티조선운동으로 유명했던 곳인데, 1989년에 주민들이 직접 옥천신문사라는 지역언론사를 만들었다. <옥천신문>을 통해 지방정부 감시부터 사회적 경제 함께 만들기까지 다양한 활동들이 엮인다. 농민과 지역의 먹을거리, 주민자치에 관심이 많은 권단씨가 아침마다 페이스북에 올리는 글은 많은 사람들의 좋아요를 받으며 공감대를 확산시키고 있다. 권단씨를 통해 비수도권 농촌에서 마을을 바라보는 이야기를 좀 듣고 싶었다.

좋은 분들을 모셨지만 이 논의에 여성활동가가 함께 하지 못했음은 참 아쉬운 일이었다. 주변에 여러 여성활동가들이 있음에도 같이 얘기를 나누자고 제안하지 못했다. 한 차례 사루비아 다방의 김인민씨가 참여했지만 그 뒤 일정이 맞지 않아 참여하지 못했다. 이 부분은 계속 아쉬움으로 남는다.

엄청나게 바쁜 사람들이 달마다 한번 토요일에 모여 이야기 한마당을 펼쳤다. 사실 이 원고에는 그 뜨겁고 즐거운 열기를 모두 담지 못했다. 그리고 가끔 “(웃음)”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만 분위기를 전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4시간씩 웃고 떠들며 수다를 떨었던 몇 차례의 모임은 끝났지만 단지 얘기만이 아니라 함께 할 실천들을 찾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조금씩 실현되고 있다.

이 책은 많은 고민을 나눴던 모임의 결과물이다. 독자들도 이 책에서 어떤 해답보다 새로이 고민해야 할 질문들을 많이 찾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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