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협동조합에 관한 얘기를 여기저기서 듣게 된다.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되고 협동조합에 관한 책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으며 언론매체에서도 협동조합에 주목하는 프로그램이나 기사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협동조합이 대안사회의 기반으로 소개되기도 하고, 지방자치단체들이 협동조합을 지역경제 발전모델로 고려하기도 한다.
왜 갑자기(?) 협동조합일까? 기념일 챙기길 좋아하는 한국인지라 유엔이 2012년을 ‘협동조합의 해’로 정했다는 사실이 흥미를 끌었을 것 같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이 현상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은 조금 더 실질적인 것으로 보인다. 언론에 소개되는 경향을 보면 일자리 창출이라는 면에 많이 집중된 듯하다. 그런 면도 분명 긍정성을 갖지만 그것만으로 협동조합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을까?
이 강좌의 주제는 협동조합과 지역운동이다. 그런데 한국 협동조합운동의 시초를 보면, 협동조합과 지역운동이 아니라 협동조합이 곧 지역운동이었다.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협동조합이 고민되었다. 물론 협동조합은 경제활동을 하는 법인이자 조직활동을 하는 결사체이다. 이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경제활동을 하고 힘을 축적할까?? 일반 기업처럼 경제활동을 하지만 경제활동의 목적이 달랐다. 자본주의 기업은 이윤의 축적, 자본형성이 목적이지만 협동조합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 힘을 어디에 쓰려고 하는 걸까? 그런 점에서 한국 협동조합운동의 기원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1. 지역운동이자 협동운동
일제 식민지 시기 여러 개혁가들이 전국 곳곳에 학교를 세웠다. 도산 안창호 선생과 남강 이승훈 선생도 그런 개혁가였다. 흥미로운 건 이들이 학교만 세운 게 아니라 협동조합을 근거로 한 이상촌을 만들려 했다는 점이다. 이들에게 학교와 협동조합은 이상촌의 기둥이었다. 지역을 공부하고 일하고 생활하는 장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안병욱 등이 쓴 『안창호 평전』(청포도, 2007년)을 보자. 도산 안창호 선생은 “산과 강이 있고 지미가 비옥한 지점을 택하여서 200호 정도의 집단 부락”을 세우려 했다. 이 이상촌에는 “공회당(公會堂), 여관, 학교, 욕장, 운동장, 우편국, 금융과 협동조합의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이 설치될 것”으로 “집단적인 회식과 오락”을 안창호 선생은 강조했다. 이 부락에는 금융기관과 협동조합이 있는데, “금융기관에서는 저금과 융자의 일을”, 협동조합은 “생산품의 공동판매와 일상생활 용품의 공동구매 배급기관”을 담당한다. 안창호 선생은 이 부락에 “일반교육의 학교 이외에 직업학교를 세우”려 했고 “직업학교는 농(農)․잠(蠶)․임(林)․원예․목축(牧畜)․공(工) 등의 여러 과목을 두되, 공에는 농가 건축, 농촌 토목, 요업, 식료품 가공, 농구제조의 목․철공, 농촌 상업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학교를 졸업하면 소자본과 약간의 연장으로 직업을 갖고 이상촌의 한 몫을 담당하도록 하는 것이 학교교육의 목표였다. 안창호 선생은 이러한 모범촌과 직업학교를 각 도에 하나씩 설립해서 적어도 전국 각 면에 한사람씩을 선발하여 교육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 모범촌은 “첫째, 각 사람이 교육받고 훈련받은 직업 기능을 가질 것, 둘째, 그리하여서 농․어․임․공 기타 모든 생산방법을 과학화하고 합리화할 것, 셋째, 부락사업의 계획과 경영과 노력을 집단화할 것. 이것을 도산은 분공합작(分工合作)이라 하였다. 넷째, 부락의 금융과 공공 매매의 협동기관을 세울 것. 다섯째, 각 사람의 덕, 즉 신용을 향상하고 부락의 일상생활을 도덕적․위생적․심미적으로 개선하여서 생활이 안전하고 유쾌하게 할 것”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안창호 선생에게 협동조합은 어떤 의미였을까? 안창호 선생은 이를 무실역행(務實力行)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아무리 옳은 것을 알더라도 행함이 없으면 아니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봤고 무실역행하는 중요한 기관이 학교와 협동조합이었다. 이 둘은 분리된 기관이 아니었다. 안창호 선생이 평양에 세운 대성학원의 뜻을 이어받은 것이 1954년 원주에 세워진 장일순 선생의 대성학원이라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안창호 선생의 이상촌을 실제 계획에 옮겼던 건 이승훈 선생이다. 이승훈 선생은 충남 홍성군에 풀무학교를 세운 이찬갑 선생의 종증조부이다. 이찬갑 선생에 관한 백승종의 『그 나라의 역사와 말: 일제 시기 한 평민 지식인의 세계관』(궁리출판, 2002년)에서 이승훈 선생이 세운 오산학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오산학교는 용동 마을에서 북쪽으로 일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전국 각지에서 온 학생들이 학교 주변에 하숙집을 정해두고 있었다. 이찬갑의 집에서도 대문의 서편에 있는 사랑방 두 개를 학생들의 숙소로 제공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숙비를 지불함으로써, 이 집의 살림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1940년경까지는 그러했다.” 이승훈 선생은 용동 마을에 교회를 세우고 자신의 사유지 일부를 마을 전체의 공유 농지로 기증하는 한편 마을조직인 용동회를 조직했다. 용동회는 “자치적으로 마을의 위생, 교양, 풍기는 물론이고 마을의 모든 일을 처리”했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 가운데서도 한 명씩 간사를 선출하여 마을일을 함께 의논”했다. 용동회와 별도로 이승훈 선생의 측근과 친척들이 자면회를 조직해서 근면, 청결, 책임을 주장하며 “농지 개량, 연료 개량, 협동생산, 협동노동 및 소득증대”를 추구했다.
이렇게 “오산학교를 발전시키는 한편, 이승훈은 지역 공동체를 굳건한 기반 위에 세우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용동을 비롯한 오산의 일곱 마을에 저마다 동회를 조직하게 하고, 그 전체를 하나로 묶어서 소비조합을 설치했다. 조합은 일곱 마을의 연합체이기도 한 동시에 동회의 상위 조직이기도 했던 셈이다. 소비조합은 본래 학생과 주민들에게 생필품과 학용품을 값싸게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찬갑은 소비조합 일에 특히 열심이었다. 1933년 3월부터 1935년 3월까지 그는 오산소비조합의 전무이사를 지냈을 정도이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이찬갑은 조합운동의 필요성을 잊지 않았다. 1958년 4월, 그는 주옥로와 함께 충남 홍성에 풀무학교를 창설했는데, 개교 직후 학교 내에 소비조합을 설치했던 것이다. 오산의 경우에도 소비조합의 사무실은 오산학교 구내에 있었다. 이 점만 보더라도 학교와 조합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 설명을 들어보자. “오산의 조합은 일종의 은행이었다. 오산학교 학생들의 학비는 부형이 학교로 송금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 돈을 조합이 보관했다. 학생들은 담임 선생님의 허가를 얻은 다음, 금전 출납부에 돈을 사용할 용도를 기입했다. 그런 뒤에야 지출이 가능했다. 용돈 지출의 경우, 학생들은 소비조합에 가서 물품을 구입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물품 구입에 사용한 금액은 매월 말 학교와 조합 및 조합원인 학생들 사이에서 정확하게 계산되었다. 조합의 회원은 오산의 주민, 교사 및 학생들이었다. 그들의 대표가 상임위원으로서 조합회의에 참여했다. 오산 일곱 마을의 동회는 각 마을의 이익을 조합에 파견된 대표를 통하여 조합 회의에서 대변할 수 있었다. 회의에서는 주민들의 생활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적 문제와 사회적인 지위에 관한 문제까지 논의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관한 연구에서 서굉일은 주장하기를, 오산학교와 일곱 마을의 공동체 활동은 “학교와 교회, 농촌으로 나누어진 현장을 교육과 산업으로 구조화시키고 정신과 물질이라는 양면으로 구체화하는 작업”이었다고 했다(서굉일 1988, 275). 서굉일의 그러한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사실, 오산학교의 시설물 가운데서도 주민들의 복지에 특히 기여하는 바가 많을 것으로 생각되던 학교 병원과 목욕탕은 그 이용이 전면 개방되었다. 학교에서 개최되는 각종 강연회와 음악회에도 주민들이 초대되었다. 그 밖에도 교회, 동회 및 야학을 통하여 오산의 뜻있는 인사들은 주민들의 정신생활을 지도했다. 그러한 결과,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을 휩쓸던 사회주의의 격랑 속에서도 오산 일대는 계층적 갈등이 노골화되지 않았다고 한다.” 오산학교의 교사였던 함석헌 선생이 1968년에 부산에서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세우고 조합원 1호로 가입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독립운동가로만 알려진 윤봉길 선생도 사실은 지역을 바꾸는 혁명가였다.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http://www.yunbonggil.or.kr/)에 가면 그 자료들을 찾을 수 있다. 불과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윤봉길 의사는 농업에 바탕을 둔 사회변화를 추구했다. “우리 조선은 농민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조선에서 주인공인 농민은 이 때까지 주인 대접을 못 받고 살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농사는 천하(天下)의 대본(大本)이라는 말은 결단코 묵은 문자가 아닙니다. 이것은 억만년을 가고 또 가도 변할 수 없는 대진리입니다.”라고 강조하는 <농민독본>을 직접 써서 야학에서 교재로 사용했다. “지식이란 혼자 힘으로 터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있는 사실도 발표하여 남에게 가르쳐 보기도 하고, 실제로 적용해 보아야 비로소 산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월례 강연회 때에는 열심히 연사의 말을 듣기도 하고, 토론회 때에는 여러분도 한번씩 연단에 올라가서 아는 바를 발표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라고 하며 독서회를 조직했다. 이 독서회는 “1. 낮에 일하다가 쉬는 사이, 밤에 야학이 파한 뒤에도 시간을 내어 독서한다. 2. 누구나 독서한 뒤 그 소감을 적어 두었다가 토론회때 의견을 발표한다. 3. 제한된 책을 여러 사람이 읽어야 하는 관계로 가급적이면 빨리 읽고 다음 사람에게 넘긴다.”라는 규정을 두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윤봉길 선생이 힘쓴 것은 협동정신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매달, 매철마다 돈과 곡식을 모아 상을 당하거나 경사가 생겼을 때 서로 도우며 친목을 도모하는 위친(爲親契), 달마다 자신이 직접 번 돈 10전 씩을 모아 돼지와 닭을 기르고 유실수를 재배하는 월진회(月進會),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며 만든 수암체육회, “뭉처야 한다. 그리고 혁신해야한다. 살길은 단결과 혁신 뿐이다”라며 마을회관인 부흥원(復興院)을 세우고 이 건물에 야학당과 구매조합, 각종 회의공간을 만들었다. 부흥원은 “첫째. 증산운동(增産運動을 펴야한다. 둘째. 마을 공동의 구매조합을 만든다. 셋째. 일본 물건을 배척하고 우리 손으로 만든 토산품(土産品)을 애용한다. 넷째. 부업(副業)을 장려해야 한다. 다섯째. 생활개선이다.”라는 실천목표를 제시했다.
그리고 두레와 품앗이를 권장했고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협동조합은 조합원들의 출자금으로 농산품을 매매하고 그 이윤을 부원에게 배당했다. 농민공생조합을 만들어 공동구입 배급 및 판매를 담당하는 소비부, 창고 및 공장 경영, 위탁판매를 담당하는 생산부, 농자금을 융통하고 예금활동을 하는 신용부, 주요 농기구들을 관리하는 이용부, 병원과 이발소, 목욕탕을 운영하는 위생부를 뒀다. 만주로 떠나기 전에 4년 동안 충남 예산군에서 지역운동을 펼쳤다.
앞선 선배들의 사상과 삶에서 지역과 협동조합, 학교는 분리된 기관이 아니었다. 이런 기관들이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지역사회를 변화시켰다. 그리고 그 변화는 자치와 자급을 지향했다. 풀무학교가 내건 ‘위대한 평민’은 헛된 구호가 아니고, 다만 그런 위대함은 구호가 아니라 생활로 증명되어야 했다. 협동조합은 위대한 평민들이 자신의 삶을 살고 협동하는 방편이었다.
이상촌은 한반도 내에서만 생기지 않았다. 무장항일조직인 <신민부(新民府)>를 이끌던 김좌진 선생이 김종진, 유자명, 이을규 선생 등의 도움을 받아 1929년에 만든 <재만한족총연합회(在滿韓族總聯合會)>도 이상촌을 추구했다. 유자명, 이을규 선생 등은 북만주에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크로포트킨의 농업론을 바탕으로 이상적인 농촌을 건설하려 했다.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우리는 한 개의 농민으로서 농민대중과 같이 공동노작(共同勞作)하여 자력으로 자기 생활을 영위하는 동시에 농민들의 생활개선과 영농방법의 개선 및 사상의 계몽에 주력한다”는 당면강령을 세우고 자신의 뜻을 실현할 공동체를 찾았다.
<한족총연합회>는 자신이 만주에 사는 한국 교민의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향상발전을 도모하며 동시에 항일구국의 완수를 위하여 재만동포의 총력을 집결한 교포들의 자주자치적 협동조직체”라고 밝혔다. 그리고 <한족총연합회>는 다음과 같은 사업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①교포들의 집단정착사업, 교포의 유랑 방지 및 집단부락 촉성, ②영농지도와 개량․공동판매․공동구입․경제적 상호금고 설치 등을 목적하는 협동조합사업, ③교육․문화사업, 즉 소학․중학의 설립운영, 각지조직의 연락 및 교포들의 소식․교포들의 생활개선․농업기술지도 등을 위한 정기간행물발행, 순회강좌․순회문고설치, 성인교육과 장학제도, ④청장년에 대한 농한기의 단기군사훈련, ⑤중학출신자로써 군사간부양성을 위한 군사교육기관의 설립운영, ⑥항일게릴라부대의 교육 훈련․계획지도를 맡으며, 지방치안을 위한 지방조직체의 치안대의 편성지도 등을 위한 통솔부 설치.” 실제로 <한족총연합회>는 농민들이 생산한 쌀을 도정하기 위해 직접 정미소를 차리고 위탁판매까지 담당했다.
이런 운동들에서 주목할 점은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이상촌이라는 구상 속에 각각의 기능이 배치되었다는 점이다. 사람을 기르는 일과 지역사회를 성장시키는 일이 분리되지 않았고, 학교와 협동조합이 분리되지 않았고 필요를 성찰하는 일과 필요를 조직하는 일이 분리되지 않았다. 안창호 선생의 이상촌은 같이 일하고 생활하며 공생공락하는 자치와 자급 공동체였다.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필영이를 제한 외에 네 아이는 무엇을 하던지 거리에 나가 신문지를 팔더라도 죄다 일전씩의 벌이라도 버는 일을 실행케 하고 이 불경기 시기를 이용하여 절용을 공부하게 하소서”라고 말하는 안창호 선생의 협동조합은 정의돈수(情誼敦修), 서로의 사랑을 도탑게 닦는 것, 사랑하기를 날마다 힘써 그것이 되도록 하는 과정이었다. 오산학교의 경우, 조합 사무실이 학교 안에 있었다. 이런 학교가 협동조합을 교육내용에 반영하지 않았을까? 윤봉길 선생은 마을회관 부흥원을 세우고 그곳에 야학당과 구매조합, 회의공간을 만들었다. <한족총연합회>는 농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정미소를 세우고 협동의 그물망을 짬으로써 미래의 공산주의 사회를 지금 현실에서 살아가려 했다. 협동조합은 그렇게 축적한 힘으로 서로의 삶을 변화시키고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발판이었다.
2. 협동조합은 어려운 것인가?
물론 사회상황은 바뀌었다. 한국은 더 이상 농사가 기본이지도 않고 지역 내의 관계망도 거의 파괴되었다. 마을은 의식적으로 관계 맺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것이 되었고, 이미 자본주의 소비주의가 일상 속으로 깊이 침투했다. 국가의 일방적인 정책결정과 강력한 중앙집중화는 대부분의 지방민을 소외시키고 있다. 농민과 노동자가 자신의 자식을 농민이나 노동자로 기르지 않으려 하는 상황은, 윤봉길 선생이 비판했던 그 상황을 지속시키고 있고 교육은 이른 경향을 강화시키고 있다. 사회 어디에서도 협동을 경험할 곳이 없고, 우리의 마음과 습관은 무한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상촌을 만들 수 있는 토대가 거의 사라졌다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국가 차원의 독점을 상쇄시켰던 마을 내의 재분배, 이를 가능케했던 공유지들이 거의 사라졌고, 최소한의 생계기준도 바뀌었다. 제임스 스콧의 『농민의 도덕경제』(아카넷, 2004년)를 보면, “농민에게 있어서의 기준은 ‘얼마나 가져가는가’보다 ‘얼마가 남는가’일 가능성이 더 크다. 생존기준은 착취당한 잉여가치라는 기준에 의존하는 이론과는 상당히 다른 착취에 대한 관점을 제공한다.” 그런데 이런 기준들은 자본주의적인 착취와 무한경쟁, 승자독식의 논리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전 세계 어느 곳의 협동조합운동을 봐도 우호적인 사회 환경에서 성장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초기에는 모두 어려운 시기를 겪었고, 그 시련이 협동조합을 강화시키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협동의 근본은 동일하다고 본다. 내 것을 우리 것으로 전환시키고 서로의 얼굴을 대면하려는 노력, 서로를 우리 삶의 주체로 만드는 과정, 서로의 필요를 공동의 필요로 만들어 우리의 몫을 키우는 과정이 협동조합과 지역사회를 살리는 지름길이다.
일본 유학생으로 <협동조합운동사>를 조직하고 활성화시켰던 전진한은 자전적 기록인 『이렇게 싸웠다』(무역연구원, 1996년)에서 자신의 이념을 ‘자유협동주의’라 명명했다. “개인주의에서 독점성과 배타성이 止 즉 폐기되고 개성자유 즉 개성존엄성, 평등성, 창의성이 揚 즉 보존됨과 동시에 전체주의에서 강권주의와 기계주의가 止 즉 폐기되고 사회협동 즉 사회연대성, 공존성이 揚 즉 보존”되는 이념인 자유협동주의는 농어촌의 협동조합체계와 도시의 소비자/생산자협동조합체계를 결합할 뿐 아니라 임금제도를 철폐하고 이익을 균점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해방 이후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협동조합조성법, 협동조합법의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던 전진한은 국가의 협동조합이 아니라 민중의 자조적인 생활을 통해 협동조합 공화국을 만들려 했다. 그는 “국민경제가 일부 독점재벌이나 간상모리배 심지어는 탐관오리에게 농단됨이 없”도록 협동조합운동을 활성화시키려 했다.
전진한이 협동조합을 만들고자 한 방식은 간단했다. 매일 한 사람이 한 숟가락의 쌀을 저축(자조미自助米)하고 매월 5, 10, 15, 20, 25, 30일 저녁식사를 죽으로 대체하고(애향미愛鄕米), 매월 7, 14, 21, 28일에 점심식사를 하지 않고 그 쌀을 모은다(구국미救國米). 농가나 공장도 수확을 할 때나 상품을 팔 때 조금씩 판매량을 저축한다. 이것이 모이면 협동조합을 만들고 운영하는데 필요한 기본자산이 된다. 그 결과 불과 2년 만에 협동조합의 수가 22개, 조합원수 약 5천명에 이르렀고 자본금도 4만 5천여원에 달했다.
협동조합의 틀이 정형화될 필요도 없다. 차성환의 글 “양서협동조합운동의 재조명”(2009년)에는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까지 부산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활동했던 양서협동조합운동이 설명된다. 부산의 청년활동가들이 공개적이고 합법적이며 도덕적인 개혁운동으로 구상한 양서협동조합운동은 말 그대로 좋은 책을 널리 권하고 함께 읽으며 민주주의를 확산시키려는 운동이었다.
1978년 4월에 창립총회를 가진 <부산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은 107명의 조합원으로 시작되었고 “본 조합은 양서를 적정한 가격으로 구입․보급하고 지역사회 개발사업을 통해 부산지방의 문화 향상을 도모하며, 조합원 상호간의 협동과 신뢰에 기초한 민주적 경영방식을 익히고 나아가 경제적 민주주의와 협동주의에 입각한 참다운 자주, 자립적 경제질서의 전 사회적 확산을 그 목적으로 한다”고 밝혔다. 이 목적을 위해 양서를 구입하고 판매하는 시설을 설치, 운영했고, 조합원은 의무적으로 매월 1천원 이상 출자하고 매월 책 2권 이상을 구입하게 했다. 세미나와 강연회, 학습모임 등 다양한 활동을 조직했고, 도시문제 연구모임, 농촌문제 연구모임 등 사회문제 학습모임과 사진반, 연극반, 꽃꽂이반 등의 취미모임도 만들었다. 이런 활동으로 부산의 양서협동조합은 불과 1년 만에 조합원 수가 3배로 늘었고 흑자로 운영되었다. 이 글에 따르면 양서협동조합의 빠른 성장은 기독교 교회의 전도방식과 비슷했다고 즉 “조합원이 조합원 신입교육을 받고 취지에 흔쾌히 찬동하고 자기가 제일 친한 친구들을 데려와 소개해 주고, 순수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과 사귈 수 있다는 매력”을 줬다고 한다.
양서협동조합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정부의 감시와 압력을 받게 되었고 1979년 10월 부마항쟁의 불씨를 일구기도 했는데, 결국 정부가 양서협동조합을 부마항쟁의 배후조직으로 지목하면서 강제로 폐쇄되었다. 1년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에 마산, 대구, 울산, 서울, 수원, 광주로 퍼져나간 양서협동조합운동은 협동조합이 민주주의를 불태우는 횃불임을 증명했다.
어두운 시대에 협동조합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틀이었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사람들은 따스한 온기를 갈망하기 마련이다. 소비자가 생산자를, 생산자가 소비자를 만나고, 노동자가 농민을, 농민이 노동자를 만나고, 학생이 선생을, 선생이 학생을 만나고, 그렇게 서로를 동등한 시각에서 만나다보면 자연스레 협동의 힘이 생긴다.
협동조합운동을 어렵게 만드는 건 부족한 자원이 아니다. 협동조합에 출자하기 위해 한 사람이 담배 한 갑, 소주 한 병, 쌀 한 숟갈 모으면, 협동이기에 순식간에 큰 자원이 된다. 협동의 힘은 내 자원을 기꺼이 내놓으려는 마음이다. 나중에 돌려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지금 좋은 삶을 살기 위해 가진 것을 공유하려는 마음, 그리고 그런 마음들의 의미를 밝혀주고 더욱더 단단하게 다져주는 사상, 사상을 실현시키는 다양한 조직들이 협동운동을 가능케 한다.
반면에 서로가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도 여기는 순간 협동의 힘은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조그만 지원금이나 매장을 놓고 지역에 있는 작은 단체, 협동조합들이 서로 경쟁하는 상황, 사람의 성장을 기다리고 지원하지 않는 조직, 스스로 직접 나서지 않고 뒤를 봐주길 기대하는 문화는 협동운동의 힘을 위축시킨다.
3. 위태롭고 불안정한 삶에서 벗어나는 법
운동은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거기서 시작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운동의 목표는 현실을 빌미로 삼아선 안 된다고 믿는다. 한 사람이 현실을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건 불가능하다. 자기 눈에 보이는 사실만을 현실로 받아들일 경우, 우리 속에 학습된 기성사회의 논리로만 바라볼 경우, 우리는 주어진 사실을 넘어설 수 없다. 제임스 스콧은 『국가처럼 보기』(에코리브르, 2010년)에서 체계화되고 표준화된 가독성의 시각에서 벗어나 지역적인 경험과 체험으로 구성된 경험지의 시각을 가져야 그동안 보이지 않던 현실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에게도 그런 시각이 필요하다. 분명 경제조직으로서 ‘협동조합’의 존재는 독점재벌이나 일반 기업보다 훨씬 나은 조건을 노동자에게 제공한다. 허나 협동조합이 있다고 해서 그 사회가 좋은 삶을 보장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단순히 협동조합의 수가 늘어나고 그것이 차지하는 몫이 커진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협동의 그물망으로 엮이지는 않을 것 같다. 공산당이나 사회당, 녹색당이 대안정치세력으로 자리를 잡은 나라의 협동조합과 대안정치세력이 거의 없고 생협의 정치참여를 법으로 금지당한 한국의 협동조합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분권화된 국가의 협동조합과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의 협동조합은 매우 다른 경제적, 사회적 조건에서 활동해야 한다. 이런 조건들을 세심하게 검토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외국의 모델을 한국에 이식할 수는 없다.
아울러 단순히 사회적 일자리를 창출하거나 사회서비스를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평민의 삶을 근본적으로 향상시킬 수 없다. 사회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이 소외를 극복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때에만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하다. 경제학자 아마티아 센은 『자유로서의 발전』(세종연구원, 2001년)에서 경제적 필요가 정치적인 자유의 절박성을 증가시킨다고 주장하면서 세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①정치적․사회적 참여를 포함하는 기본적인 능력과 관련된 인간의 삶에서 그것들의 직접적 중요성, ②경제적 필요의 주장을 포함하여 사람들이 정치적 관심사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표출하고 지지하는 발언의 기회를 강화시키는 그것들의 도구적 역할, ③사회적 맥락에서 ‘경제적 필요’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여 ‘필요’의 개념화에 있어서 그것들이 지니는 구성적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센은 경제적인 발전이 개인을 능동적인 행위주체로 변화시키는 전략과 연계되어야만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요한 자원들을 중앙정부와 재벌이 독점하고 있는 상황을 변화시켜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 지역의 다양한 주체들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하고, 그런 지역들이 촘촘히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나는 이를 지역들의 연합, 연방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처럼 중앙정부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곳에서는 지역이 홀로 고립되어서는 결코 생존할 수 없다. 정치를 변화시키고 분권을 이루려는 노력이 결합되어야만 한다. <YMCA>운동을 이끌었던 황주석 선생은 『마을이 보인다, 사람이 보인다』(그물코, 2007년)에서 이미 ‘시민생활나라’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시민생활나라는 참여와 자치, 자결과 협동을 중히 여기고 이로써 운영됩니다. 또한 시민생활나라는 연대를 중히 여깁니다. 나라 안의 연대, 나라 간의 연방을 형성하며 나라가 뻗어갑니다.” 중요한 과제들이 이 속에 모두 담겨 있다.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정치학자 데이비드 맥낼리는 『글로벌 슬럼프』(그린비, 2011년)에서 세계경제 전체를 보면서 새로운 형태로 변이되는 경제위기의 속성을 파악하지 않으면 현재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위기를 주도하는 탈정치화의 경향에 맞서 정치를 되살리고 희망의 기운을 만들 다양한 고리들을 조직하는 것, 그것이 대안이라고 맥낼리는 얘기한다. 그러니 협동조합은 지역의 관점에서 세계경제의 변화를 읽고 지역적인 행동으로 변화에 개입하고 그 사건들을 조직해야 한다.
유럽 협동조합의 기본은 농민과 소상공인, 도시노동자들을 지원하는 구조였다. 그리고 그런 역할을 위해 협동조합은 분권화를 추구했고 지역과 지방은행을 강화시켰다. 중앙에서 조직되어 지방으로 퍼지는 방식이 아니었다. 자급이 기본이고, 불가피할 경우에만 중앙이 개입했다. 중앙이 가서 판 깔아주고 컨설팅해주고 하는 구조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유럽연합(EU)으로 통합된 이후에도 협동조합들은 자급의 원칙을 지키고 있고, 분권화되어 있어 유연하고 조합원이나 외부의 변화에 민감하다. 그리고 중소기업들이 협동조합과 긴밀한 연계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나 협동조합이 조직되는 방식은 어떤가? 수도권과 중앙 중심이고 그 구조가 집중화되어 있다. 이런 구조를 비판하고 바로잡지 않고서는 협동운동의 성공을 점칠 수 없다.
아울러 협동조합은 공론장(公論場)이어야 한다. 다양한 의견과 행동들이 이 장에서 갈등하고 충돌하고 조절되고 합의되어야 한다. 수많은 얘기와 활동들이 협동조합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분리된 삶터와 일터의 얘기들이 협동조합을 통해 순환되어야 한다. 공장과 사무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삶터에서 얘기되고, 반대로 삶터의 일들이 공장과 사무실에서 얘기되어야 한다. 아울러 지역사회에서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 청소노동자, 식당노동자, 배달노동자 등 다양한 직종의 비정규직/일용직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들이 그들이 생산한 제품과 서비스를 이용하는 소비자들 사이에서 얘기되어야 한다. 또 재벌들이 만드는 열악한 노동시장의 조건에 소비자들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삼성그룹의 제품을 쓰고 보험을 들고 주식투자를 하는 게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조합원들이 고민해야 하고 그 대안을 구체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지금 벗어나면, 지금 저항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 그 행복을 만지고 느낄 수 있게 하는 틀, 그 행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게 하는 틀, 중앙이 아니라 변방을 강화시키는 틀, 협동조합은 그런 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