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후배와 같이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의 The Ego and Its Own(1844년작)을 읽고 있다.
읽다보니 이런 독창적인 사상가를 진작에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던가라는 후회가 든다.
니체보다 훨씬 앞서 독창적인 사유의 틀을 만들었고, 중세를 벗어나지 못한 근대의 사유를 비판했던 사상가, 슈티르너.
중간까지 읽으며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아래는 슈티르너가 정치적 자유주의(political liberalism)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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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슈티르너는 계급제도가 사상의 지배요, 정신의 지배라고 얘기한 바 있다. 그것은 중세만이 아니라 근대에도 이어져 내려온 지배이고 혁명도 서열을 바꾸었을 뿐 그 지배 자체를 제거하지 못했다(개혁이 있을 뿐 진정한 혁명은 없었다). 고대인의 지혜가 모두 세계에 관한 학문이라면 근대인의 지혜는 모두 신에 관한 학문이다. 프로테스탄티즘과 근대적 사유는 내적인 종속을 더 심화시켰을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슈티르너는 자유주의도 바라본다. 슈티르너에 따르면, “자유주의는 단지 깔개 위에 다른 개념을 가져왔을 뿐이다. 신성 대신에 인간을, 교회조직 대신에 정치를, 교리 대신에 ‘과학’을, ‘조잡한 도그마’와 가르침 대신에 현실의 개념과 영원의 법칙(eteranl laws)을.”(88쪽)


사람은 누구든 인간으로 대우받길 원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건 우리를 인간으로 인정하고 비인간적으로 대우받을 위험에서 보호해주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를 진정한 보호자요 수호자로 인정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서로 단결하고 그런 단결의 형태가 공동체와 국가로 나타난다.

그런데 자유주의는 민족(nation)이나 국가(state)의 형태로 단결할 때에 우리가 진정한 인간이라고 본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유주의가 지향하는 삶은 인간이 아니라 시민으로 사는 삶이라고 얘기한다. 자유주의는 개인적인 성격이나 고립을 버리고 사적인 삶을 공적인 삶을 누릴 때 참된 인간(true man)이 된다고 얘기한다. 과거에 좋은 기독교인을 요구했듯이, 근대는 좋은 시민을 요구한다. “국가는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의 공동체가 되고 모든 사람은 ‘전체의 복지’에 스스로 헌신해야 한다.”(90쪽) 슈티르너는 이를 세속신(mundane god)의 출현이라 본다.


프랑스 혁명은 소유(property)라는 강렬한 재료로 불이 붙었다. 그래서 그들은 돈에 강렬한 애착을 보이고 자신의 소유를 인정받고 소유자가 되려 한다. 슈티르너는 이 과정에서도 새로운 이상이 출현했다고 본다. 그것이 바로 민족, ‘인민의 자유’, ‘자유로운 인민’이라는 이상이다. 평민들(commonalty)은 기득권 계층의 권리를 폐지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민족’이라 부르며 특권을 ‘권리’로 전환시켰다. 이것이 새로운 군주제의 출현을 가져왔고 제한된 군주제를 절대 군주제(absolute monarchy)로 전환시켰다. 부르주아지가 그 과정을 주도했다.

그러면서 국가는 권리를 누려야할 수많은 군중을 가졌다(Now the state has an innumerable multitude of rights to give away). 그것이 바로 국가의 권리이자 ‘정치적’ 권리이다. 더구나 국가는 그 권리에 조건을 붙여 위임된 권리에서 파생되는 의무를 충족시킬 경우에 권리를 인정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만 명령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전에는 다수의 작은 군주국들(little monarchies)이 있었고 개인들은 이런 작은 사회에 속해있었다. 혁명은 이런 작은 군주국들을 무너뜨렸을 뿐이고, 제3계급은 자기 외의 다른 계급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유일한 계급을 만들기 위해 자신을 민족으로 선언한다. 슈티르너는 이를 신과 직접 연결되려는 프로테스탄트와 비교하며 정치적 프로테스탄트라 부른다.


부르주아지는 국가라는 영혼에 봉사하는 좋은 시민이다. 순종적인 시민이 자유인이라는 생각이야말로 부르주아지의 뜻을 대변한다. 충실한 하인보다 더 합리적인 시민은 좋은 시민을 국가의 하인으로 본다. 그런 점에서 혁명은 오랫동안 지속된 정신의 지배, 영혼의 지배를 무너뜨리지 못했고 도덕(moral spirit)이나 도덕의 영향력(moral influence)을 없애지 않았다. 그것을 다른 형태의 개념으로 대체했을 뿐이다. 슈티르너는 이것을 자유주의의 실제 모습이라 본다. ‘합리적인 질서’, ‘합리적인 법’을 얘기하지만 그 틀은 과거를 반복할 뿐이다. 자유주의자는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지배자인 이성에 대한 광신도(zealots)이다.


정치적 자유(political liberty)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두 번째 단계일 뿐이고 ‘종교의 자유’와 비슷하다. 종교를 가진 사람만이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고 종교의 자유가 종교의 사라짐을 뜻하지 않듯이 정치적 자유 역시 국가 내에서의 자유이다. “Political liberty means that the polis, the state, is free.…State, religion, conscience, these despots, make me a slave, and their liberty is my slavery”(97쪽). 여기서 슈티르너는 기독교와 자유주의의 공통점을 또 하나 지적한다. 그것은 바로 목적이 수단을 신성하게 만든다(the end hallows the means)는 생각이다.

개인의 자유(individual liberty) 역시 사람이 아니라 법을 따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즉 자의적인 의지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법적인 군주(constitutional prince)에 종속된다. “Only liberal matter, only lawful matter”(98쪽)

슈티르너는 이런 과정이 결국 국가만을 유일한 군주로 승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유로운 경쟁도 국가를 전제한다. 개인적으로는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군주가 되지 못한다. 심지어 아이들도 부모가 아니라 국가에 속한다.


“If the revolution ended in a reaction, this only showed what the revolution really was.”(99쪽) 신중함(discretion)이야말로 반혁명의 신호로 한계를 정하는데, 자유주의자는 진정으로 신중함을 원한다. “The revolution was not directed against the established, but against the establishment in question, against a particular establishment. It did away with this ruler, not with the ruler.”(100쪽) 슈티르너는 이런 것이 결국 개량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낡은 자리에 새로운 지배자를 세우는. 혁명을 통해 세계를 바꾸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인민이고 민족이고 주권국가이다. 그것은 “A fancied I, an idea, such as the nation is, appears acting; the individuals contribute themselves as tools of this idea, and act as 'citizens'. The commonalty has its power, and at the same time its limits, in the fundamental law of the state.”(100쪽) “People keep carefully within the limits of their authorization.…I am a―law-abiding citizen!”(101쪽)

그런데 이 세계에도 세계의 붕괴에서 아무 것도 잃어버리지 않을 위험한 계급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민이다. 평민들은 자기 주변의 빈곤을 신의 현명한 뜻에 따라 불평등하게 나눠진 행운이라 여기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빈곤이 날뛰면 그것을 가두고 밀어내려 한다. 그러면서도 출생이 아니라 노동이 소유를 보장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도 슈티르너는 과거와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고통을 겪으며 지혜를 깨우친다는 중세의 ‘진리’를 평신도들이 믿지 않게 되듯이, 노동자들도 돈의 ‘진리’를 믿지만 그럴 수 없음을 깨우친다. “‘Money governs the world’ is the keynote of the civic epoch.”(103쪽)

소유자들의 지배는 국가가 그 빈곤한 ‘신민’들을 훈련시키고 그들이 따르는 만큼 돈(봉급)을 주고, 평민은 국가의 보호와 자비를 통해 존재한다. 그래서 만일 국가권력이 붕괴되면 평민은 반드시 모든 것을 잃을까 두려워할 것이다. 하지만 잃을 게 없는 노동자들은 어떨까? 가진 게 없는 자(non-possessor)는 가진 자를 보호하고 가진 자에게 특권을 주는 권력으로 국가를 볼 것이다. 좋은 시민은 가진 자이고, 경찰은 노동자들에게 적은 임금을 주기 위해 기꺼이 많은 세금을 내는 좋은 시민을 위해 존재한다('good citizens' gladly pay high tax-rates to it in order to pay so much lower rates to their labourers).


정치적 자유주의를 끝맺는 슈티르너의 말은 맑스보다 더 빠른 1844년에 위선적인 부르주아 사회의 미래를 예고한다.

The labourers have the most enormous power in their hands, and, if they once became thoroughly conscious of it and used it, nothing would withstand them; they would only have to stop labour, regard the product of labour as theirs, and enjoy it. This is the sense of the labour disturbances which show themselves here and there. The state rests on the―slavery of labour. If labour becomes free, the state is lost(105쪽)


슈티르너는 세속세계에 관심을 가졌던 고대와 정신에 사로잡힌 중세와 근대를 얘기하면서 진정한 에고이스트가 등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슈티르너는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기대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인간은 누구일까? 니체가 말한 초인과 다른 또 다른 존재일까?

우리의 민주주의는 매우 약하다.
기득권층이 지배하고 재벌이 승승장구하며 이명박이 집권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취약한 게 아니다.
우리네 민주주의가 약한 것은 그것이 매우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일상 속에서 민주주의를 몸으로 겪으며 배울 수 없기 때문에 우리네 민주주의는 언제나 머릿속 아테네를 떠다닌다.
경험적이지 않기에 그 지식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돌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지식인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무슨 무슨 민주주의를 떠들기는 하지만 그 민주주의가 실제 공간에서, 일상 생활속에서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를 얘기하는 지식인은 아주 드물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제도의 수준에서만 얘기되지 실제 삶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흥미로운 자료를 발견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진행되는 회의인 듯한데, 회의 발표 자료를 모두 공개했다.
http://tlc.oise.utoronto.ca/wordpress/conferences/
800페이지에 가까운 발표문들이 PDF파일로 묶여 있다.
총 8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었다.
1섹션: 시민권의 학습과 참여민주주의 - 논쟁과 개념, 이슈들
2섹션: 학교에서의 민주주의 학습
3섹션: 고등교육에서 민주주의 학습
4섹션: 비공식 교육기관에서의 민주주의 학습
5섹션: 사회운동과 정당에서의 민주주의 학습
6섹션: 지역공동체에서의 민주주의 학습
7섹션: 지역과 지방 거버넌스에서의 민주주의 학습
8섹션: 전지구적 맥락에서의 민주주의 학습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읽어보진 못했으나 서구사회에서는 시민권(citizenship)이 다시 핵심적인 주제로 떠오르고 있는 듯하다. 특히 여성과 이주민, 청소년처럼 기존의 시민권 논의에서 배제되어온 정치주체들을 능동적인 정치주체로 포괄할 수 있는 방안들이 계속 논의되고 있다. 한국의 상황과 비교하면 참으로 대조적이라 얘기할 수 있다.

지금 '도시생활자의 정치백서'(가제)라는 책을 집필하고 있다.
정치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잡고,
선거만이 아니라 주민소송, 주민투표, 주민발의, 참여예산제도 등을 활용하는 구체적인 방법,
정당에 가입하고 정당활동을 하는 방법,
시민사회단체에 가입하고 활동하는 방법,
웹상에서 이슈를 조직하고 알리는 방법,
동네를 조직하고 정치화하는 방법 등을 사례를 들어 구체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다음 달까지 마무리해야 하는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이 책의 목적은 한 가지이다.
최소한 뭐라도 한 가지 하면서 욕을 하고, 내 속의 분노를 정치적인 에너지로 전환시켜보자는...
그런 과정에서만 민주주의가 활성화될 수 있지 않을까?
형준의 블로거에 들렸다가 하워드 진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http://blog.naver.com/caujun
1월 27일 하워드 진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한다...

뭐랄까...
하워드 진은 특별한 지식인이었다.
어떤 이념에 맞춰 세상을 재단하지도 않고 자신을 부각시키지 않으면서도 그는 세상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 나갔다.
내가 하워드 진에게 호감을 느낀 건 그가 공군 폭격수였음을 스스로 드러내고 그것을 극복하며 반전과 인권, 자유를 외치는, 투쟁하는 지식인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그는 [전쟁에 반대한다](이후, 2003)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나는 여전히 파시즘을 저지하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항공대에 들어가 열렬한 폭격수가 되도록 나를 떼밀었던 도덕적 올바름을 지탱하는 명쾌한 확실성 위로 바야흐로 많은 생각들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아마도 내게 『요가수행자와 인민위원The Yogi and the Commissar』을 빌려줬던 다른 승무조 사수와 나눈 대화를 통해 최초로 의구심이 지펴진 듯했다. 그는 이 전쟁이 ‘제국주의 전쟁’이며 양 진영 모두 국가적 힘을 위해 싸우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영국과 미국이 파시즘에 반대하는 이유는 단지 파시즘이 자국의 자원과 국민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권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히틀러는 미치광이 독재자이자 침략자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영제국은, 이윤과 제국의 영광을 위해 곳곳의 원주민을 상대로 정복전쟁을 벌인 대영제국의 기나긴 역사는 무엇인가? 또 소련을 보라. 역시 야만적인 독재는 아니지만, 전 세계 노동계급이 아니라 자신의 국가적 힘에만 관심이 있지 않았던가?"

그에게서 나는 지식인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기만족이나 이념에 갇혀 성장을 거부하는 지식인이 아니라 민중과 함께 호흡하며 성장하는 지식인, 그것이 하워드 진의 참모습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하워드 진의 또 다른 매력은 지행합일, 언행일치이다.
그는 많은 연구를 통해 다양한 진실을 드러내면서도 대학의 교수보다 강연장이나 거리의 투사로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대학이라는 공간이 지식인의 삶을 구속하는 현실에서 진은 그 현실을 넘어설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노엄 촘스키 등이 지은 [냉전과 대학](당대, 2001)에 하워드 진은 이런 글을 실었다.
박사학위논문 주제를 정하던 촘스키는 시민적 자유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며 전문가를 찾았다.


"컬럼비아의 중견 역사학교수를 찾아가 시민적 자유와 관련한 주제를 쓰고 싶다고 했더니, 그는 다른 분야를 시도해 보라고 주의를 주었다. 시민적 자유는 너무나 논쟁의 여지가 많아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기가 무척 어려울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런데 그는 시민적 자유의 옹호자로 유명한 사람이었다.한 개인의 직업이 그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권력 범위 내에서 승인 혹은 거부당하는 조건에서도, 설령 그 상황이 불리하다는 점을 감안한다 해도 선택 가능성은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우리가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느끼는 가치관에 따라 가르치고 행동하는 것과, 아니면 우리 위에 군림하고 있는 권력자들로부터 인정을 받거나 안전을 위해 자신에 대해 부정직해지고 자기검열을 하는 것 중 하나가 된다."


박사학위를 받고 난 뒤에도 진은 미국인들이 가장 불편해하는 얘기를 미국인들과 전 세계에 전하며 자신의 앎을 삶과 일치시켰다.

여전히 세상은 위선과 전쟁에 휩싸여 있기에 그의 마지막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는 않을 듯하다.
하지만
형준이 번역한 [권력을 이기는 사람들](난장, 2008)이 진의 마지막 책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책에서 진의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을 듯하다.

"시민불복종은 우리를 자극하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우리가 서로 조직할 때, 우리가 참여할 때, 우리가 일어서서 함께 외칠 때, 우리는 어떤 정부도 억누르지 못하는 힘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니 슬퍼하기엔 아직 이르다.
하늘이 진을 부른 것은 야속하지만 어쩌면 그의 죽음은 우리에게 더 적극적인 삶을, 더 실천적인 앎을 요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워드 진의 책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아픈 진실에 눈을 뜬 사람들이 교양을 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참여하도록 그는 자신의 자리를 비켜준 것일지도...

고인의 명복을 빈다.

영어로 유토피아의 의미는 '어느 곳에도 없는 장소(no where)'이다.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단어를 다시 조합해서 '지금 여기(now here)'로 쓰기도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당장 이상적인 대안이 실현되리라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계급론으로 유명한 라이트(E. O. Wright)가 주도하는 'Real Utopias Project'는 그런 회의적인 시각을 넘어서기 위해 1991년에 시작되었다. 라이트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회학자, 경제학자, 정치학자들이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모이고 토론을 거치며 조금씩 그 실현가능한 대안을 완성해 가고 있다.
그리고 그 논의의 결과물들이 Verso출판사를 통해 출판되고 있다. 벌써 5권이 출판되었다.
더 좋은 점은 그 내용들을 웹사이트에서 다운받아 볼 수 있다는 점인데... 아래 주소로 가면 원문들을 다운받아 볼 수 있다(물론 전부를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http://www.ssc.wisc.edu/~wright/RealUtopias.htm
더 많은 논의를 위해 자료들을 과감하게 공개하는 점이 참 마음에 든다.

이제 20년을 향해 가는 대규모 프로젝트, 이런 것이 한국에 가능할까?
1년마다 연구성과를 비교하고, 양적인 비교에만 익숙한 한국에서 이런 프로젝트는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그것을 불가능하다 여기지 말고 조금씩 만들어가는 것도 연구자들의 몫이 아닌가 한다.

영국은 참여예산제도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네요.
아래 사이트를 클릭하시면 각종 정보와 참여예산제 실행방법(tool kit)을 구할 수 있어요.^^

http://www.participatorybudgeting.org.uk/

예산제도를 시행하기 전에 미리 시범지역을 정하고 거기서 나온 경험들을 정리하고 지속적으로 보완하는 걸 보면, 제도를 제대로 시행하려는 의지가 잘 드러납니다.
참여예산제도를 기획, 추진하는 Participatory Budgeting Unit이 멘체스터에 있네요(좋겠어요, 오처장님...ㅎㅎ).
우리도 이런 사이트를 하나 운영하면 재미있을 것 같네요.^^

박노해 시인의 '라 광야' 전시회에 가는 걸 조금은 망설였다. 온갖 폭력과 전쟁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평화라는 가냘픈 가치를 지킨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 폭력에 밥숟갈 하나 얹으려 파병을 결심하는 나라에 사는 나는 얼마나 부끄러운가? 그래서 카메라 셔터에 담긴 순간적인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도 함께 손을 잡고 갈 각시(나는 아내라는 말보다 각시라는 말이 좋다)가 있고, 박노해 시인이 기록한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느린걸음, 2007)이란 책을 읽었기에, 강연으로 맺은 나눔문화 사람들과의 인연이 있었기에 전시회로 향할 수 있었다.

전시회장에 들어서면 외지인을 반기는 차라는 샤이와 함께 박노해 시인이 팔레스타인과 터키, 시리아 국경을 넘나들며 찍은 삶을 접하게 된다. 예상대로 마음이 무겁다. 폭력과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에 앙상한 자연과 파괴된 건물이 남아 있고 그 폐허 속에 사람이 산다. 아무도 살지 못할 것 같은 그곳에 사람들이 짧은 미래를 살아가고 있다.



마음 한 켠에서는 내가 그곳에 살지 않기에, 내가 사진의 주인공이 아니기에 안도감을 느낀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나 역시 그 곳의 주민임을 자각하게 된다. 사진 속의 마을은 저기 먼 나라의 풍경이 아니다. 그곳에 용산이 있고 새만금이 있다. 그 속에 해군기지 때문에 쫓겨날 제주도 강정마을의 주민들이 있고, 생태공원 때문에 밀려날 팔당의 농민들이 있다. 사진 속에는 4대강 사업이 파괴할 생명들이 보인다.

우리는 진정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을까? 지금 이 땅에서도 소리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총을 든 폭력과 서서히 숨을 죄어오는 개발의 폭력에서 무겁고 가벼움을 구분할 수 있을까? 우리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착각’은 눈 앞의 진실을 가린다. 하루 아침에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평생의 터전에서 쫓겨날 사람들의 마음을 우리는 정녕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다르게 살고 있다 자신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그래도 폐허에서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희망이 싹튼다. 폐허를 뛰어노는 아이들이 있고, 먼 길 찾아온 시인을 반기는 사람들의 ‘환대’가 있다. 메마른 땅이라고 어찌 생명과 반가이 맞이하는 문화가 싹트지 않겠는가? 가톨릭노동자운동을 벌였던 피터 모린의 말처럼 모든 곳에는 하느님의 집과 방이 있고, “아무도 부유해지려고 하지 않으면 모두가 부유해질 것”이고, “모두가 가난해지려고 하면 아무도 가난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은 ‘아직까지’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구걸하지 않고 ‘존엄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며 평화를 요구한다.



그런 사람들이기에 시인은 겸손한 마음으로 사진을 찍는다. 풍경이 아니라 삶을 담고자 흑백사진을 고집한다는 시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아마도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박노해 시인이 평화와 나눔을, 소박한 삶을 선택한 건 그런 만남의 덕이 아닌가 한다. 이제 그 자신이 새로운 만남의 끈이 되고 있다.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 사진이 이렇게 쓰이게 되리라는 것은 짐작도 못했다. 저마다 먹고사는 일에 바빠 종종걸음으로 외면하고 지나가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레바논을 살립시다, 이스라엘의 폭격을 중단시킵시다, 정말이지 위축되는 목소리로 외치며, 한 사람의 눈길이라도 더 붙잡아 보려 기를 쓰며 서명을 호소하다 ‘우리의 미약한 행동이 과연 이 거대한 전쟁 앞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무력감에 몸서리를 친 적도 많았다. 하지만 그 광경을 담은 사진 한 장이 발휘하는 힘을 보면서 새로운 생각이 들었다. 평화는 힘이 세다. 평화는 무력하지만, 평화는 힘이 세다. 닫힌 마음을 열 수 있는 것보다 더 강한 힘이 어디 있겠는가?” 어쩌면 이 사진전은 그런 다짐을 확인하는 시인의 마음일지 모른다.

그래서 그 만남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같은 세계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살고 있는가? 우리는 자존심을 버리지 않고 당당히 평화를 요구하고 있는가? 진실이 무겁게 어깨를 누르며 짐 하나를 더 얹는다.

전시회를 다녀온 뒤 새벽에 일어나 잠든 각시의 얼굴을 봤다.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 각시는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다. 아이가 생겼다는 말을 들으며 한편으론 두려움이 들었다. 이런 세상에 아이를 낳는 게 좋은 일일까 생각을 했었다.

이제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저 세상에서 나와 함께 짐을 나눠질 새로운 사람이 오는구나, 그 사람을 반가이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구나,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 만들어갈 세계를 고민한다.

미국의 작가 오 헨리(O. Henry)의 단편소설 ‘경관과 찬송가'에서 주인공 소피는 추운 겨울을 교도소에서 보내기 위해 일부러 범죄를 저지른다. 자존심 강한 소피는 자선단체의 적선을 받느니 차라리 깔끔하게 교도소에서 지내려 한다. 교도소에 가기 위해 무전취식을 하고 무단횡단을 하고 우산을 훔치지만 소피의 소원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던 중 우연히 찬송가 소리를 들은 소피는 마음을 고쳐먹고 새 삶을 시작하리라 다짐한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소피는 경관에게 붙들려 금고 4개월의 형을 선고받는다. 이 작품에서 오 헨리는 불평등한 사회의 아이러니한 단면을 드러냈다.

그런데 오 헨리의 소설은 점점 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유아사 마코토(湯浅誠)는 『빈곤에 맞서다』라는 책에서 경제대국 일본 내의 빈곤을 다루며 현실의 소피를 얘기한다. 마코토는 고용과 사회보험, 생활보호제도라는 3중의 사회안전망이 붕괴하자 가난한 사람들이 제 4의 대안으로 교도소를 택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범죄자의 연령대가 높아지고 교도소를 가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늘어나면서 소설은 점점 현실이 되고 있다.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도 생계형 범죄라는 말이 심심찮게 언론에 등장하고 있다. 2009년 통계청이 발표한 ‘2008 사회조사’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자살충동을 느끼는 사람이 10명 중에 4명이나 된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드러냈다. 그리고 작년 연말에는 끼니와 잠자리를 해결하지 못한 노숙자들이 교도소를 택한다는 소식이 언론을 타기도 했다. 이정도면 소설 속 아이러니는 더 이상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들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고 그런 사람들을 교도소에 가두는 건 정상적인 사회의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올 해부터 국민기초생활수급자나 저소득층에 대한 난방비 지원금이나 월세 지원금 등 각종 지원예산을 없애거나 줄이고 있다. 연말이라 각계각층의 따뜻한 온정이 이어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런 자선은 불평등한 현실을 바로잡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고 교도소를 택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은 더욱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을 예상(?)해서인지 올해 10월 민간업체가 설립하고 운영하는 교도소가 최초로 등장할 예정이다. 법무부의 ‘2010 주요업무계획’에 따르면, 정부는 민영교도소를 허가해서 교도소 신축 비용을 줄이고 다양한 교화프로그램을 실시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기독교 재단법인 아가페가 경기도 여주시에 300여명의 수형자를 수용할 수 있는 민영교도소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 정부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바로 잡지 않고 오히려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드는 나쁜 방향을 택하고 있다. 사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는커녕 벼랑 끝으로 내몰고 그들이 교도소라는 최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과연 법치주의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인식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불법시위와 불법파업을 엄단하겠다고 경고하면서도 경영권 편법승계와 조세포탈 및 배임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천 100억 원을 선고받은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을 불과 4개월 만에 특별사면하는 사회에서 법치주의란 비정상적인 상황을 강요하는 정상적인 언어일 뿐이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이 과연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비극을 부를까? 새로 태어난 이들이 부모의 굴레를 고스란히 이어받아 더 깊은 나락으로 미끄러지는 곳에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미래가 없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어떤 관계에도 얽매이지 않기에 충동을 억누르지도 동기를 묻지도 않는다. 그런 사회에서 누가 자신의 안전을 장담할 수 있을까?

미래를 꿈꾼다면 우리 곁의 소피에 관심을 쏟고 그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다른 길은 없다.

3·1운동, 직접행동으로 주인임을 증명하다!

 

 

1919년 4월 1일 밤 11시, 경기도 화성시 수촌리의 주민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개죽산 봉우리는 마치 산불이 난 듯 환했고 만세 소리가 온 마을을 뒤덮었다. 개죽산만이 아니라 쌍봉산, 천덕산, 당재봉, 무봉산 화성 일대의 산봉우리들이 붉게 타올랐고 깜깜한 밤공기를 타고 만세소리는 사방으로 퍼졌다. 일본 헌병대가 총을 쏘며 산기슭을 올랐지만 도망을 치면서도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의 입을 막지는 못했다. 지난 3월 말에는 인근 수원에서 위생검사와 도박을 핑계로 사람들을 괴롭히던 일본 경찰 1명이 주민들에게 맞아죽었다는 소식도 들렸다. 칠흙같은 밤 수촌리 주민들의 마음은 산 위의 횃불처럼 불타올랐다. 이대로 꿇고 사느니 서서 죽자, 굳은 다짐이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같은 날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 주민들은 몽둥이를 들고 일본인들이 사는 마을로 쳐들어갔다. 그 놈이 그놈이지만 일제가 권력을 잡은 뒤에는 삶이 더 어려워졌다. 자기 땅을 짓던 사람들도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대부분이 높은 소작료에 시달렸다. 심지어 일제는 일본 모종을 심어라, 뽕나무를 키워라, 매달 가마니를 몇 장씩 짜서 내라는 온갖 무리한 요구를 했다. 그래서인지 주민의 82.9%가 소작농이던 칠곡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왔다. 안성 주민들은 헌병주재소를 불태우고 전선을 끊었으며 우체국과 면사무소에 불을 질렀다. 주민들은 일본인의 상점도 부쉈고 심지어 다리나 철도까지 끊으려 했다. 심지어 일본 군대가 공격할 것을 대비해 산 위에 돌무더기를 쌓아 놓기도 해서 상해임시정부는 시위대를 ‘독립군’이라 부르기도 했다. 일제는 이날 경기도 안성의 만세시위를 평안북도 의주, 황해도 수안의 시위와 더불어 ‘전국 3대 폭동’이라 불렀다.

 

유관순의 신화에서 벗어나기

 

우리가 유관순 누나와 태극기, 만세 삼창으로만 기억하는 3․1운동은 조선 말기 수많은 민란들의 뒤를 이었고, 가까이는 1894년 동학혁명의 기운을 이어받았다. 이 땅의 민중들은 산꼭대기에 횃불이나 봉화를 피우고 만세를 외치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주장했다. 시골 장터가 열리는 곳마다 만세시위가 벌어졌고, 사람들은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릴레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경찰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은 사람의 시신을 떠메고 상여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상인들은 가게 문을, 학생들은 학교 문을, 노동자들은 공장 문을 닫았다. 농민들은 일제 품종이나 묘목을 심지 않고,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일제 상품을 사지 않으며 일상 속에서 싸움을 하기도 했다. 그동안 거리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어린이, 거지, 기생들도 만세를 외치며 시위의 주체로 등장했다. 심지어 삼베 주머니로 도시락을 만들어 망태에 넣고 돌아다니는 전문 시위꾼인 ‘만세꾼’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데 누가 감히 운동을 이끌었다 얘기할 수 있단 말인가?

만세시위는 전국적으로 벌어졌고 참여한 사람들도 200만 명을 넘었다. 그리고 3월 1일만이 아니라 3월부터 4월 말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3.1~3.10

3.11~3.20

3.21~3.31

4.1~4.10

4.11~4.20

4.2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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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4

 

<표>에서 드러나듯 서울의 만세시위는 일제의 탄압을 받아 점점 수그러들었지만 오히려 전국 각지에서 그 기운을 이어받아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3월 말과 4월 초는 시위의 정점을 이뤘고 수많은 사람들이 말 그대로 ‘목숨 걸고’ 거리에서 일제와 맞섰다. 때로는 태극기를 손에 들고, 때로는 돌멩이를 던지며, 때로는 낫과 몽둥이, 호미를 들고 경찰, 헌병과 맞섰다.

그 엄혹한 일제 시기에, 나라조차 없는 상황에서 거리에서 목숨을 잃을 수 있는데도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은 저항했을까?

 

헐벗은 삶에서도 저항은 시작된다

 

일본 제국주의의 목적은 단순히 조선이라는 영토를 지배하는데 있지 않았다. 일제는 조선인의 삶에서 자발성과 능동성을 완전히 제거하고 수동적인 인간을 만들려 했다. 왜냐하면 일제는 동학농민전쟁을 경험했고 을사조약 이후에도 수많은 의병들의 저항을 강제로 억눌러야 했기 때문이다(일본 측의 통계를 따라도,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총 2,852회의 전투가 벌어졌고, 141,185명이 이 전투에 참여했다). 따라서 일제는 민중의 삶 자체를 뿌리째 뽑아 그 삶이 외부의 권력과 자본에 기생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일제는 행정부, 사법부의 주요 관리들을 일본인으로 교체할 뿐 아니라 헌병과 경찰의 수를 대폭 늘리고 이들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했다. 헌병과 경찰은 단순히 범죄를 단속하고 첩보를 수집하는 역할만을 맡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심으라는 모종을 심지 않거나 토지측량을 거부하거나 위생검열에 응하지 않으면 헌병과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1910년에 제정된 ‘범죄즉결령’은 결찰서장이나 헌병분대장이 구류, 태형 등의 범죄나 3개월 이하의 징역, 100원 이하의 벌금에 해당하는 범죄를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1912년에 제정된 ‘조선태형령’은 조선인의 경우 징역이나 벌금 대신에 매질을 하게 했다. 따라서 경찰서장이나 헌병대장은 자기 마음에 들지않는 사람이면 아무나 끌고 와서 매질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일제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해 소유가 분명하지 않은 땅들을 강제로 빼앗았고 이를 이주하는 일본인들에게 팔아넘겼다. 그리고 이들은 농민들에게 비싼 소작료를 걷었다. 소작농으로 전락한 농민들은 비싼 소작료를 낼 뿐 아니라 일본 모종을 쓰고 일본식 농법으로 농사를 지어야 했다. 종자를 골라 모를 심고 수확하고 건조하고 탈곡하는 과정 모두에 식민권력이 간섭하며 일일이 명령을 내렸고 말을 듣지 않으면 모종을 밟아 뭉개고 벌금을 매겼다. 또한 도살세, 연초세, 주세, 학교조합비 등 각종 세금을 거뒀다.

일제의 만행은 이렇게 개개인의 삶을 억누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일본은 저항의 힘이 자치공동체에 스며들어 있다는 점을 경험으로 깨달았다. 그래서 자치공동체인 동이나 구를 없애고 강제로 면으로 통합시켰고 대부분의 면장을 일제에 협조적인 사람으로 바꿨다. 일제는 지역의 자치공동체를 무너뜨려 중앙집권적인 식민지 지배구조로 흡수시키려 했다.

3·1운동은 이렇게 국가와 자본에 내몰리고 뿌리 뽑히는 사람들과 공동체들의 극렬한 저항이었다. 일제는 사람들이 저항하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자신들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지고 있음을 눈치 챈 사람들은 온 힘을 다해 싸웠다. 시위 때의 구호도 다양했다. 길거리 곳곳에서 사람들은 “지금 우리는 나라를 위하여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면장이든 면서기이든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를 위하여 이렇게 우리들은 진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조금이라도 국가를 위하여 진력하지 않는 자세를 취하는 놈은 때려 죽여라”, “지금부터는 모자리 일을 할 것도 없다. 송충이를 잡을 필요도 없다”, “바닷가의 간척공사도 안 해도 좋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 “조선이 독립하면 부역, 세금이 필요 없게 될 것이며”, “이제부터는 묘포(苗圃)일도 할 것 없고 라고 외쳤다.

이렇게 민중들은 자신이 이 땅의 주인임을 선언했다. 그리고 권력이나 자본의 간섭 없이도 자신들이 잘 살 수 있음을, 그리고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다스리고 스스로 마련하는 삶이야말로 올바른 대안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 점은 자치공동체가 해온 역할을 대신하던 면사무소가 공격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전남 순천, 평안도 의주, 평안도 신미도 등지의 주민들이 면사무소를 접수하고 자치업무를 봤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다시는 헐벗은 삶으로 내몰리지 않으리라는 강한 의지가 국가의 폭력을 넘어 새로운 정치의 장을 열었다.

자기 목숨을 건 자발적인 정치의 운동이었기에 일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를 막을 수 없었다. 서울에서 시위를 막아도 지방으로 들꽃처럼 번져가는 불길을 잡기는 어려웠다. 언제, 어디서 만세시위가 벌어질지 몰랐기에 일제는 가늠하지 못했다.

 

직접행동과 전쟁상태

 

이런 민중의 의지를 보았기에 일제는 이에 맞서 전쟁을 일으켜야 했다. 민중이 일제의 ‘치안’을 무너뜨리고 ‘정치’를 지향하자 일제는 경찰, 헌병만이 아니라 일본인 자위대, 소방대까지 동원해서 민중을 탄압했다. 그런 상태에서 폭력․비폭력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위들은 민족대표들이 주장했던 평화시위를 따랐지만 일제의 폭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헌병이나 경찰이 총을 쏘고 주동자를 연행하며 강제로 해산을 시도하면, 평화적으로 진행되던 시위도 돌멩이, 죽창, 삽, 도끼 등을 든 시위로 변했다. 그래서 <표>에서 드러나듯 3월 말이 되면 충돌은 더욱 격렬해졌다. 경기도 수원 화수리의 항쟁은 계획적으로 헌병주재소를 습격해 일본경찰을 때려죽이기도 했고, 평안도 안주에서는 체포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헌병주재소장과 헌병 3명을 붙잡아 살해하기도 했다.

이런 직접행동에 일제는 마을 전체를 파괴하는 것으로 맞섰다. 화수리의 경우 일제는 마을의 집 30채를 불지르고 마을주민들을 끌고가 갖은 고문을 다했으며 주모자에게 징역 15년형을 선고했다. 안성 지역에서는 일제 경찰과 함께 보병부대가 주민들을 검거에 나서 1명을 죽이고 20명을 부상시켰으며 9채의 집에 불을 질렀다. 심지어 부대가 학교에 야영을 하며 한 달 동안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몽둥이로 때리기도 했다.

이렇듯 무장하지 않은 민중이 무장한 권력에 맞섰던 전쟁의 결과는 비참했다. 역사가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창으로 찌르고 칼로 쳐서 마치 풀을 베듯 하였으며, 촌락과 교회당을 불태우고 부수었다. 잿더미 위에 해골만이 남아 쌓이고, 즐비했던 집들도 모두 재가 되었다. 전후 사상자가 수만 명이었고, 옥에 갇혀 형벌을 받은 사람이 6만여 명이나 되었다. 하늘의 해도 어두워져 참담하였으며, 초목도 슬피 울었다”고 적었다. 일제는 마을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전쟁을 저지른 뒤에야 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런 피의 전쟁을 감추기 위해, 그리고 민중의 정치를 다시 치안의 틀에 가두기 위해 일제는 ‘문화정치’를 펼쳤다. 이 문화정치는 민중들을 분열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사상가 함석헌의 말처럼, “일본 군인의 총칼도 감옥의 생죽음도 무서워 않던 민중이 풀이 죽기 시작한 것은, 되는 줄 알았던 독립이 아니 돼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뒤 소위 일본 사람의 문화정치 밑에서 사회의 넉넉한 층, 지도층이 민중을 팔아넘기고 일본의 자본가와 타협하여 손잡고 돈을 벌고 출세하기를 도모하게 됨에 따라 민중의 분열이 생기면서부터였다.” 작가 이광수를 비롯한 거짓된 자치주의자들이 민중들의 자치의지를 대신하려 들었고 한국인 지주와 자본가들은 민중의 피를 팔아 자신들의 이득을 꾀했다.

스스로 다스리며 살겠다는 민중의 의지에 공포를 느낀 것은 일제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해방이 되자 기득권층의 국가는 역사를 왜곡해서 3․1운동의 다양한 목소리를 ‘독립’이라는 국가주의의 목표로 축소시켜야 했다. 그 다양한 목소리와 정치행동은 모두 사라지고 유관순 누나의 비폭력만 남아야 했다.

 

3·1운동과 촛불집회, 앞으로의 사회운동...

 

역사학자 이정은의 말처럼 “1919년 2월 28일 밤 서울 시내에 독립선언서가 뿌려지고, 이튿날 아침 각처의 집 대문 앞에서 광무황제 독살설을 알리는 격문이 발견되었을 때 이를 발견한 일제 경찰도, 이를 추진했던 민족진영에서도 이 운동이 어떤 형태로 어디까지 파급되어 갈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앙마라는 아이디를 쓰는 한 네티즌이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고 모이자는 제안을 했을 때, 청소년들이 청계광장에 모여 촛불문화제를 열었을 때, 이를 지켜보던 어느 누구도 이 운동이 어떤 형태로 어디까지 파급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누구도 싸움이 벌어지리라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사건은 터진다. 이런 사건은 아주 우연히, 우발적으로 터지기도 하지만 그 결과는 의도적인 운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따지면 3·1운동은 의도적인 운동으로 이어졌던 사건이다. 우리는 그 사건을 패배라 여기지만 1920, 30년대의 운동을 보면 그렇게 평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3·1운동으로 민중의 폭발적인 정치적 잠재력을 확인하게 된 지식인과 활동가들은 이를 조직적인 운동으로 연결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1920년 4월 11일 창립한 <조선노동공제회>는 한국 최초로 노동운동을 전면에 내걸고 조직되었다. 소작농민들은 ‘불납동맹’, ‘아사동맹’, ‘소작권상실 걸인단’을 만들어 싸웠고 ‘소작인조합’, ‘농민조합’은 전통적인 자치공동체를 이용해 마을 지주들에게 기금을 걷고 민간의 협동조합을 만들어 운동의 뿌리를 강화시키려 했다. 청년학생들은 민중을 대상으로 야학/여자야학과 강연회, 토론회 등을 열며 지역사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고 지역운동의 구심점을 마련했다. 이와 더불어 아나키즘, 맑스-레닌주의 등 다양한 사상이 강연회와 야학, 독서모임에서 대중과 더불어 논의되었다.

그리고 시위가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은 것은 중앙의 지도부가 전국의 시위를 조직하지 않고 각 지역의 지식인들이 자기 동네에서 시위를 조직했기 때문이다. 그 전의 민란과 농민운동이 그러했듯이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들불처럼 번져가는 시위는 쉽게 그 불길을 잡히지 않았고 민중의 삶이 그 운동과정과 방식에 반영되었다.

이처럼 3·1운동은 다양한 사회운동의 출현을 알리는 예고편이었다. 3·1운동은 스스로를 거름으로 만들어 새로운 것의 불씨를 만드는 운동이었다. 이 점은 3·1운동의 역사에서도 드러난다. 3·1운동이 가장 극렬했던 곳은 예전에 동학농민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지 않은 곳이었다. 모를 돌아가며 심듯이 짓밟힌 곳은 잠시 숨을 죽였고 싹을 틔운 곳은 그 숨이 끊이지 않도록 운동의 맥을 이어갔다. 이 운동은 국가의 폭력에 ‘사상’과 ‘자기조직화’로 맞섰다.

3·1운동은 사회운동이 민중을 이끌려 하거나 민중이 사회운동을 배제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역할과 가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었다. 그러했기에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민중들은 1920, 30, 40년대에도 끊임없이 저항운동을 조직했다. 그러니 3․1운동은 민중이라는 주체를 드러내고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함석헌은 3․1운동 이전이 “정치가의 역사, 지배자의 역사, 영웅주의의 역사”였다면, 그 이후는 “씨알의 역사다. 자주(自主)하는 민(民)의 역사”라고 말했다.

2009년을 마감하는 우리는 그동안 어떤 준비를 해왔고 어떤 운동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까? 2010년에 우리는 어떤 새로운 조직, 새로운 이념, 새로운 정치를 맞이할 수 있을까? 준비 없이 꽃은 피지 않는다.

 

 

참고한 책

 

이정은 지음, 『3․1독립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국학자료원, 2009).

박환 지음, 『경기지역 3․1 독립운동사』(선인, 2007)

박은식 지음, 김도형 옮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소명출판, 2008)

한국역사연구회․역사문제연구소 엮음, 『3․1민족해방운동 연구: 3․1운동 70주년 기념논문집』(청년사, 1989)

조동걸 지음, 『일제하한국농민운동사』(한길사, 1983)

함석헌 지음, 『생활철학』(서광사, 1966)

함석헌 지음, 노명식 엮음, 『함석헌 다시 읽기』(인간과자연사, 2002)


인터넷 즐겨찾기에 나쁜놈들이란 '폴더'가 있다.
언론기사를 읽다 눈에 걸리는 기사들을 즐겨찾기하는 폴더인데, 이제 기사가 넘쳐 난다.
매달 칼럼을 쓸 때마다 한번씩 쓰고 정리하곤 하는데도 줄어들기는 커녕 달이 지날수록 늘어나기만 한다.
까칠한 내탓이냐, 미쳐 돌아가는 세상 탓이냐...

용산참사 유족들의 신변문제가 합의되었다고 한다.
간만에 본 9시 뉴스 첫보도이다.
다들 자기 성과, 누구 탓이라고 떠들어댄다.
합의금은 발표하지 않기로 했다는데 35억이라는 얘기가 버듯이 보도되고...

허나 이미 구속된 사람들은 여전히 징역을 살아야 하고,
명동성당에 있는 래군이형과 대책위 사람들은 곧 감방에 가야한다.

다시 또 싸울 수 있을까?
사건은 어느날 갑자기 불현듯 다시 찾아올 거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을까?

생각이 많은 밤이다.

서울 동북여성민우회 소식지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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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풀뿌리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대통령을 바꿔서 세상을 변화시키려던 사람들의 바람은 그들의 허무한 죽음만큼 뿌리 깊은 변화를 이루지 못한 듯합니다. 오히려 거꾸로 도는 시계바퀴처럼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난 뒤에는 모든 것이 허무하리만큼 이제껏 이뤄온 민주화의 성과들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센 놈만 살아남고 센 놈에게 모든 걸 다 바치는 승자독식의 경쟁사회는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나 혼자, 우리 가족이라도 살아남아야 하니 주위의 아픔과 고통에 자꾸 눈을 감고, 그 마음을 다스리려 자꾸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괜찮다”, “이번 한번만”, “다들 이렇게 사는데, 뭘”, “애들 생각해서.” 날이 갈수록 핑계는 늘어나고 내가 혼자 지고 가야할 삶의 무게도 늘어납니다. 이 무게를 견디며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스스로 위안합니다.

하지만 조세희 선생님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란 소설책에서 이런 우리 모두가 난쟁이라는 냉혹한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용산참사에서 목숨을 잃은 분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이 망루에 오르게 되리라 생각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팔당에서 유기농 농사를 짓던 농민들 중 어느 누구도 그 농지가 강을 죽인다고 매도당하며 자전거도로와 생태공원으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를 듣게 되리라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렇게 어느 순간 내 삶의 터전이 송두리째 사라지게 되었을 때, 그 때는 어쩌면 이미 늦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미 죽어버린 땅을 등 뒤에 남기고 소설에서처럼 우리는 달나라를 갈망해야 할지 모릅니다.

아마도 우리가 풀뿌리라는 말을 되뇌는 건 이런 불안감 때문일 겁니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는 단순히 아래로부터 변화의 씨앗을 만들자는 ‘운동의 전략’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풀뿌리는 우리의 삶이 더욱더 단단히 이 땅에 뿌리를 내려 권력이 우리를 밀어내고 갈아엎으려 해도 잡초처럼 끈질기게 살아보자는, 그리고 서로의 뿌리를 단단히 얽어서 함께 살아보자는 ‘생활의 전략’이기도 합니다. 운동의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야 하겠지만 그 가치가 생활로 단단히 묶이지 않으면, 운동의 가치와 삶이 단단히 서로를 부둥켜안고 받쳐주지 않으면 변화는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풀뿌리는 그런 점에서 변화의 시작이면서 그 자체가 변화의 과정입니다.

올해는 여성민우회 생협이 2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습니다. 여성민우회와 민우회생협이 지난 세월 한국의 지역사회에서 만들어온 변화는 아주 소중합니다. 민우회의 ‘사회주부’는 여성대중을 조직화하고, 대중의 참여 증진을 통해 여성을 세력화하며 대중 속에서 리더십을 발굴하고, 여성대중의 지지를 받는 운동을 만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민우회생협의 조합원선언은 환경, 여성, 지역사회 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여성적 관점에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민우회와 민우회생협은 가치와 생활의 변화를 함께 모색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소소한 생활의 변화부터 지방선거에 참여하는 것까지 민우회는 다양한 변화의 물꼬를 터왔습니다.

하지만 개발주의가 판을 치는 한국의 지역사회를 바꾸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과제입니다. 지방정부는 주민들을 무시하며 일방적으로 정책을 계획하고 집행하며, 이들과 결탁한 토호들과 관변단체들이 여러 사업들을 펼치며 주민들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가부장적인 한국문화는 여성들의 지역활동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아이들이나 가사일을 여성에게 떠맡기려 합니다. 이 모든 조건들은 가치가 삶으로 녹아드는 걸 방해합니다.

그래서 풀뿌리가 희망이려면 서로의 삶이 지금보다 더 많이 얽혀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은 서로가 서로의 역할과 활동방식을 이해하는 단계가 필요한 듯합니다. 다양한 재료를 섞은 음식이 조화로운 맛을 내려면 시간이 필요하듯이, 가치와 생활이 잘 버무려져 새로운 삶이 드러나려면 여유가 필요합니다. 각자의 고유한 맛을 잃지 않으면서도 조화로이 섞이려면 자기 방식을 고집하지 말고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 나오는 화백회의는 만장일치로 운영됩니다. 드라마에는 마치 그 회의가 정치적인 음모의 장처럼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한 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수의 의견이라도 무시하지 않고 전체 회의장에서 토론될 수 있었고 차이가 합의로 이어질 시간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와 함께 생활하는 이들이 소중하지만 더 많은 친구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관계를 더 찢어놓고 경쟁을 시키려는 사회에 맞서 손을 잡아야 합니다. 손조차 쉽게 내밀 수 없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끌어주고 그들이 스스로 자기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든든한 디딤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사는 지역사회를 경험하고 분석하며 내가 누구와 함께 사는지를 깨달아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2010년에는 지방선거가 있습니다. 아마도 그 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머슴임을 주장하며 지지를 호소할 겁니다. 그런 장에서도 관계는 만들어지겠지만 기본적으로 선거에서 후보자는 상대가 내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가보다 내게 표를 찍을 건지 안 찍을 건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내 진심(眞心)보다는 표심(票心)에만 관심을 쏟는 게 바로 선거입니다. 따라서 선거를 통해 지역사회가 자연스레 바뀌리라 기대하기란 어렵습니다.

따라서 선거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선거를 뛰어넘는 정치전략이 필요합니다. 표심이 아니라 진심을 파악할 수 있는 관계맺음이 필요하고 그런 진심을 자극하고 만나며 다른 꿈을 꿀 수 있어야 합니다.

나부터 꿈을 품어야 합니다. 풀뿌리가 희망이려면 나부터 꿈을 꾸고 그 꿈이 서로의 관계를 타고 퍼지며 힘을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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