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들은 ‘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대통령을 바꿔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우리의 바람은 그들의 허무한 죽음만큼 삶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오히려 거꾸로 도는 시계처럼 이명박 정부는 허무하리만큼 이제껏 이뤄온 민주화의 성과들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다.

더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센 놈만 살아남고 센 놈이 모든 걸 다 가지는 승자독식의 경쟁사회가 만들어지고 있다. 검사가 온갖 접대를 요구하는 건 나쁜 놈들 능력이고, 이건희가 국민들의 정직성을 탓하는 건 강자의 도덕이다. 우리 가족이라도 살아남아야 하니 주위의 고통에 눈을 감고, 그 부끄러움을 감추려 자신을 정당화한다. “괜찮다”, “이번 한번만”, “다들 이렇게 사는데, 뭘”, “애들 생각해서.” 날이 갈수록 핑계는 늘어나고 지고 가야할 삶의 무게도 늘어난다. 이 무게를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걱정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다며 자신을 위안한다. 이렇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비굴하게 만들고 있다.


조세희 선생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우리 모두가 난쟁이라는 냉혹한 비밀을 고백했고 지금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용산참사에서 목숨을 잃은 분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이 망루에 오르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팔당에서 유기농 농사를 짓던 농민들 중 어느 누구도 유기농지가 강을 죽이니까 자전거도로와 생태공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으리라 예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삶의 터전이 갑자기 사라지게 되었을 때, 그 때는 이미 늦었다.


우리가 풀뿌리정치를 말하는 건 다시 떳떳한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이다. 풀뿌리정치는 단순히 아래로부터 변화의 씨앗을 만들자는 ‘운동의 전략’이 아니다. 오히려 풀뿌리정치는 우리의 삶이 단단하게 이 땅에 뿌리를 내려서 권력이 우리를 밀어내고 갈아엎으려 해도 잡초처럼 끈질기게 버텨보자는, 서로의 뿌리를 단단히 얽어서 함께 살아보자는 ‘생활의 전략’이다. 운동의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야 하지만 그 가치가 생활로 단단히 묶이지 않으면, 그래서 운동의 가치와 삶이 단단히 서로를 부둥켜안고 받쳐주지 않으면 변화는 지속되기 어렵다. 풀뿌리정치는 변화의 과정이면서 그 자체가 변화의 목표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풀뿌리정치가 쉬운 일은 아니다. 일단 사람들이 정치에 무관심하고 냉소적이다. 사람들의 자질이 모자라서 그런 건 아니고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난 100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국가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 왔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처참한 현장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정치는 4년, 5년마다 한번 찾아오는 투표로 제한되었고 그나마도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산업역군에서 찾고 정치의 주인으로 나서지 못했다. 회의하자고 하면 빨갱이, 말 많으면 빨갱이,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이런 얘기들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적어도 정신의 면에서 식민지는 계속되고 있다. 교육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우리의 교육방식은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요즘은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또 다른 식민지를 따르고 있다. 무릎 꿇고 기어서라도 남을 제치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식민지의 본능이 강해질수록 더불어 살려는 의지나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이 들어설 자리는 줄어든다.


이렇게 억눌려 사니 냉소할 수밖에 없다. 자기 힘이 약하니 강자들에게 지배를 받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냉소의 효과는 두 가지인데, 강자에게 맞서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약자들이 서로에게 폭력을 쓰게 만든다. 내가 나서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나설 때 격려하고 도와줘야 할 텐데 오히려 그런 사람을 시기하고 왕따를 시킨다. 부끄러운 자신을 감추려 다른 사람을 비난하다보면 약자들도 체제를 지키는 부속품이 되어버린다.


정신적인 면과 더불어 참여를 가로막는 실제 장벽도 높다. 지방정부는 주민들을 무시하며 일방적으로 정책을 계획하고 집행하고, 이들과 결탁한 토호들과 관변단체들이 여러 사업들을 펼치며 주민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가부장적인 지역문화는 여성들의 지역활동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이 모든 조건들이 풀뿌리정치의 활성화를 가로막고 있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정치의 과제는 냉소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풀고 참여를 가로막는 장벽을 허무는 것이다. 두 가지 과제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마음을 풀려면 정치의 즐거움을 직접 느껴보고 명예로운 삶을 맛봐야 한다. 누가 대신 해주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뛰어들어 자기 몫을 걸어봐야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힘이 결코 약하지 않다는 점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풀뿌리정치가 희망이려면 서로의 삶이 지금보다 더 많이 얽혀야 한다. 지금 나와 함께 생활하는 이들이 소중하지만 더 많은 친구들을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의 관계를 더 찢어놓고 경쟁을 시키려는 사회에 맞서 서로 손을 잡아야 한다. 손조차 쉽게 내밀 수 없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끌어주고 그들이 스스로 자기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한다. 그러려면 내가 사는 지역사회를 경험하고 분석하며 누구와 더불어 살고 있는지를 깨달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선거는 ‘뜨거운 감자’이다. 다가올 6월의 지방선거에서 단체장이나 교육감을 당선시키고 괜찮은 지방의원이나 교육의원을 많이 당선시킨다면 풀뿌리정치를 가로막는 장벽들은 무너질 것이다. 괜찮은 후보들이 제법 그럴싸한 지역을 만들 수는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선거는 사람들이 정치를 바라보는 수동적이고 냉소적인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 왜냐하면 선거는 ‘잘난 사람’들의 치열한 ‘경쟁’이고 친구보다 적을 만들기 때문이다. 선거는 나를 ‘위해서’ 일하겠다는 사람을 뽑는 자리이지 나와 더불어 살 사람을 선택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리고 당선을 목표로 삼는 순간 사소한 차이도 비난의 이유가 되고 다른 사람을 깎아 내려야만 조금 더 당선에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러니 선거에 들어가면 친구도 적이 되고 득표로 연결되지 않는 소소한 이야깃거리들은 무시된다.


따라서 선거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는 선거를 뛰어넘는 정치전략이 필요하다. 표심이 아니라 진심을 파악할 수 있는 관계맺음이 필요하고 그런 진심을 자극하고 만나며 다른 꿈을 꾸는 활동이 필요하다. 선거가 중요하지 않으니 관심을 끊어라가 아니라 선거가 중요한 만큼 우리 일상의 정치도 중요하다. 우리 스스로가 정치를 좁게 보면 풀뿌리정치가 살아나기 어렵다. 아무리 권력을 바꾸더라도 그런 권력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과 의지가 바뀌지 않으면 새로운 세상은 오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 나부터 꿈을 품어야 한다. 풀뿌리가 희망이려면 나부터 꿈을 꾸고 그 꿈이 서로의 관계를 타고 퍼지며 힘을 만들어야 한다. 내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고, 풀뿌리정치 없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삼성을 생각한다』(사회비평, 2010)가 어느새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비자금을 폭로하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함께 기자회견장에 섰을 때와 비교하면 지나치다고 느낄 만큼 관심이 뜨겁다. 광고나 서평 하나 제대로 실리지 않았는데 어느새 판매고가 10만부를 훌쩍 넘었다고 한다.


삼성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이 책이 나올 때까지 독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삼성특검이 어이 없이 끝나고 이건희 회장이 사면을 받고 동계올림픽 유치위원으로 돌아다닐 때까지 10만의 독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김용철 변호사가 배신자, 매국노로 욕을 먹고 그의 양심선언을 도왔던 신부님들이 한직으로 물러날 때 독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태안주민대책위의 성정대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책이 나오고 난 뒤에 이건희 회장이 삼성전자 회장으로 복귀한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삼성반도체의 박지연씨가 23살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을 때 독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단지 금서(禁書)에 대한 유혹일까? 어떤 이유로 문제의 책이 잘 팔리는 걸까? 사람들은 삼성의 실체를 잘 몰라서, 그래서 그 실체를 공부하려고 책을 사보는 걸까?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믿으며 열심히 읽는 걸까?



공화국을 꿈꾸는 왕국의 국민들


아직도 한국을 공화국이라 믿는 사람들이 있을까? 공화국이라 부르기에 이 나라는 너무나 불공평하다. 가진 놈들이 더 무섭다고 이 나라의 부자들은 서로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다. 삼성그룹만 해도 CJ그룹, 새한그룹, 한솔그룹, 신세계그룹과 한 가족이고, 사돈까지 따지면 대상그룹, LG그룹, 중앙일보, 동아일보까지 한 가족이다. 이런 가족관계는 삼성만이 아니라 다른 재벌들에게도 일상이다. 가족관계로 서로에게 보험을 들 뿐 아니라 이들에게는 일이 생기면 즉각 보호를 요청할 수 있는 정부가 있다. ‘정경유착’이라는 말이 상식이 될만큼 둘의 관계는 끈끈하다. 시민들의 관계가 평등해야 공화국이라 부를 수 있을 터인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정반대이다.


공화국의 시민이라면 이런 부조리에 분노해야 할 터인데, 우리 사회의 풍경은 아주 차분하다.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삼성의 성공을 시기해서 일부러 흠집을 잡는다고 생각하고 부패를 사실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리고 설령 부패를 인정하더라도 그런 부패가 삼성만의 일도 아니고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키우려면 그 정도의 부패는 어쩔수 없다고 얘기한다.

이럴 때를 대비하는 ‘준비된 선수들’도 있다. 삼성에서 문제가 터져 나올 때마다 삼성을 비호하는 지식인들이 있다. 자문교수라는 은밀한 관계를 통해, 때로는 사외이사라는 공식직함을 통해, 때로는 기업의 프로젝트를 통해 기업의 돈을 받는 지식인들이 적잖이 많다(경향신문 취재팀이 낸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을 보면 그 점이 잘 묘사된다).

예를 들어, 서울대 사회학과의 송호근 교수는 어떨까? 그는 삼성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한국인의 평등지향적 심성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인정하거나 존경하지 않는 문화, 자신보다 뛰어난 상대와 자신의 거리를 좁히려는 열망이 “삼성전자를 세계 50대 기업에 진입하게 만든 경영 기법과 노력에 대한 관심보다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에 더 많은 관심”을 쏟게 하고, 다른 재벌들은 놔두면서 유독 삼성만을 견제의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고 지적한다(송교수에게 이 책을 왜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냈는가라고 물으면 그것도 평등지향적 심성 탓일까?)(송호근, <한국의 평등주의, 그 마음의 습관>)


심지어 삼성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 나서서 삼성을 먼저 생각하고 챙기기도 한다. 삼성이 최고의 기업이라고 믿는 순진한 사람들, 그래서 너무나 위험한 사람들이 삼성에 대한 공격을 막는데 앞장선다. 심지어 삼성에게 착취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조차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래도 ‘우리 기업’이라며 슬쩍 돌아선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그 끈적끈적한 논리가 아직도 살아 있다.


하지만 어떤 논리로 방어하더라도 공화국의 가장 큰 적은 부패이다. 왜냐하면 공화국은 시민들의 덕성이 공동체에 생명력을 계속 공급하고 시민들이 스스로 정한 법과 규칙을 따르는 나라를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즉 공화국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있을 때에만 지속될 수 있다.


그런데 부패는 시민들의 덕성을 타락시키고 법과 규칙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법을 피하는 방법이 ‘능력’으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공화국은 부패한 왕정으로 변한다. 그럼에도 자신을 공화국 시민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왕국의 신민들은 자기 환상을 깨려 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위험한 경험주의


어떤 사안을 비판하다보면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으라는 반박을 듣곤 한다. 어찌 보면 지당하신 말씀이다. 대안 없이 비판만 하면 어쩌란 얘기인가? 그러나 다르게 보면 이런 얘기는 심각한 폭력이기도 하다.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비판조차 하지 못한다면 어쩌란 말인가? 이미 현실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면 어떻게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이렇게 지금 현실이 다른 현실의 출현을 가로막는 ‘알리바이’가 되고 있다. 사상가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이를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경험주의(ideological empiricism)라고 불렀다. 지금 존재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이런 경험주의는 새로운 현실의 출현을 가로막을 뿐 아니라 지금 존재하는 것을 이상으로 만든다. 마르쿠제는 이렇게 믿는 인간을 ‘일차원의 인간(One-dimensional Man)’이라 부르며 이런 인간형을 벗어날 힘을 예술에서 찾았다. 긍정적인 것을 전복시키는 부정의 언어, 인간의 사유를 형성하는 시의 언어가 그 힘이다(허버트 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는 문학의 종언이 선언되었고, 시의 언어도 힘을 잃어가고 있다. 문학은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현실을 보여주는데 열중하고 때로는 가족이라는 낭만으로 회귀하기도 한다. ‘그래 이게 현실인데 어쩔 거냐’ 아니면 ‘엄마, 아빠, 가족찾기’이다. 현실을 뛰어넘어 전복적이고 초월적인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언어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사회과학도 마찬가지이다. 통계자료와 조작된 언어들을 사용하는 세련된 글만이 경험주의의 승인을 받는다. 하지만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잘 알아서 변화를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부조리를 고발하는 통계가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죽어가는 생명의 고통을 통계와 사회과학의 언어들이 표현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사실과 정보를 접할수록 우리는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변화를 불신하고 냉소한다. ‘차가운 머리, 뜨거운 가슴’은 옛말이고 머리와 가슴 모두가 싸늘하게 식은지 오래이다.


삼성그룹은 『삼성을 생각한다』가 나온 뒤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4월일이 되어서야 내부 게시판에 반박글을 올리고 그룹블로그(
www.samsungblogs.com)를 새로 만들어 공식입장을 밝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반응은 이미 예상하고 있듯이 근거없음의 연속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충분한 입증자료가 있다”, “국가기관을 통해 조사를 진행했다”라는 예상된 답변들이 나온다. 싸늘하게 식은 가슴을 숫한 거짓말들이 뒤흔드니 누가 감히 도전하겠는가?


이계삼은 사상가 후지타 쇼조(藤田省三)의 표현을 빌어 우리의 현실주의를 질타한다. “오늘날 이 어이없는 현실이 현실로서 승인되는 것은 아마도 쇼조의 표현처럼 우리들의 인간성에서 본성(nature)의 영역, 이를테면 ‘자연’에 대한 천부의 감각이나, ‘상식’이라는 이성적 현실감각, 혹은 ‘양심’이라는 도덕적 감각, 그것도 아니면 그저 ‘분노’와 같은 자연스러운 야생의 정서가 거세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을 거세한 이른바 ‘현실주의’의 압도적인 질주가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는 이 모든 파행의 바탕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이계삼, '우리들의 현실주의, <녹색평론> 2010년 3/4월호)


삼성을 생각하는 우리의 자세도 마찬가지이다. 머리로 제아무리 삼성을 생각하고 삼성가의 비리를 추적해도 우리의 몸이, 우리의 생활이 삼성에 젖어 있으면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삼성불매운동이 중요하다. 고작 불매운동으로 그 거대한 삼성그룹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라는 물음은 이미 이 현실에 포섭되어 있다. 이렇게 묻는 사람들은 인류 역사를 다시 살펴봐야 한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삶들이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눈에 얼마나 무모한 일로 보였는지.



삶이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


사상가 톨스토이(L. Tolstoy)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과 타협하기 위해서 현재의 생활에 질질 끌려 다니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런 삶을 살게 되면 너는 사랑의 왕국이 다가오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랑의 왕국이 다가오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네 생활을 폭력이 아닌 사랑 위에 세워야 한다."(톨스토이, <톨스토이의 위대한 인생>)


그런 점에서 삼성을 제대로 생각하려면 삼성불매운동이 필요하다. 삼성불매운동을 한다고 삼성딱지가 붙은 상품을 모두 버리고 다른 재벌가의 신상품을 살 필요는 없다. 새로운 상품을 사지 않고 오래 버티는 것도 불매운동의 한 방법이다.


현명한 불매운동도 필요하다. 삼성그룹의 비자금과 이건희 일가의 수입원은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삼성전자제품이나 삼성의 의류가 아니다. 김용철 변호사의 책에 따르면, 삼성그룹은 삼성생명과 삼성화재, 삼성카드 등의 제2금융권에서 비자금을 축적하고 전횡을 일삼아 왔다. 이런 자금줄을 틀어막아야 삼성의 태도가 바뀔 수 있다. 더구나 삼성생명의 유가증권시장 상장이 5월로 예고되니 삼성생명과 삼성그룹의 실체를 알리며 압박을 가해야 한다.


그리고 삼성은 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순환출자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에버랜드의 위치를 흔드는 것도 필요하다. 삼성에버랜드의 작년 영업실적을 보면 레저부문이 약화되고 급식 및 식자재를 취급하는 외식사업부의 실적이 10.9%나 늘어났다고 한다. 그러니 에버랜드 이용 안하기도 중요하지만 에버랜드 외식사업부나 그와 관련된 ‘에버푸드’라는 브랜드를 실패하게 만드는 것도 이건희 일가를 압박하는 좋은 방법이다.


이런 일이 몇몇 사람이나 몇몇 시민단체, 노동조합의 힘만으로 이뤄지기는 어렵다.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공동으로 노력할 때 재벌이라는 거인을 쓰러뜨릴 수 있다. 이런 노력들이 성공하면 GMO FreeZone만이 아니라 삼성 FreeZone을 선언할 수도 있다. 상상해 보자. 우리 마을에서는 삼성생명이나 삼성화재 보험사들이 명함을 내밀지 못하고 삼성카드 가맹점이나 삼성카드를 쓰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홈플러스나 홈플러스 익스프레스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문을 닫는다. 그러면 즐겁지 않을까? 이런 다양한 노력들이 모여서 6개월 정도 자금줄을 죄면 삼성그룹이나 이건희 일가도 태도를 좀 바꾸지 않을까? 국민들에게 정신차려라고 말하지 않고 자기네들부터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그리고 삼성에 집중하면 다른 재벌들도 같이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돈으로만 세상을 주무를 수 없다는 점을 그들에게 알려주자. 냉소하지 말자. 지금은 분노해야 할 시간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불매를 넘어 자급(subsistence)의 삶을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불매와 자급의 틈을 메우는 힘이 바로 협동조합이다. 소비자생협들이 대기업의 유통망을 벗어난 삶을 가능케 하고, 생산자협동조합이 노동자들의 삶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재벌 없이도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 우리가 가진 힘을 과소평가하지 말고 협동의 힘을 실현할 때 다른 삶은 현실이 된다.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꿈을 꾸자.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을 읽고 있다.
읽다보면 책의 내용과 지금 한국사회의 모습이 어찌나 많이 일치하는지...
경제력의 집중, 정치적인 통제의 확대, 여론의 조작, 무의식적 욕망을 통제하는 장치들, 이런 것들이 어떻게 일차원적인 사회라는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마르쿠제는 잘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온 번역본 모두가 오역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책의 한 단락이 지금 우리 삶의 모습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산업문명이 가장 발달된 지역에서 드러나는 총체적인 동원의 사회는 복지국가와 전쟁국가의 특징들을 가장 생산적인 형태로 결합한다. 예전 사회와 비교할 때, 이 사회는 진정 '새로운 사회'이다. 전통적인 문제들은 제거되거나 격리되었고 혼란스러운 요소들은 처리되었다. 주요한 경향들은 잘 알려져 있다. 대기업의 필요에 따라 국가경제를 집중하는 것, 정부가 그런 과정을 자극하고 지원하고 때때로 심지어 통제하는 힘이 되는 것, 이 경제를 전 세계적인 군사동맹, 금융협정, 기술지원, 발전계획의 체제에 연결시키는 것, 기업과 노동에서 블루칼러와 화이트칼라의 리더십 유형이 점점 동화되는 것, 서로 다른 사회계급들의 여가활동과 열망이 점점 동화되는 것, 학문과 국가의 목적 사이에 이미 확립된 일치점이 확장되는 것, 통합된 여론이 개인의 가정으로 침투하는 것, 침실이 매스미디어에 개방되는 것 등이다."

"The society of total mobilization, which takes shape in the most advanced areas of industrial civilization, combines in productive union the features of the Welfare State and the Warfare State. Compared with its predecessors, it is indeed a 'new society'. Traditional trouble spots are being cleaned out or isolated, disrupting elements taken in hand. The main trends are familiar: concentration of the national economy on the needs of the big corporations, with the government as a stimulating, supporting, and sometimes even controlling force; hitching of this economy to a world-wide system of military alliances, monetary arrangements, technical assistance and development schemes; gradual assimilation of blue-collar and white-collar population, of leadership types in business and labor, of leisure activities and aspirations in different social classes; fostering of a pre-established harmony between scholarship and the national purpose; invasion of the private household by the togetherness of public opinion; opening of the bedroom to the media of mass communication."

일차원적 인간의 출판년도가 1964년이니, 지난 36년의 시계는 거꾸로 흘러온 셈이다.
일차원적 사회에 관한 논의를 끝내면서 마르쿠제는 삐딱하게 사유하기(negative thought)가 어려운 이유를 언어의 조작주의(operationalism), 기능적이고 폐쇄적인 언어에서 찾는다.
시적 언어의 상실, 초월적인 예술의 언어의 상실이 이렇게 조작된 언어들의 지배를 불러왔다.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요, 현재의 사회적 현실이 우리의 규범이라는 경험주의라는 이데올로기(ideological empiricism)는 우리 시대 일차원적 사유를 대변한다. 오직 현실만이 영원할 뿐 다른 이데올로기는 없다.

이런 사유를 넘어서야 대안을 만날 수 있다.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 새로운 현실을 꿈꾸고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 그게 대안이다.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지 않으면 다르게 살 수 없다.
삼성이 나쁘고 삼성 돈을 받아먹는 정치권이나 언론사가 나쁘다는 얘기는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펴냄)나 <프레시안>의 "삼성을 생각한다" 특집 기사들을 통해 많이 얘기되었다. 하지만 이런 얘기들이 그냥 이야깃거리로 끝난다면 몇 년 뒤에 또다시 이런 추악한 얘기들을 듣게 될 터, 이제 우리의 실천이 필요하다.

며칠 전 스물세 살 꽃다운 박지연 씨의 죽음은 우리가 멈추면 안 될 또 다른 이유를 마련해 주었다. 그동안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했던 사람들 중 여러 사람들이 백혈병으로 사망하거나 투병을 하고 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반올림에 따르면, 확인된 암 발생자만 22명이고 탈모와 유산, 무월경 등의 증상은 수없이 발견되지만 삼성전자는 단 한 건의 산업 재해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아무런 산업 재해도 없는데 사람들의 건강이 나빠지고 목숨을 잃을까.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 이런 얘기를 믿을 수 있을까? 단지 기업 내부가 썩어서라기보다는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의 목숨과 건강이 상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삼성을 그냥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더 나쁜 것은 삼성이 그런 피해자들을 대하는 태도이다.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을 생각은 전혀 없고 돈이면 모든 게 다 해결된다는 식의 태도 말이다. 한 푼이 아쉬워 젊은 아들과 딸을 공장으로 보내야 했던 부모들의 아픈 마음을 마지막까지 헤집어버리는 그 태도, 대체 삼성 내에서 어떤 명령을 받고 무엇을 보고 배웠길래 그들의 태도는 그럴까?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예의와 책임성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삼성전자만이 아니다. 2007년 태안반도를 기름으로 도배했던 삼성중공업은 어떠한가? 지난 2월 26일에는 태안군의 성정대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태안 주민 중 네 번째 자살이라고 한다. 특히 성 위원장은 서울고등법원이 삼성중공업의 배상 책임을 56억 원으로 제한하는 결정을 내리고 이 결정에 대한 항소마저 기각되자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기름 유출 사고 이후 태안의 마을에서 암 환자가 크게 늘고 있다고 하지만 삼성중공업이 이를 책임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러니 이미 많은 비극들이 예고되고 있다.

▲ 태안 기름 유출 사고 직후, 인근 굴양식장의 모습. ⓒ인디코

사실 이런 비상식적인 사건들이 삼성과 관련해 계속해서 일어났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2005년 2월 서울중앙지검은 삼성SDI의 전·현직 직원 12명이 이건희 회장 등 삼성 관계자 8명을 형사 고소한 사건을 기소중지했다. 고소 이유는 개인의 휴대전화를 몰래 복제해서 사람들의 위치를 추적했기 때문이다. 위치를 추적당한 사람들은 노조를 만들려고 했었고, 위치 추적을 한 휴대전화의 발신지는 삼성SDI의 수원공장이었다. 이 정도면 누가 위치를 추적했는지 어린아이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검찰은 "'누군가' 고소인들의 휴대전화를 복제한 사실은 밝혀졌으나, 그 '누군가'를 찾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누군가'를 기소 중지했다"고 밝혔다. 지금 우리가 나서서 바로잡지 않으면 이런 어이없는 일들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삼성 불매 운동이 필요하다고 본다. 지난번 언론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의 김성균 대표의 글(☞관련 기사 : "삼성 불매 펀드, 100억 원을 넘었습니다")처럼 삼성 불매 운동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미 삼성 불매 운동이 벌어지고 있고, 삼성그룹의 상품을 사지 않는 사람들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삼성이 꿈쩍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잠깐 뒤로 물러난 이건희 회장이 국민들에게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훈계하며 슬그머니 자리로 복귀하고 해체되었던 전략기획실이 다시 등장하는 이유는 뭘까? 약간 따끔하긴 하지만 아직은 숨통이 막힐 만큼 답답하지 않은 게다. 따라서 이제는 그 숨통을 확 죄어줘야 한다.

김용철 변호사에 따르면, 삼성그룹은 삼성생명, 삼성화재, 삼성카드 등의 제2금융권에서 비자금을 축적하고 전횡을 일삼아 왔다. 이런 자금줄을 틀어막아야 삼성의 태도가 바뀔 수 있다. 더구나 삼성생명의 유가증권시장 상장이 5월로 예고되고 국내 투자자만이 아니라 외국인 투자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삼성생명과 삼성그룹의 실체를 알리며 압박을 가해야 한다. 삼성생명을 중심에 놓고 삼성이 운영하는 보험, 카드 등의 시장 점유율을 떨어뜨리고 앞으로도 그 점유율이 계속 떨어질 것이라는 점을 강하게 예고해야 한다.

그리고 삼성은 '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순환 출자 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에버랜드의 위치를 흔드는 것도 필요하다. 삼성에버랜드의 작년 영업 실적을 보면 레저 부문이 약화되고 급식식자재를 취급하는 외식 사업부의 실적이 10.9퍼센트나 늘어났다고 한다. 그러니 에버랜드 이용 안 하기도 중요하지만 에버랜드 외식사업부나 그와 관련된 '에버 푸드'(☞바로 가기)라는 브랜드를 실패하게 만드는 것도 이건희 일가를 압박하는 좋은 방법이다. 에버랜드의 사업에 관심을 두고 불매 운동을 벌이자.

이렇게 삼성 일가의 자금줄을 죈다면 삼성 불매 운동은 성공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운동의 성공을 위해서는 언소주(언론소비자주권 국민캠페인)나 진알시(진실을 알리는 시민)같은 단체만이 아니라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의 공동 노력이 필요하다. 소액 주주 운동에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참여연대이나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등은 주주총회장에서 이건희 일가의 막무가내 행동을 막으면 좋겠다. 그리고 노동단체나 시민단체도 회사의 급식 회사를 확인하고 조합원이나 회원들에게 불매 운동을 알리는 메일과 편지를 보내서 동참을 유도하면 좋겠다.

또 30만 명이 넘는 조합원을 가진 소비자 생활협동조합들도 불매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 좋겠다. 소비자 생협의 매장에서 삼성카드를 다루지 않고 조합원에게도 삼성카드를 해지하고 삼성생명이나 삼성화재 등을 이용하지 말자고 권유하면 좋겠다(삼성카드는 가맹점 수수료율이 높기로 유명하니 이번 기회에 그런 불공정함도 바로잡자).

삼성 불매 운동에 찬성하는 단체들이 단체 홈페이지와 블로그에 "삼성 불매 운동에 동참합니다"라는 배너를 달고 동참 단체들이 등록하는 홈페이지를 만들면 그 힘을 증명할 수 있다.

이런 노력들이 성공하면 '삼성 FreeZone'을 선언할 수도 있다. 상상해 보자. 우리 마을에서는 삼성생명이나 삼성화재 보험사들이 명함을 내밀지 못하고 삼성카드 가맹점이나 삼성카드를 쓰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홈플러스나 홈플러스 익스프레스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문을 닫는다. 그러면 즐겁지 않을까? 이런 다양한 노력들이 모여서 6개월 정도 자금줄을 죄면 삼성그룹이나 이건희 일가도 태도를 좀 바꾸지 않을까? 국민들에게 정신 차려라고 말하지 않고 자기네들부터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그리고 삼성에 집중하면 다른 재벌들도 같이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돈으로만 세상을 주무를 수 없다는 점을 그들에게 알려주자. 냉소하지 말자. 지금은 분노해야 할 때다.

미숙씨가 쓴 [호모 에로스]라는 책을 읽었다.
느티나무 도서관에서 몇몇 친구들과 함께 책을 읽기로 했는데, 어떤 책을 읽었으면 좋겠냐는 말에 역시 그 또래의 관심사를 반영하는 주제가 선택되었다.
한 친구가 고미숙씨의 [호모 에로스]를 함께 읽으면 좋겠다는 말에 그러자고 답을 했다.

사실 나는 고미숙씨의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뭐랄까, 지나친 자기확신이랄까,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를 읽으며 느꼈던 불편함과 몇몇 잡지 인터뷰를 보면서 느꼈던 뜨악함, 그리고 최근 [열하일기] 번역과 관련된 여러 가지 얘기들, 뭐 이런 것 때문에 좋아하진 않지만, 그 친구들이 좋아할 이유도 있겠다 싶어 한번 읽어봤다.

내가 나이를 먹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특별한 내용은 별로 없다.
내 사랑을 타인에게 투영하지 말고 내 자신을 찾아라, 과잉하지도 냉소하지도 말라, 자기의 몸과 정직한 대화를 나눠라, 몸의 감응력, 내공을 길러라, 뭐 이정도...

그런데 나는 책을 읽으며 자꾸 지붕뚫고 하이킥의 한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애교를 글로 배웠습니다'라는...
사랑과 에로스에 대해 얘기하고 있지만 사랑에 대한 원론적인 주장이나 분석이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만들어내는 그 다양한 변주에 대해서는 별반 내용이 없다.
마치 글로 배운 듯한 얘기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으니 웃음이 날 수밖에...

사람의 손을 잡고 만지고 껴안고 키스하고 애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그 많은 에너지와 생각들, 사람을 생각하는 것과 사람을 만지고 느끼는 것 사이에 놓인 그 차이를 고미숙씨는 잘 모르는 듯하다.
정말 쿵푸하듯 열심히 에로스를 배운 듯한 느낌만이(왜 배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니 책 제목은 에로스이지만 에로스에 관한 얘기는 없다. 아마도 고미숙씨는 에로스를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지 않는 '원나잇스탠드' 정도로 생각하는 듯하고, 설령 '원나잇스탠드'라 할지라도 그것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양상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듯하다.
그냥 누군가의 이야기에 기대어 얘기를 풀어갈 뿐 실감나는 얘기가 없다.

그러다 마지막 부분에서 고미숙씨가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하며 "사랑을 할땐 공부를 하라"는 얘기에선 웃음이 아니라 실소가 터져 나왔다.
사랑을 할 때 세미나를 하라니, 이게 무슨 에로스적이지 않은 소리인가.
그런 점에서 나는 고미숙씨가 인용한 빌헬름 라이히의 [오르가즘의 기능]이라는 책을 진정 열심히 읽어봤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마음과 몸으로 나누는 그 많은 대화들이, 다양한 생활들이 그렇게 간단히 재단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아울러 나는 평론가인 고미숙씨가 김선우 시인의 '목포항'이라는 시를 잘 이해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아무쪼록 사랑과 에로스를 꿈꾸는 이들이라면 [호모 에로스]를 읽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알랭 드 보통의 표현을 빌린다면, [호모 에로스] 역시 '쾌락 파시즘'의 변종일 뿐이다.

김선우 시인의 '목포항'은 보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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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

막배 떠난 항구의 스산함 때문이 아니라

대기실에 쪼그려 앉은 노파의 복숭아 때문에


짓무르고 다친 것들이 안쓰러워

애써 빛깔 좋은 과육을 고르다가

내 몸속의 상처 덧날 때가 있다


먼 곳을 돌아온 열매여

보이는 상처만 상처가 아니어서

아직 푸른 생애의 안뜰 이토록 비릿한가


손가락을 더듬어 심장을 찾는다

가끔씩 검불처럼 떨어지는 살비늘

고동소리 들렸던가 사랑했던가

가슴팍에 수십 개 바늘을 꽂고도

상처가 상처인 줄 모르는 제웅처럼

피 한방울 후련하게 흘려보지 못하고

휘적휘적 가고 또 오는 목포항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게 되기를


떠나간 막배가 내 몸속으로 들어온다 

지난번 칼럼을 쓰고 난 뒤, 속해 있는 단체의 블로그에 어떤 분이 댓글을 다셨다. 줄여서 표현하면, 내가 하는 얘기가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 실제 현실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었다. 절반의 진실이라 생각한다. 지난번 칼럼은 진보정당이 지역이나 지방자치를 대할 때 어떤 마음으로 대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적은 글이기에 추상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그 얘기가 궁금하신 분은 http://blog.grasslog.net/archive/709을 방문해보시길). 그래서 오늘은 좀 구체적인 얘기를 하고 싶다.

지금 지방선거에 대비하는 선거연합 논의가 한창이다. 승자와 패자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선거인지라 그런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너무 그 논의에 집중하다보면 깃발만 꽂으면 이길 수 있다는 착각이 생기기도 하기 때문에 분위기를 좀 환기시키는 논의가 필요할 듯하다.


민주노동당이 정책정당으로 활동하려면 정책을 세울 기본적인 정보와 자료들이 수집되어 정리되어야 한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의 홈페이지에 가면 주로 성명․논평, 활동보고, 운영위, 대의원대회 소식만 올라와 있지 지역에 관한 정보를 찾기 어렵다. 내친 김에 민주노동당의 시․도당 홈페이지를 쭉 둘러봤다. 그런데 서울시당, 충남도당에만 약간의 지역자료가 있고 다른 시도당의 경우 자료실이라는 이름이 좀 무안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조차도 지방정부의 원자료를 올려놓은 수준이지 그 자료를 민주노동당의 관점에서 가공하고 주민의 눈높이로 설명하는 내용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 지방선거에 민주노동당의 각 지역후보들은 어떤 정책을 가지고 선거에 임할 생각인가? 물론 민주노동당이 히트시킨 몇 가지 공약들이 있지만 그 공약들을 지역에 그대로 대입하기는 어렵다. 그 지역의 실정에 맞게 공약들을 다시 가공하고 구체적인 정책으로 만들려면 그 지역에 관한 정보가 있어야 한다.


당 내에서 지역별로 정책연구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지 제법 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연구소는 고사하고 기본적인 지역정보조차 정리되어 있지 않다. 정보를 구하기 어려워서 그렇다면 이해가 되지만 과거와 달리 기본적인 자료들은 지방정부의 홈페이지만 가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시정백서와 각종 통계자료, 예산서 등을 PDF나 엑셀파일로 다운받아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필요한 자료가 공개되어 있지 않다면 민원을 넣거나 정보공개를 청구해서 그것을 직접 구할 수도 있다.


내가 사는 용인시의 2010년 본예산서를 그냥 쓱 훑어만 봐도 많은 문제점이 눈에 띤다. 일단 사회단체보조금이 14억이나 잡혀 있는데, 대부분이 관변단체의 운영비와 사업비로 지출되고 있다. 1조 1천억원이 넘는 예산에서 수송 및 교통부문 예산이 약 2,772억원으로 25%를 차지한다. 이 액수는 사회복지예산보다 무려 300억원이나 많다. 또한 교육체육과 시예산이 553억원인데 그 중 304억원이 엘리트 체육 및 생활체육 육성에 사용된다. 지역이슈가 별 것 있나, 이런 것들이 바로 이슈이다.


몇 년치 예산서와 시정백서, 도시기본계획, 복지계획 등을 늘어놓고 그 관계를 추적하다보면 지역에 관한 많은 얘깃거리들을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얻은 정보들을 주민의 눈높이로 설명하고 이렇게 쓰일 돈이 사실은 다르게 쓰일 수도 있다고 얘기해 보자. 주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당이 내거는 구호들을 추상적으로만 느낄까?


우리가 집권하면 이렇게 달라진다고 주장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주민들의 참여를 끌어내려면 참여의지를 자극하는 정보를 제공하고 판을 깔아야 한다. 지역의 상황이 너무 열악하기 때문에 이런 작업을 혼자 하기 힘들다면 당이 가진 역량을 지역으로 내려 보내라.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든지 일시적으로라도 사람을 보내 지역의 정보들을 정리하도록 도와주라. 거창하게 연구소를 세우려하니 차일피일 미뤄진다.


이제 진보정당에게는 감동을 주는 리더십만이 아니라 수치로 얘기하고 증명할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다. 지금 당장 시작하지 않으면 늦다.


풀뿌리자치연구호 이음의 출판기념회에서 발제한 글입니다.
요즘 머릿 속을 떠도는 이야기들을 대충 정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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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모두 쓴 책도 아니고 여러 명이 나눠 쓴 책에 대해 제가 발제라는 걸 하려니 좀 어색하기도 하네요. 아마도 전체 기획을 한 것과 다른 분들이 바쁘다는 이유로 제게 떠넘긴 듯한 느낌이 강하지만...^^ 그래도 이미 제가 발제를 한다고 다 나갔으니 몇 자 적어라도 가야 할 듯해서 글을 끄적거려 봅니다.

예전에 이음이 냈던 책 『풀뿌리는 느리게 질주한다』가 지방자치제도와 더불어 풀뿌리운동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담았다면, 『모이고 떠들고 꿈꾸다』는 조금 더 정치적인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올 6월의 지방선거가 코앞에 다가온 탓도 있지만 풀뿌리의 실험들이 공동체를 의미있게 바꾸려면 정치영역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정치란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꼬운 것도 있지만 뭘 해도 참 안 바뀔 것처럼 느껴지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단지 정치에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정치에 염증을 내는 사람들에게 함께 정치를 하자고 말하는 건 참 어려운 일입니다.

요즘 저는 두 가지 생각을 많이 합니다. 사람들이 지역정치에 무관심하고 냉소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나름대로 한국사회는 역동적인 변화를 거쳐 왔고 민주화 속도를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왜 사람들은 수동적이고 냉소적일까?

그와 관련해 저는 두 가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정치 일반에 대해 수동적인 이유는 능동적이려 할 때마다 끊임없이 억눌려 왔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요즘 제 관심은 지난 100년 동안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사람들의 노력이 어떻게 좌절되었고 그것이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무엇을 남겼을까라는 부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국가는 사람들의 저항의지를 제거하기 위해 식민지 시절부터 많은 노력을 해왔고 그런 체계가 우리 사회를 아직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 시절부터 지금까지 가장 바뀌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그건 우리의 교육이겠지요. 새로운 사람을 길러내야 하는 교육이 식민지 교육의 방식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요즘은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해괴한 논리로 경쟁의 속도를 더하고 있습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본능이 강해질수록 더불어 살려는 의지나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은 우리 속에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TV 개그코너의 표현을 빌린다면,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는 정치의 영역이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젠 이정도면 되었지라는 잘못된 자족감(특히 정치엘리트들의!!)도 그런 수동성에 한 몫을 하겠지요. 지금까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라는 말이 지나치다면 지금껏 많은 것이 변했다라는 말도 지나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도가 변한 건 맞지만 사람들이 변하지 않았지요. 오히려 제도가 열려진다면 사람들의 마음은 닫혀지고 있습니다. 소위 민주정부 10년이라는 기간 동안의 사회, 경제, 문화적 지표를 따져보면 오히려 우리 사회는 후퇴해 왔습니다. 그 사람들의 탓이라고 꼭 집어 얘기하긴 어렵지만 그 탓이 아니라고 얘기하기도 어렵습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큰 법이지요.

또한 노력해도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냉소의 근원은 자기 자신의 힘이 매우 약하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합니다. 내가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뭔가 바꿔보려 할텐데 내가 약하다고 여기니 나서지 않으려 합니다. 내가 약하니 저 더럽고 부패한 인간들에게 지배를 당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사람들의 자신감과 자긍심이 짓밟히고 너덜너덜해져 있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민주주의는 무의미한 제도가 될 뿐 아니라 위험한 제도가 되기도 합니다.

위험한 제도가 된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런 냉소가 냉소로만 끝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못 나서면 다른 사람이 나설 때 격려하고 북돋워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나서는 사람을 시기하고 경멸하고 왕따를 시키는 거지요. 어느 순간 자기 자신도 이 시스템을 지키는 하나의 부속품이 되어버린 거지요.

최근 옆 나라 일본에서는 정치에 관심을 쏟자는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우리 삶이 이 모양이라는 반성이 일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쿄 히비야 공원에 텐트를 친 젊은이들은 구걸을 받지 않고 일하면서 당당하게 살 권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일본 젊은이들의 조직화에 열심인 유아사 마코토(湯浅誠)는 『빈곤에 맞서다』(검둥소, 2009)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대로는 곤란하다’와 ‘어차피 헛일이다’ 사이를 연결하는 활동을 찾아야 한다. 그러한 활동이 사회 전체에 퍼지면 정치도 빈곤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 더욱더 관심을 갖고,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무관심한 채 돌아보지 않는 이러한 상태를 극복하고 싶다. 빈곤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 것,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제야말로 우리 사회가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마코토만이 아니라 널리 알려진 하지메도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하지메는 일상적인 삶을 바꿔야 한다는 점을 얘기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얼마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느냐, 이거다. 따분한 직장에서 일하는 친구가 “아이고, 이런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3년만 다니고 그만둬야지, 그때는 자유롭게 살아가야지”하는 놈치고 진짜 회사를 그만 두고 자유롭게 사는 꼴을 본 적이 없다. 항상 안정감 위주로 무리도 안 하는 대신, 하고 싶은 일도 못한다면 해방감 있는 세상을 맛볼 수 없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우리가 그동안 억눌려왔던 자신감과 자긍심을 살려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모습은 어떨까요? 최근 지방선거와 관련된 논의들을 봐도 참으로 한심합니다.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도가 그다지 높지 않으니 소위 야권이 단합하기만 하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연합공천을 하면 최소한 1석이라도 건질 수 있겠지, 연합논의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해야 하니 일단 모든 지역에서 다 공천을 내놓고 협상을 해야지, 풀뿌리정치와는 그리 상관없는 생각들이 여러 매체들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저는 선거 자체를 거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선거만을 바라보면 정치라는 영역이 아주 좁아진다고 생각합니다. 왜 우리에게 정치가 선거밖에 없습니까? 정당이 있고 시민단체가 있고 여러 가지 자원활동이 있고 시민들과 함께 일을 모색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식들이 있습니다. 『모이고 떠들고 꿈꾸다』에 실린 많은 사례와 내용들은 바로 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선거가 중요하지 않으니 관심을 끊어라가 아니라 선거가 중요한 만큼 우리 일상의 정치화, 페미니스트들이 얘기하듯이 개인적인 것 속에서 정치적인 것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일상 속에서 권력의 작용을 볼 뿐 아니라 그 권력을 변형시키는 사람들의 자발성도 봐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 스스로가 정치를 그렇게 자꾸 좁게만 해석하고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권력을 바꾸더라도 그 권력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과 의지가 바뀌지 않으면 새로운 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제가 최근에 재미있는 생각을 하나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두레와 계같은 공동체 조직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걸 저는 18세기 정도로 봅니다. 농업기술도 발달하고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잉여도 생기고 상업도 활성화되는 거지요. 이런 사회의 발전이 사람들의 마음도 조금씩 든든하게 하고 공동체 조직은 그 힘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줍니다. 18, 19세기에 수많은 민란이 일어났던 건 아마도 이런 힘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예전에는 그냥 저항을 꿈꾸기만 했다면 이제는 함께 저항할 사람들과 조직이 있는 거지요.

더구나 이런 조직들은 ‘회의’라는 걸 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따로 정치시간을 빼야 하지만 이런 조직들에서는 일상이 곧 정치였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공동체라는 걸 자연스럽게 느꼈을 겁니다. 즉 정치문화가 형성된 거지요. 그 힘이 폭발한 게 동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강한 믿음이 없다면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믿음과 종교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20세기는 바로 이런 믿음과 자발성, 공동체를 짓밟고 해체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일제 식민지가 그러했고 군사독재가 그러했습니다. 단지 파괴할 뿐 아니라 그것을 왜곡하고 대체하려 했지요. 일종의 ‘가짜 공동체’를 만들어 전파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관변단체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을 따로따로 떨어뜨려 놓고 경쟁의 법칙을 강요했습니다. 이런 경쟁 속에서 정치문화는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전에는 공동체 속에서 자라고 배우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정치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이런 정치문화가 없습니다. 태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습득되는 과정이 없는 거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장의 문화가 사라졌다면 다시 사람을 성장시킬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프레이리나 알린스키, 함석헌, 장일순같은 분들이 왜 그토록 교육이라는 걸 강조했을까, 학교에서 배우는 게 아니라 우리 삶에서 배움이라는 걸 강조했을까, 저는 그 이유를 바로 이런 점에서 찾고 싶습니다.

공동체가 실체로 존재하는 곳은 없습니다. 이상적인 교육의 틀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이상을 보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 삶을 돌아보며 단단한 사람들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거짓 공동체가 아닌 진짜 공동체가 가능하겠지요. 사람 일에 시간을 쏟지 못한다면 저는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풀뿌리정치가 실현되려면 여러 가지 것들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나 자신을 보는 관점, 사회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바꾸고 삶을 바꿔야 풀뿌리의 정신이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안도 많고 할 일도 많은 시대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때론 격하게 부딪쳐야 하겠지요. 하지만 끌려가는 시대정신이 아니라 내가 끌고가는 시대정신을 만들려면 우리 스스로가 다른 사람을 만나고 수다 떨며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이지요. 뭘 바라셨습니까... ^^

삼성불매 소비자주권 선언을 널리 퍼뜨리면 좋겠습니다.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등...
조직적인 운동도 필요하겠지만 우리 각자의 다짐어린 선언도 필요합니다.
아래의 선언문을 각자 자기 나름대로 바꿔서 선언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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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는 사이에 삼성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이 걱정스럽긴 합니다.
이미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는 삼성의 온기를 구분할 재간은 나에게 없을 것 같지만,
적어도 삼성의 로고가 찍힌 완성품이나 홈플러스, 에버랜드, 삼성의료원, 삼성카드, 삼성생명, 세콤 등등을 앞으로 이용하지 않겠습니다.

삼성의 성장은 발전의 상징이 아니라 정의롭지 못한 자본권력의 사악함의 상징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탈법과 불법의 경계가 없는 한 인간이 다시 경영에 복귀하는 건, 상식적인 수준에서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저
상식적인 사람일 뿐입니다.

이건희 회장이 약속대로 경영진에서 물러날 때까지, 삼성그룹에 노동조합이 만들어져서 자본을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삼성제품을 구입하지 않겠습니다.
이건희 복귀 소식을 듣고 프레시안에 쓴 글입니다.
불매운동을 벌일 다양한 아이디어가 모아지면 좋겠습니다.
저는 삼성제품 리콜경연대회, 홈플러스 불매운동, [삼성을 생각한다] 독자 퍼포먼스 등을 생각하고 있는데요...
이건희를 주저앉히는 즐거운 상상을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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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경영 복귀, 반성은 없었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의 회장으로 복귀했다. 2008년 4월 22일 퇴진을 선언한 지 23개월 만에 다시 경영진으로 복귀했다. 이것은 단지 한 개인의 경영 복귀가 아니다. 그것은 이 회장의 퇴진과 더불어 해체되었던 전략기획실이 부활한다는 것도 뜻한다. 삼성 사장단협의회가 이건희 회장의 경영 복귀를 건의했다고 하지만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에 따르면, 사장단협의회란 핫바지요 얼굴마담일 뿐이니, 그건 영화 <왝더독>의 제목처럼 꼬리가 개의 몸통을 흔든다는 얘기다.

23개월이나 쉬었으니 그동안 충분히 반성했을 거라고 생각해야 하나? 하지만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 공식트위터에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 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삼성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앞으로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가자"라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 23개월 동안 반성한 사람의 기운보다는 와신상담의 기운이 느껴진다. 비록 지금은 내가 저런 것들에게 밀려서 경영에서 손을 떼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복귀하고 말리라. 그런 기운을 느낀 건 나뿐일까?

'징역 3년형' 받은 범죄자가 당당한 세상

그리고 돌이켜보면 그동안 방송들이 토요타의 위기와 동계올림픽의 경제적 효과를 열심히 떠든 건 이건희 회장의 경영 복귀를 위한 사전포석이었던 것 같다. 이건희 회장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고마운 토요타, 고마운 김연아, 고마운 금메달의 얼굴들이다. 아마도 이런 수순을 염두에 두고 방송사들은 그토록 열심히 토요타와 동계올림픽을 외쳤을 것이다. 이제 경영복귀 선물로 청년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만 좀 나눠주면 모두가 '올레'라고 외칠 분위기이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의 복귀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우리 사회의 오래되고 서글픈 코미디를 다시금 재현한다. 말도 안 되는 재판으로 떼어낼 수 있는 죄를 다 떼어내고도 '징역 3년형'을 받은 범죄자가 아무런 합의도 없이 사면되고 이제는 다시 경영일선으로 돌아온다. 그나마 다른 범죄라면 또 모르겠다. 경영 과정에서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입히고 세금을 몰래 빼돌린 죄를 지은 사람이 경제 위기와 경영 리더십을 핑계 삼아 복귀하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정치 민주화에 정신 팔린 사이, 곳간이 털리고 있었다

▲ <나쁜기업>(한스 바이스·클라우스 베르너 지음, 손주희 옮김, 프로메테우스 펴냄). <삼성을 생각한다>와 함께 읽으면 좋은 책이다. ⓒ프레시안
그런 점에서 김상봉 선생의 글은 매우 반가웠다.(☞관련 기사: "지금 당장 '삼성 불매 운동'을 제안합니다!")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초국적 기업들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을 뿐 아니라 곳곳에서 분쟁과 전쟁을 유도하고 있다.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이나 한스 바이스의 <나쁜 기업: 그들은 어떻게 돈을 벌고 있는가>를 보면 그들이 나쁘고 끔찍한 일들을 벌이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국가의 민주화에만 정신이 팔려 자기 곳간 털리는 줄 모르고 사는 우리에게 김상봉 선생은 그들의 만행을 주목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사실 삼성이라는 거대한 제국에 맞서 소신 있게 자기 얘기를 할 수 있는 대학 교수가 한국에 몇이나 될까?

불매 운동의 한계 : '자본주의 너머'도 보자

그렇지만 불매 운동을 벌이자는 얘기에 공감하면서도 조금 걱정스럽기도 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소비자 운동이 가진 힘은 크다.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자본도 소비자들의 힘이 모이면 자본을 무너뜨리지는 못할 지라도 그것을 통제할 힘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회장님의 권력을 박탈해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삼성을 해체하는 작업이 불매 운동으로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경제와 소비에 대한 새로운 철학과 윤리를 마련하는 것과 불매 운동은 다른 과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불매 운동은 그 회사의 제품을 구매하지 않거나 다른 회사의 제품을 대신 구매하는 자본주의 속의 운동이고, 삼성을 해체하고 경제에 대한 새로운 철학과 윤리를 마련하는 일은 자본주의 너머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정의로운 국가, 양립가능한가?

▲ <쇼크 독트린>(나오미 클라인 지음, 김소희 옮김, 살림Biz 펴냄). <삼성을 생각한다>와 함께 읽으면 좋은 책이다.
이런 점이 뒤섞이니 토지정의시민연대 이태경 사무처장처럼 불매 운동을 '구좌파적 상상력'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생긴다.(☞관련 기사: "삼성 해체가 답인가?", "삼성 임직원 전체를 적으로 돌리지 말라")

그런데 자본주의 속에서 "공정하고 건강한 시장경제를 운용할 수 있는 강하고 유능하고 정의로운 국가의 구성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 역시 '낡고 순진한 상상력'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경제를 운용하는 강하고 정의로운 국가를 찾는 건 논리적인 모순이고 자본주의가 발전해온 역사적인 과정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국가의 도움 없이 지금의 자본주의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었단 말인가?

이건희 가신들이 불법 일삼을 때, 삼성 직원들은 무엇 했나?

그리고 삼성그룹을 이건희 일가나 그들의 가신 그룹과 구분할 수 있을까? 이건희 일가와 가신 그룹이 각종 탈법과 불법을 일삼을 때, "국가의 지원과 국민들의 성원, 소속 임직원들의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 삼성이 그런 길을 걸을 때, 삼성그룹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아주 사악한 소수의 사람들과 그들에 의해 지배당하는 착한 다수의 사람들이라는 구도가 그대로 삼성에 적용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그 피라미드의 가장 위에는 이건희 일가가 있겠지만 그 중간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그 일가를 위해' 일을 하고 있고 스스로 그런 질서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23개월의 공백 동안 삼성그룹 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정상적이라면 삼성전자의 노동자들이 부패한 경영자의 복귀를 반대해야 옳은데,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질까?

돌아가신 함석헌 선생은 '씨알'이라는 말을 통해 스스로를 부정하며 참된 나로 거듭나는 과정을 강조했다.

"씨알아, 네가 스스로 눈을 감지 않는데 네 눈을 가릴 자가 누구란 말이냐? 네가 스스로 입을 다물지 않는데 누가 네 입을 틀어막는단 말이냐? 네가 참을 참대로 보는 것과 그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 밖에 또 무엇을 아낄 것이 있는 듯해 너는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느냐? 그러나 속고 나면 속았구나 하는 것이 민중이요, 속았구나 하면 분하다 분하다 못해 내가 잘못이지 하는 것이 민중이다. 그러나 스스로 속였구나 할 때 속움직임이 있다. 거기서 새 역사의 걸음이 시작된다."

"지금이 삼성 불매 운동의 적기다"

불매 운동은 바로 이런 새 역사를 쓰는 첫걸음이어야 한다. 그래서 불매 운동은 다른 운동들처럼 운동의 목표를 분명하게 잡아야 성공할 수 있다. 삼성그룹 해체라는 목표는 사실 허깨비처럼 잘 잡히지 않는 목표이다.

오히려 삼성에 대한 불매 운동은 그룹의 해체보다 삼성그룹의 지배 구조를 바로잡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가능한 목표이다. 그러니 지금이 딱 좋은 시점이다. 이건희 회장과 그의 가신들이 경영에서 손을 떼고 삼성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까지 불매 운동을 벌여야 한다. 삼성의 해체 또는 삼성의 전환은 또 다른 과제이다.

불매 운동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의 경제를 만들지는 못한다. 삼성에 대한 불매가 그와 비슷한 처지인 다른 재벌가의 상품을 구매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면 운동이 거둔 성과는 제한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재벌가들이 저질러온 범죄들을 보면 하나같이 경영자가 하지 말아야 할 범죄들이기 때문에 삼성만 해체한다고 한국경제가 바뀌지는 않는다.

"삼성이 견제받고, 다른 재벌도 눈치 좀 보게 하자"

한국 경제를 바꾸는 것은 구좌파적 상상력이 아니라 진정한 좌파적 상상력을 요구한다. 아니, 좌우를 넘어선 상상력을 요구한다. 인간이나 생명을 도구가 아니라 목적으로 간주하는 경제는 지금과 같은 정치경제 구조로 실현될 수 없다. 요즘 많이 얘기되는 사회적 경제나 기본소득들을 우리 사회와 접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찾을 때에만 대안적인 경제의 가능성이 보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김상봉 선생의 말처럼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기에 길게 보며 함께 논의하고 결정할 과제이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행동은 삼성 제품을 사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삼성 제품을 사지 말아야 할 이유를 얘기하고 나누는 것이다. 그런 논의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삼성이 견제를 받고 다른 재벌들도 덩달아 눈치를 좀 보게 해야 한다. 자신들의 실패를 소비자에게 고스란히 떠넘기고 단합하고 독점하며 소비자를 착취하는 재벌들을 우리 손으로 통제해야 한다.

삼성맨 아닌 삼성맨들오만한 삼성, 우리가 키웠다

그동안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를 이토록 깔보고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그렇게 키운 것이다.

삼성은 그 사람을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데, 스스로 나서서 삼성을 생각하고 챙기는 이상한 오지랖들(알바인지 모르지만)이 제법 많다. 삼성에게 10원짜리 한 장 받아본 적 없을 것 같고 앞으로도 받을 일이 없는 사람들이 마치 삼성맨처럼 얘기하며 삼성을 옹호한다.

그만큼 우리 삶이 불안하고 위태롭다는 이야기이다. 불안하고 위태로우니 무작정 강자가 잘 되어서 떡고물이라도 떨어지길 기대하지만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런 일은 아주 드물다. 오히려 지금 있는 곳에서 내쫓기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복고풍이 유행인 세상이지만 과거가 우리의 답이 될 수는 없다. 엉뚱한 사건들이 맞물리며 하나씩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복귀 역시 복고풍의 흐름을 타고 있다. 우리 뒷 세대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더 이상 보이고 싶지 않다면, 그리고 삼성그룹의 노동자들이 진정 노동자로 살고 싶다면, 한국의 시민이 시민으로 살고 싶다면 지금 바로 불매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얼마전 수원행동연대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나눴던 내용이다.
선거에 대해 조금은 다른 얘기를 하고 싶어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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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객민주주의 넘어서기


우리는 민주주의를 얘기하지만 정작 민주주의를 경험한 적이 거의 없다. 학교나 직장, 동네 등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거의 모든 곳들이 민주주의와는 거의 상관없는 곳들이다. 경험한 적이 없으니 민주주의는 멀게만 느껴지고 일상생활에 큰 도움이 안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나마 우리가 민주주의를 얘기할 수 있는 곳은 선거 뿐이다.

근대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이다. 대의 민주주의는 유권자가 합리적으로 자신의 대표를 선택할 수 있고 대표가 헌신적으로 그들의 뜻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근대국가는 대중의 정치를 ‘선거로’ 제한했고 정치를 의회와 행정부의 전유물로 만들어 왔다. 근대는 정치인이 정책을 생산하고 유권자가 그 정책을 구매하는 시장으로 정치를 변질시켜 왔다. 우리는 관객처럼 물끄러미 그네들의 정치판을 바라보기만 한다.

사실 관객민주주의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다.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의 의미는 주인됨을 뜻하는데 관객은 지나가는 손님이기 때문이다. 물론 주인과 관객이 서로 말을 건내며 서로의 세계를 조금 더 넓힐 수도 있겠지만 그 역시 관객의 주인됨이 가능할 때나 가능한 얘기이다.

우리의 대의민주주의는 관객을 배제할 뿐 아니라 배신한다. 유권자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솔직히 드러내지 못할 수 있고(예를 들어,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지 않은 한국에서 사회주의자는 자신의 선호를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없거나 드러낼 경우 불이익을 받는다), 또 자신의 진정한 욕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수도 있다(이를테면, 대중들은 조중동과 보수화된 언론들이 쏟아내는 온갖 이데올로기와 선전, 조작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런 점에서 사실상 선거는 대중이 직접 정치하는 걸 막는 장애물일 뿐이고 언제나 대중을 배반한다. 그래서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루소(Jean J. Rousseau)는 대의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한 영국 국민조차 선거기간에만 자유로울 뿐 나머지 기간은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민주적이라 여기는 비밀투표는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원리가 아니라 사실상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원리로 변질될 수 있다. 실제로 자신을 뽑아준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대표는 유권자에게 직접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따라서 일단 뽑히고 나면 소환되지 않는 이상 대표는 대중을 배신할 수 있다(국민소환제조차 인정되지 않는 한국에서 유권자는 국회의원을 통제하려면 다음 선거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처럼 대의 민주주의가 유권자와 대표의 관계에서 구조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기에 선거라는 형식은 대중이 자신의 주인공을 승인하는 과정으로 변질되기 쉽다.

2010년 지방선거의 상황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4대강사업, 세종시 등 중앙정치의 이슈들이 지역의 이슈들을 압도할 것이고, 예전 선거를 보면 지역별로 각종 개발사업이나 녹색성장산업들이 패키지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1주기도 다가온다. 풀뿌리민주주의는 여전히 풀뿌리보수주의에 밀려 힘을 쓰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민주당,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이 단일후보를 내는 방안을 고려한다고 하는데, 이 역시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반MB연합후보라는 틀이 얼마나 가벼운가? 이명박을 싫어하면 모두다 내 편일까? 단일후보를 만들면 시민들은 무조건 이를 지지해야 할까? 중앙에서 모여 패키지를 합의를 보는 건 시민을 관객의 자리에 앉혀 놓는 대의민주주의와 무엇이 다를까?

6월의 선거에만 초점을 두지 말고 올 한 해에 정치무대 자체를 뜯어고치는 작업을 해보면 어떨까? 더 이상 관객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내가 직접 정치무대에 뛰어들면 어떨까? 시민들이 함께 지역공동체를 만들어 가면 어떨까? 새로운 정치실험을 위해 과거의 의미들, 예를 들어, 한일합방 100주년, 4월민중항쟁 50주년, 5월 광주항쟁 30주년같은 사건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2. 선거 때 무얼 할까?


(1)첫 번째 방법, 그냥 투표만 할까?

마치 투표를 하는 게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지는 것처럼 얘기하지만 글쎄올시다. 만일 투표를 할 만한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할까? 최악을 피하기 위해 조금 더 나은 사람에게 투표하면 내 마음은 편할까? 그 놈이 그 놈같은 선거판에서 반드시 투표를 해야 한다는 것도 스트레스이다.

정말 끌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면 무효표를 만들면 어떨까? 그냥 무효표만 만들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니 무효표를 만들려면 자신이 무효표를 찍는 이유를 널리 알리고 선거 대신에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싶다고 외치고 공감하는 사람들을 모아야 한다. 인터넷에 무효표 사이트를 만들고 사람들의 의견을 받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


(2)두 번째 방법, 선거운동을 좀 도와줄까?

결론이 어떻게 날지는 모르겠지만 반MB를 내세운 후보단일화가 한창이다. 지방선거에서 반MB연대가 과연 올바른 방식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명박이 싫으니 다른 정당의 선거운동을 도와주고 싶을 수 있다. 이왕 선거운동을 할 거면 성별, 직업별, 계급별 비례에 맞는 사람을 밀어주자. 그리고 똑같은 후보라면 여성을, 농민이나 노동자계급 출신을 밀어주자. 그래야 배신의 확률이 낮아진다.^^;;

그리고 선거운동을 할 생각이라면 미리 선거법을 좀 공부해 두는 게 좋다. 현행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공무원도 선거운동에 참여할 수 없고, 향토예비군 간부, 주민자치위원회의 위원, 새마을, 자유총연맹,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의 임원 및 대표자도 선거운동을 할 수 없다. 이들은 “교육 기타 명목여하를 불문하고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의 업적을 홍보”하거나 “선거운동의 기획에 참여하거나 그 기획의 실시에 관여하”거나 “정당 또는 후보자에 대한 선거권자의 지지도를 조사하거나 이를 발표하는 행위”, “선거기간중 소속직원 또는 선거구민에게 명목여하를 불문하고 법령이 정하는 외의 금품 기타 이익을 주거나 이를 약속하는 행위”, “선거기간중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으로 시행하는 사업중 즉시 공사를 진행하지 아니할 사업의 기공식을 거행하는 행위”, “선거기간중 정상적 업무외의 출장을 하는 행위”, “선거기간중 휴가기간에 그 업무와 관련된 기관이나 시설을 방문하는 행위” 등이 금지되어 있다. 이 말을 뒤집으면 뭘까? 이런 사람들이 선거운동에 참여하면 적극적으로 신고하자. 이런 사람들이 암암리에 선거운동을 하며 토호들의 당선을 도우니 두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자. 그리고 “누구든지 교육적·종교적 또는 직업적인 기관·단체 등의 조직내에서의 직무상 행위를 이용하여 그 구성원에 대하여 선거운동을 하거나 하게 하거나, 계열화나 하도급 등 거래상 특수한 지위를 이용하여 기업조직·기업체 또는 그 구성원에 대하여 선거운동을 하거나 하게 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지위를 이용해 선거운동을 하면 신고하자.

또한 후보자와 그 배우자(배우자 대신 후보자가 그의 직계존비속 중에서 신고한 1인을 포함), 선거사무장, 선거연락소장, 선거사무원, 후보자와 함께 다니는 활동보조인 및 회계책임자를 제외하면 어깨띠나 옷, 표찰, 수기, 마스코트 등을 사용하여 선거운동을 할 수 없다. 하는 사람이 있으면 신고하자. 그리고 “누구든지 숫자ㆍ부호 또는 문자를 조합하여 전화번호ㆍ전자우편주소 등 수신자의 연락처를 자동으로 생성하는 프로그램 그 밖의 기술적 장치를 이용하여 선거운동정보를 전송하여서는 아니된다”고 되어 있다. 자기 연락처나 메일주소를 밝히지 않은 사람이 선거운동을 하면 신고하자.

선거법이 좋은 건 아니다. 개떡같지만 국민이 아닌 자나 19세 미만의 청소년은 선거운동에 참여할 수 없다. 왜 참여하면 안 되는 걸까?


(3)세 번째 방법, 정치계약을 맺자!

선거만 되면 서민후보, 무슨 무슨 후보가 난립한다. 열심히 일하겠다니 기특하지만 그 말을 어찌 믿고 4년 동안 책임을 맡길 수 있으랴. 그러니 무슨 일을 하겠다고 하면 그와 정확하게 계약을 맺자. 즉 후보자와 ‘정치계약’을 맺자! 그냥 당선을 위해 뛰어주는 게 아니라 ‘정치계약’을 맺자. 당선되고 난 뒤에 자기 마음대로 결정을 내리면서 민심을 받들었다고 떠들지 못하도록 일본의 ‘대리인운동’처럼 대리인으로 일하게 하자.

지방의원이나 단체장으로 선출되는 것보다 선출되고 난 뒤의 과정이 훨씬 중요하다. 일본 <가나가와 네트워크>의 경우 “의회에 보낸 사람을 의회 바깥에서 지원을 해주는 ‘공육(共育, 상호교육을 통한 상호성장) 시스템’”을 강조한다. ‘대리인 운동’이라는 표현이 한국사회에서도 많이 쓰이고 있는데, 대리인만큼 중요한 것이 상호성장이라고 본다. 지방의원이나 단체장이든 그 속에서 활동하며 경험한 것을 독점하지 않고 나누고, 제도권 밖의 운동이 자칫 정형화되기 쉬운 고민에 활력을 제공하는 이중적이고 상호적인 체계가 있어야 정치세력화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나?

그리고 후보자들한테만 요구하지 말고 주민들에게도 똑바로 감시하고 책임을 묻겠다는 책임서명운동을 하자. 정치인을 뽑아놓고 나 몰라라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뽑은 책임을 지고 앞으로 함께 하겠다는 서명운동. 선거감시를 위한 선거운동이 아니라 유권자가 스스로 결의하고 동네일에 참여하겠다는 ‘공정선거운동’을 하자. 선거법에 따르면 선거운동을 위한 서명이나 날인이 아니라면 서명을 받아도 무방하다.

그리고 진보정당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국회에 진출한 자원과 지역을 연결하며 정책을 만드는 역할을 맡겠다는, 즉 아젠다 형성과 정책연관성을 살리고 법률과 조례가 결합하는 중간매개의 역할을 하는 정당이 되겠다는 약속을 받자. 그리고 그 약속을 증명하는 의미로 정당공천후보자들에 대한 기본적인 기준을 마련하고 지역단체가 함께 공천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라고 요구하자.

지금 다른 지역에서는 지금 유권자연대, 마포풀뿌리좋은정치네트워크같은 실험들이 진행중이다. 그런 사례들을 참조해도 좋다.

- 관악유권자연대는 지역정치에서 다룰 정책을 만들고 주민후보를 발굴하고 당선시키는 활동을 펼칠 예정이다. 후보를 공개모집하고 후보검증절차를 거쳐 주민후보를 선정할 예정이고, 주민후보들은 관악유권자연대가 지향하는 가치들, 즉 인권, 복지, 생태, 풀뿌리민주주의, 연대와 협동의 가치에 동의해야 한다. 관악유권자연대는 선거 이후에도 행정과 의정을 감시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운동을 펼칠 계획이다(cafe.daum.net/2010gwanak)

- ‘마포 풀뿌리좋은정치네트워크(약칭 마포풀넷)는 선출절차에 따라 정해진 주민후보에게 전면적인 지원(선거자금, 선거인력, 선거정책)을 해서 후보 개인이 돈을 쓰지 않도록 할 예정이다. 그리고 ‘주민후보’로 나서고자 하는 사람은 마포풀넷과 후보자와 주민 사이의 서로 지켜야 할 구체적 약속이 담긴 소정의 ‘협약서’를 작성해야 한다. 이 주민후보의 구체적 성격(무소속 여부 등)은 운영위원회에서 안을 제시하고, 회원 투표로 이를 확정할 예정이다(http://community.microtop10.com/archive/13)


(4) 네 번째 방법, 어차피 낙선할 거라면, 하고 싶은 말 다 하자!

만일 후보자로 선거에 나설 생각인데 당선가능성이 없다면 그냥 길목 좋은 곳에서 하루 종일 떠들자. 뻔한 얘기 말고 진솔한 삶의 얘기를 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인다. 괜히 옆의 측근 말만 듣고 당선될 수 있을 거란 부질없는 희망을 버리자. 혹시 아나? 진솔한 마음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당선될 수 있을지. 아니면 적어도 15/100 이상의 득표를 얻어 기탁금을 되찾을 수 있지 않겠나.


(5) 다섯 번째 방법, 생활정치보고서를 만들자!

보통은 선거운동을 하며 온 힘을 다 빼고 선거가 끝나면 아노미 상태가 된다. 이기면 이긴대로, 지면 진대로 아무런 평가 없이 그냥 지나가고 4년이 지나면 또 다시 선거에 관한 고민을 시작한다.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평가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평가는 꼭 니가 잘 했니, 내가 잘 했니를 따지는 과정이 아니다. 선거에 임하기 전에 미리 활동의 목표를 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선거에서의 목표는 당선만이 아니라 지역복지정책, 청소년인권 등 다양한 의제를 제안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목표를 둔다면 당선과 무관하게 그 의제들을 후보자나 당선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후에 실천하는가를 계속 따져야 한다. 그리고 선거운동도 그런 의제들이 선거를 통해 지역사회에 순환되도록 해야 하고, 단순히 선거에 동원되는 방식이 아니라 선거를 자기 목표를 실현하는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중요한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세부적인 과제를 정하고 그 과제를 위해 어떤 활동을 펼쳤고 그런 활동이 실제로 그런 과제를 실현하는데 잘 맞는지, 아닌지를 따져야 한다. 이번 선거를 통해 우리가 목표로 삼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정하고, 그 목표에 맞춰 세부적인 행동계획을 짜고, 그 행동계획을 실천한 뒤에 각각의 계획들을 평가하고 보고서를 작성한다. 어느 지역을 가든 선거에 뛰어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있지만 선거과정을 기록하고 그것을 평가한 자료들은 보기 어렵다. ‘선수’들은 있는데, ‘매뉴얼’은 없다. ‘생활정치보고서’라는 매뉴얼을 작성하고 선거 때마다 업그레이드한다면 다음 선거를 제대로 준비할 수 있다.


(6) 여섯 번째 방법, 적이 아니라 친구를 만들자!

현재의 선거는 적을 만들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이 어떠하건 그것이 표로 연결되지 않으면 중요하지 않다. 당선만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선거는 친구보다 적을 만드는 과정이고 그나마 관계가 있던 사람들마저도 하나씩 그 관계가 분명해지며 정리되는 과정이다. 그러다보니 선거는 승리하든 지든 지역사회에 많은 상처를 남긴다. 우리는 상처를 서로 치유할 만큼 충분히 소통하고 있나? ‘우리가 남이가’라는 마음가짐은 없나?

어떻게 하면 지역정치를 통해 적이 아니라 친구를 만들 수 있을까? 어찌보면 방법은 간단할 수 있다. 친구가 되려면 만나야 하고 서로의 관심사가 비슷하다는 점을 확인해야 한다. 지역주민이 비슷한 관심사를 가지는 문제는 무엇일까? 동네를 한바퀴 돌다보면 사람들과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많은 꺼리들을 찾을 수 있다. 물론 얘깃거리가 많다고 해서 사람들이 모이는 건 아니다. 사람들은 어떤 얘기에 관심을 가질까? 사람들의 분노를 자극하고 열 받게 만드는 얘기가 아무래도 가장 효과를 거두기 쉽다. 그렇다면 우리 동네에서 사람들이 가장 열 받아 하는 문제는 뭘까? 거기서 시작해 사람들을 만나고 꼬시고 친구가 되면 지역일을 풀어 가는데 좋다.


(7) 일곱 번째 방법, 지금부터 지역발전 10개년 계획을 작성하자!

지역의 미래계획을 짜는 사람들은 공무원들이 아니라 바로 주민이어야 한다. 그냥 주민이라고 하면 감이 오지 않는다. 우리 마을에 누가 사는지, 어떤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지, 우리 마을의 독특한 문화는 무엇인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대화를 나누는지 귀를 기울이며 숨겨진 자원을 찾아야 한다.

10년 뒤의 우리 마을을 생각해 보자. 나는 이 마을에 살고 있을까? 내가 이 마을에 계속 살고 있다면 왜일까? 단지 전세나 월세 때문에? 아니면 사람들이 좋아서? 한국의 수도권이 과연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지금과 같은 사회경제적 조건에서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이런 얘기를 주민들과 함께 나누다보면 한숨이 나오기 마련이다. 한숨이 나올 때 주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방안을 나누며 서로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 주민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민들과 더불어 지역발전계획을 짜야 한다.


(8) 여덟 번째 방법,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다!

선거가 진행되는 과정을 잘 살펴보면 뿌옇게 보이던 지역토호들의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누가 한나라당 선거운동을 하는지, 어떤 조직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이는지, 그런 것을 일일이 기록하고 지역토호 지도를 그리자. 적을 알면 이길 수 있다고 하지 않나. 어떻게 활동하고 누구를 만나는지를 꼼꼼히 기록하는 스파이가 되자.

소위 진보단체나 정당이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나는지는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지역토호들이 누굴 만나고 어떻게 활동하는지 거의 모른다. 선거를 통해 그들의 실체를 드러내자.^^

선거가 끝난 뒤에 이 토호지도는 아주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선거가 끝나면 분명히 토호들이 사는 지역에 여러 가지 개발사업들이나 수상한 정책들이 시행될 것이다. 그때 이 토호지도를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



3. 모두가 행복한 정치는 불가능할까?


(9) 아홉 번째 방법, 과거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자!

그동안 여러 선거를 거쳤는데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은 행복했을까? 그나마 당선되면 노련한 지역 활동가가 사라지는 대신 그럭저럭 괜찮은 지역정치인이 생기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지방의회에서 소수파로서 그다지 영향력은 행사할 수 없고 개인적인 야심에 따라 활동영역을 광역, 국회의원 등으로 넓히다보니 정작 자기 기반이 약해진다. 결국 당선된 사람은 지역 내에서 고립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도 그가 행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단체 후보를 당선시킨 단체는 행복했을까? 출마 후 지역단체들의 활동영역과 지역정치인의 활동영역이 괴리되어 평상시보다 훨씬 더 못하게 소통하는 경우가 많았다. 단체는 정치인에게 필요한 사안에 대한 도움을 못 받는다는 불만을 가지고, 정치인은 자신의 의정활동을 지원하지 않고 소수파의 입지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불만을 가진다. 결국 당선자와 단체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고 심지어 싸우는 경우도 있었다. 단체는 행복했을까?

부패한 정치구조를 개혁할 뿐 아니라 권력을 주민들의 손에 돌려주기 위해 정치권으로 투신하고 이런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비슷한 정치인들과 연대하는 것, 분명 매력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실제로 가장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성과를 가져올 수 있기에 정치세력화는 더욱더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런 매력이 실현된 적이 있나? 단체장이나 지방의원이 바뀌면 정치가 바뀐 걸까?


(10) 열 번째 방법, 내가 행복하기 위해 마을이 행복해야 한다!

과거 지역정치인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지역주민들의 참여와 조직화, 그리고 임파워먼트(개인적 임파워먼트와 조직적 임파워먼트)를 강조했다. 왜 그럴까? 선거에 임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그것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진정한 정치세력화는 주민들을 헌신적으로 대변하는 사람들이 여럿 나오는 게 아니라 주민들 스스로가 정치화되고 정치인들과 자신의 차이를 의식하지 않을 때, 언제라도 자신이 저런 책임을 맡을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가질 때 실현된다고 본다. 정치가 무엇이고 어떻게 실천되어야 할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주민운동에 요구된다.

좋건 나쁘건 여러 가지 주민참여제도들이 우리 사회에 도입되어 있다. 정보공개청구, 주민투표, 주민소환, 주민발의, 참여예산 등 다양한 방법의 활용해서 정치적 기회구조를 스스로 만들자. 아이 한 명이 자라려면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서로 돕고 보살피는 과정을 만들어 보자. 행복해지고 싶다면 마을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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