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국가와 저 국가의 사잇길


2008년에 때 아닌 논쟁이 건국 60주년 기념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60주년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주장했고, 60주년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영토와 주권을 가진 국가의 실효성을 주장했다. 아주 식상한 내용으로 진행되었지만 그 논쟁은 그동안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배워왔기에 거의 묻지 않았던 질문을 던질 기회를 마련했다. 도대체 우리에게 건국이란 어떤 의미일까? 친일파를 몰아내기는커녕 친일파에 맞섰던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 살해하고 기득권층의 배만 불렸던 대한민국이 언제 누구의 뜻을 받들어 세워졌는지가 왜 중요한가?

 

그리고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집회는 더욱더 본질적인 질문, 즉 우리에게 국가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먹거리조차 자유로이 결정할 수 없는 나라에서 왜 우리는 국민으로 살아야 하는가? 국가가 내 뜻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도 나는 계속 국민이어야 하는가? 국민으로 살지 않으면 나는 행복하지 못할 것인가?

 

그동안 이런 물음을 던지지 못한 것은 우리의 역사인식이 국사(國史)의 틀을 벗어나지 못해서이다. 민족주의는 기득권을 차지한 자들을 보호하고 사회주의는 그들을 비판하며 노동자․농민의 세상을 주장했지만, 둘 다 자기 역사의 틀을 국가에서 찾았다. 각자가 자신의 국사를 기록하고 그 정당성을 고집해 왔기에, 우리는 국가가 아닌 다른 무엇을 통해 나와 우리의 행복을 그려본 적이 없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을 수 있다. 사람이 사는데 역사나 국가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허나 내 옆의 가족, 친구, 애인조차 믿을 수 없는 불안한 사회에서 국가에 대한 우리의 애정은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발휘하고 멀쩡하던 사람이 한순간에 태극기를 흔드는 애국자로 변신한다. 평상시에 “왜?”라는 물음을 던져본 적 없기에 국가는 은근히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

 

문제는 그렇게 충성을 바쳤건만 국가가 내 삶의 기반을 마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가는 자신이 필요한 것을 내게 요구할 뿐 내가 필요한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딱히 맞설 방법도 없고 대안도 없으니 무섭고 더러워서 참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 삶은 더 불안하고 서글프다. 지금 우리가 서글픈 것은 역사를 트집잡는 뉴라이트의 억지보다 새로이 역사의 흐름을 짚을 좌표가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추상적이고 공허하다 하더라도 이념은 길잡이 역할을 한다. 밤하늘에 뜬 별을 보고 사람들이 길을 찾듯이, 이념은 우리 사회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 뉴라이트들이 지난 역사를 부여잡고 온갖 트집을 잡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하늘을 보지 않고도 제 갈 길을 잘 찾아가면 좋겠지만 지금 우리의 삶은 너무나 불안하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삶이 아니라 국가나 재벌이 정해놓은 좌표를 보며 쫓기듯 삶을 산다.

 

그런데 조선, 일제 식민지, 미군정,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국가 사이에 놓인 사잇길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을까? 국사의 틀을 벗어나 풀뿌리 민중들이 살아왔던 기록을 엿볼 수는 없을까? 설령 그런 기록 자체가 진리는 아닐지라도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면 그런 시도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국가와 자본이 우리의 삶 속으로 침투하던 시대를 돌이켜보려 한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당시 인구의 83%를 차지했던 농민들은 어떤 세상을 꿈꿨을까? ‘오래된 미래’라는 말의 참신함이 어느 정도 냉랭해진 지금이지만 저 곳의 얘기가 아니라 이 곳의 얘기라면 다시 온기가 돌 수 있지 않을까?



식민지 시대의 저항하는 농민공동체


1980년대 초 라나지뜨 구하(Ranajit Guha)를 비롯한 인도의 역사학자들은 식민주의와 민족주의 관점을 비판하고 민중의 관점에서 역사를 다시 인식하기 위해 서발턴(subaltern)이라는 개념을 주장했다. 스스로 만든 개념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A. Gramsci)에게 빌려온 개념이지만 이들은 이것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되짚을 새로운 틀을 만들었다. 특히 이들은 식민권력과 토착권력을 전복시키려는 농민들의 저항을 분석하며 농민을 다시 정치의 무대에 올려놓았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이런 노력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서발턴 개념을 빌려온 연구들이 제법 있지만 그 연구들은 주류 역사학을 비판하거나 탈근대/변경의 역사를 주장할 뿐 역사를 근본적으로 재해석하며 농민들을 정치의 주체로 재구성하지 않았다. 기존의 국사보다 인식의 폭이 넓어졌지만 권력의 결을 거스르며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시도는 드물었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거칠게나마 우리 농민들의 저항과 농민공동체의 형성을 살펴보려 한다.

 

러시아의 사상가 크로포트킨(P. Kropotkin)이 제안했던 아나코-코뮨주의(anarcho-communism)라는 개념은 일제 시기 농민공동체의 의미를 되짚어보는데 유용하다. 아나코-코뮨주의는 그동안 《녹색평론》에 몇 차례 소개했는데, 농업과 소공업에 바탕을 둔 자치와 자급의 마을공동체를 뜻한다. 외국말이라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 개념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을 때 농민들은 그것이 뜻하는 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말은 낯설지만 그것이 지향하는 서로 돕고 보살피며 함께 꾸려가는 삶은 전혀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농민공동체가 지금처럼 낭만적인 향수로 얘기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농민들의 삶을 지탱하는 실제 현실의 버팀목이었다. 19세기부터 한국의 농민들은 민란(民亂)을 일으키고 면과 동리 단위로 모정(茅亭), 농정(農亭), 농청(農廳)과 같은 공간에서 촌회(村會)나 향회(鄕會)를 열며 자치질서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일제는 한국의 마을공동체들을 파괴하려 들었다. 이미 동학운동을 경험했던 일제는 자신의 지배를 위협하는 저항의 기반이 농민공동체임을 깨달았다. 이를 파괴하기 위해 일제는 한일합방 이전인 1896년 13도 개정 때부터 군수의 역할을 보좌하던 향장(鄕長)과 향청(鄕廳)을 폐지했고 1914년에는 부군면을 통합하고 면장을 임명했다. 마을이름도 ○○동으로 바꿔서 마을의 정체성을 없앴다. 그리고 경찰과 헌병의 수를 매년 늘리고 그들에게 범죄단속이나 첩보수집만이 아니라 모종심기와 토지측량, 위생검열에 이르기까지 민중의 삶을 시시콜콜 간섭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줬다.

 

일제의 식민지 지주제 또한 농민들의 삶을 뿌리채 뽑으려 들었다. 자작농은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소작농은 높은 소작료와 각종 부역에 시달리다 일고(日雇)나 도시빈민으로 전락했다. 쌀의 생산량을 늘리려는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은 수리조합을 만드는 비용을 농민들에게 부담시키며 삶을 더욱더 힘들게 만들었다. 일제조차도 농민층의 붕괴를 보다 못해 1933년부터 농촌진흥운동을 벌이며 농가경제의 자력갱생, 건전한 농민정신 함양을 주장할 정도로 농민들의 삶은 어려워졌다.

 

그렇지만 한국의 농민들은 이런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제 초기부터 의병(義兵)의 전통을 따르는 반란이 전국 곳곳에서 나타났다. 일본 측의 통계를 따르더라도,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총 2,852회의 전투가 벌어졌고, 141,185명이 이 전투에 참여했으며, 죽은 사람만 해도 17,697명, 부상자가 3,706명, 체포된 사람이 11,994명에 달했다. 주로 해산된 군대나 지방유림의 지도를 받았지만 많은 농민

들이 이 반란에 참여했다.

 

그러다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은 농민들의 자발적인 의지로 일어난 사건이고 사상가 함석헌의 말처럼 “씨의 역사”, “자주(自主)하는 민(民)의 역사”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3․1운동을 민족이나 독립의 관점으로만 해석해 왔지만 3․1운동은 조선 말기 수많은 민란들의 뒤를 이었고 가까이는 1894년 동학혁명의 기운을 이어받았다. 이 땅의 민중들은 산꼭대기에 횃불이나 봉화를 피우고 만세를 외치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주장했다. 시골 장터가 열리는 곳마다 만세시위가 벌어졌고,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릴레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경찰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은 사람의 시신을 떠메고 상여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상인들은 가게 문을, 학생들은 학교 문을, 노동자들은 공장 문을 닫았다. 농민들은 일제 품종이나 묘목을 심지 않고,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일제 상품을 사지 않으며 일상 속에서 싸움을 벌였다.

 

3․1운동을 통해 이 땅의 민중들은 권력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치와 자급의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 점은 자치공동체가 해온 역할을 대신하던 면사무소가 공격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전남 순천, 평안도 의주, 평안도 신미도 등지의 주민들이 면사무소를 접수하고 자치업무를 봤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농민들은 행정기관을 접수하고 서류철을 불태웠을 뿐 아니라 회의를 열고 공동체의 일을 함께 돌봤다.

 

일제가 3․1운동을 힘으로 짓누른 뒤에도 풀뿌리 민중들의 열망은 쉽게 식지 않았고, 1920, 30년대의 농민운동은 농촌공동체를 다시 세우려 했다.



농민공동체에서 싹튼 다양한 사상들


3․1운동 이후 새로운 사회에 대한 갈증이 깊어지면서 다양한 사상들이 농민들 속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소작쟁의를 일으키며 지주제에 맞서던 농민들은 아나키즘, 사회주의, 민족주의 등 다양한 사상들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국사는 이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된 농민들의 저항을 기록하지 않았고, 사회주의 역사관은 농민의 저항을 개량주의와 사회주의로 구분했다. 기존의 역사관은 임시정부의 법통이나 해방의 의미를 강조해야 했기 때문에 농민들을 무기력한 존재로 그리며 해외의 독립운동을 주로 다뤘다. 그리고 사회주의 관점은 국내의 농민운동을 혁명과 개량의 관점에서 ‘평가’하며 사회주의 계열만을 진정한 사회운동으로 봤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 관점은 천도교 계통의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나 기독교계의 농민운동, 협동조합운동 등을 일제 농민개량화정책의 결과물로 보며 개량주의라 평가했다.

 

하지만 이런 운동을 개량주의로 재단할 수 있을까? 기독교계의 손정도(孫貞道)는 “우리가 時下를 쫏차 基督의 精神을 發揮하나니 朝鮮 內地나 滿洲나 基督敎的 新農村이 組織되여야 하겟고 압흐로는 네게 잇는 所有를 다 이 農村에 드리노켓느냐 하는 問答으로 그 이가 敎人되고 못됨이 나타나게 될거시다”라고 말하며 소유 없는 ‘기독교 사회주의’를 모색했다. 손정도는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설립해 “無産農民으로서 金錢이 잇는 資本家들을 抵抗하고 스사로 生産하기가 不能할지니 不可不 貧者 貧者끼리 協同互助하는 것으로 生産의 資本力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상촌 건설에 힘썼다. 그리고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영향을 받았던 이용도(李龍道)는 톨스토이를 스승이라 부르며 빈자와 연대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주장했다. 이용도는 장로교회에서 이단으로 선언되는 파문을 겪으면서도 교회를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춤추고 기도하는 공동체로 만들려 했다. 또한 3․1운동 이후 점점 보수화되는 교회에 실망하던 이대위(李大偉)를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이 YMCA를 중심으로 사회복음운동과 농촌협동조합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유재기(劉載奇)는 협동조합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활화하는 유기적인 조직체라고 평가하며 장로회 농촌운동을 이끌었다. 유재기는 독일 라이파이젠식 신용조합과 영국 로치데일식 소비조합을 만들어 소농의 자립과 협동을 유도하기도 했다.

 

이런 다양한 흐름을 모두 개량주의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자기 재산을 모두 공동체에 바치고 서로 돕고 협동하며 살겠다는 사람들이 현실과 타협하는 개량주의자들일까? 빈부와 계급을 넘어 사랑과 협동을 나누며 서로의 삶을 떠받치는 공동체를 만들려는 노력이 개량주의로 평가되어야 할까?

 

그리고 당시의 농민운동을 사회주의운동과 그렇지 않은 운동으로 구분하는 것도 위험한 시각이다. 일제 시기의 농민운동사를 연구한 역사학자 조동걸은 사회주의운동이 소작쟁의를 자신들의 운동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고 일제도 농민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일부러 사회주의자를 만들었던 경우도 허다했다고 지적하기 때문이다.

 

농민운동을 개량과 혁명을 평가하는 관점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농민공동체에서 싹트던 다양한 사상들을 새로이 평가할 수 있다. 가령, 톨스토이가 스스로 아나키스트임을 주장하지는 않았으나 자급하는 농촌공동체를 이상으로 삼았음을 생각하면, 앞서 얘기한 기독교 사회주의운동이 지향하는 사회주의는 소련식 사회주의보다 아나코-코뮨주의와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상에 맞춰서 현실의 농민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농민공동체를 기반으로 다양한 사상이 재구성되고 있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 즉 단순히 외국의 이론을 좇아 만들어지는 현실이 아니라 우리 현실 속에서 재구성되는 사상을, 그리고 농민공동체 속에서 싹트는 자치와 자급의 이념을 볼 수 있다.

 

그 점은 천도교에서 두드러졌다. 예를 들어, 천도교계의 김일대(金一大)는 종교가 민중의 아편이지만 동학당(東學黨)을 이어받은 천도교는 “인내천주의(人乃天主義)로서 광제창생(廣濟蒼生)을 하겟다는” 새로운 정치사상을 가진 교정합일체(敎政合一體)라고 주장한다. 1925년에 조직된 조선농민사는 사회 전체의 행복을 얻고, 농민대중의 교양을 향상시키고 농민대중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킨다는 목적을 세우고 소비조합운동, 생산조합운동, 기술향상운동, 경제균형운동(經濟均衡運動)을 펼쳤다. 김일대에 따르면, 1930년 조선농민사가 천도교청년당과 통합하면서 불과 10개월만에 새로 들어온 사원이 3만명, 새로 만들어진 군단위 농민사가 50개소, 리단위 농민사 1,000개소라는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고 한다. 김일대는 조선농민사가 조선 전체의 경제력을 발전시키고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농민사는 계와 두레같은 전통적인 공동노동조직을 공동경작계로 꾸리고 군단위마다 공생조합(共生組合)을 만들며 농민들이 자급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려 했다. 그리고 《조선농민》과 《농민》등의 잡지를 발행하고 강연회를 열며 계몽운동과 농민야학에도 힘썼다. 《조선농민》은 야학의 교재로 사용될 〈농민독본〉, 〈농민과학 강좌〉, 〈위생강좌〉, 〈상식문답〉 등을 연재하고 농민야학과 귀농운동에도 힘을 썼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조선농민》과 《농민》이 아나키즘의 경향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역사학계에서는 연구가 거의 없지만 국문학계에서 이런 논의가 조금씩 활발해지고 있는데, 예를 들어 조선농민사의 중농주의를 민족주의적 개량주의보다 아나키즘에 기반한 자생적인 이념의 하나로 평가하기도 한다.

 

특히 이 잡지에 글을 실은 작가와 비평가들은 본격적인 농민문학의 장을 열었을 뿐 아니라 공동경작제를 통한 이상촌건설을 추구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허문일(許文日)의 〈自主村〉은 그런 이상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얘기된다. 문학평론가 김택호는 허문일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민중이 함께 만들어가는 세계를 강조했던 인내천주의가 제국주의의 사회진화론을 거부하고 이상촌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아나키즘과 소통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문학작품만이 현실의 노동조직에서도 그런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각 군의 농민사들은 공동경작에 관한 규약을 만들고 협동조합을 설립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공동경작계는 협동노동을 공동체의 규약으로 발전시키며 서로 돕고 보살피는 자급과 공생의 체계를 마련했다. 조선농민사만이 아니었다. 1926년 6월 전진한(錢鎭漢)이 일본 동경에서 조직한 협동조합운동사(協同組合運動社)는 “①우리는 협동․자립 정신으로써 민중적 산업의 관리와 민중적 교양을 한다. ②우리는 이상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조합정신의 고취와 실지 경제를 기한다”는 목적을 내세웠다. 협동조합운동사는 방학 동안 경상북도 일원을 순회하며 강연회를 열고 협동조합을 조직했다. 그래서 1928년 11월에는 협동조합의 수가 22개, 조합원수 약 5천명에 이르렀고 자본금도 4만 5천여원에 달했다.

 

그런데 이 협동조합이야말로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기대를 걸었던 삶의 양식이었다. 독일의 사상가 란다우어(G. Landauer)가 말했듯이 협동조합의 정신인 서로 돌봄(mutuality)은 빈곤-노예-노동-생산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바꾸고 자연의 질서를 회복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서로 돌봄은 돈의 지배를 없애고 일을 하고자하는 모든 사람이 일하게 하고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키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정신이다. 한국의 아나키스트들도 협동조합운동에 많은 노력을 쏟았을 뿐 아니라 계와 두레같은 전통적인 노동조직에서 상호부조의 가능성을 찾았다. 따라서 이런 노동조직 자체가 아나코-코뮨주의와의 강한 친화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상적인 면에서도 동학과 아나키즘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수운 최제우가 강조했던 바르게 이해하고 익히고 실천한다는 신경성(信敬誠)의 수행체계, 한울님이 네 몸 가까운 곳, 천지생명체에 모셔져 있으니 먼데서 구하지 말라는 인내천의 사상, 사물이 자기 속의 씨앗을 스스로 틔우며 조직해간다는 기화(氣化)의 사상은 아나키즘의 근본적인 논리와 맞닿아 있다. 즉 몸소 겪고 부딪치며 현실 속의 잠재력을 드러내는 직접행동(direct action), 자기 밖의 본질에 갇혀버린 고대와 근대의 정신을 비판하며 참된 자아(ego)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 정신과 육체, 사물과 본질을 구분하지 않고 통합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관점은 동학과 유사하다(사상적인 면은 기회가 된다면 다음번에 더 자세하게 다루고 싶다).

 

이처럼 식민지 시기의 농민공동체는 새로운 사상의 싹을 틔우는 배양기였다. 농민들은 각 마을의 ‘촌계’, ‘동계’를 디딤돌로 삼아 민간협동조합을 조직하고 ‘동회’나 ‘리회(里會)’같은 공동체적 연대를 이용하여 ‘면민대회’나 ‘촌민대회’를 열며 새로운 사회를 준비했다. 농민들은 “상호부조의 원칙에 의하여 정의를 지지하며 이상에 資할 과학으로 호상부조의 원리 아래 생존권 확립을 期하는 ‘이상향’을 지향”하기도 했다. 이상은 저 먼 곳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경향은 사회주의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김명식(金明植)과 김사국(金思國) 등이 활동했던 서울청년회는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상호부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는데, 서울청년회와 교류했던 전라도 지역의 사회주의운동들은 농민공동체를 디딤돌로 삼았다. 예를 들어, 전라남도 완도 근처의 작은 섬인 소안도(所安島)에서는 사회주의 계열의 소안노동대성회(所安勞動大成會)가 조선농민사의 공동경작계를 받아들여 함께 밭을 일구고 물고기를 잡았다. 그리고 완도 주변에서 조직된 ‘필연단’과 ‘살자회’도 “우리는 역사적 필연성인 진화법칙에 의하여 합리적 신사회의 건설을 기하자. 우리는 상호부조와 일치단결로써 민중운동의 충실한 역군이 되자”, “우리는 상호부조와 정의에 희생할 정신함양을 도모함. 우리는 신사회건설의 속성을 도모”하자는 강령을 결의하기도 했다. 아나키즘의 주요 노선인 상호부조가 사회주의 청년단체들의 주요한 강령이 된 것은 농민공동체 속에서 다양한 사상들이 재해석되고 재구성되었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다양한 사상의 흐름을 놓치고 그동안 역사를 아주 좁은 관점으로만 해석해 왔다. 당시 농민공동체에서 움트던 사상을 어떤 하나의 경향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농민들 자신이 변화하는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려 했고 공동체라는 기반이 그런 저항과 새로운 창조를 뒷받침했다는 점이다. 다만 일제가 그 싹을 무참히 짓밟았으면서 미처 꽃을 피워보지 못하고 사라졌을 뿐이다.



잠깐 피었다 사라진 아나키즘 공동체


그렇다면 아나코-코뮨주의의 지향을 실현한 농민공동체는 한국에 존재하지 않았을까? 일제 하의 한반도에서는 그런 이상촌을 찾기 어렵다. 춘천 신북면 천전리지역, 양주군 봉안촌지역, 북간도 어복촌, 안희제(安熙濟)의 발해농장 등의 이상촌 운동이 소개된 적은 있지만 그 이상촌과 아나코-코뮨주의와의 연관성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반도 밖의 북만주에서는 잠깐 동안 아나코-코뮨주의를 따르는 공동체가 만들어졌던 적이 있다. 무장항일조직인 신민부(新民府)를 이끌던 김좌진(金佐鎭)이 김종진(金宗鎭), 유자명(柳子明), 이을규(李乙奎) 등의 도움을 받아 만든 재만한족총연합회(在滿韓族總聯合會)가 만들던 공동체가 바로 그것이다. 중국의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1924년 4월에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1927년에는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며 다양한 활동을 펼치다 1929년 7월 북만주 해림(海林)에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했다.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크로포트킨의 농업론을 바탕으로 이상적인 농촌을 건설하려 했고 항일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민족주의와 협동전선을 펼치려 했다.

 

이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우리는 한 개의 농민으로서 농민대중과 같이 공동노작(共同勞作)하여 자력으로 자기 생활을 영위하는 동시에 농민들의 생활개선과 영농방법의 개선 및 사상의 계몽에 주력한다”는 당면강령을 세우고 자신의 뜻을 실현할 공동체를 찾았다. 때 마침 당시 신민부는 무장투쟁노선을 주도하는 군정파와 일상적인 정착을 시도했던 민정파로 갈라져 있었는데, 군정파를 주도하던 김좌진이 정착과 투쟁을 병행하기로 결심하고 아나키스트들의 도움을 얻으려 했다. 1929년 여름에 한족총연합회가 결성되고 이들은 상호부조와 자유연합이라는 아나코-코뮨주의의 조직원리에 따라 자치적인 농민공동체를 만들려 했다.

 

한족총연합회는 자신이 만주에 사는 한국 교민의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향상발전을 도모하며 동시에 항일구국의 완수를 위하여 재만동포의 총력을 집결한 교포들의 자주자치적 협동조직체”라고 밝혔다. 그리고 한족총연합회는 다음과 같은 사업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①교포들의 집단정착사업, 교포의 유랑 방지 및 집단부락 촉성, ②영농지도와 개량․공동판매․공동구입․경제적 상호금고 설치 등을 목적하는 협동조합사업, ③교육․문화사업, 즉 소학․중학의 설립운영, 각지조직의 연락 및 교포들의 소식․교포들의 생활개선․농업기술지도 등을 위한 정기간행물발행, 순회강좌․순회문고설치, 성인교육과 장학제도,  ④청장년에 대한 농한기의 단기군사훈련, ⑤중학출신자로써 군사간부양성을 위한 군사교육기관의 설립운영, ⑥항일게릴라부대의 교육 훈련․계획지도를 맡으며, 지방치안을 위한 지방조직체의 치안대의 편성지도 등을 위한 통솔부 설치.” 실제로 한족총연합회는 농민들이 생산한 쌀을 도정하기 위해 직접 정미소를 차리고 위탁판매까지 담당했다.

 

김종진은 “농민들의 조직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농민자신들이 필요에 의하여 상호단결하여 맺어져야한다는 것”이라고 봤고 한족총연합회를 지도자의 조직이 아니라 “농민자신의 자의적인 조직”으로 만들려 했다. 김종진은 “주민자신들의 생활을 위한 공동체로서 그들의 경제적 협력기구를 조직하고 그것을 중심하여 인보상조(隣保相助)하는 농촌자치체”를 만들려 했다.

 

그러나 북만주의 지배권을 다투던 화요파 만주총국의 공산주의자들이 1930년 1월 이후 한족총연합회의 핵심인 김좌진과 김종진, 이준근(李俊根), 김야운(金野雲) 등을 연이어 암살하고 만주가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한족총연합회의 실험은 결국 실패로 끝이 났다.

 

이 영향을 받아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해방 이후에 농민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예를 들어, 1946년 3월 10일에 조선농촌자치연맹(朝鮮農村自治聯盟)은 “①오등(吾等)은 자주 자치적 생활의 실천으로 농촌의 조직화를 기함. ②오등은 농촌의 합리적 경영을 위하여 공동경작, 생산수단 및 시설의 공동화를 기함, ③오등은 농공의 균형 발전을 위하여 농촌 실정에 적합한 공업 시설의 완비를 기함, ④오등은 농촌의 공동 이익을 위하여 협동조합적 기관의 철저 보급을 기함, ⑤오등은 비경제적 제 생활양식을 개선하여 생활의 과학화를 기함, ⑥오등은 우리의 교육급 문화기관의 완비를 기함, ⑦오등은 오등의 보건을 위하여 후생시설의 충실을 기함, ⑧오등은 상호부조적 윤리관의 실천에 의하여 국민도덕의 앙양을 기함”이라는 강령을 선언했다. 조선농촌자치연맹의 기원(祈願)은 그 강령을 이런 마음으로 노래했다. “사람살이의 터닦은 그대들이여/ 그대들의 땀과 눈물은/ 온 사람의 겨레의 살터를 닦았다. 사람들의 온 겨레를 길러내인 그대들이여/ 그들의 땀과 눈물은/ 온 세상을 입히고 먹이었다. 터닦고 길러내인 그대들이여/ 이 자유의 씨를 그터에 뿌리고 가꿔라/ 온 세상의 겨레는 그 가을을 기다린다”.

 

하지만 이런 시도 역시 미군정과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거치며 계속 좌절되고 말았다. 자치․자급의 농민공동체를 만들려는 움직임들이 계속 있었지만 그 시도들은 국가의 개입과 자본주의의 침투로 계속 좌절되었다. 그러니 공동체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국가와 자본의 힘으로 파괴되었다. 그런 경험을 반복해 왔기에 지금 우리에게 공동체는 국가보다 훨씬 낯설 뿐 아니라 너무나 약한 존재이다. 우리는 국가를 통하지 않고 다른 대안을 사유하지 못하고 국가를 통한 것만이 현실적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 틀을 깨지 못하고 진정 우리가 다른 사회를 꿈꿀 수 있을까? 공동체는 결코 무기력하게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공동체는 극렬하게 국가에 저항했고 그랬기에 국가는 공동체의 힘을 빼기 위해 새마을, 자유총연맹같은 끄나풀을 심고 토호들을 만들어 공동체 내부를 파괴했고 협동의 힘을 가로채기 위해 농협, 수협, 신협 등을 만들었다.



식민지 속의 식민지인 농촌과 농민공동체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농민공동체는 꿈같은 이야기이다. 한국사회에서 농촌은 ‘식민지 속의 식민지’인 이중의 식민지라 얘기될 수 있다. 한국이 아직도 사상과 이념의 식민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도시가 모든 자원을 약탈하고 있다는 점에서 농촌은 이중의 식민지이다. 이중의 식민지이기에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은 손쉬운 과제일 수 없다.

 

이시백 작가의 소설 《누가 말을 죽였는가?》(삶이보이는창, 2008)를 읽으면 농민공동체라는 말을 꺼내기가 무색하다. 지금 우리 농촌의 실제 모습은 ‘1박2일’이나 ‘패밀리가 떴다’에 등장하는 낭만보다 한미FTA라는 종말을 눈앞에 두고 떠날 수도 남을 수도 없는 무기력함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이제 인구의 7% 정도로 줄어든 농민들이 세상의 능동적인 주체로 나서기는 어려운 듯하고 그들이 꿈꾸던 세상 역시 이미 옛날 이야기로 변해버린 듯하다.

 

하지만 농촌에 사는 사람들만 농민이 아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과거에 농민이었듯이, 지금 도시에서 뿌리를 잃고 헤매는 존재들은 ‘미래의 농민’들이다. 농촌이 몰락하면 그 다음은 소도시가, 식민지의 대도시가 몰락의 길을 걸을 것이다. 과거의 농민들이 협동과 관계라는 과거의 유산을 물려받았다면, 미래의 농민들은 홀로 고립된 채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먹고 입고 자는 곳, 어느 하나 안심할 수 없는 삶에서 벗어나려면 나와 우리가 직접 짓고 만드는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 대안을 기다릴 게 아니라 직접 대안을 살아야 한다. 혼자서 살기는 어려우니 함께 살아야 한다. 그러니 농민공동체는 가능성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과거의 농민공동체가 저항의 기반이자 미래의 이념을 배양하는 공간이었다면, 지금의 우리에게도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 현재의 온갖 위기를 헤쳐가려면 우리는 다시 삶을 꿈꿀 수 있는 기반을 찾아야 한다. 무서운 속도로 식민화 과정을 밟아온 한국사회가 식민성에서 벗어나 자아를 되찾으려면 다시 공동체가 필요하고, 그 공동체는 소비의 도시를 벗어나 자급과 자치의 기반을 갖춘 농민공동체이어야 한다.

 

외부의 힘에 기대지 않고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더구나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살며 서로 보살필 수 있는 든든한 공동체가 있다면 삶의 조건은 달라진다. 만일 닥쳐올 에너지와 식량 위기를 벗어날 방법을 국가에서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미 이명박 정부의 ‘저탄소녹색성장’에 포섭되고 있다(조력발전, 풍력발전 등 수많은 녹색성장이 재앙을 예고하고 있다). 공동체가 아니면 무엇이 중앙집권화된 국가에게 자치를 요구하고 빈곤과 비참함으로 내모는 시장을 통제할 힘을 만들 수 있을까?

원래 청탁을 받은 내용은 ‘협동조합 신드롬’이었다. 협동조합기본법이 만들어지면서 협동조합들의 수는 빠르게 늘어나고 있지만 내실 있게 성장할 것인가라는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주제는 이미 여러 차례 논의된 바이고(나도 한 편의 글을 쓴 적이 있다1)), 당분간 그 진행과정을 보며 판단해야 할 문제이다.

 

그래서 이 글은 지금 이곳의 소비자생활협동조합으로 초점을 맞췄다. 새로운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지만 이미 자리를 잡은 협동조합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불협화음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가장 많이 드러나는 불협화음은 매장을 둘러싼 문제이다. 급기야 지난 5월 2일에는 광주광역시에서 생협매장 문제로 <아이쿱 광주권 생협>과 <한살림광주생협>의 토론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매장 문제가 현재 소비자생협들의 가장 큰 쟁점일까? 매장이나 그 입지가 중요하다는 건 일반 유통기업들과 다를 바가 없고, 공급에서 매장으로 생협의 물류망이 바뀌고 있기 때문에 갈등은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왜 그동안 서로 의논해서 원칙이나 기준을 마련하지 못했을까라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협동조합간의 연대라는 원칙이 희미해진 상황에서 이런 갈등을 둘러싸고 ‘협동조합간의 경쟁’이라는 논리가 등장한 것은 유감이지만 매장 외에도 소비자생협의 정체성과 방향을 놓고 진지한 논쟁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최근 《녹색평론》에 실린 박승옥 선생과 신성식 경영대표의 논쟁은 의미가 있다. “망하지 않고 사업체로서 살아남고 사업이 지속되는 것과 성장신화에 갇히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박승옥 선생의 지적과 “성장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그에 맞는 경영원칙을 세워야” 하지만 한국에서 소비자생협의 성장은 불가피하다는 신성식 대표의 반박은 곱씹어 볼만한 주제이다.

 

이 논쟁을 시작으로 다양한 논쟁들이 활성화되면 좋겠다. 협동조합의 정체성이나 비전, 그 사업방식이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협동조합운동역사에서도 주요한 주제였다. 이런 물음들이 있었에 협동조합운동이 지금껏 자기 몫을 충실히 해 오고 있었던 거라 믿는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논의를 조금 더 풍부하게 만들 이야기꺼리들을 제안하려 한다.

 

협동조합의 탈협동화, 다른 나라의 일일까?

 

《살림이야기》제 17호(2012년 여름호)에 “살리지 못하면 죽는다― 유럽 탈협동화 경향이 주는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협동조합의 탈협동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소개한 적이 있다. 그 글은 주로 갈러(Zvi Galor)의 글을 인용했는데, 이 글은 탈협동화 문제를 더 깊이 다룬 볼로냐대학의 바띨라니(Patrizia Battilani)와 베르겐대학의 쉬뢰터(Harm G. Schröter)의 공동연구 “탈협동화와 그 문제점들(Demutualization and its Problems)”(Quaderni DSE Working Paper, 2011년)을 소개하려 한다.

 

탈협동화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지만 이 연구는 기본적으로 소유권 구조의 변화, 전통적인 협동조합에서의 이탈, 협동조합의 사회적 가치변화를 특징으로 본다. 바딸라니와 쉬뢰터는 20세기부터 탈협동화가 진행되어 왔고, 1980년대 이후 특히 미국과 영국,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탈협동화 경향이 두드러졌다고 지적한다(그래서 2007년에는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이 탈협동화를 심층적으로 조사할 연구위원회를 소집하기도 했다). 반면에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탈협동화되었던 협동조합들이 다시 협동조합으로 변신하는 재협동화(re-mutualization)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바띨라니와 쉬뢰터는 기본적으로 탈협동화가 미국식 경쟁 자본주의와 비슷하고, 세계화의 흐름이 이런 경향을 강화시키고 있다고 본다.

 

이 연구에서 바띨라니와 쉬뢰터는 탈협동화의 원인을 다섯 가지로 지목한다.

 

첫째, 기업이나 정치․사회제도의 영향을 받아 협동조합이 사기업이나 투자자소유기업의 절차와 전략을 따르면서 협동조합의 조직이 점점 비슷해지는 경향(organizational isomorphism)

둘째, 공동소유구조가 너무 경직되어 급변하는 현실을 따라잡기 어렵다며 사유화를 지지하고, 급속도로 강화되는 경쟁에 적응해야 한다는 문화적 요인(cultural reasons)

셋째, 일반경제학 교육을 받고 상호성을 옹호하지 않는 경영진이 취임하고 이들이 조합원을 희생시켜 자기 이득을 취하려 하면서 생겨난 경영진의 착취(expropriation by managers)

넷째,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로 협동조합에 대한 반감이나 협동조합을 낡은 모델로 보는 의식이 확산된 정치적인 요인(political reasons)

다섯째, 자본이 제한되고 관리자에 대한 통제체계가 없는 협동조합의 비효율성 또는 성장전망의 부재(inefficiency or lack of growth perspectives)

 

이런 요인을 정리하면서 바띨라니와 쉬뢰터는 지난 20년 동안 ①조합원제도에 바탕을 둔 상호부조라는 전통적인 인센티브가 흐려질 경우(협동조합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을 때), ②정부가 탈협동화를 유도하는 인센티브를 제공할 경우, ③미래의 전망을 발전시킬 방법에 관한 대안적인 견해가 전통적인 견해보다 더 매력적일 경우에 탈협동화가 진행되었다고 지적한다. 특히 바띨라니와 쉬뢰터가 강조하는 건 협동조합이 기업으로 전환되기가 쉽지 않은데 정부가 탈협동화를 가능케 하는 법률들을 제정함으로써 여러 협동조합들(특히 보험과 관련된 협동조합들)이 탈협동화를 부추겼다는 것이다. 탈협동화가 적절한 법적인 틀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때로는 그런 법적인 틀이 탈협동화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보통 탈협동화가 성과와 성장을 내세우지만 바띨라니와 쉬뢰터는 탈협동화가 더 나은 효율성과 성과를 보장한다는 명확하고 보편적인 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 아울러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미국과 캐나다의 신세대협동조합과 같은 혼성조합(hybridization)이 탈협동화와 관련되어 있고 탈협동화가 혼성조합의 어두운 면이라고 말한다.

 

바띨라니와 쉬뢰터의 연구를 통해 탈협동화의 경향이 수십년 동안 강화되어 왔고 미국식 경제의 확산과 세계화의 흐름이 이런 경향을 강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미FTA를 체결하고 세계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 바띨라니와 쉬뢰터가 지적한 탈협동화의 원인이 한국의 소비자생협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협동조합의 대의원총회나 이사회가 형식적인 의결기구로 변하고 일반기업과 비슷하게 관리자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현상, 외부환경의 변화에 대응한다는 명목으로 1인 1표와 민주적 참여의 원칙을 훼손하는 현상, 일반기업의 경영전략이 협동조합에 적용되는 현상 등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그리고 한국에서 보편화된 무한경쟁, 승자독식의 논리가 협동조합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을까? 그러다보면 조합원들이 협동조합을 ‘조합’으로만 인식하게 되지는 않을까? 아울러 자본출자를 둘러싼 논쟁과 협동조합의 전략부재에 관한 논쟁 등도 불거지고 있는데, 이에 대한 판단의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이런 상황에서 협동조합을 일자리 창출의 도구로 보는 정부의 시각은 어떤 형태로든 협동조합의 성격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가 외부의 우려처럼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을 동원하는 ‘제2의 새마을운동’을 시작할 경우, 탈협동화 경향은 훨씬 더 강화될 수 있다. 바띨라니와 쉬뢰터가 지적하듯이 협동조합에 대한 정부정책이 탈협동화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자생협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일단 ‘협동조합간의 경쟁’이라는 틀은 이런 현실의 경향에 저항하고 그것을 바로잡기는커녕 탈협동화 경향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한살림광주생협>과 <아이쿱 광주권 생협>의 토론회에서 매장경쟁과 관련해 어느 한 매장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해서 그 지역에 다른 매장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독점’이고 협동조합 사이에도 경쟁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등장했다. 조합원을 위하고 전체 협동운동의 몫을 고려한다는 전제가 붙긴 했지만 이것은 경쟁이 시장을 활성화시킨다는 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리고 독점의 반대말이 경쟁이라는 것은 하이예크를 비롯한 자유주의 경제학자들(한국에서는 주로 자유기업원)이 강조하는 논리이다. 소비자생협이 이런 논리를 따라야 할까?

 

자유주의 경제학과 다른 관점에 따르면 독점의 반대말은 경쟁이 아니라 공유나 경제민주화, 자급자족이다. 생협매장의 지나친 경쟁을 막고 상생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 경쟁을 방해한다는 논리로 빠지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설령 어쩔 수 없이 경쟁을 고려하더라도 그건 일반기업과의 경쟁에 대처하는 방법이어야지 협동조합 간에는 적합하지 않다. 외려 소비자생협이 일정한 매장운영협정을 만들고 그런 규칙이 사회적 시장을 만들도록 자극해야 하지 않을까?

 

멘자니(Tito Menzani)와 자마니(Vera Zamagni)는 “이탈리아 경제의 협동조합 네트워크(Cooperative Networks in the Italian Economy)”(《Enterprise&Society》, 2010년)에서 이탈리아 협동조합운동의 성공이 네트워크에서 비롯되었다고 강조한다. 보통 네트워크라고 하면 하나의 중심을 가진 중앙화된 네트워크나 이리저리 분산된 탈중심화된 네트워크를 생각하지만 이탈리아의 협동조합들은 수평적인 네트워크(horizontal network)를 구성했기에 강한 힘을 키울 수 있었다는 거다. 이 네트워크에서 한 단위는 단순한 구성원일 수 있지만 때때로 다른 단위와 선으로 연결되거나 전체 네트워크를 코디네이터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다른 단위들이 자신에 의지하게 되면 전체 네트워크의 주요한 단위가 될 수 있다. 이 수평적인 네트워크가 시장경쟁력을 증가시키고 생산을 합리화시키며 공동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위험과 기회를 공유했다는 게 멘자니와 자마니의 평가이다.

 

국내에서도 ‘사회적 경제블록’이라는 말이 등장했지만 그것이 멘자니와 자마니가 말한 수평적인 네트워크를 지향하고 그렇게 형성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더 중요하게 소비자생협들은 그런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주요한 단위가 되고자 하는가? 아직 그런 경험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가능하다가 아니라 그런 경험을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축적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야 협동조합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고 기업문화가 바뀔 수 있다. 그래야 끊임없이 자본주의 사회의 영향을 받는 조합원들이 현실의 경쟁논리에서 벗어나 협동의 논리로 현실을 바라보고 삶을 기획할 수 있다. 만일 그런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경쟁의 논리가 부메랑처럼 돌아와 협동조합을 탈협동화시킬 수도 있다. 소비자생협들이 경쟁논리를 도입해 서로간의 적대적인 경쟁을 강화시킨다면, 당장은 개별 생협들이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탈협동화의 경향에 편입될 수밖에 없다. <한살림>도 예전에 이랬다, <아이쿱>도 그랬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건 자기 살을 깎아먹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다보면 소비자생협의 구조가 비슷하게 적대적인 합병을 시도하려는 외부의 기업들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협동조합의 차이를 만들어야!


협동조합이 현실에 기반한 실사구시 운동이라지만 협동조합‘운동’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소비자생협은 언제든 탈협동화의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실사구시(實事求是)와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강조한 안창호 선생은 그 방식이 정의돈수(情誼敦修), 사랑을 도탑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협동은 내가 더 이상 홀로 살 수 없음을 자각하는 과정이고, 협동조합은 그렇게 자각한 사람들이 서로를 떠받치는 장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정체성이 명확하지 않을 경우 소비자생협은 여러 가지 외부위협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협동조합운동, 21세기의 대안》(들녘, 2003년)의 저자로 국내에 알려진 존스턴 버챌(Johnston Birchall)은 “소비자협동조합의 합병시도에서 배우는 이론적, 실천적 함의(Some theoretical and practical implications of the attempted takeover of a consumer co-operative society)”(《Annals of Public and Cooperative Economics》, 2000년)라는 글에서 협동조합이 외부의 자극과 영향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버챌은 1997년에 앤드류 리건(Andrew Regan)이라는 민간업자가 유럽에서 가장 큰 협동조합이던 영국의 도매협동조합(Co-operative Wholesale Society, CWS)을 합병하려 했던 과정을 분석하면서 협동조합이 미디어의 영향이나 내부매수 등에 취약하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이런 문제가 2차 대전 이후 진행된 사업(business enterprise)과 결사(membership association)의 분리에서 불거졌다는 점도 지적한다. 버챌은 협동조합이 사업 면에서 다른 경쟁자들보다 잠재적으로 이로운 건 조합원들 때문이라는 점을 경영진이나 관리자들이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점을 자각하고 잘 활용한다면 소비자생협이 시장에서 제한되지만 잠재적으로 아주 유용한 위치(limited but potentially quite fruitful place in the market)를 점할 것이라는 거다.

 

비슷한 맥락에서 미국 세인드 메리 대학 경제학과의 노브코비츠(Sonja Novkovic)는 협동조합/신용조합과정(MMCCU, the Master of management : Co-operatives and Credit Union)을 소개하는 자료에서 협동조합이 ‘협동조합의 차이(Co-operative difference)’를 사회적으로 인식시켜야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협동조합은 조합원이나 시민들이 이 차이를 이해하고 믿도록 하고 이 가치를 만들고 관리해야 한다는 거다. 노브코비츠는 아래와 같은 것이 협동조합의 차이라고 본다.


표1. 협동조합의 차이 이해하기

 

투자자 소유 기업

협동조합

가치 기준

상장과 경영

실질성과 고유함

목적

투자자 수익 극대화

조합원과 공동체의 필요

윤리적 태도

자선

정의

요점

단일함, CSR= 비용

다차원성; 최적화된 사회

출처: http://www.vtsummit.coop/pdf/Novkovic-Managing_the_Co-operative_Difference.pdf


노브코비츠는 협동조합의 사업은 이런 차이를 마케팅하는 것이고 마케팅이 곧 교육이고 교육이 마케팅이라는 점, 시설이 교육이고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교육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협동조합에서 일하는 노동자(활동가)가 생산품에 대한 이야기, 우리 사람과 큰 뜻에 관한 이야기, 구체적인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비자생협이 활동하는 장소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버챌과 노브코비츠는 협동조합이 적대적인 시장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시장의 논리를 내면화하는 것이 아니라 협동조합의 논리를 내부에서 더 많이 교육하고 그 가치를 사회적으로 확산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은 조합원들이 협동조합을 성장시키는 것이고 조합원들이 스스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이 협동조합의 전략이다.

 

플레차(Ramon Flecha)와 크루즈(Ignacio Santa Cruz)는 “경제적인 성공을 위한 협력: 몬드라곤 사례(Cooperation for Economic Success: The Mondragon Case)”(《Analyse & Kritik》 2011년)에서 협동조합의 민주주의가 경쟁력을 만들고 협동조합간의 연대나 이익의 공유, 매우 평등한 봉급체계, 안정적인 고용구조 등이 협동조합의 차이를 만들고 확산시킨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노동인민금고나 인도주의적인 경영만이 아니라 공개적인 지적 토론과 풀뿌리민주주의가 있었기에 몬드라곤의 성공이 가능했다고 지적한다.

 

국내에서도 많이 거론되는 <로치데일공정선구자조합>은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이나 8시간노동제, 연금같은 기본적인 노동조건을 보장했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이 새로운 사회를 보는 눈과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했다. <선구자조합>이 매장에 읽을거리를 비치하고 대규모의 도서관을 만들었던 것은 당시 노동계급에게 절실했던 정치의식과 계급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에드워드 톰슨의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을 보면, 당시 영국의 노동자들이 다양한 공간에서의 토론과 학습을 통해 계급의식을 형성해간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이 <선구자조합>의 성공을 보장했다고 나는 본다.

 

그렇다면 지금 소비자생협에게도 ‘협동과 연대의 의식’을 만들고 확산시키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지역사회 조직화에는 식생활이나 취미 등을 매개로 하는 모임도 필요하지만 사회적인 의식을 형성하며 지역사회의 변화를 도모할 모임도 필요하다. 가령, 소비자생협의 주요한 조합원인 주부들이 가부장적이고 자본화된 한국사회를 이해하고 다른 사회의 전망을 구상하고 실천할 수 있는 교육도 필요하다. 각자의 다양성과 차이를 드러내고 무엇이 소비자생협의 전망인가를 토론할 수 있는 다양한 장도 필요하다. 1978년에 부산에서 만들어진 <양서협동조합>이 단순히 좋은 책을 거래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1978년에 협동서점을 만들고, 1979년에는 협동출판사, 1985년에는 협동도서관, 1990년에는 협동연구소, 2000년에는 협동대학을 설립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소비자생협들이 빠른 속도의 성장에도 이런 장을 구체적으로 마련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런 차이가 부각되지 않다보니 ‘의식과 삶의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소비자생협들이 이런 괴리를 조장하는 면도 없지 않다. 이것은 소비자생협이 생산에 대한 관심을 놓고 소비와 매출고를 높이는데 관심을 두면서 생기는 문제이기도 하다.



윤리적 소비와 생산-소비의 연대


캐나다 토론토대학의 호세 존스턴(Josée Johnston)은 “시민-소비자 혼성의 이데올로기 긴장과 홀 푸드 마켓 사례(The citizen-consumer hybrid: ideological tensions and the case of Whole Foods Market)”(《Theor Soc》 2008년)에서 윤리적 소비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존스턴은 윤리적 소비운동이 역사적으로 네 단계, ①소비자의 힘을 조직해서 지역 내 생산에 개입하려 했던 19세기 영국의 협동조합운동, ②대량생산 대량소비의 포디즘에서 출현했고 생산자보다 소비자의 정체성에 주목했던 소비자 행동주의, ③미국의 소비자운동으로 유명한 네이더주의(Nadersim)가 통제받지 않는 기업자본주의를 비판하며 공정한 정보와 기업의 책임성을 강조한 시기, ④개인소비자에게 안전한 시장을 보장하는 것을 넘어서 지속가능하지 않은 집단적인 소비에 관심을 두고 환경과 같은 후기 산업사회의 가치에 주목했던 1980년대 이후의 대안적인 소비운동 시기를 거쳤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역사를 거치면서 기업들도 소비자운동에 대응하기 시작했고 일정 부분 적응하며 심지어 이런 운동을 새로운 사업기회로 받아들였다. 그런 점에서 존스턴은 윤리적 소비운동이 이런 현실적인 맥락에서 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존스턴은 해외에서 유기농 시장이나 대안적인 식생활문화를 개척한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받는 <훌 푸드 마켓>을 분석하면서 윤리적 소비운동이 일정한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고 본다. 이 어려움은 그 개념 자체의 모순에서 생기기도 하는데, 존스턴은 소비자운동(consumerism)과 시민의식(citizenship)이 원론적인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차이를 가진다고 본다.


표2. 소비자운동 대 시민의식

 

소비자운동: 개인이익의 최대화

시민의식: 사회와 생태계의 공공재에 대한 공동책임

문화

개인의 선택과 다양성에 우선순위

개인의 선택과 다양성을 제한하고 공동의 해결책을 모색

정치경제학

소비자시장에 우선순위; 소비를 통한 사회지위

사회 모든 계급의 공평한 접근과 역량강화; 시장을 제한함

정치생태학

소비를 통한 보존

소비의 감소; 욕구와 필요의 재평가

출저: 앞의 논문


이 구분은 원론적인 의미이고 현실의 소비자는 두 가지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런데 존스턴은 <훌 푸드 마켓>을 분석하면서 이 두 모습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점점더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고 본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개인의 자발적인 선호가 강조되다보니 절제하며 공공재를 보존하도록 국가를 압박하는 시민의 책임은 최소화되는데, 기업은 이런 편리하고 즐거운 쇼핑을 부추긴다. 그리고 좋은 맛과 영양, 건강함을 강조하는 <훌 푸드 마켓>의 홍보전략은 엘리트 계층의 문화자본(cultural capital)을 정당화시키고 불평등한 소득구조를 바꾸려하지 않는다. 또한 소비를 통한 보존이라는 전략은 더 많은 욕망과 소비를 자극하고, 자급하고 짧은 거리 내에 유통되며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지 않는 포장, 상품화되지 않은 식재료 등에 많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존스턴은 이런 결과를 토대로 “시민-소비자를 섞는 기업의 프레임이 녹색을 팔아먹는 전략과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프레임과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훌 푸드 마켓>의 윤리적 소비라는 프레임을 통해 시민-소비자는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사회와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깨달아가는 대중적인 관심과 더 높은 소비생활로 기업이윤을 늘려야 한다는 필요성을 겉으로는 일치시킬 수 있었다. 시민-소비자는 약간의 제한요건만 받아들이면 영원한 경제성장과 소비자 주권이라는 소비자 이데올로기에 계속 몰입하면서도 시민으로서 사회적이고 생태적인 관심사를 표현할 수 있다.”고 비판한다.

 

한국의 소비자생협들은 이런 존스턴의 비판에서 자유로울까? 생산과 소비를 분리시키고 개인의 소비를 통해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환상’을 주입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자료를 보면, <한살림>의 ‘2009 수도권 지역 한살림 조합원 의식조사’에서 조합원의 자가주택 소유율이 74.7%, 월평균 가계소득이 454만원으로 조사되었다. 그리고 ‘2012년 아이쿱생협 조합원 소비생활과 의식에 관한 조사’에 따라도 응답자의 77.6%가 대졸이고, 64.9%가 자기 집을 소유했으며, 가구의 평균소득은 약 422만원이다. 그렇다면 소비자생협운동 자체가 중산층의 전유물이라고 보지는 않더라도 현재 한국 소비자생협의 조합원 구성이 중산층을 반영하고 그들을 마케팅목표로 삼는 전략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면 야박한 평가일까? 또한 소비자생협들 조합원들에게 무조건적인 소비의 확대보다 자기 욕구와 필요를 평가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나? 자본주의 소비문화와 조합원의식이 충돌할 경우 소비자생협은 어떤 대안을 마련하고 있나? 직거래되는 농수산물에서 가공품으로 생활재의 비중이 변하고 있는데 소비자생협들은 생산자, 노동자의 삶에 어떤 관심을 쏟고 있나? 그리고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400 ppm을 넘은 기후변화 시대를 맞아 소비자생협은 어떤 대안을 준비하고 있나?

 

이런 물음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소비자생협에 필요하다고 본다. 이것은 단지 조합원 교양이나 교육의 차원이 아니라 조직의 정체성과 사업 차원의 문제로 다뤄져야 한다. 자신의 차이를 부각시키고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협동조합운동의 지속을 쉽게 장담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생산과 노동자를 고민하지 않는 소비자생협이 대안적인 사회를 만들기는 어렵다. 리스트(Gilbert Rist)는 《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봄날의 책, 2013년)에서 “‘발전’은 분명히 한정된 자원을 끊임없이 수탈함으로써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경제성장은 풍요의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보편적인 결핍을 낳을 뿐이라는 사실을 얼버무리는 실체적인 환상”이라고 비판한다. 즉 소비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생산과의 연계를 고려하지 않는 소비자협동조합은 경쟁 자본주의에 쉽게 동화될 뿐 아니라 자신의 뜻은 아니라 할지라도 타자에 대한 수탈을 정당화시킬 수밖에 없다.

 

소비자생협에서 소비자라는 단어를 부담스러워하는 <한살림>은 이런 물음을 더욱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한살림>이 <한살림농산>에서 <한살림공동체소비자협동조합>으로, <한살림생활협동조합>으로 변해온 역사는 이런 고민을 반영한다. 그렇다면 초기의 고민은 지금의 정체성과 방향, 사업방식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 최혜성 선생은 1989년 7월에 발표된 “한살림운동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생명의 세계관이란 “인간이 사회 안의 공동체적 협동, 자연과의 조화된 공생 속에서 자기 자신을 실현할 수 있음”을 밝히는 것이고 한살림의 이념은 “사회적 노동에 의해 창출되는 모든 생활가치가 협동적으로 생산되고 공정하게 배분되는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고, 생활가치가 인간노동의 소산이자 자연의 소산임을 인식하고 인간에게 생명의 젖을 먹여주는 자연의 생태균형을 유지시키고, 정의의 사회적 실천, 자연과의 조화된 생활을 통하여 내면적 자기실현을 추구하는 것을 그 실천목표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한살림 초창기의 소식지나 가입안내서를 살펴보면 유기농산물 거래의 목적은 안전한 먹을거리가 아니라 자연과 외국농산물의 수입으로 쓰러져가는 농촌 살리기, 농약으로 신음하는 농민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이런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지향하는 (사회)운동과 소비자생협이라는 틀의 모순을 해결하는 과제가 <한살림>에 있다고 본다. 즉 한살림은 윤리적 소비운동을 넘어서는 인식틀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스스로 실현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을 조합원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린비출판사 노동조합을 지지하는 카페를 만들기 위해 언론기사를 검색하다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린비출판사'라는 검색어를 넣고 언론기사를 검색하다 아래의 기사를 봤습니다.
http://news.donga.com/3/all/20130206/52848959/1

흠. 그렇지. 삐뽀삐뽀가 그린비출판사의 효도상품이랬지.
헛, 그런데 왜 '그린비라이프'이지?
기자가 잘못 썼나?

그래서 출판사/인쇄소 검색시스템(http://61.104.76.20/html/) 에 들어가 그린비라이프를 검색했더니,
동대문구 휘경동에 그린비라이프라는 회사가 따로 있더군요.
그린비출판사는 마포구 서교동으로 등록되어 있구요.

대표는 유재건으로 동일합니다.

 

 

그린비라이프의 등록일자는 2012년 6월 11일.
그린비출판사의 등록일자는 1990년 9월 27일.

우리가 아는 삐뽀삐뽀는 분명 그린비출판사의 것인데 왜 그럴까요?
그래서 우리 집에 있는 삐뽀삐뽀 119 소아과를 펴서 확인했지요.
2010년 2월 25일에 개정9판1쇄로 나왔습니다.
펴낸이는 유재건, 펴낸곳은 그린비출판사.

동아일보 기사가 틀린 게 아니라면 삐뽀삐뽀의 판권이 그린비라이프로 옮겨졌단 얘기이지요.
그린비라이프의 등록일자가 2012년 6월 11일이니 분명 2012년 6월과 동아일보 기사가 나온 2013년 2월 6일 사이에 판권이 옮겨졌단 얘기겠지요.
동아일보 기사가 나온 2013년 2월은 그린비 노조가 외부에 그린비출판사의 사정을 알리기 전입니다.

어이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노조는 이런 일을 알고 있을까요?

시점이 좀 공교롭긴 한데요, 검색해보니 그린비노조의 창립총회는 2012년 7월 25일.
창립총회가 7월이니 그 전부터 논의가 있었겠죠.
유재건 대표는 왜 6월에 별도의 출판사를 설립했고, 2013년 2월 전에 그린비출판사의 효도상품이라 불리는 '삐뽀삐뽀' 시리즈의 판권을 왜 그 출판사로 이전했을까요?
무슨 목적일까요?

유재건 대표는 2004년 5월 22일 <세계일보>에 이런 글도 썼더군요. "출판계의 저임금이나 낮은 복지는 부분적으로 이런 현실의 반영이다. 노조가 있는 출판사는 거의 없으며, 전문경영자가 경영하는 출판사도 거의 없다. 주식회사인 경우에도 실질적이고 신뢰할 만한 기업결산 보고서를 공개하는 출판사는 없다. 출판계의 모든 얘기는 그저 바람결에 떠도는 풍문일 뿐이다."
http://www.yemoon.com/webzine/viewbody.php3?code=webzine&page=1&number=160&keyfield&key

그렇다면 이런 궁금증을 스스로 풀어주시겠죠?

이래저래 풀뿌리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된 일을 하며 지내온 시간이 십년을 훌쩍 넘었습니다. 풀뿌리운동을 보며 희망을 얻었고 그 운동에 관련되어 있음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어느 순간부터 풀뿌리운동을 사랑하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때론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환상을 낳기도 합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상대방의 모습을 규정하고 그렇게 규정된 모습을 사랑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하지요. 그러면서 괜한 질투와 타박을 하기도 하구요. 이 글은 풀뿌리운동에 대한 저의 사랑고백이자 당신에 대한 애정은 변함없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사랑하던 그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담은 고백입니다. 제가 만든 이미지를 사랑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괜히 오해하고 있는 건지, 얘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1. 우리는 왜 이 운동을 시작했을까요?


미래가 보이지 않는 시대입니다. 살아남기도, 살아가기도 힘든 시대입니다. 사람들의 관계망은 끊어지고 마을이나 공동체도 해체되고, 노동강도나 생활의 속도는 점점 더 강해지고 빨라져서 운동을 하기에 좋지 않은 조건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동안 풀뿌리운동은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운동의 목적은 다양할 수 있지만 주민 주체의 역량을 강화시켜 시민자치에 이르도록 하는 것, 이것이 풀뿌리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일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목표는 어떻게 실현되고 있을까요?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을 통해 실현되고 있나요? 이런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재활용가게, 나눔장터, 동네카페, 도서관,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등 풀뿌리운동의 영역은 계속 넓어지고 있고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규모와 활동가의 수가 운동의 목적을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외려 규모와 수가 늘어날수록 단체 내부에서조차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자기 담당사업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자기반성의 목소리가 솔솔 흘러나옵니다. 외부로 알려진 만큼 내실이 없다는 비판, 사업담당자만 있지 활동가는 없다는 성찰도 있습니다. 눈에 띄는 사업에 단체들이 몰리고 때로는 단체들이 서로 경쟁하며 기본적인 정보조차 공유하지 않는다는 볼멘소리도 들립니다.

 

그동안 풀뿌리운동이 성장해온 과정이나 그 힘을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1991년 지방자치제도의 부활 이후 행정이 풀뿌리운동을 중요한 파트너로 여기게 된 건 그 과정과 힘 때문입니다. 주민들의 지지가 높아지고 행정의 파트너로 인정받게 된 건 분명한 성과입니다. 관이 맡는 것보다 풀뿌리단체가 맡는 게 주민들에게 더 좋고 올바르다는 인식도 확산되었습니다. 이건 그동안의 운동이 있었기에 가능한 변화였습니다.

 

그런데 민관협력이나 거버넌스가 원래의 취지와 달리 ‘관주도’라는 비판이 계속 제기되고 있습니다. 민관협력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관이 기획하거나 공모하는 사업을 단체가 지원해서 진행하는 식이고, 대충 기획된 것을 제대로 집행하느라 너무 힘이 든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이런 식이라면 당장 사업을 때려치고 싶지만 우리가 아니면 안 될 사업이라 울며 겨자먹기로 한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때로는 성장이 위기를 불러온다고 했던가요. 어느 순간 풀뿌리 운동은 체계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제는 일방적으로 판을 깨고 나오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계속 들어가기에는 뭔가 곤란한, 모호한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노동자들에게 최후의 무기가 파업이라면 풀뿌리운동에게 최후의 무기는 무엇일까요? 어떤 힘이 있으면 이 모호한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저는 이것에 대한 고민이 ‘지금’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완전히 무장해제되어 아무런 힘도 없으면서 정신승리법으로 버티는 상황이 올지도 모릅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물어볼까요. 관이 해야 할 일을 대행하는 것이 풀뿌리운동이나 풀뿌리단체의 역할일까요? 물론 주민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칠 사업들을 제대로 실행하는 건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업들에 모두 ‘운동’이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습니다. 운동은 전체적인 사회발전의 목표를 주민들과 함께 정하고 그 목표에 비춰 사업을 평가하는 과정인데, 사업에 대한 ‘평가의 권한’은 풀뿌리단체들이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외려 관이 그런 평가의 권한을 가지고 사업에 개입합니다. 사업을 제대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이 사업을 하는 것인가’, ‘사업이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우리는 주민들과 어떻게 논의하고 그 사업에 개입하고 있나’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면, 많은 사업들은 운동을 하지 않는 상황에 대한 핑계일 뿐입니다. 주민의 삶과 결정을 대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민 스스로가 주체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촉진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 풀뿌리운동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소수의 사람들로 우리가 어떻게 많은 일들에 일일이 다 관심을 가질 수 있냐고 되물을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인정하고 싶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그렇기에 사업을 ‘정리’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역단체들이 지원한 사업과 관련된 심사를 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난감한 경우는 단체들의 고유활동을 지원사업으로 신청할 때나 그 단체의 설립목적과 큰 관련이 없어 보이는 행사를, 소위 ‘뜨는 행사’를 사업으로 만들어 지원할 때입니다. 비슷한 유형의 사업이 동시에 신청되거나 그런 사업이 반복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가 사업을 하기 위해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면 이제 그런 관행을 스스로 없애야 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자원을 마련하는 과정이야말로 운동의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순간 단체들도 쉬운 길만을 선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갈수록 단체들의 사업이 비슷해지고 있고, 지역특성을 반영한 활동들, 아니 유기체처럼 변화하는 지역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반영하는 활동들은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공무원들이 바보는 아닙니다. 자원이 제한되고 부족한 시민사회의 상황을 알고 있기에 더욱더 거만하게 나옵니다. 때로는 일부러 단체들끼리 경쟁을 붙이고 자기 말을 잘 듣는 단체들을 밀어주기도 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운동의 목적은 자꾸 사라지고 사업만 남게 됩니다. 행정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감시하고 비판하는 단체의 목적보다 앞서 나가고 운동은 뒷전이 됩니다.

 

따라서 국가나 시장에 끌려가지 말고 우리의 자원을 마련해야 합니다. 기획서를 작성하고 사업에 공모해서 자원을 얻으려 말고 지역의 주민들 속에서 자원을 발굴하는 과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눈먼 돈이라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게 어찌 눈먼 돈일까요. 주민들의 세금, 시민들의 피땀입니다. 운동에 필요한 자원을 모으는 과정이 운동의 방향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저는 풀뿌리운동을 통해 배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배움의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소비자생협 진영에서는 아주 오랜 논쟁이 있습니다. 협동조합의 기본이 사업이냐 운동이냐를 놓고 논쟁을 벌였고, 이제는 사업 쪽의 힘이 훨씬 강해진 것 같습니다(물론 둘을 완전히 분리할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인데요). 풀뿌리운동이 이런 흐름을 따라가야 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풀뿌리운동이 시민사회운동의 전부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문제를 풀뿌리운동이 떠안을 수도 없습니다. 각각의 운동은 제각기 자기 목표를 가질 겁니다. 다만 현재 풀뿌리운동의 목표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주민자치를 실현하고 마을과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 지역사회 복지체계를 마련하고 주민들의 필요에 부합하는 사업을 진행하는 것? 하지만 마을과 공동체가 살아있는 유기체이려면, 관계와 사회에 기반한 복지가 살아나려면 사회의 구조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운동이 시민사회운동과의 강한 고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요즘은 어디에 가나 박원순 시장 얘기를 듣습니다. 박원순 시장과 같은 사람이 앞으로 더 나올 수 있을까요? 운동이 사람을 성장시키지 못한다면 좋은 활동가, 뛰어난 활동가도 더 이상 나오지 못할 겁니다. 솔직히 묻겠습니다. 단체의 활동가 충원구조는 마련되어 있습니까? 과거에는 학생운동 출신들이 이런저런 시민사회운동의 활동가로 충원되었지요.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경쟁적인 교육체계, 대학 중심, 학벌 중심의 교육체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이제 그런 충원구조는 사라졌습니다. 10년 뒤, 20년 뒤에는 누가 어떤 과정을 밟아 운동에 참여할까요? 아이디어나 기획력이 뛰어나고 사회정의감을 가진 대학생들도 아마 단체가 아니라 행정조직을 택할 겁니다. 왜냐하면 그곳이 실행력과 자원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활동의 문화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목적을 공유하더라도 문화를 공유하지 못하는 ‘세대단절’의 문제가 풀뿌리운동 내에서도 보입니다. 이런 단절을 이어가려는 노력을 풀뿌리운동이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고민을 했다손 치더라도 그 고민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을 거의 못 봤습니다. 10년 정도 더 지나면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생활리듬과 가치관을 가진 이질적인 존재가 한 단체 안에서 (그것도 운이 좋아야) 불편한 동거를 하게 될 겁니다.

 

물론 풀뿌리운동에는 학생만이 아니라 전업주부들도 활동가로 일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 조금 나은 편이지요. 하지만 사업을 중심에 둘 경우 활동가들은 사업단위로 결합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사업의 전망’밖에 주지 못하면서 ‘운동의 헌신’을 요구하는 모순은 운동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합니다. 활동의 폭이 넓어질수록 대표나 소수의 핵심활동가들이 전체적인 의사결정과정을 쥐고 흔든다는 비판도 들립니다. 사람을 성장시키고 역량을 강화시키는 풀뿌리운동의 ‘대의(大義)’는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건 풀뿌리운동의 목적으로 본다면 심각한 위기입니다.

 

 


2. 10년, 20년 뒤에 풀뿌리운동은 어떻게 될까요?


지금 서울시는 마을공동체사업을 한창 추진하고 있고 언론도 이 사업에 관심이 많습니다. 기대만큼 잡음도 생기고 추진과정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서울시의 마을공동체 사업에 관한 성명서는 풀뿌리단체들이 아니라 진보신당 서울시당에서 나왔습니다. 진보신당의 성명서와 김상철 처장의 발표문을 읽으며 한편으로 참 고마웠고 다른 한편으로 마음이 좀 씁쓸해졌습니다. 마을은 안 보이고 사업만 보인다는 지적, 사업추진의 속도조절이 필요하다는 지적, 추진과정의 폐쇄성과 관 주도에 대한 비판 등은 특별한 분석이나 논리가 아니었고 그동안 풀뿌리운동이 지속적으로 관에 문제제기해온 바입니다. 그런데 왜 정작 풀뿌리운동은 이런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을까요?

 

박원순 시장이 되고 난 뒤에 서울시가 달라졌다는 얘기가 많이 들립니다. 시장 한 사람 바뀌었을 뿐인데, 라는 말을 활동가들에게서도 듣게 됩니다. 실제로 그렇지요. 무상급식에 반값등록금에 저소득층 지원에, 공공임대주택 확충,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중증장애인 활동보조 자기부담금 폐지, 중소상인을 위한 대형마트나 SSM의 영업규제 등 취임한 지 1년도 안 되었는데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상황이야말로 풀뿌리운동의 위기상황입니다. 지역에서 몇 년 동안 빡세게 일할 필요가 뭐 있어, 시장 한 명, 구청장 한 명 바뀌면 이렇게 분위기가 확 바뀌는데, 라는 생각을 시민들이, 심지어 활동가들마저 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풀뿌리운동의 위기가 아니라면 무엇이 위기일까요?

 

풀뿌리운동이 바꾸고자 한 건 시장이라는 직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풀뿌리운동은 시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는 ‘구조’를 바꾸려고 한 거죠. 그렇다면 지금 서울시의 의사결정구조, 정책결정구조는 어떻게 바뀌고 있나요? 몇몇 시민사회단체 인물이 행정체계나 위원회에 들어가는 건 이전 정부 때도 자주 있던 일이고 구조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시장이 현장을 돌아다니며 직접 목소리를 듣고 챙기는 것이 한편으론 좋아 보이지만, 달리 보면 지방자치의 근본정신을 거스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시장님의 트위터에 글을 남겨라, 이건 구조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사실 그동안 풀뿌리운동이 경계해온 것은 ‘해결사’가 아니었던가요? 그리고 지방자치법에 따르면 서울시장은 자신의 권한에 속하는 사무 중 일부를 자치구에 위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시의 거버넌스 구조가 실질적으로 바뀌고 있나요? 물론 박원순 시장 개인의 활동을 보면 눈물겹기도 합니다. ‘박원순 프로세스’라는 말이 나올만큼 소통과 청책(聽策), 협치가 강조되고 요일별로 시장의 일정이 짜지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이런 시장의 변화가 일선 공무원들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공무원들이 생각하는 제3섹터, 주민단체의 범주가 풀뿌리단체로 이해되는지도 의문입니다. 기존의 관변단체에 대한 지원과 묵인이 바뀌고 있는지도 살펴야 하고, 제 3섹터를 양성한다는 목적 하에 허투루 사업이 진행되는 건 아닌지 꼼꼼하게 감시해야 합니다.

 

물론 지방자치제 하에서 자치구의 변화가 중요하지 광역단체의 변화가 뭐 그리 중요한가, 풀뿌리운동이라면 자치구에 집중해야 하지 않냐고 되물을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자치구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지방자치제도와 행정체계에서는 자치구가 제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서울시의 권한도 중앙정부의 권한과 맞물려 제한을 받지만 자치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사업기획은 중앙정부와 광역단위에서 꼬리표가 매겨진 뒤에 자치단체로 이관됩니다. 예산은 기초자치단체에서 집행하지만 기획과 평가의 권한은 여전히 중앙정부나 광역자치단체가 가지고 있습니다. 공무원들도 그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항상 책임을 회피합니다. 상급기관에서 명확한 지침이 내려오지 않았다며, 또는 예산이 없다며 시민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구조의 변화 없이 운동의 성공을 얘기할 수는 없고, 지금은 감시와 비판마저 사라지고 있기에 심각한 위기상황이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서울광역자활센터의 운영, 교통체계의 개선(버스준공영제), 도시기본계획, 제3섹터영역의 활성화, 세제개편 등 자치구의 경계를 넘어 서울시 차원에서 기획되는 사업들이 많습니다(서울시정개발연구원 홈페이지에 가면 이와 관련된 연구보고서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활권을 중심으로 한 통합도 논의되고 있습니다. 현재의 광역행정구역 논의로 볼 때 실제로 그렇게 진행될 가능성도 큽니다. 서울 시민들의 생활을 볼 때 삶터와 일터가 분리되고 생활반경이 넓어져서 마을이나 공동체를 거주지 개념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면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풀뿌리운동은 이런 서울시 차원의 사업, 하지만 자치구와 연관될 수밖에 없는 사업들에 대해, 그리고 행정체계와 생활권의 변화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을까요? 한국 사회의 빠른 변화 속에 풀뿌리운동은 어떤 열매를 맺으려 하고 있을까요?

 

저는 풀뿌리운동이 고립된 공동체, 폐쇄된 해방구를 만드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외려 그런 경계를 없애고 주민과 공동체의 관계를 새로이 구성하는 것이 풀뿌리운동의 역할일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서울의 풀뿌리운동이 서울이라는 공간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지적하라면 저는 ‘수도권으로의 초집중화’와 지방의 ‘내부식민지화’를 얘기할 겁니다. 핵발전소 문제가 계속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데, 서울시는 원전 한기 줄이기 운동을 힘겹게 벌이는 정도이고, 햇빛발전소와 수소연료전지발전소를 공공건물과 학교에 설치한다는 계획 또한 쉽지 않은 일입니다(전력 생산량은 전국의 0.28%에 불과한데, 전력 소비량은 전국의 10.9%를 차지합니다). 4대강 사업도 서울시민들에게는 강 건너 불구경입니다. 직접적인 피해는 없으니까요. 오히려 재벌건설회사들의 본사가 위치한 곳이라 서울은 깔때기처럼 그 이윤을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서울이 모든 걸 빨아들이는 곳에서 서울 사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 운동의 목표일까요?

 

더 이상 이런 과제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결국 자치구 단위의 행정교섭만으로는 풀리지 않을 수밖에 없고, 그 사업의 기획과 평가에 자체에 개입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개입과정에서 약 1만 6천명에 달하는 서울시의 공무원, 전문화된 관료조직을 감시하고 비판하며 그들과 경쟁해야 합니다. 그런 경쟁이 불가능하다면 각종 공모사업에 참여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명확한 권한과 충분한 사업기간이 보장되지 않는 사업에 대해서는 집단적인 보이콧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민간단체가 관료조직으로 편입되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참여예산제가 활성화된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레시에서는 이런 문제가 이미 드러났다고 합니다. 포르투알레그레시의 참여예산제를 연구한 학자 마리옹 그레와 이브 생또메는 시민사회가 자율성을 잃고 국가에 흡수되는 문제를 세 가지 측면에서 문제삼는데, 참여자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며 시정부에 의존하게 되는 면, 시민운동단체의 지도자들이 지방정부의 비공식적인 상임 간부가 되거나 결정권자 집단 안에 비공식적으로 흡수되면서 풀뿌리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면, 시민사회단체들이 자신들의 활력과 논리를 잃어버리고 국가권력의 구성부분이 되는 면을 지적합니다. 참여예산제 안에서 활동가들이 모든 열정을 불태우다보니 단체가 비어버렸다고 합니다. 한국 시민사회도 고민해야 할 부분입니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 저는 지역 경험이 많은 사무국장 이상의 활동가들이 서울시를 대상으로 활동을 펼치는 중간지원조직을 구성하고 그곳에서 활동하면 좋겠습니다. 그 활동가들이 기존의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다른 시민사회운동이나 정당과 연계하는 몫을 맡길 권합니다. 그 분들의 연륜과 활동경험, 인적 네트워크라면 분명히 좋은 효과를 발휘하고, 이는 자치구에서 활동하는 단체활동과 연계될 수 있습니다. 제도정치인이 되는 것 말고 별다른 출구가 없는 풀뿌리운동이 새로운 활동을 모색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서울시와 서울시민의 일터와 삶터에 관한 현황을 정리한 구체적인 자료도 필요합니다. 자치구를 넘나들며 자신의 생활권과 동선에 맞춰 서울시민들이 스스로 뭔가를 의식하고 조직할 수 있도록 이를 지원할 중간지원조직이 필요합니다. 이 중간지원조직이 주민들의 실제 생활동선과 지역사회의 변화를 추적하고 기록하는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아울러 중간지원조직이 서울시가 아닌 서울시에 사는 시민들의 10년, 20년 장기비전을 구상하는 역할을 맡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정당의 정책연구소들이 응당 그런 기능을 맡아야 하겠지만 한국 정당정치의 현실을 고려할 때 서울시당이 그런 기능을 맡을 가능성은 당분간 없어 보입니다. 저는 서울의 풀뿌리단체들이 ‘서울문제’를 해결할 대책을 스스로 강구하면 좋겠습니다. 더글러스 러미스가 말했듯이 ‘타이타닉 현실주의’에서 벗어나 눈 앞에 다가오고 있는 빙산을 피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풀뿌리운동의 힘은 끊임없는 자기성찰이라고 믿습니다. 이 고백이 좋은 시작이 되면 좋겠습니다.

 협동사회경제란 말은 낯설다. 사회경제란 말도 익숙하지 않은데 협동사회경제라니... 낯설지만 이미 ‘협동사회경제’라는 말을 쓰는 곳들이 여럿 있고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외국에서도 협동사회경제라는 말을 쓸까? 찾아보면 ‘cooperative/social economy’라는 말은 쓰지만 협동사회경제라고 붙여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다면 왜 이런 말을 쓰게 되었을까?

 

한국협동사회경제연대회의는 자신의 출범배경으로 “‘협동조합기본법’ 제정을 위해 시민사회단체들로 구성된 <협동조합기본법제정연대회의>와 ‘사회적기업육성법’의 올바른 제정을 위해 구성되어 6년 여 동안 활동한 <한국사회적경제연대회의>가 통합된 조직으로, 2012년 11월 21일 출범하였습니다. 연대회의는 한국의 협동조합, 사회적 경제 영역에서 활동하는 제 단체들이 연대하고 협력하는 네트워크 연대조직으로서 한국의 사회적 경제운동의 활성화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활동할 것”이라 밝힌다. 이 맥락을 읽어보면 협동사회경제란 협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진영과 사회적 기업을 중심으로 한 진영의 결합체를 뜻하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경제운동의 활성화와 발전을 도모하는 듯하다. 그렇다보니 두리뭉술하고 ‘협동사회경제’라는 말이 뭔가 입에 짝짝 달라붙지는 않고, 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 약간 붐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강의의 주제인 협동사회경제의 사례를 본다는 것은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의 사례들을 본다는 것일까? 어느 협동조합의 규모가 어떻고 어떤 사회적 기업이 잘 된다는 얘기는 이미 언론이나 출판을 통해 여러 차례 다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기획재정부가 만든 협동조합 사이트에서 알림마당→자료실로 들어가면 ‘아름다운협동조합 만들기’를 다운받을 수 있다. 거기서 기본적인 자료들을 얻을 수 있고, 서울시청 홈페이지에서 사회적 경제→사회적 경제 자료실에 들어가면 ‘협동조합 운영 사례집’을 다운받을 수 있다. 그 사례집에는 국내외 50개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김현대 등의 『협동조합, 참 좋다』(푸른지식, 2012년), 김성오 등의 『우리, 협동조합 만들자』(겨울나무, 2013년)를 참조해도 좋다.

 

이 이상의 사례들을 논하는 건 나의 능력 밖이다. 심지어 나는 외국에 사례를 보러 나가본 적이 없고 그런 욕망도 없다. 그런 사람에게 사례 얘기를 들어야 하니 좀 우울하실 터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자리에 섰을까? 몇 가지 고민을 나누고 싶어서이다.

 

 

1. 사례를 본다는 것의 의미는?

 

우리는 왜 사례를 보고 듣고 싶어 할까? 한국사회는 좀 과다한 싶을 정도로 사례에 집착한다. 어느 곳이 주목을 받으면 그곳을 도는 것이 일종의 코스가 되고, 외국 사례도 그곳 관계자들이 힘들어할 정도로 주목을 받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방문한다. 왜 그럴까?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말을 믿어서일까?

 

사례를 보고 온 사람들은 그 사례의 전도사가 되어 여기저기서 많은 얘기들을 한다. 그런데 정말 사례를 논할만 할까? 내 경험상 하루 들린 사람들은 견학 정도이고 보름 정도 지긋하게 눌러 있어도 그곳의 역사나 사회조건, 문화적인 특징 등을 잘 모르면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반대로 생각하면 된다. 사천 지역을 알아보겠다는 사람이 하루 돌고 난 뒤에 사천에 관해 얘기하면 어떻겠는가?). 그래서 나는 직접 가서 보고 듣는 것도 필요하지만 잘 정리된 연구들을 보는 게 때로는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꼭 가서 보고 싶은 곳도 있을 수 있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마음을 흔든 사례는 없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사례를 보려 할까? 뭔가를 빨리 만들어내고 싶은 욕망이 사례를 보게 만들 수 있다. 우리도 빨리 저런 걸 만들고 싶다, 우리 지역도 빨리 저렇게 변하면 좋겠다. 그러니 가서 어떻게 되었는지를 듣고 빨리 그 방식을 우리 삶에 적용하고 싶어진다. 직접 보고 와서 얘기하면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기도 쉽다. 내 눈으로 봤다 아이가, 이런 식이다.

 

그런데 이럴 경우 사례와의 만남은 우리를 억압한다. 내 옆의 사람과 손을 잡고 그를 신뢰하는 게 아니라 어떤 틀을 만들고 사람과 관계를 그 속에 밀어 넣게 된다. 잘 안 되면 그 탓은 틀이 아니라 내 옆의 사람 탓이다. 이렇게 되면 사례는 성공의 지름길이 아니라 실패의 지름길이 된다.

 

그렇다고 사례를 보면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사례를 보려는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적어도 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 그 사례에서 내가 필요한 부분을 취할 수 있다. 보통 나는 나라서 나를 매우 잘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타자의 얼굴에 비친 내 모습을 통해 자기를 알아 간다. 어쩌면 사례의 진정한 의미는 따라가고픈 그 모습이 아니라 그것에 비친 내 모습일 수 있다. 우리가 만남을 가지는 이유는 타자에게 종속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이다. 사례에 들뜨거나 사례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사례를 보는 자신의 모습을 잘 살펴야 한다.

 

그리고 사례를 본다는 것의 의미는 그냥 들어보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할 ‘의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좋은 얘기 잘 들었습니다’로 그치지 않고 그 사례가 실제 내 삶에서 의미를 가지려면 나의 준비를 확인해야 한다. 다른 지역의 특수한 사례로 여기지 말고 우리 지역 내에 그런 특수성을 접목시킬 수 있도록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례를 볼 때는 그 맥락을 조심스레 살펴야 한다. 우리는 어떤 방식이나 제도를 금방 수입하고 만드는데, 그렇다보면 그것의 정신이나 문화를 무시하게 된다. 외국의 좋은 제도들이 한국에 들어오면 다들 이상해지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어떤 제도를 성공하게 하는 건 탁월한 리더십의 역할도 있지만 전체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구조의 탓도 크다. 우리는 사례를 볼 때 사람이나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만 보는데, 보이지 않는 구조들도 고려해야 한다.

 

이처럼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과 뭔가 변화를 도모하려는 의지, 맥락을 읽는 눈이 없다면 사례를 봐도 아니 봄만 못하다. 이를 전제하고서 사례를 보자.

 

한국에서 협동사회경제를 이룩한 지역이 어디 있을까? 협동조합 메카로 유명한 강원도 원주? 마을만들기로 유명한 전라남도 진안군? 커뮤니티 비즈니스로 유명한 전라북도 완주군? 풀무학교로 유명한 충청남도 홍성군? 성미산마을로 유명한 서울시 마포구 성산1동?

 

협동사회경제를 이룩한 외국 지역은 또 어디일까? 스페인의 몬드라곤? 이탈리아의 볼로냐? 캐나다의 퀘벡? 영국의 토드네스? 유럽의 또 어느 지역?

 

 

2. 원주의 이야기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는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 공동체운동기관 등 19개 단체가 모인 네트워크 조직이다. 2003년 6월 5일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로 시작했고, 2009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각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는 460여 명이고, 조합원과 회원 수를 합하면 원주시 전체 인구의 10%인 3만 5천여 명에 이른다. 네트워크의 각 구성단체는 조합원 수와 매출액에 따라 회비를 낸다. 네트워크 내에는 정책위원회, 지역농업위원회, 식생활교육위원회, 협동기금위원회, 편집위원회, 국제교류위원회 등 6개 위원회가 있어 사업을 담당한다.

 

2011년 3월에 네트워크의 구성단체들은 원주 사회적 경제 블록화 사업 심포지엄에서 ‘생명공동체를 위한 사회적 경제 조직 협약문’이라는 것을 작성했다. 이 협약문은 ‘공동 소유, 민주적 운영, 인간적 사회 서비스 실현, 협동을 통한 사회적 목적 구현’을 목적으로 삼는 조직을‘사회적 경제 조직’이라 정의했고, 다섯 가지 내용을 담았다.

 

①사회적 경제 조직 간 협동정신을 바탕으로 상호 발전을 위한 시스템을 안착시키자.

②둘째는 상호 발전을 위한 시스템을 통해 각 조직의 발전을 도모하는 한편, 이를 통해 창출되는 잉여는 사회적 목적 실현에 재투자하자.

③민주주의를 바탕으로 각 조직의 주인인 조합원 및 회원 등의 참여 보장과 이들에 대한 정보 전달에 힘쓰며 사회적 경제 조직 확대를 위해 노력하자.

④우리 모두를 위해 각 조직은 민주성, 투명성, 신뢰성 확보에 힘쓰고 인적·물적 서비스에 대한 자율 구제 등을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⑤경쟁과 이윤 추구로 대변되는 주류 경제 질서에 대항하여 돈보다는 사람이 우선되는, 생명이 살아 숨쉬는 지역공동체를 만들자.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는 아래와 같은 비전을 가진다.

①사회적 협동조합: 기아 및 식량 문제 대응, 인간적이고 생산적인 일자리 제공, 상업적 성공으로 머물지 않고 사회 보전자 역할로서의 임무 확대.

②협동조합의 사회적 기여 : 한살림 등 기존 생협의 지역사회 기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운동 모색

③사회경제 운동을 통한 지역 공동체 건설: 이윤보다 회원과 공동체를 위한 운영, 국가로부터의 자율성, 민주적 경영(1인 1표), 자본에 대한 개인과 노동의 우위, 참여의 원칙과 개인 및 집단의 권력화(empowerment)

풀뿌리 민주주의 확립

 

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는 ‘사회적 경제 영역 발전을 위한 방안’을 다음과 같이 마련한다.

①협동조합 정신 등 사회경제 영역의 가치와 지향점 대중적 공유: 원칙을 바탕으로 한 사회경제 영역의 운영 및 협동조합 정신의 대중적 공유와 미래비전 제시→ 제도화되지 않은 자기 원칙의 설립과 준수
선순환 구조와 사회적 경제 블록 구축을 위한 상호부조 시스템 확립: 사회적 경제 블록의 선순환 구조의 시스템화

③영역확대를 위한 노력: 네트워크 내 회원단체 확대와 영역별 구축

사회적 경제 지표를 통한 네트워크의 가능성과 규모 파악(인적 능력과 인간적 연대포함): 사회적 경제 지표를 통한 역량 파악 및 홍보, 제도개선에 활용

⑤역사와 브랜드 홍보를 위한 체계 확립: 역사와 현재 역량을 바탕으로 한 브랜드 가치 창출 및 홍보, 축제 및 세미나, 포럼 개최

⑥사회적 경제 가치를 통한 발전계획 및 지역의 미래상 정립: 협동의 도시 트렌토 등의 방식으로 지역의 미래상 정립

⑦정부 - 자치단체 간 교류협력 및 투쟁(제도 및 지원): 생협법 개정 및 조례 제정(사회적 경제 지원 및 육성에 관한 조례), 기금조성 등

⑧국제·국내적 연대와 연구: 지속적인 교류활동을 통한 가치 및 제도, 시스템의 학습

⑨주민 삶을 책임지는 새 영역 구축: 새로운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 창립 지원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 영역 확장을 위한 기금 조성 및 운영: 협동기금 설치 및 운영

매체의 안정적 발행과 내용의 대중화

사회경제 일꾼 재생산을 위한 비전의 공유와 교육의 장 마련: 미래 비전을 통한 재생산 및 지속적인 만남과 교육의 장 마련

네트워크의 서비스 프로그램 정착 및 안정화, 체계화: 네트워크 강화 및 서비스 프로그램 창조

⑭한국식 전형 창출: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공동체 운동기관, 협동조합 형 사회적 기업 등

⑮민주주의 확립

⑯지역사회와의 연대와 기여: 시민사회단체, 정당, 노동조합, 주민조직


이런 역사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졌을까?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의 전신(前身)인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는 10년 전에 만들어졌고, 네트워크는 2009년에 만들어졌다. 원주 협동조합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지학순 주교의 부임은 1965년의 일이다. 밝음신협은 1972년에 설립되었고, 한 살림의 전신인 원주소비자생활협동조합은 1985년에 설립되었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 역사 속에 수많은 인물과 단체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사라졌다. 다양한 사람과 단체가 만나 사건을 일으키고 서로 충돌하고 화합하며 지금의 모습을 만들어왔다.

 

그렇다고 원주시 협동사회경제의 미래를 무조건 낙관할 수는 없다. 협동조합운동은 초기 운동가들의 연로와 후진양성의 미흡, 신자유주의와 제1금융권의 팽창, 정부 개입의 증가, 조합원 활동의 위축, 새로운 협동조합 정책 및 이론 생산의 미흡 등 운동과 경영 양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리고 원주시청이나 원주시의 경제상황, 문화적인 조건들이 협동사회경제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렇다면 사천시에는 어떤 역사가 있는가? 협동사회경제와 관련된 인물과 단체들을 꼽는다면 누가, 무엇이 있을까? 협동사회경제를 함께 도모할 수 있는 사람과 단체, 자원은 무엇일까? 네트워크가 공동으로 소유할 수 있는 자산은? 민주적으로 회의하고 공동으로 결정해본 경험은 있는가? 여러 단체들이 공동으로 대처하여 성공했던 경험은 있는가?

 

단체 회원이나 조합원, 구성원들은 협동사회경제를 이해하고 이와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는가? 서로 기꺼이 역할을 나눠가지려는 자세는 되어 있는가? 협동사회경제의 확대/확장을 위해 기꺼이 내 자원을 공유할 의지는 있는가?

 

한국정부나 사천시청은 협동사회경제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품고 있는가? 한국의 경제구조나 사천시의 경제현황은 협동사회경제에 유리한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는가? 지역에 활용할 만한 기술이나 자원은 있는가?

 

 


3. 해외 사례 이야기


사례라고 해서 꼭 잘되는 사례만 들을 이유는 없다. 때로는 안 되는 이유를 듣는 것이 훨씬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이탈리아 볼로냐대학의 바띨라니(Patrizia Battilani)와 베르겐대학의 쉬뢰터(Harm G. Schröter)는 “탈협동화와 그 문제점들”(Demutualization and its Problems)”(Quaderni DSE Working Paper, 2011년)이라는 주제로 다음과 같은 공동연구를 진행했다. 이 연구는 기본적으로 소유권 구조의 변화, 전통적인 협동조합에서의 이탈, 협동조합의 사회적 가치변화에서 탈협동화의 원인을 찾는다. 바딸라니와 쉬뢰터는 20세기부터 탈협동화가 진행되어 왔고, 1980년대 이후 특히 미국과 영국,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탈협동화 경향이 두드러졌다고 지적한다(그래서 2007년에는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이 탈협동화를 심층적으로 조사할 연구위원회를 소집하기도 했다). 반면에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탈협동화되었던 협동조합들이 다시 협동조합으로 변신하는 재협동화(re-mutualization)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바띨라니와 쉬뢰터는 기본적으로 탈협동화가 미국식 경쟁 자본주의와 비슷하고, 세계화의 흐름이 이런 경향을 강화시키고 있다고 본다.

 

이 연구에서 바띨라니와 쉬뢰터는 탈협동화의 원인을 다섯 가지로 지목한다.

 

첫째, 기업이나 정치․사회제도의 영향을 받아 협동조합이 사기업이나 투자자소유기업의 절차와 전략을 따르면서 협동조합의 조직이 점점 비슷해지는 경향(organizational isomorphism)

둘째, 공동소유구조가 너무 경직되어 급변하는 현실을 따라잡기 어렵다며 사유화를 지지하고, 급속도로 강화되는 경쟁에 적응해야 한다는 문화적 요인(cultural reasons)

셋째, 일반경제학 교육을 받고 상호성을 옹호하지 않는 경영진이 취임하고 이들이 조합원을 희생시켜 자기 이득을 취하려 하면서 생겨난 경영진의 착취(expropriation by managers)

넷째,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로 협동조합에 대한 반감이나 협동조합을 낡은 모델로 보는 의식이 확산된 정치적인 요인(political reasons)

다섯째, 자본이 제한되고 관리자에 대한 통제체계가 없는 협동조합의 비효율성 또는 성장전망의 부재(inefficiency or lack of growth perspectives)

 

이런 요인을 정리하면서 바띨라니와 쉬뢰터는 지난 20년 동안 ①조합원제도에 바탕을 둔 상호부조라는 전통적인 인센티브가 흐려질 경우(협동조합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을 때), ②정부가 탈협동화를 유도하는 인센티브를 제공할 경우, ③미래의 전망을 발전시킬 방법에 관한 대안적인 견해가 전통적인 견해보다 더 매력적일 경우에 탈협동화가 진행되었다고 지적한다. 특히 바띨라니와 쉬뢰터가 강조하는 건 협동조합이 기업으로 전환되기가 쉽지 않은데 정부가 탈협동화를 가능케 하는 법률들을 제정함으로써 여러 협동조합들(특히 보험과 관련된 협동조합들)이 탈협동화를 부추겼다는 것이다. 탈협동화가 적절한 법적인 틀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때로는 그런 법적인 틀이 탈협동화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보통 탈협동화가 성과와 성장을 내세우지만 바띨라니와 쉬뢰터는 탈협동화가 더 나은 효율성과 성과를 보장한다는 명확하고 보편적인 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 아울러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미국과 캐나다의 신세대협동조합과 같은 혼성조합(hybridization)이 탈협동화와 관련되어 있고 탈협동화가 혼성조합의 어두운 면이라고 말한다.

 

바띨라니와 쉬뢰터의 연구를 통해 탈협동화의 경향이 수십년 동안 강화되어 왔고 미국식 경제의 확산과 세계화의 흐름이 이런 경향을 강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미FTA를 체결하고 세계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 바띨라니와 쉬뢰터가 지적한 탈협동화의 원인이 한국의 협동사회경제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의 대의원총회나 이사회가 형식적인 의결기구로 변하고 일반기업과 비슷하게 관리자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현상, 외부환경의 변화에 대응한다는 명목으로 1인 1표와 민주적 참여의 원칙이 훼손되는 현상, 일반기업의 경영전략이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는 현상 등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그리고 한국에서 보편화된 무한경쟁, 승자독식의 논리가 협동사회경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을 일자리 창출의 도구로 보는 정부의 시각은 어떤 형태로든 협동사회경제의 성격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가 외부의 우려처럼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을 동원하는 ‘제2의 새마을운동’을 시작할 경우, 협동사회경제의 탈협동화 경향은 훨씬 더 강화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협동사회경제를 준비하는 진영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최근에 등장한 ‘협동조합간의 경쟁’이라는 틀은 이런 현실의 경향에 저항하고 그것을 바로잡기는커녕 탈협동화 경향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예를 들어, 소비자생협의 매장경쟁과 관련해 어느 한 매장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해서 그 지역에 다른 매장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독점’이고 협동조합 사이에도 경쟁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등장했다. 조합원을 위하고 전체 협동운동의 몫을 고려한다는 전제가 붙긴 했지만 이것은 경쟁이 시장을 활성화시킨다는 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리고 독점의 반대말이 경쟁이라는 것은 하이예크를 비롯한 자유주의 경제학자들(한국에서는 주로 자유기업원)이 강조하는 논리이다. 소비자생협이 이런 논리를 따라야 할까?

 

자유주의 경제학과 다른 관점에 따르면 독점의 반대말은 경쟁이 아니라 공유나 경제민주화, 자급자족이다. 생협매장의 지나친 경쟁을 막고 상생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 경쟁을 방해한다는 논리로 빠지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설령 어쩔 수 없이 경쟁을 고려하더라도 그건 일반기업과의 경쟁에 대처하는 방법이어야지 협동조합 간에는 적합하지 않다. 외려 소비자생협이 일정한 매장운영협정을 만들고 그런 규칙이 사회적 시장을 만들도록 자극해야 하지 않을까?

 

멘자니(Tito Menzani)와 자마니(Vera Zamagni)는 “이탈리아 경제의 협동조합 네트워크(Cooperative Networks in the Italian Economy)”(《Enterprise&Society》, 2010년)에서 이탈리아 협동조합운동의 성공이 네트워크에서 비롯되었다고 강조한다. 보통 네트워크라고 하면 하나의 중심을 가진 중앙화된 네트워크나 이리저리 분산된 탈중심화된 네트워크를 생각하지만 이탈리아의 협동조합들은 수평적인 네트워크(horizontal network)를 구성했기에 강한 힘을 키울 수 있었다는 거다. 이 네트워크에서 한 단위는 단순한 구성원일 수 있지만 때때로 다른 단위와 선으로 연결되거나 전체 네트워크를 코디네이터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다른 단위들이 자신에 의지하게 되면 전체 네트워크의 주요한 단위가 될 수 있다. 이 수평적인 네트워크가 시장경쟁력을 증가시키고 생산을 합리화시키며 공동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위험과 기회를 공유했다는 게 멘자니와 자마니의 평가이다.

 

그런 점에서 국내의 협동사회경제 네트워크가 멘자니와 자마니가 말한 수평적인 네트워크를 지향하고 그렇게 형성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더 중요하게 지역의 다양한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 단체들은 그런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주요한 단위가 되고자 하는가? 아직 그런 경험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가능하다가 아니라 그런 경험을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축적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야 협동사회경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고 기업문화가 바뀔 수 있다. 그래야 끊임없이 자본주의 사회의 영향을 받는 조합원/회원/자원활동가들이 현실의 경쟁논리에서 벗어나 협동의 논리로 현실을 바라보고 삶을 기획할 수 있다. 만일 그런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경쟁의 논리가 부메랑처럼 돌아와 협동사회경제를 탈협동화시킬 수도 있다.

 

《협동조합운동, 21세기의 대안》(들녘, 2003년)의 저자로 국내에 알려진 존스턴 버챌(Johnston Birchall)은 “소비자협동조합의 합병시도에서 배우는 이론적, 실천적 함의(Some theoretical and practical implications of the attempted takeover of a consumer co-operative society)”(《Annals of Public and Cooperative Economics》, 2000년)라는 글에서 협동조합이 외부의 자극과 영향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버챌은 1997년에 앤드류 리건(Andrew Regan)이라는 민간업자가 유럽에서 가장 큰 협동조합이던 영국의 도매협동조합(Co-operative Wholesale Society, CWS)을 합병하려 했던 과정을 분석하면서 협동조합이 미디어의 영향이나 내부매수 등에 취약하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이런 문제가 2차 대전 이후 진행된 사업(business enterprise)과 결사(membership association)의 분리에서 불거졌다는 점도 지적한다. 버챌은 협동조합이 사업 면에서 다른 경쟁자들보다 잠재적으로 이로운 건 조합원들 때문이라는 점을 경영진이나 관리자들이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점을 자각하고 잘 활용한다면 소비자생협이 시장에서 제한되지만 잠재적으로 아주 유용한 위치(limited but potentially quite fruitful place in the market)를 점할 것이라는 거다.

 

비슷한 맥락에서 미국 세인드 메리 대학 경제학과의 노브코비츠(Sonja Novkovic)는 협동조합/신용조합과정(MMCCU, the Master of management : Co-operatives and Credit Union)을 소개하는 자료에서 협동조합이 ‘협동조합의 차이(Co-operative difference)’를 사회적으로 인식시켜야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협동조합은 조합원이나 시민들이 이 차이를 이해하고 믿도록 하고 이 가치를 만들고 관리해야 한다는 거다. 노브코비츠는 협동조합의 사업은 이런 차이를 마케팅하는 것이고 마케팅이 곧 교육이고 교육이 마케팅이라는 점, 시설이 교육이고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교육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협동조합에서 일하는 노동자(활동가)가 생산품에 대한 이야기, 우리 사람과 큰 뜻에 관한 이야기, 구체적인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비자생협이 활동하는 장소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버챌과 노브코비츠는 협동조합이 적대적인 시장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시장의 논리를 내면화하는 것이 아니라 협동조합의 논리를 내부에서 더 많이 교육하고 그 가치를 사회적으로 확산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은 조합원들이 협동조합을 성장시키는 것이고 조합원들이 스스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이 협동조합의 전략이다. 마찬가지이다. 협동사회경제를 강화시키는 힘은 막대한 자원의 투입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를 강화시키고 신뢰와 협동을,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를 확대시켜야 한다. 정치적인 시민권과 사회경제적인 시민권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플레차(Ramon Flecha)와 크루즈(Ignacio Santa Cruz)는 “경제적인 성공을 위한 협력: 몬드라곤 사례(Cooperation for Economic Success: The Mondragon Case)”(《Analyse & Kritik》 2011년)에서 협동조합의 민주주의가 경쟁력을 만들고 협동조합간의 연대나 이익의 공유, 매우 평등한 봉급체계, 안정적인 고용구조 등이 협동조합의 차이를 만들고 확산시킨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노동인민금고나 인도주의적인 경영만이 아니라 공개적인 지적 토론과 풀뿌리민주주의가 있었기에 몬드라곤의 성공이 가능했다고 지적한다.

 

국내에서도 많이 거론되는 <로치데일공정선구자조합>은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이나 8시간노동제, 연금같은 기본적인 노동조건을 보장했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이 새로운 사회를 보는 눈과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했다. <선구자조합>이 매장에 읽을거리를 비치하고 대규모의 도서관을 만들었던 것은 당시 노동계급에게 절실했던 정치의식과 계급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에드워드 톰슨의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을 보면, 당시 영국의 노동자들이 다양한 공간에서의 토론과 학습을 통해 계급의식을 형성해간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이 <선구자조합>의 성공을 보장했다고 나는 본다.

 

따라서 ‘협동과 연대의 의식’을 만들고 확산시키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1978년에 부산에서 만들어진 <양서협동조합>이 단순히 좋은 책을 거래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1978년에 협동서점을 만들고, 1979년에는 협동출판사, 1985년에는 협동도서관, 1990년에는 협동연구소, 2000년에는 협동대학을 설립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 라면상무와 감정노동의 현실

 

얼마 전 포스코의 한 상무가 비행 중에 스튜어디스를 모욕하고 “밥이 설익었다”, “라면이 짜다”, “라면이 익지 않았다”며 폭행하는 일이 발생해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그러면서 감정노동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비행기만이 아니라 백화점이나 대형마트같은 유통업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식당과 술집같은 외식업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콜센터나 공공부문에서 서비스를 담당하는 노동자들, “매우 만족했다”는 고객의 평가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서비스노동자들의 감정노동이 매우 심각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노동과정의 스트레스 때문에 지난 4년 동안 정신질환 자살자나 산재신청 횟수가 계속 늘고 있다고 한다.

 

지난 4월 29일 국회에서 열린 ‘우리나라 감정노동 실태와 개선방향’ 토론에서 임상혁 노동환경건강연구소장은 감정노동이 감정적 부조화(자아의 이중화), 낮은 직무만족(높은 직무 스트레스), 정신적 고갈,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음주, 흡연, 약물, 도박 중독을 불러온다고 지적했다. 사례조사 결과 서비스업 종사자의 절반 정도가 가벼운 우울증 이상의 질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개인의 의지나 감정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 누구의 감정이 더 힘드나?

 

전 세계적으로 항공기 객실 승무원은 감정노동을 가장 많이 하는 직업으로 분류된다. 앨리 러셀 혹실드는 항공 승무원의 노동을 분석한 《감정노동》(이매진, 2009년)에서 “감정을 상품으로 바꾸거나, 감정을 관리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도구로 바꾸는 데 자본주의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자본주의는 감정 관리를 사용할 방법을 찾았고, 그렇게 감정관리를 좀더 효율적으로 조직하면서” “감정노동을 경쟁과 연결 짓고, 실제적으로 ‘진심 어린’ 미소를 광고하고, 그런 미소를 만들도록 노동자를 훈련시키고, 노동자들이 미소를 만드는지 감독하고, 이런 활동과 기업의 이익 사이의 연결 고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혹실드는 “여성이 남성보다 감정 관리를 더 많이 한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고, 감정노동이 남녀의 성역할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세상은 여성에게 어머니 노릇을 요구하고, 이 사실은 묵묵히 직무 내용의 많은 부분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감정노동은 주로 여성, 나이로 보면 30대 이하에서 가장 많이 요구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판매․서비스 분야에서 일하는 전체 노동자의 수가 약 314만 명인데, 서비스 종사자의 약 66%, 판매 종사자의 약 50%가 여성이다. 특히 전화로 고객을 상담하는 콜센터에서 일하는 100만 명의 상담원 중 약 89만명이 여성이다. 이런 현실을 고려해 2011년 국가인권위원회는 ‘여성감정노동자 인권가이드’를 제작해 배포하고, 2012년에는 ‘여성 감정노동자 인권수첩’을 발간하기도 했는데, ‘인권수첩’은 여성감정노동에 대한 정보와 감정노동자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바꿀 방법, 감정노동자가 보장받는 권리의 내용 등을 담고 있다(인권수첩은 국가인권위원회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 생협매장과 감정노동

 

생협이 운영하는 매장에서는 감정노동이 없을까? 매장의 매니저나 활동가는 무조건 친절하고 웃어야 한다고 강요받지 않을까? 조합원들은 매장에서 일하는 조합원들을 같은 조합원으로서 동등하게 대하고 있나? 생협의 매장이 무조건 친절해야 할까? 외려 조합원들이 소비자의 관점에서 매장활동가들에게 감정노동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을까? 이런 질문들에 답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협동조합의 정신에 따른다면, 조합에 감정은 넘쳐 흘러야 하지만 그것이 노동으로 강요되면 안 된다. 그리고 물품의 유통에서 공급보다 매장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는데, 매장에서의 관계와 역할, 활동에 관한 합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앞서의 임상혁 소장은 고객에게 무조건 사과를 하라는 회사의 매뉴얼 말고 고객이 요구할 수 있는 서비스와 수용의 기준, 지속적으로 웃지 않을 권리, 고객과 마찰이 생겼을 때 적절하게 대응하는 지침 등을 담은 매뉴얼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생협에서도 이런 매뉴얼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 죽음의 무기, 확산탄

확산탄은 공중에서 폭발해서 많은 작은 폭탄들을 흩뿌리는 폭탄으로 군사목표와 민간인을 구별하지 않고 넓은 지역에 피해를 입히는 끔찍한 살상무기임. 확산탄 피해자 중 98%가 민간인이고 이중 1/3이 어린아이로 알려짐. 이런 비인도적인 피해 때문에 2008년에 전 세계적으로 확산탄금지협약이 추진, 체결되었고 2010년 8월부터 이 협약이 발효되고 있음. 이 협약에 따라 확산탄의 사용, 생산, 비축, 이전이 국제적으로 금지되었고, 2013년 4월까지 전 세계 80개국이 협약을 비준한 상황임.

 

확산탄의 사용을 금지하는 차원을 넘어 벨기에, 아일랜드,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뉴질랜드, 스위스 등 7개국은 확산탄에 대한 각종 투자를 법으로 금지함. 7개국 외에 21개국도 확산탄금지협약에 의거 투자를 금지한다는 해석 성명을 발표함. 실제로 노르웨이연금기금이 2006년과 2008년에 각각 풍산과 한화에 대한 투자를 철회한 것도 이런 윤리지침에 따른 것이었음.

 

그런데 확산탄에 대한 전 세계 투자현황이 기록된 《확산탄 세계투자: 공동의 책임보고서》(2012년 6월 개정판)에 따르면 한국의 한화와 풍산은 세계 8대 확산탄 생산기업임. 그리고 이 두 기업에 가장 많이 투자한 곳이 국민연금이라 기록됨.

 

 


- 무기생산기업에 대한 투자에서 협동조합에 대한 투자로

2011년 말 국민연금은 세계 4대 공적연기금으로 성장함. 국민의 생활안정과 노후행복에 공헌하겠다는 국민연금공단이 전 세계적으로 금지되고 있는 무기생산에 투자하는 것은 모순임. 더구나 국민연금은 투자할 때 투자대상의 환경, 사회, 지배구조를 고려해야 한다는 유엔책임투자원칙(UN PRI)에 2009년 7월에 가입했음. 또한 국민연금은 사회책임경영, 윤리청렴경영, 사회공헌, 동반성장 등을 중요한 원칙으로 내세우고 있음.

 

전 세계적인 흐름과 자신의 원칙에 부합하려면 국민연금은 무기나 사회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생산하는 대기업보다 사회적 경제를 활성화시키려는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에 투자해야 함. 그러나 국민연금이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벤처기금을 운용하고 있지만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을 지원한 사례는 없었음.

 

만일 국민연금이 그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국민연금으로 미래를 준비해야 이유가 있을까? 국민연금이 미래를 파괴하는 생산에 투자하는 건 자기모순임. 그런 의미에서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국민연금이 제대로 투자될 수 있도록, 우리 삶의 기반을 강화시킬 수 있도록 사회적인 합의를 만들고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할 듯.

 

- 참고: 무기거래를 감시하는 단체 <무기제로>의 ‘국민연금에 보내는 공개서한’

 - 일베만의 문제인가?

<일간베스트 저장소>라는 인터넷 사이트의 줄임말인 ‘일베’가 사회적인 논쟁의 화두가 되고 있음. 2009년에 만들어졌고 대표적인 우파 사이트로 불리는 일베에서는 하루 동안 게시물을 조회하는 수가 400만을 넘는다고 하니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 그동안 일베 게시판에서 여성이나 다문화 여성, 장애인 등 사회의 소수자를 비난하거나 모욕하는 일이 잦았음. 그러다 최근 일베 게시판에 “광주 5·18은 고정간첩들과 북괴놈들 내려와서 벌어진 일”이라느니 희생당한 광주시민을 “홍어 택배”라고 부르는 글이 올라오면서 사회적인 파장이 커지고 있음.

 

그동안의 일베 게시물을 분석한 ‘일베 리포트’를 보면, 게시물에 사용된 주요 단어는 “씨발, 존나”(5,417건), “여자”(4,321건), “노무현”(2,339건), “盧”(1,564건), “광주”(1,622건), “종북”(1,633건), “민주화”(1,204건), “섹스”(616건)임. 노무현과 광주, 종북, 민주화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된 건 민주화에 거부감을 가진 일베의 성향을 보여줌.

 

그런데 이런 현상이 일베만의 특징은 아님. 일베의 등장은 사회의 전반적인 보수화와 무관하지 않고, 특히 경제적, 문화적인 면에서 배제되고 있는 청년층의 확대와 연관성을 가짐.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거나 사상을 주입당해 보수화된 게 아니라 현실에 대한 반감과 불만이 기존의 권위에 대한 파괴적인 성향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볼 수 있음. 그래서인지 힘에 대한 강한 욕망을 보임.

 

하지만 이런 상황논리로 일베의 등장을 분석하는 건 단편적일 수 있음. 과거에는 보수적인 분위기에서도 민주화를 외치며 많은 청년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단편적인 분석은 어려움. 그리고 일본에서도 ‘넷 우익’이라 불리는 집단이 세를 불리고 있고, 유럽에서도 인종주의가 강해지고 있다는 현실 변화를 고려해야 함. 특히 논란 이후 중앙 일간지들은 일베를 문제집단의 집합소로 몰아세우고 있는데, 이는 우리 스스로 깊이 성찰해야 할 지점을 놓치게 함.

 


- 누가 일베인가?

 

일베가 대중의 관심을 받은 건 걸그룹인 시크릿의 일원인 전효성이 방송에서 “저희는 개성을 존중하는 팀이거든요. 민주화시키지 않아요.”라고 말한 일 때문임. 일베에서 민주화는 반대나 싫다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를 사용한 것임. 그리고 최근 밝혀진 것을 보면 일베에는 교사나 의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음. 즉 특정한 연령이나 직업, 계층으로 정의될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이 일베에 접속하고 있음.

 

일베가 문제되자 민주당의 몇몇 국회의원은 일베의 운영을 법적으로 중단시키고, 광주시는 광주와 관련된 발언을 한 일베 회원을 고소하겠다는 입장을 밝힘. 이와 관련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고, 그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더 큰 위험을 낳는다는 지적이 있음. 냉소와 분노가 동시에 공존하는 사람들은 기존의 상식으로 평가되기 어렵고, 실체를 드러낸 극우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잠재된 냉소하는 사람들임.

그러니 일베를 법에 따라 처벌하거나 일베를 무시하거나 그것에 관심을 끊는다고 해결될 일도 아님. 물론 표현의 자유를 넘어서는 폭력에 가까운 발언들이 있고 그 말을 통해 자기 힘을 과시하고 쾌감을 느끼려는 태도는 지극히 위험해 보임. 하지만 그 극도의 위험성은 불안감의 정점에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기도 함.

 

어쩌면 우리 아이, 내 친구, 내 동료들이 일베에 들어가 글을 남기는 사람일 수 있음. 그렇다고 우리 속에도 일베가 있으니 모두가 내 탓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님. 한국사회는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개인화해서 어떤 사회적 조건으로 만들곤 함. 가령 어려운 삶을 산 개인이 순간적인 분노로 범죄를 저지를 경우 ‘사이코패스’로 분류하며 이를 그의 성장과정 탓으로 몰아붙이곤 함. 최근 일베 사이트에 ‘인증’이 자주 올라오는 건 그런 규정에 대한 반감이기도 함.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서로 마음의 심연(深淵)을 들여다보는 것이기도 함. 타자의 눈에 비친 내 속의 심연을 대면해야지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도 생김.

지난 5월 2일, 광주광역시에서는 생협매장 문제로 <아이쿱 광주권 생협>과 <한살림광주생협>의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아이쿱 생협이 한살림 매장 근처에 연이어 대형매장을 내어 한살림매장이 큰 위기를 겪거나 폐점되자 한살림이 먼저 토론회를 제안했다. 아이쿱 생협은 신설 매장이 조합원 협동의 결과물이고 먼저 매장이 들어섰다고 그것이 기득권이나 독점일 수 없으며 협동조합도 서로 경쟁할 수 있다고 답하며 토론회를 수락했다.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지만 토론회는 서로의 입장 차이를 확인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그렇지만 이 토론회가 시작이어야지 끝이면 안 될 것 같다. 이제 그럴 때가 되었다. 가끔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도 생협과 관련된 논쟁들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생협 매장이 지역의 작은 가게들에 영향을 미치거나 문을 닫게 만들었다는 이야기, 생협과 거래하는 생산지들이 커지고 사업화되면서 자기 지역 먹거리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이야기, 생협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털어놓는 어려움을 접한다. 그럴 때마다 놀란 가슴을 달랜다. 생협은 자기 길을 잘 걷고 있나?

그 많은 이야기들이 그동안 우리에게 들리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피해온 걸까? 이러다간 어느 순간 생협도 점점 일반 기업처럼 변해가는 건 아닐까, 걱정이 생긴다. 살림이나 호혜의 경제학이 아니라 자유주의 경제학, 시장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건 아닐까? 조합원이나 협동조합의 숫자는 늘어나지만 사회의 의식이나 문화는 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시민의 삶은 더욱더 치열한 승자독식의 경쟁으로 내몰리는 건 아닐까?

러시아의 사상가 크로포트킨은 《상호부조론》에서 적자생존을 위한 경쟁만이 상호부조가 만물의 진화를 돕는다는 이론을 사회에도 적용시켰다. 경쟁이 없다거나 무조건 경쟁을 배제하자는 게 아니라 경쟁만이 사회를 움직이는 건 아니고 외려 상호부조와 상호지지를 통해서 경쟁이 제거되면 더 좋은 조건들이 만들어진다는 것이었다. 크로포트킨은 상호부조하는 삶이 경쟁하는 삶보다 훨씬 오랜 전통과 문명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한다. 이것은 단지 ‘성장이냐 아니냐’라는 미래의 가능성을 점치는 물음이 아니고 지금 현재 우리 삶과 역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인식의 문제이다.

그렇지만 경쟁이라는 말이 이미 나왔으니 그 말을 하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경쟁을 의식할 수밖에 없고, 경쟁은 더 다양한 말로 치장될 것이다. 아마 적대적인 경쟁과 호의적인 경쟁이 다르다는 말도 나올 것이다. 허나 그런 차이가 만들어지려면 사회적인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새로운 협동조합들을 지원하고 우호적인 경쟁자를 만든다는 이탈리아의 협동조합기금이 이탈리아라는 사회적 조건을 무시하고 논의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적인 환경은 이탈리아와 비슷한가? 협동조합에 이로운 외부 환경이 조성되어 있나? 그런 환경이 없는 상태에서 조합원들이 경쟁을 당연한 원리로 받아들일 때 협동조합의 정체성은 아무런 변화도 겪지 않을까? 무조건 규모를 계속 키워야 하는 매장, 같은 조합원임에도 일방적인 친절함을 강요당하는 매장 활동가나 실무자, 일반 기업이 겪는 문제를 협동조합은 겪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 단지 매장의 입지만이 아니라 이런 여러 가지 물음들을 놓고 다양한 토론이 벌어지면 좋겠다.

협동조합 7원칙 중 여섯 번째 원칙은 ‘협동조합간의 연대’이다. 그런데 연대 이전에 서로의 존재에 대한 자각과 인정이 필요하다. 우리는 지역 내의 다른 생협이나 협동조합들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서로를 어떻게 모시고 있나? 이 물음에 답을 찾아야 진정한 연대가 가능하다.

함께 살자, 이것은 결코 당위가 아니다.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에 관한 이야기인지 모른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에서 “가난이 왜 고통스러운가 하면, 가난하기 때문에 싫은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고, 가난하기 때문에 관리나 억압에 저항하지 못하고 착취당하기 때문입니다. 상사가 아무리 보기 싫어도 이를 악물고 일해야 하고, 경멸당하고 무시당해야 하니까 그것이 고통스러운 거죠.”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핍을 보상받을 물질이 아니라 싫은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관리나 억압에 저항할 수 있으며, 경멸당하고 무시당하지 않아도 살 수 있도록 서로를 지탱해주는 관계이다. 남을 타고 오르는 것이 아니라 넘어지는 사람을 받쳐주는 것이 사람(人)이고 협동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어떤 완성된 과정이나 단계로 생각한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도입하면 곧바로 뭔가가 이루어지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정답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 아닌가. 정답이 없기에 둥글게 모여 앉아 서로의 지혜를 모아 보자는 것이 민주주의 아닌가. 물론 어떤 과정이나 단계가 그렇게 지혜를 모으기에 좋은 조건을 마련할 수는 있겠지만 그 자체가 민주주의일 수는 없다.


그렇기에 민주주의의 관점으로 본다면 모범 사례모델은 불가능하다. 어느 한 곳의 성공이, 어떤 다양한 경험과 문화, 생각들이 하나의 모델로 정리되어 다른 곳에 이식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민주주의나 정치에 관해 강의할 때 가장 많이 요청받는 것이 그와 관련된 사례이다. 사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완벽하게 실현하고 있는 사례가 있을까? 내가 보기엔 없다. 밖으로는 민주적이라고 알려진 공동체나 출판사, 단체들도 막상 가 보면 몇몇 사람들이 주요한 결정들을 내리고 구성원들의 지혜를 모으는 과정은 결정을 보완하는 수단 정도로 여겨진다.


반면에 민주주의가 실패한 사례들은 주변에 널려 있다. 왜 실패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민주적인 사회구조를 이유로 든다. 이런 구조에서는 민주주의가 어렵고 때론 비효율적이라고 얘기한다. 타당한 지적이지만 충분한 지적인지는 모르겠다. 바로 그런 구조이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더욱더 필요한 게 아닐까?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입에서조차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되면 더더욱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운동을 하는 거지?


어느새 이런 부조리가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되어 버렸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셀러로 팔리는 사회에 살지만 정작 우리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규정하거나 요구하지 못한다. 생각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삶의 과제로 가져오는 건 목숨만큼 큰 대가를 요구한다. 공부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살 수는 없는, 그렇게 살면 안 되는 불온한 민주주의. 이미 법정에서 판결이 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탑에 올라야 하는 노동자에게, 학생의 인권이 조례로 보장된다는 사회에서 홀로 고립되어 아파트 난간에 올라선 청소년에게 민주주의는 어떤 의미일까? 삶은 이렇게 절박한데 민주주의는 박제된 골동품처럼 느껴진다.

 

아직도 민주주의가 더 필요한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무슨 민주주의가 더 필요하냐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지금으로도 민주주의는 충분하며 민주주의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지나쳐서 문제이고, 외국에서 얘기되듯이 현재의 문제는 과잉된 민주주의(demorecracy)라는 거다. 지금껏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했거나 자기 삶과 연관된 결정들에 참여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공론장에 모습을 드러내면 기득권층은 기함하며 이들을 막아선다. 마치 당장 무슨 변고가 일어날 것처럼, 사회가 하루아침에 무너질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그런데 이건 그들의 과장이 아니라 그들의 실감일 수 있다. 비교적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로 평가받는 송호근의 입장을 살펴보자. 송호근은 한국의 평등주의, 그 마음의 습관에서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평등 지향적 심성을 지적한다. 원인보다는 결과에 더 민감한 평등주의 심성이 한국 사회를 하향 평준화시켰고, 이런 습속folklore이 누적됨으로써 책임과 의무가 결여된 평등주의가 한국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평등주의 자체가 해로운 것은 아니지만 비난의 심성, 분노와 적개심의 에너지 등이 공정성을 권리 투쟁의 대상으로 만들어 한국 사회를 파괴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송호근이 해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다원적 평등과 관용이다. “똑같은 양의 재산을 소유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의 다양성을 반영하는 다양한 분배 기준을 요구하는 다원적 평등 개념을 주장하고, “양보의 기억을 쌓는관용을 강조한다. 도발적인 문제 제기에 비해 모범생 같은 결론이다.


어쨌거나 민주주의가 지나치게 평등을 지향하면서 사회의 반목만 낳았다는 것이 송호근의 분석인데, 이 분석은 좀 문제가 많다. 일단 사회적인 평등을 논하는 전제가 잘못되었다. 송호근은 사회주의권을 제외하고 자본주의권에서 한국은 소득 불평등이 비교적 낮았던 국가에 속한다. 적어도 금융, 토지, 주택 소유를 논외로 하고 소득만을 비교했을 때에 한국은 급속한 산업화에도 불구하고 소득 불평등이 낮은 매우 모범적인 국가로 꼽혀 왔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심각한 사회적 양극화는 소득만이 아니라 그가 배제한 금융, 부동산에서 기인한다. 예를 들어 손낙구의 부동산 계급사회에 따르면, 1988년과 2006년 사이에 토지 소유자 중 상위 50%가 소유한 면적 비중은 98.2%에서 99.6%로 늘어났다. 소위 민주화 이후 토지 소유에서 빈부의 격차가 더 벌어진 것이다. 그러니 사회가 평등해지는데 반목만 늘어났다고 주장하기는 어렵고, 외려 실질적인 평등이 더욱더 요구된다고 볼 수 있다. 보통 과잉을 주장하는 얘기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시도일 때가 많다. 이들은 본질을 제대로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본심이 드러날까 봐 아프다며 엄살을 떤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과잉을 주장해야 하기에 실제 역사가 왜곡되기도 한다. 가령 송호근은 “1987년 민주화 과정은 재산 축적을 향해 무한 질주를 해 온 교양 없는 중산층결과의 평등을 앞세운 노동계급 간 전면 대결로 촉발되기에 이르렀다. 민주화 과정이 재분배 문제를 둘러싸고 각 집단과 계급의 이해 충돌과 갈등으로 점철된 이유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것은 실제 역사와 다르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건 민주주의는 중산층과 노동계급의 대결이 아니라 기득권층과 새롭게 구성되는 정치 주체의 대결이었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묘사했을까?


이런 잘못된 정보는 한국 사회가 공정 사회나 기회 균등을 부르짖어도 사실상 두 개의 질서로, 즉 특권을 남용하는 소수의 기득권층과 주어진 권리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대부분의 시민들로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감춘다. 인사 청문회에서 보이듯 기득권층에겐 부동산 투기가 상식이고 직위를 남용한 특혜가 권리이며 학벌은 상속되는 재산이다. 재벌가의 후손들에겐 불법 증여나 분식 회계가 상식이고 특별사면이 권리이다. 그래서 무엇이 잘못인지를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를 원인 없는 적개심이라 불러야 할까? 민주주의가 사회를 하향 평준화시킨 게 아니라 기득권층과 시민들의 삶이 완전히 분리된 건데, 이것이 평등주의 탓일까?


과잉을 주장하는 기득권층에게는 지금껏 눈에 들어오지 않던 사람들이 자신과 동등해지는 것이 싫다. 민주주의는 그런 동등함을 전제하기에 불손한 것이고, 과잉과 문란의 위험을 내포한 민주주의는 절제되어야 한다. 1987년 민주화 당시 노동자들이 요구한 것은 단지 임금 인상이 아니었다. 구해근의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보면, 당시 노동자들은 임금 및 상여금 인상, 노동 시간 단축, 조장組長에 의한 자의적인 평가 폐지,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노동자 간의 지위 구분 철폐, 식사의 질 개선, 복장과 머리 길이에 대한 규제 철폐, 강제적인 아침 체조 중단을 포함한 정말로 긴 요구 목록을 제시했다”. 동등한 사람으로 대우받기를 원하는 것이 당사자에게는 최소한의 조건이지만 이들을 관리하는 사람에게는 과잉이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이다. 법으로 보장된 휴일을 쉬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하고 계약서를 쓰자고 맘 편히 얘기 할 수 없는 사회, 여성이라는 이유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배제되는 사회에서 우리도 그들과 동등하다고 얘기하는 평등은 질서를 파괴하는 위험한 것이 된다.


그래서 송호근의 모범 답안 같은 다원적 평등과 관용은 현실의 불평등과 반민주주의를 지속시킬 뿐이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순수관용비판A Critique of Pure Tolerance에서 한쪽 편을 들지 않는 정파적인non-partisan 관용을 추상적또는 순수한관용이라고 부르면서 이런 관용이 현재의 차별과 착취, 억압을 지속시킨다고 비판했다. 비판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선전할 수단을, 자기 삶과 연관된 결정을 내릴 힘을 갖지 못한 상황에서 모두가 똑같이 관용해야 한다는 것은 거짓이다. 그래서 마르쿠제는 보편적인 관용이 아닌 차별하는 관용discriminate tolerance을 제안했다. 이는 루쉰이 물에 빠진 개를 때릴것을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왕의 머리가 잘리지 않았다면 과연 프랑스혁명이 지속될 수 있었을까? 때로는 불공정한 조건을 바로잡기 위한 과잉된 개입이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좀 과잉될 때에만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자신을 동등하게 대해 달라는 목소리와 개입이 있어야 기득권이 해체되고 새로운 정치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잉이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은 기득권이 위협받고 있음을 뜻하기에, 어쩌면 우리가 조금 더 본질에 다가서는 것일 수 있다. 그러니 누가 과잉을 주장하는지 잘 살펴야 한다.


학교와 연관 지어 생각해도 마찬가지이다. 학교가 과잉을 외치며 지키려 하는 본질적인 이해관계나 기득권은 무엇일까? 학교가 학생회 선거에 개입하고 학생들의 삶을 규율하려는 이유는, 국가와 사회가 청소년의 삶을 규율하려는 이유는 뭘까? 이런 부조리한 현실과 학교를 바로잡기 위해 교사와 학생은 같은 세계에 살고 있고 서로를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던질 수 있어야 민주주의는 때에 따라 필요한 게 아니라 언제나 필요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다.

 

몫 없는 자들의 민주주의, 그게 가능할까?

노동자나 소수자의 인권이 처참하게 짓밟히는 상황에서 다른 한쪽에선 인권조례가 논의되고, 주민들의 참여를 님비라 매도하거나 폭력으로 진압하는 상황에서도 어느 한쪽에선 주민참여조례들이 제정된다. 이렇게 이상한 나라에 살다 보면 사람의 판단력도 흐려질 수밖에 없다.


학교를 봐도 그렇다. 무상급식이 조금씩 확산되고 있지만 그것을 함께 밥을 먹는 공동체 문화, 즉 식구食口라 부를 수는 없다. 대학 등록금이 반값으로 떨어질 수는 있으나 대학의 교칙이나 수업 과정에 대한 권리는 오로지 대학 당국의 것이다(학생회마저 조폭들이 장악하는 대학에는 정치의 자리가 없다). 단지 수업만이 아니라 학교의 공간을 구성하고 학생들이 생활할 권리조차 학교 당국의 손에 좌지우지된다. 설령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더라도 그 사안을 해석하고 판단하고 결정할 권리가 교사나 학교에 있다면, 그 역시 민주주의가 아니다. 제도가 권리를 보장해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정치를 보장하지는 못한다.


한때 몫 없는 자들의 민주주의라는 말이 유행했다. 몫 없는 자들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주체이니 치안의 질서에서 벗어나 강하게 아니오라고 외치며 정치를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건데,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치안의 힘이 너무 강하다.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서귀포경찰서장이 수배자를 찾는다며 온 마을을 뒤지고, 서울시 중구청장이 대한문 앞 농성장을 부수고 화단을 만드는 건 수많은 사례들 중 하나일 뿐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권리의 목록을 제 아무리 길게 만들고 읽어 줘도 그것을 실제로 쓸 사람이 적을 수밖에 없다. 몰라서 못 쓰는 게 아니라 알아도 안 쓰는 게 약자의 권리 아니던가.


그리고 우리는 계속 한계를 넘어선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쇠사슬을 감고 저항하던 제주도 강정마을 강동균 회장이 경찰에 끌려가는 사진에서는 치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건 그냥 폭력, 공권력의 탈을 쓴 노골적인 폭력이다. 몫을 논하는 순간 돌아오는 이 폭력 앞에서 정치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한때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는 말이 유행했다. 한국에서 노동자와 청소년, 소수자들은 이미 헐벗은 삶을 살고 있다. 내가 그 현장과 자리에 서지 않기를 원할 뿐 우리는 죽음의 뺑뺑이를 돌고 있다. 언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는 존재들이다. 무기력한 민주주의가 이 뺑뺑이를 멈출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새로운 정치의 등장이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렵다. 아니, 자기 자신과 우리의 몫을 사유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얼마 전 의정부의 한 고등학교에서 고등학생들과 정치 이야기를 나눴다. 정치에 관한 궁금증을 질문지로 미리 받았는데, 인상에 남은 질문들을 추리면 다음과 같다. “국회는 왜 말로 할 것이지 맨날 주먹다짐이나 하나요. 다 큰 어른들이……. 다들 생각도 있고 연세가 있으신 분들일 텐데 왜 그리들 스트리트 파이터가 되는지 궁금해요.” “박근혜가 이번에 18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박정희 정권에 대해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박정희 정권 당시 독재정치가 맞는 건가요?” “보수 진영은 왜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들 편에 서는 걸 좌빨이라며 비난하나요?” “보수와 진보는 왜 항상 싸우기만 하나요? 보수와 진보의 각각 제대로 된 정의는 무엇이고 둘 다 제대로 된 역할을 하고 있나요?” 이런 심도 깊은 질문들에 나는 국회란 원래 논쟁하고 싸움하라고 만들어 놓은 장이니 더 열심히 싸워야 하고, 다만 지금처럼 카메라가 켜진 곳에서만 싸우면 안 된다고 얘기했다. 박정희가 독재정치를 했냐는 질문에는 헌법을 정지시키고 긴급조치를 남발한 사람이니 당연히 그렇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 다음 질문들은 좀 어렵다. 질문 자체에 답하는 게 어렵다기보다는 왜 이런 질문을 던졌을까 궁금해서였다. 왜 고등학생의 정치의식에서 보수와 진보가 중요한 질문이 되었을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신문이나 매체가 보수와 진보의 대립을 계속 부각시켜서일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 정치와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건 보수와 진보 이전에 자신과 우리의 몫이다. 보수와 진보는 그 몫을 인지하고 난 뒤에야 의미 있는 질문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등학생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참정권이다. 17세부터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고 무엇이 바뀔까? 고등학생들이 스스로 교육감을 선택할 수 있다면 학교가 어떻게 바뀔까? 지금처럼 정치인이나 교육 공무원들이 시혜의 관점으로 학생이나 청소년의 권리를 접근할 수 있을까? 아마도 학생들이 투표권을 가지게 되면 유권자들이 가득한 학교 앞은 선거철마다 후보자들의 주요 무대가 될 것이다. 그리고 교사 역시 수업 외의 시간에 학생들을 대하는 시선이 바뀔 것이다. 자기 몫을 생각한다면 보수와 진보보다 이게 더 중요한 문제 아닐까?


찾아보면 정보가 없지도 않다. ‘청소년의 정치적 기본권 내놔라 운동본부(내놔라 운동본부)’는 이미 5가지의 명쾌한 요구안, 선거권·피선거권 내놔라’, ‘모이고 외칠 권리 내놔라’, ‘학교 민주주의 내놔라’, ‘판단할 권리 내놔라’, ‘우리 동네 내놔라를 요구하고 있다. 너무나 훌륭한 요구이다. 문제는 이런 요구를 실현할 방법이다. 어떻게 하면 이 요구를 실현할 수 있을까? 그리고 누구에게 내놓으라고 요구해야 할까? 나는 알고 있는 내놔라 운동본부를 정작 당사자인 고등학생들은 모르는데 어찌해야 할까? 이런 물음을 던지다 보면 희망이 그려지지 않는다. 정치는 자신이 속한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는데, 그것은 이미 고등학교부터 대상화되어 관전 포인트를 찾는 객관적인문제가 되어 버린 듯하다.


그렇다고 자기 몫을 못 챙기는 사람들을 탓할 문제는 아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몫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판단할 수 있는 장 자체가 없다. 중요한 정치 의제는 언제나 중앙이나 외부에서 논의되다 삶으로 툭 떨어진다. ‘자아 성찰자기 판단은 교과서에나 나오는 얘기이고 실제 삶에는 그런 과정이 없다. 수많은 착시 현상들이 판단을 방해하니 판단력은 더욱 떨어지고, 똑똑한 사람들이 반드시 좋은 시민이라는 보장도 없으니 대략 난감이다.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정치학교를 열고 싶어 하는 선생님도 만났는데, 쉽지 않을 꺼라 얘기했다. 정치는 동등한 자들이 자웅을 겨루는 장이기 때문에 현재의 학교는 정치에 적합한 장이 아니다. 어느 한편을 시혜나 훈육의 대상으로 보는 곳에서는 정치가 시작될 수 없다. 정치에 관한 지식을 교육할 수는 있겠지만 그곳이 정치의 장일 수는 없다. 그곳을 지배하는 원리는 우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 주체로 서지 못하는 민주주의, 서로를 알아보고 동등하게 인정할 수 없는 민주주의, 새로운 관계와 만남으로 이어지지 않는 민주주의는 가식이다. 내가 저들을 위해 권리 목록을 만들고 보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물음이 필요하다. 우리가 어떤 세계에 같이 살고 있는가?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서로를 그렇게 마주 보고 있는가?

 

의식과 교육이 민주주의를 체화시킬 수 있을까?

사람들과 정치를 얘기하다 보면 종종 냉소를 경험한다. 이런저런 일에 개입해 봐야 별 효용도 없고 나만 피해를 볼 것이라 생각하고, 나아가 뭔가를 하려는 사람들을 지지하지 않고 주저앉히며 원래 다 그런 거라고 한다. 현실에 무심해서가 아니라 현실에 밝을수록 더 심한 냉소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이렇게 이미 냉소를 품은 사람들을 의식화시키고 교육한다고 한들 그 삶이 바뀔 수 있을까?


재작년에 관둔 대학에서 나는 시민교육이라는 과목을 담당했다. 인문 정신을 내세운 교양 과정 개편이 그 과정을 이수할 사람들과 합의 없이 진행되었고, 학생들이 무슨 과목인지도 모른 채 수강 신청을 해야 하는 수강 대란이 벌어졌다(좋은 내용이면 과정이 중요치 않다는 생각은 그곳에서도 반복되었다). 시민교육도 그 교양 과정의 일부였고, 심지어 필수 과목으로 지정되었기에 학교 내외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시민교육의 방법에 관한 합의가 없었고, 가장 심각한 건 강사들이 학생들을 시민으로 만들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설령 내가 좋은 시민의 삶을 살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 삶과 판단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권리는 없다. 사실 시민으로서의 삶이란 학습되는 게 아니라 경험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최상의 교육은 내가 시민의 삶을 더 열심히 살아 그 삶이 주변에 울림을 만드는 것이다. 굳이 따라오라 설명하지 않아도 공명할 수 있는 교육의 관계, 그것이 민주주의 아닐까?


하지만 강사들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빈약해진 채, 시민교육은 학생들이 팀을 짜서 현장 활동을 하고 이를 정리하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시민으로서의 삶이 왜 중요하고, 시민의 권리를 조직하는 법이나 그것을 지키기 위해 민원을 넣거나 압력을 행사하는 법, 아르바이트를 할 때에도 고용계약서를 써야 하는 이유 등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는데, 정작 학교에서의 내 삶은 그 앎을 반영하지 못했다. 학교를 관두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이처럼 앎을 반영하지 못하는 삶이었다. 앎과 삶의 모순, 이 커다란 간극을 해결하지 않고 나 스스로도 그 간극을 메우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 대체 어떤 교육이 가능할까? 하물며 시민교육이라니.


물론 대학 밖의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대거 수업을 맡으며 기존의 교육 방식과는 다른 방식을 도입한 것은 학내에 많은 활력을 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서로의 주체성을 존중하고 살리며 서로를 변화시키는 교육이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학점을 매기고 받는 관계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가? 내용을 함께 기획하고 실천했다면 이미 평가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의미한 것이지 않은가? 이런 모순을 해결하지 않은 채 민주 시민이 되라고 하니 일시적인 경험이 장기적인 삶의 변화로 이어지기 어렵다. 팀을 구성하는 목적이 학점 경쟁을 위해서라면 TV의 오디션 프로그램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대학생들의 현실과 대학을 바꾸기 위해 대학 안과 밖이 어떻게 연계되었던가? 사학 재단의 소유물로 둔갑한 공공재인 대학을 바꾸기 위해 시민교육에 참여했던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은 어떤 역할을 했던가? 만일 시민교육이 제대로 진행되었다면 그 학교의 교과과정이나 교칙이 엄청난 변화를 겪어야 했을 텐데, 지금도 그런 소식이 전해지지 않는 걸 보면 그 과정의 한계를 느낄 수 있다.


대학만이 아니라 다른 공간에서 진행되는 민주시민교육을 봐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교육을 받아서 어디에 어떻게 써먹으란 얘기인가? 청소년들이 노동기본권에 대한 교육이나 인권교육을 받는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어디에 써먹으란 얘기인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주유소나 편의점의 사장이나 점장, 매니저에게 그것을 써먹을 수 있을 것인가? 학생이나 교사들이 민주시민교육을 받는다손 치더라도 비민주적으로 운영되는 학교에서 그 내용을 어떻게 써먹을 수 있을까?


정치와 민주주의를 경험할 수 있는 공공 영역이나 공론장은 계속 줄어드는데, 권리를 교육받은 시민들은 늘어나고 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건 공리이지만,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공리는 분노보다 냉소를 낳기 쉽다. 이 냉소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또 다른 권리 목록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의식화와 교육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을까?


사실 이 물음에 대한 모범 답안은 없다. 다만 내가 관심을 가지는 역사는 있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 안창호 선생과 이승훈 선생은 학교를 세웠다. 평범한 사람들이 외부의 힘에 휘둘리지 않고 둥글게 둘러앉아 삶을 공유하고 나눌 수 있다면 일제가 아닌 어떤 다른 국가로부터도 독립할 수 있을 거라고, 자치와 자급이 이루어진다면 일제가 물러가지 않아도 이미 독립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그들은 판단했다. “지금 나라가 날로 기우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총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겠지만, 중요한 건 백성들이 깨어나는 것입니다라는 오산학교의 설립 정신은 그 고민을 말해 준다.


비록 안창호, 이승훈 선생의 이상촌 계획은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되었지만 그들이 학교를 통해 이루려고 했던 바는 원주나 홍성으로 이어져 지금도 역사를 이어 가고 있다. 그들의 계획에서 눈에 띄는 점은 학교와 협동조합, 지역사회를 하나의 체계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협동조합을 구성해서 살림살이를 해결하고 이런 관계망이 지역사회를 단단하게 만든다면 이상촌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구상했다.


의식과 교육이 아니라 생활이, 직접 그렇게 살아 보는 경험이, 그리고 그런 앎을 반영하고 삶을 고양시키는 앎이 식민지라는 현실을 극복하게 만들 것이라고 그들은 기대하지 않았을까? 방관자의 자세에서 벗어나 그 문제를 내 것으로서 삼아 참되고 실속 있게 행한다는 무실역행務實力行, 서로의 사랑을 도탑게 하라는 정의돈수情誼敦修는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준다. “나는 씨앗이 땅속에 들어가 무거운 흙을 들치고 올라올 때 제 힘으로 들치지 남의 힘으로 올라오는 것을 본 일이 없다는 이승훈 선생의 말 역시 우리가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를 알려 준다. 지금 필요한 건 삶과 괴리된 앎이 아니라 삶으로 단단하게 뭉쳐질 수 있는 앎과 그런 앎의 관계이다.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물음과 깨달음, 같은 세계에 사는 동료 시민과의 구체적인 만남과 관계, 이 관계를 바탕으로 스스로 만들어 가는 세계, 이런 것이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지 않을까?


나는 이 말들을 사랑으로 살림살이(경제)를 살고 우정으로 정치하자고 풀이하고 싶다. 정치가 사랑의 장이 아니라 우정의 장인 것은 연인이 아니고 친구여야 몰입하지 않고 거리를 지키며 서로의 잘남을 뽐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우정을 맺으며 산다면, 저들의 과잉을 경계해야 하겠지만 마냥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이유도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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