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안철수 바람’이 잦아들지 않고 있다. 설마가 현실이 되니 온갖 예측이 난무하고, 박원순 변호사의 서울시장 당선은 기성 정치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정말 정치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걸까? 허나 몇몇 새로운 인물의 등장을 제외하면 지금의 정치구도는 새로움을 논하기엔 여전히 낡고 칙칙하게 느껴진다. ‘나는 꼼수다’의 성공이 화려한 조명을 받지만 듣고 즐기는 것 이상의 정치참여가 활성화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 색깔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사회에서는 ‘소속 없음’도 하나의 소속이다. 왜냐하면 소속되지 않겠다는 것도 소속된 자들의 신념만큼 강한 하나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무소속은 소속될 수 없는 사람을, 소속되기 싫은 사람을 뜻하기도 하니까. 정당정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소속 없음을 ‘냉소’나 ‘무능력’의 상징으로 보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한국의 정당법은 5개 광역시도 이상에서 1,000명 이상의 당원을 거느린 전국정당만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선거법은 정당에 소속된 후보자들에게 선거기호나 운동기간 등의 면에서 지나치게 많은 이득을 준다. 한국의 정치구조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진입을 가로막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정치규칙이 소속 없는 사람들의 ‘능력’을 능력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배제한다고 봐야 한다. 가령 2006년 지방선거 때 만들어진 <풀뿌리 옥천당>은 지역정당의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정당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강제로 해산되었고 법적인 처벌까지 받았다. 자신이 속할 곳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소속을 갖지 않는 건 당연한데도 정당정치를 외치는 사람들은 이를 문제삼지 않는다.


그리고 정부선거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중앙/지방선관위는 어떠한가? 이 불필요한 조직이 온갖 유권해석을 독점하며 선거기간의 정치활동을 막는데도 이 기관을 문제 삼는 정당정치주의자들은 많지 않다. 그냥 닥치고 선거나 하란다. 이런 상황에서 소속 없음은 냉소나 무능력이 아니라 치열한 고민의 산물이다. ‘닥치고 정치’가 ‘닥치고 투표’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기권의 정치’도 필요하다.


사회를 지배하는 규칙이 기득권층을 위해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나는 안철수의 등장이 흥미롭다. 준비 안 된 정치인이면 어떻고, 착한 자본가면 어떤가. 이 재미없고 갑갑한 한국 정치판을 뒤흔들 흥미로운 요소를 보탰다는 이유만으로도, 그가 손쉬운 방식으로 명망가 정당을 창당하지 않으며 버티는 것만으로도, 기성 정당에 쓱 들어가며 권력을 움켜쥐지 않는 것으로도 나는 안철수가 반갑다.


물론 마냥 반갑지는 않다. 왜 우리는 정치를 ‘사건’이 아니라 인물로만 사유하는가? 박원순 변호사의 서울 시장 당선도 마찬가지이다. 박원순이나 안철수라는 인물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다거나 없다는 것보다 나는 그들의 등장이 일으킨 파장에 관심을 둔다. 그 사건이 한국사회의 정치구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까?


그런 흐름을 보려면 우리의 잘못된 고정관념들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정치현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기본적인 관점 말이다. 정치와 이념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관점,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권력의 장(長)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정당이 아니면 선거가 의미없다는 생각도 바뀌어야 한다.


이 글은 우리 사회의 변화를 풀뿌리운동의 관점에서 해석하려 한다. 국회의원 총선과 대통령선거라는 큰 선거가 모든 정치 쟁점들을 삼켜버릴 2012년에 풀뿌리운동이 어떻게 다른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을지를 살펴보려 한다. 기존의 풀뿌리운동이 선거에 수동적으로 대응했다면, 최근 녹색당의 출현은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녹색당이 풀뿌리운동과 맞물릴 수 있는 접점을 찾아보려 한다. 서구에서 68혁명이 녹색정치의 문을 열었다면, 한국에서는 지역의 다양한 풀뿌리운동의 힘이 녹색정치의 기반을 다지고 있다. 이것은 한국정치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1. 정치를 오해하게 만드는 잘못된 프레임들


학자들이 쉽게 쏟아내는 추상개념들이 지금 이곳의 정치를 설명하는데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까? ‘탈(脫)’이라는 접두어를 단 여러 개념들, 예를 들어 탈이념, 탈물질, 탈정치, 탈정당이라는 개념이 현실을 얼마나 설명할 수 있을까? 철저히 기득권화되고 사유화된 정치에 대한 시민의 허탈함과 냉소를 어찌 탈이념, 탈정치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엄기호가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푸른숲, 2010년)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 각자의 삶에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은 채 그 답만을 가지고 도덕적으로 판단한다.” 탈정치는 타인에 대한 낙인이지 이해하려는 언어가 아니다. 즉 “‘탈정치화’라든가 ‘소비주의적’이라든가 ‘개인주의적’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도덕적 판단의 언어이다.” 이런 낙인이 자주 찍히는 청년들을 엄기호는 이렇게 옹호한다. “이들의 이야기에서 만난 것은 탈정치화가 아니라 정치에 대한 지나친 계몽이다. 이 세대는 정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너무 많이 안다. 너무 잘 안다. 너무 많이 알고 너무 잘 알아서 정치에 냉소한다. 이들은 정치에 대해 아무런 환상이 없다.” 계몽의 깊이가 이해나 공감의 깊이와 다르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계몽되어 냉소하는 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옳을까? 어찌 부르건 그것을 단순히 탈정치라 정의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청년만이 아니라 지역의 풀뿌리운동에 대해서도 기존의 정치해석은 탈이념, 탈정치라는 낙인을 자주 찍는다. 풀뿌리운동이 좌우의 이념 스펙트럼에서 어느 편도 아니고 선거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정치 풀뿌리운동’이라는 말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풀뿌리운동이라는 말 자체가 강한 정치성을 띠기 때문이다. 정치라는 말은 선거나 정당같은 제도화된 정치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장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와 의견을 나누고 조절하고 합의하는 과정을 뜻한다. 풀뿌리운동은 일상을 바꾸는 정치운동이다.


과거 식민지와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시민들이 정치라는 말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보인다면, 운동세력은 정치라는 말을 지나치게 순수하게 보려는 경향이 있다. 마치 정치가 높은 선을 구현하고 악을 몰아내는 방법인양 사고되는데, 사실 정치는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거치며 한 단계씩 발전하는 불순한 개념이다. 그래서 정치에 문제가 있을수록 더욱더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해야 변화가 가능하다. 풀뿌리운동은 기성의 정치와 다른 정치를 추구한다.


그동안 풀뿌리운동은 생활로부터 벗어난 변화가 아니라 생활과 연계된 변화를 꿈꿔왔다. 1960년대 이후의 주민운동, 빈민운동 등이 풀뿌리운동의 뿌리가 되었고, 1991년 지방자치제도의 부활 이후에는 제도정치와의 접목을 모색하는 시도들이 늘어나고 있다. 풀뿌리운동은 주민자치운동, 도서관운동, 보육운동, 학교급식운동, 참여예산운동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활동을 넓히고 있다. 풀뿌리운동은 당면한 쟁점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 시민을 참여시키고 그것을 통해 의식을 바꾸고 확장시키는 주체형성의 정치를 실천해 왔다. 이것은 왜 정치가 아니란 말인가?


탈정치라는 말이 낙인으로 찍히거나 남용되는 것은 현재의 정치현실이 과거의 언어로 해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울리히 벡(U. Beck)이 『정치의 재발견』(거름, 1998년)에서 얘기하듯이 “정치적인 갈등과 이해관계의 개성화는 또한 더 이상 탈참여도, ‘분위기 민주주의’도, ‘정치에 대한 염증’도 의미하지 않는다. 대신 모순적일 정도로 다양한 참여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들이 정치 스펙트럼의 고전적인 양극을 혼합∙조합하고 있다. 이로써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좌이면서 우로, 급진적이면서 보수적으로, 민주적이면서 비민주적으로, 생태적이면서 반생태적으로, 정치적이면서 무정치적으로 사고하며 그리고 행동한다.” 기성정치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인정하기 싫은 다양하고 혼합된 참여형태들을 탈정치나 몰정치, 반(反)정치라 규정한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탈이념 정치가 어떻게 가능한가? 이념을 벗어난다는 것은 이념이 없는 진공상태로 들어간다는 것이 아니다. 백지상태(tabula rasa)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겠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는 이미 이념이 존재하고 어떤 이념에 서지 않는 것 자체가 이미 어떤 입장을 뜻한다. 이념을 벗어난다는 것은 지금 현실을 지배하는 이념에 투항하겠다는 것인데, 그 역시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다. 지금의 현실을 유지시키려 노력하든 현실을 배반하든 그 역시 하나의 선택이고 아무 것도 없는 진공상태는 불가능하다. 하워드 진(H. Zinn)이 얘기했듯이 달리는 기차에는 중립이 없다. 중립은 환상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적 중립’이라는 신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정치적 중립이 불가능하다. 좌파의 이념이 온전히 자기 색깔을 드러내지 못했고 우파가 기득권으로 변질된 우리 사회에서 중립은 무기력이나 냉소와 동의어이다(‘닥치고 정치’가 가진 장점은 바로 그런 환상을 한칼에 베어버렸다는 점이다. 다만 ‘닥치고 정치’는 기차가 가야할 방향에 대해 아무런 의견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지금까지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는 개인과 시민사회단체들은 자신의 입장을 다시 고민해야 한다. 정치를 부정적으로 이해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지금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기득권들이다. 토미 더글러스(Tommy Douglas)가 ‘마우스랜드’라는 비유로 적절히 설명했듯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검은 고양이에서 흰 고양이, 얼룩고양이로의 교체가 아니라 생쥐들이 권력을 잡는 것이다.


정치의 의미가 혼란스럽게 사용되고 제대로 해석되지 않는 상황을 무조건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한길사, 2006년)에서 유럽의 전체주의운동이 성장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계급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정당들은 선전에서 더욱더 심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으로 되었고, 정치적 접근방식에서 더욱더 옹호적이고 과거지향적으로 되었다. 게다가 정당들은 어느새 중립적 지지자들을 잃어버렸다. 이들은 어떤 정당도 자신들의 이익을 돌보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에 정치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유럽정당체제 붕괴의 첫 신호는 옛 당원들의 탈당이 아니라, 젊은 세대로부터 당원을 모집하는 데 실패한 것과, 조직되지 않는 대중의 무언의 동의와 지지를 상실한 것이었다. 이 대중은 갑자기 냉담해졌고, 격렬한 적대감을 표명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갔다.”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은 이와 얼마나 다를까?


지금 한국의 정치를 정의하려면 탈정치나 탈이념이 아니라 정치가 벌어지는 ‘세계’의 파괴에 간해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이 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시민이 아니라 기득권층의 사유물인 정부이다. 한국에서는 정당만이 아니라 정부기구에 대한 신뢰가 낮은데, 이는 정부가 정치에서 벗어난 탓이 크다. 제주도 해군기지나 4대강 사업, 한미FTA처럼 정부가 정치의 틀을 벗어나 움직이고, 시민의 통제를 벗어나며 정치를 배반하고 있다. 정부가 앞장서서 정치의 세계를 파괴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하고 비판해야 할 지점은 바로 이 점이다. 비판을 받지 않고 당연히 인정되어온 상식에 대한 부정, 정부를 중심에 놓고 정치를 사유하지 말고 정치를 중심에 놓고 사유해야 한다.


이제 정치를 사유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의 화두가 핵발전과 탈핵(脫核)이기 때문이다. 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우리는 세계의 근본적인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핵이 폭발한 곳에 어떤 생명, 어떤 인간이 살 수 있단 말인가? 핵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정치의 미래는 없다. 이것은 이전의 인간들이 한 번도 부딪힌 바 없는 위기상황이고, 핵은 정치의 다양성을 가로막는 절대악이다. 핵은 정치를 절대폭력의 장으로 몰아간다.


더구나 한국사회에서 탈핵은 단순히 에너지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에너지정의와 환경정의, 사회정의의 문제이다. 탈핵은 수도권으로의 초집중화와 불균등발전, 중앙집권형 국가에 대한 비판이자 그들과 결탁한 독점재벌과 언론, 지식인들에 대한 비판이고 기술과 정보를 독점하고 공개하지 않는 비민주적인 권력에 대한 비판이다. 그런 점에서 탈핵은 반(反)자본주의, 반(反)국가를 선언하는 가장 정치적인 구호이고, 자치와 자급의 삶을 전제하는 근본적인 정치운동이다. 이것은 또 왜 정치나 이념이 아니란 말인가?


이런 흐름을 탈이념, 탈정치라 부른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위아래가 뒤바뀐 사고방식이고, 그런 삶이 우리의 미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전국의 다양한 풀뿌리운동들이 탈핵이라는 구호를 중심으로 모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지금 당장 그것이 하나의 이념으로 꼴을 갖추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새로운 이념이 탄생할 조건을 마련하고 있다. 이념의 의미를 너무 완고하게 파악하지 않는다면 이념은 좌표나 지표의 역할을 한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 총체적이고 전일적인 삶의 방식은 무엇인지,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이 조금씩 구체화되고 있다. 과제는 우리가 이런 고민을 현실로 소환하는 방법이다.



2. 세계의 위기: 정치의 어버이화와 청소년의 배제


아렌트는 『과거와 미래사이』(푸른숲, 2005년)에서 현재란 단순히 과거의 연장이나 미래의 전단계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지속적 투쟁, 즉 그가 과거와 미래에 대적하여 ‘그의’ 자리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시간 속의 틈새”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시간의 틈새로 스며들어 자신의 토대를 세우는 만큼 과거와 미래가 나눠질 수 있다. 시간이라는 연속의 흐름을 분열시키는 이 힘이 어떤 사건의 시작이자 우리의 현재이다. 우리의 현재는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오랜 세월 동안 자기 목소리를 내거나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민들이 곧바로 능동적인 정치주체로 나서서 정치활동을 펼치기는 어렵다. 그동안 풀뿌리운동은 이런 주체들이 성장할 수 있는 과정을 마련해 왔다. 풀뿌리운동은 소외되어온 시민이 직접 참여하며 몸과 마음으로 자신의 ‘시민됨’을 자각하고 능동적인 정치적 의지를 회복하는 과정을 마련해 왔다. 단순히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을 몰아내자는 주장으로 그치지 않고 시민을 정치의 주인공으로 세우려 한다는 점에서, 추상적인 이념이나 구호보다 실질적인 생활의 변화, 삶의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풀뿌리운동은 정치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꿔왔다.


그리고 풀뿌리운동은 목적으로 치우친 정치행위를 정치과정으로, 권위적이고 중앙집중화된 권력에서 자율적이고 분화된 권력으로, 효율성에서 공감으로,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에서 ‘지역적으로 생각하고 지구적으로 행동하라’로 정치의 무게중심을 옮겨 왔다. 그동안의 모든 새로운 움직임을 풀뿌리운동의 힘으로 소급할 수는 없지만 그 역동성이 한국의 시민사회에 영향을 미쳐왔음을 분명하다.


보통 풀뿌리운동의 의미를 지역공동체운동 정도로 제한하려 하지만 그것 역시 닫힌 프레임이다. 풀뿌리운동은 기득권층의 분할통치전략에 맞서 협동의 전략으로, 즉 “나도 그들이다.” “우리도 그들이다”이라는 자각을 일깨워왔다. 자기들끼리 잘 사는 공동체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마을을 만드는 것이 풀뿌리정치의 목표였고, 더불어 사는 관계망의 범위를 확장시켜 왔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집회에서 청소년과 여성들이 운동의 새로운 주체로 등장했다고 하지만, 사실 청소년과 여성들은 그 이전부터 정치의 주체가 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기존의 성인 남성 중심의 정치제도가 이들을 정치주체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안철수 현상의 긍정성은 우리의 정치세계를 꿀렁거리게 만들어 시민들도 함께 들썩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자 시민들을 쳐다보지도 않던 기성정당들이 시민들에 주목하고 있다. 물론 선거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다시 안색을 바꾸겠지만 시민들도 매번 당해온 배신을 똑같이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관건은 이 답답한 정치의 시간에 틈새를 만들어 현재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 틈새를 만들지 못하면 현재의 사건도 의미를 잃을 수밖에 없다.


이런 틈새를 만들려면 새로운 정치에너지가 필요하다. 단순히 정치신인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정치라는 현상에 활력을 줄 수 있는 정치주체, 세계에 새로이 출현한 존재가 정치세계로 충원되어야 한다는 얘기이다. 이런 존재가 없다면, 세계는 다양한 독특성을 흡수할 수 없어 파멸하게 된다(핵은 이 가능성을 근원적으로 차단한다).


그런데도 한국사회는 청소년과 청년의 정치참여를 금지하거나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다. 정당정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지적하지 않는 또 다른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기성정당의 청년위원회를 살펴보면, 청년위원회는 대부분 유명무실한 조직이다. 청년위원회는 청년답지 않은 45세 까지의 연령대를 포괄하고, 실제 청년들은 그 과정에서 거의 역할을 맡지 못한다. 조직만 있을 뿐 기능이 없다.


국회의원 연령대를 보면 그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비례대표를 포함한 제 18대 국회의원의 평균연령은 53.5세이다. 50대가 가장 많고, 40대, 60대가 그 뒤를 잇고 30대 당선자는 불과 7명이다(이런 현실을 감추기 위해 국회 홈페이지는 위원회나 소속정당, 당선회수, 당선지역별 현황을 두지만 연령별 현황을 두지 않고 있다). 적어도 국회 내의 정치는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정당만이 아니라 시민사회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시민사회단체에 소속된 활동가들의 평균 연령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 90년대 후반에만 해도 시민사회단체의 핵심은 20, 30대 활동가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분포가 점점 변하고 있다.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려는 청년들의 수는 줄고 있고, 시민사회단체 활동의 허리 역할을 맡을 활동가의 수도 줄어들고 있다.


<대한민국 어버이연합>보다 더 무서운 건 정당과 시민사회단체의 ‘어버이화’이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틈새를 만들 청년들이 정치세계에서 사라지고 있다.


청년에서 청소년으로 내려가면 더 끔찍한 현실이 기다린다. 한국의 교육은 정치를 금기어로 만들었다. 인터넷의 시대에 청소년들이 정보를 구하지 못할 리 없는데, 학교나 정부는 청소년들이 정보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못하게 한다. 2003년과 2008년의 촛불집회 때 좌우를 막론하고 반복되었던 폭력은 청소년들에게 입 닥치고 공부나 하라, 이제 알았으니 너희는 들어가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한국의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정치적인 입장을 가지는 걸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을 것이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의 가부장적인 부모들은 자식이 자신과 다른 입장을 가지는 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식들이 자신이 살아갈 세계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니 학교가 정치의 장으로 바뀌는 것도, 교사가 정당활동을 하는 것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이런 교육환경에서는 사회현상에 관한 정보가 아니라 ‘입장’을 가진 청소년들이 등장하기 어렵다. 입장이란 건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겪으며 생기는 체험을 바탕으로 삼는데, 학교와 학원, 집을 오가는 청소년들이 입장을 가지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똑똑하게 말하는 아이들은 많지만 그 똑똑함을 삶으로 드러내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갖가지 논리로 무장한 똑똑한 아이들이 정치에 냉소한다는 건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점이다. 알면서도 그리 되지 않을 거라 미리 냉소하는 마음은 세계를 파멸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것도 좋지만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연령을 낮춰야 한다. 이것은 한국의 정치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시도들 중 하나이다. 이를 통해 새로운 정치주체들이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등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2006년 9월에 설립된 독일 해적당(Piratenpartei Deutschland)은 2011년 베를린 시의원 선거에서 8.9%의 득표율로 15석의 의석을 차지하며 제 5당이 되었다. 소통과 공유를 중요한 기치로 내세우는 해적당의 평균연령은 30.2세로 녹색당의 평균연령 46.8세보다도 낮다. 더 놀라운 점은 16세 이상이면 당원이 될 수 있고 종교와 국적도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독일 해적당만이 아니다. 한국에도 도입된 주민참여예산제도를 처음 실시한 브라질에서도 16세 이상의 청년들이 투표권을 가진다.


이것은 특정 이념이나 정파를 위한 정치적인 고려가 아니라 어릴 적부터 정치적인 판단력을 기르고 연습해야 좋은 정치주체가 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의미한다. 19세 이상의 정당가입과 만 20세 이상의 참정권만을 인정하는 한국의 법률은 과거의 정치세계를 그대로 지속시키겠다는 의도일 뿐이다. 이런 세계에서는 과거와 다른 정치가 불가능하다.


다른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정당정치가 구태의연한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에도, 풀뿌리정치는 대안적인 정치참여의 틀을 실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11년 경기도 수원시에서는 청소년참여예산제가 진행되었다. 홈스쿨링을 포함한 15개 학교 만16세~18세까지의 학생 23명이 공개모집되어 방학 때 예산학교에 참여했다. 고등학생들이 모여 교육과 관련한 예산을 결정한다고 하니 그 수준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논의된 결과를 보면 그렇지 않다(아주 독특한 제안들이 나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른들이 모여서 논의한들 크게 달라질 것 없는 제안들이다).[각주:1]

순위

주  제

내   용

1

진로상담도우미(MY WAY HELPER)

학교상담가배치, 진로체험

1

학습공간 확충(우리들의 공부하는 행복한시간)

도서관열람실, 독서실 조성

3

청소년 동아리 지원(날개달기 프로잭트)

학교동아리공간, 동아리지원금

4

학교셔틀버스(학교가기가 제일 쉬웠어요)

학교 셔틀버스 운영

5

청소년 프로그램 홍보(니가 나를 알아?)

청소년 시설 및 활동홍보

6

청소년 놀이문화공간(노릿길)

청소년을위한거리, 문화공간

7

학교급식개선(잘 먹고 잘 삽시다)

위생과 질개선

8

봉사센터 네트워크

자원봉사연계시스템

9

길거리 동물구조대(청소년 119)

동물구조 청소년 활동지원

10

학교내 모의법정(청소년 배심원제)

학생자치권보장

순위외

무상교육실시

중,고등학교 의무교육실시



그리고 서울시에 주민발의로 제출된 학생인권조례가 “학생은 학교 안팎에서 모임이나 단체활동 및 정치활동에 자유롭게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는 점 역시 기대할 만한 일이다. 또한 다양한 지역의 풀뿌리운동이 진행하는 청소년의회나 청소년활동도 이런 정치성을 강화시키고 있다.



3. 풀뿌리정치와 징검다리 정당


그렇지만 이런 시도들만으로는 세계가 근본적으로 바뀌길 기대하기 어렵다. 일본의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다양한 생활운동들이 활성화되어도 보수적인 정치기득권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정치흐름이 형성되는 건 긍정적이나 그 흐름이 이미 존재하는 현실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현재를 만들어갈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기존 질서를 부정할 수는 있지만 더불어 살아야 할 사람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스스로 만드는 질서가 중요하지만 이미 있는 질서에 포획된 사람들을 탈출시키고 그들과 더불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풀뿌리정치가 자율적인 지역공동체를 꿈꾸지만 그들만의 리그로 끝난다면 그것은 사회를 바꿀 수 없다.


지금 한국의 풀뿌리정치가 새로운 정당을 고민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다양한 정치주체를 성장시킬 뿐 아니라 이들간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협동의 힘을 강화시키고 부당한 정치․사회질서를 재편해야 자치하고 자급하는 공동체, 공동체들의 공동체가 가능하다. 그런데 현실의 정치구조를 볼 때 정당을 완전히 배제하고 순수한(?) 시민정치의 힘만으로 정치세계를 바꾼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국가 내에서 국가를 배제하고 시장 내에서 자본의 논리를 배격하자는 전략도 있지만 이것은 특정한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한국처럼 권력보다 폭력의 논리가 앞서고 기득권이 거의 모든 사회자원을 독점한 사회에서는 소수의 엄청난 헌신과 순교에도 성공가능성을 장담하기 어렵다. 그리고 지나치게 많이 일하고 자기 목소리를 스스로 검열하는 한국사회에서 그 정도의 능동적인 에너지를 많은 시민들이 지금 당장 드러내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독일 녹색당의 탈정당정치 전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독일 녹색당은 ‘장기적인 안목의 생태주의’, ‘사회적 관심’, ‘풀뿌리민주주의’, ‘비폭력’이라는 네 가지 기본원칙을 부각시키며 독일의 정치세계에 자리를 잡았다. 그동안의 독일 녹색당 활동에 대해 여러 가지 평가가 가능하지만, 녹색당이 독일 정치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었고 녹색당의 기본원칙들이 독일과 유럽의 정치세계에서 차츰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정치구조의 면에서 녹색당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장했다.


• 경제의 독점과 중앙집권적 기구의 지속적인 성장 대신에 시민과 친숙하고 민주적으로 통제가능한 자기조정형태의 개발

• 행정업무의 단순화와 완전한 분권화

• 행정적 권한, 자치권, 그리고 주, 지역, 군, 자치단체, 이웃에 대한 재정세입 할당액의 증액

• 행정과 관련된 모든 정보의 검열 없고 신속한 공개

• 행정기관과 국회의 청문회에 참관하고 각 부문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을 시민단체와 결사체의 권리

• 시민으로부터 유리되고 직무가 명백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은 많은 자문 상담실을 일반적인 자문과 의사결정위원회로 대체. 자치단체, 군, 지역, 주, 연방의 차원에서 중요한 경제계획과 결정에 대한 이런 위원회들의 발언권 보장

• 직접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국민투표와 일반투표.[각주:2]


이런 내용들은 기성정당의 ‘집권전략’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대표를 자처하며 자신이 모든 권력을 가지려 하지 않고 시민들에게 권력을 돌려주겠다는 발상이, 자율적이고 자치적인 시민이 정치세계를 활성화시킨다는 믿음이 여기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런 녹색당 덕분에 독일에서는 다양한 시민사회운동들이 활성화될 수 있었다.


지금 한국의 풀뿌리운동이 녹색당을 고민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녹색당 홈페이지(http://kgreens.org)에 따르면, 녹색당은 “환경뿐 아니라 농업 살리기, 비정규직 문제, 소수자 인권, 방사능 먹거리 문제와 원전 폐기, 재생가능에너지, 동물권, 청소년 인권과 참여, 노동시간 단축과 생활임금 보장, 지속가능한 지역계획,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과 마을 만들기, 반전평화, 풀뿌리민주주의 등”의 다양한 의제들을 제기하고 이런 의제들을 “생태적 지혜와 사회적 정의라는 관점에서 들여다보고 풀어가고자” 한다고 밝힌다. 그 전에 없었던 새로운 제안을 하는 게 아니라 그동안 무시되어온 제안들을 녹색당이라는 틀을 통해 실현하겠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녹색당의 사무책임을 맡고 있는 하승수에 따르면, 녹색당은 반정당의 정당(anti-party party)을 지향한다고 한다.[각주:3]
기존의 정당정치를 반대하는 정당이라니 묘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정당정치가 가져온 폐해를 다시 정당정치로 돌아가서 해결하겠다는 것은 분명 ‘모순’이다. 그렇지만 사유화되고 독점된 정치구조를 외면한 채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꾸기도 어렵다. 그래서 시민들이 부조리한 세상에 좌절하지 않고 정치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줄 ‘징검다리 정당’이 필요하다. 누가 징검다리를 건너는가에 따라 구호와 성격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징검다리 정당의 정체성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다만 독일 녹색당의 경험에서 드러났듯이 권력을 집중시키는 정당의 속성과 권력을 해체하는 반정당의 속성을 하나의 조직 속에 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허나 괜스레 기존의 정당조직을 모방해서 조직을 형식화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자연계에 변이하지 않는 생명체는 없고, 환경의 변화에 맞춰 자신을 바꾸고 그럼으로써 환경을 바꾸는 생명체만이 오랜 생명력을 가진다. 정당을 인공적인 조직체가 아니라 하나의 살아있는 생물로 본다면, 정당도 그런 적응력과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려면 당원 한 명, 한 명의 의미와 실천이 정당의 조직과 연결되어야 하고, 그들이 자신의 정치언어를 가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당원들이 직접 만드는 당헌, 강령이 중요하다. 그리고 당헌과 강령이 당원들에게, 그리고 시민들에게 쓸모와 의미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당헌과 강령이 일상적인 언어로 술술 풀려야 하고, 당원들의 일상생활 속에 실현되어야 한다. 권력이나 집권이 아니라 당원의 욕구와 삶을 지지하는 정당은 생명력을 가지고 다양한 풀뿌리운동과 접속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의 정당들은 시민의 징검다리가 아니었다. 정치세계를 보존하고 활성화시킬 새로운 정당은 탈정당정치가 아니라 ‘비(非)정당정치’를 추구해야 한다. 모든 정치과정을 제도정치 속으로 제한하는 게 아니라 정치의 과정 자체를 넓혀 제도와 일상 속에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새로운 사건들은 이런 정치가 실현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4. 인공의 정치에서 번식하는 정치로


새로운 정치의 방식으로 많이 얘기되는 것이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팟캐스트이다. 실제로 서울시장 재보궐선거나 여러 정치적인 사건에서 이런 매체들이 TV나 신문같은 언론매체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고, 심지어 ‘나는 꼼수다’를 본딴 MBC의 ‘나는 하수다’처럼 공중파 방송이 이를 모방하는 특이한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정보를 주고받으며 소통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 봐야 할까? 그리고 정치도 이런 변화에 발맞춰 변화해야 할까?


사람들이 만나고 관계를 맺는 방법이 달라지면 그에 맞춰 정치의 방식도 당연히 변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변화를 기술의 변화에 따른 정치변화로 해석해야 할지는 의문이다. 한국사회에서 인터넷을 비롯한 소통기술의 발달은 현실의 닫힌 소통구조를 넘어서려는 욕망/열망과 맞닿아 있다. 현실세계에서 소외되고 배제당한 사람들이 사이버세계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강화시켜왔고, 현실세계에서 바이러스로 규정되고 금지된 담론들이 사이버세계에서 확산되어왔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지금처럼 많은 에너지를 인터넷에 쏟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새로운 경향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흔히 인터넷의 구조가 고구마나 감자가 수평으로 넓게 퍼지는 구조인 리좀(rhizome)을 닮았다고 얘기한다.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아니라 수평적인 연계망을 통해 비조직적으로 확산된다는 점에서 인터넷의 구조는 풀뿌리운동의 방식과 닮았다. 조양호는 『모이고 떠들고 꿈꾸다』(이매진, 2010년)에서 인터넷정치의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인터넷은 조직이 없이도 조직을 만들 수 있게 했다. 세상의 변화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일어나고 있는 지금, 고정된 조직이 아니라 유연하고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조직 아닌 조직이 필요하다. 조직의 규모를 키워서 영향력을 발휘하기보다는 조직과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 사람들의 영향력이 확대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이런 조직관은 다양한 접속을 가능케 한다.


사실 이런 조직관은 이미 풀뿌리운동에서 논의되던 바이다. 같은 책에서 이호는 풀뿌리운동이란 “‘권력에서 소외된 다수 대중’이 주체가 돼서 우리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는 사회운동”이라 정의하면서 풀뿌리운동의 활동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민들과 일상의 공감대를 좀 더 많이 형성하는 과정”이라 지적한다. 인터넷정치처럼 풀뿌리운동은 유연하고 개방적인 조직구조를 통해 다양한 주민/시민들이 서로의 삶을 지지하고 호혜의 관계망을 맺으면서 세계를 변화시키도록 지원해 왔다. 풀뿌리운동은 개인이 사회라는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성장하는 존재이고, 그래서 서로 돕고 보살피는 호혜의 관계가 사회를 발전시키는 힘이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풀뿌리운동은 경쟁과 생존투쟁을 극복하고 공생과 자율의 삶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이자 내 삶의 경험이나 의식과 분리되지 않은 정치구조를 만드는 방법, 나와 우리의 삶을 정치적으로 재구성하는 방법이다.


그렇지만 그동안 한국의 풀뿌리운동은 지역사회라는 경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세계로의 확장요구 앞에서 머뭇거려왔다. 이제 풀뿌리운동은 ‘번식하는 정치’를 요구받고 있다. 자신을 복제하는 정치 말고 외부로 활발하게 접속하며 자신을 변형시키는 정치 말이다. 인터넷이 고구마나 감자 같은 식물의 구조를 닮았듯이, 정치세계도 자연세계를 반영할 수 있다. 스테판 하딩(Stephan Harding)은 『지구의 노래』(현암사, 2011년)에서 세균들의 증식구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균류는 놀라운 지능을 가졌을 뿐 아니라 특이한 자의식도 있다. 이것은 균사체 속에서 균사들이 꼭지에서 꼭지 또는 꼭지에서 측면으로 서로 연결하면서 경이적인 의사소통 능력이 있는 네트워크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 네트워크는 우리 혈액 체계나 뇌 속의 신경회로와 매우 유사하다.…생물을 포함하는 모든 복잡한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균사체는 지적이지만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존재다. 인간의 파이프라인과 달리 균사체는 주위 환경을 파악하고 나면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법을 배운다. 균사체는 시간과 공간 모두에서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세균 종들 간에도 의사소통을 하며 그 결과로 여러 종이 혼합된 군집이 나타날 수 있다. 이 혼합된 군집은 단일 종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한다.…세균의 화학적인 의사소통 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이 의사소통은 인간언어의 기본적인 문법구조와 유사한데, 그래서 과학자들은 이제 세균의 통사론(統辭論)과 사회적 지성에 대해서까지 말하고 있다. 이 정교한 세균의 언어는 미생물 군집 내에서 다른 종들 간의 긴밀한 조정까지 가능하게 할 정도다.”


우리는 정치가 인위(人爲)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동물이나 신이 아닌 인간이기에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설명은 타당하지만 인위적인 정치의 논리가 반드시 인공(人工)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인공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욕망이 핵발전과 같은 파괴의 정치를 불러왔다. 그동안의 인공적인 정치는 사람의 관계와 정치적인 힘을 만들려(工)했고 그래서 더욱더 강한 힘을 욕망했다. 그래서 정파와 조직이 중요했고 규율과 규범이 강조되었다.


이제는 인공적인 정치에서 자연의 정치로의 인위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사람과 자원을 쓰고 버리는 근대적인 ‘소비의 정치’가 아니라 순환시키고 재활용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보잘 것 없는 균류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생명이란 근본적으로 불확실하다는 것,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네트워크를 맺으며 번식해야 한다는 것, 경험에서 배우며 향상시키는 지성을 가져야 한다는 그 지혜 말이다.


세계의 근본적인 위기에 맞서 풀뿌리운동은 공통의 과제를 찾고 공동으로 노력해야 한다. 각자가 추구해온 정체성을 버리고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연결할 수 있는 문법을 개발하고 이질적인 요소를 서로 소통하며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의제와 정책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우선순위를 정하고 관료제도와 자본의 저항에 맞설 수 있는 강한 정치력도 형성해야 한다. 가령 핵발전을 추진하는 원자력마피아를 해체하려면, 부패한 학자와 관료, 독점재벌, 언론들의 강력한 동맹을 해체시켜야 한다. 엄청나게 강한 정치적인 힘이 없다면 이런 카르텔을 깨기 어렵다. 단순한 구호만으로는 이런 힘을 만들 수 없다. 이미 기득권화된 정치구조에서 하나의 정당이 독자적으로 이런 힘을 만들 수도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풀뿌리운동이 구성할 새로운 정당은 다양한 정치적 힘이 접속해서 활용할 수 있는 허브여야 한다. 그러려면 시민사회운동이나 풀뿌리운동이 만든 의제와 정책을 정당이 받아들이는 과거의 방식을 넘어서야 한다. 이것은 기존의 독일 녹색당도 고민했던 바이다. 독일 녹색당은 지방의회와 연방의회에서 여러 시민사회운동단체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그곳에서 얻은 정보를 단체들에게 제공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독일 녹색당도 정당구조 자체를 바꾸지는 못하고 현실정치의 논리를 따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이런 구조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정당이 풀뿌리정치의 허브 역할을 맡을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새로운 정당은 앞서 얘기한 균류의 생명력을 배워야 한다. 여러 종의 세균이 뒤섞여 군집해서 의사소통하고 네트워크를 형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떨어지며 한 종이 해낼 수 없는 일을 하듯이, 정당도 그런 성격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강한 정치적인 힘을 만들며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뒤섞임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방식이 바로 ‘추첨제’이다. 추첨제가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라는 점은 이미 『일본 정신의 기원』(이매진, 2003년), 『선거는 민주적인가』(후마니타스, 2004년), 『추첨 민주주의』(이매진, 2011년)와 같은 책들에서 진지하게 논의된 바 있다. 민주적인 원리라는 점 외에도 추첨제는 권력을 순환시켜 전문가나 정파의 출현을 막는다. 그리고 추첨제는 정치를 근본적으로 불확실한 것으로 만들고 서로가 서로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연합하게 만들며 아마추어가 가진 경험을 중요한 지식으로 만든다. 마치 균류의 체계처럼.


그렇지만 추첨제만으로는 부족하다. 능동적인 참여의지를 가진 시민 없이 추첨제가 저절로 자리를 잡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풀뿌리정치의 역할이 중요하고, 정당 안팎에서 풀뿌리운동은 다양한 사건들을 계속 일으켜야 한다. 새로운 정당은 기득권화된 정치구조를 해체시키며 풀뿌리운동을 지원하고, 풀뿌리운동은 새로운 정당의 정치주체들을 발굴하고 성장시켜야 한다. 때로는 왁자지껄한 소란과 이질적인 대립이, 때로는 끈끈함 공감과 울림이, 때로는 화끈한 합의와 긴밀한 소통이 다양한 정치 에너지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정당은 ‘공유지로서의 정당’이어야 하고 그것을 통해 ‘번식하는 정당’이어야 한다. 누군가의 정당이 아니라 우리의 정당이 되어야 하고, 실제로 당원들이 당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자원과 기술, 사람이 접속하고 분화되는 플랫폼이어야 한다. 공유지로서의 정당을 만드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각자가 가진 것을 서로 나누는 것에서 공유는 시작된다. 나누는 것은 단지 물질만이 아니다. 내가 가진 지식, 물건, 공간 등 다양한 것을 나누면서 우리의 삶은 조금 더 끈끈해지고 조금 더 안전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끈끈한 공유지가 정치의 힘을 발휘할 때 주권에 포획되지 않는 다양한 정치력이 발휘될 수 있다.



5. 풀뿌리정치의 꿈틀거림


그동안 질기게 이어진 풀뿌리운동은 선거라는 제도정치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제는 탈정치나 탈이념이라고 매도당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가 마련되었고, 풀뿌리정치는 기성의 권력정치(power politics)나 정당정치를 변화시키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것은 한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고, 사건이기에 미래는 기대할 만한 것이 되었다.


그렇지만 모든 사건이 특정한 방향의 지향을 가지는 것은 아니고 사건이 특정한 성공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사건은 사건이기 때문에 터져 나오고 예측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니엘 벤사이드(Daniel Bensaïd)가 『저항』(이후, 2003년)에서 말하듯 “사건은 늘 너무 조숙하게, 때맞지 않게 시간을 거슬러서 출현한다. 사건의 힘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사건은 ‘자신의 미래에서,’ 자신이 창시하는 새로운 가능성에서 의미 있게 된다. 사건은 ‘자신에 대한 이해의 조건’을 자신 안으로 운반해 온다. 사건의 후예만이 이런 새로움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건은 가능한 것들의 뿌리에서 올라오기 때문이다. 사건은 가능한 것들이 놓인 지평을 바꾸고 ‘시간의 혁명’을 선언한다.” 지금 우리가 지켜보며 준비하는 것도 하나의 사건이다.


풀뿌리정치가 믿고 따라갈 모범이나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열심히 꿈틀댈 뿐이다. 겨우내 움츠려 있으면서 꿈을 길러서 봄이 오면 꿈을 튼다는 것이 바로 꿈틀거림이라고 함석헌 선생은 강조했다. 이 꿈틀거림이 정말 “무서운 꿈틀”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사나운 겨울바다, 같은 권세 밑에 갇히는 민중의 꿈”이고, “그 꿈이 터지고야 마는 봄”이 오기 때문이다. “삶은 절대이기 때문에 터지고야 만다. 말도 못하고 죽는 민중의 꿈틀거림은 생(生)의 항의(抗議)다. 삶의 외침이다. 삶의 음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이다. 말씀이다. 역사의 길이다. 내가 이름 없는 민중이라도 민중이기 때문에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각주:4]


그런 경계를 넘나드는 풀뿌리정치의 꿈틀거림이 2012년에 만들어낼 사건을 기대한다.

  1. 김광원, “참여예산, 제도보다 중요한건 주민참여!”, 2011년 11월 22일 ‘좌충우돌 참여예산, 우리 동네를 발견해줘’ 발표문. [본문으로]
  2. 스프레트낙․후리조프 카프라 지음, 강석찬 옮김, 『녹색정치: 전지구적 위기에 도전하는 녹색당의 이념과 활동』(정신세계사, 1990년) [본문으로]
  3. 하승수, “지금 왜 녹색당인가”, 《녹색평론》 2012년 1~2월호. [본문으로]
  4. 함석헌 지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생각사, 1979년) [본문으로]
학교에 강의하러 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한 남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내게 청량리로 가는 열차냐고 묻던 남루한 차림의 그 남자는 말이 고팠던지 계속 말을 걸었다. 이어폰을 빼고 눈을 맞추자 그 남자는 내게 스포츠토토 복권을 하냐고 물었다. 로또도 해본 적 없는 내가 당황하자 그는 자신의 복권을 꺼내어 설명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잘 써야 한다고, 자기 아는 형님은 2만원 넣어서 100만원을 탔다고 얘기하다 그는 갑자기 지갑을 꺼냈다. 낡은 파란색 지갑에는 복권 용지로 보이는 하얀 종이가 가득했고 다행히 천원 지폐 몇 장 외에 만 원권도 보였다. 실패한 희망이 가득한 지갑을 접으며 그는 이번에는 꼭 성공하리라 다짐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가카와 박원순 시장 얘기를 꺼냈다. 가카가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에 일감이 줄었다고, 박원순 시장이 바로 서울을 바꾸기는 어려우니 2년 정도는 기다려야 할 거라며, 나이든 사람들은 보수적인데 자신은 박원순을 찍었노라며 열변을 토할 때쯤 지하철은 청량리에 도착했다. 클라이맥스라 아쉬웠지만 지갑 안의 만 원권이 복권용지로 변하지 않길 바라며 그 남자를 보내야 했다.


남자가 내린 뒤 복권과 박원순의 관계를 찾으려 애를 썼지만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평소에 스포츠토토 복권을 하며 머리를 단련시키지 않아서일까? 내게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가 왜 그에겐 당연한 일상일까?


실마리는 다른 곳에 있다고 했던가. 내가 사는 용인시 수지구의 한 아파트를 지나며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작년, 그 아파트 단지의 벽에는 시민들의 쉼터인 토월약수터를 파괴하는 노인복지시설 건립을 반대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수지구에 몇 남지 않은 녹지를 보존하려는 좋은 마음이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아파트 벽 같은 자리에 이런 플래카드가 걸렸다. “신분당선 연장선 착공 경축! KTX-GTX 동천역에 환승역 추진하라!” 약수터를 지키자와 마을을 파헤치자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이걸 보며 나는 실마리를 찾았다. 가난한 사람들이 박원순을 지지하는 진보이고, 수지구에 사는, 분당을 꿈꾸는 중산층이 김문수와 가카를 지지하는 보수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건 인간의 마음을 단순하게 설명하고 자기 식으로 재단하려는 몹쓸 사람들이나 할 얘기이다.


내가 찾은 실마리는 우리 시대가 직면한 위기의 심각성이다. 도저히 함께 품을 수 없는 욕망들을 모두 움켜쥐고 살아야 할 만큼, 아니 그렇게 살 수밖에 없을 만큼 우리의 삶은 근본적인 위기에 처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으려 하고 가능한 많은 걸 더 빨리 손에 쥐고 싶어 한다. 그것이 결국에는 자기 삶을 파괴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는 꼼수다’를 즐겨 들어도 2012년에 세상이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정권은 바뀔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우리 삶의 위기를 해결하거나 욕망을 풀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두 손에 움켜쥔 욕망을 내려놓고 위기에서 벗어나려 적극적으로 몸부림을 쳐야 우리는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 내가 투자한 회사의 주가를 노동조합이 떨어뜨린다고 투덜거리지 않고, 집값을 높인다며 마을을 공사판으로 만들지 않고, 전력수요를 대비한다며 핵발전소를 짓지 않아야 우리는 가카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다.


1988년 귓 속에 도청장치가 있다며 뉴스 방송에 뛰어든 남자는 우리가 그런 세계에 살고 있을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폭로했다. 구속된 송경동 시인의 산문집도 그런 진실을 폭로한다. 제목부터 숨이 막힌다. 『꿈꾸는 자 잡혀간다』라니. 하지만 그는 감옥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나비처럼 훨훨 날아 나오는 꿈을 꾼다고 한다. 그 누구도 꿈을 가둘 수는 없다. 우리도 꿈을 꾸자.

<프레시안>에는 '원순씨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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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은 현 정부를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 불렀다. 그동안 녹색, 공정, 공생처럼 좋은 말들의 의미를 줄줄이 왜곡해온 사람이라지만 이건 너무하다. 측근들의 비리가 줄줄이 터져 나오고 '위키리크스'를 통해 부정한 외교가 들통 난 상황에서 현 정부가 도덕적으로 완벽하다니. 개그라면 웃겠지만 진심이라니 기가 막힌다.

아직은 자신이 힘을 가지고 있으니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명박산성이 영원할 수는 없다. 비록 2008년 촛불의 행진은 명박산성에 막혔지만 이제 시민들은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용산 레아, 홍대 두리반, 4대강 공사 현장,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강정 마을 해군 기지 등을 찾는 시민들의 발길은 현실을 스스로 판단하려는 움직임이다.

물론 짜잘하게 부딪쳐봤자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며 냉소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다. 통계 수치나 이론, 정책을 들먹거리며 자신을 믿고 '큰 거 한방'에 기대를 걸라고 설득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성공한 사건(?)만을 기억하는 한국 사회에서 정치는 MB, JP, DJ같은 약자로 얘기되는 정치인과 사조직처럼 움직이는 정당들의 전유물로 얘기된다.

갑작스런 사건이 우리를 흥분시키는 것은 분명하지만 군불이 없다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제프리 골드파브의 <작은 것들의 정치>(이충훈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는 정치의 군불을 때는 방법을 다룬다. 한나 아렌트와 어빙 고프먼의 이론을 받아들여 골드파브는 "사람들이 역사적 상황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상호 작용 속에서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세계에 가져올 수 있는 역량이 있다"고 주장한다.

▲ <작은 것들의 정치>(제프리 골드파브 지음, 이충훈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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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벌어졌던 사건들, 1989년의 루마니아 혁명, 2001년 9·11 테러, 2004년 미국 내의 반전 운동과 대통령 선거 운동 같은 굵직한 사건들에서 일상의 정치는 변화의 물꼬를 텄다. 골드파브는 "구조적 조건들이 변화를 이끌기 위해서는, 상황을 정의하는데 있어서 나타난 변화가 공유되고 공개되며, 그런 공유된 변화에 입각해 행위가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큰 거 한 방도 세상을 달리 보려는 자잘한 시도들이 쌓여야 가능하다는 얘기이다.

골드파브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광범위한 상호 작용에 내재한 자유로운 공적 공간의 중요성"을 간파하면 식탁, 책방, 살롱, 공장, 학교 같은 일상 공간이 정치의 장으로 변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공간에서 상황을 스스로 새로이 규정하며 시민들은 대안적인 정치의 싹을 키운다. 마치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는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시민들은 "사회적 상호 작용의 일상적인 유형, 즉 자유로운 시민사회의 구성요소를 사실상 만들어" 낸다.

물론 우리의 '가카'처럼 부조리한 권력자들은 공권력을 동원하고 미디어의 입을 막으며 공식 이데올로기를 시민들에게 강요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공식적인 공간에서는 공식적인 이데올로기를 믿는 척했지만, 식탁의 주위에서, 독립적인 책방에서, 살롱에서, 그런 강요된 관계는 의문시되었다." 의심받기 시작한 권력은 그렇게 서서히 무너지고, 시민들은 일상적인 관계 속에서 새로이 권력을 정의하며 대항 지식, 대항 권력을 형성한다.

특히 골드파브는 인터넷이 좌파 운동의 중요한 수단이라고 얘기한다. 미국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던 민주당의 하워드 딘과 <무브온>, 미국의 반전 운동을 예로 들며 골드파브는 인터넷이야말로 작은 것들의 정치를 펼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서로 만났다. 그들은 자신의 글을 올렸고, 서로에게 반응했으며, 서로를 알게 되었고, 그들의 행위를 조율했다. 그들은 상황을 재정의했다. 상황은 그들의 정의에 따라 변화했다." 이야기와 관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인터넷이야말로 작은 정치를 큰 정치로 전환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매개물이다.

그렇다고 작은 것들의 정치가 곧 권력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골드파브는 "작은 것들의 정치(흔히 시민사회의 중요성이라는 통념으로 요약되는)가 권력의 중요한 기반을 제공한다는 것이지 권력의 궁극적인 원천은 아니라"고 인정한다. 그런 점에서 골드파브는 작은 것들의 정치가 '제도화'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유동적인 운동들은 중요한 정치적·문화적 변화를 산출하지만, 그것들은 또한 출현하자마자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상황을 정의하는 힘은 제도화되지 않으면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 그렇지만 대안들이, 기존의 두 지배 정당 가운데 한 정당(예컨대, 민주당―옮긴이)에서 제도화된다면, 그와 같은 대안들은 미국인들에게 꾸준히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제도화는 작은 것들의 정치가 장기적으로 생존하는데 핵심적인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제도화는 정당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매우 다양한 사회 제도들 속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가 살펴보게 될 것처럼 교육과 미디어 제도들은 특히 중요하다."

더불어 이런 생각을 말로만 떠들지 않고 골드파브는 'deliberately considered'라는 사이트를 운영하며 다양한 시민들과 소통하고 일상의 정치를 활성화시키고 있다. 골드파브의 이론을 통해 우리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나는 꼼수다>의 유행과 '닥치고 정치'라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바로 작은 것들의 정치이다.

포스트 후쿠시마 시대의 정치

이런 골드파브의 주장이 완전히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정규군이 큰 것 같지만 어떤 때 가면 정규군을 다 동원할 수도 없어요. 쥐는 고양이가 잡게 생겼지 황소가 못 잡는단 말이야. 그런 모양으로 신문에서라든지 잡지에서 못하게 되면 차 마시러 들어가서 다방에서도 얘기하고, 친구 만나 음식점에 가서 얘기하고, 기차 타러 가서 그 안에서 얘기하고, 그게 게릴라전 아니냐. 정규의 언론 기관은 아니지만, 정규의 언론 기관이 다 맥이 빠져서, 권력에 팔려서, 종이 돼서 할 말을 못하고 있다 그런다면 우리끼리 어디서든 만나는 대로 해야 돼."

함석헌의 이런 얘기는 이미 핵심을 짚었다. 그리고 골드파브보다 훨씬 더 강한 열정과 활동으로 함석헌은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려 했다. 많은 시민들이 그의 글과 강연에 매료되었다.

그런데도 왜 우리 사회에서 작은 것들의 정치는 활성화되지 못했을까? 한국의 시민들이 능동적이지 못해서? 한국 사회 시민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렇게 판단하기 어렵다. 문제는 작은 것들의 정치가 몇몇 스타를 낳을 뿐 긍정적으로 제도화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서민의 꿈과 희망을 대변하겠다는 인물들만 있었지 시민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정치제도는 만들어지지 못했다. 아니 만들어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대다수 정치인과 정당들, 시민 운동 활동가들조차도 작은 것들의 정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시민들의 꿈을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시민들이 직접 꿈을 꾸는 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08년 9월 촛불 집회의 끝물에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하는 <인권오름>에 '편견과 망각의 정치'라는 글을 실었다. (☞관련 기사 : 편견과 망각의 정치) 3년이 지났지만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원순닷컴이 한나라쩜 오알쩜 케이알을 '한 방에' 날려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능력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외려 그의 능력을 알기에 그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걱정스럽다. '반드시 나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가 없어도 시민들이 소통할 수 있는' 구조를 짜는 게 서울 시장 당락과 무관한 박원순의 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역사의 반복과 더불어 냉소주의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거리로 나선 시민들이 열정을 경험한 뒤에 돌아가는 곳은 억압적인 학교와 공장, 가정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를 정치의 장에 가두는 사고야말로 정치의 발전을 가로막는 방해물이다. 학교와 공장, 가정의 민주화 없이는 정치의 민주화가 이루어질 수 없고, 우리의 정치는 삶터의 장을 넘어 일터로 진입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일상은 작은 정치의 희망을 꽃피우는 장소가 아니라 정치의 무덤으로 변한다.

그런 점에서 골드파브가 던지지 않은 질문을 던져 보자. 골드파브가 극찬하는 폴란드는 왜 민주 혁명 이후 신자유주의의 덫에 걸렸을까? 우리 식으로 말하면, 시민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던 노무현 정부가 왜 시민들의 생활 기반을 파괴하는 한미 FTA나 제주 해군 기지, 핵폐기물 처리장 정책을 추진했을까?

이는 정치 논리로만 풀 수 없는 어려운 수수께끼이다. 이 수수께끼를 풀려면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골드파브의 글에서 그런 통찰력을 찾아보긴 어렵다. 정치는 내용이 아니라 틀만 짜야 하기에,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경제의 영역으로 진입하지 못한다. 이제 정치는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구호에, '삼성공화국을 해체하라'는 요구에 답을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골드파브는 아렌트의 이론에 많은 점을 기대고 있지만 그녀가 현대 정치에서 감지한 위기감을 제대로 인식하지는 못한 듯하다. 아렌트는 근대와 현대의 차이를 핵의 발명에서 찾는다. 왜냐하면 핵무기를 다루는 정치는 전쟁이 민간인을 대량 학살할 뿐 아니라 자연 자체를 새로이 만드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정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치의 약속>에서 아렌트는 핵무기의 등장이 "정치를 궁극적으로 정당화하는 바로 그것, 즉 모든 인류가 살아가기 위한 기초적인 가능성을 위협"하는 모순을 만들었다고 얘기한다. 아렌트는 정치와 진리를 연관 짓는 걸 거부하지만 정치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모순을 핵의 발명에서 찾았다. 이것은 아렌트의 정치 이론을 재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즉, 정치의 기반인 세계의 파멸을 막기 위해 우리는 일정한 진리 앞에 서야 한다.

허나 골드파브는 이를 거부하는 듯하다. 골드파브는 책 제목을 따온 아룬다티 로이를 거론하며 "테러주의와 반테러주의에 대한 대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활동가로서의 로이보다는 소설가로서의 로이를 참조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허나 나는 소설가로서의 로이만큼 반세계화 활동가로서의 로이(로이는 활동가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지만!)도 좋아한다.

"만약 후세인 정권이 쓰러진다면 바스라 거리에 사람들이 뛰어나와 춤을 출지 모른다. 그렇다면 만약 부시 정권이 무너진다면 세계 전역에서 거리마다 사람들이 뛰어나와 춤을 출 것이다."

이 얼마나 명쾌한 정의인가?

핵 발전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한국의 정치는 근본적인 물음 앞에 서 있다. '원자력 르네상스'를 꿈꾸고 아직도 원자력의 신화를 믿는 우리 사회에서 작은 것들의 정치는 반핵(反核)을 지지해야 한다. 작은 것들의 정치, 제도 정치 모두를 위해서.
나는 경기도민이다. 팍팍한 서울 생활에 질려서 2년 전에 서울을 탈출했다. 그래서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심심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내게 투표권이 없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박원순 변호사가 당선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치열한 경합이라는 언론 기사는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얘기로 들릴 뿐 결과가 바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 관심은 박원순 변호사의 당선 이후에 있었다. 적대적인 중앙정부 아래에서 가장 큰 지방자치단체를 박 시장이 잘 이끌 수 있을까? 선거 공약이야 참여연대부터 희망제작소까지 시민단체를 이끌어온 실력으로 충분히 채우겠지만 정치가 종합선물세트는 아니지 않은가? 타협이 정치의 미덕이지만 갈등과 충돌 없이 정치가 이뤄질 수는 없는데 ‘친절한 원순씨’가 잘할 수 있을까 염려도 되었다.

예상대로 박 시장은 취임하자마자 좋은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초등학교 무상급식이 실시되고, 서울시립대의 등록금이 반값으로 떨어졌으며, 서울시의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될 예정이다. 대규모 토건사업이 재검토되고 어린이집이 확충될 예정이다. 심지어 한·미 FTA에 대한 의견서를 정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박 시장의 행보는 ‘신자유주의의 마녀’ 마거릿 대처 정부 아래에서 런던 시를 이끌었던 켄 리빙스턴 시장과 비슷하다. 영국 노동당의 후보였고 ‘레드 켄’(우리 식으로는 ‘빨갱이 켄’)이라 불리던 이 사람은 대중교통 요금을 인하하고 탁아시설을 늘렸으며 공공부문의 일자리를 지켰다. 공공 서비스를 확충하며 시민참여를 활성화시켰다.


   
보수 언론이 그의 사생활을 헐뜯기도 했지만 켄의 인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결국 대처 정부는 런던을 비롯한 광역시의 자치권을 폐지해서 강제로 켄의 반란을 진압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국의 상황도 비슷하다. 보수 언론은 박 시장을 흠집 내느라 바쁘다. 박 시장이 한·미 FTA에 관한 의견서를 내자 정부 5개 부처가 합동 브리핑을 열어 이를 비판하는 등 중앙정부도 박 시장을 경계하고 있다.

그런데 두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차이점도 있다. 리빙스턴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엔 영국 노동당을 바꾸고 영국을 바꾸려는 동지들이 있었다. 영국과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신좌파의 이상이 있었다. 그렇다면 박 시장의 뒤에는 누가 있을까? 민주당? 새롭게 탄생하는 어떤 정당? 그들이 과연 근본 변화를 꿈꾸고 있을까?


노동조합 힘 강화한 리빙스턴 시장


리빙스턴은 대처 정부에 맞설 뿐 아니라 대기업의 부당한 노동조건을 바로잡고 노동조합의 힘도 강화하려 했다. 이것이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서울의 ‘협찬 시장’에게도 이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사회구조의 문제에서 개인의 창의와 선택으로, 재벌 개혁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으로 관점을 바꿔온 박 시장이 시민운동 시절 들었던 ‘노동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비판을 극복할 수 있을까. 이주노동자나 여성을 차별하는 기업, 부당한 노동조건을 강요하는 기업, 백혈병 환자를 양산하는 삼성전자의 물건을 더 이상 구매하지 않겠다는 서울시의 선언을 기대할 수 있을까.

리빙스턴은 주민이 직접 지역사회를 바꾸는 다양한 자치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박 시장도 서울 곳곳에 마을 공동체를 만들겠다고 한다. 하지만 마을 공동체는 외부의 공조직이 줄 수 있는 선물이 아니다. 오히려 시장의 몫은 그런 공동체 구성을 방해하는 기성 관변단체들의 힘을 빼고 해체시키는 일이다.

내 기억에 역대 서울시장 선거에서 가장 본질적인 구호는 2002년 사회당의 서울시장 후보가 내걸었던 ‘해체 서울’이었다. 식량과 에너지를 거의 생산하지 않으면서 가장 많은 양을 소비하는 서울시민의 행복은 뭔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면 서울시장은 서울을 넘어서 생각해야 한다.
<내일을 여는 역사>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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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관심을 좀 두려 하면 어김없이 “왜 선거 나가게?”라고 묻는 한국사회, 자신이 뽑은 대표자 앞에서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도 술자리에서 질펀하게 정치인의 자질을 논하는 한국사회에서 정치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다. 정치인이나 공무원의 부정부패를 “그럴 줄 알았다”는 상식으로 받아들이는 한국사회에서 정치에 대한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다. 정치현실이 부정적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런 인식의 문제점은 부정한 정치현실을 바꿀 힘도 정치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생활정치의 의미는 소중하다. 생활정치는 단순히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을 몰아내자는 주장으로 그치지 않고 시민을 정치의 주인공으로 세우려 한다는 점에서, 추상적인 이념이나 구호보다 실질적인 생활의 변화, 삶의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정치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꾼다. 즉 생활정치는 특정 정치인의 교체가 아니라 정치참여과정과 정치의제의 변화를 요구한다.

정치적인 장의 관객이 아니라 주인이라면 나는 더 이상 정치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그리고 정치는 선악의 기준이나 단순한 논평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생활정치에서 정치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니라 ‘1인칭’, ‘2인칭’의 시점을 갖는다. 따라서 나는 또 다른 주인들과 공동체의 합의를 만들어가야 한다.


정치보스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한국사회에서 생활정치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생활정치라는 말이 등장하려면 먼저 그런 정치의 장이 마련되어야 했고, 따라서 우리는 지방자치제도의 부활을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각종 정치적인 사건들에 관해 시민들이 자유로이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여전히 한국에서는 조중동같은 기득권화된 언론사들이 여론을 주도하고 선거 때마다 색깔논쟁이 불거지고 있다. 그래도 인터넷이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등에서 다양한 의제가 소통되면서 생활정치의 기반이 마련되고 있다.

이 글은 한국사회에서 생활정치가 활성화될 수 있을지를 살펴보고 활성화를 위한 조건을 따져본다. 아울러 생활정치의 관점에서 중앙집중화된 복지국가 담론을 넘어서 분권화되고 지방화된 복지사회론을 전개한다. 또한 총선, 대선이 실시되는 2012년에 이런 실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살펴보려 한다.


1. 생활정치는 어떤 변화를 꿈꾸나?

한국사회에 생활정치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92년 총선 때였다. 이때는 단순히 주민들을 위한 정치를 펼치겠다는 의미로 생활정치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그러다 생활정치라는 말이 기성정치와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여성단체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이 1995년 지방선거를 준비하면서부터였다. 보육과 교육, 복지가 이루어지는 지역사회, 생활세계를 잘 아는 여성들이 지방의회로 진출하거나 그런 생활상의 의제들이 선거공약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생활정치라는 말이 조금씩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YMCA>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이 ‘생활정치아카데미’나 ‘생활정치네트워크’를 결성해서 지방선거에 후보자를 낼 뿐 아니라 시민교육, 즉 민주적인 토론역량과 합리적인 갈등해결능력, 정치적인 의사표현능력 등을 키우고 가부장적 권위주의를 극복하며 시민의 정치역량을 강화시키자는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런 운동은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가나 전문가들을 제도정치 속으로 보낼 뿐 아니라 시민사회 자체의 역량을 강화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생활정치가 전개되어온 과정을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한국사회에서 생활정치가 활성화되려면, 다양한 정치의 장이 구성되고 각자 고유한 의제를 개발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한국사회에서 정치는 중앙정치, 수도권정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방이나 지역사회의 주체나 의제들이 시민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지방선거 때에도 언제나 중앙의 정치바람이나 국가적인 사안이 후보자들의 당락에 영향을 미쳐왔고, 지역사회를 대변하는 후보자나 의제들은 선거에서 배제되었다. 생활정치를 내세운 여성운동이나 시민운동도 여성후보공천비율을 확대하거나 여성의 정치활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역할을 했지만 국가 중심의 정치구조를 바꾸지는 못했다.

둘째, 한국사회에서 정치는 주로 선거로 드러났고 선거를 준비하는 정당이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정당이 비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시민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대표하지도 못한 채 보수화되어 있기 때문에 제도정치와 생활정치의 거리는 좁혀지지 못했다. 선거 때가 오면 정당과 시민사회운동이 전술적으로 연대하고 공동의 의제나 정책을 마련하기도 했지만 선거 이후에는 그런 연대가 이어지지 못했다. 즉 한국사회에서 생활정치운동은 ‘정치개념의 확장’이라는 역할을 담당하지 못했다.

셋째, 일제 식민지 시기부터 뿌리를 내려온 지역의 토호세력들이 지방의회나 지방정부를 장악하며 지방자치를 보수화시키고 생활정치를 가로막았다. 사실상 기득권 세력들이 다수의 지방정부와 지방의회를 독점한 채 이권을 나눠먹어 왔다. 그러니 구청장이나 시장, 지방의원들이 부패하고 제대로 임기조차 마치지 못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경기도 시흥시나 성남시처럼 시장들이 몇 대째 계속 구속되는 어이없는 상황도 벌어졌다.

넷째, 일터와 삶터가 분리되면서 생활정치의 의제는 노동의제를 배제하게 되었다.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이 분리되었듯이, 생활의제도 노동의제와 분리되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노동조합운동이 협동조합운동이나 문화운동이 자연스레 결합되었는데 한국에서는 노동정치가 생활정치를 무시하고 생활정치가 노동운동을 배제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다섯째, 한국의 시민사회운동들이 주요한 사회적 의제들을 제기하고 정당의 빈 곳을 메워온 것은 맞지만 그들 역시 공공성이라는 추상적인 가치를 구체적인 생활상의 문제로 접목시키지 못했다. 시민사회운동은 전문가나 활동가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시민의 생활로 파고들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생활정치 역시 추상적인 가치로만 얘기되지 실제 생활을 바꾸는 운동으로서 논의되지 못했고, 생활정치의 주체로 나서야 할 시민들은 관객은 아닐지라도 운동의 객체나 수혜자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여섯째, 일본에서는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 정치활동에 참여하고, ‘가나가와네토’나 ‘도쿄생활자네트워크’같은 정치모임을 구성해서 ‘생활자정치’를 활성화시키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소비자생활협동조합운동은 일본의 ‘생활자운동’에 큰 관심을 보이지만 적극적으로 정치운동을 펼치고 있지 않다. 한국의 생협법(제 4조)이 생협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탓도 있지만, 소비자생협들 스스로 정치활동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다. 소비자생협만이 아니라 많은 시민사회단체들도 스스로 정한 ‘정치적 중립성’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생활정치라는 말은 자주 쓰이게 되었지만 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변하지 않고 시민사회 자체가 강화되지도 못했다. 이런 분위기가 바뀔 기미를 보인 것은 2010년 지방선거였다. 민선 5기를 맞이하는 지방선거에서는 중앙의 정치바람이 잦아졌고 공동지방정부라는 개념이 등장했으며 기득권세력의 독식현상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무상급식이나 마을만들기, 사회적 기업과 같은 생활의제들이 주요한 선거쟁점으로 떠올랐고 다양한 시민사회단체들이 자신의 정치성을 커밍아웃하기 시작했다. 특히 주민참여예산제도를 비롯한 주민참여제도들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었고, 시정(구정)공동운영위원회나 도정협의회같은 거버넌스 기구들이 만들어졌다. 이런 변화는 분명 생활정치의 영향력을 높일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얘기했던 한국사회의 특징들이 근본적으로 변했다고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여전히 정치는 관전이나 논평의 주제이지 내가 직접 뛰어들 수 있는 장은 아니다. ‘나는 꼼수다’처럼 주요한 현안을 재미있게 소개하고 시민의 정치참여를 유도하려는 시도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이런 시도들이 생활정치를 강화시킬지 아니면 제도정치를 강화시킬지를 미리 예측하기는 어렵다.

특히 중앙정부나 수도권이 주요한 정치의제를 독점하고 중앙언론이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교육, 문화, 경제 등 모든 사회자원이 수도권으로 빨려들어가는 초집중화 현상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정치의식을 가진 시민들의 시선도 중앙에 집중되어 있지 자기 주변을 둘러보지 않는다.

생활정치가 꿈꾸는 변화는 내 욕구를 대신 해결해줄 ‘해결사’의 등장이 아니라 나의 욕구를 공통의 욕구로 만들며 함께 꿈꿀 ‘공동체’의 등장이다. 생활정치는 다른 사람이 내게 필요하거나 중요한 것을 정해주는 과정이 아니라 내 자신이, 우리 스스로 그런 필요와 중요성을 정해가는 과정이다. 어떤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곳에서 도움을 받아도 좋지만 같이 힘을 모아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다. 왜냐하면 그런 자립(自立)을 통해 자치(自治)의 힘이 강화되고 자존감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공생(共生)이나 공존(共存)도 그런 자립을 전제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2. 복지국가와 복지사회의 큰 차이점

과거와 달리 한국사회에서 복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권리’없이 ‘의무’만이 강조되고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복지는 상식의 전환을 가져온다. 그런데 복지국가가 곧 시민의 복지와 행복을 대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고 그것이 생활정치의 방식일지는 의문이다.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의 다음과 같은 얘기는 생활정치와 관련해 중요한 고민꺼리를 던져준다. “복지국가와 복지사회는 다른 개념이죠. 국가와 사회가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니까요. 복지국가는 국가적 시스템으로 시민들을 보호하겠다는 것이고, 복지사회는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들 자신이 자주적으로 상호 연대하고 협동함으로써 만들 수 있는 사회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당장에 실현 가능할 뿐 아니라, 확실한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틀입니다.”

김종철 발행인의 말처럼 복지국가와 복지사회는 다르고, 생활정치는 복지국가보다 복지사회와 가까운 개념이다. ‘복지국가 소사이어티’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이 주장하는 주요 정책들에 공감하고 그것이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권리를 보장해 주리라는 점을 모르지 않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변화일지는 의문이다. ‘보편적 복지’가 가진 장점도 분명히 있지만 ‘보편적 복지 대 선별적 복지’라는 구도로 해명되지 않는 부분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김종철 발행인은 “개인들의 자립적 역량과 자기책임을 무엇보다 강조하는 나라”인 덴마크의 아이들이 스스로 도시락을 싼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무상급식이 필요하지만 자기 먹을 것을 스스로 장만하는 교육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이다. 모두에게 똑같이 대우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모두가 스스로 필요한 것을 고민하게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

어른들이 청소년의 판단을 대신하고 그들의 성장을 대신하려는 사회에서 생활정치는 활성화되기 어렵다. 남성들이 여성들의 필요를 예측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려는 사회에서 생활정치는 왜곡되기 쉽다. 모든 복지를 한꺼번에 실시할 수 없다면 우선순위가 필요한데 그 우선순위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정해야 한다. 그런데 복지국가의 관료조직은 그렇게 유연하지 않다.

그리고 복지국가에 관한 담론은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드러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서울특별시의 모든 학교들이 친환경 무상급식을 한다고 치자. 조그만 공터에도 아파트를 짓는 서울시는 그 많은 쌀이나 식재료를 어디서 마련할 수 있을까? 지산지소(地産地消)나 로컬푸드(local food)를 전제하지 않은 무상급식은 다른 지역사회의 복지를 파괴할 수 있다. 피크 오일(peak oil) 시대를 맞이한 에너지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전력자급률이 1.9%에 지나지 않는 서울특별시가 에너지 복지를 실현하려면 다른 지역의 에너지를 빼앗아와야 한다. 많은 결정권한을 소유한 수도권이 주요한 사회자원을 배분하면서 전체적인 균형복지를 추진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복지국가 담론은 중심부가 주변부를 지배하는 ‘내부식민지’라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또한 복지국가 담론은 김종철 발행인이 지적하듯이 “복지국가가 유지되려면 반드시 경제성장이 계속돼야 한다는 대전제”를 유지한다. 복지는 세금을 높이고 세금을 내는 사람들의 수를 늘려야 가능하다. 하지만 최근의 잇따른 경제위기에서 드러나듯 성장은 ‘신화’가 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김종철 발행인의 얘기는 시사적이다. “거듭 말하지만, 덴마크 같은 사회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적 제도 개혁 이전에 시민들 자신의 자주적․협동적 결사운동이 활발했기 때문입니다. 시민들의 자주적 결사체가 활발해져야 국가도 국민의 의사를 존중하고, 건강해질 수 있어요. 원래 근대국가의 논리는 그대로 두면 폭력이 되기 쉽습니다. 국가는 국민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원합니다. 반면에, 우리가 국가나 자본의 폭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단결하고 연대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단, 개인들이 자신의 독자적 인격과 자립성을 유지하면서 연대하는 것이죠. 우선 나 자신이 강인한 인간, 실력있는 인간이 돼야 합니다. 그러자면 끊임없이 인간관계를 통해서 단련을 해야 합니다. 타인이야말로 내가 가진 가장 큰 재산이라는 진리를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가장 훌륭한 복지는 제도가 아닙니다. 풍요로운 인간관계입니다. 물론 그 인간관계는 민주적인 관계여야 하죠.”

따라서 복지국가와 생활정치의 방향도 매우 달라질 수밖에 없다. 복지국가가 위로부터의 제도적 보장을 강조한다면, 생활정치는 아래로부터의 상호부조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활정치는 어떤 식의 복지를 구상할까?

복지국가를 얘기할 때 많이 다뤄지는 것은 일정한 ‘기준’이다. 국가가 국민의 최저생활수준을 보장하는 내셔널 미니멈(national minimum)처럼 다양한 기준을 통해 복지국가의 복지는 실현된다. 문제는 이런 기준들이 시민의 ‘실제 욕구’와 얼마나 일치하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과정이 얼마나 민주적인가이다.


앞서 말했듯이 수도권으로 초집중화된 한국사회의 현실을 고려할 때, 중앙정부가 모든 기준을 결정하는 것은 구조적인 비민주성을 낳을 수밖에 없다. 가령 수도권의 기초생활수급자가 느끼는 불편과 어려움이 지방에서 생활하는 기초생활수급자의 불편이나 어려움과 똑같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지방자치단체가 복지수준을 정하는 시빌 미니멈(civil minimum)이라는 기준을 활용하고 있다. 시빌 미니멈은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누려야 하는 최소한의 생활환경기준, 예를 들어 보행로나 공원, 복지시설, 편의시설이 어느 정도 확보되어야 하는지를 정한다. 지방자치단체가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시빌 미니멈을 정하기 때문에 지역주민들의 실제 욕구가 이런 기준들에 충실히 반영될 수 있다.

그런데 일본 <생활클럽생협>의 요코다 카쓰미는 이와 또 다른 커뮤니티 옵티멈(community optimum)을 제안한다. 내셔널 미니멈이나 시빌 미니멈이 필요하지만 “상호부조와 상호지원에 의한 복지로 지역복지에 최적의 조건을 가능하게 만드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이다.
지역사회의 복지를 최저수준이 아니라 ‘최적수준’으로 보장하려면 시민이 복지의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복지의 제공자이기도 해야 한다. 즉 “미니멈에 입각한 복지서비스를 제공받는 것은 시민의 권리이기에 이러한 기준에 입각한 서비스를 제공받으면서도 자기 자신이 생활하는 지역사회에서 ‘최저 기준’에 입각한 복지 서비스를 창출해 그 수익자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위해 상부상조의 인간관계(커뮤니티)를 만드는 데 참가하는 것을 통해 미니멈보다 더 만족스러운 복지기준을 만들어내고 상호 활용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생활자 정치가 활성화되고 있기에 가능한 주장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논의가 한국에도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의 정치가 소수의 정치인과 다수의 시민관객으로, 수도권과 비수도권으로 양분되었듯이, 우리의 복지도 언제나 수혜자층이 누구인가를 놓고 다툼을 벌인다. 허나 생활정치의 관점으로 본다면, 일방적인 수혜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복지의 관점이 놓치는 것은 복지가 필요한 사람들의 ‘처지’이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가난이 왜 고통스러운가 하면, 가난하기 때문에 싫은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고, 가난하기 때문에 관리나 억압에 저항하지 못하고 착취당하기 때문입니다. 상사가 아무리 보기 싫어도 이를 악물고 일해야 하고, 경멸당하고 무시당해야 하니까 그것이 고통스러운 거죠. 물질이 풍요롭지 않다는 것, 즉 가난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관계의 문젭니다. 관리되는 인간관계에서 자신의 위험이 상처받는 것이 고통스러운 게 아닐까요?”라고 묻는다.
복지국가가 복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처지를 개선시키려면, 필요한 것은 일방적인 수혜관계가 아니라 호혜성이다.

근대사회에서 생활정치가 살리려 하는 것도 바로 그 호혜성이다. 서로가 서로를 보살피고 각자의 목소리를 내며 함께 행동할 때 정치의 장이 풍요로워지고 행복해진다. 그것은 선거가 아니라 추첨이 민주적인 대표자 선출방식이라는 오랜 지혜처럼 낯설지만 손쉽게 가능한 해결책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해결책을 향해 가고 있을까?


3. 2012년은 전환점이 될 수 있을까?

박원순 변호사가 서울시장으로 당선되면서 정치에 대한 기대나 희망이 싹트고 있다. 투표율이 올라가고 정치에 관심을 가지며 자기 목소리를 내는 시민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의 세계에 들어가면 다양한 사회의제들이 시민들 사이에서 얘기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조건들이 생활정치를 활성화시킬 것이라고 낙관하기는 어렵다. 우리의 정치조건이 근본적으로 변화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의 세계를 정의하는 언어 자체가 분명해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너무 어지럽다. ‘녹색성장’, ‘공정사회’, ‘공생발전’처럼 그 의미와 현실이 완전히 분리된 경우도 있고, 민주주의나 시민처럼 그 의미가 모호한 언어도 많다. 그런 점에서 프란시스 무어 라페는 우리의 언어 자체가 민주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얘기하며 대안용어를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

혼란스럽게 만드는 암시들

더 정확하고 힘있게

소통하게 하는 대안용어

행동가

선동가, 자신만의 의제를 지닌 극단주의자

참여하는 시민, 능동적 시민, 권리있는 시민

반세계화주의자

퇴행적이고 이기적인 고립주의자

민주주의 옹호자, 강력한 공동체 옹호자, 반(反)기업통제, 반(反)경제집중

시민권

부담, 의무, 지겨운 것

공적인 참여, 공동체 만들기

관행 농업

무해하며 오랜 경험으로 입증된 것(둘 다 사실이 아니다)

화학의존적 농업, 자연착취적 농업, 공장식 농업

보수주의자

환경과 공동체를 보존하는데 헌신적임을 암시

극우, 반(反)민주 우파(적용가능할 때)

민주주의

투표와 정부에 한정된 것

살아있는 민주주의: 공정함, 포용, 상호책임성같은 민주적 가치들이 우리 공적 삶의 모든 지평에 스며드는 삶의 방식

자유무역

정부통제의 부재, 자동 메커니즘 암시(자동 메커니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기업 우선의 불공정 무역

세계화

연결보다는 상호의존, 자유무역, 저가상품을 암시

세계적인 기업 통제, 세계적 기업주의, 경제 집중화, 경제 봉건주의, 임금 수준에 대한 세계적 하향 조정 압력

사회정의

급진좌파, 평등강요와 연결

공정성, 공정한 기회, 자유

자유선호의․자유당의

거대정부 선호

진보적, 민주적

최저임금

인간에 대한 영향력을 전달하지 못하는 용어

빈곤임금 vs 생계임금

일인당 국가 부채

대부분 사람들에게 의미 없는 것

출생 세금(2005년 각 신생아가 직면한 국가의 부채 액수는 15만 달러이다)

비영리조직

부정적인 뜻으로 정의됨

사회에 기여하는 조직, 시민의 조직

유기농, 저투입

화학살충제, 화학비료같은 물질의 부재에만 초점을 맞춤

생태 친화적 농업: 환경을 향상시키는 한편, 생태학을 생산성과 품질 향상에 사용하는 강력한 지식을 요하는 농업

선택 홍호

(낙태 합법화 옹호)

사소하게 들린다

양심 옹호

저항, 데모

제한적, 방어적

시민불복종: 민주적 가치를 옹호하기 위한 적극적 행동

공적 삶

공무원과 유명인사에게만 한정된 것

구매자, 노동자, 고용주, 부모, 유권자, 투자자, 그리고 거대한 파문을 만들면서 매일 수행하는 모든 역할들에서 각자 하고 있는 것

동성 결혼권

성에 초점을 맞춘 것

결혼할 수 있는 권리, 동등한 결혼

세금

부담, “우리” 돈의 갈취

강력하고 건강한 사회를 위한 구성원의 의무, 판사 올리버 웬델 홈스 주니어가 이야기한 그대로, “문명의 비용”

복지국가

사람들의 요구를 다 받아주는 체제, 거대한 관료주의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는 국가

 

언어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우리의 언어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공유할 세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정치는 우리가 함께 발 딛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고 그 세계에 나의 가치를 심는 것으로 시작된다. 우리가 처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공통의 언어와 감각이 요구된다. 생활정치는 그런 언어와 감각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데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제이슨 델 간디오는 다른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신급진주의를 제안하고 그런 의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얘기한다.

• 신급진주의는 인간이 소통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 신급진주의는 사람들에게 자기 내면에 자리잡은 정치적 욕망을 쫓아가라고, 선택한 현실이 무엇이든 창조하라고 주문한다.
• 신급진주의는 다른 현실을 방해하지 않는 한 무엇이든 수용되고, 존중되고, 인정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 신급진주의는 사람들이 욕망하는 현실을 자유롭게 창조하게 해주는 사회체제를 수립하려고 애쓴다. 이렇게 하려면 이 과정을 방해하는 사회체계가 무엇이든 그것을 탐구하고 대결하고 근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 이 투쟁은 무한히 계속된다. 심지어 중심 없는 현실의 세계를 창조한다고 해도 지속된다. 방해하고 통제하고 억압하는 힘이 다시 출현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우리의 현대사는 힘없는 사람들이 주변을 잘 살피고 조용히 말을 하도록 내면화시켰다. 옳고 그른 것, 바르고 나쁜 것을 논하기 전에 사람들 각자가 마음 속에 있는 얘기를 털어놓을 장이 필요하다. “내가 한들 뭐가 바뀌겠어”,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대안이 없어요”라는 말이 아니라 내 속에 자리잡은 감정과 언어를 나눌 시간과 여유가 필요하다.

지금 당장 막아야할 사업과 지켜야 할 가치들이 있는데, 그렇게 막연한 얘기를 하냐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허나 내 속의 언어를 끄집어내는 과정과 세계를 함께 이해하고 공유하는 과정이 없다면 제 아무리 급진적인 변화라도 기성체제 속으로 흡수될 수밖에 없다. 2012년 역시 수많은 정책과 사람들 속에서 필요한 것을 취사선택하는 과정이 아니라 서로의 목소리와 꿈을 공유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2012년은 지나온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는 반복에 그칠 것이다.

2012년 대선을 두고 안철수 씨의 등장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데, 그런 평론 역시 지식인의 ‘전문성’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개운한 반응은 아니다. 왜냐? 아마추어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고 때로는 전문가들의 정치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물론 지식인들은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허나 그것이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비판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안철수 씨나 박원순 씨의 등장 자체가 생활정치의 성격과 맞을지도 의문이다.

특히 우리가 맞닥뜨린 근본적인 위기가 있다. 서울시 노원구 월계동 아스팔트에서 방사능이 검출되면서 두려움이 일고 있다. 그나마 서울에서 터진 일이기에 사건이 되었고, 그와 더불어 이미 2011년 2월에 경주시, 포항시의 아스팔트에서도 방사능이 검출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방사능은 이미 우리 일상생활 속에 깊이 침투했을 수 있다.

그렇게 검출된 방사능만이 문제는 아니다. 정부는 원자력 클러스터를 만들고 전 세계에서 가장 밀집된 핵발전 단지를 만들려 하고 있다. 일본 핵발전소 사고를 바로 곁에서 겪고서도 우리는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다. 단지 30년 동안의 풍족한 에너지 소비를 위해 수만년의 부담을 후손들에게 떠넘기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생활정치를 아무리 떠들어도 부질없는 짓이다.

원자력만이 아니다. 먹고사는 문제의 핵심인 식량과 종자도 근본적인 위기를 예고하고 있다. 한미FTA를 비롯한 협약들과 초국적기업의 침투는 농민들의 삶과 우리의 식량주권
을 위협하고 있다.

어떤 정당, 어떤 정치세력이 이런 예고된 비극을 막을 수 있을까? 2012년은 희망의 완결점일 수 없고 희망의 시작일 뿐이다.


4. 결론

문강형준은 파국의 상황에 맞닥뜨린 우리의 실존을 좀비와 비교한다. “좀비는 포스트-정치적 상황과 결합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체제가 날로 분명히 몰고 오고 있는 파국의 분위기에 최적화된 주체일지도 모른다. 모든 사회적인 것을 개인화하고, 이윤을 위해서 자원을 모조리 끌어다 쓰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지구적 환경문제는 외면한다. 이로 인해 결국 사회적 갈등과 지구적 문제가 연쇄적으로 폭발하는 상황을 파국이라 할때, 그 파국 상황에서도 ‘묵묵히’ 걸어 다니며 자신의 식욕을 채우는 ‘일차원적’ 존재를 우리는 좀비라는 아이콘을 통해 발견한다. 좀비는 파국의 상황을 예비하면서 동시에 파국을 전파하는 존재다. 완벽하게 자유롭지만 완벽하게 속박된, 인간의 형상을 했지만 인간이 아닌, 포식하면서 소진하는, 살아 있으면서 죽어있는, 존재이면서 비존재인, 주체이면서 반주체인, 노예이면서 소비자인, 결핍이면서 과잉인, 이 모순적 존재는 바로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의 온갖 모순을 체화하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그 모든 모순이 터지는 날, 어쩌면 ‘우리’는 ‘그들’ 중 하나가 되어 파괴된 거리를 서성이고 있을 것이다. 좀비가 된 우리들에게도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하나있으니, 파국 상황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은 ‘인간’이지 ‘좀비’는 아니라는 것이다.”
날카롭고 무서운 지적이다. 파국의 상황에도 ‘지금 당장의 식욕’만을 채우려는 일차원적 존재인 존비가 우리의 실제 모습일지 모른다.

좀비임을 한탄만 하지 않고 인간이고자 한다면 우리는 선택을 내려야 한다. 생활정치를 펼치며 사람의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기득권의 정치에 끌려다니며 좀비의 삶을 살 것인지. 2012년은 그 시작을 알리는 해일 뿐이다.


※ 참고하면 좋은 책

김종철, “우애의 경제를 위하여”, 《녹색평론》2011년 7~8월호(통권 제 119호)
요코다 카쓰미 지음, 나일경 옮김, 『어리석은 나라의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시민: 생활클럽 운동그룹과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의 모델 만들기』(논형, 2004)
C. 더글러스 러미스․쓰지 신이치 지음, 김경인 옮김, 『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녹색평론사, 2010)
프란시스 무어 라페 지음, 우석영 옮김, 『살아 있는 민주주의』(이후, 2008)
제이슨 델 간디오 지음, 김상우 옮김,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동녘, 2011)
아네트 아우렐리 데스마레이즈 지음, 박신규․엄은희․이소영․허남혁 옮김, 『비아캄페시나: 세계화에 맞서는 소농의 힘』(한티재, 2011)
문강형준, 『파국의 지형학』(자음과 모음, 2011)
이지원, “현대 일본의 자치체 개혁운동: 혁신자치체와 시빌미니멈을 중심으로”, 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 1999년 박사논문.
장석준, 『신자유주의의 탄생』(책세상, 2011)
김홍우 외 지음, 『삶의 정치, 소통의 정치』(대화출판사, 2003)
오사무 우오토, 『현미 선생의 도시락 1~8권』(대원씨아이, 2009~2011)
하승우․유해정, 『도시생활자의 정치백서』(북하우스, 2010)

[오늘의 문예비평]에 쓴 글이다.
글 중간중간이 엉성한데 그냥 내버려 뒀다.
그 공백을 채우는 건 읽는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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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소개[각주:1]

1. 고공크레인으로 들려진 사람들


크레인으로 올라간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들은 건 대학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90년이었다. 노동조합을 주도하던 수십 명의 노동자를 식칼로 난자했던 끔직한 테러사건과 육해공에서 병력을 동원한 경찰의 미포만 작전으로 벼랑 끝에 내몰린 현대중공업의 노동자들이 82미터 높이의 크레인에 올랐다. ‘골리앗 투쟁’이라 불리는 이 싸움에서 노동자들은 “새벽과 한밤중에 헬기까지 동원한 정부의 무력진압에 우리는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천대와 우리의 비애에 울분을 느끼고 급기야 투신하려는 동지들을 서로가 감싸안으며 자제시키고 있습니다. 저희도 저 밑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회사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노조가 유린되고 정부에 의해 천대받는 현실에서 골리앗 위에 있는 우리 전원은 죽을 수는 있어도 물러서지 않기로 결의하였습니다”라고 부르짖었다. 전국의 노동자와 학생들이 동조파업을 하고 울산으로 내려와 연대투쟁을 벌였고, 크레인에 오른 이들은 5일동안 단식투쟁까지 벌였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벼랑끝 투쟁이었고, 노동자들의 자존심을 건 싸움이었다.


당시에 나는 대학 선배들과 함께 서울지하철 선전전을 나갔다. 선배는 즐거운 어린이날에 크레인 위의 아빠를 맘 조리며 지켜봐야 하는 아이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 드라마같은 비극에 귀를 기울이는 승객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승객들은 무관심했다. 승객들이 일어난 자리엔 우리가 뿌린 유인물이 놓여 있었다.


크레인 위로 올라가야만 했던 사람들의 절박함은 저녁 시간 지하철로 퇴근하는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불법으로 금지되던 시기라 진실을 알리는 목소리가 위험했을 수도 있지만 외면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불편에 가까웠다. 사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넥타이부대가, 권력층과의 협상에 바빠진 운동의 지도부가 현장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닫았다는 점은 같은 해 7월부터 9월까지의 노동자대투쟁에 대한 반응에서 이미 증명되었다. ‘보통 사람들’로 포장된, 반공과 중산층을 내세운 지배 이데올로기는 묘한 조화를 이루며 사람들을 분리시켰다. “나는 너희와 달라 또는 달라야 해”라는 구분이 “우리도 당신이다”라는 선언을 가로막았다. 힘겨운 싸움은 13일 만에 막을 내렸다.


당시 골리앗 투쟁을 이끌었던 이갑용씨는 자서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골리앗(고공농성)에 오를 거라면 계획을 잘 잡아야 한다. 절대 혼자 올라가선 안 되고, 여럿일 경우 고공에서 어떤 일을 할지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한다. 책을 읽을 수도 있고, 글을 쓸 수도 있다. 투쟁일기 같은 것을 적어도 좋다. 어떤 경로로 침탈할 수 있는지 면밀히 살펴 대비해야 하고, 건강에 유의해야 한다. 투쟁이 때를 가려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겨울의 고공농성은 되도록 피했으면 한다. 초여름에도 견디기 어려운 하늘 위의 날씨인데 겨울에는 상상 이상이다. 그리고 고공단식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단식은 지상에서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배변 문제 때문에 최소한으로 음식을 조절하다 단식으로 가기도 하고, 음식을 다 아래로 집어던지고 결사항전을 각오하기도 하는데, 고공 단식만은 말리고 싶다.”


하지만 그 뒤에도 많은 사람들이 크레인에 올라야 했다. 살 곳을 강제로 빼앗긴 철거민들은 망루를 세우고 그 위에 올랐다. 지상에서 살 곳을 빼앗기고 내몰린 사람들은 하늘 가까운 망루와 크레인에서 안식처를 찾아야만 했다.


20세기의 소설같은 비극은 21세기 한국에도 계속 재현되었다. 절대 혼자 올라서는 안 된다는 그 크레인을, 초여름에도 견디기 어렵다는 그 크레인을 한진중공업 故김주익 위원장은 혼자 올랐다. 골리앗 투쟁이 노조간부들을 식칼로 찌르고 헬기와 해군함정으로 진압하는 노골적인 폭력에 맞섰다면, 김주익 위원장의 투쟁은 노조간부들을 매도하고 고발하며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은밀한 폭력에 맞섰다. 골리앗 투쟁이 빨갱이로 매도당했다면, 김주익 위원장의 투쟁은 무관심으로 외면당했다.


지상에서 35미터 떨어진 곳에서 그는 가장 강력한 태풍이라 불리던 매미를 견디며 무려 129일 동안 고공농성을 벌였다. “노동자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 그런데도 자본가들과 썩어빠진 정치꾼들은 강성노조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아우성”인 나라에서 김주익 위원장은 “잘못은 자신들이 저질러놓고 적반하장으로 우리들에게 손해배상 가압류에 고소고발로 구속에 해고까지 노동조합을 식물노조로 노동자를 식물인간으로 만들려는 노무정책을 이 투쟁을 통해서 바꿔내지 못하면 우리 모두는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승리할 때까지 이번 투쟁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라 부르짖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스스로 목을 매어야 했다. “휠리스인지 뭔지를 집에 가면 사주겠다고 크레인에 올라온 지 며칠 안 되어서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조차도 지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는 유서를 남긴 채.

세상은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까지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언론매체는 태풍 매미의 강력함을 연일 방송했지만 그 태풍을 견디며 한 사람이 크레인 위에 버티고 있다는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그를 인터뷰한 사람도 없었다. 그가 죽음을 택하고 나서야 많은 이들이 그를 기억하며 눈물을 훔쳤고, “35m 상공에서 100여 일도 혼자 꿋꿋하게 버텼지만 세 아이들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에는 아픈 마음을 숨기지 못한 아버지. 그 아버지를 대신해서 남겨진 아이들에게 인라인 스케이트를 사준 사람이 있습니다. 부자도, 정치인도 아니구요. 그저 평범한, 한 일하는 어머니였습니다. 유서 속에 그 휠리스 대목에 목이 메인 이 분은요,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주머니를 털었습니다. 그리고 휠리스보다 덜 위험한 인라인 스케이트를 사서, 아버지를 잃은, 이 위험한 세상에 남겨진 아이들에게 건넸습니다. 2003년 늦가을. 대한민국의 노동귀족들이 사는 모습입니다.”라는 故정은임 아나운서의 멘트는 그의 죽음 뒤에도 인터넷을 떠돌고 있다. 이 역시 한국에서는 일상이 되어버린 소설같은 현실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크레인에 올랐다. 하지만 그들은 크레인으로 들려질 수밖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지상에서 수십 미터 떨어진 위험한 곳에 그들은 둥지를 틀어야만 했다. 높은 크레인을 오르며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희망을 품었을까? 이번에 올라가면 다시 지상에 발을 디딜 수 있을 거라 생각할까?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그 높은 곳으로 올라간 사람들을 왜 우리는 보지 못했을까? 크레인으로 들려진 사람들의 꿈은 지상에서 꾸역꾸역 일상을 사는 우리들의 꿈과 달랐을까? 왜 우리는 눈을 감았을까?


이 외면의 역사를 이야기하지 않고 희망을 얘기할 수는 없다. 그동안 크레인에서 떨어진 땀과 고통의 눈물이 지상으로 스며들지 못했다면, 지금과 같은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의 희망은 과거의 절망을 인정하고서야 온전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고통의 기억만을 부여잡자는 건 아니다. 모든 희망이 다 이루어졌다면 아마 희망이라는 말도 소용없을 것이다. 희망이 필요한 건 우리 사회가 절망적이기 때문이다. 연꽃이 썩은 연못에서 피듯 희망도 절망 속에 핀다. 이제 희망을 얘기할 시간이다.



2. 타지 않은 버스에 관한 이야기



희망버스에 관한 얘기를 할 텐데, 미안하게도 나는 ‘아직’ 희망버스를 타지 못했다. 갓 돌을 지난 아이를 데리고 희망버스를 타기엔 여유가 없었다. 경험하거나 목격하지 않은 사건에 관해 말을 꺼내는 건 참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 고향이 부산이고 영도는 내가 힘겹게 고등학교 시기를 버티던 장소였다. 한진중공업은 당시 내 아지트였던 태종대에 가기 위해 지나쳐야만 했던 곳이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변하지 않은 그 곳 사람들, 그 곳 지리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사실 직접 경험하면 알게 될 만한 이야기를 경험하지도 못한 내가 간접적으로 얘기한다는 건 꽤나 주제넘은 짓이다. 그럼에도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건 희망버스 참가기가 아니라 희망버스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희망버스를 달리게 하는 에너지가 무엇인지 나도 궁금했다.


타보지 않았기에 버스를 탄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희망버스를 기획한 사람들이 만든 『깔깔깔 희망의 버스』(후마니타스, 2011년)를 읽으며 웃음은커녕 눈시울만 붉혔다. 시인의 예찬이 없어도 그동안 집회현장, 추모집회에서 발표된 김진숙 씨의 말과 글은 이미 한 편의 문학이었다.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희극을 예감하는 사람을 보며 나는 깔깔깔 웃을 수 없었다. 어느 대목에서 깔깔깔 웃어야 할지 좀 난감했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했다. 타지 않은 버스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희망버스를 탔던 사람들이 언론에 기고하거나 인터넷에 올려놓은 글들을 검색해서 읽어봤다. 그러면서 희망버스 외에도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희망을 찾으러 떠난 사람들이 있었고 직접 부산으로 가지는 못했어도 각지에서 희망을 지지하고 보살폈던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희망버스는 부산으로 떠난 버스가 아니라 부산에서 전국으로 떠난 버스였던 셈이다.


인터넷에서 접한 대부분의 글들은 희망버스에서 희망을 발견했고 그 희망을 일깨워준 소금꽃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자발적으로 돈을 내고 1박 2일을 내어 희망버스를 탄 사람들, 그들에게 온갖 물건과 마음을 건넨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한국에 1만 명 이상 있다는 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신문과 잡지들이 앞을 다투어 특집을 기획했고 다양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기에 그런 얘기를 반복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다만 영의정 버스(청소년 활동가들의 버스), 퀴어버스, 장애인연대버스, 농민-노동자 연대버스가 등장했다는 점은 기억해 둘만하다. 숨어야 했던 사람들이, 서로를 마주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손을 잡는 건 어떤 모순과 비판꺼리가 있더라도 좋은 일이다.


그리고 단지 위로하거나 확인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뭔가를 서로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개인이든, 단체이든)의 수가 늘어난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시국회의와 만민공동회에서 시민들은 서로의 말과 생각을 나눌 뿐 아니라, 양말을 나누고 밥을 나누고 약을 나누고 음악과 미술, 웃음과 눈물을 나눴다. 무한경쟁의 시대, 자기 앞가림만 강요하는 시대에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뭔가를 나눈 기억은 우리가 존엄한 사람으로 살도록 도울 것이다. 사실 그동안 어느 집회장을 가든 그런 나눔은 하나의 문화였지만 이제 그 나눔이 일상을 집회의 장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즐거운 상상을 하게 되었다.


인터넷을 뒤지다보니 희망버스를 욕하는 사람들도 만나게 되었다. 몸소 부산으로 내려가 간만에 완장 차고 어깨에 힘준 어버이연합도 있고, 똥오줌 못 가리는 대학생들도 있었다. 종북좌파, 빨갱이 색출에 여념이 없는 구국시민들도 있고, ‘영도주민’이라며 희망버스를 절망버스라고 욕하는 사람들도 인터넷 댓글에 자주 등장했다(내가 영도주민이라도 제법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정말 영도 주민일까?). 어쨌거나 그들도 자신이 존재해야 할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나름 애쓰고 있었다.


그렇게 애쓰는 이들보다 내 마음을 더 불편하게 만든 사람들은 희망버스를 ‘타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나처럼 버스를 못타 못내 미안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 희망버스를 비아냥대는 사람들도 있었다(내 눈엔 비아냥으로 보였다). 스머프 마을의 똘똘이 스머프를 보는 느낌이랄까. 사람들은 분주히 일하고 있는데 옆에서 가르치고 충고하려 드는 불편한 사람들. 눈 앞의 사람에게 직접 묻지 않고 몇 푼의 얄팍한 지식에만 의존하려는 사람들.


단지 불편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런 얘기를 보며 90년대 초반의 고백논쟁을 떠올렸다. 당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과 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에서 일했던 신지호 씨는 “당신은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가”라는 글로 고백운동(?)의 테이프를 끊었다(그는 얼마 전 폭탄주 음주토론으로 술 먹으면 말 더 잘한다는 상식을 굳이 몸소 증명했다). 그 뒤로 운동권이었다는 사람들의 간증이 이어졌고 그 사람들이 지금은 뉴라이트라는 기괴한 이권모임(이념모임이 아니다!)을 꾸리고 있다. 희망버스를 비아냥대는 이들의 행보는 이런 과거와 다를까?


사회디자인연구소의 김대호 소장은 2011년 8월 2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희망버스에서 희망을 찾을 수가 없다”고 얘기했다. 한진중공업의 문제는 조선산업의 문제이고, 중국과의 경쟁에서 밀리는 조선사업의 구조조정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현실을 잘 아는 노조의 합의와 판단을” 김진숙씨가 “시민들의 상식에서 동떨어져” 무시하고 있고, 조남호 회장이 무리하게 경영하지 않았는데도 진보가 이런 판단을 계속 무시한다면 “국민 다수와 대부분의 기업주들은 진보의 집권을 ‘한국의 재앙’이자 ‘절망’으로 여기지 않겠는가”라고 그는 물었다. 아울러 “정리해고 없는 세상은 사회주의”이고 “‘정리해고 철폐’라는 우상을 숭배해선 결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사실 2010년 제주인권회의에서도 이 사람의 얘기를 들으며 참 불편했는데 그 때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반복했다. 그 때도 그랬지만 이 인터뷰를 보며 왜 그가 ‘진보논객’이라 불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과거에 운동경력이 있으면 모두 진보라 불려야 할까? 그러면 김문수나 신지호, 이재호 씨도 모두 진보정치인이라 불러야 한다(그렇게 부르면 아마도 보수를 자처하는 그 사람들은 화를 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의 진보가 참으로 가볍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세 치 혀에 진보가 놀아날 수 있다면, 나는 진보를 버리고 싶다. 그리고 집권을 위해서 진보가 현실과 타협을 한다면, 그런 진보가 집권하는 걸 보느니 차라리 진보가 망하는 걸 나는 기다리겠다.


비슷한 맥락에서 《한겨레신문》과의 2011년 8월 4일 인터뷰에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 해결을 요구하면서 시작된 희망버스는 정리해고 철폐라는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외치고 있다”며 “좀 더 현실적인 목표를 주장해야 한다”고 주문하는 방송통신대 김기원 교수의 말도 불편했다. 그의 진심이 김대호 소장보다는 조금 더 우리 사회에 닿아 있음을 알지만 회사 쪽과 함께 대책을 찾아봐야 한다는 얘기는 참 한가로운 얘기로 들렸다. 그렇게 함께 대책을 논의할 수 있다면 누가 높은 크레인에 오르겠는가?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공리(公理)는 현실과 상식이라는 말로 재단될 수 없다. 한국 현실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비현실과 비상식이 지배하는 우리 현실을 어찌 현실이라 부를까. 노동운동이 민주노조를 세우기 위해 어렵사리 마련한 복수노조 허용방침은 허용 이후 불과 한 달만에 322개의 노동조합이 새로 만들어지는 쾌거(?)를 이뤘다고 한다. 노동조합이 새로 만들어졌다니 기뻐할 일이지만 이 노조들 중 대부분의 노조가 회사 측이 만든 노조라고 한다(대표적인 것이 삼성 에버랜드의 노동조합이다). 대학의 청소노동자들이 어렵사리 만든 노동조합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각 대학의 노동자들이 만든 산별노조는 이화여대나 연세대에서 새로이 만들어진 개별노조에 교섭권을 빼앗길 처지라고 한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어떤 상식을 얘기할 수 있을까? 경북 구미의 전자부품업체 KEC는 노조의 파업에 맞서 1년이나 직장폐쇄를 한 뒤에, 공장으로 복귀한 노조원들에게 파업가담 정도에 따라 다른 색깔의 티셔츠를 입히고 정신교육을 시키고 있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현실에서 우리는 어떤 현실적인 상식을 따라야 할까?


이런 비현실은 노동자만의 일이 아니다. 노동자에게 해고가 살인이라면, 농민에게는 땅의 포기가 곧 살인이다. 땅 없는 농민이란 말 자체가 모순이다. 하물며 농민들에게는 올라갈 크레인조차 없다. 허나 농업을 산업으로 보고 취사선택하듯이 이쪽 산업을 저쪽 산업과 거래하는 사람들에게는 땅의 포기가 곧 살인이라는 말도 우상이나 비현실적인 얘기로 들릴 것이다. 자살하는 농민들이 목숨으로 증명하는 공리를 우리는 비현실적이라며 외면해야 할까? 그런 외면이 부메랑처럼 우리의 삶을 파고들지는 않을까? 이 현실에서 눈을 돌린다면 우리가 대체 어떤 대안을 얘기할 수 있을까?


기득권층이 좌지우지하는 ‘말로만 공화국’에서 정의로운 공리는 불가능한 것을 상상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상상하는 최악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 희망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기득권층의 상상에 맞서는 정의로운 상상이다.


나는 김진숙 씨가 크레인에 텃밭을 만들고 식물을 키운다는 얘기를 들으며 감탄 또 감탄을 했다. 고공에서도 지상에서의 삶이 이어질 뿐 아니라 그곳이 지상으로 변할 수 있음을, 사회운동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3. 위로와 희망의 사회운동



그동안 여러 학자들이 촛불집회나 희망버스를 보며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의 분리,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리 등을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핵심적인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분리보다 일터와 삶터의 분리, 일상과 제도의 분리, 활동가와 시민의 분리, 그로 인한 운동의 선택과 집중전략이 더욱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시민운동은 그 시작부터 전문가 중심이었고, 노동운동은 80년대부터 대기업 남성 정규직 노동자 중심이었다. 이것은 최근에 갑자기 불거진 문제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의 부진이 시민들의 능동성을 강화시켰다고 보기도 어렵다. 오히려 운동이 공감하지 못하거나 채우지 못한 부분을 시민들이 직접 채우려 뛰어들고, 운동이 주목하지 않던 주체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 전문가나 지식인들처럼 거시적인 전망이나 정책을 제안하지는 못하지만 시민들은 어떤 사건에 공감하거나 분노하며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행동으로 드러낼 수 있다. 이런 시민들의 공감과 분노, 직접행동이야말로 사회를 달구는 군불이다. 이렇게 보면 시민사회운동과 시민의 직접행동이 서로를 멀리할 이유는 없고 외려 서로 끌고 당기며 돌봐줘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서로 눈을 맞추지 못하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기득권층은 눈을 마주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시민과 운동을 이간질한다. 기득권층이 공격하는 건 시민사회운동이 아니라 그 운동에 관심을 둔 시민들의 마음이다. 경찰의 방패와 캡사이신이 공격하는 건 정의로운 장에 서려는 시민들의 의지이다.


서로 눈을 맞추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건 기득권층만이 아니다. 촛불집회 때와 마찬가지로 반짝하고 불타올랐다 수그러드는 건 사건 속의 사람들이 아니다. 실제로는 그 사건에 콩놔라 팥놔라 훈수두기 좋아하는 지식인들이 그런 모습을 보였고 지금도 그렇다(지식인들이 할 역할은 훈수가 아니라 참여이다).


시민들의 직접행동은 시민사회운동을 대체하려는 게 아니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고 사실 대체는 불가능하다.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전업 활동가로 일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직업적인 시민사회운동의 노하우와 조직력은 시민들에게 부족한 힘을 제공할 수 있다. 반면에 조직운동이 둔감해진 일상의 영역을 시민들의 직접행동은 활성화시킬 수 있다. 시민사회운동이 일상을 제도화하고 시민의 직접행동이 제도가 일상으로 스며들도록 발판을 마련한다면, 이렇게 서로가 상대방의 활동에 주목하며 힘을 실어줄 수 있다면, 모두의 힘이 강해질 수 있다.


시간 되면 뛰어들었다 시간 없으면 어쩔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하는 건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런 일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없는 ‘공백’을 메워주고 ‘전망’을 제안하는 시민사회운동단체의 역할은 중요하다. 따라서 그런 단체들의 힘이 빠지지 않도록, 국가나 자본에 휘둘리지 않도록 기반을 단단하게 다져줘야 한다. 하루에 밥 한 숟갈씩, 일주일에 담배 한 갑, 소주 한 병, 그렇게 모은 정성은 단체에게 힘을 줄 수 있다. 인권센터를 짓는데 힘을 보태고 사회적 파업기금을 모으고 강정마을 후원주점에 참여하는 시민들에게서 이미 그런 움직임을 찾아볼 수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배우 김꽃비와 제작자 김조광수, 감독 여균동이 보여준 ‘I ♡ CT85, GANG JUNG’의 퍼포먼스도 그런 선언이 아닐까? 그에 앞섰던 배우 김여진과 날라리 외부세력도 마찬가지이다. 드라마와 영화보다 우리 현실이 더 드라마같고 영화같다는 점을 배우와 감독들도 깨닫기 시작했다. 일상생활 속에서 연대는 다양한 형태로 실현되어 왔고 더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희망버스를 ‘촛불의 진화’라고 부르는 게 좀 불편하다. 왜냐하면 진화라는 말은 발전이라는 말처럼 과거를 부정하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버스는 진화가 아니라 ‘개화’이다. 희망버스는 더 이상 그들을 나와 다른 사람으로 외면하지 않겠다는 하나의 선언이다.


죽은 그가 나일수도 있음을, 크레인에 들려진 사람이 나의 친구, 나의 형제․자매, 나의 부모․자식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희망은 싹을 틔울 수 없다. 희망버스는 권력과 자본이 만든 경계를 허물고 “그가 나일 수 있다”고 인정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히 선언하도록 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의 위기는 사람들에게 다시 ‘공통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있다. 모든 차이를 무로 만드는 공통성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로서의 공통성. 나는 당신과 다르다가 아니라 나도 언젠가는 당신의 처지가 될지 모른다는 공통성, 그렇기에 함께 손을 잡아야 한다는 깨달음. 유럽의 ‘브뤼셀 아고라’, 뉴욕의 ‘제너럴 어셈블리’, 한국의 ‘희망버스’는 그런 공통성과 깨달음을 반영한다.


그리고 이런 선언은 확산되고 계속 소통되고 있다. 여전히 신문이나 TV는 이런 선언을 제대로 전하지 않고 있지만 트위터나 페이스북같은 소셜 네트워크를 타고 소식은 돈다. 주류 언론매체는 여전히 이권에 목을 매고 있지만 사람들의 대화는 늘어나고 수다스러워지고 있다. 김진숙씨가 핸드폰을 들고 크레인에 오른 것도 김주익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허나 희망이 항상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이 글을 쓰다 몇 년 만에 아는 동생을 만났다. 동생은 부산에서 경찰로 일한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 둘째 얘기가 나왔다. 희망버스를 막고 대기하는 일을 하다 아이가 유산되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슨 말을 해줄까 단어를 찾았지만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희망버스가 우리 사회의 희망이라는 글을 쓸지라도 아이를 잃은 동생에게 희망을 얘기할 수는 없었다.


물론 이것은 나의 문제도 동생의 문제도, 시민과 경찰의 문제도 아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비극을 만든 장본인은 따로 있으니 우리의 탓이 아니다. 허나 그렇다고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는 없다. 비극은 소리없이 찾아와 희망을 비틀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을 품으면서도 세심하게 서로의 고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함께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함께할 사람, 함께 하고픈 사람에게로 연대가 넓어질 수 있다.


아픈 이들에게 필요한 건 충고나 동정이 아니라 ‘위로’이다. 힘을 가진 자들의 사회는 위로를 나약하다 말하지만 자신을 약하다 생각하지 않고 타자를 동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누는 위로는 결코 약하지 않다. 위로는 우리가 느끼는 고통의 무게를 덜고 같이 일어설 수 있게 한다.


얼마 전 루시드폴의 노래 ‘고등어’를 우연히 듣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를 고를 때면 내 눈을 바라봐줘요. 나는 눈을 감는 법도 몰라요. 가난한 그대 날 골라줘서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오늘 이 하루도.” 눈 감지 않고 따뜻하게 손 잡으며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라고 얘기하는 연대만큼 강한 것이 있을까?


나는 ‘결사항전’, ‘사수’같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 결의를 보여주기에 좋은 말이지만 그것은 나의 선택을 제한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크레인에 오르는 운동도 필요하지만 크레인에 오른 사람을 살아 내려오게 하는 운동도 필요하다. 지지하고 격려하는 운동도 필요하지만 위로하고 보듬어 안아주는 운동도 필요하다.


김진숙 씨는 크레인 위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지금 주익 씨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하루를 보내고 주익 씨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잠을 자고 주익 씨가 살아생전 마지막 봤던 세상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저는 주익 씨가 못해 봤던 일, 너무나 하고 싶었으나 끝내 못했던 내 발로 크레인을 내려가는 일을 꼭 할 겁니다. 그래서 이 85호 크레인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더 이상 눈물이 아니라, 더 이상 한과 애끓는 슬픔이 아니라 승리와 부활이 되도록 제가 가진 힘을 다하겠습니다.”
이 힘에 우리의 힘을 보태야 한다. 날마다 내려오는 연습을 하는 그 사람이 살아 내려올 수 있도록.




4. 파란 나라와 빨간 나라



우리 아이는 지금 15개월이다. 아이를 키우다보니 지금 현재만큼 미래가 걱정이다. 일본 대지진에 이어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사고를 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전 세계적인 탈핵 움직임에도 원자력 르네상스를 부르짖는 이상한 나라, 핵발전소의 고장이 잇따르는데도 괜찮다며 안심하라고 강요하는 나라, 사계절은 옛말이고 열대 폭우가 내리는 나라에서 아이를 키워야 하니 걱정이 태산이다.


요즘 아이랑 같이 ‘뽀로로와 함께 노래해요’를 자주 본다. 동요가 쭉 나오는데 그 중엔 ‘파란나라’라는 동요도 있다. 대학 때는 이 노래를 ‘빨란 나라’로 바꿔서 부르기도 했는데. 사실 색깔이야 빨갛든, 파랗든 그게 뭐 그리 중요할까. 노래가사처럼 우리가 한번 해 보고 온 세상 모두가 손을 잡고 함께 바꿔갈 수 있다면.


사실 온 세상이 한 가지 색깔만 가져야 한다는 건 끔찍한 상상이다. 색깔보다 중요한 건 우리가 손을 잡고 어떤 나라를 상상하고 그 나라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간다는 점이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손을 잡고 있는가?

  1. 나는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강사도 아니고 교수도 아닌, 계약서도 없이 1년 마다 재계약을 하는 이상한 신분의 노동자이다. 대학이 O15B나 토이도 아닌데 객원교수라니... 정리해고, 산업재해, 이런 말을 할 수 없는 이상한 ‘공장’ 대학에서 일한다. 그런 신분이니만큼 눈치도 보지 않고 쓸데없는 요구에도 응하지 않지만 불안감은 어쩔 수 없고, 아이가 태어난 뒤에는 더욱더 그렇다. 한국의 대학이 변할 수 있을까? 큰 기대는 없다. 나는 동네의 도서관에서 반상근으로 일을 한다. 몇 년 전 강의를 했던 도서관의 인상이 강해서 그 동네로 이사를 왔다. 처음에는 동네 청년들 멘토를 하다, 도서관의 이런저런 일에 한발가락씩 담그다, 그냥 눌러앉게 되었다. 도서관에 어떤 책을 꽂고 어떤 책을 뺄지, 도서관이 커뮤니티 공간으로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게 내 몫이다. 재밌는 일은 일로 하지 말라는데 살다보니 일로 해도 재밌는 일도 있다. 매달 후원하는 단체를 세어보니 15개 정도 된다. 매달 30만원 정도를 회비로 낸다. 회비만 내지 않고 운영위원을 맡거나 이런저런 일을 돕는 단체들도 몇 되지만 회비와 마음으로만 지지를 보내는 단체들이 더 많다. 간혹 술 한잔 나누며 얘기도 나누고픈 활동가들도 많다. 사정이 어려워서 후원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도록 알바도 종종 뛴다. [본문으로]
다른 사람의 페이스북에서 아래의 사진을 봤다.


원전 사고 이후 일본 각지에서 측정된 세슘의 양이란다.
평년과 금년의 수치가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세슘의 반감기는 30년.
세슘을 마시며 살아야 하나.

바로 옆 나라 한국은 무조건 안전하니 안심하란다.
이런 상황이야말로 진정 파국이다.
'닥치고 정치'라는 구호만큼 절실한 구호는 '닥치고 반핵'이다.

일본에서도 녹색당이 창당될 것 같은데, 한국에서도 곧 녹색당이 창당될 것 같다.
반핵을 중심으로...
원자력과 反민주주의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만큼, 반핵이 가능하려면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적인 구조 모두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근본적인 변화가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가자...
우리는 중앙집중화된 세계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의 인식은 시대가 정한 에피스테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 중앙화된 것에 저항하는 지역화되고 경험적인 지식, 메티스의 저항은 계속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지방에 있는 출판사가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대구에서 '한티재'라는 출판사가 서서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아마도 권정생 선생님의 [한티재 하늘]과 무관하지 않을 출판사 이름이다.
[녹색평론]을 편집하던 팀이 대구에 남아 출판사를 꾸렸다.
대구에 가면 꼭 한번 들리고 싶은 '물레책방'과 더불어 지방에서 새싹을 틔우고 있다.
[근대의 아틀리에: 대구 근대미술 산책], [인문학을 만나다: 대구경북지역의 자생적 인문학 커뮤니티를 찾아서], [우리 시대의 몸/삶/죽음]에 이어 [비아캄페시나]를 출간했다.

예전에 변홍철 선생님이 서울에 왔을 때 잠깐 만나기도 했는데...
예상대로, 기대만큼 좋은 책을 출간하고 있다.
지금 읽고 있는 [비아캄페시나]는 무척 중요한 책이다.
"비아캄페시나는 부정의하고 지속가능하지 않은 생산과 무역의 모델을 바꾸기 위해 헌신하고 있다. 소작농과 농민들은 남북을 막론하고 어느 곳에서나 재정적, 사회적, 문화적 위기로 고통 받는다. 따라서 어느 곳에서건 우리는 더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농민사회를 만들기 위한 연대에 노력해야 한다. 소작농과 소농인 우리에게 패배는 없다. 우리는 강력하고 단호하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다수이다. 우리는 자신의 노동으로 가족들과 인류를 위해 안전한 식량을 생산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우리는 생명과 문화 양자 모두의 다양성을 소중히 여긴다. 미래는 우리의 것이다.
- 2000년 10월 3일 비아캄페시나의 '방갈로르 선언'"
이 선언에 비아캄페시나의 정체가 드러난다.
'한티재'이기에 이 책을 다룰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모든 게 수도권으로 집중된 우리 사회에서, 지방의 출판사들이 하나씩 문을 닫고 있는 상황에서 '한티재'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우리 사회의 메티스를 지켰으면 한다.
그런 점에서 얼마 전 원고를 청탁받은 부산의 문예지 [오늘의 문예비평]도 그런 메티스의 보고이다.
왠만하면 지방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의 청탁을 거절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 원고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된다.

'프레시안'에서 서평을 청탁받은 [작은 것들의 정치]가 집으로 배달되었다.
원제는 The politics of Small Things: The power of the powerless in dark times 이다.
번역된 제목은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과 관련이 있을까?
제목만이 아니라 내용도 그만 해야 할텐데 아직 읽지 않아 잘 모르겠다.
번역한 사람이 아는 사람이라 기대도 크다.


학기가 시작되어 다시 3과목을 진행하고 있다.
나의 대학생활 멘토는 현미선생이다.
낮은산출판사의 정우진씨가 보내준 만화책, 읽는 순간 진한 감동이 밀려왔다.
아,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대학선생이구나...
입과 말이 아니라 몸과 먹거리로 묵묵히 자신의 뜻을 알려주는...
찾아서 읽게 되는 만화책이다.
현미선생의 삶 역시 메티스의 체현이다.

나는 메티스를 품은 지식인으로 살고 있는가?
반성하게 되는 하루이다.
두 권의 책을 읽고 있다.

한 권은 내가 잠깐 들린 '현장'에서 언제나 '살고 있던' 조약골이 쓴 [운동권 셀레브리티](텍스트, 2011)이다.

용산의 레아, 홍대의 두리반, 강정마을, 내가 몇 시간 남짓 들린 곳에서 조약골은 살고 있다.
이 책은 그의 활동과 음악, 열정을 고스란히 담은 책이다.
좀처럼 듣기 어려운 그의 과거 이야기까지 등장하는...
제목을 왜 이렇게 지었을까, 좀 궁금하긴 하지만 제목과 동떨어진 내용은 아니다.
나중에 본격적인 서평을 한번 쓰겠지만 아쉬움은 '거리'이다.
자서전 형식의 글이 삶과 거리를 두긴 어렵겠지만 현장에서 사는 사람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고민이 담겨있었으면 훨씬 좋은 책이 되었을 것 같아 아쉽다.
그 치열한 현장이 날것으로 드러나지 않고 그의 시선만으로 정리되어 아쉽다.

다른 한 권은 내가 좋아하는 길동무이며 탁월한 문화비평가인 문강형준이 쓴 [파국의 지형학](자음과 모음, 2011)이다.

연재한 글을 모은 책인데 그가 미국에서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얼마나 열심히 읽고 듣고 보고 정리하며 사는지를, 미국에서의 삶에 매몰되지 않고 이곳과의 끈을 놓치지 않고 사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아쉬운 점은 그의 글에 '현장'이 없다는 점이다.
그가 보고 읽는 다양한 텍스트들이 우리가 사는 세계를 드러내고 해부하지만, 현장에 사는 사람이라면 묵직한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을 얘기들이 길게 부연설명된다.
그가 한국에 돌아올 날을 기대하게 되는 건 그에게 다시 현장이 주어졌을 때 폭발할 날카로움 때문이다.

독자이기에 가능한 상상이지만 이 두 권의 책이 하나로 섞이면, 현장과 비평이 하나로 섞이면 엄청난 폭발력을 가질 듯 싶다.
아직 기대할 게 많은 사람들이기에 아쉽지는 않다.

김중미씨가 문정현 신부님의 구술을 받아 쓴 [길 위의 신부 문정현, 다시 길을 떠나다](낮은산, 2011), [에코토피아]를 쓴 어니스트 칼렌바크와 마이클 필립스가 쓴 [추첨민주주의](이매진, 2011)도 곁들여 읽으면 좋을 책들이다.

아카이브 출판사가 보내 준 사진집 [사람을 보라](아카이브, 2001)는 감동적이다. 우리의 일상을 깨고 들어오는..

스테판 하딩의 [지구의 노래](현암사, 2011)와 에메 세제르의 [식민주의에 대한 담론](그린비, 2011)을 읽고 있는데 묵직한 느낌이다(그런데 66페이지에 불과한 세제르의 책은 가격이 만원이다. 꽤나 어이가 없는 가격이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튼튼한 지느러미로/ 나를 원하는 곳으로 헤엄치네. 돈이 없는 사람들도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나는 또 다시 바다를 가르네.” 루시드폴이 부른 ‘고등어’라는 노래의 가사이다.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울렁거린다. 고등어라는 존재가 주는 감동보다 그 존재를 바라보는 가수의 시선 때문이다. 고등어를 보며 “나는 참 바보다. 엄마만 봐도 봐도 좋은 걸”라고 노래하는 김창완의 시선과는 또 다른 따뜻함과 공감이 가사에 묻어난다.


어쩌면 사회운동, 인권운동도 고등어의 처지와 비슷하지 않을까? 나를 원하는 곳으로 헤엄쳐 가는 튼튼한 지느러미. 부자들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배불리 먹는 삶을 위해 자기를 아끼지 않고 바다를 가르는. 그런 존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누군가는 위안을 얻을 것이다.


허나 고등어가 단지 먹히기 위해 태어난 존재는 아닐 것이다. 그 나름의 삶이 있고 꿈도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평생을 투쟁으로 살아온 사람들에게도 해방이나 변혁이라는 말로만 설명되지 않는 꿈과 소망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설명되지 않는 꿈과 소망에 관해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새로운’ 사회운동의 출현?



내가 이 연재를 시작한 이유 중 하나는 새로움에 대한 거부반응이었다. 새로운 사회운동이 출현했다는 환호를 나는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을 믿어서도 아니고 어제와 같은 오늘은 없다는 말을 싫어해서도 아니다. 새로운 것의 등장을 기대하지만 그 새로움이 아무런 기반 없이 출현했다고 믿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인류는 끊임없이 새로이 태어난다. 사상가 아렌트(H. Arendt)가 말한 ‘탄생성(natality)’의 의미처럼, 새로운 사람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인류 자체(human beings)가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새로운 인간의 탄생이 새로운 사회의 출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새로이 태어난 인간은 이미 태어난 사람과 세계(world)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이전 세계를 완전히 파괴하지 않는 한 완전한 새로움은 없다. 특히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사회운동이 그런 새로움을 취하기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위험하다고 나는 믿는다.


예전에는 새로움에 들뜨는 분위기를 단지 갈망이라 생각했다. 워낙 현실이 갑갑하니 뭔가 새로운 게 나타나길 기대하는 사람들의 흥분이라 여겼다. 그런데 요즘엔 생각이 좀 달라졌다. 새로운 것에 대한 환호는 그 새로운 것을 자신의 기반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의 의도로 느껴진다. 특히 지식인들에게서 그런 의도를 찾아볼 수 있다. 새로운 것이라며 이전과 다른 양식을 만들고 그것을 설명하고 주도하는 과정에서 지식인들의 욕망이 개입하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새로움에 대한 환호를 언제나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촛불집회나 희망버스는 분명 기존에 찾아보기 ‘어려웠던’ 운동이다. 하지만 보기 어려웠던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 역사를 되짚어보면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자존심을 버리지 않고 권력과 자본에 맞섰던 수많은 사건들을 찾을 수 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방법은 새로워지겠지만 그 뜻과 과정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그런 사건들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예를 들어 1924년의 암태도 소작쟁의는 최초의 소작쟁의이자 성공적인 쟁의로 불린다. 부조리한 소작료를 거부하는 불납동맹이 결성되고, 지주측이 이를 탄압하고 식민경찰이 간부들을 구속시키자 소작인들은 면민대회를 열고 저항에 나섰다. 이들은 소작인들이 구속된 목표경찰서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으로 몰려갔고 석방하지 않으면 법정에서 굶어죽겠다고 결의했다. 남녀노소 모두가 굶어죽기를 각오한 아사동맹이 4일을 넘기자 언론이 이 사건을 보도하기 시작했고, 전국에서 모금운동이 벌어지고 변호사들이 변호를 자처했다.


작가 송기숙은 소설 《암태도》에서 당시 소작인들의 고민을 글로 복원했다. “요새 세상에는 싸운다는 것이 그냥 버티는 이렇게 버티는 것만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한쪽에서는 이렇게 버티면서 또 한쪽으로는 신문으로 세상에다 대고 왜장을 치고, 양수겹장으로 몰아쳐야 해요. 개명한 세상에 산다는 것이 뭡니까? 연락선 놔두고 풍선 타고 다니던 생각만 하면 그만치 세상에서 뒤떨어지는 것이 됩니다.…옛날 동학난리 때도 요새같이 신문만 있었더라면 일이 그렇게 전라도 쪽에서만 일어나다 말지는…….” 기술은 달라졌지만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조건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자세히 보면 사람들을 동요시키던 논의꺼리도 변하지 않았다. 《암태도》에서 소작인들은 투쟁을 방해하는 사람들에 관해 회의를 열며 이렇게 얘기한다. “저자들하고 실랑이가 벌어졌을 때 부애난다고 혹시라도 저 작자들한테 손을 대서는 큰일납니다. 악담은 얼마든지 퍼부어도 좋지만 손을 대서는 절대로 안돼요. 혹시 저쪽에서 먼저 손을 대더라도 그냥 맞아요. 저놈들은 내중에 가서는 이쪽에서 그렇게 손을 대도록 수를 쓸지도 모릅니다. 경찰을 불러들일 언턱거리를 만들자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부애난다고 때리는 것은 저자들 수에 말려드는 것이고, 같이 치고 맞더라도 경찰을 불러들일 구실이 되기는 마찬가지니까 결국 이 쪽이 지는 것입니다. 이 점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1924년의 일이니 무려 87년 전이다. 허나 지금의 상황과 얼마나 비슷한가?


암태도 소작쟁의 당시 소작인들이 내세웠던 조건은 잡혀간 소작인들의 석방과 소작료율을 7, 8할에서 4할로 내리는 것이었다. 당시 5, 6할을 하던 소작료를 4할로 내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불납동맹, 아사동맹을 각오했던 암태도민의 저항은 그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지주측은 소작료율 인하와 함께 2,000원이라는 큰 돈을 소작인들에게 기부해야 했다. 희망버스와 관련해 불가능한 요구라니, 산업계의 동향을 파악하지 못한다느니 떠들어대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우리 역사이다.


마찬가지로 1919년 3․1운동 때 사람들이 외쳤던 “대한독립 만세”는 불가능한 구호였다. 어쩌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라는 구호보다 훨씬 더 실현 불가능한 구호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국에서 그 구호를 외친 수십만 명의 민중들은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을까? 지금처럼 조직을 주도하는 사람들도 없는 상태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구호에 자신의 불만과 꿈을 걸었다. 구호는 하나였지만 그 속엔 민중들의 다양한 소망과 꿈이 담겨 있었다. 일제 관리의 못된 행동에 대한 불만, 무거운 세금과 부역에 대한 불만, 인민의 권리를 무시하는 정책에 대한 분노, 강제로 묘목을 심게 하는 것에 대한 분노, 독립된 삶을 살고자 하는 꿈, 공동체와 나라를 다시 세우려는 꿈 등이 그 구호에 뒤섞였다.


그 불가능한 구호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그 다양한 꿈들을 담을 수 있을까? 제 아무리 운동경력이 화려하고 오래 되었다고 한들, 아무리 많은 지식을 습득했다고 한들, 아무리 대단한 비전을 갖고 있다고 한들, 하나의 구호로 터져 나오는 그 수많은 꿈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는 사회를 바꿀 수 없다. 수많은 시민의 이름을 팔아도 그는 홀로 있는 자일 뿐이다. 홀로 있는 자는 운동을 하는 자가 아니다.



운동과 정서, 연대



나는 문제를 추상화시키면서 자신들이 그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에 관한 답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 사회를 바꾸는데 어찌 모범답안이나 정답이 있을까.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얘기는 반갑지만 옳다, 그르다의 관점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밥맛이다. 누구나 훈수를 둘 수 있지만 아무도 자신의 생각을 정답이라 주장해서는 안 된다. 정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운동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다면 그 과정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 당연히 이념과 조직이 사람들을 움직인다. 인적․물적 자원을 조직하고 동원하는 단체도 필요하고, 그런 단체가 내세우는 이념도 중요하다. 그런데 관변단체가 폭넓게 퍼져있고 노동조합과 같은 기본조직조차 제대로 조직되지 않은 한국사회에서 조직화되지 않은 시민들을 움직이는 에너지는 이념이나 단체의 힘으로만 구성되기 어렵다. 만일 이념이나 조직만이 문제라면 김대호나 김기원이 지적했던 조선산업계의 동향이나 실현가능한 정책이 중요할 수 있다. 허나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과 몸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면?


식민지 시기 농민운동과 관련된 책을 뒤적이다 재미있는 구절을 봤다. 3․1운동 당시 “주변 마을이 다 하니까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라는 생각에서 이른바 ‘체면시위’라는 것이 등장했다고 한다. 이 체면시위의 규모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체면이라는 것도 사람들을 움직이는 중요한 동기이다.


지금 우리라고 해서 다를까? 집회 때마다 나부끼는 깃발도 어느 정도는 그런 체면을 상징한다. 그리고 ‘나도 그곳에 있었다’고 증명하고 싶어 하는 ‘인증’욕구도 그런 체면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체면 차리기’라고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누구나 체면을 세우려 드는 건 아니고 체면이 밥 먹여주나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기 때문이다. 체면을 생각한다면 평화를 깨고 남의 삶터에 침입하는 경찰이 되지 않을 것이고, 어른의 멱살을 잡는 용역깡패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체면을 세우려는 용기는 품위있는 사회를 만든다. 단 하루라도 품위있게 살고자 하는 체면이 하루하루의 일상이 될 때 운동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어떤 사건에 대한 분노나 공감도 사람들을 움직인다. 한 사람이 129일 동안 높은 크레인에 올라가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외쳤건만 기업과 세상은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까지 그 목소리를 무시했고 그 사실에 사람들은 분노했다(그 사연을 소개한 故정은임 아나운서의 멘트가 아직도 인터넷을 떠다닌다). 시간을 더 앞으로 돌려보면 1991년 5월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가 안양병원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많은 노동자들이 분노했다. 그러니 지금 85호 크레인에 올라가 있는 사람은 한 명이 아니다. 김진숙의 어깨 위엔 여러 사람들의 짐과 꿈들이 실려 있다.


분노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지 말라고 하는 건, 냉정하게 이성을 차리고 이해관계를 따지자고 얘기하는 건 그 분노의 원인을 인정하지 않는 위선이다. 그 속에는 공감하지 않고 타자의 꿈을 배제하려는 폭력의 싹이 똬리를 틀고 있다. 반면에 공감이나 정서를 담은 합리성은 삶의 다양성을 받아들인다.


그런 합리성에 바탕을 둔 위로의 마음도 사람들을 움직인다. 누군가는 크레인 위에 올라 있어야 희망버스가 출발할 수 있다. 그 누군가가 꼭 나일 필요는 없지만 그 버거운 짐을, 자신의 다른 소망과 꿈을 포기하고 그 짐을 지려는 사람을 위로하고픈 마음. 평생을 투사로 싸워주길 기대할 수도 있지만, 그리고 그이가 삶을 선택할 수 있고 때론 쉴 여유를 가졌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다. 홀로 크레인에 올라간 이를 보며 우리가 건네고 싶은 그 많은 말들이 희망버스로 이어졌을 것이다. 먼 발치에서나마 그 얼굴 한번 보고 건강하세요, 꼭 이기세요, 라고 말하고픈 그 맘이, 나도 힘들지만 함께 힘을 내요, 라고 말하고픈 그 공감이 희망버스를 움직이는 에너지이다. 또 다른 현장에서 열심히 싸우는 사람들이 당신의 승리로 우리도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연대의 마음이 사람들을 움직인다. 희망버스의 희망은 하나일 수 없다.


그런데 소위 ‘운동권’은 위로에 인색하다. 고맙다, 수고했다며 손 한번 꼭 쥐어주고 등 한번 두드려주면 될 텐데 그런 정서에 익숙하지 않다. 운동의 결과와 상관없이 그 운동을 책임졌던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떤 말을 건네고 있을까? 앞서 루시드폴의 ‘고등어’라는 노래를 얘기했는데, 그 노래의 후렴구는 이렇다. “나를 고를 때면 내 눈을 바라봐줘요. 난 눈을 감는 법도 몰라요. 가난한 그대 날 골라줘서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오늘 이 하루도.”


위로는 동정이 아니다. 고맙고 수고했다고 얘기하는 게 어찌 동정일까. 동정은 사람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지만 위로는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위로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감정, 즉 같이 아파하는 감정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내 상처를 걱정하는 마음이 우리 상처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퍼진 것이 위로이니 위로는 서로의 마음을 분리시키지 않고 연결시킨다. 위로는 계속 꿈을 꾸자며 서로를 다독인다. 서로에 대한 위로 없이 연대가 가능할까?



다양한 삶과 꿈이 만나는 장



2008년 촛불집회 때 참여자들이 이랜드나 비정규직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며 운동의 한계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똑같은 논리로 따지면 지금 희망버스를 보며 버스가 고리핵발전소로 가지 않는다, 포이동으로 가지 않는다며 볼멘소리가 나야와 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얘기가 없는 걸 보면 노동이슈가 다른 모든 사안보다 중요하다는 고정관념이 있는 듯하다.


우리는 하나의 꿈을 서로에게 강요하는데, 이 꿈이 다른 꿈보다 앞선다며 설득하는데 익숙하다. 힘들 때 서로를 위로하기보다는 서로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데 익숙하다. 조그만 차이도 불편해하며 상대방을 설득시키려 한다. 대화와 토론은 서로의 꿈과 소망을 나누는 게 아니라 내 꿈과 소망을 상대방에게 설득하는 과정이다. 내 귀에 들리는 소리만 들으니 아무리 토론을 많이 해도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다.


당연히 노동이슈는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 꿈을 꿀 수 없다. 우리의 일상이 어찌 노동으로만 정리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꿈이 열심히 일만 하는 사회도 아니고. 그러니 이 사회에 살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꿈이 다양한 사건들로 녹아들어가야 한다.


그러려면 서로의 꿈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내 앞가림하기도 바쁜 시기라고 얘기하지 말고 내 앞만이 아니라 다른 운동의 앞도 봐야 총체적이고 장기적인 비전을 세울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이야말로 농민운동과 노동자운동이 만나야 할 때이다. 도시에서 계속 비정규직, 일용직 노동하며 살아라가 아니라 농촌에서 땅을 일구며 살 수 있는 기회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게 보면 노동운동의 중요한 이슈는 땅과 종자를 지키는 농민운동이어야 한다. 그리고 도시빈민이나 노동자의 상당수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온 농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노동자의 조건은 농민운동의 중요한 사안이기도 하다. 또한 노동자의 일상이 공장이나 사무실에서만 이루어지지 않고 생활공간에서도 이루어지니 노동운동과 주민운동, 풀뿌리운동의 거리도 멀지 않아야 한다. 그러려면 서로를 바라볼 때 조금 더 자세를 낮추고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김진숙 역시 이렇게 얘기했다. “민들레에게 올라오라고 할 게 아니라 기꺼이 몸을 낮추는 게 연대입니다. 낮아져야 평평해지고 평평해져야 넓어집니다. 겨울에도 푸르른 소나무만으로는 봄을 알 수 없습니다. 민들레가 피어야 봄이 봄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생애 처음 민들레를 기다리는 봄. 이 설렘을 동지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이번 글이 마지막 연재이다. 그동안 심심한 글을 참고 읽어준 독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 참고한 글

김진숙, 『소금꽃나무』(후마니타스, 2007년)

송기숙, 『암태도』(창작과비평사, 19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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