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지는 못하더라도 괴롭힐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 있다.
이게 요즘 나의 모토이다.

강자와 맞붙어 싸울 때 가장 큰 두려움은 질 수밖에 없다는, 그래서 적당히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투기는 사라지고 적당한 변명만이 남는다.
그리곤 더욱더 냉소적이 된다.

승리가 아니라 괴롭힘이 목적이라면 어떨까.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란 걸 보여주겠어.
너네들이 지긋지긋해할 정도까지 내가 괴롭혀주마.
그러다보면 강자도 자기 마음대로 세상이 굴러가진 않는다는 걸 조금은 느끼게 되고, 앞으로 똑같은 일을 벌이더라도 한번쯤은 이렇게 해도 괜찮을지를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면 나는 냉소보다 비판의 힘을 더 믿게 되지 않을까?

승리하지 못한다면 그만 둬라가 아니라 이기지 못하더라도 처절하게 괴롭히자.
부끄럽지 않게 세상을 산다는 건 그런 거다.
 

지금 서울시에서는 학생인권조례를 주민발의로 제정하려는 서명운동이 한창이다. 조례안을 발의하기 위해 필요한 서명인 수는 만 19세 이상 유권자의 1%, 약 8만 2천명이다. 수치로만 보면 1%가 그리 부담스러워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8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시민들에게 서명을 받을 곳도 마땅치 않고 서명을 받는 형식도 매우 까다로워 애써 서명을 받아도 무효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웬만한 광역자치단체에서 주민발의로 조례를 제정한다는 건 기적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동안 주민발의로 조례를 제정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서울시에서도 2004년 3월 약 14만 6천명의 서명을 받아 학교급식조례제정청구서가 제출되었고, 2010년 3월에도 서울광장조례개정안이 주민발의로 청구되었다. 가끔은 현실이 되기에 이런 사건은 불가능이 아니라 기적이라 불린다. 1999년 8월 지방자치법이 개정되면서 도입된 주민발의제도는 조례를 제정하고 개정할 시민의 권리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참여민주주의제도라는 평가를 받는다.


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이 한창인 와중에 다른 한편에서는 무상급식을 반대하기 위해 오세훈 서울시장이 주민투표 실시를 주장하고, 실제로 2011년 1월 보수단체들이 본격적인 주민투표 청구운동에 들어갔다. 주민투표를 청구하려면 6개월 이내에 서울시 유권자의 5%, 약 41만 명의 서명을 받아야 하기에 좀 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보수세력이 제도를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2004년 7월에 주민투표법이 제정된 이후 시민들이 직접 주민투표를 청구한 사례는 한 건도 없고 모두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청구했다는 점에서 주민투표법의 한계는 분명하다. 허나 주민투표법은 지방자치단체의 주요결정사항에 관해 주민의 직접참여를 보장해서 행정의 민주성과 책임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그냥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조건 좋아하기에도 애매한 닭갈비이다.


주민발의제도와 주민투표제도는 주민소환제도와 함께 참여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린다. 이 제도들은 선거에서 대표를 선택하는 수동적인 선택을 넘어 시민이 직접 법안을 발의하고 정책을 결정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때문이다. 허나 우리 현실에서는 이런 민주주의의 꽃이 시들시들하고 아름답게 피어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참여민주주의의 역설


참여민주주의의 ‘역설’이라는 게 있다. 민주주의는 항상 모든 사람이나 사회적 약자에게 유리할 것 같지만, 조직화된 세력이 선거과정에 개입해서 여론을 몰아가거나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들이 서로 야합하면 오히려 다수의 시민들이나 약자에게 불리한 결정이 내려질 수도 있다. 이런 결정이 내려지는 과정 자체는 민주적인 절차를 따르기 때문에 그 정당성을 문제삼기도 어렵다. 결국 참여민주주의를 통해 민중이 지배하는 게 아니라 민중이 지배를 당하는 역설이 발생한다.


이처럼 참여가 민중의 권리를 강화시킬 수도 있지만 때로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기득권층의 결정을 정당화하며 악용될 수도 있다. 1인 1표로 계산되는 대의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는 ‘쪽수’의 힘이기 때문이다. 이런 힘이 중요한 사회에서는 당연히 과정이 무시된다. 수능시험 한 번에 그동안의 노력이 판가름되듯이, 선거 당일의 투표결과에 따라 시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들이 내려진다.


민주화의 속도가 빠르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이런 역설이 한국사회에 등장하지 않았지만 미국같은 나라에서는 이미 현실이다(이를 빌미삼아 직접민주주의를 비판하는, 진보를 가장한 보수학자들도 더러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영화배우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주지사로 일했던 캘리포니아주를 예로 들 수 있다. 민주당 주지사를 주민소환제도로 소환해서 해직시키고 공화당의 슈워제네거가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미국에는 서명과 운동을 대신하는 전문회사들이 있을 정도이니 돈만 있으면 사적인 이해관계를 민주적인 여론으로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에는 민관협력사업이나 마을만들기 등을 통해 시민참여가 시민동원으로 변해버렸다는 지적도 있다. 민주적인 제도가 ‘민중의’ 지배가 아니라 ‘민중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시킨다.


교사의 인권과 학생의 인권이 서로 충돌한다는 전제에서 시작하면 인권의 의미가 뒤죽박죽되듯이, 참여의 성격을 가리지 않으면 민주주의도 뒤죽박죽된다. 한 때는 신새벽에 남 몰래 쓰는 단어가 민주주의였고, 참여민주주의제도가 도입되면 세상이 바뀔 거란 기대도 있었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런 기대를 배반하고 있다. 그리고 배반을 목격하면서 우리는 현실을 비관한다. 허나 정말 현실의 문제일까?


이란의 마지드 라흐네마(Majid Rahnema)는 참여를 “교묘한 통제의 방법”이라 부른다. 원래 참여는 “다르게 살고 다르게 어울린다”는 윤리적인 말이었다. 그런데 상향식 참여를 강조하며 시민의 힘을 동원하려는 정부의 전략은 참여의 의미를 대규모 공사나 정부를 지지하는 대중집회로 만들었다. 이렇게 되면서 조작된 참여와 자발적인 참여는 구분되기 어려워졌다.


특히 라흐네마는 경제발전 영역에서 참여가 더 이상 정부에게 위협으로 여겨지지 않을 뿐 아니라 외려 정치적․경제적으로 매력적인 구호로 변하고 “새로운 투자수단으로, 더 큰 효율성을 낳는 수단”, “훌륭한 기금마련 수단”, “민간부문을 개발사업에 곧장 끌어들일” 방법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한다.


사실 이런 문제점은 참여민주주의제도가 처음부터 가진 한계였다. 왜냐하면 참여민주주의는 정부가 시민의 참여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에는 ‘정부=공권력, 민중=권력없는 무기력한 존재’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참여민주주의는 정부가 자신의 권력을 쪼개어 시민에게 넘겨주는 것을 참여라고 불렀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인민주권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권력은 정부가 아니라 민중에게 있다. 제 아무리 억압적인 지배를 당하는 민중이라도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그에게는 권력이 있다. 제도로는 잡히지 않지만 힘으로 느껴지고 사람들 사이에 울림을 가져오는 그런 정치적인 행위가 있다. 이런 행위를 권력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왜 우리는 그런 행위를 권력이라 부르지 않을까? 라흐네마는 이를 “유럽 좌파의 전통에서 나온 권력 관념에 크게 영향을 받아 참으로 문제가 있는 권력 관념이 전통적․향토적 권력관념을 밀어냈다”고 지적한다. 때로는 참여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조차도 민중이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려 들면 거북해하거나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상식을 가진 풀뿌리 민중이 선구적 지도자들이 내놓은 해법에 결국은 동의하지 않을 때 민중이 협조하지 않거나 노골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아직 의식이 깨지 않았거나 반혁명 세력에게 놀아나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 어떤 명분을 대더라도 이런 모습은 민중의 권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비민주적인 태도이다.


그러니 참여민주주의라는 세련된 말에는 모순이 담겨 있다. 민주주의가 제 몫을 다하려면 우리를 세뇌시킨 이런 잘못된 상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정부에게 권력을 위임한 것이지 정부가 스스로 권력을 만들지는 못한다.


만일 민주주의가 민중의 지배를 보장한다면 그 사회의 법을 제정하고 바꿀 권리도 민중의 손에 있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법치주의가 성립될 수 있다. 인민주권을 전제하지 않은 법치주의는 기득권층의 기만적인 통치술일 뿐이다.



법에 가로막힌 주민발의, 정부에 가로막힌 주민투표


정부가 모든 폭력을 합법적으로 독점한 근대국가에서 법을 제정하고 바꿀 힘은 민중의 손에 있지 않다. 민중이 ‘합법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입법의 영역은 그나마 조례 정도이다. 미흡하지만 이런 점에 조례의 중요성이 있다. 주민이 발의할 수 있는 조례는 민중이 자기 자신을 입법자로 여기도록 만든다. 지역의 법인 조례는 입법자와 그 법의 영향을 받는 사람이 일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앙의 법률과 다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주민발의로 조례를 만드는 힘은 지방의회나 지방의원이 아니라 지역사회 곳곳의 공론장과 시민에게서 나온다. 그리고 단순히 조례만 제정하거나 개정하는 게 아니라 그 운동 과정에서 많은 소규모 공론장들이 만들어지고 그 이후의 다양한 운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점 때문에 한국의 중앙정부는 주민발의에 강력한 금지조항을 달아두었다. 지방자치법 제 13조는 ‘법령을 위반하는 사항’, ‘지방세와 사용료, 부담금의 부과․징수 또는 감면에 관한 사항’, ‘행정기구의 설치․변경에 관한 사항 또는 공공시설의 설치를 반대하는 사항’에 관해 주민발의를 할 수 없도록 금지하고 있다. 즉 시민들이 아무리 노력해서 조례를 제정/개정하더라도 그 조례가 법률을 어기면 자동적으로 폐기된다. 우리농산물을 쓰도록 규정한 학교급식조례안이 세계무역기구(WTO)협정을 위반한다며 거부되거나 초․중등교육법을 개정해서 학생인권조례안을 막으려는 정부의 태도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렇게 민주주의를 거스르는 태도가 계속 나타나는 건 조례가 중앙의 법률을 넘어서지 못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렵사리 주민발의를 통해 조례안이나 개정안을 제출하더라도 지방의회의 심의를 거치면서 그 내용이 바뀌는 경우도 많다. 그동안 주민발의된 조례들을 살펴보면, 발의된 원안대로 지방의회에서 의결되는 사례가 드물고 대부분이 수정되어 의결된다. 시민들이 온 힘을 다해 서명을 받고 조례안을 제출해도 지방의회를 거치며 빛바랜 개살구로 변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한계는 주민투표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주민투표법은 법령에 위반되거나 재판중인 사항, 국가 또는 다른 지방자치단체의 권한 또는 사무, 예산․회계․계약 및 재산관리 사항, 지방세․사용료․수수료․분담금 등 각종 공과금의 부과 또는 감면에 관한 사항, 행정기구 설치․변경, 공무원 인사․정원 등 신분․보수에 관한 사항, 동일한 사항에 대하여 주민투표가 실시된 후 2년이 경과되지 아니한 사항 등에 대해 두루두루 주민투표를 금지하고 있다. 그리고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장은 주민투표를 쉽게 요구할 수 있지만 시민들이 투표를 청구하기는 매우 어렵게 만들어 놓고 있다. 그래서 주민투표제도가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정책을 합리화하거나 정책에 면죄부를 주는 제도로 악용될 수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이렇게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서도 자신을 민주적이라 포장하는 제도들이 시민의 ‘착각’을 유도한다. 이 제도들은 시민이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하기는커녕 자신의 한계를 깨닫도록 만든다. 한국사회에서 “해봐도 소용없다”는 회의주의는 타고난 본성이 아니라 학습된 경험이다. 민주적이라 평가되는 제도들도 이런 경험을 바로잡기는커녕 그것을 강화시키곤 한다.


제도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필요치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제도의 변화가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고 그런 과정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수단일 수 있지만 제도는 언제나 악용될 위험을 항상 가진다. 그래서 직접행동의 정치가 중요하다. 그런 제도를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야 제도가 원래의 취지를 실현할 수 있다. 그리고 때때로 직접행동은 제도 없이도 기적을 일으킨다.



왜 직접행동이 필요한가?


주민투표법이 제정되기도 전에 이미 시민들은 주민투표를 시작했다. 즉 제도 이전에 이미 정치행위가 있었다. 2000년에 고양시장이 백석동에 55층의 주상복합건물을 세우려 하자 시민들은 이에 반대해 주민총회를 열고 자발적으로 주민투표를 실시했다. 고양시에 사는 세대 중 43.3%가 투표에 참여했고(그 전해의 고양시장 보궐투표 참여율은 23.1%였다), 88.05%의 시민이 건물신축에 반대했다. 비록 법적인 효력을 가지지 못했지만 시민들은 자신들의 뜻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지방자치단체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던 도시계획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2003년과 2004년의 부안방폐장(방사성폐기물처리장)반대운동에서도 주민투표가 정부의 근거없는 비방을 없애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앙정부가 온갖 강압과 회유, 속임수를 썼지만 시민들은 소규모 공론장을 형성하며 자기 목소리를 냈고 결국 외부의 시민단체와 연대해 주민투표운동을 벌였다. 이 투표 역시 72.04%의 시민이 참여했음에도 법적인 효력을 갖지 못했지만 부안시민의 91.83%가 방폐장에 반대한다는 점을 증명했다.


고양시와 부안의 사례에서 보이듯 제도 없이도 시민들은 기적을 일으켰다. 아니 어쩌면 제도가 없었기에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민들은 ‘제도가 없음’을 통해 그 제도의 정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온 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부안의 주민투표과정을 지켜봤던 한 활동가의 말이 이를 증명한다. “주민투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민들이 준비해야 했습니다. 참여하지 않으면 주민투표가 성사될 수 없었기 때문에 더 많은 주민들이 참여했습니다. 우편요금을 아끼기 위해 자원봉사자들이 2만 가구가 넘는 집들로 투표안내문을 일일이 전달했습니다. 투표에 필요한 투표함, 기표대도 모두 주민들이 직접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참여의 폭과 열기는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전국의 시민사회와 종교계가 연대했습니다. 40명의 변호사들이 부안 주민투표의 성사를 위해 투표소마다 배치되어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전국의 시민사회와 종교계에서 6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부안 주민투표의 실무를 돕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시민들은 자신의 경험을 변화시키며 권력이 제도에 있지 않고 자신들에게 있음을 증명했다. 그렇기에 시민은 정치의 수동적인 대상으로 머물지 않고 정치의 능동적인 주체가 될 수 있었다. 이런 참여는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주민투표에서의 참여와 질적으로 다르고, 이런 참여야말로 민주주의를 실현할 권력이다.


제도와 운동의 관계를 설명한 말 중에서 나는 함석헌 선생의 비유를 가장 좋아한다. “육신이 사는데 집 옷이 있듯이 제도란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울타리다. 집은 닫기운 것이요, 닫겼기 때문에 집이지만 집 안에 오래 있으면 공기가 흐리고 독소가 생겨 사람이 죽게 되듯이 제도는 고정한 것이요, 고정한 것이기 때문에 사회생활을 가능하게 하지만 제도가 오래면 사회는 반드시 해를 입는다. 그것은 생명은 쉴 새 없이 자라는 것인데 제도는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회를 언제나 건전하게 발전시키려면 제도를 끊임없이 고쳐야 한다.” 집이나 옷에 몸을 맞추는 게 아니라 우리 몸에 집이나 옷을 맞춰야 한다.


민주적인 제도를 얘기하는 전문가들은 많지만 더불어 함께 시민을 만들려는 시도는 부족하다. 이런 상태라면 아무리 민주적인 제도라 하더라도 금방 생명력을 잃고 화석처럼 굳어져 새로운 민주주의의 등장을 가로막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직접행동을 벌이는 시민들 속에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고, 민주적인 제도는 그런 권력의 뒷받침을 받을 때에만 참뜻을 실현할 수 있다.



※ 참고한 글


하승우, 『참여를 넘어서는 직접행동』(한양대출판부, 2004)

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생각사, 1979)

볼프강 작스 외, 『반자본 발전사전』(아카이브, 2010)

김현․이호, “주민자치”, 시민의 신문 편집부, 『한국시민사회운동 15년사: 1987~2002』(시민의 신문, 2004)

하승수, “생명과 평화, 자치의 공동체로”, 《빛두레》제 659호(2004).


우리 각시는 내가 흉내내지 못할 글을 쓴다.
글을 읽다보면 그 감정 속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우리 각시가 <시사인>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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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 어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울 때가 있다. 경기도 성남시 단대동 철거 현장에서 준우란 아이를 만나던 날도 그랬다. 아파트 건설 현장 펜스에 기대 세워진 판잣집. ‘여기 사람이 살고 있다’라는 현수막이 없었다면 혹한에 장사를 접은 포장마차인 줄 알았을 그곳에 철거민들이 산다. 한낮이건만 빛 한줌 들어오지 않고 바람만 피했을 뿐 말할 때마다 입김이 서리는 천막 안에서 준우는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을 물어도 아이는 입을 열지 않는다. 농담을 건네도 웃지 않는다.

다른 이를 통해 알았다. 아이의 이름이 준우라는 것도, 올해 열한 살이 됐다는 것도, 그리고 아빠 김창수씨가 용산 참사로 구속된 이후 그 충격에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도. 김창수씨는 2009년 1월 용산 망루에 올랐다가 4년형을 선고받았다. 준우 엄마는 화를 참을 수 없다고 했다. 한순간에 집을 빼앗긴 것도 기가 막힌데 남편을 교도소에 보내고, 노모를 모시며 어린 두 아이를 홀로 키워야 하는 현실이 너무 가혹하다고 했다. 우리만 살기도 벅찬 세상에 왜 남편은 용산 철거민들을 돕겠다고 망루에 올랐는지, 내쫓으면 사라지면 될걸 왜 우리도 사람이라고 외쳤는지. 때로는 제 발로 사지에 들어간 남편이, 용산 철거민들이 원망스럽다. 슬픔과 무기력은 사라지지 않고, 수면제 없이는 잠들지 못한다.

   
그들을 보고 있노라니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떠올랐다. 회사 측의 정리해고에 맞서 77일간 파업을 벌이던 2009년 여름, 쌍용차 노동자의 아내들과 아이들도 그런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빠의 긴 부재에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엄마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이들은 경찰만 보면 엄마에게 숨으라고 했다. 구사대가 내뱉는 욕을 배웠고, 막대기와 돌멩이 던지는 것을 배워 소꿉장난을 했다.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평생 씻지 못할 죄를 지은 것 같다며 가슴을 쳤다.

이겨야만 했던 싸움은 패배로 끝났다. 노동자 90여 명이 구속됐고 파업 참여 노동자들은 민사소송에 휘말리면서 빚더미에 앉았다. 해고된 이들은 생활고에 아이의 우유를, 학원을 끊었다. 누군가에겐 ‘지난 사건’이 이들에게는 살아내야 하는 시간이었고, 오늘도 계속되는 삶이다. 혹독한 삶의 무게에 지난 2년간 쌍용차 노동자 다섯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 남의 일이라며 뒷짐만 져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얘기한다. 혹독한 세상, 안될 일에 미련 두지 말고 빨리 손 털라고. 부모의 무책임한 행동에 아이들만 상처받는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평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들을 돌아봤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정부와 지역사회가 이들을 보살피고 보호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오히려 정부는 자신들의 소관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고, 사법부는 ‘법대로 했다’는 주장만 되풀이할 뿐이다. 건설회사는 계산기만 두들기고, 많은 어른들은 남의 일이라며 뒷짐을 진다.

발전과 경제성장만이 화두인 세상에서 내몰리는 사람은 점점 많아지는데,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는 이들의 고통과 그 가족의 아픔은 오롯이 그들 몫이다. 사회적 고통이 되지 못하고, 화두가 되지 못한다. 얼마나 서글픈 시대인가. 싸울 수밖에 없는 현실도 서러운데, 그 과정에서 생긴 상처도, 분노도, 죄책감도 다 그들 몫으로 고스란히 남겨지는 세상은.

언젠가 아이들이 물을 거다. ‘정리해고’ ‘강제철거’ ‘승자독식’이 무슨 뜻이냐고. 그때 우리는 이 말들의 의미를 설명해줄 수 있을까? 발전·경제성장이라는 명분 아래 집과 부모를, 동심을 빼앗긴 아이들이 있다는 걸 이해시킬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외면해야 했다고, 우리 가족이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말해야 할까? 오늘도 준우는 아빠를 기다리고, 수많은 준우의 부모들은 망루에, 타워크레인에 오른다.
 
 
<정치의 발견>
박상훈 지음·폴리테이아·2011

정치에 대한 날선 비판은 넘쳐나지만, 우리 사회에서 어떤 정치를 원한다는 얘기는 듣기 쉽지 않다. 그 점은 이른바 진보정당이 등장한 뒤에도 별로 달라진 바 없다. 그러나 정치를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으론 좋은 세상을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정치가 살아나야 좋은 삶을 꿈꿀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정치의 발견>은 여러 가지 고민거리를 던진다.

<정치의 발견>은 몇 가지 장점이 있다. 보통 정치를 다루는 책은 자신의 논리를 장황하게 설명하는데, 이 책은 말하려는 바를 간결하고 분명하게 드러낸다. 정치는 현실 세계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벌이는 활동이기에 정해진 이념이나 노선에 따라 진행되지 않는다. 근대 사회에서 정치는 선거와 정당을 중심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제도와 조직을 민주적으로 만들고 퇴화되는 것을 막으려면 ‘지도자의 역할’, ‘정치가의 리더십’이 중요하다. 정치가의 리더십은 의사소통과 말의 힘을 통해, 일상생활의 경험과 언어를 통해 발휘된다. 진보정치는 권력을 거부하지 말고 오히려 권력을 잘 활용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200쪽을 조금 넘긴 분량에 저자의 주장을 잘 담았다.
 
정치와 진보

또 다른 장점은 독자층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진보정당 사람을 대상으로 진행된 강의를 정리했기에, 독자층도 ‘진보파’이다. 어정쩡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고 진보파에 대한 불만과 충고를 과감하게 쏟아낸다. 목적만을 강조하는 진보파에게 이 책은 “좀더 정치적이고 좀더 인간적이 되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리고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이념과 가치의 다원주의, 타인에 대한 인간적 정중함과 관용을 핵심으로 하는 정치적 이성을 통해 경쟁”해야 하고, 무엇보다 진보적인 정치가는 “정치적 이성에 대한 자각을 통해 인격적인 깊이를 갖춰야” 한다(미국의 사회개혁가 솔 알린스키와 정치가 버락 오바마가 구체적인 사례로 제시된다). 진보파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지만 진보정치를 외치는 사람들이 진지하게 고민할 만한 화두를 제안한다.

또한 이 책은 ‘정치’라는 단어에 실린 지나친 무게감을 좀 덜어낸다. 어쩌면 정치에 대한 지나친 흥분과 냉소는 정치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기 바라는 기대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할 거란 비관이 빚은 결과물일지 모른다. 조금은 편해져야 그 단어를 편하게 가지고 놀 수 있고, 그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볼 수 있을 텐데 지금까지 우리 정치는 너무 무거웠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정치를 ‘발견’해낸다.

물론 이 책의 모든 내용에 공감하는 건 아니다. 특히 3강 ‘민주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싸움’에서 얘기되는 촛불집회 토론회에는 나도 참여했고, 민주주의와 관련해 저자와 각을 세울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부제가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학 강의’가 아니라 ‘제도정치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진보정당의 사람들을 위한 정치학 강의’였다면 내 평도 여기서 그쳤을 것이다. 짧은 지면에서 얘기하기엔 나눠야 할 얘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함께 고민하면 좋겠다 싶은 점을 몇 가지 얘기하고 싶다. 저자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가 “매우 일면적일 수 있다”고 “하나의 의견 내지 주장”이라 얘기하니 비판적인 대화로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현실주의와 편견

   
▲ <한겨레> 자료
첫 번째로 고민되는 점은 ‘정치란 무엇인가’이다. “정치는 누가 어떻게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책이 시작되는데, 정치 지평을 좁게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정치에서 중요한 개념은 권력이고, 누가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사회의 모습이 달라진다. 이 책에서 논의되는 권력은 국가의 공권력이다.

막스 베버와 달리 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정치란 인간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서(in-between) 생겨나고 다양한 인간들 사이에 세계를 만드는 행위”라고 말한다. 아렌트에게 권력은 목적을 강요하는 수단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는 사람들의 능력이고 다수의 시민들이 구성하는 공론장이다. 권력과 폭력의 차이점은 권력이 정당성을 갖는다는 점이고, 권력은 국가의 소유물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능력이며, 정부만이 (공)권력을 가진다는 생각은 기득권층이 주입하는 편견이기도 하다. ‘시민사회’나 ‘정치적인 것’이 중요한 건 정치 지평이 넓기 때문이다(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번역된 샹탈 무페의 책도 그러하다).

두 번째 논쟁점은 ‘정치와 도덕을 분리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도덕성이 정치적 행위를 규제하는 기준이 될수록 정치가 도덕적일 수 있는 기반은 파괴된다”고 주장한다. 어떤 맥락에서 이런 주장을 했는지는 이해된다. 사심 없는 정치, 권력을 잡지 않는 정치를 내세우는 진보정치의 속내를 드러내기 위해 이런 얘기가 필요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도덕을 순결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시민의 덕목이자 공동체의 재화를 나누는 방식이라 본다면 정치와 도덕은 분리될 수 없다. 아니 분리돼서는 안 된다. 이런 기준과 가치가 없다면 정치는 끊임없는 협상과 타협의 과정일 뿐 가능성의 장이 아니다(“인간적 삶을 풍부하고 의미 있게 살게 하는 것”이 진보라는 말도 도덕적인 판단을 필요로 한다).
 
통치와 민주주의

세 번째 논쟁점은 정당이다. 저자는 정당민주주의가 현대민주주의의 기본이고 “리더십 있는 정당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우리 사회에서 좋은 정당이나 좋은 정치인이 필요치 않다고 주장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그런 정당이나 정치인이 강한 시민사회 없이 등장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진보정당 사람들이 리더십 있는 정치인으로 거듭나더라도 그와 더불어 정치에 참여할 시민이 없다면 도루묵이다. 시민 없이 정치나 민주주의가 변화될 수는 없다. 민주주의가 지금껏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는 점이 민주주의를 포기할 이유는 못 된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민주적으로 살아야 할 이유다.

대의제도를 깡그리 무시하고 새로운 정치 시스템을 만들자는 게 아니라, 대의제도가 자신의 본령을 벗어나지 못하는 정치 세계를 만들자는 말이다. 책을 읽으며 저자가 정치 세계와 생활 세계를, 정당 정치와 생활 정치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한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쟁점은 저자가 강조하는 ‘통치의 정치학을 익히는 문제’이다. 우리는 왜 통치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봐야 할까? 제임스 스콧은 <국가처럼 보기>(에코리브르·2010)에서 통치의 관점이 진보의 이름으로 세계의 다양성과 시민의 경험적 지혜를 파괴해온 역사를 지적한다. 통치를 얘기하는 순간 우리는 민주주의와 멀어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책의 부록이 껄끄러웠다. "도시 재개발에 반대하지" 않고 용산 참사로 "도시계획자, 공무원, 법관, 경찰관들이 키워온 자부심"이 상처 입을까 걱정하는 저자의 정치학, 이런 일을 올바르게 결정할 "정부다운 자세"가 존재한다는 정치학이 어떤 의도에서 나온 것인지 알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글•하승우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그린비·2006), <참여를 넘어서는 직접행동>(한양대학교출판부·2007) 등을 썼다.


요즘 서평 청탁이 자주 들어온다.
이번달에만 세꼭지가 들어왔다.
다른 원고보다 서평청탁은 흔쾌히 받아들이는 편인데, 원고 쓸 겸 책도 꼼꼼하게 읽고 책도 받고...^^

하지만 서평이 쉬운 글은 아니다.
나는 그런 부담감을 별로 가지지 않는 편이지만 저자와의 깊은 대화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책을 읽으며 든 생각을 담담하게 정리하는 편이다.
이 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픈 생각이나 느낌 같은 것을...

이번달에 서평 때문에 읽은 책, 읽고 있는 책은 다음과 같다.

[국가처럼 보기]는 강추하는 책이다. [농민의 도덕경제]보다 재미있다.
[반자본 발전사전] 역시 참 좋은 책이다. 번역이 늦은 감이 있다. 물론 일찍 번역되었어도 요즘 사회 분위기상 많이 팔릴 책은 아니다.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는 좀 더 읽어봐야 겠다.
[정치의 발견]은 명쾌하지만 불편한 책이다. 아, 최스쿨(최장집 교수와 그 제자들)은 여전히 이런 생각을 하며 사는구나, 뭐 이런 우울함이 든다는...

서평 외에 느티나무도서관 장서개발강좌나 개인적인 관심사로 요즘 읽은, 읽고 있는 책은 다음과 같다.
[가난뱅이 난장쇼]는 [가난뱅이의 역습]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조금 더 구체적인 책이다. 하지메는 아직 자신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 참 크고 장한 일인데... 조만간 서평을 한번 써볼 생각이다. 가급적 다른 책과 묶어 쓰고 싶은데, 어떤 책이 좋을지 고민 중...
[민주적 공공성]은 강추하고픈 책이다. 역시 아렌트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면서도, 왠지 조금 더 보강을 하면 좋겠다는 욕심을 자극하는 책이다. 우리의 시선으로 다시 구성하면 좋겠다는 책.

[식민지 공공성]은 흥미로운 책이다. 여러 명이 같이 쓴 책이라 들쑥날쑥한 면도 있지만 식민지 사회를 조금 더 내밀하게 볼 기회를 제공한다.
[도서관학 5법칙]은 약간 문화적 충격이다. 이 책을 쓴 랑가나탄이라는 인물에 대한 호기심이 확 생길 수밖에 없는... 어떻게 그 시대, 인도에서 이런 생각을... 어쩌면 이 역시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19세기 말, 20세기 초반의 뭔가 전 세계를 관통했던 기운일지도...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도 강추하고픈 책이다. 아, 통찰력이란 이런 것이구나, 관찰자의 눈높이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는 책이다.

솔랑이는 무럭무럭 큰다.
이제 10kg에 육박하는 아이를 등에 업고 가끔 책을 읽고 원고를 쓴다.
육아를 통한 통찰력은 아직 잘 생기지 않는다.
책에 너무 익숙해서일까...
프레시안의 서평 청탁을 받고 쓴 글이다.
아직 프레시안에 올라오진 않았는데, 연휴 때문인지 아니면 글에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쓴 글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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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은 당선되기 전, 지리산 노고단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 “아직 개발이 덜 됐어.” 그리고 얼마 전 여성계 신년인사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한국의 “보육은 이미 사실 무상 보육에 가까이 왔다”는 충격적인 발언에 이어 무상급식과 관련해 “대기업 그룹의 손자, 손녀는 자기 돈 내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 손자 손녀는 용돈 줘도 10만원, 20만원 줄 텐데 5만원 내고 식비 공짜로 해준다면 오히려 그들이 화가 날 것”이라 말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나도 화가 났다. 한국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이렇다. 그들은 이 세계에 어떤 생명/사람이 사는지를 모른다.


딱딱한 분위기를 풀기 위한 농담이었다면 철렁했던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이명박 대통령의 ‘진심’을 느끼고, 그럴 때마다 그가 지닌 강한 힘을 의식하고 우리 사회의 정의를 의심하게 된다. 내게는 참으로 불편한 ‘복불복의 공정사회’가 그에게는 기회의 땅이다.


가장 춥고 눈이 많이 온다는 이 겨울에 어떤 이는 얄팍한 비닐천막에 의지해 농성장을 지키고 어떤 이는 35미터 높이의 고공크레인에 올라 있지만, 힘을 가진 사람들의 눈엔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 치열한 몸부림이 힘 있는 자들의 눈에는 돌파해야 할 장애물이나 발전에 뒤따르는 부수적인 피해로 비친다. 그래서 힘 있는 자들은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는커녕 철거와 벌금으로 맞선다.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데, 왜 그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볼까? 왜 우리와 비슷하게 보이던 사람도 힘을 가지는 순간 전혀 다른 인물로 변신할까? 제임스 스콧의 『국가처럼 보기』(에코리브르, 2010)는 이런 의문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준다. 6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지만 스콧의 얘기를 정리하면, 그들의 눈은 숲이 아니라 팔 수 있는 나무만 보도록 맞춰져 있다. 그들의 눈에 “가치 있는 식물은 ‘농작물’이 되고, 그 농작물과 경쟁하는 종은 ‘잡초’로 낙인찍힌다. 그리고 농작물에 기생하는 벌레는 ‘해충’으로 낙인찍힌다. 또한 가치있는 나무는 ‘목재’가 되는 반면, 이와 경쟁하는 종은 ‘잡목’이 되거나 ‘덤불’쯤으로 여겨진다. 이와 동일한 논리는 동물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높은 가격이 매겨진 동물은 ‘사냥감’이나 ‘가축’이 되지만 그것과 경쟁하는, 혹은 그것들을 먹이로 삼는 동물은 ‘약탈자’나 ‘야생동물’쯤으로 간주된다.” 안타깝지만 우리가 진보적으로 믿는 “시민권, 공공위생 프로그램, 사회안전, 교통, 커뮤니케이션, 보편적인 공교육 그리고 법 앞의 평등 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모두 국가중심적, 하이 모더니즘적 단순화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런 시각을 가지게 된 게 아니라 근대국가와 자본주의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단순해진 지도와 세계를 ‘만들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아직도 애써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미 피부로 서서히 느껴지는 지구세계의 파멸이다. 이 비극적인 상황을 감추기 위해 힘을 가진 자들은 ‘복원’과 ‘살리기’를 시도한다. 하지만 스콧은 그런 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가상적’ 생태를 만들기 위한 ‘삼림 복원’이 시도되어 뒤섞인 결과를 드러냈지만, 숲을 지탱하는데 가장 중요한 조건을 여전히 부정하고 있었다. 바로 다양성이다.” 다양성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필수조건인데, 획일적인 사회에서 살아온 우리에게 다양성은 여전히 어려운 선택이다.


그렇다면 눈앞으로 다가온 파멸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스콧은 국가처럼 보지 않고 우리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고, 우리 눈의 가치를 우리 스스로 인정하도록 노력하자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힘을 가진 자들의 ‘하이 모더니즘’을 견제할 강한 시민사회이다. 그런 점에서 스콧은 민주주의를 강조하고 그 민주주의란 토착적이고 경험적인 지혜를 뜻하는 “시민의 메티스가 조정이라는 방식으로 그 나라의 법과 정책을 끊임없이 수정”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말이 조금 식상할 수 있지만 사랑이 또 다른 사랑으로 치유되듯이 우리가 기댈 곳은 역시 민주주의 뿐이다.


‘또 다른 경제가 가능하다’가 아니라 ‘또 다른 경제가 이미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려줬던 스콧의 『농민의 도덕경제』처럼, 『국가처럼 보기』는 ‘또 다른 삶의 질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렇다고 스콧이 지금껏 알지 못하던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사람과 세계를 통제해서 생산을 확대하고 사회질서를 합리적으로 바로 잡으며 이 세계를 발전시키겠다는 욕망이, 스콧의 표현을 빌면 “행정적 질서화에 대한 열망”이 ‘아방가르드’나 ‘전위’,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학자들이 지적해온 바이다.


그럼에도 스콧의 얘기가 흥미로운 것은 그것을 ‘보는 법(seeing)’으로 설명하고, 국가가 파괴하고 무시해온 평범한 사람들의 지혜가 중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단지 바라보는 사고틀(프레임)의 문제가 아니다. 이 책은 그동안 하이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이 다양성을 파괴하고 지역적 지식의 중요성을 무시하면서 사람들의 자발성과 자율성을, 개인의 자율적인 역량을 파괴해 왔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다시금 과거의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다른 책에서 찾아보기 힘든 목소리를, 농민과 “전통적인 사람들”, TV프로그램인 ‘생활의 달인’에 나올 법한 평범한 사람들의 지혜를 열정적으로 옹호하는 목소리를 접할 수 있다.


안타까운 점은 이 열정적인 책이 한국에서 차갑게 ‘소비’된다는 점이다. 이 책에 대한 언론사들의 서평을 보면 그들의 ‘책을 보는 법’이 드러난다. 《조선일보》의 서평은 이 책을 두 번이나 다루지만 소련의 집단농장 실험에 대한 비판, 외국의 국가공공사업에 대한 비판으로 다룰 뿐 지금 우리의 현실을 다루지 않는다. 반면에 《경향신문》과 《한겨레》의 서평은 박정희와 4대강사업을 비판하지만 정작 스콧에 강조했던 농민과 공동체, 전통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다. 이념의 틀을 뛰어넘어 삶과 그 터전을 지키려는 열정이 우리 사회에서는 기존의 앎을 확인하거나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소비된다.


책을 번역한 사람으로 넘어가면 안타까움이 궁금증으로 바뀐다. 책을 번역한 서울대 환경대학원의 전상인 교수는 소위 ‘뉴라이트’로 분류되는 사람이다. 여기서 이념을 문제삼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왕 시작된 4대강 사업이 100년 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반열에 오르는 성과를 낳겠다는 꿈과 각오를 함께 다지면서 말이다. 문제는 시간도 아니고 예산도 아니다. 정답은 정성이다.”  “지역주민 대부분이 원하는 데다가 사법부도 적법하다고 판단한 4대강 사업, 그리고 당사자인 자동차업계가 환영한다는 한·미 FTA를 민주당이 '절대 반대'로 임하는 자세는 공당(公黨)의 몫이 아니다”라고 《조선일보》에 칼럼을 쓰는 분이 스콧의 책을 번역했다는 사실은 좀 생뚱맞다. 이런 관점이 바로 스콧이 비판하는 관점 아닌가? 그렇다면 왜 이 책을 번역했을까? 자신이 동의하지 않지만 중요한 얘기니 알려야 한다는 지식인의 사명이었을까?


이 궁금증을 풀려면 책의 본문과 각주 뒤의 ‘옮긴이의 글’을 읽어봐야 한다. 번역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글 뒤에 이런 문장이 있다. “박사과정에 속한 김동완(현재는 박사다), 김민희, 김성연, 김예성, 여희경, 장지인, 정유진, 최민정은 이 책의 번역 과정에 참여했다.” “생애 최초의 번역 작업이 정말로 지긋지긋하고 힘들었”을 수 있지만 많은 대학원생들과 함께 했다면 그리 힘들지는 않았을 듯싶다. 『우리 시대 지식인을 말한다』라는 책에서 권력과 지식의 유착을 비판하며 지식인이 연구라는 자신의 본령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한 분이, 사회 정의나 이념과 무관한 진리 추구를 부르짖는 분이 학생들과 함께 번역한 책에 자기 이름만 덜컥 올린 점은 참으로 유감스럽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이렇게 국가처럼 보는 분이 이로써 공직을 맡기 어려운 근거 하나를 만들었다는 점, 메마른 현실에 단비가 될 책이 번역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북한의 지배자들을 싫어한다.
그들이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간 뛰어난 능력자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렇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권력을 독점하며 인민을 지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네 대한민국의 민주공화국이 참 공허하듯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신도 참으로 공허하다.

예전에 경향신문 대담을 할때 김상봉 선생님이 북한에 관심을 두지 않는 지식인은 진보적 지식인이 아니라고 했는데, 관심을 두지 않는 건 아니지만 왜 그곳의 문제를 우리가 결정하려 드는지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북한의 인민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끔 연대하고 도와주는 역할은 할 수 있지만 그네들의 삶을 우리가 결정하고 이끌 수 있을까?

이런 복잡한 감정 때문인지 탈북자 또는 북한이탈주민 또는 새터민, 기타 등등으로 불리는 사람들에 대한 감정도 복잡하다.
그런데 아무리 상황이 복잡하다해도 북한에서 권력을 누렸던 사람들이 뛰쳐나와 북한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는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아마 그런 좋지 않은 감정의 정점에 황장엽이라는 인물이 있었던 듯하다.
이미 돌아가신 분이라 좀 그렇지만, 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만 가득 품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도서관 서가를 돌다 우연히 황장엽의 [민주주의 정치철학]이란 책을 발견했다.
예전에 봤을 수도 있지만 아마 부정적인 감정이 그 책의 존재를 무시했을 것이다.
더구나 출판사도 시대정신이고...
얼마 전도 황장엽이라는 이름을 먼저 봤다면 당연히 넘어갔겠지만 책의 표지가 없고 두껍고 낯선 하드카바의 책이라 슬쩍 꺼내봤다.
몇 페이지 읽다 좀 진지하게 읽어봐야겠다 싶어 대출해서 읽었다.

아, 그런데 이건 왠 일인가...
황장엽이라는 인물이 북한 최고의 이데올로그였다는 사실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의 사상을 이처럼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이, 그것도 민주주의에 관한 얘기를 고대 아테네나 공화주의같은 서구정신에 기대지 않고 풀어낼 수 있는 지식인이, 약 6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각주에 의존하지 않고 한달음에 써낼 학자가 한국에 몇이나 될까.
책의 내용에 전적으로 공감하지는 않지만 그의 사유의 폭과 깊이에 감탄하며 몇 일간 이 책에 푹 빠져 있었다.
나의 편견을 비판하며...


이 책의 몇몇 핵심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자연개조사업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인간의 사회생활이 경제생활이며 인간개조사업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인간의 사회생활이 정신문화생활이고 사회관계개조사업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인간의 사회생활이 정치생활이다.” 황장엽 선생은 정치의 기본개념을 권력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협조성에서 찾는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재부를 어떻게 결합시키는가에 따라 사회에서 차지하는 사람들의 자주적 지위와 창조적 역할에서 큰 차이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므로 사회는 자기의 생존과 발전의 근본요구인 사회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자주적 지위와 창조적 역할을 높이는 방향에서 자기의 구성요인들을 결합시키고 관리하는 기능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정치의 본질은 사회관계를 개조하고 관리해 나가는 사회의 자체 관리기능이라는데 있다.”


“인간은 경제관계와 문화관계에 의거하여 경제생활과 정신문화생활을 하지만 경제관계나 문화관계 자체를 개조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경제나 문화 분야의 과업이 아니라 정치의 과업인 것이다.…경제관계나 문화관계를 개조하는 활동을 보장하기 위하여 맺어지는 사회관계가 다름 아닌 정치관계이다.”


“정치는 고립된 개인의 생명을 위대한 집단의 생명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사람들에게 위대한 집단의 생명을 지니고 사는 끝없는 기쁨과 행복을 안겨주며 세계의 주인,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 살며 발전할 수 있는 불패의 힘을 안겨준다. 물론 개인은 집단의 생명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공동의 주인으로 된다. 위대한 생명의 공동의 주인으로 된다고 하여 주인으로서의 지위가 약화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부부가 결합된 생명을 공유한다고 하여 결합된 생명의 주인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생명과 생명을 결합시키면 생명력이 비상히 강화될 뿐 아니라 개인의 생명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게 된다. 생명과 생명이 결합되면 인간의 자주성과 창조성이 비상히 강화된다.”


황장엽 선생은 자신의 민주주의 정치철학을 “개인주의적 인본주의 사상이며 개인중심 민주주의 정치사상”이라 정의한다. 그는 자신의 정치철학을 정의의 원리와 사랑의 원리로 설명한다. “정의의 원리가 인간이 개인적 존재라는 특징과 결부되어 있다면 사랑의 원리는 인간이 집단적 존재라는 특징과 결부되어 있다.”


“사회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지위와 역할을 규제하는 사회관계를 개변시키는 것은 정치의 임무에 속한다. 경제의 민주화를 떠나서는 정치의 민주화가 불가능하지만 정치의 민주화를 떠나서는 경제의 민주화가 완성될 수 없다. 세계민주화의 물질적 조건은 경제의 세계화를 통하여 마련될 수 있지만 세계민주화는 세계 인민들의 민주주의적인 정치적 협조와 결부됨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다.”


흔히 인권은 인간의 권리로 해석된다. 그런데 권리를 보장받는 인간,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눈 두 개, 코 하나, 팔과 다리를 가진 존재를 인간이라 부를까? 그렇다면 원숭이나 침팬지에게도 권리가 있을까?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크게 다르지 않다면 유독 인간에게만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이 다른 생명체보다 앞서, 또는 그보다 뛰어난 ‘만물의 영장’인 이유는 무엇일까? 따지고 보면 인간이 다른 생명체보다 뛰어나다는 생각은 근대에 ‘발명’된 것이다. 그리고 서양의 철학자들처럼 이성을 가진 존재만을 인간이라 부른다면, 그 이성은 무엇으로 측정될 수 있을까? 만일 그 이성이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 ‘정신’을 뜻한다면, 그런 정신이 없거나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될 수 없다. 사실 사람의 생활과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다양할 수밖에 없는데, 하나의 정신을 인간의 특징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인간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면 다양한 생명체들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망과 문화가 눈에 들어온다. 나의 불편함이 다른 누군가의 당연함으로, 나의 권리가 어떤 존재에게는 폭력으로 느껴진다.


이렇게 까다롭게 묻지 않더라도 개발권/발전권이라는 말이 있듯이, 권리를 인간의 권리로 제한하는 순간 인권은 생태계의 파괴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개인의 자유권을 넘어 사회적인 권리로 해석될수록 인권은 생태주의와 충돌하곤 한다.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태계를 파괴해 왔으니...


흔히 인권운동과 생태주의운동의 접점을 찾기 어렵다고 얘기한다. 실제로 인간을 위한 운동이 인간만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운동과 접점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생태주의를 단지 자연을 보존하자는 구호로만 이해하지 않는다면, 인권이 인간이라 정의되지 않는 생명체(태아), 인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생명체(프랑켄슈타인)를 배제하지 않는다면, 생태주의와 인권의 접점이 보인다. 그 접점은 바로 평화이다. 생명체의 생존과 생활을 권리이자 문화로 본다면 평화는 그런 권리와 문화를 가능케 하는 디딤돌이다. 평화로운 삶에서 생명체들은 스스로 성장하고 서로 보살피는 가능성을 누릴 수 있다.



평화유지와 평화로운 삶의 차이


서양에서 평화를 뜻하는 피스(peace)라는 말의 어원인 라틴어 팍스(pax)는 서로 다투지 않겠다는 합의를 뜻했다. 다투지 않겠다니 평화의 의미와 일치하는 듯하지만, 평화가 단지 분쟁이나 전쟁없는 상태만을 뜻할까? 더구나 팍스라는 말이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 쓰이면서 이 평화는 로마의 지배를 받아들인 평화를 뜻했다(로마시대 이후에도 팍스라는 말은 팍스 브리태니카Pax Britannica,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처럼 초강대국이 구현한 세계질서와 평화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팍스가 뜻하는 평화란 주체들의 자유로운 선택보다 강요된 질서에 가까운데도 이를 좋은 상태로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평화가 목에 칼을 들이댄 위협적인 질서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H. Arendt)에 따르면, 로마시대의 평화는 전쟁의 승리와 패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연합국이 된 전쟁 당사국들간의 합의, 전투에서 형성된 새로운 관계와 그것에 대한 로마법의 인정을 뜻했다. 여기서 평화란 무력보다 법적인 상태와 가까웠고, 평화협정이라는 말처럼 평화는 무조건적인 강압보다 인위적인 합의에 가까웠다. 평화의 다른 이름은 질서였고, 그 질서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 질서의 결과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러니 팍스를 무조건 나쁘게만 볼 이유는 없다.


19세기 말에 일본인들은 팍스에서 유래된 피스라는 말을 국가들 사이에 전쟁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평화(平和)로 번역했다. 비록 평화라는 말은 없었지만 동양에서는 태평(太平), 인화(人和), 대동(大同), 대도(大道) 등이 평화로운 삶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말들은 질서나 법적 상태를 뜻하는 평화의 의미와 달랐다. 예를 들어 《예기(禮記)》에 따르면, “대도(大道)가 행해지니 천하가 만민의 것이 되고 어질고 유능한 자가 선출됨으로써 모두가 신의를 중히 여기고 화목한 사회가 되었다. 그러므로 자기 부모만을 사랑하거나 자기 자식만을 사랑하지 않고 모두가 한 가족같이 사랑하였다. 그럼으로써 늙은이는 수명을 다하고 젊은이는 재능을 다하고 어린이는 무럭무럭 자랐으며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자식 없는 늙은이, 병자들도 부양받게 되었다. 또한 남자는 모두 직분이 있고 여자들은 모두 시집을 갈 수 있었다. 재물을 땅에 버리는 낭비를 싫어하지만 결코 자기만을 위하여 소유하지 않으며, 노동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했으나 반드시 자기만을 위하지 않는다. 이처럼 풍습이 순화되어 간특한 모의가 통하지 않으니 변란이 일어나지 않고, 도둑질과 약탈이 없으니 대문을 닫지 않고 살았다. 이것을 일러 ‘대동’이라 말한다.” 이 대동의 의미가 팍스나 피스와 같을까? 대동사회에서는 정부가 질서를 만들기는커녕 정부가 가만히 놔둘 때 백성들이 평화를 즐겼다. 너와 내가 서로를 차별하지 않고 더불어 살 수 있는 세상, 누구나 꿈꾸는 이상사회는 위대한 지배자나 특정한 정치체제가 아니라 민중의 평화로운 삶에서 구현되었다.


사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서양에서도 등장했다. 로마시대의 키케로(Cicero)는 노예제도가 평화를 가져올 수 없고, 평화란 “모든 사람의 권리를 인정하는데서 오는 자유”라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평화를 획득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하며, 또 노예제도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근대의 공화주의자들 중 몇몇은 민중이 평화의 수호자일 때에만 자유와 평화가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상가 이반 일리치(I. Illich)는 팍스에 관해 다른 얘기를 들려준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팍스라는 말을 학살을 정당화시키고 군대를 통제하는 말로 이용했지만 12세기에 팍스는 영주들이 전쟁을 벌이지 않는 상태를 뜻하는 말이 아니었다. 일리치에 따르면, 팍스는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이 자급할 생존수단을 전쟁의 폭력에서 보호하는 것을 의미했고, 이런 ‘신의 평화’, ‘땅의 평화’는 단지 전쟁을 일으킨 자들의 휴전과는 달랐다는 것이다. 이런 삶의 문제였기에 평화는 하나의 질서로 환원될 수 없었고 각자의 자율성을 누렸다. 이런 역사를 바탕으로 일리치는 “내게는 한 인간사회가 누리는 평화는 그 사회구성원들이 향유하는 시(詩)만큼 개성적”이고 “각 시대와 각 문화영역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강대국들이 강요하는 평화유지와 평화로운 민중의 삶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평화가 시의 언어처럼 다양하고 자율적이지 못하다면 그것은 강요된 질서나 살아남기 위해 타자 앞에 무릎을 꿇는 굴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평화가 지속되다보면 나의 존엄함을 잃고 자기 스스로 의지를 꺾고 자기 자신을 검열하게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평화는 결국 세계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파괴한다.



휴전과 전쟁국가, 전쟁상태


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 군사독재라는 가혹한 현대사를 거쳐온 한반도의 주민들에게 평화는 어떤 의미일까? 아직도 외세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않은 한반도, 서로 포격이 오가며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고 있는 휴전상태의 한반도에서 평화란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상태를, 즉 질서유지의 의미만을 담고 있다. 휴전상태를 유지해야 하기에 우리는 노예상태나 강대국의 법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에게 평화기념관이 아닌 전쟁기념관이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휴전과 분단이라는 현실은 지금도 평화를 위한 전쟁, 국익을 위한 파병이라는 모순된 표현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전쟁이 아니라 평화가 예외상태이다보니 병역거부가 ‘시민의 권리’나 ‘인권’의 차원에서 다뤄지지 않는다. 옆 나라 일본에서는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여겨질 징병제도가 우리에게는 상식이자 시민의 의무로 받아들여진다. 우리 민족/국민과 적대적/위협적인 타민족/국민을 구분하는 경계가 세워지고 국경선이 그어지면서 전쟁국가는 안보를 빌미로 자신의 질서를 시민들에게 강요할 명분을 얻는다. 전쟁국가에서는 평화로운 삶의 추구가 질서유지와 안보를 내세운 평화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전쟁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평화로운 삶을 상상하지 못하는 건 기존의 평화관을 극복하지 못한 탓도 크다. 일리치는 민중의 편에서 전쟁을 비판하는 역사가들도 평화의 의미를 제대로 밝히지 못했고 심지어 “가난한 사람들의 평화보다도 폭력에 대해서 더 큰 흥미를 느끼고 있다”고 지적한다. 민중의 혁명과 투쟁을 다룬 기록들은 그나마 있지만 그들이 어떻게 평화로운 삶을 누려왔는가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일시적인 투쟁의 역사만 기억할 뿐 훨씬 더 오래되고 길었던 평화의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다. 일리치는 “농민과 유목민, 마을문화와 가정생활, 여성과 아이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역사가들에게는 검토할 만한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에 “속담과 수수께끼와 민요에 담겨 있는 암시에 주의를 기울여야” 평화로운 삶의 문화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만일 이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평화연구는 “제로섬 게임에 갇힌 경쟁자들간의 최소한의 폭력과 휴전에 대한 연구로 제한”되어 버린다고 일리치는 경고한다.


그리고 정치사상가 더글러스 러미스(D. Lummis)는 전쟁이 일상화되고 평화가 예외적인 경우로 느껴지게 된 이유가 생태계의 파괴와 무관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매스컴에서는 ‘치안’, ‘안전’, ‘안정’, ‘공안’같은 말들이 범람하고 있지만, 반면에 ‘평화’니 ‘헌법 9조’니 하는 말을 입에 담으면 무슨 특수한 이데올로기나, 편중된 정치사상을 가진 사람 취급을 받는다. 우리는 ‘평화’라는 말을 더 이상 친숙하게 느끼지 못한다. 본디 평화란 각각의 가정이나 공동체나 지역 안에서 개개인이 누리던 극히 당연한, ‘안심’이라는 씨앗에서 싹튼 것이었다. 그런데 그 ‘마음의 평안’이라는 기본적인 충족감이, 우리 주변에서 떨어져 나가 어느새 아주 먼 곳으로 유배되어버린 것만 같다.…사정은 환경문제의 경우에도 비슷하다. 우리사회에는 자연환경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금욕적이라는 뿌리 깊은 이미지가 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돈벌이와 소비라는 ‘쾌락’을 취할 것인가, 자연환경이라는 ‘인내’를 취할 것인가 하는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다.” 이런 착시현상들은 우리 자신의 삶을 평화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어렵게 만든다. 아니 우리의 전쟁같은 일상은 평화의 시야를 가리고, 나 자신을 전쟁의 희생자이자 전쟁을 치르는 주체로 만든다.


국가간에는 전쟁이 없지만 그런 질서를 받아들이는 한 국가 내에서는 살아남기 위한 끔찍한 전쟁이 진행 중이다. 아주 평화로운 상태처럼 보이지만 어느 한켠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의 시야를 인간에서 생태계의 다양한 생명체로 넓히면 그 치열한 전쟁터가 드러난다. 한국에서도 신종인플루엔자나 조류독감, 광우병이 발생하면 그 지역의 모든 가축들이 죽임을 당한다. 보통 한 해에 수백만 마리의 동물들이 인간에게 전염된다는 이유로 살해되고 있다. 살처분이라는 다소 누그러진 명칭으로 부르고 있지만 한 번에 수만의 생명체를 몰살하는 홀로코스트이다. 이런 살육을 저지르고도 우리가 평화를 논할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이 평화로워질 수 있을까?


2003년 10월 지율스님이 고속철도 관통구간인 천성산의 도롱뇽을을 대신해서 공사착공금지 가처분소송을 낸 것은 도롱뇽만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천성산이 죽고, 도롱뇽이 죽는다면 다음 죽을 차례는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인간 자신일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인식합시다”라는 지율스님의 말은 평화로운 삶의 터전이 끊임없이 파괴되어 왔고 그 파괴 속에 우리가 있다는 진실을 드러낸다. 100일을 넘긴 단식에도 전쟁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고속철도 공사는 완공되었다.


그러면서 평화로운 삶을 파괴하는 팍스의 또 다른 명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전쟁을 정당화시키는 근거는 더 이상 질서나 안보가 아니라 바로 경제이다. 전쟁국가의 명분도 경제이고 그 결정이 옳다고 믿는 우리의 명분도 경제이다. 그리고 이런 파괴가 이명박 정부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고 4대강 사업을 가능하게 했다.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도록 세뇌당해온 ‘한강의 기적’이야말로 인권과 생태주의의 접점인 평화를 파괴해 왔다. 공장의 착취와 억압, 생태계의 파괴는 무관하지 않다. 토건국가의 다른 이름이 전쟁국가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일상을 변화시키는 틀로 평화의 관점을 확장시켜야 하고 인권과 생태운동이 서로 눈을 맞춰야 한다. 환경운동가 쓰지 신이치(辻 信一)는 이렇게 얘기한다. “전쟁을 말할 때 저는 자연계에 대한 전쟁도 추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에 대한 자각이 없기 때문에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환경문제와 평화문제가 하나로 연결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한편 환경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우유팩 같은 것에는 주의를 기울이지만, 군수산업을 포함한 경제 그 자체가 일종의 전쟁이라는 인식은 전혀 못하고 있어요. 확신한 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과제는 전쟁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경제발전과 인권, 생태


일리치는 평화를 깨트리는 전쟁의 주역이 세상의 오해와 달리 바로 경제발전이라고 지적한다. 일리치는 민중의 평화(popular peace)와 ‘팍스 에코노미카(pax economica)’의 대립을 지적하면서 민족국가의 등장과 더불어 민중의 자급생활을 보장하던 평화인 민중문화와 공유지, 여성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고 엘리트들이 발전을 내세워 민중을 지배했다고 지적한다. “‘팍스 에코노미카’는 자급적 생존방식을 ‘비생산적’이라고 규정하고, 자율적인 것을 ‘비사회적’이라고 부르며, 전통적인 것을 ‘미개발된’ 것으로 봅니다.” 이런 팍스 에코노미카는 경제권력들의 균형, 강대국과 초국적 자본의 질서를 민중들에게 강요한다. 자치와 자급의 평화로운 삶을 파괴하는 경제라는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인권운동과 생태주의운동이 손을 잡아야 한다.


토다 키요시(戶田 淸) 교수는 민주화란 “평화(단순히 전쟁의 부재가 아니고, 환경보전이나 차별의 극복까지도 포함하는 적극적 평화)의 불가결한 요건”이라고 얘기한다. 에너지, 군수, 자동차, 식품 등에서 발생하는 구조적인 폭력이, 그리고 “유해상품의 합법적 판매나, 나아가서 농약의 대량사용을 비롯해서 ‘자연에 대한 폭력’까지 포함”하는 폭력문화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평화로운 삶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연생태계 안에서 인간사회를 유지하고 재생산해가는 얼개”인 서브시스턴스(subsistence)가 보장되려면 “환경과의 조화, 사회적 공정[성], 소비의존증이 아닌 진실로 풍요로운 생활조건”이 필요한데, 이는 민주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사실 우리 시대에 생태는 이미 인권의 중요한 항목이다. 지적소유권에 따른 종자(種子)의 독점과 신체적인 권리의 상실, 생태계 파괴에 따른 생명체의 오염과 기형화, 가장 극단적으로는 핵의 위협이 인간의 생활세계 자체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몸과 정신에 대한 권리를 온전히 누리려면 내가 생활하는 터전이 그런 권리를 뒷받침해야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몫 없는 사람들의 몫,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목소리를 회복하는 것이 ‘인권의 정치’라면, ‘생태의 정치’는 그 몫과 목소리의 범위를 더 넓히라고 요구한다. 아니 몫과 목소리를 나누는 기준을 해체하고 서로의 관계망의 새로 구성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고 녹색과 적색을 무조건 뭉뚱그리자는 주장은 아니다. 오히려 각각의 운동들이 자신의 경계를 허물고 적극적으로 소통을 시도하며 새로운 운동의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생태주의자들의 자기만족을 비판하는 러미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일 만하다. “근대사회에 대한 비판은 아주 중요하고 또 정곡을 찌르고 있고, 저 자신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거기에는 아주 큰 함정이 있어요.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노고와 노력을 이해하고, 그 위엄을 인정하면서 논의할 수 있는 형태로 어떻게 비판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 사람들의 생활과 노력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니 ‘마음이 죽었다’느니 하는 말을 그 시대에 많이 들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포기했다’, ‘말이 안 통한다’는 말도. 그런 말들을 내뱉고는 자기만족에 빠져있는 외국인들이 실제로 그 당시 교토에 많았어요.” 생태주의운동이 인권운동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사회를 민주화시킬 힘이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면서도 러미스는 “기업이 대규모 공해를 일으키고 있는데 내가 그런 작은 일들을 죽어라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는 무력감. 하지만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를 전쟁상태에서 평화상태로 전환하는 운동에 참가하면, 자신의 활동과 거대한 환경문제와의 관계가 분명해질 겁니다. 즉 자신의 작은 행동과 커다란 문제가 직접적으로 연결될 거란 말입니다.”라고 지적한다. 인권운동이 생태주의운동의 시야를 받아들일 때 활동의 전일성(全一性)이 회복될 수 있다.


이렇게 인권과 생태의 관점을 통합하는 시도는 이미 시작되었다. 2004년 5월 평택에서 열린 ‘5․29반전평화문화축제’에서 문정현 신부는 이렇게 연설했다. “저는 6개월 동안 유랑하면서 평화가 무엇인가를 터득했습니다.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가 원직복직하는 것이 평화입니다. 청주에 갔습니다. 천연기념물인 두꺼비와 맹꽁이가 개발에 밀려서 멸종이 되지 않도록 서식처를 만들어주는 것이 평화입니다.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인이 성한 사람들의 도움으로 가고 싶은 곳을 쉽게 갈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이 땅을 일궈온 농민들이 더 이상 빼앗기지 않게 하는 것이 평화입니다. 영문도 모르고 강대국의 침략으로 죽어가는 부녀자들 노인들을 살려주는 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그러기에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고 미군을 이라크에서 철수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평화입니다.”


그리고 평화활동가 조약골은 이 강연을 ‘평화가 무엇이냐’라는 노래로 만들었다. “성매매 성폭력 성차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 군대와 전쟁이 없는 세상 신나게 노래 부르는 것이 평화. 배고픔이 없는 세상 서러움이 없는 세상. 쫓겨나지 않는 세상 군림하지 않는 세상. 빼앗긴 자 힘없는 자 마주보고 손을 잡자. 새세상이 다가온다 노래하며 춤을 추자” 일리치의 말처럼 평화를 시의 언어로 표현하려는 시도들이 우리 사회에도 등장하고 있다.


평화의 시를 느끼는 감수성이 일상을 사는 시민들의 가슴 속에 자리잡을 때, 우리는 전쟁상태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그것은 남이 만들어준 안전한 평화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평화를 가능케 한다. 하나의 평화, 하나의 질서가 아니라 다양한 평화, 다채로운 질서를 가능케 한다. 지배자들의 구별짓기, 경계짓기, 분할통치(divide and rule)를 넘어서야 평화로운 삶이 가능하다



※ 참고한 책


더글러스 러미스․쓰지 신이치 지음, 김경인 옮김, 『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녹색평론사, 2010)

이반 일리치 지음, “평화의 근원적 의미”(《녹색평론》 2002년 1~2월호)

토다 키요시 지음, 김원식 옮김, 『환경학과 평화학』(녹색평론사, 2003)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 『혁명론』(한길사, 2004)


 

한 사회의 지배구조를 분석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누가 권력을 행사하는지를 분석하는 방법도 있고, 어떤 정책이 기획되고 집행되는 과정을 분석하는 방법도 있고, 지역사회 내의 평판이나 명망을 수집하는 방법도 있다. 그리고 한국사회를 분석하려면 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 군사독재라는 역사적인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만이 아니라 국가와 시장의 관계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런저런 방법으로 한국의 지역사회지배구조를 분석하면 그 실체가 조금 드러난다. 일단, 지역사회라 해서 중앙정부와 재벌의 힘이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지방정부와 많은 권한이 넘어오긴 했지만 여전히 중앙정부가 돈줄을 쥐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국세와 지방세의 비중이 7: 3이라면 지출에서는 중앙과 지방의 비중이 3: 7로 역전된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여전히 중앙이 기획한 사업을 지방이 집행한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소수의 재벌들이 한국의 시장을 장악하고 있고 점유율은 계속 올라가고 있고, 대형할인마트와 기업형슈퍼마켓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또한 중앙언론이 한국사회의 여론을 지배하며 영향력을 행사한다. 한국은 여전히 중앙집권형 국가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에 위임된 집행권력을 지방자치단체장이 자기 마음대로 행사한다. 대통령처럼 막강한 힘을 가진 단체장은 지방정부의 예산을 쌈짓돈삼아 부패를 일삼기도 하고 재선을 위해 터무니없는 사업들을 집행한다. 이를 막을 지방의회의 힘은 약할 뿐 아니라 단체장과 연관된 보수정당이 지배하니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사실 선거 공약을 지켜야 하는 지방의원들은 그 권한을 가진 단체장과 결탁할 수밖에 없다. 지방공무원들(또는 그들의 관료주의)은 인사권을 가진 단체장에 묶여 있지만 민주화 이후 독자적이고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추구한다. 그리고 이런 공무원 밑으로 통 단위까지 관변조직이 만들어져 있다. 어떠한 명분을 대더라도 이런 구체적인 이해관계를 극복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런 제도화된 권력을 뒷받침하는 각종 관변단체들이 존재한다. 각 동단위까지 뿌리를 내린 새마을운동협의회, 자유총연맹, 바르게살기협의회를 빼고도 대한노인회, 각종 보훈단체, 체육단체, 한국예총, 여협, 로타리, 라이온스, 청년회 등의 단체들이 지방정부의 사회단체보조금을 독점하며 영향력을 행사한다. 지방정부의 각종 자문위원회와 주민자치위원회, 청소년선도위원회, 평화통일자문위원회, 읍․면개발위원회 등 수십 개의 위원회들을 그들이 장악하고 있다.


또한 지역의 상공회의소들도 정치인, 관료, 학계, 관변단체들을 연계해 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영향력을 행사한다. 주로 건설업자들의 소유인 지역언론사들도 지역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며 개발사업을 정당화시키고, 지역의 대학들도 지방정부의 각종 용역을 받아 지방권력을 비호한다(대학교수들이 공무원 다음으로 위원직을 많이 차지하고, 각종 재단과 시설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의사, 약사, 각종 직능단체들의 지역조직도 지역사회에서 이익을 거래하며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런 다양한 사람과 집단들이 중앙에서 지역까지 하나의 권력망을 구성하고 서로 이해관계를 나누며 공생하고 있다. 한번 움직이면 수천에서 수만 명이 조직적으로 동원되고, 공권력이나 자본이 그들의 뒤를 적극적으로 봐준다.


반면에 우리가 가진 힘과 사람들을 한번 꼽아보자. 몇 명이나 되고 어떤 자원을 가지고 있나? 민주노총, 민언련, 민노당, 진보신당, 시민단체 등 지역의 진보적인 단체들을 죄다 끌어 모아도 그 수는 얼마 되지 않고, 이런 단체들마저도 서로 경쟁하거나 갈등하는 관계라 하나로 묶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니 주민들이 누구를 믿고 누구의 편에 설까? 가치의 문제를 넘어서 누가 제시하는 비전이 더 현실적일까?


이 지배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진보적 지방자치는 그냥 말일 뿐이다. 얼마 되지 않는 몫을 놓고 싸울 것인가, 우리의 편을 더 많이 모을 것인가, 여기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

녹색사회연구소의 심포지움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민주화 이후 관료주의의 경향이 더욱더 강해졌다는 느낌을 글로 정리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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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사회학자 베버는 관료제를 쇠창살(iron cage)이라 불렀다. 베버는 근대사회의 도구적 합리성이 다른 가치나 윤리, 초월성을 압도하면 기계적인 계산과 영혼 없는 통제와 관리가 사회를 지배할 것이라 봤다. 민주주의가 이런 도구적 합리성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베버는 믿지 않았다. 외려 관료제가 민주주의를 압도할 것이라 그는 믿었다.

안타깝게도 베버의 오래된 예측은 지금 이곳 한국에서 실현되고 있다. 경제나 행정의 합리성이 생활세계의 합리성을 식민화해도 생활세계의 의사소통 합리성이 이런 침입을 막아낼 것이라는 하버마스의 기대는 우리 사회에서 통하지 않는다. 권력과 화폐의 힘이 소통의 힘을 압도하고 있다.

물론 동물원의 동물들이 살아있듯이 쇠창살에 갇힌다고 우리가 죽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때로는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우리 스스로가 그런 관리를 택하기도 한다. 개발이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거나 풍요롭게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애써 외면하거나 알아도 어쩔 수 없다며 체념한다. 힘겹게 싸워서 막아도 몇 년 뒤에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현실은 힘든 싸움을 포기하게 만들기도 한다. 허나 그렇게 물러서면 우리의 삶, 미래세대의 삶은 어찌할 것인가? 창살에 갇혀 있어도 우리의 의식이 그 창살을 넘어서고 끊임없이 탈출을 꿈꾼다면 언젠가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1. 왜 변화가 어려운가?

 

개발주의나 신개발주의의 문제는 이미 여러 차례 다뤄진 주제이다. 그런데도 왜 변화가 없을까?

한편으로 우리 사회가 바뀌지 않는 건 무지나 정보의 부족보다 현실적인 힘의 역학관계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시민단체나 시민사회의 힘보다 정부나 대기업, 그들의 지배를 받는 대중매체의 힘이 훨씬 강하기 때문에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바꾸기 어렵다는 얘기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시민단체나 시민사회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해지거나 정부나 대기업, 대중매체의 힘이 급격하게 약해지지 않는 한 변화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런 조건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일처럼 결론은 분명하지만 현실적인 방법을 찾기 어렵다.

그런데 문제를 조금 꼼꼼히 뜯어보면 정부나 재벌, 언론사라는 개별 정치세력만큼 심각한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방자치제도 실시 이후에도 중앙정부가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점, 중앙정부에서도 대통령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점(제왕적 대통령제도), 지방정부에서도 단체장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점(로컬 로얄 패밀리), 토건자본과 권력의 결탁관계, 중앙언론이 전국을 지배하는 현상 등이 개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구조만 바뀌더라도 개발주의의 힘이 제법 약해지겠지만 이 역시 쉽지 않은 과제이다. 더구나 세계화가 개발주의를 부추기는 측면도 나타나고 있고, 전 지구적인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논리가 개발과 발전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구조적인 문제이기에 쉽게 해결되기 어렵지만 다른 한편으론 민주화가 이런 문제점들을 서서히 해결하리란 기대도 있다.

하지만 그런 기대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도 있다. 시각을 조금 더 넓혀보면 우리 사회의 인식은 아직도 개화기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 19세기 개화를 이끌었던 인물들은 백성이 근대적인 국민으로 거듭나서 주체로 성장할 때까지 입헌주의를 유보하고 관료들의 효율적인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관료들이 국정 운영의 주체가 되어 국가 자원과 국민 역량을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배분․조직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는데, 과거제 폐지와 성과급 제도의 도입, 그리고 관리의 상공업 종사 허용 등”을 생각했다(허동현, 2000: 257). 한국사회에서 국익이나 공공성은 시민사회의 합의가 아니라 정부조직의 지시나 발표로 정의된다.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는 이런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회의 인식이 이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한편으론 지식인들의 탓도 크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시민사회의 힘을 강화시키는 본래의 역할보다 권력이나 자본과 결탁해서 이익을 보는데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경향신문 특별취재팀의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후마니타스, 2008)은 지식사회의 암울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노골적인 결탁이 아니더라도 지식인의 자율성 자체가 정부나 자본의 영향을 받으며 흔들리고 있다. 예를 들어 지방자치와 관련된 연구들은 “제도도입과 분권 등 전체적으로 ‘제도’의 수준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지방자치의 발전에 대한 평가 역시 제도적 변화수준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을 띤다. 반면에 “궁극적인 서비스의 개선과 자치과정 그리고 실제적 삶의 질은 연구의 대상에서 미미한 부분을 차지”하고 “그 결과 주민들이 체감하는 지방자치의 효능감 내지 소망성과 연구자의 시각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존재”한다(이종수, 2008: 45). 지난 20년 넘게 민주화의 과정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시민사회의 역량을 강화시킬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안들은 아직도 지식사회의 중요한 화두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지식사회와 시민사회가 괴리되면서 묘한 긴장관계마저 생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구조를 변화시킬 새로운 합리성이 등장하기 어렵다.

이런 다양한 조건들이 맞물려 한국사회의 변화를 가로막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이런 조건들을 강요하는 한국의 강력한 관료제도가 존재한다.

 

 

2. 민주화와 한국의 관료제의 확장

 

경기도 성남시의 경우 민선 1기부터 4기까지 단체장 모두가 구속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현재의 시당국은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을 선언했다. 그리고 대다수의 국민이 반대의사를 밝혔지만 4대강사업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 사회의 민주화가 진행되는 과정에 왜 이런 어이없는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질까? 정치학자 조현연은 이렇게 답한다. “민주화는 국가를 운영할 집권 정치 엘리트와 선출되지 않은 국가행정관료 엘리트 간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요구하면서 일종의 권력투쟁이 개시된다. 정치 엘리트들이 선거에 의해 선출되지 않는 국가관료에 반대해서 자신들의 목표를 촉진하기 위해 투쟁하게 된다는 사실 자체는, 투쟁의 결과가 어떻든 관료제의 권력 표시인 동시에 선거와 민주적 절차에 대해 위협을 제기할 수 있는 관료제의 능력 표시인 것이다. 결국 ‘국가관료제가 민주주의의 딜레마를 창출’하는 가운데 정치 엘리트와 국가관료 엘리트 사이에는 끊임없이 긴장과 갈등이 발생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은 하나의 공생적 관계를 이룬다.”(조현연, 2009: 139) 즉 민주화가 진행되더라도 관료제의 능력과 힘은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기에, 정치 엘리트들은 자신의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관료들과 협조하며 공생해야 한다. 소수의 진보적인 인물들이 권력을 잡더라도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힘든 건 바로 이 강력한 관료제 때문이다. 민주화가 진행되더라도 자동적으로 관료제가 몰락하지는 않는다.

일찍이 베버는 이런 현상을 예언했다. 중앙집권화된 거대국가가 자신의 행정적인 업무를 양적으로 늘려가면 대중정당이나 다른 정치세력도 그에 발맞춰 관료화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관료와 대표자의 유착 현상은 이미 예견된 일인지도 모른다. 관료제는 '수동적 민주주의(passive democracy)'의 출현, 즉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평준화(the leveling of the governed)와 동시에 진행된다.

그런 점에서 민주화는 관료제의 힘을 빼기는커녕 그 힘을 강화시키기도 한다. 실제로 민주화와 복지국가를 지향하면서 전체 관료기구의 규모가 계속 늘어났다. 그리고 시민의 삶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국가기구를 운영하는 관료들은 끊임없이 지식의 체계를 축적 발전시켰다. 한 국가나 지역의 인구이동․기예․농업기술․주민의 건강상태․산업기술에 대한 조사는 특정한 권력과 지식이 연관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지식의 확보 없이는 통치가 매우 잠정적이고 불안정한 수준에 머물 것이기 때문에, 지식은 그 지식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권력 체계와 순환관계로 이어져 있다. 마찬가지로 지식은 권력 효과들을 유도하고 확장한다(윤평중, 1992). 즉 지식과 권력은 분리되지 않고 바로 지식이 국가의 행정적 능력을 강화시키고 권력효과를 확산하는데 일조를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중립적이라 여겨지는 것들이 실제로는 우리를 관리하고 감시하기 위한 장치이다. 민주화 시기에 관료제는 자기 조직의 합리성을 더욱더 부각시키면서 권력을 효과를 극대화시키려 한다.

물론 관료들이 대통령이나 지방자치단체장의 의지를 무조건 거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자신들의 이해관계나 합리성이 침범당한다고 느끼면 관료조직은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이를 민주화의 논리로 포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김대중 정부가 관료제의 개혁을 위해 개방형 임용제도를 마련하자 관료들은 강하게 저항했다. 군사정부 시절과 달리 민간정부 하에서 한국의 관료들은 “정치권력으로부터 부여받은 지위의 안정성과 재량권이 이미 제도화됨에 따라” “최고지도자를 1차적인 봉사대상으로 삼지 않고 자신의 제도적 이익을 1차적인 봉사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주경일․김미나, 2006: 188) 이런 저항은 고위관료일수록 더욱더 강해지는데, 그것은 이들의 태생 탓이기도 하다. 1977년부터 1987년까지 사관학교 출신들을 대거 일반직 5급 공무원으로 특별채용하는 유신사무관제도가 실시되었는데, 2001년까지도 육사출신이 중앙부처의 1~3급 고위직 중 7%를 차지할 만큼 그 잔재가 남아 있다(주경일․김미나, 2006: 283).

민주화를 거치면서 과거 권위주의적인 지도자에게 복종하던 관료제는 이제 상급자, 명령권자에 대한 복종으로 자신을 변화시킨다. 이런 변화는 특정한 효과를 불러오는데, “최고 위치의 한 사람을 제외하면 한 상급자는 또 다른 상급자의 부하이며, 위에서 받은 명령을 아래로 전달하고 그 성취 여부를 평가하는 입장에 서 있다. 따라서 모든 관료들은 아닐지라도 거의 대부분의 관료들은 자신에게 떨어지는 명령의 기원을 모호하게, ‘저기 위에서’라는 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은 이중의 효과를 낸다. 첫째, 책임의 ‘부동浮動’이다. 책임의 소재를 정확하게 짚고 묻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지며, 단지 실제적인 목적에서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는 결론으로 몰리게 된다. 둘째, 이들 관료들이 따라야 할 명령은 절대적이고 저항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신의 명령’에 비해 결코 덜 강력하지 않다”(바우만, 2009: 146~147). 이런 관료조직의 성격은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훼손시킨다.

한국에서는 관료제가 민주주의를 훼손시키는 과정에 다른 요인들도 개입한다. “1960년대 이래 본격화된 산업화와 도시화는 엄청난 공공수요를 유발시켰고 이 과정에서 관료들은 예산, 인력, 규제행위 등을 크게 증대시킬 수 있었”다는 점,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권위주의, 정의(情誼)주의(personalism), 가족주의 문화에 숙달된 국민들의 내면에 뿌리 깊게 자리잡은 ‘관존민비’ 의식”, “분단 상황에서 조성된 반공과 안보 이데올로기, 그리고 성장 이데올로기는 흑백논리와 비밀주의를 조장하고 관료의 독주를 가속화시킴으로써 국민들에게 관료의존적 사고를 뿌리내리게 하였다”는 점, “국회를 비롯한 여타 정책 행위자들이 관료제 권력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였으며, 정치권력의 전문성 저하는 관료제 권력을 상대적으로 신장시키는데 한몫을 하였다”는 점(오재록, 2007: 60~61), “관료들 대부분이 지역적 기반 하에 혈연, 지연, 학연으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박기관, 2004: 45), 5․16쿠데타 이후 관료제 내에 자리잡은 군사문화 등은 한국사회의 특징이다. 따라서 민주화가 진행되더라도 관료제의 힘은 오히려 더 강해질 수 있다.

또한 관료제를 개혁하려는 정책이 정반대의 결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참여정부가 추진한 관료제 개혁의 결과는 그것이 목표했던 ‘자율성’의 향상을 가져오기보다는 하부조직의 ‘자율성’을 축소시키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조성익은 이런 결과가 나타난 이유를 “정부가 추진한 관료제 개혁의 두 가지 측면인 ‘수평적인 의사결정구조’와 ‘표준화된 평가체계’의 작동원리”에서 찾는다. 수평적인 의사결정구조로의 개편은 조직간의 현실적인 힘의 격차를 무시함으로써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해소시키기는커녕 외려 힘의 집중화를 가져왔고 기존의 피라미드식 관료제 하에서 하부조직들이 ‘해석’을 통해 누리던 자율성마저 축소시킨다. 그리고 표준화된 평가시스템은 중앙이 사업의 목표와 계획을 제시할 뿐 아니라 모든 과정을 표준화하고 표준화된 기준에 따라 평가하기 때문에 각 조직의 장이 발휘할 리더십마저 줄이고 획일화시켰다(조성익, 2007: 147~150).

그런 점에서 관료제의 철창을 벗어나려면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우리의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평론가 김종철은 이렇게 얘기한다. “민주주의는 몇몇 제도로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단계에 이르러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돌보지 않으면 죽어버리는 생명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원점에서 다시 시작되고, 순간순간 되풀이하여 쟁취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엘리트에 의한 권력독점 현상이 구조적으로 강화되기 쉬운 오늘의 상황에서는 민주주의의 생명은 풀뿌리 민중이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이 거리로 나오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음이 분명하다. 정말로 살아있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민중이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정당하게 요구하고, 그들의 민주시민으로서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는 것이 허용되고 있으냐 없으냐가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김종철, 2007: 5)

나아가 러미스는 정치와 경제를 다른 차원으로 여기는 우리의 사고방식이 문제라 지적한다. 역사상 어느 사회도 그것이 분리되지 않았고 그런 분리를 이용한 자들이 기득권층이라고 러미스는 지적한다. 공장과 사무실에서 복종에 길들여지는 사람들이 정치영역에서 능동적인 시민이 될 수는 없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기득권층은 일자리와 임금 등을 무기로 시민들의 발을 묶으려 든다는 얘기이다(러미스, 미출간). 정치민주화에만 매달려온 우리사회의 민주주의가 이토록 취약한 것도 그 때문이고 재벌그룹의 사장이 대통령이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민주화는 단순히 민주적이라 불리는 제도의 도입을 뜻하지 않는다. 그 자신의 합리성과 이성, 감성을 가지지 못한 제도는 관료제의 틀 속으로 쉽게 포섭될 수 있다. 민주화와 민주주의는 민중이 권력을 가지고 실제로 통치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민중이 그럴 의사를 비치고 실제로 행동할 때에만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정당과 선거로만 논의된 우리 사회의 민주화는 본질을 건드리지 못한 껍데기나 신기루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3. 관료제의 독자세력화와 난개발의 확대

 

과천청사에서 근무했던 한 공무원의 자기고백적인 이야기는 한국의 관료제가 다른 이해관계를 대변하며 그 과정에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수준을 넘어서 독자적인 이해관계를 만들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이경호, 2006).

 

“재무부가 조감법 폐지와 금융업의 공정거래법 적용에 결사 반대하는 이유는 관치금융 때문이야. 관치금융을 펴야 지금처럼 계속 낙하산 타고 금융기관에 내려갈 수 있으니까.”

“그리고 관치금융을 펴야 정책자금 갖고 장난칠 수 있고, 조세나 관세를 감면해주면서 술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어. 그래서 금융발전법 제정을 반대하는 거야.”

……

“용역비 있잖아? 난 용역비가 아까워죽겠어. 연구할 게 뭐가 있다고 왜 매년 수천억 원의 용역비를 낭비하는 거야?”

“용역비, 그거 눈먼돈이야. 먼저 보는 놈이 임자야.”

“정말이지 그런 놈의 용역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모르겠어.”

“소용이 있지. 건설부와 상공부는 산하연구기관에 용역을 주면서 용역보고서에 자기네가 원하는 내용을 써넣어 작성하라고 한 대. 그래서 소용이 있는 거야!”

“자자, 술이나 먹어. 쓸데없는 예산이 어디 용역비 뿐이겠어? 판공비, 출장비, 일반수용비도 다 쓸데없잖아?”

“그런 그렇고 우린 언제까지 가라공문을 작성해야 하는 거야? 가짜 공문으로 예산을 빼내자니 일말의 양심이 느껴져.”

“판공비를 차라리 장관․차관․국장에게 월급으로 줘버렸으면 좋겠어. 어차피 그 사람들 주머니로 들어갈 거니까”

……

“건교부는 택지개발을 위해 평소 산하 연구기관에 신도시개발관련 용역을 주고 있어요. 이 용역에는 토질 전문가, 지질학 전문가, 문화재 전문가 등이 다수 참가해요. 이들은 지표조사를 통해 지질조사, 토양조사를 하고, 조사가 끝나면 어느 지역이 양토인지 사토인지 파악을 하지요. 동시에 어느 지역이 택지개발지역이고 택지개발가능지역인지를 결정하구요. 그리고 용역기관은 이런 결과를 담은 ‘신도시 개발 용역보고서’를 건교부에 제출하지요. 그런 후 입소문을 통해 관련 개발정보가 좌악 퍼져 건교부 직원들은 다 알게 되요. 그리고 그들은 이 정보를 자기 친인척에게 알려주고 땅을 구입하라고 하지요.”

“아니? 그게 사실이야?”

“네, 사실예요. 그리고 건교부 주택국은 이런 ‘신도시개발 용역보고서’를 항상 몇 건씩 비치해 놓고 있어요. 그러다가 아파트 투기가 일어날 때마다 적당한 시간에 적당한 용역보고서를 끄집어 내어 ‘어디어디 신도시개발!’하고 떠드는 거예요. 그러니 판교신도시 개발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에요.”

“그래서 1989년도에 아파트 200만호 건설할 때, ‘분당․일산 신도시건설!”, “평촌․산본․중동 신도시건설!’하면서 호들갑을 떨었군.”

“그런데 웃기는 것은 이런 ‘신도시 개발 용역보고서’가 5년 전부터 강남 중개업소를 돌아다녔다는 거예요. 중개업자나 기획부동산 놈들이 돈주고 개발정보를 빼낸 거지요. 이들은 땅투기꾼․복부인․건설사에게 이 용역보고서를 보여주면서 땅을 구입하라고 부추기지요. 그래서 정작 건교부장관이 신도시개발정책을 발표할 때는 그 지역은 이미 건교부 고위직․건교부 직원 친인척․투기꾼․복부인․건설사 놈들이 땅 구입을 완료한 상태지요.”

“건교부 놈들이 부동산투기를 완전 조장하고 있군!”

 

그리고 예전에는 관료들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부정부패를 일삼았다면, 이제는 퇴직 이후를 염두에 두고 은밀히 기업과 결탁하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회전문 현상’이다. 관료들은 퇴직한 뒤에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기업이나 이익집단에 취직해서 공직에 있었을 때의 지식과 경험, 인적인 네트워크를 활용해 정책을 관철시키고 많은 이득을 취한다. 그리고 퇴직 이전에도 그런 관계를 염두에 두고 주요 정책을 결정한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2009)에서 드러나듯이 기업들은 관료들의 이런 관심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정책의 방향 자체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만든다.

그러다보니 한국의 개발사업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큰 사업으로 변한다. 경인운하가 대표적인 사업이다. “경인운하 사업은, 굴포천 유역의 홍수 예방을 위해 1992년 확정된 2710억 원 규모의 ‘굴포천 종합치수사업’이 3년 만에 국비 4382억 원을 포함해 총 1조 8429억 원에 달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로 바뀐 것이다. 이는 결국 중동 건설경기와 수도권 신도시 붐이 사라진 1990년대 중반 건교부․수자원공사․건설업계 등 거대 토목세력들이 새로운 시장 개척을 위해 이 사업을 창조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업은 현재 총 사업비 1조8429억 원 중 4382억 원의 정부예산이 투자되어, 2001년 하반기 착공하고 2005년 1차 완공 및 운영을 시작할 예정으로서, 향후 40년간 민간이 운영한 뒤 국가로 반납하게 되어 있는 민관 합동의 대규모 국책사업이다.”(오관영, 2005: 115~116)

이렇게 관료들이 공공성을 내세워 ‘사적인 이해관계’를 추구할 뿐 아니라 관료조직들은 ‘조직의 이해관계’를 놓고 조직간의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관료 개인이 가지는 권력도 있지만 하나의 집단으로서 관료조직이 가지는 권력도 있는데, 정부조직 내에서 이 권력은 편차를 가지고 같은 기관 내에서도 경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실제로 6개의 중앙부처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분석결과를 보면, 외부로 공개되지 않는 부처간의 이해관계 갈등이 빈번하고, 이런 갈등은 정책집행단계보다 정책입안단계에서 많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런 갈등은 권력을 더 많이 가진 부처에 유리한 쪽으로, 즉 예산이나 인력규모, 기관의 법적․공식적 권한, 대통령의 관심과 지지를 더 많이 받는 부처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결되고, 그러다보니 정책의 종합성과 일관성이 손상되기도 한다. 이 조사는 비교적 권력이 강한 부처로 재정경제부, 기획예산처, 중앙인사위원회, 행정자치부, 외교통상부, 법무부를 꼽는다(박천오, 2005: 22~23). 그리고 45개 중앙행정기관을 대상으로 한 또 다른 조사는 재정경제부, 검찰청, 국방부, 교육인적자원부를 ‘빅4 권력기관’으로 꼽는다(오재록, 2007: 324).

이런 다양한 부처들이 서로 경쟁을 벌이면서 자기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는 여러 가지 사업들을 벌이고 있는데, 아래의 표처럼 부처들이 경쟁적으로 도시․지역개발사업을 진행하고 있다(진미윤, 2005).

중앙부처나 광역․기초자치단체의 관련 부서가 이런 개발사업을 직접 추진하거나 개발공사, 소속․산하․유관기관들이 경쟁적으로 지역개발사업을 추진한다. 심지어 아래의 표에서 드러나듯이 같은 부처 내에서도 비슷한 사업이 진행되기도 한다(차미숙․박준화, 2008: 123)

분야별

유사사업

소관부처명

농산어촌 및

낙후지역개발사업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

․어촌종합개발사업

농림수산식품부

․어촌체험마을 조성사업

․어촌관광 활성화사업

농림수산식품부

지역혁신사업

․지역연고진흥사업

․지역혁신센터

․지역혁신인력양성사업

․산학협력중심대학육성

지식경제부

․지방중심대학육성사업(NURI)

․산학연협력체제활성화

․지방대학특화분야육성

지식경제부

 

자신의 사업영역을 확대하고 예산을 확보하기 위한 관료조직들의 경쟁이 점점 더 치열해지는 반면, 이를 조정할 수 있는 조직내 또는 조직간의 시스템은 마련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중앙정부가 직접 사업대상을 선정하다보니 지방자치단체의 사업기획은 중앙정부의 기획을 따를 수밖에 없고 공모로 사업을 진행하다보니 지방자치단체간의 과도한 경쟁이 유도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아래 그림에서 드러나듯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업이 중복되어 진행되고 있다(진미윤, 2005). 한마디로 지역발전을 내세운 난개발 사업들이 전국을 공사판으로 만들고 있다.

이처럼 관료와 관료조직이 독자적인 이해관계를 가지다보니 민주화가 진행될수록 개발사업이 줄어들기는커녕 난립하는 모순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사업들은 주민/시민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관료조직이나 그들과 결탁한 개발동맹에만 이득을 가져다주지만, 관료조직이 공공성을 독점하다보니 시민사회의 목소리나 전략이 반영되지 않고 있다. 더구나 민주화의 영향으로 시민사회의 당파성이 사라지면서 시민사회의 목소리는 관료조직이 의도적으로 만든 관변조직의 목소리와 뒤섞이거나 그것에 묻히기도 한다.

 

 

4. 결론: 풀뿌리의 전략과 인권에 기반한 발전

 

관료제가 공공성을 독점하고 자신의 합리성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동안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시민단체나 지역단체의 활동이 힘겹게 이어져 왔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건 관료제의 합리성을 비판하며 쇠창살을 벗어날 수 있는 대안적인 합리성을 체화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동안 국가가 독점해온 공공성의 영역을 해체하거나 대체하려는 시도들도 매우 부족했다. 그런 점에서 국가나 시장에 대항할 수 있는 사회의 밑천을 모으고 강화시키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하승우, 2010). 단 그런 노력은 관료주의 방식을 통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요구하는 풀뿌리의 전략이 중요하다.

관료제의 특성을 보면, 일단 정책이 입안되고 집행되기 시작하면 그것을 막을 방법을 찾기 어렵다. 따라서 용역보고서로 시작되는 정책의 입안과정에 관심을 두며 참여해야 하고 겉으로 드러난 단기적인 사업만이 아니라 중․장기적인 계획․투융자심사에도 관심을 둬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적으로 생각하고 지구적으로 행동하라’는 러미스의 주장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전 세계에서 온 토착민들의 대표들은 자신들의 전통 공동체의 가치를 강하게 주장했고 댐계획과 벌목, 리조트 건설, 다른 형태의 ‘개발’로 파괴되어가는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국제적인 지원을 호소했다. ‘지역적으로 생각하고, 지구적으로 행동하라.’ 그리고 그들의 지역적이고 지구적인 행동 모두에서 이런 종류의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얼굴을 맞대는 집단을 형성하곤 했다. ‘경향(tends)’이 아니라 그것이 이런 집단을 조직할 때에만 운동은 존재하고 권력을 가졌다. 이것은 사람들이 얼굴없는 대중으로 단지 ‘담고’ 있는 국가나 정당, 제도가 아니다. 운동은 자율적으로 서로 연결된 집단들의 네트워크로 존재했고 그렇지 않고는 존재하지 못한다.”(러미스, 미출간)

이런 경향을 더욱더 강화시킬 수 있는 방안으로 1990년대 중반 이후 국제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인권에 기반한 접근법(HRBA, Human Rights Based Approach)’을 들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존엄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HRBA는 그와 관련된 발전의 전 과정, 즉 발전정책의 기획, 수립, 이행, 평가 및 발전 이익의 향유에 있어 발전의 대상이 아닌 주체로 활동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한다. 그리고 이 요구는 개별 국가의 법률만이 아니라 국제인권규범에 근거해서 국가에게도 의무를 부과할 수 있다..

HRBA는 참여와 북돋움(empowerment), 책무성(accountability)을 중요한 원리로 제시한다. 참여는 실질적이고 능동적이고 자유로워야 하고 그 과정에서 배제되기 쉬운 소수자나 취약계층의 참여를 정책의 기획, 결정, 이행, 평가, 발전이익을 누리는 전 과정에서 반드시 보장해야 한다. 그리고 참여의 방식도 공청회나 설명회, 토론회 뿐 아니라 시위 및 피켓팅, 항의방문 등 사람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전달할 수 있는 다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아울러 의미있는 참여를 위해 표현의 자유나 단체 행동권 등의 권리만이 아니라 교육권과 정보 접근권 등도 보장되어야 한다. 북돋움은 개인이나 집단이 역량을 서로 북돋우면서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며 존엄성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책무성은 개인이나 집단이 스스로 발전의 주체가 되어 자신에게 위임된 권력과 권한을 합당하게 행사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것을 뜻한다(유해정, 2009).

<국제앰네스티>의 아이린 칸 사무총장은 리우선언 이후, 아후스협약Aarhus Convention으로 알려진 국제적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고 정부행정과 공공참여에 대한 내용이 그것에 포함되어 있다고 얘기한다. 특히 정부는 참여자들에게 다섯 가지 기준을 지켜야 한다(칸, 2009: 240)

①정부의 결정 이전에 참여가 이루어져야 한다. 모든 선택사항들이 효과적으로 개방된 상태에서 공공의 참여가 이루어져야 함.”

②중요한 사항들은 정부가 먼저 공지해야 하며 과정과 참여 가능성에 대해서도 알려줘야 한다.

③참여자는 청문회나 공청회 등을 통해 의견을 전달하거나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④정부당국은 의견을 수렴할 의무가 있다. 근거 없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진지한 검토 없이 전달된 의견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정책결정시에는 적절한 근거와 이유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⑤법에 의해 공인받은 단체나 독립기관, 혹은 법원에 의한 합법적 승인이 있어야 정책결정과정이 마무리된다. 실질적인 참여란 이런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도 된다.

따라서 국제적인 기준에 따라 국내의 변화를 요구하는 전략도 고민할 수 있다.

어느 한 가지 방법이 만병통치약으로 작용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다양한 노력이 모인다면 숨을 쉴 수 있는 여지가 조금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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