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에 보낸 글인데, 제목이 바뀌었다.

가급적 예의를 지키려 한 글인데 제목이 바뀌어 좀 그렇게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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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불편했다기보다는 내용을 다루는 방식과 문체 때문이었다. 문체를 누누이 강조해온 분이 이런 좋은 얘기를 왜 이런 문체로 썼을까?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를 읽은 이후 고미숙 선생의 책을 읽을 때면 비슷한 불편함이 느껴진다. 우린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얘기하면 될 것을, 너네는 왜 우리처럼 못 사니라고 쪼아대니 불편할 수밖에.


그래서 서평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지 않았다면 굳이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읽지 않았을 책을 굳이 읽고 서평을 쓰는 오지랖은 불편함을 전하고 다음번에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수다를 책으로 엮었습니다


이 책이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서평을 부탁받기 전에 알고 있었다. 동네 청년들과 함께 책을 읽는데, 그 모임에서 고미숙 선생의 『호모 에로스』를 읽었다. 책을 읽고 블로그에 ‘에로스를 글로 배웠습니다’라는 감상문을 썼다. 책의 제목은 에로스인데 몸이나 에로스에 관한 구체적인 실화는 없고(심지어 원나잇스탠드에 대한 적개심이 드러나고!) 난데없이 세미나 얘기가 튀어나와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책을 읽다보니 <지붕뚫고 하이킥2>의 ‘애교를 글로 배웠습니다’ 편이 생각났다, 이런 감상문이었다. 그런데 출판사가 이 글에 새 책이 나왔다는 트랙백을 걸어 놨다(불편한 글에도 트랙백을 거는 출판사의 센스?).


사실 『호모 코뮤니타스』도 비슷한 느낌으로 읽었다(이게 나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호모 코뮤니타스』의 구성은 『호모 에로스』와 비슷했다. 요즘 세태에 대한 적당한 비판(주변 사람들에게 적절히 모은 정보들), 돈을 잘 벌고 쓰는 노하우, 돈에 대한 상상력, 에필로그이다. 두 책의 다른 점은 고미숙 선생에게 적절한 정보를 제공한 세 사람의 글이 함께 들어가 있다는 점 정도? 구성이 책의 내용을 말해주지는 않지만, 그리고 시리즈라서 구성이 비슷할 수도 있지만, 그 구성상 현실에 대한 재기발랄한(?) 비판이 달인의 노하우로 잘 연결되지 않는다.


모두가 부유한 삶이라는 헛된 꿈을 향해 질주하는 우리 사회의 풍경이야 이미 잘 알려진 바이다. 이 책은 그 대안으로 학교에 다니지 말고 가족에 얽매이지 않고 젊었을 때 사서 고생하라고, 비슷한 욕구를 가진 사람들과 더부살이하며 공동체를 꾸리라고 충고한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만한 좋은 얘기들이다.


그런데 이 얘기들은 몇 권의 책을 읽는 세미나 시간에 나눴던 수다를 책으로 옮긴 듯하다. 물론 그런 수다의 내용이 소중하지만 그런 수다가 책으로 나오려면 적어도 몇몇 사람들의 “개별적이고 일상적 차원의 윤리나 실천”만이 아니라 “경제구조나 정책적 사안”도 담아야 하지 않을까? 더구나 “요즘 부모들이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명분 가운데 하나가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다.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자식들이 기죽지 않고 살려면 재산이 있어야 한다는 명목하에서”라는 현실진단이나 “이게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아주 평균적인 행보다. 이 행보가 주욱 이어지다 보면 ‘쇼핑족들의 헤븐’이라는 홍콩까지 드나들게 된단다”라는 진단은 좀 당황스럽다. 수다를 떠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현실일 수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 진단을 현실감있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몇몇 사람의 수다가 아니라 사회현실을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면 조금 더 사회계층 피라미드의 밑으로 내려가야 할 것 같다. 대안을 자유로이 선택하며 누릴 수 있는 사람들보다 대안에 냉소하고 때론 대안을 증오하기도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책의 좋은 얘기들은 불가능한 것의 상상이 아니라 가능한 사람들의 여유로 그치지 쉽다.


예를 들어, 책은 가족과 분리된 삶을 찬양하지만 사실 그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들만의 이야기이다. 마치 몇몇 대안학교들이 ‘자기 아이들’을 공부도 잘 하고 놀기도 잘 놀고 예술적인 아이로 키우려는 부모들의 욕망을 반영하듯이. 하지만 가족을 거북이등껍질처럼 이고 살아 온 사람들에겐 “부모의 가난은 자식한테는 차라리 축복”이라는 말처럼 불편한 말도 없다.


격월간 잡지 《민들레》 69호에서 현병호 선생은 자발적 가난이라는 말에 대한 불편함을 털어놓았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단지 불편한 것일 뿐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 말을 만든 사람은 아마도 지독한 가난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리라. 가난은 불편을 넘어 생존을 위협하는 두려운 상황이기도 하다. 아침에 배달되는 도시락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버티는 독거노인이나, 아이를 키우면서 끼니 걱정을 해본 사람이라면 저 말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게다. 친구들 눈치를 보면서 무료 급식을 받아야 점심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아이들에게도 가난은 불편을 넘어서 자존감을 갉아먹는 벌레 같은 것이다.” 책을 읽으며 비슷한 불편함을 느꼈다.



우리들의 탐욕 아니면 청승, 그들의 공동체?



책을 읽으며 가장 당혹스러웠던 부분은 강연료 얘기를 할 때이다. 자신의 얘기를 듣고자 청한 단체에게 강연료 얘기를 꺼내고 정신노동의 화폐가치를 얘기하며 “풋, 더 어이없다”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게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게 우연한 만남의 기회와 장을 마련해준 고마운 사람들에게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요구한다, 그러면서도 책 곳곳에서 비노바 바베나 마하트마 간디의 얘기를 칭송하니 어리둥절하다. 바베나 간디도 자신의 얘기를 듣고자 청한 단체에게 그렇게 반응했을까?


이런 불일치가 실수로 느껴지지 않는 건 마쓰모토 하지메의 행동을 “화폐에 대한 통쾌한 복수”라고 얘기하면서 <수유+너머>가 보증금 1억에 월세 천만 원을 내며 돈이 “흘러오는 만큼 다시 흘러가게” 하는 단체라고 자랑(?)할 때이다. 허나 일본에서 곧 헐릴 건물을 수리해서 활용하는 ‘아마추어의 반란’과 비교한다면 <수유+너머>는 이미 가난뱅이와 무관하다(오히려 서울 해방촌의 ‘빈집’이 하지메와 더 가깝다). 책을 읽다 문득 개그 콘서트의 행복전도사가 생각났다. “이 정도는 누구나 하잖아요. 이 정도도 못하면 그건 공동체가 아니잖아요, 그냥 청승이지.” 옛날 살던 옥탑방에서 길 건너편 래미안 아파트를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한겨울에 수도파이프 얼어 터질까 걱정하며 주방창문 열고 담배 한 대 피는데, 저쪽에서는 반팔 입은 사람들이 거실에서 즐겁게 놀고 있었다.


책에서 고미숙 선생이 예로 드는 대안은 좋은 세상이지만 <수유+너머>와 관계를 맺은 사람들만의 세상이다. 그 공동체 밖의 세상에 관한 얘기는 거의 없고 가끔 있더라도 언론에서 다뤄지는 기사처럼 매우 추상적이고 현실감이 떨어진다(참고로 얘기하자면 한국에 분당시는 없고 <문탁네트워크>는 용인시 수지구에 있다). 자기 공동체의 단단함과 이런 삶이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그 밖의 세계를 접하지 않고 자기 세계의 원리가 보편타당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수유+너머>가 쪼개져서 전국 곳곳으로 흩어지고 있다지만 그 공동체는 여전히 자기만의 원리로 움직이는 공동체이다(<수유+너머>라는 이름을 내건 단체가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는 게 인문학적으로 긍정적인지도 잘 모르겠다).


나 역시 공동체라는 말을 좋아하지만 가급적이면 말을 가려서 쓰는데, 그 이유는 공동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자기만족감 때문이다.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고 즐기는 건 그들의 자유이다. 허나 그런 공동체가 대안공동체를 자처하며 공동체 밖의 사람들을 가르치려 들면 좀 불편해진다. 화폐 없이 생활하는 공동체들이 많아지는 건 분명 우리사회의 축복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재미있고 행복하게 사니 우리의 방식을 따르라고 말하는 건 오만이다.


이 세상에는 몰라서 못 사는 사람보다 알아도 못 사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도 자신의 생활공간에서 나름 열심히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는 생각대로 살 수 있는 사람들의 디딤돌이 아니라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디딤돌이 될 때 운동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런 공동체는 공간 내에서의 차이와 증여보다 공간 밖과의 강한 충돌을 겪으며 조금씩 확장될 것이다. 독자로서 나는 그런 충돌에 관한 얘기가, 승승장구하는 사람들의 얘기보다 실패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리는 사람들의 얘기가 더 궁금하다.


돌아가신 장일순 선생은 이런 말을 남겼다. “도둑을 만나면 도둑이 돼서 얘기를 나눠야 해요. 도둑은 절대 샌님 말은 안 들어요. 저 사람도 나와 같은 도둑이다 싶으면 그때부터 말문을 열기 시작한단 이 말이에요. 그때 도둑질을 하려면 없는 사람 것 한두 푼 훔치려 하지 말고 있는 사람 것을 털고 그것도 없는 사람과 나눠 쓰면 좋지 않겠냐고 하면 알아들어요. 부처님은 마흔네 개의 얼굴을 갖고 계시다는 말이 있는데 말하자면 이런 거지요.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과 하나가 된다.’ 이 말이에요.”

문정현 신부님, 문규현 신부님, 두 분을 뵈면 정말 신부님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부복보다 평상복 차림일 때가 훨씬 더 많은 신부님이고 성당보다 거리나 집회에서 더 자주 뵐 수 있는 신부님이지만 그 어느 종교인들보다 더 많은 감동을 받게 됩니다.
생명, 평화라는 말은 두 분의 모습에서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라 생생한 활동으로 꽃을 피우지요.
그런 두 분이 형제라는 사실이 한편으로 놀랍고 다른 한편으론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번에 문정현 신부님이 콘서트를 여십니다.
용산참사 현장을 지키러 용산에서 생활하실 때 잠깐 짬을 내서 뵌 적이 있었는데(저랑 같이 사는 사람의 덕입니다),
그때 잠깐 지나가는 말처럼 얘기되던 콘서트가 11월달의 공연으로 잡혔습니다.
문정현 신부님의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정말 아름다운 사진이죠).

11월 4일부터 6일까지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화암홀에서 열립니다.
매일 다른 테마로 진행되고, 입장료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감동을 받은 만큼 성금으로 내라니 이 역시 신부님의 콘서트다운 생각입니다.
기회가 되면 콘서트에 들려 신부님의 얘기도 듣고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돌아갈 성금도 팍팍 내시길...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 산후조리원에 있을 때, 문부식 선생에게 전화가 왔다.
예전에 프레시안에 썼던 삼성불매운동 원고를 보완해 달라는 전화였다.
2편의 글을 썼는데, 조금 더 쓰고 싶은 글이 있었는데 좀 해괴한 논리를 펴는 분이 있어 그냥 말았다.
잘 되었다 싶어 애기 보며 몇 자씩 꾸역꾸역 고쳐서 보내드렸는데 어제 책이 나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제목처럼 굿바이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고...
김상봉 선생이 180매의 장문의 원고를 썼다고 하는데, 그 글도 한번 읽어보고 싶다.
그나저나 김용철 변호사는 잘 지내시나 모르겠네.
처음 봤을 때와 달리 두번째 봤을 때는 그 나름의 유머감각에 조금 즐겁기도 했는데...

지금 당장 삼성을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논의의 시작이 되면 좋겠다.
함께하는 시민행동과 공동기획하는 [청년정치학교]가 개강을 앞두고 있다.
10월 중순부터 본격적인 홍보와 모집에 들어갈 듯.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내세우며 청년들을 지방의회에 대거 진출시킬 계획이다.
2014년 지방선거를 염두에 두고 지역에서 활동하는 청년들의 수를 늘리고 이를 정치활동과 연계시키는 구체적인 지원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10년 내에 대학을 하나 만들겠다고 얘기하고 다녔는데, 그 첫 단계이다.
현실과 괴리된 정치학을 다시 현실로 끌어내리며 냉소와 불신을 넘어선 그 무엇인가를 마련해볼 생각이다.
정치학에서 시작해 하나씩 분과를 만들다보면 나중에는 종합대학이 되지 않을까?ㅎㅎ

곧 다시 공지...
 

추석 전날 무섭게 내린 폭우는 우리 사회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철도와 지하철의 운행이 중단되고 다리의 통행이 중단될 만큼 폭우의 힘은 강했다. 공공시설의 피해 외에도 반지하나 지하에서 생활하거나 일하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삶터와 일터를 잃어버렸다. 추석대목을 바라던 장터의 상인들도 하늘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특이하게도 한반도 전역에서 이런 일이 똑같이 벌이지지 않았다. 서울과 수도권에 폭우가 내리는 동안 남부지방엔 햇빛이 쨍쨍했다. 그리고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서도 강우량이 큰 차이를 보였다. 그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앞을 떠나지 못했다.


아마도 앞으로는 이런 자연재해가 더욱더 잦아질 것이고 그 피해도 커질 것이다. 한국의 기후가 아열대로 바뀌면서 장마가 없어지고 열대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생태계 파괴가 불러올 재난은 예측하거나 막는 게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큰 공포와 불안을 심어준다.


하지만 폭우가 내리는 동안에도 4대강에서는 포크레인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재난을 겪으면서도 그 원인을 제거하기는커녕 왜 재난을 부채질할까? 생태계 파괴의 심각성과 위험을 사람들이 몰라서일까? 그렇지는 않다.


힘없는 사람들에겐 그런 사업을 결정할 권한이 없다는 점도 한 이유이지만 재난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이다. 힘있는 자들이 사는 곳은 물에 잠기지도 않을 것이고 설령 피해를 보더라도 즉각 조치나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힘없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는 재난이 힘 있는 사람들에겐 한순간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냉장고와 밥상이 떠다니는 지하 전세방에서 물난리를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알려지지 않지만 영화배우 정우성의 2억짜리 자동차가 물에 잠길 뻔한 일은 트위터를 타고 알려지듯이.


어느 아파트에 사는지가 그 사람을 증명하는 사회에서 재난은 계급을 가린다. 새로 세워지는 고급아파트에는 입주자들을 위한 사우나 시설과 휴양림이 마련되어 있고 도로에는 폭설에 대비한 열선까지 깔려 있다고 한다. 아마도 자연재해가 계속되면 고급 아파트는 재난에 대처할 다양한 시설과 장비를 갖출 것이다. 그리고 보안회사와 감시카메라가 경찰의 몫을 대체하듯이, 그런 아파트가 늘어날수록 공공성의 영역은 줄어들고 재난은 각자가 알아서 대비해야 할 일이 된다. 시간이 지나면 미국처럼 지방정부가 사설기업으로 대체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의 자연재난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의 재난으로 변한다.


더구나 힘있는 자들에게는 재난이 새로운 기회이기도 하다. 태풍 카트리나가 미국 뉴올리언즈시를 물바다로 만들었을 때 정치인들과 개발업자들은 축배를 들었다고 한다. 골치 아픈 빈민가를 보상 한 푼 없이 싹 밀어버렸으니 그들에게는 대홍수가 엄청나게 좋은 기회였다. 쓰나미가 마을을 집어삼켰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한국의 상황은 다를까? 한국에서도 재난이 힘있는 자들에게는 구호금을 떼어먹을 기회, 댐을 만들고 둑을 쌓는 개발사업을 진행할 기회이다. 피해는커녕 더 많은 기회를 누릴 수 있으니 그들이 재난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4대강사업 때문에 보금자리를 잃어버린 농민들이 겪는 고통은 도시에서 반지하와 다세대주택의 주민들이 겪는 고통과 맞닿아 있다. 재난은 사회적 고통을 대물림한다. 이 연관고리를 깨닫지 못하면 힘없는 사람들만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러니 이제 우리도 반격을 준비해야 한다. 마이클 무어의 영화 <자본주의>를 보면, 사유화된 영역을 다시 공공영역으로 전환시키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보인다(주택을 점거하라고 연설하는 하원의원도 보인다). 우리도 재난을 새로운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재난을 피하기 위한 긴급구제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이다. 흉년이 들면 만석꾼의 곳간을 열게 했듯이, 인간이 만든 재난을 바라보며 진보정당이 요구해야 하는 것은 땜질식 대책이 아니라 근본적인 처방이다.


한살림서울생협 장기과제 포럼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안이 아니라 밖에서 무언가를 얘기한다는 건 언제나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한 사람의 삶에 관해 얘기하는 것도 어려운데 여러 사람들의 공동활동에 관해 얘기하는 건 더더욱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어려운 짐을 져야 하는 건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부분들이 때때로 밖에서 관찰하는 사람에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 Arendt)는 “관찰자는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행위자에게는 숨겨져 있는 신 또는 자연의 이러한 계획을 지각할 수 있다. 그래서 한편에는 광경과 관찰자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행위자와 모든 개별사건들 그리고 우연하고 일시적인 일들이 존재한다”고 말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숨겨져 있는 신이나 자연의 계획을 알지는 못하지만 애정을 가지고 한살림의 활동을 지켜보던 사람으로서 그 어려운 짐을 한번 지려 합니다. 다소 불편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서로의 불편함을 드러내야 더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안의 일을 세세하게 알지는 못하기 때문에 <모심과살림연구소>가 2010년에 발표한 ‘한살림조합원 의식조사결과보고서’와 ‘한살림이 만들어가는 지역살림활동’을, 그리고 『죽임의 문명에서 살림의 문명으로』를 참고했습니다. 제가 새로운 과제를 제시할 능력이 부족하기에 그동안 한살림이 주장해온 과제와 성과들을 되짚어보며 그것들이 지금 현실에서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1. 한살림선언과 세계의 변화


한살림운동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의미는 중요합니다. 위기의 시대에 협동운동이 이루어야 할 뜻을 ‘생명사상’이라는 틀로 담아냈기 때문입니다. 다들 그 틀에 관해 잘 아실 터이니 그 뜻에 관해 제가 구구절절 얘기할 필요는 없을 듯하고 그 사상과 현실의 틈에 관해 얘기하려 합니다.


한살림선언은 오늘날 산업문명이 직면한 위기를 핵위협과 공포, 자연환경의 파괴, 자원고갈과 인구폭발, 문명병의 만연과 정신분열적 사회현상, 경제의 구조적 모순과 악순환, 중앙집권화된 기술관료체제에 의한 통제와 지배, 낡은 기계론적 세계관의 위기에서 찾았습니다. 모든 선언은 “이리 될 것이다” 또는 “이리 할 것이다”라는 기대나 의지를 품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살림선언 역시 그런 기대나 의지를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현실은 그 선언을 실현하는 방향이 아니라 이미 20년 전에 지적된 위기들이 더욱더 심각해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위기에 대한 진단은 정확했는데 의지가 약했던 탓일까요? 새만금이나 4대강 외에도 우리가 생활하는 세계 곳곳에서 죽임과 파괴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특히 그런 죽임과 파괴는 바로 이곳 서울에서 결정되어 지방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서울이 바로 그런 위기의 정점에 있고 그런 위기를 세계로 퍼뜨리고 있습니다. 서울을 유지하기 위해 핵발전소나 방폐장이 세워지고 지방의 온갖 자원이 약탈되며 수도권의 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온갖 문명병이 만연되고 있습니다. 재벌중심의 경제구조는 더욱 강화되고 지방자치제도의 실시에도 중앙집권화된 관료체제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4대강사업이 대표적인 예겠죠). 낡은 세계는 몰락하고 있는데 새로운 세계로 건너갈 방법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실용주의’와 ‘현실주의’가 판을 치면서 ‘생명’과 ‘협동’, ‘공생’은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낱말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살림서울생협의 지역살림운동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 삶을 위협하는 위기들에 맞서 지역살림운동은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요? 조합원의식조사 결과보고서를 보면, 조합원들은 ‘안전한 먹을거리를 지키기 위한 활동’(60.2%), ‘농업과 농촌을 지키고 살리는 활동’(18.9%), ‘생명의 가치에 맞게 생활양식을 변화시키는 활동’(8.6%), ‘환경 및 생태계를 지키고 보호하는 활동’(8.3%) 순으로 한살림의 활동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보고서는 이런 대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유기농먹거리를 찾는 ‘웰빙바람’이나 환경을 지키자는 ‘착한 운동’에서도 이런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한 그릇의 밥’ 속에 많은 의미가 들어있고 그 의미를 깨우쳐야 하지만 그것만 강조되고 우리사회의 생활문화가 바뀌다보니 한살림선언의 뜻은 외려 묻히고 있습니다. 산업문명위 위기를 극복하자던 선언의 의지는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그리고 보고서를 보면, 한살림이 그동안 집중해온 ‘안전한 먹을거리나눔’ 활동을 토대로 하여 지역에서 활동영역을 ‘환경’, ‘복지’, ‘문화’, ‘교육’ 등으로 넓혀야 한다고 조합원들은 대답했습니다. 심지어 응답자의 13.7%가 구체적으로 참여의사(적극 참여의사가 5.7%, 물품이나 기부금 등으로 후원의사가 8%)를 밝히고 있으니 이는 축복이라고 봅니다. 다만 이런 관심사들이 세대나 소득별로 나눠지는 게 아니라 지역살림이라는 큰 틀 내에서 다뤄져야 할 것 같습니다. 부분을 키우다보면 전체가 드러나리라 생각하는데, 최근의 사회상황은 전체를 보지 않으면 부분을 키우기가 어렵거나 그 부분의 의미를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정부(중앙/지방)나 재벌들이 이런 영역들을 끊임없이 견제하거나 흡수하려고 하니까요.


따라서 다양한 활동들이 하나로 엮여 산업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지역사회의 단단한 그물망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서울이나 수도권에서는 이곳이 위기의 근원이기에 그런 노력이 더욱더 많이 필요합니다. 저는 지역살림운동이 잘못되고 있다고 비판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지역살림운동에서 드러난 힘들이 이런 쪽으로 자랄 수 있도록 영양분을 주는 게 한살림서울생협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돌아가신 함석헌 선생님은 인간의 사회조직이 “하나 하나의 개체들이 보다 높은 하나를 드러내는 방법”이라 말했습니다. “각 개체가 다 전체를 가능성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전체의 발전은 개체의 발전을 통해서만 되게 되어 있다. 민족적인 본성은 개인의 자아 속에서만 볼 수 있고 발전시킬 수 있다.”고 하셨지요. 그 말을 따르면 개인의 타락이나 제도의 불완전함이 아니라 전체의 통일이 깨졌기에 우리의 삶이 위기와 불안,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시 이 전체의 통일과 균형을 잡는 것입니다. 각자가 서로의 삶에 의존해 살고 있음을 인정하고 자기 품을 내어주는 게 필요합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지역살림운동이 품을 내어준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지역살림운동 속에서 자기선택과 공생 진화, 협동진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방법은 한살림만의 힘으로 가능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을 겁니다. 일단은 가능한 것부터 시작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가능하도록 만들 힘도 필요합니다.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라’는 구호가 가진 힘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삶터와 일터의 분리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삶터와 일터의 분리를 극복한다는 것은 공장이나 사무실로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일하자는 게 아닙니다. 지역살림살이의 자족성을 갖출 여러 가지 방안이 얘기되고 있지만 그건 시간이 많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 기반이 마련될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리지 말고 일단 삶터와 일터의 삶이 서로 소통되게 해야 합니다. 공장과 사무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삶터에서 얘기되고, 반대로 삶터의 일들이 공장과 사무실에서 얘기되어야 합니다. 이런 과정들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공생진화는 헛된 말일 뿐입니다. 특히 조합원의 약 2/3가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생활인으로 살아가기에 이런 과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조합원이 아닌 사람의 삶, 그러나 지역사회에서 함께 생활하고 조합원들이 지역사회에서 생활하며 만나는 사람들의 삶도 얘기되어야 합니다. 환경미화원, 식당종업원, 배달원 등 다양한 직종의 비정규직/일용직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들이 그들이 생산한 제품과 서비스를 이용하는 소비자들 사이에서 얘기되어야 합니다. 또 재벌들이 만드는 열악한 노동시장의 조건에 소비자들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삼성그룹의 제품을 쓰고 보험을 들고 주식투자를 하는 게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조합원들이 고민해야 하고 그 대안을 구체적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반대로 생활정치의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에 그 지역에 위치한 공장과 사무실 노동자들의 관심을 유도해야 합니다. 지역의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공장과 사무실, 공공기관, 자영업 등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깨달아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한살림서울생협 조합원의 85.4%가 출퇴근 1시간 이내 지역에서 일하고 있으니 이런 과정은 충분히 마련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한 공간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깨닫고 바라봐야 합니다. 영화 <아바타>에 나오듯 서로를 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더욱 단단하게 손을 맞잡을 수 있고 예상치 못했던 힘을 구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생각해보면 너무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다만 삶터와 일터의 거리가 너무 멀다보니 동시에 삶을 산다는 점을 망각하고 분리해서 생각할 뿐입니다. 이렇게 분리된 우리 사회의 살림살이구조, 정치와 경제구조를 바꾸고 합치는 일에 한살림서울생협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더글러스 러미스는 『Radical Democracy』라는 책에서 “지역적으로 생각하고, 지구적으로 행동하라.”라고 주장합니다. 토착공동체를 지키는 힘이, 결국에는 우리가 뿌리는 내리고 사는 세계를 지키는 힘이 국경을 가로지르는 운동 속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아쉬운 점은 기업들은 협동의 힘을 깨닫고 온갖 방법을 마케팅으로 동원하고 있는데 정작 그 힘의 기원인 협동조합들은 거꾸로 기업의 투자논리와 마케팅을 따라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장의 세계관은 지구적인데 그 전일성을 주목했던 협동운동의 세계관이 지구를 보듬지 못한다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리고 한살림서울생협이 풀어야 할 중요한 화두 중 하나가 저는 로컬푸드라고 봅니다.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 가량이 사는, 자급의 능력을 거의 상실해가는 수도권은 10년 뒤에 한국에서 가장 위험한 공간이 될지도 모릅니다. 갑자기 도시가 망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서울은 식량, 에너지 면에서 너무나 취약하기 때문에 로컬푸드에 관한 고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행히도(?) 서울과 달리 경기도는 그런 잠재력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정해진 모범을 따르려 말고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하면 좋겠습니다. 로컬푸드와 도시텃밭, 베란다텃밭, 마을텃밭 등 지역에서 다양한 관계가 얽히고 설키어 서로의 삶을 살리고 모시면 좋지 않을까요? 그리고 에너지 소비량을 줄이고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베네주엘라에서는 정부가 텃밭을 만들어 지역주민들이 가꾸게 하고 자유롭게 필요한 만큼 가져가게 한다고 합니다. 서울에도 이런 공간이 많이 만들어지도록 함께 노력하면 좋지 않을까요?


또 여러 대학에서 ‘청년 생태주의자’ 모임이 만들어지고, 레알텃밭학교도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만행이라는 청년공동체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러 모임에서 생태주의와 대안적인 삶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학들이 몰려있기 때문에 많은 청년들이 수도권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찾아보면 의외로 귀농을 고민하거나 생태적인 삶을 살려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이런 청년들이 ‘젊은 날의 치기’로 고민을 접지 않고 실제로 그 삶을 꾸준히 살아가려면 여러 디딤돌이 필요합니다. 알아서 헤엄쳐 강을 건너오길 기다리지 말고 절반이라도 건너와 꿈을 꿀 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놓아주면 어떨까요? 이 역시 찾아오길 기다리지 말고 먼저 품을 내어주는 게 필요합니다. 학교나 대학, 학생회와 협약을 맺고 공동사업을 추진하는 것도 고민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과정을 만드는데 한살림서울생협의 지역살림운동이 적극적으로 동참하면 좋겠습니다.



2.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밖에서 얘기하길 한살림운동을 ‘중산층운동’이라고 합니다. 조합원 의식조사를 보니 조합원의 월평균 가계소득수준이 454만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수도권에서 자기 집을 소유한 비율이 무려 74.7%라고 하니, 그 구성원으로만 보면 중산층이 아니라 중상층의 운동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한살림은 ‘섬’이 되어 간다는 얘기가 근거없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재산이 많은 것이 문제는 아니고, 섬이 되는 것 자체도 문제는 아닙니다. 어찌되었건 우리는 다른 누군가에게 섬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한살림의 정신을 실현하려면 그런 섬을 연결할 수 있는 많은 다리를 놓아야 할 겁니다.


한살림의 지역살림운동에서 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녹색장터와 벼룩시장, 지역아동센터, 방과후 교육공동체, 장애인편의시설 실태조사 등 다양한 가능성이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한 살림서울생협의 경우 10세 이하 자녀수와 30대, 40대의 비중이 높으니 이와 여계된 사업들을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싹이 나무로 자라 튼튼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한살림운동이 ‘너무’ 순수하고 착한 운동으로 가는 듯한 모습도 보입니다. 그런 마음이야 한살림운동의 중요한 힘이지만 때로는 그 마음이 사람의 성장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순수하거나 착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런 마음이 다른 사람을 대상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모심은 내가 상대를 동정하거나 연민하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삶을 돌본다는 의미인데, 일방적인 관계가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런 마음과 그렇게 만들어진 관계가 사회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로막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런 변화를 추구하는 운동과의 거리감을 만든다는 점에서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역사회에는 반(反)생명적인 세력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중앙/지방정부와 결탁한 관변단체와 지역언론사, 보수적인 주민자치위원회, 각종 직능단체 등이 각종 개발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작은 4대강 사업들이 지방정부의 사업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이런 세력들이 있기에 때로는 충돌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이들과 무작정 싸움을 벌이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돌아가신 장일순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도둑을 만나면 도둑이 돼서 얘기를 나눠야 해요.

도둑은 절대 샌님 말은 안 들어요.

저 사람도 나와 같은 도둑이다 싶으면

그때부터 말문을 열기 시작한단 이 말이에요.

그때 도둑질을 하려면 없는 사람 것 한두 푼 훔치려 하지 말고 있는 사람 것을 털고 그것도 없는 사람과 나눠 쓰면 좋지 않겠냐고 하면 알아들어요.

부처님은 마흔네 개의 얼굴을 갖고 계시다는 말이 있는데 말하자면 이런 거지요.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과 하나가 된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한살림운동이 조금 덜 착한 운동이면 좋겠습니다. 소득수준과 생활수준이 높은 만큼 주민들 속에 더 낮게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이미 고민들이 지역살림운동에서 조금씩 드러나고 있습니다. “유기농 먹을거리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인식들이 많이 성장을 하듯이 사회와 지역과 더불어 소외계층에 대한 나눔의 미덕도 커졌으면 한다. 녹색장터가 비록 한살림 조합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지만 지역의 다른 생협들과 함께 장을 연다면 지역연대활동으로 이어져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게 될 것이다.…우리가 하고 있는 품앗이 활동이 소모임의 차원에서 벗어나 지역사회에 큰 영향을 주려면 우리가 하고 있는 교육공동체가 무엇인지, 왜 해야 하는지, 얼마나 중요한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동안은 내부 프로그램이나 활동 위주로 가다보니, 대외적인 홍보가 부족했다. 교사 재교육이나 경제 여건 등 해결해야 할 문제점도 많다.”(군포지부)


“한살림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여러 단체들과 연대의 고리를 지속하면서 사회복지분야를 비롯한 지역문제를 조합원과 지역주민들에게 널리 알려내어 공감대를 마련하고, 자치단체가 이 문제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제도를 개선해 나갈 수 있도록 다양한 활동을 해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서울 동부지부)


그래서 한살림서울생협의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들이 그런 운동을 시도해온 단체와 함께 진행하거나 그런 운동의 앞선 사례들을 꼼꼼하게 분석하면 좋겠습니다. 《민들레》라는 대안교육잡지 제 69호(2010년 5․6월호)를 보면, 공부방과 지역아동센터 교사들의 고민을 엿볼 수 있습니다. 조금만 인용해 볼까요?


“공부방 활동을 하다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사건을 겪을 때가 많다. 오죽하면 옛날부터 머리털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겠는가? 그만큼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힘들고 어렵다는 말일 게다. 초라함과 졸렬함, 어리석음과 야비함, 교활과 탐욕, 게으름과 변명, 무지와 공포, 편견과 선입관 등, 인간의 온갖 밑바닥 감정들이 버젓이 활개치고 다니는 곳이 공부방이다. 때로는 선의나 너그러움을 교묘히 악용하고 자극하여 교사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얽어매는 경우도 있다.”


“지금 지역아동센터가 당면한 과제 중 하나는 그거라고 본다. “우리가 왜 존재하는가? 이 사회에서, 그것도 사회적 돌봄이 필요한 아동 옆에 왜 존재하는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집단에게도 질문해서 같이 토론해야 한다. 센터로 교육하러 다녀 보면, 사람들이 공통으로 이야기하는 게 있다. 아이들에게 사랑을 쏟으면 쏟을수록 훨씬 더 의존적인 아이들로 자라는 것 같다는 것이다. “또 무슨 도움 없어요?” “이번에는 왜 이렇게 조금밖에 안 줘요?” 우리가 원하는 건 자립적인 아이들인데, 실천하다 보니까 오히려 의존적인 아이가 되더라, 이런 고민이 드는 거다. 우리는 이제 이런 이야길 해야 한다. 당신이 주는 사랑의 내용이 뭐냐? 우리가 아이들에게 주는 게 뭐냐? 선의로 사랑을 주려고 했는데 그게 독이 될 수도 있다. 대신 해결해 주는 교육과정을 통해서는 절대 주체적인 인간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하면 주체적인 아이들이 길러지나? 바로 실천할 수 있는 것 한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여러분들이 무엇인가 하기 전에 언제나 아이들에게 물어 봐라.” 일반적으로 교사들은 잘 묻지 않는다.…사실 아이들이 현재와 같은 방식의 공부는 못 해도 된다. 단, 미래사회에 자기주도적으로 살려면 꼭 필요한 능력이 있다.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능력이다. 아이들이 자기 삶에서 펼쳐지는 문제에 대해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줘야 한다.”


한살림의 정신이 반드시 한살림 조직으로 실현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저는 그것도 ‘이천식천(以天食天)’의 정신이라고 봅니다. 자기 이름을 내걸려는 운동은 많지만 다른 운동과 손을 잡고 아래로부터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운동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한살림이 먼저 손을 내밀고 잡으면 어떨까요?


왜 한살림이 그런 일까지 맡아야 하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한살림 자신을 위해서 그런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 세계에서 사회적 양극화가 가장 심하다는 브라질에서는 부자들이 출근할 때 헬기를 이용한다고 합니다. 수영장이 딸린 대저택 바로 옆에 빈민가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습니다. 총을 든 경비원들이 순찰을 도는 문 밖만 나가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으니 공중으로 날아다니는 겁니다. 10년 뒤 서울의 모습이 이렇게 않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요? 저는 용산참사가 이미 그 미래를 예고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홍대 앞 두리반, 왕십리 등이 제 2, 제 3의 용산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공간들이 하나씩 바뀌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어떻게 될까요? 착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만일 이런 얘기에 동의하신다면 남은 과제는 다른 운동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개발하는 것입니다. 이건 한살림만의 과제가 아니라 한국사회를 바꾸려는 여러 운동들이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서로 소통할 수 있을까요? 서로의 마음을 잘못 읽거나 멋대로 해석하지 않고 진심에 다가설 수 있을까요? 한살림이 가려는 길이 다른 운동의 길과 다르지 않음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동안 한살림운동이 강조해온 ‘스스로의 변화’는 소수자들이 겪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그들의 문제’로 만들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체’라는 특성이 ‘배타성’을 띠기도 합니다. 자기부정 없이 ‘우리’만 부각되다 보면 공동체들이 ‘우리들만의 공동체’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를 벗어나려면 한살림운동이 일상적인 생활정치 속에 소수자의 시각을 녹여내고 그것이 가진 차이를 통합하려는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메이데이, 2007)에서 김도현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노라 그로스Nora E. Groce라는 사회학자는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 해안가의 외딴 섬인 마서즈 비니어드Martha's Vineyard에서 농인deaf people들의 생활상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그 섬에서 농인들은 사회로부터 배제되지 않았으며 그들 자신만의 농 문화를 형성하지도 않았는데, 이는 섬의 모든 사람들이 영어와 수화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바이링귀스트bilinguist들의 사회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곳에서는 농인들에 대한 사회적 제약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으며, 농인들은 지역사회의 삶에 자연스럽게 통합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한 살림운동의 언어가 아이들의 언어, 주부의 언어, 장애인의 언어로도 표현될 수 있으면 좋을 겁니다. 그리고 이제는 어른들이 바라는 ‘아이들을 위한 도시’에서 ‘아이들의 도시’로, ‘주부들을 위한 정치’에서 ‘주부들의 정치’로, ‘장애인을 배려하는 도시’에서 ‘장애인의 도시’로의 관점이 변하면 좋겠습니다.


물론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조합원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조합원이 62.3%나 되는데, 이렇게 어렵고 힘든 활동을 굳이 해야 하는가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꼼꼼하게 따져보면, 중산층이고 비교적 젊은 세대인 한살림서울생협의 조합원들에게 왜 시간적인 여유가 부족할까요? 어쩌면 서울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여유를 없애는 것이고 이는 개인의 노력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여유를 만들려면 혼자만의 노력에서 벗어나 그런 여유를 없애는 사회질서를 바꿔야 합니다. 승자독식의 경쟁질서를 서로 보살피는 공생의 질서로 바꿔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이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살기 위해 여유를 만들고 서로 손을 잡아야 하겠지요. 여유 없는 조합원들이 다른 것을 포기하고 조합원 활동을 택하도록 만드는 것, 그것은 구호가 아니라 한살림서울생협의 구체적인 사업을 통해, 다른 시민사회운동단체들과의 손잡음을 통해 준비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장기적으로 보면서 서로의 언어를 맞춰가야 합니다.



3. 내실을 다져야 할 시기


최근에 흥미로운 글을 하나 읽었습니다.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볼 수 있는 글입니다. 갈러(Zvi Galor)라는 이가 지은 “Demutualization of Cooperatives: Reasons and Perspectives”라는 글입니다. 한글말로 옮기면 “협동조합의 탈협동화: 이유와 전망”이 되겠네요. 갈러는 전 세계의 많은 협동조합들이 더 많은 상부상조와 협동보다 경쟁과 탈협동으로 가고 있는 이유를 분석합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미국, 캐나다, 유럽연합, 동남아시아, 이스라엘 등을 분석한 뒤에 갈러는 특히 소비자협동조합과 전력공급협동조합에서 탈협동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지적하면서 중요한 원인을 조합원의 참여부족에서 찾습니다. 협동조합의 중요한 원리 중 하나인 조합원의 적극적인 참여와 그것을 통한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데서 갈러는 문제점을 찾고 있습니다. 이런 탈협동화의 결말은 협동조합이 문을 닫거나 협동조합들이 통합되거나 주식회사(조합원소유/주주소유)로 전환되거나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소유권의 분할과 개인회사 취득)이라 얘기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갈러는 협동조합의 탈협동화를 불러온 조합 내부의 원인을 조합원과 협동조합의 관점에서 각각 살핍니다. 조합원의 경우 그 원인은 소유권의 제한, 조합원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음, 조합에 대한 관심 부족과 교육의 부족이고, 협동조합의 경우 원인은 조합원에서 주주로의 변화, 협동조합 정체성의 상실, 살림에서 이윤으로의 가치변화, 자금조달능력 확대의 필요성입니다. 한살림이 해당하는 항목은 없는지 잘 살펴볼 일입니다.


그리고 갈러는 탈협동화를 불러오는 조합 외부의 원인도 지적합니다. 그 원인은 소유권의 재설정(redefinition), 대안적인 협동조합 해결책의 부족, 협동조합이 낡은 방식이라는 생각, 협동조합과 다른 외부환경, 탈협동화중인 협동조합부문(미국의 농업부문, 오스트레일리아와 영국의 신용협동조합부문, 캐나다의 생명보험부문, 서유럽의 협동조합은행)입니다.


아쉽게도 갈러는 이런 다양한 현상을 보여줄 뿐 이런 경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관해서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런 얘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역살림운동이 조합원들의 자발적이고 의식적인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역살림운동은 조합원운동이기도 합니다.


한국식으로 번역하면 이런 고민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조합원이지만 1년에 조합을 한 번도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49.5%나 되면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고 조합원이지만 매장만 이용할 뿐 조합의 소유권과 운영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매출고와 조합원 확대에 관한 고민은 많지만 그것이 조합 내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에 관한 고민은 부족한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갈러는 협동조합의 탈협동화를 안타까워하는데, 앞서 얘기한 러미스는 그것이 결국 그 사회의 비민주화, 보수화를 가져온다고 비판합니다. 우리는 정치와 경제를 떼어놓고 생각하지만 역사상 어느 사회도 그것이 분리되지 않았고 그런 분리를 이용한 자들이 기득권층이라고 러미스는 지적합니다. 공장과 사무실에서 복종에 길들여지는 사람들이 정치영역에서 능동적인 시민이 될 수는 없다는 얘기지요. 그리고 기득권층은 일자리와 임금 등을 무기로 시민들의 발을 묶으려 든다는 얘기입니다. 정치민주화에만 매달려온 우리사회의 민주주의가 이토록 취약한 것도 그 때문이고 재벌그룹의 사장이 대통령이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협동운동은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되살리는 운동입니다. 그러니 한살림의 규모가 커지고 조합원이 늘어날수록 한살림의 관계가 기존의 사회관계를 변화시켜야 협동운동이 튼튼해질 수 있습니다. 한살림이 조합원과의 관계를 돈독히 다지고 한살림이 위치하고 사회의 외부환경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켜야 장기적인 과제를 정할 수 있습니다.


국가는 힘과 권력에서 자유롭지 않아 힘 센 이에게 더 많은 관심을 둘 수밖에 없고 민초의 삶을 세세하게 돌보지 못합니다. 더구나 국가와 자본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사회의 힘을 빼려 합니다. 국가/시장/사회의 관계로 본다면 사회의 힘은 여전히 약합니다. 사회가 강해지고 난 뒤에야 국가나 시장이 제대로 민초의 뜻을 받들려 할 겁니다. 그러니 사회의 힘을 길러야 하고 그 힘을 기르는 방법은 바로 민초들의 관계입니다. 사회적 경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지역사회의 관계망이 단단해지지 않으면 모두 모래성일 뿐입니다.


조합원이 한살림에 관심을 가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범답안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보고서의 결론에 나와있듯이 조합원의 특성과 욕구를 고려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다양한 교류의 장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강조하자면, 더 많은 정보와 권한을 조합원들에게 줘야 합니다. 정보 없는 관심 없고 권한 없는 참여란 불가능합니다. 본부나 지부가 정보를 만들어서 조합원에게 제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약간 벗어날 필요도 있습니다. 조합원들이 필요한 정보를 모으고 스스로 구성해서 조합원들끼리 공유할 수도 있습니다. 권한이라고 해서 꼭 의사결정과정에서의 표결권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권한은 말과 행동에서 나오는데, 표결권이 없어 말할 권리만 보장할 수도 있습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에 나오듯,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나에게로 와 꽃이” 됩니다. 한살림이 조합원들의 이름을 끊임없이 불러줘야 합니다. 서로에게 하나의 의미가 되어야 합니다.


요즘 리더십에 관한 얘기가 많습니다. 그런데 리더십은 카리스마나 지도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념이 분명하면 누구라도 리더십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위기는 이념이 사라진 데서 불거지고 있습니다. 하늘의 별을 보며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면 캄캄한 밤에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도시의 환한 불빛에도 우리의 삶이 불안과 공포 속에 헤매는 건 그런 별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한살림서울생협이 그런 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학벌없는 사회가 엮은 [학교를 버리고 시장을 떠나라]에 실은 글입니다.



“어떤 행복을 꿈꾸어 나는 경쟁하고 경쟁했는데

우리가 그린 미래는 드라마에 불과한 공상입니다

…일상의 무게로 비굴해진 나의 자존심도 용기도 버린 내일

우리의 꿈은 서로 다르지 않은데 꿈을 위해 꿈을 버리고

어머니 당신은 알고 계시나요 나는 이름도 없는 나사”

―자우림의 노래 ‘나사(螺絲)’ 중에서



지금 당신은 왜 행복하지 못한가?



행복을 꿈꾸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행복이란 무엇일까? 사람은 무엇으로 행복해질까? 알렉산더 대왕이 전 세계를 정복하며 행복을 느끼고 있을 때,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가 원한 건 단지 알렉산더가 가렸던 햇빛이었다. 디오게네스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지만 자신의 삶에서 행복을 느꼈다. 아니, 디오게네스는 권력이나 부유함, 명예에서 행복을 구하던 다른 사람들을 하찮게 여겼다. 디오게네스는 자신이 원할 때 먹고 원할 때 잠을 청할 수 있는 자유인이었기에 행복했다. 어느 누가 그에게 불행한 사람이라 설득할 수 있을까?


낚시질 하는 어부에게 지나가는 사람이 말을 건다. 낚시 대신 그물을 쓰면 한꺼번에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그러자 어부가 묻는다. 많은 고기를 잡아서 무엇하냐고? 그러자 행인은 물고기를 팔아 돈을 모으고 배도 살 수 있다고 답한다. 어부는 다시 묻는다. 그렇게 하면 무엇이 좋냐고? 행인은 배도 사고 돈도 많이 모으면 노후에 편히 살 수 있다고 답한다. 그러자 어부는 답한다. 나는 지금 편하게 낚시질을 하며 살고 있다고. 이와 비슷한 얘기들은 아주 많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삶을 포기하라는 얘기들에 현명한 사람들은 이렇게 답했다. 지금 나는 이미 행복하다고. 권력도 없고 돈도 넉넉지 않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미국의 사상가 소로우(H. D. Thoreau)는 이렇게 얘기했다.



“왜 우리들은 이렇게 쫓기듯이 인생을 낭비해 가면서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배가 고프기도 전에 굶어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 사람들은 제때의 한 바늘이 나중에 아홉 바늘의 수고를 막아준다고 하면서 오늘 천 바늘을 꿰매고 있다. 일, 일 하지만 우리는 이렇다 할 중요한 일 하나 하고 있지 않다. 단지 무도병舞蹈病에 걸려 머리를 가만히 놔둘 수가 없을 뿐이다.”[각주:1]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명한 사람들은 저 먼 곳의 행복이 아니라 지금 이곳의 행복을 즐기고 누리라고 가르친다. 행복은 먼 곳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사회에서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현재를 포기하고 있다. 권력을 잡아야, 돈을 많이 모아야 우리는 자신과 가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정말 그럴까? OECD국가들 중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길지만 가장 불안하고 위험해서 교통사고율이나 암발생율이 높고 자살율도 높은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어느 날 갑자기 문자로 해직통보를 받거나 병원에서 암진단 선고를 받고, 자동차 사고나 갑작스런 사고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두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 산다. 허나 불행한 현재를 사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행복한 미래가 찾아올 수 있을까?


비단 한국 사람들만 그런 건 아닐 터이지만 유독 이곳의 사람들은 현재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왜 그럴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우리의 교육에 있다. 우리 사회의 교육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해야 한다고 세뇌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육은 안정되고 좋은 직장을 잡으면, 그러기 위해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그러기 위해 외국어고나 특목고에 들어가면, 그러기 위해 국제중에 들어가면, 그러기 위해 좋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그러기 위해 미리 영어유치원을 다니면, 미래의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달리는 말에도 더 채찍을 가해야 옳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누가 누구의 어떤 행복을 보장한단 말인가? 아이들을 좋은 학원에 보내기 위해 야근을 하고 알바를 뛰며 밤 늦게 집에 들어오는 부모들이 아이들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을까? 학교와 학원의 경쟁에 시달리고 짓눌려 어깨가 축 처진 아이들이 부모들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을까? 서로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까? 부모는 아이들의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 속이 타들어가고, 아이들은 따뜻한 대화없이 온기를 잃어버린 가정에 숨이 턱턱 막힌다. 모두가 불행한데 어디서 갑자기 행복한 미래가 불쑥 튀어나올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니 우리의 교육은 폭력을 사용한다. 자신이 바라는 바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타자에게 강요한다. 사랑하면 모든 것이 다 용서되는 줄 안다. 사랑하니까 때리고 사랑하니까 잔소리하고 사랑하니까 강하게 키우기 위해 험한 곳으로 내몬다. 자신의 꿈을 보상받으려는 사랑 때문에 부모들은 아침에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아이들을 억지로 깨워 학교로 보낸다. 이게 정녕 사랑일까?


그러니 우리의 교육은 배우고 스스로 깨닫는 가르침이 아니라 폭력이고 매트릭스이다. 실제로는 에너지를 뽑히는 갇힌 몸이면서도 자신이 자유롭다고, 행복하다고 착각하도록 만든다. 누가 나서서 이제는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외쳐도, 같이 짜기라도 한 듯이 모두가 등을 돌린다. 반대하는 사람은 왕따를 시키며 특별한 것들은 지들끼리 모여 살라면서 우리 눈을 감고 귀를 닫는다. 서로가 서로의 폭력을 묵인하고 자신의 알리바이로 삼으며 공모한다.


제 아무리 휘황찬란한 여러 가지 지표로 자신을 정당화시켜도 지금 우리 사회는 매우 불행하다. 교육은 똑같은 행복을 내세운 경쟁으로 아이들을 내몰아 그 영혼을 메마르게 하고, 우리 사회는 아이들의 에너지를 아귀처럼 빨아먹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나나 우리 가족이 정녕 행복해질 수 있을까? 행복은 고사하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경쟁에서 이기면 행복해질까?



우리나라는 지금 서느냐 무너지느냐하는 갈래길에 섰다. 그 기본조건은 민생(民生)이다. 민중이 우선 먹어야 한다. 건전한 사회가 되려면 되도록 노동하는 자가 많고 놀고 먹는 자가 적어야 할 일이다. 대학이 늘수록 놀고 먹는 자가 늘어갈 뿐이니 많을수록 국민적으로는 손해다. 그러나 대학 수는 훨씬 줄여 학문에 소질이 있는 자로 필요한 수에만 한하게 하고 그 경비를 초등교육에 돌려야 할 것이다.…대학을 자꾸 지원하는 것은 정부가 인물 등용에 반드시 실력으로써 하지 않고 소위 간판으로 하기 때문인데 정부가 그 방침을 쓰는 것은 표면은 그럴듯한 구실을 내 걸고 사실은 특권계급이 자기네 이익, 지위를 옹호하는 제도를 지켜가는 방법으로 하는 것이다. 학교를 졸업해야 우대한다 해서 실지로 필요하지도 않는, 하고 나오면 실업자가 되는 교육을 강요함으로써 농민을 착취하고 있다. ―함석헌 선생의 글에서[각주:2]



잘못된 논리를 가르치는 것은 학교만이 아니다. TV드라마나 영화, 대중문화들도, 우리 정부도 무한경쟁의 전도사이다. 남이 괴롭고 힘들어도 나만 아니면 된다는 ‘복불복의 논리’, 어떤 수단을 쓰던 성공만 하면 된다는 ‘왜곡된 합리성의 논리’, 전 세계의 사람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세계화의 논리’가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런 다양한 논리들이 서로 맞물리며 경쟁의 피라미드를 구성한다. 어떤 능력, 어떤 성품을 가진 사람이든 그 사다리에서 한 단계 올라서면 존경받고, 한 단계 떨어지면 가차없이 내쳐진다. 이긴 자에게 모든 몫이 돌아가고 패배한 자는 모든 걸 잃는다. 피라미드의 끝이 아주 뾰족하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니 피라미드에서 밀려 떨어지지 않기 위해 모두가 발버둥을 쳐야 한다.


그렇다, 우리 사회는 냉정하고 치열한 경쟁에 지배당하고 있다. ‘공부의 신’이 아니라 ‘경쟁의 신’이 우리 사회를 지배한다. 우리는 경쟁을 거쳐야 능력이 생기고 경쟁을 통해서만 강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그런 믿음을 강하게 가지게 된 건 불행한 역사 때문일지도 모른다. 강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을만큼 넉넉한 사회였다면 우리가 굳이 경쟁을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허나 강자만이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기에 우리는 싫건 좋건 경쟁을 받아들여야 한다. 적어도 내 아이는 한 단계 높은 자리에 보내려 한다.


그러니 아이들을 좋은 유치원에 보내기 위해 부모들이 밤새 줄을 서야 하고 걸음마를 갓 뗀 아이들이 영어를 따라 말하고 초등학교 아이들이 무거운 가방을 질질 끌며 학교로 향해야 한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나도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날고 싶다”는 유서를 쓰고 아이들이 자살해도 우리 사회는 쉬쉬한다. 자살이 청소년의 주된 사망원인이고, 15세에서 19세의 청소년들이 자살충동을 느끼는 원인의 51%가 성적과 진학문제인데도, 우리 사회는 이를 해결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못나고 약한 아이들이나 그렇지 내 아이는 그렇지 않다고 자위하며 부모들은 아이들을 위해 고된 하루를 보낸다. 아이나 부모나 극단적인 경쟁에 시달리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회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생각하며 살까? 한 교사는 자신의 끔찍한 체험을 이렇게 말했다.



“얼마 전 10일짜리 자원봉사 활동을 다녀왔다. 학생들의 농촌 체험 활동인데 교사로서 자연봉사를 했다. 그런데 자원봉사를 하는 동안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한 학생이 개미들을 밟아죽이고 있는 것이었다. 다가가서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왜 약한 개미들을 죽이냐고 물었다. 죽여도 된다고 대답했다. 너는 너보다 힘센 사람이 너를 괴롭혀도 좋으냐라고 물었다. 그래도 좋단다. 여기까지도 많이 놀랐는데 더 놀라운 대답이 이어졌다. 힘센 니가 개미를 죽이듯이 너보다 힘센 사람이 너를 괴롭히면 너는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으냐라고 물으니 아이는 대답했다. “나는 죽어도 좋아요”라고. 왜 그러냐고 물으니 그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학원을 안 가도 되잖아요.” 나는 너무 놀랐다. 그 아이는 8살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학원을 다섯 개를 다닌다고 한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이렇다.”[각주:3]



학원을 가지 않으니 죽어도 좋다는 아이들을 둔 우리 사회가 지속가능할까? 설령 이 아이들이 운 좋게 어른으로 성장한다 해도 우리 현실이 나아질 수 있을까?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아이들을 안아주기는커녕 힘겹게 경주하는 아이들에게 채찍질을 가한다. 요즘 아이들이나 청년들은 배가 불렀다거나 고생을 안 해봐서 그렇다라는 어른들의 막말이 아이와 청년의 영혼을 질식시킨다. 영혼이 죽은 시체같은 타자들을 보며 우리 사회는 군기가 바짝 들었다며 만족스러워 한다. 간간히 들리는 안타까운 소식은 그 사람의 나태함과 게으름 탓이지 경쟁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제는 그런 힘겨운 노력조차 사회에서 통하기가 어렵다. 영어사전을 씹어 먹으며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출세했다는 이야기는 이제 드라마에서조차 다루지 않는다. 승용차로 등교하고 학원버스로 하교하는 아이들, 특목고를 다니고 좋은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이 경쟁의 피라미드의 윗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박이 터져라 싸우는 아이들은 그 경쟁의 사다리 중간이나 그 밑을 차지하는 아이들이다. 교육만이 아니다. 대기업들이 중소기업들을 착취하며 대부분의 이윤을 독점하고, 대형마트나 기업형 슈퍼마켓이 재래시장이나 구멍가게들을 잡아먹고 있다. 그러니 제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경쟁의 결과는 우리 사회에서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공정한 경쟁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IMF를 거치면서 피라미드의 규칙이 바뀌었다. 즉 운 좋게 경쟁에서 승리해도 그 승리가 평생 이어지지는 않는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도 언제 비정규직으로 떨어질지, 명예퇴직을 당할지 모르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도 청년실업을 면하기 어렵다. 중소기업으로 성공해도,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도 언제 재벌들에게 잡아먹힐지 모른다. 더구나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나타내듯이, ‘용산참사’에서 증명되었듯이 우리 사회는 경쟁을 할 때 이미 강한 자들에게 유리한 규칙을 일방적으로 적용한다.


웬만한 사람들은 이 잔인한 현실을 알기 때문에 조금 남은 중간 자리를 두고 다툰다. 앞서 가는 사람들을 따라잡기란 불가능하고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들을 보면 불안하니까 사람들이 모질어진다. 지금 내가 지키는 자리, 작은 여유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가차없이 밀어내고 짓밟는다. 강자에게는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고 약자에게는 무수한 폭력을 가한다. 경쟁할수록 풍족해지고 풍요로운 게 아니라 더 불안하고 빈곤해지는데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나만이라도, 우리 가족이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수동적인 무모함이 경쟁의 피라미드를 보호하는 든든한 장치이다.


그러니 기득권자들이 지배하는 사회는 우리들을 극단적인 경쟁으로 빈곤하게 만든 뒤에 마음껏 조롱하고 모욕한다. 나이를 먹고 성장하며 자신의 자아를 찾고 큰 인간으로 자라기는커녕 더욱더 비굴해지고 작은 인간으로 길들여진다.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웬만한 수모는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생존의 달인이 된다. 허나 노예의 배가 부를 수는 있으나 행복할 수는 없듯이, 이런 사회에서 행복은 불가능하다.


이미 50년 전에 함석헌 선생은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교육자의 혼이 ‘어버이’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버이를 대신한 존재이기에 교육자는 우등생, 열등생을 구별하지 않아야 하고 각각의 아이들에게 맞는 나름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남보다 뒤떨어진다고 해서 그 아이를 추려내고 벌준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교육이 아니요, 어버이의 마음도 아니다. 만일 그런 교육자가 있다면 그는 자신의 무성의와 무능함을 숨기기 위한 협잡꾼이라고 함석헌 선생은 지적했다.


더구나 그런 교육은 아이들도 교활하게 만든다. 교사는 지식을 파는 사람이고 학생은 그 지식을 사는 소비자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는 인격적이거나 윤리적인 관계를 맺을 여지가 없다. 이런 세계에서 교육은 출세를 위해 학벌을 따는 과정이지 존경과 신뢰를 배우고 배움에 감사하는 과정이 아니다. 선생이 학생을 때리고 학생이 선생을 때리는 것은 교육이 출세의 수단으로 변질된 현실을 반영할 뿐이다. 그리고 이런 현실은 강자와 이긴 자가 약자와 패한 자를 짓밟고 욕보이는 교육을, 경쟁과 이익이 지배하는 교육을 정당화하고 있다. 왜곡된 교육과 비정한 현실이 강력한 동맹관계를 맺고 인간성을 짓밟고 시민의 출현을 가로막는다.


이런 사회를 바로잡고 다시 행복해질 방법이 있을까? 교육의 위기와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이제 저 바닥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단순히 제도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교육의 근본정신을 회복하지 못하고 교육개혁을 얘기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런 혼이 회복될 사회적인 조건을 마련하지 않고 교육혼의 회복을 애기하는 건 모래로 탑을 쌓는 것과 같다.


아이 한 명이 바르게 자라려면 한 마을이 필요하다고 한다. 교육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은 정권이나 몇몇 교육단체의 몫일 수 없다. 이제 마을의 지혜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떤 지혜가 필요할까? 어렵고 복잡한 정책이나 혁명적인 조치가 필요할까? 돌아가신 이오덕 선생은 그 지혜를 단순명료하게 밝히셨다.



“청소를 싫어하고, 청소를 하지 않으려고 그 시간에 도망가고 하는 것은 그 학급의 교육이 사람답지 못한 점수 따기 경쟁 교육으로, 반인간, 반민주 교육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주 힘드는 높은 단계의 무슨 훌륭한 교육을 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런 교육을 하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다. 생각만 있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사실 아이들은 책만 읽고 쓰고 외우고 하는 그런 공부를 아주 싫어한다. 그 증거로 아이들은 체육 시간이 되면 몸이 아픈 아이가 아니고는 모두 좋아한다. 책에서 해방이 되어 운동장에서 뛰어놀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 시간이나 과학 시간에 산이나 들에 나간다고 해 보라. 기뻐서 소리칠 것이다. 교실 청소를 할 때 보면 책걸상을 옮기거나 걸레로 마루를 닦는 것을 장난처럼 하면서 즐긴다. 일이 놀이가 되고, 그것이 또 운동도 되고 학습도 되는 것인데, 이런 아이들의 삶에서 교사는 배워야 한다. 모든 교육을 이렇게 해야 가장 좋은 교육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의 한평생도 이와 같이 어떤 일을 즐겁게 열심히 하면서(일과 놀이와 공부가 하나로 되는 삶을 즐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사람의 길이다. 정치도 모든 국민이 이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온갖 사회 문제가 풀린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에서부터 아이들이 이렇게 일과 놀이와 공부가 하나로 되는 삶을 나날이 즐기도록 하는 교육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교실에서 청소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거나 장난을 치면 “입 다물어!” “장난치지 마!”하고 선생이 야단을 치니까 그만 그 청소는 재미가 없게 되고 하기 싫어진다.”[각주:4]


 

이렇게 간단한 해답을 두고서 우리는 계속 엉뚱한 답을 찾고 있다. 일과 놀이, 공부가 하나로 되는 삶, 경쟁하지 않고 서로 돌보고 보살피는 삶, 그런 삶을 이야기하면 모두들 달나라 얘기를 하냐는 듯 쳐다본다. 정말 불가능한 꿈일까?




공생은 헛된 공상인가?



우리는 자연계의 법칙을 적자생존, 생존경쟁이라 믿지만 그건 잘못된 믿음이다. 러시아의 사상가 크로포트킨(P. Kropotkin)은 서로 보살핌(mutual aid)이야말로 자연계 진화의 비밀이라고 주장한다. “동물들 사이에서 경쟁은 예외적인 시기로 제한되고, 자연선택은 그 원리가 발현되기에 더 좋은 분야를 찾게 된다. 상호부조와 상호지지를 통해서 경쟁이 제거되면 더 좋은 조건들이 창출된다. 엄청난 생존경쟁 속에서―최소한의 에너지를 소비해서 가능한 최대한도로 생의 충만함과 강렬함을 추구하기 위해서― 자연선택은 지속적으로 가능한 한 경쟁을 피하는 방법을 추구한다.”[각주:5]
더구나 인간의 지식과 지능은 그런 경쟁을 제한하며 공생을 더욱 활성화시킬 수도 있는데, 그 방법이 바로 교육이다.


사실 서로 보살피고 공생해야 한다는 건 엄명한 자연계의 질서이기도 하다. 미국의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와 그녀의 아들 도리언 세이건(Dorion Sagan)의 『생명이란 무엇인가?(What is Life?)』(1995)는 크로포트킨의 논의를 이어받는다. 마굴리스와 세이건에 따르면 생물은 자기 완결적이고 자율적인 개체가 아니라 다른 생물과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정보를 상호교환하는 공동체이다. 숨을 쉴 때마다 우리는, 비록 느리기는 하지만 역시 호흡하는 생물권의 나머지 생물들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즉 생명체는 물과 공기를 통해 복잡하게 서로 얽혀 있고, 지구상의 생물들은 수십 억 년 전부터 상호작용을 하며 지구의 생존조건을 유지해 오고 있다.


마굴리스와 세이건은 지구가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제임스 러브록(James E. Lovelock)의 가이아(Gaia) 가설을 지지하면서 생물이 지구의 표면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생물이 곧 지구의 표면이라는 획기적인 이론을 주장한다. 생명은 고립된 개체로서가 아니라 서로 공생하는 하나의 체계로서, 즉 지구로서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진화의 요인은 경쟁이 아니라 공생이다.


그러니 생물의 진화과정에서 그 자체로 구분가능한 개체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인간 역시 단독자가 아니라 공생의 복합체이고 우리 몸 속과 몸 밖에서 살고 있는 생물에게 훌륭한 환경을 제공하고 그들의 도움을 얻는다. 인간은 수 억개의 박테리아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각주:6]

 

인간과 박테리아를 비교하는 것이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박테리아는 작고 불완전한 생명체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완전한 생물이며, 35억 년 이상 계속 번성해 오고 있는 진화된 존재이다. 사실상 “모든 생물은 한 박테리아의 후손이거나 아니면 여러 박테리아가 합병된 것이다.” 그리고 이 박테리아는 유전자를 거래하며 환경에 적응하며 공생 연합, 말하자면 공생에 의한 동맹을 꾀한다. 진화는 바로 박테리아들이 서로 공생을 하면서 이루어졌다.


그런 점에서 공생은 “결혼처럼 좋건 궂건 함께 살아나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결혼이 서로 다른 두 사람의 결합인 반면, 공생은 둘 혹은 그 이상의 서로 다른 생물들 사이에서도 이루어진다.” 때로는 박테리아가 다른 생물의 속에서 살아가는 ‘내부 공생’도 이루어진다. 이런 공생을 통해 새로운 개체가 만들어지고 생물은 진화한다. 마굴리스와 세이건의 주장은 생물학적인 면에서도 상호부조의 원리가 경쟁의 원리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유전자도 이타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증명한다.


이런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공생은 공상이 아니라 자연적이고 자발적인 질서이다. 다만 우리 사회의 잘못된 구조가, 그리고 그런 구조를 강요하는 국가가 그런 질서를 파괴해 왔을 뿐이다. 이제 그런 구조와 국가에서 벗어나 공생의 삶을 모색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에게 진정 미래가 보장될 수 있다.


이 역시 어렵고 복잡한 대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장 단순한 방법은 저 멀리 있는 행복을 위해석 아니라 지금 내 자신을 위한 삶을 성실하게 사는 것이다. 돌아가신 권정생 선생은 참다운 삶이 멀리 있지 않다고 봤다.



“이 세상에서 진정 공생의 길을 찾고 평화적 삶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모두가 참된 하느님을 찾은 사람들이다. 그것은 그 누구나 그 무엇을 위함이 아니라 바로 자기자신을 위한 삶이다. 우리의 모습이 본래부터 하느님이었는데 새삼스레 하느님이 되려고 하는 노력은 가장 우둔한 짓이다. 가장 사람다운 삶과 모습이 바로 하느님의 모습이다. 인간을 사랑함이 곧 하느님을 사랑함이며 인간을 사랑하는 길은 이웃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길이다.”[각주:7]


그리고 생태계 파괴와 전쟁, 착취를 반대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이미 걷고 있다. 미국의 사상가 리 호이나키는 이 시대를 살아있게 하는 사람들을 ‘거룩한 바보’라고 부르며 “‘거룩한 바보’들이 아직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고, 그들의 연기 때문에 우리가 세계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 모두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고 얘기했다.[각주:8]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바보 이반의 소박한 진리를 따를 때 우리는 전쟁과 물신의 시대를 넘어 공생공락(共生共樂)의 시대를 누릴 것이다.




헝그리사회에서 벗어나기


악바리 근성을 지켜

깡다구 하나로 덤벼

사나이 칼을 뽑았어

벌써 잊었니? 헝그리 정신

…허리띠를 꽉 졸라매고

머리통을 빡빡 3미리로

밀었어 크나큰 거울 앞에 서서

매일 매일 나와 싸웠던 땔 잊은 채

먹고 살만하니 살만 쪄

현실과 타협? 웃겨 변명 때려 쳐

Yo Amateur 만족하지 말고 어서 일어서

성공보단 목표를 향해 전속력을

-바비킴의 노래 ‘헝그리정신’ 중에서



흔히들 교육을 백년지대계라고 얘기한다. 이 말은 제자백가서 중 하나인 『관자(管子)』의 “일년 계획은 곡식을 심는 것만한 것이 없고, 십년 계획은 나무를 심는 것만한 것이 없고, 평생 계획은 사람을 키우는 것만한 것이 없다(一年之計, 莫如樹穀; 十年之計, 莫如樹木; 終身之計, 莫如樹人)”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사람을 기르는 것만큼 크고 중요한 계획이 없다.


그런데 크고 중요하다는 것이 어렵고 특별한 일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동안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는 교육개혁을 전문가들의 몫으로 미뤄왔다. 교육부나 교육학자들만 교육을 논할 수 있는 듯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현재의 심각한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은 몇몇 사람들의 지혜로 구해질 수 없다.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의 지혜를 모으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서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먼저 바로잡고 헝그리 정신에서 벗어나야 한다. 영화 <넘버3>에서 조필(송강호 役)은 홍수환과 임춘애를 헝그리 정신의 대표로 얘기한다. 가난하지만 성공이라는 목표 하나만을 보고 달리는 사람들의 헝그리 정신은 좋은 삶의 자세로 얘기된다.


물론 이런 자세가 무조건 나쁘다 얘기할 순 없다. 하지만 경쟁의 사다리가 세워진 사회에서 이런 자세는 나쁜 알리바이로 악용될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정녕 무조건 열심히 한다고 우리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뒷배경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사람이 ‘운좋게’ 노력만으로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옆 나라 일본에서는 사회의 구조적인 빈곤에 맞서는 운동이 한창이다. 그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유아사 마코토(湯浅誠)는 과거에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다메’[각주:9]
가 있었지만 지금 사회에는 그런 다메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빈곤하다는 것은 단순히 물질적으로 여유가 없다는 점을 뜻하지 않고 다메가 사라졌음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부모, 친구, 연인들이 점점 사라졌음을, 그래서 자신과 자존심이 사라지고 있음을 뜻한다. 유아사 마코토는 의미있는 얘기를 건낸다.


 

“인정상 어쩔 수 없는 면도 있다. 대학 입시에 합격한 사람이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비싼 교육비를 내주신 부모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쉽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가 노력해서 수험공부를 참아 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예전에는 가난했지만 현재는 성공한 사람들도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가족과 지역, 친구의 유형무형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가난해도 꾸준히 노력하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다”고 생각하려 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곤란한 것은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칼이 될 때, 즉 자신과는 조건이 다른 사람에게 무리하게 적용할 때이다. “나도 열심히 살았어. 너도 분발해!”라는 말에는 많은 경우 자신이 상정하는 범위에서의 ‘객관적 상황의 큰일’이나 ‘분발’에 한정되어 있다. 그때 자칫하면 자신과 타인의 ‘다메’ 크기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 간과된다. 그것은 때로 억압과 폭력으로 나타난다.”[각주:10]



차이가 무시되면 폭력이 되기 쉽고, 이런 폭력을 이용해 자기 뱃속을 채우는 것은 다름아닌 정부와 기업이다. 그들은 강하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을 지속시키고 싶어 한다. 한국의 상황은 과연 다를까?


경쟁은 우리 사회를 행복과 풍요로움보다 절망과 빈곤으로 내몰고 있다. 이제는 그런 경쟁의 논리에서 벗어나 공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 경쟁에서의 패배를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몰고 가는 헝그리 사회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홀로 런닝머신을 뛰는 것이 아니다. 거리로 나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과 손을 맞잡고 자기 목소리를 외칠 때 공생은 가능하다.


그리고 공생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내가 당했던 경쟁의 규칙을 다른 사람에게 똑같이 강요하지 않고 그런 규칙에 걸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관심을 두는 것이다. 내 삶과 타자의 삶이 서로 얽혀들 수 있도록 여지를 만들고 공유의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지금 당장 내가 도움을 줄 수 없더라도 자신의 일에 관심을 두고 함께 하려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불안과 공포를 덜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관계 속에서만 진정한 헝그리 정신이 가능할지 모른다. 남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 때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


행복하게 살자.


  1.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월든』(이레, 2001), 134쪽 [본문으로]
  2. 함석헌 지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생각사, 1979), 235쪽 [본문으로]
  3. 김종철 지음, “민주주의를 위하여(2)”, 《녹색평론》 제 108호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4. 이오덕 지음, 『문학의 길 교육의 길』(소년한길, 2002), 129~130쪽 [본문으로]
  5. P. A. 크로포트킨 지음, 김영범 옮김,『만물은 서로 돕는다』(르네상스, 2005), 105쪽. [본문으로]
  6. 린 마굴리스․도리언 세이건 지음, 황현숙 옮김, 『생명이란 무엇인가?』(지호, 1999), 343쪽. [본문으로]
  7. 권정생 지음,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사, 1997), 51쪽. [본문으로]
  8. 리 호이나키 지음, 김종철 옮김,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녹색평론사, 2007), 336쪽. [본문으로]
  9. “‘다메’라는 것은 저수지를 가리키는 ‘다메이케 溜(ぬ)池’의 ‘다메’이다. 큰 저수지를 가지고 있는 지역은 비가 적게 와도 당황하지 않는다. 저수지 물이 전답을 적셔 주어 작물을 기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저수지가 작으면 가뭄이 지속되기만 해도 전답이 바싹 말라 심각한 손실을 입는다. 이처럼 ‘다메’는 밖으로부터의 충격을 흡수해 주는 쿠션(완충제) 역할을 하는 동시에, 에너지를 끌어들이는 모든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다메’의 기능은 다양한 형태로 갖춰져 있다.…일부러 추상적인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금전으로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유형, 무형의 다양한 것이 ‘다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의지할 수 있는 가족, 친족, 친구가 있다는 것은 인간관계의 ‘다메’이다. 자신감이 있고,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는 것 역시 정신적인 ‘다메’이다.”(유아사 마코토 지음, 이성재 옮김, 『빈곤에 맞서다』(검둥소, 2009), 94쪽) [본문으로]
  10. 앞의 책, 103쪽. [본문으로]
한국의 논객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칼날을 겨루고 있다.
논객들이 서로에게 칼날을 겨루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왠지 그 싸움의 끝이 생산적이거나 중요한 의미를 남기지 못할 듯하다(물론 논쟁이 꼭 생산적으로 끝나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진중권씨야 좌충우돌하며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온 사람이니 앞으로도 슬기롭게 자기 길을 잘 헤쳐가리라 믿는다.
허낙 김규항씨에 대해서는 생각이 좀 다르다.
소위 'B급좌파'라는 이미지로, 역설적이지만, 자신의 이미지를 '순수하게' 만들어온 그이니, 이번 논쟁이 어떤 면에서는 그의 순수하지 않은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번의 사태는 예전에 김규항씨가 '그 페미니즘'이라는 글을 썼을 때와 느낌이 좀 비슷하다(지나친 생각일까?)
다시 한번 이미지 마케팅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특히 진중권씨의 얘기가 아니라 얘기하는 방식을 물고 늘어지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김규항 씨가 자신에게 날아온 비판을 대한 방식은 어땠을까?
워낙에 자기관리(?)를 잘 하시는 분이라 흠을 잡기가 쉽지 않지만 출판계에서 몇번 악명(?)을 들은 바 있고, 내가 아는 활동가들이 직접 곤경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 흔적이 아직 남아있는데, http://blog.jinbo.net/mete0r?pid=322 나 http://blog.jinbo.net/aumilieu/?pid=602 를 보면 대강의 정황을 알 수 있다.

사회가 어떻게 바뀌더라도 자신이 하고픈 말을 누구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그 말이 힘을 가지려면, 어렵지만, 앎과 삶이 조금씩 다가서야 한다.
김규항씨가 그렇게 존경한다는 권정생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말을 건냈을까?
아니면 그가 책을 쓴 예수라는 분은 어떻게 얘기를 건냈을까?

진보신당의 미래도 암담하지만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삶도 그리 희망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 점이 우리를 더욱 힘빠지게 하는지 모른다.

자유주의의 역사를 정리한 알랭 로랑은 자유주의의 개인이 “분리할 수 없고 서로 환원되지 않으며 실제로 홀로 느끼고 행동하며 생각하는 인간”, “독립을 추구하는 자율적 존재로 만드는 내면적 특성”을 가진 인간이라고 얘기한다. 이런 고유한 존재이기에 개인은 “외부의 강제 없이 자신의 고유한 삶의 주체가 되고, 선택하지 않은 집단의 강요 없이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창조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각주:1]


외부의 힘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고유함을 실현하는 존재라니 개인은 참으로 중요한 존재이다. 허나 한국사회에서 이런 개인/주체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국가나 자본의 힘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내면성을 사회에 실현할 수 있는 존재, 얼마 전에 그런 사람을 책에서 보기는 했다.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비평, 2010)를 읽으니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그런 개인에 가까운 듯하다.[각주:2]
이처럼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제외하고 한국사회에서 근대적 주체를 자처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물론 근대적 개인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이런 엄격한 조건(?)을 부각시키려고 등장한 것은 아닐 것이다. 강력한 집단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자율적인 개인의 중요성을 부정할 사람은 드물다. 개인적인 삶을 가능케 하는 사회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박노자의 얘기가 우리 사회에서 각광을 받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박노자는 민주적이며 개인 중심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여러 계급과 계층들의 이해관계가 자유롭게 표현되며 자율적으로 조절될 수 있는 시민사회”를 구성해야 하고 이를 위해 국경을 초월해 연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각주:3]
그러면서 박노자는 그동안 한국사회의 지식인이나 운동이 개인주의에 “애매하고 불철저한 관심과 두려움”을 가졌다고 비판한다.[각주:4]


자율적인 개인과 그들의 연대에 관한 얘기가 한편으로 희망을 심어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감을 늘리기도 한다. 세계화된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논리는 홀로 떨어지거나 남겨지는 것을 두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의 고유함과 차이를 실현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고립되는 것도 두렵기 때문에 우리는 애매하고 철저하지 못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각 개인의 경험과 우리의 근대사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그 삶과 역사에 대한 분석 없이 개인에 대한 환상과 신화만을 강조하는 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 상태에서 개인에 대한 기대치는 계속 높아지고 있다. 성찰적 근대(reflexive modernity)를 주장하면서 울리히 벡은 개인화가 전통적인 의무를 피하거나 극복하고 새로운 형태의 행동과 공존형식, 자유를 추구할 기회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이 개인화는 “에로틱하며 성적인 욕구를 그대로 즐길 뿐만 아니라 삶을 먼 미래뿐만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서 즐길 것을, 또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로부터 시작해 ‘즐김의 문화’를 개발하고 세련화시킬 수 있는 자유를 지향”하고 “자기 자신의 욕구를 권리로 변형시켜 제도적 규범과 의무에 저항할 수 있는 자유, ‘외부’의 간섭에 맞서 자기 자신의 삶을 방어하고 보호하며, (말 그대로 또 비유적 의미에서) 삶에 ‘삶 나름의 공간’을 제공하고 이러한 사적 공간이 위협받을 경우에는 언제든지 사회적․정치적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자유를 겨냥”한다.[각주:5]


하지만 이런 희망적인 전망도 우리사회에서는 뭔가 어정쩡한 상태로 드러나고 있다. “부모에게 상처 주는 일을 차마 못하는 ‘착한 심성’을 가졌다는 것, 그렇게 용기있게 사고를 쳐 본 경험이 없다는 것, 여전히 여자들에게 약간의 정절 이데올로기 같은 것이 요구되는 봉건 사회라는 것, 여기에 미래가 너무 불투명하고 불안한 것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부모의 도움 없이는 집 마련이 힘들고, 특히 그간 유지해온 생활수준을 대폭 낮추어야 하는데 그것도 행동을 결정하는데 암암리에 크게 작용한다.…분명한 것은 근대화/개인주의화/합리화가 진행되던 한국사회가 21세기에 들어서서 개인주의도 집단주의도 아닌 아주 이상한 어떤 곳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각주:6]
이것이 우리사회의 보편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한 단면을 보여주는 건 사실이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 그리고 그들간의 촘촘한 네트워크가 만들어내는 사회변화는 분명 희망적이다. 다만 우리는 이런 개인이 식민지와 군사독재를 경험한 사회에서, 아직도 그 잔재를 털어버리지 못한 사회에서 어떻게 출현할 수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우리는 외부의 강제 없이도 ‘자기 삶’의 주체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까?

 


식민성과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은 의도적으로 식민성을 다루지 않는다. 개화기의 지식인들이 보여줬듯이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유를 부르짖지만 그 자유의 속내는 문명사회에 대한 동경과 사회진화론, 제국주의 미화, 민중에 대한 불신이다.[각주:7] 그들에게 개인은 ‘강한 타자’이기에, 그런 타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은 ‘태생적으로’ 개인이 될 수 없다. 그래서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은 “불황의 문제도, 도산하거나 실업하는 것은 각 개인의 책임이니까 사회적인 대처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고 자유주의를 “결코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존하려는 인간의 치열한 철학이나 세계관”으로 생각한다.[각주:8] 이러니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에게 식민성은 부차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 억울하면 너도 강해져라, 강하면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이것이 그들의 개인주의이다.


이제 세계화의 물결은 더 이상 타자를 동경할 필요가 없는 시대, 힘과 돈으로 치장하면 타자로 살 수 있는 시대를 불러왔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건 강한 타자가 아니라 ‘자신들의 공동체’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기꺼이 희생할 약한 내부인들이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도 공동체를 얘기하고 ‘공동체 자유주의’라는 거짓 개념을 만들기도 한다. 이 거짓 개념은 “자유주의를 통한 개인의 자아실현과 공동체주의를 통한 공동체의 재창조와 발전”이라는 탈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사회공동체만이 아니라 “자연공동체와 역사공동체”로 확장되려 하고 심지어 식민주의의 주인공이 되려 한다.[각주:9]
이 괴물에게 식민성은 빨리 버려야 할 부끄러운 약자의 과거이다.


이렇게 생각하기에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은 기득권층에 속하고 역사를 자기 식대로 해석하려 든다. 억압적인 권력과 결탁해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 왔기에 그들은 식민성을 인정하는 순간 본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에게 식민성은 반드시 숨겨야 하는 기록이다.


식민성을 은폐하지는 않더라도 그 의미를 낮게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가령 최장집은 한국의 시민사회가 공익을 위해 참여하는 ‘적극적 시민’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그 “내면적 자아의 공허함, 내면적 정신세계의 황폐화”를 문제삼는다. 한국의 시민들은 “스스로의 가치와 내면의 정신세계를 갖지 못하고, 바깥에 존재하는 가치와 기준에 의해 그리고 여론의 헤게모니적인 힘에 의해 휩쓸리고 동원”되기 쉽다.[각주:10]
내면적 자아가 없어 외부의 환경에 휘둘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연히 그에게는 개인보다 제도와 대의기구를 통한 사회변화가 중요하다.


그런데 왜 내면적 자아가 공허하고 황폐해졌을까? 그의 분석처럼 반공이데올로기와 협소한 이념적 대표체계 탓일까? 하지만 원인은 조금 더 멀리 있다. 일제 식민권력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구분하지 않고 억압했다. 식민권력은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소화되지 못한 외래사상으로 배격하려 했고 이를 위해 공동체주의를 지속적으로 강조했다.[각주:11]
식민권력은 “식민지의 주민들을 통치대상으로 전락시키면서, 동시에 식민지적 질서 속에서 각 개인들을 스스로 그것을 유지, 재생산할 수 있는 주체로 만들려고 시도하였다.”[각주:12]


한국사회의 식민성은 단지 의식적인 차원에서 강요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식민성은 일본의 이에를 본 딴 가부장제도, 병영같은 학교와 기업만이 아니라 군대와 경찰이라는 폭력기구를 통해 실현되었다. 이런 가공할 폭력은 강자에 대한 자발적인 복종을 내면화하고 그 굴욕감을 약자간의 폭력으로 해소시켰다. 이런 사회에서 살아남았기에 내면은 황폐해지고 개인은 외부의 가치와 기준에 휩쓸리기 쉽다. 그리고 아직도 그런 식민성이 유지되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것이 한국만의 특징은 아니다. 프란츠 파농은 알제리를 분석하면서 식민권력의 폭력으로 인한 수치심과 공포이 원주민들의 자아를 붕괴시켰다고 얘기한다. “흑인은 ‘행동하는’ 인간이 아니다. 그 흑인의 목적은 (백인으로 가장한) ‘타자’가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타자만이 그에게 가치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각주:13]
이렇게 보면 식민지를 경험한 사회에서 근대적 개인의 출현은 불가능하다. 식민권력과 결탁해 승승장구해온 기득권층, 타자를 닮으려 애쓰는 지식인들 제외하면 말이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자유주의자들이 개인의 이름으로 한국사회에서 개인의 출현을 가로막아 왔다면, 최근에는 자율적인 개인의 출현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각자의 고유함과 독특성을 공통성 또는 코뮨으로 녹여내려는 흐름이, 자율주의나 코뮨주의를 실천하는 흐름이 한국에서도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제국에 맞서는 다중에 관한 논의들은 “개인성이 단순히 집단적인 것에 대립되는 것으로 되지 않으면서 그 자체로 인정되고 진실로 해방되는 커뮤널한 생활양식”을 추구한다.[각주:14]
자율주의는 개인과 집단성을 결합한 독특한 양식의 출현에, 내부의 차이를 서로 소통하고 함께 행동하면서 공통된 것(the common)을 ‘생산’하는 다중의 출현에 기대를 건다. 그리고 그런 다중의 저항이 제국의 주권까지 뛰어넘어 새로운 사회를 구성할 것이라 예상한다.


허나 그런 고유함을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파괴당해온 사람들은 그 고유함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학교를 그만두고 주유소나 편의점에서 알바를 뛰며 생활의 달인이 되어가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자율성은 긍정의 힘으로만 작용할까? 생필품을 구할 수 없어 가게나 공공시설을 터는 사람들에게, 4대강 살리기 때문에 농지를 잃게 된 농민들에게 노동거부는 어떤 의미일까? “‘~이(가) 없는’ 사람들―고용이 없고, 주소지가 없고, 주택이 없는 사람들― 모두는 실제로 부분적으로만 배제되어 있”고 “실제로 그들이 사회적․삶정치적 생산의 회로들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지를 더 많이 알 수 있다”는 네그리와 하트의 얘기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만큼의 설득력을 가질까?[각주:15]
사회적 안전망 없이 노골적인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도 차이를 서로 소통하고 함께 행동하면서 공통된 것(the common)을 ‘생산’할 수 있을까?


물론 가능성은 불현듯 찾아온다. 허나 그 가능성의 싹이 자라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땅에 씨앗을 심고 똑같은 조건을 마련해도 빨리 싹을 틔우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햇빛이 비치는 각도와 양, 땅의 질과 수분처럼 아주 미세한 차이들이 큰 차이를 만든다. 씨앗의 고유함도 있지만 이런 환경도 그 고유함에 영향을 미친다. 마찬가지로 개개인이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해서 그 가능성이 자동적으로 실현되지는 않는다. 식민지를 경험한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네그리와 하트가 구상하는 권력의 양면성과 다중의 네트워크는 다분히 당위적이다. 물론 ‘~되기’라는 능동성은 당위를 현실로 바꿀 잠재성의 실현을 전제한다. 하지만 저항할 수 있다고 해서, 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저항하거나 네트워크가 구성되지는 않는다. 저항이 어떻게 시작되는가라는 물음은 현실에서 조금 더 깊은 차원의 분석을 요구한다. 우리사회에서도 소수자운동의 가능성이 얘기되고 있지만 흑인여성도 여성인가라는 물음처럼 모든 소수자가 똑같은 소수자는 아니다. 예를 들어, 똑같이 학교를 떠났지만 대안학교를 다니는 청소년과 거리에서 생활하는 청소년의 처지가 같을 수는 없다. 이들이 서로의 삶을 낯설지 않게 보지 않는 공통의 장은 만들어질 수 있을까? 현재 한국사회의 상황을 보면 그런 장이 만들어지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코뮨주의에 대해서도 비슷한 의문이 든다. 코뮨주의 선언은 “가장 고독한 순간에도 우리는 고독한 채로 무리를 이룬다. 우리에게는 ‘고독’조차 ‘고독들’이다. 모든 것들이 더불어 있다는 것, 더 나아가 더불어 있는 것만이 실존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출발점”이라 선언한다. 타자들을 억압하는 공동체로 변질되었던 과거의 코뮨을 반성하면서 이 선언문은 코뮨주의를 “언젠가는 도달해야 할 세상의 이름이 아니라, 언제든 도달할 수 있고 언제든 실현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라 주장한다.[각주:16]


그런데 대안학교의 학생은 “대안학교의 가장 큰 장점이자 약점”으로 자율성을 꼽는다. 학생들은 “자율성은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성실하고 진지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약이 될 수 있다”며 자신의 성숙과 성장을 위해 “아이들이 알아듣고, 느낄 수 있는 언어”로 조금 더 사랑해줄 것을 요구한다. 또 “대안학교에서는 너무 ‘좋은 것, 건전한 것’만 가르치고 경험시킨다”고 딴지를 걸면서 그 역시 일종의 세뇌가 아닌지를 묻는다.[각주:17]
 놀기도 잘 하고 공부도 잘 하고 성품도 좋은 아이로 키우고 싶어하는 ‘부모들의 귀족학교’로 변질되어버린 대안학교는 더 이상 기성학교에 대한 대안이 아니다. 대안공동체의 상황은 이와 다를까?


매우 거칠지만 북친의 지적 역시 귀담아 들을 만하다. “아무런 분류도 등급도 조정도 시도하지 않는 접근법은 우리의 역사관을 통찰력있는 논리성보다는 조야한 절충주의로 축소시키거나, 의미와 보편성보다는 차이와 독특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상식적인 개개인이 자유 극대화를 지향하는 사회 운동을 재구성하도록 도와주기보다는 심리적인 안락의자로 숨어들도록 한다.”[각주:18]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건 차이나 고독보다 약자들의 삶이 자연스레 서로 엮일 수 있는 생활의 망일지 모른다. 일본에서 ‘아마추어의 반란’이라는 대안공간을 운영하는 마쓰모토 하지메는 그 점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개인 차원에서 아이디어를 내서 생활하는 것에 비해 가게를 통해 마을에서 공동체를 조직하면 훨씬 다양하고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대로 된 세상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우선 어중이떠중이가 모이면 공공의 재산을 많이 확보할 수 있다는 점, 신명이라도 나면 공공시설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 두자. 우리 가난뱅이, 얼간이, 오합지졸은 이제까지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결탁해서 무언가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동네를 둘러보면 여기저기 가난뱅이 천지인데도 왠지 한 사람 한 사람 고독하게 살아간다. 그래서 시시껄렁하게 뼛골 빼먹는 직장에서 일만 죽도록 하거나 중류 계급인 척하면서 번화한 중심가로 놀러 가기도 한다. 하지만 가난뱅이 제군! 이제 그런 바보 같은 짓은 그만두자.”[각주:19]


다행히도 우리 사회에서도 바보짓을 그만두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터지고 있다. 고병권은 2008년의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한국사회에서도 “하나의 정체성으로 환원되지 않으면서도 절묘하게 서로 융합한 일종의 ‘질적 다양체’”가 등장했다고 평가한다. “아주 다른 커뮤니티들이 자신들의 색깔을 살린 채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국가와 개인의 이분법이 아니라, 비국가적이지만 공통적인 ‘공공성’을 형성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앞으로 수십 년간 한국 사회의 방향을 크게 좌우할 성취”
라는 지적[각주:20]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허나 그 성취는 여전히 가능성일 뿐이고 그 공공성의 실현은 여전히 어려운 과제이다. 조지 오웰은 너무나 냉정한 언어로 그 사실을 지적한다. “여기 중산층의 전형적인 일원인 내가 있다. 내가 계급차별을 없애기 바란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거의 모든 것은 계급차별의 산물이다. 나의 모든 관념은 (선악에 대한, 유쾌와 불쾌에 대한, 경박과 경건에 대한, 미추에 대한) 어쩔 수 없이 ‘중산층’의 관념이다. 책과 옷과 음식에 대한 나의 취향, 명예에 대한 나의 감각, 나의 염치, 나의 식사예절, 나의 어투, 나의 억양, 심지어 나의 독특한 몸동작도 전부 특정한 훈육의 산물이며, 사회 위계의 윗부분에 있는 특정한 지위의 산물이다. 그런 사실을 이해할 때, 나는 프롤레타리아의 등을 두드려주며 그가 나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고 말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이해하게 된다.…나를 철저히 변화시켜야 하며, 결국엔 같은 사람인 줄 모를 정도로 달라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노동계급의 현실을 개선하는 것으로도, 더 어리석은 형태의 속물근성을 억제하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삶에 대한 상류층적, 중산층적 태도를 완전히 버리기까지 해야 한다.…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번거롭게 자신의 습성과 ‘이데올로기’를 바꾸지 않고도 계급차별을 철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각주:21]


덧붙여 말하자면 대안을 추구하는 여러 운동들은 한국의 사회운동에 내재된 문제점들, 예를 들면 학벌이나 가부장성, 엘리트주의를 극복했을까? 즉 80년대 운동권 문화라 불리는 “위계질서나 보이지 않는 권위에 대한 순응성, 조직에 대한 충성도, 조직에 가족주의적인 가치관의 적용”은 이런 운동들 속에서 사라졌을까?[각주:22]
쉽게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렵다.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사실 자유주의, 자율주의, 코뮨주의를 막론하고 그 모두가 주목하지 않는 건 생태주의이다.[각주:23] 그들의 공통성은 인간들의 공통성으로 제한되고, 세계체제라는 개념 역시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개념이다. 세계체제가 생태계의 위기를 다루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 위기의 해법은 다분히 인간중심적이다. 생태주의에 대한 이런 무관심은 “합성 물질이든, 단순한 것이든 아니면 기계적이든 간에 이것들이 현존하는 생명체와 생태적인 관계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연 세계의 파괴는 정당화될 수 있다”는 위험한 사고방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각주:24]


허나 생태주의가 정녕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이성과 감성 모두에서 전일성(全一性)을 회복하도록 돕기 때문이다.[각주:25]
전일성을 회복하지 못한 차이는 서로를 보살피는 것이 남을 위한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차이와 독특성을 유지하는, 심지어 차이들의 어떠한 종속도 가져오지 않는 네트워크가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단절된 섬이라면 어떤 중요성을 가질 수 있을까?


함석헌은 고립된 개인이란 거짓말이고 인간의 사회조직은 “하나 하나의 개체들이 보다 높은 하나를 드러내는 방법”이라 주장한다.[각주:26]
그러므로 “각 개체가 다 전체를 가능성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전체의 발전은 개체의 발전을 통해서만 되게 되어 있다. 민족적인 본성은 개인의 자아 속에서만 볼 수 있고 발전시킬 수 있다.”[각주:27] 개인의 타락이나 제도의 불완전함이 아니라 전체의 통일이 깨어질 때 불안과 공포가 우리의 삶을 덮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 전체의 통일과 균형을 회복하는 일다. 그러려면 각자가 서로의 삶에 의존해 살고 있음을 인정하고 자기 품을 내어주는 게 필요하다. 차이와 긍정이 중요하지만 때로는 베풀고 내어주고 자기를 버려야 비로소 전체의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각주:28]


이것은 관념적인 얘기가 아니다. 마굴리스와 세이건은 이를 생물학적으로 증명한다. “진화의 원동력으로서 공생이 지니는 힘은 개체성을 확고하고 안정된 신성한 그 무엇으로 생각하는 현재의 통념을 가차없이 깨부순다. 특히 인간은 단독자가 아니라 복합체이다. 우리들 개개인은 여러 박테리아와 균류, 회충, 진드기 등 우리 피부와 몸속에서 살고 있는 생물에게 훌륭한 환경을 제공해 준다.”[각주:29]
보이지 않고 인정하지 않지만 이미 우리는 그런 복합체 속에서 생활하고 있고, 우리 스스로가 그 복합체를 파괴하고 있다.


영화 <아바타>의 주인공들은 서로에게 “네가 보여(I see you)”라고 말한다. 우리는 서로를 보고 있을까?


  1. 알랭 로랑 지음, 김용민 옮김, 『개인주의의 역사』, 한길사, 2001, 10~12쪽. [본문으로]
  2. “언제나 그렇듯, 어떤 유형의 사회에서든, 개인성이란 많은 이의 부러움을 사며, 엄중한 보호와 경호를 받는 소수만의 특권이다. 개인이 된다는 것은 대중에서 벗어나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얼굴이 널리 알려지고, 유명해진다는 뜻이다.”(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함규진 옮김, 『유동하는 공포』, 산책자, 2009, 64쪽) [본문으로]
  3. 박노자, 『나를 배반한 역사』, 인물과 사상사, 2003, 55쪽. [본문으로]
  4. 같은 책, 82쪽. [본문으로]
  5. 울리히 벡 지음, 정일준 옮김,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 새물결, 2000, 110쪽. [본문으로]
  6. 조한혜정, 『다시, 마을이다: 위험사회에서 살아남기』, 또하나의문화, 2007, 44쪽. [본문으로]
  7. 이나미,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 책세상, 2001. [본문으로]
  8. 장상환, “공병호: 신자유주의보다 더한 보수주의 찬미론자”, 최종욱 외, 『보수주의자들』, 삼인, 1997, 216쪽. [본문으로]
  9. 박세일, 『대한민국 선진화전략』, 21세기북스, 2006, 159~160쪽. [본문으로]
  10.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한국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후마니타스, 2002, 226쪽. [본문으로]
  11. 박세훈, 『식민국가와 지역공동체: 1930년대 경성부의 도시사회정책 연구』, 한국학술정보(주), 2006, 99~105쪽. [본문으로]
  12. 김진균․정근식, “서장: 식민지체제와 근대적 규율”, 김진균․정근식 편저, 『근대주체와 식민지 규율권력』, 문화과학사, 1997, 24쪽. [본문으로]
  13. 프란츠 파농 지음, 이석호 옮김, 『검은 피부, 하얀 가면』, 인간사랑, 1998, 191쪽. 그렇다고 파농이 자아를 찾으려는 시도를 포기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아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자아를 재포착하려는 시도를 통해서만, 그리고 그 자아를 음미하려는 시도를 통해서만 또한 자유의 지속적인 긴장을 통해서만 인간은 인간 세계를 위한 이상적인 존재 조건을 창출해낼 수가 있다. 우월감? 열등감? 타자를 만지고 타자를 느끼며 동시에 그 타자를 내 자신에게 설명하려는 그런 단순한 노력을 왜 그대는 하지 않는가?”(같은 책, 291쪽) [본문으로]
  14. 안또니오 네그리․펠릭스 가따리 지음, 조정환 편역, 『미래로 돌아가다』, 갈무리, 2000, 103쪽. [본문으로]
  15.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지음, 조정환·정남영·서창현 옮김, 『다중』, 세종서적, 2008, 168쪽. [본문으로]
  16. 고병권․이진경 외 지음, 『코뮨주의 선언: 우정과 기쁨의 정치학』, 교양인, 2007, 5~29쪽. [본문으로]
  17. “기획: 아이들, 대안교육을 까다”, 《민들레》67권, 2010, 6~45쪽. [본문으로]
  18. 머레이 북친, 문순홍 옮김, 『사회생태론의 철학』, 솔, 1997, 211~212쪽. [본문으로]
  19. 마쓰모토 하지메 지음, 김경원 옮김, 『가난뱅이의 역습』, 이루, 2009, 102쪽. [본문으로]
  20. 고병권, 『추방과 탈주』, 그린비, 2009, 107쪽. [본문으로]
  21.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위건부두로 가는 길』, 한겨레출판, 2010, 217~218쪽. [본문으로]
  22. 권인숙, 『대한민국은 군대다』, 청년사, 2005, 205쪽. [본문으로]
  23. 변화의 실마리는 보인다. 이진경은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그 경계를 근본에서부터 변환”하고 “인간을 착취하고 인간을 억압하는 권력에 분노하면서도 인간 아닌 것들에 대해서는 착취하고 쉽사리 버리거나 파괴하는데 아무런 불편함도, 부당함도 느끼지 않는 우리의 감각을 변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연이나 사물에 대한 관계의 변화 없이 코뮨주의를 적절하게 구성했다고 말해선 안 된다.”(이진경, “코뮨주의와 휴머니즘: 휴머니즘 이후의 코뮨주의”, 『코뮨주의 선언』, 226쪽) [본문으로]
  24. 머레이 북친, 『사회생태론의 철학』, 110쪽. [본문으로]
  25. “개인이 하루에 할 수 있는 많은 일의 하나로(푸리에의 조건을 따른다면) 유기 농업은 우리의 일상 생활이 갖는 다양성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고, 성장과 분해에 대한 자연적인 감성을 더욱 예리하게 만들며, 우리를 자연의 리듬에 순응시킨다. 따라서 오직 하나의 보기일 뿐이나, 유기 농업은 생태적인 사회에서는 단순한 영양 문제의 해결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사회적, 문화적, 생물학적인 자각이 있는 존재로서 우리의 일부가 될 수 있다.”(머레이 북친 지음, 박홍규 옮김, 『사회생태주의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8, 214쪽). [본문으로]
  26. 함석헌, 『들사람 얼』, 한길사, 2001, 34쪽. [본문으로]
  27. 같은 책, 42쪽. [본문으로]
  28. “밖에서 사람을 만나 술도 마시고 이야기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는 꼭 강가로 난 방축 길을 걸어서 돌아옵니다. 혼자 걸어오면서 '이 못난 나를 사람들이 많이 사랑해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감사하는 마음이 듭니다. 또 '오늘 내가 허튼소리를 많이 했구나. 오만도 아니고 이건 뭐 망언에 지나지 않는 얘기를 했구나.'하고 반성도 합니다. 문득 발 밑의 풀들을 보게 되지요. 사람들에게 밝혀서 구멍이 나고 흙이 묻어 있건만 그 풀들은 대지에 뿌리내리고 밤낮으로 의연한 모습으로 해와 달을 맞이한단 말이에요. 그 길가의 모든 잡초들이내 스승이요 벗이 되는 순간이죠. 나 자신은 건전하게 대지 위에 뿌리박고 있지 못하면서 그런 얘기들을 했다는 생각에 참으로 부끄러워집니다.”(장일순,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시골생활, 2010) [본문으로]
  29. 린 마굴리스․도리언 세이건 지음, 황현숙 옮김, 『생명이란 무엇인가?』, 지호, 1999, 343쪽. [본문으로]

지난 몇 년간 지역사회를 살릴 다양한 방법들이 소개되고 논의되고 있다. 예를 들어, 지방의제, 지역재생, 마을만들기, 사회적 경제 등 외국에서 성공을 거뒀다는 다양한 방법들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안적인 지역발전의 모습을 그리려 한다는 점에서 이런 방법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많은 중요성을 가진다.

허나 아무리 혁신적이고 대안적인 방법이라도 그것이 우리사회의 성격과 맞지 않으면 도루묵이다. 1980년대에는 국가의 성격을 놓고 사회구성체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런 치열함이 없고 더더구나 지역사회에 관련해서는 아무런 논쟁도 없다. 그냥 ‘열심히 하면 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와 한 방에 사람들을 끌어 모으겠다는 프로젝트만 있지 장기적인 발전전략이나 비전이 없다. 지식인, 활동가를 막론하고 모두가 단기적인 사례에 집중할 뿐이다. 그러다보니 새로 들여온 방법들도 이런 단기적인 프로그램을 짜는데 이리저리 짜깁기식으로 활용될 뿐이다.

장기적인 전략을 짜려면 우리의 지난 역사와 현재의 관계를 꼼꼼하게 분석해야 한다. 나는 지난 100년 이상의 흐름을 봐야 지역사회의 성격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가령 동학혁명으로 대표되는 민중의 자치·자립에 대한 욕구와 능동적인 정치행위는 두레와 동회, 계를 비롯한 다양한 조직들로 뒷받침되었다. 그리고 그런 조직들은 단지 정치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삶까지 두루 헤아리는 자립적이고 자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런 강력한 뿌리가 있었기에 일제 식민지, 군부독재 시기에도 다양한 형태의 조합운동과 저항운동이 가능했다.

그렇게 강했기에 일제 총독부와 해방 이후의 미군정, 군부독재는 그런 자치와 자립의 흐름을 파괴시키고 자기 내부로 흡수하는 것을 주요한 과제로 삼았다. 그런 지배구조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니 이런 지배구조를 깨고 자치와 자립의 구조를 회복시킬 장기적인 전략이 필요한데, 아직까지 그런 논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재원과 사람만 구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꿈같은 얘기들만 오가고 있다. ‘모델만 만들면’ 어떤 지역에서든 똑같이 찍어낼 수 있다는 환상이 팽배해 있다.

그리고 그나마 얘기되는 대안적인 지역비전마저도 중앙집권화된 국가전략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수도권으로 초집중화된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해결할 진보전인 전략, 산업화 노선을 위해 희생을 거듭해온 농민과 농업, 농촌공동체를 회복시킬 진보적인 지역전략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앙정부 주도의 경제발전전략을 당연한 논리로 받아들이고 지역전략마저도 중앙에서 구상된다. ‘우리가 집권하면’이라는 꿈같은 얘기에 다른 모든 걸 보류해온 지가 너무 오래 되었다.

또한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진보라는 말이 삶터와 일터를 철저히 구분했고 일터의 진보성이 때로는 지역생활의 보수성과 연결된다는 점은 회피되었다. 왜 진보세력은 언제나 지역사회에서 소수파를 벗어나지 못하고 강력한 연대의 관계망을 구성하지 못할까? 일상생활이 어떻게 체제와 촘촘히 얽혀 영향을 주고받는지, 일상의 공간들이 어떻게 사람들의 참여를 가로막고 의식을 보수화시키는 방향으로 재생산되는지를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하지만 ‘현장에 매달려’ 생활을 방관해온 지도 너무 오래 되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세상이지만 그럴수록 사람들에겐 기대고 싶은 희망이 필요하다. 민주노동당이 생각하는 진보적인 지역체제는 대체 어떤 것일까? 영국 노동당의 좌파시장 켄 리빙스턴이 이끌던 런던은 한때 대처 정부에 맞서는 양산박이 되기도 했다. 브라질의 노동자당은 뽀르뚜 알레그리라는 도시를 자신을 상징하는 지역으로 만들었고 전 세계적으로 그 성과를 인정받았다. 그렇다면 우리 진보정당의 그림은 무엇인가? 의정활동 우수의원을 꼽으면 대부분이 진보정당 의원들인데도 왜 선거에서 고전을 면치 못할까? 현안에 밀려 장기적인 전망을 세우지 못한다면, 진보정당의 전략은 모래성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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