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이 지났건만 천안함이 침몰원인에 대한 궁금증은 쉽게 풀리지 않고 남북한간의 긴장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고 긴장을 완화하는데 앞장서야 할 종교인들이 오히려 공공연히, 또는 은밀히 이런 긴장을 부추기는 일도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는 "이제는 더 이상 우리 사회에 김정일 추종 세력이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천안함의 재건조를 위한 모금 운동을 시작해야 합니다"라며 천안함재건조를 위한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다. 다행히(?) <한기총>이 당장 전쟁을 벌이자고 주장하지는 않고 "침몰의 원인이 북한의 소행으로 드러나더라도 무력응징만큼은 피해주기 바랍니다. 그 대신 무력응징을 제외한 모든 단호한 대응을 총동원해주기 바랍니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는 했다. 하지만 한기총이 참여하는 보수단체의 집회들은 공공연히 "김정일 단죄", "북한이 도발시 북한의 잠수정, 잠수함 기지를 공격", "한반도는 지금 총성없는 전시상황"이라고 외치고 있다. 평화의 사도여야 할 기독교인들이 전쟁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이런 집회에 함께 하고 있다.

이런 모순이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미국과 소련간의 동서냉전이 한창일때, 미국에서도 종교인들이 '정당한 전쟁', '핵전쟁'을 지지하는 입장을 밝히곤 했다. 이런 흐름을 거스르며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신부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지지하는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머튼 신부가 적극적으로 글을 쓰며 평화를 외치자 가톨릭 신부들이 머튼을 비판하기도 했고 돔 가브리엘 총아빠스(대수도원장)은 '전쟁과 평화'에 관한 글을 쓰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든 핵전쟁, 그리고 꼭 핵무기가 아니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도시와 인간과 국가와 문화를 대규모로 파괴하는 것은 극히 중대한 범죄행위이며, 이것은 그리스도교 윤리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그 어떤 정상적인 도덕률에 의해서도 금지되는 행위"라고 믿었던 머튼은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머튼의 평화론](분도출판사, 2006)은 그가 쓴 평화에 관한 여러 가지 글을 담고 있다. "내일 신문 헤드라인보다 더 시의적절한 머튼의 경고"라는 추천사처럼 머튼은 암울한 냉전 상황 속에서도 평화의 빛을 놓치지 않으며 맹목적인 사람들에게 경고를 보낸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무기를 써서라도 공산주의와 싸울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 어떤 무기가 있더라도 공산주의와 싸우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전쟁에서건 평화에서건 그리스도적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는 있어야 한다." 머튼이 얘기하는 그리스도적 양심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그리스도가 육체를 지닌 '말씀'임을 믿는 사람은 모든 인간을 그리스도로 여겨야 한다"는 사실이자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반드시 우리 형제를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상황을 단순하게 정리하지 말고 외부의 공산주의나 파시즘에 저항해야 하지만 우리 내부의 파시즘과 집단주의에도 저항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무기는 파괴적인 전쟁무기가 아니라 "'성령의 칼'에 대한 믿음"과 "기도"이다. 이 양심과 믿음, 기도를 잃어버렸기에 그리스도인의 사고방식에서 "예외적 폭력이 정상이 되었고 정상적 자비는 오히려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 버렸다."

머튼 신부는 짧은 17편의 글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비판하고 그리스도인이 전쟁을 지지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마치 요즘 한국에서처럼 전면전이 아니라 제한된 전쟁을 벌이면 어떠냐는 주장에도 머튼 신부는 전쟁을 소규모로 제한하는 것이 전쟁을 아예 없애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자제력을 필요로 한다고 꼬집는다. 그렇게 자제력이 뛰어나다면 전쟁을 없앨 것이지 왜 제한전을 벌이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
전쟁 그 자체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전쟁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려는 욕구와 태도에 우리가 맹목적으로 어쩔 수 없이 얽매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전쟁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고 비판한다.

어떤 대가를 치뤄서라도 반드시 적국을 없애야 한다고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머튼 신부는 이렇게 꼬집는다. "
우리가 자유와 권리와 인간적 진실을 옹호한다고 말할 때, 실제로는 무책임한 행동과 흥청대는 삶과 돈벌이의 자유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지키려고 하는 게 무엇인가? 우리의 종교인가 우리의 물질적 부인가? 아니면 종교와 돈을 우리가 완전히 동일시하게 되어서 그 둘을 구분하는 것이 이제 도저히 불가능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한국의 종교계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우리는 무엇을 지키기 위해 저 너머의 사람들을 희생시키려 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머튼 신부는 우리 속에 내면화된 "도덕적 차원에서의 거의 완전한 수동성과 무책임성, 그리고 사회적․정치적․군사적 영역에서의 악마적 능동성"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정부 당국이 앞으로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지 전혀 감도 잡지 못한 채 ‘합법적으로 선출된 권력’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라는 식으로 더욱 안이하게 판단하는 맹목적 믿음"을 벗어나야 한다.

나아가 머튼 신부는 신앙과 정치를 나눠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행동으로 발언"해야 하고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행동이 투표장 안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행동은 누구에게나 명백하게 드러나야만 하며,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크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진리를 자기희생―오해와 불의와 비방과 심지어 투옥이나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으로 지킬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순수하게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다바쳐 그것을 지키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이것은 노동문제든, 인종 문제든, ‘제3세계 문제든, 국제문제든 간에 모든 영역에서 정의를 위해 쉴 새 없이 투쟁해야 함을 뜻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내적 의도와 외적 행위 간의 거리를 좁혀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의 사회적 행동은 우리 내면의 깊은 종교적 원칙과 부합되어야 한다. 신앙과 정치를 더는 별개의 영역으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조금 위험한듯 보이지만 머튼 신부의 뜻을 왜곡하지 않는다면 이는 사랑과 평화라는 종교의 원리가 연대와 정의라는 사회의 원리와 무관할 수 없음을 뜻한다.

이런 머튼 신부의 뜻은 지금 한국에서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종교계의 입장에서도 읽을 수 있지만 그 뜻은 한반도 전체,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전 세계로 확대되어야 온전해질 수 있다. 더 많은 종교인들이 평화를 위협하는 다양한 흐름에 맞서 자신의 양심과 신념을 지켜야 한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머튼 신부는 이렇게 얘기한다. "이것을 위해 아직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재빨리 지나가고 있다." 우리의 시간도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한다.
 

선거 끝! 정치 끝?

: 축하의 샴페인을 터뜨리기엔 이르다



6․2 지방선거는 한나라당의 완패로 끝이 났다. 한나라당은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 자리를 지켰지만 서울시 내 25개 구청장 중 단 4개만을 차지했다. 서울시의회 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은 전체 106석 중 27석을 차지했다. 경기도에서도 한나라당은 31개 시장․군수 선거에서 단 10개를 차지했고, 도의회 전체 124석 중 42석을 차지했다. 어렵게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 자리를 지키긴 했지만 예전처럼 일방적으로 정책을 밀어붙이기는 어렵게 되었다.


허나 한나라당의 완패가 ‘선거의 승리’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이번 선거결과를 보면 한나라당이 빠진 자리를 대부분 민주당이 채웠다. 그런데 이번 지방선거 공천과정 때 민주당 내부에서는 전략공천, 이중당적, 공천뒤집기 등의 잡음이 터져 나왔다. 개혁정당의 공천과정에서 벌어지면 안 될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런 점에서 “투표가 권력을 이겼다”는 민주당 정세균 대표의 말은 본질을 감추려는 시도이다.


교육감 선거에서는 곽노현, 김상곤 등의 진보교육감 후보들이 6명이나 당선되며 교육정책의 변화를 예고했지만 정치인을 뽑는 선거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여러 지역에서 착실히 활동을 해 왔던 풀뿌리 후보들이 중앙정치의 바람에 밀려 낙선한 점은, 그리고 민주당이라는 이유만으로 검증되지 않은 후보들이 다수의 표를 얻은 상황은 그 불안함을 예고한다. 또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정당득표율을 봐도 비슷한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


더욱더 불안한 건 선거에서 한나라당을 이기려는 ‘반MB연합’, 선거연합이 선거 이후에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무상급식 찬성, 4대강 반대 외에 ‘반MB연합’이 어떤 공통점을 가지며 공통의 정책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당선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민주당 후보로 단일화했고 그렇게 당선된 지역에서 야권연대는 어떤 새로운 정치구조를 만들 수 있을까? 지금처럼 단체장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 지방자치제도 하에서 공동지방정부는 어떻게 작동될까? 특히 단체장만이 아니라 지방의회에서도 민주당이 많은 의석을 확보한 상황에서 권력분점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번 선거에서 표를 몰아줬던 지역주민들은 이런 권력구조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까? 이런 정치구조에 대한 논의 없이 무조건 단일화한 지역일수록 선거의 후폭풍이 거세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번 선거 결과는 한나라당과 청와대의 오만함과 독선에 경고를 보냈다는 점만을 보장할 뿐이다. 그마저도 저들이 정책을 얼마나 변화시킬지는 지켜봐야 할 부분이고 어쩌면 막대한 비용을 쏟아 부어서 여론을 바꾸고 조작하려 들지 모른다. 그러니 선거로 경고했으니 알아서 하겠지라며 손을 놓을 게 아니라 더욱더 적극적으로 각각의 사안을 물고 늘어져야 한다.


그리고 민주당이나 다른 정당이 집권한 지역에서도 후보들이 제대로 일하는지 감시해야 한다. 무상급식이나 4대강사업 반대 외에 지역사회를 어떻게 바꾸려 하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사실 무상급식은 선거가 진행되는 동안 한나라당 후보들조차 공약으로 내걸 정도로 많은 예산이나 정책전환이 필요하지 않은 공약이고, 4대강사업 반대는 국책사업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지방정부의 간섭이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민주당 후보들이 내건 공약들을 살펴보면 그 규모만 작을 뿐 4대강사업과 비슷한 형태의 개발공약들을 심심찮게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쓸데없는 개발사업들로 지역토호들의 배를 불리지는 않는지, 선거를 도왔다는 이유로 특혜를 받는 사람들은 없는지, 내가 낸 세금이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틈틈이 지방자치단체의 홈페이지에 들려서 지역사회의 비전이 제대로 만들어지고 정책이 집행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가끔 지방의회에 방청을 가서 뽑아준 의원들이 제 몫을 다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지역의 학교와 복지관, 도서관, 주민자치센터 등이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지를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겉만 뻔지르르하고 속은 곯아서 우리 삶을 위협하는 정책은 없는지 계속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경기도지사, 서울시장을 지지했던 표의 수라면 주민들이 직접 조례를 발의할 수 있고 중요한 정책에 관한 주민투표를 요구할 수도 있다. 만일 단체장이나 지방의원이 선거 때 약속했던 것과 다른 행동을 하거나 실패할 정책을 추진한다면 주민소환제도를 통해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도 있다.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정치인들이 긴장하며 일꾼 역할을 제대로 한다.


잘 뽑아줬으니 정치인들이 알아서 잘 하리라고 믿는다면 큰 착각이다. 주인이 일을 제대로 시키지 않으면 머슴들은 주인을 깔보기 마련이다. 그러면 “갈아봤자 소용없다”는 우리사회의 정치불신은 또다시 높아질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정치에 대한 불신과 냉소가 늘어났다면, 지금 우리는 그런 불신과 냉소를 가라앉힐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실패의 역사를 반복하지 말자.


 

좌파와 출파: 역사의 이단은 어떻게 등장하나?



조경달의 『이단의 민중반란』(역사비평사, 2008)과 『민중과 유토피아』(역사비평사, 2009)를 읽고 있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역사학자 조경달은 근대 이행기의 민중운동이 자율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근대 이행기의 민중운동을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민족운동과 혼동”하면 안 되고 “민중이 자신들의 생활주의에서 비롯된 고유한 문화와 논리를 가지는 이상, 비록 지식인들의 지도를 받아들였더라도 그 운동에는 자율적인 측면이 많이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 증거로서 조경달은 갑오농민전쟁과 동학, 3․1운동 등 각지의 민중반란을 분석한다.


이런 연구를 통해 그는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 조경달의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한국의 근대사가 근대국가 건설이라는 하나의 일관된 목표를 향해 발전되었다는 주장은 허구이다. 조경달의 목소리를 빌리면, “유토피아와 현실의 국가는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국가는 민중의 유토피아사상을 배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점은 근대국가의 창설이 실패해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과거, 그리고 현재까지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현재로부터 제기되는 중요한 의문, 즉 민중의 입장에서 근대=국민국가란 어떠한 의미를 가진 것이었던가 하는 의문을 조선 근대사의 맥락에서도 제기해야만 한다. 아직도 통일국가를 실현할 수 없는 회한에 가득 찬 조선의 현실은 자칫하면 국민국가를 이상화理想化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거꾸로 그러한 불행한 현실이 있기 때문에 조선은 유토피아로서 국가의 상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민중과 국가의 관계를 다시금 냉정히 바라보는 지평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조경달은 『이단의 민중반란』에서 갑오농민전쟁을 꼼꼼히 분석한다. 최제우의 원시동학과 최시형의 정통동학이 만든 체계의 틈에서 서장옥과 전봉준, 김개남의 이단동학이 자라고 민중들은 이에 열광한다. 조경달은 흔히 갑오농민전쟁의 성과로 알려진 집강소에 대해서도 그것이 실제로는 ‘관민상화’의 산물, 즉 힘을 잃은 공권력이 반란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로 본다. 결론을 보면, 조경달은 갑오농민전쟁을 통해 민중이 변혁의 주체로 등장하기는 했으나 정치의 주체로 등장하지는 못했다고 분석한다. “변혁의 주체를 단 한 사람의 초인적 진인=구세주에서 총체적인 민중으로 확대하고자 한 것이야말로 동학의 획기적인 면”이지만 국왕에 대한 환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민중은 스스로를 정치의 주체로 등장하지 못했지만 끊임없이 근대에 저항하는 반근대적 변혁지향을 품었다.


책을 읽다보면 우리 역사에서 다양한 정치적 계기들을 만나게 되는데, 조경달은 임술민란이 민란시대를 알린 신호탄이라 얘기한다. 조경달은 수령구조에서 소외된 몰락양반이나 향촌 지식인들이 ‘덕망가적 질서’를 갖췄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덕망과 정의감이 있는 사족이 존재하기를 바라고 그들에 의해 향촌의 질서가 조화롭게 재생하기를 기대하는 심성”을 가진 민중이 이들과 함께 일종의 유토피아를 꿈꿨다고 본다.


임술민란이 일어날 당시 전라좌도 3읍 암행어사였던 김원성金元性은 이런 보고를 남겼다고 한다. “호남(전라도)의 여러 읍에는 출파出波와 좌파坐波의 명맥이 있는데, 모두 향유鄕儒 가운데서 문자를 조금 해독하고 자못 권력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관정官政을 살펴 득실을 논하고 시비를 말하며 잘못을 기꺼이 비방한다. 앉아서 지휘하는 자를 좌파라 하고, 분주하게 노동하고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지 않아서 경향京鄕으로 출몰하는 자를 출파라 한다. 이번 여러 읍의 소요는 (사람들이) 관리의 가혹한 정치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이른바 수창자首昌者는 출파나 좌파와 같은 자들이다.”


흥미로운 기록이다. 반란의 수장인 출파와 좌파라. 이 구절을 읽으며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와 묘하게 겹친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시대에 스스로를 좌파라 칭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대중들 사이에서 조그만 권력을 가진 그들은 외국의 급진적인 이론을 수입하기에 바쁘고 권력을 비방하기에 바쁘다. 그렇게 분주하게 일하며 그들은 반란을 일으키는데 일정한 기여를 한다.


하지만 좌파들은 ‘앉아서 지휘’하고자 한다. 자신들은 큰 판을 읽으며 마치 도박바둑을 두듯이 말을 움직이려 한다. 저만큼 떨어져서 보면 크게 읽을 수 있겠지만 가까이 가서 두루 살피지 않으면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정통이 필요하지만 이단도 필요한 것은 현실의 층이 다양하고 사람들의 삶 역시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주하게 노동하고 움직이며 온갖 동네에서 출몰하는’ 출파가 필요하다. 민중과 더불어 새로운 일을 도모하는 출파들은 곳곳에 반란의 씨앗을 심고 기운을 일으켰다. 출파와 좌파의 힘이 모이고 민중들이 함께 꿈틀거리면서 반란이 일어났다.


허나 모두가 앉아서 지휘하려 들면, 자연히 분란이 생기고 망할 수밖에 없다. 분란과 갈등이 생기는 건 부정적이지 않지만 앉아서 지휘하는 자들의 분란은 망하는 지름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좌파만 수두룩하고 출파는 거의 없거나 인정과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 이단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좌파들은 더불어 꿈꾸기를 주저한다. 자신의 순수성이 훼손될까 걱정일까, 아니면 함께 하길 싫어하는 천성일까? 혼자 고고한 삶을 추구하다보니 ‘명망’은 높지만 ‘덕망’은 낮다. 똑똑하고 말을 잘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다가서지 못한다. 좌파가 하지 못한다면 출파가 그런 역할을 보완해야 할 터인데 좌파는 넘쳐 나지만 출파는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가 거듭 반란의 실패를 경험하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나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출파의 모습을 풀뿌리운동에서 본다. 풀뿌리의 힘이 강해질수록 이단의 힘도 강해지고 새로운 반란이 싹을 틔울 수 있다고 믿는다.



 

선거의 가장 기본은 투표이다. 주변 사람들이나 부모님들은 누구를 찍어야 한다며 열심히 훈수를 두시지만 딱히 기준이 없어 그 말을 따르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투표를 해야 할까? 공약집이나 홍보물을 열심히 살펴보면 누가 더 나은지를 가릴 수 있을까?



1단계: 나와 우리 마을에 필요한 건 뭘까?


물론 선거자료를 열심히 보는 건 중요하다. 아는 만큼 조금 더 나은 사람을 뽑을 수 있다. 그런데 이건 순서가 좀 뒤바뀐 거다. ‘어떤 사람을 찍을 것인가?’보다 훨씬 중요한 건 ‘나는 뭘 원하는가’이다. 선거는 내가 원하는 바를 대신해서 해결할 사람을 뽑는 자리이지 나한테 뭘 해주겠다는 사람을 뽑는 자리가 아니다. 선거는 권리를 행사할 자리이지 선물을 받는 자리가 아니다. 시장에 갈 때 필요한 물건들을 미리 적어서 나가는 사람이 ‘알뜰한 소비자’이듯이, 선거를 맞이해서 자신이 필요한 걸 잘 챙기는 사람이 ‘훌륭한 시민’이다. 그리고 ‘훌륭한 민주시민’이 되고 싶다면 나에게 필요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 마을에, 우리 공동체에 필요한 것을 함께 따지면 된다. 나와 우리 마을에 필요한 걸 먼저 쭉 늘어놓고 그걸 충실히 잘 따르겠다는 후보자를 찍어야 우리 삶이 더 행복해질 수 있고 제대로 잘 하고 있는지 평가할 수도 있다.


그래야 대표가 하는 일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의원님, 시장님, 우리 마을에 이런 일을 해줘서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할 게 아니라 “내가 뽑아줬으니 당연히 이 정도는 해줘야지. 그리고 앞으로는 이렇게 해주면 더 좋겠어.”라고 말해야 민주적인 시민이다. 사실 그들이 마을에 해주는 사업들은 그들의 개인 재산을 털어서 해주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짬짬이 낸 세금으로 하는 일이니 고마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공약을 지키면 잘 했다고 등을 두들겨주면 되지 굳이 고마워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투표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내가 필요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 마을에 필요한 것, 내 이웃과 가족들이 필요한 것을 챙기고 공동의 과제를 찾는 것이다. 당신이 우리에게 뭘 해줄 거냐고 물을 일이 아니라 우리는 지금 무엇이 필요하다고 얘기하고 그 일을 성실하게 하겠다는 사람을 대표로 뽑아야 한다.



2단계: 사람됨 살피기


선거에 관한 정보를 얻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선거홍보물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 강국 한국에서는 웬만한 후보자들이 선거 때마다(아니, 거의 선거 때만) 홈페이지를 운영한다. 아니면 직접 선거사무소를 찾아가도 좋다. 혼자가면 썰렁하지만 마을 사람들을 모아서 찾아가면 대접을 제대로 받을 수 있다. 그러니 궁금한 게 있으면 참지 말고 곧바로 묻고 그 내용을 널리 알려서 자신이 한 말을 책임지도록 해야 한다. 주인으로서 우리는 머슴에게 계속 고민거리를 던져줘야 한다.


대통령선거는 봉투가 비교적 간소하지만 국회의원선거나 지방선거로 오면 홍보물 봉투가 제법 두툼하다. 출마하는 사람도 많지만 국회의원선거와 지방선거 때는 직접 후보자에게 투표하는 것 외에 일정한 비율의 표를 얻으면 의석을 가질 수 있는 정당명부비례대표제도가 실시되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선거의 경우 비례대표는 전체 유효투표의 3% 이상을 얻으면 원내 의석을 가질 수 있다. 2004년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13.1%의 지지를 얻어 8명의 비례대표를 국회로 보냈다. 그리고 지방선거의 경우 시․도의원만이 아니라 자치구․시․군의원도 비례대표로 뽑는데, 비례대표는 의원정수의 1/10 비율로 선출되고, 후보자 중 50% 이상을 여성후보로 채우도록 되어 있다. 비례대표투표는 득표율에 따라 비례대표순서대로 당선되니 어떤 사람이 추천되었고 순서가 어떻게 되어있는지를 한번 살펴보고 투표하는 게 좋다.


비례대표는 평소에 내가 눈 여겨 보던 괜찮은 정당에 찍으면 되고, 직접 투표하는 건 앞서 얘기했듯이 나와 우리의 필요에 맞춰 투표하는 게 좋다. 내게 필요한 부분을 찾았다면 그와 비슷한 공약을 내건 후보를 찾으면 된다. 그런데 만일 내게 딱히 필요한 부분을 못 찾았다면 조금 더 머리를 써야 한다. 보통 홍보물은 무슨 일을 하겠다는 온갖 공약(公約)들로 채워져 있어 후보자들의 차이를 잘 느낄 수 없다.


그래도 나오는 사람이 나를 잘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인지 그 ‘사람됨’부터 먼저 확인해 보자. 홍보물에는 후보자의 재산상황(배우자와 직계의 재산 포함), 병역사항, 최근 5년간 소득세·재산세·종합부동산세 납부 및 체납실적, 100만원 이상 벌금형을 포함한 전과기록, 직업·학력·경력 등 인적사항이 나와 있다.


먼저 재산과 세금, 경력을 살펴봐야 한다. 돈이 많은 게 죄는 아니다. 하지만 그 돈을 어떻게 벌었고 어떻게 쓰고 있는지는 정치인에게 중요한 덕목이다. 재산이 많다면 어떤 일을 해서 재산을 모았고 재산이 적다면 왜 그런지를 잘 살펴야 한다. 인터넷에서 이름과 직업으로 검색하면 정보를 쉽게 구할 수 있다. 더불어서 세금 납부 실적과 직업, 경력도 잘 살펴봐야 한다. 직업은 변호사나 기업인인데 세금을 나보다 적게 냈다면 일단 의심해봐야 한다.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으면서 정치인이 되겠다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그런 분들은 일단 자기 주머니를 따로 찰 가능성이 높으니 정치인으로 적합하지 않다. 그리고 직업과 경력을 잘 봐야 하는 이유는 정치인들이 자기 회사나 자기 부인, 자식들의 회사, 자기가 속한 단체나 협회에게 이익을 주는 공약을 내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특히 기초의원의 경우 그런 일이 많다). 공약의 주요 내용과 직업, 경력의 내용이 겹친다면 한번 의심해봐야 한다.


다음으로 병역사항. 병역을 면제받는 것이 문제는 아니지만 멀쩡한 사람이 면제를 받았다면 의심해봐야 한다. 사실 이 조항이 의미를 가지려면 후보자만이 아니라 후보자의 가족 병역사항까지 따져봐야 하는데 아쉽게도 홍보물에는 후보자의 것만 있다. 예전에 국적법을 개정할 때 국내외에서 1,820명이 국적을 포기했는데, 살펴보면 전(前)국방장관, 외무장관, 대학총장의 손자 등이 있었고, 서울시 강남권이 40% 이상을, 그 중 가장 부자라는 강남 도곡동의 타워팰리스에 사는 사람들이 단일주소지 중 가장 많은 인원을 차지했다. 자기 이익 다 챙겨먹는 사람들이 정작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잘 살펴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전과기록. 생각보다 정치인들 중에 전과자들이 많다. 1987년 이후에는 민주화운동을 하다 감옥에 갔다 온 사람들이 정치계로 많이 들어갔지만 그런 경력 외에 사기나 뇌물수수같은 잡범으로 감옥을 다녀온 사람들도 더러 있다. 민주화운동 때문에 전과기록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그 사실을 함께 기록하니 상관없고 다른 범죄기록이 있으면 잘 확인하자.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실수를 더 이상 범하면 안 된다.


그리고 선거에 처음 나온 사람이 아니라 이미 공직을 맡고 있는 정치인이라면 그 사람에 관한 평가를 들어봐야 한다. 인터넷 쇼핑을 할 때 상품평이나 사용후기를 보고 그 상품을 평가하듯이, 정치인도 그렇게 평가를 해야 한다. 그 사람이 발행하는 의정활동보고서나 의정활동백서에만 의존하지 말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거나 인터넷 검색을 활용하면 어렵지 않게 평가정보를 얻을 수 있다. 쇼핑 할 때는 눈이 뻘겋게 정보를 검색하는 사람들이 투표할 때는 너무 신경을 안 쓴다. 이제 신경을 좀 써야 머슴들이 기억력 나쁜 국민들이라며 거만하게 굴지 않는다. 선거 끝나고 난 뒤에 후회하지 말고 미리 신경을 좀 쓰자.



3단계: 정책실현가능성 살피기


아무리 좋은 공약을 내걸더라도 실현될 가능성이 없으면 그건 말짱 도루묵이다. 그러니 공약의 숫자나 하겠다는 사업의 규모보다 실현가능성을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옛날에는 당선되면 이것저것 다해준다고 뻥을 칠 수 있었는데 요즘은 ‘매니페스토’(참공약)라고해서 그 공약을 지킬 과정을 밝히게 한다. 2008년도에 개정된 공직선거법은 선거공약과 함께 각 사업의 목표, 우선순위, 이행절차, 이행기한, 재원조달방안을 게재하도록 하고 있으니 뻥을 치지는 않는지 잘 살펴보자. 이런 과정을 세세하게 밝히지 않는 사람이라면 일단 뻥쟁이로 봐야 한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http://www.manifesto.or.kr/)에 가면 매니페스토운동과 관련된 여러 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으니 참고하면 좋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서도 여러 가지 선거정보와 선거자료 등을 찾아볼 수 있다. 매니페스토운동에 참여한 사람이라면 일단 그 공약을 한번은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니 약간은 더 신뢰할 만하다.


그리고 실현가능성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공약이 시민들의 욕구를 얼마나 반영했는가이다. 시민들은 당장 필요한 게 복지와 교육인데, 후보자들은 건설이나 재건축 등 엉뚱한 공약을 내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공약들이 아파트 재개발을 하고 커다란 편의시설을 세우고 다리를 놓고 도로를 까는 하드웨어 쪽에 집중되어 있다. 일단 뭘 많이 세운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세하게 따져봐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후보자들은 자기나 가족들이 운영하는 기업에 이득을 가져다줄 공약들을 자기 지역을 위한 것인양 선전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냥 선거를 대행해주는 회사에 맡겨서 지역의 욕구와 무관한 사업들을 늘어놓기도 한다. 그러니 그 사업이 실제로 필요한 건지, 재정은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를 따져봐야 한다. 복지관이나 주민센터 등 주민들을 위한 시설을 만들겠다고 하는 경우에도 그 시설이 얼마만한 규모로 어떤 위치에 세워지는지를 봐야 한다. 주민들이 잘 가지도 않는 곳에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편의시설을 세우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이사를 할 때는 다리품을 파는 만큼 좋은 집을 구할 수 있다. 마찬가지이다. 후보자의 정책을 평가할 때도 품을 들이는 것만큼 좋은 사람을 대표로 뽑을 수 있다. 보통 후보자들은 선거사무소를 설치하니 그 사무실에 한번 방문해서 주인의 지위를 실험해 봐도 좋다. 직접 찾아갔는데 소 닭 보듯 한다면 주인을 제대로 섬길 준비가 안 된 머슴이니 바로 리스트에서 지우자.


그리고 선거법에 따라 각 후보자들은 선거운동기간 동안 거리유세나 전화, 문자, 이메일 등을 통해 자신의 정책을 알릴 수 있다. 대통령후보자는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회의원이나 자치단체장, 지방의원들은 지역의 유선방송을 통해 자신의 정책을 홍보한다. 또한 지정된 공개장소에서 연설하고 대담을 나눌 수 있다. 그러니 싹수가 보이는 인물인지 그 목소리에 귀를 잘 기울여 보자.


또한 시민단체들은 보통 선거 때가 되면 후보들간의 정책토론회를 개최하곤 한다. 시간이 되면 한번 참석해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좀 들어볼 필요가 있다. 토론회에서 말을 잘 하는 후보자보다는 하나의 정책이라도 진심을 가지고 대하는 후보자에게 귀를 기울이면 좋다.



4단계: 기권하거나 무효표 만들기


요즘 정치는 시장원리를 따라 정당이 정책을 생산하고 유권자가 정책을 선택한다는 논리를 많이 내세운다. 유권자가 직접 정책을 고민하지 않도록 최대한 소비자의 기호에 맞춰 정책을 만들고 뜻을 받들겠다고 외친다.


그런데 쇼핑할 때는 마음에 드는 상품이 없으면 사지 않는 게 최선의 선택이다. 만일 마음에 드는 후보가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에 드는 후보가 없는데도 자꾸 투표를 하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에 드는 후보를 찾는 것도 시민의 몫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후보를 떨어뜨리는 것도 시민의 선택 중 하나이다. 왜 이 물건이 마음에 안 드는지 알려야 파는 쪽에서도 고민을 좀 할 게 아닌가? 좋은 상품이 나올 때까지 상품을 사지 않으면서 나쁜 상품을 계속 떨어뜨리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제대로 된 후보자가 나올 때까지 계속 삐딱하게 굴자.


워낙 쓸만한 인물이 없는 선거판인지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표소에 들어갈 때까지 망설이게 된다. 특히 마음에 드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면 더더욱 그렇다. ‘에라, 모르겠다 한 표 먹고 떨어져라’는 심정으로 투표할 수도 있지만 한번 떠난 투표용지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미국에는 ‘no bullet, but ballot’, 즉 총알 대신 투표권이라는 말이 있다. 총으로 해결할 일을 투표권으로 해결하라는 말이다. 그만큼 비중있게 써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다.


진정 시민이 주권자라고 여긴다면 시민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후보를 찾을 때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후보자를 거부할 권리를 누려야 한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투표용지에 기권란을 하나 만들어서 시민들이 지금 나온 후보들 모두를 반대한다는 의견을 드러낼 수 있도록 보장하면 된다. 이런 선거를 거부하겠다는 시민들의 마음이 드러날 수 있도록 투표용지에 기권란을 만들자. 기표소에서 기권란을 그리고 그곳에 기표를 하자. 그렇게 기표하면 잘못 찍어서 생긴 무효표와 구분되니 우리의 생각을 드러낼 수 있다. 투표율을 높이면서도 수동적으로 지금의 선거판에 휩쓸리지 않고 우리의 정치의지를 드러낼 수 있다. 그렇게 감시하는 시민들의 눈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당선된 사람들도 정신을 차리고 멋대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정 마뜩잖으면 무효표를 만들거나 투표를 거부해도 좋다. 찍을 사람이 없는 선거판을 거부한다는 점을 표현하는 건 주인의 권리이기도 하다. 유럽의 경우 실제로 투표거부운동이 벌어지기도 했고, 멕시코에서는 무효를 뜻하는 눌로(Nulo)를 찍자는 ‘Voto Nulo 캠페인’이 벌어지기도 했다. 눌로운동은 아무도 찍지 않는 것이 현직 정치인들을 뽑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벌어졌다고 한다.


다만 한국에서 이런 행위는 투표용지를 잘못 찍어 무효표를 만든 경우나 정치에 무관심해서 투표장에 가지 않는 경우와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결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무효표를 만들거나 투표를 거부하려 한다면 최소한 웹사이트에서라도 그 운동의 취지를 알리는 블로그나 카페를 만들어 다른 사람들의 동참을 유도해야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투표율을 높이고 싶다면 기권의 권리를 달라!

: 거짓 선거판을 거부하고 시민주권을 보장하는 기권란을 만들자



지방선거를 앞두고 각 시도의 선거관리위원회는 투표율을 끌어올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투표율이 지나치게 낮으면 선거의 정당성이 사라지니, 선관위는 시민들에게 투표를 권유할 뿐 아니라 상품권이나 컴퓨터 등을 경품으로 주는 변칙적인 방법까지 쓰고 있다. 하지만 그런 편법이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할지는 의문이고, 이런 편법들은 선거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더욱더 왜곡시킬 수도 있다.


특히 이런 선관위의 편법은 투표율이 낮은 이유를 투표장에 가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찾는다. 허나 사람들이 투표장을 찾지 않는 건 투표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투표할 사람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내가 사는 용인시만 하더라도 세 명의 시장후보가 있는데, 세 명 모두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한나라당, 민주당의 후보는 국회의원이 공천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해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선출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고, 다른 한 명의 후보인 현직시장은 인사비리로 이미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처럼 세 명 모두에게 께름직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운데, 이 세 명을 놓고 사람들이 투표장에 가서 투표를 하고 싶을까?


더구나 시장만이 아니라 도의원, 시의원, 교육의원을 놓고 봐도 비슷한 마음이다. 홍보물을 보면 이런저런 경력을 써놓았지만 선뜻 지지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선거 끝나고 나서 정당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비례대표도 께름직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런 상황이 용인시만의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마음에 들지도 않는 사람을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뽑아야 하는 선거를 민주주의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이렇게 뽑을 사람이 없는데도 투표하고픈 마음이 생길까?


따라서 정말 투표율을 높이고 싶다면 기권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진정 시민이 주권자라고 여긴다면 시민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후보를 찾을 때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후보자를 거부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투표용지에 기권란을 하나 만들어서 시민들이 지금 나온 후보들 모두를 반대한다는 의견을 드러낼 수 있도록 보장하면 된다. 이런 선거를 거부하겠다는 시민들의 마음이 드러날 수 있도록 투표용지에 기권란을 만들자.


시민들 다수가 기권란에 기표하면 선거를 다시 치르도록 해야 한다. 주권은 정치공동체의 틀을 만들 권리이다. 한국이 민주공화국이라면 응당 시민들의 주권을 보장해야 한다. 선거는 시민이 일꾼을 고르는 자리이지 일꾼이 시민들에게 뭘 해주겠다며 유혹하는 장이 아니다. 더구나 그들이 쓰는 예산은 시민들이 낸 세금이지 그들이 자기 재산을 팔아 마련한 돈이 아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예산을 제대로 써야 시민들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다.


이미 2008년도 국회의원 선거를 치를 때 이런 얘기가 나왔는데, 선거가 끝나고 유야무야 넘어갔다. 정치인들이 이런 주장을 반길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야 마음대로 권력을 만끽할 수 있으니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제도개선을 반대할 것이다.


하지만 세계 어느 나라에도 그런 사례가 없다면 우리가 지금 만들면 되고, 민주주의란 특정한 모델이 아니라 민중이 지배하는 방식이니 우리 실정에 맞게 만들면 된다. 그리고 선거를 다시 치를 비용이 문제라면 그런 후보자들을 공천한 정당이 그 비용을 담당하도록 해야 한다. 당원들이 내는 당비보다 국고보조금으로 정당을 운영하면서도(2008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정당의 당원들 중 당비를 내는 사람은 7.1%에 불과하다) 선거조차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다면 정당이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하면 정당도 더욱더 신중하게 후보자를 공천하지 않을까?


그들이 권력을 쥐고 있어 선거제도를 바꿀 수 없다면 우리가 직접 뜻을 밝히자. 기표소에서 기권란을 그리고 그곳에 기표를 하자. 그렇게 기표하면 잘못 찍어서 생긴 무효표와 구분되니 우리의 생각을 드러낼 수 있다. 투표율을 높이면서도 수동적으로 지금의 선거판에 휩쓸리지 않고 우리의 정치의지를 드러낼 수 있다. 그렇게 감시하는 시민들의 눈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당선된 사람들도 정신을 차리고 멋대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한국의 대학이 처한 상황은 위기가 아니다. ‘이미’ 대학은 파국으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올해 3월의 김예슬 선언은 대학을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로 묘사했다. 누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을까? 심지어 대학이 손수 땅장사를 하거나 용역노동자들을 착취하기도 하니 막장이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 그 실상은 이미 드러났고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파국을 극복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대학과 윤리


얼마 전 경희대의 한 여학생이 화장실을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 막말을 한 사건이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다. 마치 심각한 문제가 터진 것처럼 난리이지만 이미 윤리가 사라진 대학에서 무슨 패륜을 논하는가? 불법비자금 조성으로 형을 선고받은 대학이사장이 ‘대학개혁’을 내세우며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현실에서 어떤 윤리를 얘기할 수 있을까? 용역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이나 휴식공간조차 제공하지 않고 이에 항의하면 해고하는 대학에서 어떤 윤리를 얘기할 수 있을까?


지금의 대학이 비윤리적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사건들을 디딤돌로 삼아 대학이 자신의 윤리를 정의하고 실천할 것을 요구해야 옳다. 진리의 상아탑이라는 위선의 막을 걷고 자신이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 그것이 윤리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윤리라는 언어의 모순을 드러내고 진정한 윤리를 실천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만일 대학이 이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자신의 윤리를 증명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예슬은 대학생이 대학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이미 증명했다. 그리고 《녹색평론》 2010년 5․6월호에는 미국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SAT)을 거부하자고 외치는 존 테일러 개토(J. Y. Gatto)의 ‘바틀비 프로젝트’라는 흥미로운 글이 실렸다. 이 글에서 개토는 “시위도 필요 없고, 돌을 던질 필요도, 반대를 위한 정치활동을 할 필요도 없다”고 얘기하며 답안지에 “나는 이 시험을 보지 않겠습니다”라고 쓰자고 주장한다. 만일 시험을 거부한 학생들이 불이익을 받으면 어떻게 하냐는 물음에 개토는 이렇게 답한다. “대학은 다른 무엇이기 이전에 하나의 사업이다. 고객을 필요로 하는 사업체인 것이다.” 그러니 고객이 애써 대안을 고민할 필요는 없다. 거부의사를 밝히면 기업이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윤리이다.


지금은 대학이 이런 거부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등록금이 계속 오르면 굳이 국내대학을 다닐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교육개방으로 곧 외국대학들(막강한 경쟁업체들!)이 국내에 캠퍼스를 만들기 시작하면 누가 국내대학을 다니려 할까? 지금은 중앙일보라는 일개 신문사가 만든 ‘대학평가’에 목숨을 걸고 있지만 그런 방식이 계속 통할까? 따라서 거부가 계속 이어진다면 대학은 대안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대학 밖의 다양한 학문공동체들이 늘어난다면 대학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세미나팀, 생활공동체, 학회 등 다양한 공동체들이 활동하며 대학의 변화를 자극할 수 있다. 이런 대학 밖의 공동체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학생들에게는 대학에 끊임없이 새로운 학문을 요구해야 한다. 학생들이 공부를 하겠다는데 대학이 이를 말릴 수 있을까?


기죽지 말고 나의 요구, 우리의 요구를 ‘당당하게’ 대학에 요구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대학생 선언, 대학원생 선언이 빛을 볼 수 있는 때이다. 더 많은 선언이 새로운 윤리를 만들 수 있다.


대학과 협동


선언이 특정한 사람들만의 언어가 아니듯 대학은 대학생들만의 공간이 아니다. 대학기구에서 일하는 노동자, 프랜차이즈 업체과 용역업체, 위탁급식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대학교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 대학강의의 절반을 도맡는 시간강사도 노동자이고, 자신을 특권층이라 믿는 교수들도 사실은 고용된 노동자일 뿐이다. ‘미래의 노동자’인 대학생들은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과거의 학생운동은 학교 밖으로 나가 공장에서 ‘노학연대’를 외쳤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지금의 대학이야말로 노학연대가 필요한 최전선이다. 이미 그런 흐름이 드러나고 있다. 고려대와 연세대, 이화여대, 동덕여대, 성신여대 등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이 청소용역노동자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며 얘기를 나누는 모임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런 연대의 범위가 더욱더 넓어져 강사와 교수들까지 끌어들일 수 있다면, 대학을 바꿀 든든한 힘이 될 수 있다.


연대가 꼭 과거의 이념적인 방식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 그런 점에서 대학생협의 구성과 발전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88년에 처음 만들어지고 현재 전국 22곳의 대학에서 활동하는 대학생협(
http://www.univcoop.or.kr/)은 좋은 본보기이다. 대학구성원들이 공동출자해서 만든 대학생협은 매점, 서점, 식당 등으로 조합원들의 생활상의 필요를 충족시키며 관계망을 확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협동은 이념이 아니라 생활로 자신의 필요성을 증명할 수 있다.


지금의 대학에 가장 절실한 부분도 바로 협동이다. 서로가 자신의 몫을 내놓고 서로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며 함께 할 일을 찾으면 된다. 학생들은 강좌만이 아니라 생활에서 여러 노동자들에게 도움을 받고 다양한 자원활동에 열정을 쏟는다. 교수와 강사들은 학교가 ‘정한’ 강좌 외에 자신있는 강좌를 열어 학생만이 아니라 지역주민들도 초대한다. 노동자들 역시 자기 업무와 연관된 생활의 지혜를 가르치고 대학의 현안을 얘기하며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캠퍼스 근처의 상인들이나 지역주민들도 참여한다면 협동의 관계망이 더욱더 넓어질 수 있다. 누가 ‘멍석’만 깔아주면 이런 논의들이 이어질 수 있고, 이런 흐름이 이어진다면 대학당국 없이도 대학을 운영할 수 있다.


당연히 이런 흐름이 순조롭게만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족벌과 기업이 지배하는 대학은 이런 자율적인 흐름을 가로막으려 온갖 노력을 다할 것이고, 승자독식의 사회질서는 관계를 끊고 경쟁을 강요할 것이다. 하지만 생활로 엮인 공동체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공동체는 외부의 힘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대학이 우리를 버린다면, 우리도 대학을 버리자. 비우면 채울 것이 보인다.




기계님의 블로그(http://blog.jinbo.net/Darae/?pid=11)에서 퍼왔습니다.

 

이제 투표일이 다음 주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을 찍을지 결심을 한 용인시민은 몇이나 될까? 지방선거 투표율은 1995년 68.4%, 1998년 52.7%, 2002년 48.9%, 2006년 51.3%로 계속 떨어지고 있다. 지방선거만이 아니라 대통령선거나 국회의원 투표율도 떨어지고 있으니 지방선거에만 관심도가 떨어진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지방선거에 관한 관심이 부족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 생활과 밀접한 것이 지방선거인데도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는 더욱더 부족하다. TV나 신문에 나오는 건 대부분 중앙정치이고 우리 지역의 소식은 아주 짧게 언급된다. 그러니 지역에 관한 정보를 구하려면 직접 인터넷이나 시청이나 구청 홈페이지를 검색해야 한다. 복잡하고 귀찮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익숙한 중앙정치의 선호도에 따라 후보자를 뽑거나 그냥 투표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무심함이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되면서 옛날에 비해 시청과 구청이 많은 권한을 갖게 되었다. 돈은 중앙정부에서 나올지라도 시청과 구청이 도시계획, 보육과 복지, 교육, 교통 등 우리 일상과 관련된 정책들을 계획하고 집행한다. 순간의 실수가 4년을 좌우할 수 있고, 순간의 선택이 우리 아이, 우리 가족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더군다나 지금 용인시는 공천과정에서부터 심한 잡음이 일었다. 한나라당은 국민공천배심원단이 부적격 판정을 내린 오세동 후보를 시장후보로 공천했고, 민주당은 기준을 세우지 못하다 여론조사에서 밀린 김학규 후보를 전략공천했다. 여기에 인사비리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현재의 용인시장 서정석 후보가 출마했다. 그러니 누가 당선되더라도 용인시의 밝은 미래를 점치기 어렵다.


이런 상황이니 선거 자체를 포기하고 싶을 수 있다. 하지만 선거 한번으로 세상이 바뀌기를 기대하지 말고 선거를 이용해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바꿔보자. 선거에 앞서 최소한 이것만은 기억하고 다짐하자.


첫째, 사람과 정책이 비슷비슷해 차이점을 찾을 수 없다면, 나와 우리 가족이 필요한 것을 먼저 생각하자. 선거는 일꾼을 뽑는 장이니 내가 무슨 일을 시킬 것인지를 먼저 정해야 한다. 후보자들이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정책으로 만들도록 끊임없이 요구하자. 선거사무소나 인터넷 홈페이지에 들어가 우리가 원하는 정책과 미래를 요구하고 후보자들이 이를 공개적으로 선언하도록 만들자.


둘째, 정책을 따지기 어렵다면 사람됨이라도 꼼꼼히 살펴보자. 선거홍보물에는 후보자의 재산상황, 병역사항, 세금납부실적, 전과기록 등이 나와 있다. 사람됨이라도 괜찮은 사람을 뽑아야 비리나 큰 정책실패를 막을 수 있다.


셋째, 지방자치는 좋은 대표를 뽑는 과정이 아니라 내가 정치에 참여하는 과정이다. 그러니 지방선거만이 아니라 지방자치제도 전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내가 뽑은 사람이 당선되지 않았다고 좌절하지 말고 당선된 사람들이 제대로 일을 하는지 계속 감시하고 문제가 있으면 주민감사제도나 주민소환제도를 통해 문제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리고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는 주민들이 주민발의제도나 주민투표제도를 통해 직접 조례를 제정하고 중요한 정책을 결정할 수 있다. 이런 제도 외에도 시청이나 구청 홈페이지에서 민원을 넣고 정보공개를 청구하며 용인시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투표 한번으로 행복을 바라지 말고 나와 우리의 행복을 위해 끈질기게 정치에 관심을 가지자. 겨울 뒤에 봄이 오고 고난 뒤에 행복이 온다.

 

모두들 살기 힘든 세상이라 얘기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공부하는데도 도무지 행복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삶에서 어떤 부분이 부족해서 행복을 예감하기 어려울까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저는 중요한 원인이 자발성의 부족과 공적 행복에 대한 무지라고 봅니다. 한때 ‘사회자본(social capital)’이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사회구성원들이 서로 협력하는 효율적인 사회를 만들려면 그들 사이에 신뢰와 규범, 연결망이 필요하다는 얘기였지요. 그런 사회자본이 형성되려면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고 그런 과정에서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며 파트너십을 만들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관계를 부담스러워 합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도시화된 한국사회에서 ‘이웃사촌’은 이미 옛날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죠. 요즘처럼 남과 경쟁하느라 바쁜 시절에 누가 남과 관계를 맺으려 할까요? 오히려 관계를 맺으면 맘 편히 경쟁하기 어렵고 내 요구를 분명하게 드러내기도 어려우니 모르고 사는 게 더 좋고 편리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사회처럼 개인주의를 따르는 합리성이 옳다며 스스로를 위안합니다.


그런데 미국의 상황은 이미 변하고 있습니다. 실업과 에너지 위기, 식량위기, 온갖 위기들을 헤쳐가려면 혼자 힘으론 불가능하다는 점을 미국인들도 차츰 깨닫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젖어왔던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으려 하고 있습니다. 혼자서 볼링을 즐기던 생활에서 벗어나 공동체에서 자원활동을 하며 관계의 가치를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에서 개인주의를 보지만 정작 미국사회는 공동체주의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다양한 자원활동이 시도되며 더불어 행복을 누리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라고 생각하면 등을 돌리게 됩니다. 자원활동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느끼려면 주어진 역할보다 스스로 계획하는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즉 자원활동가들의 권한이 커져야 합니다. 자원해서 하는 일이니만큼 반드시 참여자들의 자율성을 보장해야 합니다. 평범한 시민이 공동체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때 첫걸음을 떼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꼭 내가 해야 하나?”, “괜히 참여했다가 나만 피곤해지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계속 머리를 떠돕니다. 그러다보면 조심스런 관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따라서 첫걸음을 쉽게 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과정은 먼저 걸음을 뗀 사람들의 모습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느끼는 겁니다. 그 모습을 보며 “아, 나도 관심을 가지고 자원활동을 시작하면 저런 행복을 느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첫걸음을 떼기가 쉽습니다. 반면에 “와, 저거 굉장히 귀찮고 어렵겠구나


시작부터 이런 계획이 성공하긴 어렵습니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사람이 성장하듯이 자원활동도 처음에는 더디고 실패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관심도 넓어지고 활동력도 커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공/실패의 여부가 계획의 의미와 중요성을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성패보다는 그 일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길 수 있도록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시민들의 역량이 강화되어야만 자원활동의 힘도 강해집니다.


다음으로 필요한 건 구체적인 정보입니다. 함께 하자고 아무리 권해도 정보가 없으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마을이나 공동체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가 참여자의 눈높이에 맞춰져서 제공되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마을에 대한 꼼꼼한 조사를 진행해서 주민들의 욕구나 공동체의 필요를 밝혀내고 그 조사과정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참여의 장으로 유도할 수 있습니다. 정보 없이는 참여가 어렵습니다.


구체적인 권한과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사람들의 선한 마음에만 매달리면 자원활동이 계속 이어지기 어렵습니다. 한국처럼 노동시간이 길고 보육, 교육 등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이 높은 곳에서는 더더욱 그렇지요. 그런 점에서 자원봉사센터가 그런 정보를 제공하고 시민들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면 좋겠습니다.


요즘 풀뿌리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풀뿌리라는 말을 되뇌는 건 다시 떳떳한 시민으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풀뿌리는 단순히 아래로부터 변화의 씨앗을 만들자는 ‘운동의 전략’이 아닙니다. 오히려 풀뿌리는 우리의 삶이 단단하게 이 땅에 뿌리를 내려서 잡초처럼 끈질기게 살아보자는, 서로의 뿌리를 단단히 얽어서 함께 살아보자는 ‘생활의 전략’입니다.

따라서 자원활동의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야 하지만 그 가치가 생활로 단단히 묶이지 않으면, 그래서 자원활동의 가치와 삶이 단단히 서로를 부둥켜안고 받쳐주지 않으면 변화는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자원활동은 변화의 과정이면서 그 자체가 변화의 목표여야 합니다.


그런데 풀뿌리가 희망이려면 서로의 삶이 지금보다 더 많이 얽혀야 합니다. 지금 나와 함께 생활하는 이들이 소중하지만 더 많은 친구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관계를 더 찢어놓고 경쟁을 시키려는 사회에 맞서 손을 잡아야 합니다. 손조차 쉽게 내밀 수 없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끌어주고 그들이 스스로 자기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서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사는 지역사회를 경험하고 분석하며 내가 누구와 함께 사는지를 깨달아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미국의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H. Arendt)는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의 독립운동을 분석하면서 ‘공적 행복(public happiness)’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우리는 행복이라는 말을 개인의 생활에만 쓰는데, 아렌트는 혁명과 독립이라는 큰 사건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자유에 행복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독재자 밑에서 개인들의 삶이 행복할 수 없듯이, 참된 행복은 건강하고 올바른 공동체에서 생활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공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 그것은 어떤 느낌일까요? 요즘처럼 어지럽고 복잡한 시대에 진정 자유로운 자만이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아렌트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자원활동은 단순히 남을 위한 활동이 아닙니다. 자원활동은 나를 위한 활동이고 내게 도움을 주는 사회적인 관계를 위한 활동입니다. 아프리카의 원주민 부족에는 “아이 하나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아이 하나 키우는 게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 일인지를 알려주는 말이지만 아이 한 명에 온 마을의 관계가 얽혀있어야 한다는 말도 됩니다. 이렇게 관계가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내가 행복하게 살려면 다른 사람도 더불어 행복해야 하고, 마을에 행복에 관심을 가져야 나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원활동도 결국에는 나의 행복을 위한 활동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행복해집시다.


출판계에 불고 있는 ‘노무현 1주년’
[주목! 이 주의 책] ‘노무현이 꿈꾼 나라’ 외
2010년 05월 23일 (일) 00:12:00 민임동기 기자 gomdori@pdjournal.com

‘운명이다’ (노무현재단 지음 / 유시민 정리)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1주년을 맞아 관련 책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습니다. 〈운명이다〉는 노 전 대통령이 남긴 저서, 미발표 원고, 메모, 편지 등과 각종 인터뷰 등을 바탕으로 한 ‘사후 자서전’입니다. 노 전 대통령 어린 시절부터 서거 직전까지 여러 사건들에 대한 고인의 솔직한 생각이 잘 정리돼 있습니다.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굵직한 사건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노 전 대통령 인생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시간과 풍경’들이 이 책 한 권에 잘 집약돼 있다고 보면 됩니다. 기록을 일관된 문제로 정리하는 작업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맡았습니다.

   
〈운명이다〉는 〈여보, 나 좀 도와줘〉(새터)를 많이 닮아 있습니다. 〈여보 나 좀 도와줘〉가 노무현 전 대통령 초기 저서라는 점을 고려하면 〈운명이다〉가 주는 의미는 상징적입니다. 노 전 대통령이 직접 작성하진 않았지만 ‘마지막 자서전’이 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놀라움을 느꼈습니다.〈여보 나 좀 도와줘〉와 〈운명이다〉가 발행된 시간 차이는 꽤 있지만, 고인의 생각과 가치관 등은 놀랍도록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운명이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 자서전이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가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가 이룬 성과와 한계가 무엇인지를 함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서거 1주년’을 맞는 시점에 〈운명이다〉가 주는 울림이 더욱 크게 다가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0명의 사람이 노무현을 말하다’ (이해찬 문재인 외 / 오마이북)

〈10명의 사람이 노무현을 말하다〉는 이해찬 한명숙 유시민 문성근 문재인 이정우 정찬용 정연주 도종환 박원순 등 10명의 사람들이 노무현을 추억하는 책입니다. 단순한 추모가 아니라 ‘노무현’이라는 이름에 담긴 시대정신을 되새긴 책이라고 보는 게 정확할 것 같습니다.

   
참여정부 때 노 전 대통령과 함께 했던 정치인을 비롯해 언론인, 시민운동가, 배우, 시인 등 대중적인 지식인들이 ‘노무현의 가치와 우리 사회 민주주의’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서울과 부산, 광주 등에서 열린 1기 ‘노무현 시민학교’ 강좌를 책으로 엮은 것이어서 대화체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문어체보다는 좀 더 부드럽고 편안하게 읽을 수가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추억과 평가 등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성공과 실패 우리 사회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 진보의 미래 그리고 시민의 역할과 나아가야 할 방향 등에 이 책의 저자들은 저마다의 의견과 해법을 내놓습니다.

다양한 필자들이 다양한 얘기를 하고 있지만 한국 사회 민주주의에 대한 우려와 시민의 역할을 강조하는 건 ‘공통적’입니다. 그만큼 지금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위기라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시민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게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10명의 사람이 노무현을 말하다〉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노무현’보다 ‘시민’인지도 모릅니다.

‘노무현이 꿈꾼 나라’ (이정우 외 33명 지음 / 동녘)

〈노무현이 꿈꾼 나라〉는 앞의 두 책 보다는 ‘학구적인 냄새’가 나는 책입니다. 고인의 죽음으로 완성되지 못한 채 중단된 연구들을 ‘남아있는’ 학자들이 이어가자는 의미로 발간된 책이기 때문입니다.

   
〈노무현이 꿈꾼 나라〉는 앞서 발간된 2009년 11월에 출간된 〈진보의 미래〉 후속편이기도 합니다. 전작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고집입니다. 노 전 대통령이 꿈꾸고 구상했던 ‘진보’에 대한 생각이 미완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 점에서 〈노무현이 꿈꾼 나라〉는 수십 명의 학자들이 ‘고인’의 구상과 물음에 대한 답인 셈입니다.

저는 〈노무현이 꿈꾼 나라〉와 같은 책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1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런 생각이 강해집니다. ‘고인’을 추모하는 것도 좋지만 ‘그’가 이루려 했던 여러 정책과 구상들에 대한 평가와 한계 등을 학자들이 ‘후속작업’을 통해 이어가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집필자에는 참여정부에 참여했던 지식인은 물론, 참여하지 않았던 학자들도 포함돼 있습니다. 특히 참여정부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날카롭게 비판했던 학자들까지 저자로 참여한 것이 눈길을 끕니다. 〈노무현이 꿈꾼 나라〉는 참여정부 정책에 대한 지지와 비판 그리고 한계 등에 대해 다양한 필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언급된 화두와 이슈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뜨거운 쟁점을 형성하고 있네요. 우리가 아직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도정일·박원순 외 지음 / 휴머니스트)

〈다시, 우리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12명의 행동하는 지성들이 모여 현 단계 민주주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모색한 책입니다. 2009년 11월과 12월, 휴머니스트와 오마이뉴스 공동으로 민주주의 특강을 준비했는데 이때의 강의를 모아서 책으로 엮었습니다.

   
김상봉, 김종철, 김찬호, 도정일, 박명림, 박원순, 오연호, 우석훈, 정희진, 진중권, 한홍구, 홍성욱 등 익히 대중적으로 알려진 지식인들이 강연자로 나섰습니다. 이들은 시민들과 직접 소통하며 ‘더 나은 세계를 향해서’ 시민들이 어떤 사유와 행동에 나서야 하는 지를 고민했습니다. 때문에〈다시, 우리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는 우리 사회 전 영역에 대한 저자들의 진단과 다양한 상상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이 책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그렇게 긴밀한 연관성이 없는 책인데, 읽다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 1주년’ 관련 서적들과 내용적으로 무척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마 앞에서 소개한 책에 필자로 참여한 분들도 일부 있기 때문에 그런 걸 수도 있을 테지요. 하지만 저는 그것보다는 많은 대중적 지식인들이 지금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이 그만큼 비슷하다는 걸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도시생활자의 정치백서’ (하승우 유해정 지음 / 북하우스)

6·2 지방선거가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정치, 욕하시는 분이 많으시죠.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책 〈도시생활자의 정치백서〉는 “정치, 욕만 하지 말고 직접 해보자”고 주장합니다. 실제 이 책 곳곳에는 “당장 실천해 볼 수 있는 정보가 가득히” 담겨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도시생활자들을 위한 정치 실전 매뉴얼’이라고나 할까요. 암튼 이 책, 여러 가지 면에서 참 흥미롭습니다.

사실 정치에 대한 혐오와 냉소가 팽배한 한국 사회에서 무조건 정치에 관심을 가지라고 ‘강조’만 하는 건 그렇게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경우 어떤 ‘이익’을 얻게 되는 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독자들에게 적극적이고 현명한 정치 참여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정치제도에 도시생활자들이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부터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어떤 사람을 찍을까를 망설이는 유권자들에게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고민이 앞서야 한다고 조언하는 식이죠. 대의명분이나 가치 이런 걸 떠나서 나의 욕구를 대변할 후보를 찾는 게 우선이라는 겁니다.

언론에서는 정치에 대한 비난과 저주가 판을 치지만 〈도시생활자의 정치백서〉에서는 이런 부분은 잠시 논외로 합니다. 대신 당원이 되면 주로 무엇을 하는지, 후원을 하거나 자원활동을 해볼 만한 시민단체는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어떤 기준으로 고를지 등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론 만들기와 언론사에 제보하기, 정보공개청구하기 등의 짚어주기를 비롯해 동네 예산과 주민자치센터, 도서관, 복지관 등에 직접 참여하고 또 부당한 정치에 맞서는 길도 소개합니다. 우리의 권리를 찾기 위한 단계별 방법을 통해 당장 실천해볼 수 있는 가이드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도시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모든 내용을 총 망라한 ‘백서’라고 보시면 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한 시민의 역할과 권리라는 게 이런 게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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